제6절 해방직전 최종 준비
1943.10월 ~ 1945.8월, 24 ~ 26세
1. 조기졸업과 귀국 251
2. 서울 취직과 가정출발 257
3. 경기도경찰부 수난 268
4. 해방직전 내적인 준비 마무리 279
1. 조기졸업과 귀국
와세다고등고학교 졸업
1943.9.30., 전기공학과 25회
내가 동경에 가서 졸업하고, 그때는 학병에 나가고 그러기 때문에 반 년을 단축해서 졸업했습니다. 왜정 말기에 있어서 우리가 졸업 할 때는 공과계통의 학생들은 6개월 먼저 졸업했다구요.
선생님의 졸업 당시는 대동아 전쟁 중이었는데 병역문제도 있고해서 6개월 단축해 9월에 졸업했습니다.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으로 돌아가게 되어 몇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쳐 두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있어서 표를 무르고 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관부연락선 '곤론마루崑崙丸' 피격사건
1943.10.5. 01:15
학교를 졸업하고 하관(下關)을 거쳐 가지고 한국까지,서울까지 오는 티켓을 끊었는데 그때 타야 할 것이 곤론마루예요, 곤론마루. 곤론마루라고, 곤윤환(崑崙丸)이라고 하는 배가 침몰이 되었어요. 바로 그 배를 내가 타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가 10월 4일인가 되는데, 그 배를 딱 타게 된 거예요.
몇 시에 배를 탄다고 전보를 쳤으니 딱 그배를 타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정거장에 나가 차를 타려고 하는데 발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 배를 탔으면 가는 거지요. 하늘이 벌써 선생님을 못 가게 하는 거예요. 그걸 잘 아는 사람이라구요. 마음이 뒤로 돌아가라는 거예요.
당장에 전보를 쳐서 못 간다는 연락을 안 하고 돌아와서 동무들하고 등산을 갔어요. 그때가 가을이었거든요. 부사산에 가자고 해 가지고 등산을 갔어요. 내가 등산 가는 바람에 며칠이 지나갔어요. 일주일 있다가 돌아왔으니 말이예요, 어디 전보를 쳤겠어요? 그러니 고향에서는 난리가 났지요.
본가(本家)의 소동과 모정의 극치
고향에서는 큰일났던 것입니다.아들이 딱 그 배를 타고, 아무날 몇 시에 온다는데 안 왔으니 큰일이 났거든요.야단이 벌어졌던 거예요. 어머니가 얼마나 자식을 사랑해요. 그러니 어머니는 환장할 지경이지요. 저 평안북도 정주에서 경찰서에 그저 이틀 간이나 들락들락했던 것입니다. 부인이 치마도 안 입고 홑바지 바람으로 행차했으면 그거 다 된 것 아니예요? 정신이 없었던 거예요. 맨발인지 치마를 벗어는지 그거 볼 게 어디 있어요?
선생님의 고향 마을에서 정주읍까지는 이십 리입니다.어머니께서는 그 이십 리 길을 왕발(맨발)로 뛰고, 부산까지 갔다 왔는데, 신이고 옷이고 무엇이고 생각할 정신이 있었겠어요? 우리 아들 죽었다고 맨발로 뛰어 나와 가지고 부산 수상경찰서까지 가서 조사를 하니 명단에는 없고, 알 수가 있나요. 그러니까 어머니는 틀림없이 아들이 죽었다고, 이래 가지고 그렇게 골똘한 마음을 가지다 보니 왕발로 뛸 때 그 발바닥에 아카시아 가시가 박혔다는 것을 몰랐다는 겁니다. 그것이 박혀 가지고 곪아 터질 때까지도 몰랐다는 거예요. 그때 내가 보름 후인가, 하여튼 열흘이 지난 후에 돌아왔어요. 돌아와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아! 내가 너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어머니였습니다.
정주에서 서울이 얼마나 멀어요. 580리 길이니까 기차로서는 열시간 걸려야 되는 거예요. 그래,부산까지 오려니 얼마나 정신이 돌았어요. 그러니 위대한 부모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어머니를 대해서는 선생님 자신은 효도를 못 해봤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를 가진 사람이라구요. 그 어머니에게 효도를 못 해봤다구요. 왜 그랬느냐? 임자네들을 사랑하려고... .
귀 국
1943.10월 중순
선생님이 일본의 궁성을 지나게 될 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민족을 잃어버린 한을 품은 외로운 사나이로서 그 궁성을 응시하면서, 이제부터 20년 후에는 하늘이 한민족을 중심삼고 승리의 깃발을 꽂으실 그 날이 오리라는 것을 선생님은 이미 알고 하나님께 기도했었습니다. '지금은 네가 우리 민족을 핍박하지만 앞으로는 반대로 내가 명령만 하면 일본의 젊이들은 너를 향하여, 이 궁성을 향하여 화살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것' 이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것이 25년 만인 1965년도에 이루어졌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을 떠나오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20년 후에 내가 틀림없이 돌아올 것이니 그때 다시 만나자. 지금은 일본 천황에게 원수를 갚지 못하여 우리 민족의 한을 풀어 주지 못하고 가지만, 앞으로는 너희 나라 백성, 너희 나라의 청년 남녀들에게 내가 명령하고 가르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다시 만나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후 선생님은 20년 만에 일본에 갔습니다. 가자마자 제일 궁금한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우리 교회에 청년 남녀들이 얼마나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한 5백 명 모였는데 그들이 전부 다 부자집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기를 일본은 우리 한국의 원수인데 내가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밑천까지 대주며 특사를 보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 모인 젊은이들에게, 너희 나라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했더니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전부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입니까? 일본 천황도 다 필요없고 통일교회와 통일교회 문선생이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또 선생님이 명령하고 들이몰면 무슨 일이든 다 할 거냐고 물으니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2. 서울 취직과 가정출발
정주 곽산(郭山)의 최씨 신부
선생님이 뜻을 알고 나서 성진이 어머니와 결혼한 것도 내 맘대로 한 것이 아닙니다. 영계에서 지시가 있어서 한 거예요. 그 사람도 영계의 지시하에서 만난 거라구요. 그 사람 이름이 최선길입니다. 높을 최(崔), 먼저 선(先), 길할 길(吉)자예요. 이름이 남자이름 같은데, 어떻게 최선길이라고 했겠어요? 영계에서 다 가르쳐 준 것입니다. 먼저 길했다는 거예요. 여자로서 먼저 길했다는 말은 하나님 섭리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축복받는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이름이라구요.
우리 성진이 어머니가 똑똑한 여자라구요. 아주 대바르고 집안도 괜찮아요. 최씨네 문중 하면 정주 고을에서 이름난 문중이거든요,거기의 종가집 딸이라구요. 또 아주 알뜰한 여자라구요. 지독한 여자예요.요만큼도 신세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니라구요.
그는 초등학교 나오고, 7년내지 8년의 과정을 거친 학력밖에 없는 사람이라구요. 그래서 하늘의 뜻 가운데서 만난 사람이라구요. 우선 세상으로 볼 때, 남편은 자기 남편밖에 없다는 걸 알아야 돼요. 모든 면에 있어서 자신이 부족하니 그가 하는 것에 순응할 수 있는 여건이 커야 되는 거예요. 또, 자기는 큰 뜻을 품고 가는 남편의 길에서 어떤 고생이라도 달갑게 받아라 이거예요.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를 볼 때, 그런 현격한 차이가 있으면 있을수록 그것이 뜻 앞에 보탬이 되겠기 때문에 선생님도 소학교밖에 안 나온 성진이 어머니를 택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이 돈독하고... . 신앙적 대표라는 거예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전세계를 대표함과 동시에 국가를 대표해 가지고, 남자 세례 요한의 입장이 아니라, 여자로서 세례 요한의 사명을 해야 될 입장에 있는 사람이 성진이 어머니였습니다. 기독교의 사명은 뭐냐 하면, 신부를 제시하고, 신부를 하늘 앞에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런 의의가 있다는 거라구요. 그때 성진이 어머니는 신사 참배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감옥살까지 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찾았던 거라구요. 그런 처녀를 찾았던 거라구요.
중매장이가 그러는데 내가 스물 넷째라는 거예요.신랑을 구하려고 신의주로부터 뭐 어디 어디, 몇백 리 안팎에서 잘난 남자는 다... . 성진 어머니 집도 기도하고 다 영통한 패들이거든요. 벌써 선생님 사진을 보고 기도하니까 영계에서 가르쳐 주더라는 거예요. 참 가르침 많이 받았어요. 동서쪽에서 큰 거울이 나타나 하늘 복판에 와서 하나된다든가, 그 가운데 태양이 떠올라 가지고 세계를 비추는데 천지 동서남북의 별과 달이 쭉 둘러 서 있었다는 거예요.그 달빛이 비쳐서 만국이 꽃밭으로 화했다든가 말이예요. 그들이 꿈같은 그런 세계를 많이 받았다 이거예요. 기도를 해보니 그렇게 되니 그 여자가 딴 남자에게 맘이 있었겠어요? 죽어도 내 사랑이라고 하게 돼 있다구요.
선보러 밤길 70리
이모니까 몇 촌이 되나요. 7촌, 촌수로 보면 한 단계 떨어져야지요? 아, 이모가 떡 나타나 가지고 말이예요. 이분이 유명한 분이지요, 중매자로서는. 아, 이거 작은 조카 중매는 자기가 한다고... . 내가 농도 좋아하거든요. 그 할머니를 내가 데리고 놀려먹는 게 참 재미있다구요. 밤에 배고프면 국수도 사 나르고 말이예요. 아, 중매 잘한다면 한번 해보시라고, 이래 가지고... .
나는 그다음 고향을 떠났거든요? 그래 가지고 이럭저럭 오자가자 하다 1년 8개월이 지나 가지고 고향에 갔다구요. 그동안에 그 색시는 시집가고도 남았을 거고, 관심도 없는데 말이예요, 가자마자 이모되는 양반이 벌떡벌떡 소리지르면서 큰일났다는 거예요. 혼자 있는 처녀 네가 바람들여 놔 가지고 이 여자가 죽어도 딴 데 시집을 안 간다고 버티고 있으니 큰일났다 이거예요. 집에 오자마자 '가 보자' 하고 앞에 서서 가시는 거예요. 또 어머니는... . 그다음에는 우리 동네에 내가 그래도 화제거리거든요? 그러니까 전부 다 삼촌으로부터 다섯 사람이 떠났었나? 밤을 새워가지고... .
서울에서 가 가지고 밤에 내려 밤길 70리를 잠도 안 자고 걸었어요. 조그만 자갯돌을 심어 놓고 포장하지 않은 그런 길이었다구요. 구두를 신고 70리 길을 가던 걸 생각하면 자금도 끔찍해요. 동이 터서 먼 발치의 사람을 볼 수 있을 만큼 되자 주막집이 보이더라고요. 거기 가서 여기 아무개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바로 요 앞집이라고 해서 보니 좋은 기와집이더라구요. 그 동네에서 제일 큰 기와집이었어요.
'지나가는 손님이 실례가 대단합니다' 하고 떡 인사를 차리고... . 세상에 그런 실례가 어디 있어요? 그렇지만 밤새도록 걸었으니 할 수 있어요? '방 하나 내소. 내가 사흘 밤을 못 잤소' 했다구요. 그래서 어머니하고 이모하고 삼촌은 딴 데 사랑방에서 자고 말이예요, 아랫방에서는 어머니하고 이모되는 사람이 자고 말이예요, 나는 신랑이니까 독방 줘야지요.
그런데 이게 열두 시가 되어도 깨지를 않네! 아침밥 다 해 놨지 별 수 있어요. 이래 가지고 말이예요, 한 시 반인가 한 시 40몇 분에 일어났어요. 그다음에 세수하는데 남의 집, 불편한데 왔으니까 돗자리 펴고 말이예요, 대야에 물하고 소금하고 바치는데... . 그러다 보니 두 시 반이 됐네! 이렇게 되면 밥 안 먹을 수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밥을 차려 놓았어요. 순식간에 다 훑어버리는 거예요.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러는 겁니다. 어떤가 보는 거지요. 이래 놓고는 물까지 더 달라고 하고 말이예요, 그 다음에는 과일 같은 거 안 사 오느냐고, 과일 없느냐고... . 없는 것만 찾거든요.
그러니 소문이... . 신랑이 선보러 왔다더라 하고 소문이 동네에... . 그 동네가 한 150집 되는 큰 동네입니다. 그 최씨 동네... .150집 되는 그거 몇 분 동안에 소문난다구요. 아이구, 자는 데는 어떻게 잤다는 등 어떻고 어떻고 소문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배포가 있나 보려고 닭을 잡으라고 한 거예요.이러니 닭을 안 잡게 돼 있어요? 있는 닭 전부 다 하고, 사돈의 팔촌네 닭까지 몇 마리나 될 까? 한 50마리 집았을 거예요. 잡아 가지고 너도 먹고 물어가고, 너도 먹고 물어가라 이거였어요.
그리고 나서 저녁 먹고는 말이예요, 이거 색시 선보러 온 사람인데 색시 선보겠다는 얘기는 하나도 안 하네! 재미있는 얘기만 엮어대는 거예요. 동경이 어떻고, 일본 사람이 사는 것이 어떻고 어떻고 전부 얘기해요. 두 시까지 얘기했다구요, 두 시까지. 밤 두 시까지입니다.
맛선 후 약혼
1943.12월
이러다가 보니 세 시가 넘었어요.세 시가 넘었다구요. 자, 이거 가만히 보니까 안 되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늦더라도 당신네 딸이 얼마만한지 한번 봅시다' 한 겁니다. 밤 세 시에 선 보겠다는 신랑감은 내가 역사적일 겁니다. 그래서 이제 불러오라고... . 불러 앉혀놓고는 전부 나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나가지 말라고 하고 하나하나 재미있게 밀고 나가는 겁니다. 학교는 어떻고 어떻고 전부 다... .
그리고 나서, 그럼 내일 만나자고 해 가지고 이튿날 본격적인 시험을 치는 거예요, 이틀째, 그다음에 사홀까지 묵는다면... .선보러 와서 사흘까지 묵고 가면 욕먹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튿날 내가 통일교회의 이런 길을 갈 것을 얘기하면서 전부 조목조목 물어보는 거예요.
그러면서 못해도 혼자 5년 동안, 결혼해 가지고 5년 이상 7년까지 될지 모른다고, 혼자 살 각오를 해야 될 거라고 그때 다 얘기를 한 겁니다. 그때야 자기가 그러니까 뭐 주는 것이 값이지요. 달라는 대로 값을 다 지불하게 되어 있잖아요. 뭣이든지 다한다고 했지요. 이래 가지고 결혼을 한 거예요. 약혼식을 딱 해 놓고 집에 돌아왔어요.
이래 가지고 12월달에 약혼을 하고... . 20세를 못 넘은, 18세 미만, 한국 나이로 하면 열아홉 살이 안 된 사람이어야 됩니다. 성진 어머니도 열어홉 살에 약혼한 거예요.
'만주전업' 행 변경과 곽산 방문
1944.2월 초순
하얼빈 위에 하이라얼 이라는 곳이 있습니다.그때 만주전업이라고 전기회사에 취직해 가지고 일본에서 돌아올 때 학교에서부터 거기까지 가서 살려고 했다구요. 거기에 가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느냐? 소련 말을 배우고 중국 말을 배우고 몽고 말을 배우려고 그랬다구요. 아시아에 있어서의 대륙기지를 앞으로 요리할 것을 생각하고 말을 배우기 위해서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3년 동안을.
만주 안동현에 만주전업이 있었습니다. 그후에 그 지점에 가려고 가만 보니까 정세가 편안치가 않아요. 만주에 가서는 안 되겠더라구요. 그래서 안동에 취직한 모든 걸 반환하러 갔어요. 가지도 않고 사표까지 첨부해 가지고 비용까지 다 가지고 안동에 가서 지점장 만나 가지고 청산짓고 나오다가... .
곽산이 정주 다음이예요. 정주와 선천 중간입니다. 그때가 2월달이던가 될 거예요. 이제는 결혼식 날짜를 받기 위해서 들렀다구요. 그런데 차 시간이 맞지 않기 때문에 저녁에 와 내렸어요. 곽산에 내리니까 여섯 시인가 그래요.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라구요, 벌써 거지까지 15리 길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때가 2월 초예요. 눈이 그때... . 평안도에는 3월달까지 눈이 옵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구요. 그러니까 내려서 찾아서 이게... . 처음가는 거지요. 약혼해 둔 색시한테 총각이 말이예요.
그런데 무슨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맏처남이라는 사람이 나오더니 '우리 최씨 문중에서는 결혼하기 전에 신랑될 사람이 찾아와서 이러는 법이 없다'이러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 문중에서는 나를 맞아들이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돌아가라 이거예요. 그거 보면 가문은 괜찮은 가문이지. 아무리 그 무엇이라도 전통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한 것이니까. 그래서 70리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어요. 함박눈은 내리고 아주 시적인 장면이 벌어진 거예요.
내가 떠난 후에 장모가 돌아와서는 큰 난리가 벌어졌어요. 장모가 와 보니 문제가 크거든요. 이건 파혼이 벌어진다고 이래 가지고 아들을 대해 책망하고 작은 아들을 불러 가지고, 어디 그럴수 있느냐고... . 이렇게 되니까 성진 어머니가 그걸 알았거든요. 큰집에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두말하지 않고 차림을 하고는 나 선 거예요. 보통 여자가 아니라구요
따라와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 집으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집의 모든 문제는 자기가 책임질 테니까 돌아가자는 거예요. 성진 어머니의 성격을 그때 내가 알았어요. 야, 이 여자가 보통 여자가 아니구나. 아주 배포도 크고 말이예요. 그러나 그런 입장에서 무슨 얼굴로 처가집에를 다시 들어가요? 그래서 안 간다고 했지요. 안 간다고 하니까 50리 길을 따라나선 거예요. 정주까지 50리 길을 밤을 새우면서 따라나서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 사연을 쭉 얘기하는 거예요.
정주읍에 우리 삼촌이 있어요. 거기 가서 아침 밥을 해 달라고 해서 먹이고 차 시간에 맞춰 보내려고 했는데 절대 안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자 이거, 그래서 삼촌 어머니더러 증인이 되어 달라고 하고 제발 큰집에 데려가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삼촌 어머니가 데리고 가서 우리 집에서 일주일 있다가 갔습니다.
자, 일주일 지내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가만히 보니까 싹싹하고, 배포가 크고 사리도 짜여 있고 그렇거든요. 어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 할것없이 흘짝 반한 것입니다. 작전을 그렇게 한 거예요.
가시마구미 경성지점 전기부 취직
1944년 3월 경
그때 저 가시마, 가시마라고 있다구요. 일본에 가면 큰 전기회사였더라는데.. . 내가 옛날에 가시마구미의 전기부에 출근 했었습니다.
선생님도 옛날에는 그랬다구요. 직장에 가더라도 제일 일찍 가고 제일 늦게까지 일했다구요. 그런 훈련을 했다구요. 일등 안하면 기분 나쁘다구요.나중에는 제일 귀한... . 그 사람이 인계자, 그 사람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라구요. 하늘의 뜻을 대해 가지고 새벽같이 일어나고 일생을 이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혼과 가정출발
1944.5.4., 호적상 1945.4.28
선생님이 결혼식을 한 것은 해방 전입니다. 그것은 하늘의 명령에 의해 가지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지만 그 사람이 성진이 어머니라구요.
결혼도 갑자기 하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두 달 이내에 무명을 10여 필을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한 일화가 참 많아요. 선생님의 일생은 전부 다 개척이었습니다. 결혼한 것까지도 내가 전부 개척한 것입니다. 말을 마련하는 것까지도... . 그때는 택시가 없었어요. 70리 떨어진 색시네 집에 장가가기 위해서는 말을 타고 가야 되는데, 왜정 때에는 전부 다 금지했어요. 걸어갈 수 없으니 말을 구하는 것부터 전부 다 선생님이 했습니다.
결혼할 때 날짜를 받았는데 말이예요,결혼하기 일주일 전에 장인이 돌아 갔어요. 4월 17일 부활절이기 때문에 지내고... . 5월 4일날, 시집 오는 날은 또 비가 억수같이 오는 것예요. 이렇게 모든 것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탕감길이예요. 탕감길. 곡절히 많았어요.
예수교의 이호빈 목사,한준명,박재봉 목사 등 그 간부들을 내가 잘 알아요. 이런 사람들이 선생님과 참 가깝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 이호빈 목사를 성진이 어머니와 결혼할 때 새 예수교회에 가 가지고 내가 잡아온 거예요. 끌어온 거라구요. 그만큼 가깝다구요. 왜 가까우냐 하면 평양 새 예수교 주일학교 학생이 천명 가까이 나오곤 했는데, 언제고 들리게 되면 주일학교 교육을 했거든요.유명하다고 소문났다구요,주일학생들 한테. 그렇게 목사들과 친하고 그랬기 때문에 이호빈 목사와도 잘 알게 되었다구요.그래서 성진이 어머니와 결혼 할 때 이호빈 목사가 주례한 거예요.
3.경기도경찰부 수난
1944.10월 ~ 1945.2월
일경(日警)의 혹독한 고문(拷問)
학생 때에도 감옥 출입을 보통으로 한 사람입니다.또 왜놈들의 고문대에서 뱃심도 부려 본 사람입니다. 그런 역사가 많은 사람이예요. 일본 녀석들한테 고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의 고문은 아주 지독했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그때처럼 지져대고 하면서 고문을 하면 옷에 똥을 싸면서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이 고약한 놀음 한 것을 다 잘 아는 것입니다. 내가 감옥살이도 하고 일본 고등계 형사나 특과 형사들에게 매도 맞고 물도 먹고 별의별 짓을 다 당한 사람입니다.
온 사지에 전부다 죽은 피가 돌 만큼, 또 피가 몇 사발 쏟아질 만큼 매도 많이 맞아 봤습니다. 왜정시대에는 군화 발에 배를 얻어맞는 고문도 당했습니다. 두 녀석은 죄우에서 손을 잡고, 또 두 녀석은 위헤서 밟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뱃가죽이 어떻게 되겠어요? 미어지나요? 터지나요? 그래서 변소에 가서 한번 앉았다가 일어나 보세요. 그 얼마나 괴롭겠어요.
선생님이 왜정 때, 그때는 한참 일본 천황의 모가지를 떼겠다고 했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서 고문을 받았는데, 제일 힘든 것이 뭐냐 하면... . 한번 해보라구요. 각목을 갖다 여기에 놓고... .왜정 때는 군대에서 신는 가죽구두가 있었다구요. 징을 박아 가지고 짜박짜박 하는 가죽구두로 밟는 거라구요. 그건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거라구요.
왜정 때에 선생님을 아무리 감옥에 넣고 뭐,비행기를 태우고 아무리 전기고문을 해대도 까딱 안 했습니다. '쳐라, 이 자식아!쳐라! 네 방망이가 크냐 내 결심이 굳냐 해 보자' 그런 싸움을 해 나왔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온종일 맞고 고문을 당하는 자리에서도, 판자 쪼가리로 조이고 뒤틀어 짤 때도 '이 자식들, 해보자, 이 작식들아' 그러면서 참았습니다.
피를 토하는 자리에서, 열 손가락에 피를 내는 자리에서도 이것이 10개 국가의 피를 대신하고 10개 민족의 피를 대신하는 제물로 바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이겠느냐고 기도하였습니다.
왜정 때, 내가 12시간 가까이 고문을 받고 피를 토한 적도 있었고, 15분동안 사람을 미치게 하는 평생 잊지 못할 그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이것을12시간 받으면서도 기적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맞으면서 뒤로 벌렁벌렁 나자빠지고, 죽은 피가 주루룩 쏟아지도록 매를 맞으면서 '쳐 봐라! 그 몽둥이가 부러지나, 내 뼈가 부러지나' 하며 견뎌냈습니다.
한번은 열네 시간 동안 취조를 당하고 고문을 당해가지고 기어서 이십 미터도 가지 못할 만큼 되고, 몇 번씩 죽었다가 깨어나는 그러한 과정이 반복되었어도 나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고문받는 심정과 기도
왜정 때에 감옥에 가서 피눈물이 엇갈리는 고문을 받으며 냈던 비명 소리는 인류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수 있는 정상의 자리를 추구하면서 냈던 소리였어요. 그 비명 소리의 정상에 올라가지 못하고는 불평을 할 수 없는 거야! 이놈의 자식들!
아버지와 본질을 토로할 수 있는 자리에서 '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하나님! 제 피는 옛날 선조들의 피와는 다릅니다. 배반의 심정을 품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가운데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은 자들과 같은 사나이가 아닙니다. 나를 동정하지 마시고, 민족과 국가와 세계 인류를 동정하시옵소서! 영계에 있는 영인들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도록 아버지여 도와주시옵소서! 나를 앞세워 그들의 살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라고 피를 토하며 기도해 나온 것이 선생님의 길이었습니다.
'패라 이놈의 자식, 내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크냐, 네가 일본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크냐? 너하고 나하고는 원수다' 이러면서 아주 멋진 싸움을 한 거예요. 선생님이 김옥에 들어 갔을 때는 일본 제국주의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선생님은 나라를 배반하는 역적의 자리에 나가지 않게 되어 도리어 감옥에 들어갔던 것을 감사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보다 나하나 죽어 가지고 나라가 해원성사되고 나라가 해방된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했던 거예요. 이것이 통일교회의 전통적 사상입니다.
일본 김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한국 민족의 비참함을 내가 알았습니다.다 교육이예요. 일본이 얼마나 나쁘다는 걸 감옥에 들어가서 알았어요.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고문을 받고 피를 흘리는 과정에서 그 동지들과 더불어 있으면서 비로소 한국의 비참상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민족을 누가 해방해야 된다는 이런 의무를 느끼게 한 것도 김옥에 들어가서예요. 감옥이 선생님에게는 위대한 선생이 되었어요.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초석을 놓을 수 있는 한때였다 이거예요.
생명을 건 묵비권
선생님도 피를 토하며 사경을 몇번이나 넘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감옥에서는 함께 일하던 동지들에 대한 책임과 의리를 위해 생명을 걸고 나 혼자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죽인다고 위협해도 말을 안 했던 거예요. 말 안 한다면 안하는 것입니다. 백여 명의 생명이 나 하나에 달려 가지고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데 혀를 끊었으면 끊었지 얘기 할 수 있어요? 안 한 거예요. '안 한다 이 자식아. 너는 쳐라. 네가 치지만, 난 맞는 데 있어서 너를 이겨야 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한 것입니다. 책상 다리 네 개가 전부 다 산산조각으로 부러져 나가도록 맞아서 온 몸뚱이에 시꺼먼 피멍이 들더라도 한마디 불지 않았다구요. '이녀석은 죽기 전에는 말 안 한다'고 할 정도로 말을 안 했어요. 아무리 고문을 해도 한마디도 말 안 한 것입니다.책임자로서의 내 비밀을 지키는 것입니다.
각목으로 소름끼치는 고문을 당할 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번 약속을 했으면 자기가 망하더라도 지켜야 합니다. 이렇게 고문을 당한 후에 하릇밤만 지나면 그날은 슬픈 날인 동시에 잊을 수 없는 날로 남아지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름을 기억한다구요. 도경의 고문 주임 녀석이 암만 고문해도 불지 않았습니다. '안 분다' 그것으로 끝이예요. 365일 암만 해보라는 것입니다. 몇 번 죽었다 깨어나도 '왜 그래? 잠 좀 자자' 하고 농담하는 거라구요. '잠을 좀 더 자려는데 왜 깨워 이 녀석들아' 이러다 보니까 고문하고도 친구가 되었다구요. 누가 와도 '야야 이렇게 하니까 안 아프다.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라' 한마디 해 버렸다구요. 해결이 안 날 게 뻔하거든요. 한마디만 하면 될 텐데... . '그래 너희들이 억지로 도장을 찍었지만 공판장에 나가게 되면 내가 얘기할 거야' 그렇게 했다구요. 사나이라면 제 마음대로 해야지요. 이런 사나이라구요.
선생님이 취재관이라면 일등 취재관이라구요.왜정 때, 수많은 능란한 검사 판사들 앞에 그저 못난이 놀음을 해 가지고 다 잡아 먹었다구요. 조서 꾸밀 때에 쓱 못난이 놀음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니, 저런 사람이 일개 책임자가 될 수 있나? 아무래도 유치원 아이들 같구만' 그래 가지고 결국은 전부 다... . 그러다보면 딱 중요한 일 가려 가지고 넘어가는 거라구요. 그래 가지고 서류 꾸미고 도장 찍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구요. 그런 작전을... .그렇게 못난 놀음을 할 때 가서는 해야 된다구요. 그게 능란한 사나이라구요.
원수 용서와 축복
나를 감옥에 가두어도 내 마음과 내 이념은 가두지 못합니다.나를 치라는 것입니다. 치면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 앞에 걸어 나 온 길과 하나님이 닦아 나오신 길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감정하라는 것입니다. 칠 테면 쳐라! 내가 너를 미워하는가, 안 미워하는가?
매를 맞고 피를 토하면서도 '아! 잘 맞았다.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인류를 대신해 맞았다. 내가 맞고 잊어버리고,내가 이것을 기억하지 않겠다' 하면서 '하나님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했다면 이것이 얼마나 멋집니까? 그 자리를 지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죽이는 자리에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간단하다는 것입니다.
옛날 왜정 때 구마하다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말이예요, 지금도 그 이름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 녀석이 나를 그저 밟고 치고 그럴 때 내가 생각하길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밟고 치니 내 성격 같으면 뭐 당장에 발길로 차 버릴 텐데. '이 녀석아, 그래 너 해라. 참아 보자. 죽는 경지에 가더라도 참아 보자' 이러고 있었다구요.
나는 그들을 원수같이 대하지 않았습니다.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고 가야 할 책임이 내게 있기 때문에, 그들의 무엇을 보고 복을 빌어 줄 것인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감방에서 고민하고 연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양심이 있으니, 아침에 사람들이 다 나간 뒤에 아무도 모르게 사과합니다. 그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인간은 누구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양심은 속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위험 방지책
고문받는 자리에 나가더라도 안 죽어요. 고문할 때는 반드시 피를 흘리고 가야 돼요. 물 먹이고 그런다구요. 그리고 배나 어디나 꽉꽉 밟아요. 밟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견디기 위해서는 관장을 하고 나가야 돼요. 오줌 대신 뒤로 다 뽑아내야 되는 것입니다. 숨통을 뚫어야 돼요.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내고 가야 됩니다. 피를 내면 파괴가 안 벌어진다구요. 폭발되지 않아요. 째지지 않아요. 그러니 피를 내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의 왕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너무 피곤하게 되면 코피가 나지요? 코피가 안 터지면 뇌출혈이 되는 거예요. 코피 나는 것은 그 방지책이예요. 고단하게 될 때 혈압이 높아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문당할 때는 반드시 숨통을 만들기 위해 피를 흘리고 가야 돼요. 그러니 입술을 깨물든가 혓바닥을 깨물든가 해서 피를 흘리고 구멍을 뚫어 놓고 가야 됩니다. 그런 것을 내가 가르쳐 줘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의 생애노정이 편안한 길이 아니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길이 구비쳐 왔지만 그 고개를 다 넘었어요
감방 안의 추위
선생님은 감옥 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감옥이 춥거든요. 옛날 왜정 때 참 추웠다구요. 불 안 때 준다구요. 화덕이 없다구요. 거기는 뭐 옷을 뭐... . 10년 살게 되면 10년 동안 옷을 입고 살아야지 벗고는 못 살아요. 그러니까 언제나 따뜻한 이 겨드랑이 아래는 말이예요, 이곳이 무슨 정거장인지 알아요? 무슨 안식처인지 알아요? 이 이. 이 벌레. 여기 솔기가 있는데 말이예요. 여기 솔기가 있거든요. 여기서 싹-. 이래 가지고 여기서부터 쭉 내려오는 솔기를 딱 이래 가지고 '음-' 하게 되면 새빨개진다구요. 그놈의 이를 말이예요, 추운데 잡아 놓으면 말이예요, 이놈이 서로가... . 따스운 데 있었으니까 놔 놓으면, 한 20마리가 있으면 서로가 주둥이를 자꾸 안으로 박는 거예요. 그러니 나중에는 그게 동그래진다구요. 그거 한 번 해보라구요. 그건 내가 전문가지요. 내 말을 못 믿겠으면 말이예요, 해보라구요.
그거 그럴 거 아니예요? 추우니까. 여러분도 춥게 되면 옹그라지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주둥이 나오는 건 싫거든요. 전부다 꽁무니만 나온다구요, 꽁무니. 꽁무니는 뭐 뭉툭하니까 추위를 타더라도 덜 탈 거 아니예요? 이 발 같은 거, 입이 나왔으니 얼마나 그거 먼저 추울까? 그러니 그거 들이 박기 위해서 자꾸 파고들어가는 겁니다. 밤톨처럼 되는 겁니다. 그게, 그거 한번 입에다 넣고 아그작 아그작... .짓궂은 사람은 그것까지도 해먹을 줄 알아요, 어떻게 되는지.
모친의 눈물
없는 돈을 모아 가지고 외국까지 보내서 공부하라고 했는데 감옥으로 끌려 다니는 거예요,감옥. 왜정때부터 어머니가 감옥에 찾아와 눈물을 흘릴 때면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그런 놀음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어머니가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말을 못해요.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잘못한 게 없습니다. 문 아무개의 집안에 태어나 그 가문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대한민국 고유의 전통적 사상을 중심삼고 비판해 보게 될 때, 양심의 가책되는 것이 없습니다. 내가 비록 옥고를 치르는 몸이 되어 있다더라도 이 아들이 불쌍하다고 눈물 흘리는 그런 어머니는 원치 않습니다. 여기에 충고를 해주고 격려해 주며 내일의 희망을 위해 가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가 내게 필요합니다.
불효해요,불효. 그런 불효가 없어요. 왜정 때에 그저 감옥살이... .일본서 오게 되면 경찰서에서 벌써 나를 호출하는 거예요. 무섭거든요. 그렇다고 주먹질하는 것이 아니라구요. 부모가 와서 눈물을 흘리게 되면 난 청천벽력같이 호령하는 거예요. '당신 아들인 문 아무개라는 사람은 졸장부가 아니요. 내 눈에 서린 것은 어머니보다도 세계와 하나님의 슬픔을 풀기 위해 서요.' 그래서 이 길에 와있다고 했어요.
석방
1945.2월
나갈 때는 그들에게 친절하게 하고 나와야 됩니다.한 대여섯 시간 동안 심하게 고문을 받고는 기절하여 벌렁 나가 쓰러질 때 그때 오히려 그에게 동정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근성이 진짜입니다. '아! 그때 그 아무개는 어디 있을 까' 하고 생각나는 것 입니다. 향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아무리 설명을 해도 절대 통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 같이 젊을 때가 참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고생을 해도 고생한 흠이 안 나요. 내가 잘 알아요. 선생님이 여러분들만 할 때 고문도 많이 받아 봤어요. 암만 매를 맞고 불고문을 당해서 몸뚱이가 터지고 그러더라도 안 죽어요. 한 2주일 지나니까 전부 복귀되던데 뭐! 두 주일 잘먹으니까 여전해지더라구요. 그러니까 고생은 늙어서 할 것이 아니고, 애기 낳기 전에 해야 됩니다. 여기 서 있는 문 아무개는 일생 동안 수차례 감옥을 왕래했지만 망하지 않았습니다. 한강변에 서서 내가 통곡했던 것을 그 누구도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4. 해방직전 내적인 준비 마무리
일제 치하에서 내적인 준비
한국은 40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은 사탄편 여성국가였습니다. 그 40년 기간에 일본은 한국의 모든 문화적 전통, 그리고 심지어 한국의 언어까지 없애려고 했습니다. 선생님 자신도 그 기간 동안에 일본인들에 의해서 투옥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일본정부에 의해서 투옥되고 억압받았던 한국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부름받기 위해 그 사람들은 애국자, 효자, 또는 그들 사회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애국자들은 나라를 위해서 그들 자신들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위해서도 그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섭리를 위한 기대를 찾으시고 넓히실 때는 항상 사탄의 반대 아래서 역사하십니다. 그때 선생님은 한 청년으로서 다가오는 공생애를 위해 자신을 준비했습니다.
1920년대를 중심삼고 하나님은 이미 준비하여 선생님이 태어나 가지고 이러한 무지한 인생문제에 신음하면서 도리, 천리를 밝히고 종교문제, 모든 사랑문제를 밝히기 위한 놀음을 죽 하면서 해방 시대까지 넘어온 것입니다,해방시대. 그때가 내가 몇 살인가? 스물 여섯 살이구만.
선생님에게 있어서 개인의 환난시대가 있었습니다. 내 자신에 대한 환난이예요. 그런 환난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심각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뜻의 길을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야 하는데, 첩첩 태산준령이 가로막혀 있는 것을 넘고 또 넘어 그 세계를 밝힐 수 있느냐? 역사시대에 그와 같은 몸부림을 지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심각한 것입니다. 그때 잘못 결정했더라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없을 거예요.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일념이라도 있었으면 못 간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해 나았어요.
그때 선생님은 여러분이 지금 배우고 있는 윈리의 어떤 것도 결코 말할 수 없었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말씀도 있었거니와 선생님이 한국의 해방 직후에 이 일을 시작하기로 하나님께 약속을 했기 때문에 그때에는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한 사람만에 의해서 성취될 수는 없습니다. 함께 일할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해방전야의 기도
서울을 중심삼고 높은 산정에 가서 비장한 눈물을 흘리고 통곡한 때가 있었습니다.이 대한민국이 어디로 갈 거냐? 위하는 천리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품을 떠나 가지고 어디로 갈 거냐? 또 내가 해방 전에 북악산으로부터 해서 전부 다닌 사람이라구요. 그래서 '너, 대한민국아!슬퍼하지 마라. 세상은 망하더라도 너는 망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있는 한 망하지 않아요.우리 나라 선조들이 원한이 많고, 하나님의 원한이 많습니다.
서울에 오게 되면 내가 삼각산을 가고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기도하던 그때가 잊혀지지 않아요. 여러분은 그런 뭐가 있어요? 세상은 모르지만 사랑의 길, 사랑의 탑은 높이 쌓아야 되는 거예요. 나라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곡히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사연이라든가, 세계를 놓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던 사연들을 마지막 그날을 보내면서 다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말할래야 말할 수 없는 가슴 아픈 내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국 신령집단 답사
내가 이 길을 나서게 될 때,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 이름난 목사들을 다 만나 봤습니다. 익었나, 설었나 다 알아 봤다구요. 누가 몇 점 짜리이고, 누구는 몇 점 짜리인지 이미 점을 치고 출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모릅니다. 겉으로 봐서는 총각이요, 그냥 텁수룩하니 지나가는 길손으로밖에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들의 속살을 다 빼 가지고 이미 하늘 보고서에 기록하고 나섰다구요. 보고하고 나선 놀음이라구요.
선생님이 소년시대를 거치고 청년시대를 거쳐 철이 나게 되면서부터 성경의 내용을 중심삼고 깊이 탐구하다보니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다는 것을 전부 알게 된 것입니다.그리하여 25세에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발족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선생님은 먼저 지하교회를 편답했어요.일본에 신사참배한 더럽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해방 3년 전부터 그러니까 23살부터 무엇을 시작했느냐 하면 지하교회 편답을 시작한 것입니다. '신령한 사람들이 어떠한 길을 가느냐? 하나님의 섭리는 이렇게 이렇게 가야 할 텐데, 이런 준비 단체가 반드시 있어야 될 텐데. ' 이래 가지고 지하교회를 탐사하며 유명하다는 신령한 사람들을 전부 다 만나 보았지만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더라 이겁니다. 하나님의 뜻의 방향을 모르는 거예요.
벌써 20대 전에 유명한 모든 부흥사들을 다 찾아봤어요. 타락이 어떻게 해서 된 줄 알아요? 타락론보고 물어봐요. 뭐 누구누구 전부 찾아보고, 또 일본 가서 잘났다는 것 다 흝어 본 거예요. '이 녀석들아, 너희들이 하늘의 비밀을 모른다. 장래에 내 수첩 안에 있는 비밀 기록이 나올 때는 너희들은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해야 돼'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 방문하는 거예요. 뭐 계룡산 패니 뭐니 잡동사니 패를 다 방문하는 거예요. 잘났다는 녀석들. 하늘의 비밀이 어떻다는 걸 내가 잘 알기 때문에... . 몇 사람은 깜깜천지가 대 가지고 정도령 해먹겠다고 이러고 있다 이겁니다.
참다운 신앙단체들은 전부 지하로 들어갔습니다.그때 선생님이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지하운동 하던 신앙단체라든가, 모든 한국 실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해방의 때 예견
문선생이 똑똑한 사람이라구요. 문 아무개라는 사람 그렇게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똑똑한 사람이예요. 벌써 천리를 내다보고 사는 사람이라구요, 벌써 10대에, 소년 시대에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을 안 사람이예요. 어제도 우리 사촌 동생(문용기)이 얘기하더구만요. '아이구! 일본과 독일이, 1945년 되게 되면 4월에는 독일이 망하고 8월에는 일본이 망한다고 얘기했던 것이 다 맞아들어가서 자기는 생각할 때 대학만 나오면 저렇게 천하를 다 알고 미래까지 훤하게 아는구만'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오늘날 말씀하는 원리는 20대에 전부 다 준비했던 거예요. 지금 보라구요. 50년 전에 말한 것이 오늘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와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한국이라는 나라도 없었어요. 그런 모든 역사를 두고 보면 한스러운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