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3권
제5절 전국 전도 및 해외선교 개척 1957.7월∼1960.4월 1. 전 식구 7일금식과 하계 40일 전도 183
2. 최초의 일본·미국 개척선교 파송 200 3. 전국 식구 조직 훈련과 사업 208 4. 참부모님 성혼 직전 3년 기간 222 1. 전 식구 7일금식과 하계 40일 전도 1957.7월
1957년의 시운 공산주의 내리막 운세 후르시쵸프가 유엔 단상에서 신발을 벗고 야단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내려가는 것입니다. 1957년부터 내려가는 것입니다. 중공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우리의 역사에 보조를 맞춰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역사는 선생님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은 8대를 못 넘어서 기울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견지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0년을 지나면서 공산당내에서 둘로 나뉘어져야 합니다. 1917년부터 공산당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40년이 지난 1957년부터 소련과 중공의 이념분쟁이 생겼습니다. 우리 통일교회는 그때를 전후해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때가 선생님으로서는 제2차 7년노정의 3년째로 들어가는 때였습니다. 소련이 국가 차원을 넘어 가지고 세계를 위할 수 있는 공산당이라면 소련 국민을 희생시켜서라도 세계 인류를 구하겠다는 입장에 서야 할 것이 천륜이 갈 길인데도 불구하고, 못 갔기 때문에 여기서부터 공산주의는 두 파로 갈렸습니다.
본격적인 전국 기반 조성
1954년부터 시작해서 1960년도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국가적 박해를 넘고 뚫고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 기간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 본래, 예수의 공생애노정을 중심삼고 3년기간에 전부 다 탕감하기 위해서 선생님이 나섰던 거예요. 그래서 34세에서부터 36세까지 해서 37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통일교회의 형태를 갖추어 가지고 지금 탕감역사를 국가적인 기준에서 넓혀 나온 거예요. 전부 다 원리적이라구요.
그때에는 한국 교회를 비롯한 전부가 반대했어요, 전부가. 그렇기 때문에 1955년에 감옥에 들어갔었지요? 1955년에 감옥살이, 감옥살이를 했던 거예요. 감옥속에서도 싸웠다구요. 그래 가지고 1957년서부터 본격적인 금식을 하고 선포식을 했어요. 전국적인, 전국적인 기반을 닦아가기 시작했던 거예요. 공세를 시작했어요, 그게. 전도를 하고 전국으로 확대한 거예요. 통일교회의 새로운 단계였다구요.
청파동에서 허리 부러진 사자 모양으로 때를 기다리며 도를 닦은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젊은이들을 교육하여 정예부대를 만들어 가지고 팔도강산을 편답하고 남을 수 있는 기반을 닦아 놓은 것입니다. 나라가 반대하더라도 밀어제낄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닦은 거예요. 이러면서 남자로서 당할 수 있는 핍박을 다 겪은 것입니다.
전 식구 7일 금식 1957.7.1.
1957년을 중심삼아 가지고 통일교회 그때 식구들은 전체 전환했어요. 1주일씩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한국 통일교회 전식구가 이날을 기해 가지고 일주일 금식을 시작했어요. 일주일 금식을 하면서 출발한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때 같이 금식(1957년 7월 20일부터)을 하면서 이것을 선언했어요.
그러므로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일주일 금식을 해야 합니다. 내가 했으니 여러분도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고생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앞에 육신을 쳤다는 조건을 세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보강하는 방법의 하나는 내적인 힘을 뚫고 들어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몸뚱이를 때려잡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일주일 금식을 못하면 통일교회 정식회원이 못 됩니다. 예수님이 며칠 금식을 했어요? 40일 금식을 했습니다. 성인이란 이름을 가진 예수님도 40일 동안 금식을 하면서 본연의 자리로 좁혀 들어갔던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의 인연을 찾기 위하여 불완전한 것을 밀치고 40일 금식도 했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금식해 놓으면 무엇이 편리하냐 하면 말이예요, 밥 걱정이 없어져요. 운명 타령이 없어져요. ‘내가 밥 굶어서 밥 때문에’ 이런 것이 없어져요. 물질을 무시하고도 당당하게 넘어갈 수 있는 실력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일주일 금식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 일주일 금식 명령을 받고 금식을 실천한 사람은 생활의 공포증을 초월합니다. 여러분은 이 기준을 중심삼고 진리를 세워야 합니다.
7일 금식을 시작하면 ‘아이고 배고파, 참아야지, 참아야지’하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갑니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쯤 되면 상당히 힘이 듭니다. 먹고 싶은 것이 왜 그렇게도 많은지 모릅니다.(웃음) 세상이 전부 다 먹는 것으로 보인다는 거에요. 심지어는 과거에 보리떡 하나 얻어먹은 것까지도 생각이 나는 거라구요. 먹는 사탄은 전부 다 동원된다는 거예요. 일주일이 되어 열두 시에 벽에서 ‘딸랑’하는 소리가 들려 오면 그 이상 기쁜 소식이 없지요.(웃음) 아이고, 10분, 5분 남았다 할 때에 고 간절한 마음이란…. 그 이상 돼야 하나님을 만난다 이거예요, 그 이상 간절해야. 밥을 그리워하는 이상의 간절한 높은 기준에 있는 것이 사랑이예요. 우리의 타락한 의식주 권내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겁니다.
최초의 하계 40일 전도 파송 1957.7.20.~8.31., 120 곳 240명 1957년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벌어져 나갔습니다. 1957년은 우리의 제1차 전도 기간입니다. 이래 가지고 역사는 전환시기로 들어온다 이거예요. 이것을 조종하는 전권을 하늘이 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맹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적인 보조를 맞추어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40일 특별활동은 1957년 7월 20일부터 시작했어요. 통일교회에서는 언제나 7월 20일을 중심삼고 그런 것을 합니다. 이때가 학교도 방학을 하는 제일 더운 때입니다. 제일 더운 때에 뜻을 위해서 땀을 흘리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것이 탕감조건을 세우는 데 유용한 거예요. 탕감조건이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간을 택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1957년도에 120군데에 전도지를 설정해 가지고 파송 하면서 ‘여러분들이 3년 동안 복역한다는 입장에서, 거기에 팔려가 고용살이한다는 입장에서 부락이면 부락에 가서 충성을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 충성의 도리를 가르쳐 줘라. 뿐만 아니라 실천해서 보여줘라.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이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들이 할 수 있는 것을 인계 받겠다고 할 것이다. 너도 나도 이렇게 나올 때 여러분은 그 부락에서 완전히 자리 잡는다’ 고 얘기했었습니다.
1957년도에 통일교회가 처음으로 출발할 때에는 120곳에 전도를 내보내게 되었는데 말이예요, 그때는 가는 차비, 가서 타고 갈 수 있는 차비만 주고 그 다음에는 돈을 전부 거두었어요. 옷도 두 벌 밖에 안 주고 내쫓았어요. 가서 미싯가루만 먹고 일해라 한 거예요, 40일동안. 그리고 노동에서부터 하라, 얻어먹는 데서부터 시작해라 한 거예요.
최하의 자리에서 개척
한국에서는 반대하기 때문에 통일교회라는 말은 하지 않고 가서 소제해 주고, 가서 식모살이 해주는 등 이런 운동을 했다구요. 동네 한 부락을 전부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씩 걸려서 쓰는 운동을 하고 그랬다구요. 그거 누가 했는지 모르지요. 몇 개월 지나야 알 수 있지요.
더 땀을 흘리고, 더 눈물짓게끔 비참해지라 이거예요. 그리고 그 비참한 것을 극복하라 이겁니다. 밀가루 같은 것, 밀가루 한 포대 가지고, 사실 한 포대도 안 되는 것 가지고 가 물 타서 한 컵씩 먹고 일했다구요. 40일 전도 나가게 되면 금식하는 거와 마찬가지였다구요. 그래 가지고 돌아오게 되면 내가 음식을 잘 해주는데, 그저 미친듯이 먹는 거 보면 ‘아, 내가 큰 죄인이 아니냐’ 그런 가책도 많이 받았다구요. 장래 한국이 망하더라도 살아 남는 패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거라구요.
1957년서부터 국가적인 차원에 전부 동원하는 것입니다. 보리밥을 먹으면서…. 보리밥이 뭐예요? 전부 다 굶고 개밥을 먹으면서. 그렇게 가 가지고 그걸 극복하고 나온 거예요. 그래서 자기들 귓속말로 ‘배가 하도 고파서 개밥을 빼앗아 먹었다’ 고 하는 거예요. 인간의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거예요.
한국에서 개척지에 나가 전도하던 그때는 돈을 하루 벌어서 하루 살기가 힘들었어요. 하루 벌어서 한 끼 먹고 살기가 힘들었어요. 젊은 사람들이 나가서 다니는데 길을 가다가 이렇게 헛다리를 딛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 거예요. 그런 놀음을 하면서 개척시대에 우리 전도사들이 책임자가 되어서 어떤 동네에 개척을 나갔는데, 먹을 것은 없지 일은 할 수 있지만 일한다면 ‘여기에 일하러 왔다.’며 동네에 소문나고 핍박이 더 하겠으니 할 수 없이 백리 길 이상을 가 가지고 일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구요.
책임자가 뭐 본부에서 돈을 갖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정을 갖고 개척전도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기의 사정을 죽으면 죽었지 절대 얘기를 안 하거든요. 이래 가지고 6개월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나서 알아 가지고는 붙들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개척교회의 심정적 분위기
통일교회에 들어오게 된 다음에는 말이예요, 교회가 자기 집보다 좋다 이거예요. 학교에도 가기 싫고 여기만 오고 싶구요. 마음이 여기에만 있다 이거예요. 그거 왜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종적인 사랑의 상대권을 이루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사랑의 무대를 확대하려고 했습니다.
밤에 다니면 먹을 것 있으면 뒀다 같이 나누어 먹으려고 하고, 그저 화동해서 전부 다 풀어주려고 하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내가 개척해 주려고 하고 말이예요. 그러니까 좋지요. 그러니까 따라오지요, 핍박받으면서도, 동네방네에서 야단하는데도 말이예요, 나라에서 다 추방하려고 하는데도 말이예요.
옛날에 우리는 그런 분위기였다구요. 그래 전도 나가서 사람이 전도되게 되면 전도한 사람이 그저 보고 싶어 매일 오는 그런 분위기였다구요. 그런 분위기에 의해서 지도하라고 했다구요. 그래 새로 들어온 사람들을 그렇게 지도했다구요. 그러니 세상에 자기 집보다도 낫고, 학교보다도 나으니 학교도 안 가려고 하고, 직장에도 안 가려고 하고, 집에도 안 가려고 하며 전부 다 모이려고 했다구요. 그래서 그게 문제가 됐다구요.
도시락으로 인도자를 섬긴 성화학생들
성화학생회가 있다구요. 중고등학생들로 구성돼 있는데 그 중고등학생들이 통일교회 전도사들을 먹여 살렸어요.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심하니까 부모님이 싸 준 도시락을 돌아가며 갖다 준 거예요. 학생들이 30명이면 하루에 세 사람씩 도시락을 놓고 가게 되면 열흘에 한 번씩 돌아오고, 아침 점심 저녁을 돌아가며 갖다 주는 거예요. 이렇게 학생들 도시락을 먹고 개척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걸 어머니 아버지가 와서 보았다면 얼마나 통곡을 했겠어요?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나라를 붙들고 뜻의 세계를 위해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전진적인 그날의 영광을 찬양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불평불만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지, 돈 타령 하면서 출발하지 않았어요. 과거역사 가운데 그런 시대가 찬란한 섭리사의 재료로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 밥을 먹어야 할 지도자의 마음이 얼마나 비참해요? 또, 밥을 주고 간 그 학생이 학교에 가서 밥을 굶을 것을 얼마나 생각했겠어요? 이러한 가운데서 서로서로 그걸 극복하면서 ‘우리는 죽더라도 뜻을 이루자’하며 심정적 유대감에 젖어 있었던 겁니다.
그래 가지고, 학교에 가는 데는…. 엊그제까지, 통일교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누구보다도 좋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 통일교회에 들어간 다음에는 도시락을 안 가지고 오고 말이예요, 매일 점심때에는 저 혼자 교정에 몰래 숨어 있다가 교실에 오는 것이 동무들에게 발견되곤 했다는 거라구요. 왜 그러냐면 자기 부모한테 알려지면 큰일나거든요. 한두번이 아니고 계속적으로 그런 놀음을 해야 되겠으니 믿지 않는 친구들이 어머니에게 가서 ‘당신의 아들딸들이 점심을 잘 가지고 다니더니 요즈음 통일교회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점심도 안 싸주니 부모들이 왜 그러냐? 통일교회의 사람들은 다 그거 뭐 사람이 아니냐? 아들은 아들 대접을 하고 딸은 딸 대접을 해야 되는 것인데 왜 그러냐?’며 항의하는 이런 놀음이 벌어진다구요. 그러니 그 부모는 아들딸에게 ‘너 학교에서 도시락을 안 먹는다던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물어보게 된다구요. 물어 보면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거든요.
이런데도 불구하고 그 다음에 부모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이놈의 자식들!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전부 다 우리 아들딸의 도시락을 빼앗아 먹고 착취해 먹고 피살을 빨아먹는 흡혈귀다’ 하며 반대를 한 겁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전국적으로. 그러니 통일교인이 온다 하면 아들딸의 피 빨아먹는 사람이 온다고 해 가지고, 동네에서 작당을 해 가지고 그에게 모듬매를 치질 않나, 별의별 짓을 다 한 거예요. 더욱이나 전국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양을 빼앗아 가는 이리떼들이 들어온다고 하며 전부 다 짝패가 되어서 별의별 짓을 다 했다구요, 별의별 짓을. 그러한 환경에서 그들을 지도하고 있던 통일교회 선생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어요?
개척 전도사들의 심정적 유대
1957년도부터 전도기간을 정해 놓고 했지만, 21년 노정 같은 때에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예물 주고 한 것은 모두 귀한 것들입니다. 서로서로 길가에서 만나서 기뻐하던 그 시간, 또 서로가 헤어질 때 산허리를 돌면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며 눈물로 상별하던 그런 시간, 그런 시간들은 여러분이 억천만금을 주고도 못 살 시간입니다.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통일교회 임자네들이 알고나 있느냐 말이예요. 초창기에는 식구 한 사람 알기를 전부다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랬다구요. 임지에 나가 전도할 때에, 서로가 갑을 지역에 떨어져 있으면 만났다가 헤어질 때, 보고 싶어서 서로가 바래다 주기 위해서 저기까지 갔다 또다시 바래다 주기 위해 왔다가, 갔다가 하면서 밤을 새우는 일도 있었어요. 형제들끼리도 그런다구요. 동생이 가는 어려운 길을 걱정하면서 먹을 것이 있으면 그걸 먹지 못하고 싸 가지고 오십 리 길이 멀다 않고 줄달음을 쳐서 갖다 주곤 했어요.
그때 한국에는 자동차가 귀해서 전부 걸어 다녔어요. 반달 달밤에, 새벽에 달이 뜨는 그 밤에 서로서로 나라를 위해서 눈물 흘리고 하늘을 위한 미래를 위해 서로가 선서하고 떠나던 그런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많아요. 거기에서 애국심이 나는 겁니다, 애국심.
세상의 첫사랑에 잠겨 가지고 사랑에 떨어진 이상의 고차적인 영적 분위기에서 그걸 그리워 하면서 움직이던 것이 언제나 그리운 겁니다. 그런 인연을 여러분들이 어떻게 유발하느냐 하는 문제가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들의 책임이고, 자기들의 활동하는 목표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그 전통 기반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노력해야 할 표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초창기 식구들의 눈물의 역사
과거에 통일교회 선생님을 따라오던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자기 아들이나 남편이나 자기 친척 앞에 칭찬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거예요. 전부 다 반대받은 것입니다. 왜? 다 버리고 왔기 때문에. 그걸 사랑하고 같이 하다가는 둘 다 망하는 거예요. 이자 택일한 입장에서 나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친척, 친구들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전부에게 찬양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구요.
그래서 오래된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눈물이 많다구요. 하늘이 직접 같이하는 자리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입니다. 그게 다르다는 거예요, 그게. 하늘과 같이 살아나왔다는 게 다르다구요. 초대교회의 전통이 여러분들의 역사의 전통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나무와 마찬가지입니다. 뿌리가 같은 가정이니만큼 한국의 전통을 가진 과거나 미국의 지금 전통을 지녀야 될 현재나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40일 전도기간 전통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7월 20일이 되게 되면 40일 전도기간을 갖게 되어 있는 것을 여러분은 모르지요? 이제부터라도 통일교회 역사를 알아야 됩니다. 역사를 모르면 현재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현재를 모르면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1957년도에 전도활동 나갔을 때는 통일교회란 말을 못 했어요. 벅찬 가슴을 누르고, 한 많은 사연을 가지고 길을 가나, 어디를 가나 분함의 마음에 사무쳐 왔지만 이것이 풀려 이제는 동등한 입장에 섰습니다.
개밥을 먹고 일해 가지고 터전을 잡은 것을 하나님이 침 뱉겠어요? 하나님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게 출발한 거라구요. 그런 귀한 역사적인 사실을 여러분이 모르고 다 흘러 버리면 안 되겠기 때문에 내가 이야기해 준 거예요. 여기 미국의 책임자도 앞으로 이런 날을 중심삼고 일주일 금식을 하고 40일을 책정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 원리에 보면 동시성시대에 대한 것이 나오지요? 거기 보면 40수에 대한 것을 다 알 거라구요. 4000년을 대신해서 400년, 400년을 대신해서 40년, 40년을 대신해서 40일, 거기에 일주일이라는 7수는 복귀섭리의 중심수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걸고 우리가 자기의 생명길을 개척하는 데 있어서는 탕감조건이 절대적인 문제입니다. 40일씩 3년을 하면 120일이 됩니다. 120일을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한 고개를 넘는 과정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그 이유는 우리가 오늘의 모든 환경에 지배되어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확장시켜야 되기 때문인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세계적이요, 전체적인 분야에 인연을 맺는 놀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활동하는 모든 삶의 존재들도 현재 나타난 그 시대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상징하고 세계 전체, 제한된 환경 전체를 상징하고 과거를 상징해 가지고 하나의 대표적인 표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과거를 대표했다는 것입니다. 역사시대를 대표하고 이 세계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사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 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존재들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원리해설(原理解說)’ 발간과 원리선포 1957.8.15.
선생님을 보지도 않고 선생님을 따른 첫 사람이 전 유협회장이었습니다. 그는 원리의 원본을 보고, 그것을 읽음으로써 선생님을 보지도 않고 선생님을 따르려고 결심했습니다.
유협회장은 선생님보다 여섯 살 위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위였습니다. 그래서 유협회장은 세례 요한의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원리를 해설해야 했습니다. 유협회장이 썼던 책은 유협회장의 책이 아닙니다. 유협회장이 그 책을 쓸 때 선생님이 그에게 이런 식으로, 또는 저런 식으로 쓰라고 지시했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자세하게 그 책을 공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원리를 통해 가지고 이 방대한 내용을 어디서부터 손을 대가지고 어떻게 풀어 나갈 것이냐? 이걸 흡수해 가지고 이만한 질서의 조직을 만들고, 이러한 기준까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는 사실, 이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라구요. 자,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내가 눈물을 많이 흘려 가지고, 며칠씩 눈물 흘려 가지고 해를 못 본 때가 많았다구요. 그걸 알아야 된다구요.
그래 가지고 이 길을 닦아 나온 거예요, 한발짝 한 발짝. 그런 것은 여러분에게 다 안 가르쳐 줘요. 그것은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여러분은 안 가르쳐 주는 것은 안 가면 돼요. 쉬운 길을 가라 이거예요, 쉬운 길.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우리 통일교회의 역사가, 오늘날 오래된 사람들이나 한국 식구들, 영적으로 체험한 사람들만이 이런 경지를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오늘날 통일교회의 원리 말씀도 선생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선포된 것입니다. 우주적으로 보아도 중심이 있기 때문에 선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있어서도 내각을 조직할 때에 밝혀지기 전에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결정해 가지고 선포해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결정되어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포하면 다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원리를 알았다는 것은, 그것은 결과적인 것입니다. 6천년 역사가 개인복귀완성하는 역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안 동시에 실천적인 실체가 결정됐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 전부와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그 가르쳐 준 모든 것을 절대시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고 그것과 더불어 죽으면 그것과 더불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신앙길에 있어서 심각해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이 아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평면적입니다. 평면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입체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틀리다는 거예요. 여러분은 여러분만한 일밖에 못 하기 때문에 선생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과 안 맞는 것 같지만 결국 지내 보면 맞게 됩니다. 암만 안 될 것 같은데도 그렇게 된다 이겁니다.
여러분이 원리 강의하는 데 있어서 땀을 흘려 보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보지 못하고는 저나라에 가서 걸리는 겁니다. 선생님이 그 원리를 밝혀 낼 때 그냥 앉아 가지고 된 줄 압니까? 어림도 없는 얘기입니다. 혈투전에 격투전을 거듭해 가지고 찾아낸 것입니다.
2. 최초의 일본·미국 개척선교 파송 1958 ~ 1959
해외 선교의 시급성
내가 형무소에 들어갔다가 나오자마자 갑사甲寺에 있으면서 연구를 한 것이, ‘금후에 있어서 일본이 문제다. 지금은 망했지만 금후에 있어서 또 일본이 문제될 때가 온다. 그러니 우리가 일본을 원수시해서는 안 되겠다’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대학가에 일본과 교섭할 준비를 해 놓고 사람을 일본에 밀파를 한 거예요.
대한민국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북에는 김일성을 중심삼고 소련과 중공이 후원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이 난국을 해결할 하나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는 일본을 뚫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일본 땅이 원수이지만 앞으로 내가 누구보다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뜻을 펼 수 있는 상대적 기준이 될 것이어늘, 그러지 않고는 제2대상의 주체국 앞에 상대적 국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이 세계적인 뜻이라면 이웃 국가 일본에게도 해야 할 책임이 있고, 각국 여러 나라에게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수난길을 거치면서라도 세계에 선교사들을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책임을 하는 데에도 먹고 남아 가지고, 쓰고 남아 가지고, 그렇게 여유가 있어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가운데에서 하는 것입니다.
최봉춘 선교사 일본선교 밀파 1956, 충남 계룡산 갑사
바로 1956년, 여러분이 알다시피 서대문 형무소에서 석방되어 충남 갑사甲寺에 휴양 가 있을 때 여기에 와 있는 최봉춘崔奉春이라는 젊은 청년을 불러서 ‘너는 일본을 위해서 밀항하는 것이다. 사나이가 정한 걸음은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 된다’ 고 훈계를 했던 것입니다. 갑사 뒷산으로 불러 가지고 일본 선교의 특명을 내렸습니다. ‘너는 현해탄을 건너야 된다.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렇게 준엄한 것이다.’이렇게 다짐시켜 가지고 밀선을 태워서 보냈습니다.
선생님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잠을 안 자고 너를 위해 기도하고 너를 위해 정성들이고 할 것이다’며 죽더라도 임무를 다할 때까지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십년만 두고 봐라. 이것이 법치국가의 국민으로서 위법행위인 줄은 알지만 틀림없이 아시아에는 자유롭게 이렇게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하여 내가 지금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더라도 이 일을 하겠다. 이러한 정의에 입각한 내 신념과 행동을 역사가 보증할 날이 올 것이다’ 생각하고 단연코 행하였습니다. 그때 통일교회 식구들은 굶다시피 하는 때였어요. 사진을 팔아서 겨우 그날그날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감옥을 들락날락하면서도 그때 돈 150만원을 빚을 얻어서 최봉춘을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법이 문제가 아니라구요. 국가 운명은 법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천운이라는 것은 인간들이 제창한 헌법을 넘어선 자리에서 찾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천운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할 수 있는 놀음을 하려니 항상 죽음이 엇갈리고 고통이 엇갈리고 핍박이 엇갈리는 것이 아니예요? 따라 가려면 무슨 핍박이 없겠느냐는 겁니다. 남 좋은 대로 한다면 무슨 핍박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때는 상충이라구요. 가로막을 때는 가로 막는 거라구요. 그래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런 길을 가는 거라구요.
3차 특명과 일본 입성 1958.6.15.
첫번에는 일본에 입국하자마자 체포됐습니다. 1차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또 보냈습니다. 2차도 또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1958년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못 가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뺨을 갈기면서 ‘이놈의 자식, 사나이가 한번 맹세했으면 실천 해야지. 죽더라도 일본에 가서 죽으라’ 고 소리를 질러 다시 쫓아 보냈습니다.
지령을 내리기를 ‘감옥에 들어가서 네가 사흘 동안, 일주일이라도 도망가 가지고 세 사람을 전도하지 않으면 안 돼!’했어요. 그 명령에 의해서 시작한 것이 현재의 일본 통일교회입니다. 충청남도 갑사 뒷산 소나무 밑에 불러 가지고 훈시를 하던 그 시간을 잊지를 않아요.
그런데 그가 여수를 통해 일본으로 가자 붙잡혀 오무라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어요. 그리하여 일주일 이내에 도로 송환되기 위해 시모노세끼로 가던 중 열차에서 뛰어내리려니 기차의 속도가 빠르고 굴이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모노세끼에 도착되어 다시 수용소에 갇혀서 송환되기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한 꾀를 내어 금식을 했답니다. 일주일, 열흘, 계속 금식 아닌 금식에 소금만을 먹고 나니 열병같은 것을 앓게 되어 까무라쳤다는군요. 그렇게 꾀병을 얻어 병원에서 치료한다고 입원해 있다가 도망을 쳐버렸던 것입니다.
1차 실패, 2차 실패, 3차만에 들어가 가지고 오무라 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보고받았을 때에는, 하나님도 무심하지, 이렇게 미래의 당신의 뜻의 길을 개척하려고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될 하나님이냐고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는 거라구요. 그렇지만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불러다가 ‘또 가자!’한 거예요. 암암리에 길을 터 가지고 후원하는 그 자금을 보냈는데 자금이 다 옆으로 흘러버렸어요.
일본 선교의 개척
이렇게 일본에 우리가 선교사업을 개척한 때가 1958년입니다. 1958년도라구요. 그때는 자유당 치하여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절대 반대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있으면서 오늘날 통일교회의 모든 식구들을 미래의 10년, 20년의 장기간을 내다보며 교육을 하여 온 것입니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다 새로운 사상관에 입각하여 기독교를 어떻게 보며, 공산주의를 어떻게 보며, 금후의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끝난 후에는 어떤 세계가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쭉 교육을 해 왔던 것입니다.
일본 내에 가서 규탄받는 것이 아니라, 일본 사람들을 교화해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토착화될 수 있느냐? 그것만이 미래에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일이라고 봤던 것입니다. 일본으로 선교를 갔던 그 청년은 일본에서 피신하고 있는 몸으로서 통일교회를 개척해 가지고, 그야말로 새로운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국민적인 운동보다도 어떻게든지 일본 위정자들 앞에 길을 뚫으려 했습니다. 이런 것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한국이 살려면 반드시 일본을 업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미국을 어떻게든지 연결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 개척선교사 파송 김영운 1959.1.2. 김상철 1959.9.18. 박보희 1964.12.29
가장 심한 핍박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나의 기도와 관심은 한국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일본과 미국에 선교사들을 보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가 미국에 선교사를 보낸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국에 원리의 씨를 뿌리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밤낮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유당 시대에 선생님을 죽이려 하는 것을 조건 삼아서 외국선교의 길을 개척했던 것입니다. 자유당 때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갔다 나왔어요. 나와 가지고 그 반대하던 장관들 내세워 가지고 여권 내어 미국 선교사를 보냈다구요. 그랬으면 됐지요. 미국에 선교사를 보낼 때는 자유당을 이용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던들 오늘날 이와 같은 승리의 터전은 절대 마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자유세계 민주세계, 미국이면 미국하고 싸우는 데는 비겁하고 기만하는 입장에서, 가장해서 싸움을 안 한다구요. 정정당당히 싸우는 것입니다. 정면적으로 충돌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그 나라에 필요한 요건을 가르쳐 주고 그 기반을 통해서 전진할 수 있어야지, 그것도 안 보여주고 전진하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반이 필요하다구요. 세계무대를 향해서 1950년대부터 그걸 준비해 가지고 그 기반을 닦아서 나선 거라구요. 모든 것을 미리 다 준비했어요.
선생님이 세계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저 뭐 생각과 더불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수십 년 전부터 계획하는 거예요, 수십 년 전부터. 그러려니까 누구도 이해 못 하고 누구도 협조 안 하는 세상에서 이 일을 하기가 쉬운 게 아닙니다.
미국 초기 개척선교
전부 다 반대했지만, 미국을 세워 빨리 배수진을 치지 않으면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이냐? 해 가지고 ‘거대한 미국을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망한다’고 작전 명령을 해 가지고, 서부 동부에 세 사람을 보낸 거예요.
미국에 선교 간 김영운 선생이 전도하게 될 때, 그냥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통인을 찾아가서 했다는 것입니다. ‘자, 이 책이 무슨 책인지 기도해 보소’ 라고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참 고차적인 전도 방법이지요? ‘내가 누군지 기도해 보소’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도를 해보면 불호령이 내리거든요. ‘그분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차렷을 하고 큰절을 해서 모셔 들여라. 그분이 돈이 없으니 돈을 줘라’고 몽시로 가르쳐 주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미국에서 그렇게 출발한 것입니다.
3. 전국 식구 조직 훈련과 사업
소인된 우표수집 판매사업 1956.7월 부터 7년간
우표수집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낱 작은 우표 한 장을 떼는 데는 불과 몇 푼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관심을 갖고 한 장의 우표를 뗀다는 사실은 숭고한 노력입니다. 숭고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나 이런 우표수집으로 상을 탄 사람들을 보면 대개 젊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중고등 학생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한때 말하기를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누구든지 한 달에 세 번씩은 식구끼리 편지하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편지할 때 40원짜리 우표를 붙이지 않고 1원짜리 우표를 붙인다 하게 되면 우리가 사업부에 배로 후원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세 번씩이면 120원을…. 이렇게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휴지로 돌아갈 우표를 사용한 것이 이런 효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거예요.
이런 걸 보게 될 때에 우리의 움직임이 사소한 것 같지만 이것을 전체 국가적으로 볼 때 막대한 이익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둔다는 사실을 우리 통일 신도에게 있어서 앞으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하나의 관습으로 남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장년들도 그런 면에 관심을 가지고 많이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이 우표수집을 해 가지고 전도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장 한장 이렇게 모아 준 우표로 말미암아 작년(1959년)에 얻어진 금액이 100만원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백만 장을 표준해 가지고, 200만 장을 표준해서 이런 것을 하자고 선생님이 말씀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작은 일에 마음을 놓지 마시고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가나 오나…. 여기 중고등 학생들이 지금 우표수집에 노력했다는 말씀을 들었으니 어느 한때라도 그런 정신을 잊지 마시고, 생활면에 있어서도 우표수집에 관심을 가져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한 풍습이 되면 우리 통일신도의 움직임에 정신적인 단결을…. 이것을 수집해서 물론 이익을 보는 것도 한 일면이겠지만, 이런 행사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통일이 되어 서로서로가 한 공동목표에 있어서 같은 심정으로 생활 감정을 같이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사실은 누구나 칭송할 수 있는 정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구조직 편성
오늘날 우리 교회에 있어서 남자 세 사람, 여자 세 사람, 이렇게 삼위기대를 만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 하면, 앞으로 주를 모셔야 할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담가정에서의 아담 부부와 그의 세 아들과 세 자부형을 대신할 수 있는 모형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위기대를 조성하는 데 있어서도 여러분은 세 삼위기대를 중심삼고 열 사람이 단결해야 돼요. 세 삼위기대를 중심삼고 반班을 만드는 데에는 무슨 뜻이 있느냐 하면, 종적으로 보면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 10대를 대신하는 것이요, 반장은 두 사람의 책임이 있기 때문에 열 두 사람형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 노아에서 야곱까지 12대를 대신할 수 있는 형이요, 역사적인 면, 즉 종적인 면에 있어서는 10대와 12대를 대신할 수 있는 형입니다.
이렇게 세 반이 합해서 한 조組가 되며, 한 조는 36수 36인을 대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야곱에 있어서는 12자식, 모세에게 있어서는 12지파, 예수의 12사도를 표시하는 것이며, 6000년의 역사적인 대표를 합한 것을 상징하는 수가 36수라는 것입니다.
남자 36인 여자 36인이 합하면 72인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를 중심삼고 70문도가 있었고, 모세를 중심삼고 70장로, 야곱의 70식구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70문도, 그리고 예수님의 신부격이 합하면 72인이 된다는 거예요. 오늘 천지의 도수를 맞추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우리가 이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년(1958년)의 하늘의 명령은 여러분을 못 살게 훈련시키라는 거예요. 금년은 수련의 해, 시련의 해로서 어떠한 고통도 늠름히 넘을 수 있는 해가 되게 해야겠고, 12인 이상의 마음을 맞춰주는 사람을 빨리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특히 1월 3일인데 여러분 단단히 결심해야 되겠어요. 3개월에 한 번씩 삼위기대를 변경할 때에 여러분은 누구와 만나게 되든지간에 하나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삼위기대로 맺어진 상대에게 ‘그대는 오랜 6000년 섭리역사를 돌고 돌다가 무슨 인연이 있어서 나하고 만났는가’ 하면서 역사적인 운명의 상봉이라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 사람이 하나되고 열 사람이 하나되고, 36, 70인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국 명산 대찰 답사 기도 1958~1959
선생님은 팔도강산 경치 좋은 데 가 가지고 기도해 줬어요. ‘야, 나는 너를 축복하러 왔다. 너를 보고 너에게 신세를 지려는 것이 아니라, 너는 역사 이래 참된 한 주인을 원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심정적으로 너희들에게 사랑을 주겠다’ 하는 이런 기도를 참 많이 했습니다. 팔도강산을 다니면서, 별스러운 사람이지요?
내가 팔도강산을 돌아다니는 것은 유람하러 다니는 것이 아니라구요. 수많은 사람은 관광지에 가 가지고 구경을 하더라도 나는 다르다 이거예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기도 많이 했다구요. 설악산에 가서도, 속리산에 가서도 기도했다구요. 이 산천을 찾아 주는 사람은 많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심정과 이 산천이 찾고 있는 심정을 가지고 찾아준 사람이 있느냐? 그런 가운데 내 역사를 대표해 가지고 내가 처음 될 것이다 하는 기도를 한 사람이라구요.
통일산업 청파동 공장 1959
옛날 청파동에 통일산업 만들 때 적산가옥에다…. 그 뒤에 연탄 놓던 곳이 있다구요. 한 반 평 되지요. 그때 선반이 어디 있나요? 선반이 없으니 일본 사람들이 쓰다 만 헌 것을 그때 화폐개혁 전에 72만원 주고 사 왔어요. 그때 내가 그걸 보고 ‘이것이 7천 대 7만 대 기계가 될 것이고 대한민국의 군수 산업이라든가 대한민국의 자동차 공업까지 꼬리를 물고 발전시킬 것이다. 믿어라!’했어요. 그 당시라면 거 임자네들 그걸 믿을 것 같아요? 그거 믿을 것 같은가 말이예요.
제1회 전국 전도사수련회 1959.1.10.~2.20., 청파동 본부교회, 207명
[개회기도] 지방에 널려 싸우던 당신의 아들 딸들이 이 한 주일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와 새로운 결심과 새로운 무장을 하기 위하여 모였사오니, 이 수련회를 통하여 아버지의 영광의 흔적을 몸으로 마음으로 체휼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이번 이 기간을 통하여 하늘의 심정을 체휼하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이번 기회에 아버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걸어간 사람들의 그 자취를 알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아가 아버님의 아들 딸이 싸워 나가던 그 싸움의 노정을 알게 하여 주시어서 하늘의 일을 알 수 있는, 하늘이 영원히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아들 딸들로 만들어 주시옵기를 진심으로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이제 저희들에게 허락하신 수련 기간을 통하여 수련을 받고 간 당신의 아들 딸들, 간곡한 심정과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이 삼천리 방방곡곡에 흩어졌사오니, 아버지, 그들의 갈 길을 아버지께서 열어 주시옵고, 싸움을 하게 될 때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고, 믿음으로 하늘의 권한을 세우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하늘의 실권의 행사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들려진 철장의 말씀과 생명의 방패로 원수들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그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고, 천적인 승리의 영광을 그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원하옵니다.
제2회 전국 전도사수련회 1959.7.20.~8.31.,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야목리, 35명
우리 통일교회가 맨 처음 출발할 때에 수원에서 앞으로 수산산업을 경영하기 위해서 젊은 애들을 데려다 교육하면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 야목이라는 곳에 참 물이 많아요. 그곳에 천년 묵은 뭐니, 사람이 들어가 본 적이 없으니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오니 뭐 명주 꼬리가 당긴다느니 별의별 소문이 다 났어요. 그곳을 습격하는 거예요. 고기가 일단 들어갔다 하면 못 나오는 그물을 만드는 거예요. 그런 그물을 고안해서 만들어 가지고 쳐 놓고 모는 거예요. 거기 그 바닥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뱀이 없나, 별의별 것이 다 있어요. 그리고 연꽃 중에 개연이라고 있습니다, 개연. 대에서부터 잎에까지 아카시아 나무같이, 분지나무와 같이 전부 가시가 있어요. 이놈에게 한번 찔리면 새빨개지고는 반드시 곪습니다. 녹두알만큼 한 게 하루 종일 곪아요. 거기에 쓱 장단지를 올려 보면 전부 찔려서….
그때 수련이 2회로구만. 그 2회 수련생들이 지금 통일교회 간부들이 됐는데 어디를 가나, 가는 곳곳마다 얘기를 하는 거예요. 야목에서 가물치 잡는 수련 방법이 어땠고, 무슨 메기 잡는 방법이 어땠고, 뱀 잡는 방법이 어땠다고 어디를 가나 그 얘기가 나오는 거예요.
그거 거창하다구요. 그물이 그때에 몇 백발이야? 몇 천발! 한 2천발 길을 건너갔다구요. 장대가 사람 키의 다섯 배, 여섯 배 돼요. 그렇게 물이 들어오는 거예요. 그 안에 고기들이 들어오면 왕창 잡는 것이지요. 검정 칠 해 가지고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똑같다구요. 얼굴에 전부가 검정칠을 했으니 늙은 걸 알아요? 전부 다 새까매 가지고 눈만 깜박깜박하고 그러면서도 해지는 줄 모르고 뱀장어 잡느라고, 고기 잡느라고 말이예요. 거 필요하다구요. 잊을 수 없는 인상, 나라를 생각하고 뜻을 생각할 때 잊을 수 없는 생애의 일부분이 아니냐구요. 춘하추동, 계절에 따라 자기 생애에서 남을 이상의 인상을 남겨 놓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훈련받은 녀석들은 못 떨어지지요.
저 김순화, 김영휘 어머니 되는 양반, 아 물에 들어가더니…. 결국은 들어갔는데 쏘옥 들어갔다가 둥둥 떠 내려가는 거예요. 둥둥 떠내려가는데 이 사람이 헤엄을 잘 못치니까 그냥 들어가는 거예요. 물을 실컷 먹고 저만큼 떠내려가니 누가 건져 줘서…. 그래서 어떠냐고 물으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러고 있더라구요. 일화가 참 많지요. 한 10미터 흘러갔는데.
여자도 팬티 입고 다니니까…. 한바탕 달리다 보면 여기 절반이 벗겨지는 것 알게 뭐예요. 팬티가 여기에 걸려 가지고 궁둥이가 나온 걸 알게 뭐예요. 그런 궁둥이를 가지고 동네 가운데 우물터로 들어가니 손가락질 받고 욕먹는 거예요. 그러면서 수련하고 말씀 받아 정신과 몸뚱이와 생활이 한 범벅이 되는 거예요. 그게 살아 있거든요. 매일 여기서 갔지요. 여기서 야목 가려면 1시간 40분 가량이 걸립니다.
그 야목에 삼 자매가 있었어요. 둘은 과부고 하나는 조카뻘 되는 그 셋이 어울려 가지고 선생님 오라고 밤낮 기도하는 거예요. 자, 이거 그렇게 끌어당기니까 선생님이 어디 가다가도 ‘야목 가자!’그러는 거예요. 가 보면 기도하고 있어요. 그러면 ‘이놈의 간나들, 엎드려서 밤새도록 선생님 오라고 기도했지, 굶어가며 기도했지? 이 쌍것들! 누가 기도하라고 그래?’, ‘통일교인이 수만 명 있지만 내가 그 사람들보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올 줄 알고 했소. 하늘이 내 말 안 들으면 안 되겠기에, 들어줘야 되겠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해서 그렇게 된 걸, 우리가 죄 있소?’ 그런다구요.
사냥과 고기잡이 1960년 전후
선생님은 1961년도 이전까지는 식구들을 산이나 내로 많이 데리고 다녔습니다. 내가 옛날에 멧돼지 사냥을 왜 다녔는지 알아요? 젊은 놈들 훈련시킬 장소를 구하러 다닌 거예요. 놀면서 그냥 사냥 다닌 게 아닙니다. 먹혀 죽을지도 모르는 높은 등성이와 낮은 골짜기를 찾아 가지고 멧돼지를 사냥한 이유는 공산당을 하나님의 원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훈련하는 데서도 죽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이런 골짜기에 전부 갖다 처넣어 가지고 훈련을 시킬 것이다. 몇 녀석 살아 남나 보자’ 하고 생각하는 거예요.
겨울에는 그 산중이 얼마나 추운 줄 알아요? 목 지키는 사람의 처량한 심정을 알아요? 아이구, 땀을 흘리면서 올라가 가지고 앉아 있으면 모든 것이 얼어 들어오는 거예요. 얼음 몽둥이가 되어 들어오는 거예요. 손가락도 그렇고 늘어진 것은 다 그래요.(웃음) 사실 그래요. 거기서 제일 다루기 곤란한 것이 남자의 그것입니다. 자 이거 얼어들어 오는데 어떻게 할 수 있어요? 그걸 붙들고 뒤넘이치고 낑낑거렸다간 노루 새끼, 돼지 새끼가 다 도망가거든요. 그러니 소리없이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아이구…. 다음부터는 생전에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철이 되면 또 가거든요. 그런 사냥의 매력을 느껴 봐야 돼요. 낚시의 매력도 그래요. 그런 걸 느껴 볼 줄 알아야 진리 탐구의 가치 있는 매력도 느낄 수 있는 거예요.
그거 누가 가라고 해서 가나요? 선생님은 뭐 누가 시켜서 하나요?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잠을 못 자요. 새벽같이 뛰어다녀야 돼요. 몸뚱이가 알아요.
서해 낚시 때의 사고
그때가 언제인가, 아마 1959년도나 1960년도쯤일 것입니다. 선생님이 성혼식 하기 전이니까 그때쯤입니다. 오팔호라는 배를 타고 서해에 낚시질을 하러 갔는데 그 배를 가만히 타고 있으니까 무슨 흉조가 있는 것 같았어요. 배가 떠날 때부터 아주 기분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낚시질을 해서 문어 한 마리를 잡았는데도 기분이 별로 좋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고기잡이고 무엇이고 그만두고 배를 몰고 바닷가로 나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나까지 여섯 사람이 갔었는데 바닷가에 있다 해도 밤이라서 안 되겠다 싶어 두 사람은 내가 데리고 나오고 세 사람은 바닷가에 그냥 남았습니다. 자기들은 걱정이 없다고 해서, 그들을 그냥 배에 남겨 두고 우리들만 육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밤이라 배는 보이지 않고 해서 ‘다 죽었겠구나’ 생각했지요. 파도가 배를 몰아치게 되면 배와 반석이 실력으로 대결해 보자는 듯이 서로 맞부딪쳐서 배가 풍비박산 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뛰어가는데 태풍으로 인해 세차게 몰아치는 모래알 같은 빗방울이 따끔따끔하게 들이 때리는 거예요. 아프고 터지고 싫고, 그런 것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요.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뛴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저 사람들 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데 왜 이럴까’ 하고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은 그 이상의 염려를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거기서 기도했던 생각이 나요.
그러면 그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구원해 주려는 사람이 어서 빨리 가까이 와 주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아이구, 나 죽는다, 아이구 나 죽는다’ 하면서 그들은 자기 생명이 경각에 놓여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몇천 번 죽음을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다시 삶의 환희가 벌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력이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4. 참부모님 성혼 직전 3년 기간 1957.7월 ~ 1960.4월
해방후 14년 탕감노정 1945~1960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셨을 때에도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섭리의 터전을 계승하여, 유대민족의 중심 가정인 요셉 가정에서부터 뜻을 펴고, 그리하여 모든 상류 계급에까지 뜻을 펴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반대의 입장에서부터 출발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도 탕감복귀 원칙에 의하여 예수님 때처럼 비참한 노정을 걸으며 맨 말단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남한에서 교단이란 교단은 전부다 반대하고 전 민족이 환영하지 않는 가운데서 통일신도들은 제일 말단에서부터 올라오는 운동을 해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나온 1960년까지의 기간은 야곱 노정에 있어서의 14년 기간과 맞먹기 때문에 이 기간내에 천적인 계획을 결정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국가가 반대하고 전교계가 최고로 반대하는 치열한 싸움의 자리에서 일을 성사시켜야 했습니다.
해방 후 14년, 만 14년이니까 1960년 초기입니다. 1960년을 중심삼고…. 이 14년이라는 것은 소생, 장성 7년이니까 장성기 완성급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7년노정에 있어서 제1차는 구약시대이고, 제2차는 신약시대입니다. 신약시대에 해당하는 예수님격 장성기 완성급을 중심삼고, 이 기간에 해당하는 1960년대에 들어와 가지고 모든 국가가 반대하던 것을 빼앗아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2차 7년노정에 있어서 한국을 대표한 그때에 예수님이 잃어버렸던 영적, 육적 기준을 연결시키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겁니다.
1954년을 중심삼고 1960년까지 7년간인데, 이 기간에 종족적 기반을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종족적 기반을 못 이룬 것을 반드시 탕감해 가지고 이 기반을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통일교회를 중심삼아 가지고 1954년부터 강력한 반대역사에 들어갔어요. 들어가면서, 전부 다 국가가 똘똘 뭉쳐 반대하는데 있어서 이후 7년간 이 국가에 영향을 미쳐야 되었다구요. 아무리 반대하고 아무리 마음대로 없애려고 해도 없앨 수 없는 환경으로 넘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종족이 없으면 민족으로 갈 길이 없는 거예요. 종족적 판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유대나라와 유대교를 중심삼고 하나 만들어 가지고 로마, 세계시대로 가야 할 그 길을 가져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혼 직전 3년 기간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개를 국가가 반대하는 차원에서 다시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알다시피 1956년 이후에 전국가의 반대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전체가 반대한 거예요. 누구 한 사람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3년 노정의 길을 다시 추어 올라가서, 전체 민족이 반대하더라도 낮은 데서부터 추어 올라가서 그 나라의 교권자들과 주권자들이 예수를 맞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최고의 반대를 받으면서 싸워서 승리해야 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정적 승리권을 찾을 수 없는 것이 예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개인 십자가 도상에서 몰림으로 말미암아 그 고개를 못 넘고 십자가에 돌아간 것이 예수가 간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1957년도 이후부터 1960년도까지 3년 기간에 반대가 최고도로 고조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간은 아무리 나라가 반대하고 아무리 내가 쇠고랑을 차고 죽음길을 간다 하더라도 단연코 생명을 내걸고 투쟁해야 할 기간이었습니다. 그것이 1960년도까지였습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1959년 하반기에서부터 1960년도 4월 이전까지 한 7개월간이 최고의 수난기였습니다. 그 기간에 있어서 우리 통일교회를 믿다 나간 사람들이-예수를 열두 제자가 반대한 것과 마찬가지로-결속돼 가지고 반대해 나온 거라구요. 지금까지 그것을 원리적으로 보면 참 무서우리만큼 맞아 나왔다는 거예요.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내가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겠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랬는데 사탄이 침해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승리의 역사를 일으켰던 것입니다.
1960년도 이전 말씀의 성격
보라구요. 1960년 이전까지는 전부 다 예수에 대한 강의를 했어요. 선생님 설교집을 찾아보라구요. 예수에 대해 전부 다 세밀히 파헤친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선생님이 60년도에 부모의 날이 설정될 때까지의 설교집(〈문선명선생 말씀선집〉 제1집∼제8집)을 전부 보라구요. 전부 다 예수님을 중심삼고 말했지, 선생님을 중심삼고 말하지 않았다구요. 복귀노정에서는 예수님이 하지 못한 것을 해원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그 사탄의 입회 하에서 ‘내가 이런 조건을 제시했으니 죽임을 당한 그 모든 한을…. 네가 이제 후퇴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자식아!’그럴 때에 ‘그렇습니다.’할 수 있는 입증을 세워 나가는 놀음을 예수님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섭리가 바로잡혀 나오지 않아요. 그런 모진 투쟁의 역사를 가려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 그걸 누가 아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복귀섭리를 중심삼고…. 신령한 사람들이 문선생에 대해서 ‘도대체 문선생님은 어떠한 사람이요?’하고 기도하게 되면 통곡을 시키는 겁니다. 혓바닥이 빳빳해지고, 밸꽁지가 틀리고, 눈물 콧물 입술이 다 말라지는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하늘이 그만큼 통곡을 시키는 거예요. 그런 통곡을 하더라도 선생님을 이해 못 합니다. 선생님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이거예요.
종의 종-종-양자-자녀-부모 시대 탕감복귀
통일교회는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이냐? 역사적인 종의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 자녀의 시대를 거쳐 가지고 부모의 시대까지 횡적 탕감복귀의 노정에 실패했던 기독교에 연결된 모든 사명을 다시 세워서 탕감복귀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960년도 전까지는 무슨 사명을 해야 하느냐 하면 통일교회 교인 자신들이 사방에 흩어져서 종의 종의 도리를 가리고, 종의 도리를 가리고, 양자의 도리를 가려 가지고 국가와 민족 앞에 어떤 수난을 받더라도 그걸 극복하여 하늘 앞에 기여할 수 있고 하늘 앞에 통일될 수 있는 하나의 무리를 형성하여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종의 종이니, 종이니, 양자니 혹은 아들이니 하는 자리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서는 사탄과 일선에 서서 부딪쳐 가지고 승리할 수 있는 무리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 일선이 어디냐 하면 국가예요. 대한민국이라면 이 국가무대 위의 첨단에 서 가지고 갖은 수욕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반대, 만약에 반대가 없었더라면 세계적 탕감노정을 거슬러 나오는데 있어서의 대를 이을 수 없었다는 거예요. 이 과정에 있어서의 통일교회 역사를 더듬어 보면 그야말로 비참한 역사요, 눈물어린 역사였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최고의 국가와 부딪혀 가지고 핍박받는 시대에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래서 1957년부터 전도하기 시작했지요? 4년 만에 아주 격동의 시대로 들어간 거예요, 3년 반이 지나면서. 나라가 반대하고, 교회가 반대하고, 성진이 어머니 가정이 반대하고, 전부다 반대했어요. 그러나 선생님 가정만은 반대 안 했다는 거예요. 선생님에게는 동생의 말은 무슨 말이든지 절대 복종하는 형님이 있었다구요. 그런 입장에서 세례 요한 같은 가정을 내세워 가지고 해와를 선택할 수 있는 기반만 닦으면 여기서 복귀의 기준이 가능하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러면서 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내적 사탄, 외적인 면에서는 외적 사탄이 합동으로 싸움을 하는 그 제일 복잡한 와중에서 1960년도 4월 11일, 음력 3월 16일에 성혼식을 한 것입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최고의 정상의 자리에서 그 일을 한 거라구요. 아무리 십자가의 핍박이 많다 하더라도 내 자체는 철석같은 신념을 가지고 모든 반대의 환경을 짓밟고 그 날을 맞이한 것이 1960년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차원이 달라져 가지고 한 고개를 넘어간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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