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 생애노정
제4절 흥남에서 부산까지 자유남하 1. 평양 귀환 10일 165 2. 평양 체류 40일 170 3. 평양에서 서울까지180 4. 서울 1주간 체류 후 부산으로 192 1. 평양 귀환 10일 1950.10.14. ~ 24. 재출발의 결의 30세 하게 되면 상당히 젊을 때입니다. 그때로 말하면, 선생님도 지금과 비교하면 상당히 청년시대였는데, 그때에 감옥에서 나오면서 다시 결심한 것이 뭐냐 하면 재출발이었다구요, 재출발. 아무리 어려움이 북한 땅에서 있었다 하더라도 그곳에서의 모든 어려움을 잊고, 그 어려었던 사실이 내가 가는 길 앞에 손해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제2의 출발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자극제로 역사노정에 남을 것을 각오하면서 재출발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길을 통해서라도 뜻의 길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될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에, 감옥에서 나온 30대 젊은이의 몸 가운데는 새로이 출발한다는 결의가 강했다구요. 선생님이 옥중에서 출감한 후는 실체로 부활한 입장과 같으므로 원리를 그대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네명의 옥중제자와 문정빈 씨 내가 감옥을 나오게 될 때 나를 붙들고 통곡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내가 이북에서 감옥을 나올 때에 네 사람이나 자기 부모와 처자식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오는 일도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문가가 하나 있었어요. 그래 문가 중에 가인이 하나 생긴 셈이 됐다구요. 이 사람(문정빈)은 함흥 도청해서 과장하던 사람이예요. 도 과장하던 사람이 부하가 잘못해 가지고 걸려든 거예요. 나와 한 감방에 있었는데 영계에서의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선생님과 인연된 사람이예요. 흥남에서 평양으로 나올 때 내 뒤, 선생님 뒤를 따라 나왔다구요. 그 양반은 자기 여편네도 있고 아들도 둘이 있는데 내가 감옥에 있을 때부터 면회 오면서 내가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래, 내가 나와서 평양으로 가야 되는데 바쁜 길을 가다 그 집 앞으로 지나가게 되어서 그 집에 들어가 인사나 하고 가려고 들어가서 인사하고 작별하고 나오는데 그가 뛰쳐나와 가지고 나를 따라오는 거예요. 그래, '왜 왔니?' 그러니,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여편네와 자식하고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며 따라오는 거예요. 누더기 수의 보따리 내가 흥남감옥에서 3년, 2년 10개월 정도 있었지만, 선생님이 그때 노동하면서 입던 옷, 옷 중에 와이샤쓰, 런닝샤쓰, 팬티... .이런 건 전부 다 면이었어요. 유산 암모니아 비료공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면에 유산이나 암모니아 산이 묻으면... . 면은 산에 약하다구요. 그래 잡아 당기면 전부 다 찢어져요. 오래 입다 보니 구멍이 뚫어지고, 썩고... . 그건 거지 중에 상거지라구요. 뭐 냄새가 나고 거 형편없는 거예요. 잡아 당기면, 비비면 전부 다 가루가 되는 거예요. 이것을 버릴 수 없으니 전부 이불 속에 빽빽이 집어넣은 거예요. 그리고 자게 될 때 그걸 떡 펴 놓고 잠을 자는 거예요. 3년 동안 그러한 누더기 보따리를 이불솜을 빼내고 대신 전부 집어넣은 거라구요. 나올 때 가지고 나올 재산이라는 것이 뭐 있겠어요? 함흥서부터 평양까지 10일간을 그걸 지고 갔다구요. 그래 가지고 그걸 올때 어떤 식구한테 맡기면서 '당신이 뭐 비단 저고리 차마 다 버리고 양단 이불 다 버리더라도 이것만은 틀림없이 나에게 갖다 줘야 돼요' 했는데 그걸 먼저 버리고 자기네들 것…. 그걸 잃어버렸다구요. 만약에 그 재료가 지금 있으면 선생님이 뭐 설명이 필요 없다구요.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재료라구요. 응변을 해 가지고 감동을 시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재료를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지금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구요. 어디 가서 찾아요? 사 올 수 있어요? 없다구요.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이러한 뜻을 중심삼고 공적인 생활을 할 때에 한 조각의 종이 짜박지, 그저 신문 쪼가리라도 아까워서 그거 다 철해 놓는 거예요. 먹을 것이 없어서 시래기 짜박지를 먹으면서도 그걸 사진 찍어 가지고 남겨두고…. 더더우기나 아들딸에게 골수적인 전통을 말없이 교육할 수 있는 거라구요. 북한의 전쟁준비 확인 50년대에 흥남감옥에서 나오면서 잘 봤어요. 우린 그런 면에 관심이 많거든요. 다리를 어떻게 놓았느냐 하면, 벌써 연장할 수 있게끔 해 놓고 다리를 놓았더라구요. 2차선 정도로 말이예요. 2차선, 고속도로처럼 그렇게 군사도로를 만들어 놓았어요. 이북은 시멘트가 많으니까 콘크리트로 이렇게 두껍게 했더라구요. 관심이 있어서 파 보니까 말이예요. 탱크가 지나가도 깨지지 않게 해 놓았더라 이거예요. 교량 같은 것도 30톤 탱크가 이동해도 관계 없게끔 전부 다 놓았더라 이거예요. 흥남에서 나오는 길은 동해안에서는 중요한 간선이 될 수 있는 도로인데 벌써 군사도로로 그렇게 준비를 했다는 거지요. 그걸 보고, 이건 남한 침공을 위해 계획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부를 세우면서 소련 극동정책에 의해 KGB의 배후의 사주를 받아 가지고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흥남에서 나는 비료 같은 것을 전부 어디로 가져 가느냐 하면 소련으로 가져갑니다. 비료하고 무기하고 바꾸는 거예요. 그 무기는 소련에서는 10년, 20년 지난 것들이예요. 그걸 전부 바꿔 오는 거라구요, 싸니까. 그래 가지고 삼팔선에 배치되고, 남한 침공을 위하여 훈련하는 데에 소모됩니다. 고급 군장비는 필요 없거든요. 그러니까 싼 군사 중장비를 준비해 나온 거라구요. 그런데 무엇 갖고 중장비를 준비해 나왔느냐 하면 비료입니다. 그래서 흥남 비료공장의 비료를 전부 다 소련으로 보내는 거예요. 하루에 몇 차씩 실어 나릅니다. 그것이 전부 무기가 돼 가지고 와서 삼팔선에 배치되는 거예요. 그걸 내 다 알고 있었다구요. 그러니까 그들은 대이동할 수 있는 군사도로를 확장해야 했었다구요. 그걸 50년대에 이미... . 흥남에서 평양까지 나오는데, 아스팔트가 없으니 시멘트 콘크리트로 교량을 놓고, 도로공사를 전부 필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언제든지 확장할 수 있는 계획이 다 되어 있다 이거예요. 2. 평양 체류 40일 1950.10.24. ~ 12.4. 고향을 두고 식구수습 선생님은 동해안에 있는 흥남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선생님은 서해안 지방의 평양까지 걸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이전 추종자들 모두에게 선생님이 돌아왔다는 것을 알리는 사람들을 보냈으나, 대부분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몇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평양에 나와서 40일 동안 있었는데 거기에서 280리만 가면 나의 고향입니다. 이틀이면 고향에 갔다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에 있는 부모 형제들은 찾아 가지 않고 뜻을 대했던 사람들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했던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 것입니다. 그때에 고향에 못 간 것은 내가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따르던 식구들이 전부 어느 처소에 널려 있는지 긍금해서, 기억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을 수습해 가지고 다 통고하고 나서 고향에 가야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게 하늘을 따라가는 정도라는 거예요. 나를 믿는다고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맹세했기 때문에, 나한테 떨어진다고 보고도 안 했고 통고도 안 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스승된 책임이 있다는 거예요. 하늘이 아직까지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이상, 그 사람을 직접 만나 가지고 그 사람이 박대할 때는 하늘도 역시 그를 포기하지만 그 전까지는 스승으로서 맹세한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흩어진 모든 식구들을 찾았습니다. 내가 직접 못 가면 원필이를 시켜서 만나고 이러다 보니 고향에 갈 새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일주일 헤매도 못찾은 사람이 있어요. 그 자체는 배반했더라도 그 후손은 구원해야 할 운명이 남아있기 때문에 배반자들을 분간해서 청산하지 못하는 하늘의 운명이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40일이 다 지나갔어요. 하나님이 돌아서라 하실 때까지 내가 흥남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매달 찾아와서 울고불고 하던 어머니를 이북에 두고 찾아가지를 못했어요. 평양에서 따르던 식구들을 찾아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80세 이상 된 노인까지 찾아가서 죽었다는 소식을 알고야 가려니 늦은 거예요. 뜻 가운데 맺어진 동지들 식구들을 규합하기 위해서, 찾아오기 위해서 늙은 사람으로부터 젊은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생각나는 모든 사람들을 전부 방문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 가지고, 한 번 가니 문전에서 배반하고 두 번가니 문전에서 배반하고 세번까지…. 말하자면 전부 후퇴할 12월이구만요. 12월 2일까지 해질녘까지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나로서는 하나님이 돌아서라 하는 지시가 있을 때까지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되는 거라구요. 버릴 수 없는 거예요. 거기에 내가 할 책임을 다했다 이거예요. 심정의 이념을 들고 나와 가지고, 심정에 상처를 받은 내 가슴속에 심어졌던 모든 상처를 전부 다 뽑아서 놓고 새로운 심정을 하나님 앞에 연결시킬 수 있다는 자신을 찾아 가지고 비로소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에 평양을 떠난 거예요. 지도자는 이렇게 신중하게 책임을 지는 거예요. 사지사판에서도 하나님이 맡겨 준 바의 책임분야를 끝맺고, 거기서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 놓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이 막혀 버린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때에 인연되었던 사람을 전부 다 해결지어 놓고 내가 하늘땅 앞에 그들의 선조나 그들의 후손이나, 금세에나 내세에 있어서 그들의 조상도 동정하고 그들의 후손도 동정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는 거예요. 그런 걸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자리를 닦아놓고 나온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뒤돌아봐도 조금도 양심에 걸리지 않아요. 복중교 방문 내가 북한에서 나오면서 그 허호빈씨 어머니를 만났어요. 그 할머니가 전부 다 교단을 이끌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한번 찾아가서 처음 만났었다구요. 벌써 그 계시를 받고, 내가 가니까 경창리에 있는 선생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계시를 받고 그 따르던 사람들이 전부 흰 옷을 입고 맞아 주더라구요. 그때라도 내가 말한 대로 완전히 했으면 선생님이 고생을 안해요. 그 단체가 컸었거든요, 거 신령한 단체가. 그 사람들은 벌써 다년간 준비를 해 왔기 때문에 주님이 와서 뭘 할까를 알아 가지고 일사천리로 차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주교로부터, 복중교로부터 새 예수교가 한 계통인데 이것이 나만 환영했다면 문제없이 하나되는 거예요. 어떻게? 원리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편편히 되어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해요. 무슨 의미인지 해석할 수가 없다구요. 반대한 목사들의 결말 선생님이 이북 공산세계에 들어갔을 때, 기성교회 목사 80여명이 전부 다 통일교회 문 아무개를 잡아죽이자고 서명 날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문선생이 죽게 되어서 개운하다고 하면서 앉아 있었지만, 선생님이 죽긴 왜 죽어요? 결국은 선생님을 죽이겠다고 모의하던 그 사람들이 전부 다 죽고 없더라는 것입니다. 공산당들이 다 죽였던 것입니다. 죽이려고 감옥에 잡아 넣았던 사람은 살아 나오고 살겠다고 나를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매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들고 사연을 풀고 그 원수들을 친히 사랑했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하려고 알아봤더니 모두다 흔적도 없이 죽고 없었던 것입니다. 평양에서 나를 감옥에 집어넣은 사람이 남이라는 목사인데 이름은 모른다구요. 그 목사의 자식들까지 다 죽었습니다. 그런 놀음을 봤어요. 그것을 하늘이 다 청산한 거라구요. 그렇다고 '너 벌받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후 손이 남았거들랑 '하늘이여! 부디 이제는 손을 떼시고 이제부터 이 나머지 후손에게도 나로 말미암아 복을 인계하시옵소서' 해야돼요. 그게 의인들이 가는 길이요, 그게 하나님이 가는 걸음이라는 걸 여러분이 알아야 돼요. 뜻을 등진 식구들 선생님이 지금까지 뜻길을 걸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부정했습니다. 평양에서부터 지금까지 걸어 나오는 가운데 하늘 앞에 맹세했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내가 모두 손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다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누가 이런 맹세를 했고, 그 사람이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것도 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저 흥남감옥에 들어갈 때 말이예요, 따르는 여자들도 많았다구요. 선생님을 위해서는 천상에서 죽거들랑 또 재림부활해 가지고, 회생해 가지고 몇 대를 살더라도 선생님을 위해서 소원성취를 할 여성이라고, 꽃이라면 백합화가 되고 꽃이라면 장미꽃이지 호박꽃이 아니라고, 얼마나…. 어떤 사람은 하는 말이 '백두산 천지의 반석을 갈아 가지고 감자를 심어서 선생님을 봉양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 선생님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하더니 웬걸, '죽음길을 가야 되겠다' 할 때는 '어, 생각을 좀더 해봅시다' 믿을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구요. 선생님 앞에 말이예요., 배반한 여자들이 많아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배반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느냐 이거예요. 아담 해와도 배반하고, 천사도 배반하고, 지금까지 배반의 역사를 엮어 나왔지마는 절대적 사랑을 가지고 주장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원수를 못 갚는다구요, 원수를. '하나님은 왜 그렇게 기다리고 있소?' 이렇게 물으면 '그걸 수가 없다' 한다구요. 절대적 사랑을 했기 때문에 원수를 못 갚고 기다리고 있다구요. 목을 이렇게 빼고 '두고 봐야지, 난 기다리고 간다' 하는 거예요. 절대적 사랑을 가지고 기다리는 거예요. 하늘이 얼마나 불쌍하고, 하늘이 얼마나 비참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얼마나 참고 얼마나 비참했느냐 이거예요. 평양시대를 대표하는 네 식구 선생님은 이북에서 여자 세사람(지승도, 옥세현, 정달옥)과 남자 한사람(김원필)을 복귀했습니다. 이러한 기대가 없으면 복귀섭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3대 기준에 걸쳐서 여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그 3대권의 여자의 형을 복귀할 수 없다면 진정한 부부를 겸한 자녀를, 가인과 아벨로서 일체가 된 자녀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탕감적인 여자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선생님도 그러한 내용을 정하고 북한에 갔었고 가서 구해 온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세 여자들을 데리고 나온 것은 3시대의 여자들이 잘못한 것을 탕감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원필이가 20세 전에 선생님을 모셨다는 것은 지극히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공산권 가인 세계를 대표한 가인의 입장이기 때문에 선생님에 대해 절대 복종해야 되는 거예요. 여기에는 이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도 원필이가 전부 다 뒷바라지 한 거예요. 김백문 씨의 자리에 있는 한 사람을 복귀시키기 위한 조건들을 세우기 위해 선생님을 따르던 멤버들의 수는 선생님이 감옥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이 돌아왔을 때에도 똑같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그 김씨의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김원필이 었습니다. 또한 거기에 세 여인도 있었습니다. 한 남자와 세 여인에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이 김백문 씨 집단에서 복귀하기를 원했던 네 사람을 복귀시킨 셈이 되었습니다. 이북의 원수들에게 가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북에 가서 사위기대를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투쟁하여 얻은 그 모든 기반을 중심삼고, 그 아들딸을 중심삼고 복귀의 터전을 넓혀 나왔습니다. 원리적 견지로 보면, 그러지 않고는 새로운 출발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옥중제자 네 사람을 대표한 박정화(朴正華)씨 그래서 선생님을 따르는 네 사람이 생기게 되었고, 선생님을 감옥에서부터 따르던 네 사람이 있었는데, 선생님이 월남할 때 그들 중의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수의 사람을 복귀하였기 때문에 남한에서 영적인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통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그후의 섭리는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나올 때 네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평양에 와 가지고 자기 고향에 다녀오라고 전부 다 보냈어요. 아무날 몇 시까지 오라 했는데 잠깐 날짜를 놓침으로 말미암아, 후퇴 바람에 전부 다 따라 나오지 못했어요. 그래서 맨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김옥에서 같이 있다가 먼저 나온 다리 부러진 박정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리가 부러져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의 형제가 전부 이남으로 내려가면서 내버려 두고 가서 누워 있는 판인데, 그 집에는 그 한 사람하고 집 지키는 세퍼트 밖에 없었습니다. 그 집을 찾아가서 다리 부러진 사람을 자전거에 싣고 내려오던 생각이 잊혀지질 않는다구요. 그리고 내가 이북에서 나올 때, 평양에 있다가 나올 때 어머니한테 사람을 보내 가지고 나오라고 했는데, 그때 원필이 어머니하고…. 그런데 서로 갈리게 되었지만, 자식의 도리로서, 북한실정이 장구화할 수 있는 무엇이 있었기 때문에 보내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래, 가다가 잡혔든 뭐했든 어떻게 돼 가지고…. 그래 할 수 없이 그 문정빈이라는 사람을 원필이 어머니 데리러 보냈다구요. 그런데 걸어가더라도 하루 이틀이면 돌아왔을 것인데 안 돌아온다 이거예요. 그래 사태는 점점점 불리해져 가지고 완전히 포위되겠기에 안 되겠으니 할 수 없이 길을 떠났다구요. 그래 가지고 그야말로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치겠다고 따라온 그 문씨라는 사람은 못 나왔다구요. 그 양반들 둘이 살았으면 영계에 가서라도 둘을 데려다가…. 그 남편하고 둘이 살았더라면 축복한 것으로 쳐 줘야 되겠다 하는 생각까지 한 사람이예요. 그런 역사의 배후가 있기 때문에…. 3. 평양에서 서울까지 1950.12.4. ~ 27. 평양 출발 1950.12.4 평양 도성에서 피난을 다 가고 난 후에 내가 출발한 거라구요. 이래 가지고 다리 부러지고 병신 되어 누워 있는 사람을 내가 자전거에 실어 끌고 왔어요. 인민군, 팔로군 중공군 옆에, 30리 뒤로 떨어져서 맨 나중에 나왔다구요. 나는 죽더라도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나는 약속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북한을 떠날 때는 1950년 겨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1951년에 남해안에 있는 부산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때 12월이면 서른 두 살인가, 서른 한 살인가요? 12월 4일에 떠나던 때가 서른 한 살 이었어요. 오버를 말이지요. 이북에서 가지고 온 오바, 옛날에 중학교 시절에 있던 오바를…. 피난 나올 때야 뭐 옷이 어디 있어야지요. 그래 그걸 입고, 단추가 이렇게 쭉 달린 거예요. 그 오버를 입고 있는데, 이놈의 팔이 참 짧았으면 좋겠더라구요. 춥거든요. 그래서 소매에다가 팔을 이렇게 하고는 거리에도 다녔어요. 그렇게 쓱 다니면 다들 쳐다봐요. 거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거기에서, 그런 자리에 있어서도 `오늘 날 수 많은 사람들은 이런 도탄 중에서 하늘을 원망하고 자기 일 개인의 일생을 원망 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평양에서 청단으로 뒤에서는 중공군이 따라오는데 데리고 가는 사람은 다리가 부러졌고, 버리고 갈 수 없는 사정이 있고, 데리고 가려니 앞길은 막혔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은 전부 다 군사 물자로 가득하고 길은 이중 삼중으로 막혔습니다. 나보다 큰 사람을 데리고 내려오는데 업고 올 수 없어서 자전거에 태우고 오려니 큰일이었습니다. 가자니 갈 수 없고 죽자니 죽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도 죽기를 각오하고 갔습니다. 피난민 중에서 제일 고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에 찾아왔던 환란 가운데 제일 고생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면, 통일 교회 문선생을 빼놓고는 못 준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마음을 먹고 갔습니다. 도로는 군수물자와 차량이 후퇴하는 데 사용되고 민간인이 사용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은 소로가 아니면 논바닥이라는 거예요. 거기로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래서 도중에서 박정화는 선생을 사랑한다고 이러다가는 같이 죽겠으니 자살하려고 하다가 나한테 들켜서 기합받고 그런 놀음도 있었습니다. 지름길을 택해 깊은 산 속의 시골길을 지나온 거예요. 그곳을 걸어서 왔다구요. 모두 하나님이 지도해 주시고, 쭉 지켜 주신 거예요. 피난길의 취사 그 때의 일화가 아주 많습니다. 이렇게 나오다 보니 제일 문제가 뭐냐 하면 밥해 먹는 것입니다, 밥. 짐을 지고 쌀까지 지고 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때는 도둑질을 하는 거예요 . 다 피난 간 집들을 뒤지는 거예요. 우리가 뒤지지 않아도 중공군이 와서 뒤져 갈 테니까. 그래 저녁 일찍 근처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일 아침 밥을 하려고 가서 쌀을 구하는데 집집마다 쌀이 있습니다. 내가 쌀 가져 올 때에는 처음 보이는 쌀을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쌀을 고르고 다니다가는 진짜 도둑놈이 된다는 거예요. 또 하늘 땅이 볼 때, ‘야, 이 녀석들은 남의 쌀을 갖다 먹어도 뭣이 있는 녀석들이다’ 하여 동정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쌀 독을 열어서 거기에 좁쌀이든 강냉이든 처음 본 것을 가져 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걸 내놓고 다른 것을 가져오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집을 딱 들어가면 쌀 독,쌀 독, 쌀 독 하면서 찾고 다닌다구요. 밥을 하게 되면 언제나 듬뿍 하지만, 양재기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피난살이 하는데 살림하는 것처럼 덜거덩 덜거덩 하게 돼 있겠어요? 젓가락은 어디를 가든지 나무를 꺾어서 하면 되기 때문에 양재기 하나만 가지고 다니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밥을 해 놓고 언제든지 셋이 둘러 앉으면 사실, 궁상이 상팔자입니다 . 그리워할 줄 아는 그 팔자. 예수님이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 것은 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배에서 꼬르륵 하니, 그 궁상에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는 거예요. 먹는 것이 보리개떡이라도 상감마마의 진수성찬 보다 더 그리운 것입니다. 맛 없는 것이 없는 거예요. 밥 숟가락 먼저 놓기 통일교회의 문선생은 지금까지의 생활철학이 나중에 먹기 시작하고 먼저 숟가락을 놓는다는 것입니다. 숟가락을 들 때는 나중에 들고, 놓을 때는 제일 먼저 놓아야 된다는 거예요. 또, 먹을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이 있어도 제일 나쁜 것에 먼저 젓가락을 대는 거라구요. 피난통에서도 그랬다구요. 따라오는 사람들을 위해 배고프더라도 번번이 숟가락을 내가 먼저 놓은 거예요. 선생님하고 셋이서 피난을 하는데 말이예요. 피난가는 사람 전부 다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밥만 해 놓으면 그저 전부 다 먹고 싶은 거예요. 전부 다 배고프다구요. 자 그런데 '선생님보다 내가 숟가락을 먼저 한번 놓아야 할 텐데 하고 밥을 먹다 보면 언제나 번번이 선생님이 먼저 숟가락을 놓으니 못 이기겠더라' 하는 말을 들어 봤다구요. 먹던 밥을 놔 두고 누가 먼저 숟가락을 놓느냐? 먼저 숟가락을 놓는 사람이 그 자리를 주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숟가락을 먼저 놓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거예요. 용매도 15리 갯벌길 왕복 이북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삼팔선을 넘게 될 때, '틀림없이 삼팔선쪽에 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고 생각했습니다. 정세를 볼 때 말이예요. 가만히 영적으로 생각해 보니까 사태가 불리하다는 거예요. 마음이 자꾸 이남으로 넘어가려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것을 여러분은 모르지만 선생님에게는 뭐 있다구요. 그리하여 딱 접경지대에 왔는데 파수대, 경비대들이, 아랫방에는 경비대원들이 있고 우리는 윗방에 있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하루저녁 넘어가려다 못 넘어가고, 이틀 저녁 못 넘어가고, 사홀만에 보따리 싸 가지고 도망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 때에는 재치가 있어야 되고 눈치가 빨라야 된다구요. 그런 때는 보따리를 싸더라도 먼저 싸야 됩니다. 아 이래 가지고 용매도(龍媒島)에 가서 제일 먼저 배를 탔는데 떼거리들이 몰려와서 아우성이 벌어지게 되니까, 어떻게 됐느냐 하면, 군경의 가족이 아니면 끌어내는 거라구요. 이런 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쫓겨나야지 별수 있어요? 용매도에 갈 때의 제일 기수가 결국은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환경에 몰려서 그렇게 되었지 틀림없이 선두로 이남에 나을 뻔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용매도를 통해서 이남 나갈 배를 탔다가, 그때도 경찰관들이 전부 다 후퇴하는 바람에 뭐뭐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타겠어요? 그래가지고 용매도로 갔다가 배가 없어서 다시 나온 거예요. 다시 나와 가지고 삼팔선을 넘어 나온 것입니다. 그때 용매도를 가기 위해 갯물길을 건널 때, 이 길을 못 가면 하늘이 망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쓰러지면 아버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가봐요. 못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향토 방위군의 검문 검색 피난 나오면서 여러 가지 사정이 많았다구요. 원필이는 방한모, 생일날 쓰는 마고자인가 그걸 쓰고 추우니까 이걸 이렇게 딱 접어 넣고 내 뒤에 따라오니 나는 남자 같고 말이예요, 여편네로 생각하는 거예요. 얼굴도 그렇고 말하는 것을 봐도 여자 음성이거든요. 그때는 수염도 안 났다구요. 어데 가나 남복을 했지만 그렇게 하고 오니까 여자로 알아요. 가는 데마다 매번, 조사받을 때는 언제나 불알을 조사받는 거예요. 왜 웃어요? 다 아는 것을. 그래야 실감이 나지. '일어나서 옷 벗어!' 몇 번을 그랬다구요. 여자 같거든요. 딱 여자 같다구요. 그런 일화가 많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에 들어와 가지고…. 여러분은 모르지만 역사적 배후에 있어서 섭리의 내용과 맞는 일치된 점이 있기 때문에 원필이를 내가 지금까지 데리고 있는 거예요. 그건 영계에서만이 아는 거예요. 몽시받고 준비한 식사 환대 출옥한 후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나그네였습니다. 평양에서 남한까지의 약 3개월간은 걸식을 하였습니다. 묵묵히…. 어떤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먹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방랑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오늘 먹을 것이 없으니 뭐라도 주십사' 하는 기도는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을 위로하고 잠을 자곤 했습니다. 어떤 때는 '내일은 틀림없이 어떤 어여쁜 부인이 길가에서 무엇인가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음날에 틀림없이 생각했던 그대로 새하얀 옷을 입은 부인이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어젯밤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드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움을 준 부락에는 때가 오면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때의 선생님 심정을 느끼게 된다면 여러분은 눈물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선생님과 하나님이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던 슬픔은 지상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 깊고 깊은 하나님에게 향한 심정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온통 세포가 저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한 밤중 강행군으로 임진강까지 이렇게 여러 가지 문제를 겪으면서 나왔는데, 저녁때가 됐는데 그 피난 나온 사람들이 걸어가다가 지친 거예요. 피곤하기가 한이 없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동네 들어가 자려고 했던 거예요. 그러나 선생님은 밤을 새워서라도 임진강을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예요. 남들은 다 들어가 자는데 선생님이 가자니까 '선생님 고집이 뭐 저래!' 이럴 거 아니예요? 사무룩해 가지고…. 밤에 남들은 전부 다 자는데 우리 셋이서만 자전거를 끌고 임진강까지 나왔다구요. 임진강 강가에 와서 잤습니다. 한 시 반인가 두 시쯤, 새로 두 시 그때에 도착했거든요. 삼팔선에서 청단까지 80리 길입니다. 그 길을 달밤에 가는데, 그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단한지 이 사람(김원필)은 보따리를 메고 가면서도 조는 거예요. 모르는 사람은 그렇다구요. 그러나 선생님은 한 발자국이 바쁜 거예요. 오늘 저녁 중으로 임진강 턱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그런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는 선생님이 비상 작전, 비상 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안테나를 최고로 뽑아 보는 거라구요. 거기에 집 한 채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발짝만 가면 이남이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별의별 냄새가 났지만 그곳이 복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위급한 때 한 걸음만 옮겨놓으면 선생님은 이남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서울로 그 다음에 걱정이 뭐냐 하면, 임진강을 건너가려면 물이 얼어야 할 텐데…. 그때 날씨가 추워져서 임진강이 얼어 버렸어요. 이래가지고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가지고 나섰던 거예요. 임진강이 얼어붙어서 결국 강을 건너갔는데 내가 맨 마직막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후부터는 커트예요. 커트해 가지고 전부 다 돌려보내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남한 땅에 왔어요. 유엔군이 철수하면서 우리 일행을 마지막으로 막아 버렸습니다. 그 뒤 사람들은 전부 뒤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럴 때 1분만 서성댔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나요? 사람 팔자 시간 문제가 아니라구요. 아예 망쳐 버리는 거라구요. 그런 일들이 우리 인생살이에도 많이 벌어지는데 천도를 가려 가는 길 앞에 없겠느냐 이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하냐 이거예요! 그걸 여러분들은 모른다구요. 그때 한 고개만 넘으면 살 길이 있다면 악착같이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내몰아야 되겠어요? 안 가겠다고 하면 들이쳐야 합니다. 멱살을 잡고 억지로라도 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삼팔선 기도 나는 삼팔선을 넘을 때 기도하던 말을 잊지 않는다구요. '아버지! 저는 이남 땅으로 갑니다. 저는 이북에 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패자의 서러움을 지닌 채 옥중의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쫓김받는 무리의 걸음을 따라 이남으로 갑니다. 갔다가 또 이 길을 찾아와야 될 것을 제가 알기 때문에, 삼팔 이북을 제가 못 가더들랑 제 사상을 심어서 후손이 가게 할 것이고, 그들이 못 가거들랑, 저를 따르는 제자들을 보내 가지고…. 그런 결심을 하고 나온 사람이라구요. 십년 세월을 하루같이 지금까지 싸워나왔다구요. 내가 하늘 앞에 맹세하고 나선 걸음은 여러분과 다르다는 거라구요. 두 손을 모아 삼팔선의 흙을 담고 '반드시 이 손으로 공산당을 소화하고, 몇년 후에 돌아오겠다' 고 결의했습니다. 내 손으로 자유세계를 수습해 가지고, 자유세계를 규합해 가지고 북한을 해방하겠다고 기도한 날이 엊그제 같아요. 삼팔선을 양발로 타고서서 울며 '남북을 내 손으로 통일하겠습니다' 하고 맹세했어요. 눈물을 머금고 기도하던 것은 같이 오던 사람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슬픔을 남기고 부모 형제를…. 나를 위해서 정성을 들이던 고향에 있는 어머니 아버지를 뒤에 두고 떠나 오면서 이 불효자식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다려 달라고, 죽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하고 떠나온 것을 내가 잊지 않고 있다구요. 4. 서울 1주간 체류 후 부산으로 1950.12.27. ~ 1951.1.3. ==> 1.27. 병역 소집 신검 1950.12.31.,서울 비원 앞 그때 내가 이북에서 나올 때 머리를 깎고 나왔어요. 나와서 서울 들어오는데 창경원이 있다구요. 거기에 젊은 군인들이 있어요. 그게 해병대 같아요, 지금 알고 보니까. 젊은 놈이 오는 사람들을 갈라 세워요.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조그만한 녀석은 이리 가라 하고 말이예요, 그렇지 않으면 저리 가라 하고. 나는 감옥에서 갓 나왔지만 이렇게 뚱뚱하고 그래도 말라깽이 같지 않거든요. 이래 가지고 병역조사를 했는데 말이예요, 머리를 깎았다고'어디서 왔소?' 하는 거예요. 머리를 깎았으면 군대에 있다 나왔을 텐데 말이예요, 군대의 도망병이 아니면…. 그래서 의심하는 거예요. '어디서 왔소? 도망병이 아니야?' 해요. 요즘에야 도망병이란 걸 알지 그때야 알게 뭐예요? '어디서 오긴 어디서 와? 이북에서 왔지' 하니까 '이북?' 하는 거예요. 머리를 깎았으니 간첩... . 그때는 한창 피난갈 때 간첩인지 군인인지 막 섞여 다녀도 모르거든요. 간첩 아니냐 하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 간첩을 집어 넣으면 자기 모가지 달아나겠거든. 그러니까 조사하고 나서 뭐냐 하면 병종(丙種)이예요. 낙제 도장을 딱 찍어 줬다구요. 그래서 그거 가지고 만사형통이지, 어디 가든지. 증명서는 그것밖에 없다구요. 그 표가 병종이지만 어디 가든 모든 것이 통과되더라구요. 그 후에 주민등록 해 가지고 살고 있다가 문제가 생겨 가지고 감옥(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어요. '아이구 병역 기피했네. 병종이래?' 하며 별의별 것 얼마나 조사해 봤겠어요, 이거 걸기 위해서. 병종은 내가 도적질해서 병종인가요? 주어서 병종이지요. 이러니 걸 수가 있어요? 이래 가지고 요사스러운 소문이 다 나 가지고 만 석달 만인가? 석달 만이구만(1955.7.4 ~ 10.4). 무죄석방하는 거예요. 이불 팔아 떡 해먹기 경북 점촌 농가 어떤 집에 들어가 보니 전부 다 피난 나간 것 같았어요. 들어가니까 할머니 하고 아주머니 두 분이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인데 1월이 되었기 때문에 뭐 좀 춥더라도 그렇게 얼어 죽을 형편이 아니고, 이게 짐이 되니 팔려고 합니다. 이거 이래도 솜도 좋고 이불도 괜찮은 겁니다. 새까맣기는 하지만 근본은 괜찮은 것이니까, 쌀하고 바꿉시다' 하니까 쌀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러면 벼하고 바꿉시다' 그래서 그때 벼 두 말하고 바꿨어요. 부산까지 가려면 이불 보따리가 짐이 되기 때문에 전부 팔아 가지고 벼 한 가마니 하고 바꿨어요. 그때는 쌀이 어디 있어요? 쌀이 없으니까 벼와 바꾸어 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발로 밟아 찧았던 것입니다. 그때 함께 내려온 사람들과 실컷 한번 먹어 보자 했지요. 그걸 모두 떡을 해 가지고 셋이 앉아서 다 먹었어요. 한 그릇 정도 남겨서 주인 아주머니에게도 주었어요. 하도 먹질 못했기에 그렇게 해서 실컷 먹은 것입니다. 벌써 이렇게 한 것이 석 달 가까이 되잖아요. 석 달이 넘었거든요. 석 달 동안 피난생활 하면서 이 솜바지 저고리 입고 나온 것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답겠나? 별수 없는 거예요. 거기 좀 있다가 부산에 가야 되겠다 이거예요. 영천(永川)에서 찢은 편지 1951.1.18.,경북 영천 철길둑 내가 미국에 가면서 여러분에게 1월 18일이 무슨 날인가를 기도해서 알아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그날이 선생님에게는 가장 슬펐던 날입니다. 그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내가 정성을 들여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그들과 약속을 한 날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생님을 저버렸을지라도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다는 사실을 중심삼고 만장(萬丈)의 편지를 써서 세 번씩이나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편지를 갖다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되돌려 보낸 것입니다. 선생님은 되돌려받은 그 편지를 가지고 이북에서 나왔습니다. 경북 영천에 들어가 보면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에서 1월 18일에 그 편지를 읽으면서 찢어 버렸습니다. 그 영천이라는 말이 아주 재미있는 말이예요. 그런 것을 여러분은 모를것입니다. 거기에 열차가 건너가는 둑이 있었는데, 그 둑이 앉아서 지난날을 생각하며 편지를 찢으면서 결심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런 무엇이 있어야 돼요. 말은 안하지만 그 목표, 그 표제를 중심삼고 원수를 내 손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그 날을 위해서 밤이나 낮에나 투입해야 합니다. 밤은 매일 찾아오고 낮도 매일 찾아오지만, 승리의 날을 못 맞을 때, 그는 패배자로 역사와 더불어 가버리는 것입니다. 그 편지를 아마 20장은 썼을 거예요. 새로운 프로가 페이지를 넘기고 전환된 때입니다. 그건 여러분이 모르는 거예요,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그런 미지의 사연들이 많이 묻혀 있는 걸 알아야 돼요. 미리 준비한 식사환대 경북 월성 건천 내가 맨 처음에 부산에 내려올 때 피난민으로서 피난 보따리를 지고, 괴나리봇짐을 지고 평양에서부터 걸어 나왔습니다. 함흥서부터 걸어 나오는 데에 한 오십 칠 일이 걸렸어요. 이래가지고 밥도 얻어먹고 그러면서 다니는데 말이지요, 재미있는 것이 하늘은 참 잘 알더라구요. 배가 고프고 정 지치게 된다면 쓰윽 벌써 알거든요? '아무날, 내일 모레쯤 닭이 생길 것이다' 생각하게 되면 어느 아주머니가 나오더니 '오셨습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래 '누구세요? 난 모르는데요' 하면 '아닌 게 아니라 간밤에 우리 몇 대조 할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신다고 닭잡고 떡 해 놓으라고 해서 떡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그 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십니까?' 물으니 '보기에 초라한 행인으로 온다' 고 해서 보니까 선생님의 얼굴과 흡사하다는 거예요. 그거 믿어져요? 그래 가지고 떡도 얻어먹고, 닭도 얻어먹고 그런 일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이남에서 들은 첫 노래 경북 경주 그 다음에는 내가 이남 땅에 와서, 내 앞에서 노래할 사람이 누구냐? 그런 것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경주에 와서 말이예요, 머슴아가 나오더니 그 녀석이 공장에 있는 녀석인데 그놈의 머슴아가…. 노래 한번 하라 그랬더니, 이남 땅에서 노래 처음 듣게 노래 한번 하라고 그랬더니 그 노래하던 생각이 나요. 첫번째 들은 노래가 뭣이냐 하면 말이예요, 한번 할까요? 여러분들 좋아할까봐 싫어요. 부산에 가는 데는 차 길이 있지요. 거기서는 이제 차가 멎는 정거장이 경주에 있다는 거예요. 그때 경주까지 한 두어 정거장 남았다고 해서 '걷자' 해 가지고…. 화차에 편승하여 부산까지 1951.1.27.,경남 울산역 그다음엔 별것 없는 거예요, 뭐 기관차고 객차고 짐차고 뭐 타고 보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짐차가 있더라 이거예요. 타는거예요. 타는 데는 어디에 타느냐? 맨 앞에 대가리에 가서 타는 거예요. 앞 대가리 가서 운전수하고 싸움을 하게 되면 밀려나더라도 뒷간에는 타는 거예요. 자, 신세를 안 질 테니까, 짐 실을 때는 내가 필요할 테니까 기관수 옆에 좀 태워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떼거리를 쓰는 거예요. 그다음엔 차 맨 밤바가 있거든요, 기관차. 거기에 올라가 앉는 거라구요. 이렇게 해서 쭉 남한으로…. 경주를 거쳐 부산까지 오는데 한 2개월쯤 걸려 도착했어요. 여기가 어디든가요? 부산 무슨 동인가, 여기가? 초량, 초량 1동이라는 여기에 옛날에는 부산진역이 있었지요. 여기 옛날 생각이 난다구요. 지금으로 말하면 옛날이 되겠습니다. 1951년도, 그때 내가 여기 도착한 것이 1월 27일이었습니다. 초량역에 내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선생님이 몇 살 때인가, 서른 하나지. 상당히 젊었을 때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