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흥남감옥 수난 1948.2.22. ~ 1950.10.14. 1. 평양에서 3개월 수난과 흥남 이송 107 2. 흥남 비료공장에서의 강제노동 125 3. 참혹한 굶주림과 헐벗음 127 4. 수용소 수형생활 138 5. 옥중 제자 전도 149 6. 한국동란 발발과 흥남감옥 출감 155 1. 평양에서 3개월 수난과 흥남 이송 1948.2.22. ~ 5.20. 평양 내무서 구속 1948.2.22. 일요일. 10:00 선생님이 교회운동을 하자 식구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북한 정부의 정책은 모든 종교를 말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성교회 목사들은 그들 교회의 많은 신도들이 선생님에게로 왔기 때문에 선생님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세번째로 투옥되었습니다. 그날이 1948년 2월 22일이었습니다. 남한의 스파이로 몰려 이승만 정권의 앞집이니 뭐니 하면서 별의별 말, 있는 말 없는 말 전부 뒤집어 씌웠다구요. '이북 정권을 욕심 부려 가지고 전부 다 약탈하기 위한 첩자다' 하는 등 별의별 짓을 다 한 거예요. 선생님은 그때 감옥에 들어가던 날 팔에 쇠고랑을 차면서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세계적 광야로 쫓겨난 거예요. 4천 3백년 역사를 43년에 재탕감해야 하는 이 고달프고 억울한 사실…. 나라와 세계의 판도를, 하나님이 6천년간 수고해서 남긴 공적을 다 잃고 흥남수용소를 찾아간 선생님의 비통한 사연을 여러분은 몰라요. 하늘땅의 미래의 소망으로서 해방의 민족이 나를 환영하려 했던 그 무리가 구름속 지옥으로 꺼져 가서 암혹세계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통곡하면서 다시 만나자고 소리를 지르던 것이 엊그제 같습니다. '너희들은 꺼져 갔지만 나는 다시 내 갈 길을 가서 광명한 아침 해를 안고 너희들을 찾아가서 다시 해방을 주겠다!' 고 선언한 것이 엊그제 같아요. 쇠고랑을 차고 소리를 지르던 그 소리를 잊어버리지 않았어요. 어려울 적마다 기도하던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삭발 1948.2.25 기성교단의 질시와 공산당국의 종교말살 정책에 따라 2월 22일에는 선생님이 내무서에 구금되었고, 2월 25일에는 머리를 깎였습니다. 내 머리를 깎아 치우던 이 아무개라는 사람과 그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른 머리가 깎여 떨어지던그 감옥에서의 일을 잊지 못합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머리를 깎이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내가 원해서 머리를 깎는 것이 아니라 원수의 손에 끌려와 강제로 머리를 깎이는 것이라고…. 그때 선생님의 눈빛이 얼마나 빛났는지 모릅니다. 떨어져 내리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내가 원하던 행복을 버리면서, 더욱이 원수 앞에서 머리를 깎이는 것이 서러웠습니다. 복귀의 사연을 엮어가는 노정에서는 그 모든 역경이 한스러운 것입니다. 가혹한 고문 취조 나는 피를 토하는 고문의 자리에서 몇 번씩 쓰러지고 모든 의식을 잃어버리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나 좀 구해 주소' 하고 기도 안 했어요. '아버지, 걱정마소.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아직까지 안 죽었습니다. 당신에게 약속한 절개를, 책임해야 할 사명이 아직까지 내게 있습니다. 동정받을 때가 아닙니다.' 이런 기도를 했다구요. 내가 효자가 되어 위로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피를 머금고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고문당하고 들어와서는 달 없는 밤에도 하늘을 위로하던 옛날의 생활을 잊지 않았어요. 고문을 받아 쓰러지는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순간이요, 숨이 끊어질락 말락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이 진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이 진리가 나오기까지는 여러분이 모르는 깊은 배후가 있고, 골짜기가 있고, 굴을 통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야! 레버런 문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이럴 수 있는 자리였다 하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구요. 내가 매를 맞는 것은 나를 위해 맞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맞는 것이요, 내가 흘리는 눈물은 이 민족의 아픔을 대신한 탕감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사탄을 대해 가지고 '이놈!' 하며, 사탄편에 있는 실체의 사탄권을 대해서 '이놈의 세계야, 쳐라! 쳐라! 만일에 때가 되거든 내가 이 7배 이상을 너희들에게 퍼부을 것이다. 그 좋은 재료를 수습하는 자리다' 하며, 고문대에 올라가더라도 '쳐라!' 하는 것입니다. 옷을 벗으면 이 길을 나서 가지고 생긴 흉터가 여러 군데 있다구요. 그걸 바라볼 때, 이 흉터는 인류와 하늘이 나에게 준 훈장이라 생각한다구요. 너, 그때에 결의 하던 것을, 너 죽을 때까지 생명을 걸고 가겠다고 하던 그 맹세를 잊어버렸느냐 이거예요. 그걸 볼 때마다, 아침, 점심, 저녁 그걸 바라보면서 맹세를 하는 놀음을 한다는 거예요. '이 흠집을 가진 너는 승리해야 돼!' 하고 승리하라고 격려한다는 거예요. 법정 공판 1948.4.7. 이북에 있을 때 재판받을 날이 원래는 4월 3일이었는데, 공산당이 교회를 탄압할 구실을 만들다 보니 기일이 늦어서 4월 7일에야 받았습니다. 이날이 구금된 후 만 40일 되는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기독교에 몰리는 입장에서 공판받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공산당원들에게 종교가 얼마나 악하고 아편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 공판을 연기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북에서 공판정에 서게 되었을 때, 이북에 있는 아무개 아무개 목사들이 와 가지고 별의별 욕을 다 했습니다. 그러한, 남이 알지 못하고 남이 느끼지 못한 충격을 아직까지 잊어버리지 않았다구요. 형무소에 가서 공판날 법정에 서는 그 기분, 나는 일생동안 그 기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공판정에 가 가지고 자기의 한 마디가 운명을 결정한다 할 때는 비장하다구요. 공산당까지 비웃고 하던 것 내가 이야기 안 한다구요. 내 역사는 너희들이 힐난하는 힐난으로써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다 이거예요. 말없이 가지만 한때에 너희들이 내 손아귀에서 인류의 힐난을 받을 때가 올 것이라고 한 것이 엊그제 같다구요. 공산주의에 대해 요만한 미련도 못 갖게 하기 위한 하늘의 작전이었고, 공산권 내에 있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못 두게 하는 하나님의 작전이었다 이거예요. 일체를 부정시키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식구들의 전송 공판정에서 판결을 받아 가지고 형무소로 가는 길에서도 식구들 앞에 이걸 소리를 내면서 흔들었는데 그 소리가 쟁쟁하다구요. 수갑 차 가지고 짤랑짤랑하면서 굿바이하던 것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구요, 짤랑짤랑하던 소리가. 거기서 역사적인 후대의 영화가 생겨나고, 후대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결의를 다짐할 수 있는 맹세의 터전으로써 폭발된다는 거예요. 오늘의 슬픔보다도 내일의 소망의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더 강하거늘, 오늘에 억울한 것 보다도 내일의 희망이 벅차오르는 그 가슴이 더 크거늘…. 아무리 포악한 원수가 내손에 쇠고랑을 채우더라도 그 쇠고랑을 차고 사랑하는 교회와 사랑하는 식구들을 대하여 '잘있거라' 하던 그 말씀 가운데는 역사를 대하여 심판할 수 있는 팻말이 박혀지는 순간이 이었음을 생각할 때... . 그걸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더라 이거예요. 사나이로서 한번 더 닦아야 할 그 길을 의기당당하게 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 본연의 가치로서 그런 길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가는 그 사나이 앞에 옥중이 무슨 문제뇨, 죽음길이 무슨 문제냐는 거예요. 그때 평양에 남은 식구들이 손을 흔들면서 전송하던 것이 잊혀지지 않아요. 나는 눈물을 안 흘리는데 그들은 전부…. 자식이 죽어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남편이 떠나는 것도 아닌데, 그저 훌쩍훌쩍 눈물을 떨구는 것을 볼 때, 그 얼마나 비장해요. 선생님은 그걸 보면서 하늘을 찾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붙들려 갈 때 애절하던 그때의 음성, 몸부림치던 그 정경을 암만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게 고통이예요. 생각하자면 일면에서는 고통이예요, 고통. 평양형무소 수감 1948.4.7. ~ 5.20. 선생님이 4월 7일에 쇠고랑을 차고 평양형무소에 갔는데 소망 가운데 찾아갔다구요. 이 과정을 거쳐 나가는 날에는 어떻게 될 것이냐? 참으로 궁금하다는 거예요. 형을 받고 감옥으로 갈 때는 오히려 희망에 찬 발걸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형무소에도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사람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또, 내 한 고비를 메우기 위한 것이, 올 것이 왔구만. 이 후엔 무엇이 올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 사건보다도 그 후에 무엇이 올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선생님이 감옥 같은 데 들어가게 되면 감방장하고 친하는 데 선수였습니다. 몇 마디만 얘기하면 금방 친해졌습니다. 그리고 떡 앉아 가지고 거기 들어온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리를 분석해서 '아 이 사람은 얼굴이 이렇게 생겼으니 이렇게 될 것이고, 저 사람은 얼굴이 저렇게 생겼으니 어떻게 되겠다'고 이야기 하면 싫어하면서도 인정합니다. 얼굴을 봐 가면서 그저 한 일주일, 아니 한 사흘만 얘기하게 되면 그저 무슨 얘기해도 좋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맨 꼴래미 저 좁은 데 앉아 있으면 자꾸 끌어올려요. 감방장이 올라오라고 한다구요. 싫다 해도 자꾸 끌어올리는 거예요. 누구든지 친구하고 누구든지 동무한다구요. 옥중에 가서 얘기 하게 되면 일년 열두 달 동안 장편소설을 얼마든지 엮어 낼 수 있다구요. 피리 소리가 들려오면 그 소리에 내 곡조를 맞추고, 그러면 그 환경이 전부 다 같이 놀아나는 거예요. 한마음 한 뜻으로 정성들여 가지고 그런 세계에 딱 밧줄을 매어 놓고 왕래해야 천하에 자기 이름을 남기는 사나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 주모자의 면회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원수가 사과하러 면회 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만나 주느냐 안 만나 주느냐 하는 것은 하나의 시험이었습니다. 선생님을 감옥소에 집어 넣은 주모자가 있었어요. 나를 감옥에 넣기 위해 선두적 역할을 한 그 녀석이 떡 나타났다 이거예요. 척 대할 때 기분이 나빴다구요. 하지만 시치미를 딱 뗐습니다. ‘누구신지 나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랬습니다 그 사람 눈을 보니 옛날에는 고약 했는데, 그 눈이 다 풀어지고 제법 사람 꼴을 쓰고 나타났더라구요. 그래가지고 지난 일을 다 흘려 버리고 찾아온 걸 나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가 한 일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갈 때 먹을 것을 사 주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먹느냐 안 먹느냐?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감옥 같은 데서는 먹을 것이 참 귀합니다. 그것을 점심 때 받아 가지고 저녁 때까지 안 먹고 심각하게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의 원칙을 발견하지 않고는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가지고 나누어 먹은 생각이 납니다. 더욱이 그는 공산당 간부라구요. 거기에서는 보안대라고 하지만, 간수들 앞에 창피당할 것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그래도 장래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심각히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원수지간이지만, 그 심정적 인연을 남긴 사람이 되게 될 때는, 역사에 다시 만날 수 있고 다시 살 수 있다 하는 것을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자신도그 감옥에서 외로운 적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 외로운 자리에 있을 때 와서 위로해 주고 간 사실이 언제나 잊혀지지 않습니다. 흥남 본궁 특별노무자수용소로 이송 1948.5.20. 15:00 경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전 5월 20일이 생각납니다. 이 날은 어떤 날이냐 하면, 평양 내무서에 잡혀가서 재판을 받고 흥남 감옥으로 이송되어 간 날입니다. 매 맞고 억울하고 분해서 울다가 자기 스스로 하늘 생각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고, 자세를 가리는 때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가게 될 때는 살인수하고 수갑을 채워 달라고 했어요. 내가 살인수의 친구가 되었어요. 흥남으로 쇠고랑을 차고 가는데 열일곱 시간이 걸렸다 이거예요. 그런데 찻간에서 무슨 생각을 했느냐? 기가 찬 것입니다. 내가 기가 차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냐 이거예요. 그러니 결심 하고 창가를 바라보며, 모든 산야의 배경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심각했겠어요. 나 혼자 밖에는 없다 이거예요. 혼자 가면 도망가기 쉬운데, 그 때 제일 나쁜 강도 하고 둘이 조를 짜가지고 쇠고랑을 차고 가면서 생각하던 것이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흥남 감옥으로 이송되어 갈 때, 산골짜기에 접어들어 개울길을 따라 걷던 그때가 참으로 새롭게 느껴진다는 거예요. 굽이굽이 산골짜기의 길을 걸어가던 그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걸음은 새로운 세계를 향해 출발했던 걸음이었습니다. 감옥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 어렵지만 나는 간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새로운 자아를 각성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으로 들어갈 때 선생님은 사탄 세계에서 하나님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결과를 가져 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곳에 가더라도 정체를 밝히지 않고 안팎으로 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 흥남 비료공장에서의 강제노동 흥남 덕리 특별노무자수용소 투옥 1948.6.21. ~ 1950.10.14. 6월 21일, 이날은 옛날에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갔던 날이라구요. 1948년…. 선생님은 북한 공산당의 감옥에 들어가서 2년 8개월 동안 중노동을 했습니다. 무슨 노동이었냐면, 비료공장의 일이었습니다. 소비에트 혁명 후 많은 러시아인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공산주의 이론은 그들 앞에 어떠한 유산계급이나 반 공산주의 분자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모두 반대자들을 죽이고 싶어하지만, 세계 여론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은 그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으로 그들이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북한에서 감옥에 있을 때, 선생님은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경험을 본받아서 모든 죄수들을 3년 동안 힘든 노동에 동원했고, 그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아침 신검과 10리 길 도보 출역 아침에 출역하게 되면 감방에서 전부 나오는 거예요. 마당에 나와 가지고 전부 다 불법 소지품이 있지 않나 해 가지 점검 하는 거예요. 검신하는 거예요. 이래 가지고 아홉 시에 작업이 시작되면 십리 길 가는데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20분이 걸린 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고 하면 두 시간 이상 걸립니다. 그러니 출역하게 되면 보통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가지고 아홉 시 작업에 닿게끔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이제 나가서 척 앉으면 말이에요. 아주 머리가 빙빙 도는 거라구요. 머리가 빙빙 돌고 일어서려면 일어설 수가 없는 거예요. 두 시간씩이나 신검을 받을 때는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당했습니다. 차라리 일터에 나가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모릅니다. 흥남은 바다 바람이 불면 자개돌이 날아오는 곳입니다. 쏘아 들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원수인지…. 자기도 모르게 워워워 떠는 것입니다. 암만 소리내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되는 거예요.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음, 더 추워라, 더 추워라, 더 추워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걸 극복하기 위한 싸움을 한 거라구요. 매일 아침 감옥을 떠날 때 손에 손을 잡고 네 줄로 서야 하고 옆에는 소총과 권총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이 있습니다. 만일 느슨해지거나 손을 잡지 않은 것이 발견 된다면 탈출하려는 것으로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머리를 똑바로 쳐들 수 없었습니다. 또 아침 먹고 나가는 데도 가면서 자꾸 헛다리가 디뎌집니다. 4 킬로미터를 걸어가는데 다리가 다섯 번 여섯 번, 어떤 때는 열 번 이상도 헛다리가 디뎌집니다. 기운이 없어 그래요, 기운이. 그 다리를 끌고 가서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어려울 때는 언제나 그걸 생각합니다. 그럴 때, 정신이 아득할 때 나는 하늘의 사람이라는 명제를 세워 놓고 끝까지 넘어갔어요.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 강제 노역 09:00~17:00 우리가 일하던 공장이 흥남 비료공장이었습니다. 그 비료공장에 가면 암모니아가 컨베이어를 통해서 내려와 산같이 쌓입니다. 이것이 뜨거운 것인데 시간이 많이 지나면 굳어 가지고 얼음과 같이 굳어집니다. 컨베이어를 통해서 큰 광장 복판에 쌓이는데 그 모습이 딱 폭포 같아요. 폭포수가 떨어지는 것처럼 하얀 게 쭉 떨어지는 겁니다. 이게 높이가 한 20미터 돼요. 그런 비료 산이 있는데 그걸 퍼담는 겁니다. 큰 광장에 800명이 나가고 900명이 나가서 하는데 대게 큰 산을 둘로 갈라 놓은 것 같아요. 참으로 힘든 중노동이었습니다. 한 조에 하루 책임량은 천 삼백 가마니로서 8시간 이내에 끝내지 않으면 식량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 조가 열명인데 열명의 책임량이 40킬로짜리 천 삼백 가마니를 담아야 합니다. 골무를 끼지만 가마니를 묶다 보면 구멍이 다 뚫어져 빠져 버린다구요. 하루 책임량이 한 사람 앞에 130개라면 이건 중노동입니다. 일반 사회 사람은 70개 80개도 못 하는데 배의 기준으로 하라니 그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항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련 배에 싣는 것입니다. 몇만톤씩 싣는데 그걸 매일 계산해서 해야 합니다. 몸은 유산에 해를 입습니다. 머리가 빠지고 피부를 짜보면 물이 나옵니다. 6개월이 지나면 반드시 각혈을 합니다. 대게 폐병이라고 생각하고 낙담하기 때문에 죽어버립니다. 기껏 1년 반이나 2년밖에 견디지 못 합니다. 살이 전부 다 갈라져 가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피가 나는 거예요. 그래도 매일같이 암모니아 비료를 날랐다구요. 보통 면 제복은 일주일 이내에 다 뭉개지는 거예요. 목면 같으면 말이예요. 그런데서 반 년만 일을 하게 되면 세포가 전부 다 죽어서 짜면 물이 난다구요. 아침에는 피가 뚝뚝 흐르고, 그렇게 전부 다 갈라진다구요. 하루에 점심때 되기 전까지 중간에 15분 쉬고, 그다음 점심때에 한 시간 쉬고, 그다음에 오후 중간에 15분 쉬어요. 이렇게 해서 한 시간 반 정도 쉬는 시간이 있는데, 점심 때가 되게 되면 전부 해체해서 자기 반끼리 밥을 먹습니다. 변소는 어떠냐 하면 그런 큰 공장에서는 구덩이에 시멘트를 쭉 해놓고 홈을 파 가지고 바닥에 폐수가 나가는 구멍을 뚫어 놓은 거예요. 그래 가지고 변소로 쓰는 겁니다. 그러나 현장에 가서 똥을 싸게 된다면 할 수 없이 암모니아 비료더미 산에 삽으로 푹 파고 거기에 주저 앉아 가지고 싼다구요. 그게 아무래도 비료가 되니까, 집어넣는 거예요. 턱 주저앉아 가지고 대포 쏘듯이 싸는 거예요. 푸다다닥! 그거 오래 할 수 없다구요. 그렇게 갈긴다 이겁니다. 전심전력을 투입한 작업 선생님은 흥남 감옥에서 비료가마니를 묶어 내면서 그곳이 최후의 전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동하는 가운데서도 노동 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치 않습니다. 노동시간이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러한 일을 하려고 태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항상 선생님은 마치 선생님이 복귀 섭리를 하는 것처럼 모든 심정과 모든 성의를 그 일에 쏟았습니다. 선생님은 작업하는 동안에 항상 선생님이 영계에서 경험했던 것을 생각했고, 훗날 선생님의 후손들과 선생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영화에서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은 휴식 시간이라는 벨이 울려도 못 들었습니다. ‘생님은 뭐 철근 같은 사나이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구요. 내가 손을 대는 일은 참 기뻐서 하는 거예요. 누구보다도 좋아서 한다구요. 그것이 앞설 뿐이지 딴 것 없다구요. 결국은 뚫고 나간 거예요. 아무리 어려운 감옥이라도 뚫고 나가야 돼요. 나는 여기서 죽더라도 너는 지지않고 이기고 죽었다 하는 그런 세상을 남겨야 된다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때 체중은 19관 3백이었습니다. 다른 수인들은 모두 야위어 가는데 ,선생님은 야위질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두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 3년 가까이 있으면서도 단 한 번 학질을 알아본 것 외에는 병이라곤 몰랐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무리 아파도 약을 먹기는커녕 금식까지 하면서 일을 했습니다. 그때에 학질을 열 두 죽을 앓았으나 조금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힘든 일을 피하겠다는 사람은 그 일에 견디지 못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 자청 감옥에서의 생활은 아무리 괴롭다고 하더라도 남에게서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절정에 설 수 있는 방책입니다. 남들로부터 혜택을 받는 것은 탕감의 길에서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자마자 어느 누구도 못하는 제일 어려운 일을 내가 책임진다고 한 것이 첫 결의 였어요. 책임을 지는 데 있어서는 몇 배까지 책임진다, 벌써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비료 산더미를 자꾸 파들어가기 때문에, 멀리서 그것을 저울 있는 데까지 옮겨 놓으려면 시간내에 책임을 못 한다구요. 한 4미터 정도 파들어가 가지고 저울에 한번 올리려면 5분 이상 걸리기 때문에 냉큼 못 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누가 들어가서 저리로 던져야 되는데 그 힘든 것을 누가 하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그걸 책임졌다구요. 그 중에 30%는 내가 했어요. 제일 어려운 일을 하면서 반원들을 수습해 가지고 다섯 시에 끝나는 것을 언제든지 열두 시 반에 끝내는 것입니다. 1천 3백 가마니 책임량에 합격만 되면 그 다음엔 노는 것입니다. 12시까지 끝내고 점심 먹고 쉬게 될 때의 그 쾌감이라는 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우리같은 사람은 거기에 있어서 챔피언이 되다 보니까 일하는 사람이 모두 내 뒤만 따라 다녔다구요. 감옥에 있어서 구세주가 못 되는 것이 평화 시대의 구세주라고 한다면 그는 가짜 구세주예요. 뭐 ‘옥중의 성자’라고 해서 흥남감옥에 있던 사람이 나에 대해서 쓴 책이 있는 것을 내가 알고 있지만 말이예요. 옥이 나에게는 무서운 곳이못 돼요. 채찍이 제 아무리 무섭고, 그 환경이 제 아무리 모질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흠모하는 마음을 점령 못 했습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을 위하는 향심을 꺽어 내지 못 했어요. 그 힘을 중심삼고 나는 종적인 단계를 해방할 수 있는 터전을 공고히 닦은 것입니다 맨살 감추기 흥남 감옥에 들어가 비료 공장에서 일할 때 그렇게 더운 오뉴월 중에도 대님을 매고 했습니다. 정강이도 내놓지 않았습니다. 내 몸을 통해서 땀을 흘려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할 거룩한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데서는 누구한테도 이 몸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산 하게 되면 알지만 가마에서 찐 것같이 김이 무럭무럭 납니다. 그러니 동짓달에도 옷을 벗고 전부 다 팬티 바람으로 일을 해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한 비료 공장에서 일하면서도 장바지를 입고 일했다구요. 그런 더운 곳에서도 내가 아랫도리를 안 보이게 했습니다. 수절 하는 여인 이상의 그런 훈련을 해 나왔습니다. 내가 아는 본향 집을 향해서, 고향의 전통을 향해서…. 아무리 감옥 자리가 험하더라도 내 갈 길을 막지 못해요. 사탄 세계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그 기준으로 일신을 바치는 것이 아니면, 그것을 지켜 가지 않으면 안되는 남자로서의 정조, 여자만의 정조가 있는 것이 아니예요? 남자도 가졌습니다 모범 노동자상 수상 내가 책임량을 못 해본 적이 없다구요. 그리하여 김옥에 들어 간 사람으로서 소장에게까지 특별대접도 받아 보았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전부 다 우러러 보았다구요. 일하는 사람들이 수십 명도 아닌 8백 명, 1천 명 이상인데 그들이 나 하나를 중심삼고 나를 선정해 가지고 수백 명의 실적을 올릴 수 있는 재료로 삼는 것입니다. 몇 개월후, 선생님은 최고의 노동자로 불리웠습니다. 매일 조원들은 탈출음모를 꾸미지 못하도록 바뀌었습니다. 조가 바뀔 때, 모든 죄수들은 그 최고의 노동자가 있는 곳으로 오기를 바랬습니다. 선생님의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모범 노동자상을 받았습니다. 노동자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것을 갖기도 싫어서 관리도 안 했지만 말이예요. 그것을 내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구요, 전부 다 자기들이 주었지. 공산세계의 감옥에 들어가 가지고 모범 노동자로서 일등이 됐으니 세계 어디에 가도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3. 참혹한 굶주림과 헐벗음 밥을 그리며 죽어가는 수인들 하루에 주는 밥은 작은 공기로 1.7공기 가량입니다. 반찬은 아무것도 없고 국은 된장국이 아닌 소금물입니다. 그것을 먹고 8시간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먹을 것은 적어서 큰 입으로 세 입이면 끝나 버립니다. 국으로 무우잎과 소금을 넣은 물을 줍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돼지 강 건너 간 물이라는 말들이 있는 그런 거예요. 어떤 때는 국이 얼마나 짠지! 그것 다 타게 되면 짜서 못 먹어요. 그래도 죽더라도 그 국을 버리고 싶지 않다구요. 일 안 나가면 밥 반덩이를 줍니다. 밥 반덩이를 덜 받는 그 비참한 것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밥 반덩이 덜 받는 슬픔과 고통을 피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죽게 된 사람도 그 밥덩이 때문에 끌려 나가요. 밥덩이 바라보고서 끌려 나가 사경에서 헤매다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밥 그릇을 받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밥을 입속으로 털어넣습니다. 자기가 먹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밥 그릇을 받는 것을 보고는 자기 밥 그릇이 비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때때로 옆 사람과 싸우기도 합니다. '네가 내 밥을 먹었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밥을 자기 입속에 털어 넣다가 목구멍이 막혀서 바로 죽어버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한 죄수가 그의 밥을 다 먹기 전에 죽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죽은 사람의 입에서 밥알을 꺼내 먹기 위해서 싸웁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젓가락이 남의 밥으로 가는 거라구요. 가다가 주인이 있는 것을 느낄 때의 그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히냐 하는 것은 여러분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침이 껌과 같이 죽 늘어납니다. 미싯가루를 가져오면 그것을 반죽해서 떡을 만듭니다. 돌에 가루가 묻으면 벌써 경쟁적으로 그것을 뜯어 먹습니다. 간유에다가 물을 부어서 먹지만 고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생콩을 먹는데도 얼마나 고소한지 모릅니다. 어쩌다 콩밥을 해주는 날은, 그 콩 한 알이 세상으로 말하면 황금덩어리가 됩니다. 오히려 금보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밥을 먹다가 콩 하나가 떨어지면 옆에서 얼른 집어먹어 치우는 거예요, 인사도 없이. 체면도 없이 말입니다. 밥 한 알, 쌀 한 톨이 떨어지게 되면 서로 주워 먹겠다 하고, 파리가 붙고 뭐 구데기가 붙어도 그런 것은 생각에도 없어요. 그러한 사망의 꼴짜기요, 죽음의 골짜기입니다. 천명이 1년만 지나면 40퍼센트 이상이 죽어갔다구요. 그러니까 매일 장사를 지내는 거예요. 매일 뒷문으로 널 나가는 걸 보아야 된다구요. 3년 내지 4년이면 다 죽는 것입니다. 일을 시켜 먹기 위해서, 기름기가 다 빠질 때까지, 죽을 때까지 일을 시켜 먹기 위해서 그런 정책을 써 나오는 것입니다. 무자비라도, 냉혹한 것에도 한계선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한계선을 넘고 넘었다 이거예요. 명절과 고등어 급식 형무소는 콩밥이 제격입니다. 그 다음에는 잡곡밥일수록 좋다는 거예요. 정월 초하루라든가 오월 초하루라든가 이북에서 지내는 명절이 있는데 그때는 반드시 이밥을 주는 거예요. 그래서 전부 항의, 건의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명절 날도 우리에게는 콩밥 주소' 이러는 거예요. 콩밥은 그래도 깨무는 맛이 있어서 좋고 또 기름기가 있기 때문에 먹으면 끈기가 있어요. 이밥은 먹으면 슬쩍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 제일 싫은 날이 명절날이예요. 또 명절날이 되면 돼지를 잡는다구요. 물론 죄수들을 위해서 준다고 잡지만 고기는 전부 간수들이 다 먹는다구요. 그거 전례인데, 하루는 정월 초하룻날 수퇘지, 불알이라 하는데, 그게 하나가 들어가 있다구요. 그걸 나눠 먹던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구요. 그때 그것이 국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세상의 무엇에도 비교 못하는 거라구요. 그걸 나눠 먹던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다구요. 그러니 얼마나 배가 고팠고, 굶주렸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된다구요. 일년에 두 번, 5월 1일과 정월 초하루에 과일을 줍니다. 그 사과를 나눠 주면 보통 사람들은 주자마자 와작와작 그저 일 분도 못 돼서 다 먹어 버린다구요. 그러나 선생님은 '이 빛이 얼마나 고우냐, 이 빛을 먹자!' 이렇게 생각했다구요. '빛을 먹고 그 다음에 맛을 먹자' 그런 생각을 했다구요. 흥남 앞 바다는 고등어가 많이 잡히는 곳입니다. 한번 잡히게 되면 산더미같이 잡힙니다. 그러면 전부 다 비료를 하는 거라구요. 고등어 철에는 제일 싸니까, 시래기 값보다 더 싸고 무엇보다도 싸니까 트럭을 들이대 가지고 '에헤라 먹고 싶어하는데 실컷 먹으라' 해 가지고 한 트럭 사다가 가마솥에 쪄서 한 바께쓰에 가득 들이미는 거예요. 그런데 일년동안 굶을 대로 굶어가지고 창자는 가늘어질 대로 다 가늘고, 기름기는 다 빠졌는데 거기에 기름기를 갖다 넣으니 소화를 시키겠어요? 소화 못 시키니까 그냥 무사통과라구요. 그러다 보면 앉은 자리 있는데 후지근한 물이 고이고, 어떤 녀석은 이게 응- 해 가지고 갈 데가 없으니까, 이게 올라와요, 이게. 덩어리까지... . 그래서 말이 생겼다구요. '봄이 돌아오면 한 번 해야 된다' 뭐 한다는 거예요? 한번 싸야 된다는 거예요. 밥을 따라간 목사들 선생님이 감옥생활 할 때에 사회적인 명사니 어떤 종교적인 대표자들이니 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 봤지만 그 사람들은 다 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예요. 하여튼 유명한 목사인데 하는 말이 ‘배고픈 그 자리에서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은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항복을 했던가, 거기에서 하나님이 도망을 간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래 감옥살이 하는 가운데서 유물론자가 돼 버린 목사가 있습니다. 어떤 지방에서 유명한 목사가 그의 사위와 함께 감옥에 들어왔는데 그 사위가 학질을 앓게 되었습니다. 이 병은 매일 그 시간만 되면 고열이 나는 병이라구요. 이렇게 깊게 고통받는 사위가 있는데도 그 목사는 학질약을 갖고 있으면서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 약은 제 삼자의 미싯가루와 바꿔 먹었습니다. 그 목사가 지금 살아 있어요. 내가 이름은 안 밝히겠어요. 다이아진 한 알에 미싯가루 한 봉지와 바꾸는 장사를 하는 거에요. 그야말로 밥 목사였습니다. 이 밥목사 떼거리들이 기르고 있는 하늘의 양을 누가 해방시킬 것이냐? 3주간의 절반 식사 선생님이 그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어요? 선생님은 정신력의 중요성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정신적으로 특별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선생님이 먹는 음식의 절반으로도 살 수 있다고 마음에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부터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생님의 음식의 절반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3주 동안 계속 했습니다. 선생님은 절반의 음식을 먹고도 선생님의 작업량을 완수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선생님의 몫의 식사를 모두 먹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의 식사는 절반이고, 다른 절반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훈련을 딱 하고 그다음부터는 뭐 차입 같은 걸 들여주더라도 그걸 먹지 않는다 말이예요. 미싯가루 같은 걸 들여주게 되면 그거 궁하고 굶주렸으니 얼마나 먹고 싶겠나요? 그러나 그것을 탐해서는 안 된단 말이예요. 그걸 바라볼 필요 없어요. 그랬다가는 죽는 거예요. 죽는 거라구요. 그런 걸 먹지 않고 딱 소정의 작정한 규율권 내에서 자기가 지탱할, 자기가 살 길을 개척해 나가야 되는 거예요 모밀 주먹밥 밥을 먹다가도 그 생각을 하면 목이 메서 밥을 못 먹어요.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날이 있습니다. 12월 24일부터 28일까지…. 모밀 있지요? 모밀? 모밀도 3분의 2도 안 갈았어요. 절반밖에 안 갈았다구요. 그런 것을 배급 줘 가지고 그것으로 끼니를 해결 했다구요. 그것을 첫날 먹으니까 살이 붓는 거예요. 배는 고픈데 그것을 먹기 힘드니까 그저 꿀떡꿀떡 삼켜서 전부 다 병이 난 것입니다. 선생님은 그걸 미리 알았다구요. 그래서 그때 모밀을 한 알 한 알 전부 다 까풀을 벗겨 먹었는데 그것이 일생에 잊혀지지 않아요. 밥을 버려서는 안 되겠고, 먹기는 해야 되겠고, 이래가지고 밥 먹는 법을 연구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 밥을 먹고 소화가 안 돼서 설사가 나가지고 고통을 받던 것이 감옥생활에 있어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밀밥 먹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 와서도 척 상을 받으면 ‘아무 때 그랬지, 반찬이 없다고 투정을 할 수 있느냐, 이것도 고맙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밥의 진가 배가 고플 때의 밥 한 알이 얼마나 귀한지 지금도 정신이 번쩍듭니다. 밥 한 알이 그렇게 까지 온 신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대한 무한한 가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 그 밥을 그리워하면서도 그것을 잊으려고애쓰면서 하나님을 더 그리워하고자 눈물을 지었습니다 쌀밥 말고 꽁보리밥, 밀밥도 좋은 거예요. 또 귀리라는 것도 있다구요. 함경도 산골이나 산꼭대기에서 나는 것인데 그런 귀리로 밥을 해서 먹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밥을 먹는 것을 왕좌에서 진수성찬을 먹는 것보다 더 감사한다면 그 사람이…. 거꾸로 되는 거예요. 그리고 나는 지금도 맨 밥을 잘 먹습니다. 맨 밥의 맛을 아는 데는 통일 교회 문 선생이 왕입니다. 소금국을 몇 년동안 마시면서도 눈물로 감사하며 알았다구요. 보리밥을 대할 때에도 선조들이 배 고팠던 걸 생각하면서, 이 밥은 우리 선열, 선조들의 피가 연이어 맺어진 결실인데, 내가 그것을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도시락이 나무통 이라구요. 밥을 먹으려고 나무 꼬챙이로 쑥 이러면 말이예요,찌꺼기가 이렇게 묻어 나와요. 그럴 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위신과 체면을 아는 나지만, 그렇다고 그걸 긁어내고 먹지 않았어요. 그냥 그대로 다 먹는 것입니다. 심각하다구요. 보리 한 알이 우리 선열들의 피의 결정체라고 하게 될 때 심각한 것입니다. 또, 감옥에 있으면 코가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몰라요. 세퍼트는 여기에 사촌도 못 된다구요. 십리 안팎의 동네에서 소 잡아 가지고 소고기 국 끓여 먹고 하는 것을 앉아 가지고 다 안다구요. 세상에서 배울 수 없는 밥의 가치를 배울 수 있는 곳은 감옥밖에 없기 때문에, 감옥이 제일 좋은 겁니다. 배 부를 때는 세계가 큰 줄 알았더니 배가 고파 들어갈 적에는 밥 한 알이 지구 몇 개보다 더 크더라 이거예요. 그건 말만 들어 가지고는 모릅니다. 그런 자리에서 밥의 고개를 넘어서 세계를 붙든다는 것은 참 어려운 거예요. 음식 나눔 자기 가족이라든가 누가 면회 올 적에는 무엇인가 가지고 오니까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도, 그리웠던 어머니라 할지라도 온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기 보다 먼저 가지고 온 물건에 눈이 갑니다, 면회와서 미싯가루를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만큼 슬픈 적은 없습니다. 내가 흥남 감옥에 있을 때에 한 달에 한 번씩 미싯가루를 받아 먹었습니다. 감방에 한 30여 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많이는 나누어 줄 수 없어서 신문지 조각에 한 숟가락씩 퍼 가지고 쭉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렇게 미싯가루를 나누어 주는 날은 잔칫날입니다. 선생님은 그것이 아깝다고 해서 혼자 먹지 않습니다. 절대 혼자서는 안 먹습니다. 미싯가루를 이겨 가지고 밀가루 떡을 만들어서 신문지에 싸서 작업장에 가지고 나갑니다. 점심 때까지 땀을 흘리고 일하기 때문에 미싯가루에 땀이 베었는데도 점심 때 그것을 떼어 먹여주면 눈물을 흘리던…. 그런 생활이 얼마나 귀한 생활이에요? 그런 자리에서 내 밥을 나누어 주고 붙들고 어머니 대신, 형님 대신 친구 되어 주었던 사람이 나예요. 사랑의 옷 감방에 들어가게 되면, 감방은 온돌방이 아닙니다. 오히려 겨울에는 감방이 더 춥다는 거예요. 바깥은 햇빛이 나기 때문에. 이 감방 이라는 곳은 낮에도 춥고 밤에도 추운 곳이에요. 감방에 사는 사람은 양단, 비단 그런 옷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다 집어 던지고 두툼한 포대자루를 먼저 가서 움켜지고 갖겠다고 싸우는 곳이 감옥입니다. 포대자루 말고 가마니짝이라도 좋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감옥에 가면 무엇이든지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옷에 대한 가치를 진짜 알 수 있는 곳이 감옥입니다. 선생님은 항상 가장 낡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좋은 것은 남에게 주고 떨어지면 대나무로 바늘을 만들어 꿰메어 입었습니다. 선생님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식구들에게서 좋은 바지 저고리가 들어오게 되면 제일 불쌍한 사람에게 갖다 입혀 줍니다. 거기에서는 가마니 같은 것을 전부 다 새끼로 묶기 때문에, 손이 전부 갈라집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 손으로 천막기지를 전부 다 푸는 거예요. 천막 지지를 풀어 가지고 옷을 만드는 거라구요. 바지를 떠서 면회 오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거예요. 그 얼마나 품이 들겠어요? 그러면 그들은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바람이 펄펄 불 때 옷이 다 째져서 궁둥이가 보이는 옷을 입고 다녔어도 감옥에 있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 옷을 들고가 그에게 주었어요. 그다음에 빤쯔 같은 것 본뜨는 것도 내가 다 가르쳐 줬다구요. 보자기들이 들어오면 그걸 통째로 접어서 그냥 그대로 본떠 가지고 주일날이면 빤쯔 열개도 만들어 입을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안 먹고 감옥에 있는 사람을 먹여 주려 했고, 나는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안 입고 떠는 사람에게 입혀 주려고 했다구요. 그들에게도 사랑의 줄을 다 달아 놓아야 되기 때문에. 그래야, 고삐를 잡아 가지고 투망처럼 당기게 되면 한때에 다 걸려 들지요. 바늘 하나의 진가 형무소에서 바늘 배급해 줘요? 절대 안 해줍니다. 자체 해결하는 거예요. 바늘이 어디 하나 있다 하면 교섭을 합니다.그래서 어느 감방에 바늘이 하나 생겼다 하면 이건 화제거리가 됩니다. 선생님도 그때 바늘을 보고 이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이 어디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필요하다면 유리를 깨뜨리는 거예요. 매 맞더라도, 기합 받더라도 갈고리 집어넣는 척하다가 비스듬히 던지면 공장 위에 있는 것이 떨어질 수도 있다구요. 그것으로 면도도하고 젓가락도 만들고 했다구요. 거기에는 내가 선생 이라구요. 와이어를 싹 구부려 가지고 그 유리로 가만가만 가만가만 싹 하게 되면 달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훌륭한 바늘이 되는 거예요. 선생님의 앞니에 금이 간 것은 흥남 감옥에 있을 때 바늘을 만들려다가 상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바늘이 그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찾고자 하는 사람도 이렇게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 수용소 수형생활 옥중 기도 절대 사랑입니다. 이것밖에 없다구요. 레버런 문은 공산당이 감옥에 넣고 별의별 놀음을 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끝끝내 사랑했어요. 하나님을 믿되 절대적으로 믿는 거예요. 내가 약속했으면 내가 약속한 것이 절대적이요, 그가 나에게 명령하면 그걸 절대적으로 안다 이거예요. 뭐 어렵고 쉽고 그거 다 문제가 되지 않아요. 감옥에서도 효자는 효자노릇해야 된다구요. 충신은 충신노릇을 감옥에 들어가서도 해야 된다 이거예요. 비가 내리는 처마 끝에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가지고 바위를 뚫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내 사랑의 눈물방울이 하나님의 가슴 속에 엉클어진 한의 바위를 뚫을 수 있으면, 그럴 수 있으면 하면서 그런 물방울을 보면서 통곡한 사정을 여려분은 모를 거예요. 또, 어렵게 될 때는 절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이야기를 안 해요.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나의 최고의 지혜를 다하고 최고의 정성을 들여 가지고 어떻게 이 어려운 환경을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녹여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느냐? 한 것입니다. 이 어려운 심정적 동기를 관련시켜 가지고 하나님이 통곡하게 하고 분함과 원통함에 시무쳐 이것을 들이칠 수 있게하는 놀음을 어떻게 하느냐? 다시 말하면 원수의 적진을 격파시킬 수 있는 심정의 폭발력을 어떻게 자극하느냐? 그런 면을 생각했다는 거예요. 어이구, 내가 빨리 나가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선생님은 흥남 감옥에서 3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지만, 그 가운데서도 몇몇 식구들을 위한 기도는 밥 먹을 때부터 잠잘 때까지 매번 안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설령 떨어져 나간 사람일지라도 그를 위하여 계속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영적으로 선생님을 찾아와서 떨어져 나간 것을 처량하게 눈물을 흘리며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약하여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인사를 하며 떠나는 그 비참한 정경은 동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것입니다.그렇게 떠나갔어도 그 사람을 위해 계속 기도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책임을 다 하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그 계승자가 나올 때까지 기도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 3년 가까이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마음으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해 주었어요. 어떤 때에는 12시간, 혹은 24시간 동안 기도해야 할 문제가 있었어요. 강도 녀석이 있었는데, 한 번은 아침에 세상에서 하던 행동을, 그 놀음을 감방에 들어와서도 하길래 내가 바른말을 했어요. 그 불손한 것을 전후를 따져 가지고 들이 공격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하고 나서는 기도를 해도 기도가 막히고 말이예요. 세상에 그런 지옥이 없다구요. 캄캄한 천지에 하나 있는 촛불마져 꺼지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딱 그거에요. 그래 가지고, 일주일만에 그것을 다시 찾게 될 때의 그 희열, 그것은 천하를 얻어도 그것과 바꿀 수 없다구요. 여러분 그것을 딱 잡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줄! 하나님도 어떻게 할 수 없고, 사탄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갖고 있어야 돼요. 나만이 귀하게 지킬 수 있고, 나만이 귀하게 할 줄 아는 생명력을 여러분은 가져야 됩니다. 변기 옆자리 선생님이 지냈던 방은 36명이 살았어요. 여름에는 거기서 물이 나와요. 거기서 나는 제일 더운데, 제일 냄새나는 밑창에서 지냈어요. 거기서 무엇을 생각하느냐? 추운 겨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겨울의 주인이 될 줄 아는 사람이 여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고, 여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겨울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똥통 옆에 눕더라도 아담 해와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맨땅에다 똥을 쌌지만 나는 독으로 된 똥통을 사용하니 아담 해와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제일 똥통 옆에 가 자기 때문에 설사하는 놈들이 전부 다 화다닥 뿌리니까 말이예요, 전부 다 궁둥이를 들고 쏴 버리니 거기 있다가는 똥바가지 쓰지 별 수 있어요? 그래도 `참 잘 됐구나 내 신세를 빛낼 수 있는, 앞으로 인류 역사를 감 쥘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지금이 아니겠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몸 관리와 잠자리 예법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하늘을 모셔야 할 책임이 있다 이거예요. 지옥에 가더라도 거기에서 천국으로의 길이 빛나야 된다 이거예요. 옥중에서 물을 주면 조그만 종지잔에 3분의 1밖에 안 돼요. 그것이 배당 수예요. 그 물을 안 먹고 수건에 적셔 가지고 반드시 몸을 닦는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말하지 않고, 둘째는 자지 않고, 자다가 새벽에 보면 남이야 자든 말든 반드시 한 15분 전에 먼저 일어나는 거예요. 들키면 큰일 나지요.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말이예요, 들키는 날에는 기합 이라는거예요. 자는 시간을 딱 정해 놓으면 암만 일어나고 싶어서 눈을 뜨고 있더라도 일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이런 감방에 있어서 한 십 분 내지 십오 분 전에 혼자 일어나서 냉수욕을 하는 거예요. 또 운동을 해야 돼요, 운동. 자기의 체력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돼요. 그래, 선생님이 고안한 운동법이 있어요. 상당히 효과가 나는 거예요. 어디에 앉게 될 때는 반드시 성별 하고 앉고 일어서게 될 때는 반드시 성별 하고 일어서고 그랬어요, 더럽히지 않으려고. 혼자 잠을 잘 때도 팔 다리를 벌리고 자지를 않았습니다.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자는데에도 예법이 있는 것입니다.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은 그래도 자유를 주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먹고 자는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3년 가까이 있었지만 낮잠 한번 하지 않았어요. 절대 낮잠을 안 자는 거예요. 소기의 작정한 시간대로…. 작정한 잠, 작정한 음식 외에는 탐내지 않았어요. 그러니 선생님이 자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는 말을 남기고 있는 거예요. 정 졸음이 올 때는 눈이 아질아질하고 막 피곤이 몰려옵니다. 그렇지만 결심을 했으면 그 결심을 지켜야 됩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고 나게 되면 척 눕자마자 하늘이 품어주는 느낌이 듭니다. 아무리 그렇게 추악한 갑방이라도 하늘은 같이 한다는 것입니다. 피곤해서 옷도 못 벗고 쓰러져 자는데 자다가 화장실에 갈 때 눈을 뜨겠어요? 변소에 가려면 어두워서 못 갑니다. 그런데 변소 가는 길이 환하게 보여요. 손이 등불이 되는 거예요. 그런 길이 있는 거예요. 그 세계를 접해야 합니다. 간수들과 감방 수인들 감옥에 들어가 살 때도 아이고, 내가 그릇된 길로 갈까봐 채찍을 든 천사장이 지키고 있으니 감사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타락시켰던 천사장보다도 더 잘못 될까봐 몽둥이를 들고 날 지키는 천사장이 있구만´ 하면서 파수 보고 있는 간수들을 고마운 분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만한 방에 30명에서 35명이 들어가거든요. 거기에는 살인 강도가 없나, 별의별 고질 죄수가 다 없나. 그런 사람들과 살을 비비대 가면서, 어떤 때는 밤에 자다가 둘이 껴안고 자기도 하고 말이에요, 별의별 짓을 다 했지요. 자다가 변소에 가려면 다리를 짓밟지 않나, 다리를 디뎌서 넘어지지를 않나, 별의별 일화가 다 있습니다. 그거 얼마나 계급 차이가평준화 돼 있는지 모른다구요. 밥을 먹는데 똥통을 타고 앉아서 뿌지직 거리지를 않나, 그런데도 불평하지 않고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되고, 또 손목을 잡고 나가서 일피 해야 되고 말이예요. 선생님이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사흘 이내에 전부 다 부하로 만든다구요. 그건 뭐냐 하면, 그것이 작지만 한 사회와 같은데 그러한 세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들어온 사람들의 배후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있어서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을 붙들고 울 수도 있고, 동정할 수도 있고, 심정적으로 자기의 식구와 같은 입장에서 그들을 대할 수도 있는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사형수들 옥중생활이 나에게 슬픔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나에게 둘 도 없는, 제일의 도장이었습니다.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사형수와 코를 맺댈 수 있고 입김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도장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같이 팔을 베고 잠도 자고 그랬어요. 그들은 밤에 자다가도 두 시, 세 시면 그저 공상을 하다가 '유-' 하고 한숨을 쉬는 거예요. 생명의 애착, 생애의 애착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요. 사형수들은 자기 이름만 부르면 얼굴이 막 창백해집니다. 자기 이름을 부르면 한숨을 쉬는 그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이 비참한 것을 내가 여러번 봤다구요.그 이름 부르는 것이 마지막 일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으로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한 번 더 요랬으면 이렇게 안 되었을 걸' 하는 것입니다. 사형수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들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살려만 준다면, 컵에 물을 가득 담아 이마에 얹고 서울을 일주하라 해도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 내가 감옥을 떠나게 될 때에, 부모가 자기에게서 떠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자리를 그들에게 남겨 주고 않고는 복귀의 사명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움직여 나왔습니다. 내가 손을 붙들고 위로해 주던 생각이 나요, 사람이 이 생만 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란 이러한 길에서부터 싹이 난다 하고 얘기 해 주는 거예요. 그립고 반가운 것들 감옥에 가 보면 해방의 한 시간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것입니다. 무기형을 받은 사람에게는 무한한 가치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는 면회 왔다는 말이 참 기쁜 소식입니다. 누가 면회를 왔다 하게 되면 아주 뭐 눈이 번쩍 뜨이는 거라구요. 선생님도 그랬어요. 감옥이라는 곳은 사람이 그리워요. '소곤소곤 얘기 할 수 있는 그것이 얼마나 그리운가. 그런 시간이 나에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기쁠까?' 이렇게 꿈속에서 그리워하고 마음속으로 사모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상상 못할 겁니다. 햇빛은 뭐냐 하면 엿줄과 같아요, 엿줄. 꿀줄이라고 할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좋은 거라구요. 그러니 해를 진짜 알아주는 사람은 감방에 있더라! 왜? 해를 제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감방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리고 집을 쫓겨나 가지고 핍박받는 서러운 자리에 있을 때 '달아 달아 밝은 달라 이태백이 놀던 달라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 하는 그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 .' 라는 노래가 얼마나 그리웠는 줄 알아요? 여름에는 벌레 소리를 듣고 벌레를 부러워했어요. 형무소에 들어가 영어의 몸이 되면 파리가 부러워요, 파리. 철창문을 휙- 날아서 자유로이 출압할 수 있는 파리가 부러워요. 선생님은 그런 세계를 잘 알아요. '하나님이 왜 나에게 그런 길을 걷게 할까? 아! 나에게 그런 사람의 사정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 그러셨구나' 하고 생각하니 고맙게 생각한다구요. 친구가 많아요. 무슨 친구? 이 친구. 그다음엔 벼룩친구,그 다음엔 빈대 친구, 그다음엔 모기 친구, 그다음엔 파리 친구. 이것들을 잡아 놓고는 운동을 시키는 거예요. 그런 것들과 대화하던 것, 그런 것을 전부 다 글로 쓰려고 하면 수백 권의 책으로 낼 수 있다구요. 독보회 공산당 조직에서 제일 핵심 조직으로 돼 있는 것이 형무소 조직입니다. 노동자 수용소, 감옥에다 노동자 수용소라는 명사를 붙이고 있습니다. 거기의 소장이라는 녀석이 매일같이 재소자들이 먹고 입고 사는 입장을 잘 보면서도 그 앞에 나타나서는 '김일성 어버이 수령이 우리를 사랑하시사, 매일같이 이밥을 주고 고기국을 주고 이렇게 잘살게 해주는데 그걸 감사하고 있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묻게 되면 그 재소자는 '예,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하게 돼요. 또, 거기에는 독보회라는 것이 있어서 자아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조직은 단일체제이지만 감시는 단일체제가 아니예요. 거기에 당이 들어와 있습니다. 당이 들어와 있는 동시에 젊은 애들을 내 세워서…. 보안대를 세워 가지고 모든 행정요원을 감시합니다. 그런 것들을 가르치고는 그 강의에 대한 각자의 감상문을 쓰게 합니다. 그들은 그런 보고서들로써 책을만듭니다. 좋은 감상문은 쓴 사람들을 뽑아서 죄수들 앞에서 낭독하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매일 감상문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에 있어서는 할 만큼 하고 있었으니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백지를 냈습니다. 그래서 1등 노동자가 돼야 했던 거예요. 살아 남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도 북한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공산치하 감옥에 있으면서 선생님이 연구한 게 뭐냐 하면 북한의 실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산당의 본질이 어떻다는 걸 잘 아는 사람이라구요. 충모님의 면회 천리 길을 찾아온 어머니를 면전에 놓고 북한 땅의 철창안에서 서릿발 같은 호령을 할 때, 부끄러움으로 '내가 네 에미다' 하며 그저 입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손으로 씻고 돌아서는 어머니를 내가 잊지 못해요. 그때 어머니를 대해 얘기하는 거예요. '나는 김 아무개의 아들이 아니오. 김 아무개의 아들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아들이요, 대한민국의 아들이기 전에 세계의 아들이요, 하늘땅의 아들이오. 그들을 사랑하고 나서 어머니의 말을 듣고 어머니를 사랑해야 할 도리를 압니다. 그런 졸장부의 아들이 아닌 것을 알고 그 아들다운 어머니의 행세를 해주시오. 이게 뭐요?' 하고 공격을 했어요. 함흥으로 가는 길이 여기 용산으로 돌아가는 경원선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경의선을 타고 서울로 와 가지고 경원선으로 갈아타고 가려니 얼마나 오래 걸려요. 한 20시간 차 타고 와야 된다구요. 그래도 아들이라고 그걸 잊지 못해서, 공산당 치하 그 못사는 이북에서 미싯가루 만드느라고 사돈의 팔촌네한테까지 가서 쌀 한 줌씩 빌려다가 아들 살려 주겠다고 열심히 해 가지고 오게 되면 그 자리에서 다 퍼가지고 나누어 주는 거예요. 면회하는 데서 말이예요. 그러니 얼마나기가 차겠어요. 내가 결혼 할 때 입던 명주바지 같은 것 전부 입으라고 갖다 주면 그거 다 나눠 줬습니다. 그러고 나는 다 해져 가지고 다리 살이 다 보이는 관복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내복 같은 것도 다 그랬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눈에서 피눈물이 나지요. 그러니 어머니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나! 문용기라고 있잖아요, 문장로? 그 집에 가서는 네 활개를 펴고 이놈의 자식이, 부모가 이러는데도 그럴 수 있느냐고 통곡을 하곤 했다구요. 내가 그걸 압니다. 다 압니다. 5. 옥중 제자 전도 옥중에 함께하신 하나님 내가 감옥에 있을 때, 그런 어려운 자리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보고 나에게 협조하지 말라고 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협조한 것입니다. 내가 어려운 데서 자신 있게 결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환경적으로 묶어 주는 그런 기반이 있어야 되 때문에, 그걸 만들어 주신 것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감옥에서도, 그보다 더한 깊은 속에 갇힐지라도 거기에는 무한한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고독하고 고독해서 불쌍한 입장,외적으로 보면 누구하나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 입장이지만, 무한한 영계와 무한한 희망의 세계의 모든 주체의 원동력이 자신과 함께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조용한 밤중에도, 혹은 숨이 막히는 그 속에서라도 최후의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에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뼏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가만히 떠오르는 하나님의 지시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일신의 신념에 넘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은 심각한 입장에 서서 무엇이든지 문의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면 어느샌가 벌써 해결의 한계를 넘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한마디 하게 되면 그대로 되기 때문에 감옥에서 선생님이 문제의 인물이 된 것입니다. 가장 심각하고 힘든 장소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은 가장 은밀한 곳입니다. 영계의 역사로 제자 전도 옥중생활에 있어서 예수님이 쫓기고 제자들이 반대했던 입장을 탕감복귀해야 했습니다. 선생님은 그 감옥생활중에서도 영계가 협조하여 12명의 제자를 전도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출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영계는 천사장권이니까, 천사장으로서 그 사명을 하지 못하면 아담의 영광권과 관계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배고플 때에 저 하늘에서 보기가 딱하면 먹을 것을 갖다주는 거라구요. 엘리야에게는 까마귀를 시켜서 먹을 것을 갖다줬지만, 나에게는 사람을 시켰다구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비몽사몽간에 하나님이 나타나 가지고 '너는 아무개가 감방에 있느니 그에게 먹을 것을 갖다 줘라!' 하는 거라구요. 그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나는 밥도 떡도 많이 얻어먹고 물건도 많이 얻어 쓴 사람이예요. 선생님의 수인 번호가 596번, 오구륙 번이었다구요. 어떻게 보면, 억울한 번호라구요. 어떤 사람에게는 꿈에 조상이 나타나서 '몇 호실에 596번, 이러이러한 양반이 있는데 네가 받은 미싯가루를 하나도 손대지 말고 그분한테 갖다 드려라' 하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래도 '이런 허황스러운 꿈 같은 거 뭐' 이러면서 한번 해서 안 들으니까, 두 번, 세 번 하다가 나중에는 목을 조르면서 '이놈아! 할래, 안 할래' 하니까 '예, 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라구요. 그렇게 되어 생님이 말하지 않고 만든 제자가 수십 명 됐습니다. 그러니 말을 해서 제자를 만들었으면 얼마나 많았겠어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박정화니 김원덕이니 하는 24명의 멤버들이 암암리에 옥중에서 천명에 의해서 결속되어 출발한 거예요. 내말이라면 생명을 걸고, 탈옥하자면 탈옥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역시간의 긴밀한 눈인사 거기 집이 몇 채인가 하면 육사(六舍)가 있는데 전부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출역하는 시간이 되면 공산당들의 심한 감시 속에서도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일하러 가기 위해 낭하에 나와 웅성웅성하는데, 물론 거기에 간수들이 총을 들고 지켜 서 있지만 그 간수가 서 있는 바닥으로 기어서 오니까 알 게 뭐예요. 하늘이 택해 만나게 해 준 사람들은 그렇게 기어와서라도 선생님께 먼저 인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아침에, 그들이 감방에서 좁은 복도로 나올 때 그들은 네 줄로 섭니다. 그 복도는 좁은데, 그때 따르는 사람들이 선생님에게 와서 윙크를 하는 것처럼 선생님을 껴안았습니다. 그것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들키는 날에는 총개머리판으로 들이 맞고 독방살이를 1주일 내지 3주일을 해야 되는 거라구요. 도주를 계획한다고 해 가지고…. 세 번만 들키게 되면 형이 가해집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선생님을 만나 인사하고 가는 것을 하루의 영광으로 알고 그런 놀음을 했다는 거예요. 이것이 하루이틀이 아니고 몇 달 동안 이렇게 되니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거라구요. 그래 가지고 내가 진땀을 흘렸다구요. 이래 가지고 서로가 뭐 인사도 서서 하는 게 아니예요. 엎드려 가지고. 그 비극적인 맛, 그거 처량한 것이지만 그때 그 맛은 여러분에게 설명해 가지고 모릅니다. 암만 설명해도 여러분은 모릅니다. 서로 눈총이 엇갈리는 심정적인 정이라는 것은 그 자리 안 가고는 모릅니다. 백과사전 천만 권으로 배워도 모른다구요.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면 '야! 요것들 봐라!' 하시며 빵긋 웃으실 수 있는 장면일지도 모른다구요. 작업장에 감춰온 미싯가루 떡 흥남 형무소에 있을 때, 날 따르던 식구들이 있었다구요. 그 사람들이 미싯가루를 종이에 싸 가지고 여기 땜내나는 사춤에다 넣었다가 선생님하고 나눠 먹겠다고 가지고 오는 거예요. 그것이 어떠한 호화판의 만찬보다도 더 인상적입니다. 살아보니 그것이 일생에 남아요. 그것이 남는 거예요. 모든 인식기관이 거기에 젖어 가야 되고, 거기서 체휼된 느낌을 가지고 영계에 가야 된다 이겁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눈짓을 해서 변소에 간다고 해 가지고 변소 모퉁이에서 '선생님 이것 혼자 먹기 미안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떡을주는 것입니다. `선생님과 점심 때 같이 니누어 먹겠다고 참아 나온 그 해방의 마음을 선생님은 알지 않소?' 하면 '그래, 그래, 나 알고 너 알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신호하는 것이 통신 중의 최고의 통신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백년동안 갈라졌다가 만나는 데 있어서의 신호와 같이 척하면 벌써 다 압니다. 그런 세계를 알아요? 우리 통일교회 교인들은 그런 성의를 가지고 선생님에게 떡 한 짜박지라도 해주려고 생각한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요. 지금도 그 세계가 그리워요. 그런 자리에서 참, 눈물 어린 그런 자리에서 미싯가루 떡을 나눠 먹던 그 인상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세상에서 보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지만 거기에 엉클어진 정기, 거기에 스며 있는 그 힘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거예요. 생일에 미싯가루 가져온 사람 내가 감옥에 있을 때,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생일날이었어요. 감옥은 상당히 살풍경이 감도는 그런 곳입니다. 거기에 평양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내 생일인 것을 알고 자기가 먹다 남은 미싯가루 한 바리를 무뚝히 아침에 주던 것이 일생동안 잊혀지지 않아요. 언젠가는 몇천 배로 갚아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세를 졌으면 반드시 갚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 일생에서 지난날 어떤 옥중, 어떠한 한 때에 그러한 일이 있었으면 그 일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고, 그 일들을 전부 다 내가 잊어 본 적이 없는 거라구요. '이것은 내가 일생에서 갚는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갚아 보지 못한 일이 없다 이거예요. 만일에 그 사람이 없게 되면 몇 배로 딴 사람을 통해서 그런 조건을 걸고 전부 다 갚아 왔다구요. 죽되 빚지고 죽은 무덤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 선생님의 생활철학이라구요. 인생관이다 이겁니다. 6. 한국동란 발발과 흥남감옥 출감 1950.10.14 한국동란 발발 1950.6.25. 하나님의 복귀섭리로 볼 때에, 하나님의 섭리는 끝날이 되면서 구문명을 기필코 아시아에 연결시키기 위해서 몰고 왔던 것입니다. 피와 살과 몸과 마음과 정성과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와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렇게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동란을 중심삼아 가지고 16개국에 해당하는 이국민이 비로소 1950년도에 아시아의 접전지인 한국을 택해 가지고 들어온 거라구요.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곳은 조국인 것입니다.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군으로서 희생한 사람들이 한국동란 참전용사들이었다 이거예요. 한국동란은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조국광복에 피를 흘리기 위한 세계적인 동원이었다 하는 결론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동란 당시에 예수님이 공중에 나타났다는 그런 얘기도 뒷받침해 주는 재료들이예요. 예수님의현현과 더불어 한국동란은 하나님의 성전을 찾기 위한 거룩한 전쟁인 것입니다. 또, 한국은 섭리의 뜻이 있는 나라로서여기에 참부모가 나타나면 이상적 조국이 되기 때문에 조국광복을 위하여 하늘이 모든 민주세계의 기독교 사상을 가진 국가를 동원해서 희생시켰다 이거예요. 싸우게 했다 이거예요. 만일 한국이 통일교회를 받아들였다면 한국동란이 일어났겠느냐? 안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이면 완전히 국가기준을 전부 다 수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7년 노정이면 세계는 완전히 길을 닦을 것입니다. 1950년 6.25동란은 7년 과정에서 벌어진 싸움입니다. 기독교가 받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침투해 가지고 칠 수 있는 기반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두 원수가 생겨났다는 거예요. 그것들이 공산세계와 기독교입니다. 공산세계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공산세계가 한국에 발을 못 붙였더라면 저런 세력을 못 가졌을 것입니다. 그때 내 손에 전부 다 녹아났을 것입니다. 그때 막아더 장군 말대로 했다면(맥아더의 중국 본토공습 주장을 의미) 1952년 6월까지 끝난다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7년만에 끝난다는 것입니다. 한국동란에 트루만 대통령이 유엔군을 투입한 것은 잘했지만, 트루만이 역사적인 실패를 했다는 것입니다. B-29기에 흥남 일대 폭격 1950.8.1. 1950년 8월 1일 백 대 이상의 B-29기가 총공격을 흥남공장을 크게 폭격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직경 12미터 이내는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까운 사람들에게 모두 선생님 주위에 있도록 일렀었습니다. 폭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금후의 이상 세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복귀의 사명을 하는 이러한 사람을 영계에 데리고 가면 하나님에겐 천주적인 손해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방비해 주고 싶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들은 그저 입 다물고 걱정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하는 거예요. 흥남공장을 한바탕 폭격할 때 남들은 죽는다고 야단하는데 나는 그 세계에 들어가 가지고 야…. 죽음의 고개가 문제가 아니라구요. 수인들의 일선 투입 공산당들은 6.25동란이 나자마자 전 일선에 누구를 동원시켰느냐 하면, 수용소에 있는 전 죄수를 전체 동원한 것입니다. 일선에서 총맞아 죽으라고 전부 동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흥남감옥의 천 명 가까운 전체 죄수들에게 120리 길을 행군해 가지고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거예요. 상부에서 우리들을 일선으로 출동시키기 위해서 집합 명령을 했고, 우리는 그 명령을 받고 갔습니다. 그때 한 8백 여명이 흥남에서부터 원산까지, 정평까지…. 원래 기차가 다녔는데 그때는 폭격을 당해서 철로가 끊어졌기 때문에 한 120리 가량을 걸어가야 됐어요. 그때 전체 중에 남아진 재소자들은 얼마 안 됐어요. 한 7, 80명밖에 안 남기고 전부 다 데려간 거예요. 그때 선생님도 끌려갔단 말이예요. 저녁 여덟 시부터 출발해 가지고 밤새껏 가 가지고 새벽을 지나 한 60리, 80리 가량 갔어요. 낮에는 폭격 때문에 걷지 못한다 말이예요. 이래 가지고 기차도 역시 밤 시간을 이용해 가지고 연락하기 위해서 네 시 전에 도착하게끔 이렇게 해놓았어요. 그런데 그 차가, 중앙에서 내려오던 차가 중간에 사고가 생겼어요. 거기에는 할 수 없이 며칠 거기에 정차해 놓고 머무르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상당히 지장이 많단 말이에요. 자기들은 불과 몇명밖에 안 되고 죄수들은 많고 이러니 문제가 생길까봐 되돌아왔단 말이예요. 되돌아와 가지고 사홀 만에 다시 갔는데, 그 8백여명의 죄수들은 전부 다 데리고 갔는데 나 하나 빼놓고 갔다는 거예요. 하나는 빼 가지고, 떨어져 거기에 남아 있어 가지고 쭉 나온 거예요. 유엔군의 흥남 상륙과 극적인 출옥 1950.10.14. 02:00경 최후에 가서는 어떻게 될 것이냐? 반드시 옥문이 열려있다 이거예요. 옥문이 열려가지고 나가야 된다 이겁니다. 국군이 원산을 제일 먼저 탈환했어요. 평양에는 1950년 10월 19일에 입성했어요. 그런데 원산은 10월 15일 새벽이예요. 그러니 날 수로 하면 10월 16일이 되지요. 여기 흥남을 제일 먼저, 북한 지역 가운데서 제일 먼저 탈환했어요. 이랬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가고 다 그랬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온 거라구요. 그것은 하나님이 바쁘게 구해야 할 한 아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10월 12일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 한 70명 정도를 30리 쯤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렸어요. 그 당시 선생님의 형기는 5년이었기 때문에 그다음, 다음날이 내가 끌려갈 차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바쁘셨을 것입니다. 13일 밤거리를 내다보니 벌써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0월 14일 공산군이 물러가자 우리는 감옥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그날 밤 총공격이 있어서 새벽 2시경부터 도망쳤습니다. 나의 경우, 형무소에서 나오려면 판사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 사탄이 해준다는 것입니다. 공판정에서는 검사가 사탄입니다. 사탄의 공인을 받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하기로 되어 있던 모든 것을 완수하였기 때문에 천사장 국가와 유엔군이 북한을 공격해서 선생님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감옥을 나왔습니다. 1950년 10월 14일, 그러니까 선생님의 사형집행 예정일 하루 전날 맥아더 원수의 연합군이 선생님을 그곳으로부터 구출해 주었으니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유엔군이 상륙함으로 말미암아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오게 된 그것이 민주 세계가 혜택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유엔군이 상륙하여 감옥문을 열어가지고 선생님을 구출하게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민주세계가 구원받고 후원받을 수 있는 인연이 남아졌다는 것입니다. 10월달은 통일교회의 해방의 달입니다. 10월 4일(서대문형무소 출감일)이 그렇고, 10월 14일(흥남수용소 출옥일)이 그렇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앞서는 달이예요, 나에게 있어서는. 그 기간에 민족을 다 잃어버렸어요. 내가 사랑하는 가정도 잃어버렸고, 사랑하는 처자까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감옥살이 역사와 전통 선생님이 출감한 날을 여러분 가정에서 기념해요? 선생님이 감옥살이를 통해서 어떤 고역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해야 돼요. 선생님이 생애의 어느때에 무슨 고생하고, 무슨 고생하고, 감옥에 들어간 날이라든가 감옥에서 나온 날이라든지 그런 모든 사실들을 확실히 알아 가지고 일람표에 적어 놓았다가 그런 날들을 기념해야 돼요. 피값을 대신해서 헌금이라도 해 가지고 후대 사람 앞에, 세계 사람 앞에 그것을 뿌려서 먹이겠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를 해야 된다구요. 그게 내가 아는 하늘나라의 전통이예요. 선생님이 세계에 나가서 무엇을 한 그날을 모르고, 기념해야 할 출옥날짜까지 다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고 있다 이거예요. 이북에 들어가 공산당의 법정 앞에 나가 가지고 수모를 당하던, 그런 사실들을 알아요? 감옥에서 무슨 생활을 하는지 알아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성지를 참배하게 해야 됩니다. 4학년 때는 4학년 때 가는 성지를 정해서 반드시 참배해야 되고, 그 다음에 5학년 때는 5학년 때 가는 성지를 정해서 반드시 참배해야 되고, 6학년 때는 6학년 때 가는 성지를 정해서 반드시 참배해야 돼요. 그다음에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도 물론이고 대학교 4학년까지 전부 다 순례의 코스를 정해서 참배해야 되는 거예요. 선생님이 남긴 역사적 전통을 한보 한보 거쳤다는 해방감에 놀라운 자신을 발견할 때, 그 결의와 다짐함이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래서 김일성이한테 우리 고향을 열어 놓으라고 한 것입니다. 흥남은 몇 년 짜리, 우리 본고향은 몇 년 짜리가 수련을 받으면서 참관하고 교육할 수 있는 장소가 될 테니 내놓아라 이거예요. 흥남감옥이 나에게 불행을 갖다주지 않았어요. 통일교회 교리가 퍼지는 세계 도처에 있어서 통일교회 원리말씀을 듣는 젊은이의 가슴에 흥남감옥 생활을 통한 선생님의 생애노정이 새로운 소생의 폭발력을 재발시킬 수 있는 힘이 솟게 하는 역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세계 제일의 형무소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기서 일 년 팔개월 정도, 전부다 그저 죽지 않을 만큼 공식적으로 한번씩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재창조할 수 있고 새로이 재평가를 할 수 있는 곳이 감옥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사람들을 한번씩 처넣어서 공식적인 훈련을 시켜야 세계를 통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 낼 수 있다고 선생님이 생각하는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