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사상 - 제3장 본성론(本性論)
제3장 본성론
( Theory of the Original Human Nature )
본성론(本性론)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 즉 타락하지 않은 본성적(本性的) 인간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이미 원상론과 존재론(存在論)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공산주의 소멸후의 새로운 혼란과, 남북문제(南北問題)를 위시하여 인종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부정부패의 확산,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각종 범죄의 만연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대립과 갈등, 투쟁과 전쟁으로 연결되면서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역사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로 대별(大別)되게 된다. 인간이 안고 있는 이러한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역사 속에 왔다 간 많은 성현(聖賢)들이나 사상가(思想家)들은 ‘현실인간(現實人間)’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막연하게나마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곤 했다.
그들이 바로 종교가((宗敎家)요 철학자(哲學者)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어떻게 해야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추구(追求)해 왔던 것이다.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 인도의 가비라성에서 태어난 석가는 수도(修道)와 고행(苦行)의 생활을 통하여 득도(得道)함으로써 인간은 본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번뇌(煩惱)에 싸여서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수도생활을 통하여 본성(本性)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도 30여 생애동안 인생문제(問題)를 깊이 탐구한 결과 인간은 죄인(罪人)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예수자신)을 믿음으로써 거듭나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유대민족을 향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객지(各地)를 돌면서 가르침을 펴기에 전력(全力)을 다했으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당시의 정치, 종교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폴리스(polis) 사회(社會)의 말기적(末期的)인 혼란상을 직시하다가, 참된 지(知)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생활이라고 하면서 “너 자신(自身)을 알라!”고 외쳤다.
그리고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이성이며 인간의 덕(德)은 폴리스에서의 공동생활(共同生活)에서 실현(實現)된다고 생각하고 인간을 사회적동물(폴리스的 動物)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인간관(人間觀)은 대체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며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활용(活用)하면 인간은 이상적(理想的)인 모습이 된다는 것이었다.
중세시대(中世時代)는 기독교(基督敎)가 서구사회의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때였다. 이 기독교(基督敎)의 인간관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았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구원과 참된 평화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近代에 이르러 다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조가 나타났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으로써만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命題)를 남겼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을 실천이성(實踐理性)이 명하는 도덕적 의무(義務)의 소리(聲)를 따라서 사는 인격적 존재(存在)로 보고, 인간은 유혹(誘惑)이나 욕망(欲望)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설(說)하였다.
헤겔도 역시 인간을 이성적(理性的) 존재(存在)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이성이 세계속에서 자신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이성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헤겔의 논리에 의하면 근대국가(近代國家, 理性國家))의 성립과 더불어 인간과 세계는 합리적(合理的)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의 실제의 인간은 인간다움을 도리어 상실(喪失)한 상태(狀態)에 머물러 있고 세계도 그대로 비합리적(非合理的)인 모습을 지속(持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극단적(極端的)인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기를 든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세계의 발전과 더불어 합리적(合理的)인 존재(存在)가 된다는 설(說)을 반대했으며, 인간은 현실사회(現實社會)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대중으로부터 떠나서, 단독자(單獨者)로서 주체적으로 인생을 헤쳐 나갈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성이 회복(回復)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현실적 인간을, 본성(本性)을 잃어버린 인간으로서 파악하고 주체적(主體的)으로 인간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생각(思考方式)이 그 이후 실존주의사상(實存主義思想)으로서 전개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또 헤겔의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대하고 인간을 감성적(感性的) 존재로서 파악한 사람이 포이엘바하(L. A. Feuerbach(1804~72) 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였다.
포이엘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유적 본질(類的本質)인 이성과 의지(意志)와 心情(사랑)을 가진 유적 존재(類的存在)로서, 이 유적 본질(類的本質)을 자기로부터 분리(分離)한 후 대상화(對象化)해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인간의 본성(類的本質)을 되찾는 길은 대상화(對象化)한 하나님을 부정할 때, 즉 종교를 부정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헤겔의 자유의 실현(實現)의 사상(思想)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진정한 해방(解放)을 주장한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 당시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社會)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그들은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으며 게다가 최저(最低)의 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임금(賃金)밖에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질병과 범죄가 만연(蔓然)하게 되었고 그들의 인간성은 박탈당하고 있었다. 한편 자본가(資本家)는 풍족(豊足)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억압(抑壓)함으로써 그들도 본래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마르크스가 처음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포이엘바하의 인간주의(人間主義)에서 출발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인간은 유적 존재(類的存在)일 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을 하는 사회적, 물질적, 역사적존재이며, 인간의 본질은 노동의 자유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社會)에 있어서 노동자는 노동 생산물을 모두 자본가에게 빼앗겼으며, 노동 그 자체가 자기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뜻에 따라서 좌우(左右)되고 있었다. 여기에 노동자의 인간성 상실(喪失)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노동자(勞動者)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를 타도(打倒)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가도 인간성을 회복(回復)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물론(唯物論)의 입장에서, 인간의 의식(意識)을 규정(規定)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토대(土臺)인 생산 관계라고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를 폭력적(暴力的)으로 변혁(變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서 세운 공산주의 국가(國家)는 자유의 억압(抑壓)과 인간성(人間性)의 유린이 심한 독재주의 사회가 되었고, 인간은 더욱 더 본래의 모습을 상실(喪失)하고 말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의 원인의 파악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소외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소외는 지난날의 공산주의(共産主義) 社會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도, 개인주의(個人主義)와 물질(物質) 중심주의(中心主義)가 만연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만연되어서 더욱 더 인간성(人間性)이 상실되어가고 있다.
한편 인간학이 모든 학문(學問)과 사상(思想)의 근본(根本)이라고 생각한 막스셀러는 인간과 역사속에서 제시한 인간관 중에서 인간은 사고(思考)하는 인간 (homo sapiens), 도구(道具)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공작인(工作人; homo faber)으로 표현하였다.
그 외에 인간은 경제인(homo economicus), 종교인(homo religious), 자유인(homo liberalis), 국가인(homo nationalis)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표현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人生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역사 개시 이래 수많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그 해석이 시도(試圖)되었으나 모두가 실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인생을 바르게 살려다가 인생의 의미를 몰라서 허무(虛無)한 인생을 비관(悲觀)하고 자살한 사람도 허다(許多)하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려고 생애를 바쳐 걸어오신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그 분은 통일원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이 비록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하찮은 존재처럼 되어 버렸지만 본래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참자녀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의 타락에 의해서, 하나님과는 무관(無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본장(本章)에서는 인간의 타락의 문제나 인간성 회복의 방법에 대해서는 論하지 않고(그것에 관해서는 원리강론의 타락론과 복귀원리의 項目을 參照), 다만 본래의 인간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것만을 논(論)하고자 한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신상을 닮은 신상적 존재(神相的存在)이며 신성(神性)을 닮은 신성적 존재(神性的存在)이다. 그리고 또 원상의 격위성(格位性)을 닮은 격위적 존재(格位的存在)이다. 다음에 이에 관하여 상론(詳論)하고자 한다.
一. 신상적 존재(神相的存在)
원상(原相)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듯이, 이러한 원상을 닮은 본연의 인간도 예외없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존재를 신상적 존재(神相的存在)라고 한다.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
인간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마음과 몸의 이중체(二重體), 즉 성상-형상의 통일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성상과 형상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인간은 우주(宇宙)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다. 즉 인간은 성상과 형상에 있어서 각각 동물, 식물, 광물의 성상과 형상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둘째로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적 존재(二重的存在)이다.
셋째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통일을 이루고 있는 심신통일체(心身統一體)이다.
그리고 넷째로 인간은 이중(二重)의 마음, 즉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이중심(二重心)의 통일체로서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다.
여기서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넷째의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라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항(本項)에서 다루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는 바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통일체와 같은 뜻이 된다.
여기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모두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를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로 표시하는 것은,
생심(生心)은 영인체(靈人體) 즉 성상(性相)의 마음이요, 육심(肉心)은 육신(肉身) 즉 형상(形狀)의 마음이어서,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영인체(靈人體)와 육신(肉身)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에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기능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생심(生心)의 기능(機能)은 진선미(眞善美)와 사랑의 생활, 즉 가치생활(價値生活)을 추구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진(眞)·선(善)·미(美)의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을 중심으로 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이 가치의 생활이다.
인간의 가치 생활에는 인간 자신이 가치를 추구하면서 기뻐하는 면도 있으나 가치를 실현하여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보다 더 본질적(本質的)인 면이다.
따라서 가치 생활이란 위하여 사는 사랑의 생활, 즉 가정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랑의 생활이다. 그리고 궁극적(窮極的)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편 의식주(衣食住)나 성(性)의 생활, 말하자면 물질적(物質的)인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육심(肉心)의 기능이다. 물질 생활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은 본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생심(生心)이 주체요, 육심(肉心)이 대상이다. 영인체가 주체요, 육신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육심이 생심을 따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생심과 육심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생심이 주체, 육심이 대상의 관계에 있을 때의 인간의 마음이 본심이다.
육심이 생심을 따른다는 것은, 가치(價値)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생활을 제1차적인 것으로 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생활을 제2차적인 것으로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치(價値)의 생활이 목적이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은 그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심(肉心)이 생심(生心)을 따르고 생심(生心)이 제 기능(機能)을 잘 하면 영인체와 육신은 서로 공명한다. 이 상태가 인격(人格)을 완성(完成)한 상태이며 곧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墮落)했기 때문에,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상(對象)이 되어야 할 육심이 주체의 입장에 서게 되었고, 주체가 되어야 할 생심이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이 목적이 되었고, 가치의 생활은 그 의식주를 위한 수단처럼 되어서 2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즉 사람을 사랑한다거나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행위는 부(富)를 얻는다든가, 지위를 얻는다는 목적 때문에 행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일상적인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가치의 생활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치 생활을 자기중심의 물질 생활을 위한 수단(手段)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육심(肉心)이 주체, 생심(生心)이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심과 육심의 본래의 관계가 역전(逆轉)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실정(實情)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거꾸로 된 관계를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해야 할 필연적(必然的)인 이유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모든 종교는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勝利)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컨대 공자(孔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했고,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으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自己)와의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은 금식(禁食, 단식), 철야(徹夜) 등의 수도(修道)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육심을 생심에 굴복시켜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앞세우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을 뒤세운 채 살아가는 것이 생심과 육심의 통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육심이 생심을 누르고 자기중심적인 의식주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苦痛)과 불행(不幸)이 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본심(本心), 즉 마음이란, 요컨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상(性相)內의 내적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본심(本心)의 선차적(先次的)인 기능은 생심(生心)에 의한 사랑의 생활이며 진선미(眞善美)의 가치(價値)를 추구(追求)하는 생활이다. 따라서 인간은 바로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인 것이다.
이런 가치의 생활이 바로 진실(眞實)의 생활이며, 윤리적(倫理的)이며 도덕적(道德的)생활이며 예술적 생활이다. 그리고 본심의 후차적(後次的)인 기능은 육심(肉心)에 의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 즉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성상과 형상의 속성(屬性)이지만 이 본성론에서 말하는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각각 양적 실체(陽的實體), 음적 실체(陰的實體)로서의 부부(夫婦)를 말한다.
부부(夫婦)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가정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모두 양음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고 번식한다.
만물이 이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양음의 결합 즉 부부(夫婦)의 결합도 단순한 남녀의 육체적 결합으로만 보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는 것은, 부부(夫婦)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오늘날 선진제국(先進諸國, 선진국들)에서처럼 남녀가 결혼했더라도 쉽게 갈라지곤 함으로써 결혼의 신성성(神聖性)이나 영원성(永遠性)은 상실되기 쉽게 된다. 이것은 본래의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왜 존재(存在)하며, 결혼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참된 해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생을 독신(獨身)생활로 일관(一貫)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첫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 중의 1성(一性)을 대표(代表)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양성-음성을 지닌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횡적(橫的)으로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종적(縱的)인 사랑이 거기에 임(臨)하게 되어서 여기에 사랑의 상승작용(相乘作用)에 의한 생명(生命)의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로, 본연의 부부의 결합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의 최후(最後)의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우주 창조의 완료(完了)를 의미한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 해와의 완성과 더불어 우주의 창조는 완료되었을 것이다. 우주 창조의 최종적인 목표는 만물의 주관주인 인간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부의 완성은 우주 창조의 완료를 의미한다. 그러나 부부(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 창조는 완료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창조(再創造)의 섭리를 계속해 오신 것이다.
재창조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개체(個體)를 완성시키고 더 나아가서 부부로서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로 창조되었으나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는 주관주가 될 수 없다. 부부로서 완성할 때 비로소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우주창조가 완료되는 것이다.
셋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인류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인류의 통일을 의미한다.
즉 부부에 있어서 남편은 전인류(全人類)의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전인류의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총인구(總人口)는 약 66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각각 33억을 대표한 가치(價値)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남편이고 그 아내이다.
넷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가정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가정의 완성을 의미한다.
가정에서 남편은 모든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상(以上)과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가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우주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며 인류의 통일과 가정의 완성(完成)을 의미한다.
이처럼 부부의 결합은 실로 신성(神聖)하고도 존귀(尊貴)한 결합인 것이다.
그런데 부부의 조화는 가정적 사위기대의 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가정적 사위기대의 형성이란, 창조 때에 인간에게 허락한 제2축복(第二祝福)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同사위기대(四位基臺)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인격적으로 완성한 남편과 아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랑과 미를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이 때의 부부의 결합은 원상내(原相內)의 주체와 대상의 조화를 닮게 된다. 즉 원상의 자동적 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의 자녀 번식은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닮고 있다. 이것은 원상의 발전적 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이때 부부는 각각 본심(本心)대로 살면서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게 된다.
본심대로 산다는 것은 원상의 내적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는 것이요,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원상의 외적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부부가 각각 원상(原相)의 모습을 완전히 닮아서 인격자로 성숙한 다음,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가정은 부부의 횡적사랑과 하나님의 종적사랑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완성된 가정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 국가, 세계를 이 地上에 세우게 되면 그것이 곧 지상천국(地上天國)이요,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란 본연의 질서를 통하여 실현(實現)되는 사랑의 世界를 말한다. 여기서 질서와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체이지만 가정도 우주의 축소체이다. 이때 인간은 구성요소(構成要素)로 본 우주의 축소체이며 가정은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인 것이다.
가정이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라는 말은 우주의 종적 질서(縱的秩序)와 횡적 질서(橫的秩序)를 닮아서 가정에도 축소된 형태로서의 종적 질서와 횡적 질서가 있게 됨을 뜻한다.
가정에 있어서의 종적 질서란 조부모(祖父母)→부모(父母)→子女→손녀(孫子)로 이어지는 질서를 말하며 횡적 질서(橫的秩序)는 부부간 및 부모중심의 형제자매간의 질서를 말한다. 사랑은 이러한 질서를 통해서 실현(實現)된다.
그리하여 사랑에는 종적 사랑과 횡적 사랑이 있게 된다. 종적 사랑이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내리사랑(下向愛)과 자녀의 부모에 대한 올리사랑(上向愛)이며 횡적 사랑이란 부부간의 사랑, 자녀상호 간의 사랑 등의 가로사랑(水平愛)이다.
이러한 사랑의 기본형을 토대로 하여 종적 가치와 횡적 가치의 기본이 되는 가정윤리가 성립된다. 종적 가치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인 자애(慈愛)요,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인 효성(孝誠)이다.
횡적 가치란 부부간의 사랑인 화애(和愛)요, 자녀 상호 간의 사랑이다. 이리하여 윤리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 가족구성원 상호간에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規範)이 되는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윤리론에서 상세히 논할 것임).
이러한 가정윤리를 사회(社會), 기업(企業), 학교(學校) 등으로 확대(擴大)시킨 것이 사회윤리요, 기업윤리요, 학교윤리이며 이웃사랑(愛), 민족애(民族愛), 원수에 대한 사랑, 자연보호운동 등도 모두 가정적 윤리를 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本性)으로 본 인간관(人間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애적 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이라 하겠다.
그런데 타락에 의해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완성을 보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미완성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해와는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없었다.
즉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부는 하나님마저 상실해 버렸다. 그리하여 우주(宇宙) 창조(創造)의 未완료(完了) 상태가 그대로 오늘에까지 지속(持續)되어온 것이다.
오늘날 가정문제(家庭問題)나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부부의 모습이 모두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어지러워졌고 국가와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부가 화애(和愛)로써 조화(調和)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세계의 통일과 직결(直結)되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의 전제조건이 된다. 따라서 부부의 화애(和愛)의 문제는 사회문제와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개성체(個性體)
하나님은 우주(宇宙)의 창조(創造)에 있어서 먼저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구상하시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실체대상으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이다.
따라서 피조만물은 원인자되시는 하나님의 원상(原相)을 상징적으로 닮은 개성체(個性體)요, 인간은 원상(原相)을 형상적으로 닮은 개성체이다.
개성체(個性體)란 원상의 개별상을 닮은 개성진리체라는 의미로서 인간은 우선 하나님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함께 닮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다.
그런데 그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다룸에 있어서 개별상(個別相)에 중점(重點)을 두고 다룰 때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개성체라고 한다.
개성체(個性體)로서의 인간의 개별상(個別相)은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각개인(每個人)마다 그 개별성(個別性)이 현저(顯著)하며, 그 얼굴이나 성격 등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는 종류별(種類別)의 개별상이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별(個人別)의 개별상(個別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특히 인간에게 개인마다 독특한 개별상을 준 것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면서 특유의 자극적(刺戟的)인 기쁨을 얻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을 돌려드리는 최고의 가치(價値)를 지닌 존재로서 이러한 개별상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상(個別相)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의 특성(特性)으로 나타난다.
첫째의 특성이 용모상의 특징이다. 세계에 65억의 인간이 있지만 같은 용모나 체격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둘째의 특성은 행동상의 특징이다. 인간의 행동양식(行動樣式)은 사람마다 다르다. 행동은 마음의 직접적인 표현이므로, 용모를 형상적인 특성이라고 한다면, 행동은 성상적인 특성의 표현(表現)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의 특성은 창작상(創作上)의 특징이다. 예술의 창작(創作) 뿐만 아니라, 창조성을 발휘하는 모든 활동은 모두 창작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하루를 살았다면 그 1일의 생활의 발자취는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창작 또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일생의 발자취도 하나의 작품(作品)(生의 작품)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시고, 행동을 보고 기뻐하시고, 또 그 작품(作品)을 보고 기뻐하시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개개의 인간을 보고 기뻐하신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이 용모나 행동이나 창작으로써 하나님께 고유한 美를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성미((個性美)이다. 따라서 개성미(個性美)란 용모상의 개성미요, 행동상의 개성미요, 창작상의 개성미이다.
부모(父母)가 자식을 대할 때, 특성에 있어서 어떤 자식이라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의 표현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때, 그 인간의 용모나 행동에서 그리고 창작생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개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즉 신래성((神來性)의 것이기 때문에 존귀하다. 인간이 인간의 개성(個性)을 귀히 여기고 상호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오늘날까지 인간의 개성(個性)은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독재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때까지의 공산주의(共産主義)사회(社會)가 그 현저(顯著)한 예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개성을 유물론(唯物論)에 근거하여 환경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경시(輕視)한다. 우리는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sm)가 인간의 개성을 존중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인간의 개성이 존중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이 인도주의(人道主義)에는 없기 때문에 철학을 가진 공산주의의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인간의 개성은 우연적(偶然的)인 것도 환경의 산물(産物)도 아니며, 하나님의 개별상에서 유래(由來)된 것이기 때문에 즉 신래성(神來性)이기 때문에 존귀하다고 하는 확고한 신학적,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