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頭翼)사상 요강
제8장 역사론 (歷史論)
( Theory of History )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역사론(歷史論)은, 사실(史實)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는 어떻게 시작되어 어떠한 법칙(法則)에 의해서 흘러 왔으며, 어떠한 방향(方向)으로 흘러 가고 있는가 하는 것 등 역사 해석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일종의 역사철학으로서 통일사상에 근거한 역사 해석을 말한다. 그리하여 이 역사론을 통일역사론 또는 통일사관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역사론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미래상(未來像)을 확립함으로써 역사의 올바른 방향성(方向性)을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문제(現實問題)를 해결하는 방안이 도출(導出)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의 복잡한 세계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명확한 비전을 가진 확고한 역사관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관이 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으나 공산주의의 역사관, 즉 유물사관처럼 영향력이 있는 사관(史觀)은 없었다. 유물사관은 인류사를 계급투쟁(階級鬪爭)의 역사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계급투쟁(階級鬪爭), 즉 혁명에 의해서 무너지고 공산주의사회가 필연적으로 도래(到來)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나름의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유물사관은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신념의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와의 대결은 역사관과 역사관의 대결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세계에는 유물사관에 대처할 수 있는 기존(旣存)의 역사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유주의세계는 그동안 끊임없이 공산주의의 공세(攻勢)와 위협(威脅)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유물사관도 결국은 쓰러지고 말았으니, 이것은 바로 文총재님의 통일역사론(統一歷史論)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통일역사론은 새로운 신관(神觀)에 근거한 사상인 바 지금까지 수십년동안 공산주의와의 이론的 대결에 있어서 유물사관의 허구성(虛構性)을 신랄(辛辣)하게 폭로해 왔다. 통일역사론은 인류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통일된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세계를 향하여 흘러왔음을 역사적 사실로써 실증적(實證的)으로 해석하는 역사이론인 것이다.
一. 통일사관(統一史觀)의 기본입장(基本立場)
통일사관의 기본입장은 통일원리중의 복귀원리를 근거로 한 입장이다. 그런데 복귀원리(復歸原理)에 근거해서 통일사관은 역사를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첫째는 죄악사(罪惡史)로서, 둘째는 재창조(再創造)역사로서, 셋째는 복귀(復歸)역사로서 역사를 해석한다. 그리고 역사를 해석함에 있어서, 역사에 법칙이 작용했는가 하는 문제와, 역사의 시원(始元)이나 방향(方向)의 문제도 제기되곤 하기 때문에, 이러한 제문제도 본항(本項)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1) 죄악사(罪惡史)
먼저 통일사관(統一史觀)이 보는 죄악사(罪惡史)에 관해서 살펴보자. 역사는 인간 조상의 타락에 의해서 출발한 죄악사(罪惡史)이다. 그 때문에 인류역사는 원리적이고도 정상적인 역사로 출발할 수 없었고, 따라서 역사는 대립(對立)과 갈등(葛藤), 전쟁(戰爭)과 고통(苦痛), 슬픔과 참상(慘狀) 등으로 얽혀진 혼란의 역사로서 이어져 왔다. 이것이 역사가 죄악사(罪惡史)란 말의 뜻이다. 따라서 역사상에 제기된 여러 가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이러한 타락문제의 해결없이는 불가능하다.
(2) 재창조(再創造)역사
다음은 인류역사가 재창조역사(再創造歷史)라고 하는데 대해서 살펴보자. 인류 시조의 타락으로 인류는 본연의 인간과 본연의 세계를 상실했다. 즉 본연의 인간은 영적(靈的)인 죽음의 상태에 떨어지게 되었고, 본연의 세계는 파괴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인간을 재창조하고 세계를 재건설하는 섭리를 하시게 되었다. 이러한 섭리의 역사가 재창조역사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적용(適用)되었던 법칙(法則)(창조의 법칙)과 말씀이 그대로 역사의 섭리에도 적용(適用)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로고스)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재창조도 말씀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재창조라 하여 우주를 다시 만든다는 뜻은 아니다. 타락은 인간만이 하였기 때문에 재창조는 인간만의 재창조이다. 즉 인간만을 말씀으로 재창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인(聖人), 의인(義人), 예언자(豫言者) 등 정신적 지도자를 세운 후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진리(말씀)를 전해서 그들을 영적(靈的)으로 인도해 오셨다.
(3) 복귀(復歸)역사
다음은 복귀역사(復歸歷史)에 관하여 살펴보자. 인간 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본연의 세계(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본연의 인간상을 잃었으며, 非본연(本然)의 모습 또는 비원리적(非原理的)인 모습이 되어서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세계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인간상은 다시 회복해야 할 이상(理想)으로 남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창조가 실패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비원리적인 세계와 인간을 본연의 상태로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류역사의 시작과 동시에 죄악(罪惡)의 인간과 죄악(罪惡)의 세계를 본연의 상태로 복귀하는 섭리(復歸攝理)를 하시게 된 것이다. 인류역사가 복귀섭리역사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리의 하나님이고, 인간의 타락은 인간이 일정한 조건(條件)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으므로, 복귀섭리에는 일정한 법칙이 작용되게 된다. 이것이 복귀의 법칙이다.
(4) 역사의 법칙성(法則性)
역사관을 세움에 있어서 역사 속에서 법칙을 발견한다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조건의 하나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역사의 법칙을 제시(提示)한 종교가나 학자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기독교의 섭리사관을 두고 볼 때, 설득력이 있는 법칙은 제시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기독교의 사관(史觀)은 오늘날 과학(사회과학)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결국 학문분야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헤겔은 역사의 설명에 변증법(辨證法; 觀念辨證法)을 적용하여, 인류역사는 절대정신(理性)이 변증법적으로 자기자신을 외부세계에 전개해 나온 변증법적 발전의 과정으로서, 최후에는 자유가 완전히 실현된 이성국가(國家)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헤겔이 이상국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프러시아는 자유가 실현되지 않은 채 역사와 더불어 흘러가 버렸다. 헤겔이 말한 역사법칙은 현실에서 유리(遊離)된 것이었다. 또 20세기에 들어와 토인비가 방대(尨大)한 문명사관(文明史觀)을 수립하여 문명의 발생(發生), 성장(成長), 붕괴(崩壞), 해체(解體)의 과정을 상세히 분석했지만 거기에서도 명확한 역사의 법칙은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역사의 법칙을 명시했으며, 그것을 과학적인 역사관이라고까지 자칭(自稱)해 왔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사관은 역사에 법칙이 작용해 왔음을 인정함은 물론, 그 법칙에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의 두 가지 법칙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법칙이야말로 실제로 역사에 작용한 참된 법칙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법칙이 제시됨으로써 유물사관의 허구성이 여실히 폭로되었던 것이다. 유물사관이 주장하는 법칙이란 실은 사이비(似而非) 법칙이며, 독단적(獨斷的)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통일사관은 신학적 입장이면서도 훌륭히 역사법칙을 정립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비과학적이라고 간주(看做)해 왔던 신학적 역사관도 이를 사회과학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5) 역사의 시원(始元)과 방향(方向)과 목표(目標)
역사가 언제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가 하는 역사의 시원(始元)에 관해서, 통일사관은 인간의 창조와 타락을 그 시원으로 본다. 이것은 기독교의 섭리사관(攝理史觀)과 같은 입장이다. 또 인류의 시조(始祖)에 관하여 일원론(一元論)(monogenism)이냐 다원론(多元論; polygenism)이냐 하는 문제가 있으나, 통일사관은 인류의 시조가 아담과 해와 뿐이라고 하는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한다. 창조는 하나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창조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의 목표는 높은 차원에서의 창조이상세계로의 복귀(復歸)이며, 역사의 방향은 이 복귀의 방향이다. 따라서 역사의 목표와 방향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그 목표에 도달하는가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하에서 인간이 -특히 섭리적인 중심인물(중심인물(中心人物))들이- 책임분담을 다 하게 될 때, 그때그때의 섭리의 뜻은 성공적으로 달성(達成)되게 된다. 따라서 역사가 흘러가는 과정이 직행(直行)이냐 우회냐, 단축이냐 연장이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즉 역사의 과정은 비결정적이어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특히 섭리적 인물들이 주어진 사명을 훌륭히 다 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을 책임분담수행(責任分擔遂行) 또는 그냥 책임분담(責任分擔)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역사의 목표는 결정적이지만 그 과정이 비결정적이라고 보는 입장, 즉 역사의 진행(進行)과정이 인간의 책임분담 혹은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견해를 책임분담론(責任分擔論; theory of responsibility, responsibilism)이라고 부른다.
二. 창조(創造)의 법칙(法則)
위에서 말한 역사의 법칙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류역사는 재창조역사인 동시에 복귀섭리역사이다. 따라서 역사의 변천(變遷)에는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이 작용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먼저 창조의 법칙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창조의 법칙에는 (1)상대성(相對性)의 법칙 (2)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3)상극(相剋)의 법칙 (4)중심(中心)의 주관(主管)의 법칙 (5)3단계완성(完成)의 법칙 (6)6수기간(期間)의 법칙 (7)책임분담(責任分擔)의 법칙 등이 있다.
(1)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
피조물 하나하나는 모두 내적으로 서로 상대적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주체적 요소와 대상적 요소가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개체는 외적으로도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고서 존재하고 운동한다. 이러한 관계 하에서 생물들은 생존(生存)하고 번식(繁殖)하고 발전(發展)한다. 여기서 주체와 대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는다는 말은 양자가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이 마주 대함에 있어서, 공동목적(共同目的)을 중심하고 대할 때와 공동목적(共同目的)없이 대할 때가 있다. 여기의 주체와 대상이 공동목적을 중심하고 서로 마주 대하는 것, 즉 상대적 관계를 맺는 것을 특히 상대기준(相對基準)을 조성한다라고 말한다.
여하간에 이와 같이 한 개체가 반드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상대성(相對性)의 법칙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회(歷史)가 발전하기 위한 필수조건(必須條件)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의 모든 분야에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相對物)가 상대관계를 맺는 일이다. 이러한 상대적관계가 형성되지 않고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 主個體와 從個體)를 말한다.
그 예로서 정신과 육체, 마음과 몸, 이데올로기와 경제적조건(物質的條件), 정신(精神)문화와 물질문명, 정부와 국민, 경영자와 노동자, 노동자와 생산용구, 기계의 주요부분과 종속부분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는 이외에도 무수히 많다. 이와 같은 상대적요소(相對的要素)가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상호간에 작용이 벌어져서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2)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사물의 내부에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두 요소가 상대적관계를 맺으면 이때에 일정한 요소 또는 힘을 주고 받는 작용이 벌어진다. 주체와 대상간의 이와 같은 상호작용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이 수수작용(授受作用)이 행해지는 곳에서 발전이 이루어진다. 역사의 발전도 이러한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즉 역사에 있어서 모든 사회분야에서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요소(相對物)가 상대적 관계를 맺은 후 공동목적을 중심하고 원만 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각 분야(分野)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예컨대 국가가 존재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민이 국가의 번영을 공동목적으로 하여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맺고 원만한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기업에 있어서도 기업의 번창을 위해서는 자본가(資本家), 경영자(經營者), 노동자(勞動者), 기술자(技術者), 기계(機械) 등이 서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이루어 원만한 수수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상대성(相對性)의 법칙(法則)과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法則)은 표리일체(表裏一體)의 관계에 있으며, 이 두 법칙을 합쳐서 광의(廣義, 넓은 의미)의 수수작용의 법칙이라고 한다.
수수작용은 조화적이지, 결코 대립적(對立的)이거나 상충적(相衝的)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유물사관은 대립물의 투쟁으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쟁은 발전을 위한 하나의 계기(契機)가 될 수는 있어도, 투쟁이 행해지는 동안 발전은 오히려 정지(停止)하거나 후퇴(後退)한다. 그러므로 발전에 관한 한 유물사관의 주장은 전혀 잘못된 것으로서 계급투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위장이론(僞裝理論)에 불과했던 것이다.
(3) 상극(相剋)의 법칙(法則)
수수작용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요소 또는 상대적(相對的) 개체(個體) 사이에서 이루어지며, 주체와 주체(혹은 대상과 대상)는 서로 배척한다. 이와 같은 배척현상을 상극작용(相剋作用)이라고 한다. 상극작용은 본래 자연계에 있어서는 잠재적(潛在的)인 것일 뿐 표면화되지 않으며,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을 강화 또는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컨대 자연계에서 양전기와 양전기(혹은 음전기와 음전기)는 서로 배척한다. 이것은 주체(陽電氣)와 대상(陰電氣)의 수수작용을 강화?보강하기 위한 작용이며, 그 자체로서 표면화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연계에서는 이와 같은 상극작용으로 말미암아 질서가 교란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주체와 주체의 상극작용은 두 지도자간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혁명시에 새로운 지도자와 과거의 지도자와의 대립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은 상극작용에 있어서 두 주체(보수파의 주체와 개혁파의 주체)는 각각의 대상층(인민대중)과 수수작용을 하여 각각의 세력을 형성한다. 그 결과 두 세력이 대결하게 된다. 이 때, 두 주체(지도자)중의 한편은 하나님의 섭리의 방향에 보다 가까운 입장에 서게 되고 다른 한편은 보다 먼 입장에 서게 된다. 전자(前者)를 선(善)편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악(惡)편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회에 있어서 주체와 주체의 상극작용은 선악의 대결 또는 선악(善惡)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이 투쟁에서 선(善)편이 승리하면 역사의 진행방향은 조금씩 선(善)의 방향으로 전환(轉換)하게 된다.
그러나 비록 타락한 사회라 할지라도 상극작용은 그 본래의 수수작용의 보완성을 나타내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국가와 국가 또는 민족과 민족간에 평화적으로 경쟁하면서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4) 中心의 주관(主管)의 법칙(法則)
다음은 중심의 주관의 법칙에 대하여 설명한다.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주체는 중심이 되고, 대상은 주체의 주관을 받게 된다. 그 결과 대상은 주체를 중심으로 원환운동(圓環運動)을 하게 된다. 자연계에 있어서는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전자가 핵을 중심으로 도는 것과 같이, 물리적인 원환운동이 벌어진다. 그러나 인간사회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주체의 마음과 대상의 마음과의 관계이므로, 대상의 마음이 주체의 명령, 지시, 부탁 등에 쾌히 따른다는 의미에서의 원환운동이 벌어진다.
복귀역사에서 하나님은 중심인물을 세운 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적합한 방향, 즉 선(善)의 방향으로 역사를 인도해 가지만, 그 경우 사회 환경을 먼저 조성하여 놓은 다음, 중심인물(中心人物)로 하여금 그 환경을 하나님의 섭리에 맞는 방향으로 수습하게 한다. 따라서 중심인물에게는 항상 환경을 수습(주관)해야 하는 책임분담이 주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복귀섭리에 있어서 중심인물이 사회환경을 주관하는 것을 중심의 주관의 법칙이라 한다. 이것은 선민(選民)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하나님은 인류역사의 중심사로서, 구약시대(舊約時代)에는 이스라엘 민족사를, 예수 이후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신약시대(新約時代)에는 서양사를 섭리해 나오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중심사(中心史)를 섭리함에 있어서 중심인물(中心人物)을 세워 나오셨다. 구약시대의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 열왕(列王)들, 예언자들 그리고 신약시대의 어거스틴, 여러 교황들, 루터, 칼빈 등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프랑크왕국의 찰스대제(大帝), 영국의 헨리 8세, 미합중국(美合衆國, USA)의 워싱턴, 링컨 등의 정치적지도자들도 각 시대에 세워진 중심인물들이었다.
한편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妨害)해온 사탄도, 자기를 중심으로 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사탄편의 중심인물을 세운 후,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면서 사회 환경을 주관해 나왔다. 汎게르만주의(범게르만主義)를 주창하면서 세계를 제패(制覇)하려고 한 카이젤(빌헬름2세)이나 히틀러, 공산주의사상을 확립한 마르크스, 공산주의혁명을 지도한 레닌, 스탈린, 모택동 등이 그와같은 인물들이다. 그들의 사상이나 지도력이 없는 전체주의(全體主義)의 대두(擡頭)나 공산주의혁명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토인비는 문명의 성장은 창조적(創造的) 개인(個人) 혹은 창조적(創造的) 소수자(少數者)에 의해서 성취(成就)되는 사업이다.'1)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수자(多數者)인 대중은 창조적 개인 또는 창조적 소수자의 지도를 받아서 그들을 따른다고 하였다. 토인비의 이러한 주장은 바로 역사에 중심의 주관의 법칙이 작용해 왔음을 말해 준다.
유물사관은 유물론의 입장에서 지도자보다도 환경(사회환경)을 더 중시함으로써, 사회환경의 기층(基層)인 인민대중이 사회발전에서 결정적(決定的)인 역할(役割)을 다 해왔으며, 지도자는 다만 일정한 사회적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 활동을 해왔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신이 물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정신이 물질의 제약을 받는 것처럼, 지도자의 정신은 물질적환경인 사회환경의 제약을 받는다는 유물론을 근거로 한 사고방식이 다. 이와 같이 공산주의는 사회환경(人民大衆)을 물질적 개념으로, 중심인물(지도자)을 정신적인 개념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지도자는 주체이며, 인민대중은 대상으로서 지도자는 그 종교적 혹은 사상적인 이념을 가지고 대중이나 사회를 일정한 방향으로 인도하고 있다.
(5) 3단계완성(完成)의 법칙(法則)
창조원리에 의하면, 모든 사물의 성장이나 발전은 소생, 장성, 완성의 3단계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예컨대 식물은 씨에서 싹이 나는 단계, 줄기가 자라고 잎이 생겨나는 단계,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단계를 통하여 그 성장을 완성한다. 이 법칙이 역사에도 적용되어서 3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재창조(再創造)의 섭리가 이루어져 왔다. 즉, 어떤 하나의 섭리적인 행사가 실패로 끝나면 비슷한 섭리가 3차(三次)까지 되풀이되면서 3단계에서는 반드시 완성하곤 하였다.
예컨대 복귀섭리의 기대(基臺)를 세우시려던 섭리가, 가인과 아벨의 헌제(獻祭)실수로 인하여 아담가정에서 이루어지지 못하고, 노아가정을 거쳐 아브라함가정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으며, 또 아브라함가정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의 代에 이루려던 복귀기대조성의 섭리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祭物失手)로 이삭의 대(代)를 거쳐서 3대(三代)째인 야곱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루어지게 되었다. 메시아(後아담)의 강림(降臨)도 마찬가지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은 제2의 아담으로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러나 십자가형(十字架刑)으로 인하여 예수님마저 창조목적을 완전히 이룰 수 없게 되자,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주(再臨主)를 강림케 하신 것이다.
재림주(再臨主)를 맞기 위한 준비기간인 근세(近世)에 있어서 헤브라이즘 복고운동(復古運動)과 헬레니즘 복고운동(復古運動)도 각각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전개되었다. 헤브라이즘 복고운동이란 신본주의운동(神本主義運動), 즉 종교개혁을 말하며, 루터,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제1차 종교개혁에 이어 웨슬레, 폭스 등에 의한 제2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오늘날 통일교회를 중심하고 제3차 종교개혁(第三次 神本主義運動)이 전개되고 있다.
한편 헬레니즘 복고운동(復古運動)이란 인본주의운동(人本主義運動)을 말한다. 제1차 인본주의운동인 르네상스에 이어 제2차 인본주의운동으로서 계몽사상운동(啓蒙思想運動)이 일어났고, 이어서 제3차 인본주의운동인 공산주의운동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어 왔다.
헤브라이즘 복고운동(神本主義運動)은 하나님편의 복고운동(復古運動)으로서 전개되었으며, 헬레니즘 복고운동(復古運動)은 인본주의운동으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인본주의운동은 인간을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分離)시키는 사탄편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마침내 무신론(無神論)(공산주의)으로 흐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데 신본주의운동(神本主義 運動)이 3단계를 통하여 성공하면, 사탄편의 사상운동인 인본주의운동은 필연적으로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편의 3단계완성의 법칙은 사탄편에 있어서 3단계 필멸(必滅)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즉 제3차 신본주의운동인 통일교회운동의 성공과 제3차 인본주의운동인 공산주의운동의 멸망은 모두 필연지사(必然之事)이다.
(6) 6수기간(期間)의 법칙(法則)
성서(聖書)에는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이어서 아담의 창조까지 6일이 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아담의 창조는 6수기간을 앞에 두고 개시되었는데, 이 기간은 아담을 만들기 위한 준비기간(準備期間)이었다. 마찬가지로 재창조(再創造)역사에 있어서도 제2아담인 메시아(예수) 강림(降臨)의 6수기간前 즉 6세기전(世紀前)부터 하나님은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신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世紀頃)에 유대민족을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여 그들의 不신앙을 회개토록 하신 것은 6세기후(世紀後)에 강림할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였다. 기원전 6세기경 중국에서는 공자(孔子)(551?~479 B.C.)가 나와서 유교를 세웠으며, 공자이후 6세기에 걸쳐서 제자백가(諸子百家)로 알려진 여러 사상가들이 나타나 중국사상의 황금시대(黃金時代)를 이루었다. 인도에도 B.C. 6세기경 석가(釋迦; 565~485. B.C.)가 나타나 불교를 세웠으며, 또 비슷한 시기를 전후하여 우파니샤드((upanisad)'는 '가까이(upa)'와 '다가앉다(nisad)'의 합성어로, 1대1로 은밀히 전수되는 비의를 뜻한다))라고 불리우는 고대 인도철학서(古代 印度哲學書)가 출현하였다. 같은 시기에 중동지방(中東地方)에서는 조로아스터교(敎)가 일어났으며, 그리스에서는 철학, 예술, 과학 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전부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였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각 지역의 사람들을 종교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선(善)한 방향으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적합한 방법으로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신 것이다.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哲學者) 야스퍼스는 기원전(紀元前) 5백년경을 전후하여 중국, 인도, 이란, 팔레스타인, 그리스 등에서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이 정신적 지도자들(종교의 開祖나 哲人)이 나타난 것에 주목하고 그 시대를 추축시대(樞軸時代)라고 불렀다.2) 거의 같은 시대에 그와 같은 정신적 지도자들이 서로 약속이나 하듯이 세계의 객지(各地)에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그것을 역사적인 비밀(秘密)이요, 풀 수 없는 수수께끼3)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6수기간(數期間)의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풀려지게 된다.
재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제3아담인 재림(再臨)메시아를 맞이할 때에도 메시아재림의 6수기간전(數期間前)부터 하나님은 재림맞이 준비를 시작하셨다. 그것이 14세기경부터 태동(胎動)하기 시작하여 16세기에 이르러 본격화(本格化)되었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文藝復興) 운동이다.4) 18세기말에 일어난 산업혁명(産業革命), 그리고 그 후의 과학과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도 역시 이 재림(再臨)을 위한 준비였다. 복귀섭리(復歸攝理)역사에 의하여 하나님은 20세기에 재림(再臨)메시아를 지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이와 같은 준비를 해오신 것이다.
예수를 맞이하기 위하여 6세기전(世紀前)에 나타난 종교가나 철학자들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가진 천사장(天使長)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말한 사랑과 진리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部分的)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만이 참사랑을 실천하며 참진리를 밝힐 수 있으며, 그 사랑과 진리를 통하여 비로소 그때까지의 종교나 사상의 모든 미해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의 교리나 철학의 내용은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가르친 불완전한 사랑이요, 불완전한 진리이기 때문에 메시아강림 때가 되면 어차피 미해결의 문제들이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그때까지의 종교는 무력화(無力化)하게 된다. 이 때 메시아가 강림해서 종래의 무력화(無力化)한 종교나 사상을 절대적인 참사랑과 참진리로써 보완(補完)하여 소생시킨 후 종교통일, 사상통일을 이루면서 통일세계(統一世界)를 실현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통일세계는 실현되지 못한 채 그 사명(使命)은 재림주에게로 인계되었으며, 따라서 유교, 불교, 동양철학, 그리스철학(哲學) 등도 통일되지 않은 채 그대로 재림때까지 남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초림(初臨) 때에 이루어야 했던 종교통일, 사상통일의 과업을 재림 때에 비로소 완성하게 된다. 즉 재림주는 이때까지의 종교나 사상의 미해결의 문제를 하나님의 참사랑과 참진리로써 해결한 후, 종교통일?사상통일을 이루어서 통일세계를 실현하게 된다.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재림주를 맞기 위한 6세기전(世紀前)부터의 준비기간은 메시아초림시(初臨時)의 6세기전(世紀前)과 같이 굳이 새로운 종교나 철학을 세울 필요가 없으며, 기존(旣存)의 종교나 철학을 잔존(殘存)시키면 되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불교 등이 남아져 왔던 것은 그 때문이다. 단, 중동(中東)에 있어서의 조로아스터敎는 선악(善惡)의 2신(二神)의 종교였기 때문에 7세기경에 유일신교(唯一神敎)인 이슬람교에 의해서 대치(代置)되었던 것이다.
(7) 책임분담(責任分擔)의 법칙(法則)
인간시조 아담과 해와에게는 하나님도 간섭(干涉)할 수 없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에게 우주의 주관주(主管主)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책임분담의 터 위에서 아담과 해와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인간으로서의 책임분담을 완수함으로써 만물에 대한 주관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재창조(再創造)의 섭리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책임분담과 인간(특히 攝理的인 중심인물(中心人物))의 책임분담이 완전히 합쳐짐으로써 同 재창조(再創造)의 섭리가 완성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란, 인간(섭리적 인물)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신의 자유의지(自由意志)에 의해서, 책임을 지고 완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섭리적 인물들이 자신의 지혜(智慧)와 노력(努力)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책임분담을 다 하면 복귀섭리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지만, 만일 그 인물이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면 그를 중심으로 한 섭리는 실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섭리는 연장되고 일정한 수리적 기간을 경과한 후에 하나님은 새로운 인물을 소명(召命)하여 동일한 섭리를 다시 반복하시는 것이다.
인류역사가 죄악역사(罪惡歷史)로서 오늘날까지 연장되어온 것은, 섭리적 인물들이 계속해서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十字架)에 달림으로써 통일세계(統一世界)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세례요한이나 제사장, 율법학자 등 당시의 유대교 지도자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공산주의가 전세계를 혼란(混亂)에 빠뜨린 이유도 산업혁명 이후 기독교국가의 지도자들이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현시점에 있어서도 민주주의국가의 지도자들은 대오각성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책임분담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참말씀과 참사랑으로 공산주의국가 사람들까지 인도하여, 하나님편에 서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참된 세계평화와 함께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三. 복귀(復歸)의 법칙(法則)
인류(人類)역사는 재창조(再創造)역사인 동시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를 회복하기 위한 복귀역사이다. 여기에 창조의 법칙과는 다른 개별(別個)의 법칙들이 역사에 작용해 왔다. 이것이 일련의 복귀의 법칙이다. 이 법칙에는 (1)탕감(蕩減)의 법칙 (2)분립(分立)의 법칙 (3)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 (4)조건적섭리(條件的攝理)의 법칙 (5)거짓과 참의 先後의 법칙 (6)종(縱)의 횡적전개(橫的展開)의 법칙 (7)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 등이 있다.
(1) 탕감(蕩減)의 법칙
타락이란 인간이 본래의 위치와 상태를 잃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리고 복귀란 그 잃어버린 본래의 위치와 상태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본래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조건(條件)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복귀를 위한 그 조건을 탕감조건이라고 한다.
인간이 세워야 할 이 탕감조건은 첫째로 믿음의 기대(基臺)요, 둘째로 실체기대(實體基臺)이다. 믿음의 기대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中心人物)를 만나서 그를 중심하고 일정한 수리적(數理的) 탕감기간(蕩減期間)을 거쳐서 일정한 조건물을 세우는 일을 말한다. 그리고 실체기대(實體基臺)를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에게 죄(罪)의 인간들이 순순히 따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죄악사회(罪惡社會)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에게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박해(迫害)했다. 따라서 의인(義人)이나 성현(聖賢)들이 걷는 길은 항상 고난의 노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의인(義人)들의 고난을 제물적인 탕감조건으로 삼아서 죄악세계의 사람들을 굴복시켜 하나님 편으로 복귀해 오시곤 하셨다. 즉 의인(義人)들의 고난을 조건으로 하여 하나님은 죄인(罪人)들을 회개(悔改)시키곤 하셨다. 이것이 탕감의 법칙이다. 그 전형적인 예가 예수의 십자가(十字架)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많은 죄악세계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罪)를 자각(自覺)하고 회개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공산주의자는 많은 종교인(宗敎人), 의인(義人), 선량(善良)한 사람들을 박해(迫害)하고 살해(殺害)해 왔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의 수난을 조건으로 하여 공산 독재정권을 굴복시킴으로써 공산세계의 인민(人民)들을 해방(解放)으로 인도해 오셨다. 따라서 탕감(蕩減)의 법칙으로 보아 공산주의의 멸망(滅亡)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2) 분립(分立)의 법칙
창조주는 하나님뿐이기 때문에 창조본연의 인간은 항상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했다. 그러나 타락에 의해 아담은 사탄과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담은 하나님도 대할 수 있고 사탄도 대할 수 있는 중간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상대(相對)하면, 사탄도 아담을 상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비원리적(非原理的)인 입장에 놓인 아담을 통하여 원리적인 섭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아담으로 하여금 두 아들을 낳게 하여 각각 하나님편과 사탄편으로 분립(分立)하였는데, 하나님편에는 아우인 아벨을, 사탄편에는 형인 가인을 세웠던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에게 순종 굴복함으로써 가인과 아벨을 함께 하나님편으로 복귀(復歸)하고자 하셨다. 하나님편에 있던 인간(아담)이 사탄의 유혹(誘惑)에 굴복하여 타락했으므로, 탕감복귀를 위해서는 사탄편 입장의 가인이 하나님편 입장의 아벨에게 순종굴복해야 하는 것이 원리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물(祭物)을 드릴 때 사탄편입장인 가인은 제물을 직접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었으며, 아벨을 통하여 바쳐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제물을 하늘앞에 직접 드렸을 뿐 아니라 끝내는 아벨을 살해(殺害)하였다. 그 결과 역사는 죄악(罪惡)역사로서 출발하게 된 것이다.6) 그러나 하나님편 입장으로 분립(分立)된 아벨이 끝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충성을 다 한 심정의 터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하여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사탄세계에서 선(善)편의 인간을 분립(分立)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선(善)편의 개인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선(善)편의 가정, 씨족, 민족, 국가, 세계를 分立하면서 점차 선(善)편의 판도를 확대해 오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에 대항(對抗)하던 사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앞서 악(惡)편의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악(惡)편의 가정, 씨족, 민족, 국가, 세계를 이루어 나오면서 악(惡)의 판도를 확대해 왔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해 왔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선(善)편의 인간들(聖賢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악(惡)편의 인간들에게 전하곤 하였으나, 악(惡)편 인간들이 듣지 않고 도리어 물리적으로 박해(迫害) 또는 공격(攻擊)을 가하곤 했다. 그래서 하나님편은 그에 응전(應戰)하는 입장에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에는 선(善)편의 개인과 악(惡)편의 개인, 선(善)편의 가정과 악(惡)편의 가정, 선(善)편의 씨족과 악(惡)편의 씨족, 선(善)편의 민족과 악(惡)편의 민족, 선(善)편의 국가와 악(惡)편의 국가, 선(善)편의 세계와 악(惡)편의 세계 사이에 싸움이 전개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따라서 역사는 선악투쟁(善惡鬪爭)의 역사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편이 선(善)이고 다른 한 편이 악(惡)이라 하더라도, 복귀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완전한 선(善)이나 완전한 악(惡)은 있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보다 가까운 측이 선(善)편으로, 보다 먼 측이 악(惡)편으로 분립되었던 것이다.
얼마전까지 세계는 선(善)편과 악(惡)편의 2대진영(二大陣營)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서 종교(특히 기독교)를 인정하는 국가군과 종교를 부정하는 국가군이었다.
하나님이 세계를 선(善)편과 악(惡)편으로 분립하신 목적은, 악(惡)편이 선(善)편에 굴복함으로써 악(惡)편도 구원(救援)하여 하나님편으로 복귀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이 양진영(兩陣營)의 투쟁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마지막에는 선편이 승리하게 되어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제 최종적으로 자유세계와 공산세계의 통일이 메시아를 맞이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아담의 불신(不信)으로 가인과 아벨이 분립(分立)되었으므로 후아담인 메시아에 의해서 가인편과 아벨편의 통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3)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法則)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 즉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성장하고 완성했더라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부부(夫婦)가 된 후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여 子女를 번식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아담(夫)=해와(妻)-자녀로 구성된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가 이루어져서,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종적(縱的)인 사랑)이 충만한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적사위기대(家庭的四位基臺)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사탄을 중심한 가정적사위기대가 형성됨으로써 전피조세계가 사탄주관권내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적인 사랑을 중심한 가정적사위기대를 복귀하는 것이 복귀역사의 중심적인 목적이었던 것이다.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먼저 4수(四數)의 기간을 가지고 상징적(象徵的), 조건적(條件的)인 섭리를 해오셨다. 이것을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 때의 4수기간(四數期間)은 가정적사위기대를 수리적(數理的)으로 회복하는 탕감조건이다. 4수기간이란 40일, 40년, 400년 등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기간은 사탄에 의해서 혼란(混亂)이 벌어지는 기간이며, 그 기간 동안 하나님편의 인간들은 고통을 받게 된다.
그 예가 노아의 40일 홍수, 모세의 광야노정(曠野路程) 40년, 기독교도에 대한 로마제국 박해시대 400년 등이다. 이 탕감기간이 지나면 조건적으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복귀했다는 의미에서 혼란은 수습(收拾)되고 하나님의 복귀섭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곤 하였다. 4수복귀(四數復歸)의 법칙은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타민족이나 국가의 역사에 적용되기도 했다.
토인비는 4백년간의 혼란기(動亂時代)를 거친 후에 통일이 달성된 세계국가의 예를 들고 있다. 예컨대 그리스?로마문명시대(文明時代)에 있어서 펠로폰네소스전쟁(戰爭)으로부터 로마의 통일까지의 4백년(B. C. 431~31),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춘추전국시대로부터 진(奏)?한제국(漢帝國)에 의한 통일까지의 약 4백년(B. C. 634~221), 일본(日本)의 역사에서 鎌倉?足利時代의 봉건적(封建的) 무정부상태(無政府狀態)에서 토요토미(豊臣秀吉)가 전국을 통일하고 도쿠가와(德川幕府)의 성립에 이르기까지의 약 4백년(1185~1597) 등의 예가 그것이다. 그러나 토인비는 왜 이와 같은 4백년기간이 나타나는가를 밝히지 못하였다.
그 외에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기간 40년(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에서 1945년의 한국 해방까지)도 그 한 예이다.
(4) 조건적섭리(條件的攝理)의 법칙(法則)
조건적섭리의 법칙이란, 섭리적인 어떤 사건에 있어서 중심인물(中心人物)이 하나님의 뜻에 적합하도록 그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의 섭리시대(攝理時代)의 성격이 결정됨을 말한다. 섭리적인 사건은 그 자체(自體)만으로 복귀섭리의 과정에서 그때그때의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후에 일어나는 섭리적인 사건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조건을 짓기도 한다.
예컨대 구약시대의 섭리에 있어서, 모세가 광야에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낸 사건이 있었다(민수기 20장). 모세의 행위 그 자체는 그 때의 현실적인 사정상, 즉 광야에서 목이 마른 백성에게 물을 먹여야 한다는 상황에서 필요한 행위였다. 그러나 동시에, 장차 예수님의 강림시(降臨時) 하나님의 섭리의 내용을 상징적(象徵的)으로 조건 짓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관하여 원리강론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의 글을 적고 있다.
반석이란 아담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모세가 치기 전에 물을 내지 않는 반석은 첫째 아담을, 그리고 모세가 한 번 쳐서 물이 나오게 된 반석은 제2아담인 예수를 상징(象徵)한다. 왜냐 하면 물은 생명(生命)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타락에 의해 영적(靈的)으로 죽은 상태에 있는 제1(第一) 아담은 물을 내지 않는 반석(盤石)에 비유되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오시는 제2(第二) 아담인 예수님은 물을 내는 반석(盤石)으로 비유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세는 불신(不信)하는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노여움에서 한 번 더 쳐버렸다. 그 결과 장차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 민족이 불신하게 되면, 사탄은 반석(盤石)의 실체되신 예수를 칠 수가 있다고 하는 조건이 성립(成立)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實際)로 예수님은 이스라엘민족의 불신(不信) 때문에 십자가(十字架)에 달렸는데, 이것은 모세의 반석 2타(二打)가 메시아강림 후의 섭리를 조건 지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성서(舊約聖書)에 기록된 사실(史實)의 한 예에 불과하지만, 그 밖에 섭리적으로 의의(意義)있는 역사적 사건에도 마찬가지로 이 법칙이 적용되어 왔다. 즉 섭리적사건은 우발적(偶發的)인 사건이 아니며, 그 이전(以前)의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하여 어느 정도 조건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시대의 섭리적 사건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에 따라서 그 후에 전개되는 역사적 사건의 성격이 조건 지워진다. 이러한 내용을 조건적 섭리의 법칙이라 한다.
(5) 거짓과 참의 선후(先後)의 법칙(法則)
이것은 참된 것이 나타나기 전에 거짓된 것이 먼저 나타난다는 법칙이다. 사탄은 인간 시조를 타락시킴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점유(占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탄이 하나님에 앞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섭리를 흉내내면서 원리형의 비원리세계를 만들어 나왔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아담이 책임분담을 다 하지 않고 타락했기 때문에 사탄의 이 비원리적인 세계의 조성을 허락(許諾)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신 하나님은 사탄의 뒤를 좇아오면서 사탄이 만든 비원리세계를 원리의 세계로 돌려놓는 섭리를 해오신 것이다. 사탄에 의한 비원리세계는 비록 번영(繁榮)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번영(繁榮)은 일시적이며, 하나님의 섭리가 진전(進展)함에 따라 반드시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복귀섭리(復歸攝理)의 구극(究極)의 목적은 지상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 즉 전세계가 하나로 통일된 국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신한 인류의 참부모)을 최고의 주권자로 모시는 하나님의 나라요, 지상천국(地上天國)으로서 그것은 메시아가 강림(降臨)함으로써 비로소 실현(實現)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의 뜻을 먼저 훔쳐다가 메시아강림(降臨 또는 再 降臨) 이전에 사탄편의 메시아적인 인물을 세워서 사탄편의 이상세계(理想世界)를 만들려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거짓 메시아에 의한 거짓 통일세계가 먼저 나타나곤 하였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나타난 로마제국(帝國)이 그 좋은 예이다. 로마에 카이사르(율리우스 시이저)가 나타나서 全갈리아를 정복하여 속국으로 만듦으로써 로마의 통일을 성취하였다(B. C. 45년). 그런데 그가 암살되자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내란(內亂)을 수습하고(B. C. 21년), 전 지중해(全地中海)를 통일하여 문자 그대로의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제국의 번영(繁榮)은 로마의 평화(平和)(Pax Romana)라고 하여 약 2세기(二世紀)동안 계속되었다.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는 사탄편의 메시아적 인물이었다. 그들은 참된 메시아(예수)가 강림(降臨)하여 영원한 사랑과 평화와 번영의 통일세계(統一世界)를 이루기에 앞서, 거짓된 평화와 번영의 통일세계를 만들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十字架)에 달려서 돌아가셨으므로 참된 통일세계, 참된 이상세계(理想世界)는 실제로 출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재림(再臨)때에도 이 법칙에 따라서 거짓 재림주(再臨主)와 거짓 통일세계가 재림의 섭리에 앞서서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스탈린과 공산주의 세계였다. 사실상 스탈린은 당시 인류의 태양(太陽)으로 자처하고 메시아와 같이 숭배되었으며 공산주의에 의한 세계통일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스탈린은 1953년에 죽었으나 섭리적으로 보면, 그 때가 재림섭리(再臨攝理)의 공식노정이 출발한 때였다. 국제공산주의의 그 후의 분열은, 거짓된 통일世界의 붕괴와 메시아에 의한 참된 世界통일의 실현의 진척(進陟)을 보이는 증거였다.
(6) 종(縱)의 횡적전개(橫的展開)의 법칙(法則)
이것은 종적(縱的)인 역사적 사건들을 복귀역사의 종말기에 횡적(橫的)으로 다시 전개시킨다는 법칙이다. 종(縱)이란 시간의 흐름을 말하고, 횡(橫)이란 공간적 넓이를 말한다. 즉 종(縱)은 역사이고 횡(橫)은 현실세계를 뜻한다. 따라서 종의 횡적전개란 역사상의 모든 섭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종말시대(終末時代)에 세계적으로 재현시켜서 섭리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섭리역사에 있어서 섭리적인 인물들의 실패로 말미암아 제때 제때에 미해결로 끝난 여러 가지 섭리적 사건들을 끝날에 한꺼번에 뜻맞게 마무리해서 복귀섭리역사를 완결(完結)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간(年間)의 복귀섭리에 있어서, 사탄의 침범으로 잃어버린 종적인 탕감조건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3대(三代)로써 탕감복귀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적이었다. 즉 아담가정의 섭리와 노아가정의 섭리가 모두 미해결로, 즉 실패로 끝났지만 아브라함 가정에서는 일단 조건적으로나마 섭리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 예수 때에 하나님은 아담에서 예수까지의 4000년의 역사에 있어서, 사탄의 침입(侵入)으로 실패로 끝난 여러 섭리적 사건들을 횡적(橫的)으로 전개하여 그것들을 한꺼번에 탕감복귀하고자 하였으나, 십자가형(十字架刑)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리고 재림(再臨)의 섭리가 시작될 때에는 아담이후(以後) 재림주님 때까지 6000년 기간동안 사탄에게 침범당했다가 조건적으로만 마무리되었던 모든 사건들을 횡적(橫的)으로 다시 전개하여, 그것들을 재림주(再臨主)를 중심하고 총체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탕감복귀하여 죄악(罪惡)역사의 섭리를 완결짓는다. 이와 같이 역사상의 사건들이 미해결인 채 남아져 있는 한 지상의 참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다. 역사상의 이 모든 사건들을 끝날에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만, 현실적인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게 되어서 여기에 비로소 참된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게 된다.
예컨대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제국(諸國)의 대립은 그것이 비록 오늘의 문제이긴 하지만 근원을 따져보면 구약시대(舊約時代)의 이스라엘민족(民族)과 주변민족(周邊民族)과의 싸움이 오늘날 재현된 성격의 싸움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대립(對立)을 단순히 정치적인 문제로만 파악해서는 그 해결이 불가능하다. 즉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근본적인 원인을 발견하여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대립은 종식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종말시대가 오면 종적인 역사상의 여러 사건들이 재현(再現)하게 되므로 여러 가지의 예상(豫想)하지 않았던 사태가 빈발하게 되며, 그 때문에 세계는 대혼란(大混亂)에 빠지게 된다. 종(縱)의 횡적전개의 법칙에 의하여 끝날에 이와 같이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므로 성경에는 이런 상황(狀況)을 큰 환난으로 표시하면서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마태 24: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은 오로지 인류가 재림주를 맞이하여 그분의 참말씀과 참사랑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만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되게 된다.
하나님이 이와 같은 역사의 여러 사건(諸事件)을 종말시에 재현시켜서, 그것들을 재림주님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해결하도록 섭리하시는 것은 첫째로, 6000년의 죄악(罪惡)역사를 인간이 실수하지 않고 꾸려 나왔다고 하는 승리의 조건을 세움으로써, 역사상의 수많은 비참한 사건의 기억을 하나님과 인류의 마음에서 영원히 불식하기 위함이요, 둘째로 사탄의 참소조건을 일소(一掃) 고 사탄을 완전히 굴복시켜서 사탄까지도 영원히 구원하기 위함인 것이다.
(7)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
과거의 역사에 있었던 일정한 섭리적 사건들이 시대마다 반복(反復)되어 나타나는 것을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이라 한다. 동시성의 관계에 있는 섭리적 시대는 중심인물(中心人物), 사건(事件), 수리적기간(數理的期間) 등에 있어서 흡사한 양상(樣相)을 나타낸다. 이것은 섭리역사에서 어떤 섭리적 중심인물이 그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했을 때 그 인물을 중심으로한 섭리의 한 시대는 끝나게 되고 일정한 기간을 경과한 후에 유사한 다른 인물이 세워져서 전시대의 섭리를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같은 섭리역사(攝理役事)를 되풀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복귀섭리의 연장과 더불어 탕감조건이 점차로 가중되어 나타나므로, 완전히 전시대와 똑 같이 반복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차원을 높인 형태로 반복한다. 그 결과, 역사는 나선형(螺旋形)을 그리면서 발전하게 된다.
그러면 동시성섭리(同時性攝理)의 법칙은 어떻게 역사에 적용되었는가. 아담에서 아브라함까지의 2000년간기간(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의 가정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가 실패함으로써 메시아가 강림(降臨)할 수 없었으므로, 거기에 대한 동시성섭리로서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의 2000년동안 이스라엘민족(民族)을 중심으로 한 복귀섭리(복귀섭리시대)가 동시성섭리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2000년간 이스라엘民族을 중심한 복귀섭리가 예수의 십자가형으로 또 실패했으므로, 예수님이후 오늘날까지 2000년간의 기독교를 중심한 복귀섭리(復歸攝理)(복귀섭리연장시대)가 다시 이에 대한 동시성섭리로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후 예수까지의 2000년과 예수이후 오늘날까지의 2000년이 된다.
역사속에서 동시성(同時性)을 발견한 사람은 슈펭글러였다. 그는 모든 문화는 동일한 형식에 의하여 발전하게 되며, 따라서 두 문화사이에는 대응(對應)하는 유사(類似)한 사상(事象)이 나타나며, 대응(對應)하는 사상(事象)을 동시성(同時性)이라고 하였다.
슈펭글러와 거의 같은 때에 역사의 동시성을 발견한 사람이 토인비였다. 토인비는 투키디데스를 강의(講義)하면서, 고대 그리스 역사와 근대서양사가 동시대적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14년이라는 해가 옥스퍼드대학(大學)에서 고전(古典) 그리스사(史)를 가르치고 있던 나를 붙들었다. 1914년 8월, 기원전(紀元前) 5세기의 역사가(家) 투키디데스는 지금 내가 붙들린 것과 같은 경험(經驗)을 그는 이미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내 마음 가운데 떠오르게 되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가 정치적으로 분할(分割)됨으로써 여러 국가간(國家間)에 발생한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대전쟁으로 지쳐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의 대전쟁이 당시의 세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음을 예견(豫見)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의 경과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증명(證明)해 주었다. 나는 지금 고대 그리스사와 근대 서양사가 경험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동시대적이라는 것을 보았다. 이 두 개의 코스는 평행(平行)하고 있으며 이것들을 비교연구(比較硏究)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토인비는 고대 그리스역사와 근대 서양사를 동시성(同時性)으로 다루었는데, 통일사관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시대는 메시아강림준비시대(降臨準備時代)이며, 근대 서양사는 메시아재강림준비시대(再降臨準備時代)여서 다 함께 메시아를 맞기 위한 준비시대(準備時代)라는 점에 있어서 동시성의 본질적(本質的)인 의의(意義)가 있다는 것이다.
四. 역사의 변천(變遷)
이상 열거한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은 모두가 역사의 변천(變遷)에 작용된 법칙들이지만, 이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 상극(相剋)의 법칙, 탕감(蕩減)의 법칙, 분립(分立)의 법칙이다. 그 중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法則)은 역사의 변천에서의 발전(發展)의 법칙이 되고, 다른 셋은 합쳐서 전환(轉換)의 법칙이 된다. 전환(轉換)의 법칙은 선악(善惡)의 투쟁(鬪爭)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역사가 수수작용에 의하여 발전해 온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즉 정신과 물질, 인간과 환경(자연, 사회), 정부와 국민, 단체와 단체, 개인과 개인, 인간과 기계 등의 여러 가지 주체와 대상간에 수수작용이 원만히 행해짐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이 이루어져 온 것이다.
발전이란 성장, 발육, 향상 등을 말한다. 또한 새로운 質의 출현을 뜻하며, 이것들은 모두 불가역적(不可逆的)인 전진운동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요소가 공동목적을 중심으로 조화로운 수수작용을 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에 반하여 투쟁은 서로 목적이 다르고 이해가 다른 주체와 주체간에 생기는 것이다. 투쟁이 일어날 때 발전은 정지(停止)되거나 또는 오히려 후퇴(後退)한다. 따라서 역사상에 나타난 어떠한 종류의 발전도 예외없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주체와 주체는 상극(相剋)의 법칙에 따라 대립하고 투쟁하는데, 역사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주체의 상극이란 지도자와 지도자의 대립을 말한다. 예컨대 프랑스혁명(革命)에 있어서 중산시민층(부르주아지)의 지도자와 루이 16세를 중심으로 한 왕당파귀족(王黨派貴族)들, 즉 새로운 지도자와 낡은 지도자와의 투쟁이 그 예이다. 양자는 분립의 법칙에 따라 상대적으로 선(善)편의 입장(하나님의 섭리(攝理)에 적합한 입장)과 악(惡)편의 입장(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입장)으로 분리(分離)된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가 대상인 대중을 서로 자신편에 끌어들임으로써(따라서 이때 大衆은 二分 됨) 선(善)편의 진영(陣營)과 악편의 진영을 형성하여 싸우게 된다. 지도자 중 어느 쪽이 선(善)이고 어느 쪽이 악(惡)의 입장인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섭리에 기여(寄與)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대체로 낡은 사회의 지도자들은 자기 중심으로 기울어짐으로써 전제적(專制的) 지배를 일삼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악(惡)편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이 때에 하나님은 섭리의 진행에 보탬이 되는 새로운 지도자를 선(善)편의 입장에 세워서 그를 통하여 섭리하시곤 했다.
선악(善惡)의 투쟁에서 선편이 이기면 역사의 진행방향(進行方向)은 보다 선(善)한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후 역사가 일정한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게 되면 이때까지의 지도자는 다시 악(惡)편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보다 선(善)한 지도자가 또 다시 나타난다. 여기에 다시 선악(善惡)의 투쟁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선편이 이기면 역사의 방향은 더욱 선한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며, 드디어는 완전한 선(善)의 단계, 즉 창조이상세계가 실현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이 때 비로소 선악의 투쟁은 종말(終末)을 고한다. 이와 같이 투쟁은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다만 역사발전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구실을 다할 뿐이다.
선(善)편의 주체와 악(惡)편의 주체와의 투쟁에 있어서 악편이 강력할 경우, 하나님은 탕감의 법칙을 통하여 악편을 굴복시키곤 하셨다. 즉 선(善)편의 지도자로 하여금 악(惡)편 세력의 박해 또는 공격을 받으면서 고난과 역경의 길을 걷게 함으로써 그것을 조건으로 하여 악편의 지도자를 자연굴복시켰던 것이다. 만일 그래도 악(惡)편의 지도자가 굴복하지 않을 때는 선(善)편의 지도자의 수난(受難)을 조건으로 전체대중을 감화시켜서 악(惡)의 지도자를 고립시킨다. 이렇게 되면 악(惡)편의 지도자는 결국 굴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선악투쟁(善惡鬪爭)의 법칙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 법칙을 맞고 빼앗는 법칙 또는 맞고 빼앗는 전술(戰術)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까지 종교(宗敎)가 박해를 받으면서 전세계에 전파(傳播)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맞고 빼앗는 법칙에 의한 것이었다.
선악(善惡)의 투쟁에 있어서 선(善)편 인물들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악편이 승리할 경우, 역사는 물론 선한 방향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그대로 연장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 일정한 기간이 경과하면 하나님은 보다 선한 지도자를 다시 세워서 악(惡)편을 굴복시킨다. 그리하여 결국은 역사가 선편 방향으로 전환되도록 하나님은 배후에서 부단히 섭리해 나오신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의 인류(人類)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선악(善惡)의 투쟁(鬪爭)에 의해서 변천되어 왔다.
이와 같이 역사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발전해 왔으며, 선악의 투쟁에 의해서 방향이 전환(轉換)되어 왔다. 즉 역사는 발전과 전환이 반복되는 가운데에서 변천(變遷)되어 왔던 것이다.
이상으로 역사는 두 가지의 방향을 향하여 변천(變遷)해 왔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발전(進展)의 방향이며, 다른 하나는 복귀(轉換)의 방향이다. 발전이란 과학이나 경제, 문화가 발달하는 것을 의미하고 복귀란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創造理想世界)-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회복(回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역사에 두 방향이 생긴 것은, 인류역사가 재창조(再創造)역사임과 동시에 복귀섭리(復歸攝理)역사기 때문이다. 미래세계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문명의 세계임과 동시에 고도의 윤리사회(社會)로서 과학문명의 세계는 발전에 의해서 도달되고 윤리사회(社會)는 복귀에 의해서 도달하게 된다.
복귀(復歸)는 선악(善惡)의 투쟁(鬪爭)에 의해서 이뤄지기는 하지만 반드시 물리적(物理的)인 투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악(惡)편이 선(善)편에 순순히 굴복하면 평화적인 전환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선악의 투쟁을 종결짓는 최후의 투쟁, 즉 메시아가 직접 사탄을 굴복시키는 투쟁은 이름이 투쟁일 뿐, 사실은 참사랑을 가지고 평화적으로 사탄을 자연굴복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는 발전과 복귀라는 두 방향을 향하여 나선형(螺旋形)을 그리면서 변천(變遷)해 왔다. 그런데 발전은 영원히 계속하는데 대하여 복귀는 창조이상세계(善의 세계)가 회복되면 그것으로 끝나고, 그 이후에는 평화와 참사랑의 이상세계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역사의 법칙과 변천의 내용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五. 종래의 역사관(觀)
다음은 종래의 대표적인 역사관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래의 역사관(觀)과 통일사관(統一史觀)과의 비교에 참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순환사관(循環史觀)(운명(運命)史觀)
그리스인들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이 해마다 반복되고 순환되는 것처럼 역사도 순환적으로 변화(變化)한다고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건의 발생과 소멸은 운명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는 의미(意味)도 목표(目標)도 없다고 보는 입장이 순환사관(循環史觀) 또는 운명사관(運命史觀)의 입장이다. 대표적인 역사가는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면서 역사(Historiai)를 쓴 헤로도토스(Herodotos, B. C. 484~425)와 펠로폰네소스전쟁사(戰爭史)를 쓴 투키디데스(Thukydides, B.C. 460~400)이다. 운명론자(運命論者)인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전쟁(戰爭)의 줄거리를 이야기식으로 서술했으며,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戰爭)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충실히 사실적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양자에 다같이 공통적인 것은, 역사는 반복한다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이었다.
순환사관(循環史觀)은 역사의 경과(經過)를 필연적(運命的)인 것으로만 이해하였으며, 인간의 노력(努力) 여하에 따라서 역사의 동향(動向)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또 역사에는 목표가 없으므로 미래상(未來像)도 제시될 수가 없었다.
(2) 섭리사관(攝理史觀)
역사는 처음도 끝도 목표도 없으며, 순환운동을 반복할 뿐이라고 보는 그리스의 역사관에 대하여, 기독교는 역사에는 처음이 있으며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직선적(直線的)으로 진행한다는 등 순환사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사관을 제시했다. 즉 역사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시작하여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이며,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의 섭리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섭리사관 또는 기독교사관이라고 한다.
기독교사관(基督敎史觀)을 체계화(體系化)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가 쓴 신국론(神國論; The City of God)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신국(神國; Civitas Dei)과 악마에 유혹(誘惑)된 사람들이 사는 지상국(地上國; Civitas terrena)과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으며, 끝날에 가서는 신국(神國)이 승리하여 영원한 평안을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의 진행은 하나님이 미리 정한 계획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는 타락(墮落)에서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인류역사를 다음의 여섯 단계로 구분했다. (1)아담에서 노아홍수까지 (2)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3)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4)다윗에서 바빌론포로까지 (5)바빌론포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 (6)그리스도의 초림(初臨)에서 재림(再臨)까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여섯번째의 최후의 기간이 얼마나 계속되는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와 같은 기독교사관에 의하여 역사는 목표를 지향하는 의미있는 역사로 비춰지고 있으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움직이는 도구적(道具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역사관의 내용은 신비적(神秘的)인 것을 내포하고 있고, 논리성이나 법칙성이 결여(缺如)되어 있어서, 오늘날에 이르러 사회과학으로서 받아들이기는 어렵게 되어 있다.
(3) 정신사관(精神史觀; 진보사관(進步史觀))
르네상스시대(時代)에 들어오면서 신학적(神學的)인 역사관은 점차 모습을 감추게 되었으며, 18세기(世紀)의 계몽주의시대에 이르러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신(神)의 섭리가 아니고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새로운 역사관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역사가 인간의 정신(精神)의 진보에 따라 거의 일직선(一直線)으로, 그리고 필연적(必然的)으로 진보해 간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관(史觀)을 정신사관(精神史觀) 또는 진보사관(進步史觀)이라고 한다.
비코(G. Vico, 1668~1744)는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했으나 세속의 세계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는 하나님의 의지(意志)를 가지고서만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역사의 파악에 있어서 하나님은 역사의 배후(背後)에 숨게 되고 인간이 전면에 나오게 되었다.13)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역사에 작용한 신(神)의 힘을 배제(排除)했다. 즉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신(神)이 아니고 높은 교육을 받은 자들로서 과학을 받아들인 사람들 즉, 계몽사상가들이라고 하였다.
콩도르세(Condorcet, 1743~1794)는, 인간의 이성이 각성하면 역사는 과학적으로나 윤리적(倫理的)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진보(進步)한다고 주장했다.
칸트(I. Kant, 1724~1804)는, 역사의 목적은 인간의 모든 고귀(高貴)한 재능의, 여러민족(諸民族)의 결합체(結合體)에서의 실현이라고 하면서, 세계시민적(世界市民的) 의도(意圖)에 있어서의 인류의 역사를 제언(提言)하였다.
낭만주의(浪漫主義)의 철학자 헤르더(J. G. Herder, 1744~1803)는 인간성의 발전이 역사의 목표라고 하였다.
헤겔(Hegel, 1770~1831)은 역사를 정신(精神)의 자기실현(自己實現) 혹은 이념(理念)의 자기실현(自己實現)으로 보았다.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사는 이성적(理性的)으로 진행한다는 견해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을 그는 세계정신이라고 불렀다.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성은 인간을 조종하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 이것을 이성의 간계(奸計)라고 하였다. 헤겔의 역사관은 특히 정신사관(精神史觀) 또는 관념사관(觀念史觀)이라고도 불리운다.
헤겔은 프러시아에서 자유의 이념이 실현된 이성국가(國家)가 도래한다고 보고 있었으나 실제는 그렇게 되지 않았고 도리어 착취나 인간소외(疎外) 등의 反이성적(理性的)인 사회문제가 심화(深化)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헤겔의 역사철학에 반기를 들고 나타난 것이 마르크스의 유물사관(唯物史觀)이었다.
(4) 유물사관(唯物史觀)
헤겔은 이념(理念)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는 정신사관을 주장한데 대하여 마르크스는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원동력(原動力)은 물질적인 힘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물사관(唯物史觀; 革命史觀이라고도 함)을 제시하였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이념(理念)이나 정신(精神)의 발전이 아니라 생산력의 발전이다. 생산력의 발전에 상응(相應)하여 일정한 생산관계가 성립되며, 생산관계가 일단 성립되면 그것은 곧 고정화(固定化)됨으로써 드디어는 생산력의 발전에 대해서 질곡화(桎梏化)한다. 여기에서 낡은 생산관계를 유지(維持)하려고 하는 계급(支配階級)과 새로운 생산관계를 희구(希求)하는 계급(被支配階級)과의 사이에 계급투쟁이 전개된다. 따라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될 수 밖에 없으며,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계급투쟁이 그 극에 달하여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드디어 계급이 없는 자유의 왕국(王國) 곧 공산주의사회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 유물사관이 잘못이었다는 것은 오늘의 공산주의의 종언(終焉; 끝났음)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론的인 면에서 보더라도 유물사관의 법칙이라는 것은 전부 독단적(獨斷的)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예컨대 유물사관은 생산력의 발전을 물질적인 발전으로 보았는데, 생산력이 어떻게 해서 발전하는가에 대해서는 유물변증법적인 해명이 되어 있지 않다. 또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변혁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말 뿐이며, 실제로 계급투쟁에 의해서 사회가 변혁(變革)된 예는 한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유물사관의 이론은 전부가 허구(虛構)의 이론이었던 것이다.
(5) `생(生)의 철학(哲學)'의 사관(史觀)
딜타이(W. Dilthey, 1833~1911)와 짐멜(T. Simmel, 1858~1918)은 生의 성장(成長)과 더불어 역사는 성장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生의 철학(哲學)'의 사관이라고 한다. 딜타이에 의하면, 생(生)이란 인간적인 체험이며, 체험은 반드시 표현되어서 외부 세계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렇게 나타난 것이 역사의 세계요 문화의 세계이다. 따라서 종교, 철학, 예술, 과학, 정치, 법률 등의 인간의 문화체계(文化體系)는 生이 객관화된 것이다.
짐멜도 마찬가지로 역사란 生의 표현이라고 주장했다. 生이란 무한히 계속되는 유동(流動)이다. 그리고 `生(精神的인 生)'의 생성(生成)의 흐름이 역사가 된다.14) 그런데 `生의 철학(哲學)'의 사관은, 역사상에 나타나는 인간의 고통이나 불행은 生의 성장(成長)에 부수적(附隨的)으로 나타나는 불가피(不可避)한 현상이라고 간주한다. 따라서 인간이 어떻게 해야 고통이나 불행에서 해방되는가 하는 문제는, 이 철학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게 되어 있다.
(6) 문화사관(史觀)
제1차 세계대전 전(世界大戰 前)까지 유럽에 있어서 역사의 진보(進步)나 발전(發展)에 대한 신뢰(信賴)는 기본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있었으며, 역사는 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와 같은 직선적(直線的)이며 유럽 중심적인 역사상(像)을 깨뜨린 사람이 슈펭글러(O. Spengler, 1880~1936)였다.
슈펭글러는 역사의 기초를 문화라고 하면서 문화사관을 주창하였다. 그는 문화를 유기체(有機體)로 보았으며, 유기체인 이상(以上) 탄생과 함께 성장하고는 멸망(滅亡)하게 되어 있어서 문화의 사멸은 불가피(不可避)한 운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로마의 몰락에 대응(對應)하는 몰락의 징후(徵候)를 서양문명에서 발견하여 서양의 몰락을 예언했다. 이러한 서양의 몰락을 예지(豫知)하면서도 페시미즘에 빠지거나 불가피(不可避)한 운명(運命)에 움추리지 말고,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것을 역설(力說)했다. 거기에는 니체와의 강한 연결이 있었다. 슈펭글러의 역사관은 결정론적이다.
슈펭글러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獨自的)인 문화사관을 수립(樹立)한 사람이 토인비(A. J. Toynbee, 1889~1975)이다. 토인비에 의하면, 세계사를 구성(構成)하는 구극(究極)적인 단위는 지역도 민족도 국가도 아니며 개개의 문명이었다. 그리고 문명은 출생(出生; genesis), 성장(成長; growth), 좌절(挫折; breakdown), 해체(解體; disintegration), 소멸(消滅; dissolution)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문명발생(文明發生)의 원인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이나 사회환경으로부터의 도전(挑戰; challenge)에 대한 인간의 응전(應戰; response)에 있다. 창조적(創造的) 소수자(少數者)가 대중을 인도하면서 문명을 성장시켜 가지만, 머지 않아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성을 상실(喪失)하게 되어서 문명은 좌절한다. 이때 창조적 소수자는 지배적 소수자로 전화(轉化)하며, 문명의 내부에서는 내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주변에는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서 지배적 소수자에게서 이반(離反)한다. 그리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면서 혼란기를 맞게 되지만, 머지않아 지배적 소수자 중의 최강자에 의해 세계국가(世界國家)가 수립되면서 혼란기는 끝난다. 세계국가에 의한 압정하(壓政下)에서 내적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등종교(高等宗敎)를 키우고, 외적 프롤레타리아트(주변의 만족(蠻族)는 전투집단(戰鬪集團)(침략세력)을 형성한다. 그리하여 세계국가(世界國家), 고등종교(高等宗敎), 전투집단(戰鬪集團)의 3자(三者)가 정립(鼎立)한다. 얼마 안가서 고등종교는 지배층을 개종시킴으로써 세계종교가 되지만, 세계국가는 곧 붕괴되고 그와 더불어 문명은 죽음을 맞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의 문명이 소멸한 후,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침입(侵入)하는데, 이 외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고등종교로 개종됨으로써 다음 대(次代)의 문명을 탄생시킨다. 이 문명의 계승(繼承)을 친자관계(親子關係)라고 한다. 세계사속에서 발생하여 충분히 성장한 문명은 21개인데, 현존(現存)하는 문명은 모두 그 3대(三代)째에 속하며 기독교문명(서양과 그리스正敎 圈)), 回敎문명(文明), 힌두교문명, 극동문명의 네가지 系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토인비가 주장한 3대에 걸친 문명의 계승은 통일사관에서의 복귀기대섭리시대(復歸基臺攝理時代), 복귀섭리시대(復歸攝理時代), 복귀섭리연장시대(復歸攝理延長時代)라는 三代의 섭리적동시성(攝理的同時性)에 대응(對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토인비의 역사관의 특징은 결정론(決定論)을 배제하고, 비결정론(非決定論), 자유의지론(意志論)을 주장한데 있다. 즉 도전(挑戰)에 대하여 어떻게 응전(應戰)하는가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 나아갈 길은 결코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인간이 미래(未來)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토인비는 인류역사의 미래상(未來像)으로서 명백히 신국(神國; Civitas Dei)을 그리고 있으나, 비결정론(非決定論)의 입장에서 신(神)의 나라냐 어둠의 나라냐 하는 미래의 선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存在)의 법(法)인 사랑의 법 아래에서, 하나님의 자기희생은 인간 앞에 영적완성(靈的完成)이라고 하는 이상을 목표로 세워 놓고 인간에게 도전(挑戰)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에 있어서 이 도전(挑戰)을 수용할 것인가, 혹은 거부할 것인가는 완전히 자유인 것이다. 사랑의 법(法)은 인간이 죄인(罪人)이 될 것인가, 성인(聖人)이 될 것인가를 인류의 자유에 맡기고 있다. 즉 사랑의 법(法)은 인간의 개인적(個人的) 및 사회적(社會的) 생활을 하나님의 나라로의 전진 방안으로 삼든지 어둠의 나라로의 전진 방안으로 삼든지, 그 선택은 인류의 자유에 일임(一任)하고 있는 것이다.
토인비 역사관의 또 하나 특징은 근대사회가 망각(忘却)한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을 역사관속에 다시 도입(導入)했다는 점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역사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섭리에 의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모습의, 희미하고도 불완전한 영상(影像)에 불과하다고 본다.
(7) 역사관(觀)의 변천(變遷)과 통일사관(統一史觀)
이상으로 종래 역사관의 개요(槪要)에 대하여 설명하였는데, 여기서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비교(比較)하여, 통일사관이 종래의 역사관을 통일할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첫째로,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보는가 직선운동으로 보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그리스의 순환사관(循環史觀), 슈펭글러의 문화사관(文化史觀)은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파악했으며, 기독교사관(基督敎史觀)이나 진보사관(進步史觀), 유물사관(唯物史觀)은 역사를 직선운동으로 파악했다. 한편 生의 철학사관(哲學史觀)은 유동(流動)하는 生의 성장과 더불어 역사는 발전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진보사관의 변형(變形)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직선운동(直線運動)으로 파악하면 역사의 발전에 희망을 가질 수 있으나, 인류역사에 있어서의 좌절(挫折)과 부흥(復興)의 의미(意味)를 이해할 수가 없다. 한편, 역사를 원환운동으로 파악할 때, 국가나 문화의 멸망은 운명적인 것이 되어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다.
통일사관은 재창조(再創造)와 복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전진운동과 원환운동이라는 양면(兩面)을 가진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으로서 파악한다. 즉 역사는 목표(目標)-창조이상세계의 실현-를 향하여 발전해 간다는 전진적성격(前進的性格)과 더불어, 섭리적인물을 세워서 탕감법칙에 따라 잃어버린 창조이상세계를 복귀한다는 원환운동의 성격을 함께 지닌 나선형운동(螺旋形運動)의 역사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로, 결정론(決定論)이냐 비결정론(非決定論)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역사는 운명에 따라 필연적으로 운동한다는 그리스의 운명사관(運命史觀)과 슈펭글러의 문화사관(文化史觀)은 결정론(決定論)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진행한다는 섭리사관도 결정론이다. 이성 또는 세계정신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헤겔의 정신사관(精神史觀)이나, 역사는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고 하는 유물사관도 결정론이다. 이것들은 모두 인간을 초월(超越)한 어떤 힘이 역사를 움직인다고 하는 견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결정론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언제나 역사의 힘이나 법칙에 끌려다니는 피동적(被動的) 존재(存在)에 불과하며, 인간이 자유의지에 의한 노력에 의해서 역사를 개혁(改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한편 토인비는 자유의지론(意志論)의 입장에서 비결정론(非決定論)을 주장했다. 즉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역사가 가는 길이 선택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인비의 비결정론(非決定論)의 입장에서 볼 때 역사의 미래상은 불분명(不分明)하며, 따라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관은, 역사의 목표는 결정적(決定的)이지만 섭리적인 사건의 성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책임분담 외에 인간의 책임분담 수행(遂行)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역사의 과정은 비결정론이라고 본다. 즉 통일사관은 결정론과 비결정론의 양(兩)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이론을 책임분담론(責任分擔論)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비교해 볼 때 종래의 역사관은 각각 통일사관의 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통일사관이 총합적(總合的), 통일적(統一的)인 역사관이라는 것도 알게된다. 그런데 토인비의 역사관에는 통일사관을 닮은 내용이 많이 있다. 섭리적으로 볼 때, 토인비의 역사관은 통일사관이 출현하기 위한 전단계를 준비한 史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토인비의 사관은 종래의 역사관과 통일사관을 연결하는 교량의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다.
六. 섭리사관(攝理史觀)과 유물사관(唯物史觀)과 통일사관(統一史觀)의 비교
끝으로 종래의 사관(史觀)중에서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섭리사관(기독교사관)과 유물사관, 그리고 통일사관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비교해 보고자 한다(그림 8-1 참조). 즉 역사의 시작(始作), 성격(性格), 발전의 원동력(原動力), 변천(變遷)의 법칙(法則), 투쟁(鬪爭), 종말(終末)의 현상?사건(事件), 종말(終末)을 고(告)하는 역사, 이상세계 등의 항목(項目)을 가지고 비교해 보려는 것이다. 서로 비교해 봄으로써 각각의 사관(史觀)의 특징을 보다 단적(端的)으로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1) 역사의 시작(始作)
섭리사관은 창조된 인간의 타락에서부터 역사가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하였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대하여 유물사관은 인간이 동물계에서 분리(分離)된 후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사회는 원시공동체사회라고 하였다. 통일사관은 섭리사관과 마찬가지로 창조된 인간의 타락에서 역사가 시작됨으로써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했다고 본다.
(2) 역사의 성격(性格)
섭리사관은 역사를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역사로 보며, 유물사관은 계급투쟁사(階級鬪爭史)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은 재창조역사(再創造歷史)와 복귀역사(復歸歷史)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역사를 파악한다.
(3)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原動力)
섭리사관에 의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 섭리사관에 있어서는, 역사를 발전시킨 원동력(原動力)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유물사관에 있어서는, 물질적인 힘인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원동력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統一史觀)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책임분담이라고 본다. 기독교의 섭리사관에 의하면, 하나님이 역사 전체를 섭리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상의 모든 비참(悲慘)한 사건도 하나님이 이러한 사건을 용인(容認)하였다는 논리가 성립되게 된다. 그러나 통일사관에서 보면, 인간이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역사상의 모든 비참(悲慘)한 사건의 책임도 인간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다.
(4) 역사변천(變遷)의 법칙(法則)
섭리사관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者)들의 신국(神國)과 악마(惡魔)를 따르는 者들의 지상국(地上國)이 싸워서 마지막으로 신국(神國)이 승리한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역사의 법칙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유물사관은 유물변증법을 역사에 적용하여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意志)로부터 독립한 일정한 생산관계를 맺는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일정(一定)한 발전단계에 대응(對應)한다, 생산관계가 토대(土臺)이고 의식(意識)의 여러 형태(諸形態)는 상부구조(上部構造)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存在)가 의식(意識)을 결정한다,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에 대하여 질곡화(桎梏化, 족쇄가 됨)할 때 혁명이 일어난다 등을 유물사관의 법칙으로 삼고 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은 역사에 작용한 법칙으로서 창조의 법칙과 복귀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5) 종말(終末)에 나타나는 투쟁(鬪爭)
섭리사관에 있어서는, 섭리역사가 종말(終末)에 이르게 되면 신국(神國)과 지상국(地上國)사이에 최후의 투쟁이 벌어진다고 한다. 성서(聖書)에 의하면,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천사(天使; 미가엘)와 악마가 싸운다고 되어 있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최후의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사회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치열한 계급투쟁이 벌어진다고 되어 있다. 통일사관에 있어서 역사는 선악(善惡)의 투쟁사이며, 종말기에서의 선악(善惡)의 투쟁은 세계적인 규모(規模)로 전개되는 바, 민주주의세계와 공산주의세계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이 투쟁에서 공산주의가 패배(敗北)하고 자유세계가 승리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메시아에 의하여 양편(兩便)의 화해가 이루어져서 통일(統一)되게 된다.
(6) 종말(終末)의 현상(現象)
성서(聖書)에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마태 24:29)고 한 기록에 근거하여 섭리사관은 종말에 이르러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일어난다고 한다. 유물사관에서는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빈곤(貧困), 억압(抑壓), 예속(隷屬), 타락(墮落), 착취(搾取)가 더욱 더 증대하고 경제(經濟)破綻과 사회혼란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관(統一史觀)은, 역사가 종말에 이르게 되면 기존(旣存)의 모든 가치관이 무시되고 붕괴되어서, 특히 성도덕(性道德)의 퇴폐가 극에 달하여서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大混亂)에 빠진다고 본다.
(7) 종말(終末)의 사건(事件)
섭리사관에 의하면, 종말에 최후(最後)의 심판(審判)이 벌어진다. 즉 성서에 의하면, 끝날의 심판때에 양(羊)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고(마태 25:32) 양(羊)편에 속한 자, 즉 하나님을 따르는 者들은 축복(祝福)을 받을 것이며(마태 25:34), 염소 편에 속한 자, 즉 악마를 따르는 者는 영원한 불속에 던져진다고 기록되어 있다(마태 25:41). 유물사관에 의하면, 폭력혁명(暴力革命)으로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인류의 前史는 끝난다고 되어 있다. 통일사관은 종말에 있어서 세계적인 규모(規模)로 선편과 악편이 분립된 후 선편이 악편에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악편을 자연굴복(自然屈伏)시킨다고 보고 있다.
(8) 종말(終末)을 고(告)하는 역사
이 항목에서는 끝날에 무엇이 끝나는가 즉 종말(終末)의 때에 어떠한 역사가 끝나는가?를 다루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종말 때에 죄악사(罪惡史)가 끝난다고 한다. 즉 섭리사관(攝理史觀)에 의하면, 신국(神國)이 지상국(地上國)에 승리함으로써 죄악사(罪惡史)가 종말을 고한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타도(打倒)함으로써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통일사관에 있어서는, 선(善)편이 참사랑으로 악(惡)편을 자연굴복시켜서 장자권(長子權)을 복귀함으로써 죄악사(罪惡史)와 선악투쟁사(善惡鬪爭史)가 종말을 고하게 된다.
(9) 도래(到來)하는 이상세계(理想世界)
역사가 종말(終末)을 고한 뒤의 세계는 어떠한 세계일 것인가? 섭리사관에 의하면, 역사의 종말의 심판이 끝난 뒤에는 새 하늘 새 땅의 시대(時代)가 도래한다고 되어 있다(계 21:1~2). 그러나 그 새 하늘, 새 땅의 시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시대인가는 전연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물사관에 의하면, 혁명후에는 계급이 없는 자유의 왕국인 공산주의사회가 실현된다고 한다. 통일사관에서는, 전인류가 참부모 되시는 메시아를 맞이하여 한가족세계(一家族世界)를 이루는 창조이상세계, 즉 지상천국(地上天國)이 실현된다고 본다.
이상의 세 가지의 사관(史觀)에 관한 9가지의 항목의 요점을 일괄(一括)하여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8-3과 같다. 도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독교사관은 신비적이고 비합리적(非合理的)이어서 오늘날에 이르러 설득력을 가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는 있으나, 법칙이 제시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역사의 종말에 이르러 왼편의 염소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준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또 끝날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유물사관(唯物史觀)은 기독교사관에 비하여 도리어 현실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고 설득력도 있어서 최근까지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그리고 한 때는 세계의 거의 절반을 적화시키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러서는 공산주의사회가 자유의 왕국도, 부(富)가 넘치는 사회도 아닐 뿐 아니라 완전히 그 반대였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서, 이제 그 사회는 이 지상(地上)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본래 공산주의는 토인비의 말과 같이 기독교가 그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세속화(世俗化)하였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한 사탄편으로부터의 참소장, 고발장으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유물사관은 마치 기독교사관을 뒤집어 놓은 것같은 외형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에 관련하여 칼 뢰비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적유물로(史的唯物論)이 이상적 토대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은…… 유대人의 낡은 메시아 사상과 예언자 주의(主義), 그리고 유대적인 끈질기고도 절대적인 정의(正義)의 고집이다.
공산당선언은 과학적 예언이라는 전도(顚倒)된 형식으로 `희망을 거는 者에 대한 확신'이라는 신앙의 특징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적대하는 두 진영 즉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간의 최종적인 적대가, 역사 최후의 시기에 있어서의 기독교와 반기독교와의 최후의 싸움에 대한 신앙과 일치(一致)하고 있으며,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가 선민(選民)의 세계사적 사명과 유사(類似)한 것은 하등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피억압(被抑壓) 계급의 세계적 구원의 역할은 십자가부활(十字架復活)과의 종교적 변증법에 일치하며, 필연의 王國이 자유의 왕국으로 변하는 것은 옛 에이온(old aion)이 새로운 에이온(new aion)으로 변하는 것과 일치(一致)한다.
공산당선언에 서술되어 있는 것같은 역사의 전과정은, 역사가 뜻있는 최종목표를 향하는 섭리에 의하여 구원의 사건으로 해석하는 유대교=기독교적인 해석의 일반적 도식(圖式)을 반영하고 있다.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은 정치, 경제학의 용어를 사용한 구원사(救援史)인 것이다.
통일사관은 기독교사관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서 나타난 것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사관의 신비성(神秘性)과 비합리성(非合理性)을 극복하고 현실적이고도 합리적인 역사관으로 제시된 것으로서, 공산주의의 기독교사관에 대한 참소를 극복(克服)할 수 있는 유일(唯一)한 사관이다. 기독교사관은 악마를 따르는 지상국(地上國) 사람들이 영원히 벌을 받는다고 했으며, 유물사관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들을 폭력的으로 타도(打倒)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관은 선(善)편이 악(惡)편을 참사랑으로 자연굴복시켜 악(惡)편도 선(善)편으로 복귀시킴으로써 전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참된 이상세계(理想世界)에서는 전인류가 모두 행복(幸福)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통일사관이야 말로 그것을 보장(保障)하는 것이다.
또 유물사관은 기독교사관을 미신(迷信) 또는 신화(神話)라고 공격(攻擊)하면서, 유물사관 자체는 법칙성(法則性)을 가진 과학적인 역사관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나, 유물사관이 제시한 법칙은 사실상 역사적사실에 맞지 않는 허구의 법칙에 불과하며, 혁명을 합리화(合理化)하기 위한 자의적(恣意的)인 가짜 법칙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관의 법칙은 예외없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一致)하는 문자 그대로의 법칙들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