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頭翼)사상 요강
제7장 예술론 (藝術論)
( Theory of Art )
일반적(一般的)으로 넓은 의미의 문화는 정치, 경제, 교육, 종교, 사상, 철학, 과학, 예술 등 모든 인간활동의 총화(總和)를 뜻하는 것으로서, 그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예술(藝術)이다. 즉 예술은 문화의 정수(精髓)이다. 그런데 오늘날 자유주의사회이거나 구 공산주의사회(舊 共産主義社會)이거나 간에 또 선진국이나 후진국을 막론하고 예술은 계속 저속화(低俗化)해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퇴폐(頹廢)한 예술은 퇴폐한 문화를 낳는 법이다. 오늘의 저속화(低俗化)의 상태가 이대로 지속되면 세계의 문화는 일대(一大) 위기(危機)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신문화의 창건(創建)을 위해서는 참다운 예술사회가 세워져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거(過去)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마다 예술은 항상 지도적(指導的)인 역할(役割)을 다 해왔다. 예컨대 15세기(世紀)경의 르네상스시대에 있어서도 그 시대의 선구자적(先驅者的)인 역할(役割)을 한 사람들은 예술가들이었다.
또 일찍이 공산주의혁명에 있어서도 예술가들의 공헌(貢獻)은 적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혁명에 있어서 고르키의 작품이, 또 중국혁명에 있어서 노신(魯迅)의 작품이 혁명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신문화 창건에 있어서도 참다운 예술활동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구소련(舊蘇聯)을 중심한 공산주의의 예술은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이라고 불리웠다. 공산주의자들은 예술을, 혁명을 위한 중요한 무기(武器)의 하나로 여겼으며, 예술을 통하여 자본주의사회의 모순(矛盾)을 폭로하고 인민대중(人民大衆)을 혁명의 대열로 몰아 세우곤 하였다.
오늘날 공산주의사회의 소멸(소멸(消滅))과 함께, 아니 그 이전(以前)에 이미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사라져 버렸지만, 한 때 공산세계의 예술계(藝術界)를 휩쓸었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과 유물사관(唯物史觀)이라고 하는 확고한 신념에 의한 예술론이었으며, 철학적 근거가 희박(稀薄)한 자유주의사회의 예술론은 이에 비해서 취약성(脆弱性)을 드러내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날 사회주의리얼리즘이 비록 사라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극복(克服)되지 않은 채 사라졌기 때문에 그 소멸(消滅)은 표면상(表面上)의 소멸(消滅)일 뿐이며, 다시 재현(再現)할 가능성(可能性)을 전연 배제(排除)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재현(再現)의 가능성(可能性)까지도 완전(完全)히 일소(一掃, 한 번에 청소)하기 위해서는 同리얼리즘의 철저한 극복(克服)이 반드시 요구(要求)된다. 즉 사회주의리얼리즘의 극복을 위한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여기에 그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으로서 통일사상의 예술론, 즉 통일예술론(藝術論)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상(以上)을 바꾸어 말하면, 통일예술론은 오늘날의 예술의 저속화(低俗化) 현상(現象)을 방지(防止)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새로운 철학(神學)에 근거한 대안(代案)을 제시코자 한다.
그것은 新문화사회(社會)의 창건에 공헌한다고 보기 때문이다.하나님의 섭리(攝理)로 볼 때 미래사회는 진실사회(眞實社會)요 윤리사회(社會)일 뿐 아니라, 예술사회(藝術社會)이기 때문에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의 제시(提示)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一. 예술론(藝術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새로운 예술론(藝術論)은 물론 통일원리(統一原理)를 근거로 하고 있다. 그런데 그 통일원리적 근거 가운데 제일 주요한 부문(部門)은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과 창조성(創造性), 기쁨과 닮기의 창조, 수수작용 등에 관한 이론이다.
먼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창조성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나님의 우주창조의 목적은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실현(實現)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對象)으로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은 위대한 예술가(藝術家)이고, 우주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쁘기 위해서 우주(宇宙)를 창조했다는 말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인간을 기쁨의 대상으로 지으시고, 그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의 기쁨의 대상으로 만물(萬物, 자연)을 창조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인간중심으로 볼 때에는 만들어진 목적 즉 피조목적(被造目的)이며, 그것이 곧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다. 전체목적은 하나님 또는 전체(민족, 국가, 인류 등 개인에 대한 전체)에 대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며, 개체목적은 타인(他人) 또는 전체(全體)로부터 자신이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피조목적을 인간이 달성하게 하기 위해서 욕망(欲望)을 부여하셨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 또는 전체(全體)를 기쁘게 하면서 자신도 기뻐하고자 하는 충동(욕망)을 항상 갖고 있다. 인간의 예술활동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창작(創作)活動은 전체목적 즉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 주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하게 되고, 감상활동은 개체목적 즉 자신이 기쁨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원상론에서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와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능력, 즉 창조의 2단구조(構造)의 형성 능력이었다(원상론의 신성(神性)을 참조).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형성이란 로고스(구상(構想))의 형성을 의미하고,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이란 로고스에 따라 형상(形狀)인 질료(質料)를 사용하여 직접 만물을 만듦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창조과정이 그대로 인간의 예술활동에 있어서의 창작의 2단구조(構造)의 형성(形成)으로 나타난다. 즉 먼저 구상을 세우고, 다음에 재료를 사용하여 구상을 실체화함으로써 작품을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은 기쁨과 닮기의 창조에 관하여 살펴보자.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기쁨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지으셨다. 주체의 기쁨은 자체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을 닮은 대상으로부터 오는 자극을 통하여 얻어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도록 형상적 실체대상으로 인간을 지으시고, 상징적 실체대상으로 만물을 지으신 것이다. 이것을 예술론에 적용하면, 창작(創作)하는 예술가는 기쁨을 얻기 위하여 자기의 성상과 형상을 닮도록 작품을 만들며, 감상자는 작품을 통하여 자기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相對的)으로 느낌으로써 기뻐한다는 논리(論理)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수작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相對的) 관계하(關係下)에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체(合性體) 또는 번식체(繁殖體)를 이룬다. 번식체(繁殖體)를 이룬다는 말은 만물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원상내(原相內)의 이러한 수수작용을 예술론에 적용하면 창작(創作)은 주체(藝術家)와 대상(素材)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감상도 주체(鑑賞者)와 대상(作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작에 있어서나 감상에 있어서 주체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대상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라는 양면(兩面)이 요구된다. 그것은 가치론(價値論)에서 말한 것처럼 가치(價値)(진(眞)-선(善)-미(美))는 주체적 조건과 대상적 조건과의 상대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二. 예술(藝術)과 미(美)
(1) 예술(藝術)이란 무엇인가
예술(藝術)이란 미(美)를 창조하거나 감상하는 인간 활동이다. 인간의 마음에는 지(知)-정(情)-의(意)라는 세 가지 기능이 있는데, 그 각각의 기능에 의한 활동으로 인하여 문화활동의 여러 분야가 형성(形成)된다. 지적(知的)인 활동에 의하여 철학이나 과학 등의 분야(分野)가 형성되고, 의적(意的)인 활동에 의하여 도덕과 윤리 등의 실천적 분야(分野)가 형성되고, 정적(情的)인 활동에 의하여 예술분야가 세워진다. 따라서 예술이란 미(美)를 창조하고 감상하는 정적(情的)인 활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 예술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신 목적은 대상을 사랑함으로써 기쁨을 얻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대상인 작품을 창작 또는 감상하는 것도 기쁨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예술이란 미(美)의 창작과 감상에 의한 기쁨의 창조활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영국의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허버트 리드(H. Read, 1893~1968)는 모든 예술가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의욕(意欲)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예술이란...... 마음의 즐거움의 형식을 만드는 시도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통일사상의 예술의 정의(定義)와 거의 같은 예술관인 것이다.
(2) 예술(藝術)과 기쁨
앞에서 말한대로 예술(藝術)이란 미(美)의 창조(創造), 곧 기쁨의 창조(創造)이다. 그러면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원리강론(原理講論)에 「무형(無形)이거나 실체(實體)이거나 자기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대로 전개된 대상(對象)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刺戟)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상대적으로 느낄 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었어서, 대상(對象)의 성상(性相)-형상(形狀)과 주체(主體)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이 서로 닮았을 때에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존재론(存在論)과 인식론(認識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우주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므로 그 몸 안에는 우주의 모든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을 잠재적(潛在的)으로 지니고 있다. 가령 꽃의 경우 그 꽃의 色, 形, 부드러움 등의 원형(原型)이 內界(몸속)에도 있는 바, 그 원형(原型)과 현실의 꽃에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통하여 합치(合致)되는 체험이 바로 인식(認識)이며 그 일치에서 기쁨의 감정은 솟아난다. 따라서 대상(對象)의 미(美)를 감지(感知)하려면 먼저 그 원형(原型)이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원형(原型)이 어떻게 하면 떠오르는가? 첫째로 필요(必要)한 것은 심령(心靈)의 맑음이다. 심령(心靈)이 맑아지면 원형(原型)은 스스로 직관적(直觀的)으로 떠오른다. 다음은 교양(敎養)이다. 미(美)의 여러 가지 형태를 체험으로나 이론적으로 배움으로써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있던 원형(原型)이 인식할 때에 쉽게 자극되어서 표면화되기 쉽게 된다.
l) 성상(性相)의 상사성(相似性)
이러한 「닮음」에 있어서 성상적(性相的)으로 닮는다는 것은 사상, 구상, 개성, 취미, 교양, 심정 등의 일부 또는 전부가 주체(主體) 및 대상(對象)간에 서로 닮는것을 뜻한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사상(思想)이다. 대상(對象) 속에서 자기와 같은 사상(思想)을 발견할 때 아름답게 보인다. 따라서 사상(思想)을 풍부하고 깊게 찾고 있으면 그만큼 기쁨의 법위가 넓어지고 또한 깊은 감동을 받게된다.
그러므로 사(思)상을 넓고 깊게 가진다는 것은 미(美)를 감(感)수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의 상사성(相似性)이란 대상(작품)속에 있는 작자의 심정, 사상 등의 성상적(性相的)인 측면과 주체(主體)(감상者)의 심정 사상 등의 성상적인 측면이 서로 닮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형상(形狀)의 상사성(相似性)
형상(形狀)에 속하는 것은 事物의 형태, 色, 音, 냄새 등 오관으로 느끼는 요소들이다. 이리한 것이 우리들의 몸속에 있는 원형(原型)과 일치될 때 아름다음이 느껴지면서 기쁨의 감정이 솟아난다.
인식론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외적 세계(世界)는 인간의 몸을 확대시켜 전개한 것이어서, 외계(外界)의 모든 요소들은 원형적(原型的)으로 內界(인간의 몸)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즉 事物(만물, 작품)의 모양, 색, 소리, 냄새 등의 형상적(形狀的) 요소는 원형적으로 즉 축소된 형태로서 인체속에 이미 갖추어져 있는 바, 이것이 곧 형상(形狀)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이다. 이 닮은 요소들이 인식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면서 情을 자극(刺戟)할 때 기쁨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의 내용인 상이성(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에는 상보성(相補性)이란 일면도 있다. 즉 주체는 대상 속에서 자기에게 부족된 특성을 보고 기뻐하는 일면이 있다. 男性은 女性속에서 자기에게 부족된 부드러움이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한다.
그것은 첫째, 인간은 단독으로는 전일자(全一者)가 아니며, 신(神)의 양성(陽性)을 그 속성(屬性)으로 지니는 남성(男性)과, 신(神)의 음성(陰性)을 그 속성(屬性)으로 지니는 여성(女性)으로 분립(分立)되었다가, 그 양자가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함으로써 신의 이성성상의 중화(中和)의 모습을 완전히 닮도록 만들어진 까닭이다. 그런데 이 상보성(相補性)이 一종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으로 보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마음의 잠재의식(潛在意識)속에 자기의 부족(不足)한 부분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영상(映像)올 찾고 있어서 현실적으로 그 映상대로의 대상올 다하게 될 때 그 부족(不足)한 부분이 실제로 채워져서(相補性)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때의 그 대상(對象)은 감상자의 마음속에 지녔던 영상(映像)과 같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 상보성(相補性)은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의 성격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둘째는 신(神)의 하나 하나의 개별상(個別相)을 나누어 갖고 있어서 자기(自己)에게 부족한 면을 서로 타인을 통하여 발견하여 그것을 서로 주고 받음으로써 기뻐하도록 창조된 까닭이다. 미(美)의 이러한 측면도 상보성(相補性)이라고 하며, 넓은 의미의 상대성(相對性)에 포함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인간이 본래 신(神)에 있어서 하나인 것이 둘(陽과 陰) 혹은 다수의 개별성(個別性)으로 분립, 전개된 것이어서 그들이 합하여 보다 완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책상과 의자와 같이 서로 상보(相補)함으로써 둘이 하나의 완전한 것으로 되는 경우도 허다(許多)하다. 보다 완전한 것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보다 더 많이 실현됨을 의미하므로 거기에 만족과 기쁨이 생겨나는 것이다. 단 상보성(相補性)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근저(根底)에 보다 깊은 차원에서의 상대성(相對性)이 있어야 한다. 공동(共同)목적이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과 같은 공통성(共通性)이 없는 단순한 차이(差異)에서는 미(美)나 기쁨은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3) 미(美)란 무엇인가
「원리강론(原理構論)」에 의하면, 사랑이란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이고, 美란 「대상이 주체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자극)이다. 대상이 광물이나 식물일 경우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은 물질적인 힘이지만, 주체(인간)는 그것을 정적(情的)인 자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비록 대상이 주체에게 자극(힘)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주체가 그것을 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 경우 이러한 자극은 정적인 자극이 될 수 없다. 문제는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오는 요소(要素)를 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느냐 혹은 받아들이지 않느냐하는 점에 있다. 대상으로부터 오는 요소를 주체가 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자극은 정적인 자극이 된다. 따라서 미(美)란 대상이 주체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인 동시에 정적인 자극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미(美)는 진(眞)이나 선(善)과 더불어 가치의 하나이므로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미(美)는 정적(情的) 자극으로서 느껴지는 대상가치(對象價値)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힘을 사랑이라 하고, 대상이 주체에게 주는 정적인 자극을 미(美)라고 했는데, 실제의 경우 인간끼리는 주체와 대상이 다 같이 사랑과 미를 서로 주고 받는다. 즉 대상도 주체를 사랑하고, 또 주체도 대상에게 미를 준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하면 미(美)에도 사랑이, 사랑에도 미(美)가 내포되기'때문이다. 주체에서 대상으로 혹은 대상에서 주체로 정적(情的)인 힘이 전달될 때, 보내는 측에서는 그것을 사랑으로서 보내고, 받는 측에서는 정적(情的)인 자극 즉 미(美)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이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미(美)를 정의했는데 종래의 철학자(플라톤과 칸트)들에 의한 미(美)의 정의를 다음에 소개한다.
플라톤은 대상속에 존재하는 미(美) 그 자체 즉 미(美)의 이데아를 미(美)의 본질로 보았으며, 인간이 느끼는 미(美)에 대해서는 미(美)란 청각과 시각을 통하여 주어지는 쾌감(快感)이다'라고 하였다. 칸트는 미(美)를 대상의 주관적 합목적성(合目的性) 혹은 대상의 합목적성(合目的性)의 형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은 자연의 대상에는 만들어진 목적이 없지만, 인간이 주관적으로 거기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한 후, 그것으로부터 쾌감이 얻어지면 인간에게 그 쾌감을 주는 것이 미(美)라는 의미이다.
(4) 미(美)의 결정(決定)
미(美)는 어떻게 해서 결정되는 것일까. 원리강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개성체(個性體)의 창조본연의 가치는 그 자체내에 절대적인 것으로 내재(內在)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성체가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중심하고 어떠한 대상으로 존재하는 목적과 그것을 대하는 인간 주체의 창조본연의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결정된다…… 예를 들면, 꽃의 미(美)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그 꽃을 창조하신 목적과 인간의 미(美)에 대한 창조본연의 추구욕이 합치(合致)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창조이상에 입각(立脚)한 인간의 미(美)에 대한 추구욕이 그 꽃으로부터 오는 정적(情的)인 자극으로 말미암아 충당(充當)되어 인간이 완전한 기쁨을 느낄 때, 그 창조본연의 미(美)가 결정된다.
미(美)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며, 가치추구욕을 가진 주체가 대상과 수수작용할 때에 결정된다. 즉 대상으로부터 오는 정적인 자극을 주체가 정적(情的)으로, 주관적으로 판단함으로써 미(美)가 결정되는 것이다.
(5) 미(美)의 요소(要素)
미(美)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느껴지는 것이다. 대상 속에 있는 요소가 주체에게 정적인 자극을 주어서 그것이 미(美)로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면 주체를 정적으로 자극하는 요인이 된 것, 즉 미(美)의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대상의 창조목적과 물리적 제요소간(諸要素間, 여러 요소)의 조화이다. 즉 회화(繪畵)에 있어서 선(線), 형(形), 색채(色彩), 공간(空間)과, 음악(音樂)에 있어서 음(音)의 고저(高低), 장단(長短) 등의 물리적 제요소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잘 조화하고 있을 때에, 목적중심(目的中心)의 조화(調和)가 주체에게 정적인 자극을 주게 되면, 주체는 그것을 주관적으로 판단하여 미(美)로서 느끼게 된다. 주체에 의해 판단된 미(美)가 바로 현실적인 미(美)이다.
조화에는 공간적(空間的) 조화(調和)와 시간적(時間的) 조화(調和)가 있다. 공간적 조화란 공간적인 배치(配置)에 의한 조화이고, 시간적 조화란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생기는 조화이다. 공간적 조화를 지닌 예술에는 회화(繪畵), 건축(建築), 조각(彫刻), 공예(工藝) 등이 있고, 시간적 조화를 가진 예술에는 문예(文藝), 음악(音樂) 등이 있다. 이것들을 각각 공간예술, 시간예술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연극, 무용 등의 예술이 있는 바, 이러한 예술은 시간적 조화와 공간적 조화를 함께 나타냄으로써 시공간적(時空間的) 예술(藝術) 혹은 종합예술이라고도 한다. 여하간에 조화가 미(美)의 감정을 일으키는 요인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形而上學)에서 미(美)란, 질서와 균형과 피한정성(被限定性; 한정된 크기를 갖는 것) 속에 있다고 하였으며,11) 리드는 예술작품에는 중력(重力)의 중심으로 비유할 만한 상상적(想像的)인 어떤 조합점(照合點)이 있어서 이 점을 둘러싸고 선(線), 면(面), 부피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고 안정되도록 배정되어 있다. 모두 이와 같은 방식의 구성상(構成上)의 목적은 조화이며, 조화는 바로 우리들의 미감(美感)의 만족이다'12)라고 하였다. 양자 모두가 미(美)의 요소가 조화에 있다는 점(點)에서 일치하고 있다.
三. 예술활동(藝術活動)의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창작(創作) 및 감상(鑑賞)
예술활동에는 창작과 감상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예술활동의 이러한 두 측면은 분리된 별개의 측면이 아니라 통일적인 하나의 활동의 두 측면이다. 즉 창작에 있어서도 감상이 뒤따르게 되고, 감상에 있어서도 주관작용(主觀作用)에 의한 부가창조(附加創造, 後述)가 뒤따르게 된다. 즉 창작과 감상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의 예술활동에 창작과 감상이라는 두 측면이 있을까. 창작은 무엇 때문에 필요하며 감상은 또 무엇 때문에 필요한가. 왜 창작과 감상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關係)에 있는가. 이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자.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보면, 창작과 감상은 두 가지 욕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실천활동(實踐活動)이다. 즉 창작은 가치실현욕(價値實現欲)에 근거하여 행해지며, 감상은 가치추구욕에 근거하여 행해진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이 두 가지 욕망을 갖게 되었을까. 그것은 이중목적(二重目的)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즉 가치실현욕은 전체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그리고 가치추구욕은 개체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추진력(推進力), 충동력(衝動力)으로서 인간에게 욕망을 부여하셨던 것이다.
전체목적은 비록 인간에게 자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에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조목적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욕망이, 아울러 잠재의식 속에 주어져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진실되게 살고, 선(善)한 행위를 하고, 미(美)를 창조하면서 인류에게 봉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창작은 이와 같은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가치실현욕)에 기인한다. 인간은 또 자기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대상에서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기쁨을 얻고자 한다. 이것이 가치추구욕이다. 감상이라는 행위는 이 가치추구욕에서 유래된다. 이와 같이 감상은 개체목적을 수행하고자 하는 욕망에 기인하고 있다.
그런데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창조목적이지만 인간 측에서 말하자면 피조목적이다. 이 목적에 하나님과 전체를 기쁘게 하고자 하는 전체(全體)목적과 자기도 기쁘고자 하는 개체(個體)목적의 두 가지가 있다.
이와 같이 창작은 작가(作家)가 대상의 입장에서 주체 즉 하나님과 인류 등 전체를 위하여 가치(미(美))를 나타내는 행위이며, 감상은 감상자가 주체의 입장에서 대상인 작품으로부터 가치(美)를 향수(享受)하는 행위이다. 어느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유래(由來)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와 같은 본연의 입장을 떠나서 자기중심적인 예술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로 안타까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장차 창작과 감상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되면 예술가는 사명감(使命感)을 가지고 본연의 예술활동을 영위(營爲)할 수 있게 될 것이다.
四. 창작(創作)의 요건(要件)
예술에 있어서 창작활동(創作活動)의 측면을 이해하려면 창작의 요건(要件)을 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창작에는 창작의 주체(作者)가 갖추어야 할 요건, 즉 주체의 요건과 대상(작품)이 구비해야 할 요건, 즉 대상의 요건이 있다. 그 외에 창작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 등도 창작에 있어서의 주요한 요건이 된다. 먼저 주체의 요건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주체(主體)의 요건(要件)
주체의 요건으로서는 모티브, 주제(主題), 구상(構想), 대상의식(對象意識), 개성(個性) 등이 다루어지게 된다.
1) 모티브, 주제(主題), 구상(構想)
예술작품의 창작에는 먼저 창작의 동기 즉, 모티브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모티브에 따라서 일정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창작목적이 세워진다. 다음에 그 목적에 따라서 주제(테마)가 세워지고 또 구상이 세워진다. 주제란 창작할 때에 다루어지는 중심적(中心的)인 과제를 말하며, 구상은 그 주제에 부합되도록 작품이 갖추게 되는 내용이나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뜻한다.
예컨대 한 화가(畵家)가 가을 풍경을 보고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때의 감동이 모티브이며, 그 동기에 의해서 가을의 경치를 그림으로 나타내겠다는 목적이 세워지며 그 목적을 터로 하고 주제(主題)가 세워진다. 예컨대 특히 단풍나무에서 받은 인상이 강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가을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가을의 단풍 따위의 주제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결정되면 산, 나무, 강, 하늘, 구름 등은 어떻게 배치하며 색은 어떻게 칠할까 하는 등 구체적인 구상이 세워지게 된다.
하나님에 있어서 피조세계의 창조도 예술가의 창작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즉 먼저 창조의 동기로서 모티브가 있게 된다. 그것이 사랑을 통하여 기뻐하고자 한다라는 정적(情的)인 충동 즉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리고 그 자신을 닮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만물을 창조하고자 하는 창조목적이 세워진다. 그리고 인간 아담과 해와라는 주제가 정해지고 그로부터 인간과 만물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 즉 로고스가 세워진다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상(性相) 내부에서는 심정을 터로 한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 知情意)과 내적형상(內的形狀; 관념, 개념, 법칙 등)이 수수작용을 하여 구상(로고스)이 형성되는데, 이러한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은 그대로 작가들의 창작의 경우에도 이루어진다.
즉 예술가는 모티브(목적)를 중심으로 하여 주제(主題)를 세우고 그 주제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한다. 이것이 구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형성(形成)에 해당한다.
로댕(Rodin, 1840~1917)의 작품의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Dante, 1265~1321)의 신곡(神曲)중 지옥편(地獄篇)에 근거하여 구상된 것으로서 지옥(地獄)의 문(門) 상단 중앙에 앉아있는 시인(詩人)의 상(像)이다.
이것은 불안과 공포와 격앙 속에서 신음(呻吟)하는 지옥의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명상(冥想)에 잠겨 있는 한 시인(詩人)의 모습으로서,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 때의 로댕의 모티브는, 단테의 신곡(神曲)(地獄篇)을 읽고 지옥의 고통을 면하려면, 지상에서 인간은 누구나 선(善)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강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주제는 생각하는 사람일 따름이며 웅크리고 앉아서 깊이 명상하고 있는 男子의 모습은 바로 그의 구상(構想)의 소산(所産)이다.
그런데 주제가 똑같은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신라시대 때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있다. 이것은 로댕의 작품과는 전연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석존(釋尊)의 가장 우수한 제자였다는 미륵(彌勒)이 중생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민중의 마음이 모티브가 되었으며, 그 입가에는 중생(衆生)의 구제(救濟)에 대한 자신감에 넘치는 듯한 미소(微笑)가 감돌고 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는 지적(知的)인 고민(苦悶)의 면을 강하게 풍기고 있으나, 미륵보살(彌勒菩薩)의 경우는 정화된 정(情)이 중심이 됨으로써 대단히 고귀(高貴)하고 성스러운 상(像)으로 표현되었다. 동일(同一)한 주제하(主題下)의 이러한 양자의 차이는 동기와 구상의 내용이 다른데 기인(基因)한 것이다.
2) 대상의식(對象意識)
창작(創作)이란, 예술가가 하나님이나 전체 앞에 대상의 입장에 서서 미(美)의 가치를 나타냄으로써 주체인 하나님이나 전체(인류, 국가, 민족)를 기쁘게 하는 활동이므로, 작가는 먼저 대상의식이 확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최고의 주체인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세가 대상의식의 극치(極致)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로, 인류역사를 통하여 슬퍼해 오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위로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기쁨을 얻기 위하여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창조성까지 주셨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존재목적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하며, 창조활동도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행해야 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의식(意識)을 잃어버렸다. 이 사실이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슬픔으로 남아져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먼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역사적인 슬픔을 위로해 드리는 입장에 서야 한다.
둘째로, 예술가는 하나님과 더불어 복귀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인이나 의인들을 위로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을 위로한다는 것은 그들과 더불어 괴로움과 슬픔을 같이 해온 하나님을 위로해 드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예술가는 과거와 현재의 선(善)한 사람들, 의로운 사람들의 행위를 작품(作品)에 표현코자 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예술가는 죄악세계(罪惡世界)의 사람들에 의해 박해(迫害)받아 왔고, 지금도 핍박받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의 행위를 작품에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攝理)에 협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넷째로, 예술가는 다가올 이상세계(理想世界)의 도래를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예술가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활동을 해야 한다.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榮光)이 표현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로, 예술가는 자연의 미(美)와 신비(神秘)를 표현함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찬미하는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쁨 때문에 자연을 지으셨으나,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미(美)를 통하여 기쁨을 얻는 부분이 적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하나님의 속성(屬性)의 표현인 자연에 대하여 외경(畏敬)의 심정을 지니면서 자연의 깊고도 오묘한 미(美)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神秘)를 찬미(讚美)하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예술가가 이와 같은 대상의식을 가지고 창작에 전력을 투입(投入)할 때,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恩惠)와 영계(靈界)로부터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거기에 참된 예술작품이 생겨나게 되며, 그렇게 될 때 그 작품(作品)은 예술가와 하나님과의 공동작품(共同作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르네상스시대(時代)의 예술가들 중에는 그와 같은 대상의식을 가지고 창작활동을 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라파엘로(Raffaello,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이 그러했다. 고전주의음악(古典主義音樂)의 완성자 베토벤(L. Beethoven, 1770~1827)도 그와 같은 대상의식을 가지고 작곡(作曲)을 했다.13) 그래서 그들의 작품은 불후(不朽)의 명작이 된 것이다.
3) 개성(個性)
인간은 하나님의 개별상(個別相)의 하나 하나를 닮도록 지어진 개성체(個性體)이다. 따라서 창작에 있어서도 예술가의 개성이 작품을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 창작은 작가의 개성-신래성(神來性)의 개별상(個別相)-의 예술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술가는 개성을 발휘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한다. 실제로 위대한 예술작품에는 작가의 개성이 충분히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작품에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田園交響曲)이라든가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未完成交響曲)과 같이 작가의 이름이 붙게 된다.
(2) 대상(對象)의 요건(要件)
작가의 모티브(목적), 주제(主題), 구상(構想) 등의 성상적조건이 작품 속에 잘 반영되어야 하는 것이 대상인 작품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성상적조건을 나타내는데 가장 적합한 재료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재료를 사용하여 창작할 때 작품에서의 물질적요건(物理的要件; 構成要素)이 최고의 조화를 나타내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형상적조건(形狀的條件)이다.
예술작품 속에서 물리적요소(構成要素)가 잘 조화되어야 한다는 말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많은 예술가나 미학자(美學者)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했다. 즉 물리적요소의 조화란 선(線)의 율동(律動), 형태(形態)의 집합의 조화, 공간의 조화, 명암의 조화, 색채의 조화, 음률의 조화, 회화에서의 양감(量感)의 조화, 선분분할(線分分割)의 조화, 무용에서의 동작의 조화 등을 말한다.
예를 들면 선분분할(線分分割)의 조화에는 옛부터 알려져 있는 황금분할(黃金分割)이 있다. 그것은 주어진 선(線)에 있어서 선분(線分)의 단변(短邊)과 장변(長邊)의 비(比)가 장변(長邊)과 전체의 비(比)에 동등하게 되도록 자르는 것이며, 대개 5대8의 비율로 나누는 것이다.
이 비율을 사용하면 형태적(形態的)으로 안정감을 주어 미(美)를 느끼게 된다. 회화에 있어서 지평선(地平線)의 상하공간(上下空間)의 관계, 전경과 배경의 관계를 그와 같은 비율로 한다면 조화가 이루어지게 되며, 피라밋이나 고딕사원(寺院)의 첨탑에 있어서도 이러한 분할방식(分割方式)이 적용되고 있다.
五. 창작(創作)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
다음은 창작의 요건(要件)과 관련된 창작의 기교(技巧), 소재(素材), 양식(樣式)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1) 기교(技巧)와 소재(素材)
원상(原相)에 있어서 창조의 2단구조(構造)란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함으로써 로고스가 형성되고, 다음에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로고스(본성상(本性相))가 형상(본형상(本形狀))과 수수작용함으로써 피조물이 만들어진다는 2단계(二段階)의 구조를 말한다. 인간의 창조활동도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컨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든다든가, 농민(農民)이 논밭을 경작하는 것, 혹은 학자가 연구하거나 발명하는 것 등은 모두 창조의 2단구조(構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예술창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에 있어서 주체의 요건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대로, 모티브(목적)를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知情意)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을 하여, 구상이 만들어지는 것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과정이다. 또한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에 의하여 만들어진 구상에 따라, 소재를 사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과정이다. 즉 외적사위기대는 모티브(목적)를 중심으로 한 성상(구상(構想))과 형상(素材)의 수수작용으로 형성된다.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에 있어서는 특수한 기술(技術) 또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것을 창작에서의 기교(技巧)라고 한다.
다음은 작품을 만들 때 필수요소가 되는 소재에 대해서 살펴보자. 소재(素材)에는 성상적인 소재 즉 표현대상으로서의 소재(素材)와, 형상적인 소재 즉 표현수단으로서의 소재가 있다. 성상적(性相的)인 소재를 제재(題材; subject)라고 한다. 소설을 쓰는데 있어서, 가공(架空)의 것이든 혹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건 간에 작품 가운데 묘사(描寫)되는 행위나 사건을 제목(題材)라 하는데, 회화의 경우 인물이나 풍경 등을 말한다. 따라서 제재는 주제(主題)의 내용을 뜻한다.
형상적(形狀的)인 소재 즉 물리적인 소재를 매재(媒材; medium)라고 한다. 조각에 있어서는 연장이나 대리석, 목재, 브론즈 등의 소재가 필요하며 회화(繪畵)에 있어서는 회구(繪具)나 캔버스 등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작품을 만드는데 있어서 이와 같은 물리적소재의 질(質)과 양(量)을 결정한 후에 구체적으로 창작을 시작하게 된다. 즉 창작(創作)은 먼저 구상을 한 다음 일정한 소재를 사용하여 구상을 작품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창작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2) 창작(創作)의 양식(樣式)과 유파(流派)
창작의 양식(樣式)이란 예술적 표현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요컨대 창작의 2단구조(構造)를 어떠한 방법으로 형성해 가는가라는 문제이다. 그 중에서 특히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을 어떻게 하는가라는 것, 즉 구상의 양식(樣式)이 기본적인 것이 된다. 내적사위기대는 모티브(목적)를 중심으로 하여 내적성상(內的性相)(知情意)과 내적형상(內的形狀, 主題)이 수수작용을 하여 형성된다. 따라서 모티브(목적)가 다르면 작품은 완전히 다르게 표현된다.
모티브(목적)가 같더라도 내적성상이 다르면 작품은 다르게 표현된다. 또 내적형상이 달라도 작품은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즉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中의 3위치에 세워지는 정착물(定着物)이 달라짐에 따라서 결과(구상)는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이 세가지 정착물중에서 하나라도 다르면, 형성되는 구상은 다르게 되고 그 결과 작품도 다르게 표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기는 창작의 다양성(多樣性) 속에서 여러 가지 창작의 양식(樣式)(style)이 형성된다. 유파(流派; school)도 그 한 예이다. 역사적으로 나타났던 대표적인 유파(流派)를 살펴보자.
1)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
이것은 인간 또는 세계를 이상화(理想化)하여 조화가 이룩된 이상적인 미(美)를 표현코자 하는 입장이다. 16세기 르네상스시대 예술가의 대다수가 이상주의적(理想主義的)이었으며 라파엘로가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2) 고전주의(고전주의(古典主義); Classicism)
그리스-로마 예술의 표현형식(表現形式)을 규범으로 하는 17~18세기의 예술경향을 말하는 것으로서 형식의 통일성(統一性)과 균형(均衡)을 중시했다. 대표적인 문학작품으로서는 괴테(J. W. Goethe, 1749~1832)의 파우스트가 있으며, 화가로서는 다비드(J. David, 1748~1825), 앵그르(J. Ingres, 1780~1867) 등을 들 수 있다.
3) 낭만주의(浪漫主義)(Romanticism)
형식(形式)을 강조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생긴 것이 낭만주의이며, 인간의 내면적(內面的)인 정열을 단적으로 묘사하고자 했던 18~19세기의 예술 경향을 말한다. 작가 유고(V. Hugo 1802~1885), 시인(詩人) 바이런(G. Byron, 1788~1824), 화가 드라크르와(Delacroix, 1798~1863) 등을 들 수 있다.
4) 사실주의(寫實主義)(Realism)·자연주의(自然主義)(Naturalism)
사실주의(寫實主義)는 현실주의(現實主義)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나타난 것으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描寫)하려고 하였으며, 19세기 중반경에서 후반에 걸쳐 나타났다. 화가 고로(J. Corot, 1796~1875), 밀레(F. Millet, 1821~1875), 끄루베(G. Courbet, 1819~1877), 작가인 플로베르(G. Flaubert, 1821~1880)가 그 대표자이다. 사실주의는 더욱 더 실증주의적(實證主義的), 과학주의적(科學主義的)인 경향을 띠고 발전했는데, 그 후 자연주의로 이행하였다. 자연주의의 대표적인 작가로는 졸라(Zola, 1840~1920)를 들 수 있으며, 미술상에 있어서의 사실주의(寫實主義)와 자연주의(自然主義)는 크게 구별이 없었다.
5)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상징주의(象徵主義)는 현실주의(現實主義), 혹은 자연주의(自然主義)에 대한 반발로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엽에 걸쳐 나타난 것으로, 종래의 전통이나 형식을 버리고 감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문학의 일파(一派)이다. 시인(詩人) 랭보(A. Rimbaud, 1854~1891)가 그 대표라 할 수 있다.
6) 인상주의(印象主義; Impressionism)
이것은 순간적으로 포착한 모습이야말로 사물의 진실(眞實)된 모습이라고 하여 개별적(個別的), 순간적(瞬間的)인 형태나 색채를 포착하려고 하였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운동으로서 마네(E. Manet, 1832~1883), 모네(C. Monet, 1840~1926), 르노아르(Renoir, 1841~1919), 드가(Degas, 1834~1917) 등이 그 대표적인 화가이다.
7) 표현주의(表現主義; Expressionism)
인상주의(印象主義)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상을 묘사한데 대하여 반대로 인간 내부의 감정을 외부로 표현코자 한 것이 표현주의(表現主義)이다. 20세기 초엽에 인상주의(印象主義)에 대한 반발로서 출현했으며, 화가 칸딘스키(V. Kandinsky, 1866~1944), 마르크(F. Marc, 1880~1916), 작가 웨펠(F. Werfel, 1890~1945) 등이 대표자이다.
8) 입체주의(立體主義; Cubism)
20세기 초엽의 미술운동으로서 그 특색은 기하학적 형체(幾何學的 形體)를 단위로 하는 구성에 있으며, 대상을 일단 단순한 형체로 분해한 후, 그것을 자기의 주관에 의하여 재구성(再構成)코자 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가 피카소(P. Picasso, 1881~1973)이다.
9) 통일주의(統一主義; Unificationism)
그러면 통일예술론(藝術論)의 창작태도는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이상주의(理想主義)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통일된 것으로서 이것을 통일주의라 한다.
통일주의(統一主義)는 지상천국의 실현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현실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에 살면서도 본연의 세계를 복귀한다는 이상(理想)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상주의(理想主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실과 이상의 통일이 원리적인 창작태도이다. 예컨대 현실의 죄악세계(罪惡世界)속에서 창조이상세계를 동경하면서 고난을 극복해가는 희망에 찬 인간상을 그리는 것이 통일주의(統一主義)이다. 통일주의는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으로 한 심정주의(心情主義)이다. 따라서 통일주의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이상적인 사랑을 표현하게 된다. 거기에는 낭만주의적인 요소도 당연히 포함된다.
그러나 종래의 낭만주의(浪漫主義)를 그대로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 인류의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으로 한 형제자매로서의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남녀의 사랑을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상기(上記)의 여러 양식(樣式)이나 유파(流派)를 대별(大別)하면, 넓은 의미에 있어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나눌 수가 있다. 이 때의 현실주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描寫)한다는 뜻의 현실주의가 아니고 그 당시의 현재에 유행(流行)하던 유파(流派)라고 하는 뜻의 현실주의이며, 이상주의는 인간이나 세계를 이상화(理想化)해서 묘사한다는 뜻의 이상주의가 아니라 그 당시의 현재의 유파에 반대하고 미래(未來) 지향적(指向的)으로 새로이 대두(擡頭)하고자 하는 유파라는 뜻의 이상주의인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유파는 어느 것이거나, 처음에는 이상주의였다가 나중에는 모두 현실주의의 입장이 되어 버리곤 했다. 통일주의는 이와 같은 의미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와의 통일을 뜻하는 창작양식(創作樣式) 또는 창작태도(創作態度)이다. 그런데 이 통일주의적인 양식(樣式)은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창조목적을 중심한 하나님의 창조방식을 닮은 양식이기 때문에 작가의 개별적인 차이가 나타나면서도 양식(樣式) 자체(自體)는 영원불변이다. 이상(以上)으로 창작(創作)의 요건(要件)의 항목(項目)을 전부 마치고 다음은 감상(鑑賞)의 요건(要件)을 다루고자 한다.
六. 감상(鑑賞)의 요건(要件)
예술작품의 감상도 수수작용의 한 가지 형태로서, 여기에도 주체(감상자)와 대상(작품)이 각각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건이 있다. 먼저 주체가 갖추어야 할 요건을 살펴보자.
(1) 주체(主體)의 요건(要件)
먼저 성상적(性相的)요건(要件)으로서 감상자는 첫째로,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積極的)인 관심을 갖는 일이다. 이 적극적 관심을 터로 하고 미(美)를 향수(享受; enjoyment)하려고 하는 기본자세를 가지고 작품을 관조(觀照; intuition), 또는 정관(靜觀; contemplation)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잡념(雜念)을 버리고 맑은 심경으로 작품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조화를 이루는 것, 즉 생심과 육심이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질 필요가 있게 된다.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진선미(眞善美)의 가치의 추구를 일차적(一次的)으로 하고, 물질적인 가치의 추구를 2차적으로 함을 뜻한다.
다음으로 감상자는 일정한 교양, 취미, 사상, 개성 등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작품을 만든 작가의 성상면(性相面) 즉 모티브(目的), 주제(主題), 구상(構想)이나 작가의 사상, 시대적-사회적 환경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작품을 이해한다는 것은 감상자가 자기의 성상(性相)을 작품의 성상에 맞춘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상자는 작품과의 상사성(相似, 서로 닮음性)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밀레의 작품을 깊이 감상하고자 한다면 그 당시의 사회적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847년의 2월혁명 당시, 프랑스는 사회주의운동(社會主義運動)의 분위기 속에 싸여 있었으나 밀레는 그러한 분위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농민(農民)들의 순박한 모습에 매우 마음이 끌려서 농민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표현코자 했다. 그와 같은 밀레의 심경(心境)을 알게 되면 그의 그림에 대한 미(美)가 한층 더 깊게 느껴지게 될 것이다.
또한 감상자는 작품과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보다 높이기 위하여, 감상하면서 주관작용(主觀作用; Subject Effect)에 의한 부가창조(附加創造)를 병행한다. 주관작용이란 감상자가 자기의 주관적인 요소를 대상(작품(作品))에 부가하고, 작가가 만든 가치요소(價値要素)에 새로운 가치(要素)를 주관적으로 더 첨가하여, 그 합쳐진 가치를 대상가치로서 향수(享受)하는 것을 말한다. 주관작용은 립스(T. Lipps, 1851~1914)의 감정이입(感情移入; Einfuhlung, empathy)에 해당한다.
예컨대 연극이나 영화에 있어서, 배우는 연기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우는 척한다. 그러나 그 때 관객은 배우가 정말로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함께 우는 일이 가끔 있다. 관객이 자기의 감정을 배우에게 투영(投影)하여 주관적으로 대상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감정이입(感情移入) 즉 주관작용(主觀作用)의 한 예이다. 주관작용에 의해서 감상자는 작품과 보다 강하게 일체화(一體化)하고 한층 더 깊은 기쁨을 얻게 된다.
그리고 감상자는 관조(觀照)에 의해서 발견된 여러 가지 물리적요소들의 조화를 총합하고, 그 전체적인 통일적조화와 작품속에 있는 작가의 성상(性相)(構想)을 결부시킨다. 즉 작품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의 조화를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주체(主體)(감상자)의 형상적요건(形狀的要件) 즉 신체적요건(身體的要件)에 대해서 살펴보자. 감상자는 건전한 시청각의 감각기관(感覺器官, 神經, 大腦) 등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므로 성상적인 미(美)의 감상에 있어서도 건전한 신체적조건(身體的條件)이 필요한 것이다.
(2) 대상(對象)의 요건(要件)
다음은 대상의 요건에 관하여 살펴보자. 대상(作品)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란, 먼저 미(美)의 요소 즉 물리적 여러 요소(構成要素)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작품의 성상(모티브, 목적, 주제, 구상)과 형상(물리적 제요소)도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감상에 있어서 작품은 감상자 앞에 놓여진 완성품(完成品, 완제품)이므로 이와 같은 작품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감상자가 마음대로 변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감상자는 주관작용(主觀作用)에 의하여 작품과의 사이에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을 높일 수 있다. 또 감상에 보다 적합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하여 작품의 전시(展示)에 있어서 위치, 배경, 조명(照明) 등의 환경을 적절히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3) 미(美)의 판단(判斷)
다음은 미(美)의 판단에 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가치는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수수작용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라는 원리에 의해 이상과 같은 감상의 조건을 구비한 주체(鑑賞者)와 대상(作品)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미(美)가 판단(判斷)(결정)된다. 즉 감상자의 미(美)에 대한 추구욕이 작품에서 오는 정적자극(情的刺戟)으로 채워짐으로써 미(美)가 판단되고 결정되는 것이다. 작품에서 오는 정적자극이란 작품 속의 미(美)의 요소가 주체의 정적기능(情的機能)을 자극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미(美)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작품 속에 있는 어떤 미(美)의 요소가 감상자의 정적기능을 자극하여, 감상자에 의해서 아름답다고 판단되어야 비로소 그 요소가 현실적인 미(美)가 된다.
다음에 미(美)의 판단과 인식에 있어서의 판단의 차이에 대하여 언급해 보자. 인식에 있어서의 판단은 주체(내적요소-원형)와 대상(외적요소-감각적내용)의 조합(照合)에 의해 이루어진다. 미적판단(美的判斷)도 마찬가지로 주체와 대상의 조합에 의해 성립된다. 이 조합(照合)의 단계에서 지적기능이 작용하면 인식이 되고 정적기능(情的機能)이 작용하면 미적판단(美的判斷)이 된다. 즉 대상이 가지는 물리적요소의 조화를 지적(知的)으로 포착하면 인식이 되고 정적(情的)으로 포착하면 미적판단(美的判斷)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知)와 정(情)의 기능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미적비판(美的批判)에도 인식을 동반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컨대 이 꽃은 아름답다라는 미적판단(美的判斷)은 이것은 꽃이다라는 인식을 동반하게 된다.
七. 예술(藝術)의 통일성(統一性)
다음은 예술의 통일성(統一性)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예술활동에는 몇 가지의 상대적인 두 측면(요소(要素))이 있다. 예컨대 상기(上記)의 창작(創作)과 감상(鑑賞)을 위시해서 내용과 형식, 보편성과 개별성, 영원과 순간 등의 각각(各各)의 통일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대적(相對的)인 측면(요소)은 본래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의 예술활동에 있어서는 이와 같은 상대적인 요소를 분리하거나 한편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통일예술론에서는 이들의 상대적측면(相對的側面)의 통일성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1) 창작(創作)과 감상(鑑賞)의 통일
보통 창작은 예술가가 하고, 감상은 일반 사람들이 한다는 식으로 분리(分離)해서 생각해 왔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양자는 주관활동(主管活動)의 두 가지 계기에 불과하다. 만물을 주관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실천이라는 상대적인 두 측면이 필요한데, 정적기능(情的機能)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인식과 실천이 바로 예술에 있어서의 감상과 창작에 해당한다. 인식과 실천은 각각 주체(人間)와 대상(萬物, 자연)의 수수작용의 두 가지 회로(回路)의 일방(一方)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인식이 없는 실천은 있을 수 없고, 실천이 없는 인식도 있을 수 없다. 창작과 감상에 있어서도 창작이 없는 감상은 있을 수 없고 감상이 없는 창작 또한 있을 수 없다.
예술가는 창작을 하면서 자기의 작품을 감상한다. 또 감상자도 작품을 감상하면서 창작을 하게 된다. 감상에 있어서의 창작이란, 앞에서 말한 주관작용에 의한 부가창조(附加創造)를 말한다.
(2) 내용과 형식(形式)의 통일
오늘날까지 형식을 중시(重視)하는 고전주의(古典主義)와 이러한 형식을 무시하고 내용을 중시하는 유파(流派)가 있었으나, 예술작품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의 관계는 성상과 형상의 관계이므로 본래는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모티브, 목적, 주제, 구상 등의 성상적인 내용과 소재를 사용하여 내용을 작품으로 표현할 때, 형식이 잘 어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의 한 미학자(美學者)는 형식(形式)이란 실은 내용의 형식이며 내용이란 다름 아닌 형식의 내용이다'17)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내용과 형식은 통일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3) 보편성(普遍性)과 개별성(個別性)의 통일
모든 피조물(被造物)은 보편상과 개별상이 통일되어 있는 것처럼 예술에도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이 나타난다. 먼저 예술가 자신이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이다. 예술가는 각각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그는 일정한 유파(流派)에 속하거나 일정한 지역적(地域的), 시대적(時代的)으로 공통된 창작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전자는 개별성(個別性)이고 후자는 보편성(普遍性)이다.
이와 같이 예술가 자신이 보편성과 개별성을 통일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도 필연적으로 보편성과 개별성의 통일로서 나타내게 된다. 즉 작품에는 개별적인 미(美)와 보편적인 미(美)가 통일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문화에 있어서도 보편성과 개별성이 통일되어 나타난다. 즉 어떤 지역의 문화는 그 지역의 특성을 지니면서 그 문화가 속해 있는 보다 넓은 지역의 문화와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한국의 석굴암(石窟庵)의 불상은 신라 문화의 대표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 중에는 그리스예술과 불교문화를 융합(融合)시킨 국제적인 간다라미술(美術)의 요소가 함께 포함되어 있음도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즉 석굴암의 불상(佛像)은 민족적인 요소(신라예술)와 초민족적인 요소(간다라美術)의 통일, 즉 개별성과 보편성의 통일이다.
여기에서 민족문하(民族文化)와 통일문화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각 민족은 각각 전통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는데, 앞으로 통일문화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전통적인 민족문화는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예술의 당파성(黨派性)과 상부구조론(上部構造論)을 주장하던 마르크스주의 예술론은 전통적인 민족문화를 무시하였으나 통일주의(統一主義)의 입장은 그렇지 않다. 통일주의는 각 민족의 민족문화를 보존하면서 통일문화를 형성한다. 즉 개성(個性)이 다른 민족문화의 정수(精髓)를 보존하면서 한층 더 차원 높은, 보편적인 종교와 예술로써 통일문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4) 영원(永遠)과 순간(瞬間)의 통일
모든 피조물은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 靜的四位基臺)와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 動的四位基臺)의 통일체이므로 불변과 변화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여기의 불변은 영원을 뜻하며, 변화는 순간 순간의 변화이기 때문에 바로 순간을 뜻한다. 따라서 피조물이 불변과 변화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말은, 바로 피조물이 영원과 순간의 통일을 이루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작품에 있어서도 영원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가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밀레의 만종(晩鐘)에는 교회와 기도하는 농부와 그의 아내, 시골풍경 등이 그려져 있는데, 여기에서도 영원적인 요소와 순간적인 요소의 통일을 발견할 수 있다. 교회나 기도하는 모습 등은 시대를 초월한 영원에 속하는 것이지만, 시골의 풍경이나 부부가 입고 있는 의복 등은 그 시대 즉 순간에 속하는 것들이다.
또 하나의 예로서 수반(水盤)에 꽂혀 있는 꽃을 들 수 있다. 수반에 꽂혀 있는 꽃 그 자체는 옛날부터 꽂혀온 것이지만, 꽃을 꽂는 방법(方法)이나 수반(水盤)은 시대마다 특유하다. 따라서 꽃꽂이에도 영원과 순간의 통일이 나타나 있다. 작품을 감상할 때도 이와 같이 영원속의 순간 혹은 순간속의 영원을 느끼면서 감상한다면 미(美)는 한층 돋보일 것이다.
八. 예술(藝術)과 윤리
최근(最近)에 이르러 예술의 저속화(低俗化)가 자주 지적된다. 이것은 예술과 윤리의 관계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예술은 만물(萬物, 자연)주관(主管)의 한 형식이다. 본래 인간은 소생, 장성, 완성이라는 3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쳐서 완성한 후에 만물을 주관 하게 되어 있다. 완성이란 사랑의 완성, 인격(人格)의 완성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사랑의 인간, 즉 윤리人이 된 후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예술가는 동시에 윤리人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랑과 미(美)의 관계에서 윤리와 예술의 관계를 도출해 낼 수 있다. 사랑은 주체가 대상에게 주는 정적(情的)인 힘이고, 미(美)는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받는 정적(情的)인 자극이다. 따라서 사랑과 미(美)는 표리일체(表裏一體; 겉과 속이 일체가 되는 것)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취급하는 윤리와 미(美)를 취급하는 예술은 불가분(不可分)의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참다운 미(美)는 참다운 사랑을 기초(基礎)로 하여 성립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예술가들은 그와 같이 되지 못했다. 이것은 예술가들도 윤리성(倫理性)을 구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고한 철학적(哲學的) 근거(根據)가 예술가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들 특히 문예작가(文藝作家)들은 사랑을 테마로 삼아 작품활동을 해왔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랑은 타락(墮落)한 세계의 비원리적인 사랑이었다.
예술지상주의자(藝術至上主義者)로 알려진 오스카 와일드(O. Wilde, 1854~1900)는 예술상(藝術上)의 탐미주의(耽美主義)를 주창하면서 동성애(同性愛)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실의(失意)와 궁핍(窮乏) 속에서 지내다가 일생을 마쳤다. 또 낭만주의(浪漫主義) 시인인 바이런(G. G. Byron, 1788~1824)도 방탕한 여성편력(女性遍歷)을 계속하면서 창작하고, 유랑(流浪) 생활을 하였다. 그들의 작품은 다름 아닌 그들의 타락한 사랑을 표현하거나 혹은 그 고뇌(苦惱)를 그린 것이다.
한편 참사랑을 표현한 작가도 있었다. 톨스토이(L. N. Tolstoi, 1828~1910)가 그러하다. 그는 러시아의 타락한 상류사회(上流社會)의 생활상을 폭로하면서 참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즉 그의 작풍(作風)은 한편에서는 현실을 묘사하는 리얼리즘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주의(理想主義)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같이 참사랑을 표현한 작품을 남기거나, 참다운 사랑을 추구하면서 창작활동(創作活動)을 하고 있는 예술가는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九. 미(美)의 유형
다음은 미(美)의 유형을 다루고자 한다. 종래의 미학(美學)이 미(美)의 유형을 다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제목을 다루려는 것이다.
(1) 통일사상에서 본 사랑과 미(美)의 유형
목적을 중심으로 하여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미(美)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보는 사람(주체)에 따라 결정되는 미(美)는 달라지고, 또 대상(예술작품, 자연물)의 종류에 따라서도 미(美)는 달라진다. 그와 같이 미(美)에는 무한한 다양성(多樣性)이 있으나 비슷한 미(美)를 한 데 모음으로써 미(美)의 유형이 정해질 수 있다. 종래의 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미(美)의 유형을 제시한 학자(學者)도 있었던 것이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사랑은 미(美)와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에 있고, 미(美) 또한 사랑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부모(父母)가 자식을 사랑하면 할수록 자식은 그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것처럼 사랑이 양적(量的)으로 증대하면 미(美)도 양적(量的)으로 크게 느껴진다. 사랑과 미(美)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상대적인 회로(回路)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주체와 대상이 사랑을 주고받을 때, 주는 편은 사랑을 주고, 받는 편은 그것을 미(美)로써 받는다. 이와 같이 사랑과 미는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미(美)의 유형을 생각하려면 먼저 사랑의 유형을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정을 통하여 분성적(分性的)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그리고 형제자매(兄弟姉妹)의 사랑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형태(形態)의 분성적인 사랑이 바로 사랑의 기본형이다. 이 기본형의 사랑은 다시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남편의 사랑, 아내의 사랑 3)아들의 사랑, 딸의 사랑으로 구분된다.
이 3대 분성적(分性的) 사랑이 다시 양성(兩性)으로 분화(分化)되어 여러 가지의 편측적(片側的)인 사랑(片側愛)이 된다. 그리고 이 6종의 편측애는 각각 다시 세분(細分)되어서 더욱 다양(多樣)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아버지는 엄격성(嚴格性), 아량성(雅量性), 광활성(廣闊性), 장중성(莊重性), 심오성(深奧性), 경외성(畏敬性) 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랑은 엄한 사랑, 아량있는 사랑, 넓은 사랑, 장중한 사랑, 깊은 사랑, 외경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며, 어머니는 온화(溫和)하고 평화로운 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은 우아(優雅)한 사랑, 고상(高尙)한 사랑, 따뜻한 사랑, 섬세한 사랑, 부드러운 사랑, 다정(多情)한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남편(男便)의 사랑은 남성적인 것으로서 아내에 대해서 적극적인 사랑, 믿음직한 사랑, 비장(悲壯)한 사랑, 과단성(果斷性)있는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아내의 사랑은 여성적인 것으로서 남편에 대하여 소극적(消極的)인 사랑, 내조적(內助的)인 사랑, 유순(柔順)한 사랑, 알뜰한 사랑 등으로 나타난다.
또 자녀의 사랑은 부모에 대하여 효성(孝誠)스러운 사랑, 복종(服從)하는 사랑, 의지(依支)하는 사랑, 어리광스러운 사랑, 익살스런 사랑으로서 나타난다. 그 외에 형(兄)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에 대한 사랑, 누나의 남동생이나 여동생에 대한 사랑, 동생의 형이나 누나에 대한 사랑, 여동생의 오빠나 언니에 대한 사랑도 있는 바, 이것들은 모두 자녀(子女)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역시 자녀의 사랑의 개념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사랑의 기본형(基本型)이 편측화(片側化)되고 다시 다양화(多樣化)되어 무수한 색깔의 사랑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유형에 대응하여 미(美)의 유형이 나타난다. 먼저 사랑의 3형태(三形態)에 대응하여 부모(父母)美, 부부(夫婦)美, 子女美라는 3형태(三形態)의 미의 기본형이 세워진다. 그것이 또 1)父性美, 母性美 2)남편美, 아내美 3)子息美, 女息美의 여섯 가지의 편측애(片側愛)로 구분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또 다시 여러 가지 특성을 가진 미(美)로서 세분화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부성미(父性美)......엄격미(嚴格美), 아량미(雅量美), 광활미(廣闊美), 장중미(莊重美), 심오미(深奧美), 경외미(畏敬美)
모성미(母性美)......우아미(優雅美), 고상미(高尙美), 온정미(溫情美), 섬세미(纖細美), 유화미(柔和美), 다양미(多情美)
남편(男便)의 美......남성미(男性美), 적극미(積極美), 신뢰미(信賴美), 비장미(悲壯美), 과단미(果斷美), 용감미(勇敢美), 신중미(愼重美)
아내의 美......여성미(女性美), 소극미(消極美), 내조미(內助美), 순종미(順從美), 비애미(悲哀美), 상냥미(明朗美), 알뜰美
자식미(子息美).....남아적(.男兒的)인 특성을 지닌 효성미(孝誠美), 복종미(服從美), 의지미(依支美), 유약미(幼若美), 익살미(滑稽 美), 어리광美 등의 남성미(男性美)
여식미(女息美).....여아적(.女兒的)인 특성을 지닌 효성미(孝誠美), 복종미(服從美), 의지미(依支美), 유약미(幼若美), 익살美(滑稽 美), 어리광美 등의 여성미(女性美)
아버지는 자식에 대하여 언제나 따뜻한 사랑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옳지 못한 일을 할 때는 엄하게 꾸짖기도 한다. 그 때, 자식은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나 후에는 감사한다. 봄과 같은 따뜻한 사랑뿐만 아니라 겨울과 같은 엄한 사랑도 사랑의 한 형태인 것이다. 그와 같은 엄한 사랑도 자식에게는 美로서 느껴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미(嚴格美)이다.
또한 자식(子息)이 어떤 잘못을 크게 저지른 다음 아버지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으로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다고 하자. 그런데 아버지는 괜찮다고 용서해 줄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식은 그 때 아버지에게서 바다와 같은 넓은 미(美)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아량미(雅量美)이다. 즉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의 사랑을 받으면 거기에 따라 자식은 여러가지 색조(色調)의 미(美)를 느끼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 다르다. 어머니의 사랑은 대단히 온화(溫和)하고 평화(平和)스럽다. 그와 같은 어머니로부터의 사랑을 자식은 우아미(優雅美), 유화미(柔和美) 등으로 느끼게 된다.
남편의 사랑은 아내에게 있어서 남성다움, 늠름성 등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이 곧 남성미(男性美)이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은 남편에게 있어서 여성다움, 부드러움, 상냥함 등으로 느끼게 된다. 그것이 여성미(女性美)이다.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자식의 본성(本性)이다. 자식은 공부를 잘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춤을 추는 것 등을 통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려고 한다. 그것이 자녀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을 부모는 미(美)로써 귀엽게 느끼게 된다. 혹은 익살스러워서 견딜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익살미라고 한다. 게다가 자식이 성장함에 따라 연령(年齡)에 상응한 미를 부모는 느끼게 된다. 이러한 미(美)는 같은 자녀(子女)라 하더라도 남아(男兒)에게서 느끼는 미(美)와 여아(女兒)에게서 느끼는 미(美)가 또한 다르다. 전자(前者)는 자식미(子息美)요 후자(後者)는 여식미(女息美)이다. 자녀들끼리 즉 형제자매(兄弟姉妹)사이에도 형제 및 자매의 사랑에 대응하여 특유한 미(美)가 나타난다. 즉 형제미 및 자매미가 나타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어렸을 때, 가정에서 성장하는 동안에 다양한 미(美)의 감정(感情)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다양한 미(美)의 감정이 복합되거나 분리(分離) 또는 변형되면서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미(美)를 느끼게 된다. 자연이나 예술작품을 대할 때에 느껴지는 미(美)의 감정은 그 유래가 모두 이와 같이 가정에서 형성된 미(美)의 유형에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기반으로 한 인간관계에서 형성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미(美)가 자연으로 옮겨지고 작품으로 옮겨진 것이 자연미(自然美), 작품미(作品美) 등의 미의 유형이다.
예컨대 험준(險峻)한 산이나 높은 벼랑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게 될 때 장엄(莊嚴)한 미(美)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부성미(父性美)의 연장이요 변형이다. 조용한 호수나 화창한 평야(平野)에서 느끼는 미(美)는 모성(母性美)의 연장이요 변형이다. 또 동물의 새끼나 식물의 싹이 돋아 나올 때의 귀여움은 자녀미(子女美)의 연장이요 변형이다. 예술작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성모(聖母)마리아의 그림이나 상(像)은 모성미(母性美)의 표현이며 고딕양식(樣式)의 건축은 여성미(女性美)의 연장 혹은 변형으로 볼 수 있다.
(2) 종래의 미(美)의 유형
미학(美學)中에 있어서 기본적인 미(美)의 유형이 된 것은 우미(優美; Grazie)와 숭고미(崇高美; Erhabenheit)이다. 우미(優美)란 아주 긍정적이고 직접적으로 쾌감(快感)을 주는 미(美)이고, 균형이 잡힌 조화의 미(美)이다. 한편 숭고미(崇高美)란 높이 솟은 산이나 소용돌이치는 성난 파도와 같이 경이(驚異)의 감동, 경외(畏敬)의 감정 등을 주는 미(美)이다.
칸트는 또한 美(優美)에는 자유美(Freie Schonheit)와 부용미(附庸美; anhangende Schonheit)가 있다고 하였다. 자유미란 일반적으로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미(美)로서 어떤 특정한 개념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는 미(美)를 말한다. 부용미(附庸美)란 입는 데 어울린다거나, 사는 데 어울리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 같은, 어떤 목적(혹은 개념(槪念))에 의존하는 미(美)를 말한다.
그 밖에 일반적으로 예술론에서 거론(擧論)되고 있는 것으로서 순수미(純粹美; Reinschone), 비장미(悲壯美; Tragische), 익살미(Komische) 등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종래의 미(美)의 유형은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분류되는지 애매하다. 거기에 대하여 통일예술론(藝術論)에서의 미(美)의 유형은 위에서 말한 대로 명확한 원리에, 즉 사랑의 유형에 근거하고 있다.
十.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비판(批判)
(1)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공산주의의 혁명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중의 하나가 예술 활동이었으며, 그 창작 방법은 사회(社會)主義리얼리즘이었다. 그러면 사회주의리얼리즘이란 어떠한 것일까. 레닌은, 예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술(藝術)은 인민(人民)의 것이다. 예술의 가장 깊은 근원(根源)은 광범위한 노동자(勞動者)계급(階級)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그들의 감정(感情), 사상(思想)의 요구를 기초로 하며, 또 그들과 더불어 성장해야 한다.18)
문학(文學)은 당(黨)에 속해야 한다. ...... 비당적문학가(非黨的文學家)를 매장하라! 초당문학가(超黨文學家)들을 매장하라! 문학의 일은 전 프롤레타리아트의 일거리의 일부(一部), 전 노동자계급의 모든 의식적(意識的)인 전위(前衛)에 의해서 운전(運轉)되는, 하나의 위대한 사회민주주의적(社會民主主義的) 기계의 `톱니바퀴와 나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 문학의 창시자 고르키(M. Gorky, 1868~1936)는 사회주의리얼리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작가는 자본주의의 더러운 범죄적(犯罪的)인 모든 것, 그 비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의도(意圖)의 모든 것을 명백히 간취(看取)할 수 있는,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영웅적인 활동의 위대성의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는 그 높은 관점에 - 오로지 그 관점에 서는 것이, 생활에 있어서나 창작에 있어서나 필요하다.
현대에 있어서 작가는 동시에 두 가지 역할 즉 〔사회주의(社會主義)에 대한〕 조산부(助産婦)의 역할과 〔자본주의에 대한〕 무덤파기꾼의 역할을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주요한 목표(目標)는 사회주의적인 그리고 혁명적인 세계관(世界觀) 즉 세계감각을 고취(鼓吹)하는데 있다.
즉 시(詩)를 짓는 것, 소설을 쓰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등등은 자본주의의 범죄(犯罪)를 폭로하고 사회주의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읽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의감(正義感)에 불타면서, 혁명을 위하여 떨쳐 일어나도록 작품을 창작(創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32년, 스탈린의 지도하에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소련 예술가들에 의해 공식화(公式化)되면서 문학, 연극, 영화, 회화, 조각, 음악, 건축 등의 모든 예술분야에 적용되게 되었다. 그 주장은 다음과 같다.
①현실을 그 혁명적 발전의 측면에서 역사적 구체성을 가지고 정확히 묘사할 것.
②예술적 표현과 사회주의정신에 있어서의 이데올로기의 혁명(革新) 및 노동자(勞動者)들의 교육이라는 과제(課題)와 일치(一致)시킬 것.
그러면 이와 같은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성립시킨 이론的 근거(根據)는 무엇인가. 그것은 마르크스의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에 관한 이론이었다. 마르크스는 경제학비판(經濟學批判) 서언(序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산(生産) 諸관계(關係)의 총체(總體)는 사회의 경제적 기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것이 현실의 토대가 되어서 그 위에 법률적(法律的), 정치적(政治的)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세워지며, 또 일정한 사회적 의식(意識) 제형태(諸形態, 여러 형태) (예술을 포함(包含))는 이 현실의 토대에 대응(對應)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은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생겨나면 그것은 최대의 능동적인 힘이 되어서 자기의 토대가 강하게 되도록 능동적으로 협력하며...... , 상부구조가 토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은 토대에 봉사하기 위해서이며, 토대가 형성되고 강하게 되는 것은 능동적(能動的)으로 돕기 위해서이며, 수명이 다한 토대를 낡은 상부구조와 함께 근절시키려고 능동적으로 싸우기 위해서인 것이다.
상부구조(上部構造)는 어떤 경제적 토대가 살아서 일하는 한 시대의 산물이다. 따라서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사는 기간은 길지 않으며, 한 경제적 토대의 근절(根絶)과 함께 근절되고 소멸(消滅)한다.
이상을 총합(總合)하여 요약하면 공산주의예술은 자본주의 제도와 그 상부구조인 정치, 법률, 예술 등을 근절시키는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공산주의사회(사회주의사회)에서 노동자들을 교육하면서 그 경제체제의 유지(維持)?강화(强化)에 적극적으로 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와 같은 이론을 근거로 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세워진 것이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리얼리즘에 대한 비판
문학은 당(黨)의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레닌의 말, 작가는 인간정신의 기사(技師)라는 스탈린의 말, 작가는 사회주의의 조산부(助産婦)요, 자본주의의 무덤파기꾼이다라는 고르키의 말처럼 예술가나 작가에게는 당(黨)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요구되며, 예술가나 작가의 개성(個性)이나 자유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혁명 이후 공산주의체제가 무너지기까지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감시와 억압속에서 살아 왔다. 그리고 특히 스탈린이 사회주의리얼리즘을 추진(推進)한 1930년대의 후반에는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이단(異端)의 이름으로 체포(逮捕)되고 숙청(肅淸)되었던 것이다.26) 스탈린의 사후(死後)에도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상당한 기간 동안 예술이론으로서 군림(君臨)해 왔지만, 그러는 동안에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반체제(反體制)로 돌아서게 되었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한 미술평론가(美術評論家) 리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지적(知的) 또는 독단적인 목적을 예술에 쓸데없이 억지로 밀어 넣으려는 기획(企劃)에 불과하다'라고 하였다.27)
스탈린상(賞)을 수상(受賞)했다가 나중에 스탈린 비판자로 돌아섰던 소련의 작가 이리아 에렌부르그(I. Ehrenburg, 1891~1967)는 방직공장(紡績工場)의 여직공을 그린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이며 인간의 감정(感情)이 아니라 생산과정에 불과하다'28)라고 하면서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 그려지는 인간상(像)을 혹평했던 것이다. 예술평론가 조요한(趙要翰)도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있어서의 인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들(소련(蘇聯)의 작가... 필자)이 묘사한 농민과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일말(一抹)의 불안(不安)도 엿볼 수 없는 희한한 주인공(主人公)들이었다. 그것은 무갈등(non-conflict)의 이론이 유포(流布)되면서 더욱 그러하였다. 즉 인간적인 깊은 고민(苦悶)과 관련이 없는 것같이 보이는, 자기의 독특한 생활이 없는 주인공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인간의 내적세계(世界)가 표현될 리가 만무하다.
1986년 4월,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그것과 관련하여 고르바초프는, 체르노빌원전(原電)의 참사(慘事) 원인이 소련의 관료주의에 책임이 있음을 확인하고 비극이다. 참사도 문제였지만 우리 사회에 관료주의가 이처럼 뿌리깊게 박혀 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 더욱 슬픈 일이다라고 개탄하였으며, 당(黨)과 정부(政府) 차원에서 시도했다가 실패한 관료주의의 청산(淸算) 노력을 작가들에게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6월말(1986)의 제8차 소련 작가동맹전국대회에 즈음하여 관리(官吏)의 위선을 풍자한 고르키의 본을 받아서 여러 작가들은 관리에 대해서 더욱 비판적인 글을 써 달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일부 작가들은 그렇다면 문학작품의 사전 검열을 폐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소련의 예술가, 작가들은 오랫동안 사회주의리얼리즘이라는 이름아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모택동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직전에 백가쟁명정책(百家爭鳴政策)의 일환으로 한 때 문화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대부분의 문화인들은 사회주의정책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 후 등소평이 집권한 후 실용주의(實用主義)를 채택하여 문화인들에게 자유를 조금씩 허락해 주었더니, 중공의 저명한 이론가 王若水는 사회주의에도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소외(疎外)가 있음을 폭로하였다.
이상으로 프롤레타리아혁명을 위한 예술, 그리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順應)해야 하는 예술로서의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완전히 거짓된 예술임을 알았을 것이다.
(3) 작가(作家)에 의한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고발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은 예술가나 작가들에 대하여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입장에서 공산주의를 찬미(讚美)할 것을 강요했지만, 참다운 예술을 추구하는 예술가나 작가들은 오히려 공산주의시대에도 공산주의의 허위(虛僞)를 신랄하게 고발했다.
그 전까지 공산주의에 매혹(魅惑)되어 있던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Gide, 1869~1951)는, 1936년 고르키의 장례식에 초청되어 참석한 후, 약 일개월간 소련을 여행(旅行)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그가 실제로 본 소련사회에 대한 실망을 소비에트 기행기(紀行記)에서 솔직히 표현하였다. 그는 서언(序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년 전 나는 소비에트연방(聯邦)에 대한 나의 감탄과 사랑을 감히 선언했다. 그 나라에서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실험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희망(希望)으로 부풀게 했고 또 거기에 대하여 우리들은 무한(無限)한 진보(進步)와 인류를 이끌어 갈 만한 비약을 기대하였던 것이다.……우리들의 마음과 정신(精神)속에서 우리들은 미래의 문화 그 자체를 소비에트연방의 빛나는 운명에 연결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1개월간(一個月間)의 여행도중 소련의 민중들과 접촉해 본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비에트에 있어서는 어떤 일이든지, 그리고 모든 것에 일정한(한 가지) 의견(意見) 이외의 것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전부터, 그리고 확고하게 인정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러시아인과 말하고 있어도 마치 러시아人 전체와 말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소련사회(蘇聯社會)를 다음과 같이 심하게 비난(非難)하였다.
오늘날 소비에트에서 요구되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을 수락(受諾)하는 정신(精神)이며, 순응주의(順應主義)이다.……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어떤 나라에서도, 예컨대 히틀러시대의 독일에서 마저 인간의 정신이 이렇게까지 不자유하고, 이렇게까지 억압(抑壓)되어 있고, 공포(恐怖)에 떨며 종속(從屬)되었을까.
소련의 작가 파스테르나크(B. L. Pasternak, 1890~1960)는 아무도 모르게 닥터 지바고를 써서 러시아혁명에 대한 환상(幻想)을 토로하고 사랑의 사상을 호소했었다. 그 책은 소련에서 출판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출판되어 대단한 호평(好評)을 받았으며 그것으로 그에게는 노벨문학상이 수여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그는 국내(國內)의 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除名)되었고, 반동적(反動的) 반소작가(反蘇作家)로서 비난받게 되었다. 파스테르나크는 그 책속에서 그 자신의 양심(良心)을 상징(象徵)하는 지바고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르크스주의(主義)가 과학(科學)이라구요? …… 마르크스주의가 과학적 분야이기에는 너무도 자제(自制)가 부족(不足)하다고 생각해요. 과학은 보다 더 균형적(均衡的)일 것이라고 보아요. 마르크스主義가 객관적(客觀的)이라구요? 나는 마르크스주의보다 사실에서 더 유리(遊離)되어 있고 더 자기폐쇄적(自己閉鎖的)인 사상(思想)은 없다고 봅니다.
그는 또 혁명가(革命家)가 지식인들에게 취한 태도를 비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훌륭했지요. 일을 성실하게만 해 주시면 대환영이지요. 사상(思想) 특히 새로운 사상을 제시하면 더욱 좋구요. 환영(歡迎)은 당연지사(當然之事)지요. 잘 해 주어요. 일에 전념하고, 투쟁심을 갖고 탐구(探求)해 주어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거리를 잡고보면 사상이라는 것은 단순한 겉치레일 뿐이며, 실제로는 혁명과 권력의 좌(座, 자리)에 있는 者를 구가(謳歌)하는 말씀의 액세서리(부속품)에 불과하였지요.
(4) 통일사상에서 본 공산주의예술론의 오류(誤謬)
사회주의리얼리즘의 오류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원인은 예술을 작가(作家)의 개성(個性)을 살리면서 전체를 위한 창작 또는 자신을 위한 감상과, 미(美)와 기쁨의 창조활동으로 보지 않고, 당(黨)의 방침에 순응하면서 인민을 교육하는 어용수단(御用手段)으로서의 예술로 본 데 있다. 예술가는 작품속에서 개성(個性)을 최대한 발휘(發揮)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인류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주의리얼리즘에서는 개성(個性)을 박탈하고 작품을 획일화(劃一化)시켜 버렸다. 따라서 거기에서 참다운 예술작품이 생길 리가 없는 것이다.
둘째 원인은 하나님을 부정함으로써 예술활동의 근본 기준을 상실(喪失)해 버린 데 있다. 그 대신 당의 방침에 입각한 제멋대로의 기준을 세워서 예술가, 작가를 그 기준에 일치하도록 강요(强要)했던 것이다. 셋째 원인은 미(美)와 사랑이 표리(表裏)의 관계이기 때문에 예술과 윤리도 표리(表裏)의 관계여야 함을 모르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사회는 사랑의 윤리를 부정하기 때문에 예술은 사랑이 없는 예술 또는 공산당의 인민지배(人民支配)의 도구로서의 예술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넷째 원인은 예술이 결코 상부구조(上部構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리얼리즘은 예술을 상부구조로 본 데에 있다. 그 때문에 예술은 경제체계(經濟體系(土臺))의 시녀(侍女)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예술은 경제체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경제학비판(經濟學批判)의 마지막 부분의 서설(序說)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곤란(困難)한 것은 그리스의 예술이나 서사시가 사회적인 발전형태에 어떻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이해하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곤란한 것은 그것들이 우리들에게 아직도 예술적인 즐거움을 주고, 어떤 점에서는 규범(規範)으로서 그리고 도달(到達)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서의 의의(意義)를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데 있다.
유물사관(唯物史觀)에 의하면, 그리스의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일부인 예술이나 문학이 지금쯤(마르크스 當時)은 형태도 없이 사라져 버렸어야 하며, 오늘날의 사람들은 그것에 아무런 흥미(興味)도 느낄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예술이나 일리아드(Iliad), 오디세이(Odysseia)와 같은 서사시(敍事詩)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 생활의 규범(規範)으로까지 삼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물사관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곤란을 느낀다고 실토(實吐)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마르크스 자신이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의 오류를 자증(自證; 스스로 인증)한 것이다.
인간에게는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추구하려는 욕망(基本的 欲望)이 있다. 이 욕망은 아무리 타락한 인간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그리고 어느 시대나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망이다. 따라서 작품중에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나타나 있다면 그것은 언제나 만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리스의 예술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음은 그것에 크건 작건 간에 인간이 바라는 영원(永遠)한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거의 동시대에 소련사회의 부패를 다같이 고발하였지만, 작풍(作風)에 있어서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작가, 고르키와 톨스토이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고르키는 폭력(暴力)에 의하여 자본주의사회를 타도(打倒)하고자 공산주의에 동조(同調)하면서, 예술가의 사명(使命)은 혁명을 고무(鼓舞)하는데 있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예술가였다. 그리하여 그는 혁명운동(革命運動)을 미화(美化)하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고르키의 작품인 어머니는 사회주의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한 노동자의 무학(無學)의 어머니가 혁명운동으로 투옥(投獄)된 외아들의 안전을 염려하는 일념(一念)에서, 계속해서 그 아들을 설득하려다가 도리어 그 아들에게 설득당하여 사회의 모순성(矛盾性)을 자각하고 드디어 혁명운동의 적극적(積極的)인 참가자가 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당시의 사회악(社會惡)을 고발하면서 그 해결의 길은 사랑에 의한 참다운 인간성(人間性)의 회복에 있다고 설파(說破)하였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의 하나가 부활(復活)이다. 배심원(陪審員)으로서 법정에 선 한 귀족청년이, 자기가 젊었을 때 한 순간의 잘못으로 유혹(유혹(誘惑))한 하녀가 범죄하여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사실을 본다. 그는 양심의 가책으로 고민하던 끝에 회개하여 그녀를 구할 결심을 한다. 드디어 그녀는 갱생(更生)되고 그 청년도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내용이다.
고르키가 택한 것은 외적인 사회혁명의 길이고, 톨스토이가 택한 것은 내적인 정신적(精神的) 혁명(革命)의 길이었다. 어느 것이 올바른 길이었을까. 고르키가 택한 폭력혁명에의 길은 그 후 사회주의사회의 실태가 보여준 바와 같이 인간성의 억압(抑壓)과 관료주의(官僚主義)의 부패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톨스토이가 택한 길은 비록 사회전체를 구한다는 점에서는 성공치 못한 점이 있지만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는 올바른 방향(方向)의 길이었다.
통일사상은 인간과 사회가 다 같이 본연의 모습으로 개혁(改革)되는 가장 올바른 길을 추구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인간과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정확히 앎으로써 본래의 인간의 모습, 본연의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방향(方向)을 향하여 인간과 사회를 개혁해 가면 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통일사상이 주장하는 새로운 예술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사랑)을 중심으로하여 이상주의(理想主義)와 현실주의(現實主義)가 통일된 통일주의예술이다. 그것은 본연의 인간과 본연의 사회라는 이상(理想)을 향하여 현실을 개혁(改革)해 나아가는 예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