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頭翼)사상 요강 - 제5장 교육론(敎育論)

훈독왕 | 20250731194307

통일(頭翼)사상 요강

 

제5장 교육론(敎育論)

( Theory of Education )

 

오늘날 청소년의 탈선(脫線), 性도덕(道德)의 퇴폐(頹廢), 폭력사건(暴力事件)의 빈발(頻發) 등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은 위기(危機)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혼란을 구할 수 있는 교육이념은 발견되지 않은 채 오늘의 교육은 방향감각(方向感覺)을 잃고 있으며, 사제(師弟)의 도(道)마저 붕괴되고 있다.

 

즉 학생은 스승을 존경하지 않으며, 스승은 권위(權威)와 정열(情熱)을 상실하고 있다. 그 결과 일부의 스승은 지식을 팔고 학생은 지식을 사는 것같은 관계가 되어 학교는 지식의 매매장(賣買場)으로 전락되어 버린 경향마저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대학가(大學街)에 침투(浸透)하여 학내(學內)를 광란(狂亂)의 장(場)으로 삼았으며, 교육이념(敎育理念) 부재(不在)의 상황속에서 공산주의의 공세를 강화(强化)시키곤 하였다.

 

민주주의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이란, 주권재민(主權在民),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 권리평등(權利平等) 등의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면서 타인(他人)의 권리를 존중하고 자기의 책임을 다한 터 위에서 자기의 권리(權利)를 주장하는 시민(市民), 즉 민주적시민(民主的市民)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육이념에 대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격(攻擊)하곤 했다. 계급사회에서 지배층이 노동자, 농민들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는가. 계급사회에서 의무(義務)와 사명(使命)을 다 한다는 것은 권력층의 충실한 종이 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참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다.

 

 
참다운 민주주의란 인민대중인 노동자(勞動者)나 농민(農民)들을 위한 민주주의, 즉 인민민주주의(人民民主主義)여야 한다. 따라서 참된 민주주의교육은 인민을 위한 교육이어야 하며, 참된 교육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사회를 타도(打倒)하고 사회주의사회(社會主義社會)를 건설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고 선전한다.

 

공산주의의 이와 같은 참소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착취, 억압, 부정, 부패 등의 사회적(社會的) 구조(構造)악(惡)이 남아있는 한, 설득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와 같은 사회악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참사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운동이 전개되어야 하며, 새로운 교육이념(敎育理念)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교육이념(敎育理念)은 인간의 성장에 대하여 본래 하나님이 원했던 기준을 근거로 해서 세워져야 한다. 그것은 혼미한 오늘의 교육에 방향성을 제시하고 미래사회에 대하여 교육의 비전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즉 다가오는 미래의 이상사회(理想社會)를 대비하기 위한 교육론이어야 한다. 本 교육론(敎育論, 통일교육론(敎育論))은 바로 이와 같은 교육론으로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육(敎育)이론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교육의 이념(理念), 목표(目標), 방법(方法) 등에 관한 것으로서 소위 교육철학(敎育哲學)이 이에 해당하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교육현상을 취급하는 측면으로서 교육과학(敎育科學)이 이에 해당한다. 교육과학(敎育科學)은 교육과정(敎育課程, 커리큘럼), 교육평가(敎育評價), 학습지도(學習指導), 학생지도(學生指導), 교육행정(敎育行政), 교육경영(敎育經營) 등을 연구하는 측면이다.


교육에 있어서의 이 두 가지 측면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다. 그리하여 교육철학은 성상적교육(性相的敎育)이고, 교육과학은 형상적교육(形狀的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과학적(科學的) 교육학(敎育學)이 과학 존중의 조류(潮流)속에서 크게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철학은 경시(輕視)되어 쇠퇴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육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곧 교육철학의 부재(不在)를 뜻한다. 따라서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은 새로운 교육철학의 확립이며, 통일교육론(敎育論)은 바로 그러한 교육철학(敎育哲學)에 해당하는 것이다.

 

一. 통일교육론(敎育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1) 하나님에의 상사성(相似性, 서로 닮음)과 3대축복(三大祝福)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으며(창세기1:27), 창조가 끝난 후 생육하고 번성하여…… 만물을 주관하라(창세기1:28)는 축복(三大祝福)을 내리셨다. 이것이 교육의 근거(根據)가 된다. 즉 교육이란 하나님을 닮도록 자녀를 양육(養育)시키는 것이며,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도록 인도하는 노력인 것이다.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신상과 신성(神性)을 닮는다는 뜻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신상(성상-형상, 양성-음성, 그리고 개별상)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극히 미숙(未熟)한 상태에 있으며, 성장하면서 점차로 하나님의 신상을 닮아간다. 신성(神性)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은 성장하면서, 신상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성상(性相)-형상(形狀), 양성(陽性)-음성(陰性), 개별상(個別相)을, 그리고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심정(心情), 이법(理法), 창조성(創造性) 등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에게 생육(生育)하고 번성(繁盛)하여 만물을 다스리라는 3대축복(三大祝福)을 주셨다.


즉, 生育하라(be fruitful)는 말은 개체의 인격(人格)을 완성하라는 뜻이며,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는 말은 부부(夫婦)가 되어 자손을 번식(繁殖)하라는 의미이고 땅을 정복(征服)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은 만물을 주관(主管)하라는 의미이다. 이 3대축복(三大祝福)을 성취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신상과 함께 하나님의 신성(神性), 즉 심정(心情), 이법(理法), 창조성(創造性)을 계승하여 완전성(完全性), 번식(繁殖)性, 주관성(主管性)에 있어서 하나님을 온전히 닮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한다. 이 3대축복(三大祝福)에서 교육의 이념(理念)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1) 완전성(完全性)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으라는 뜻이다. 완전성이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심정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원만한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를 이루고 있다. 이 상태가 완전성(完全性)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완전성(完全性)을 닮는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성상과 형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성상-형상에는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네 가지의 유형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을 말한다. 그래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생심(生心)이 주체, 육심(肉心)이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생심이 육심을 주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생심은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추구하고, 육심은 의식주(衣食住) 및 性을 추구한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제1차적으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을 제2차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의 중심은 심정(心情)이며 사랑이다. 결국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중심으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이 영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완전성(完全性)을 닮는다는 뜻이다. 인간이 어렸을 때는 진선미(眞善美)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성장함에 따라 점차 심정이 발달하여 사랑을 중심한 참된 생활, 선(善)한 생활, 아름다운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점차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아가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적 존재이므로 인간의 성장에는 영인체의 성장과 육신의 성장이 있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육(生育)하라'라는 제1축복(第一祝福)은 육신의 성장의 의미도 있으나, 주로 영인체의 성장, 즉 심령기준(心靈基準)의 향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라 하더라도, 육신을 터로 하고서만, 즉 성상(영인체)과 형상(육신)의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해서만 영인체가 성장한다. 이렇게 해서 다 성장하여 하나님의 완전성을 상속받으라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1(第一)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다.


2) 번식성(繁殖性)


인간은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을 닮으라는 것, 즉 인간이 자녀번식의 단계에까지 성장(成長)하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이 양성(陽性), 음성(陰性)의 조화체이듯이 이 하나님의 양성(陽性)-음성(陰性)의 조화를 닮으라는 뜻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양성-음성의 조화란 부부의 조화를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인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수수작용(통일)과, 양성(陽性)-음성(陰性)의 조화에 의해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도 마음과 몸의 통일과 양성(陽性)-음성(陰性)(남성과 여성)의 조화에 의하여 자녀를 번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번식성(繁殖性)을 닮으라는 말은, 하나님과 같이 양성(陽性)-음성(陰性)이 원만한 수수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결혼을 하여 자녀를 번식하는 자격을 구비하도록 성장하라는 의미이다. 즉 남성(男性)은 남성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고 여성(女性)은 여성으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남편으로서의 도리(道理), 아내로서의 도리(道理)를 다 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성장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자격을 갖춘 후 결혼하여 자녀를 번식(繁殖)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제2(第二)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 된다.


3) 주관성(主管性)


그리고 또 인간은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지 않으면 안 된다. 주관성(主管性)을 닮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심정(心情)(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대상(新生體)을 만드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창조성을 가지고 인간 및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고자 한다. 본래, 인간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서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완성하면 그와 같은 능력을 구비하게 되며, 이것이 제3(第三)의 예약축복(豫約祝福)이다.


예컨대, 모든 산업활동은 일종의 만물주관에 해당한다. 농민이 논밭을 경작하는 것은 토지에 대한 주관이요, 노동자가 공장에서 기계를 사용하여 원료를 제품으로 만드는데, 이것은 기계나 원료에 대한 주관이다. 또 어업(漁業)은 바다나 물고기에 대한 인간의 주관이요, 임업(林業)은 산이나 나무에 대한 인간의 주관이다.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은, 만물에 대하여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창조성은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측면에서 보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농업에 있어서 농민은 새로운 아이디어(창조성)를 가지고 창의적(創意的)으로 보다 많은 수확을 올리고자 노력하게 된다. 상업에 있어서도 아이디어와 창의력(創意力)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 요컨대 농업, 광업, 공업, 상업, 임업, 어업 등은 모두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발휘의 대상이며 만물의 주관이다. 과학이나 예술도 만물주관의 범주(範疇)에 들어가며, 사회를 주관하는 것 즉 정치하는 것도 만물주관 속에 속한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을 중심한 창조성인데 타락으로 인하여 심정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기 즉 이기심(利己心)을 중심한 창조성이 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창조성을 가지고 사회나 자연에 피해(被害)를 끼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전쟁무기의 생산(生産)이라든지 공해증대(公害增大) 등이 그 예이다. 따라서 학생을 지도함에 있어서 교사들은 새로운 교육론의 입장에서 학생들이 심정을 중심한 창조성을 발휘하도록, 즉 하나님의 주관성을 닮도록 지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인간의 성장과정(成長過程)


인간은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으나, 태어나면서 곧바로 하나님을 닮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는 일정한 성장기간이 없어서는 안 된다. 피조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소생(蘇生), 장성(長成), 완성(完成)의 3단계에 걸쳐 성장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닮게 된다. 닮되 완전성(完全性), 번식성(繁殖性), 주관성(主管性)을 닮게 된다. 따라서 성장이란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측면과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의 측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3대축복(三大祝福)이란, 인간이 완성한 후, 하나님의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을 상속받는다는 의미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3대축복은 3대예약축복(三大豫約祝福)이다. 그런데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이 3대축복은 성취되지 않았다.

 
이 3대축복은 창세기에 있는 대로, 하라는 따위의 명령형식(命令形式)의 축복이다. 비록 인간은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명령(命令)은 취소된 것이 아니며, 명령(命令, 축복) 그 자체는 오늘날까지 유효(有效)하다. 이것은 천의(天意)가 인간의 잠재의식(潛在意識)을 통하여 3대명령(命令), 즉 3대축복을 성취하도록 작용해 온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중에도 3대축복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된다. 즉 타락사회에 있으면서도 인간은 모두 자기도 모르게 그와 같은 천의(天意)에 따라 비록 서툴기는 하지만 인격적(人格的)으로 성장하여, 좋은 상대를 찾아서 가정을 만들고 자연을 지배하거나 사회를 개선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다.


인간에게 성장욕(成長欲), 결혼욕(結婚欲), 지배욕(支配欲), 개선욕(改善欲) 등이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욕망이 오늘날까지 온전히 달성되지 못하였으니 그것은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이었다.


여하 간에 본연(本然)의 세계에 있어서, 인간은 3대축복을 완성하기 위하여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 이외의 만물도 성장한다. 그런데 만물은 원리자체(原理自體)의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 성장한다. 즉 생명(生命)이 지향하는 대로 맡겨두면 자연히 성장하는 것이다.

 
원리자체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이란 바로 생명(生命)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육신은 만물과 마찬가지로 원리자체의 자율성(自律性)과 주관성(主管性)에 의해 성장하지만, 영인체의 성장은 그렇지 않다. 영인체는 책임분담을 완수할 때에만 성장하게 되어 있다.


인간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이 부과된 것은 그 때문이다. 책임분담(責任分擔)에 의한 성장이란 인간이 자신의 책임과 노력에 의해 인격을 향상(向上)시켜 나아감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의사로써 규범원리(規範原理)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체험)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인류시조(人類始祖)인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계명(戒命)을 지키면서 성장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한 다음, 부부가 되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는 전인류를 대표하는 최초의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자기의 책임분담 뿐만 아니라 후손(後孫)의 대부분의 책임분담까지도 메워져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의 책임분담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干涉)하시지 않는다.


아담과 해와가 스스로의 힘으로 그와 같은 무거운 책임분담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완수하게 되면, 그 자손들은 지극히 적은 분량(分量)의 책임분담만으로도, 즉 부모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아담과 해와의 경우, 이 3대축복을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순전히 자신들의 책임만으로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가 완성한 뒤, 자녀들이 그 부모의 가르침에 순순히 따른다는 말은 부모의 가르침 즉 부모의 교육을 자식들이 받아야 함을 뜻한다.


여기에 부모(父母)의 자녀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생긴다. 바꾸어 말하면 子女가 해야 할 책임분담을 위해서 부모의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에 교육의 이념(理念)이 세워진다. 즉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쳐서 3대축복을 완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의 근본이념(根本理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본래의 장소는 부모가 상주(常住)하는 가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정보량이나, 교육내용이 증대(增大)하게 되어 현실적으로 부모만으로는 불가능하므로, 교육의 장소는 필연적(必然的)으로 가정에서 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로 옮겨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대신 학교에서 스승이 부모를 대신하여 교육하게 된다. 따라서 교사는 부모의 심정(心情)으로 부모를 대신해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본래의 교육의 모습이다.


(3) 교육(敎育)의 3대이념(三大理念)


이리하여 통일교육론에 있어서의 교육(敎育)의 목표는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완전성, 번식성, 주관성을 닮게 하는데 있다. 이것이 통일교육론의 교육의 이념(理念)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 것을 개체완성(個體完成, 개성완성(個性完成))이라 한다.


개체완성은 제1축복(第一祝福)의 완성으로서 인격의 완성을 의미한다. 또 번식성을 닮는 것을 가정완성(家庭完成)이라 한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장차 결혼하여 부부의 조화(調和)를 나타내면서 원만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즉 제2축복(第二祝福)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성을 닮는 것을 주관성완성이라 한다. 이것은 만물의 주관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곧 제3축복(第三祝福)의 완성을 뜻한다. 이리하여 통일교육론에 있어서의 교육의 3대이념은 제1축복완성(第一祝福完成)을 위한 개체완성(個性完成)과 제2축복완성(第二祝福完成)을 위한 가정완성과 제3축복완성(第三祝福完成)을 위한 주관성완성인 것이다.

 

二. 교육(敎育)의 3형태(三形態) 


이와 같은 이념(理念)을 기반으로 할 때, 인간에게는 어떤 형태의 교육이 필요할까.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해서는 심정교육(心情敎育)이 필요하고, 가정완성을 위해서는 규범교육(規範敎育)이 필요하고,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기술교육(技術敎育), 지식교육(知識敎育), 체육(體育) 등의 주관교육(主管敎育)이 필요하다. 다음에 이 세 가지 교육의 형태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심정교육(心情敎育)


1)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게 하는 교육이 심정교육이다. 하나님의 완전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성을 닮는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수수작용을 하여 하나된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 있어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은 심정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함으로써 통일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생심과 육심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心情)이 생심과 육심의 수수작용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심정(心情)이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중심이 되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해서, 개인의 중심이 되는 그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一致)되어야 한다. 개인의 심정이 하나님의 심정과 일치(一致)하도록 하는 교육을 심정교육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심정교육(心情敎育)은 개체완성(個體完成)을 위한 교육이 된다.


심정교육(心情敎育)이란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만민과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으로 기르는 교육이다. 그와 같은 인간으로 양육하기 위해서는 피교육자(被敎育者)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학생(피교육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2)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표현 형태


하나님의 심정은 창조와 복귀섭리의 과정을 통하여 세 가지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즉 소망의 심정, 슬픔의 심정, 고통의 심정이 그것이다.


① 소망(所望)의 심정(心情)


소망의 심정이란, 우주 창조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으로서, 무한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최초의 자녀, 아담과 해와를 얻는다는 기대(期待)와 소망에 찬 기쁨의 감정을 말한다. 이 소망의 심정이 달성되었을 때 말할 수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을 느낀다.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표현할 길이 없는 만족에 찬 기쁨이었던 것이다.


최근 물리학에 의하면, 150~200억년이라는 오랜 기간 전에 우주가 생성(生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통일원리로 볼 때 150~200억년 전에 우주가 창조(創造)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랜 기간을 두고 우주를 창조하신 이유(理由)가 무엇일까. 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자녀인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한 자녀를 얻기 위한 한 때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와 같은 오랜 기간을 걸쳐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희망에 찬 하나님은 우주 창조의 과정이 아무리 길고 어렵더라도 그것이 길다거나 괴롭다고는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기쁜 결과를 바라보면서 일을 준비할 때는, 그 일이 아무리 어려운 것같이 예견(豫見)되더라도 실제로 부딪혀 보면 그렇게 괴로움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간은 속히 흘러간다. 그것은 머지않아 기쁨이 다가온다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기쁨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그와 같은 기쁨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훨씬 큰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아담과 해와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바 없이 크고 깊은 것이었다.


② 슬픔의 심정(心情)


슬픔의 심정이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여 사망권내(死亡圈內, 사탄의 지배하)에 떨어졌을 때의 하나님의 감정을 말하는 것으로서 자식(子息)을 잃고 슬퍼하는 부모(父母)의 감정과 같은 하나님의 감정을 뜻한다. 초창기때 선생님의 설교 말씀이 아담과 해와의 타락에 미치게 되면, 그 때의 하나님의 그 슬픈 심정을 소개하면서 슬피 통곡하시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그리고 아담과 해와의 타락 직후부터 복귀섭리를 시작한 후에도 장차 뜻이 이루어질 미래의 기쁨과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은 섭리를 진행시키셨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의 그 섭리를 아랑곳 하지않고 퇴폐(退廢)와 난폭(亂暴)만을 일삼고 있었으니, 이 광경(光景)을 바라보시면서 그때마다 또 다시 탄식하시고 슬퍼하시곤 하셨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역사를 섭리해 오신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인 동시에 한(恨)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즉 창조할 때의 기대(期待)와 소망(所望)이 너무 컸기 때문에 타락에 의해 초래(招來)된 하나님의 실망의 슬픔은 그 만큼 더 컸던 것이다.


속세(俗世)에서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을 때 부모(父母) 특히 그 어미(母)는 심히도 애통(哀痛)해 한다. 비록 자식의 병이 위중해서 불치(不治)의 병이라고 선고되었더라도, 실제로 숨이 끊어지면 슬퍼서 어쩔 줄 모르는 모정(母情)이 적지 않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했을 때의 하나님의 슬픈 심정과, 감옥과 같은 사탄세계에서 고생하는 아담과 해와와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의 심정은, 자식을 잃은 세속적(世俗的)인 부모의 슬픔과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것이었다. 역사 이래 하나님처럼 슬픈 인간은 일찍이 이 세상(世上)에 없었다는 것이 문선생께서 알려주신 하나님의 심정의 모습의 하나였다.


③ 고통(苦痛)의 심정(心情)


고통의 심정이란 복귀섭리(復歸攝理)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섭리역사의 중심인물들이 사탄과 그 앞잡이들로부터 박해(迫害)를 당하면서 고통당하는 것을 보실 때의 하나님의 아픈 감정을 말한다. 즉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되살리기 위해서 선지선열(先知先烈)과 성현(聖賢)들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박해하고 때로는 학살(虐殺)까지 하는 광경을 바라보실 때마다 하나님의 가슴은 못이 박히고 창에 찔리는 듯이 아프셨던 것이다. 타락세계의 인간들을 기어이 살리시기 위해서 보내신 성현(聖賢)들이나 의인(義人)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당하는 멸시(蔑視)와 조소(嘲笑), 박해(迫害)와 천대(賤待)는 바로 하나님 자신에 대한 멸시와 조소로 느끼셨으며,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박해와 천대로 느끼신 것이다. 이리하여 복귀섭리노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또 하나의 심정은 고통의 심정이었다.


3)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이해(理解)


심정교육(心情敎育)을 위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심정을 피교육자(被敎育者, 학생)들에게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복귀노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아담가정(家庭), 노아가정(家庭), 아브라함가정(家庭), 모세노정(路程), 예수님노정(路程) 등의 복귀노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문선생께서 소개하신 하나님의 심정(心情)에 관한 내용이다.


① 아담 가정(家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소망 가운데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한없는 소망과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아담과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한없이 비통해 하셨다. 그래서 아담가정을 구하기 위하여 아담과 해와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에게 헌제(獻祭)를 시켰으며,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의 헌제(獻祭)가 성공할 것이라는 큰 소망을 가지고 그 자리에 임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므로 아담과 해와나 가인?아벨이 실패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한탄하고 슬퍼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비록 인간이 타락할 수도 있으리라는 가능성(可能性)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심정의 하나님이요,


따라서 소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타락의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예지(豫知)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헌제(獻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헌제에 걸었던 하나님의 기대(期待)는 엄청나게 컸던 것이다. 헌제에 건 하나님의 소망이 이처럼 강했기 때문에 헌제의 실수(失手)의 가능성(可能性)에 대한 예지(豫知)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계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심정(心情)(사랑)과 이성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심정의 충동력 그 자체는 이성을 압도하리만큼 강력(强力)한 것이다.


이리하여 아담과 해와 때도 가인?아벨 때도 하나님의 심정은 성공만을 원하신 소망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아담과 해와도, 가인?아벨도 실패하고 말았으므로 그 슬픔이 비길 데 없이 컸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슬픔을 외부로 표현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런 장면(場面)마다 항상 사탄이 함께 있어서 주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슬픔을 외부에 나타내면 슬픔에 젖은 그 하나님의 모습이 사탄에게는 위신도 권위도 없는, 하나님답지 않은 초라한 모습으로만 비쳐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누르면서 비장(悲壯)한 얼굴로 그곳을 떠나가신 것이다. 이것이 초창기에 문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아담가정에서의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② 노아 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아담가정을 떠난 하나님은 160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曠野)의 길을 걸으시면서 지상의 협력자를 찾아 헤매셨다. 그동안 인간들은 모두 하나님에게 등을 돌릴 뿐, 누구도 하나님을 맞이하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世上에는 하나님이 머물 수 있는 한 채의 집도, 설 수 있는 한치의 땅도, 상대할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천애(天涯)의 고독단신(孤獨單身)의 처량한 신세가 되어서 쓸쓸한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하나님은 한 사람의 협력자(協力者)인 노아를 만나셨다. 하나님의 기쁨은 비할 데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적 사정 때문에 사랑하는 노아에게 엄한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사람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120년간 방주를 지었다.


노아는 단지 하나님 앞에 세워진 종이요, 의인(義人)이었을 뿐,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록 종일지라도 그와 같은 노아를 만난 것이 그렇게도 기뻐서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종의 입장으로 내려와 노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런데 홍수심판을 거친 뒤에 노아의 아들 함이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홍수(洪水)심판에서 살아남은 유일(唯一)한 가정이었던 노아가정에 다시 사탄이 침범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과 슬픔을 느끼면서 또 다시 쓸쓸한 모습으로 노아가정을 떠나신 것이다.


③ 아브라함 가정(家庭)에서의 하나님의 심정


그 후, 4백년 만에 아브라함을 찾아 세웠다. 아브라함노정(路程)에 있어서 아브라함에게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칠 때였다. 비둘기와 양과 암소를 바치는 상징헌제(象徵獻祭)에 실패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그 때 아들을 살릴 것인가, 천명(天命)에 따라 자식을 바칠 것인가, 즉 인륜(人倫)을 따를 것인가 천륜(天倫)을 따를 것인가를 두고 아브라함은 고민했다.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대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고 싶을 정도로, 이삭을 살리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인륜(人倫)을 끊고 천륜(天倫)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리아산(山)을 향해 가는 3일간의 기간은, 아브라함에 있어서 천륜(天倫)이냐, 인륜(人倫)이냐를 택일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었다. 그 때 하나님은 멀리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를 바쳐라라는 엄한 명령을 내리시고는, 아브라함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아니 그 이상으로 괴로워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모리아山에서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 이삭을 제물(祭物)로 바치기 위해 칼을 들고 죽이려 했을때, 하나님은 드디어 그를 죽이지 말라고 황급히 말리시면서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창세기 22:12)고 말씀하셨다. 그 때 하나님의 뜻을 대하는 아브라함의 심정과,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과 순종과 충성은 이미 그로 하여금 이삭을 죽였다는 입장에 서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삭을 죽이지 않아도 죽인 것과 같은 조건(條件)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 죽이는 것을 中止시키고, 대신에 숫양을 번제로 드리게 했다. 여기에 이제야………라고 하신 말씀 속에는 그동안 아브라함에 대해 느끼셨던 하나님의 섭섭함과, 이삭헌제(獻祭)에서 보인 아브라함의 충성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④ 모세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애급의 왕자로서 성장하던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민족이 받고 있는 고통의 현장을 목격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복귀(復歸)시키기로 작정하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을 광야로 인도했으나, 이스라엘백성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지도자인 모세에 대해 반역(反逆)을 하곤 했다. 한 번은 모세가 시내山에서 40일간의 금식(禁食, 단식)을 마친 후, 두 개의 석판을 받아 가지고 山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이스라엘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빌고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불신(不信)의 행위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면서 석판(石板)을 던져버렸다. 그 때 하나님은 내가 이 백성(百姓)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애급 32:9~10)고 하셨다.


그 때의 모세의 심정(心情)은 어떠하였을까. 이스라엘백성들의 불신이 괘씸은 했으나 이 백성을 내가 진멸하겠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대할 때, 순간적으로 그의 애족(愛族), 애국(愛國)의 심정이 솟구쳤다. 그리하여 그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 해도 이 민족(民族)을 살리고 싶었으며, 할 수만 있으면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가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매달려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 (출세기 32:12)라고 하면서 민족을 살려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그 애족심(愛族心)어린 호소의 기도를 용납하셔서 드디어 이스라엘민족을 진멸코자 했던 뜻을 철회하신 것이다.


그런데 40년간 광야(曠野)를 유랑(流浪)한 후,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백성들은 마실 물조차 없다면서 모세를 또 원망하였다. 그 때 모세는 불신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노여움 때문에 한 번 쳐야할 바위를 두 번 쳐버린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짓이었다. 그 후 하나님은 비스가 山上에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백성이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을 보여 주면서 너는... ...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신명기 32:52)라고 하신 것이었다. 80 노구를 이끌고 40일 금식을 두 번씩이나 했던 모세, 불신하는 민족을 붙들고 40년간이나 신광야에서 고생했던 모세였다. 사실상 출애급의 주역인 모세를 가나안 땅에 인도하고 싶은 하나님이었지만 사탄의 참소 때문에 할 수 없이 눈앞에 있는 그 곳을 환상으로만 보여 주시고는 그를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슬픔과 아픔과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이다.


⑤ 예수 노정(路程)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심정(心情)


구약성서에 기록된 대로(이사야 9:6) 예수님은 지상(地上)에 메시아로 오셨다. 온 땅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지 않으면 안될 구세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릴 때부터 배척(排斥)당하였다. 가족들이 예수를 몰랐고 유대교가 예수를 불신했으며, 결국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이다. 어디에도 갈 곳이 없었던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노정을 포함해서 33년간 쓸쓸하고 고독(孤獨)한 생애를 보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누가 9:58)라고 하면서 그 고독한 심정을 토로(吐露)했으며,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고 눈물지으시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받은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누가 19:41~44)고 하면서 저주하기도 했다. 때로는 갈릴리 해변을 거닐면서 또는 선민(選民)이 아닌 사마리아여인(女人)과 말을 나누면서(요한 4:7~26) 외로움을 달랬으며, 유대인의 지도자들보다 세리(稅吏)들과 창녀(娼妓)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마태 21:31)고 하면서 구세주이신 자신을 몰라주는 교단들에 대한 섭섭함을 고백하기도 하셨다. 이 때 하나님도 고독한 예수님과 더불어 고독한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十字架)에 달리신 독생자(獨生子) 예수님의 그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겠는가. 너무나 참혹한 모습을 하나님은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내려 놓을 수 없는 사정을 한탄하시면서 얼굴을 돌리셨다. 그 장면이 세 시간의 어둠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十字架刑)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 이상의 것이었다.


4) 하나님의 심정(心情)의 소개


이상은 모두 초창기에 선생님께서 설교때마다 흐느껴 우시면서 소개하신 내용들이다. 곧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의 노정(路程)을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나 이민족(異民族)에 있어서의 성현(聖賢), 의인(義人)들의 수난의 노정 배후에도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심정교육에 있어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부모(父母) 혹은 교사(敎師)들이 학생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직접 말씀으로써 들려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비디오 등의 매스컴이나 소설, 연극, 회화 등의 작품을 통해서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5) 실천(實踐)을 통한 심정교육(心情敎育)


하나님의 심정을 말로 알릴뿐 아니라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직접 보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가정에서 부모가 자식에게 진실로 사랑을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 먹이고 입히고 거처를 제공하고, 잠을 재우고 하는 일, 예절을 가르치는 일 등 가정에서 자식(子女)들을 보살핌에 있어서 항상 지성어린 따뜻한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참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부모가 계속해서 자식들에게 보인다면, 자식들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면서 효도하게 되는 것은 물론 자식들 상호간에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정이 부모의 참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자식들에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는 말과 행동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사랑을 보여야 한다. 매 학과마다 정성을 다해서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아동 하나 하나에 대해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내 자식처럼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 주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가정교육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일상의 言語와 행동(行動)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공사간(公私間)의 생활에 있어서의 선생의 말 한마디, 행동의 일거수(一擧手) 일투족(一投足)이 피교육자(被敎育者)에게는 모두 배움의 교재가 되고 인격 형성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에 넘친 학교교육을 받는 동안 아동들은 깊은 감동을 받게 되며, 그 스승을 존경하고 따르게 될 뿐 아니라, 드디어 그 스승을 닮게 됨으로써 참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이다. 이상이 가정과 학교에 있어서의 실천을 통한 심정교육이다.

 

(2) 규범교육(規範敎育)


1) 가정완성(家庭完成)을 위한 교육(敎育)


가정완성을 위한 교육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夫婦)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를 닮을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서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교육이 다. 인간타락이 규범(規範)(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데 있었으므로, 이 교육은 우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규범교육인 것이다. 남성(男性)은 남편으로서의 도리(道理)가, 여성(女性)은 아내로서의 도리(道理)가 몸에 배도록 배워 익히게 한다. 또 가정에서의 부모와 자녀의 본연적(本然的) 자세나 형제자매(兄弟姉妹)의 자세도 규범교육에 포함된다.


규범교육에 있어서 특히 중요한 것은 性의 신성성(神聖性), 신비성(神秘性)에 대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性은 결혼을 통하여 비로소 체험하는 것이므로 그 때까지는 결코 범해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일깨우는 일이다.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선악(善惡)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어서는 안 된다(창세기 2:17)고 하셨다. 선악과는 해와의 성적(性的)사랑(원리강론 1987, p. 85)을 의미하기 때문에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性(性的器官)은 신성한 것이므로 성적영역(性的領域)을 범함으로써 성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명은 아담과 해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有效)하다. 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영원히 유효(有效)한 하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인 것이다. 이것은 또 남녀가 결혼(結婚)한 뒤에도, 다른 이성(異性)과의 탈선(脫線)행위가 결코 허락되지 않는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규범교육(規範敎育)이란 첫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양음(陽陰)의 조화를 닮도록 하는 교육, 즉 부부의 자격을 갖추도록 하는 부부(夫婦) 자격교육인 것이다.


2)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게 하는 교육(敎育)


인간은 logos(이법(理法))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규범교육(規範敎育)은 또한 인간으로 하여금 로고스的 존재, 이법적(理法的) 존재(存在)가 되도록, 즉 천도(天道)를 따를 수 있게 하는 교육으로서 이법(理法)교육(敎育)이라고도 한다. 천도(天道)란 우주를 꿰뚫고 작용하고 있는 법칙으로서 수수작용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이 천도에서 두 종류의 법칙, 즉 자연법칙(自然法則)과 가치법칙(價値法則)이 도출되는데 이 중의 가치법칙이 바로 규범이다. 우주에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는 것처럼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다. 그리하여 가정에는 이 두 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성립한다. 즉 종적가치관과 횡적가치관이 그것이다. 그 밖에 개인적 가치관이 있는 바, 그것들에 대해서는 이미 가치론(價値論)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규범교육(規範敎育)은 심정교육과 병행하여 실시(實施)되어야 한다. 규범교육 그 자체는 의무만을 강요하기 쉽기 때문이다. 규범(規範)이란, ... ... 해서는 안 된다 라든가, ... ...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행위를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랑이 없으면 그 규범은 형식화(形式化)되거나 율법적(律法的)인 것이 되기 쉽다. 따라서 규범교육은 사랑의 분위기속에서 실시(實施)되어야 한다. 심정교육이 병행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규범(規範)없이 무턱대고 하는 사랑을 일반적으로 익애(溺愛)라고 한다. 그와 같은 사랑으로 자식을 대하면 자식은 마침내 분별력이 없어지고 부모나 교사를 경시(輕視)하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나 교사의 사랑에는 어딘지 모르게 권위(權威)가 있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은 로고스를 터로 한 사랑이 아니면 안되며, 또 사랑은 적게 베풀고 규범만을 강조하면, 아동들은 구속감(拘束感)을 느껴서 부모나 교사를 싫어하게 된다. 사랑은 규범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그 위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식이나 아동이 비록 규범을 한 두번 지키지 않았더라도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사랑과 규범(規範)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랑은 원만하고(둥글고) 규범은 직선적(直線的)이기 때문에 사랑과 규범이 통일된 인간은 원(圓)과 직선(直線)을 통일적으로 지닌 인격자가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수용(受容)하려 하지만, 규범은 엄하게 규제(規制)하고자 하기 때문에 규범교육은 심정교육과 통일되어야 한다.


즉 가정과 학교내에 사랑의 분위기가 충만된 가운데서 아동의 규범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 규범 때문에 사랑이 냉각되면 그 규범은 형식화(形式化)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격자란 가장 원만하면서도 엄격한 면을 갖춘 사람, 즉 양면성(兩面性)을 통일적으로 구비한 사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격을 가진 인간은 어떤 때는 대단히 엄하고, 또 어느 때는 매우 온화(溫和)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언제든지 어울리는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3) 주관교육(主管敎育) : (지식교육(知識敎育), 기술교육(技術敎育), 체육(體育))


1) 주관성(主管性) 완성(完成)을 위한 교육


마지막으로 주관교육은 주관성완성을 위한 교육이다. 주관성완성을 위해서는, 먼저 주관의 대상에 대한 정보(情報), 즉 지식(知識)을 습득(習得)해야 하는 바, 이것을 위해서 첫째로 지식교육(知識敎育; 知育)이 필요하다. 다음은 대상을 주관하는데 필요한 창조성을 개발하기 위해서 기술을 습득(習得)하는 교육도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이 기술교육(技術敎育; 技育)이다.


그리고 주관(主管)을 잘 하려면 주관의 주체인 인간은 체력을 증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위한 교육이 체육(體育)이다. 이상(以上)의 지육(知育), 기육(技育), 체육(體育)을 합해서 주관교육(主管敎育)이라고 한다. 한편 지육(知育)에 있어서 주관에 필요한 지식과 학문은 주관(主管)의 대상의 영역(領域)에 따라서 자연과학을 위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광범위한 分野에 걸치게 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분야 등의 활동도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기육(技育)에 있어서의 기술은 만물주관의 직접적인 수법(手法)으로서 주관교육의 중심이 되며, 체육(體育)에 있어서의 체위(體位)의 향상과 체력의 증진도 만물주관에 긴요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기술교육(技術敎育)이나 체육에도 다시 세분된 전문분야가 있다. 그리고 예술에 관한 교육, 즉 예능교육(藝能敎育)도 일종의 기술교육으로 볼 수 있다. 요컨대 주관교육은 창조성을 발휘하기 위한 수단 배우는 것이다. 창조성은 천부적(天賦的)인 것으로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천적(先天的)인 가능성으로서 구비하고 있지만 이것을 현실적으로 발휘(發揮)하기 위해서는 주관교육이 필요하다.


2) 창조성(創造性)의 개발과 2단구조(構造)의 형성


창조성의 개발이란, 요컨대 하나님의 창조의 2단구조(構造)를 본받아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을 증진시키고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숙련도를 높인다는 뜻이다.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이란 로고스의 형성 능력, 즉 구상(構想)의 능력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교육(知識敎育)을 통하여 지식을 많이 獲得하여 내적형상(觀念, 槪念) 등)의 내용을 질적, 양적으로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얻은 지식(情報)이 많을수록 구상이 풍부(豊富)해진다. 로고스를 형성(구상(構想))한다는 것은 소위 아이디어의 개발을 뜻하며, 산업(産業)에 있어서의 기술혁신(innovation)도 부단(不斷)한 로고스형성(구상(構想))의 반복(反復)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다음에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을 양성한다는 것은 일정한 구상에 따라 도구나 재료를 사용하여 구상을 실체화하는 능력을 높이는 것, 즉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手技)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교육이 필요하다. 또 신체적 조건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체육에 의한 체력의 증진도 필요하다.


3) 보편교육(普遍敎育)을 기반으로 한 주관교육(主管敎育)


주관교육은 심정교육 및 규범교육을 기반으로 하되 그것들과 병행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교육(知識敎育)이나 기술교육이나 체육은 심정(心情, 사랑)과 규범에 근거해야 비로소 건전한 것이 되고 창조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은 전인류가 모두 공통적으로 받아야 할 교육이므로 보편교육(普遍敎育)이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주관교육은 개인(個人)의 자질에 따라 배우는 영역으로서 어떤 사람은 자연과학(自然科學), 어떤 사람은 文學, 또 어떤 사람은 경제학을 전공하는 등 원칙적으로 개별교육(個別敎育)이 된다.


여기에서 보편교육(普遍敎育)과 개별교육(個別敎育)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은 정신적 교육, 즉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이며, 주관교육은 만물을 주관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교육(普遍敎育, 심정교육(心情敎育), 규범교육(規範敎育))과 개별교육(個別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병행하여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균형교육(均衡敎育; balanced education)이다.


그리스시대나 중세(中世), 근세(近世)에도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사랑의 교육이 있었고, 윤리?도덕(道德)교육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들이 거의 무시(無視)되기에 이르렀으며, 교육은 거의 전부가 지식편중(知識偏重), 기술편중(技術偏重)의 소위 불균형교육(不均衡敎育)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인간성의 건전한 성장이 지장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따라서 여기에 새로운 교육론이 나타나서 새로운 차원에서 참된 사랑의 교육 특히 윤리?도덕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반 위에서 지식교육(知識敎育)과 기술교육(技術敎育)이 행해져야 하며 이러한 균형교육(均衡敎育)이 시행될 때 비로소 과학기술(科學技術)이 보다 선한 방향으로 지향(指向)해 나아가게 된다. 그렇게 되면 공해문제(公害問題)나 자연의 파괴 등의 문제도 자연히 해결되어 갈 것이며 교사들도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하여 교사로서의 권위를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다시 부언(附言)하거니와 교육의 원점(原點)은 가정교육(家庭敎育)에 있다. 가정교육이 연장, 확대, 발전한 것이 학교교육이다. 따라서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이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보편교육으로서의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이 제대로 시행(施行)되기 어렵게 되며, 따라서 교육의 통일성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三. 피교육자(被敎育者)의 이상상(理想像)


역사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자들에 의해 여러 교육론이 발표되었으며, 또한 각자의 교육이념(敎育理念)에 의해서 양육하려는 나름대로의 인간상(像)이 있었다. 통일교육론에 있어서도 역시 교육에 의해서 양성(養成)해 내려는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이 있다.


통일사상의 교육론에서 규정하는 피교육자의 이상상은, 첫째 인격자(人格者), 둘째 선민(善民), 셋째 천재(天才)이다. 이것은 각각 심정교육, 규범교육, 주관교육에 대응하는 이상상(理想像)이다. 따라서 교육을 이상적 인간상(像)이라는 면에서 볼 때, 심정교육은 인격자교육(人格者敎育), 규범교육(規範敎育)은 선민교육(善民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은 천재교육(天才敎育)이라고 할 수 있다.


(1) 인격자(人格者) 교육(敎育)


인격자(人格者)란, 심정교육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간상이다. 따라서 인격자 교육은 피교육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여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도록 지도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인격자가 되게 하는 교육이다. 심정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사랑의 원천(源泉)이며, 인격의 핵심(核心)이다.


심정(사랑)이 결여(缺如)되면 아무리 지식(知識)을 많이 가진 자라 해도 또 아무리 체력이 좋고 막강한 권력(權力)을 가진 자라 해도 인격자가 될 수는 없다. 세속적(世俗的)인 개념(槪念)으로서의 인격이란 일정한 덕성(德性)과 지식(知識)과 건강(健康)을 갖춘 인간을 말하지만,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인격자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면 이상적(理想的)인 인격자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심정(心情,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전인적 인격(全人的 品格)을 지닌 완성한 인간을 말한다. 인격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살기 때문에 만인(萬人)과 만물(萬物, 자연)에 대하여 언제나 참사랑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충효(忠孝)의 정성으로 그 슬픔과 고통을 위로해 드리며, 하나님의 원수에 대해서는 공적인 적개심, 즉 공분심을 지니면서도 원수까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참사랑을 이어받아서 눈물을 머금고 그 원수를 용서한다.


평소에는 항상 온유겸손의 덕(德)과 온정이 넘치는 자세를 갖추고 종적 횡적 가치관을 실천한다. 법도(法道)와 사랑의 실천자이므로 타인(他人)에 대해서는 가장 부드러우면서 자신에 대해서는 가장 엄격하다. 對人관계(關係)에 있어서는 사랑과 법도의 통일을 생활화한다.


법도 없는 사랑은 아동들을 懦弱(나약)하게 하며, 사랑없는 법도는 구속감(拘束感)만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이 심정교육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격자의 모습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격자란 만인(萬人)과 만물(萬物, 자연)에 대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2) 선민교육(善民敎育)


선민(善民)이란 성품이 선(善)한 국민이라는 뜻으로서 규범교육에 의해서 형성되는 인간의 이상상(理想像)이다. 규범교육은 보통 학교에서 행해지지만 그 기반은 가정에 있다. 가정은 우주질서의 축소체(縮小體)로서 사회, 국가, 세계는 가정의 질서체계를 확대한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규범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사회, 국가, 세계에서의 규범생활을 잘 지킬 수 있으며, 그러한 사람은 선(善)한 가정인 이면서 선한 사회인이고, 선한 국가인이면서, 선한 세계인이 되는 것이다. 즉 규범교육을 통해서 선한 가정인이 되면 사회, 국가, 세계 등 어느 장소에 처하더라도 그때그때의 규범에 맞게 행동하게 된다.


또한 지상에서 선민(善民)으로서 생활하면 영계(靈界)에 가서도 마찬가지로 선(善)한 영계(靈界)人이 된다. 지상에서나 영계에서나 동일한 선(善)한 생활을 하게 되므로 이러한 선민(善民)은 바로 선(善)의 우주(天宙)人인 것이다. 가정, 사회, 국가, 세계, 천주에서의 선민(善民)의 생활이 바로 천국생활이다.


(3) 천재교육(天才敎育)


주관교육(主管敎育)에 의해 형성되는 인간의 이상상(理想像)은 천재(天才)이다. 천재(天才)란 창조성이 풍부한 사람을 말하는데, 인간은 본래 모두 천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의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은 창조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天才'라는 말 자체가 하늘이 준 재능(才能)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능성(可能性)으로서의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附與)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인간이 주어진 창조성을 100% 발휘하면 그대로 천재가 된다. 그러나 창조성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 교육이 바로 주관교육(主管敎育)이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주관교육은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을 기반으로 하고 병행된다. 즉 주관교육은 균형교육(均衡敎育)의 일환(一環)으로 행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창조성이 나타난다. 심정교육이나 규범교육이 불충분하거나, 또는 전혀 행하여지지 않는다면 창조성은 충분히 발휘되지 않는다. 예컨대 음악적인 창조성을 가진 아동이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부모가 항상 불화(不和)하고 그 아동을 냉대하거나 학대하는 일이 잦을 경우, 그 아이는 심정적(心情的)으로 상처를 받으면서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며, 피아노를 쳐도 손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감정이 불안(不安)한 상태에서 피아노를 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동은 아무리 훌륭한 음악가적 창조성을 가능성으로서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창조성의 발로(發露)는 불화(不和)한 가정환경에 의해서 지장을 받게 된다.


인간에게는 개성이 주어져 있으므로 창조성에는 특성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음악적(音樂的)인 창조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수학적(數學的)인 창조성이, 어떤 사람에게는 정치적(政治的)인 창조성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사업적(事業的)인 창조성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인(各人)이 자기에게 주어진 창조성을 충분히 발휘하면, 음악의 천재가 되고, 수학(數學)의 천재가 되고, 정치의 천재가 되고, 기업경영의 천재가 될 것이다. 즉 각 사람은 개성(個性)에 맞는 특유한 천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창조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으며, 천재가 되기 어려운 여건 속에 머물게 되었다. 현실은 수만 명중(數萬名中) 한 사람이 천재(天才)가 될 수 있을 정도일 뿐, 대부분의 인간은 거의 범재(凡才)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타락한 사회에서의 주관교육의 한 단면(斷面)이다.


천재교육(天才敎育)에 있어서는 영계의 협조를 얻을 수 있게 됨은 물론이다. 하나님을 중심한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균형교육(均衡敎育)을 실시하게 되면, 선영(善靈)들이 영적으로 협조하기 때문에 아이의 천재적(天才的) 소질은 빠르게 발휘(發揮)되는 것이다.

 

四.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다음에는 종래의 대표적인 교육관의 요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종래의 교육관(敎育觀)과 통일교육론을 비교함으로써 통일교육론의 역사적인 의의(意義)가 보다 더 뚜렷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1) 그리스의 교육관(敎育觀) 플라톤의 敎育觀)


플라톤(Platon, 427~347 B.C.)에 의하면, 인간의 혼(魂)은 정욕적부분(情慾的部分), 기개적부분(氣槪的部分), 이성적부분(理性的部分)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정욕적부분의 덕(德)을 절제, 기개적부분의 덕(德)을 용기, 이성적부분의 덕(德)을 지혜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덕(德)을 조화시킬 때 나타나는 덕(德)을 정의(正義)라고 하였다. 국가에는 이 혼(魂)의 세 부분에 대응하는 세 가지 계급이 있다. 농공상(農?工?商)의 서민은 정욕적부분(情慾的部分)에 대응하는 하층계급(下層階級)이며, 군(軍)?관료(官僚)는 기개적부분(氣槪的部分)에 대응하는 중간계급이며, 철학자는 이성적부분(理性的部分)에 대응하는 상층계급(上層階級)이다.


그리고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認識)한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할 때, 비로소 이상국가(理想國家)가 실현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에 있어서의 교육의 당면 목적은 사람들을 이데아의 세계에로 이끄는 것이었다. 그것은 소수(少數)의 지배계급인 철학자를 양성하는 교육이었으며, 이상적 인간상은 `愛智者(철학자)'이며, 동시에 심신(心身)이 조화하고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4덕(四德)을 겸비한 `조화적인간(調和的人間)'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선(善)의 이데아가 실현된 이상국가(理想國家)를 이룩하는 것이다.


(2) 중세(中世)의 기독교적 교육관(敎育觀)


그리스시대의 교육이 사회에 봉사하는 선(善)한 인간을 목표로 한데 대하여 중세(中世)의 기독교사회에 있어서는 기독교를 이상으로 하는 인간의 육성(育成)을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적인간(宗敎的人間)이 이상적(理想的) 인간상(像)이었다. 특히 수도원에서 이러한 인간상(像)을 위한 엄격한 교육이 행해졌으며, 그것은 순결(純潔), 청결(淸貧), 복종(服從)을 덕으로 삼고 완전한 영적생활(靈的生活)을 영위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즉 교육의 목적은 기독교적 인간의 육성인 동시에 내세(來世)의 생활에 대한 준비였다.


(3) 르네상스시대(時代)의 교육관(敎育觀)


르네상스시대에 들어오면서 복종(服從)이나 금욕(禁慾)을 덕으로 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의 세계관을 타파하고 인간성의 존중(尊重)을 중시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의 세계관이 출현했다. 인본주의의 교육관을 대표하는 사람은 에라스무스(D. Erasmus, 1466~1515)로서 그의 교육의 목적은 본성적(本性的)으로 자유인인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인간성의 완전한 발달을 이루게 하는 것이며, 개성적(個性的)인 풍부한 교양을 몸에 지니게 하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문학, 미술, 과학 등의 인문적 교양(人文的 敎養)을 강조했으며 중세시대에 무시되었던 체육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르네상스시대의 이상적(理想的) 인간상(像)은 심신이 조화적으로 발달한 만능(萬能)의 교양인이었다. 에라스무스의, 인간 본성(本性)에의 복귀 사상은 코메니우스와 루소에로 계승(繼承)된다.


(4) 코메니우스의 교육관(敎育觀)


코메니우스(J. A. Comenius, 1592~1670)에 있어서 인생(人生)의 구극(究極, 궁극)의 이상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내세(來世)에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며, 현세(現世)의 생활은 그 준비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첫째, 모든 사물을 알고 둘째, 사물 및 자기를 통제할 줄 아는 자(者)가 되며 셋째, 하나님을 닮은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적교육(知的敎育), 도덕적교육(道德的敎育), 종교적교육(宗敎的敎育)의 3교육(三敎育)의 필요성을 역설(力說)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모든것을 가르치는 것이 코메니우스의 교육론의 주제였기 때문에 그의 교육사상을 범지주의(汎知主義; pansophism)1)라고 불리운다.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교육이 달성(達成)되는 소질이 본래 인간에게 내재(內在)하고 있으며, 이 내재(內在)하는 소질(素質), 즉 자연(自然)을 이끌어 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였다. 코메니우스는 또 교육은 본래 부모가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렇게 안될 경우에 부모를 대신해서 학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코메니우스에 의하면, 이상적(理想的) 인간상(像)은 하나님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참된 지식의 모든 것을 아는 범지인(汎知人)이며, 교육의 목적은 모든 것을 아는 실천적인 그리스도人을 육성하여 기독교에 의한 세계의 평화(平和)통일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5) 루소의 교육관(敎育觀)


계몽시대(啓蒙時代)의 인물(人物)인 루소(J. J. Rousseau, 1712~1778)는 에밀이라는 교육소설을 저술(著述)하고, (인간은) 만물을 만드는 者(창조주(創造主))의 손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선(善)하지만 인간의 손에 넘어오면서 모든 것이 악(惡)하게 된다.'2)고 하면서 자식을 자연 그대로 교육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본래 내재(內在)하는 자연의 선성(善性)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그대로의 모습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인간의 자연능력의 개발에 방해가 되는 요인-기성(旣成)의 체계적(體系的) 문화나 도덕적(道德的)?종교적(宗敎的) 관념의 주입(注入)-을 제거하면서 인간을 자연 그대로 성장시켜 간다는 것이 루소가 주장하는 교육이다. 그런데 현실의 타락한 사회에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상적(理想的)인 공화제사회(共和制社會)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인간과 사회속의 시민이 양립(兩立)한다고 생각하고, 사회인(社會人) 교육(敎育)의 필연성도 주장했다.


루소의 교육관(敎育觀) 서의 이상적 인간상(像)은, 자연인(自然人)이며, 교육의 목적은 자연인을 육성하고, 자연인이 시민이 되는 이상적(理想的)인 공화제사회(共和制社會)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루소의 교육관은 칸트, 페스탈로치, 헤르바르트, 듀이 등으로 계승되어 갔다.


(6) 칸트의 교육관(敎育觀)


칸트(I. Kant, 1724~1804)는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안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3) 인간은 교육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4)라고 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力說)하였다. 교육의 사명은 인간의 자연적 소질을 조화적으로 발달시켜 도덕률에 따르면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양성(養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루소의 영향이 있었다. 또 칸트는, 교육은 특정한 사회에 순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며, 일반적으로 인간 그 자체의 완성을 목표로 삼으며, 세계주의적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칸트는 인간의 본성(本性)에 근본(根本)악(惡)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며 악(惡)이란 도덕율(道德律)을 자기애(自己愛)에 종속(從屬)시킴으로 해서 성립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내적인 전환(轉換, 回心)에 의해서 도덕률을 상위(上位)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으며, 의무(義務)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도덕의 존중과 과학에의 신뢰(信賴) 그리고 하나님에의 경외(敬畏)가 칸트의 교육관?인간관의 특징이다. 칸트에 있어서 이상적 인간상은 선인(善人)이며, 교육의 목적은 세계주의적인 인간성의 완성이며, 구극적으로는 국제적인 영구 평화(永久 平和)의 확립이었다.

 

(7) 페스탈로치의 교육관(敎育觀)


페스탈로치(J. H. Pestalozzi, 1741~1827)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자연(自然)에 입각(立脚)한 교육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고귀한 소질인 인간성을 해방하려고 하였다. 단순한 것, 순수한 것을 기초로 하면서 근본원리(根本原理)를 직감함으로써 인간은 선(善)한 행위를 하게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교육은 가정에서의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면서 가정교육이 교육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페스탈로치는 인간성을 구성하는 데는 세 가지의 근본(根本)된 힘, 즉 정신력(精神力), 심정력(心情力), 기술력(技術力)에 있다고 보고, 이것은 각각 머리, 심장, 손에 해당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정신력의 교육이 지식의 교육이며, 심정력(心情力)의 교육이 도덕*종교교육이며, 기술력의 교육이 기술교육(체육을 포함)이라고 하였다. 이것들을 통일하는 내적인 힘이 사랑이다. 사랑은 심정력(心情力)의 기본이며, 도덕*종교교육의 추진력이다. 따라서 도덕*종교교육을 중심으로 이 세 가지 교육은 조화(調和)롭게 통일된다고 주장하였다.


페스탈로치가 생각한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은 세 가지의 근본된 힘이 조화(調和)롭게 발달한 인간, 즉 全人이었다. 그는 사랑과 신앙을 중심으로 한 전인격적교육(全人格的敎育)을 주장한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성을 도야(陶冶)하여 도덕적*종교적인 국가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8) 프뢰벨의 교육관(敎育觀)


페스탈로치를 신봉(信奉)하며 페스탈로치의 인간교육을 체계적(體系的)으로 구성한 사람이 프뢰벨(F. Frobel, 1782~1852)이다. 프뢰벨에 의하면, 자연과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통일되고, 하나님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 신성(神性)이 만물의 본성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본성을 표현하고, 계시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만물의 사명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에 내재(內在)하는 신성(神性)을 생활속에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며, 교육은 그런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적(神的)인 것의 표현이야말로 바로 모든 교육, 모든 생명의 목적인 동시에 노력(努力)의 목표이며 인간의 유일한 사명(使命)이다.“


프뢰벨은 특히 유아교육(幼兒敎育)과 가정교육(家庭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유아를 자연 그대로 성장시키는 장소는 가정이며, 교사는 부모이다”라는 것이 프뢰벨이 주장하는 교육의 기본이다. 그리고 페스탈로치와 마찬가지로 그도 어머니의 역할을 강조했다. 또 가정교육을 보충하기 위하여 유치원(Kindergarten)이 필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유치원의 창립자가 되었다.


루소가 주장한 선성(善性)을 가진 자연인(自然人)은 페스탈로치에 이르러 고귀(高貴)한 인간성을 가진 全人이 되었는데, 프뢰벨에 있어서의 이상적 인간상은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 되었다.


(9) 헤르바르트의 교육관(敎育觀)


헤르바르트(J. F. Herbart, 1776~1841 독일 관념론적 철학자, 교육학자)는 교육학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자 하였으며, 이 때 윤리學과 심리학(心理學)을 기초과학으로 채택하고자 시도하였다. 즉 윤리학을 기초로 하여 교육의 목적을 세우고, 심리학을 기초로 하여 교육의 방법을 수립코자 했던 것이다.


먼저, 헤르바르트는 칸트에 따라서 이상적 인간상을 선인(善人)으로 하고, 교육의 목적을 도덕적 품성의 도야(陶冶)라고 하였다. 그 다음 심리학(心理學)의 입장에서 교육의 방법을 추구하였다. 헤르바르트는 인간의 정신생활의 기초(基礎)를 이루는 것은 표상(表象)이며, 표상의 집합(集合)인 사상권(思想圈; Gedankenkreis)을 도야(陶冶)함으로써 도덕적 품성이 도야된다고 생각하였다. 즉 지식(知識)을 교수(敎授)하고 그것으로 도덕적 품성을 형성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헤르바르트는 표상(表象)의 형성에 있어서 가르침 즉 교수(敎授; Unter\richt)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교수의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헤르바르트의 이론을 나중에 수정한 헤르바르트학파(學派)에 의하면, 교수의 과정은 예비(豫備), 제시(提示), 비교(比較), 총괄(總括), 응용(應用)의 五단계였다.


(10) 듀이의 교육관(敎育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국(美國)에서는, 행동을 인생의 중심에 두는 프래그머티즘의 인생관이 생겨났다. 듀이(J. Dewey, 1859~1952)는 지성(知性)은 행동에 유용(有用)한 도구(道具)이며, 사고(思考)는 인간이 환경을 통제(統御)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발전한다고 주장하면서 도구주의(道具主義, instrumentalism)를 주창하였다.


듀이는 교육(敎育)은 성장하는 것과 전적으로 일체(一體)이며, 그것은 그 자체를 초월하는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7)라고 말하고, 미리 제시(提示)할 수 있는 교육의 목적을 부정하고, 성장(成長)으로서의 교육을 주장하였다. 교육이란 생활上의 통신(communication)에 의한 전달(transmission)이며,8) 체험(體驗)을 부단히 재조직(再組織, reorganization) 혹은 개조(改造, reconstruct -ion)하는 것"9)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전달은 직접(直接), 성인(成人, 敎師)으로부터 아이들에게 行하는 것이 아니며 환경이라는 매개물(媒介物)을 통하여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에 의하여 사회는 발전해 가는 것이다. 듀이가 의도(意圖)한 것은 사회의 개조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기술교육(技術敎育)이었다. 그의 교육관에 있어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행동적(行動的) 인간이었다.


(11) 공산주의(共産主義)의 교육관(敎育觀)


마르크스나 레닌은 자본주의사회의 교육을 다음과 같이 예리(銳利)하게 비판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부르주아지 사회의 교육정책은 우민화정책(愚民化政策)이며, 교사들은 기업가의 치부(致富)를 위해서 아동의 두뇌(頭腦)를 가공하는 생산노동자이다." 레닌에 의하면, 자본주의 교육은 부르주아지의 계급적인 지배의 도구(道具)이며, 부르주아지를 위해서 순종적이며 약삭빠른 종복(從僕), 자본의 의지(意志)의 집행자, 자본의 노예(奴隷)를 기르는 일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에 대하여 레닌은, 사회주의사회에 있어서 학교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獨裁)의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교사는 노동자 대중에게 공산주의의 정신(精神)을 심는 군대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공산주의교육의 목적은, 소련의 국민교육기본법(國民敎育基本法)(1973년)의 전문(前文)에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소련방(蘇聯邦)의 국민교육의 목적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사상으로 길리움을 받고 소비에트법(法)과 사회주의 질서의 존중,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의 정신으로 양육된 높은 교양을 가지고, 전면적으로 발달한 공산주의사회의 적극적(積極的)인 건설자의 육성(育成)에 있다. 즉, 교육의 목적은 공산주의사회의 건설에 헌신적(獻身的)인 인간을 육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 인간상은 전면적으로 발달한 인간이다.


그러면 공산주의교육은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먼저 개별적(個別的)인 기술교육에 반대하고 총합(總合)기술교육(技術敎育)(polytechnism)을 중시한다. 그리고 총합기술교육은 노동과 결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사회주의사회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에는 이해의 대립이 없으며, 또 집단을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총합기술교육을 체계화한 사람이 크루프스카야(N. K. Krupskaya, 1869~1939)이며,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을 체계화한 사람이 마카렌코(A. S. Makarenko, 1888~1939)였다.


(12)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교육관(敎育觀)


민주주의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이란, 민주주의사상에 기초를 둔 교육관으로서 민주주의교육관의 형성에는 듀이의 교육관이 20세기의 전반을 통하여 큰 역할(役割)을 다 하였다. 여기서는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 世界大戰) 후의 민주주의의 교육이념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미국 교육사절단보고서(美國 敎育使節團報告書)"18) 에서 인용코자 한다. 同 보고서는 먼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民主主義)란 종지(宗旨)가 아니며, 인간의 해방된 힘을 모든 다양성(多樣性)속에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유효(有效)한 수단이다. 민주주의를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멀리있는 저 편의 목표(目標)로서가 아니라 현존(現存)하는 모든 자유의 침투적(浸透的)인 정신으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은 이러한 자유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다. 의무는 권리가 서로 상살(相殺)하는 것을 방지한다. 나눠진 권리에 대해서든지 메워진 의무에 대해서든지 평등한 취급(取扱)의 음미(吟味)는 민주주의의 근본이다."


그리고 민주주의교육(民主主義敎育)에 대하여 同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 생활에 적응하게 하는 교육제도(敎育制度)는 개인의 가치와 존엄과의 인식(認識)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그것은, 각 개인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서 교육의 기회(機會)가 주어지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교과(敎科)내용과 방법을 통하여 그것은 학문의 자유, 비판적인 능력의 훈련을 중요시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발달단계에 있는 생애(生涯)의 능력의 범위내에서 사실적 지식에 관한 광범(廣範)한 토론을 장려할 것이다.


이들의 목적은 학교의 일이 미리 규정(規定)된 교과(敎科) 과정이나, 각교과(各敎科)에 관하여 하나만이 인정된 교과서에 한정(限定)되어서는(이들의 목적은) 수행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교육의 성공은 획일성(劃一性)이나 표준화(標準化)에 의해서 측정될 수 없다. 교육은 개인을, 사회의 책임있는, 협력적인 일원(一員)이 되도록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民主主義)의 교육이념(敎育理念)은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원리를 준수(遵守)하면서, 그리고 자아(自我)의 인격완성을 지향(指向)하면서 타인(他人)의 인격을 존중(尊重)하며, 자기의 책임과 의무를 다한 다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 즉 민주적 시민(民主的 市民)을 양성(養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의 목적은 인격을 완성시키고 사회의 책임있는 성원(成員)으로 육성(育成)하는데 있으며, 민주주의 교육의 이상적 인간상은 `민주주의적(民主主義的) 인격자(人格者)'인 것이다.

 

五. 통일사상에서 본 종래의 교육관(敎育觀)


그러면 종래의 교육론을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평가해 보자. 플라톤은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認識)한 철학자를 이상적 인간상이라 하고, 그와 같은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하면 이상국가(理想國家)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시대에 있어서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철학자는 출현하지 않았고, 또 선(善)의 이데아는 국가(國家, 폴리스)에서 실현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헬레니즘시대에 이르러, 폴리스의 붕괴와 더불어 이데아의 사상도 붕괴되어 버렸다. 선(善)의 이데아사상(思想)이 막연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선(善)의 기준은 정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이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중세(中世)의 기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도록 교육한다고 했으나 그러한 사랑은 아가페的인 사랑으로서 십자가상(十字架上)의 예수님의 희생(犧牲)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은 희생의 사랑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인간은 왜 사랑해야 하는가가 밝혀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기독교의 교육관으로는 인간성에 눈뜬 근대인(近代人)들을, 확신(確信)을 가지고 인도(引導)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르네상스시대(時代)의 교육은 억압(抑壓)되어 왔던 인간성을 해방한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될 만하지만, 16세기 중엽부터는 고전(古典)을 학습하는 일에 국한(局限)되면서 교육은 형식화되어 갔다. 또 인간중심에 치우쳤기 때문에 피교육자는 종교적(宗敎的)인 도덕성을 점차 잃게 되었던 것이다.


코메니우스는 인간에 내재(內在)하고 있는 소질(素質, 자연(自然))을 이끌어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이라고 하였지만, 그 내재(內在)한다는 소질이 어떤 것인가가 명확하지 않았다. 또 참된 지식을 얻으면 그것이 그대로 덕(德)과 신앙으로 연결된다고 하는 범지주의(汎知主義)에 문제가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참된 지식교육은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을 기반으로 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코메니우스가 주장한 세 가지 교육은 통일교육론의 심정교육, 규범교육, 주관교육에 통하는 바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소도 인간을 자연 그대로 성장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그가 말하는 인간의 `자연(自然)'도 애매하였다. 인간의 성질을 무조건 선(善)으로 규정한 데도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심정(心情, 사랑)을 중심으로 한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을 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자연 그대로 기른다 하더라도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칸트는 도덕교육(道德敎育)에 중점을 두었으나 그의 도덕교육에는 확고한 기반이 없었다. 도덕(道德)의 기반이 되어야 할 하나님은 요청(要請)될 뿐인 존재(存在)에 불과해서 실존(實存)하고 있는지 없는지 애매했다. 또 칸트에 있어서는 개인적규범으로서의 도덕만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인간 상호간의 규범으로서의 윤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페스탈로치는 지식교육, 도덕과 종교교육, 기술교육의 세 가지가 사랑에 의해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심정교육을 기반으로 한 규범교육, 주관교육의 사고방식(思考方式)을 닮고 있다. (페스탈로치의 지식교육과 기술교육은 통일사상의 주관교육에 해당하고, 도덕과 종교교육은 규범교육에 해당한다 하겠다).


또 전인격적(全人格的) 교육(敎育)이라는 생각과, 가정이 교육의 기반이라는 생각도 통일교육론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육의 목적이 3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또 도덕과 종교교육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에 관한 이해가 불충분(不充分)하였다. 그 때문에 페스탈로치의 교육이념(敎育理念)도 확고한 것이 되지는 못하였다.


페스탈로치의 교육론을 계승(繼承)한 프뢰벨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뢰벨은 이상적(理想的) 인간상을 신성(神性)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닮도록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하는 통일교육론의 입장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헤르바르트는 관념(觀念, 표상)과 그 상호관계가 감정이나 의지 등의 모든 정신활동을 일으키는 근원(根源)이라고 생각하여 사상권(思想圈)을 도야함으로써 도덕적품성(道德的品性)이 실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상의 도야로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심정(心情,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선(善)의 가치를 추구하고 규범(規範)을 지킴으로써 도덕성이 실현되는 것이다.


듀이는 교육(敎育)의 목적을 인정하지 않고 다만 성장과 진보를 강조했다. 그런데 목적을 명확히 설정하지 않은 채 성장이나 진보를 주장한다고 해서 인간 본성의 소외나 사회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과학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 듀이의 교육방법을 실시(實施)해 온 바로 그 미국사회에서, 많은 사회적인 병폐가 나타나고 있다. 듀이가 목표로 한 실천적(實踐的)인 기술교육은 심정교육과 규범교육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한(限), 건전한 인간과 사회를 형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主義)가 말하는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지배의 도구(道具)로서의 자본주의교육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도구(道具)로서의 사회주의교육은, 계급투쟁이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본 교육관에 불과하다.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이나 유물사관(唯物史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의 터 위에 세워진 공산주의 교육관도 잘못된 것이다.


또,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전면적(全面的)으로 발달한 인간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균형적으로 발달한 인격(人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노동도 할 수 있도록 노동자의 노동의 능력을 전면적(全面的)으로 발달시킨다는 의미이다. 또 노동과 결부된 총합(總合)기술교육(技術敎育)을 주장했지만 노동에 중점을 두고 있는 교육이기 때문에 총합기술교육(總合技術敎育)은 단순한 노동기능의 교육이 되어버렸다. 또 집단주의교육(集團主義敎育)은 개성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억압(抑壓)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끝으로 민주주의의 교육은 개인의 가치나 존엄성을 기본(基本)으로 한 것이긴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존중한 나머지 개인주의(個人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의 풍조를 낳았다. 또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입각하여 인간성을 주장함으로써 가치관이 상대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의 혼란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터로 한 심정교육(心情敎育)과 규범교육(規範敎育)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개인의 가치와 존엄성이 확고한 것이 되며, 사회의 조화(調和)와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