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頭翼)사상 요강
제4장 가치론(價値論)
( Axiology )
오늘의 시대는 대혼란(大混亂)의 시대요, 대상실(大喪失)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전쟁과 분쟁은 그칠 줄 모르며 테러, 파괴, 방화, 납치, 살인, 마약중독, 알콜중독, 性도덕(道德)의 퇴폐(頹廢), 가정(家庭)의 붕괴(崩壞), 부정부패(不正腐敗), 착취, 억압, 모략, 사기, 중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악덕현상(惡德現象)들이 세계를 뒤덮고 있다. 이와 같은 대혼란(大混亂)의 와중에서 인류의 귀중한 정신적 유산들은 거의 상실되어 가고 있다. 인격(人格)의 존엄성(尊嚴性)의 상실, 전통의 상실, 생명(生命)의 존귀성의 상실, 인간 상호간의 신뢰성(信賴性)의 상실, 부모(父母) 및 교사(敎師)의 권위상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혼란(混亂)과 상실이 오게 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통적인 가치(價値)觀의 붕괴 때문이다. 즉 진(眞)-선(善)-미(美)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觀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선(善)에 대한 관념이 사라지면서 윤리?도덕관이 급속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가치관의 붕괴의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을 배제(排除)하고 종교를 경시(輕視)해 왔기 때문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대부분은 종교적 기반 위에서 성립된 것인데, 이 기반이 무너지니 가치관은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 유물론(唯物論)이나 무신론(無神論) 특히 공산주의 이론의 침투에 의한 가치관의 파괴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을 두 계급(階級)으로 구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립(對立)을 선동(煽動)하고 불신감(不信感)을 증대시키면서 철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곤 하였다. 공산주의는 전통적인 가치관을 봉건적(封建的)이라든가 체제유지를 위한 도구라고 비판하면서 가치관의 붕괴를 기도(企圖)해 왔다.
셋째로, 종교(宗敎) 상호간의 대립이나 사상(思想) 상호간의 상충 때문이다. 이러한 대립(對立)이나 상충이 가치관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가치관은 종교나 사상의 기반 위에서 세워지기 때문에, 종교나 사상에 대립과 상충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보게 되며, 따라서 일정(一定)한 가치관을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넷째로, 중세(中世) 이후(以後) 전해 내려온 전통적(傳統的)인 종교(유교, 불교, 기독교, 회회교 등)의 덕목(德目)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현대인들을 설득하는데 실패(失敗)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 속에는 비과학적인 내용들이 적지 않으며, 따라서 과학에 대하여 절대적인 신뢰(信賴)를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종교적 가치관은 수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의 원인(原因)을 이와 같이 분석(分析)할 때, 여기에 필연적(必然的)으로 새로운 가치(價値)觀의 정립(定立)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定立) 없이는 앞으로 도래(到來)하게 될 미래(未來)의 이상사회를 대비(對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새로운 가치관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먼저 기존의 모든 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모든 사상의 가치관을 함께 포괄(包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유물론(唯物論)이나 무신론(無神論)을 극복할 수 있는 가치관이어야 하며, 과학을 포용(包容)하고 지도할 수 있는 가치관이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가치관이란 절대자(絶對者)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한 절대적 가치관이다. 이것이 바로 미래사회(未來社會)의 대비(對備)를 위하여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는 새로운 가치관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대비해야 할 미래사회는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떠한 사회인가를 살펴보자. 미래사회는 본연(本然)의 인간에 의해서 건설되는 사회이다. 본연의 인간이란 하나님의 심정(心情), 하나님의 참사랑을 지닌 인격(人格)의 완성자를 말한다. 여기서 인격(人格)이란 심정(心情)을 中心하고 균형적으로 발달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을 터로 한 인품(品格)을 말한다. 따라서 미래사회는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중심하고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조화(調和)롭게 발달된 인간들로써 구성된 사회이기 때문에, 여기의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란 본래의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에 대응(對應)하는 가치를 말한다.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각각 진(眞)-미(美)-선(善)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가치의 추구를 통하여 진실사회(眞實社會), 예술사회(藝術社會), 윤리사회(社會)가 실현되게 된다. 여기서 진실사회(眞實社會)는 眞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거짓이 없는 참의 사회(社會)를 말하며, 예술사회(藝術社會)는 美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美의 사회를 말하며, 윤리사회(社會)는 선(善)의 가치를 추구함으로써 실현되는 선(善)의 사회를 말한다. 진실사회(眞實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교육론(敎育論)이요, 예술사회(藝術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예술론(藝術論)이며, 윤리사회(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이론으로서 필요한 것이 윤리론(倫理論)이다. 그리고 가치론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총합적으로 다루는 부문이므로 가치론은 이들 세 가지 이론의 총론(總論)이 되는 셈이다.
미래사회는 이와 같이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실현되는 사회일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경제는 고도의 성장을 이룩함으로써 경제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풍요한 사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은 주로 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가치를 즐기는 생활이 되기에 이른다. 심정(心情)을 중심하고 진(眞)-선(善)-미(美)의 가치가 실현된 사회가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의 사회요, 통일문화의 사회이다. 이상으로 미래사회(未來社會)를 대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는 데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가치관은 미래사회에의 대비(對備)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늘의 현실세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늘의 현실세계는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가치관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어 가고 있는데,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건전한 가치관의 재정립(再定立)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관은 문화의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오늘의 세계의 혼란(混亂)을 궁극적으로 수습하기 위해서는 여러 전통문화의 통일이 또한 필요하다. 그런데 여러 문화는 각각 일정한 종교 또는 사상을 터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종교나 사상은 일정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문화통일을 위해서는 여러 가치관의 통일, 예컨대 기독교(基督敎)가치관(價値觀), 불교가치관(佛敎價値觀), 유교가치관(儒敎價値觀) 등의 통일이 요구되며 또한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가치관의 통일이 필요하다. 따라서 여기에도 모든 가치관을 포섭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제시(提示)가 요구된다.
一. 가치론(價値論) 및 가치의 뜻
새로운 가치관이란 통일원리(統一原理)에서 본, 가치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데 새 가치관을 제시함에 앞서서 가치론과 가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1) 가치론(價値論)의 뜻
가치론(價値論)은 일반적(一般的)으로 경제학, 윤리학 등의 분야에서도 다뤄지지만, 철학에서는 주로 가치철학을 가리킨다. 즉 가치일반(價値一般)에 관한 이론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가치론이 근대에 이르러 철학체계의 한 부문(部門)이 되고 있지만 그 내용은 비록 단편적이나마 古代에서도 발견되며(후술), 칸트가 사실문제와 가치문제를 구별하고 사실의 부문과 가치의 부문을 구분한 이후 가치론은 철학상의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었다.
특히 로체(Rudolph H. Lotze, 1817~1881)가 존재(存在)와 가치(價値)를 분리한 후 존재의 세계에 가치의 세계를 대치시키는 동시에, 존재의 세계는 지성(知性; Verstand)에 의해서 파악되지만 가치의 세계는 감정(感情)에 의해서 파악된다고 주장하면서, 철학(哲學)上에 가치개념을 끌어들임으로써 가치철학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2) 가치(價値)란 무엇인가
가치(價値)라는 말은 본래 경제적 생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주로 경제적 가치를 의미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이 말이 일반화(一般化)하여 사회, 정치, 법률, 도덕, 예술, 학문, 종교 등 인간생활의 거의 전반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는 가치(價値)를 크게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로 구분한다. 물질적가치란 상품가치와 같이 생활자료의 가치를 뜻하며, 정신적 가치는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에 대응(對應)하는 진(眞)-미(美)-선(善)을 말한다. 본 가치론(價値論)에서는 그 중 정신적가치(精神的價値)만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가치(價値)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定義)하기가 불가능1)하기 때문에 가치현상(價値現象)을 통하여 분석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본 가치론에서는 주체(主體, 主觀)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對象)의 성질을 가치라고 규정한다. 즉 어떤 대상이 있어서, 그것이 한 주체의 욕망이나 소원을 충족시켜 주는 성질을 가질 때, 그 주체(主體)가 인정하는 그 대상(對象)의 성질을 가치(價値)라고 한다. 즉 가치는 주체가 인정하는 대상가치(對象價値)이며, 주체에게 인정되지 않으면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여기에 아름다운 꽃이 있다고 하자. 주체가 이 꽃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꽃의 가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가치(價値)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주체가 대상의 성질을 인정(認定)하면서 평가(評價)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3) 욕망(欲望)
가치란 이미 언급한 대로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치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체가 가지고 있는 욕망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가치(價値, 物質的價値)를 포함)를 다루어 온 많은 사상가(思想家)들은 인간의 욕망의 문제를 배제하고 그 가치의 현상만을 객관적으로 취급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가치관은 뿌리없는 나무나 토대없는 건축물과 같이 취약성(脆弱性)을 면할 수가 없다. 뿌리없는 나무는 시들 수밖에 없고 토대없는 건축물은 곧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기존(旣存)의 사상체계(思想體系)는 여러가지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그 무력성(無力性)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물질적 가치를 취급하는 경제이론까지도 현재의 경제혼란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거의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노사관계가 기업 실적에 미치는 영향 등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왜 이러한 결과가 올까. 그것은 종래의 경제학자들이 인간의 욕망을 올바르게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은 경제활동의 동기가 욕망인 것을 알면서도 그 욕망을 분석하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그들의 이론은 토대가 없는 건축물과 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나타난 현상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욕망(欲望)의 분석에서부터 접근하고자 하지만, 이에 앞서 먼저 가치론의 통일원리적 근거를 다루고자 한다.
二. 가치론(價値論)의 원리적(原理的) 근거(根據)
가치론의 통일원리적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통일원리에 의하면, 인간은 성상(性相)-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이면서 목적과 욕망(欲望)을 갖고 있다. 욕망은 물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본성(創造本性)(원리강론, 1987, p. 97)이다. 그리고 목적도 욕망도 각각 이중(二重)性을 띠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하여 통일가치론이 성립하게 된다.
(1) 성상(性相)-형상(形狀)과 二性목적
창조된 인간에게는 일정(一定)한 피조목적(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주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피조목적을 지닌 인간은 이성성상의 중화체(中和體)요 통일체(統一體)이다(즉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체요,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피조목적이 주어져 있다는 것은, 인간의 성상(性相)에도 목적이 주어져 있고 형상(形狀)에도 목적이 주어져 있음을 뜻한다. 전자(前者)를 성상적목적(性相的目的)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형상적목적(形狀的目的)이라고 한다.
이 양자를 합해서 이중목적(二性목적)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성성상에 대응하는 목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가치론에 있어서, 성상은 바로 생심(生心)을 뜻하며 형상은 바로 육심(肉心)을 뜻하기 때문에 성상적목적이란 생심이 지닌 목적이며, 형상적목적이란 육심이 지닌 목적이다. 따라서 성상적목적이란 생심의 목적인 진(眞)-선(善)-미(美)-애(愛)의 생활을 영위(營爲)하는 것을 뜻하며, 형상적목적이란 육심의 목적인 의(衣)-식(食)-주(住)-성(性)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2) 성상(性相)-형상(形狀)과 2성욕망(二性欲望)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성상-형상의 통일체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기 때문에 목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욕망에도 성상적욕망(性相的欲望)과 형상적욕망(形狀的欲望)이 있게 된다. 이것을 이중욕망(二性欲望)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2성목적(二性目的)과 마찬가지로 이성성상에 대응하는 욕망이라는 뜻인 것이다. 성상적욕망이란, 생심(生心)의 욕망으로서 진(眞)-선(善)-미(美)-愛의 생활에 관한 욕망이요, 형상적욕망이란 육심(肉心)의 욕망으로서 의(衣)-식(食)-주(住)-성(性)의 생활에 관한 욕망이다.
(3)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이중욕망(二重欲望)
원리(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닌 연체(聯體)이다(원리강론, 1987, p. 52). 이것은 성상(生心)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라는 이중목적(二重目的)을 지니고 있고, 형상(육심(肉心))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성상적목적(생심의 목적)에도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이 있고, 형상적목적(육심의 목적)에도 전체목적 및 개체목적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욕망이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려는 마음의 충동이다.
따라서 욕망에는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과 개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욕망이 있게 된다. 전자(前者)를 가치실현욕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가치추구욕이라 한다. 이 양자를 합해서 이중가치욕(二重價値欲)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성상적욕망과 형상적욕망이 각각 이중목적(二重目的)을 실현하기 위한 이중욕망(二重欲望) 즉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의 이중욕망을 포함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성상적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이 있으며, 형상적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이 있다.
여기서 이중목적 및 이중욕망과 관련해서 이중가치에 대하여 살펴보자. 목적에 이중목적이 있고, 욕망에 이중욕망이 있는 것처럼 가치에도 이중가치가 있다. 그것이 실현가치(實現價値)와 추구가치(追求價値)이다. 가치실현욕에 의해서 실현코자 하는 가치(價値) 또는 실현된 가치가 실현가치요, 가치추구욕에 의해서 추구코자 하는 가치 또는 추구된 가치가 추구가치이다. 따라서 이중목적(二重目的)과 이중욕망(二重欲望)과 이중가치(二重價値)는 서로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다.
(4) 욕망(欲望)의 유래와 창조목적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창조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창조목적이란 하나님에 있어서는 대상(인간과 만물)으로부터 기쁨을 얻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피조물의 입장에서 보면, 이 창조목적은 피조목적(被造目的)을 의미하게 된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께 미(美)를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그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목적 즉 인간의 피조목적은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繁盛)하여 만물을 주관하라는 3대축복(三大祝福)을 성취함으로써 달성된다.
따라서 인간의 창조목적(被造目的)이란 곧 3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목적만을 주고 욕망을 주시지 않았다면, 인간은 기껏해야 다만 창조목적(創造目的)이 있다거나, 3대축복(三大祝福)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실천의 당위성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충동적(衝動的)인 의욕(意欲) 즉 하고 싶다거나, 얻고 싶다는 마음의 충동성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충동성이 욕망이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창조목적(피조목적), 즉 삼대축복을 달성하고자 하는 내적인 충동을 느끼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터전이 심정이다. 인간은 이미 언급한 대로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이라는 이중목적을 지닌 연체(聯體)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의 실현은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실현하게 된다.
인간의 전체목적이란 참사랑을 실현하는 것, 즉 가정, 사회, 민족, 국가, 세계 그리고 궁극적(究極的)으로는 인류의 부모인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인류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체목적이란 개체가 그 자체의 성장과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모두 전체를 위하는 목적과 개체를 위하는 목적의 이중목적(二重目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창조목적의 이중성(二重性), 즉 피조목적의 이중성(二重性)이다. 만물과 인간은 창조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그 방법이 다르다. 무기물(無機物)은 법칙에 따라서, 식물은 자율성(自律性, 生命)에 따라서, 그리고 동물은 본능(本能)에 따라서 각자의 창조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욕망에 따라서 자유의지(自由意志)를 가지고 자기 책임으로 창조목적을 달성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욕망이란 주어진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마음의 충동이었다. 따라서 목적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의 이중목적이 있는 것처럼, 이에 대응해서 욕망에도 가치실현욕과 가치추구욕의 이중욕망이 있다. 그리고 이 이중목적과 이중욕망에 대응하는 가치가 실현가치와 추구가치의 이중가치였다.
三. 가치(價値)의 종류(種類)
(1) 성상적(性相的) 가치(價値)
가치란 주체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이었다. 성상과 형상의 이중적(二重的) 존재(存在)인 인간의 욕망에는 성상적욕망과 형상적욕망이 있으므로 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에도 성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상적(性相的)가치(價値)와 형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의 성질(가치), 즉 형상적가치(形狀的價値)가 있다.
성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상적가치는 진(眞)-미(美)-선(善)과 사랑이다(사랑은 사실은 가치 그 자체라기보다는 진(眞)-미(美)-선(善)의 가치의 기반이다). 진(眞)-미(美)-선(善)이란 마음의 三기능(機能)인 지(知)-정(情)-의(意)에 대응하는 가치이다. 즉 주체가 대상이 가지는 가치적 요소를 평가할 때, 지(知)-정(情)-의(意)의 三기능(機能)에 따라 다르게 판단한 것이 각각 진(眞)-미(美)-선(善)이다.
(2) 형상적(形狀的) 가치(價値)
한편, 형상적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치는 의(衣)-식(食)-주(住)의 생활자료의 가치, 즉 물질적가치(상품가치)를 말한다. 물질적가치는 육신생활을 위한 가치이며, 육심(肉心)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치이다. 육신생활은 영인체(靈人體)를 성장시키고 3대축복(三大祝福)을 완성시키기 위한 토대가 되기 때문에 형상적가치는 성상적가치의 실현에 있어서 필수조건이 된다.
여기서 사랑이 진(眞)-미(美)-선(善)의 가치의 기반이 된다는데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주체가 대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또 대상이 주체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주체에 있어서 그 대상은 한층 참되고 아름답고 선(善)하게 보인다. 예컨대 부모(主體)가 자식(對象)을 사랑할수록, 또 자식이 부모를 사랑할수록, 부모에 있어서 자식은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자식이 아름답게 보이면, 부모는 자식을 보다 더 사랑하고 싶게 된다. 진(眞)과 미(美)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식을 사랑할수록 그 자식은 더 참되고 선하게 보인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진(眞)-선(善)-미(美)가 세워진다. 사랑 없이도 진(眞)-선(善)-미(美)가 느껴질 때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이때에도 실은 무의식중에 주체의 잠재의식(潛在意識) 속에 사랑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은 가치의 원천이며 기반이 된다. 사랑이 없으면 참된 가치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하고 사랑의 생활을 하게 되면 오늘날까지 경험한 것 보다 훨씬 더 빛나는 가치를 체험하거나 실현할 수가 있게 된다. 이상에서 가치에는 성상적가치와 형상적가치가 있음을 밝혔는데 本 가치론(價値論)에서는 주로 성상적가치만을 다루기로 한다.
四. 가치(價値)의 본질(本質)
(1) 가치의 본질적 요소와 현실적가치
가치에는 대상(對象)이 지니고 있는 성질로서의 가치와,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결정되는 가치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前者)를 잠재적가치라 하고 후자(後者)를 현실적가치라고 한다. 위에서 주체(主體)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대상의 성질(性質)이 가치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잠재적(潛在的)가치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가치는 현실적으로 반드시 평가되는 것이며, 이 때의 평가(評價)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이 평가(授受作用)에 의해서 결정되는 가치가 현실적가치이다.
그런데 잠재적가치, 즉 대상이 지닌 성질이란 가치의 본질적요소(本質的要素)로서, 대상이 지닌 내용, 속성(屬性), 조건(條件) 등을 말한다. 즉 미(美)나 선(善)이나 진(眞)의 가치는, 그 자체로서 대상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가치가 될 수 있는 요소(본질적요소)로서 대상의 내부(內部)에 잠재(潛在)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가치이다.
(2) 잠재적(潛在的)가치(價値, 본질적요소(本質的要素)
그러면 가치의 본질 즉 대상의 본질적요소(내용, 속성, 조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은 대상이 지닌 창조목적과 대상속에 있는 상대적요소 상호간의 조화이다. 모든 피조물에는 반드시 만들어진 목적, 즉 창조목적(創造目的, 被造目的)이 있다.
예컨대 꽃에는 美로써 인간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창조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예술(藝術)작품이나 상품의 경우에도 반드시 제작된 목적이 있다.
그리고 상대적 요소(要素)의 조화(調和)란 주체적요소와 대상적요소의 조화를 말한다. 만물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원상을 닮아서 반드시 그 내부에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주요소(主要素)와 종요소(從要素) 등의 주체적요소와 대상적요소의 상대적요소가 깃들어 있다.
이 상대적요소 사이에는 반드시 수수작용에 의한 조화가 나타난다. 이 때의 수수작용은 대비형(對比型)의 수수작용이다. 이리하여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상대적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가치의 본질이다.
五.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의 결정과 가치기준(價値基準)
(1) 가치(價値)의 決定
가치는 주체인 인간과 대상인 만물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즉 수수작용에 의하여 결정 또는 평가되는 것으로서, 대상이 구비해야 할 조건, 즉 대상적조건(對象的條件)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목적 중심한 상대적요소 상호간의 조화이다. 한편, 주체(主體)에도 주체가 구비해야 할 조건 즉 주체적조건(主體的條件)이 있다. 먼저 주체가 가치추구욕(價値追求欲)과 대상에의 관심(關心)을 가지는 것이 가치결정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리고 가치결정을 좌우하는 요소는 주관(主觀)的 요인(要因)으로서 주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 취미, 개성, 교양, 인생관, 역사관, 세계관 등이 있다. 주체의 이 주관적요인과 가치추구욕 및 관심 등은 모두 주체가 지녀야 하는 주체적 조건들이다. 현실적가치는 이 주체적조건과 대상적조건과의 상대적관계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2) 주관작용(主觀作用)
상술한 바와 같이 가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주관적 요인들이 크게 작용한다. 즉 주체의 사상, 세계관, 취미, 개성, 교양 등의 주체적조건이 대상에 반영되어서(또는 대상적조건에 첨가되어서) 그 주체만이 느끼는 특유한 현실적가치(現實的價値)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주체적조건과 대상적 조건이 성립할 때, 거기에 수수작용이 행해짐으로써 구체적인 가치가 결정된다. 구체적인 가치(價値)가 결정된다는 것은 가치의 실제의 양(量)과 질(質)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의 양(量)이란 꽃의 경우 매우 아름답다라든가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와 같이 가치평가의 양적(量的)인 측면을 말한다. 또 가치에는 질적인 측면도 있다.
예컨대 예술론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후술(後述)) 美에는 우아미(優雅美)라든가 외경미(畏敬美), 장엄미(莊嚴美), 익살미 등 여러 가지 차이미(差異性)의 美가 있는데, 그것은 질적인 측면의 차이를 보이는 美(가치)이다.
그런데 같은 달(月)도 어떤 사람에게는 슬프게 보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또 같은 사람이 보아도 슬플 때 보면 달도 슬프게 보이고, 기분이 좋을 때 보면 달도 아름답게 보인다. 주체의 마음가짐에 따라 美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미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선(善)이나 眞의 가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것은 상품가치에 관해서도 말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주관(主觀)이 대상에 반영됨으로써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가치의 차이가 생기는데 이러한 주체적조건의 작용을 주관작용(主觀作用)이라고 한다. 즉 주체의 주관이 대상에 반영되는 작용이 주관작용(主觀作用)이다.
이것은 미학(美學)에 있어서 맆스(T. Lips)의 감정(感情)의 이입(移入)(empathy, Einfuhling)에 해당한다 하겠다. 감정의 이입(移入)이란, 자연풍경을 볼 때나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자기의 감정이나 구상을 대상에 투사(投射)해서 그것을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주관작용의 예를 한 두 가지 더 들어보자. 먼저 문선생님의 말씀中에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아들(예수님)이 당신에게 손수건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손수건은 돈보다도 귀하고, 생명(生命)보다도 가치가 크다고 할 것이다. 또 무엇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녔다고 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신은 어떤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살고 있더라도 거기는 궁전(宮殿)이나 마찬가지로 느낄 것이다. 그때는 의복(衣服)이 문제가 아니며, 거처하는 집이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왕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自覺)을 가지면 오막살이 집도, 그대로가 궁전(宮殿)같이 휼륭하게 보인다는 뜻으로서 주관작용(主觀作用)의 적절한 예인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는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누가 17:21)는 성구(聖句, 성경구절)가 있는데 이 역시 주관작용(主觀作用)의 예이다. 또 불교에는 삼계유심소현(三界唯心所現)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三界, 즉 세계 전체의 모든 현상은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뜻이다.모두가 주관작용의 예인 것이다.
(3) 가치(價値)의 기준
1) 상대적(相對的) 기준
상술한 바와 같이 주관작용으로 인하여 가치결정(評價)의 결과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적조건에 공통성이 많을 때에는 가치평가에도 일치점(一致點)이 많아지고, 따라서 같은 종교나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의 가치평가의 결과는 거의 일치한다. 예컨대 유교의 덕목인 부모(父母)님께의 효도(孝道)는, 유교사회에서는 언제나 일치(一致)되게 평가되는 보편적인 선(善)이다.
이것은 종교나 사상을 같이 하는 사회에서는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함을 뜻한다. 로마의 평화(平和, Pax-Romana)시대에는 스토아 철학이 일반화(一般化)되어 있었기 때문에, 극기적정신(克己的精神)과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는 그 당시의 지배적인, 통일된 가치관이었다. 또 중국의 당나라시대나 한반도의 통일신라시대 때에는 불교가 국교였기 때문에 불교적인 덕목이 중심적인 가치관이었다. 또 기독교국가인 미합중국(美合衆國, USA)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기독교(新敎)의 도덕관이 미국민의 통일된 가치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서로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의 배경을 가진 사회 사이에서는 가치관의 차이가 나타난다. 예컨대 힌두교에서는 쇠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나 이슬람교에서는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또 공산주의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과 자유주의세계가 말하는 평화관(平和觀)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즉 공통된 종교나 공통된 사상이 시행되고 있는 지역(地域)이나 사회에서의 가치관은 국민간에 대개 일치(一致)하지만 종교나 사상이 서로 다를 때에는, 가치관의 일치(一致)는 일정(一定)한 범위 내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이 공통되는 가치평가의 기준이 일정한 범위에 국한될 때, 이러한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을 상대적 기준이라고 한다.
2) 절대적(絶對的) 기준
가치의 상대적 기준으로 전인류의 가치관을 통일할 수는 없다. 가치관의 차이에 의한 대립이나 투쟁을 무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인류(全人類)의 진정한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차이, 문화적인 차이, 사상적인 차이, 민족적인 차이 등을 극복할 수 있는 평가기준(評價基準), 즉 전인류에 공통되는 가치평가(價値評價)의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가치평가의 기준이 절대적(絶對的) 기준이다.
그러면 이와 같은 절대적 기준은 어떻게 해서 세워질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종교, 모든 문화, 모든 사상, 모든 민족 등을 있게 한 근원자가 하나임을 밝히고 그 근원자로부터 유래된 여러 공통성들을 발견하면 된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주 만물은 천태만상(千態萬象)이지만 일정한 법칙에 의해서 질서정연하게 운행되고 있으며, 또 모든 만물은 공통적인 속성(屬性)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우주 만물이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산재해 있는 여러 종교, 문화, 사상, 민족은 각각 그 가치관이 다른 것이 보통이지만, 그것들을 발생시킨 근원자는 하나밖에 없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근원자로부터 유래하는 공통성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종교가 출현하였지만 각각의 교조(敎祖)들이 자기 마음대로 종교를 만든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최종적으로 구하기 위하여 일정한 시대와 일정한 지역에 일정한 교조를 세워서 우선 그 시대, 그 지역의 사람들을 선(善)의 방향으로 인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때와 장소에 따라서 언어, 습관, 환경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시대 그 지역에 적합한 종교를 세워서 구원섭리(救援攝理)를 전개해 오셨음을 뜻한다.
따라서 각 종교의 공통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를 세운 근원자(根源者)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만물의 근원자를 유대교에서는 야훼, 이슬람교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불교에서는 진여(眞如), 유교에서는 천(天)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모두 동일한 존재이다.
그런데 이들 각 종교가 근원자의 속성(屬性)에 대해서는 명확히 규명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교에서는 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밝히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에서의 진여(眞如)나 힌두교의 브라만도 그러하다. 또 기독교의 하나님이나 유대교의 야웨, 이슬람교의 알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가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지에 대해서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으며, 비참한 인류를 왜 하루 속히 또 일시에 구할 수가 없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와 같이 각 종교의 근원자는 베일에 감추어져 있어서 막연하게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각 종교의 근원자에 관한 설명들은 그 근원자의 일면(一面)만을 파악한데 불과했기 때문에 각 종교를 세운 근원자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여지기까지 하였다.
이들 각 종교의 근원자(根源者)가 결국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 근원자가 어떠한 분인가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의 속성(屬性), 창조목적(創造目的), 우주창조(宇宙創造)의 법칙(로고스) 등을 정확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각 종교는 동일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兄弟의 종교(宗敎)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겪어온 대립(對立)과 투쟁(鬪爭)의 관계를 청산하고 서로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정확히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문화, 사상, 민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문화, 사상, 민족을 발생시킨 근원자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알면 그 문화의 공통성, 사상의 공통성, 민족의 공통성 등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면, 가치평가(價値評價)의 절대적기준이 될 수 있는 공통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사랑(絶對사랑)과 하나님의 참진리(절대진리)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기독교의 아가페, 불교의 자비(慈悲), 유교의 인(仁), 이슬람교의 자애(慈愛) 등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모든 종교의 사랑은 한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 있어서 가정을 통하여 부모(父母)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의 사랑이라는 삼대상(三對象)의 사랑으로서 나타난다(여기의 자녀의 사랑은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자녀 상호간(형제자매간(兄弟姉妹間)의 사랑을 말한다.) 기독교의 이웃사랑의 실천, 불교의 자비(慈悲)의 실천, 유교의 仁의 실천, 이슬람교의 慈愛의 실천 등은 그 내용이 전부 이 삼대상(三對象) 사랑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영원성을 지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주의 운행을 지배하는 진리(眞理, 이법(理法))는 영원불변(永遠不變)한 것이다. 우주에 공통되는 보편적인 사실(事實)은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자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전체를 위해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선악(善惡)의 기준은 타인(他人, 인류)을 위해서 사는가, 자기중심적으로 사는가에 따라 좌우된다.
3) 절대적(絶對的) 기준(基準)과 인간의 개성
이렇게 해서 가치결정의 절대기준이 세워진다. 즉 하나님의 참사랑과 참진리에 의해서 세계 만민의 가치판단(價値判斷; 決定)이 一致되게 된다. 그러면 그때 인간의 개성(個性)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치결정이 일치화(一致化)된다고 해서 인간의 개성이 무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치판단은 개인의 주관적(主觀的)인 요소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개성에 따라서 가치평가에 반드시 차이(差異)가 생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기준하에서 가치결정이 일치화(一致化)된다면 개인(個人)의 개성(個性)은 무시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에서 가치판단이 일치화(一致化)한다 할지라도 개성은 무시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모두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편상(공통성)과 개별상(특수성)을 닮고 있으며, 또 연체(聯體)이기 때문에 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가치평가의 절대적 기준은 보편상(성상, 생심, 심정, 로고스)과 전체목적에 근거한 평가기준이요, 주관작용은 개별상 및 개체목적에 기인한다.
따라서 아무리 절대적 기준에 의해 절대적가치가 결정된다 할지라도 주관작용에 의한 개인차는 있기 마련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절대가치란 개인차를 포함한 보편가치이다. 그것은 마치 개성진리체가 개별상을 포함한 보편상을 지닌 개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전체목적을 우선시키면서 개체목적을 추구하고, 보편상을 지니면서 개성(개별상)을 나타내는 것이 인간이다.
절대적 기준에 있어서 가치평가를 함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인간의 개성에 따른 주관작용(主觀作用)을 피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차이성(差異性)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차이성(差異性)에 의한 가치관의 혼란(混亂)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때의 차이(差異)는 질적(質的)차이가 아니라 양적(量的)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선(善)의 판단의 경우 가난한 사람(貧者)을 돕는다는 것은 종교나 사상여하(思想如何)를 막론하고 선(善)으로 판단된다. 그것을 악(惡)으로 판단(질적판단)하는 사람은 이상세계(理想世界)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판단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 선(善)이 크게 선(善)하다 중간쯤 선(善)하다 보통으로 선(善)하다 등과 같이 양적(量的)인 평가의 차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美나 참(眞)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란 요컨대 질적판단(質的判斷)의 일치(一致)를 말하는 것이다(그런데 타락사회는 이기주의(利己主義) 사회(社會)이기 때문에 질적 차이마저 생기게 되어서 그 결과 가치관에 혼란이 일어나기 일쑤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 및 가치관의 통일이 가능하게 된다. 즉 가치관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가치평가의 기준을 절대진리(絶對眞理), 절대애(絶對愛)를 중심하고 일치화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진리를 기반으로 한 가치관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가치관의 가치가 바로 절대적 가치이다. 이러한 절대가치로 모든 가치관을 조화(和合), 조화(調和)시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가치관의 통일이다. 이러한 가치관의 통일에는 하나님의 속성, 창조목적, 심정, 사랑, 로고스 등에 관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종교(宗敎)통일, 사상(思想)통일도 가치관의 통일로써 가능하다.
六. 종래의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가치관(價値觀)의 붕괴의 원인의 하나는, 종래의 가치관-주로 종교적 가치관-이 설득력을 상실(喪失)한 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종래의 가치관이 설득력을 잃어버렸는가, 여기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기독교(基督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기독교에는 다음과 같은 성구(聖句)를 통하여 훌륭한 덕목(德目)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2:39),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 7: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산상수훈, 마태 5장).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선량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 5:22~23).
그런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라고 되어있는 바와 같이 덕목(德目)의 기초가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한 4:7~8)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이다. 그런데 근대(近代)에 이르러 니체, 포이엘바하, 마르크스, 러셀, 사르트르 등에 의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부정(否定)되었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러한 사상에 대해서 기독교는 효과적으로 대처(對處)할 수 없었다. 즉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의 이론적 대결에 있어서 기독교는 패배(敗北)만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무신론의 포로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또 기독교 가치관(價値觀)에 대한 공산주의의 의도적인 도전이 있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말하는 절대적 사랑이나 인류애(人類愛)를 부정하고, 진정한 사랑은 계급애(階級愛) 또는 동지애(同志愛)라고 주장한다. 이해가 대립하고 있는 사회속에서 계급을 넘은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은 프롤레타리아트 측에 서거나 부르주아 측에 서거나 양자택일(擇一)을 해야 한다. 따라서 인류애를 부르짖는 것은 말뿐이며, 실제로는 인류애(人類愛)를 실천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계급사회라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을 얼른 들으면 확실히 계급애가 현실적이고, 기독교의 사랑은 관념적(觀念的)인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태에서, 종래와 같은 기독교의 신관(神觀, 사랑觀)에 설득력이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리하여 최근에 이르러 제3세계(第三世界)에 해방신학(解放神學)과 종속이론(從屬이론)이 대두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해방신학에 의하면, 예수는 그 시대의 억압받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고, 혁명가였다는 것이며, 따라서 참다운 기독교인은 사회혁명을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인의 가난한 사람에의 동정은 공산주의의 계급애(階級愛)와 부합하는 것이니, 현실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공산주의와 제휴(提携)할 필요조차 있다고 하는 주장까지 있었다.
종속이론(從屬理論)도 제3세계(第三世界)의 빈곤은 선진제국(先進諸國)과 제3세계(第三世界)와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이기 때문에, 제3세계(第三世界)가 빈곤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제3세계(第三世界)는 선진제국(先進諸國) 즉 자본주의 제국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해방신학과 마찬가지로 종속이론도 공산주의와의 제휴를 도모했다. 해방신학(解放神學)이나 종속이론(從屬理論)은 공산주의와 같은 확고한 철학, 역사관, 경제이론이 없으므로 결국은 공산주의에 휩쓸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와 같은 사태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강구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2) 유교(儒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유교에는 다음과 같은 덕목(德目)이 있다.
① 오륜(五倫)……… 고래(古來)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인륜(人倫)의 기초가 되었으며 맹자(孟子)에 의해 더욱 강조되었다.
② 4덕(四德)……… 맹자는 仁義禮智의 四德을 강조했다. 후에 한(漢)의 동중서(董仲舒)는 여기에 信을 더하여 仁義禮智信이라는 오상(五常)의 道를 세웠다.
③ 사단(四端)………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겨서 언짢아 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불의를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사양할 줄 아는 마음), 是非之心;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4단(四端)이라 하여 각각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기본으로 삼았다.
④ 8조목(八條目)……… 격물(格物)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⑤ 충효(忠孝)
그런데 유교(공자)의 덕목(德目)의 기초가 되는 것은 인(仁)이며, 仁의 기초는 天이었다. 그런데 유교에 있어서 天이란 무엇인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토대(土臺)와 상부구조(上部構造)의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유교의 가르침은 봉건시대에 있어서 지배계급이 일반대중을 순순히 복종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계급지배(階級支配)의 합리화(合理化)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따라서 오늘날의 권리(權利) 평등(平等)과 다수결원칙을 취지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유교를 비판하였다. 그 결과, 유교의 덕목(德目)들은 오늘날 거의 사장되다시피 하였으며, 더구나 사회가 도시화되고 가정이 핵가족화 함으로써 유교적가치관은 더욱 붕괴해 가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의 무질서(無秩序)와 혼란은 가중(加重)되어 갔던 것이다.
(3) 佛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불교의 근본적인 덕목(德目)은 자비이지만,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수행(修行)생활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간은 수행생활을 통하여 성문(聲聞; 부처의 설법을 듣고 4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스스로 阿羅漢의 제자가 되기를 이상으로 하는 佛道修行者), 연각(緣覺; 부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달아 자유경에 도달한 성자)을 통과하고, 보살(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이의 총칭으로서 위로는 부처를 따르고 아래로는 일체의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의 버금되는 성인), 佛陀(스스로 불교의 大道를 깨달은 성인)에 이르게 되며, 자비는 보살, 불타의 단계에서 이를 실천하게 된다. 성문(聲聞), 연각(緣覺)의 과정에서는 아직 자비를 실천하는 단계가 아니라고 한다.
인간은 세상의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는 것, 즉 무상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현실생활에 집착하고 있다. 이것이 苦의 원인이다. 따라서, 고(苦)를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修行)생활을 통하여 집착(執着)을 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집착에서 떠나고, 고(苦)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해탈(解脫)이다. 이처럼 해탈하여 무아(無我)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참된 자비(慈悲)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의 사상을 체계화한 것이 사제(四諦)와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이다. 사제(四諦)란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를 말한다. 고제(苦諦)란 현세에서의 삶은 모두 고통이다라는 가르침이다. 집제(集諦)는 고(苦)의 원인은 끝없는 집애(執愛, 渴愛)에 있다라는 가르침이다. 멸제(滅諦)는 열반의 경지를 이상으로 한다는 내용으로서 苦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도제(道諦)는 열반에 이르는 데는 올바른 수행(修行)의 길이 있다고 하는 가르침이다. 그 길이 팔정도(八正道)인 바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항목(要目)이 있다. 사성제
① 정견(正見)... 모든 편견을 버리고 만물의 진상을 바르게 판단하라
②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라
③ 정업(正業)... 살생이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④ 정명(正命)... 正法에 따른 바른 생활을 하라
⑤ 정념(正念)... 잡념을 떠나 진리를 구하는 마음을 언제나 잊지 말라
⑥ 정정(正定)... 번뇌로 인한 어지러운 생각을 털어버리고 바르게 정신을 집중시켜 마음을 안정시켜라
⑦ 정사유(正思惟)... 바르게 생각하라
⑧ 정정진(正精進)... 一心으로 노력하여 아직 발생하지 아니한 악을 낳지 못하게 하고 선(善)을 발생하게 하라.
그리고 인간에게서 괴로움이 생긴 원인을 추구하고, 12事項의 계열(系列)을 세운 것이 12인연(因緣; 12緣起)의 가르침이다. 그것에 의하면 인간에게 있어서 괴로움의 근본원인은 갈애(渴愛)로서 그 안쪽에 무명(無明)이 있다고 한다. 무명(無明)이란 진여(眞如)에 대한 무지를 말하는데, 고통이나 번뇌는 본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으로서, 이 無明에서 일체의 번뇌가 생긴다는 것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보살이 되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여섯 가지의 덕목이 있는데, 그것이 다음과 같은 육바라밀(六波羅密)(六波羅密多)이다.
① 보시(布施)……… 자비심으로 남에게 조건없이 베풀어 주는 것
② 지계(持戒)……… 계율을 잘 지키는 것
③ 인욕(忍辱)……… 고통을 참는 것
④ 정진(精進)……… 불도(佛道)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⑤ 선정(禪定)……… 정신통일을 하는 것
⑥ 지혜(智慧)……… 옳고 그른 것, 선악(善惡)과 시비를 판단하는 것
이상의 팔정도(八正道)나 육바라밀(六波羅密) 등의 덕목의 근본이 되는 것은 자비(慈悲)이다. 그리고 자비의 기초가 되는 것이 우주의 본체로서의 진여(眞如)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불교의 가치관도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불교 가치관의 설득력이 약화(弱化)된 원인은 불교의 교리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우주(宇宙)의 본체라고 하는 진여(眞如)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 제법(諸法, 宇宙萬象)이 어떻게 생성(生成; 연기(緣起))되었는가 하는 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 무명(無明)은 왜 생겼는가에 대한 근본적 해명이 없다는 것, 현실문제(人生문제(問題), 사회(社會)문제(問題), 역사문제(問題))의 근본적 해결이 수도(修道)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수도생활이 현실문제의 해결과 연결되어 있지않다는 것 등이다.
그 외에 공산주의에 의한 도전이 또한 있어 왔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공격(攻擊)하곤 했다. 현실사회에는 착취, 억압, 빈부의 격차 등 사회악이 충만해 있는데 그 원인은 無明에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주의사회의 체제적(體制的) 모순(矛盾)에 있다. 불교의 수행은 개인의 구제(救濟)를 위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요, 문제해결의 회피인 것이다. 현실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수행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이와 같이 공격(攻擊)해 올 때 불교(佛敎)는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유효(有效)한 반론(反論)을 제시하지 못했다.
(4) 이슬람교(敎)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이슬람교에서는 예언자(豫言者) 중에서 마호멧이 가장 위대하며, 경전 중에서 코란이 가장 완전하다고 믿고 있으며,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마호멧과 같은 예언자로 믿고 있다. 그리고 코란 이외에 모세5경, 다윗의 시편(詩篇), 예수의 복음서(福音書)도 경전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덕목에는 유대교나 기독교의 덕목과 공통되는 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11) 이슬람교에는 6신(六信)과 5행(五行)이라는 믿음과 실천의 가르침이 있다.
육신(六信)이란 신(神), 천사(天使), 경전(經典), 예언자(豫言者), 말세(末世), 천명(天命)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오행(五行)이란 신앙고백, 예배, 금식, 희사(喜捨), 순례를 말한다. 신앙의 대상은 알라신(神)이며, 알라는 절대유일하며 창조주일 뿐만 아니라 지배자이다. 알라는 어떠한 신(神)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이슬람교의 신학자들은 99가지의 속성을 들고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속성(屬性)으로서 깊은 자비(慈悲), 넓은 자애(慈愛)를 들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의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자비(慈悲) 또는 慈愛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이슬람교의 가치관에는 본래, 타종교의 가치관과의 공통성, 조화성(調和性)을 지니고 있으나 현실에 있어서는 오늘날까지 이슬람교 내부에서의 교파간의 싸움, 타종교와의 전쟁 등 심각한 대립을 많이 보여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대립에 편승(便乘)하면서 공산주의가 침투하곤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인류애(人類愛)는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다. 이슬람 교파간의 싸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계급사회에 있어서는 계급애(階級愛)가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은 이슬람교와 타종교와의 대립을 이용하면서 이슬람교 국가의 일부(一部)를 친공(親共) 또는 용공(容共)으로 유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내적으로 교파간에 대립을 보일 뿐 아니라 외적으로 他宗敎(예컨대 유대교, 기독교)와도 오래 전부터 심각한 대립관계에 있어 왔던 것이다. 같은 종교 내의 교파끼리, 그리고 다함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믿는 타종교(他宗敎)와 이같은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일반인(一般人)에게 대해서 이슬람교의가치관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5) 인도주의(人道主義) 가치관(價値觀)의 취약성(脆弱性)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tarianism)는 휴머니즘(humanism,人本主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인도주의(人道主義)와 휴머니즘은 구별된다. 휴머니즘이 인간의 해방을 목표로 삼고 인격(人格)의 자주성(自主性)을 추구해 온 사조(思潮)인데 비하여, 인도주의는 윤리적인 색채가 강하며, 인격의 존중(尊重), 박애주의(博愛主義),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른 인간다움이 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사고방식이 인도주의이다. 그러나 인도주의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기본문제가 명확히 해명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인도주의(人道主義)는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해서 약점을 노출시켜 왔던 것이다. 예컨대 인도주의적인 어느 경제인이 있다고 하자. 공산주의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할 것이다.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인간으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식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청년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공산주의자가 와서 그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가. 자기의 출세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국 부르주아를 위하여 봉사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우리들은 人民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비판할 때 양심(良心)的인 청년(靑年)들은 반론하기 어려울 것이며,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는 공산주의 이론에 일리(一理)가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주의(人道主義)的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의 공격에 대하여 속수무책이었다. 이리하여 과거 적지 않은 인도주의(人道主義)者들이 공산주의로 넘어가기도 했다(공산주의가 무너진 오늘날에 와서 물론 그들은 공산주의가 결국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지만).
이상으로 종래의 여러 가치관들이 오늘날에 와서 그 설득력을 상실하게 된 경위를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가치관을 회복(回復)하는 길은, 확고(確固)한 신관(神觀)의 터 위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定立)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七.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定立)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절대적인 가치관을 의미한다. 가치관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 새로운 가치관의 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나, 상대적 가치관을 가지고서 그 붕괴현상을 방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즉 절대적 가치관이 아니면 안 된다.
절대적 가치관은 절대자인 하나님이 어떤 속성(屬性)을 갖고 있으며, 또 어떤 목적(創造目的)과 법칙(法則, 로고스)를 가지고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을 명백히 밝힌 기반 위에서만 세워지는 가치관이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그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서 만물을 창조하셨다. 절대적가치(絶對的價値)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절대적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세워진 진(眞)-선(善)-미(美)의 가치, 즉 절대적인 진(眞), 절대적 선(善), 절대적 美를 말한다. 새로운 가치관이란, 이와 같이 절대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한다는 견해(見解)이다.
그런데 가치관의 통일이란 가치(특히 善의 가치)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이 절대적가치의 여러 표현형태(表現形態)라는 것, 따라서 모든 덕목은 절대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은 종래의 기독교, 유교, 불교, 이슬람교 등의 가치관을 완전히 부정하고 새롭게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종래의 가치관의 기반이 붕괴되었으므로, 다시는 붕괴되지 않는 확고한 것으로,
그리고 과거의 여러 가치관들을 다시 소생(蘇生)시킬 수 있는 것으로서 세워진 것이 새로운 가치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가치관이 그 절대성(絶對性)을 보증받기 위해서는 同가치관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神學的), 철학적(哲學的), 역사적(歷史的)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1)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제시
신학적(神學的)근거(根據)의 문제는 우주의 절대자, 즉 기독교의 하나님, 유교의 천(天), 불교의 진여(眞如), 이슬람교의 알라 등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 상호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가 풀리기 위해서는 절대자인 하나님이, 왜 인간과 우주를 창조하셨는가 하는, 종래의 종교에서 밝히지 못했던 미해결의 문제가 먼저 해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상론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 심정(心情)의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심정이란 사랑을 통하여 기쁨을 얻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었다. 그 충동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 우주를 만드신 것이다. 즉 하나님을 `심정의 하나님'으로 규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대한 필연적인 이유가 합리적(合理的)으로 설명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서 완성하기를 원하셨으며,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기쁨은 최고에 이르게 된다. 그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三大祝福)을 내려주신 것이다. 즉 인간이 인격을 완성하고, 가정을 완성하고, 주관성을 완성하게 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인간이 3대축복(三大祝福)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되게 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종교의 덕목(德目)은 삼대축복을 완성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데에 그 덕목의 취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철학적(哲學的)근거(根據)의 제시
다음은 철학적근거의 제시에 관해서 살펴보자. 기독교나 유교, 불교, 이슬람교의 가치관은 기원전 6세기경부터 기원후 7세기에 걸쳐 나타났다. 당시는 군주의 명령을 백성들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였다. 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이론적 비판력이라곤 태무(殆無)했기 때문에 권위(權威)앞에 무조건적인 순종은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따라서 석가, 예수, 마호멧 등 권위있는 분들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무조건 따르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그 시대의 가치관을 현대의 합리적(合理的), 논리적(論理的)인 사고방식(思考方式)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의 지성인(知性人)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설명 방식을 통하여 그들의 가치관을 현대인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인(現代人)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이란 어떠한 것일까? 그것도 자연과학적 방법이다. 아무리 윤리적(倫理的) 덕목(德目)이라 하더라도 그 덕목(德目)이 과학적인 법칙의 뒷받침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덕목은 현대의 지성인(知性人)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자연을 연구하여 거기에서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발견하다는 것은, 古代 그리스에서나 동양에서 흔히 행해져 온 방법이었다.
예컨대 주자(朱子)는 자연법칙이 그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 윤리법칙이 된다고 함으로써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의 대응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연법칙을 잘못 인식하기는 했지만, 역시 주자(朱子)와 같이 자연법칙과 사회법칙(사회생활의 규범)의 동일성(同一性)을 고집하면서, 사회도 자연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데 있어서도 자연이나 우주의 관찰을 통하여 거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적인 법칙을 발견한 후 거기에서 가치관(價値觀)을 도출(導出)하는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으며, 뿐만 아니라 우주를 꿰뚫고 있는 일관(一貫)된 법칙, 즉 천도(天道)가 인륜(人倫)의 도덕(道德)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밝혀야 한다. 이것이 곧 철학적근거의 제시이다.
여기서 자연법칙과 윤리법칙은 과연 대응(對應)하는가, 즉 자연법칙을 그대로 윤리법칙에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통일사상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양 측면을 통일적으로 구비하고 있다. 따라서 성상면의 법칙인 윤리법칙과 형상면의 법칙인 자연법칙에는 대응관계(對應關係)가 있다는 결론이 자동적으로 도출(導出)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을 어떻게 올바르게 인식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이미 존재론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主義)의 변증법은 대립물의 투쟁에 의하여 자연이 발전한다고 봄으로써 자연을 잘못 파악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에 대한 잘못된 파악(把握)의 터 위에 세워진 투쟁(鬪爭)하는 인간상(像)은 그릇된 인간상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우주(宇宙, 자연)에 작용하고 있는 근본법칙은 변증법(辨證法)이 아니고 수수법(授受法)(수수작용의 법칙)이다. 그리고 존재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수법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즉 상대성(相對性), 목적성(目的性)과 중심성(中心性), 조화성(調和性), 질서성(秩序性)과 위치성(位置性), 개별성(個別性)과 관계성(關係性),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과 발전성(發展性), 원환운동성(圓環運動性) 등이다. 여기에서 우주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가치관(統一價値觀)을 논하고자 한다.
우주(宇宙)에는 종적(縱的)인 질서와 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다.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으며, 태양계는 은하계의 중심핵을 중심으로 돌고, 은하계는 우주의 중심을 중심하고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 있어서의 종적인 질서이다. 한편 태양을 중심으로 하여 수성(水星), 금성(金星), 지구(地球), 화성(火星), 수성(水星), 토성(土星), 천왕성(天王星), 해왕성(海王星), 명왕성(冥王星)이 일정한 궤도(軌道)를 그리며 돌고 있다. 이것이 우주에서의 횡적인 질서체계의 하나이다. 이것들은 모두 조화(調和)로운 질서체계이며 모순(矛盾)이나 투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우주의 질서체계를 축소한 것이 가정질서이다. 따라서 가정에도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성립된다.
가정의 종적질서에서 종적가치관이 성립된다. 가정에 있어서 부모는 자녀에게 자애(慈愛)를 베풀고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한다. 이것이 가정에서의 종적(縱的)가치관(價値觀)이다. 이것을 사회, 국가에 적용하면 여러 가지의 종적 가치가 도출된다. 군주의 국민 또는 신하에 대한 긍휼(矜恤)이나 선정(善政), 국민 또는 신하의 군주에 대한 충성(忠誠),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도(師道), 제자의 스승에 대한 존경과 복종, 연장자(年長者)와 연소자(年少者)에 대한 애호(愛護), 연소자(年少者)의 연장자(年長者)에 대한 존경(尊敬), 상관(上官)의 부하(部下)에 대한 권위와 명령, 부하의 상관에 대한 복종 등이 그것이다.
가정의 횡적질서에서 횡적(橫的)가치관(價値觀)이 성립된다. 가정에는 부부간(夫婦間)에 화애(和愛), 형제자매간에는 우애(友愛)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동료, 이웃, 동포, 사회, 인류 등에 대한 가치관으로 확대하고 전개된다. 그리하여 화해, 관용, 의리, 신의, 예의, 겸양(謙讓), 연민(憐憫), 협조, 봉사, 동정 등의 덕목이 횡적가치로서 성립(成立)하게 된다.
이와 같은 종적(縱的) 및 횡적(橫的)인 가치가 잘 지켜지면 사회는 평화를 유지(維持)하고 건전하게 발전하나, 그렇지 못할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이러한 가치관은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봉건사회의 유물이나 잔재가 결코 아니며 인간이 영원히 지키지 않으면 안될 보편적인 인간 행위의 규범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법칙이 영원하듯이 인간사회의 법칙도 이 우주의 법칙에 대응(對應)해서 영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주의 법칙에는 개별성의 법칙이 있는데 이에 대응한 것이 개인적 가치관이다. 우주의 모든 개체는 각자의 특성을 지니면서 우주의 질서에 참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사회에 있어서도 각 개인은 고유한 인격을 형성하면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개인적 가치관에는 순수(純粹), 정직(正直), 정의(正義), 절제(節制), 용기(勇氣), 지혜(智慧), 극기(克己), 인내(忍耐), 자립(自立), 자조(自助), 자주(自主), 공정(公正), 권면(勤勉), 청결(淸潔)등이 있다. 이것들은 전부 개인으로서 자기를 수양하기 위한 덕목(德目)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적가치관(縱的價値觀), 횡적가치관(橫的價値觀), 개인적 가치관이 덕목으로서는 특별히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공자, 석가, 예수, 마호멧 등이 이미 가르쳤던 내용들이다. 단지 종래의 가치관은 철학적 근거가 막연함으로 인하여 오늘날에 와서는 그 설득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확고한 철학적 근거를 제시함으로써 전통적인 가치관까지도 소생될 수 있게 된다.
(3) 역사적(歷史的)근거(根據)의 제시
다음은 역사적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앞에서 언급한 새로운 가치관은 역사적(歷史的)으로도 실증될 수 있어야 한다. 공산주의는 자연현상이 투쟁에 의해 발전하듯이 인류(人類)역사도 역시 투쟁(계급투쟁)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역사론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역사는 투쟁에 의해서 발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역사의 발전은 어디까지나 주체와 대상(지도자와 대중)의 조화적인 수수작용에 의해 이루어져온 것이다.
역사상에 투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계급투쟁은 아니었다. 보다 선(善)한 세력과 보다 악(惡)한 세력과의 싸움이었다. 가치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가치관과 가치관의 싸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천도(天道)에 보다 가까운 편의 가치관(선(善)편)과, 천도(天道)에서 보다 먼 편의 가치관(악(惡)편)과의 싸움이었다.
그리고 일시적(一時的)으로는 선(善)편이 악(惡)편에 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결국은 천도(天道)에 가까운 선(善)편이 승리해 왔다. 맹자(孟子)도 순천자(順天者)는 존(存)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고 했다. 그런데 선악의 투쟁은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역사를 보다 선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제8장 歷史論을 참조).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의 여러 주권들이 흥망(興亡)을 반복해온데 비하여 선(善)을 표방했던 종교는 계속하여 오늘날까지 존속(存續)해 왔다. 또 성인(聖人)이나 의인(義人)들이 비록 악(惡)의 세력들에 의하여 희생되는 수가 많았지만 그 대신 그 성인(聖人)이나 의인(義人)들의 가르침과 업적은 후세 사람들의 삶에 교훈(敎訓)과 귀감(龜鑑)이 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천도가 그대로 살아서 역사에 작용해왔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역사는 어떤 주권자라도 이 천도(天道)를 거역할 수 없다는 것과 만일 천도(天道)를 거역하게 되면 그 거역한 자가 비운(悲運)에 쓰러지고 만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역사의 법칙은 역사의 출발점에서 이미 목표가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다. 우주(宇宙)는 목적(創造目的)을 중심하고 이법(理法, 로고스)에 따라 창조되었다. 생물의 성장을 보아도 종자(種子, 또는 알)속에 이미 이법(理法)이 내재(內在)해 있고, 그 이법(理法)에 따라 종자는 성장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민족의 역사,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도 역시 출발점에 일정한 이념이 있었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역사는 발전해 온 것이다. 즉 역사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신화(神話)나 설화(說話) 등에 상징적으로 표시된 인류나 민족의 이상(理想), 건국(建國)의 이상(理想)이었다.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류역사는 죄악사(罪惡史)로서 출발했으나, 하나님은 복귀해야 할 창조이상의 세계상을 상징(象徵)과 비유(比喩)가 섞인 일종(一種)의 신화형식으로 인간에게 알리곤 하셨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의 사건의 내용이나, 이사야서나 계시록 내의 예언적(豫言的) 기사, 그리고 한민족(韓民族)의 경우의 단군신화(檀君神話) 등이 그 예이다.
대개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이상(理想), 민족의 이상(理想)이란 선(善)하고 밝고 평화로운 세계, 행복한 세계의 실현이었다. 그것이 바로 천도(天道)에 맞는 세계의 구현인 것이다. 이와 같이 역사의 출발점에 이미 역사의 목표(目標, 天道 세계의 실현)가 세워져 있음을 하나님은 신화(神話)나 예언(豫言)의 형식으로 가르쳐 주곤 하셨다. 따라서 역사가 목표로 삼고 있는 미래의 세계는 천도에 부합된 세계이며 가치관이 확립된 세계이다. 이상으로 신학적, 철학적, 역사적 근거의 제시를 마친다.
八. 가치관의 역사적(歷史的) 변천(變遷)
종래의 서양 가치관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자. 이것은 절대적가치를 탐구(探究)하던 그리스철학과 기독교가치관이 상대적인 가치관에 압도(壓倒)되어 결국은 무력화되어 버린 역사적인 과정을 파악(把握)하기 위해서이며, 새로운 가치관(절대적 가치관)에 의하지 않고서는 오늘날의 세계적인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1) 그리스시대의 가치관
1) 유물론적(唯物論的) 가치관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식민지(植民地)였던 이오니아지방에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자연철학이 출현(出現)했다. 그 당시 그리스는 씨족사회로서 신화를 중심한 시대였으나, 이오니아의 철학자들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와 인생을 자연법칙을 통하여 설명하고자 했다.
이오니아지방에는 밀레토스라는 도시가 있었으며, 그곳은 무역이 왕성하여 상인들은 지중해의 전역에 걸쳐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현실적이고 행동적이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점차 신화적(神話的)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 무역도시 밀레토스에 기원전 6세기(世紀)경부터 유물론적(唯物論的)인 철학자들이 출현(出現)하였다. 이들을 밀레토스학파(學派)라 하며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등이 그 대표자였다. 이들은 주로 만물의 근원(根源; arche)에 대해서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만물(萬物, 자연)의 근원(根源)에 관하여 탈레스(Thales, 624~546 B. C.)는 그것을 물(水)이라고 설명하였고,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1~547 B. C.)는 무한자(無限者, apeiron),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5~528 B. C.)는 공기(空氣)라고 하였으며, 그 외에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5~475 B. C.)는 불(火)이라고 하였고,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460~370 B. C.)는 원자(原子)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철학(유물론)과 더불어 객관적(客觀的), 합리적(合理的)인 사고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2) 자의적가치관(恣意的價値觀, 궤변적가치관(詭辯的價値觀)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 그리스에는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여 민주정치가 발달하였다. 청년들은 입신출세(立身出世)을 위하여 지식을 배우려 하였고, 그 때문에 특히 변론술(辯論術)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변론술을 가르쳐서 일정한 보수를 받는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소피스트라고 불렀다.
그때까지 그리스철학은 자연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으나, 자연철학만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인간사회의 여러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법칙은 객관성(客觀性)을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인간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법(法)이나 도덕(道德)은 나라에 따라 다르고, 또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법(法)이나 도덕에는 어떤 객관성(客觀性)이나 보편성(보편성(普遍性))이 없었으며, 그 때문에 사회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사람들은 주로 상대주의(相對主義) 혹은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81~411 B. C.)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尺度)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진리의 기준이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며, 따라서 이것은,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상대주의를 표시하는 말이다.
소피스트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민중(民衆)을 각성시키는 일종의 계몽적(啓蒙的)인 효과를 주었다. 그러나 점차로 회의론(懷疑論)의 입장을 취해가면서 진리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들은 변론(辯論)의 방법만을 중시하고, 궤변을 해서라도 논쟁에 이기려고만 하였기 때문에 나중에는 궤변가(詭辯家)라고도 불려지게 되었다.
3) 절대적(絶對的) 가치관
① 소크라테스
이러한 상황하에 소크라테스(Socrates, 470~339 B. C.)가 나타나서 이같은 현상을 크게 개탄하였다. 그는 소피스트는 아는 척하나 실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인간은 먼저 자기가 무지(無知)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적하면서 인간은 먼저 자신이 무지함을 아는 것이 참다운 知에 이르는 출발점이라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도덕의 근거는 인간의 내면에 내재(內在)하는 신(神)(다이모니온)에서 구했으며 따라서 도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덕(德)이란, 진실하게 살기 위한 知의 애구(愛求)를 의미하며 德이 知이다라는 것이 그의 핵심사상이었다. 또 그는 덕(德)을 안다면 반드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참다운 지(知)를 얻을 수 있을까. 참다운 知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또 자기자신에 의해서 깨달아지는 것도 아니다. 타인과의 대화(문답)를 통해서만 자기와 타인이 함께 납득할 수 있는 보편적진리(普遍的眞理, 참다운 知)에 도달할 수 있다고 스크라테스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덕(德)을 확립함으로써 아테네를 사회적 혼란에서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② 플라톤
플라톤(Platon, 427~347 B. C.)은 변화(變化)하는 현상계(現象界, 感覺界)의 배후에 변치 않는 본질의 세계가 있다고 보고 그것을 이데아계(叡知界)라고 불렀다. 그런데 인간은 혼(魂)이 육체에 갇혀 있기 때문에 보통 감각계(感覺界)를 참된 실재(實在)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본래 인간의 혼이 육체에 깃들기 전에는 이데아界에 있었으나 육체에 깃들게 되면서 이데아界를 떠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인간의 혼(魂)은 항상 참된 실재인 이데아界를 동경(憧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인식(認識)이란 흔히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想起)하는 일에 불과(不過)하다. 윤리적(倫理的)인 이데아에는 정의(正義)의 이데아, 美의 이데아, 선(善)의 이데아가 있으나 그중에서 선(善)의 이데아가 최고의 이데아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가져야 할 덕(德)으로서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의 네 가지 덕(德)을 들었다. 특히, 국가를 통치하는 자는 지혜의 덕(德)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가 바로 선(善)의 이데아를 인식한 사람이다. 플라톤에 있어서 선의 이데아는 모든 가치의 근원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계승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탐구(探究)했던 것이다.
(2) 헬레니즘의 로마시대의 가치관
헬레니즘시대란 알렉산더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 B. C.)이 페르시아제국을 멸한 후부터 로마군이 이집트을 정복하여 지중해 세계를 통일할 때까지의 약 3세기 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오로지 개인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개인주의 풍조가 지배하던 때였다. 폴리스 국가의 붕괴로 국가를 중심으로 한 가치관은 소용이 없게 되었고 그리스人들은 불안정한 사회정세하(社會情勢下)에서 부득이 개인의 생활방식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스토아학파(學派), 에피쿠로스학파(學派), 회의학파(懷疑學派)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인주의의 사조(思潮)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무력성(無力性)을 통감(痛感)하게 된다. 그러다가 로마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인간이상의 위치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지하기를 원하게 되면서 점차로 종교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드디어 신플라톤주의(主義)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1) 스토아학파(學派)
우주만물(宇宙萬物)에는 로고스(法則, 이성)가 깃들어 있으며 우주는 법칙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운행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로고스가 깃들어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성에 의해 우주의 법칙을 알고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주장이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이 고통을 느끼는 것은 정욕(情欲)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정욕을 떠나 아파테이아(apatheia)-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는, 완전히 평정(平靜)한 마음의 상태(離欲狀態)-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면서 금욕(禁欲)을 주장하였다.
즉 아파테이아가 최고의 덕(德)이었다. 그리스人이거나 동방인(東方人)이거나 전부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토아학파에 있어서의 로고스는 신(神)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서 동포인 것이다. 이리하여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가 세워지게 되었다. 스토아학파의 창시자는 키프로스의 제논(Zenon, 336~264 B. C.)이었다.
2) 에피쿠로스학파(學派)
금욕(禁欲)을주장한 스토아학파와는 반대로 쾌락(快樂)을 선(善)으로 설명한 사람들이 에피쿠로스(Epikuros, 341~270 B. C.)를 창시자(創始者)로 하는 에피쿠로스학파이다. 에피쿠로스는 현세에서의 개인적 쾌락만이 그대로 덕(德)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이 쾌락은 육체적(肉體的)인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육체(肉體)에 있어서 고통이 없는 것과 영혼(靈魂)에 있어서 흐트러짐이 없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이 없는 평안(平安)한 마음의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이고상태(離苦狀態)-라고 부르고, 이것을 최고의 경지로 삼았다.
3) 회의학파(懷疑學派)
인간은 사물에 대해서 이렇게 또는 저렇게, 즉 어떻게든지 판단(判斷)하려 하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로 마음의 平安을 얻으려면 일절(一切)의 판단(判斷)을 정지(停止)하라고 엘리스의 퓌론(Pyrrhon, 356~275 B. C.)은 말했다. 이것을 판단중지(判斷中止, 에포케, epoche)라고 한다. 인간에 있어서 진리(眞理)는 인식(認識)할 수 없으므로 일체의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회의학파(懷疑學派)는 주장했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도, 에피쿠로스학파의 아타락시아도, 회의학파(懷疑學派)의 에포케도 모두 개인적인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이 탐구(探求)했던 가치의 절대성은 의문시되기 시작한다.
4) 新플라톤주의(主義)
헬레니즘시대(時代)에 이어지는 로마시대에 있어서도 그리스철학(哲學)은 그대로 계승되었으나 헬레니즘의 로마시대의 철학이 궁극에는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新플라톤主義에 당도(當到, 도달)했던 것이다. 플로티누스는 일체의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되었다고 하는 유출설(流出說)을 주장했다.
즉 처음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가까운 누스(nous, 理性), 다음에 영혼(靈魂), 그리고 가장 불완전한 물질(物質)이라는 식으로, 단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래 그리스철학은 신(神)과 물질이 대립한다는 이원론(二元論)的인 입장이었으나 플로티누스는 하나님이 전체라고 함으로써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했다.
인간의 혼(魂)은 한편으로는 감성적인 물질세계로 흘러감과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누스에서 하나님으로 되돌아 가고자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감성적인 것으로부터 떠난 후 하나님을 직관(直觀)함으로써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최대의 덕(德)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무아(無我, 엑스타시스, ecstasy)의 상태에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된다고 하면서 그것을 최고의 경지라고 하였다. 그리스풍의 철학은 플로티누스와 더불어 종언을 고했지만, 新플라톤주의(主義)는 다음에 나타나는 기독교철학(哲學)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3) 中世의 가치관(價値觀)
1)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신앙을 철학적으로 기초를 세운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였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永遠), 불변(不變), 전지(全知), 전능(全能)하고, 최고의 선(善), 최고의 사랑, 최고의 미적(美的) 존재이며 우주의 창조주였다. 플라톤에 있어서 이데아의 세계는 그 자체로서 독립된 세계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데아를 하나님의 정신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모든 것은 이데아를 원형(原型)으로 하여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출(流出)된 것이라고 하는 新플라톤主義에 대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재료(材料)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한 無에서 자유로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창조론(創造論)을 주장하였다. 그러면 인간은 왜 죄(罪)의 존재인가. 인간시조(人間始祖) 아담이 자유를 악(惡)用한 후 하나님을 배반(背反)하여 타락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恩寵)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여 믿음, 소망, 사랑의 세 가지 덕(德)을 권하였다.
2) 토마스 아퀴나스
기독교신학(基督敎神學)을 확립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덕(德)으로서 신학적인 것과 윤리적(倫理的)인 것을 들었다. 신학적인 덕은 기독교의 三元德, 즉 믿음, 소망, 사랑이며, 윤리적(倫理的)인 덕(德)은 그리스철학의 4원덕(四元德), 즉 지혜, 용기, 절제, 정의이다. 신학적인 덕은 인간을 지복(至福)으로 인도하는 바, 그 중에서도 사랑이 궁극적인 것이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인간은 지복(至福)을 받기에 합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윤리적(倫理的)인 덕(德)은 이성의 질서에 복종하는 것이다. 윤리덕은 신학적(神學的)인 덕(德)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看做)되었다.
(4) 근세(近世)의 가치관(價値觀)
중세가 지나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이렇다 할 새로운 가치관이 나타나지 않았다. 근세의 가치관은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 가치관의 연장 또는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종래의 모든 가치관을 의심(疑心)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소위 회의주의(懷疑主義)는 아니며 회의(懷疑)를 통하여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알고자 하는 시도(試圖)였다. 그 결과 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근본원리(根本原理)에 도달하였다. 그는 인간이 이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으며, 여기에 인간은 이성에 의해 정념(情念)을 지배하면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행위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의 도덕관(道德觀)이 생겨났다.
파스칼(B. Pascal, 1623~1662)은 인간을 위대함도 갖고 있고, 어리석음도 갖고 있는 모순(矛盾)的 존재(存在)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표현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는 가장 약하나 생각함으로써 가장 위대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참 행복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며 신앙에 의해서, 즉 심정(心情)에 의해서 하나님께 이르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13) p.337
칸트(I.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純粹理性批判), 실천이성비판(實踐理性비판批判), 판단력비판(判斷力批判)에서 각각 진(眞)-선(善)-미(美)가 어떻게 해서 성립하는가를 논하였다. 동시에 그는 이 3개의 비판에서, 인간은 이러한 각각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특히 선(善), 즉 도덕에 있어서 인간은 실천(實踐)이성으로부터 오는 무엇 무엇을 하라라는 무조건적인 명령-정언명법(定言命法)-에 따라 행위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벤담(J. Bentham, 1748~1832)은 고통이 없는 쾌락의 상태를 행복이라 하면서 최대다수(最大多數)의 최대행복(最大幸福)이라는 원리를 세웠다. 이것이 그의 공리주의(功利主義)이다. 그는 쾌(快)와 고(苦)를 양적(量的)으로 계산함으로써 인간 행위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벤담의 공리주의(功利主義)는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하여 생긴 가치관으로서 형상적(形狀的)인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은 미적(美的) 실존(實存)단계, 윤리적(倫理的)실존(實存)단계를 거쳐서 종교적실존단계(宗敎的實存段階)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실존의 3단계를 주장했다. 즉 인간은 쾌락속에서만 사는 것(美的단계)은 아니며, 또 윤리를 지키면서 양심적으로 사는 것(윤리적 단계)만으로도 불충분하며,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종교적 단계)고 역설(力說)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고 애썼던 것이다.
니체(F. Nietzsche, 1844~1900)는 19세기말의 유럽을 모든 가치(價値)가 붕괴되어 가는 니힐리즘의 시대라고 보았다. 그에 있어서, 기독교는 강자를 물리치고 인간을 평균화한 노예도덕(奴隷道德)이며, 니힐리즘을 초래한 최대의 원인자였다. 그래서 그는 권력(權力)에의 의지(意志)를 기준으로 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계에서 강력(强力)하게 살자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었다.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통일적으로 다루면서 가치를 철학의 중심문제로 취급한 사람은 新칸트학파(學派)의 빈델반트(W. Windelband 1948~1915)였다. 칸트는 사실문제와 권리문제를 구별하였으나 이것을 이어 받은 빈델반트는 사실판단(事實判斷)과 가치판단(價値判斷)을 구별하였다. 그리고 철학의 임무는 가치판단을 취급하는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판단(事實判斷)은 사실을 개관적으로 인식한 명제(命題)이며, 가치판단(價値判斷)은 사실에 대하여 주관적인 평가를 내린 명제(命題)이다. 예컨대, 이 꽃은 붉다라든가, 그는……… 을 하였다라는 것은 사실판단이며, 이 꽃은 아름답다라든가, 그 행위는 선(善)이다라고 하는 것은 가치판단이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연과학이 다루어 온 것은 사실판단(事實判斷)이고, 철학이 다루어 온 것은 가치판단(價値判斷)이라고 하면서 사실과 가치를 완전히 분리해서 다루었던 것이다.
금세기에 이르러 언어(言語)의 논리적(論理的) 분석(分析)을 철학의 방법으로 사용하는 분석철학이 생겨났다. 분석철학은 가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① 가치는 직각(直覺)에 의해 알 수밖에 없다. ② 가치판단이란 발언자의 도덕적인 찬성(贊成)이나 혹은 불찬성(不贊成)이라는 감정의 표명에 불과하다. ③ 가치론(價値論)은 가치언어의 분석에만 의의(意義)가 있다. 이리하여 분석철학은 대체적으로 철학에서 가치관을 배제하려고 하였다.
듀이(J. Dewey, 1859~1952)에 의해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은 생활에 대한 유용성(有用性)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따라서, 진(眞)-선(善)-미(美)와 같은 가치(價値)개념(槪念)도 사물을 유효하게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입장에 있어서,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며 비록 동일인물(同一人物)에 있어서도 때에 따라 달라진다. 이같은 듀이의 입장은 상대적(相對的)인 가치다원론(價値多元論)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의 가치관(價値觀)을 살펴보자.
공산주의의 가치관으로서는 예컨대 투가리노프(B. P. Tugarinov, 1898~)의 다음과 같은 정의(定義)가 있다. 가치(價値)란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 또는 계급에 속한 사람들에게, 현실의 것으로서 또는 목적 내지 이상으로서 유용하고 필요한, 자연 및 사회의 현상이다."즉 공산주의에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유용하다는 것이 가치의 기준이었다. 여기에서 부르주아的 가치관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존의 종교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이, 공산주의 가치관의 전제(前提)가 되고 있다. 그리고 공산주의에 있어서의 도덕이란 공산주의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집단생활을 추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헌신, 복종(服從), 성실, 동지애, 상호부조 등이 그 내용이다.
(5) 새로운 가치관(價値觀)의 출현(出現)의 필요성(必要性)
이와 같이 역사상에 많은 가치관들이 나타났으나, 그것은 절대적 가치를 수립하려고한 시도들이 모두 붕괴되어 온 역사였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참다운 지(知)를 추구함으로써 절대적인 가치(價値)를 수립코자 하였다. 그러나 폴리스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그리스철학의 가치관도 붕괴되어 버렸다. 다음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아가페)을 중심으로 하여 절대적인 가치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결국 기독교의 가치관은 중세사회를 지배하였으나, 중세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점차 힘을 잃고 말았다.
근대에 이르러 데카르트나 칸트는 그리스철학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중심으로 한 가치관을 수립했으나 가치관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파악이 애매함으로 인하여 그 가치관은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한편 파스칼이나 키에르케고르는 참다운 기독교의 가치관을 부흥시키려 했지만, 확고한 가치관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新칸트학파(學派)는 가치의 문제를 철학상의 주요문제로서 다루었으나 가치를 취급하는 철학(哲學)과 사실을 취급하는 자연과학(自然科學)을 완전히 분리시켜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이 가치를 도외시하고 사실만을 연구한 결과, 인류를 대량으로 살육(殺戮)하는 병기의 개발, 자연환경의 파괴, 공해문제 등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공리주의(功利主義)나 프래그머티즘은 물질적인 가치관으로서 완전히 상대적인 가치관이 되었으며, 분석철학(分析哲學)은 가치부재(價値不在)의 철학이었다. 그리고 니체의 철학이나 공산주의는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반가치(反價値)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철학이나 기독교를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가치관은, 오늘날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으며, 전통적인 가치관은 취약화(脆弱化)되면서 자연과학에서 분리(分離)되어 드디어는 철학의 영역(領域)에서도 배제(排除)되기에 이르렀다. 그럼으로써 오늘의 사회(社會)혼란(混亂)은 극도에 달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통적인 가치를 소생시키면서 절대적 가치를 수립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의 출현이 절실히 요청된다.
따라서 새로운 가치관은 유물론(唯物論)을 극복하고, 올바른 가치관으로 과학을 인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치(價値)와 사실(事實)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사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이 통일되어 있는 것과 같이, 가치와 사실도 본래 하나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고자 출현한 것이 本가치론(價値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