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頭翼)사상 요강 - 제3장 본성론

훈독왕 | 20250731192651

통일(頭翼)사상 요강

 

제3장 본성론

( Theory of the Original Human Nature )


본성론(本性론)이란 인간의 본연의 모습 즉 타락하지 않은 본성적(本性的) 인간을 다루는 철학부문이다. 이미 원상론과 존재론(存在論)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은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 왔다. 특히 오늘날 우리들은 공산주의 소멸후의 새로운 혼란과, 남북문제(南北問題, 선진국과 개도국의 격차문제)를 위시하여 인종분쟁, 종교분쟁, 영토분쟁, 부정부패의 확산,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각종 범죄의 만연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이 대립과 갈등, 투쟁과 전쟁으로 연결되면서 혼란의 와중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역사의 현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로 대별(大別)되게 된다. 인간이 안고 있는 이러한 존재(存在)의 문제(問題)와 관계(關係)의 문제(問題)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한편 역사 속에 왔다간 많은 성현(聖賢)들이나 사상가(思想家)들은 `현실인간(現實人間)'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막연하게나마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아보곤 했다. 그들이 바로 종교가((宗敎家)요 철학자(哲學者)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어떻게 해야 본래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가를 추구(追求)해 왔던 것이다.


기원전(紀元前) 5세기경 인도의 가비라성에서 태어난 석가는 수도(修道)와 고행(苦行)의 생활을 통하여 득도(得道)함으로써 인간은 본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번뇌(煩惱)에 싸여서 고통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수도생활을 통하여 본성(本性)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예수님도 30여 생애동안 인생문제(問題)를 깊이 탐구한 결과 인간은 죄인(罪人)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예수자신)을 믿음으로써 거듭나야 한다고 설파하면서, 유대민족을 향해 천국이 가까왔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객지(各地)를 돌면서 가르침을 펴기에 全力을 다했으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당시의 정치, 종교계의 벽을 넘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형을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폴리스(polis)사회(社會)의 말기적(末期的)인 혼란상을 직시하다가, 참된 知를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참된 생활이라고 하면서 너 자신(自身)을 알라!고 외쳤다. 그리고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는 것이 최고의 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이성이며 인간의 덕(德)은 폴리스에서의 공동생활(共同生活)에서 실현(實現)된다고 생각하고 인간을 사회적동물(폴리스的 動物)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인간관(人間觀)은 대체적으로 인간의 본질은 이성이며 인간의 이성을 충분히 활용(活用)하면 인간은 이상적(理想的)인 모습이 된다는 것이었다.


중세시대(中世時代)는 기독교(基督敎)가 서구사회의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때였다. 이 기독교(基督敎)의 인간관은 인간을 죄인으로 보았으며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구원과 참된 평화의 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近代에 이르러 다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조가 나타났다. 데카르트는 인간은 이성적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으로써만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命題)를 남겼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을 실천이성(實踐理性)이 명하는 도덕적 의무(義務)의 소리(聲)를 따라서 사는 인격적 존재(存在)로 보고, 인간은 유혹(誘惑)이나 욕망(欲望)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설(說)하였다.


헤겔도 역시 인간을 이성적(理性的) 존재(存在)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역사는 이성이 세계속에서 자신을 실현해 가는 과정이며,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이성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헤겔의 논리에 의하면 근대국가(近代國家, 理性國家))의 성립과 더불어 인간과 세계는 합리적(合理的)인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있어서의 실제의 인간은 인간다움을 도리어 상실(喪失)한 상태(狀態)에 머물러 있고 세계도 그대로 비합리적(非合理的)인 모습을 지속(持續)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헤겔의 극단적(極端的)인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기를 든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세계의 발전과 더불어 합리적(合理的)인 존재(存在)가 된다는 설(說)을 반대했으며, 인간은 현실사회(現實社會)에서 참다운 인간성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은 대중으로부터 떠나서, 단독자(單獨者)로서 주체적으로 인생을 헤쳐 나갈 때 비로소 참다운 인간성이 회복(回復)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현실적 인간을, 본성(本性)을 잃어버린 인간으로서 파악하고 주체적(主體的)으로 인간성을 되찾으려고 하는 생각(思考方式)이 그 이후 실존주의사상(實存主義思想)으로서 전개되었다. 이에 관하여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또 헤겔의 이성주의(理性主義)에 반대하고 인간을 감성적(感性的) 존재로서 파악한 사람이 포이엘바하(L. A. Feuerbach(1804~72)독일의 유물론 철학자)였다. 포이엘바하에 의하면 인간은 유적본질(類的本質)인 이성과 의지(意志)와 心情(사랑)을 가진 유적존재(類的存在)로서, 이 유적본질(類的本質)을 자기로부터 분리(分離)한 후 대상화(對象化)해서 그것을 하나님으로 숭배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간이 인간의 본성(類的本質)을 되찾는 길은 대상화(對象化)한 하나님을 부정할 때, 즉 종교를 부정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헤겔의 자유의 실현(實現)의 사상(思想)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진정한 해방(解放)을 주장한 사람이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 당시의 초기 자본주의사회(社會)에 있어서의 노동자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그들은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했으며 게다가 최저(最低)의 생활을 유지하기도 힘들 정도의 임금(賃金)밖에 받지 못했다. 노동자들 사이에는 질병과 범죄가 만연(蔓然)하게 되었고 그들의 인간성은 박탈당하고 있었다. 한편 자본가(資本家)는 풍족(豊足)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노동자를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억압(抑壓)함으로써 그들도 본래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인간 해방을 부르짖던 마르크스가 처음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포이엘바하의 인간주의(人間主義)에서 출발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인간은 유적존재(類的存在)일 뿐만 아니라, 생산활동을 하는 사회적, 물질적, 역사적존재이며, 인간의 본질은 노동의 자유라고 파악하게 되었다. 자본주의(資本主義)사회(社會)에 있어서 노동자는 노동생산물을 모두 자본가에게 빼앗겼으며, 노동 그 자체가 자기의 의지에서가 아니라 자본가의 뜻에 따라서 좌우(左右)되고 있었다. 여기에 노동자의 인간성 상실(喪失)이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던 것이다.


노동자(勞動者)를 해방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사회(資本主義社會)를 타도(打倒)하지 않으면 안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가도 인간성을 회복(回復)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유물론(唯物論)의 입장에서, 인간의 의식(意識)을 규정(規定)하고 있는 것은 사회의 토대(土臺)인 생산관계라고 주장하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를 폭력적(暴力的)으로 변혁(變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라 혁명을 일으켜서 세운 공산주의 국가(國家)는 자유의 억압(抑壓)과 인간성(人間性)의 유린이 심한 독재주의사회가 되었고, 인간은 더욱 더 본래의 모습을 상실(喪失)하고 말았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인간소외의 원인의 파악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소외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큰 오류를 범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간소외는 지난날의 공산주의(共産主義)社會의 문제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도, 개인주의(個人主義)와 물질(物質)중심주의(中心主義)가 만연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방식이 만연되어서 더욱 더 인간성(人間性)이 상실되어가고 있다.


한편 인간학이 모든 학문(學問)과 사상(思想)의 근본(根本)이라고 생각한 막스셀러는 인간과 역사속에서 제시한 인간관 중에서 인간은 사고(思考)하는 인간 (homo sapiens), 도구(道具)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공작인(工作人; homo faber)으로 표현하였다. 그 외에 인간은 경제인(homo economicus), 종교인(homo religious), 자유인(homo liberalis), 국가인(homo nationalis)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표현도 인생의 참된 의미를 나타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人生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역사 개시 이래 수많은 종교가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그 해석이 시도(試圖)되었으나 모두가 실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인생을 바르게 살려다가 인생의 의미를 몰라서 허무(虛無)한 인생을 비관(悲觀)하고 자살한 사람도 허다(許多)하다. 한국의 윤심덕(尹心悳), 일본의 후지무라(藤村操夫)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인간의 문제를 근본적(根本的)으로 해결(解決)하려고 생애를 바쳐 걸어오신 분이 계신다. 그 분이 바로 문선명 선생(文鮮明 先生)이시다. 그 분은 통일원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인간이 비록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하찮은 존재처럼 되어 버렸지만 본래의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참자녀라고 선언(宣言)하신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의 타락에 의해서, 하나님과는 무관(無關)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본장(本章)에서는 인간의 타락의 문제나 인간성 회복의 방법에 대해서는 論하지 않고(그것에 관해서는 원리강론의 타락론과 복귀원리의 項目을 參照) 다만 본래의 인간은 어떠한 모습인가 하는 것만을 논(論)하고자 한다. 인간의 본래의 모습은 신상을 닮은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이며 신성(神性)을 닮은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이다. 그리고 또 원상의 격위성(格位性)을 닮은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다음에 이에 관하여 상론(詳論)하고자 한다.

 

一.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


원상(原相)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듯이, 이러한 원상을 닮은 본연의 인간도 예외없이 성상-형상, 양성-음성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존재를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라고 한다.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자 한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

 
인간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인간이 마음과 몸의 이중체(二重體), 즉 성상-형상의 통일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성상과 형상에는 네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로 인간은 우주(宇宙)를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다. 즉 인간은 성상과 형상에 있어서 각각 동물, 식물, 광물의 성상과 형상의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다. 둘째로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이중적존재(二重的存在)이다. 셋째로 인간은 마음과 몸이 통일을 이루고 있는 심신통일체(心身統一體)이다. 그리고 넷째로 인간은 이중(二重)의 마음, 즉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이중심(二重心)의 통일체로서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이다.


여기서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는 관점에서 볼 때, 넷째의 생심과 육심의 이중심적(二重心的) 존재(存在)라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그리하여 본항(本項)에서 다루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는 바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통일체와 같은 뜻이 된다. 여기서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모두 마음(성상(性相))인데도 불구하고,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를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관계로 표시하는 것은, 생심(生心)은 영인체(靈人體)(성상(性相))의 마음이요, 육심(肉心)은 육신(形狀)의 마음이어서, 생심과 육심의 관계는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음에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기능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생심(生心)의 기능(機能)은 진선미(眞善美)와 사랑의 생활, 즉 가치생활(價値生活)을 추구한다. 여기서의 사랑은 생명의 원천인 동시에 진(眞)-선(善)-미(美)의 기반이 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을 중심으로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이 가치의 생활이다. 인간의 가치생활에는 인간 자신이 가치를 추구하면서 기뻐하는 면도 있으나 가치를 실현하여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 보다 더 본질적(本質的)인 면이다. 따라서 가치생활이란 위하여 사는 사랑의 생활, 즉 가정을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국가를 위하고, 인류를 위해서 사는 사랑의 생활이다. 그리고 궁극적(窮極的)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한편 의식주(衣食住)나 성(性)의 생활, 말하자면 물질적(物質的)인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육심(肉心)의 기능이다. 물질생활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은 본래,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다. 여기서 생심(生心)이 주체요 육심(肉心)이 대상이다. 영인체가 주체요, 육신이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육심이 생심을 따르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생심과 육심이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지만, 생심이 주체, 육심이 대상의 관계에 있을 때의 인간의 마음이 본심이다. 육심이 생심을 따른다는 것은, 가치(價値)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생활을 제1차적인 것으로 하고, 물질을 추구하는 생활을 제2차적인 것으로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가치(價値)의 생활이 목적이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은 그 목적실현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심(肉心)이 생심(生心)을 따르고 생심(生心)이 제 기능(機能)을 잘 하면 영인체와 육신은 서로 공명한다. 이 상태가 인격(人格)을 완성(完成)한 상태이며 곧 본연의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인간은 타락(墮落)했기 때문에,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본래의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상(對象)이 되어야 할 육심이 주체의 입장에 서게 되었고, 주체가 되어야 할 생심이 대상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이 목적이 되었고, 가치의 생활은 그 의식주를 위한 수단처럼 되어서 2차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즉 사람을 사랑한다거나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 행위는 부(富)를 얻는다든가, 지위를 얻는다는 목적 때문에 행하는 행위가 되고 말았다. 오늘날 일상적인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가치의 생활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가치생활을 자기중심의 물질생활을 위한 수단(手段)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육심(肉心)이 주체, 생심(生心)이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심과 육심의 본래의 관계가 역전(逆轉)되어 버린 것이 오늘의 실정(實情)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거꾸로 된 관계를 본래의 관계로 회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인간이 수도생활(修道生活)을 해야 할 필연적(必然的)인 이유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모든 종교는 먼저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勝利)하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예컨대 공자(孔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했고,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으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도 하였다. 그리고 자기(自己)와의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 사람들은 금식(禁食, 단식), 철야(徹夜) 등의 수도(修道)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육심을 생심에 굴복시켜서 진선미(眞善美)의 생활을 앞세우고, 의식주(衣食住)의 생활을 뒤세운 채 살아가는 것이 생심과 육심의 통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함으로써 육심이 생심을 누르고 자기중심적인 의식주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苦痛)과 불행(不幸)이 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본심(本心)(마음)이란, 요컨대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수수작용을 해서 합성일체화(合性一體化)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상(性相)內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본심(本心)의 선차적(先次的)인 기능은 생심(生心)에 의한 사랑의 생활이며 진선미(眞善美)의 가치(價値)를 추구(追求)하는 생활이다. 따라서 인간은 바로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인 것이다. 이런 가치의 생활이 바로 진실(眞實)의 생활이며, 윤리적(倫理的)와 도덕적(道德的)생활이며 예술적 생활이다. 그리고 본심의 후차적(後次的)인 기능은 육심(肉心)에 의한 의식주(衣食住)의 생활, 즉 물질적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성상과 형상의 속성(屬性)이지만 이 본성론에서 말하는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은 각각 양적실체(陽的實體), 음적실체(陰的實體)로서의 부부(夫婦)를 말한다. 부부(夫婦)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가정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모두 양음의 결합에 의해서 존재하고 번식한다. 만물이 이러하기 때문에 인간의 양음의 결합 즉 부부(夫婦)의 결합도 단순한 남녀의 육체적 결합으로만 보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는 것은, 부부(夫婦)를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오늘날 선진제국(先進諸國, 선진국들)에서처럼 남녀가 결혼했더라도 쉽게 갈라지곤 함으로써 결혼의 신성성(神聖性)이나 영원성(永遠性)은 상실되기 쉽게 된다. 이것은 본래의 부부의 모습이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왜 존재(存在)하며, 결혼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참된 해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생을 독신(獨身)생활로 일관(一貫)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다.


첫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 중의 1성(一性)을 대표(代表)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양성-음성을 지닌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의미한다. 부부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횡적(橫的)으로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종적(縱的)인 사랑이 거기에 임(臨)하게 되어서 여기에 사랑의 상승작용(相乘作用)에 의한 생명(生命)의 창조가 이루어지게 된다. 둘째로, 본연의 부부의 결합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의 最後의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우주 창조의 완료(完了)를 의미한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아담 해와의 완성과 더불어 우주의 창조는 완료되었을 것이다.


우주 창조의 최종적인 목표는 만물의 주관주인 인간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부의 완성은 우주 창조의 완료를 의미한다. 그러나 부부(아담과 해와)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주 창조는 완료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창조(再創造)의 섭리를 계속해 오신 것이다. 재창조란 타락한 인간으로 하여금, 개체(個體)를 완성시키고 더 나아가서 부부로서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로 창조되었으나 남자만으로 혹은 여자만으로는 주관주가 될 수 없다. 부부로서 완성할 때 비로소 인간은 만물의 주관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주창조가 완료되는 것이다.


셋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인류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인류의 통일을 의미한다. 즉 부부에 있어서 남편은 전인류(全人類)의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전인류의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총인구(總人口)는 약 66억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각각 33억을 대표한 가치(價値)를 지니고 있는 것이 그 남편이고 그 아내이다.


넷째로, 본연의 부부는 각각 가정의 절반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부부의 결합은 가정의 완성을 의미한다. 가정에서 남편은 모든 남성을 대표하고 아내는 모든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상(以上)과 같은 측면에서 볼 때,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가정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우주 창조의 완성을 의미하며 인류의 통일과 가정의 완성(完成)을 의미한다. 이처럼 부부의 결합은 실로 신성(神聖)하고도 존귀(尊貴)한 결합인 것이다.

 
그런데 부부의 조화는 가정적사위기대의 형성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된다. 가정적사위기대의 형성이란, 창조 때에 인간에게 허락한 제2축복(第二祝福)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同사위기대(四位基臺)는 하나님을 중심하고 인격적으로 완성한 남편과 아내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사랑과 미를 주고 받음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이 때의 부부의 결합은 원상내(原相內)의 주체와 대상의 조화를 닮게 된다. 즉 원상의 자동적사위기대(自同的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그리고 부부의 자녀 번식은 하나님의 인간창조를 닮고 있다. 이것은 원상의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이때 부부는 각각 본심(本心)대로 살면서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게 된다.


본심대로 산다는 것은 원상의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는 것이요,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원상의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를 닮는 것이다. 부부가 각각 원상(原相)의 모습을 완전히 닮아서 인격자로 성숙한 다음,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서로 사랑을 주고 받는 수수작용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곳에 임재하게 된다. 가정은 부부의 횡적사랑과 하나님의 종적사랑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완성된 가정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서 국가, 세계를 이 地上에 세우게 되면 그것이 곧 지상천국(地上天國)이요,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가 되는 것이다.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이상(創造理想)을 완성한 세계란 본연의 질서를 통하여 실현(實現)되는 사랑의 世界를 말한다. 여기서 질서와 사랑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인간은 우주의 축소체이지만 가정도 우주의 축소체이다. 이때 인간은 구성요소(構成要素)로 본 우주의 축소체이며 가정은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인 것이다. 가정이 질서로 본 우주의 축소체라는 말은 우주의 종적질서(縱的秩序)와 횡적질서(橫的秩序)를 닮아서 가정에도 축소된 형태로서의 종적질서와 횡적질서가 있게 됨을 뜻한다. 가정에 있어서의 종적질서란 조부모(祖父母)(父母)→부모(父母)→子女→손녀(孫子)로 이어지는 질서를 말하며 횡적질서(橫的秩序)는 부부간 및 부모중심의 형제자매간의 질서를 말한다. 사랑은 이러한 질서를 통해서 실현(實現)된다. 그리하여 사랑에는 종적 사랑과 횡적 사랑이 있게 된다. 종적사랑이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내리사랑(下向愛)과 자녀의 부모에 대한 올리사랑(上向愛)이며 횡적사랑이란 부부간의 사랑, 자녀상호간의 사랑 등의 가로사랑(水平愛)이다.


이러한 사랑의 기본형을 토대로 하여 종적 가치와 횡적 가치의 기본이 되는 가정윤리가 성립된다. 종적 가치란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인 자애(慈愛)요, 자녀의 부모에 대한 사랑인 효성(孝誠)이다. 횡적 가치란 부부간의 사랑인 화애(和愛)요, 자녀 상호간의 사랑인 우애(友愛)이다. 이리하여 윤리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 가족구성원 상호간에 지켜야 할 행위의 규범(規範)이 되는 것이다(이에 관해서는 윤리론에서 상세히 논할 것임). 이러한 가정윤리를 사회(社會), 기업(企業), 학교(學校) 등으로 확대(擴大)시킨 것이 사회윤리요, 기업윤리요, 학교윤리이며 이웃사랑(愛), 민족애(民族愛), 원수에 대한 사랑, 자연보호운동 등도 모두 가정적윤리를 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本性)으로 본 인간관(人間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애적인간(愛的人間)(homo amans)이라 하겠다. 그런데 타락에 의해서 인간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완성을 보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미완성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해와는 본연의 부부가 될 수 없었다. 즉 부부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부부는 하나님마저 상실해 버렸다. 그리하여 우주(宇宙) 창조(創造)의 未완료(完了) 상태가 그대로 오늘에까지 지속(持續)되어온 것이다. 오늘날 가정문제(家庭問題)나 사회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것은 부부의 모습이 모두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그 때문에 가정과 사회가 어지러워졌고 국가와 세계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부가 화애(和愛)로써 조화(調和)를 이루어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세계의 통일과 직결(直結)되는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의 전제조건이 된다. 따라서 부부의 화애(和愛)의 문제는 사회문제와 세계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개성체(個性體)


하나님은 우주(宇宙)의 창조(創造)에 있어서 먼저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구상하시고,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실체대상으로 전개한 것이 피조세계이다. 따라서 피조만물은 원인자되시는 하나님의 원상(原相)을 상징적으로 닮은 개성체(個性體)요, 인간은 원상(原相)을 형상적으로 닮은 개성체이다. 개성체(個性體)란 원상의 개별상을 닮은 개성진리체라는 의미로서 인간은 우선 하나님의 보편상과 개별상을 함께 닮은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다.


그런데 그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다룸에 있어서 개별상(個別相)에 중점(重點)을 두고 다룰 때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를 개성체라고 한다. 개성체(個性體)로서의 인간의 개별상(個別相)은 동물이나 식물과는 달리 각개인(每個人)마다 그 개별성(個別性)이 현저(顯著)하며, 그 얼굴이나 성격 등이 사람마다 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즉 동물이나 식물에 있어서는 종류별(種類別)의 개별상이지만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별(個人別)의 개별상(個別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특히 인간에게 개인마다 독특한 개별상을 준 것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하면서 특유의 자극적(刺戟的)인 기쁨을 얻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최고의 기쁨을 돌려드리는 최고의 가치(價値)를 지닌 존재로서 이러한 개별상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상(個別相)은 세 가지 측면에서 인간의 특성(特性)으로 나타난다. 첫째의 특성이 용모상의 특징이다. 세계에 65억의 인간이 있지만 같은 용모나 체격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둘째의 특성은 행동상의 특징이다. 인간의 행동양식(行動樣式)은 사람마다 다르다. 행동은 마음의 직접적인 표현이므로, 용모를 형상적인 특성이라고 한다면, 행동은 성상적인 특성의 표현(表現)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의 특성은 창작상(創作上)의 특징이다. 예술의 창작(創作) 뿐만 아니라, 창조성을 발휘하는 모든 활동은 모두 창작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성을 발휘하면서 하루를 살았다면 그 1일의 생활의 발자취는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창작 또한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뿐만 아니라 인간 일생의 발자취도 하나의 작품(作品)(生의 작품)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기뻐하시고, 행동을 보고 기뻐하시고, 또 그 작품(作品)을 보고 기뻐하시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이 개개의 인간을 보고 기뻐하신다는 것은 개개의 인간이 용모나 행동이나 창작으로써 하나님께 고유한 美를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성미((個性美)이다. 따라서 개성미(個性美)란 용모상의 개성미요, 행동상의 개성미요, 창작상의 개성미이다.


부모(父母)가 자식을 대할 때, 특성에 있어서 어떤 자식이라도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자식은 부모의 표현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할 때, 그 인간의 용모나 행동에서 그리고 창작생활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개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즉 신래성((神來性)의 것이기 때문에 존귀하다. 인간이 인간의 개성(個性)을 귀히 여기고 상호 존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오늘날까지 인간의 개성(個性)은 무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독재사회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때까지의 공산주의(共産主義)사회(社會)가 그 현저(顯著)한 예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개성을 유물론(唯物論)에 근거하여 환경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이를 경시(輕視)한다. 우리는 인도주의(人道主義)(humanism)가 인간의 개성을 존중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인간의 개성이 존중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해답이 인도주의(人道主義)에는 없기 때문에 철학을 가진 공산주의의 비판을 견뎌내지 못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서 통일사상은 인간의 개성은 우연적(偶然的)인 것도 환경의 산물(産物)도 아니며, 하나님의 개별상에서 유래(由來)된 것이기 때문에 즉 신래성(神來性)이기 때문에 존귀하다고 하는 확고한 신학적, 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二.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


인간은 또 하나님의 신성(神性)도 닮고 있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에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심정(心情)(사랑), 무소부재(無所不在), 생명(生命), 진(眞)-선(善)-미(美), 정의(正義), 로고스, 창조성(創造性)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중요한 것 3가지만을 다루고자 한다. 이 세 가지는 현실문제 해결에 특히 중요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의 신성(神性)을 닮고 있다는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인간은 심정적(心情的) 존재(存在)요, 로고스적 존재요, 창조적 존재이다. 이에 관해서 다음에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


여기의 심정(心情)은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心情)은 사랑의 원천이며 사랑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정적(情的)인 충동이기도 한 것으로서 원상(原相)의 핵심(核心)을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성상(性相)의 핵심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정은 하나님에 있어서 인격(人格)의 핵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고 하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人格), 즉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닮으라는 가르침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심정은 인격의 핵심이 되게 되어 있었다. 인간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은 이러한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하나님의 심정을 체휼함으로써 인격(人格)을 완성한 인간이 바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계속적으로 체휼하면 드디어 하나님의 심정을 완전히 상속받게 된다. 그러한 인간은 사람이나 만물을 사랑하고 싶어 한다. 사랑하지 않으면 도리어 마음이 괴롭기 때문이다. 타락인간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일치된 자리에 이르게 되면 생활 그 자체가 사랑의 생활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있으면, 가진 자(者)는 갖지 못한 者에게 베풀면서 살게 된다. 사랑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부(貧富)의 차(差, 차이)나 착취 등은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효과(效果)는 사랑의 평준화(平準化)작용(作用)에 기인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 심정적 존재라는 말은 인간이 사랑의 생활을 하는 존재(存在)임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이 되는 것이다.


심정(心情)은 인격의 핵심이 되기 때문에, 인간이 심정적존재라는 말은 인격적 존재임을 또한 뜻한다. 그것은 심정을 중심으로 하여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이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하게 됨을 뜻하며 또한 심정을 중심으로 지-정-의의 기능이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게 됨을 의미한다.


타락(墮落)한 인간에 있어서는 생심(生心)의 기능이 약해서 생심(生心)이 육심(肉心)에 주관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이성(知的能力)이 대단히 발달해 있으면서도 정적(情的)으로 미숙(未熟)하거나 선(善)을 행하려고 하는 의지력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받아서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가 되면 지-정-의는 균형적(均衡的)으로 발달하고, 또 생심(生心)이 주체의 입장에서 육심(肉心)을 주관하면서 육심과 함께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행하게 된다.


심정은 또 성상(性相)의 핵심으로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知)-정(情)-의(意)는 각각 진(眞)-선(善)-미(美)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기능이기도 하다. 즉 지(知)는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眞의 가치를 추구하며, 정(情)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능력으로서 美의 가치를 추구하며, 의(意)는 결의(決意)하는 능력으로서 선(善)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 추구는 모두 심정을 동기로 하고 이루어지고 있다. 지적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진리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과학, 철학 등의 학문으로 나타나며, 정적활동(情的活動)에 의해 미(美)를 추구할 때 그 성과는 예술로 나타나며, 의적활동(意的活動)에 의해 선(善)을 추구할 때, 그 성과는 도덕(道德)-윤리 등으로 나타난다.


정치, 경제, 법률, 언론, 스포츠 등도 모두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의 성과인 것이다. 따라서 심정은 지(知)-정(情)-의(意)를 중심한 전체 문화활동의 원동력(原動力)이 되고 있으며, 특히 예술활동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의의 활동의 성과의 총화(總和)가 바로 문화이며, 본연(本然)의 세계에 있어서는 심정적(心情的) 인간(사랑의 인간)이 문화활동의 주역이 된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은 본래 문화활동(文化活動)의 원동력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룩했어야할 문화는 본래 심정문화(心情文化)였다. 이것이 참다운 문화이며 하나님이 아담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아담문화이다. 그러나 아담과 해와의 타락으로 심정문화(心情文化)는 실현되지 않았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기심(利己心)을 기반으로 한 문화, 즉 지적활동(知的活動), 정적활동(情的活動), 의적활동(意的活動)이 통일을 이루지 못한 문화, 따라서 분열(分裂)된 문화가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예컨대 경제생활(經濟活動)에 있어서 인간은 오늘날까지 돈 버는 것만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 왔다. 그러나 본연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가난한 생활을 하는데, 자기만이 유복(裕福)한 생활을 하게 되면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때문에 돈을 많이 모으면 이웃이나 사회에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즉 기업활동(企業活動)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영역(領域)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여기에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가 세워지게 된다. 이때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은 사랑을 중심하고 통일되게 된다. 이것이 통일문화이다. 따라서 사랑의 문화는 바로 통일문화이다.


오늘날까지 인류는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를 실현하려고 수없이 시도했으나 결국은 실패(失敗)로 끝나고 말았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여러 문화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거듭한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참다운 문화, 항구적(恒久的)인 문화가 어떠한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중국(中國)에 있어서 공산주의식 문화운동인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도 그 일례(一例)였다. 유물변증법을 근거로 하여 노동을 기반으로 한 문화가 참된 문화인 줄 알고 일으킨 문화혁명이었으나, 그 결과는 인간성(人間性)의 억압(抑壓)과 근대화의 지연(遲延)과 경제의 파탄을 초래했을 뿐이었다. 참다운 문화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문화 즉 심정문화(心情文化)로서, 문선생님이 주창하고 계시는 신문화혁명은 바로 심정문화의 건설운동인 것이다.


여기서 문화와 문명(文明)의 개념에 관해서 살펴보자. 지(知)-정(情)-의(意)의 활동에 대한 성과의 총화를 과학과 기술 등의 물질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명(文明)이라 하고, 특히 종교, 예술 등의 정신적(精神的)측면에서 볼 때 그것을 문화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활동의 성과를 정신적(精神的)인 면과 물질적인 면으로 명확히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문화와 문명(文明)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통일사상에 있어서도 일반의 예(例)에 따라서 문화와 문명을 동일한 뜻으로 사용할 때가 많다.


(2) 로고스的 존재(存在)


로고스라는 말은 원상론에서 밝힌 대로 원상내(原相內)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한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의 산물, 즉 신생체(新生體)를 의미한다. 여기의 창조목적은 심정(心情)(혹은 사랑)을 터로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도 심정이 그 터가 되고 있다.


우주(宇宙)는 이러한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 운행하고 있으며, 이 로고스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 인간도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고 로고스에 따라서 살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로고스的 존재이다.


로고스란 이미 언급한 대로 원상(原相)의 성상(性相)에 있어서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수수작용을 하여 생긴 신생체(新生體)로서, 내적성상(內的性相)속의 이성과 내적형상(內的形狀)속의 법칙이 특히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의 통일체(統一體), 즉 이법(理法)이 된다. 따라서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라 함은 인간이 이법적존재(理法的存在)임을 뜻한다. 여기서 이성과 법칙의 특성은 각각 자유성(自由性)과 필연성(必然性)이므로 로고스적 존재라는 말은 자유성과 필연성을 통일적으로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자유의지(意志)에 따라 행동하는 이성적 존재이면서 또한 法則(規範)에 따라 살아가는 규범적 존재이다.


오늘날, 인간은 자유성을 갖고 있으므로 法則(規範)에 따르는 것을 일종(一種)의 속박(束縛)으로 알고 거부하는 사고방식(思考方式)이 만연되어 있다. 그러나 참다운 자유는 법칙을 따르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지키는 데에 있다. 법칙(法則)을 무시한 자유는 방종(放縱)이어서 파멸을 가져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차는 궤도(軌道)위에 있으므로 빨리 달리거나 늦게 달리거나 할 수도 있고, 또 전진(前進)하거나 후진(後進)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궤도(軌道)를 벗어나면 기차는 전혀 달릴 수 없게 된다. 즉 기차는 궤도 위에 있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며, 궤도를 떠나면 기차 자체도 파괴되고, 인간이나 가옥에도 막대한 피해를 주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규범(規範)에 따라 살 때에 참다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에서 70이 되니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더라도 법도(法道)를 넘는 일이 없었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공자가 70세가 되어서 드디어 자유의지와 법칙이 통일된 완전한 로고스적 존재가 될 수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은 로고스的 존재이므로 법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 본래의 모습이다. 인간이 지켜야 할 법칙이란 우주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 즉 수수작용(授受作用)의 법칙을 말한다. 그런데 원상(原相)에서 로고스가 형성될 때, 그 동기는 심정(心情)이다. 따라서 우주의 법칙은 사랑(心情)이 그 동기가 되었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적이 되었던 것이다. 존재론(存在論)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정은 우주의 질서체계의 축소체이다. 즉 우주에 종적(縱的)?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는 것과 같이, 가정에 있어서도 종적(縱的)-횡적(橫的)인 질서가 있다.


종적질서와 횡적질서에 대응하는 가치관이 종적규범(종적가치관)과 횡적규범(횡적가치관)이다. 가정에서의 종적가치관이란 부모(父母)와 子女間에 있어서의 규범이며, 횡적가치관이란 형제자매(兄弟姉妹)의 관계 및 부부의 관계에서의 규범(規範)이다. 또 인간에게는 개인으로서 지켜야 할 가치관 즉 개인적(個人的) 규범(規範)도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인격(人格)을 완성하거나 유지하기 위한 규범이다(이들 종적규범, 횡적규범, 개인적규범에 대해서는 가치론과 윤리론에서 상세히 설명하고자 함).


가정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규범(規範)은 사회나 국가에 그대로 확대 적용된다. 결국 가정의 규범은 사회나 국가가 지켜야 할 규범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로고스적 존재가 되지 못하였다. 그 결과 사회도 국가도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놓여지게 되었다. 인간이 로고스적 존재로서의 본성(本性)을 회복할 때, 비로소 가정도 국가도 본래의 질서(秩序)를 갖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


하나님은 그의 창조의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으로써 우주를 창조했으며 그 창조성(創造性)을 인간에게도 부여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부여받은 이 창조성을 발휘하여 오늘날까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여기의 창조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나님의 창조성은 심정(心情)을 기반으로 한 창조의 능력이다. 이미 원상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주 창조에 있어서 원상내부(原相內部)에는 다음과 같은 2단계(二段階)의 수수작용이 행하여졌는바, 그 첫째는 내적수수작용이요 둘째는 외적수수작용이었다.


내적수수작용은 심정에 의해 세워진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로고스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외적수수작용은 동일한 목적을 중심하고, 同로고스와 형상(본형상(本形狀)) 사이에 벌어진 수수작용으로서 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피조물이 生成되었던 것이다. 이 2단계(二段階)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은 바로 2단계(二段階)의 발전적사위기대의 형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이란 결국 이 2단계(二段階)의 발전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및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形成)의 능력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만들 때 먼저 목적을 세우고 설계를 하거나 구상을 한다. 즉 내적수수작용을 한다. 그리고 그 구상에 따라 물건을 만들게 된다. 즉 외적수수작용을 행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성(創造性)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심정을 터로 한 사랑으로써 만물을 주관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주관이란 物的對象(自然萬物, 자연), 재화(財貨) 등)과 인적대상(人的對象)을 다루거나 다스리는 것을 뜻하며, 특히 만물 주관은 물질을 다루는 것, 즉 물질의 취급, 관리, 처리, 보존 등을 의미한다. 산업활동(産業活動)(一次産業, 二次産業, 三次産業), 정치(政治), 경제(經濟), 과학(科學), 예술(藝術) 등 물질을 취급하는 일절(一切)의 활동이 모두 이러한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갖고 이러한 주관활동을 하는 것이 본연(本然)의 주관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계승(繼承)했더라면 이들 활동은 모두 하나님의 심정이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영위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라(창1:28), 즉 주관(主管)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물을 주관(主管)하려면 만물(萬物, 자연)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主管主)로서의 자격(資格)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은 大주관주(主管主)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주관하실 수 있는 자격으로서 창조성(創造性)을 갖추고 계신 것과 같이, 인간도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주관주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성(創造性)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서 성장기간(成長期間)을 두시고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완수함으로써 인격적으로 완성되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成長過程)을 통하여 완성됨으로써만 하나님의 창조성을 부여받아 가지고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런데 주관은 본래 자기가 만든 것(자기 것)만을 주관하게 되어 있지, 타인(他人)이 만든 것(타인 것)을 함부로 주관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은 만물 창조가 끝난 뒤에 지음받았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자식은 자라서 부모의 권한(權限)을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주관권을 상속받을 수 있는 조건(條件)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면서 성장하도록 명령(命令)하셨던 것이다. 그 조건(조건(條件))이란, 인간도 우주의 창조위업(創造偉業)에 가담한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바로 인간(아담과 해와)이 자기의 책임분담(責任分擔)하에 자신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만물을 총합(總合)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이기 때문에 인간 한 사람의 가치는 우주의 가치에 맞먹는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책임분담으로 자기를 완성(完成)시킨다면 그 노력은 우주를 완성시킨 것(창조한 것)과 동일(同一)한 가치(價値)의 노력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에게 책임분담을 다하게 하신 이유였다. 즉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도 하나님의 창조위업에 가담했다는 조건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분담에 의해서 완성토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理由)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에게 성장기간 동안에는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원리강론 1987, p. 85:性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계명(誡命)을 주신 이후,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 간섭(干涉)하지 않으셨다. 만일 간섭하게 되면 인간 책임분담(責任分擔)을 하나님 스스로 무시하는 입장이 되며, 미완성한 아담과 해와로 하여금 만물을 주관하게 하는 모순을 초래(招來)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 해와는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만물을 주관하는 자격(資格)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계승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이성에 의한 창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개인(個人)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이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가정레벨의 창조일 경우에는 자기가정의 이익(利益)만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국가레벨의 경우에는 자기 국가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창조활동(創造活動)은 거의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또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지속(持續)해 왔다. 그 결과 자연파괴나 공해, 살육병기(殺戮兵器)의 개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야기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심정을 중심으로 한 본래의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정이 창조성의 기반이 된다는 것은 사랑을 동기로 하여 창조가 이루어져야 함을 뜻하며 올바른 가치(價値)觀에 따라 창조활동이 행하여져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과학자는 과학자이기 전에 먼저 가치적인 인간, 즉 인격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면 윤리가 자연과학의 기반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근대이후(近代以後), 과학자(科學者)들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탐구(探求)하면서 일체의 가치관을 배제해 왔다.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혼란상태(混亂狀態)가 오게 되었다. 국제과학통일회의가 개최될 때마다 문선생님이 과학자들에게 가치관을 다루도록 강조한 것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참다운 창조성(創造性)을 회복(回復)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자연(自然)을 사랑하고 인간의 가치(價値)를 재검토(再檢討)하고, 인간 상호간의 사랑 그리고 사랑의 근본(根本)인 하나님을 찾음'으로써 참된 창조성을 지닐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三.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


한편 인간은 원상(原相)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성을 닮아서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지니게 되어 있다. 인간은 먼저 부모 앞에 대상으로서 출생(出生)하며, 성장한 다음에는 부모(父母)가 되어서 자식을 낳고, 그 子息에 대하여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된다. 또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하위의 대상의 직급에서 출발하여 점차 상위의 주체의 직급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머물러 있다가 점차로 주체격위로 옮아가게 된다.


(1) 대상격위(對象格位)와 주체(主體)


대상격위는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格位)인 동시에 주체에게 기쁨을 돌려주는 데에 그 존재의 의의(意義)가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으로 지음받았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서 대상격위에 있는 인간생활의 제1차적인 의의(意義)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먼저 하나님에 대하여 대상의 위치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여러 대신(代身) 위치에 대해서도 대상격위에 서게 된다.


여기서 하나님의 대신 위치란 예컨대 다음과 같다. 즉 백성에 대한 대통령이나 국왕, 자식에 대한 부모, 제자에 대한 스승, 부하에 대한 상관, 그리고 개인에 대한 전체 등이 그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대상(對象)인 것처럼, 국민(百姓)은 대통령이나 국왕의 대상이요, 자식은 부모의 대상이며, 제자는 스승의 대상이요, 부하는 상관의 대상이며, 개인은 전체의 대상인 것이다.


인간은 여러 주체들과 연관을 맺으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대상격위(對象格位)에 있는 인간은 주체의 주관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주체에 대한 일정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대상의식이다. 먼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대상의식은 하나님을 모시는 마음, 즉 시봉심(侍奉心) 혹은 충성심(忠誠心)이며, 국가에 대한 국민의 대상의식도 충성심(忠誠心)이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대상의식은 효성심(孝誠心)이며,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대상의식은 존경심(尊敬心) 혹은 복종심(服從心)이다. 또 상관에 대한 부하의 대상의식은 복종심(服從心)이며, 전체(全體)에 대한 개인의 대상의식은 봉사심(奉仕心)이다. 여기에서 각각의 주체에 대한 대상들의 공통적인 대상의식은 온유와 겸손, 그리고 위하고자 하는 마음(爲他心)인 것이다.


그런데 타락세계에 있어서는 역사상, 많은 독재자(獨裁者)가 나타나서 대중들의 대상의식을 이용(利用)하여 마치 참다운 주체인 것 같이 행동함으로써 국민의 존경(尊敬)이나 지지(支持)를 받아 왔다. 예컨대 히틀러, 스탈린, 모택동, 차우체스크(Ceausescu 루마니아 독재자)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거짓 주체들이 비록 일시적으로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대중의 지지(支持)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子女로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봉(侍奉)하고, 충성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대상의식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식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고자 하는 마음까지를 유발(誘發)하게 된다. 종교인들의 순교(殉敎)정신(精神)이 바로 그 예이다. 위대한 지도자의 추종자(追從者) 중에 때때로 그 지도자를 위해서라면 생명(生命)까지 기꺼이 바치는 예가 가끔 있음을 보는데, 이러한 예들은 참주체(하나님 대신입장)에 대한 대상의식이 극한적으로 발로(發露)된 예이다. 그런데 일반대중은 누가 참주체인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독재자(獨裁者)와 같은 거짓주체를 참 주체(主體)로 착각하고 그를 맹목적(盲目的)으로 따름으로써 인류사회에 해악(害惡)을 끼치는 일에 도움을 주는 결과를 낳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이리하여 참된 주체를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필요(必要)한 일이다.


대상의식(對象意識)은 윤리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오늘날 대상의식이 거의 마비됨으로써 주체의 권위가 무시를 당하고 여기에 주체와 대상의 질서가 사라져서 그로 말미암아 사회가 혼란상태(混亂狀態)에 빠지게 되어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상태가 되고만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윤리의 확립을 위해서는 확고한 대상의식을 앞세우게 하는 의식의 개혁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2) 주체격위(主體格位)와 대상(對象)


주체격위는 대상을 주관하는 위치이다. 본래 인간이 성장하여 완성하면 만물에 대해서 주체의 위치 즉 주체격위에 서게 된다. 즉 만물을 주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런데 여기의 주체격위는 인간 대 인간관계(關係)에 있어서의 주체의 위치를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주체의 예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에 대하여 주체이며, 학교에서 교사는 학생에 대하여 주체이다. 사회(社會)에서 상사(上司)는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主體)이며, 국가에서 정부(政府)는 국민(國民)에 대하여 주체이다. 또 전체는 개인에 대하여 주체이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을 주관하는데 있어서도 일정(一定)한 심적태도(心的態度)가 요구된다. 이것이 주체의식이다. 그것은 첫째로, 대상에 대해서 부단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그 동안 인간 소외문제가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어 왔는데, 그것은 여러 주체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말단(末端)의 대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데에 기인한 것이다. 대상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대상은 주체에게 불신(不信)을 품게 되고, 그 주체를 따르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주체는 주관의 대상에 대하여 망각지대(忘却地帶)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상관이 부하(部下)에게 명령하거나 대상을 지배하는 것이 주체의식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참주관(主管)은 대상을 능동적(能動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행복(幸福)과 이상(理想), 기쁨과 생명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주체(主體)가 대상(對象)을 사랑할 때 대상은 주체에게 충성하고 복종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이 대상인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주체는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셋째로, 주체는 적당한 권위(權威)를 지녀야 한다. 주체가 사랑을 가지고 부하를 주관(統率)할 때, 일정한 권위가 없이 동정심(同情心)만 베푼다면 부하는 믿음직한 상관(上官)이라는 이미지가 흐려짐과 동시에 긴장감(緊張感)이 풀어져서 일하고자 하는 의욕이 저하된다. 따라서 주체는 적당한 권위를 지니면서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랑에는 봄날과 같은 따뜻한 사랑도 있으나 겨울의 차가움과 같은 엄격(嚴格)한 사랑도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權威)를 갖춘 엄격한 사랑은 대상들의 주체에 대한 신뢰도(信賴度)와 소속감을 제고(提高)시키며, 상관(上官)에의 복종심과 일에 대한 의욕(意欲)을 앙양시킨다. 여기의 권위를 갖춘 엄격한 사랑이란 사랑을 내포(內包)한 엄격한 명령(命令)을 말한다.


이와 같이 주체에게는 일정한 권위가 필요하나, 과다한 권위의식은 도리어 금물이다. 그런 권위에는 사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권위가 지나치게 강하게 작용하면 부하는 위축되어 창조성(創造性)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된다. 상사가 부하를 꾸짖어도 부하가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질책(叱責)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하는 권위가 참권위(權威)이며, 바로 사랑을 내포한 권위(權威)인 것이다.


하나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권위의 하나님이시다. 예컨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비둘기와 양과 암소의 헌제에 실패하였을 때, 그의 자식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順從)하여 이삭을 헌제로 바치고자 했을 때,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아노라"5)고 하셨다. 이것은 이때까지 너는 내가 두려운 권위의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 네 아들을 제물로 바치도록 한 것이다라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해서, 안이(安易)하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며 도리어 두렵게 여기는 것을 원(願)하고 계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권위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상속(相續)받으면, 심정을 터로 한 하나님의 창조성을 발휘(發揮)하여 만물을 주관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참사랑)을 가지고 만물을 주관(主管)하게 된다. 그 때, 인간은 참된 의미에서 만물에 대한 주체격위에 서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 마르크스主義는 생산수단(生産手段)을 국유화(國有化)하고 계획경제를 실시하게 되면, 인간은 자연에 대한 참다운 의식적(意識的)인 주인이 된다6)고 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主義)는 인간이 계획경제를 실시함으로써 만물주관의 주체격위(主體格位)에 서게 된다고 보고 있음을 뜻한다.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경제의 개혁(계획경제의 실시)에 의해서 인간이 만물주관의 격위(格位)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과거 수십 년 동안 소련(蘇聯)이나 중국(中國) 등에서 경제정책이 실패하고, 생산성의 정체(停滯) 등으로 경제가 파탄된 것은 공산주의가 만물주관에 완전히 실패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主義의 물질주의적(物質主義的) 인간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인간은 만물에 대해서 참다운 주체격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연체의식(聯體意識)과 민주주의(民主主義)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실제로는 주체격위와 대상격위에 함께 서있다. 이것은 인간이 연체(聯體)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주체격위와 대상격위를 겸비(兼備)한 존재, 즉 이중격위(二重格位)를 가진 존재이다. 이것을 연체격위(聯體格位)라고 한다. 연체격위는 이중(二重)목적, 즉 전체(全體)목적과 개체(個體)목적을 지닌다. 예컨대 어느 직장에 있어서 한 부서(部署)의 장(예: 과장, 부장)은 부하(部下)에 대하여 주체격위에 있으나 동시에 상사(上司)에 대하여 대상격위에 처해 있다. 그 회사에 있어서 최고의 주체입장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대상격위에 있으므로 인간은 누구나 엄격히 말해서 모두 연체격이(聯體格位)에 있는 것이다. 연체격위에 있어서 취해야할 마음의 자세는 대상의식과 주체의식을 겸비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연체의식(聯體意識)이라고 한다.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인간은 먼저 대상격위에 있다가 다음에 주체격위에도 서게 된다. 따라서 연체의식에 있어서는 대상의식이 우선(優先)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주체의식은 대상의식의 기반위에 세워지는 것이 본연의 모습이다. 그런데 타락인간에 있어서 인간이 주체의 위치에 설 때, 대체로 주체의식을 우선(優先)하게 된다. 그 전형적(典型的)인 예가 독재자(獨裁者)들이다. 독재자들은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의 뜻대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본연의 사회에서의 지도자는 비록 최고의 위치에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하나님 앞에 대상의 위치에 있음을 의식하고 겸손성(謙遜性)을 잃지 않는다.


다음에 민주주의에 있어서의 연체의식에 대해서 살펴보자.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다수결주의(多數決主義)와 권리평등(權利平等)의 사상으로서 이 권리평등의 사상은 로크(J. Locke, 1632~1704)의 `자연권(自然權)의 평등' 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홉스(T. Hobbes, 1588~1679)에 있어서는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鬪爭)이었으나 로크는 자연상태(自然狀態)에 있어서 자연법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상태에 있다고 언명(言明)하면서, 자연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은 자연(自然)의 권리(權利)-생명(生命), 자유, 재산(財産)에 대한 평등한 권리(權利)-를 가진다고 하였다.7) 이 자연권(自然權) 사상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고대(그리스시대)로부터의 자연법 사상이었다. 이 자연법 사상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이 근대민주주의(近代民主主義) 원칙의 성립의 동기가 되었다. 여기의 권리평등이란 개인 개인의 권리(權利)의 평등을 뜻함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 자연법에 근거한 권리평등의 사상을 정확히 말한다면 기독교의 하나님 앞에서의 平等의 사상에서 온 것이다. 즉 존 로크의 자연권(權利平等)사상은 인간의 平等한 자연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국가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평등권사상(平等權思想)이 근대민주주의 성립의 참된 근거였다. 따라서 평등사상(平等思想)은 하나님앞에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평등을 뜻하는 것으로서 본래 평등사상은 대상의식의 사상(思想)이며, 따라서 질서의식의 사상이었다. 즉 민주주의는 본래 대상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출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달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모습은 점점 대중의 관심권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개인의 권리주장(權利主張)이 지나치게 강조됨으로써 대상의식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개인은 본래대로의 대상의식이나 연체의식을 가질 수 없게 되었으며, 주로 주체의식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주체의식(主體意識)만을 지닌 인간의 관계, 즉 주체와 주체의 관계로 변질(變質)되었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질서부재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주체와 주체의 관계는 본질(本質)상 상극적(相剋的)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민주주의는 그 성립(成立)된 이후 상당한 기간 동안에는 비교적 건전한 발전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의해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후, 과학의 발달과 유물사상(唯物思想)의 확산(擴散)의 영향을 받아서 기독교는 세속화되어 갔으며, 따라서 인류의 정신지도의 능력(能力) 또한 사라져 갔던 것이다. 게다가 사회는 급속히 산업사회로 화하였고 가치관은 다원화(多元化)되어 갔다.


이러한 사회환경의 변천과 함께 민주주의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서의 대상(對象)의 평등에서 法 앞에서의 주체의 권리평등사상으로 변질(變質)되어 갔으며, 그 결과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민주주의의 모순 즉 주체와 주체의 상극적(相剋的)인 요인이 드디어 표면화되면서 여러 가지의 사회적 혼란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주체와 주체의 상호관계는 서로 상극(相剋)의 관계이다. +전기와 +전기가 서로 배척(排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주체)의 권리평등의 사상은 기독교의 사랑과 같은 조절기능이 없는 한 필연적(必然的)으로 상충현상을 빚어내기 마련이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紛爭), 충돌(衝突), 전쟁(戰爭), 상호증오(相互憎惡) 등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불화현상은 모두 이 주체와 주체간의 상극작용의 표현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의 권리평등(權利平等) 사상은 시초부터 상극요인을 안고 출발하였으며, 따라서 때가 이르면 그 상극작용은 반드시 표면화(表面化)될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때가 당도하자 잠재(潛在)해 왔던 상극작용이 표면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전체 민주주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殺人), 강도(强盜), 방화(放火), 테러, 파괴, 마약중독, 부정부패, 性도덕(道德)의 퇴폐, 이혼율(離婚率)의 증대, 가정(家庭)의 붕괴, 에이즈(AIDS)의 확산, 성범죄(性犯罪)의 만연 등도 실은 모두 이 민주주의의 상극적 요인(要因)을 바탕으로 하고 일어나고 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의 결과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사회의 가치관의 붕괴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인간의 머리에 다시 본래의 대상의식(對象意識)을 부활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인류의 참된 주체인 하나님을 다시 맞아들여야 하며 민주주의가 출발할 때의 본래의 정신(精神)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실재(實在)를 합리적(合理的)으로 증명(證明)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게 되면 자기의 상위자를 존경하게 되고, 또 상위자는 하위자를 사랑으로 지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국민을 사랑하게 되고, 국민은 정부에게 충성을 다하게 된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잃어버렸던 민주주의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가 될 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병폐(病弊)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게 된다. 통일사상은 하나님을 중심한 민주주의를 천부(天父) 중심의 형제주의 라고도 한다. 이것을 간단히 천부주의 또는 형제주의라고도 부른다. 부모없는 형제가 있을 수 없고 형제를 떠난 부모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전인류(全人類)는 참부모(父母)인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랑의 형제자매(兄弟姉妹)가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만물에 대한 인간의 주관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3대축복(三大祝福)의 하나로서 만물주관을 명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만물의 주관격위에 설 수 있었을 것이다. 만물주관이란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 만물을 단순히 지배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산업(제1차, 2차, 3차산업)활동을 위시한 모든 경제활동과 제조활동, 기술활동이 모두 이 주관에 속한다. 그러면 이러한 만물주관에 대한 인간의 심적태도(心的態度)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은 만물에 대해서 사랑의 마음을 지니는 것이다. 만물에 대한 사랑이란, 온정(溫情)을 가지고 만물을 소중히 다루면서 위해 주는 것이다. 즉 사랑을 터로 하고 만물을 다루고 다스리는 것이다. 이러한 주관은 천도(天道)에 따르는 주관이기 때문에 만물(萬物, 자연)도 기뻐한다.


四. 결론(結論)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신상적존재(神相的存在)요, 신성적존재(神性的存在)요,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이것이 고래(古來)로부터의 철학적인 물음,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통일사상의 대답인 것이다. 결론으로서 이상의 인간 본성(本性)에 관한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신상을 닮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統一體)이다. (2) 인간은 신상을 닮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다. (3) 인간은 신상을 닮은 개성체(個性體)이다. (4)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며, 사랑을 실천(實踐)하는 인격(人格)的 존재(存在), 즉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이다. (5)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로고스的 존재(存在)요, 천도(天道)에 따라 사 는 규범(規範)的존재(存在)이다. (6) 인간은 신성(神性)을 닮은 창조적존재(創造的存在)요, 심정(心情)을 중심으로 한 만물의 주관주이다. (7) 인간은 이중(二重)목적과 연체의식(聯體意識)을 지닌 격위적존재(格位的存在)이다.


위와 같이 엄청난 내용을 가진 귀(貴)하고 성(聖)스러운 존재(存在)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본질(本質)적인 인간의 본성을 든다면, 그것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오늘날까지 대표적인 인간관(人間觀)으로서는 이성을 인간의 본성(本性)이라고 하는 지성인(지성(知性)人)(homo sapiens)이나 도구(道具)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을 인간의 본성(本性)으로 하는 공작인(工作人)(homo faber)등이 있었다. 전자(前者)에 속하는 인간관(人間觀)이 그리스철학이나 근대 합리주의 철학(哲學)이며 후자(後者)에 속하는 인간관(人間觀)이 마르크스주의나 프래그머티즘이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의 본질(本質)이 심정(心情) 또는 사랑이라는 뜻의 애적인간(愛的人間; homo amans)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五. 통일사상에서 본 실존주의(實存主義) 인간관(人間觀)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추구(追求)한 대표적인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들이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사회 속에서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거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러한 절망이나 불안에서 해방(解放)될 수 있는가를 생애(生涯)를 바쳐서 찾았던 것이다. 여기서 5명의 대표적인 실존주의(實存主義) 철학자(哲學者)들의 주장을 간단히 소개하면서 통일사상의 인간관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성론의 이해를 보다 깊게 할 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키에르케고르


1)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1813~1855)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自問)하고 인간은 정신(精神)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이다. 자기란 무엇인가? 자기란 자기 자신에 관한 하나의 관계이다.'8)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러면 이와 같은 관계를 조정(措定)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자기 이외의 제3자(第三者)가 아니면 안 된다. 그것을 곧 신(神)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본래적인 자기란 신(神) 앞에 서있는 자기(自己)이다.


그런데 본래 신(神)과 관계를 맺고 살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이 신(神)으로부터 떠나버렸다. 그 경위는 불안(不安)의 개념(槪念)이라는 책속에서 성서 창세기의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처음에 아담은 평화와 안식의 상태에 있었으나 동시에 불안(Angst)한 상태에 있었다. 신(神)이 아담에게 선악(善惡)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을 때, 아담속에 자유의 가능성이 자각(自覺)되었으며 이 자유의 가능성이 아담을 불안(不安)에 빠뜨렸다. 그리고 아담이 자유의 심연(深淵)을 들여다 봄으로써 현기증(Schwindel)을 느껴 자기(自己)에게 집착(執着)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원죄(原罪)가 성립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자기자신(自己自身)에 대한 관계 속에 분열이 일어나 절망(絶望; Verzweifelung)에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인간은 이 절망을 위로부터 자기를 내리 누르는 어떤 무엇인 것처럼 착각하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그 절망을 제거(除去)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으로는 결코 절망이 제거되지 않는다. 신앙에 의해서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함으로써만 본래의 자기의 관계를 되찾을 수가 있고, 절망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공중(公衆)은 일절(一切)이며, 무(無)이다. 모든 세력중에서 가장 위험(危險)한 것, 그리고 가장 무의미한 것이다."9)라고 하면서 대중(大衆)의 무책임성과 양심(良心)이 없음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인간이 참다운 인간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비인간적(非人間的)인 대중의 세계에서 벗어나서 단독자로서 단지 홀로 신(神)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인간이 본래的인 자기에로 돌아가는 단계를 실존(實存)의 3단계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p. 265


첫째의 단계는 미적(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단지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감성적(感性的)인 욕구(欲求)에 따라 기지(機智)를 가지고 살려고 하며, 이 단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인생의 목적은 향락(享樂)이다. 이것은 에로스적 사랑을 추구하는 심미가(審美家), 유혹자(誘惑者)의 입장이다. 그러나 향락의 순간은 계속해서 반복되기 어려우며, 결국은 권태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좌절(좌절(挫折))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옮아간다.


둘째의 단계는 윤리적(倫理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이 단계의 인간은 양심(良心)을 선악(善惡)의 판단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한다. 즉 책임감과 의무감을 가지고 선량(善良)한 시민으로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努力)해도 전적으로 양심에 따라 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다시 좌절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새로운 결단에 의해 다음의 단계로 넘어간다.


셋째의 단계는 종교적(宗敎的) 실존(實存)의 단계이다. 신앙을 가지고 신(神) 앞에 홀로 서는 단계이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다운 실존(實存)이 된다. 이 단계에 이르려면 비약(飛躍)이 필요하다. 그것은 지성(知性)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역설(逆說)(Paradox)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 예컨대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신앙이나, 영원(永遠)한 신(神)이 유한(有限)한 시간(時間)속에서 수육(受肉, 육신을 쓰고)하여 인간(예수)이 되어 나타났다고 하는 비합리적(非合理的)인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을 그는 역설(逆說)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약을 통하여 비로소 신(神)과의 관계를 회복(回復)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인륜(人倫)에 반하는 신(神)의 명령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복종하여 자식 이삭을 제물로서 바치려고 한 행위를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삶의 전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神)을 중심으로 한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 인간이 자기(自己)를 사랑하는 것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신(神)을 매개(媒介)로 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을 주고 받을 때, 그와 같은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참된 사회가 성립(成立)될 수가 있다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키에르케고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에서 떠남으로써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한 관계에 분열이 생겨서 불안과 절망에 빠졌다고 하였는데, 자기자신에 관한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그는 밝히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이것은 마음과 몸 또는 생심(生心)과 육심(肉心)의 관계라고 가상(假想)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이 가상을 전제로 하고 그의 자기(自己) 자신에 관한 관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그러면 이런 전제(前提)에서 볼 때, 자기 자신에 관한 관계에 분열(分裂)이 생겼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신(神)을 떠남으로써 마음과 몸이 분열된 것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본래적인 자기에 있어서는 신(神)을 중심으로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 타락으로 마음과 몸이 갈라졌음을 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고, 인간의 생심과 육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회복하여 원만한 수수작용(授受作用)을 함으로써 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단독자(單獨者)로서 신(神) 앞에 서게 될 때, 절대자(神)에 대하여 절대적인 관계에 선다고 하였다. 이 단독자는 통일사상에서의 인간본성의 개성체(個性體)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이다. 그러나 그는 단독자가 왜 절대적인가를 설명하지 않고 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의 개성체(個性體)가 절대적인 것은 인간이 절대자인 하나님의 개별상(個別相)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관계성과 단독성은 통일사상의 마음과 몸의 통일적관계(統一的關係)와 개성체(個性體)의 개념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이러한 이해(理解)는 인간본성(本性) 전체에 대한 이해는 아니다. 인간 본성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은 심정적존재(心情的存在)이다. 또 인간이 단독자로서 즉 개성체(個性體)로서 신(神) 앞에 선다고 보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파악이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부부(夫婦)로서 신(神)앞에 설 때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된다. 인간은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의 조화체(調和體)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또 로고스적 존재이며 창조적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주체성(主體性)과 대상성(對象性)을 함께 구비한 격위적 존재이기도 하다. 단독자로서 홀로 신(神)앞에 선다는 그의 인간관은 진지(眞摯)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인간은 고독하고 쓸쓸한 것이 되고 말았다.


인간은 왜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을까. 그 원인이 명백해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 즉 신(神)의 지음을 받은 대로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키에르케고르는 아담이 자유의 가능성(可能性)에서 오는 불안 때문에 죄(罪)에 떨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통일원리에 의하면 자유나 불안이 타락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 시조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천사장(天使長)의 유혹에 의하여 사랑의 방향성(方向性)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에 의해서 타락한 것이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탈선(脫線)하려고 할 때 그들의 본심의 자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데 대한 불안감을 일으켰으며, 이 불안감은 오히려 그들이 탈선(脫線)하지 않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원리적인 사랑의 힘은 이 불안감을 누르고 그들로 하여금 타락(墮落)線을 넘게 하였다. 이 타락의 결과로 인류는 신(神)으로부터 떠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계명을 어긴 데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으로부터의 사랑의 단절(斷切)로 인하여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타락의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인간의 불안과 절망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신(神)의 사랑에 관한 개념도 막연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무한히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情的) 충동인 심정으로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지상(地上)에 나타날 때에는 방향성(方向性)을 갖추고 나타난다. 즉 먼저 가정을 기반으로 하여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 형제의 사랑과 같은 분성적(分性的)인 사랑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다시 여러 방향으로 확대되어서 인류애(人類愛), 민족애(民族愛), 린인애(隣人愛, 이웃사랑), 동물(動物)에의 사랑, 자연에의 사랑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향성이 있으며, 막연한 사랑을 신(神)의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본래의 모습을 회복(回復)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허위(虛僞)와 싸워서 신(神)에게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쳤다. 이것은 사회의 박해(迫害)와 조소를 참으면서 신(神)을 뵈려고 한 그 자신의 발걸음을 반영(反映)한 것이며, 진실한 신앙인의 모습을 갖도록 당시의 종교인(宗敎人)들에게 경각심을 일으키려는 충고이기도 한 것으로서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그는 27세때 레기네 오르센과 약혼(約婚)하였으나 결혼으로 그녀를 불행(不幸)에 빠뜨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 때문에, 또 연애보다도 차원이 높은 이상적(理想的) 사랑을 실현해 보고자 일방적(一方的)으로 약혼을 파기(破棄)하였다. 그 때문에 그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통일사상으로 볼 때 그는 무의식중에 인격(人格)을 완성한 터 위에서, 신(神)을 중심한 참다운 남녀(男女)의 사랑을 실현할 것을 원했다고 볼 수 있다. 본래의 인간상(像)을 찾아 나아가는 키에르케고르의 방향성(方向性)은 기본적으로 통일사상의 입장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 니 체


1)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 신(神)앞에 설 때 본래的자기(自己)가 된다고 하였으나 니체(Nietsche, Friedrich Wilhelm, 1844~1900)는 그와 반대로 신(神)에 대한 신앙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적 자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니체는 당시 유럽사회에서의 인간의 수평화(水平化), 왜소화(矮小化)를 개탄(慨歎)하고, 그 원인이 기독교의 인간관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生(生命)을 부정하고 금욕주의(禁慾主義)를 주장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피안(彼岸)에 두었다. 또 만인은 신(神)앞에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 결과 인간의 활발한 생명력(生命力)을 소실(消失)시키고 강(强)한 인간을 끌어내리어 인간을 평균화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神)은 죽었다(Gott ist tot)라고 선언(宣言)하면서 기독교를 공격(攻擊)했다. 기독교의 도덕은 신(神)이나 영혼(靈魂)이라는 개념으로 生과 육체를 억압하고, 生의 현실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봄으로써 강한 인간에의 길을 막았으며, 약자(弱者)나 고생하는 자를 후원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의 도덕을 그는 노예도덕(奴隷道德))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기독교적인 사랑의 생활, 정신적(精神的)인 생활을 물리치고 본능에 의한 생활, 생명이 욕구하는 대로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긍정(肯定)하였다.


생명(生命)이란 성장(成長)하려고 하는 힘이며, 발전하려는 힘이다. 그는 대체로 살아 있는 자를 발견하는 곳에서 나는 권력에의 의지도 발견하였다. 그리고 복종(服從)하며 봉사하는 자의 의지 속에서도 나는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의지를 발견하였다"10)라고 하였으며, 인간의 모든 행위의 근저(根底)에는 보다 강대해지고자 하는 권력(權力)에의 의지(意志)(Wille zur Macht)가 존재(存在)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독교의 노예도덕(奴隷道德)을 대신하여 권력의 크기를 가치기준으로 하는 군주도덕(英雄道德)을 수립했다. 그는 선(善)과 악(惡)의 기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善)이란 무엇인가?-권력(權力)의 감정을, 권력에의 의지(意志)를, 권력자체를 인간에게 높이는 모든 것이다. 악(惡)이란 무엇인가?-나약으로부터 유래하는 모든 것이다. 행복(幸福)이란 무엇인가?-권력이 성장한다는 것, 저항(抵抗)을 이겨낸다는 것의 감정(感情), 약자(弱者)나 잘못된 것 등은 철저(徹底)하게 몰락(沒落)해야 한다. 이것이 즉 우리들의 인간愛의 제일명제(第一命題)이다. 그리고 그들의 철저한 몰락(沒落)을 도와 주어야 한다. 어떠한 배덕(背德, 배은망덕)보다도 유해(有害)한 것은 무엇인가? 모든 잘못된 것과 모든 약자에 대하여 아주 불쌍히 여기는 것,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의 군주도덕(君主道德)에 의한 이상적 인간상(像)은초인(超人)(Ubermensch)이다. 초인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극한(極限)에까지 실현한 존재로서 권력의지(權力意志)의 체현자(體現者)이다. 초인의 가능성은 모든 生의 고통을 견디고 生을 절대적으로 긍정(肯定)하는데 있다. 生을 절대적으로 긍정한다는 것은 모든 것은 가고, 모든 것은 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있다"라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사상, 즉 세계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이 영원히 반복(反復)한다는 사상을 견뎌내는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운명(運命)도 이를 인내(忍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必然的)인 것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 운명(運命)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능하다고 하면서 운명애(運命愛)(amor fati)를 주장하였다.


2) 통일사상에서 본 니체의 인간관(人間觀)


기독교의 극단적(極端的)인 내세주의(來世主義)에 의하여, 인간은 현실의 생활을 존중(尊重)할 수가 없게 되어서 약체화(弱體化)하였다고 니체는 생각하였으나, 인간의 본성(本性)을 회복(回復)하려고 고뇌(苦惱)한 그의 진격(眞擊)한 노력은 그 나름대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할 것이다. 니체의 주장은 기독교에 대한 하나의 참소요, 경고였다. 즉 기독교가 그 본래의 정신(精神)에서 이탈(離脫)하고 있다고 니체는 생각하였다. 니체가 본 기독교의 하나님은 높은 곳에 앉아서 좋은 일을 한 사람에게는 사후(死後)의 부활(復活)을 약속하고, 나쁜 일을 한 사람에게는 벌(罰)을 준다는 심판의 신(神)이고, 피안(彼岸)的인 신(神)이었다. 그러나 니체가 비난한 것은 예수의 가르침 그 자체가 아니고 예수의 가르침을 피안주의(彼岸主義)로 변화시킨 바울이었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하나님은 현세(現世)를 부정하고 높은 곳에만 계시는 피안적인 신(神)만은 아니다. 신(神)의 창조목적은 사후(死後)의 세계에 있어서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었다. 그리고 지상에 천국이 실현되었을 때, 지상에서 천국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이 사후(死後)에 천상천국(天上天國)에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使命)도 본래는 지상천국(地上天國)의 실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울이 피안주의(彼岸主義)로 변질시켰다고 하는 니체의 주장에는 일리(一理)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태민족(猶太民族)의 불(不)신앙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구원(救援)은 영적(靈的)인 구원이 되었고 현세에 있어서의 인간은 항상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침입(侵入)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을 비난(非難)한 나머지 기독교 그 자체를 부정하고 신(神)의 죽음까지 선언(宣言)한 것은 잘못이었다.


다음은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에는 권력의지(權力意志)가 있다는 니체의 주장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한다. 창세기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스리라하는 축복(祝福)을 주셨다. 즉 신은 인간에게 주관성(主管性)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지배욕(주관욕) 그 자체는 신(神)으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본성의 하나이다. 이 지배(주관)의 위치는 통일사상에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의 하나인 주체격위(主體格位)에 해당한다. 그런데 주체격위의 항목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래의 주관(主管)은 사랑에 의한 주관이지 힘에 의한 주관은 아닌 것이다. 즉 주관성을 발휘(發揮)하는 전제조건으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하여 인격(人格)을 완성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기대위에서 참다운 주관성이 발휘되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그와 같은 기반을 무시(無視)하고 단지 권력의지(權力意志)만을 전면(前面)에 내세웠으니 거기에 니체의 또 하나의 잘못이 있다 하겠다.


니체는 기독교의 도덕(道德)이 강자(强者)를 부정하는 약자(弱者)의 도덕이라고 하였으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다운 주관성을 발휘(發揮)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참사랑을 가르쳤으며, 또 가르쳐야만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육신의 본능적 욕망을 통하여 작용하는 악(惡)의 힘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육신의 본능적(本能的) 욕망(欲望) 그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타락인간은 육신을 주관해야 할 영인체(靈人體)의 심령기준이 미완성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육신의 본능적 욕망에 따라 살면 악(사탄)의 힘에 지배(支配)되고 만다. 영인체의 심령기준이 높아져서 육신을 주관하게 될 때, 즉 생심(生心)이 육심(肉心)을 주관하게 될 때 비로소 육신의 움직임은 선(善)하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정신(精神), 사랑, 이성을 무시하고 육체(肉體), 본능(本能), 생명(生命)을 중시(重視)하라고 외쳤다. 이것은 인간의 영인체를 무시해 버린 것이다. 인간에게서 영인체를 무시할 경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동물적인 육신만이 남는다. 즉 니체는 인간을 동물의 격위에까지 격하(格下)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서 강대해지라고 하는 것은 맹수가 되라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신(神)이 창조하려고 한 참다운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인간을 본래의 모습으로 인도(引導)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지만 그 방법이 전혀 잘못되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로서 성상이 주체요 형상이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니체는 인간의 형상적인 면만을 중시(重視)하고 성상적인 면을 무시(無視)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기독교人들이, 예수님이 지상천국(地上天國)을 실현코자 오셨던 사실을 망각하고 지상의 생활을 자칫 경시(輕視)하려는 경향에 대해서 경고를 발한 점은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3) 야스퍼스


1)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에 있어서의 실존(實存)이란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깨달은 자아(自我)를 말한다. 그는 실존(實存)이란 결코 객관(客觀)이 될 수 없는 것이고, 내가 그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또 행동하는 근원(根源)이며…… 실존(實存)이란 자기자신에 관련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초월자(超越者)에 관계하는 것(그 무엇)이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키에르케고르와 같은 사고방식(思考方式)이다.


그는 초월자(Transzendenz) 또는 포괄자(包括者; Das Umgreifende)를 아직 만나지 아니한 실존 즉 본래적 존재를 찾아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실존을 가능적 실존(mogliche Existenz)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살고 있는 가능적(可能的) 실존(實存)이며, 그러한 상황에 대처해 가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나 야스퍼스는 죽음(Tod), 고뇌(苦惱)(Leiden), 투쟁(鬪爭; Kampf), 부채(負債; Schuld) 등 우리들이 넘을 수도 없고 변경(變更)할 수도 없는 상황이 존재(存在)한다'라고 지적하고 이것을 한계상황(限界狀況)(Grenzsituation)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영원(永遠)히 사는 것을 원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죽음은 자기의 존재의 부정이다. 또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고통, 질병, 노쇠, 기아 등의 고뇌가 있다. 또 인간이 살아있는 한 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자기라는 존재가 다른 사람을 배척한다고 하는 빚(負債)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계상황(限界狀況)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절망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 이 좌절(挫折)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결정된다. 한계상황을 도피하지 않고 좌절을 직시(直視)하며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그것을 수용(受容)할 때, 존재세계(世界存在)를 넘어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그 무엇)이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 때까지 무의미(無意味)한 것으로 생각되던 자연의 배후에, 역사의 배후에, 철학의 배후에, 예술의 배후에 초월자 즉 신(神)이 있어서 우리들을 포옹(抱擁)하고, 무엇인가를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홀연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 초월자는 직접적(直接的)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암호로써 나타난다. 초월자는 자연이나 역사, 철학이나 예술 등을 통하여 암호(暗號)로 나타나서 인간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그리고 한계 상황 속에서 좌절을 체험한 자가 그 암호를 풀 수가 있다. 이것을암호해독(暗號解讀)(Chiffredeutung)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다만 혼자서 초월자를 향하여 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참된 자기의 실존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을 만난 다음부터 인간은 타인과의 사귐(交際)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한다. 서로 대등(對等)한 입장에 서서 각자(各自)의 자립성(自立性)을 인정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삶이며, 타인과의 교제를 통하여 실존(實存)이 완성되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절(一切)의 목적의 의미에 최종적인 근거를 주는 철학의 목적, 즉 존재(存在)를 내적으로 각지(覺知, 지각)하고 사랑을 개명(開明)하며 평안을 완성한다는 목적은 사귐에 있어서만 비로소 달성되는 것이다."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며 사랑의 싸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야스퍼스의 인간관(人間觀)


야스퍼스는, 인간은 보통 초월자(超越者)를 발견하지 못한 가능적실존(可能的實存)이지만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초월자에 관계되는 실존(實存), 즉 본래의 자기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보통, 가능적 실존으로서 초월자로부터 떨어지게 되었는가? 또 왜 인간은 한계상황을 통과할 때에 초월자를 만나게 되는가?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는 한, 본래의 자기는 무엇인가, 또 어떻게 해야 본래의 자기를 회복(回復)하는가 하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창조목적을 완성하도록 지음받았다. 창조목적의 완성이란 삼대축복(三大祝福)의 완성, 즉 인격의 완성, 가정의 완성, 주관성의 완성을 뜻한다. 그런데 인간시조(人間始祖)인 아담과 해와는 성장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인격이 미완성한 채 타락했으며 비원리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부부(夫婦)가 되어 가지고 죄(罪)의 자녀를 번식(繁殖)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전인류(全人類)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비원리적인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는 것이, 본래적인 자기를 회복하는 길이다.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창조목적을 실현할 때 나타나게 되어 있다. 야스퍼스는 키에르케고르와 마찬가지로 자기자신(自己自身)에 관계하면서 초월자에 관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실존이라고 했으나, 이것은 통일사상으로 볼 때 3대축복(三大祝福)중의 제1축복(第一祝福)인 인격완성만을 다룬 입장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통일사상이 말하는 인간본성의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통일체에 해당한다. 야스퍼스는 타인과의 사귐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이 사랑 역시 키에르케고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막연하다.


참된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온정(溫情)을 가지고 대상을 한없이 위해 주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으로서, 이 사랑이 가정을 통하여 4대상(四對象)을 향하는 사랑(부모(父母)에 대한 子女의 사랑, 부부(夫婦)의 사랑, 子女에 대한 부모(父母)의 사랑, 자녀 상호간의 사랑)으로서 분성적으로 나타난다. 이 4대상(四對象)에의 사랑을 기본으로 할 때 타인과의 교제에 있어서의 사랑이 원만해지게 된다. 야스퍼스는 실존(實存)의 사귐은 긴장(緊張)의 관계이고 사랑의 싸움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사랑의 본질은 기쁨이다. 따라서 본래의 사랑은 긴장이나 싸움으로 표현될 성질의 것이 결코 아니다.


다음의 문제는 왜 한계상황을 통과함으로써 인간이 초월자를 만날 수 있게 되는가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인간이 한계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직시(直視)하고 성실히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다. 그러나 한계상황에 직면(直面)하여 좌절을 성실하게 받아들인 사람 중에는, 니체와 같이 신(神)으로부터 더욱 멀어진 사람도 있고, 키에르케고르처럼 신(神)에게 더욱 가까워진 사람도 있다. 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야스퍼스의 철학에서는 명백하지 않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렸으며 악(惡)의 주체인 사탄의 주관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무조건(無條件)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한 속죄(贖罪)의 조건-탕감(蕩減)조건(條件)-을 세우고서만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야스퍼스의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의 절망과 좌절은 탕감조건에 해당하는 것이며 그 조건을 뜻 맞게 세움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앞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한계상황에 있어서 고통(苦痛)을 견디어 내면서도 救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마태 7:7)라고 한 것같이 자기중심을 버리고 절대적인 주체(하나님)를 찾으려고 하는 대상의식(對象意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自己)중심적(中心的)인 주체의식만을 가지고 있거나, 원념(怨念, 원한)이나 복수심을 품고 있는 한, 아무리 한계상황을 통과해도 신(神)을 만날 수는 없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좌절의 암호(暗號)를 해독함으로써 인간은 초월자를 만난다고 하였으나, 암호해독(暗號解讀)으로 알려진 신(神)은 상징적인 신(神)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것만으로는 신(神)의 참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신(神)의 창조목적과 인간타락(墮落)의 사실을 알고, 신앙생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3대축복(三大祝福)의 실현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심정(心情)을 체휼할 수가 있고 참다운 실존(본연의 자아(自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하이데거


1)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99~1976)는 인간을 현존재(現存在)(Dasein)라고 규정했으나 근대 철학이 말한 인간 처럼 세계를 향해 서있는 자아(自我)로 보지는 않았다. 그것(現存在)은 현재(現在) 거기에 있는 개개의 인간의 존재(Sein)를 의미한다. 현존재는 세계 속에 있으면서 다른 존재자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관심을 가지고 자기의 주변을 살피고 타인(他人)에게 마음을 쓰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現存在)의 이와 같은 근본적인 존재방식(存在方式)을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In-der-Welt-Sein)라고 하였다. 세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주사위처럼 세상 속에 던져져 있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이 지상에 태어나려고 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주사위처럼 이 세상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됨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狀態)를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또는 사실성(事實性)(Faktizitat)이라고 하였다.


인간은 보통 일상생활에 있어서, 주위의 의견이나 사정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 동안에 자기의 주체성을 상실(喪失)하게 된다. 이것이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이른바 속인(俗人)(Das Man)의 입장이다.19) 속인(俗人)은 일상생활에서 잡담으로 소일하거나 호기심(好奇心)에 사로잡혀서 애매함속에 안주하고 있다. 이것을 현존재(現存在)의 퇴락(頹落; Verfallen)이라고 한다.


이유도 없이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현존재는 불안(不安; Angst)속에 있으나 그 불안의 유래(由來)를 더듬어 보면 결국 죽음에의 불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불안속에서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어차피 죽음에의 존재(存在)(Sein zum Tode)임을 적극적(積極的)으로 인정하고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하고 살아갈 때, 본래의 자기를 지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자기자신을 던지게 된다. 즉 자신의 미래를 기획(企劃)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투기(투기(投企); Entwurf)라고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존재(現存在)의 성질을 실존성(實存性; Existenz)이라고 한다.


이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던지는 것일까. 그것이 양심의 소리이다. 양심의 소리(Ruf)란 퇴락(頹落)한 자기에서 본래의 자기로 돌아갈 것을 바라는 내적인 호소이다. 하이데거는 양심의 소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리는 틀림없이 세계속에서, 나와 함께 있는 타인(他人)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양심(良心)의 소리는 나의 속에서 그러면서도, 나를 넘은 곳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의 현존재(現存在)의 존재의 의미를 시간성(時間性; Zeitlichkeit) 에서 파악하기도 한다. 현존재(現存在)의 존재방식은 던진다는 면(앞으로 기획(企劃)한다는 면)에서 보면 자기(自己)에 앞서 있음(未來에 있음)이며 던져져 있다는 面(과거에 이미 던짐을 받았다는 면)에서 보면 이미 속에 있음(세계 속에 던져져 있음)이며 관심을 가지고 환경을 살피며 타인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面에서 보면 존재자(存在者)의 옆에 있음이다. 이들 세 가지 계기(契機)를 시간성에 비추어보면 각각 미래(未來; Zukunft), 기존(旣存)(과거(過去; Gewesenheit), 현재(現在; Gegenwart)에 해당한다.


인간은 세계에서 떠난, 고립(孤立)된 자기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인수(引受)하면서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자기를 구제하기 위하여, 미래의 가능성을 향하여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시간성(時間性)에서 본 인간관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하이데거의 인간관(人間觀)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이며, 본래의 자기를 상실한 속인(俗人)이며 그 특성은 불안(不安)이라 하였다. 그러나 왜 인간은 본래의 자기를 상실하였는가, 또 본래의 자기는 어떤 것인가를 그는 명백히 밝히지 않고 있다.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자신을 던진다고 하나 그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상(像)이 불분명(不分明)하면, 똑 바로 본래의 자기로 향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가 없다. 그는 양심(良心)의 소리가 인간에게 본래의 자기로 돌아오도록 인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인간이 양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이며, 이 상식적인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한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神)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결국 니체와 같이 본능적(本能的)인 생명에 따라 사느냐, 하이데거와 같이 양심(良心)에 따라 사느냐의 어느 한 쪽을 택할 수밖에 없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양심에 따라 사는 것만으로는 불충분(不充分)하다. 인간은 본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각자가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양심의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양심에 따라 살 때 그것이 본래의 자기를 지향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아무도 확언(確言)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 본심(本心)에 따라 살 때, 인간은 비로소 본래의 자기를 향하여 가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막연히 미래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미래를 향하여 결의(決意)할 때, 불안(不安)에서부터 구제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본래의 자기모습이 명백하지 않은데 어떻게 불안(不安)에서 구제될 수가 있을 것인가. 통일사상에서 보면 불안의 원인은 신(神)의 사랑에서 떠난 데에 있다. 따라서 인간은 신(神)께로 되돌아가서 신(神)의 심정(心情)을 체휼하여 심정적 존재가 될 때, 비로소 불안에서 해방되고 평안과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죽음도 결의(決意)된 죽음으로서 받아들일 때, 죽음에의 불안을 초월(超越)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을 해결했다고는 할 수 없다. 통일사상에서 보면 인간은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의 통일체, 즉 성상과 형상의 통일체이며, 육신을 토대로 하여 영인체가 성숙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이 지상의 육신생활을 통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완성하면 성숙된 영인체(靈人體)는 육신의 死後, 영계에서 영원히 산다. 인간은 죽음에의 존재(存在)가 아니고 영생(永生)의 존재(存在)이다. 따라서 육신의 죽음은 곤충의 탈피(脫皮)에 해당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죽음의 불안은 죽음의 의의(意義)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자기의 미완성을 의식적(意識的)으로나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 인간(현존재(現存在))이 시간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즉 인간은 과거(過去)를 인수받고 현재의 퇴락(頹落)에서 떠나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명백하지 않다. 통일원리(統一原理)에 의하면, 인간은 아담과 해와의 타락이래(墮落以來) 혈통적으로 원죄(原罪)를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상이 범한 유전죄(遺傳罪)나, 인류나 민족이 공통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연대죄(連帶罪)를 짊어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죄(罪)를 청산하기 위한 조건(條件, 탕감조건)을 세우면서 본래의 자기와 본래의 세계를 복귀하는 과업을 사명으로서 부여(附與)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과업은 인간 1대(一代)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자자손손(子子孫孫) 바톤을 계승하면서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과거의 조상들이 다하지 못하고 남겨놓은 탕감조건을 인수(引受)해서 현재의 내가 그것을 청산하고 또 미래의 자손에게 복귀(復歸)의 터전을 물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통일사상에서 바라본, 인간이 시간성을 가진다는 것에 대한 참된 의미이다.

 

(5) 사르트르


1)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신(神)의 실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출발했다. 하이데거는 신(神)이 없는 실존을 주장했지만 사르트르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신(神)을 부정하는 실존(實存)을 말하였다. 그는 이 사실을 실존(實存)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로써 표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인간은 우선 존재하고 세계 속에서 만나고, 세계 내에 별안간 모습을 나타내고 그 후에 정의(定義)되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實存主義者)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定義) 불가능한 것은, 인간이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후에 이르러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인간은 자신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간의 본성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그의 본성(本性)을 생각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구(道具)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그 제작자(製作者)에 의해서 그 용도(用途)나 목적, 즉 본질이 결정된다. 따라서 본질이 존재에 선행(先行)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고, 하나님의 관념(觀念)에 따라 인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본질이 존재(存在)에 선행(先行)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르트르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지 않다. 인간은 본질에서가 아니라 無에서 출현한 것이다.


다음에 그는 실존(實存)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無에서 출현한 우연적존재(偶然的存在)이며 누구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을 계획(計劃)하고, 자신을 선택(選擇)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주체성의 의미이다. 즉 공산당원(共産黨員)이 되거나 기독교도가 되거나 결혼을 하거나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이와 같은 실존(實存)의 근본적 성격을 불안(不安)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선택하나 그것은 동시에 각인(各人)은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전인류(全人類)를 선택한다"22)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전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을 뜻하며 여기에 우리들의 불안(不安)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안(不安)은 행동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행동의 조건(條件) 그 자체이며, 행동 그 자체의 일부라고 한다.


인간은 또 자유로운 존재이다.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서는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으며, 어떠한 일도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롭다는 것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일체의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무거운 짐이며, 인간은 자유로워지도록 저주받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만일 한편에 있어서 하나님이 존재(存在)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자기의 행위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가치나 명령을 눈앞에서 발견할 수가 없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들의 배후에도, 또 전방(前方)에도, 명백한 가치의 영역(領域)에 정당화를 위한 이유도, 핑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핑계도 없어 고독(孤獨)하다. 그것을 나는 인간이 자유의 刑에 처해져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인간이 주체성(主體性)이라고 하면 인간은 그 주체성을 발휘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받아야 할 대상이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존재에는 즉자존재(卽自存在)(etre-en-soi)〕와 대자존재(對自存在)(etre-pour-soi)가 있다. 즉자존재(卽自存在)는 그 자체로서 있는 만물이며, 대자존재(對自存在)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주체성을 발휘함에 있어서 즉자존재(卽自存在)(만물)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대자존재(對自存在)(인간)를 대상으로 할 때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주체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타인(他人)도 또한 주체성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고 있을 때, 그 인간존재(存在)를 대타존재(對他存在)'(etre-pour-autrui) 즉 다른 사람을 대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대타존재(對他存在)의 근본적구조(상호관계)는 視線을 보내는 者가 되거나 시선을 받는 者가 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나의 대상이거나 내가 다른 사람의 대상이거나 하는 관계이다.25) 즉 인간관계는 끊임없는 상극관계(相剋關係)가 되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존재는 타인(他人)을 초월하거나 혹은 타인(他人)에 의해 초월되거나 하는 이 딜레마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 의식개체(意識個體)의 상호간의 관계의 본질은 공동(共同) 존재(存在)(Mitsein)가 아니고, 상극(相剋; conflict)이다."


2) 통일사상에서 본 사르트르의 인간관(人間觀)


사르트르는 인간에 있어서 실존(實存)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고, 인간은 자신을 만든다고 하였다. 하이데거도 마찬가지로 인간은 미래를 향하여 투기(投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으나 그의 경우에 있어서의 양심(良心)의 소리는 막연하지만 인간을 본래의 자기에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경우에 있어서 본래의 자기라는 것은 완전히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은 신(神)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린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이다. 만일 사르트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 있어서 선악(善惡)의 기준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자기의 책임으로 결단했다면 그것만으로 합리화(合理化)되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사회는 윤리부재(倫理不在)의 사회가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사르트르는 또 인간은 주체성(主體性)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통일사상은 인간은 주체성인 동시에 대상성(對象性)이다라는 것, 즉 인간의 본성은 주체격위(主體格位)인 동시에 대상격위(對象格位)라는 것을 주장한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성이란 자유로이 자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말하며 또 다른 사람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이 말하는 주체성은 사랑으로써 대상을 주관하는 능력을 말한다. 참다운 주체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먼저 대상성을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먼저 대상격위에 서있으면서 대상의식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대상격위의 단계를 거쳐서 성장 또는 승진하여 드디어 주체격위에 서서 주체성(主體性)을 발휘하게 된다. 또한 사르트르에 의하면 인간 상호간의 관계는 주체성과 주체성의 상극의 관계 혹은 자유와 자유의 상극의 관계이다. 이것은 홉스의 만인(萬人)의 만인(萬人)에 대한 투쟁(鬪爭)에 통하는 사상으로서 분명히 잘못된 주체관이며 잘못된 자유관이다. 이러한 주체관이나 자유관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민주주의(民主主義)사회(社會)의 혼란을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은 주체성과 대상성의 양면(兩面)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에 그 양면(兩面)의 기능이 원만한 수수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 때에 비로소 평화의 세계가 실현되는 것이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보면 자유란 저주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원리(原理)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원리(原理)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규범(規範)인 것이다. 따라서 참된 자유는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인 동시에 규범 안에서의 자유이다. 규범을 떠난 자유는 실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放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