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頭翼)사상 요강 - 제1장 원상론(原相論)

훈독왕 | 20250731192246

통일(頭翼)사상 요강

 

제1장 원상론(原相論)

( Theory of the Original Image )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통일사상은 인류의 모든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인류를 영원히 구원하기 위해서 출현한 사상이다. 그런데 그러한 난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하여 정확히 또 충분히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관한 이론이 원상론이다. 여기서 원상(原相)이란 원인적 존재인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속성에는 꼴의 측면과 성질, 성품, 능력 등의 기능적 측면이 있다. 전자(前者)를 신상(신상)이라 하고 후자를 신성(神性)이라고 한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도 하나님의 속성을 여러가지로 표현해 왔다. 즉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지선(至善, 지고지선), 지미(至美), 지진(至眞), 정의(正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유일무이(唯一無二, 唯一神), 영원불변, 무소부재 등으로 하나님을 표현해 왔다. 통일사상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러한 성품은 하나님의 속성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만 파악해서는 현실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불가능한 것이다.


통일사상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신성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신성 외에 보다 더 중요한 속성이 있으니 그것이 신상(神相)이다. 통일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이 신상과 신성을 함께, 그리고 정확히 이해함으로써만 현실문제(인생문제, 사회문제, 역사문제, 세계문제 등)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게 된다.


통일사상에서 다루는 하나님의 신상이란 두 종류의 이성성상(性相, 形狀)과 양성(陽性) 음성(陰性))과 개별상(個別相)을 말하며 하나님의 신성(神性)이란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을 말하는 바, 본 원상론에서는 원상(原相)의 내용이라는 제목하에 신상과 신성(神性)의 하나하나의 내용을 설명하고, 원상(原相)의 구조(構造)라는 제목하에 神相중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一. 원상(原相)의 내용


원상의 내용이란 하나님의 속성(屬性) 하나하나의 내용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제목 하에 신상인 성상-형상, 양성-음성, 개별상 등과 신성(神性)인 심정, 로고스, 창조성 등의 각각의 내용을 상세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신상을 다루고 다음에 신성(神性)을 다룬다.

 

 1. 신상(神相)


신상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의 꼴의 측면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일정한 꼴 또는 꼴이 될 수 있는 가능성(可能性), 素材), 규정성(規定性)을 갖고 있다. 이것이 곧 신상이다. 이 신상에 성상과 형상, 양성과 음성의 두 종류의 이성성상과 개별상이 있는 바, 먼저 성상과 형상을 다루고자 한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은 본성상(本性相), 본형상(本形狀)이라고도 하며 이 양자를 합하여 이성성상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만물(萬物, 자연)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지만, 이 관계를 원인(原因)과 결과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성상(本性相)은 피조물의 무형성(無形的), 기능성(機能的) 측면의 근본원인이며 본형상(本形狀)은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 물질적측면(質料的側面)의 근본원인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로서 서로 닮고 있기 때문에 본성상(本性相)은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며 본형상(本形狀)은 인간의 몸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양자는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속성이 아니며, 서로 상대적 및 상보적(相補的)인 관계에서 중화(中和, 調和)를 이루어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원리강론에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로 계신다(원리강론, 1987, p. 35)고 한 것은 이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해서 신상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중화를 이룬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본체론(本體論)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신상관(神相觀)은 유심론(唯心論)도 유물론(唯物論)도 아니며, 유일론(唯一論) 또는 통일론(統一論)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심론(唯心論)은 본성상만이 우주의 근본이라고 보는 입장에 해당하며, 유물론(唯物論)은 본형상만이 우주의 실체라고 보는 입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각각의 내용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성상(性相)(本性相)

 

    ① 본성상(本性相)과 피조물(被造物)


하나님의 성상(性相)(本性相)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의 마음에 해당하며(따라서 성상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무형적, 기능적측면의 궁극적 원인이 된다. 즉 인간의 마음, 동물의 본능(本能), 식물의 생명, 광물의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작용성의 근본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시간, 공간의 세계에 전개된 것이 광물의 물리화학적 작용성이며, 식물의 생명, 동물의 본능, 인간의 마음이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성상(性相, 마음)이 광물과 같은 무기물에도 비록 극히 낮은 차원에 있어서나마 깃들어 있음을 뜻하며, 식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마음이 생명의 형태를 취한, 보다 더 높은 심적기능(心的機能)으로서 나타나며(최근 인간의 마음에 반응하는 심적 작용이, 식물에도 있음이 실험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동물의 단계에 있어서는 육심(肉心, 본능(本能))의 형태를 취한 한층 더 높은 심적기능으로 나타남을 뜻한다.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동물에도 인간에서와 똑같은 지정의(知情意)의 기능 즉 의식(意識)이 있음이 밝혀졌다(다만 동물이 인간과 다른 점은 동물에는 인간에서와 같은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없다는 점이다).


    ② 본성상(本性相)의 內部構造)


그런데 하나님의 성상(本性相)은 다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 바, 내적성상 및 내적형상이 그것이다. 내적성상은 기능적부분(따라서 주체적부분)을 말하며 내적형상은 대상적부분(對象的部分)을 말한다. 하나님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인간의 마음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i) 내적성상(內的性相)


 기능적부분이라 함은 지-정-의의 기능을 말하는 바, 이중에서 지적기능(知的機能)은 인식(認識)의 능력으로서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 등의 능력을 말하며 정적기능(情的機能)은 정감성(情感性) 즉 희로애락 등의 감정을 느끼는 능력이며, 의적기능(意的機能)은 의욕성 즉 욕구하거나 결심, 결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러한 기능은 내적형상(內的形狀)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내적성상(內的性相)은 내적형상(內的形狀)에 대하여 주체적(主體的) 部分이 되고 있다. 지적기능에 있어서 감성이란 오관(五官)에 비치는 대로 아는 능력, 즉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뜻하며, 오성(悟性)이란 논리적으로 원인(原因)이나 이유(理由)를 따져서 아는 능력이다. 이성(理性)이란 보편적 진리를 구하는 능력 또는 개념화(槪念化)의 능력을 말한다.

 

이 3기능(機能)을 뉴턴이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함에 있어서 먼저 사과가 落下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인식(認識)하였으며, 다음에 사과가 落下하는 원인을 생각하여 大地와 사과가 서로 引力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으며, 다시 그후에 여러 가지 실험 관찰 등의 연구를 통해서, 지구나 사과뿐 아니라 우주내의 質量을 갖고 있는 모든 物體가 인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경우 처음 단계의 인식이 감성적인식(感性的認識)이며, 두번째 단계의 인식이 오성적인식(悟性的認識)이며, 세번째 단계의 인식이 이성적인식(理性的認識) 즉 보편적 인식인 것이다.


      ii) 내적형상(內的形狀)


 이것은 본성상(本性相) 內의 대상적 부분을 말하며, 몇 개의 꼴의 요소로써 이루어져 있다. 그 꼴의 요소중 주요한 것은 관념(觀念), 개념(槪念), 원칙(原則), 수리(數理) 등이다.


ㄱ) 관념(觀念)...... 관념(觀念)은 마음(성상(性相))속에 있는 피조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표상(表象), 즉 영상(映像)을 말한다. 인간들은 경험을 통해서 객관세계의 사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을 영상으로서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바, 이 영상(映像)이 바로 관념(觀念)이다. 인간의 경우는 경험(선험적)을 통해서 관념을 얻지만 하나님은 절대자(絶對者)이시기 때문에 본래부터 무수한 관념(觀念)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ㄴ) 개념(槪念)...... 개념(槪念)은 추상적인 영상을 말하며, 일군(一群, 한 무리)의 관념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요소가 영상화(映像化)한 것을 말한다. 예컨대 개, 닭, 소, 말, 돼지 등의 관념에 있어서 공통적인 요소는 감각(感覺)을 가지고 운동하는 성질인 바, 이것을 영상화시키면 동물(動物)이라는 추상적인 꼴을 얻게 된다. 이것이 개념(槪念)이다. 이 개념에는 종개념(種槪念), 유개념(類槪念)이 있다.


ㄷ) 원칙(原則)...... 原則은 피조세계의 자연법칙(예:물리학적 법칙, 화학적 법칙 등) 및 규범법칙(當爲의 법칙) 또는 가치법칙(價値法則)의 근본원인이 되는 법칙으로서, 수많은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은 이 원칙이 각각 자연현상(물리적 및 화학적현상)과 인간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형태인 것이다. 마치 식물(예:나무)에 있어서 한 알의 씨앗이 발아하여 줄기가 되고 수많은 잎(葉)들이 무성하게 되듯이, 하나의 원칙에서 수많은 법칙(法則, 자연법칙, 규범법칙)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본다.


ㄹ) 수리(數理)...... 數理는 수적원리(數的原理)라는 뜻으로 자연계의 수적(數的) 현상(現象)의 궁극적 원인을 말한다. 즉 내적형상속에는 수적현상의 근원이 되는 무수한 數, 수치(數値), 계산법(計算法)이 관념으로서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數理이다. 피타고라스(Pythagoras)가 만물(萬物, 자연)의 근본(根本)은 數이다라고 말할 때의 數의 개념(槪念), 또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대성에 공헌한 영국의 물리학자 디락(P. Dirac, 1902- )이 하나님은 고도의 수학자(數學者)이며, 우주를 구성할 때 극히 고급한 수학을 사용했다'2)라고 했을 때의 數의 개념은 모두 통일사상의 數理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 내적형상(內的形狀)의 원리적(原理的) 및 성서적(聖書的) 근거(根據) 다음은 以上의 내적형상에 관한 이론이 통일원리 및 성서의 어디에 그 근거가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ㄱ) 내적형상(內的形狀)...... 따라서 내성(內性, 성상(性相))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반드시 그 어떠한 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닮아난 그 외형(外形)이 눈에 보이는 그 어떠한 꼴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전자(前者)를 성상(性相)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형상(形狀))이라 한다(원리강론,1987.p. 33). 이것은 눈에 보이는 꼴 이전에 성상(性相)속에 이미 꼴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 성상(性相)속의 꼴이 바로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

 

ㄴ) 관념(觀念)?개념(槪念)......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男子와 女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하나님이 6일간에 걸쳐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매일(每日)의 창조를 마치시고는 그대로 된지라(창세기 1:7, 9, 11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4, 10, 12, 18, 21, 25절)고 하셨는데 이것은 마음속에 지녔던 관념(觀念), 개념(槪念)대로 피조물이 닮아 났음을 뜻한다.


ㄷ) 원칙(原則)(原理)... ... 하나님은 원리(原理)에 의해서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고 그 원칙에 따라서 攝理를 하심(원리강론, 1987, p. 108), 하나님은 원리(原理)의 주관자로 계시다(同上 p. 64), 원리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同上 p. 103), 하나님은 원리(原理)로써 창조된 인간을 사랑으로 주관하셔야 하므로(同上 p. 92)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원칙(원리)을 세운 후,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ㄹ) 수리(數理)...... 피조세계(被造世界)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이 수리적인 원칙에 의해서 실체적으로 전개된 것이다(同上 p. 62). 하나님은 수리성(數理性)을 갖고 계시다(同上), 하나님은 數理的으로도 존재하시는 분이시다(同上 p. 376)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내적형상(內的形狀)을 이루고 있는 꼴의 요소들은 모두 統一原理(원리강론)와 聖書에 그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以上은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內의 기능적부분(내적性相)과 대상적부분(對象的部分, 내적형상(內的形狀))을 인간의 마음에 비유해서 설명한 것이다. 본성상을 이와 같이 상세히 다루는 것은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이다. 예컨대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그것이 심정(心情)(후술(後述))을 터로 하고 작용할 때, 사랑을 터로 하는 眞?美?선(善)의 가치관이 성립되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지(知) 정(情) 의(意)의 대상적부분(對象的部分)인 동시에 본형상(後述)과 더불어 피조물의 유형적부분(有形的部分)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실과, 지(知) 정(情) 의(意)(主體部分)에 대응하는 가치가 眞 美 선(善)이라는 사실에서, 현실생활에 있어서 의식주(衣食住)의 물질적생활보다도 眞 美 선(善)의 가치생활을 우선해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된다. 이것도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

 

2) 형상(形狀); 본형상(本形狀))


다음은 하나님의 형상(本形狀)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① 본형상(本形狀)과 피조물(被造物)

 

하나님의 형상(本形狀)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의 몸에 해당하며,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인 要素(측면)의 근본원인이 된다. 즉 인간의 몸(肉體), 동물의 肉, 식물의 조직세포(組織細胞), 광물의 分子 原子 등의 궁극적 원인인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시간 공간의 세계에 展開된 것이 광물의 분자 원자이며, 식물의 조직세포이며, 동물의 肉이며, 인간의 몸인 것이다.


이와 같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有形的要素)의 근본원인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의 근본원인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하나는 소재(素材; 質料)적 요소(要素)요, 또 하나는 무한(無限)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無限應形性)이다(만물의 형태 자체의 근본원인은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


여기서 무한(無限)한 형태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無限應形性)을 비유적으로 예를 든다면 물(水)과 같다 하겠다. 물 자체는 다른 만물과 달라서 일정(一定)한 형태가 없다. 그러나 용기(容器)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를 나타낸다. 삼각형(三角形) 용기에서는 삼각형(三角形)으로, 사각형 용기에서는 사각형으로, 원형의 용기에서는 원형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물이 무형(無形)인 것은 실은 어떠한 용기의 형태에도 응변(應變)하는 무한(無限)한 응형성(應形性)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이 무형(無形)인 것은 실은 무한형(無限形)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형상(本形狀)도 그것 자체는 일정(一定)한 형태가 없지만, 어떠한 형태의 영상에도 응변(應變)할 수 있는 응형성(應形性) 즉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을 소재적(素材的) 요소외(要素外)에 또한 갖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피조물의 유형적요소(有形的要素)의 근본원인에는 소재적요소와 무한응형성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形狀)(本形狀)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경우, 창작(創作); 창조(創造))이란 마음이 구상한 무형의 꼴의 틀에 일치(一致)하도록 가시적(可視的)인 소재(조각의 경우:石膏 또는 大理石)를 변형시키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창작이란, 구상한 꼴의 틀(形式)에다가 소재(내용)를 맞추어 내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본성상내의 내적형상(각종 觀念)이 틀(용기) 또는 주형(鑄型)이 되어서, 이 틀에 무한응형성을 지닌 소재적요소를 부어 넣은 후 일정하고도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하는 작업을 창조(創造)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본형상(本形狀)과 과학(科學)


본형상(本形狀)에 있어서,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 측면의 두 근본원인중의 하나인 소재적 요소는 요컨대 과학의 대상인 만물(물질)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소재적요소와 과학자는 어떠한 관계에 있는 것일까?

 

오늘의 과학은 물질의 근본원인을 소립자(素粒子)의 전단계(前段階)인 에너지(物理的에너지)라고 보고 있으며, 그 에너지는 파동성(波動性)과 입자성(粒子性)을 띠었다고 한다. 그러나 과학은 결과의 세계, 현상의 세계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그 원인이 에너지라 하더라도 궁극적인 제일원인(第一原因)에는 과학이 도달할 수 없다. 본원상론(本原相論)은 그 궁극적 원인을 바로 본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본형상을 과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에너지의 前단계 즉 前단계에너지'(Prior-stage Energy) 또는 간단하게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Pre-Energy)3)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③ 본형상(本形狀)과 힘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는 본형상(本形狀; Pre-Energy)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후술(後述))에 의하여 먼저 두 가지의 힘(에너지)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 하나는 형성(形成)에너지(Forming-Energy)요, 다른 하나는 작용(作用)에너지(Acting- Energy)이다.

 

전자(前者)(形成에너지)는 곧바로 입자(粒子)로 化하여 현실적인 물질적 소재가 되어서 만물(피조물)을 형성하고, 후자(後者)(作用에너지)는 만물에 작용하여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에 주고 받는 힘(例:求心力, 遠心力 등)을 일으킨다. 이것을 통일사상에서는 원력(原力; Prime-Force)이라고 부르며, 이 원력(原力)이 만물을 통해서 작용력으로 나타날 때 이 작용력을 만유원력(萬有原力; Universal Prime-Force)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본형상(本形狀)에서 수수작용(授受作用)에 의하여 형성(形成)에너지 및 작용(作用)에너지가 발생함에 있어서, 사랑의 근원인 심정(心情)(後述)이 수수작용의 터전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 두 에너지는, 단순한 물리적인 에너지만이 아니며, 물리적에너지와 사랑의 힘과의 복합물(複合物)인 것이다. 따라서 원력(原力)에도, 만유원력(萬有原力)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文鮮明 先生은 1975년 5월의 희망(希望)의 날 만찬(晩餐) 대강연회(大講演會)이후, 자주 만유원력(萬有原力)에도 사랑의 힘이 작용한다고 말씀하고 계심).

 

3)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이동성(異同性)


다음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 本質的으로 동질적(同質的)인가 이질적(異質的)인가, 즉 성상과 형상의 이동성(異同性)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앞에서 말한 성상과 형상의 이성성상論이, 일반 철학상의 본체론(本體論)으로 볼 때 어떠한 입장이 될 것인가, 즉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二性性相)論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또는 유물론(唯物論)인가 유심론(唯心論; 관념(觀念)論)인가. 여기의 일원론(一元論)이란 우주의 시원(始元)이 물질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물론(唯物論)이거나, 우주의 시원(始元)이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원론적(一元論的) 유심론(唯心論, 觀念論)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전자(前者)에 속하고 헤겔의 관념론은 후자(後者)에 속한다. 그리고 二元論은 물질과 정신이 각각 별개이면서 우주생성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사유(思惟; 精神)와 연장(延長; 물질)의 두 실체를 인정하는 데카르트(R. Descartes)의 유심이원론(物心二元論)이 그 예이다.


그러면 통일사상의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이성성상論은 一元論인가, 二元論인가, 즉 원상(原相)의 성상과 형상이 본래 동질적인 것인가 이질적인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만일 성상과 형상이 이질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이원적 존재(二元的 存在)가 되어 버린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성상(마음)과 형상(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이 이질적(異質的)인 두 요소인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인가를 알아보면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질적인 요소의 두 표현태(表現態)이다. 이것은 마치 수증기와 얼음(氷)이 물(水:H₂O)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인 것과 같다. 물은 물分子(H₂O)의 引力과 斥力이 균형을 이룰 때이며, 열을 가하여 척력이 우세해지면 기화(氣化)하여 수증기(水蒸氣)가 되고, 기온(氣溫)이 下降하여 빙점 이하로 떨어져서 引力이 우세해지면 얼음이 된다. 수증기나 얼음은 모두 물의 표현태, 즉 물분자의 引力과 斥力의 상호관계의 표현양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양자는 전혀 이질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이성성상도 하나님의 절대속성의, 즉 동질적요소의 두 가지 표현태(表現態)인 것이다. 절대속성이란 에너지的 心이요, 心的에너지이다. 에너지와 마음은 별개가 아니라 본래 하나이다. 이 절대속성이 창조과정에서 分化된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서의 성상(性相)과 하나님의 몸으로서의 형상(形狀)이다.


성상과 형상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성상은 심적요소(心的要素)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에너지的 요소도 갖고 있으며, 단지 심적요소(心的要素)가 에너지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또 형상은 에너지적 요소로 되어 있지만, 거기에는 심적요소도 갖춰져 있으며 에너지적 요소가 심적요소보다 많을 뿐이다. 그와 같이 성상과 형상은 전혀 이질적(異質的)인 것이 아니다. 양자 모두 공통적으로 心的요소와 에너지的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조세계(被造世界)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정신(마음)과 물질로서 서로 이질(異質)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역시 거기에도 공통된 점이 있다. 그것을 표시하는 例로서 마음에도 에너지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개구리 등에서 채취한, 신경이 달린 골격근(骨格筋; 신경근표본)에 대하여 신경(神經)에 전기적 자극을 주면 근육은 수축(收縮)한다. 한편 우리들은 마음으로써 손이나 발의 근육을 움직인다. 이것은 마음이 신경을 자극하여 근육을 움직이는 것이다. 즉 마음에도 물질적인 에너지(전기에너지)와 같은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면술(催眠術)로 타인의 몸, 예컨대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것도, 마음에 에너지가 있음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에너지에도 성상적요소가 깃들어 있다. 최근의 과학에 의하면, 物理的 眞空狀態에서 에너지가 진동(振動)하여 소립자(素粒子)가 형성되는데, 이 때의 에너지의 진동은 연속적이 아니고 단계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마치 음악에 음계(音階)가 있듯이 同에너지가 단계적으로 진동해서 그 결과 그 단계에 따라서 규격(規格)이 다른 소립자가 나타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마치 음악에 있어서 음계(音階)의 차가 마음에 의해서 나타나듯이 에너지의 배후에도 마음(성상)이 있어서 진동단계를 나타낸다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성상(性相) 속에도 형상적요소가 있고 형상(形狀)속에도 성상적요소가 있지만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과 형상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절대속성에서 성상과 형상의 차이가 생기고, 창조를 통하여 그 속성이 피조물이 되어서 피조세계에 나타날때 이질의 두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점에서 두 방향으로 두 개의 직선(直線)이 그어지는 것과 같다. 그 때 하나의 직선은 성상(精神)에 대응(對應)하고, 다른 직선은 형상(物質)에 대응하는 것이다(그림 1-1).

 

성서에는 피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질을 알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1:20). 피조물을 보면 마음(정신)과 육신, 본능과 肉, 생명과 세포?조직 등의 양면성(兩面性)이 있기 때문에 귀납적(歸納的)으로 볼 때, 절대원인자인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이성성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있어서 이성성상은 실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원리강론에서는 하나님은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의 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본체론(本體論)에서 볼 때는 統一論'5)이 되게 된다. 그리고 창조를 구상하기 전의, 절대속성 그 자체만을 표현할 때의 본체론은 유일론(唯一論)'6)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 C.)에 의하면 실체(實體)는 형상(形相; eidos)과 질료(hyle)로 되어 있다. 형상(形相)이란 실체로 하여금 바로 그것이 되게 하는 본질을 말하며, 질료는 실체를 이루고 있는 소재를 말한다. 서양철학의 기본적인 개념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는 통일사상에서 말하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형상(形相)과 질료(質料)를 구극(究極)에까지 소급(遡及)해 올라가면 순수형상(純粹形相; 第一形相)과 제1질료(第一質料)에 도달한다. 여기의 순수형상이 곧 하나님이지만 그것은 질료가 없는 순수한 활동이며, 사유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순수한 思惟 또는 사유의 사유(노에시스, 노에세오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제1질료(第一質料)는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체론(本體論)은 이원론(二元論)이다. 또 제1질료(第一質料)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본체론은 하나님을 모든 존재의 창조주로 보고 있는 기독교의 신관(神觀)과도 다르다.


토마스 아퀴나스(T.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思惟)를 근거로 하여,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형상 또는 사유의 사유를 하나님으로 보았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 354~430)와 마찬가지로 그는 하나님이 無에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질료를 포함한 일체의 창조주시며 게다가 하나님에게는 질료적요소가 없으므로 그는 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無에서 물질이 생긴다는 교의(敎義)는, 우주가 에너지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이다.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는 하나님과 정신과 物體(물질)를 세 가지의 실체라고 하였다. 구극적(究極的)으로는 신이 유일(唯一)한 실체이나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정신과 물체는 각각 하나님에 의존하면서도 상호간에는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실체라고 하여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다. 그 결과, 정신과 물체는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 그 설명이 곤란(困難)하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을 이어받은 게엘링크스(A. Geulincx, 1624~1669)는, 서로 독립한 이질적인 정신과 신체 사이에 어떻게 해서 상호작용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양자 사이를 매개(媒介)한다고 설명했다. 즉 정신이나 신체의 한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을 계기(契機)로 하여 그에 대응하는 운동을 신(神)이 다른 한편에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을 기회원인론(機會原因論; occasionalism)7)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적(方便的)인 설명에 불과할 뿐 오늘날에는 아무도 이것을 거들떠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고 본 데카르트의 관점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서양사상이 포착한 형상(形相)과 질료(質料) 혹은 정신과 물질의 개념에는 설명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난점을 해결한 것이 통일사상의 성상과 형상의 개념, 즉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은 동일한 본질적 요소의 두 가지의 표현태(表現態)이다라는 이론이다. 이상으로 신상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신상인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양성(陽性)과 음성(陰性)


   1)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이성성상이다.


양성(陽性)과 음성(陰性)도 하나님의 이성성상(二性性相)이다. 그러나 같은 이성성상인 성상과 형상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성상과 형상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속성이지만 양성과 음성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속성이며, 직접적으로는 성상과 형상의 속성(屬性)이다. 즉 양성과 음성은 모두 성상(性相)의 속성인 동시에 형상(形狀)의 속성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성상(性相)(본성상(本性相))도 양성과 음성을 그 속성으로서 지니고 있고, 하나님의 형상(形狀)(본형상(本形狀))도 양성과 음성을 그 속성으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양성과 음성도 이성성상과 마찬가지로 중화(中和)를 이루고 있다. 원리강론에 하나님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중화적주체로 계시다(1987, p. 35)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뜻한다. 이 中和의 개념도 성상과 형상의 중화와 마찬가지로 조화(調和), 통일(統一)을 의미하며 창조가 구상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 하나가 창조에 있어서 양적속성(陽的屬性), 음적속성(陰的屬性)으로 분화(分化)되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철학인 역학(易學)의 태극생량의(太極生兩儀)(太極에서 음양이 생겨났다)는 맞는 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양성 음성의 개념은 易學의 양(陽) 음(陰)의 개념과 비슷하나 반드시 一致하지는 않는다. 동양적인 개념으로는 陽은 빛(光), 밝음(明)을 뜻하며 陰은 그늘(蔭), 어두움(暗)을 뜻한다. 이 기본적인 개념(槪念)이 확대적용되어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즉 陽은太陽 ,山, 天, 낮, 경(硬; 단단함), 열(熱), 高 등의 뜻으로, 그리고 陰은 이에 대응하여月, 谷, 地, 밤, 연(軟; 연함), 냉(冷), 저(低) 등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은 모두 성상 형상의 속성이기 때문에 피조세계에 있어서 성상 형상은 개체(個體) 또는 실체(實體)를 이루고 있으며, 양성-음성(陽性-陰性)은 이 실체(피조물)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다. 예컨대 태양과 밝음(明)에 있어서 태양(個體)은 성상 형상의 통일체(統一體); 實體)이며 태양빛의 밝음만이 陽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달(月) 그 자체는 개체(實體)이며 달의 반사광의 밝음의 희미함만이 陰인 것이다.


여기서 통일사상의 실체(實體)의 개념을 잠깐 다루고자 한다. 통일사상의 실체는 물론 통일원리의實體의 뜻에서 유래한다. 통일원리에는 실체기대(實體基臺), 실체헌제(實體獻祭), 실체성전(實體聖殿), 실체세계(實體世界), 실체상(實體相), 실체대상(實體對象), 실체노정(實體路程) 등 실체와 관련된 용어가 자주 쓰여지고 있는데, 여기의실체(實體)는 피조물, 개체, 육신을 쓴 인간, 물질적존재 등의 뜻을 지닌 용어이다.


그런데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성상 형상의 합성체(合性體; 통일체(統一體))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물에 있어서 성상과 형상은 각각 개체(個體)의 구성부분이 되고 있어서, 성상이나 형상 그 자체도 또한 실체(피조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마치 자동차도 제작물(제작물(製作物); 實體)이며, 자동차의 구성부분인 부품(예:타이어, 트랜스미션 등)도 제작물(실체)인 것과 같다. 따라서 인간의 성상과 형상도 통일사상에 있어서는 각각 실체의 개념에 포함된다.


그런데 원상(原相)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을 각각 본양성-본음성(本陽性-本陰性)이라고 한다(원리강론 1987, p. 35). 원상의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 및 본양성(本陽性)과 본음성(本陰性)을 닮아난 것이 인간의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서는 상술한 바와 같이 성상도 형상도 모두 실체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양성과 음성은 모두 실체로서의 성상-형상(또는 그 합성체(合性體)인 개체)의 속성이 되고 있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2와 같다.

 

따라서 원상에 있어서의 성상-형상과 양성-음성의 관계를 정확히 알려면, 인간에 있어서의 실체로서의 성상-형상과 그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의 관계를 알아보면 된다. 다음에 도표로써 인간의 경우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의 관계를 밝히면 그림 1-3과 같다.  


이 도표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성상(性相)(마음)의 지(知) 정(情) 의(意)의 기능에도 각각 그 속성으로서 양성(陽性)과 음성(陰性)이 있다. 예컨대 지적(知的)기능에는 명석(明晳), 판명(判明) 등의 양적측면과 모호(模糊), 혼동(混同) 등의 음적측면이 있고, 의적(意的)기능에도 적극적, 창조적 등의 양적측면과 소극적, 보수적 등의 음적측면이 있다. 그리고 형상(形狀)(육신)에 양적측면(隆起部, 突出部 등)과 음적측면(陷沒部, 孔穴部 등)이 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서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 도표에서 열거(例擧)한 것은 인간의 경우일 뿐이며, 하나님의 경우는 이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심정 중심한 원인적존재이시기 때문에 창조 전의 하나님의 성상(知情意)과 형상의 속성인 陽性-陰性은 다만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하며, 일단 창조가 개시되면 그 가능성으로서의 양성-음성이 표면화되어서,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에 조화있는 변화를 일으키고 형상에도 조화로운 변화를 가져 온다.

 

2)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와의 관계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陽性-陰性과 男子-女子의 관계이다. 동양에서는 고래(古來)로 남자를 양(陽), 여자를 음(陰)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통일사상(통일원리)에서는, 남자를 양성실체(陽性實體), 여자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말한다. 얼핏보면 동양의 男女觀과 통일사상의 남녀관(男女觀)이 같은 것 같으나 사실은 전연 다르다.


상기(上記)의 도표에서 알 수 있듯이 남녀의 성상과 형상이 다 함께 양성-음성을 갖고 있으나, 성상에 한해서는 남자의 성상의 陽陰과 여자의 성상의 양음이 질적으로 다르다(후술(後述)). 이를테면 남자의 陽性-陰性은 남성적인 陽陰, 여자의 陽性-陰性은  여성적인 陽陰이라고 할 수 있다(후술(後述)). 이러한 양성과 음성을 가진 남자를, 양성을 지닌 성상(性相)-형상(形狀)의 통일체라고 하며, 이러한 양성과 음성을 지닌 여자를, 陰性을 지닌 성상-형상의 통일체라고 한다. 이것을 간단히 말해서, 남자를 양성의 실체, 여자를 음성의 실체라고 표현한다(원리강론 1987, p. 37).


여기서 특별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남자를 양성(陽性)의 실체(實體)라고 할 때의 양성과, 여자를 陰性의 실체라고 할 때의 음성이 상기(上記) 도표에서 밝혀진 양성-음성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성상에 있어서 男女間의 양성과 음성이 다르고, 형상(形狀)에 있어서 男女間의 양성-음성이 다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형상(形狀)(육신)에 있어서의 남녀간의 양성-음성의 차이를 설명한다. 형상 즉 몸에 있어서는 陽性인 융기부(隆起部)나 돌출부(突出部)도, 또 음성인 함몰부(陷沒部)나 공혈부(孔穴部)도, 남녀가 똑같이 갖고 있으나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남자는 突出部(陽性)가 하나 더 있고 여자는 孔穴部(陰性)가 하나 더 있다. 따라서 형상(形狀)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양성에도, 음성에도 모두 양적차이(量的差異)가 있음을 알게 된다. 즉 형상(形狀)에 있어서 남녀간의 양성-음성의 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이다.


그러면 성상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성상에 있어서의 남녀간의 陽性-陰性의 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가 아니라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量的으로는 도리어 男女間에 차이가 없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성상 즉 마음에 있어서 陽性인 명석(明晳)의 경우, 남녀가 다 함께 명석(明晳(陽))을 갖고 있으나 그 명석의 質이 남녀간에 차이가 있다. 남자의 명석은 포괄적(包括的)인 경우가 많고 여자의 명석은 축소지향적(縮小指向的인 )경우가 많다. 재치(才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 성상(性相)(마음)의 감정상의 슬픔(陰)이 과도(過度)할 경우, 남자의 슬픔은 비통(悲痛(억센 슬픔))으로 변하기 쉽고, 여자의 슬픔은 비애(悲哀(가냘픈 슬픔))로 변하기 쉽다. 성상의 의욕(意欲)에 있어서 적극성(陽)의 경우, 남자의 적극성은 상대방에게 경성감촉(硬性感觸)을 주기 쉽지만 여자의 적극성은 상대방에게 연성감촉(軟性感觸)을 주기 쉽다. 남녀간의 이러한 차이가 질적차이(質的差異)이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1-4와 같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마음)에 있어서는, 남녀간에 陽性에도 질적차이가 있고, 陰性에도 질적차이가 있다. 이것을 음악(聲樂)에 비유하면 고음(高音)에 男子(tenor)와 여자(soprano)의 차이가 있고, 저음(低音)에도 남자(bass)와 여자(alto)의 차이가 있는 것과 같다 하겠다. 이와 같이 성상(性相)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이 남녀간에 질적차이(質的差異)가 보일 때, 남자의 양성-음성을 통틀어서 남성적이라 하고, 여자의 양성-음성을 통틀어서 여성적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여기에 남성적(男性的)인 양성-음성과 여성적(女性的)인 양성-음성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여기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형상에 있어서는 남녀간의 차이가 양적차이(量的差異)이기 때문에, 즉 남자는 양성이 量的으로 더 많고 여자는 陰性이 量的으로 더 많기 때문에, 남자를 陽性의 실체로 여자를 음성의 실체로 보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성상(性相)에 있어서는 남녀의 차이가 질적차이일 뿐, 남녀가 量的으로는 똑같이 陽-陰을 갖고 있는데 왜 남자를 양성의 실체, 여자를 음성의 실체라고 하느냐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男女間의 陽的 및 陰的 차이가 量的이건 質的이건 간에, 양성과 음성의 관계는 주체(主體)와 대상(對象)의 관계(후술(後述))이기 때문이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적극성(積極性)과 소극성(消極性)의 관계요, 능동성(能動性)과 피동성(被動性)의 관계요, 외향성과 내향성의 관계이다. 그런데 상술한 성상(性相)(지(知) 정(情) 의(意))의 속성인 陽陰의 남녀간의 질적차이를 살펴볼 때, 그 질적차이에 있어서도 남성의 陽과 여성의 陽의 관계 및 남성의 陰과 여성의 陰의 관계가 모두 주체와 대상의 관계임을 알게된다.


즉 상기한 例로 볼 때, 지적기능(知的機能)인 陽에 있어서 남성의 명석의 포괄성(包括性)과 여성의 축소지향성(縮小指向性)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며, 정적기능(情的機能)인 陰에 있어서 남성의 悲痛(억센 슬픔)과 여성의 悲哀(가냘픈 슬픔)의 관계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또 의적기능(意的기능(機能))의 陽에 있어서 남성의 적극성(積極性)의 경성(硬性)과 여성의 적극성(積極性)의 연성(軟性)의 관계도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다. 이같은 남녀간의 陽과 陰의 질적차이는 양적차이(量的差異)때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양과 음의 관계임을 뜻한다. 이상으로 男子을 양성실체(陽性實體), 女子를 음성실체(陰性實體)라고 부르는 이유를 밝혔다.

 

3) 성상(性相) 형상(形狀)의 속성으로서의 양성-음성과 현실문제의 해결


이상에서 양성-음성은 성상 형상의 속성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이 사실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것이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의 현실문제란 남녀문제를 말한다. 남녀간의 성도덕(性道德)의 퇴폐문제(頹廢問題), 부부(夫婦)間의 불화문제, 가정파탄의 문제 등이 그것이다.


양성-음성이 성상-형상의 속성이라는 말은, 성상(性相)-형상(形狀)과 陽性-陰性의 관계가 실체와 속성과의 관계임을 뜻하는 것이다. 실체와 속성에 있어서 선차적(先次的)으로 중요한 것은 실체이다. 속성이 依據하는 근거가 실체이기 때문이다. 실체없는 속성은 무의미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상-형상은 양성-음성이 의거(依據)하는 근거로서의 실체이며, 이 성상-형상이 없는 양성-음성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인간에 있어서의 성상-형상이란, 현실적으로는 성상-형상의 통일을 말하는 것으로서 마음과 몸의 통일, 생심(生心)과 肉心의 통일을 말하며, 인격(人格)의 완성을 뜻한다.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 양성과 음성의 문제는 현실적으로 볼 때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뜻한다. 여기서 인격(人格)의 완성(完成)과 男女間의 結合과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즉 남녀의 결혼에 있어서, 인격의 완성이라는 조건이 왜 필요한가 하는 문제이다. 陽性-陰性이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이다라는 命題에 따른다면 남녀는 결혼하기 전에 먼저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통일원리(統一原理)의 삼대축복(個性完成, 家庭完成, 主管性完成)에 있어서 개성완성(人格完成)이 가정완성(부부의 결합)보다 앞에 놓인 것은, 그 근거가 바로 이 陽性-陰性은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이다라는 명제에 있었던 것이며, 대학(大學)의 8조목(條目)中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平천하에 있어서 수신을 제가보다 앞에 놓은 것도, 大學의 저자가 무의식중에 이 명제(命題)를 감지했기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남녀관계에 관련된 각종 사회문제(性道德의 퇴폐, 가정불화, 이혼, 가정파탄, 부녀자 가출, 부녀자 인신매매 등)가 속출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두 가정완성전에 개성완성이 안되었기 때문이요, 齊家전에 修身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그 해결이 가장 어려운 현실문제의 하나인 남녀문제(男女問題)는 가정완성(家庭完成)전에 즉 결혼전에, 먼저 남녀가 함께 인격을 완성(個體完成)함으로써, 또는 제가(齊家)하기 전에 먼저 수신(修身)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陽性-陰性이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속성이다라는 명제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상으로 원상(原相)中의 양성-음성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또 하나의 꼴로서의 속성(屬性)인 개별상(個別相)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개별상(個別相)

 

1) 개별상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말한 성상(性相)-형상(形狀) 및 陽性-陰性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으로서, 이 두 종류의 상대적 속성은 모두 피조세계에 전개되어서 보편적으로 모든 개체속에 일일이 나타나고 있다. 성경(聖經)에 창세로부터 그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永遠)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신상)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로마서 1:20)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 사실을 두고 한 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만물이 모두 보편적으로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보편상(普遍相)이라고 한다.

 

한편 만물은 개체마다 독특한 성질을 또한 지니고 있다. 광물, 식물, 동물 등의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천체(天體)도 항성이거나 유성이거나 모두 특성을 갖고 있으며, 특히 인간은 각개인(每個人)마다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체격(體格), 체질(體質), 용모(容貌), 성격(性格), 기질(氣質) 등이 개인마다 다르다.

 

만물과 인간의 개별적(個別的)인, 이와같은 특성의 원인의 소재는 하나님의 본성상(本性相)의 내부, 특히 내적형상의 내부인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형상의 내부에 있는 이같은 개별적 특성의 원인을 개별상(個別相)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속성(屬性)속에 있는 개별상이 피조물의 개체 또는 종류마다에 나타난 것을 피조물의 개별상이라 한다. 그리고 인간은 개인마다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인간의 개별상을 개인별(個人別) 個別相이라 하고, 만물은 종류에 따라서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만물의 개별상을 종류별(種類別) 개별상(個別相)이라고 한다.

 

2) 개별상(個別相)과 보편상(普遍相)

 

그런데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물의 개별상(個別相)과 인간의 개별상이 그 범위에 있어서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에 있어서의 개별상은 每 個人의 특성을 말하지만, 인간 이외의 만물(동물, 식물, 광물 등)의 개별상은 일정(一定)한 종류의 특성 즉 種差(특히 最下의 종차)를 말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 및 하나님의 子女로 지음받았고, 만물은 인간의 기쁨의 대상(對象)으로 지음받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피조물의 보편상과 개별상과의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개별상이 아무리 개체의 특성이라 하더라도, 보편상과 별개의 특성이 아니며 보편상 그 자체가 개별화된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얼굴(容貌)이 각각 다른 것은 얼굴이라고 하는 형상(形狀)(보편상)이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것이며, 인간의 개성이 각각 다른 것은 성격(性格), 기질(氣質)이라고 하는 성상(性相)(보편상)이 개별화되고 특수화된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에 있어서의 개별상이란 每 個人의 보편상이 개별화된 것이며, 이외의 피조물에 있어서는 매 종류의 보편상이 개별화된 것이다.

 

피조물에 있어서 이와 같이 보편상의 개별화가 개별상인 것은,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속에 있는, 피조물에 대한 개별화의 要因(개별상)이 하나님의 성상-형상 및 양성-음성을 개별화시키는 요인(要因)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보편상을 원보편상(原普遍相)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속에 있는 개별상을 원개별상(原個別相)이라고도 부른다. 그리하여 피조물의 보편상과 개별상은 원보편상 및 원개별상에 각각 대응(對應)하고 있는 것이다.

 

3) 개별상(個別相)과 돌연변이(突然變異)

 

다음은 개별상(個別相)과 유전인자(遺傳因子)와의 관계에 관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즉 일반 생물의 종차(種差) 및 인간의 개성과 유전인자(遺傳因子)와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진화론(進化論)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생물의 종차(種差)로서의 개별상의 출현은 돌연변이(突然變異)에 의한 신형질(新形質)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인간의 개성으로서의 개별상의 출현은 父의 DNA(遺傳情報)와 母의 DNA의 단편(斷片)들의 다양한 혼합(混合), 또는 조합(組合)에 의한 유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일사상에서 볼 때, 진화론(進化論)은 창조과정의 현상론적(現象論的) 파악(把握)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생물(生物)에 있어서 돌연변이(突然變異)에 의한 신형질(新形質)의 출현이 실은 돌연변이의 방식을 취한 신개별상(新個別相) 의 창조인 것이며, 인간에 있어서 父母의 DNA의 혼합(조합(組合))에 의한 신형질의 출현도 실은 유전정보(遺傳情報; DNA)의 혼합(조합(組合))의 방식을 통한 인간의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물이나 인간의 신개별상(新個別相)의 창조란,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에 있는 일정한 원개별상을 이에 대응하는 피조물(被造物)(생물과 인간)에게 신개별상(新個別相)으로서 부여(賦與)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4) 개별상(個別相)과 환경

 

다음으로 개별상과 환경과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개별상을 지닌 개체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환경과의 사이에 부단한 수수관계(授受關係)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즉 개별상을 지닌 개체는 환경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변화하면서 성장, 발전한다. 이것은 수수작용의 결과로서 반드시 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 변화체)가 형성된다는 수수법(授受法)의 원칙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한 개체의 특성(個別相)은 원칙적으로 선천적(先天的)인 것이지만, 그 개별상의 일부는 환경요인에 의해 변화되어서 마치 후천적(後天的)으로 형성된 특성인 것처럼 느껴진다(예:일란성쌍생아(一卵性雙生兒)의 경우). 그러나 동일한 환경요인에 의해서 나타나는 특성에도 개인별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수수작용의 방식)에도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이 개인차는 바로 개별상에 기인하는 개인차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개별상의 일부가 변형되어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특성처럼 나타난 것을 개별변상(個別變相; Individual Changed Image)이라고 한다.

 

5) 인간개성의 존귀성

 

끝으로 인간의 개성의 존귀성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무릇 피조물의 특성은 그것이 하나님의 속성(屬性)중의 개별상(原個別相)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모두 귀한 것이지만 특히 인간의 개성은 더욱 존엄하고 신성하고 귀중한 것이다. 인간은 만물에 대한 주관주(主管主)인 동시에 영인체(靈人體)와 육신으로 구성된 이중체(二重體)이며 육신의 사후에도 영인체가 영생(永生)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은 지상에서나 천상에서 그 개성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實踐)하면서 창조이상을 실현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연의 개성은 그만큼 존귀하고 신성한 것이다. 흔히 인도주의(人道主義)가 인간의 인격이나 개성의 존귀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한 주장은 개인의 특성의 신래성(神來性)이 인정되지 않는 한, 인간을 동물시하는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관을 극복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개별상(原個別相)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現實問題; 인간의 개성(個性)이 왜 존중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以上으로 신상(성상(性相)-형상(形狀), 陽性-陰性, 個別相)에 관한 설명 전부를 마친다. 다음은 신성(神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신성(神性)


하나님의 속성(屬性)(원상(原相))에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꼴의 측면뿐만 아니라 기능, 성질, 능력의 측면도 있다. 이것이 신성(神性)이다. 종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전지(全知), 전능(全能), 편재성(遍在性), 至선(善), 至眞, 至美, 공의(公義), 사랑, 창조주(創造主), 심판주(審判主), 로고스 등은 그대로가 신성(神性)에 관한 개념들이며 통일사상도 물론 이러한 개념(槪念)들을 신성(神性)의 표현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문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개념(槪念)들은 꼴(신상)의 측면을 함께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창조와 직접 관련된 내용을 포함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대로는 현실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통일사상은 현실문제 해결에 직접 관련되는 신성(神性)으로서 심정(心情), 로고스, 창조성(創造性)의 세 가지를 꼽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심정(心情)이 가장 중요하며, 이것은 이때까지 어느 종교도 다루지 않았던 신성(神性)이다. 다음에 이들의 신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떻게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1) 심정(心情)


1) 심정(心情)이란 무엇인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속성 특히 성상(性相)의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서,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이다. 심정의 이와 같은 개념(槪念)(뜻)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인간의 경우를 例로 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인간은 누구나 생래적(生來的; 태어나면서부터)으로 기쁨을 추구한다. 즉 기뻐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이것은 인간이 언제나 기쁨을 얻고자 하는 충동(衝動), 또는 기쁘고자 하는 충동(衝動)을 갖고 살고 있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까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참 기쁨, 영원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있음도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인간들이 대부분 기쁨을 금전이나 권력, 지위나 학식속에서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참된 기쁨, 영원한 기쁨은 사랑(참사랑)의 생활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사랑의 생활이란 남을 위해서 사는 생활, 애타적(愛他的)인 봉사생활, 즉 남에게 온정을 베풀어서 남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생활을 말한다.


2) 심정(心情)은 정적충동(情的衝動)이다.


여기서 정적(情的)인 충동(衝動)에 대해서 설명한다. 정적인 충동이란,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소원 또는 욕망을 뜻한다. 보통의 소원이나 욕망은 의지(意志)로써 억제할 수 있으나, 정적(情的)인 충동은 인간의 의지로써 억제할 수 없는 원망이요 욕망(欲望)이다.


우리들은 기쁘고자 하는 충동(욕망(欲望))이 이와 같이 억제하기 어려운 것임을 일상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돈을 벌려 하고, 지위를 얻으려 하고, 학식을 넓히고, 권력을 차지하려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어린 아이들이 무엇이든지 호기심(好奇心)을 가지고, 열심히 배우려고 하는 것도 기쁘고자 하는 충동때문이요, 심지어 범죄행위(犯罪행위)마저도 다만 방향이 그릇되었을 뿐, 그 동기는 역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인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욕망(欲望))은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욕망은 달성되어야만 充足이 된다. 대부분의 인간들에 있어서 기쁘고자 하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고 있는 것은,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짐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기쁨이 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그 기쁨의 근거(根據)가 하나님에 있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심정(心情)이시다.


하나님은 심정(心情)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지니고 있는 바, 이같은 하나님의 충동은 인간에 있어서의 충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억제(抑制)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인간은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이같은 하나님의 심정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墮落)하여 사랑은 상실(喪失)되었지만 기쁘고자 하는 충동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정적(情的)인 충동을 억제하기란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하나님에 있어서 이 기쁘고자 하는 정적인 충동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다. 즉 참 기쁨은 참사랑을 통해서만 얻어지기 때문에,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기쁘고자 하는 충동보다 더 강력한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충동은,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욕망(欲望)을 뜻하게 된다. 사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함은, 사랑의 대상을 갖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음을 또한 뜻한다.


이러한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기쁘고자 하는 충동이 촉발(觸發)된다. 따라서 사랑의 충동이 1차적인 것이요, 기쁨의 충동은 2차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쁨을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며, 다만 무조건적인 충동일 뿐이다. 그 사랑의 필연적(必然的)인 결과가 기쁨이다. 따라서 사랑과 기쁨은 표리(表裏; 겉과 속)관계에 있으며, 기쁘고자 하는 충동도 실은 사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표면화(表面化)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정(心情)은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정적(情的)인 충동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에는 반드시 그 사랑의 대상이 필요하다.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은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기 때문에, 그 사랑의 대상이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창조는 필연적(必然的), 불가피적(不可避的)이었으며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4) 우주(宇宙) 창조(創造)와 심정(心情)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되어, 사랑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直接的)인 사랑의 대상으로, 만물은 하나님의 간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던 것이다. 만물이 간접적인 대상이라 함은, 직접적으로는 만물이 인간의 사랑의 대상임을 뜻한다. 그리고 창조의 동기로 볼 때의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지만, 결과로 볼 때의 인간이나 만물은 하나님의 기쁨의 대상인 것이다.


이와 같이 심정(心情)이 동기가 된 우주 창조의 이론 즉 창조의 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창조설(創造說)이 참이냐, 생성설(生成說)이 참이냐의 문제)를 해결한 결과가 되었다. 즉 우주의 발생에 관한 종래의 창조설과 생성설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결과가 된 것이다. 그것은 생성설〔예:플로티노스의 유출설(流出說), 헤겔의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설(自己展開說), 가모브(Gamov)의 대폭발(Big Bang)설, 유교의 천생만물설(天生萬物說) 등〕로서는 현실의 죄악이나 혼란 등의 부정적 측면까지도 자연발생에 의한 것으로 다루어져서 해결할 길이 막혀 있었으나, 정확한 창조설(創造說)로서는 그러한 부정적 측면을 근본적으로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심정(心情)과 문화


다음은 심정(心情)이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위에서 말)이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또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심정과 문화의 관계에 관한 설명이다. 하나님의 성상(본성상(本性相))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으로 되어있는 바, 내적성상이 내적형상보다 더 내적이며 심정은 그 내적성상보다도 더 내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창조 본연의 인간의 성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이 인간의 지적활동(知的活動), 정적활동(情的活動),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됨을 뜻한다. 심정은 정적인 충동력으로서 이 충동력이 지적기능, 정적기능, 의적기능을 부단히 자극하여 나타나는 활동이 바로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활동(知的活動)에 의해서 철학, 과학을 위시한 여러 학문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정적활동(情的活動)에 의해서 회화(繪畵), 음악(音樂), 조각(彫刻), 건축(建築) 등의 예술분야가 발달하게 되고, 의적활동(意的活動)에 의해서 종교, 윤리, 도덕, 교육 등의 규범분야(規範分野; 當爲의 分野)가 발달하게 된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인간들로 구성되는 사회에 있어서는 지적,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원동력이 심정이요, 사랑이기 때문에 학문도 예술도 규범도 모두 심정이 그 동기가 되고 사랑의 실현이 그 목표가 된다.8) 그런데 학문분야, 예술분야, 규범분야의 총화(總和) 즉 인간의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성과의 총화가 바로 문화(文化, 문명(文明))인 것이다.


따라서 창조본연의 문화는 심정을 동기로 하여 사랑의 실현(實踐)을 목표로 하고 성립하며, 이러한 문화는 영원히 계속된다. 이러한 문화를 통일사상은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 또는 중화문화(中和文化)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간 조상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인류문화는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 비원리적(非原理的)인 문화로서, 흥망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성상의 핵심인 심정이 이기심(이기심(利己心))에 의해서 가려져 버렸기 때문이며, 따라서 심정(心情)의 충동력이 이기심을 위한 충동력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혼란(混亂)이 거듭되는 문화를 바로잡는 길은, 이기심을 추방하고 성상의 핵심의 자리에 심정의 충동력을 다시 활성화(活性化)시킴으로써, 전문화분야를 심정을 동기로 하고 사랑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문화영역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즉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를 창건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심정(心情)은 하나님의 성상의 핵심(核心)이라는 명제가, 오늘날의 위기(危機)에서 문화를 어떻게 구출할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6) 심정(心情)과 원력(原力)


끝으로 심정(心情)과 원력(原力)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주 만물은 일단 창조된 뒤에도 부단히 하나님으로부터 일정한 힘을 받고있다. 피조물(被造物)은 이 힘을 받아 가지고 개체간에도 힘을 주고 받는다. 따라서 전자(前者)는 종적(縱的)인 힘이요, 후자(後者)는 횡적(橫的)인 힘이다. 통일사상은 전자를 원력(原力)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만유원력(萬有原力)이라고 한다.9)


그런데 이 원력(原力)도 실은 원상내의 수수작용(授受作用), 즉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신생체(新生體)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상내의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형상내의 전에너지(Pre-Energy)와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된 새로운 힘이 원력(原力; Prime Force)이다. 이것이 만물에 작용하여 횡적(橫的)인 만유원력(萬有原力)(Universal Prime Force)으로 나타나면 만물(萬物, 자연) 상호간의 수수작용을 일으킨다. 따라서 만유원력(萬有原力)은 하나님의 원력의 연장인 것이다.


만유원력(萬有原力)이란, 물리학에서 말하는 만유인력(萬有引力)에 해당하는 개념(槪念)인 바, 만유원력이 심정(心情)의 충동력과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에 의해서 형성된 원력의 연장이란 말은, 우주내의 만물 상호간에 물리학적인 힘 뿐 아니라, 사랑의 힘도 작용하고 있음을 뜻한다.10) 따라서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인 것이다.


이리하여 심정(心情)과 원력(原力)과의 관계에 관한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됨을 알게 된다. 즉 인간은 남을 반드시 사랑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때에 따라서는 투쟁(폭력)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는가, 적을 사랑할 것인가, 타도(打倒)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이론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으로 심정(心情)에 관한 설명을 전부 마친다. 다음은 로고스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2) 로고스


1) 로고스란 무엇인가


로고스(Logos)란, 統一原理에 의하면 말씀 또는 이법(理法)을 뜻한다(원리강론, 1987, p. 222).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태초(太初)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 1:1~3)


통일사상에서 보면, 로고스를 말씀이라고 할 때의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고(思考), 구상(構想), 계획(計劃)을 뜻하며, 또 로고스를 이법(理法)이라고 할 때의 그 이법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의 이성은 본성상내의 내적성상의 지적기능(知的機能)에 속하는 이성을 뜻함은 물론이지만, 만물을 창조한 로고스의 일부인 이성은 인간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의 이성은 자유성을 지닌 지적능력(知的能力)인 동시에 개념화(槪念化)의 능력 또는 보편적 진리 추구의 능력이지만, 로고스內의 이성은 단순한 자유성, 사고력, 지적능력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로고스의 또 하나의 측면인 법칙은 자유성이나 목적성이 배제된 순수한 기능성(機械性), 필연성(必然性)만을 지닌 규칙을 뜻함은 물론이다. 즉 때와 장소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이 법칙이다. 마치 기계장치인 시계의 시침(時針)이나 분침(分針)이,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일치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이 법칙의 규칙성(規則性), 기능성(機械性)인 것이다.


2) 로고스는 이법(理法)이다.


이법(理法)이란, 이러한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을 뜻한다. 이리하여 여기서는 이러한 이법으로서의 로고스를 주로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이 로고스에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 의 해결의 기준을 찾아세우기 위해서이다. 그 현실문제란, 오늘날 사회의 대혼란(大混亂)의 원인이 되고 있는 가치관(價値觀)의 붕괴를 어떻게 수습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원리강론에는 로고스가 하나님의 대상인 동시에 이성성상을 지닌 것(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다(원리강론, 1966, p. 229. 同 1987, p. 222). 이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일종의 피조물이며 신생체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의 합성체(合性體)와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구상(構想)이기 때문에, 그리고 이 말씀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로고스 그 자체가 만물과 똑같은 피조물일 수는 없다. 실제의 피조물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은, 사고(思考)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즉 그것은 완성(完成)된 구상(構想)을 뜻하는 것이며, 마음(본성상(本性相))에 그려진 일종의 설계도인 것이다. 건물을 세울 때 먼저 그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듯이,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도 만물 하나 하나의 창조에 관한 구체적인 청사진(靑寫眞) 또는 계획안(計劃案)이 먼저 세워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로고스이다.


그런데 설계도는 비록 건물은 아닐지라도, 설계도 그 자체는 제작물(製作物) 즉 결과물임에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로고스도 구상(構想)이요 설계도인 이상 그것 역시 결과물이며, 따라서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被造物)인 것이다.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서 존재한다. 그러면 신생체로서의 로고스는 하나님의 무엇을 닮았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본성상(本性相)안의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적성상(內的性相)과 내적형상(內的形狀)이 일정한 목적을 중심하고 통일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에 있어서, 본성상과 본형상이 中和(통일)를 이룬 상태가 신상인 것과 같다. 그런데 로고스는 말씀인 동시에 이법(理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로고스를 이법(理法)으로만 이해할 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이 바로 이성과 법칙(法則)이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관계는 바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관계와 같다. 그런데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상호관계는 후술(後述)하는 바와 같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인 것이다.


3) 로고스는 이성과 법칙(法則)의 통일체(統一體)


이와 같은 이성(理性)과 법칙(法則)의 통일로서의 로고스에 의해서 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피조물에는 모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와 법칙적요소(法則的要素)가 통일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리하여 만물이 존재하거나 운동함에 있어서 반드시 이 양자가 통일적으로 작용한다. 단 저차원의 만물일수록 법칙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하고, 고차원의 만물 일수록 이성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작용한다.


그리하여 가장 低차원인 광물에는 법칙적요소만이 작용하고 이성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고, 가장 고차원(高차원)인 인간에는 이성적요소만이 작용하고 법칙적요소는 전연 없는 것 같지만, 양자의 모두에 이성적요소(理性的要素) 및 법칙(法則)的 요소(要素)가 함께 통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만물의 존재와 운동은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며, 목적성(目的性)과 기능성(機械性)의 통일인 것이다. 즉 필연성속에 자유성이 작용하고, 기계성속에 목적성이 작용한다. 필연(必然)과 자유의 관계가 종래에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인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그것은 마치 구속(拘束) 과 해방(解放)이 정반대의 개념인 것처럼, 필연과 자유도 정반대의 개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사상은 로고스의 개념(槪念)(이법(理法))에 관한 한, 이성과 법칙을 이율배반(二律背反)의 관계로 보지 않고 도리어 통일의 관계로 본다. 이것은 비유컨대 기차가 레일(rail) 위를 달리는 현상과 같다할 것이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법칙(法則))이며, 만일 그 레일을 벗어나면 기차 자체의 파괴뿐 아니라 인근(隣近)의 인명이나 건물에 피해를 준다. 기차는 반드시 레일 위만을 달려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차의 운행은 준법적인 것이며, 따라서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레일 위를 달린다 하더라도, 빨리 달리고 천천히 달리는 것은 기관차(기관사)의 자유이다. 따라서 기차의 운행은 전적으로 필연적(必然的)인 것 같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이다.


또 하나의 비유를 들어 보자. 교통신호를 지키는 자동차 운전자의 예가 그것이다. 운전자는 청신호 때에는 전진하고, 적신호 때에는 정지한다. 이것은 교통법규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필연성이다. 그러나 일단 청신호가 켜진 뒤에는 교통안전에 지장이 되지 않는 한 속도는 자유로이 조정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동차 운전도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이다.


이상(以上)으로 기차의 운행이나 자동차의 운전에 있어서 필연성과 자유성의 관계가 통일의 관계임을 밝혔는데, 로고스에 있어서의 이성과 법칙(法則)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통일의 관계이다. 이로써 로고스의 이성성상으로서의 이성(자유성)과 법칙(필연성)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아니라 통일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로고스가 이성(자유성)과 법칙(法則)(必然性)의 통일이기 때문에 로고스에 의해서 창조된 만물은 크게는 천체(天體)로부터 작게는 원자(原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외없이 이성(자유성)과 법칙(法則)(필연성)의 통일적 존재이다. 즉 만물은 반드시 그 내부(內部)에 이성과 법칙, 자유성과 필연성,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동하고 발전한다.


이 사실은 오늘날의 일부 과학자의 이론과도 일치한다. 예컨대 검류계(檢流計; 폴리그라프)의 부착실험에 의한 식물심리의 확인(Backster 效果)13)과 샤론(Geun E. Charon)博士의 복합상대론(複素相對論; Complex Relativity)에 있어서의 전자(電子), 광자(光子)內의 기억과 사고의 메카니즘의 확인14)등이 그것이다. 즉 식물에 마음이 있고, 전자에 사고(思考)의 메카니즘이 있다는 사실은 모든 피조물 속에 이성과 법칙(法則), 자유성과 필연성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4) 로고스 및 자유와 방종


다음은 로고스와 관련해서 자유와 방종의 참 뜻을 밝히고자 한다. 자유와 방종에 관한 바른 인식(認識)에 의해서 또 하나의 현실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의 이름 밑에 자행되는 갖가지의 질서파괴(秩序破壞) 행위와, 이에 따르는 사회혼란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자유와 방종(放縱)의 참 뜻이 밝혀져야 한다.


原理(원리강론)에는 원리를 벗어난 자유는 없으며(1987, p. 103), 책임없는 자유는 없으며(同上), 실적없는 자유는 없다(同上)라고 적혀 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자유의 조건은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의 세 가지가 된다. 여기서 원리를 벗어난다는 것은 原則 즉 법칙을 벗어난다는 뜻이며, '책임'이란 각자의 책임분담 완수를 뜻하는 동시에 창조목적의 완성을 의미하며, '실적'이란 창조목적을 완성하여(同上), '선의 결과를 가져옴'을 뜻한다(同上). 그런데 책임분담의 완수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선(善)의 결과를 가져옴은 모두 넓은 의미의 원리요, 인간이 따라야 하는 천도(天道)이며, 법칙(法則; 가치법칙, 규범법칙)이다.


따라서 자유에 관한 세 가지 요건 즉 '원리 안에 있을 것', '책임을 질 것', '실적을 올릴 것'등은 한마디로 '자유는 원리안에서의 자유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으로서, 참 자유는 결국 법칙성(法則性), 필연성(必然性)과의 통일에 있어서만 성립한다는 결론이 된다. 여기서 법칙이란, 자연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 있어서는 가치법칙(규범법칙)이다. 가치니 규범이니 하는 것은 질서 하에서만 성립된다. 규범을 무시하거나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는, 본연의 세계에서는 결코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엄격한 의미에서 선택(選擇)의 자유이며, 이 선택은 이성에 의한 선택이다. 따라서 자유는 이성에서 출발하여 실천으로 옮겨진다. 이때 자유를 실천하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것이 자유의지이며, 이 의지(意志)에 의해서 자유가 일단 실천되면 그 실천행위가 자유행동이 된다. 이것이 원리강론에 보이는 자유의지, 자유행동(同上 p.103) 등의 개념(槪念)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자유에 의한 선택이나, 자유의지나, 자유행동은 모두 자의적(恣意的)인 것이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원리 안에서 즉 법칙(價値法則)과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필연성과 통일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본래 자유는 이성의 자유이며, 이성은 법칙과의 통일하에서만 작용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연의 자유는 '이법(理法)' 즉 '로고스'안에서만 성립할 수 있으며, 로고스를 떠난 자유는 존립(存立)할 수 없다. 흔히 법칙은 자유를 구속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이것은 법칙과 자유의 원리적인 의미를 모르는 데서 오는 착각인 것이다. 본연의 법칙이나 자유는 모두 사랑의 실현을 위한 것이며, 사랑 안에서의 법칙이며 자유이다. 참사랑은 생명(生命)과 기쁨의 원천(源泉)이다. 따라서 본연의 세계에서는 기쁨 속에서 법칙을 따라서 자유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로고스가 심정(心情)을 터로 하고 형성(形成)되기 때문이다.


로고스를 떠난 자의적(恣意的) 사고(思考)나 자의적 행동은 사이비(似而非) 자유로서 이것이 바로 방종(放縱)이다. 따라서 자유와 방종은 그 뜻이 전연 다르다. 자유는 선(善)의 결과를 가져오는 건설적인 개념(槪念)이지만, 방종은 악(惡)의 결과를 가져오는 파괴적(破壞的)인 개념이다. 이와 같이 자유와 방종은 엄격히 구별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흔히 혼동되거나 착각되고 있다. 이것은 자유의 참 근거(根據)로서의 로고스에 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다. 로고스의 뜻을 바르게만 이해한다면 자유의 참 뜻을 알게 되고, 따라서 자유라는 이름하의 온갖 방종이 방지(防止)될 수 있으며, 마침내는 사회혼란의 수습도 가능해 질 것이다. 이것으로 로고스에 관한 이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5) 로고스 및 심정(心情)과 사랑


마지막으로 로고스와 심정 및 사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이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말씀, 구상(構想)인 동시에 이법(理法)이었다. 그런데 말씀(構想)과 이법이 별개의 것이 아니며, 말씀 속에 그 말씀의 일부로서 이법(理法)이 포함되어 있다. 마치 생물을 다루는 생물학 속에 그 일분과로서, 생물의 生理學(生理作用)의 學)이 포함되어 있는 것과 같다. 생물학에는 해부학(解剖學), 생화학(生化學), 생태학(生態學), 발생학(發生學), 분석학(分析學), 생리학(生理學) 등 여러 분과로 분류되지만 그 중의 一分科가 생리학인 것처럼,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무한대한 양과 종류를 내용으로 하는 말씀(構想)中의, 적은 일부분이 이법(理法)(로고스)으로서, 말씀중의 만물의 상호작용(相互作用) 또는 상호관계(相互關係)의 기준에 관한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말씀과 이법(理法)은 별개의 것이 결코 아닐 뿐 아니라, 말씀의 터전이 되고 있는 심정은 동시에 이법(理法), 로고스의 터전도 되는 것이다. 마치 유기체(有機體)의 생활현상의 연구가 생물학의 모든 분과의 공통항목인 것처럼,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구상과 이법의 공통기반이 되고 있다.


심정(心情)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었다. 이와 같은 심정이 창조에 있어서 구상과 이법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은, 피조물 전체의 구조(構造), 존재(存在), 변화(變化), 발전(發展) 등 모든 우주현상이 사랑의 충동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법(理法)도 자연법칙이건 가치법칙이건 간에, 그 배후에 사랑이 반드시 작용하고 있고, 또 작용해야 한다. 자연법칙은 일반적으로 물리화학적(物理化學的) 법칙(法則)으로만 이해되고 있는데 이것은 불완전한 이해이며, 비록 차원은 다를망정 거기에 반드시 사랑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상호간의 가치법칙(價値法則), 규범법칙(規範法則)에는 이 사랑이 더욱 더 현저하게 작용해야 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로고스 즉 이법의 해설에 있어서 이성과 법칙(法則), 따라서 자유성과 필연성에 관해서만 주로 다루었지만, 이법의 작용에 있어서는 이법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랑이 중요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도에 있어서 사랑은 이법을 능가하기조차 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는 이법(理法)만의 생활은 규율(規律) 속에서만 사는 병영(兵營)처럼 냉랭해지기 쉽고, 알맹이 없는 쭉정이처럼 시들기 쉬운 것이다. 따뜻한 사랑 속에 지켜지는 이법의 생활에서만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고, 봉접(蜂蝶; 벌과 나비) 이 군무(群舞; 무리지어 춤추는)하는 봄동산의 평화가 찾아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정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는 참된 방안(方案)이 무엇인가 하는,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基準)이 된다. 즉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로고스(이법(理法))의 이론은 가정에의 참된 평화 수립의 방안(方案)도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로고스에 관한 설명을 모두 마치고 다음은 창조성(創造性)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3) 창조성(創造性)


1) 창조성(創造性)이란 무엇인가


창조성은 일반적으로 새 것을 만드는 성질(性質)이라고 정의(定義)되고 있다. 통일원리에서도 창조성을 일반적인 뜻으로도 해석하고 있지만, 그보다는 창조의 능력(能力)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은 원리강론에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能力)과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와 같이 창조의 성질이나 창조의 능력(能力)으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확한 이해라 할 수 없다. 이미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하는 목적은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한 모든 이해(理解)가 정확하고 구체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창조성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창조에 관한 상식적인 이해만 가지고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특성(特性) 또는 요건(要件)이 밝혀질 필요가 있게 된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발적(偶發的)인 것이 아니며, 자연발생적인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억제불능(抑制不能)의 필연적 동기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명백한 합목적적인 의도(意圖)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창조가 이른바 심정(心情)을 동기(動機)로 한 창조심정동기설(心情動機說)로서 이 창조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 또는 수수작용(授受作用)(후술)이 반드시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구체적으로는 목적을 중심한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 정의(定義)하게 된다. 이것을 인간의 창조(新品目의 製造)의 경우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내적사위기대의 형성은 구상(構想)하는 것, 또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개발(따라서 청사진(靑寫眞)의 작성)을 뜻하며,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은 그 청사진에 따라서 인간(主體)이 기계와 원료(對象)를 적절히 사용(수수작용)해서, 청사진대로의 신제품(신생체(新生體))을 만들어 냄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屬性)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후술(後述))은 각각 성상과 형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있어서 내적사위기대의 형성은 상기(上記)한 목적중심의 로고스를 형성하는 것이며, 외적사위기대의 형성은 목적 중심한 성상(性相)(주체)과 형상(形狀)(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만물)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은 이와 같은 내용을 갖춘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 형성의 능력으로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로고스 형성에 이어서 신생체를 형성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창조성(創造性)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의 개념(槪念)을 이처럼 상세히 다루는 것은, 창조와 관련된 여러 가지의 현실적 문제(예컨대 공해문제(公害問題), 군비제한(軍備制限) 내지 철폐문제(撤廢問題), 과학과 예술의 방향성(方向性) 문제 등) 해결의 근본적 기준을 정립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2) 인간의 창조성(創造性)


다음은 인간의 창조성에 관하여 설명코자 한다. 인간에게도 새것을 만드는 능력(能力), 즉 창조성(創造性)이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성이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인간은 닮기의 법칙(法則)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성도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기로, 또는 이어받기로 되어 있었으나, 타락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불완전하게밖에 닮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사실상 인간의 창조성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창조성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성을 인간에게 부여(賦與)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부여하시고자 하였을까?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萬物, 자연)世界에 대한 창조주의 입장에 서게 하여서, 만물에 대한 주관(主管) 자격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여기서 만물주관이란 만물을 아끼고 소중히 하면서, 그 만물을 마음대로 다루는 것을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이 사랑의 마음을 갖고 여러 가지의 사물을 다루는 것을 만물주관(萬物主管)이라 하며, 여기에는 인간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領域)이 포함된다. 예컨대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이 모두 만물주관의 개념에 포함된다. 지상의 인간은 육신을 쓰고 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물질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인간생활 전체가 만물주관의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본연(本然)의 만물주관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본연의 주관(主管)이란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사물을 다루는 것, 즉 사랑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행하는 행위, 예컨대 경작, 제작, 생산, 개조, 건설, 발명, 보관, 운송, 저장, 예술창작 등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경제, 산업, 과학, 예술 등의 활동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생활, 정치생활도 그것이 사랑을 가지고 물건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본연의 만물주관에 포함된다. 이와 같은 본연의 인간에 있어서 사물을 다루는 데는, 사랑과 함께 새로운 창안(구상(構想))이 부단히 요구되기 때문에, 본연의 주관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성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성을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닮을 수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본연의 만물주관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조상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따라서 이러한 인간이 이어받은 창조성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렸으며, 만물주관도 불완전하고 비원리적(非原理的)인 것이 되고 말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하나님이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날 때부터 본연의 창조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따라서 타락과는 관계없이 그 창조성은 지속되었을 것 아닌가? 실지로 오늘날 과학기술자들은 훌륭한 창조(創造)의 능력(창조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다.


3) 닮기의 창조(創造)


여기서 잠깐 닮기의 창조(創造)가 시공(時空)의 세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설명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창조란 요컨대 피조물 즉 하나 하나의 만물이, 시공의 세계(時間)을 포함한 四차원의 세계)에 출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창조가 하나님의 구상(構想)의 단계에서는 초시간(超時間), 초공간(超空間的)으로 이루어졌더라도, 그 피조물이 시공세계에 출현하는데 있어서는 소형(小形), 미숙(未熟) 또는 유소(幼少)의 단계에서부터 출발하여, 일정한 시간적 경과를 거쳐서 일정한 크기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일정한 크기의 단계에까지 완성한 후에야 하나님의 구상(構想) 또는 속성(屬性)을 완전히 닮게 된다. 그때까지의 기간은 미완성단계이며,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 나아가는 과정적 기간으로서, 통일원리는 이 기간을 성장기간(成長期間)이라고 하여 소생기(蘇生期), 장성기(長成期), 완성기(完成期)의 삼단계(3단계;질서적 3단계)의 기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성장과정인 장성기의 완성급 단계에서 타락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성을 이어받음에 있어서도 본연의 창조성의 2/3정도만을 이어받았던 것이니, 과학자들이 아무리 천재적(天才的)인 창조력을 발휘한다 하더라도 본래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고자 했던 창조성에 비하면 크게 못 미쳐 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피조물중에서 타락한 것은 인간뿐이다. 만물은 타락하지 않고 모두 완성하여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각자의 차원에서 닮고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또 생길 것이다. 즉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일컬어지는 인간이 왜 영장(靈長)답지 않게 타락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만물이 원리 자체의 주관성 또는 자율성에 의해서만 성장하게 되어 있는데 대하여, 인간은 성장(成長)에 있어서 이 원리의 자율성(自律性), 주관성(主管性) 외에 자신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4) 창조성(創造性)과 책임분담(責任分擔)


여기서 원리 자체의 자율성이란 유기체(有機體)의 생명력을 말하며, 주관성은 같은 생명력(生命力)의 환경에 대한 영향성을 말한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는 것은 그 내부의 생명력 때문이며, 주관성은 그 나무(生命力)가 주위에 미치는 영향력(影響力)을 말한다. 그런데 인간의 성장의 경우에도 이 원리 자체의 자율성과 주관성이 작용(作用)한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육신만이 자율성과 주관성에 의해서 성장하며, 인간의 영인체는 그렇지 않다. 영인체의 성장에는 다른 차원의 조건(條件)이 요구된다. 그것이 책임분담 즉 분담(分擔)책임의 완수인 것이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영인체(靈人體)의 성장이란 육신처럼 영인체의 신장이 커짐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영인체는 육신에 밀착(密着)되어 있기 때문에 육신의 성장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커지게 되어 있다. 여기의 영인체의 성장이란 영인체의 령성의 성숙과 인격의 향상을 뜻한다. 또한 심정 수준의 향상을 뜻한다. 요컨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마음 자세의 성장이 바로 영인체의 성장인 것이다.


이러한 영인체의 성장은 다만 책임분담의 완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의 책임분담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지(堅持; 굳건히 지키면서)하고 계명(誡命)을 준수(遵守)하는 가운데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내적 외적으로 가해지는 수많은 시련을, 스스로의 판단(判斷)과 결정하(決定下)에 극복해 나아가면서, 사랑의 실천을 계속함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간섭할 수 없는 상황(狀況)에서, 육신의 부모마저 없는 여건하에 이같은 책임분담을 다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아담은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와 같은 책임분담을 다 하지 못하고 결국, 사탄의 꼬임에 빠져서 타락(墮落)하고 말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실패할 수도 있는 책임분담(責任分擔)을 아담에게 메웠을까? 만물처럼 쉽게 성장하게 할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것은 인간을 만물의 주관(主管)位에 세우기 위해서였으며 만물에 대한 주관자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同上). 주관은 자기의 소유물(所有物)이나 자기가 창조한 것(제작물(製作物))만을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며, 타인의 소유나 타인의 창조물은 주관(主管)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한 아담은 만물보다 뒤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의 소유자도 창조자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아들에게 자신의 창조주(創造主)의 자격을 물려주어서 주관주(主管主)로 세우고 싶었기 때문에(창 1:28), 일정한 조건을 세우게 하여 그것으로 아담도 하나님의 우주 창조에 동참했다는 것으로 인정해 주려(쳐 주려) 했던 것이다.


5) 인간의 완성과 책임분담(責任分擔)


그 조건(條件)은 아담이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즉 아무의 도움도 받지 아니하고 자기를 완성시키면, 그것으로써 우주를 창조한 것과 같은 자격(資格)으로 쳐주려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치로 볼 때, 인간 하나의 가치는 전체 우주의 가치와 같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우주(天宙)를 총합한 실체상(實體相)이며, 소우주(小宇宙)이기 때문이요, 또 인간의 완성으로써만 우주 창조도 완성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 16:26)고 하신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아담이 스스로 자신을 완성시키면, 가치로 보아서 아담이 우주를 창조한 것과 동등한 입장에 서는 셈이 된다.


그런데 창조는 창조자(創造者) 자신의 자기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책임 하에서였다. 마찬가지로 아담이 자신을 완성시키는 일(창조(創造))도 아담 자신의 책임분담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해와에게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메웠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100% 책임을 아담에게 메운 것은 아니다. 인간 성장의 대부분의 책임은 하나님이 지시고, 아담-해와에게는 극히 적은 부분의 책임(책임;5% 책임)분담(分擔)을 메워, 그 5%의 책임분담을 다하기만 하면 100% 책임 전체를 아담이 다 해낸 것으로 쳐주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특혜에도 불구하고 아담-해와는 책임분담을 다하지 못하고 타락(墮落)하고 말았으며, 그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즉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온전히 이어받았더라면 어떠한 결과가 되었을 것인가.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완성했더라면 먼저 하나님의 심정 즉 사랑을 통해서 기쁨을 얻으려는 정적(情的)인 충동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은 사랑의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주관활동(主管活動)이 심정을 터전으로 하는 사랑 중심의 활동이 되게 됨을 뜻한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산업, 과학, 예술, 종교 등이 물질을 다루는 한에 있어서 모두 주관활동(主管活動)인데, 이러한 활동이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창조성(創造性; 온전한 창조성)을 터로 한 사랑의 주관활동으로 변모(變貌)하게 된다.


6) 본연(本然)의 창조성(創造性)과 문화활동


상기(上記)의 심정(心情)의 항목에서, 심정의 충동력을 동기로 하는 지적(知的), 정적(情的), 의적활동(意的活動)의 총화가 문화(心情文化)라고 했는데, 여기의 지적활동, 정적활동, 의적활동이 모두 물질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이기 때문에 이 문화활동도 따지고 보면 본연(本然)의 창조성에 의한 주관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화(文化)라는 관점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문화는 급속히 몰락(沒落)되어가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교육, 언론, 윤리, 도덕, 종교 등이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혼란의 와중(渦中)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서 획기적인 어떠한 방안이 세워지지 않는 한, 이 몰락해 가는 문화를 다시 구출한다는 것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혹자는 다년간 철의 장막으로 가린 채 강력한 기반을 유지해 온 공산독재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와 대결하다가 오늘날 개방을 계기로 하여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자본주의 방식의 도입을 서두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고 자본주의의 경제체제와 과학기술의 우월성(優越性)을 자랑할는지 모르나, 그것은 근시안적 인식착오(認識錯誤)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적 모순에 의한 노사분규(勞使紛糾) 및 빈부(貧富)의 격차의 심화와 이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가치관의 붕괴현상과 사회적 범죄의 범람, 그리고 과학기술의 첨단화(尖端化)에 따르는 범죄기술의 첨단화, 산업의 발달에 따르는 공해의 증대 등은 자본주의의 고질적(痼疾的)인 병폐로서 미구에 반드시 자본주의를 쇠망시키는 요인이 될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주관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문화적 위기의 근본원인은 멀리 인류역사(人類歷史)의 시발에까지 소급(遡及)하여 거기서 찾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인간조상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心情)과 사랑을 온전히 이어받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고 이기주의(利己主義)가 팽배하게 된 데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문화를 위기(危機)에서 구출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를 청산하고 모든 창조활동, 주관활동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전개하는 것이다. 즉 세계의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행동하게 될 때,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과학, 종교, 사상, 예술, 언론 등 여러 문화영역(文化領域)의 얽히고 설킨 난문제(難問題)들이 근본적으로 그리고 통일적으로 해결되어, 여기에 새로운 참된 평화의 문화가 꽃피게 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문화도 아니요, 자본주의문화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문화이니 그것이 바로 심정문화(心情文化), 사랑의 문화라고도 불리우는 중화문화(中和文化)인 것이다.


이상으로 하나님의 창조성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으로 창조성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동시에 하나님의 신성(神性), 더 나아가서 원상(原相)의 내용에 관한 설명도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二. 원상(原相)의 구조(構造)


다음은 원상(原相)의 구조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 本원상론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 원상(原相)의 구조에서는 신상의,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려는 것이다. 앞의 원상의 내용의 제목하에서는 신상과 신성(神性)의, 하나 하나의 속성의 내용을 다루었는데, 여기의 원상의 구조에서는 신상인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 및 양성과 음성의 상호관계(주로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를 다루려 한다. 이와 같은 속성(屬性)의 상호관계를 다루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관계를 중심한 여러 현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기준을 발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상대적(相對的) 관계(關係)


원리강론의 창조원리에는, 만물은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에 의한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으며, 또 (만물은) 양성과 음성의 이성성상의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하게 된다고 적혀 있으며, 이것은 만물의 제일원인(第一原因)인 하나님이 성상(본성상(本性相))과 형상(본형상(本形狀))의 중화적주체로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상과 형상은 만물에 있어서나 하나님에 있어서나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맺고서만 존재하고, 개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의 상대적 관계(相對的關係)란 두 요소나 두 개체가 서로 마주 대하는 관계를 말한다. 예컨대 두 사람이 대화할 때, 또는 상품을 매매할 때, 그 대화나 매매가 이루어지기 직전에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대하는 관계가 먼저 성립(成立)한다. 이것이 상대적 관계이다. 그런데 이같은 상대적 관계는 반드시 상호 긍정적인 관계여야 하며, 상호 부정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대적 관계가 맺어지면 대개의 경우,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현상(現象)이 벌어진다. 인간은 자주 말(대화), 금전, 힘(協力), 영향, 사랑 등등을 주고받는다. 자연계에서는 천체간의 만유인력(萬有引力), 동물과 식물간의 가스(CO₂, O₂) 교환(交換) 등이 그 예이다. 이와 같이 양자가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현상을 수수작용(授受作用)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상대적 관계가 성립됐다고 해서 수수작용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거기에 상대기준이 함께 조성되어야 한다. 상대기준이란 공통기준 즉 공통요소 또는 공동목적(共同目的)을 중심하고 맺어진 상대적 관계를 뜻한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면 상대적 관계가 성립하여 상대기준이 조성되면 이때에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성상(본성상(本性相))과 형상(본형상(本形狀)) 사이에도 이 원칙에 의해서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즉 성상과 형상은 공통요소(심정(心情) 또는 창조목적)를 중심하고 상대적 관계를 맺어서, 즉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무엇인가를 주고 받는 작용 즉 수수작용을 지속한다. 성상이 형상에게 주는 것은 관념(觀念)的인 것과 심정적인 것이며, 형상이 성상에게 주는 것은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的 요소이다. 이와 같은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하나님의 속성이 중화(합성체(合性體))를 이루거나 피조물(신생체)을 産出한다. 그러면 수수작용과 사위기대라는 제목을 가지고, 성상과 형상의 상대적 관계 또는 수수작용에 대해서 좀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2. 수수작용(授受作用)과 사위기대(四位基臺)


(1)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의 수수작용(授受作用)


1)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이란 무엇인가


원상(原相)中의 성상(본성상)과 형상(본형상)이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수수작용이 벌어지는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때에는 반드시 일정한 공통요소(共通要素)가 중심이 되어서 상대기준이 조성(造成)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에 있어서 이 공통요소로서의 중심은 심정(心情) 또는 그 심정을 터로 한 창조목적이다. 이러한 수수작용, 즉 일정한 공통요소를 중심한 수수작용은 반드시 일정한 결말을 짓게 마련이다.


바꾸어 말하면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에는 반드시 일정한 중심과 일정한 결과가 수반(隨伴)된다. 심정이 중심일 때에 그 결과는 합성체(合性體) 또는 통일체(統一體)가, 목적(創造目的)이 중심일 때에 그 결과는 신생체(新生體) 또는 번식체(繁殖體)가 나타난다. 즉 중심에 따라서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여기서 합성체란 하나로 통일된 형태를 말하며 신생체는 창조된 만물(인간 포함)을 말한다. 따라서 원상(原相)에 있어서 신생체의 출현은 만물창조를 뜻한다.


2) 합성체(合性體)와 신생체(新生體)의 개념


여기서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합성체(合性體)와 신생체(新生體)의 개념을 소개하고자 한다.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합성체는 만물의 존재, 생존, 존속(存續), 통일, 공간운동, 현상유지 등을 뜻하며, 신생체는 새로이 출현 또는 산출되는 새로운 결과물을 뜻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성질 혹은 특성이거나 그러한 성질 혹은 특성을 지닌 신요소(新要素), 신개체(新個體), 신현상(新現象)을 뜻하며, 이러한 신생체의 출현은 피조세계에 있어서 곧 발전을 의미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세계에서 만물이 존재-생존-존속하고 운동-발전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크게는 천체로부터 작게는 원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개체들 상호간에, 원상내의 성상-형상간의 수수작용과 동일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조의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하나하나의 만물은 하나님의 속성(屬性)을 닮고 있고, 만물의 상호관계와 상호작용은 원상의 구조 즉 성상-형상의 상대적 관계 및 수수작용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모든 피조물이 존재-생존하고, 운동-발전하기 위해서는 원상내의 수수작용을 반드시 닮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원상내에서의 수수작용은 심정(心情) 중심 때이건 목적 중심 때이건, 작용 그 자체는 원만성(圓滿性), 원화성(圓和性), 조화성(調和性), 원골성(圓滑性)을 그 특징으로 한다. 중심에서 사랑이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심정은 사랑을 통해서 기쁘고자 하는 정적(情的)인 충동이기 때문에, 심정은 사랑의 원천(源泉)이 된다. 따라서 심정이 중심인 곳에서는 사랑이 우러나오게 된다. 목적이 중심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창조목적은 심정을 터로 하고 세워지기 때문이다.


3) 수수작용(授受作用)의 특징은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이다.


이와 같이 원상내의 수수작용은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을 그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거기에 모순(矛盾), 대립(對立), 상충(相衝)같은 현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상호작용에 모순, 대립이 나타나는 것은 거기에 심정, 목적과 같은 공통요소로서의 중심이 없기 때문이요,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외형상으로는 아무리 수수작용이 벌어지더라도 거기에 사랑이나 공통요소가 중심이 되지 않는 한, 그 작용은 조화성-원화성을 나타낼 수 없으며 도리어 대립-상충이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이 원상에서의 수수작용의 원화성, 조화성의 이론은 수많은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세계의 대혼란(大混亂)은 무수한 종류의 이해관계의 상충이 그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며, 그 수많은 유형의 상대적 관계가 상충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관계, 민족과 민족의 관계, 종교와 종교의 관계, 정당과 정당의 관계, 노사관계, 사제관계(師弟關係), 부모와 자녀의 관계, 부부관계, 대인관계 등 무수한 상대적(相對的) 관계가 상충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무수한 상충적 관계의 누적이, 오늘날 세계의 대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적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매개의 상충적인 상대적 관계를 원화의 관계, 조화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각 단위의 상대적 관계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한 수수작용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원상내의 수수작용의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의 이론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2)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 및 주체와 대상


1) 사위기대(四位基臺)란 무엇인가


성상(性相)-형상(形狀)의 수수작용에는 상술한 바와 같이 반드시 중심(심정(心情) 또는 목적)과 결과(합성체 또는 신생체)가 동반되기 때문에 수수작용에는 반드시 中心-성상(性相)-형상(形狀)-결과의 4요소가 관련되게 된다. 그런데 이 4가지 요소의 상호간의 관계는 위치(位置)의 관계가 된다. 즉 수수작용에 있어서 중심, 성상, 형상, 결과는 모두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 후, 서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고, 수수작용이 벌어지는 4위치의 터전을 사위기대라고 한다. 그리하여 수수작용은 원상에 있어서나 피조세계에 있어서 또 어떤 유형의 수수작용이거나 예외 없이 이 사위기대를 터전으로 하고 이루어진다.

 
그런데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하는데 있어서, 이 양자는 동격이 아니다. 즉 격위가 다르다. 격위(格位)란 자격상의 위치를 말한다. 통일원리(따라서 통일사상)에서의 자격이란 주관에 관한 자격을 뜻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의 격위(格位)란 능동성에 관한 입장(또는 위치)을 말하는 것으로서, 성상과 형상이 격위가 다르다는 것은, 성상은 형상에 대하여 능동적인 위치에 있고, 형상은 성상에 대하여 피동적인 위치에 있음을 뜻한다. 이때 능동적 위치에 있는 요소나 개체를 주체라 하고 피동적인 위치에 있는 요소 또는 개체를 대상이라고 한다. 따라서 성상(性相)과 형상(形狀)과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성상이 주체의 입장이 되고 형상이 대상의 입장이 된다.


따라서 사위기대(四位基臺)란 중심-주체-대상-결과의 네 위치로 이루어지는 기대로서 어떠한 수수작용도 반드시 네 위치 즉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 이루어진다. 네 위치를 터로 하고 수수작용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매번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중심, 주체, 대상, 결과라는 이 네 위치는 고정불변(固定不變)이지만, 그 위치에 세워지는 실제의 요소는 각양각색임을 뜻한다.


예컨대 가정적 사위기대에 있어서 중심의 위치에는 가훈이나 가법 또는 조부모가 세워지고, 주체의 위치에는 아버지가, 대상의 위치에는 어머니가, 결과의 위치에는 가정평화 또는 자녀번성 등이 세워진다. 또 주관적 사위기대(예:기업활동(企業活動))에 있어서는, 중심의 위치에 기업의 목표 또는 이념이 세워지고, 주체의 위치에는 여러 人的要素(관리직과 종업원)가, 대상의 위치에는 물적요소(物的要素, 기계, 원자재)가, 그리고 결과의 위치에는 생산물(生産物, 상품)이 세워지게 된다. 또 태양계에 있어서 중심은 창조목적, 주체는 태양, 대상은 혹성, 결과는 태양계이며, 인체에 있어서 중심은 창조목적, 주체는 마음, 대상은 몸, 결과는 인체(혹은 心身一體)이다. 이와 같이 사위기대에 실제로 세워지는 요소(이것을 定着物이라 함)는 각양각색이지만 네 개의 위치만은 항상 중심-주체-대상-결과로서 고정불변(固定不變)이다.


2) 주체와 대상의 개념


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주체와 대상의 개념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수작용의 성격이 구체적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주체는 능동적 위치에 있고, 대상은 피동적 위치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주체가 중심적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의존적(依存的)이고, 주체가 동적(動的)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정적(靜的)이고, 주체가 적극적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소극적이며, 주체가 창조적일 때 대상은 이에 대하여 보수적(保守的)이다. 그리고 주체가 외향적일 때 대상은 내향적(內向的; 내성적)이 된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피조세계에 있어서, 크게는 천체로부터 작게는 원자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다. 예컨대 태양계의 태양과 혹성과의 관계, 원자의 양자와 전자와의 관계는 중심적인 것과 의존적인 것의 관계이며, 어미동물과 새끼동물,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는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의 관계이며, 지도자와 추종자, 주는 자와 받는 자와의 관계는 적극성과 소극성의 관계 또는 능동성과 피동성의 관계이다.


또 가정생활에 있어서 부단히 가정의 번영을 꾀하는 남편은 창조(創造)的 또는 외향적이요, 가정을 내적으로 알뜰히 꾸려나가는 아내는 이에 비해서 보수적 또는 내향적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의 개념은 상대적이다. 예컨대 아무리 한 개체가 주체일지라도 상위자에 대해서는 대상인 것이요, 아무리 한 개체가 대상일지라도 하위자에 대해서는 주체가 된다.


3) 주체와 대상의 격위(格位)는 다르다.


이와 같이 주체는 대상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중심적, 동적, 적극적, 창조적, 능동적, 외향적이며, 대상은 주체의 각각의 입장에 대응해서 의존적, 정적, 소극적, 보수적, 피동적, 내향적이다.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위치상의 주체와 대상의 차이성은, 그 근원이 원상내의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주체와 대상의 격위의 차이 때문이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을 포함한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서만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간단히 말해서 주체와 대상사이에만, 즉 격위(格位)의 차이가 있는 곳에서만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두 요소나 개체가 동격일 경우에는 수수작용이 벌어질 수 없으며, 도리어 반발이 벌어지기 쉽다. 양전기와 양전기 사이에 벌어지는 반발이 그 예이다.


그런데 주체와 대상의 격위의 차이는 바로 질서를 뜻한다. 따라서 질서있는 곳에서만 수수작용이 벌어진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의 이론은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 세계는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거의 모든 유형의 상대적 관계가 원만한 수수관계가 되지 못하고, 상충적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모든 상대적 관계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되지 아니하고, 주체와 주체의 반발의 관계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혼란을 수습하는 길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요,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주체와 주체의 상충적 관계를 주체와 대상의 조화적 관계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 설정의 필연성(必然性) 또는 그 당위성이 밝혀져야 하는데, 여기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의 기준 또는 근거가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원상(原相)內의 사위기대이론 또는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의 이론이다. 이리하여 원상에 있어서의 주체와 대상에 관한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임을 알게 된다.


4) 상대물(相對物)과 대립물(對立物)


끝으로 주체와 대상에 관련하여 상대물과 대립물의 개념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주체와 대상의 원리적인 관계는, 목적중심의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조화적(調和的)이요, 상충적이 아니다. 두 요소 또는 두 개체(個體)의 관계가 조화적일 때, 이 두 요소(個體)를 통일사상에서는 상대물(相對物)이라 하고, 그 관계가 상충적일 때는 이 두 要素(個體)를 대립물(對立物)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상대물 사이에는 조화가 벌어져서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대립물 사이에는 상충과 투쟁이 벌어져서 발전이 정지되거나 파탄(破綻)이 온다. 공산주의 철학인 유물변증법은 모순(矛盾)의 이론, 대립물의 이론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이론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변혁(變革)하려 했기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오늘날 걷잡을 수 없는 파탄이 초래되고 말았던 것이다.


발전은 목적 중심의 주체와 대상, 즉 상대물의 수수작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며, 목적(目的; 中心)이 없는 대립물의 상충작용에 의해서는 결코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리하여 상대물(相對物, (주체와 대상)의 이론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의 혼란(混亂, 뿐 아니라 자유세계의 혼란까지도)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방안도 된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상대물의 이론도 또 하나의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상으로 사위기대(四位基臺) 형성 및 주체와 대상에 대한 설명을 모두 마친다. 다음은 사위기대의 종류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3)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종류


1) 사위기대(四位基臺)의 구성요소


이미 앞의 (1)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의 항목에서 지적한 것처럼,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은 중심에 따라서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 하나는 합성체(合性體)이며, 또 하나는 신생체(新生體)이다. 즉 심정(心情)이 중심일 때는 합성체를 나타내고, 목적(창조목적)이 중심일 때는 신생체를 낳는다. 이러한 두 가지의 결과는 피조물 상호간의 수수작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조물의 수수작용이 원상(原相)內의 수수작용을 닮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수작용에 두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뜻한다. 즉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은 중심의 종류(심정, 목적)와 결과의 종류(합성체, 신생체)에 따라서 두 가지 종류로 나뉘게 된다. 즉 심정이 중심이 되고 결과가 합성체(合性體)인 경우의 수수작용과, 목적이 중심이 되고 결과가 신생체인 경우의 수수작용이 그것이다. 전자(前者)는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중화체(이성성상의 중화적 주체 원리강론, 1987, p. 35)를 이루는 경우이며, 후자(後者)는 성상-형상(이성성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하나님의 실체대상을 번식하는 경우(同上, p. 42), 즉 만물을 창조하는 경우를 말한다.

 
이같은 수수작용은 피조물 특히 인간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인체가 마음과 몸의 통일체(統一體)인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원리(창조원리)로 보면, 목적(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성상(마음)과 형상(몸)이 수수작용에 의해서 합성체(合性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가끔 마음으로 구상(構想)(성상)하고, 이에 따라서 손 또는 도구(형상)를 움직여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한다. 이것을 원리로 표현하면, 목적(新作品을 만들려는 목적)을 중심하고 성상과 형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합성체(合性體)를 이루는 경우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인간의 예에서와 같이 수수작용을 하기 전이나 한 이후, 성상과 형상의 결과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성상도 형상도 수수작용을 하기 전이나 후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그 양자가 결합해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을 뿐이다. 이를 비유하면 남녀의 결혼과 마찬가지이다. 남자는 결혼 전이나 후나 내내 그 남자요, 그 여자도 결혼전이나 후나 내내 그 여자이다. 다만 다른 것은 결혼 후의 부부는 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결과가 합성체(合性體)인 경우의 성상과 형상도 마찬가지이다.


다음 신생체를 이루는 경우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수수작용을 하기 전의 성상-형상과 수수작용을 한 후에 나타난 결과와는 본질적으로 전연 다르다. 즉 수수작용의 결과, 새로운 신생체(新生體)(作品)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전자(前者) 즉 합성체를 이루는 경우의 수수작용을,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 수수작용, 또는 간단히 자동적(自同的)수수작용이라 하고, 후자(後者) 즉 신생체(新生體)를 산출하는 경우를 발전적(發展的)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이 양자를 변화,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자(前者)는 수수작용의 전과 후에 있어서 성상-형상이 무변화이기 때문에 이것을 정적수수작용(靜的授受作用)이라고 하고, 후자는 수수작용에 의해서 변화된 결과로서 신생체(新生體)가 출현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동적수수작용(動的授受作用)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은 위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실은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이며, 중심과 결과의 위치를 포함하면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결국 사위기대(四位基臺)의 형성(形成)인 것이다. 따라서 위치로 볼 때, 자동적수수작용(授受作用)은 자동적(자기동일적)사위기대(四位基臺)임을 뜻하며, 발전적수수작용(授受作用)은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임을 뜻한다. 이리하여 사위기대에는 우선 합성체(合性體)를 이루는 자동적사위기대와, 신생체를 이루는 발전적사위기대의 두 가지의 종류가 있음을 알게 된다.


2)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


그런데 사위기대(四位基臺)에는 이 외에 또 다른 두 종류의 사위기대가 있다. 그것이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와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이다. 이에 관해서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의 사위기대를 알아보려면 위에서 처럼 먼저 수수작용에 내적수수작용과 외적수수작용이 있음을 이해하면 된다. 우리는 위에서 성상과 형상이 상대적관계를 맺어서 상대기준을 조성하면 반드시 수수작용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원상(原相)의 내용중의 신상의 항목에서, 하나님의 성상(본성상(本性相))은 기능적부분과 대상적부분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것과, 기능적부분을 내적성상(內的性相), 대상적부분을 내적형상(內的形狀)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즉 본성상(本性相) 내부에 다시 성상과 형상이 있는 것이다. 본성상을 중심하고 볼 때 내부에도 성상(내적性相)과 형상(내적형상(內的形狀))이 있고, 외부에도 성상(본성상(本性相))과 형상(본형상(本形狀))이 있다. 내부이거나 외부이거나 성상-형상이 공통요소를 중심하고 상대적 관계를 맺으면 반드시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즉 외부의 본성상과 본형상 사이뿐 아니라, 내부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 사이에도 수수작용이 벌어진다. 전자(前者)를 외적수수작용이라 하고, 후자(後者)를 내적수수작용이라고 한다. 이 내적수수작용에도 중심(심정(心情) 또는 목적)과 결과(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가 포함됨은 물론이다.

 
이것은 본성상(本性相)만을 중심하고 볼 때, 안팎(內와 外)으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것을 인간에 비유하면 인간이 내적 생활과 외적생활을 동시에 행하는 것에 해당한다. 내적생활이란 내면생활 즉 정신생활을 뜻하며, 외적생활이란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서 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인간의 이 내적 생활도 수수작용이며, 외적생활도 수수작용으로서, 내적 생활은 마음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내적授受作用)이요, 외적생활은 타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외적授受作用)인데, 그 기원이 바로 원상(原相)의 본성상의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인 것이다. 이와 같이 본성상으로부터 유래된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은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의 모든 개체에도 예외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상술한 바와 같이 성상과 형상의 관계는 위치로 볼 때 주체와 대상의 관계이며, 따라서 중심과 결과를 포함한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바로 사위기대의 형성인 것이다. 따라서 위치로 볼 때, 내적수수작용은 내적사위기대를 뜻하며 외적수수작용은 외적사위기대를 뜻한다. 즉 본성상(本性相)은 안팎으로 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다. 원상내의 본성상을 중심한 이같은 내적사위기대와 외적사위기대를 특히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라고 부른다. 그리고 피조물도 원상의 구조를 본떠서 개체마다 안팎으로 사위기대(四位基臺)를 형성하고 있어서 이것을 존재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3)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와 존재의 2단구조(構造)


그러면 다음에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와 존재의 2단구조(構造)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피조물이 예외없이 본성상(本性相)으로부터 유래된 내적 및 외적수수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인간뿐만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예외 없이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음을 뜻한다. 수수작용이란 심정(心情) 또는 창조목적을 중심한 원만하고 조화로운 상호작용이기 때문에, 만물은 예외 없이 이같은 창조목적을 중심으로 내적 및 외적인 수수작용 즉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타락으로 내적생활(精神생활) 즉 내적사위기대와, 외적생활(사회생활) 즉 외적사위기대가, 심정(心情)(사랑)이나 창조목적을 중심하지 못하고 자기중심이 되어버려서 상충, 갈등, 대립, 투쟁, 분규 등의 사회혼란을 야기(惹起)시키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성격의 사회적 혼란(현실문제)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는 길은, 인간이 내적 및 외적으로 본연의 사위기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본성상 중심의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의 이론도 또한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원상내의 내적사위기대 및 외적사위기대는 피조만물의 존재방식(存在方式)의 기준이 되고 있다. 원상(原相)의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가 바로 위에서 말한 바의 원상(原相)의 2단구조(構造)이다. 그리고 이것을 닮은 피조물의 안 밖의 사위기대를 존재의 2단구조(構造)라고 부른다. 이 존재의 2단구조(構造)는 창조의 닮기의 법칙에 의해서 원상의 이단구조를 닮아난 것이다.

 
4) 사위기대(四位基臺)의 종류


그러면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사위기대의 종류를 다루고자 한다. 이상의 설명에서 사위기대에는 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및 발전적사위기대(四位基臺) 외에, 내적사위기대(四位基臺) 및 외적사위기대(四位基臺)의 또 다른 두 종류의 사위기대가 있음을 알게되었다. 따라서 사위기대에는 원리적으로 4종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들이 서로 조합(組合)되어서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사위기대가 형성된다. 즉 내적자동적사위기대(內的自同的四位基臺), 외적자동적사위기대(外的自同的四位基臺),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외적발전적사위기대(外的發展的四位基臺)가 그것이다. 이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그림 1-11과 같다. 다음에 이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① 내적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이것은 내적사위기대와 자동적사위기대가 조합(組合)된 것이다. 즉 본성상 내부의 내적사위기대(내적수수작용)가 자기동일성 즉 불변성을 지니게 된 것을 말한다. 자동적사위기대란 성상(주체)과 형상(대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그 결과로서 합성체 또는 통일체를 이루는 사위기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위기대가 실제에 있어서는 안팎에서 동시에 형성된다. 예컨대 인간의 경우, 인간은 누구나 생각(사고(思考))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생각한다는 것은 내적으로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하는 것, 즉 내적사위기대(의 형성(形成))를 의미하며, 생활한다는 것은 외적으로 타인과 수수작용하는 것, 즉 외적사위기대(의 형성(形成))를 의미한다.


이때의 생각은 막연하고도 비생산적인 생각으로서, 그 생각의 결과는 다만 마음의 한 상태일 뿐이다. 즉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합성체일 뿐이다. 이러한 합성체를 이루는 사위기대가 자동적사위기대이다. 그런데 그것이 내적으로 마음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내적자동적사위기대가 된다. 내적자동적사위기대도 그 중심은 심정 또는 창조목적20)이며,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도 역시 원만하고 조화롭게 이루어지며, 그 결과 역시 합성체(통일체)이다. 모든 피조물은 예외 없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수수작용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 때 반드시 그 내부에서도 수수작용 즉 사위기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내적사위기대의 원형이 바로 본성상(本性相)內의 내적사위기대이다.


② 외적자동적사위기대(四位基臺)


이것은 외적사위기대와 자동적사위기대가 하나로 조합된 것이다. 즉 본성상 외부(즉 본성상과 본형상간)의 외적사위기대가 자기동일성(불변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하며,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기 직전의 속성의 상태 즉 성상과 형상이 중화를 이룬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은 후,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수가 많다. 이때의 사위기대(四位基臺)(授受作用)가 바로 외적자동적사위기대이다. 단 이때에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가 동반되게 된다. 그 좋은 예가 부부생활이다. 남편이나 아내는 각각 내적생활(정신생활), 즉 내적자동적사위기대를 조성해 가면서, 그 터 위에서 서로 협조하고 화합하여 부부일체(夫婦一體; 合性體)를 이룬다. 이것이 외적자동적사위기대의 형성인 것이다.


이와 같이 외적자동적사위기대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으며, 내적인 자동적사위기대의 터 위에서 외적자동적사위기대가 성립된다. 원상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내적 및 외적사위기대의 불가분리성(不可分離性, 떼려야 뗄 수 없는)은, 피조물 및 인간 상호간의 사위기대(외적자동적사위기대) 형성의 기준이 된다.


다음에 만물 상호간의 실례로서 태양과 지구를 예로 들어보자. 태양과 지구는 만유원력(萬有原力)을 주고 받으며 수수작용을 한다. 이때 태양은 주체이고 지구는 대상이다. 태양이 주체이기 때문에 지구에 대해서 중심적이며, 이에 대하여 지구는 대상이기 때문에 태양에 대하여 의존성(依存的)이다. 그런데 피조세계에 있어서의 수수작용은 원칙적으로 대상이 주체의 주위를 반드시 도는 원환운동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원상내의 성상-형상의 수수작용의 원화성, 원만성의 상징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피조세계에 있어서 일정한 원환운동(圓環運動)이 벌어지면, 그것은 거기에 반드시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태양과 지구의 관계를 볼 때, 지구가 태양을 돌면서(公轉) 지구 자체도 돈다(自轉). 이것은 지구와 태양계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즉 지구는 자전을 통해서 자체의 존립(存立)(自己同一性)을 유지하고, 공전을 통해서 태양과 더불어 태양계 전체의 존립(存立)(自己同一性)을 유지한다. 지구의 이같은 자전과 공전은, 지구 내부에도 자동성 유지를 위한 수수작용(내적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지구 외부에도(태양과의 사이에) 자동성 유지를 위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태양은 태양대로 자전하면서 자체의 자동성을 유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지구에 대해서는 주체로서 지구의 의존의 중심이 되어 지구를 주관한다. 즉 지구에 만유원력과 빛을 준 후 지구의 공전을 도우면서 지구의 생물을 살린다. 뿐만 아니라 은하계의 중심에 대하여 대상이 되어서 은하계의 주변을 공전한다.


이와 같이 태양과 지구의 예로 볼 때, 거기에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외적자동적사위기대가 동시에 조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양 기대(兩 基臺)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적자동성 유지와 외적자동성 유지를 나타내는 원환운동(자전, 공전)은, 본연의 인간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단 인간생활은 정신과 정신의 관계를 터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원환운동은 물리적인 원환운동이 아니라 원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중심한 원만성, 조화성, 원활성을 띤 수수작용을 뜻한다. 따라서 내적자동성(내적자동적사위기대)의 유지는 사랑을 중심하고 타인과 화해하면서, 보다 더 효과적으로 타(他)에 봉사하려는 심적자세의 유지로 나타나며, 외적자동성(외적자동적사위기대)유지는 특히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상하간(上下間)일 때는, 대상의 주체에 대한 공전운동이 상위자(主體)에 대한 감사에 찬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주체의 대상에 대한 주관은 진리의 힘과 사랑의 빛의 시여(施與; 베품)로서 나타난다. 즉 주체(上位者)는 대상을 잘 가르치면서 계속해서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이상이 본연의 세계에 있어서의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조성하게 되는 내적자동적사위기대와 외적자동적사위기대로서, 오늘의 타락한 사회에서는 그 모범적 실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가치관의 총체적인 붕괴와 사회적 범죄의 증대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원상의 내적 외적인 자동적사위기대이론은 단순한 신관(神觀)이 아니라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이다.


③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다음은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내적사위기대와 발전적사위기대가 조합된 것이다. 즉 본성상내의 내적사위기대가 발전성, 운동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22) 발전적사위기대란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하여 신생체(新生體)를 산출할 때의 사위기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위기대도 실제에 있어서는 안팎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자동적사위기대 때와는 달리, 동시적(同時的)이 아니고 계시적(繼時的)이다. 즉 내적인 발전적사위기대가 먼저 형성되고, 이어서 나중에 외적인 사위기대가 형성된다.


이러한 내적인 사위기대는 창조에 있어서 제일 먼저 형성되는 사위기대이다. 예컨대 인간이 제품을 만들거나 작품을 창작할 때에, 먼저 마음으로 구상해서 계획(청사진)을 세우고 나중에 그 구상, 계획에 의해 도구 또는 기계를 사용하여 물품을 제작(창작)한다. 즉 구상의 단계가 먼저이고 제작의 단계가 나중이다. 그리고 구상은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내적이요, 제작은 외부의 도구나 기계를 사용하면서 하기 때문에 외적이다. 그리고 구상도 수수작용 즉 사위기대 조성이요, 제작도 사위기대 조성이다. 그리고 구상한 결과도 신생체요, 제작한 물품도 신생체이다. 그리고 또 구상은 막연한 구상이 아니라, 일정한 물품을 제작하겠다고 하는 뚜렷한 목표를 세워놓고 한 구상이며, 제작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구상단계의 사위기대나 제작단계의 사위기대는 모두 목적을 중심한 사위기대인 것이다. 목적과 신생체를 포함한 사위기대는 발전적사위기대이다. 이것이 안팎의 두 단계에 걸쳐서 형성되었으니 처음 구상단계의 것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요, 다음의 제작단계가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단계이다.


인간의 제작의 경우, 이처럼 구상(構想)(내적발전적사위기대)이 먼저 이루어지고, 이어서 제작(외적발전적사위기대)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원형(原型)이 하나님의 원상의 구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본성상내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간의 목적 중심한 수수작용으로서, 신생체인 구상(로고스, 말씀)이 형성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모든 유형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원형이다.


그러면 피조세계에서 나타나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원형으로서의, 본성상내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하여 좀 더 상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 중심=목적, 주체=내적성상(내적성상), 대象=내적형상(內的形狀), 내적수수작용, 결과=구상(構想) 등의 소항목을 가지고 설명키로 한다.


i) 중심=목적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목적 즉 창조목적이다. 그런데 이 목적은 사랑하고자 하는 정적충동(情的衝動)인 심정을 터전으로 한 창조목적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심정을 동기로 한 창조이기 때문에 창조목적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사랑의 대상을 세워서, 그를 통하여 피조세계에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서 기쁨과 위로를 받고자 하심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고, 만물은 인간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 받았다. 따라서 인간의 피조목적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 기쁨과 위로를 돌려드리는 것이요, 만물의 피조목적은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인간에게 美와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타락 때문에 인간은 서로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만물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만물로부터의 아름다움마저 전면적으로는 수용할 줄을 모르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만물을 괴롭게 하는(로마서 8:22) 결과를 낳고만 것이다.


인간은 창조의 닮기의 법칙에 따라서 하나님을 닮아나도록 지음 받았다. 창조목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인간은 모든 창조활동(제작, 생산, 창작 등의 활동)에 있어서, 그 목적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으로 인하여 자기중심주의(中心主義), 이기주의(利己主義)로 흘러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도(天道)를 어긴 결과가 되어서 인간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세계적 대혼란을 수습하는 방안의 하나는, 모든 창조활동에 있어서 각양의 창조목적을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일치시키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따라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인 목적에 관한 이론까지도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된다.


ii) 주체=내적성상(內的性相)


ㄱ) 내적성상(內的性相)이란 무엇인가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있어서 주체의 입장에 있는 요소는 물론 내적성상이다. 내적성상이란 지(知)-정(情)-의(意)의 세 가지의 심적기능(心的機能)이다. 그런데 이 3기능은 각각 별개의 독립된 기능이 아니고 서로 연관되어 있다. 지적기능(知的機能)에도 情과 意가 포함되어 있으며, 정적(情的)기능에도 지(知), 의(意)가 포함되어 있고, 의적(意的)기능에도 지(知), 정(情)이 포함되어 있다. 즉 3기능은 서로 통일되어 있어서 그 통일체가 때로는 지적기능을 더 많이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적기능을 더 많이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적기능을 더 많이 발휘하기도 한다.


지정의(知情意)의 기능(機能)이란 이러한 성격의 세 기능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 형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성격의 3기능을 발휘했다고 본다. 지정의(知情意)의 3기능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현실세계에 있어서 이에 대응하는 본연의 가치, 즉 眞-美-선(善)도 공통요소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되고, 더 나아가서 이 3가치에 대응하는 3대문화 영역(領域; 과학-철학 등의 학문분야, 예술분야, 종교-도덕분야)도 상호 공통요소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간 영역도 있게 됨을 또한 알게 된다.


이 사실은 창조와 관련해서 현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먼저 심정을 동기로 하여 창조목적을 세우고, 그 목적을 중심하고 지정의의 3기능을 총동원시켜서, 즉 '전력투입(全力投入)'하여 ('하나님은 천지 창조에 있어서 자신을 전력 투입하셨다':선생님 말씀) 창조를 개시(開始)하고 추진하였음을 뜻하며, 뿐만 아니라 재창조에 있어서도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을 총집중시켜 왔음을 뜻한다. 그리고 다시 이 사실은 복귀역사에 있어서, 특히 말세적인 혼란이 계속되는 오늘에 있어서, 이 지(知)-정(情)-의(意)에 대응하는 과학, 철학 등의 학문분야와 음악, 무용, 회화, 조각, 문학, 시 등의 예술분야와 종교, 도덕윤리 등의 규범분야 등의 3대 문화분야는 하나님의 창조이상세계의 실현에, 즉 통일문화세계, 심정문화세계의 창건에 총동원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을 바라볼 때, 모든 문화분야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점점 더 저속(低俗)한 방향으로 타락해 가고 있다. 여기에 공산주의와 김일성주체사상과 같은 사이비(似而非) 개혁사상이 침투하여, 모든 문화영역 특히 예술분야를 프롤레타리아예술이니, 민중예술이니 하면서 더욱 저속화시키고 있고 더욱 불모화(不毛化)시키고 있다. 이것은 사탄이 그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문화영역에 종사하고 있는 모든 지성인, 학자들의 사명은 자명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창조목적 실현과 창조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하여, 그리고 통일문화(심정문화(心情文化))세계의 창건을 향하여, 총궐기하며 총진군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창조시에 원상(原相)의 본성상내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형성됨에 있어서, 내적성상인 지정의(知情意)의 3기능이 목적 중심으로 총동원되었다는 사실까지도, 현실문제 해결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ㄴ) 내적성상(內的性相)은 육심(肉心)과 생심(生心)의 통일체이다.


끝으로 여기에 한가지 첨부할 것은,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에는 영인체의 지정의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육신과 영인체의 二重體(통일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本心)도 육심과 생심의 통일체이다. 따라서 내적성상도 육신의 지정의의 기능과 영인체의 지정의의 기능이 복합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육심의 지적기능은 감각과 지각정도이며, 기껏해야 약간의 오성적기능(悟性的機能)을 나타내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생심의 지적기능은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을 전부 갖고 있어서 보편적 진리를 체득할 수도 있다. 생심(生心)은 또 자아(自我)를 인식하고 반성(反省)하는 능력 즉 자아의식(自我意識)(self-consciousness)도 갖고 있다. 과학자들(예:대뇌생리학자 존 엑클스, 생물학자 앙드레 구도페로 등)이 인간에게만 자아의식(自我意識)이 있고, 동물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한 것은, 인간에게는 생심이 있기 때문이다.


육심의 정적(情的)기능은 생심의 그것에 비하여 저차원이다. 생심과 마찬가지로 희로애락을 느끼며 제한된 범위내에서는 애타심(愛他心)도 발휘한다. 그러나 생심의 정적기능은 고차원적이어서 인간이 예술생활을 할 수 있고,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면서 민족이나 인류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 생심(生心)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육심의 의적(意的)기능도 생심의 그것에 비하여 역시 저차원이다.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의적기능은 의욕성(意欲性)으로서, 창조목적(創造目的; 개체목적, 전체목적)을 달성하려는 실천심(實踐心; 실천(實踐)力) 또는 결단심(決斷心; 決斷力)을 말한다. 동물의 창조목적은 주로 물질생활(육체 중심의 먹기, 살기, 새끼낳기 등)을 통해서 달성되지만, 인간의 창조목적은 육신생활을 터로 한 정신생활(眞?美?선(善)의 가치의 생활)을 통해서 달성되기 때문에, 의적기능에도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게 된다. 즉 동물의 의적기능은 의(衣)?식(食)?주(住)?성(性)에 관한 것이지만, 인간의 의적기능은 육심의 의적기능과 생심의 의적기능이 복합되어 있으며, 본연의 인간에게는 생심의 기능(가치의 실현 및 추구의 기능)이 육심의 기능보다 우위(優位)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의적기능이 선차적으로는 가치(정신적가치)를 추구하며, 후차적으로는 물질생활을 추구한다.


이상으로 인간의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육심의 지정의와, 생심의 지정의와의 통일임을 밝혔다. 즉 지적기능도 두 마음(육심, 생심)의 지적기능의 통일이요, 정적기능도 의적기능도 각각 두 마음의 기능의 통일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통일된 지적기능, 정적기능, 의적기능 등 3기능마저도, 서로 분리(分離)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술한 바와 같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다. 통일사상의 인식론(認識論)에는 이 내적성상의 통일된 측면을 특히 부각시켜서 이것을 영적통각(靈的統覺)이라고 부른다. 생심 중심의 통일된 인식능력(認識能力)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내적성상(內的性相)을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로 보는 관점은 자유의 문제에 대해서, 전통적인 미해결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iii) 대상(對象)=내적형상(內的形狀)


ㄱ) 내적형상(內的形狀)이란 무엇인가


다음은 내적발전적 사위기대(內的發展的 四位基臺)에 있어서의 대상의 입장인 내적형상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내적형상은 본성상 내에 있는 꼴의 부분으로서 관념, 개념, 원칙, 수리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관념은 이미 창조되었거나 또는 장차 창조되어질 피조물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표상(表象) 즉 영상(映像)이며, 개념은 일군(一群, 한 무리)의 관념에 공통적으로 포함된 요소를 마음속에 영상화(映像化)한 것이다. 그리고 원칙은 피조세계의 자연법칙과 규범법칙 등의 근본원인이 되는 법칙이며, 수리(數理)는 수적(數的) 원리로서 자연계의 수적현상(數的現象)의 궁극적 원인이다.


그러면 내적형상을 이루고 있는 유형(有形)의 요소를 창조와 관련시켜서 보자. 이 내적형상은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있어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그것은 비유컨대 주형(鑄型)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주형이란 쇠붙이를 녹인(融解한) 액체를 부어서, 물건을 만드는 거푸집을 뜻한다. 창조에 있어서 이 융해액(融解液)에 해당한 것이, 본형상 즉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Pre-Energy; 무형의 에너지)이다. 마치 인간이 주형에 철(鐵)의 융해액을 부어서 철물을 만들듯이, 하나님은 이 내적형상이라는 영적(靈的) 주형에 본형상(本形狀)이라는 영적액체(靈的 液體)를 부어 넣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물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ㄴ) 내적형상(內的形狀)은 일종의 주형(靈的鑄型)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형상(內的形狀)內의 주형은 인공주형(人工鑄型)과 달라서 겉모양만의 주형이 아니라, 내용 즉 세밀한 내부 구조까지를 갖춘 주형(영적주형)이다. 인간의 경우, 오장육부(五臟六腑)를 위시한 각종의 기관, 조직, 세포에 이르기까지 세밀한 구조를 갖춘 주형이며, 창조에 있어서 이러한 주형의 역할을 다한 것이 내적형상내의 여러 관념(단순관념(觀念), 복합관념(觀念))이라고 본다. 우리가 만물을 바라볼 때, 大小를 막론하고, 또 종류별을 막론하고 만물은 반드시 일정한 꼴을 갖고 있고, 일정한 종류에 걸쳐 공통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일정한 법칙이 작용하면서 일정한 수적(數的)내용을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마치 철물의 모양이 그 주형의 꼴을 닮아난 것처럼, 모두 주형(영적주형)인 내적형상(복합관념)을 닮아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또 하나 분명히 해둘 것은, 이상에서 설명한 내적형상이 모두 창조에 직접 관련된 것, 즉 피조물의 직접적인 모형이 된 것 뿐이었다는 점이다. 그 외에 창조의 모형(模型)과는 무관한 관념, 개념, 원칙, 수리 등이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하나님', '나', '부모', '美', '이상', '목적' 등의 관념(觀念)이나 개념(槪念)은, 시공의 세계에 만물로서 지음받을 수는 없는 것들이다. 이들은 창조와 간접적인 관련은 있어도, 직접적으로 피조물이 되지는 못한다. 이상으로 내적형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iv)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


ㄱ)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이란 무엇인가


다음은 내적수수작용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본성상 내부에서 신생체의 형성을 위한 수수작용에 의해 벌어지는 사위기대(四位基臺)이기 때문에 이 수수작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수수작용 역시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인데 이것은 바로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적기능과 내적형상간의 수수작용을 뜻한다. 물론 위에서 밝힌 창조목적을 중심한 수수작용이다. 그런데 이 내적수수작용은 요컨대 생각, 사고(思考), 구상(構想)을 뜻한다. 왜냐하면 본성상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그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하는 것을 왜 수수작용(授受作用)으로 보느냐 하는데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생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생각은 다음과 같은 기능을 다한 마음의 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억, 회상, 판단, 관심, 계획, 의견, 이해, 상상, 추측, 추리, 희망, 사색, 명상, 해석 등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심지어 망상(妄想)까지도 생각의 개념에 포함된다. 이것들은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의 현상(現象)(생각)은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각과, 현재의 상황(狀況)에 대한 생각,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의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과거에 경험한 것에 대한 생각이란 기억에 관한 것이며, 현재의 상황에 대한 생각이란 의견, 추측, 이해 등에 관한 것이며, 미래의 일에 대한 생각은 계획(計劃), 희망(希望), 이상(理想) 등에 대한 것을 말함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생각도 미리 마음속에 일정량(一定量)의 관념(일종(一種)의 마음의 영상(映像))이 들어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텔레비전의 시청(視聽)은 형광판(螢光板)에 영상이 비쳐질 때에만 가능하며, 영상이 형광판에 비쳐지지 않으면 시청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의 관념(영상(映像))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형성된다. 우리가 눈을 감고도 마음속에서 새를 생각하고 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실지로 과거에 새나 꽃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ㄴ) 관념(觀念)의 조작(操作) 생각하는데 일정량(一定量)의 관념이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의 일을 되새기는 생각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을 살피고, 앞날의 일을 내다보는 생각까지도 모두, 과거에 일단 경험한 관념을 가지고서만 가능함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경험이 풍부할수록 즉 경험한 관념이 많을수록 생각을 많이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저축(貯蓄)을 많이 해두면 필요할 때에 찾아내서 언제든지 살림을 늘릴 수 있는 것과 같다. 또 우리가 가재도구를 창고에 많이 저장해 두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에 꺼내어 쓸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인간이 지식(知識)을 배우고 견문(見聞)을 넓히는 것도, 결국은 기억의 창고에 여러 가지 관념(觀念)을 많이 저장하기 위한 것이며, 실제로 많이 저장된다. 즉 생각이란, 창고에서 저장물을 끄집어내어 필요할 때마다 적절히 사용하듯이, 기억의 창고에서 관념을 끄집어내어 여러 가지로 다루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통일사상에서는 관념(觀念)의 조작(操作)(Operation of Ideas)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 관념의 조작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관념이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표상(表象) 또는 영상(映像)을 말하며, 사물 하나하나의 영상과 같이 간단한 것을 단순관념(單純觀念)이라 하고, 이 단순관념이 2개이상 복합(複合)된 것을 복합관념(複合觀念)이라 한다(단 이것은 비교상의 상대적 개념이다). 그리고 조작이란, 기계같은 것을 이리 저리 다루는 것을 뜻한다. 특히 여기서의 조작의 뜻은 예컨대 필요한 여러 부품이나 기계를 저장소에서 끌어내는 것(인출(引出)), 또는 필요한 기계와 기계를 연결시키는 것, 또 필요에 따라서 기계를 구성부분(構成部分)으로 분해하는 것, 혹은 부품을 모아서 새로운 기계를 조립하는 것, 기계의 몸체는 그냥 두고 두 개의 부품의 위치를 교환하는 것, 또는 여러 기계를 연결시켜서 하나로 통일하는 것 따위의 작업을 의미한다.


ㄷ) 관념(觀念)의 조작(操作)은 수수작용(授受作用)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관념을 다루는 것이 관념(觀念)의 조작(操作)이다. 즉 첫째로, 기계의 인출(引出)에 해당하는 관념의 조작이 상기(想起(記憶), 기억을 떠올림)이며, 기계의 연결의 조작에 해당하는 것이 관념과 관념의 연합(聯合) 또는 복합(複合)이요, 기계의 분해에 해당하는 것이 관념의 분석(分析)이요, 새 기계의 조립에 해당하는 것이 신관념의 구성(構成)이요, 부품의 위치 교환에 해당하는 관념조작이 환위(換位)요, 여러 기계의 연결, 통일에 해당하는 것이 관념의 종합(綜合)이다. 그 외에 또 중요한 관념조작의 하나로, 일정(一定)한 관념(觀念)을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일도 있는데, 이것을 환질(換質)이라고 한다. 이상을 요약하면 관념의 조작(운용 operating system)이란, 과거에 경험한 여러 관념들 중에서 필요한 것을 가지고 상기, 연합, 분석, 구성, 종합, 환위, 환질 등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상기(想起; 회상 anamnesis)는 과거의 경험중에서 필요한 관념을 이끌어내는 것이요, 연합(聯合)은 한 관념을 생각할 때, 그로 말미암아 다른 관념이 연상되는 것이며(예:아버지를 생각할 때에 어머니가 연상됨과 같은), 여러 작은 관념들이 모여서 큰 관념을 이루는 것이 구성(構成)이요(예:토대, 주춧돌, 기둥, 도리, 들보, 대들보, 서까래, 지붕, 방 등의 관념이 모여서 집이라는 큰 관념이 구성되는 것), 어떤 관념을 작은 관념으로 나누는 것이 분석이며(예:인체는 신경계통, 소화기계통, 감각기관, 순환기계통, 호흡기계통, 근육조직, 비뇨기, 내분비선, 임파계통으로 되어 있다고 할때의 세분하는 방식), 분석한 여러 관념을 다시 하나의 큰 관념으로 總合하는 방식이 종합이다(예:신경계통, 순환기계통, 호흡기, 소화기, 감각기관, 비뇨기 등이 합해서 된 것이 인체이다 라고 할때의 생각(思考方式).


그리고 하나의 판단의 뜻을 변치 않게 하면서 주어와 술어를 바꾸는 조작을 환위(換位; 위치 바꿈)라 하고(예:모든 A는 B이다를 어떤 B는 A이다라고 하는 따위), 하나의 긍정판단을 부정판단(否定判斷)으로 하되 그 술어를 모순(矛盾)관념(觀念)으로 바꿔서 의미를 변하지 않게 하는 조작을 환질(換質)이라고 한다(예:A는 B이다를 A는 非 B가 아니다라는 따위의 사고방식). 설명이 조금 장황했지만, 생각이 내적수수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ㄹ) 수수작용(授受作用)의 유형


앞에서 말한 여러가지 종류의 사고(思考):예컨대 회상, 판단, 의견, 상상, 이해, 추리 등)이 여러 가지 방식의 관념(觀念)조작(操作)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관념조작이 바로 수수작용이다.

 
이제부터 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관념의 조작이 수수작용이라는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수수작용의 유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유형이란 양측의식형(兩側意識型(第一型)),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第二型)), 무의식형(無意識型(第三型)), 타율형(他律型(第四型)), 대비형(對比型(조합(組合)型: 第五型))의 5형의 수수작용을 말한다.


양측의식형은 주체와 대상이 모두 의식을 지니고 수수작용을 하는 경우를 말하며, 편측의식형은 주체만이 의식을 갖고 있고 대상은 무기물이거나 무기물과 같은 無생명(生命)의 입장에 있는 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을 말한다. 또 무의식형(無自覺型)은 주체와 대상이 전연 알지 못하는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수작용(예: 동물과 식물사이에 CO₂와 O₂의 교환)을 말하며, 타율형은 양측이 모두 무생명인 채 제3자(第三者)로부터 주어진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수수작용의 경우(예: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의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대비형은 인식 또는 판단하는 경우에 형성되는 것으로서, 편측의식형과 같으면서도 대상이 한몫에 두 개 또는 두 개 이상일 때, 혹은 대상의 속성이 두 개 또는 그 이상일 때, 이들의 요소를 비교해서 인식(認識)(判斷)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길을 걸어가는 한 쌍의 남녀(男女)를 멀리서 바라보고 두 사람의 연령, 태도 등을 비교 혹은 대조해서 그들이 부부라는 것을 판단하는 따위, 또는 가게에서 상품을 바라보고 비교한 후 좋은 것을 택하는 것, 혹은 푸른 숲속에 붉은 기와집의 지붕이 있음을 보고 그 녹색(綠色)과 적색(赤色)을 대조해서 조화의 미(美)를 느끼는 따위가 모두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이때 이 대비에 의한 판단은 비록 그것이 수수작용이라 하더라도 주체가 일방적으로 행한다. 주체가 일방적으로 대비 및 판단하는 것이 수수작용이 되는 이유는, 주체는 대상에게 관심을 주고 대상은 주체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이 주고 받는 작용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ㅁ) 생각(思考)도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앞에서 생각(思考)이 수수작용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실은 이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즉 인간의 경우 마음(성상(性相)) 내부의 영적통각(靈的統覺, 내적성상), 즉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가 주체가 되어서 내적형상 속에 있는, 그리고 경험에서 얻어진 여러 관념(영상)들을 먼저 대비(對比, 또는 對照)한다. 이 대비작용 자체도 좁은 의미의 대비형수수작용이다. 대상의 두 요소중의 하나를 주체로, 다른 하나를 대상으로 삼고 양자를 대비하는 것으로서, 대비는 비록 영적통각이 하는 것이지만, 영적통각의 관심이 양자사이를 왕래하기 때문에 내적형상내에서 대비되는 임의의 두 요소 사이의 작용도 일종의 수수작용이다. 좁은 의미의 대비형(對比型)수수작용(授受作用)인 것이다. 결국 영적통각과 내적형상과의 수수작용도 대비형수수작용이요, 내적형상내의 대비되는 임의의 두 요소 사이의 작용도 대비형수수작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수수작용(對比)의 결과이다. 그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양자가 완전히 일치할 때도 있고, 비슷할 때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다. 때로는 정반대일 경우도 있다. 또 양자가 대응관계(對應關係)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수수작용은 목적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목적에 따라서도 결과가 달라진다. 이러한 다양한 결과를 예상하면서 영적통각은 가급적 일정한 방향으로 이 수수작용을 조정해 나아간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내용이다. 생각에 회상, 이해, 판단, 추리, 희망 등 여러 가지가 있게 된 것은 이 수수작용의 목표(目的)와 대비방식의 차이에서 연유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리하여 다양한 생각이 계속되면서 물 흐르듯 이어져 나아간다.


그런데 물건을 창조할 때에는 이 생각의 흐름에 일단 매듭이 지어진다. 즉 창조코자 하는 주형(鑄型(模型))이 될 관념(단순관념, 복합관념 등)이 정해진다(이것을 주형성관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것은 대비형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신생체가 형성됨을 뜻한다. 즉 창조에 관한한 그 주형은 신생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로고스(말씀, 구상)로서의 신생체가 아니며, 그 전단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前로고스(PreLogos), 또는 전구상(前構想)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신생체인 신생관념(新生觀念; 주형성관념)은 그 속에 그 관념에 필요한 개념, 원칙, 수리 등의 요소를 다 갖춘, 그리고 치밀한 내부구조까지를 갖춘, 보다 더 구체화된 관념이다. 창조에 있어서 이와 같이 내적수수작용을 통해서 신생관념이 형성되는 단계가 내적수수작용의 초기(初期)단계이며, 실제의 피조물에 대한 구상(構想)(로고스)은 후기(後期)단계에서 이루어진다.


ㅂ) 목적이 중심(中心)이다.


이상으로 생각이란 마음(性狀)속에서 벌어지는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임을 밝혔는데, 이것이 수수작용이기 때문에, 목적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인간이 체험하는 생각에는 목적이 없는 막연한 생각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구상)은 처음부터 목적 중심이었다. 그것이 바로 심정을 터전으로 한 창조목적이었다.


하나님이 창조를 생각하기 前단계, 즉 심정 중심의 사위기대(四位基臺)(自同的四位基臺)만의 단계도 있었다고 보지만, 그 심정도 억제하기 어려운 정적인 충동이기 때문에 자동적사위기대의 터 위에서 필연적으로 창조목적이 세워져서 발전적사위기대가 세워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창조 후에도 이 자동적사위기대가 발전적사위기대의 터전이 되고 있다는 사실(하나님의 不變性, 絶對性)이 이것을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구상이 목적(심정을 터로 한 창조목적)없이는 세워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시사(示唆)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중요한 현실문제 해결의 또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무렇게나 생각하게 되어 있지 않다는 것, 본연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사랑(心情)을 동기로 하고 피조목적(전체목적과 개체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만 생각하게 되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적인, 자의적(恣意的)인 생각 패턴을 버리고 본연의 사고 패턴으로 돌아와서 사랑을 동기로 한 창조목적 실현(實現(地上天國實現))을 위하여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26) 이상으로 내적수수작용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v) 결과=구상(構想)


ㄱ) 결과란 무엇인가


다음은 결과 즉 구상(構想)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의 위치에 세워지는 구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앞의 항목(내적수수작용)에서 다룬 구상은 생각한다는 뜻의 구상, 즉 내적수수작용과 같은 뜻의 구상이었지만 여기서의 구상은 생각한 결과로서의 구상으로서, 요한복음(1:1)에 있는 말씀 즉 로고스를 뜻하며, 바로 本원상론의 신성(神性)(심정, 로고스, 창조성)중의 하나인 로고스이다. 따라서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로고스라는 소제목하에 구상(말씀)과 이법(理法)에 관한 설명을 이미 마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재론하는 것은,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다룬 로고스는 구상 즉 말씀으로서의 로고스라기 보다는, 이법으로서의 로고스여서, 여기에 더 보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앞에서 설명했던 로고스에 관한 요점을 다시 간단히 소개하고 이어서 약간의 보충을 가하려고 한다.


로고스는 원리강론의 해석에 따라서 말씀 또는 이법(理法)이라고 보는데, 말씀이 바로 구상, 사고, 계획 등이고 이법(理法)은 이성과 법칙의 통일이다. 그리고 이성은 자유성과 목적성이기도 하고, 법칙성(法則性)은 필연성과 기계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성과 법칙의 통일인 이법은 동시에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 목적성과 기계성의 통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법에 의해서 우주만물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만물속에 이법(理法)(이성과 法則)이 들어있고, 만물 상호간에도 이 이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계에 작용하고 있는 이법이 바로 자연법칙이요, 인간생활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이 가치법칙(價値法則, 規範法則)이다.


그리고 자유성(性)과 필연성(必然性)의 통일이 이법이라는 말은, 자유는 필연 즉 법칙속에서의 자유이며, 원리속에서의 자유 즉 원리안에서의 이성의 선택의 자유임을 뜻하며, 따라서 원리나 법칙을 무시한 자유는 사실은 방종(放縱)이다. 그리고 이법은 말씀과 별개의 것이 아니고 모두 로고스이며, 도리어 말씀의 일부가 이법이라는 것과, 말씀과 함께 이법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하나님의 대상(1987, p. 220)이기 때문에 일종의 신생체요, 일종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는 심정을 동기로 하였기 때문에 로고스(理法)도 사랑이 그 터전이 되고 있다는 것, 따라서 자연법칙, 가치법칙의 배후에도 사랑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도 밝혔던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 이법(價値法則)이 반드시 지켜져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생활은 따뜻한 사랑속에서 지켜지는 생활이어야만 거기에 비로소 백화가 만발하는 봄 동산과 같은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도 아울러 밝혔던 것이다.


ㄴ) 구상(構想)으로서의 로고스


이상이 앞의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다룬 로고스의 내용의 요점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앞에서는 주로 이법(理法)으로서의 로고스만을 다루었으며, 말씀 즉 구상으로서의 로고스는 상세히 다루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 구상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미 앞의 내적수수작용의 설명에서도 구상을 다루기는 했지만, 그것은 신생체 즉 결과물로서의 구상이 아니고 주로 생각한다는 뜻의 구상, 즉 수수작용으로서의 구상, 관념의 조작으로서의 구상이었다. 그런데 내적수수작용의 단계에서도 관념(觀念)의 조작의 의미를 갖는 구상 외에, 신생체의 뜻을 갖는 前구상(構想)이라는 개념이 쓰여진 바가 있었다. 즉 창조를 목적으로한 대비형의 수수작용의 결과 형성된 신생체로서 개념, 원칙, 수리 등을 갖춘, 그리고 치밀한 내부구조를 지닌 보다 더 구체화된 鑄型(靈的鑄型) 곧 모형(模型)으로서의 신생관념 즉 주형성관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상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말씀으로서의 구상이 아니며 다만 그 前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영상으로 말하면 사진과 같은 정적(靜的)영상(映像)에 불과하며, 영화에서와 같은 생동력있는 영상 즉 동적영상(動的映像)이 되지는 못한다. 문자 그대로의 설계도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말씀인 로고스는 생명이 들어있는 산 신생체(新生體)이며, 산 구상(構想)인 것이다. 요한복음 1장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그 안에 생명(生命)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1-4).


ㄷ) 로고스는 구상체(구상(構想)體)이다.


이와 같이 만물을 창조한 말씀(로고스)은 생명을 지닌 생동(生動)하는 구상체였다. 이것은 前단계인 관념의 조작단계에서 형성된 신생체로서, 치밀한 내부 구조를 갖춘 신생관념(주형성관념)에 생명이 부여되어 그것이 동적(動的) 성격을 띠게 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정적(靜的)인 성격을 지닌 신생관념이 동적 성격을 띠게 되었을까? 그것은 바로 내적수수작용의 초기와 후기의 2단계(二段階) 과정에 의해서인 것이다. 즉 영적통각(靈的統覺,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과 내적형상과의 수수작용에는 초기단계와 후기단계의 두 단계가 있는데, 그 초기단계에서는 관념의 조작에 의해서 신생관념(前構想)이 형성되고, 그것이 후기단계에서는 심정(사랑)의 힘에 의해서 지정의의 기능이 주입된 후 活力을 얻게 됨으로써, 즉 생명을 얻게 됨으로써 완성된 구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지정의 속에 가능성으로서만 포함되어 있던 양성, 음성이 이 후기단계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하여, 지정의의 기능의 발현에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구상이 바로 하나님의 대상인 로고스이며, 이성성상을 통일적으로 지닌 로고스 즉 로고스의 이성성상(원리강론 1987, p. 222)이다. 이것이 바로 이령(裡寧, 속에서 편안하게 거함) 창조한 말씀으로서의 로고스이며,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인 구상이다.


로고스의 이성성상이란 로고스속에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두 요소가, 로고스의 차원과 종류에 따라서 필요한 만큼 내포되어 있음을 뜻한다. 즉 내적성상(內的性相)인 지적기능, 정적기능, 의적기능과 내적형상인 관념, 개념, 원칙(법칙), 수리 등이 창조될 만물의 차원(광물, 식물, 동물, 인간 등)과 종류에 따라서 각양각색으로, 그 로고스에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내적수수작용의 후기의 단계에서 이미 관념조작(觀念操作)에 의하여 형성된 초구상(新生觀念)속에 지적, 정적, 의적기능이 심정(사랑)의 충동력에 의해서 차원을 달리하면서 주입된 후, 前구상(構想)을 활성화시킨 것이다.


vi)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설명의 요약 이상으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한 설명을 일단 마치고자 한다. 그러나 설명의 어떤 부분은 장황하고 부드럽지 못한 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상의 설명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서 다시 소개(紹介)하고자 한다.


ㄱ)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중심


내적발전적사위기대는 창조에 있어서 외적발전적사위기대보다 먼저 조성되는 사위기대로서, 이 사위기대의 중심인 목적은 심정을 터전으로 하고 세워졌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으로 인간을 세워놓고 그를 통해서 사랑을 실현하는데 있다. 따라서 인간의 피조목적은 서로 사랑함은 물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인간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대혼란이 야기되었으니, 이 혼란을 수습하는 길의 하나는 만인간의 모든 목적을 인간 본연의 피조목적으로 일치화시키는데 있다.


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의 입장은 내적성상인 지(知)-정(情)-의(意)의 三기능(機能)으로서, 이 세 기능은 서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경우 이 3기능에 대응해서 진(眞)-미(美)-선(善)의 3가치(三價値)가 세워지고 이 3가치에 대응해서 3대문화 영역(領域)이 세워진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주창조에 있어서 창조목적을 실현하고자 全力(지(知)-정(情)-의(意)의 총기능)을 투입하였다. 그러므로 오늘날 위기에 처해 있는 문화를 구제함과 아울러 신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도 3대 문화영역의 지성인, 학자들은 통일된 理念(目的)을 중심하고 총궐기해야 된다. 한편 인간의 지(知)-정(情)-의(意)는 肉心의 그것과 생심(生心)의 그것이 통일된 통일心인 동시에 지?정?의도 통일되어 있어서, 이 통일의 면을 특히 부각시킨 지정의의 통일체를 영적통각(靈的統覺)이라 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영적존재가 되게 하였으며, 아울러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갖게 하고 있다.


그리고 육심(肉心(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은 의식주(衣食住) 및 성(性)의 생활 즉 물질생활을 추구하는 것이고, 생심의 기능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생활을 추구한다. 여기에서 생심에 의한 가치생활의 추구를 선차적으로 하고, 육심에 의한 물질생활의 추구를 후차적으로 하는 것이 본연의 인간의 생활자세(생활姿勢)인 것이다.


ㄷ)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대상(對象)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대상의 위치는 내적형상이다. 즉 관념, 개념, 원칙, 수리 등의 꼴의 요소들이다. 그 중 개념, 원칙, 수리 등은 창조에 있어서는 모두 관념속에 통일되어 있고, 그 관념(觀念)은 주형(鑄型)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때 단순관념이 주형(영적주형)이 되기도 하고 복합관념이 주형이 되기도 한다. 창조에 있어서 이 주형(영적주형)은 치밀한 내부구조를 갖는다. 그리고 여기의 融液(영적융액)에 해당하는 것이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인 본형상(本形狀)이다. 그리고 창조에 관련되는 주형의 수(數)는 무수히 많으며 각각 그 꼴이 다르다. 그 하나 하나가 개별상인 것이다. 이 개별상이 인간에 있어서는 개인별(個人別)의 개별상(個別相)이기 때문에 주형의 역할은 일회한(一回限, 한번 만)으로 끝난다. 그러나 만물의 개별상은 종류별이기 때문에 하나의 주형은 한 종류 전체의 창조를 망라한다.


ㄹ) 내적수수작용(授受作用)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내적수수작용은 상기(上記)의 목적 중심한 내적성상(靈的統覺)과 내적형상과의 수수작용인데, 이것은 생각, 구상을 뜻한다. 즉 내적수수작용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것, 구상하는 것을 뜻한다. 생각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크게 나누어서 과거에 관한 생각(기억, 회상 등)과 현재에 관련된 생각(의견, 판단, 추리 등)과 미래에 관한 생각(계획, 희망, 이상 등)으로 유별(類別, 분류하여 구별함)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의 가장 기본요소는 관념 즉 마음속에 간직된 영상으로서, 생각이란 이 관념을 여러가지로 조작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관념의 조작에는 상기(想起), 연합(聯合(複合)), 분석(分析), 종합(綜合), 구상(構成), 환위(換位), 환질(換質) 등의 여러 방식이 있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내적수수작용이란 요컨대 이러한 관념의 조작이다. 그런데 그 수수작용은 물론 주체인 영적통각(내적성상)과 대상인 내적형상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만, 실제의 내용은 대상내의 여러 관념들을 여러 방식으로 조작한 것에 불과하다. 이 조작은 관념과 관념의 대비(對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 수수작용은 대상내의 관념과 관념의 대비가 병행되는, 주체(主體(영적통각))와 대상(對象(내적형상))간의 수수작용이기 때문에 대비(對比) 성격을 띤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의 수수작용으로서, 일종의 대비형의 수수작용이다.


ㅁ)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


끝으로 결과의 위치에 세워지는 구상에 관한 설명을 요약한다. 결과로서의 구상은 내적수수작용에서 다룬 구상과 다르다. 후자는 생각한다는 것 즉 작용을 뜻하며, 전자는 수수작용의 결과로 나타난 신생체를 뜻한다. 신생체로서의 이 구상은 바로 로고스이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내적수수작용에는 초기, 후기의 2단계가 있는데 초기의 단계에서는 내적형상 내의 관념조작(觀念操作)에 의해서 신관념(新觀念)이 형성된다. 이것도 일종의 신생체이며 구상(前構想)이다. 그러나 이것은 말씀으로서의 구상의 전단계에 불과하며, 생동성(生動性, 살아서 움직이는 성질)이 없는 정적영상(靜的映像)에 불과하다.


우주를 창조한 말씀인 구상(로고스)은 생명이 들어 있는 산 신생체(新生體)로서, 이것은 내적수수작용의 후기단계에서 영적통각인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심정의 충동력에 의하여 신생관념에 주입된 후 同관념(觀念)이 활성화됨으로써, 즉 생명을 얻게됨으로써 완성된 구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때의 구상이 바로 이성성상을 지닌 로고스이다. 그리고 이 구상(構想)中에는 이법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 이법은 이성과 법칙의 통일이며 자유성과 필연성의 통일인 것으로서,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신성(神性)의 항목에서 로고스라는 소제목하에 비교적 상세히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생략(省略)하고자 한다.


④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


i)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란 무엇인가


네 종류의 사위기대(四位基臺)中에서, 끝으로 외적발전적사위기대에 관해서 설명코자 한다. 이것은 외적사위기대와 발전적사위기대가 조합된 것으로서 본성상(本性相)의 외부에서의 수수작용, 즉 본성상과 본형상의 수수작용의 터전이 되고 있는 외적사위기대가 발전성, 운동성을 띠게 된 것을 말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통일사상에서 볼 때, 발전이란 새로운 성질의 개체 즉 신생체가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창조를 결과의 면에서 파악한 개념이다. 따라서 발전적사위기대란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신생체를 낳을 때의 사위기대(四位基臺)를 뜻한다.


그리하여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본성상의 외부에 형성된 외적사위기대가 발전성을 갖추게 되어서, 발전적사위기대가 된 것이다. 이미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설명에서 언급했듯이,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형성된 뒤를 이어서, 그 다음 단계의 사위기대로 형성되는 것이다. 즉 본성상을 중심하고 볼 때, 자동적사위기대 때와 마찬가지로 발전적사위기대도 본성상의 안팎에서 형성되는데, 자동적사위기대 때처럼 동시적(同時的)이 아니고 계속적(繼續的)이어서 내적인 기대가 먼저 형성된 후 그 다음에 외적인 기대가 형성된다.


ii)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의 기반위에 형성된다.


이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에 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누차 말한 바와 같이 사위기대란 요컨대 심정 또는 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한 후, 그 결과를 맺는 현상을 공간적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내적 및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도 수수작용으로써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발전이란 창조를 결과의 면에서 파악한 개념이기 때문에, 발전적사위기대를 바로 이해하려면 창조나 제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이것을 인간의 경우를 비유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사람은 무엇을 만들려 할 때, 먼저 마음으로 반드시 구상을 한다. 가령 집을 지으려면 일정한 목적을 세우고, 깊이 구상을 하여 계획서(計劃書)나 청사진을 만든다. 계획서나 청사진은 그 구상을 잊지 않기 위해서 지면에 나타냈을 뿐, 그대로가 마음의 구상인 것이다. 이 구상이 위에서 말한 내적수수작용이며 곧 창조의 第一단계이다. 이어서 창조의 제2단계(第2段階)가 시작된다. 이것은 여러가지 건축재료를 가지고 인간들이 그 구상(청사진)에 따라서 창조작업 즉 건축공사를 진행한다.


그리하여 드디어 일정한 시간후에 목적했던 대로의 건물을 완성한다. 여기서 마음의 구상은 성상내의 수수작용 즉 내적수수작용이다. 그리고 사람이 건축자재를 가지고 그 구상대로 집을 짓는 것도 수수작용이다. 이것은 마음(性相)의 밖에서 벌어진 수수작용이기 때문에 외적수수작용이라 한다. 그런데 구상(構想)(청사진)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요, 건물도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기 때문에 모두 신생체(新生體)이다. 따라서 이 신생체의 출현은 동기로 보면 창조요, 결과로 보면 발전이다. 이 수수작용에서 주체는 구상(현실적으로는 구상을 지닌 인간, 또는 그 인간을 대리한 다른 인간들)이요, 대상은 건축자재 등이다. 그리고 이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이 바로 건축공사의 진행인 것이다. 그리고 이 수수작용의 결과인 신생체가 바로 완성된 건물인 것이다.


또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이때에도 화가는 일정한 목적을 먼저 세워놓고 구상을 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구상을 소묘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것이 제일(第一)단계이다. 구상이 끝나면 제2단계(第2段階)의 작업이 개시된다. 즉 화폭, 붓, 채료(彩料(물감)), 화가(畵架) 따위의 화구(畵具)를 써가면서 화가(畵家)는 구상한 대로의 그림을 그린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림이 완성된다. 이때 제일(第一)단계의 구상도 수수작용이요, 제2단계(第2段階)의 그림 그리기도 수수작용이다. 그리고 제일(第一)단계의 구상도, 제2단계(第2段階)의 완성한 그림도, 모두 전에 없었던 새로운 결과이므로 신생체(新生體)들이다. 따라서 이 그림 그리기도 또한 창조요, 발전인 것이다.


iii) 모든 창조는 2단계의 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에 의해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 진다. 첫째로, 창조에는 반드시 두 단계의 과정이 있으며 둘째는, 첫단계는 내적인 구상의 단계요 다음 단계는 외적인 작업의 단계라는 것이며, 셋째는 두 단계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이 모두 동일한 목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반드시 그 결과로서 신생체를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의 첫단계가 바로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요, 둘째 단계가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이다. 이 일련(一聯)의 원칙은 모든 창조활동에 적용된다. 생산, 제작, 발명, 예술 등 어떠한 유형의 창조활동에도 예외없이 적용된다. 그 이유는 이 원칙의 기준이 하나님의 원상(原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본성상의 안팎의 수수작용 즉 내적발전적수수작용과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인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먼저 일정(一定)한 목적을 세워 놓고 만물 창조를 구상한 다음, 재료에 해당하는 형상(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을 사용해서 구상한 대로의 만물을 실제로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구상하는 단계가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요, 실제로 만물을 만드는 단계가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단계이다.


이상의 설명으로 인간의 창조나 제작에는 반드시 그 전에 구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외적발전적수수작용에는 반드시 그 전에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이 인간의 구상 때의 수수작용(授受作用)의 원형은 하나님의 원상내의 수수작용이었다. 즉 원상(原相)內의 수수작용은 반드시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서만 행해진다. 사위기대의 별명이 수수작용이요, 수수작용의 별명이 사위기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내적발전적수수작용이 반드시 외적발전적수수작용에 先行한다는 것은 내적발전적사위기대가 반드시 외적발전적사위기대에 선행(先行)해서 형성(形成)됨을 뜻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창조에 있어서는 반드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와 외적발전적사위기대가 연속적(連續的)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을 원상(原相)의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이것을 도표로 표시하면 그림 1-13과 같다. 인간의 경우의 현실적인 창조활동 때에도 내적 및 외적인 사위기대(四位基臺)가 연속적으로 형성된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창조활동에 있어서 연속적으로 형성되는 2단계의 사위기대를 현실적인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라고 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심(疑心)이 생길는지 모른다. 즉 실제(實際)의 창조에는 반드시 구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기 쉽게 표현하면 될 것을, 왜 내적발전적사위기대니 외적발전적사위기대니 이단구조니 하는 어려운 표현을 쓰느냐, 통일사상은 왜 쉬운 말도 어렵게만 표현하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해서 답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통일사상은 천주(天宙, 영계와 지상세계)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다루기 때문이다. 근본원리란 영계(靈界)와 지상세계(地上世界)를 막론하고 존재세계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근본이치이다. 이 근본이치(根本理致(原理))는 깊고 넓은 내용을 함축하면서도 그 이치를 나타내는 용어는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한 용어여야 한다. 그 예의 하나가 통일원리의 이성성상 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다. 이 용어는 인간의 마음과 몸을 나타내는 용어일 뿐 아니라, 동물, 식물, 광물 더 나아가서 영인체와 영계의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 속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즉 이성성상의 뜻의 내용은 대단히 깊고 넓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이성성상의 용어 그대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쉽고도 상세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설명에는 때때로 예화(例話)나 비유(比喩)도 필요하다. 통일사상에서 다루는 근본원리는 오관(五官)으로 느낄 수 없는, 하나님과 영적세계(靈的世界)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여기서 예화(例話)나 비유(比喩)를 들면서 행하는 설명은, 다만 그 근본원리를 밝히는 수단에 불과하며, 근본원리 그 자체는 아니다. 근본원리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이성성상 또는 성상(性相)과 형상(形狀)이다. 마찬가지로 수수작용(授受作用), 사위기대(四位基臺), 2단구조(構造) 등도 근본원리에 관한 개념(槪念) 즉 기본개념들이어서 이 용어들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내적발전적사위기대(內的發展的四位基臺), 외적발전적사위기대(外的發展的四位基臺),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도 그러한 근본원리를 함축한 개념들이다. 여기서 다시 분초(分秒)를 다투면서 살아야 하는 이 바쁜 시기에, 그런 어려운 기본개념을 우리가 꼭 배워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의문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 기본개념들을 바르게 파악함으로써만 현실의 여러가지 난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준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통일사상에 있어서의 기본개념의 중요성에 관해서 설명하였다.


iv) 외적발전적사위기대(發展的四位基臺)의 구성요소(構成要素)


다시 본론에 돌아와서 본(本) 소제목인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설명을 계속코자 한다. 앞에서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반드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다음 단계로서 형성되기 때문에, 이러한 2단계(二段階) 과정을 현실적 창조의 2단구조(構造)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원상(原相)內에서도 동일한 창조의 2단구조가 형성된다. 위에서 본성상의 안팎에서 형성된다고 한 사위기대 즉 내적발전적사위기대 및 외적발전적사위기대가 그것이다. 이것은 원상내에서 창조때에 형성되는 사위기대이기 때문에 이것을 원상(原相)의 창조(創造)의 2단구조(構造)(前述)라고 한다.


원상(原相)內의 내적발전적사위기대는 이미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소항목에서 상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설명을 약하기로 하고, 다만 그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4위치중 중심의 위치에는 목적이 세워지며, 주체의 위치에는 내적성상(內的性相)(靈的統覺: 知-情-意의 통일체)이 세워지고, 대상의 위치에는 내적형상이, 그리고 결과의 위치에는 구상이 신생체로서 세워진다는 것과, 그리고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은 생각하는 과정 즉 관념조작(觀念操作)의 과정이라는 것만을 상기(想起)시켜 둔다.


그런데 원상내의 외적발전적사위기대도, 4개의 위치 즉 중심, 주체, 대상, 결과로서 이루어짐은 물론인데 이때의 중심(中心)은 내적인 사위기대 때와 마찬가지로 심정을 터로 하는 창조목적이요, 주체(主體)는 여기서는 본성상(本性相)이며 대상(對象)은 본형상(本形狀)이다. 그리고 수수작용에 의해서 형성되는 결과는 신생체로서의 피조물(被造物)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4위치 즉 중심, 주체, 대상, 결과의 위치에 각각 세워지는 목적, 본성상, 본형상 및 피조물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런데 목적은 내적발전적수수작용때의 목적, 즉 창조목적과 동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약하기로 하고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 대상(對象)=본형상(本形狀), 외적수수작용, 결과=피조물(被造物) 등의 소항목을 가지고 설명하고자 한다.


ㄱ)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


원상내의 외적발전적사위기대는 본성상(本性相)과 본형상(本形狀)과의 수수작용의 기대(基臺)이기 때문에 주체의 입장이 본성상임은 두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 본성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내적발전적사위기대의 결과의 입장인 구상(構想)이다. 즉 목적을 중심하고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신생체(新生體)로서 나타난 말씀이요, 로고스요, 구상이다. 그런데 이 내적수수작용이란 생각하는 것, 즉 사고(思考)의 과정이다.


이러한 내적수수작용의 과정에는 前단계와 後단계의 두 단계가 있는데(前述), 전단계는 관념(觀念)조작(操作)이 진행되는 과정이어서, 이 단계에서 新관념(觀念) 즉 前구상(構想)이 형성된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영적통각에서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 그 속성인 양성-음성의 영향을 받으면서 前구상(構想)에 주입된 후, 그 前구상(構想)이 생명을 지닌 완성된 구상(構想), 즉 로고스로서 나타나게 되는데 이렇게 완성된 로고스가 바로 이성성상을 지닌 로고스이다. 그런데 구상으로서의 로고스는 비록 신생체이기는 하지만, 본성상의 내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주체(本性相)와 대상(本形狀)의 수수작용에 있어서는 영적통각(靈的統覺)에 파지(把持; 파악이 지속)되어 주체로서 작용한다. 여기서 밝혀둘 것은, 내적수수작용에 의해서 내적성상인 영적통각에서 지-정-의가 내적형상내에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에 주입되었다 하더라도, 영적통각 자체는 본래 무한성을 띤 기능이기 때문에, 그것의 일부가 신생관념 속에 주입된 뒤에도 여전히 내적성상으로서의,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적 기능은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본성상과 본형상간의 수수작용에 있어서 주체로서의 본성상은 영적통각(靈的統覺)에 파지(把持)된 상태에 있는 로고스이다. 이상으로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主體)=본성상(本性相)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ㄴ) 대상(對象)=본형상(本形狀)


이미 원상(原相)의 내용의 부분 중 신상의 제목 하에, 형상(본형상(本形狀))의 소항목에서 설명한 것처럼, 본형상은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의 궁극적(窮極的)-질료적(質料的) 요소이다. 질료적 요소란 피조물의 유형적(有形的)要素(물질)의 근본원인을 뜻하며,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은 마치 물(水)과 같이 어떠한 형태라도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그런데 질료적요소는 물질의 근본원인이면서도 과학의 대상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 궁극적 원인으로서 통일사상은 이것을 前단계에너지 또는 간단히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 Pre-Energy)라고 부른다. 이 본형상에서 후술하는 바와 같이, 마치 물이 용기에 부어 넣어져서 용기의 형태를 취하듯이, 본성상의 구상(로고스)의 주형(鑄型; 영적주형)속에 부어 넣어져서 현실적인 만물로서 지음받게 된다.


ㄷ)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다음은 외적수수작용에 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만물이 하나님의 성상과 형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창조되었다28)는 통일원리나 통일사상의 주장이 참된 내용임을 밝히려는 것이다. 외적수수작용도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 행해지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떨어져 있다가 다시 합해져서 하나의 신생체(新生體) 즉 만물이 되는 것으로 설명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의 세계에는 內와 外, 上과 下, 원근(遠近), 광협(廣狹, 넓고 좁고)이 없다. 大-中-小가 없으니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가 같다. 또 선후(先後)가 없으니 과거(過去)-현재(現在)-미래(未來)가 없으며 영원과 순간이 동일하다.


따라서 시공(時空)을 초월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이러한 수수작용이 벌어지기 때문에 설명의 편의상(또는 이해의 편의상(便宜上)), 주체와 대상이 동일 공간을 중첩적(重疊的)으로 차지하면서 수수작용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컨대 인간의 영인체(주체)와 육신(대상)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가 합해져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본래부터 동일한 공간을 중첩적(重疊的)으로 차지하면서 수수작용을 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원상내의 외적수수작용을, 동일공간을 중첩적으로 차지한 주체와 대상간의 수수작용으로 보고, 또 수수작용에 의해서 산출된 신생체(新生體)인 피조물도 역시 동일 공간을 중첩적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입장에서 논리(論理)를 전개해 보자.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외적발전적사위기대의 주체인 본성상은 영적통각(靈的統覺)에 파지(把持)된 상태에 있는, 신생체(新生體)인 로고스이며, 대상인 본형상은 무한응형성(無限應形性)을 지닌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였다. 이러한 주체와 대상이 중첩되어서 동일공간을 차지한 채 수수작용하여 신생체인 피조물(예컨대 말과 같은 동물)을 산출(産出(創造))하게 되는데, 이때 산출된 피조물도 동일한 공간을 중첩적으로 차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상으로 수수작용이 행해지는 기대의 4위치는 문자 그대로 떨어져 있는 4위가 아니라 4개의 정착물(定着物)이 함께 겹쳐 있는 하나의 위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하나의 위치에서 서로 겹쳐진 채로 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수수작용을 한 후, 그 결과물로서 피조물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수수작용의 구체적인 내용이란 무엇인가. 중첩된 상황속에서의 수수작용이란, 본형상인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가 본성상내에 형성된 구상(構想)(로고스)의 주형(鑄型(영적주형))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성상내의 내적수수작용의 첫단계에서 형성된, 치밀한 內部구조(構造)를 갖춘 신생관념(新生觀念) 즉 주형성관념(鑄型性觀念)이 다음 단계에서 심정의 충동에 의하여 생명이 부여(賦與)된 후 나타난 것이 완성된 구상이다. 따라서 이 완성된 구상은 바로 생명을 얻은 주형성관념이요 살아있는 주형이다.29)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주형(鑄型)은 초기(初期)단계에서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으로서, 치밀한 내부구조를 갖춘 주형성관념이 후기(後期)단계에서 활력이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활력이 주어졌다 하더라도, 그리고 또 아무리 내부 구조가 치밀하다 하더라도 주형(영적주형)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에, 거푸집에 쇠(鐵)의 융액(融液)을 부어 넣어 철물을 만들 때와 같이, 이 주형성관념속에도 반드시 융액에 해당하는 본형상(本形狀)의 질료 즉 전에너지(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가 부어 넣어질 수 있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주형의 공간은 반드시 융액이 넣어져서 채워지기 마련이다. 본성상과 본형상 사이에 이러한 현상이 벌어질 때 그것이 바로 수수작용이다. 즉 본성상의 주형성관념내의 치밀한 공간에 본형상의 질료적 요소가 삼투(渗透)하여 채워지는 것이 바로 수수작용(授受作用)이다(이때 본형상 속에 가능성으로만 잠재하고 있던 속성(屬性)인 음성-양성(陽性-陰性)이 표면화(表面化, 겉으로 드러남)되기 시작하여 질료적 요소의 삼투(渗透, 스며듬)의 흐름에 조화로운 변화를 일으킨다). 왜 이 현상이 수수작용이 되느냐 하면, 본성상(주체)은 주형의 공간을 가지고 본형상(대상)에게 질료의 삼투(渗透, 스며듬)의 기회를 제공하고, 본형상은 질료로 공간을 채움으로써 그 공간의 존재목적을 이루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약간 모형적으로 표현했지만, 이러한 작용이 동일 위치의 주체와 대상이 중첩(重疊)된 상황하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주창조에 있어서 원상내부에서 이루어진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참 내용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첨가할 것은, 이 수수작용은 형(型)으로 봐서 편측의식형(片側意識型)의 수수작용이다. 왜냐하면 이 수수작용때의 주체는 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인 영적통각(靈的統覺)(鑄型性觀念을 포함)이고, 대상은 본형상 즉 질료이기 때문이다.


ㄹ) 결과=피조물(被造物)


a) 결과란 무엇인가


다음은 외적발전적(發展的)사위기대(四位基臺)의 결과의 위치에 세워지는 피조물에 관해서 살펴보자. 우선 이 결과로서의 피조물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본성상과 본형상이 수수작용함으로써 형성된 신생체(新生體)이다. 이것이 원리해설(原理解說)(1957년판)에 적힌 피조세계는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이 창조원리에 의해서 형상적 또는 상징적인 실체로 전개된...... ,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다(同上 p. 25)라는 문장중의 하나님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며,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개별진리체(個性眞理體)(同上, p. 25)이며, 주체와 대상의 이성성상의 실체적 전개에 의하여 창조된 피조물(同上 p. 24)이다.


그리고 또 원리강론(1966년판)에 적힌 피조물은 모두 무형(無形)의 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 실체로 分立된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p. 26) 라는 문장의 실체대상(實體對象)이며, 이러한 실체대상을 우리는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同上)의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이다. 이와 같이 통일원리(원리해설(原理解說), 원리강론)에서 말하고 있는 실체대상이니 개성진리체이니 하는 개념은 모두 피조물을 보는 관점에 따라서 표현을 달리한 개념들이다. 실체대상은 객관적(客觀的), 물질적(物質的) 측면을 부각(浮刻)시킨 개념으로서 로고스에서와 같이 마음에만 그려진 관념적인 대상이 아니라, 3차원의 공간적 요소를 갖춘 물질적 대상이라는 뜻이며, 개성진리체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개념으로서 피조물은 모두 닮기의 법칙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예외없이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인 것이다.


b) 닮음과 외적수수작용(授受作用)


여기서 특히 밝히고자 하는 것은, 피조물(被造物)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그 닮음의 내용이, 외적(발전적)수수작용의 관점에서 볼 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미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피조물은 본성상과 본형상이 창조목적을 중심하고 수수작용을 한 결과로서 나타난 신생체(新生體)였다. 그런데 이때의 본성상은 살아 있는 주형적(鑄型性)관념(觀念)을 파지(把持)한 영적통각, 또는 영적통각에 파지된 살아 있는 주형성관념이며, 본형상은 질료적요소(質料的要素)였다. 그리고 이 살아있는 주형성관념이 바로 로고스 즉 이성성상을 지닌 로고스이다.


이 이성성상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의 두 요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때의 내적성상은 지(知)-정(情)-의(意)의 기능이며, 내적형상은 관념조작(觀念操作)에 의해서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주형성관념)을 뜻한다. 즉 로고스는 지정의의 기능과 신생관념(주형성관념)이 복합된 신생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최종의 신생체인 피조물속에 포함된 본성상의 부분은 내적성상에 해당하는 영적통각의 일부로서의 지정의의 기능과, 내적형상에 해당하는 신생관념(주형성관념)이었다.


그리고 본형상인 질료적요소는 그대로 몽땅 신생체(新生體)(被造物)에 포함되어 있다. 주형성관념의 치밀한 공간속에 본형상의 질료적요소가 삼투(渗透)하였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을 뜻한다. 이리하여 외적수수작용에 의해서 본성상의 요소와 본형상의 요소 전체가 피조물을 구성하였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밝혀 두고자 하는 것은 본성상과 본형상이 각각 그 속성인 양성(陽性(本陽性))과 음성(陰性(本陰性))을 함께 지닌채로 피조물을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의 요소 및 본양성과 본음성의 요소를 모두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본성상속에 포함된 신생관념 즉 주형성관념은 그대로가 개별상(個別相)이기도 하다. 결국 피조물은 하나님의 속성(본성상-본형상, 본양성-본음성, 그리고 개별상)을 모두 이어 받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피조물(個體)을 개성진리체(個性眞理體)라고 한다. 이것이 통일원리에 피조물을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개성진리체라고 한 말의 내용인 것이다.


c) 로고스와 피조물(被造物)의 관계


다음은 로고스와 피조물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성경(聖經)에는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함에 있어서 말씀으로써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한 1:1~3) 이 말씀이 바로 로고스였다(원리강론 1988, p. 222). 그런데 통일원리에는 로고스는 하나님의 대상이며 주체이신 하나님이 이성성상이시므로 그 대상인 로고스도 역시 이성성상이 아닐 수 없다(同上). 만일 로고스가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로고스로 창조된 피조물이 또한 이성성상으로 되어 있을 수가 없다(同上)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피조물의 이성성상은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은 것이요,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것임을 뜻하는 것으로서 로고스의 이성성상과 하나님의 이성성상이 완전히 동일한 것인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통일사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이성성상은 물론 본성상과 본형상이지만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다. 즉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로고스의 이성성상은 일치(一致)하지 않는다. 따라서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았다는 뜻이요,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것은 로고스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을 닮았다는 뜻이다. 그러면 만물이 닮은 로고스의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내적수수작용의 後期단계에서 영적통각(지(知)-정(情)-의(意)의 통일체)의 일부가 전단계에서 형성된 신생관념(新生觀念)(주형성관념)에 주입(注入)됨으로써 생겨난 완성된 구상(構想), 산 구상(構想)이었다. 따라서 로고스의 내적성상은 주형성관념속에 주입된 일부의 지정의의 기능이며 내적형상은 주형성관념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지닌 내적성상과 내적형상이 바로 로고스의 이성성상이었다.


통일원리에서 피조물의 이성성상이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로고스의 이성성상이란 바로 이러한 내용의 이성성상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공간적-삼차원적 실체(三次元的 實體)인 피조물의 모습 그대로가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로고스는 산 구상이며 활력(活力)을 띤 관념(觀念)(주형성관념)에 불과했다.


비유컨대 움직이는 영상과 같은 것이며 꿈속에서 만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모두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는 것은, 이같은 살아 있는 영상을 닮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꿈속의 사람은 다른 모든 면에서 현실의 인간과 같지만 물질적(物質的)인 체(體(肉體))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만은 다른 것이다. 다른 만물도 마찬가지이다. 이 물질적(物質的) 체(體)까지를 갖춘 만물이 되려면, 만물은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본성상과 본형상을 닮게 될 것인가? 그것은 창조 때의 외적수수작용에 의하여 본성상인 완성된 구상(構想) 즉 살아 있는 주형(鑄型(觀念))의 그 치밀한 공간속으로 본형상인 질료적요소(質料的要素(前에너지, 에너지로 변환되기 전의 상태))가 삼투함으로써(즉 스며듦으로써) 닮게 된다. 이러한 수수작용을 통하여 움직이는 영상(映像)이 물질적인 체(體)를 갖추게 되어서 현실적인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이때의 만물이 바로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은 피조물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이성성상과 로고스의 이성성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가 밝혀졌을 것이며, 아울러 피조물이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닮음과 로고스의 이성성상을 닮았다고 할 때의 닮음이 다르다는 것도 명백해졌으리라 믿는다. 다음은 수수작용과 관련된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에 관하여 살펴보자.

 

3.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


1)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란 무엇인가?


위에서 수수작용은 사위기대를 터로 하고 행해진다는 것을 밝혔다. 즉 수수작용이 벌어지려면 반드시 중심(中心)과 주체(主體)와 대상(對象) 및 결과의 4위치가 세워져야 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수수작용의 현상을 공간적 측면에서 파악(把握)한 개념이 사위기대(四位基臺)이다. 모든 현상은 공간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지닌다. 수수작용의 현상도 시간적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수수작용의 과정을 시간적으로 파악한 개념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다. 즉 수수작용에 있어서 사위기대가 정해지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다룬 개념이 동(同) 작용이다. 즉 먼저 중심이 정해지고 그 다음에 주체와 대상이 정해지고 맨 나중에 결과의 위치가 정해진다는 관점에서 본 수수작용이 바로 정분합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수수작용을 3단계 과정에서 파악한 개념이다.

 
통일원리(원리강론)에 사위기대는 정분합작용에 의한 하나님, 부부, 자녀의 삼단계로써 완성되므로 삼단계 원칙의 근본이 된다(1987, p. 43)고 한 것도 사위기대는 수수작용의 공간적 파악이요, 정분합작용은 그것의 시간적 파악임을 보여 주고 있다.31) 따라서 이 작용의 내용은 수수작용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즉 심정(心情)을 터로 한 목적을 중심하고 주체와 대상이 원만하고 조화로운 상호작용에 의해서 합성체(合性體) 또는 신생체(新生體)를 이룬다고 하는 내용은 수수작용에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정분합작용의 종류도 수수작용의 종류와 일치한다. 즉 내적자동적정분합작용, 외적자동적정분합작용, 내적발전적정분합작용, 외적발전적정분합작용 등이 그것이다.


2) 正分合과 正反合


그런데 시간성(時間性)을 띤 이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의 개념은 특히 공산주의의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과 비교된다는 점에서 의의(意義)가 있다 하겠다. 공산주의의 철학은 유물변증법으로서 이것은 자연의 발전법칙(發展法則)에 관한 이론이다. 그 내용은 모순(矛盾)의 법칙, 양(量)의 질(質)에의 전화(轉化)의 법칙,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의 법칙 등의 3법칙으로서 이것은 헤겔의 관념변증법에서 변증법을 따다가 유물론(唯物論)과 결부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헤겔은 그밖에 이같은 변증법이 진행하는 형식도 아울러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정-반-합(正-反-合), 또는 정립-반정립-종합(定立-反定立-綜合), 또는 긍정-부정-부정의 부정(긍정(肯定)-否定-否定의 否定)의 3단계형식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이 헤겔의 변증법의 형식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자연, 역사 등의 발전을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즉 사물이 발전하려면, 그 사물(事物(肯定 또는 正))은 반드시 그 내부에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反)를 지니게 되어서 양자가 대립하게 되는데(이 상태를 모순(矛盾)이라 함), 이 대립(모순)은 다시 否定되어서(부정의 부정) 한층 높은 단계로 지양(止揚; Aufheben))한다(合)고 설명한다. 이것이 정-반-합(正-反-合) 또는 긍정-부정-부정의 부정(肯定-否定-否定의 否定)(혹은 定立-反定立-綜合)의, 삼단계의 변증법적 진행형식이다. 여기서 지양(止揚)은 사물이 부정되었다가 재차 부정될 때, 그 사물의 긍정적 요소는 보존되어서 새로운 단계로 높여지는 것을 말한다. 계란에서 병아리가 부화하는 과정이 그 적절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계란(受精卵)이 병아리가 되려면 정(正) 또는 긍정(肯定)으로서의 계란은 그 내부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반 또는 부정)인 배자를 지니게 되며, 이 배자가 커감에 따라서 양자의 대립(모순(矛盾))이 커가다가, 드디어 이 모순이 지양(止揚)되어서 계란 껍질은 다시 부정되고(부정의 부정), 긍정적 요소인 유황(卵黃, 노른자), 유백(卵白, 흰자) 등은 양분으로 배자에 흡수된 후(保存, 止揚) 병아리가 되어서 부화한다(合).


이 정-반-합(正-反-合)의 형식을 마르크스주의는 사회발전의 설명에도 적용한다. 예컨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로 발전하는 과정의 설명에 정-반-합(正-反-合)의 형식을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즉 자본주의(正)는 반드시 그 내부에 그 자체를 부정하는 요소인 프롤레타리아계급(反)을 지니게 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성장에 따라서 계급대립(모순)이 격화되며, 드디어 자본주의체제의 외피는 터지고(부정의 부정), 자본주의의 긍정적 성과(경제성장, 기술발전 등)는 그대로 보존되면서 한층 더 높은 단계인 사회주의에로 이행한다(合)는 것이다.


3) 정반합(正反合)이론의 비판(批判)


그러면 이제부터 정-반-합(正-反-合)의 3단계 형식을 비판하여 그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한다. 그 옳고 그름의 기준(基準)은 자연의 발전이나 사회발전의 실제의 사실이 이 3단계의 形式과 일치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변증법을 오래도록 과학이라고 주장해 왔다. 따라서 변증법의 진행형식(進行形式)도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는 과학적 형식으로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또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현실문제(現實問題(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과 병폐의 제거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출현한 철학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유물변증법도 그리고 변증법의 진행형식의 이론도 모두 객관적(客觀的(과학적))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또 사회의 현실문제 해결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유물변증법도, 변증법의 진행형식의 이론도 모두 잘못된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먼저 계란이 부화되는 실제의 경우를 분석하면서 이 3단계형식을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로, 계란내의 배자는 계란의 발전을 위하여 나중에 부정적 요소로서 발생한 것이 아니며, 계란 껍질이나 난백(卵白; 흰자), 난황(卵黃; 노른자)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계란의 일부였다. 따라서 배자는, 자신도 그 一部인 계란을 부정할 수가 없다. 만일 배자가 계란을 부정하려면, 처음부터가 아니고 중간에 계란속에서 대립물로 생겨난 것이어야 한다. 이래야만 정-반-합(正-反-合)의 본뜻에 부합된다. 그러나 배자는 실제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계란의 일부였던 것이다.


둘째는 난백(卵白), 난황(卵黃) 등이 배자의 양분으로서 보존되는 것은 분명히 긍정(肯定)임에도 불구하고 부정(否定)으로 다룬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며, 셋째로, 계란 껍질이 부화되는 순간(터진 뒤에) 즉 부정된 뒤에 배자가 새로운 단계인 병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다 된 병아리가(즉 새로운 단계의 병아리가) 그 자신의 부리로 쪼아서 껍질을 부수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으로 계란의 부화의 실제(實際)의 경우가 변증법적(辨證法的) 발전의 3단계형식(形式)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사회발전에 적용한 3단계발전이론(三段階發展理論)을 비판하고자 한다. 자본주의(正)가 프롤레타리아계급(反)의 대립?모순(혁명)에 의해서 한층 더 높은 단계인 사회주의로 이행(移行)되며(合), 이때 자본주의의 성과가 그대로 보존된다고 한 것도 실제의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 발전형식(發展形式)이 옳은 형식이라면

 

첫째로,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일본 등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들이 벌써 사회주의사회로 이행되었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공식이 적용될 수 없는 후진국(後進國)에 사회주의가 세워졌으며

 

둘째로, 그 후진국에 사회주의가 세워짐에 있어서 그에 앞서 약간이나마 싹트고 있던 자본주의의 성과가 보존은 커녕 도리어 훼상(毁傷)을 입게 되어 경제가 후퇴(後退)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레닌이 혁명후 신경제정책(新經濟政策)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으며, 덩샤오핑(鄧小平)이 문화혁명후(革命後) 중국경제의 파탄을 자인(自認, 스스로 인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변증법적 진행의 삼단계형식을 사회발전에 적용한 이론도 실제의 역사적사실과 상치(相馳, 서로 맞지 아니함)됨을 알게 된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동유럽의 사회주의국가는 물론, 자본주의국가들보다 한 단계 더 앞서 있어야 했던 사회주의 종주국(宗主國)인 소련마저도, 경제적 파탄이 계속되다가 드디어 붕괴(崩壞)되고 말았다.

 

이 사실은 유물변증법의 삼단계발전형식(發展形式)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자연현상과도 맞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는 유물변증법의 正-反-合의 발전형식이론(發展形式理論)은 현실문제 해결에 완전히 실패(失敗)하고 만 것이다.


4) 정반합(正反合)이론과 현실문제 해결의 실패(失敗)


그러면 그 정-반-합(正-反-合)의 이론이 왜 현실문제의 해결에 실패하였는가? 그 원인을 분석해 보자. 그 첫째의 원인은 삼단계형식에 목적이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없는 발전은 예정된 방향이 없기 때문에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계란의 경우 이미 병아리라고 하는 목표(目標(目的))가 확정되어 있으며, 적당한 온도(溫度)와 습도만 가해지면 그 목표의 방향대로 발전운동이 벌어져서 드디어 그 목표에 도달한다. 목표(목적)가 세워지지 않은 곳에는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회발전에 있어서도 목적없이 정(正)과 반(反)의 대립뿐이라면 거기에 설사 발전운동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자본가의 목적은 이윤(利潤)을 극대화(極大化)시키는 것이고 노동자의 목적은 임금인상(임금(賃金)引上)과 처우개선(處遇改善) 등을 실현하는 것이며, 극히 적은 일부 직업혁명가(職業革命家)들만이 사회주의사회를 목표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전체를 볼 때, 그리고 사회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양계급(兩階級)의 대립은 무목적(無목적)의 대립이 되어 버려서 삼단계형식에 따르는 새로운 단계에의 도달(到達)은 처음부터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패의 둘째 원인은 정-반-합(正-反-合)에 있어서 정(正)과 반(反)의 관계가 대립, 모순, 투쟁의 관계가 됨으로써 협조, 화합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발전은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과 인간과의 원만한 협조관계(協助關係)에서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데 발전의 법칙(辨證法)과 형식(정반합(正反合))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대립, 모순, 투쟁의 관계로 규정해 버렸기 때문에 모든 인간관계는 으레 모순(矛盾)의 관계 및 적대의 관계인 것처럼 상식화되어 버려서, 화합(和合)이나 협조(協助)는 도리어 비정상적인 것처럼, 또는 이례적(異例的)인 것처럼 느껴지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이런 사회환경속에서 어떻게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만일 그 사회내에 협조에 의해서만 발전이 이루어 진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상적 이질감(異質感) 때문에 그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그 사회에 항거할 것이다.


발전이 반드시 조화로운 협조관계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대로 자연의 발전에도 적용되는 명제(命題)이다. 예컨대 위에 예거(例擧)한 계란의 부화의 경우, 배자-흰자-노른자, 껍질 등이 모두 병아리를 산출(産出)시킨다는 공동목적하에 서로 협조적으로 상호작용한 터 위에서 비로소 병아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계의 발전이나 사회의 발전은 반드시 공동의 목적 또는 목표를 중심하고 여러 요소들 또는 개체(個體)들간에 원만한 협조와 협력의 관계가 성립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마르크스주의의 정-반-합(正-反-合)의 이론에서는 이러한 목적이나 협조관계가 도출(導出)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그러한 이론은 거짓이 되었고 현실문제 해결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서 독자는 이 정-반-합(正-反-合)의 대안이 바로 정반합작용(正分合作用)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을 것이다. 正-分-合 작용의 이론은 바로 수수작용의 이론이요, 사위기대의 이론이기 때문에 이 정-분-합 작용의 3단계과정에 의해서만 목적 중심의 원만한 상호협조관계(相互協助關係)가 성립되며 그 결과로서 합(合)인 신생체(新生體)가 나타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발전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정-반-합의 3단계와 정-분-합의 3단계가 결코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3단계라는 점만 같을 뿐 정의 개념도 양자가 다르고, 반과 분도 다르고, 합의 개념도 양자가 다르다. 정반합의 정은 사물을 뜻하나, 정분합의 정은 목적 또는 심정을 뜻한다. 또 정반합의 반은 정인 사물에 대립하는 부정적요소(否定的要素)를 뜻하지만, 정분합(正分合)의 분은 분립물 또는 상대물이라는 뜻으로서 상대적 관계에 있는 주체와 대상을 말한다.

 

그리고 정반합의 합은 대립물이 대립을 지양한 후 하나로 종합되는 것을 뜻하나, 정분합의 합은 분의 단계의 주체와 대상의 수수작용에 의해서 이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개체(個體) 즉 신생체(新生體)가 나타남을 뜻한다. 이리하여 수수작용(발전적수수작용)을 시간적으로 파악한 개념인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이 발전에 관한 현실문제 해결에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의 정-반-합(正-反-合)의 유일한 대안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으로 원상구조(原相構造)의 주요내용을 전부 마친다. 그러나 여기서 마지막으로 원상구조에 관련된 사항 한 두가지를 더 첨가하고자 한다. 그것은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통일성과 창조이상이다. 먼저 원상구조의 통일성에 관하여 살펴보자.

 

4.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통일성(統一性)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원상구조란 신상의, 특히 성상과 형상의 상호관계였으며, 이 관계가 밝혀짐으로써 많은 현실문제들의 근본적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현실적인 난문제(難問題)들은 관계상의 문제들이기 때문이며, 관계의 바른 기준을 일탈함으로써 야기된 문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원상구조가 밝혀짐으로써 그 관계의 본연의 기준이 명백해졌기 때문에 모든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또 항구적(恒久的)으로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원상구조에 관하여 마지막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은, 신상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왜 구조(構造)라는 개념이 필요한가 하는 것과, 구조라는 면에서 본 원상의 참모습은 어떠한가에 관한 설명이다.


본래 구조(構造)라는 용어는 일정한 재료로써 만들어진 구성물, 예컨대 건축이나 기계 등에 대하여 그 재료의 상호관계를 나타낼 때에 흔히 사용된다. 특히 구조는 유형물(有形物)의 구성을 분석하고 연구할 때 자주 쓰인다. 즉 인체구조, 사회구조, 경제구조, 분자구조, 원자구조 등이 그 예로서, 사물을 분석하고 연구하는데 있어서 구조의 개념이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러한 측면을 확대적용하면 의식(意識)이나 정신(精神) 등 무형적 존재를 분석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의식(意識)구조(構造)니 정신(精神)구조(構造)니 하는 용어가 쓰이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무형인 하나님의 하나하나의 속성의 관계를 알아보는데 구조의 개념을 사용한 것이 바로 그러한 동기(動機)에서였던 것이다. 즉 구조의 개념을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특히 성상과 형상과의 관계의 상세한 내용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성상과 형상의 상대적 관계가 상술한 바와 같이 종류가 여럿이 있다 하더라도, 원상의 세계는 시공(時空)을 초월한 세계이므로 구조(構造)개념(槪念) 또는 시공관념(時空觀念)으로 유추(類推)할 때의 원상의 참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통일성(統一性)이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공간이 없기 때문에 위치가 없으며, 따라서 전후와 좌우가 없고, 상하가 없으며, 내와 외가 없고, 넓고 좁음이 없으며, 원근이 없고, 삼각형, 사각형 등의 공간도 없다. 무한대(無限大)와 무한소(無限小)가 같은 세계이며, 모든 공간이 한 점에 모두 중첩되어 있는 다중첩(多重疊)의 세계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하, 전후, 좌우, 내외가 한없이 넓혀지고 있는 세계이다.


또 원상의 세계는 시간이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시간관념으로 유추(類推)하면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현순간에 합쳐져 있다. 마치 영화 필름의 두루마리(필름말이) 속에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는 것과 같다. 즉 시간도 현순간속에 합쳐져 있다. 즉 순간속에 영원이 있다. 그러면서 순간 시간이 영원으로 이어져 있다. 따라서 순간과 영원이 같다. 이것은 원상의 세계가 하나의 상태(성상-형상, 양성-음성이 통일된 상태)의 순수지속(純粹持續)임을 뜻한다. 즉 상태(狀態)의 순수지속(純粹持續)이 원상세계의 시간이다.


이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원상의 세계는 순수한 통일체(統一體)이다. 공간과 시간 뿐만아니라 그 외의 모든 현상(墮落과 관련된 비원리적인 현상을 제외하고)의 원인이 중첩적(重疊的)으로 한 점에 통일되어 있는 세계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시간, 공간을 위시한 우주 내의 모든 현상은 이 통일된 한점(一點)에서부터 발생한 것이다. 마치 한점(一點)에서 상하 전후 좌우로 무한히 긴 직선을 무수히 그을 수 있는 것처럼 이 통일성에서부터 시공의 세계가 상하 전후 좌우로 무한히 뻗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가 아무리 광대(廣大) 무변(無邊)하고, 우주의 현상(現象)과 우주의 운동이 아무리 복잡한 것 같다 하더라도, 그 시공과 그 현상을 지배하고 있는 기본원리는 이 한점(一點) 즉 통일성에 있으니 그것이 곧 통일의 원리 즉 수수작용의 원리, 또는 사랑의 원리이다. 예컨대 수수작용의 터전인 사위기대(四位基臺)라는 한점(一點)(원점)에서 공간이 전개되어 나왔고, 정분합작용이라는 일점에서 시간이 전개되어 나왔던 것이다.

 

5. 창조이상(創造理想)


1)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원상구조와 관련(關聯)된 사항으로서 창조이상에 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창조이상이 원상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사위기대의 중심인 창조목적과 직접 관련된 사항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상(理想)이란 인간이 희망하는 바, 또는 소원하는 바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인간이 왜 희망하고 소원하는가? 기쁘기 위해서이다.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이다. 기쁨은 어떤 때에 오는가?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었을 때에 온다. 왜냐하면 참 기쁨의 터전은 심정의 충동성, 사랑의 충동성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쁨에 관한 통일원리의 기록을 몇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통일원리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어떤 때에 오는가 하는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즉 이처럼 피조물(被造物)이 선(善)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시기 위함이었다(원리강론, 1987, p. 51), 창조목적은 기쁨에 있으며, 기쁨은 욕망을 채울 때 느껴지는(것이다)(同上 p. 97), 자기의 성상과 형상대로 전개된 대상이 있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自體의 성상-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때 비로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同上 pp. 52~53),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3대축복(三大祝福)의 말씀을 이루어 천국을 이룩함으로써 선(善)의 목적을 완성한 것을 보시고 기쁨을 누리시려는데 있었던 것이다(同上 p. 52) 등이 그것이다.


이상의 뜻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기쁨을 얻는데 있는데, 그 기쁨은 피조물이 선(善)의 대상이 될 때, 욕망이 채워질 때, 대상이 자신을 닮았을 때, 그리고 선의 목적을 완성했을 때에 느껴진다. 이것을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기쁨은 첫째로 피조물이 선의 대상이 되어서 하나님을 닮음으로써 하나님의 욕망이 충족될 때, 둘째로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사이에 서로 상보적(相補的;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성립될 때 온다는 말이 된다. 여기의 욕망이 충족된다는 말은, 희망이 이뤄지고 소원이 성취됨을 뜻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이상이 실현됨을 뜻한다.


그리고 선(善)의 대상이 된다는 말은 사랑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선의 터전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닮는다는 말은 심정을 중심한 하나님의 성상-형상의 조화로운 수수작용의 모습을 닮는다는 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자가 됨을 뜻한다. 원리강론의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랑으로 인하여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1987, p. 83)는 기록도 이것을 뜻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이상이 무엇인가가 명백해진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할때에 뜻(希望)하였던 바가 완전히 실현된 상태,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미래에 하나님을 닮아난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인 것이다.


2)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차이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차이를 밝히고자 한다. 창조목적은 통일원리에 적힌 대로 기쁨을 얻는데 있었다. 그런데 기쁨은 욕망이 충족될 때에 온다고 되어 있다. 욕망의 충족은 요컨대 희망(希望)이 이루어짐이요, 소원이 성취된 것으로서 하나님의 소원의 성취는 바로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실현(實現)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욕망의 충족(充足)이나 하나님의 기쁨도 창조이상이 실현되었을 때에 이루어진다는 결론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창조이상의 실현에 있었다. 즉 창조이상을 실현(實現)하는 것이 바로 창조목적이었으며 다음과 같은 통일원리의 기록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즉 '이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졌더라면 죄의 그림자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이상세계가 이루어졌을 것이니'('원리강론' 1987, p. 56)의 문장이 그것이다.


여기서 참고로 인간의 창조목적과 만물의 창조목적의 차이에 관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을 포함해서 만물전체를 창조한 목적은 이미 위에서 말한 대로 그 피조물을 보시고 기뻐하시려는데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그러나 직접적인 기쁨으로는 그리고 자극적이고 아기자기한 기쁨은 인간에게서만 느끼게 되어 있었으며, 만물에서도 큰 기쁨을 느끼시지만 그 기쁨은 인간에서처럼 자극적인 것은 못되며 그것마저도 인간이 창조되어 완성한 뒤에야 인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느끼시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적 실체대상(實體對象)이며, 만물은 하나님의 상징적(象徵的) 실체대상(實體對象)이기 때문이다('원리강론' 1987, p. 55). 이 말은 만물은 인간의 직접적인 기쁨의 대상으로 지으셨음을 뜻한다. 통일원리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즉 만물세계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성상과 형상을 실체로 전개해 놓은 그 대상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만물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으로 말미암아 자체의 성상과 형상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리게 된다(원리강론 1987, p. 55)가 그것이다.


그런데 통일원리(統一原理)에서는 만물이 창조목적을 가졌다고 할 때, 그 창조목적은 마치 개별상이 만물(萬物, 자연)(個體)에 따라서 다르듯이 개체마다 다른 것으로 느껴지는데 통일원리는 여기에 관한 언급이 없다. 예컨대 꽃의 창조목적과 새의 창조목적은 똑같지는 않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개별적(個別的)인 창조목적도 분명히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꽃의 개별적인 창조목적은 꽃의 색(色)의 아름다움으로 시각(視覺)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며, 새의 창조목적은 새의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청각(聽覺)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지만,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는 점에 있어서는 다 같기 때문에, 그 공통점만을 만물의 창조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3) 창조(創造)목적과 창조이상(創造理想)의 개념(槪念)은 다르다.


지금까지 창조목적에 관해서 잠깐 알아보았는데, 여기서 원리강론에서는 이 창조목적(創造目的)의 용어가 본래의 뜻대로 쓰인 것 외에 피조목적, 창조이상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창조목적의 본래의 뜻은 위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이 피조물을 보시고 기뻐하시려고 한 것이었다. 즉 창조목적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세운 목적인 동시에 창조할 때에 세운 목적이었다. 그런데 원리강론에는 이 창조목적이 피조목적(被造目的)의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창조(創造)목적을 완성(完成)한 인간(1987, p. 146, p. 215)이 그것인데 이것은 피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의 뜻이다. 왜냐하면 창조목적은 창조자(하나님)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시는 것이고, 피조목적은 인간이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인간이 시계를 제작한 목적은 시간을 알고자 함에 있다. 이때 제조된 시계는 인간에게 시간을 알려주게 되어있다. 이것은 시계의 입장에서 보면 피조목적이다. 제조목적과 피조목적은 전연 다르다. 마찬가지로 창조목적과 피조목적이 다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을 느끼는 것(창조목적)이 아니라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피조목적)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기록 즉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였다(1987, p. 201)의 창조목적과 비교(比較)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여기의 창조목적은 분명히 하나님이 기쁨을 느끼는 일을 뜻하는 것으로 앞서의 창조목적을 완성한 인간에서의 창조목적과는 그 의미가 다름을 알게된다.


다음은 창조목적이 창조이상의 뜻으로도 사용된 예(例)를 들어 보자. 타락 인간으로 하여금 믿음의 기대(基臺)를 세우게 하고, 그 기대 위에서 메시아를 맞게 함으로써 창조목적을 완성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는, 일찍이 아담가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1987, p. 235~236). 이 인용문(引用文)중의 창조목적은 기쁨을 느끼시려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조금 부자연스러움을 느낀다. 창조이상의 뜻으로 즉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狀態)로 해석하는 것이 도리어 무난(無難)하다. 다음의 문장과 비교해보면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 진다. 즉 예수님이 재림(再臨)하실 때에는 반드시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어, 다시는 그 이상(理想)이 지상에서 거두어 지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1987, p. 260)라는 문장에 있는 창조이상(創造理想)이나 전문(前文) 중의 창조목적의 완성이나, 그 뜻하는 바의 내용은 같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후자(後者)인 창조이상을 창조목적의 뜻으로 해석(解釋)해서는 어색하며, 차라리 전자(前者)의 창조목적을 창조이상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함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이런 예는 이 외에도 있다.


이와 같이 원리강론에는 창조목적이라는 용어가 때때로 피조목적의 뜻으로나 창조이상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통일사상에서는 이들의 개념을 명확히 한 후 구별해서 쓰고 있다. 단(但) 구별이 필요 없을 때에는, 예컨대 창조목적으로 해도 좋고 피조목적으로 해도 좋을 때, 또는 때에 따라서 인위적(人爲的)인 목적을 써야 할 때에는 그냥 목적으로만 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창조이상과 창조목적의 개념의 차이를 밝혔는데 요컨대 창조이상은 이미 설정(設定)된 목표가 달성되어 있을 때의 상태(狀態)를 말하며 창조목적은 그 설정된 목표만을 말한다. 창조이상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미래에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난 인간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이며, 창조목적은 대상(對象)을 보고 기뻐하려는 것으로서, 앞으로 도달(到達)코자 하는 목표이다. 문법상의 시제(時制)로 표현하면 창조목적은 미래형(未來形)이요, 창조이상은 미래완료형(未來完了形)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창조이상은 창조목적이 달성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창조목적은 창조이상의 실현(實現)을 통해서 달성된다.


4) 창조이상(創造理想)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이다.


그러면 창조이상의 내용인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실현된 상태(狀態)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그것은 이상인간(理想人間), 이상가정(理想家庭), 이상사회(理想社會), 이상세계(理想世界)가 실현된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이상인간이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성상-형상의 중화체를 닮은 이상적 남자와 이상적 여자를 말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만인과 만물에게 베풀 줄 아는 남자와 여자, 하나님을 참부모로 모실 줄 아는 남자와 여자를 말한다. 이러한 인간은 하나님이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게 된(마태 5:48) 인간이며,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이며 전피조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에…… 천주적(天宙的)인 가치의 존재인 것이다.('원리강론 1987, p. 215).


이러한 남녀가 결합해서 하나님의 양성과 음성의 중화체를 닮은 부부를 이룬 것이 이상가정(理想家庭)이다. 이러한 가정은 그 내부에 사랑이 넘칠 뿐 아니라 이웃, 사회, 국가 더 나아가서 세계를 사랑하고, 만물까지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참 부모(父母)로 모시는 가정이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상가정이 모여서 사회를 이룰 때 그 사회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사회가 되어서, 내부(內部)가 사랑에 넘칠 뿐 아니라 외적으로 다른 사회와 사랑으로써 화합(和合)하고, 하나님을 그 사회의 구심점(求心點)으로 참부모로 모시게 된다. 이것이 이상사회이다. 다음에 이상인간이 모여서 세계를 이룰 때 그 세계 또한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세계가 되어서 온 인류가 하나님을 인류의 참부모로 모시고, 서로 서로가 한 부모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의 관계를 맺고 사랑이 넘치는 영원한 평화와 번영과 복된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상세계로서 역사 개시 이래 수많은 성현(聖賢)들, 의인(義人)들 철인(哲人)들이 꿈꾸었던 이상향(理想鄕)이다. 그런데 사랑은 진(眞)-선(善)-미(美)의 가치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따라서 이상사회, 이상세계는 가치의 사회요, 가치의 세계로서 진실생활(眞實生活), 윤리생활(倫理生活), 예술생활(藝術生活)의 3대 생활영역을 기반으로 한 통일세계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경제, 정치, 종교(倫理)에서 실천되는 공생공영공의주의(共生共榮共義主義) 사회이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지상천국(地上天國)이다. 그리하여 창조이상이란 이와 같은 이상인간, 이상가정, 이상사회, 이상세계가 미래에 실현된 상태(狀態)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러한 상태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즉 창조이상이 실제로 실현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창조목적(創造目的)이, 다시 말해서 영원한 기쁨을 얻고자 하셨던 당초의 소원이 달성되게 된다.


이것으로 창조이상에 관한 설명을 마친다. 아울러 원상구조(原相構造)의 항목 전부를 마친다. 끝으로 종래의 본체론과 통일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종래의 몇 가지 본체론(本體論)(통일사상의 원상론에 해당)의 요점을 간단히 소개하여 그것이 현실문제 해결에 어떻게 실패하였는가를 촌평식(寸評式)으로 예시(例示)하고자 한다. 통일사상이 현실문제 해결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한 이유가 보다 더 명확히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三. 종래의 본체론(本體論)과 통일사상


본체론(本體論)은 하나님 또는 우주의 근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관한 이론으로서 일반적으로 사상체계의 기초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현실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도 대개 본체론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몇가지 종래의 본체론(本體論)의 요점을 간단히 소개(紹介)하면서 그것이 현실문제에 어떻게 연관되었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 및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관(神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정신(精神)으로 보고, 그 하나님이 무(無)에서 질료를 만들어서 세계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形相)과 질료(質料)의 원리를 이어받은 토마스 아퀴나스는 질료를 가지지 않는 순수형상(純粹形相)중에서 최고의 것을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하나님은 세계를 무(無)에서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현실문제에 어떻게 연관(聯關)되어 있는가. 이 신관(神觀)은 정신을 근원적인 것으로, 물질을 2차적(二次的)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이 신관(神觀)에서 물질적인 현실세계를 2차적(二次的)인 것으로 경시(輕視)하고 정신의 세계, 영적인 세계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나타나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리하여 사후의 세계에서의 구원(救援)만을 중요시하는 구원관이 오래도록 기독교를 지배해 왔다. 그런데 현실 생활에 있어서 물질을 무시하고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기독성도들의 생활은 신앙상으로는 물질생활을 경시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물질생활을 추구(追求)하지 않을 수 없는 상호모순(相互矛盾)의 생활(生活)이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것이다. 즉 기독교의 신관(神觀)을 가지고서는, 지상의 현실문제의 해결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게 되어 있었다. 지상(地上)의 문제는 대부분이 물질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관이 현실문제의 해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원인은, 첫째가 하나님을 정신으로만 보고 물질의 근원(根源)을 무(無)라고 본 데 있었고, 둘째로 창조의 동기와 목적이 불분명(不分明)한데 있었던 것이다.


2) 이기설(理氣說)


송대(宋代)의 신유학(新儒學)에 있어서 주렴계(周濂溪; 1017~1073)는 우주의 근원을 태극(太極)이라 했고 장횡거(張橫渠; 1020~1077)는 태허(太虛)라고 했다. 이것들은 모두 음양(陰陽)의 통일체로서의 기(氣)를 말한 것이다. 기(氣)란 질료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唯物論)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정이천(程伊川; 1033~1107)에 의해서 만물은 모두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는 이기설(理氣說)이 주창되었으며 나중에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하여 대성(大成)되었다. 이(理)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무형의 본체를 뜻하고 기(氣)는 질료를 뜻하였다. 주자는 이(理)와 기(氣) 중에서 이(理)를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이(理)는 천지(天地)의 법칙(法則)일 뿐만 아니라 인간내에 있는 법칙이기도 하다고 설파하였다. 즉 천지(天地)가 따르고 있는 법칙과 인간사회의 윤리법칙은 동일한 이(理)의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이같은 사상에 근거하여 현실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생활의 方向은 천지의 법칙을 맞추기 위한 조화(調和)의 유지에 치중하게 되었고 사회적인 윤리에 입각한 질서 유지에 편중하게 되었다. 또 모든 것을 법칙에 맡긴 나머지 자연이나 사회의 변화나 혼란에 대해서는 방관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생겨났으며 자연을 지배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려는 창조적, 주관(主管)的인 생활방식 즉 능동적인 개혁(改革)의 방식은 경시되는 경향이 생겨났다. 이기설도 현실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이 실패의 근본원인은 태극(太極), 이기(理氣) 등에서 왜 만물이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그 동기와 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데 있는 것이다.


3) 헤겔의 절대정신(絶對精神)


헤겔(G.W.F. Hegel, 1770~1831)에 의하면, 우주의 근원은 절대정신으로서의 신(神)이다. 신(神)은 절대정신이면서 동시에 로고스이며 개념이었다. 이 개념(로고스)이 모순을 매개로 하면서 정-반-합(正-反-合)의 삼단계의 변증법적 발전형식에 따라서 자기발전(자기전개)해 간다고 헤겔은 생각했다. 개념은 자기발전하여 이념의 단계에까지 발전한 후 자기를 외부로 소외시켜서(부정) 자연으로 나타난다. 그 자연속에서 이념은 변증법적 발전을 통하여 드디어 인간으로 나타나는데, 이 인간을 통하여 이념이 자신을 회복(回復)하고, 그 후 여러 단계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절대정신으로서 자기를 실현한다. 즉 처음 출발했던 자기자신(절대정신)으로 복귀(復歸)한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개념(로고스)의 자기실현의 과정이다.


그리고 역사가 이성국가의 단계에 이르렀을 때 자유가 최고도로 실현되며 인간사회가 가장 합리적인 모습이 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헤겔 철학에 따르면 세계와 역사는 로고스의 자기실현의 과정이기 때문에, 인간사회는 이 변증법적 발전형식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합리적인 모습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이같은 방식에 따라서 프러시아에 이성국가가 실현된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는 비합리적인 현실을 필연의 법칙에 맡기고 방관만 해도 좋다고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또 자연을 이념의 타재형식(他在形式)으로 본 그의 자연관은 일종의 범신론(汎神論)33)이 되어서, 현실문제의 해결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쉽게 무신론적인 휴머니즘이나 유물론으로 전환(轉換)할 수 있는 소지(素地)를 갖고 있었으며, 모순을 발전의 계기로 봄으로써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투쟁이론을 발생시키는 소지도 지니고 있었다. 즉 헤겔 철학은 프러시아사회의 현실문제 해결에 실패하였으며, 도리어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무신론철학을 출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은 그가 신(神)을 로고스로 보고, 창조를 변증법에 의한 자기 발전으로 잘못 본 때문이었다.


4) 쇼펜하우어의 맹(盲)목적의지(意志)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 1788~1860)는 헤겔의 합리주의(合理主義와 理性主義)에 반대하여, 세계의 본질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아무 목적도 없이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의지라 하고, 이것을 맹(盲)목적인 삶에의 의지(意志)(Blinder Wille zum Laben)라고 불렀다. 인간은 이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서 좌우되면서 오로지 외곬으로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그 때문에 인간은 항상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면서도 만족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만족과 행복은 한 순간의 경험(經驗)에 불과할 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불만과 고통뿐이며, 이 세계는 본질적으로 고통의 세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난 사상이 염세주의(厭世主義; pessimism)였다. 그 대신 그는 예술적 관조(觀照)나 종교적 금욕생활(禁慾生活)에 의해서 고뇌(苦惱)의 세계로부터의 구원을 시도해 보았으나, 그것은 현실문제의 해결은 커녕 오히려 현실로부터의 도피(逃避)의 이론이 되고 말았다. 쇼펜하우어가 현실문제 해결에 실패한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섭리의 참 내용을 몰랐기 때문이요, 둘째로 이 지상세계가 악(惡)(사탄)이 지배하는 세계인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5) 니체의 권력의지(權力意志)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질을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라고 하여, 삶에 대하여 비관적태도(悲觀的態度)를 취한 데 대하여 니체(F. Nietzsche, 1848~1900)는 세계의 본질을 권력의지(權力意志; Wille zur Macht)라고 하여 철저(徹底)한 현실 긍정의 태도를 취했다. 니체에 의하면 세계의 본질은 맹목적인 의지가 아니라 도리어 강자(强者)가 되고 싶고, 지배력을 갖고 싶어하는 강력한 의지라고 했다. 이것이 그의 권력의지인데, 그는 권력의지를 체현(體現)한 이상상으로서 초인(超人)을 세워서, 인간은 초인을 목표로 삼고 生의 고통을 참으면서 어떠한 운명에도 견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그는 신(神)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기독교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였다. 기독교의 도덕(道德)을 강자를 동경하는 노예도덕으로 보고 삶의 본질에 적대(敵對)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전통적인 가치관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니체의 권력의지(權力意志)의 사상은 힘에 의한 현실문제의 해결과 결부되었다. 그래서 히틀러나 뭇솔리니 등이 니체의 사상을 권력유지(權力維持)를 위하여 이용하였다. 즉 니체도 현실문제의 해결에 실패한 것이다. 니체의 실패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참된 신(神)까지를 부정한 데에 있다. 그가 부정해야 했던 신(神)은 참 신(神)이 아니라 거짓 신(神)이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던 신(神)은 거짓 신(神)이었을 뿐, 참 신(神)이 아니었는데 그는 참 신(神)까지를 부정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 마르크스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유물론(唯物論)


마르크스(K. Marx, 1818~1883)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입장에서 세계의 본질은 물질이고, 사물속에 있는 모순(대립물)의 투쟁에 의해서 세계는 발전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사회의 변혁은 종교나 정의(正義)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급투쟁에 의해서 폭력적(暴力的)으로 물질적인 생산관계(경제)를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계급혁명론도 현실문제 해결의 하나의 방안이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지배계급(支配階級)이나 피(被)지배계급(支配階級)중 어느 편에 속하는 계급적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피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트)측에 서서 혁명에 가담할 때만 그 인격적 가치가 인정된다. 그의 인간관에는 인격을 절대적인 것으로 존중하는 가치관이 없으며,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은 혁명에 있어서 이용가치(利用價値)가 없는 인간, 혹은 혁명에 반대하는 인간에 대하여 하등에 양심의 가책 없이 학살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공산주의체제는 동유럽과 소련에서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한 계급혁명론도 현실문제 해결에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그 원인은 첫째로 참 하나님을 몰라보고 무조건 신(神)을 부정한 때문이요, 둘째로 폭력은 반드시 폭력을 낳는다는 천리(天理)를 무시하고 폭력에 의한 개혁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7) 통일사상의 본체론(本體論)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우주의 근원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혹은 하나님의 속성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인간관, 사회관, 역사관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서 현실문제 해결의 방법이 달라진다. 따라서 올바른 신관(神觀), 올바른 본체론(本體論)을 세움으로써 현실의 인생문제, 사회문제, 역사문제를 올바르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통일사상의 본체론 즉 원상론에 의하면 하나님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은 심정(心情)이다. 심정을 중심하고 성상의 내부에서 내적성상(知情意)과 내적형상(觀念, 槪念 등)이 수수작용을 하며, 또한 성상과 형상(질료)이 수수작용을 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존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심정에 의해 목적이 세워지면 수수작용은 발전적으로 진행되어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종래의 본체론은 이성이나 의지, 혹은 개념이나 물질이 중심이었다. 그리하여 정신만이 또는 물질 만이 실체라고 하는 일원론(一元論)이 나오게 되었고, 정신과 물질 모두가 우주의 실체라고 하는 이원론(二元論)도 나타나게 되었다. 통일사상에서 볼 때, 종래의 본체론은 하나님의 속성의 실상(實相)을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하였고, 또 속성 상호간의 관계를 바르게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다.


통일사상의 본체론(本體論)(원상론)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동기와 목적,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하나의 내용이 상세히 밝혀지게 되었고, 그 속성의 구조까지 정확히 또 구체적으로 소개됨으로써 현실문제의 근본적 해결의 기준이 확립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그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