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鮮明 評傳
제12장 통일교의 미래를 이끌 한학자 총재
2. 헌신과 일념으로 눈물의 강을 건너다
한 여사는 갖은 고난 끝에 서울의 성정중학교를 다녔다. 1989년에 그 학교를 인수하여 선정 중・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때 한 여사가 학교를 찾아가니 국어선생님이 그대로 계셨고, 수학선생님도 그대로 계셨는데 두 분 모두 한 여사를 지극히 사랑해주셨던 스승님들이었다.
한 여사는 지금 세계적인 여성 지도자가 되어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세계 각국을 종횡무진하고 있지만 학창시절에는 참으로 얌전하고 내성적인 소녀였다. 문선명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 의하면,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한 여사는 엄격한 홍순애 어머니가 주신 「성자성녀전(聖者聖女傳)을 읽기에 바빴다. 남들처럼 소녀로서의 꿈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성녀상을 바라게 되었고, 문선명과 결혼할 때도 어린 나이였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한 총재가 문선명의 아내가 된 것은 크게 3가지 기대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한국의 기독교를 통해 재림주님을 위한 정성의 기대를 준비해오셨다. 특히 해와의 역사를 중심으로 여성 지도자를 세워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신부의 사명을 다하게 했다. 둘째, 한 여사의 집안은 외할머니, 어머니, 한 여사까지 3대가 모두 외동딸로서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홍순애 어머니는 남으로 내려온 후 재림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생식(生食)을 하며 정성을 들였다. 그 기대 위에 문선명의 아내가 된 것이다. 셋째, 한 여사는 절대신앙・절대사랑・절대복종의 신앙을 자연스럽게 익혀 왔다. 마치 수녀와도 같은 신앙심으로 정결한 생활을 해왔으며 세상적인 것과 단절된 환경에서 성장해왔던 것이다.
문선명은 아내의 이름을 두고 한번은 이렇게 말했다.
"이름이 좋아요. 한학자! 여자가 문선명의 상대가 되려면 학자가 되어야지요. 한은 무슨 한이냐 하면 한학(漢學)도 한이지만, 한스러운 학문의 한(恨)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 최고로 공부한 학자가 되어야 된다구요. 한학자. 여자가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하나님의 상대 자리에 나간다고 봤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좋고 이름도 좋아요. 지금 결국은 그 자리에 온 것입니다. 또 왜 학자일까? 학녀가 되지. 왜 학자가 되었을까? 나는 '아하! 거기에 아들 자(子)를 붙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과 인연을 맺어주기 위해서였구나. 본래가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 났기 때문에 통일교회의 어머니의 이름을 가졌구나! 이렇게 생각한다구요. 그거 근사하지요? 어머니! '한'하면 한국을 대표할 수도 있고 우주를 대표할 수도 있지요. '한'은 하나로서 제일이라는 뜻이거든요.
문선명은 아내가 특별한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에 깊이 감사해 했다. 그것은 한 여사가 항상 사심이 없으며, 자녀들뿐만 아니라 통일교 신도들에게도 항상 무언가를 주려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귀하게 생각되는 게 있으면 누군가에게 주어야 직성이 풀렸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한 여사가 호화롭게 살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옷장 속에 옷이 별로 없어 날씨에 맞춰 옷을 입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가족에 대한 헌신, 사심 없는 마음으로 내조를 해왔다.
한 여사는 결혼 후 7년 동안 혹독한 훈련기간을 거쳤다. 그 즈음에 한 여사를 둘러싼 여러 가지 비난, 중상, 소문, 오해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부는 그러한 것들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한 여사는 결혼 후 십수 년을 오직 침묵과 기도, 헌신으로 이겨냈고 사람들은 차차 그 앞에 머리를 숙이고 "이 분은 정말 천주의 어머니시다"라고 감복했다. 그리하여 결국 세계적 여성 종교지도자로 우뚝 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 여사는 남편인 문선명이 걸어왔던 노정을 돌이켜 생각할 때면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문선명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기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1977년 5월 한 여사는 미국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그러한 마음을 처음으로 밝혔다.
"저는 온실 안의 한 송이 꽃 같이 성장해 나왔습니다. 평화스러운 온실에서, 사막에서 피는 꽃과 같다고 나 자신 느껴왔습니다. 사막이 제가 살고 있는 환경이어서 가는 곳마다 거친 바다가 미친듯이 날뛰는 것 같았습니다. 제 주위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혹과 시험과 여러 가지 고난들이 소용돌이치는 어려운 현실적 또는 영적 정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참으로 거친 바다에 뜬 작은 돛단배였습니다."
그러나 한 여사는 인류에 대한 사랑과 사명을 깊이 인식하고 모진 핍박과 시련을 언제나 당당하게 이겨내 왔다.
"한편 그때는 저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제일 깊이 느낀 때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계시를 주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때가 그토록 어려운 시련과 고난 가운데 인내해야 하는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그때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하나님의 은혜에 가득찬 정말로 하나님께서 같이 해주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한 여사가 가장 어려웠던 때의 하나는 남편이 댄버리에 수감되던 1984년 즈음이다. 그때 자주 면회를 갔는데 그 면회도 편치 못했다. 두 시간쯤 지나면 간수들이 와서 자리를 비켜 달라 하면 어떻게 해서든 남편 옆에 더 있기 위해 샌드위치를 먹게 하고, 음료수를 사러 매점을 돌아다니고. 전화를 건다는 핑계로 동전을 바꾸면서 시간을 끌었다. 남편이 카키색의 죄수복을 입고, 가슴에 달린 수인번호를 보고 무척 가슴이 아파했다. 세상에 어느 아내인들 자신의 남편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죄수복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 여사는 그때의 슬픔을 안으로 삭이면서 의젓하게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아버님(문선명)이 댄버리로 출발하실 때는 정말로 큰 좌절과 아픔을 맛보았어요. 생이별을 한다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오고 전신의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고 빠져나갔어요. 그런데 아버님은, 나는 걱정 말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아버님의 말씀 속에는 고난을 승리로 바꾸어 놓으시겠다는 의지가 확고했으며 오히려 미국과 세계가 구원받을 길이 열릴 것이라고 했어요. 여러분이 합심해서 아버님께서 바라시고 계시는 일을 빨리, 그리고 크게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모두가 아버님의 대신자가 되어 아버님께서 기뻐하실 효자효녀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학자 총재는 한국인의 딸로서, 한 남편의 아내로서,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출발했지만 곧 세계를 이끄는 뛰어난 여성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지난 50년 동안 한 총재가 여성 지도자로서 앞장서서 헌신해온 업적은 무수히 많다. 문선명 성화 이후 세계의 눈과 귀는 한 총재에게 쏠렸다. 과연 한 총재가 문선명만큼 통일교를 이끌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수많은 언론들의 비판 기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 학자 총재의 통일교는 예전보다, 아니, 예전보다 더 내적으로 충실한 성장을 하고 있다. 사람들의 의문과 의혹, 우려는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현재 한 총재는 여러 직책을 맡고 있는데 그 일들이 한 여성에게는 벅찬 일일 수 있으나 이제까지 주어진 사명을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잘 감당해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 뛰어난 혜안과 영민함, 부지런함과 소명의식으로 어떠한 일도 잘 처리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