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 2 권 제 13 일
16 훈독경 제2권 13일 같이 살아야 할 인간과 하나님 1.mp3
같이 살아야 할 인간과 하나님(훈독본)
날짜 : 1959. 1. 1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게 된 동기와 목적
하나님이 온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동기와 목적은 같이 사시는 데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 연하여 있는 모든 존재물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쁨의 존재들로 창조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지으신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 중의 생각의 존재요, 심정 중의 심정의 존재요, 창조이념 중의 이념의 존재요, 창조실체 중의 실체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소유하시는 것은 온 우주를 소유하시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인간을 주관하시는 것은 또한 피조세계 전체를 주관하시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인간과 더불어 기뻐하시는 것은 피조세계 전체와 기뻐하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듯 창조이상으로부터 창조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목적의 전체를 대신한 대표적인 존재로 인간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같이 사시는 것인데 오늘날 인간과 만물, 모든 존재물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권내에 있지 않는 것은 타락으로 인한 것입니다. 타락된 연고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신 그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 인간들을 찾아 헤매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殿)이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하늘과 땅을 대신한 하나의 실체존재가 되면 우리 인간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인간을 통하여 만물에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만물을 연결시키는 중간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렇게 되어야 할 우리 인간들이 오늘날까지 그러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지으시려던 본연의 성전을 갖추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이념을 가져 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의 인간들의 실상이었습니다.
지어 주신 주인이 계시되 그 주인을 모르고, 심정의 주체가 계시되 그 심정의 주체를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창조의 이념이 없고 창조의 실적이 없으면 모르겠거니와 창조의 실적인 만상이 있고, 창조의 이념이 하나님 속에 남아 있다면 그 이념과 실적을 완성시키고 완결시킬 수 있는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 존재는 만물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요, 바로 우리가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우리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을 한 터로 삼아 하늘 것으로 옮기기 위해서 찾아오고 계십니다. (5-140)
타락의 결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조건을 완비하여 생활을 통하여 창조이념 전체와 연결될 수 있고, 그 이념권 내에서 완성될 수 있고, 완성된 실체로서 하나님 앞에 이념의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었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떠나가시고 만물과의 인연도 끊어져 버렸고 인간과 인간끼리의 인연도 끊어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슬픔 중의 슬픔이요, 탄식 중의 탄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 한 개인에 국한된 탄식이 아니라 옆을 바라보면 동포의 탄식이요,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면 인류의 탄식이요, 더 나아가 만물을 바라보면 만물의 탄식이요, 머리를 들어 마음을 통하여 하늘 세계를 바라보면 하늘의 탄식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런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모르지만 계신다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인간이요, 배반의 인간이요, 절망의 인간을 다시 빚어 낼 조건을 찾아서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까지 헤매고 계십니다.
타락한 아담의 위치에 있는 인간을 끌어내어 하늘 편에 세워 놓고 하나님의 이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소원까지 하나님 전체의 속성을 완비시키시어 그들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살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을 찾아 헤매시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이상 고마워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인간들이 모르는 사이에 개인을 통하여 환경적인 섭리의 발판을 닦으셨고 환경을 통하여 세계적인 섭리의 발판을 닦아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복귀노정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그 말씀을 배반했던 우리 선조들에게만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타락 이후 6천 년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어느 시기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은 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어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슬픔 중의 슬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어 말씀의 결실을 맺기를 원하시던 하나님의 소망을 수천만 번 배반한 선조들임을 알게 될 때 타락의 혈통을 남긴 선조들을 대해 적개심을 갖는 참된 후손들은 나오지 않겠느냐? 선조들이 그 말씀을 배반하여 하나님한테 서러움을 안겨 드리고 죄의 담을 쌓아 놓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선조들을 붙들고 항거할 수 있고 북받치는 심정으로 하늘땅을 대하여 외치고 나설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의 모습을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몸에 당신의 말씀을 심어 그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갖춘 본연의 인간으로 세우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심으려고 하셨고, 하나님의 이념을 심으려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속에 옮겨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한 창조이념이 우리 선조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온데간데 없어졌고, 하나님의 말씀도 온데간데 없어졌고, 하나님의 실체인 본연의 인간도 없어졌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린 이상의 슬픔은 피조세계에 또 다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서글픈 사실을 놓고 뼈살에 사무치는 심정을 갖고 흐느껴 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제물이 된 연고로 인간들은 잃어버리기 전의 본연의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 본연의 나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어떠한 물건이 그리운 것이 아닙니다. 지어진 만상이 있다 해도 그 만상이 나와 관계가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역사와 세계가 있으나 그 또한 내 마음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고 참다운 나를 위로해 줄 수도 없으며 어떤 자극적인 충격을 줄 수도 없는 입장, 나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5-142)
다시 찾아야 할 본연의 나
인간에게 있어 제일 귀한 것은 본연의 나, 즉 하나님의 전체 속성을 갖추어야 할 본연의 나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잃어버렸으니, 즉 제일 귀한 것을 잃어버린 인간이기에 그것을 찾기 전에는 인간 자신 속에서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찾아 나선 우리,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선 우리,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려고 나선 우리는 어느 누가 치고 천대하여도, 그들에게 맞으면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치시는 데도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쳐 민족을 거쳐 세계까지 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치시는 목적은 인간을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과 접하고 있는 악의 분자를 제거시키기 위함입니다.
오늘날까지 사탄이라는 비원리의 주인공이 우리를 유린해 나왔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 우리의 창조이상 세계를 유린해 왔습니다. 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죄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 왔고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중심이 되어 왔으니, 이제 우리 인간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생각하고 창조본연의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탄이 내 육신을 지배하고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움직여 왔으니, 그보다 강한 조건이 우리의 마음에서 폭발되어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본연의 인연을 맺으려야 맺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 끝날은 사탄에게는 무한한 슬픔의 날이요, 본연의 인간에게는 무한한 기쁨의 날이요,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앞에는 무한히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우리는 이 끝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서는 끝날의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무엇을 해 나오셨던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입시키기 위해 기나긴 세월을 수고해 오셨던가? 우리를 하나의 발판, 하나의 터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주입하기 위해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신 말씀을 인간이 잃어버린 연고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6천 년이 걸리더라도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참된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실존성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그러한 말씀을 인류 앞에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인류 앞에 그런 말씀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에게 그 말씀을 찾아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6천 년을 수고해 나오신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5-144)
복귀의 순서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도 말씀을 통해서 지으셨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도 말씀을 통해 찾아 나오십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말씀을 뿌렸으니 그 말씀을 거두어서 아버지의 것으로 찾아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끝날은 말씀을 거두어서 하나의 실체를 갖추어야 하는 때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실체가 빚어집니다. 이같이 말씀을 통해 빚어진 실체를 찾아 헤매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실체를 먼저 보여 주지 않고 말씀을 먼저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거꿀잡이로 찾아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순서대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체를 소망하시되 먼저 타락한 인간들의 가슴 가슴에 말씀의 씨를 뿌린 후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실체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체가 나오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한 말씀과 같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실체가 된 후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면 생령이 될 것입니다. 생령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존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세계에 들어가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들이 그런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생령체로서 완성되어 당신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셔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내리신 말씀의 완성실체로 왔습니다. 구약시대의 인간들 앞에 무형의 신으로 말씀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대신한 실체로 왔고, 실체를 갖춘 하나님의 격으로 나타나서 인간 앞에 실체의 말씀을 주어 인간과 하나되기 위하여 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거두는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어 몽땅 그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실체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하여 보내진 예수님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처단했습니다. (5-146)
예수님의 강림목적과 유대민족의 불신
말씀은 실체 앞에 굴복하고 실체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 들어가야 되는데, 그 실체인 예수님을 인간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실체였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4천 년 동안의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조건을 청산하려고 했습니다. 그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이란 4천 년 동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것을 말합니다. 이 원한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한 분을 믿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풀릴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4천 년의 원한의 말씀을 내세워 그 실체를 잡아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범한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유리고객하면서 종의 종이 되어 세계인으로부터 밟힘을 당했고 천대에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참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실체적인 말씀을 세워 놓으셔야 했던 예수님이 구약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이 신약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약말씀에서 실체를 찾아 허덕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봐도 말씀의 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말세는 어떠한 때인가? 말씀의 실체, 말씀의 주인공을 상봉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체와 상봉하려면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참된 인간 앞에 나타내려고 하신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을 지니고 그 말씀과 일체(一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오시는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완전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으나 그것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신을 통하여 그 완전한 말씀을 나타낼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 년 동안 수고하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끝날에 예수님이 나타내려던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실체로 나타나실 그분을 알아서 그분을 신랑으로 모시고 신부로서 신랑 신부의 상대적인 관계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5-148)
실체신앙의 시대, 부활신앙의 시대
무형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대하던 것을 실체로 대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예수님이 운명한 연고로 구약형의 말씀밖에 남기지 못했으니 그것이 신약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체를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실체신앙의 시대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강림목적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믿을 것이 아니라 부활의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몸을 유린한 죄로 인해 생겨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후 40일을 지나 이루어진 성신강림과 더불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른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한 실체로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해 줘야 했습니다. 그 말씀은 사탄이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나서는 사람은 사탄이 시험을 못 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탄이 억천만 번 시험을 하고자 해도 시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탄에게 침범받으면서 남겨놓고 간 말씀을 가지고 믿고 나가고 있으니 그 성도들에게 사탄이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체를 갖추어서 사탄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시대는 어느 때에나 올 것인가? 그때가 재림의 날입니다.
내 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말씀의 씨앗을 심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둬들여야 하겠고, 내 몸에 말씀을 통한 실체를 심어서 하나님의 실체로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쁨에 겨워 품으시고 사랑하실 수 있는 실체, 영과 육이 하나된 완성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신랑 신부가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끝날인 오늘날에는 성신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서 이 성신이 백 퍼센트 역사할 수 있게 재촉할 수 있는 성도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5-150)
인간은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성신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을 끝내게 하려면 예수님이 돌아가고 나서 성신을 보낼 때의 말씀의 본의를 완전히 알고 보내신 실체의 사정을 알아 그 실체 이상의 자리까지도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성신의 역사는 땅에서 거두어지고 땅 위에 성신의 대신 존재를 세워서 성신의 역사를 계승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님한테 옮겨졌고, 예수님의 일이 성신한테 옮겨졌습니다. 이제 성신의 일을 오늘날 믿는 성도들에게 옮겨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삼위신이 쉴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까지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을 찾을 수 없고, 우리 몸에 말씀을 심었다고 해도 그 말씀의 목적을 이룬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왔다간 후 2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렸던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이 아니요, 예수님의 마음 역시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2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기다리게 되었던가? 수많은 곡절을 다 넘고 나서 “하나님의 6천 년 역사의 내용이 이러이러한 것이오!” 할 수 있게 하나님을 대신한 완성실체로서 사탄이 반박할 수 없는 말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지 못한 연고로 2천 년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가 연장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입니다.
이제 끝날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고 예수님의 실체를 붙들고 나서는 우리는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고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몸을 붙들고 난 후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옮겨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할 수 있는 실체를 갖추고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갖춘 연후에야 비로소 인류 앞에 약속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여됩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믿는 것처럼 하나님은 존엄하셔서 우리와 관계 맺을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껍데기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의 실체요, 하나님의 심정의 실체로 믿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몸에 옮겨받아 하나님이 동하면 같이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활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동하고 정할 수 있는 관계,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인간을 만드시고자 한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5-152)
관념적인 신앙을 버려야 할 때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처럼 “오, 하나님!” 하는 그런 관념적인 신앙을 가질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 끝날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 나온 참된 하나님의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하나님을 생활의 중심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을 찾아야 하나님은 숨을 내쉬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숨을 내쉬시고 의논할 수 있는 인간은 억천만 사탄이 있다 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람, 하나님의 사정을 붙안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갔으되 하나님이 예수님을 붙들고 “너는 내 영원한 아들이요, 사탄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킨 내 참된 아들이다.” 하시면서 한 번도 사랑해 보시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갔던들 낙원에 가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원한은 신랑 신부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운명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영계에 가서 영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신을 통하여 영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되 육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정입니다.
성신도 우리를 찾는데 있어서는 우리의 육신이 없으면 안됩니다. 몸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지으신 연고로 예수님도 성전을 통해야 되고 성신도 성전을 통해야만 구원섭리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선의 아들딸을 번식하는 것인데 영육의 실체를 통하지 않고 번식하는 존재는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런 창조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사시킬 대신 존재요,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창조본연의 제2의 아담적인 존재로 왔던 분이요,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갖고 왔던 분이요, 하나님의 이념과 생명력과 사랑을 가지고 나타났던 분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슬픔은 말씀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리신 것이요, 생명을 번식시킬 실체를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역사적인 기도를 올려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석판을 받기 위해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이삭 번제 때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걸어 놓고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일보 일보 걸으며 마음으로 드리던 기도 이상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고자 심정에 사무쳐 하늘땅을 붙들고 눈물짓는 무리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5-162)
<훈독 소감>
하나님이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같이 사시는데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과 같이 심정과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본 적이 없게 되었기에 6천년 동안 창조본연의 인간을 찾아오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만물과 인간을 지으실 때도 말씀을 통해서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을 찾아 세우는 것도 말씀을 통해 말씀의 실체로 빚으셔야 하심을 강조하시면서 말씀의 실체이신 예수님을 보내신 뜻도 여기에 있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아담 해와의 실체를 빚으시고 난 후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은 실체를 갖춘 하나님 격으로 인간을 찾아 오시어 실체를 빚는 말씀을 주시기 위해 메시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심을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 그 말씀의 씨앗을 심음으로 말미암아 실체를 빚고 나아가 하나님의 실체(생령체)로 거둘 수 있음을 깨우쳐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하여 나를 말씀의 실체로 빚지 않으면 실체하나님, 즉 아버지의 성전이요, 아버지의 형상인 생령체가 빚어질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 자신이 생령체로 빚어질 때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성령의 실체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 원문 &&&&&
천일국 훈독경 제 2 권 제 13 일
같이 살아야 할 인간과 하나님
날짜 : 1959. 1. 1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하시게 된 동기와 목적
하나님이 온 피조만물을 창조하신 동기와 목적은 같이 사시는 데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 연하여 있는 모든 존재물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움직일 수 있는 기쁨의 존재들로 창조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심혈을 기울여 지으신 존재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 중의 생각의 존재요, 심정 중의 심정의 존재요, 창조이념 중의 이념의 존재요, 창조실체 중의 실체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인간을 소유하시는 것은 온 우주를 소유하시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인간을 주관하시는 것은 또한 피조세계 전체를 주관하시는 것이 되는 것이요, 인간과 더불어 기뻐하시는 것은 피조세계 전체와 기뻐하시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렇듯 창조이상으로부터 창조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목적의 전체를 대신한 대표적인 존재로 인간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목적은 같이 사시는 것인데 오늘날 인간과 만물, 모든 존재물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권내에 있지 않는 것은 타락으로 인한 것입니다. 타락된 연고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터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잃어버리신 그날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우리 인간들을 찾아 헤매시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전(殿)이 되고,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하늘과 땅을 대신한 하나의 실체존재가 되면 우리 인간이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인간을 통하여 만물에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 만물을 연결시키는 중간 매개체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이렇게 되어야 할 우리 인간들이 오늘날까지 그러한 기쁨을 느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지으시려던 본연의 성전을 갖추어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이념을 가져 본 적도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의 인간들의 실상이었습니다.
땅 위에 아무리 잘나고 훌륭하다고 만상 앞에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을 갖춘 성현이나 현철이 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념의 전(殿)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찾아주실 수 있는 이념의 실체가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할 수 있는 참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권내에 있던 우리 인간, 그러한 운명에 처해 있던 우리 인간은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서 어디에 머물고자 6천 년의 기나긴 세월을 거쳐왔던가? 오늘도 살기를 바라고, 내일도 살기를 바라고, 생에 대한 애착심을 갖고 생의 끝없는 연장을 소망하면서 하나의 이념을 찾아 헤매는 인간들이 머물고자 하는 소망의 기점은 과연 어디냐?
지어 주신 주인이 계시되 그 주인을 모르고, 심정의 주체가 계시되 그 심정의 주체를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인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창조의 이념이 없고 창조의 실적이 없으면 모르겠거니와 창조의 실적인 만상이 있고, 창조의 이념이 하나님 속에 남아 있다면 그 이념과 실적을 완성시키고 완결시킬 수 있는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존재는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그 존재는 만물도 아니요, 하나님도 아니요,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될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우리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 인간을 한 터로 삼아 하늘 것으로 옮기기 위해서 찾아오고 계십니다. (5-140)
타락의 결과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모든 조건을 완비하여 생활을 통하여 창조이념 전체와 연결될 수 있고, 그 이념권 내에서 완성될 수 있고, 완성된 실체로서 하나님 앞에 이념의 실체가 될 수 있을 것이었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떠나가시고 만물과의 인연도 끊어져 버렸고 인간과 인간끼리의 인연도 끊어져 버리게 되었으니 이것이 슬픔 중의 슬픔이요, 탄식 중의 탄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내 한 개인에 국한된 탄식이 아니라 옆을 바라보면 동포의 탄식이요, 눈을 들어 세계를 바라보면 인류의 탄식이요, 더 나아가 만물을 바라보면 만물의 탄식이요, 머리를 들어 마음을 통하여 하늘 세계를 바라보면 하늘의 탄식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여러분은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마음 몸으로 그 탄식을 붙들고 크게 탄식하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탄식하는 모든 만상을 붙들고 그 위에 맺혀 있는 탄식, 우리를 지으신 주인의 탄식을 염려하면서 더 큰 탄식에 사무쳐 하늘을 붙들고 통곡하고, 만민을 붙들고 통곡하고, 만물을 붙들고 통곡하고 싶은 그런 심정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마음을 갖지 못한 우리지만 하나님이 탄식의 심정으로 우리를찾아 헤매신다 할진대 그 하나님 앞에 불효자 중의 불효자요, 역적 중의 역적이요, 배반자 중의 배반자라는 것을 느끼기라도 해야 합니다.
만일, 그런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모르지만 계신다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역적입니다. 이러한 불신의 인간이요, 배반의 인간이요, 절망의 인간을 다시 빚어 낼 조건을 찾아서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까지 헤매고 계십니다.
타락한 아담의 위치에 있는 인간을 끌어내어 하늘 편에 세워 놓고 하나님의 이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소원까지 하나님 전체의 속성을 완비시키시어 그들과 더불어 의논하면서 살고자 하시는 것이 창조주가 인간을 찾아 헤매시는 목적입니다. 이것을 느끼는 자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은 그 이상 고마워하실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인간들이 모르는 사이에 개인을 통하여 환경적인 섭리의 발판을 닦으셨고 환경을 통하여 세계적인 섭리의 발판을 닦아 나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복귀노정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6천 년 역사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과 인연 맺기 위하여 투쟁해 왔고 우리 민족과 국가와 땅과의 인연을 맺기 위해 투쟁해 나온 목적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에 그 말씀을 배반했던 우리 선조들에게만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타락 이후 6천 년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어느 시기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지 않은 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어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슬픔 중의 슬픔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심어 말씀의 결실을 맺기를 원하시던 하나님의 소망을 수천만 번 배반한 선조들임을 알게 될 때 타락의 혈통을 남긴 선조들을 대해 적개심을 갖는 참된 후손들은 나오지 않겠느냐? 선조들이 그 말씀을 배반하여 하나님한테 서러움을 안겨 드리고 죄의 담을 쌓아 놓은 것을 분하게 여겨 그 선조들을 붙들고 항거할 수 있고 북받치는 심정으로 하늘땅을 대하여 외치고 나설 수 있는 참된 아들딸의 모습을 하나님은 찾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몸에 당신의 말씀을 심어 그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갖춘 본연의 인간으로 세우시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심으려고 하셨고, 하나님의 이념을 심으려 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그 마음속에 옮겨주시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그러한 창조이념이 우리 선조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온데간데 없어졌고, 하나님의 말씀도 온데간데 없어졌고, 하나님의 실체인 본연의 인간도 없어졌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도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린 이상의 슬픔은 피조세계에 또 다시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서글픈 사실을 놓고 뼈살에 사무치는 심정을 갖고 흐느껴 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타락의 제물이 된 연고로 인간들은 잃어버리기 전의 본연의 나를 그리워합니다. 그 본연의 나가 그립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어떠한 물건이 그리운 것이 아닙니다. 지어진 만상이 있다 해도 그 만상이 나와 관계가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역사와 세계가 있으나 그 또한 내 마음의 세계와 인연을 맺을 수 없고 참다운 나를 위로해 줄 수도 없으며 어떤 자극적인 충격을 줄 수도 없는 입장, 나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느냐? (5-142)
다시 찾아야 할 본연의 나
인간에게 있어 제일 귀한 것은 본연의 나, 즉 하나님의 전체 속성을 갖추어야 할 본연의 나입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잃어버렸으니, 즉 제일 귀한 것을 잃어버린 인간이기에 그것을 찾기 전에는 인간 자신 속에서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타락된 인류는 동서남북 사방에 흩어져 그 본연의 나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무엇을 찾아야 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내가 못 되어 있고, 몸은 있으되 하나님의 전(殿)이 못 되어 있고, 마음은 있으되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마음이 못 되어 있고, 심정은 있으되 하나님의 심정과는 하등의 관계를 맺지 못하는 심정이 되었습니다. 내가 이념과 사랑을 찾고 논의하되 그것들이 하나님과 하등의 관계가 없는 입장에 떨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슬픔이요, 하나님의 슬픔이요, 피조만물의 슬픔입니다. 이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을 찾아 나선 우리,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나선 우리, 하나님의 한을 해원하려고 나선 우리는 어느 누가 치고 천대하여도, 그들에게 맞으면서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찾아가야 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치시는 데도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쳐 민족을 거쳐 세계까지 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치시는 목적은 인간을 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과 접하고 있는 악의 분자를 제거시키기 위함입니다.
오늘날까지 사탄이라는 비원리의 주인공이 우리를 유린해 나왔고 우리의 가정과 사회, 우리의 창조이상 세계를 유린해 왔습니다. 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죄가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해 왔고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중심이 되어 왔으니, 이제 우리 인간들이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을 생각하고 창조본연의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탄이 내 육신을 지배하고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움직여 왔으니, 그보다 강한 조건이 우리의 마음에서 폭발되어 나오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창조본연의 인연을 맺으려야 맺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들은 사탄에게 얻어맞으면서 나오다 보니 오늘날 종말시대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때는 하나님의 6천 년의 소원이 접해 들어오는 때요, 사탄이 깨지는 때요, 인류의 소원이 접해 들어가는 때입니다.
이 끝날은 사탄에게는 무한한 슬픔의 날이요, 본연의 인간에게는 무한한 기쁨의 날이요, 섭리해 나오신 하나님 앞에는 무한히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우리는 이 끝날을 맞이하기 위하여 나서는 끝날의 성도들이 되지 않으면 안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무엇을 해 나오셨던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입시키기 위해 기나긴 세월을 수고해 오셨던가? 우리를 하나의 발판, 하나의 터로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주입하기 위해서 수고해 나오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주신 말씀을 인간이 잃어버린 연고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6천 년이 걸리더라도 이 땅 위의 인류 앞에 참된 말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실존성을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그러한 말씀을 인류 앞에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인류 앞에 그런 말씀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에게 그 말씀을 찾아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6천 년을 수고해 나오신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몸을 헤쳐서 분석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뿌리기 위해 6천 년 동안 수고하셨는데, 그 피땀의 결정체인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가 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5-144)
복귀의 순서
하나님은 어차피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와 하나되어 우리의 생활환경과 이 세계에 이념의 동산을 창설하셔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복귀섭리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실 때 여러분이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사탄세계의 어떠한 말보다 강력한 하나님이 뿌리신 말씀의 소유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도 말씀을 통해서 지으셨고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도 말씀을 통해 찾아 나오십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할진대는 하나님이 말씀을 뿌렸으니 그 말씀을 거두어서 아버지의 것으로 찾아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끝날은 말씀을 거두어서 하나의 실체를 갖추어야 하는 때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실체가 빚어집니다. 이같이 말씀을 통해 빚어진 실체를 찾아 헤매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실체를 먼저 보여 주지 않고 말씀을 먼저 보여 주셨는데, 그것은 거꿀잡이로 찾아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순서대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체를 소망하시되 먼저 타락한 인간들의 가슴 가슴에 말씀의 씨를뿌린 후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 실체를 갖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체가 나오면 성경에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세기 2:7) 한 말씀과 같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실체가 된 후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면 생령이 될 것입니다. 생령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존재, 하나님과 일체를 이룬 세계에 들어가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실체대상이라는 것을 체휼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인간들이 그런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생령체로서 완성되어 당신 앞에 나타나기를 바라셔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역사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마음의 터 위에 뿌려 놓으신 말씀을 통하여 무엇을 하실 것인가?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리셨던 아담 해와의 형상을 다시 빚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천 년 역사가 끝날 때 하나님이 인간 앞에 말씀을 대신하여 말씀의 실체로 보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실체로 나타난 예수님한테는 구약시대에 뿌려진 말씀을 받은 인간들을 주장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구약 율법을 믿고 있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마음의 터전 위에 말씀의 대신 존재를 세워야 했고, 예수님의 몸을 붙들어야 했고, 예수님의 마음을 붙들어야 했고, 예수님의 이념을 붙들어야 했고, 예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사랑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말씀을 통하여 예언되었고 하나님의 무한한 고생을 통하여 보내진 예수님, 전체의 말씀을 대신할 수 있었던 실체존재, 우리 인간이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붙들 수 있게끔 보내진 그 예수님은 어디로 갔느냐?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이 4천 년 동안 내리신 말씀의 완성실체로 왔습니다. 구약시대의 인간들 앞에 무형의 신으로 말씀하셔야 했던 하나님의 서글픈 심정을 대신한 실체로 왔고, 실체를 갖춘 하나님의 격으로 나타나서 인간 앞에 실체의 말씀을 주어 인간과 하나되기 위하여 왔습니다.
또,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거두는 동시에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을 믿어 몽땅 그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실체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하여 보내진 예수님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처단했습니다. “1600년 전부터 모세를 통하여 세워진 율법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예수가 뭐야? 이 말씀에 굴복 안 하는 자는 반역자다.” 하여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실체를 잃어버린 인간이 되었습니다. (5-146)
예수님의 강림목적과 유대민족의 불신
말씀은 실체 앞에 굴복하고 실체는 하나님 앞에 굴복해 들어가야 되는데, 그 실체인 예수님을 인간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실체였던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 4천 년 동안의 역사적인 모든 원한의 조건을 청산하려고 했습니다. 그 역사적인 원한의 조건이란 4천 년 동안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것을 말합니다. 이 원한은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한 분을 믿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풀릴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4천 년의 원한의 말씀을 내세워 그 실체를 잡아버렸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범한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은 세계를 유리고객하면서 종의 종이 되어 세계인으로부터 밟힘을 당했고 천대에 천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영광 중의 영광의 나라를 건설했어야 할 민족이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헤매면서 영광의 나라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죽인 죄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참말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 위에 실체적인 말씀을 세워 놓으셔야 했던 예수님이 구약과 같은 약속의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이 신약말씀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신약말씀에서 실체를 찾아 허덕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을 봐도 말씀의 중심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13) 하면서 말씀을 못 다하고 갔습니다. 인간이 완성된 실체, 땅 위에서 완전한 기반을 잡은 실체로서 살 수 있는 생활적인 말씀은 성경 가운데도 없습니다. 그 말씀을 못 다하고 간 예수님인 연고로 다시 와야 한다는 명제가 남아졌습니다. 믿어지지 않으면 기도해 보십시오! 기도해 보면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면 오늘날 말세는 어떠한 때인가? 말씀의 실체, 말씀의 주인공을 상봉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체와 상봉하려면 인간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참된 인간 앞에 나타내려고 하신 그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중심을 통할 수 있는 말씀을 지니고 그 말씀과 일체(一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오시는 주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완전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으나 그것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성신을 통하여 그 완전한 말씀을 나타낼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 년 동안 수고하신 성신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끝날에 예수님이 나타내려던 말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하여 실체로 나타나실 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분을 알아서 그분을 신랑으로 모시고 신부로서 신랑 신부의 상대적인 관계를 맺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실체를 갖고 이 땅에 와서 인간들을 실체적인 성전으로 완결시키기 위한 말씀을 못했으니 우리가 그 말씀을 대신한 가치적존재, 제2의 실체성전으로 나설 수 있어야만 우리의 몸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존재들이 살 곳이 지상천국입니다. (5-148)
실체신앙의 시대, 부활신앙의 시대
성경을 붙들고 울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구약의 완성실체로 왔던 예수님을 죽인 연고로 성경에는 그 예수님이 완성되어 실체로 나타내실 모든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못합니다.
무형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대하던 것을 실체로 대하기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예수님이 운명한 연고로 구약형의 말씀밖에 남기지 못했으니 그것이 신약말씀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체를 믿어야 합니다. 지금은 실체신앙의 시대입니다.
베드로는 12사도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입장에 있었으나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에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에는 못 나갔습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의 실체를 붙들 수 없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붙들려 했으나 붙들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이렇게 실체를 붙들 수 없게 된 것이 우리 인간의 제2차적인 비극입니다.
1차의 비극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잃어버린 것이요, 2차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 말씀의 완성실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다시 와야 합니다. 이것이 알고 보면 한없이 울어야 할 일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슬프다면 이 이상 슬픈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해원의 날을 바라시고 4천 년 동안 눈물의 고개, 슬픔의 고개, 복통할 수밖에 없었던 고개를 거쳐 나오셨습니다. 그러한 고개를 넘으시면서 소망의 실체로 예수님을 이 땅에 세우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분을 죽음의 자리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님의 생명을 대신하고 약속한 이념을 대신한 메시아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메시아의 뒤를 따르고 메시아를 모실 수 있는 준비를 하라고 하셨는데 메시아로 왔던 예수님을 붙들고 울었어야 할 민족이요, 통곡했어야 할 이스라엘은 사탄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아담을 잃어버린 그 날부터 4천 년 동안 하나님을 모시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왔다고 믿고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강림목적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십자가의 도리를 믿을 것이 아니라 부활의 도리를 믿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몸을 유린한 죄로 인해 생겨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진 후 40일을 지나 이루어진 성신강림과 더불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른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으러 왔다면 4천 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이 안 믿으면 들이치고, 애급에서 고역당하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끌어내셨겠습니까? 또, 바빌론에 포로가 되었을 때도 선지자를 세워 간곡히 권고하셨겠습니까? 4천 년 동안의 역사가 예수님을 잡아죽이기 위한 역사였습니까?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이 세계에 널려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민족과 같은 제2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심각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완성한 실체로서 하늘나라의 말씀을 해 줘야 했습니다. 그 말씀은 사탄이 시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나서는 사람은 사탄이 시험을 못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믿었던 성도들 가운데 시험받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사탄이 억천만 번 시험을 하고자 해도 시험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탄에게 침범받으면서 남겨놓고 간 말씀을 가지고 믿고 나가고 있으니 그 성도들에게 사탄이 공격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체를 갖추어서 사탄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시대는 어느 때에나 올 것인가? 그때가 재림의 날입니다.
내 몸에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말씀의 씨앗을 심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둬들여야 하겠고, 내 몸에 말씀을 통한 실체를 심어서 하나님의 실체로 거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쁨에 겨워 품으시고 사랑하실 수 있는 실체, 영과 육이 하나된 완성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존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신랑 신부가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끝날인 오늘날에는 성신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서 이 성신이 백 퍼센트 역사할 수 있게 재촉할 수 있는 성도들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성신이 오늘날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그 이념의 기준은 무엇인지 성신을 앞에 세워 놓고 물어봐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끝날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입니다. (5-150)
인간은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로 성경은 모두 66권이 되었습니다. 신약은 4복음서 이외에도 여러 권이 있지만 예수님이 지상에 왔다 간 이후 최후에 수록된 묵시록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하고 싶었던 말씀이었는데, 그것을 영계에서 들려 준 것입니다.
성신이 이 땅에서 하는 일을 끝내게 하려면 예수님이 돌아가고 나서 성신을 보낼 때의 말씀의 본의를 완전히 알고 보내신 실체의 사정을 알아 그 실체 이상의 자리까지도 넘어갈 수 있는 하나의 존재가 나와야 합니다. 이렇게 성신의 역사는 땅에서 거두어지고 땅 위에 성신의 대신 존재를 세워서 성신의 역사를 계승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님한테 옮겨졌고, 예수님의 일이 성신한테 옮겨졌습니다. 이제 성신의 일을 오늘날 믿는 성도들에게 옮겨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삼위신이 쉴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까지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말씀을 찾을 수 없고, 우리 몸에 말씀을 심었다고 해도 그 말씀의 목적을 이룬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신부가 되어야 할 입장에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려 할 때 오지 말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가 “오냐, 오냐!” 하면서 예수님이 손을 벌려 품어 줄 수 있는 신부의 단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원한을 다 탕감하고 살아서 완성의 말씀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선 신부가 되어야만 사탄이 참소할 수 없습니다. 또, 그래야만 섭리가 끝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왔다간 후 2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기다렸던 것이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이 아니요, 예수님의 마음 역시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2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기다리게 되었던가? 수많은 곡절을 다 넘고 나서 “하나님의 6천 년 역사의 내용이 이러이러한 것이오!” 할 수 있게 하나님을 대신한 완성실체로서 사탄이 반박할 수 없는 말씀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지 못한 연고로 2천 년 동안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나긴 세월 동안 섭리가 연장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입니다.
이제 끝날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고 예수님의 실체를 붙들고 나서는 우리는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고 사탄이 침범할 수 없는 말씀을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몸을 붙들고 난 후 예수님의 마음과 사랑을 우리의 마음에 옮겨 받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할 수 있는 실체를 갖추고 예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심적 기반을 갖춘 연후에야 비로소 인류 앞에 약속한 하나님의 사랑이 부여됩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말씀을 완성한 실체로 섰던들 아담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그는 하나님의 실체요, 말씀의 화신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아담의 몸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아담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 아담의 심정은 하나님의 심정, 아담이 느꼈던 감정도 하나님의 감정으로 나타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믿는 것처럼 하나님은 존엄하셔서 우리와 관계 맺을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한복음 14:20)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껍데기만 믿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말씀의 실체요, 하나님의 심정의 실체로 믿을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이념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몸에 옮겨받아 하나님이 동하면 같이 동하고 하나님이 정하면 같이 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생활적인 면에서 하나님과 동하고 정할 수 있는 관계,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인간을 만드시고자 한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5-152)
관념적인 신앙을 버려야 할 때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처럼 “오, 하나님!” 하는 그런 관념적인 신앙을 가질 때는 지났습니다. 이제 끝날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아 나온 참된 하나님의 아들딸이 있다 할진대 그들은 하나님을 생활의 중심으로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간을 찾아야 하나님은 숨을 내쉬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숨을 내쉬시고 의논할 수 있는 인간은 억천만 사탄이 있다 할지라도 침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통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사람, 하나님의 사정을 붙안고 사랑하는 자를 빼앗아 갈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왔다 갔으되 하나님이 예수님을 붙들고 “너는 내 영원한 아들이요, 사탄을 근본적으로 굴복시킨 내 참된 아들이다.” 하시면서 한 번도 사랑해 보시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육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고 갔던들 낙원에 가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원한은 신랑 신부의 관계를 이루지 못하고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할 수 있는 개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영육을 합한 실체로서 사탄이 도저히 참소할 수 없는 승리의 말씀을 하나님 대신 나타낼 수 있는 입장에 섰던들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사탄은 꼼짝도 못 하고 굴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운명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실체로서 종결지어야 할 창조이념을 종결짓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영계에가서 영적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신을 통하여 영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되 육을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정입니다.
예수님의 육을 친 사탄에게는 오늘날 이 땅 위에 있는 인류의 육을 붙들고 대항할 수 있는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그 조건을 당당히 반대하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성신도 우리를 찾는데 있어서는 우리의 육신이 없으면 안됩니다. 몸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지으신 연고로 예수님도 성전을 통해야 되고 성신도 성전을 통해야만 구원섭리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선의 아들딸을 번식하는 것인데 영육의 실체를 통하지 않고 번식하는 존재는 이 땅 위에 없습니다. 그런 창조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예수님을 땅 위에 세우시어 타락 후 4천 년간 쌓여 온 역사적인 서러움을 탕감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런 고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사시킬 대신 존재요,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창조본연의 제2의 아담적인 존재로 왔던 분이요, 하나님의 심정과 사정과 소원을 갖고 왔던 분이요, 하나님의 이념과 생명력과 사랑을 가지고 나타났던 분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후 하나님의 슬픔은 말씀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을 잃어버리신 것이요, 생명을 번식시킬 실체를 잃어버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혈통을 가진 민족은 어디로 갔느냐? 생명의 중심으로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의 상대를 찾고 계시고 말씀을 대신할 수 있는 생명체를 갖춘 하나님의 혈족을 찾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이념을 찾으십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사랑을 부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자 창조이상임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5-154)
이제 끝날에 처해 있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역사적인 기도를 올려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석판을 받기 위해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상에서 이삭 번제 때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생사를 걸어 놓고 드린 기도 이상의 기도,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일보 일보 걸으며 마음으로 드리던 기도 이상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를 하고자 심정에 사무쳐 하늘땅을 붙들고 눈물짓는 무리를 찾아야 할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 (5-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