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 2 권 제 11 일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훈독본)
날짜 : 1959. 10. 1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모든 존재물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
하늘이나 땅의 어떠한 존재물을 막론하고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늘에서도 하나의 사랑이 중요한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도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인간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분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예수님의 사랑이요, 천상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인데, 그 사랑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피조만물의 생명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요, 가치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할진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생명을 체휼하지 못한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논의하고, 아무리 생명을 논의하고, 아무리 이념을 논의한다 해도 하늘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인류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끊어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데 먼저 어떠한 섭리를 하시느냐? 참다운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랑에 굶주림을 느끼는 마음, 이념의 결핍을 느끼는 마음을 움직여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이념을 심중으로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다면 이러한 충격이 마음으로부터 폭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와 관계를 맺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7-288)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정도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데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시는지 여러분의 관념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다 할진대 부모는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개의치 않으며 죽음도, 어떤 행동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밖에 안될 것인가? 어떠한 역경과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고 희생을 개의치 않고 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할진대, 하나님이 창조 본연의 인간을 사랑하시려던 그 사랑은 타락한 세상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고, 미치고 죽는 자가 있는데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시겠습니까? (7-290)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아담 해와를 지으셨고, 또한 사랑의 동기가 되시며 사랑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을 몽땅 쏟기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피조만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하늘로부터 천지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자로서 아담 해와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자식일망정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을 놓고도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 땅 위에 악의 자손이 아닌 선의 자손을 번식하였다면 여러분은 자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바라보시던 그 느낌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7-291)
인간 타락 직후의 하나님의 슬픔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사랑의 심정으로 사랑하신 사람이 역사이래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심정과 그러한 감촉에 화하여 사랑하는 부부가 없었습니다. 매일 죄나 짓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타락한 이후에 벌어진 천사장급 이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심정은 터질 듯, 찢어질 듯, 미칠 듯했습니다.
인간이 타락된 후 하나님의 마음속에 맺혀진 원한의 심정,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해서 6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난 오늘 이 시간까지도 하나님은 쉼 없이 허덕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것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형장으로 보내셨고, 그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류가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7-292)
타락 인간을 복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
타락한 이후 인간이 천만 번 배반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수고도,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개인 앞에 배반당하고, 민족 앞에 배반당하고, 유대국가 앞에 배반당하시면서도 반역한 그들을 저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늘을 저버릴지라도 인연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을 저버리지 못하십니다.
사람을 대하여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들딸이라는 심정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하여 있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배척당하고 내일도 배척당하시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배척당하고 저곳에서 배척당하시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참다운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걸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붙들고 울고,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울면서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 이것이 우리들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7-294)
하나님의 소원과 인간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느냐? 부모의 사랑에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을 가한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여러분이 생각하기 전, 사모하기 전, 그리워하기 전, 찾아 허덕이기 전에 하늘은 이 날 이 때까지 그리워하며 허덕이고 미칠 듯한 입장에서 우리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어떤 궁전 가운데 편안히 앉아 계시는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6천 년이란 역사를 허덕이며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기 전에 몰리며 찾아오셨고 죽음의 고개를 넘으시며 찾아오셨습니다. 선열들이 순교의 고비고비를 넘을 때마다 하늘도 그러한 고충을 느꼈습니다.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움직이는 아들딸과 함께 고충을 당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위로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고, 인간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슬퍼하시며 찾아오셨던 하나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갖고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위로하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얼마나 쓰러지셨으며, 얼마나 허덕이셨나이까?” 할 수 있는 아들, 천만 번 수고하고 천만 번 모욕을 당하고 천만 번 어려움을 당하시면서도 슬펐던 가슴을 헤쳐 놓고, 억울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분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통정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우리가 믿고 모셔야할 하나님은 그러한 분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뒤넘이치면서 찾아오셨던 하나님의 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중심삼고 화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이 찾아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요, 그러한 세계가 창조이상의 세계입니다.
땅 위에 불행이라는 명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 외에는 그런 명사를 붙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 불행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7-296)
독생자의 사명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홀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말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걸고 처음 낳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똑똑히 못 보여 주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이 어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은 어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국가는 어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는 어떻다는 것을 못 보여 주었습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천신만고 역사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치고 거쳐오시면서 민족이 지쳐 떨어지면 붙들고 또 붙들면서 4천 년 역사가 지난 후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세워서 하나님의 4천 년의 슬픔을 털어놓고 4천 년의 고충을 털어놓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우주의 창조이념을 복귀 완성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창조이념을 완성시킬 대표자로 보내셨던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7-298)
예수의 형편
예수님은 태어나서 이 땅의 최악의 고난의 길까지도 다 죽지 않고 거쳐야 했습니다. 그분은 마구간에서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최하의 자리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자랄 때도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에는 무한한 슬픔이 사무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에 태어났지만 요셉과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딸을 기르게 될 때 예수님을 등한시했습니다. 동생들한테도 천대를 받고 자란 불쌍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정적으로도 의지할 부모가 없었고 가정적으로도 안식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런 자리를 원망할래야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모시던 아버지는4천 년 동안 억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았고, 불효의 역사를 거듭해 나온 선조들의 잘못까지도 책임지고 탕감복귀해야할 사명을 지닌 자신인 것을 알았기에 그분은 반대하던 무리를 대하여 원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대등한 심정을 가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반대하던 민족을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죽으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죽을 때까지의 예수님, 죽기 전 예수님의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어가던 예수님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은 어떠하겠느냐?”(누가복음 12:49∼50) 했지만, 그 말씀의 상대가 없었습니다. 4복음서의 말씀을 했지만 그 말씀의 상대를 찾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천당 가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신다는 이야기는 천만부당한 것입니다. 말씀은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심정과 실체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7-299)
예수를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들만 잘먹고 재미있게 살라고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의 가정, 민족, 세계 전체를 대신하여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셨으니 그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딸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그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인 예수님이었기에, 예수님과 같은 아들딸을 찾으시려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였기에 멸망을 예고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상에 쓰러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심적인 동기가 하늘에서부터 출발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만 되어선 안됩니다. 예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품고 하나님의 속에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것을 유업으로 맡기고 안심하실 수 있었던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정할 수 있고 모든 이념을 맡기고 축복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심정에 사무친 아들딸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났다면 재림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2천 년이나 걸릴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죽어간 사람들은 있었으나 예수님의 심정을 알고 예수님의 실체를 믿고 죽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무얼 믿으란 말입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했습니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것, 영원히 영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악된 이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 줄 아는 자, 또 독생자를 세상과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세상을 자기의 몸보다도 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으니, 자신을 주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제자를 세우기 위한 3년 공생애였습니다. 3년 동안 세 제자를 아들딸같이 만들기 위하여, 12사도를 참다운 직계의 아들딸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한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노아 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 하나님,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 3대를 세워서 섭리하신 것과 같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3수를 찾아 나오는 천적인 복귀의 원칙에 따라서 믿음의 세 아들을 세워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 버리고 가더라도 그 세 제자는 떨어져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고 골고다 산정까지 같이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슬픈 역사는 거기서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7-301)
세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자 했다면
만일, 세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자 했다면 예수님은 승천하지 않고 땅 위에서 뜻을 이뤘을 것입니다. 성신이 오고 믿음의 아들딸이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이 땅 위에서 영적으로라도 기반을 잡고 뜻을 이루어 나왔을 것입니다.
땅을 구하러 온 예수님이 왜 승천하고, 어머니 신인 성신이 무엇 하러 예수님의 대신으로 땅 위에 오는가? 배반한 땅, 이 땅은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해와, 곧 어머니 때문에 타락했으니 이 타락한 땅의 죄를 씻는 일은 어머니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 신인 성신과 오늘 믿는 신자들은 뒤넘이치면서 사선을 넘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의 대신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을 생명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잃어버린 생명나무의 대신으로 온 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쫓아내야만 했던 그때도 하나님은 분하셨지만,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고서 죽이시고 또 다시 보내야 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은 더 분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사명자로 보냈지만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이 기뻐할 수 있었던 한 날을 예수님 당시에 못 가졌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7-303)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만일에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예수님이 독생자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그 앞에 독생녀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8절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참다운 딸의 모습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못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 년 역사는 딸을 찾는 역사였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앞으로 싸우게 되는 것도 이 문제 때문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딸로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해원의 그 날은 어린양 잔칫날입니다. 일천 남자 중에 택한 한 남자로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의 한 신부는 어디에 있을 것이냐? 성신이 와서 2천 년 동안 지상에서 해야 할 것은 신부를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축복해 주신 것은 아담 해와만을 사랑하시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 후손들까지도 사랑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실 수 있었던 후손,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었던 아들딸이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는 영원무궁토록 사랑할 나의 아들딸이요, 나의 직계로다.” 할 수 있었던 아들딸이 있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죽어 간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 뜻을 계승하여 땅 위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7-304)
세 가지의 해원해야 될 것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찾기 위하여 미칠 듯이 수고하신 것을 아시고 예수님도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미칠 듯한 심정을 갖고 30여 년의 생애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 가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2천 년 동안 미칠 듯이 이 땅 위의 인간을 고대하고 그리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제일 슬펐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분하고 억울했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기뻤던 고비가 어디냐? 슬프고 분한 고비는 나와 있지만 기뻤던 고비는 찾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4천 년 동안의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 못 하고 갔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한 예수님의 슬펐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은 아들딸을 잃어버리신 슬픔이요,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시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릴 만한 사랑의 심정으로 아들딸을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미쳐야 됩니다. 그 어떤 부부가 사랑하는 이상 미쳐야 됩니다. “내 뼛골, 내 생명이 여지없이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위한 충절의 심정이 변할소냐? 그대를 위한 흠모의 심정이 변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밥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7-305)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까? 아버님만 생각하면서 살고, 살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달음질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활과 생애노정에서 사라지지 않아야만 그분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로잡혀서 산천을 바라보면 산천에도 하나님의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흐르는 물을 보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눈물이 어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누운 자리도 하나님의 눈물바다고 골고다의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마음을 갖고 “골고다 산상에서 주님께 십자가를 지게 하셔야 했던 아버지시여!” 하며 눈물 짖는 아들딸, “예수님은 죽어 땅 위에 한을 남기고 갔지만, 나는 죽지 않고 실체로서 이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6천 년 역사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6천 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한테 빚을 진 자요, 6천 년의 하나님의 눈물의 결정체요, 골고다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산 나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시대적인 죄를 탕감하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벌리고 들어갈 때, 하나님은 너희가 고대하던 주인이요, 내가 찾던 아들딸이라며 사탄세계와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 앞에 늠름히 내세우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들딸들이 나타나야만 하나님은 비로소 6천 년 수고를 잊어버리고 하늘땅을 맡기고 안식의 자리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 슬픔의 역사를 붙들고 예수님이 울었고 예수님이 죽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아버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있다 할진대 고이고이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7-307)
<훈독 소감>
모든 존재의 근본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하지 못한 인간은 아무리 사랑과 생명과 이념을 논의한다고 해도 하늘과 하등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인류가 처참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깨우쳐 주시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과 이념을 찾아세워야 함을 역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으로 잃어버린 당신의 사랑의 대상인 아들딸을 찾으시기 위해 얼마나 수고의 길을 걸어오셨는지 토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최고의 효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찾으시는 아버지 앞에 자녀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버지 앞에 돌아가는 길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신앙이며 최고의 가치적 삶일 것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목표로 신앙을 해야 할지 확실히 깨우쳐 주시는 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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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 2 권 제 11 일
사랑하는 자녀를 내세우려는 하나님의 수고
날짜 : 1959. 10. 1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모든 존재물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
하늘이나 땅의 어떠한 존재물을 막론하고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하늘에서도 하나의 사랑이 중요한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도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이 중요합니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준 분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예수님의 사랑이요, 천상에서 사랑을 놓고 그리워할 것이 있다 할진대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통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인데, 그 사랑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시조가 사랑의 동산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그분의 영원한 사랑을 생의 이념으로 삼고 살아야 했던 것이 창조본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지 못하고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과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피조만물의 생명의 중심이요, 이념의 중심이요, 가치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인정할진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하나님의 생명을 체휼하지 못한 인간은 아무리 사랑을 논의하고, 아무리 생명을 논의하고, 아무리 이념을 논의한다 해도 하늘과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인류가 처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이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것을 다시 한 번 가슴 깊이 체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픔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슬픔에 반하여 하나님의 생명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소생의 가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끊어지고, 하나님의 이념이 끊어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데 먼저 어떠한 섭리를 하시느냐? 참다운 생명을 그리워하는 마음, 사랑에 굶주림을 느끼는 마음, 이념의 결핍을 느끼는 마음을 움직여서 섭리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이념을 심중으로 얼마나 그리워했습니까? 이런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찾으려야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충격이 마음으로부터 폭발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와 관계를 맺을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끝날이 가까웠습니다. 인간들은 이구동성으로 세상이 다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한 사람을 붙들고 “당신만이 내 심정의 고갈을 채워 줄 수 있고 당신만이 내 생명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이라고 할 사람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당신이 내 심정으로 그리고 흠모하던 분이요, 당신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채워 줄 수 있는 분”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념 분야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필코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역사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참다운 사랑의 사람, 참다운 생명의 사람, 참다운 이념의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7-288)
하나님의 인간을 사랑하시는 정도
그러면 우리가 도의 길을 찾아나가고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목적이무엇이냐?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이념을 지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도 찾으시고 예수님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닌 존재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예수님도 축복할 수 있는 자, 인정할 수 있는 자가 나와야만 이 세상에 참다운 사랑과 참다운 생명과 참다운 이념이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데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시는지 여러분의 관념으로는 그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자리에서 허덕이고 있다 할진대 부모는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하여 고통과 두려움을 개의치 않으며 죽음도, 어떤 행동도 개의치 않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일망정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정도밖에 안될 것인가? 어떠한 역경과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고 희생을 개의치 않고 갈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 할진대, 하나님의 사랑은 타락한 인간이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 본연의 인간을 사랑하시려던 그 사랑은 타락한 세상의 사랑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은 사랑하는 자식이 죽든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슬퍼하며 고통을 느낍니다. 의식까지 잃어버리거나 미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죽는 자도 있습니다.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끼리도 사랑하는 상대를 대하여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고, 미치고 죽는 자가 있는데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시겠습니까? (7-290)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하나님은 온 천지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으로 아담 해와를 지으셨고, 또한 사랑의 동기가 되시며 사랑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은 그 사랑을 몽땅 쏟기 위하여 아담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만우주를 주관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주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피조만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이라 할진대,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늘로부터 천지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자로서 아담 해와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의 선조를 지으셨습니다.
이념을 세우시고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가 이루어짐에 따라 이어서 창조하실 아담 해와를 생각하면서 즐거워하셨을 것입니다. 또,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자라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은 무한히 기뻐하셨습니다. 무한히 즐거워하시고 무한히 행복해 하시며 아담 해와를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위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실존성까지도 잊어버리고 아담 해와를 사랑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느냐?
여러분은 사탄의 혈통을 받고 태어난 자식일망정 무한히 사랑할 줄압니다. 또, 다른 사랑의 대상을 놓고도 무한히 사랑할 줄 압니다. 만일, 인간이 타락하지 않고 이 땅 위에 악의 자손이 아닌 선의 자손을 번식하였다면 여러분은 자식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바라보시던 그 느낌을 느낄 수 있고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7-291)
인간 타락 직후의 하나님의 슬픔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사랑의 심정으로 사랑하신 사람이 역사이래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한 심정과 그러한 감촉에 화하여 사랑하는 부부가 없었습니다. 매일 죄나 짓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은 타락한 이후에 벌어진 천사장급 이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다고 그저 막연히 듣고만 있습니다. 알고 있는 내용이 희미합니다. 거기에 대한 아무런 심정의 반응도 없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던 그 순간에 하나님의 심정은 터질 듯, 찢어질 듯, 미칠 듯했습니다. 자기의 처신을 잊어버릴 만큼 혼돈된 아버님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땅 위의 타락한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때는 뼛골이 녹아짐을 느끼며 자기가 대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을 살리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거늘, 타락의 길을 밟아 사망선으로 넘어가는 아담 해와를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그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것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슬픔을 체득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인간 세상의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 어떠한 최고의 사랑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슬픈 심정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탕감복귀의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본연의 세계로 되돌아가려면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고 하나님과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타락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슬퍼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 보았습니까?
인간이 타락된 후 하나님의 마음속에 맺혀진 원한의 심정,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해서 6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지난 오늘 이 시간까지도 하나님은 쉼 없이 허덕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고, 그것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것을 해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형장으로 보내셨고, 그것을 해원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류가 허덕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7-292)
타락 인간을 복귀하시는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은 개인으로부터 민족을 세워 놓고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하나의 실체를 세워 해원성사하셔야 하는 목적이 있으신 연고로그 목적을 향하여 역사노정을 붙들고 나오십니다.
타락한 이후 인간이 천만 번 배반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인간을 자녀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수고도, 죽음의 자리도 개의치 아니하셨습니다. 개인 앞에 배반당하고, 민족 앞에 배반당하고, 유대국가 앞에 배반당하시면서도 반역한 그들을 저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자식이 죄를 짓고 허랑방탕한다고 해서 부모가 그 자식을 버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본래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직계 아들딸로서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인연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하늘을 저버릴지라도 인연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은 인간을 저버리지 못하십니다.
그것을 생각하게 될 때,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들은 만천하에 불효의 팻말을 붙이고 천대를 받아 마땅한 후손들입니다. 국가적으로 보게 된다면, 하나님은 하나의 군왕이십니다. 하나님을 군왕과 같이 모시고 하늘 앞에 충신 중의 충신이 되어야 할 우리가 그런 입장에 서지 못하니 역적의 종족이라는 팻말을 붙여 만천하에 공개해도 항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이런 사정이 있다면 원수 중의 원수일 것인데, 그 원수 중의 원수와 같은 입장을 넘어설 수 있는 심정을 갖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느냐? 사람을 대하여 영원히 동고동락해야 할 아들딸이라는 심정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하여 있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배척당하고 내일도 배척당하시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이곳에서 배척당하고 저곳에서 배척당하시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참다운 자식을 찾아 나오시는 걸음을 돌릴 수 없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울어본 적도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인간들아, 네 자식이 그리워 울기 전에 하늘을 그리워하면서 울어라! 그 무엇이 원통하다고 땅을 치기 전에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치며 가슴을 쳐라! 땅의 그 무엇에 미치는 자가 있거든 이 땅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하여 미치는 자가 되어라!” 하면서 기도한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슬픈 분이십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슬픈 그 가슴을 누구한테 하소연하실 것이며, 고통과 억울함을 누구에게 하소연하실 것인가? 그럴 수 있는 이가 세상에는 없습니다.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런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나기를 고대하고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을 붙들고 울고, 하나님의 고통을 붙들고 울면서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아들딸, 이것이 우리들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인연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는 6천 년 동안 미치는 것 이상의 심정을 지니고 땅을 대하여 허덕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그 아버지를 향해 저주에 저주, 배반에 배반을 거듭했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이제라도 하늘을 향하여 미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하늘은 그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7-294)
하나님의 소원과 인간이 소망해야 할 최고의 기준
인간들도 사랑하는 자식이 쓰러지게 될 때 그 부모가 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느냐? 부모의 사랑에 부부의 사랑과 자녀의 사랑을 가한 주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여러분이 생각하기 전, 사모하기 전, 그리워하기 전, 찾아 허덕이기 전에 하늘은 이 날 이 때까지 그리워하며 허덕이고 미칠 듯한 입장에서 우리를 찾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탄이 “자식을 품고 사랑하셔야 할 하나님이여, 자식을 두고 한숨은 웬 말이요? 탄식은 웬 말이요?” 하면서 조롱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여 어떤 궁전 가운데 편안히 앉아 계시는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정을 품고 6천 년이란 역사를 허덕이며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선조들이 맞기 전에 맞으며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몰리기 전에 몰리며 찾아오셨고 죽음의 고개를 넘으시며 찾아오셨습니다. 선열들이 순교의 고비고비를 넘을 때마다 하늘도 그러한 고충을 느꼈습니다.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움직이는 아들딸과 함께 고충을 당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위로할 방법은 없을 것인가? 인간에게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없고, 인간에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슬픔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문제는 없습니다.
슬퍼하시며 찾아오셨던 하나님 이상의 슬픈 심정을 갖고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습니까?” 하고 위로하는 아들이 나타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얼마나 수고하셨으며, 얼마나 쓰러지셨으며, 얼마나 허덕이셨나이까?” 할 수 있는 아들, 천만 번 수고하고 천만 번 모욕을 당하고 천만 번 어려움을 당하시면서도 슬펐던 가슴을 헤쳐 놓고, 억울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분했던 가슴을 헤쳐 놓고 통정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모셔야할 하나님은 그러한 분입니다.
역사노정에서 십자가의 노정을 뒤넘이치면서 찾아오셨던 하나님의서러움을 아는 참다운 아들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한 아들딸을 중심삼고 화할 수 있는 하나의 세계가 하나님이 찾아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요, 그러한 세계가 창조이상의 세계입니다.
땅 위에 불행이라는 명사가 있다 할진대, 하나님 외에는 그런 명사를 붙일 수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비하면 그 불행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슬픔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선의 동산을 바라셨습니다. 그들을 품고 사랑하고 천지만물이 화답하는 가운데서 즐거워하기 위하여 지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어디 그랬다는 곳이 있습니까? 아담 해와를 잃어버린 하나님의 심정은 외아들을 잃어버린 서러우신 심정이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어버린 서러움이었다는 것입니다. (7-296)
독생자의 사명
예수님을 독생자라고 했습니다. 독생자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홀로 하나님을 위로할 수 있는 하나의 아들을 말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밖에 없었던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다시 찾기 위하여 보내신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걸고 처음 낳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생활이 어떻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사회가 어떻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사는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똑똑히 못 보여 주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가정이 어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은 어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국가는 어떻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계는 어떻다는 것을 못 보여 주었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의 자리에 나아갔다면 하나님은 쌍수를 들어 “오, 사랑하는 내 아들딸아! 너희는 내 유업을 받아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주관하면서 영원히 나와 더불어 살자!”고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사이래 하늘땅을 걸어 놓고 아담 해와와 같은 두 사람을 축복하실 한 날을 고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천신만고 역사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치고 거쳐오시면서 민족이 지쳐 떨어지면 붙들고 또 붙들면서 4천 년 역사가 지난 후 예수님을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세워서 하나님의 4천 년의 슬픔을 털어놓고 4천 년의 고충을 털어놓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대우주의 창조이념을 복귀 완성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창조이념을 완성시킬 대표자로 보내셨던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7-298)
예수의 형편
예수님은 태어나서 이 땅의 최악의 고난의 길까지도 다 죽지 않고 거쳐야 했습니다. 그분은 마구간에서 탄생했습니다. 이 땅 위에 아무리 불쌍하고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역사이래 마구간에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섭리는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하의 자리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자랄때도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30여 년의 생애에는 무한한 슬픔이 사무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에 태어났지만 요셉과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의붓자식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딸을 기르게 될 때 예수님을 등한시했습니다. 동생들한테도 천대를 받고 자란 불쌍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정적으로도 의지할 부모가 없었고 가정적으로도 안식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직접적인 지도 밑에서 자랐습니다. 또, 심정적으로는 미래의 소망의 심정을 갖고 있었던 예수님이었던 연고로 그러한 환경에서도 민족과 국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세계를 바라보아야 할 운명에 처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런 자리를 원망할래야 원망할 수 없었던 것은하나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고 모시던 아버지는4천 년 동안 억울한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을 알았고, 불효의 역사를 거듭해 나온 선조들의 잘못까지도 책임지고 탕감복귀해야할 사명을 지닌 자신인 것을 알았기에 그분은 반대하던 무리를 대하여 원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대등한 심정을 가지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도 반대하던 민족을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님을 죽으러 오신 분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결과만 바라보니 간단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의 예수님, 죽기 전 예수님의 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죽어가던 예수님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의 심정을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도 어떠한 사람을 사랑합니까?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몰라주는 사람을 사랑합니까?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은 어떠하겠느냐?”(누가복음 12:49∼50) 했지만, 그 말씀의 상대가 없었습니다. 4복음서의 말씀을 했지만 그 말씀의 상대를 찾지 못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기만 하면 천당 가고 주님을 신랑으로 모신다는 이야기는 천만부당한 것입니다. 말씀은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심정과 실체를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슬픔을 내적으로 주고받아 가지고 그 슬픔을 위로해 드린 예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된 사람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땅 위에 나타났는데, 그 예수님 앞에 독생자가 될 수 있는 아들딸은 어디로 갔는지 생각해 봤습니까? (7-299)
예수를 보내신 목적
하나님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 해와를 축복하신 목적이 어디에 있었느냐? 그들만 잘먹고 재미있게 살라고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해와의 가정, 민족, 세계 전체를 대신하여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은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셨으니 그 앞에 독생자 될 수 있는 아들딸을 찾는 데 있었습니다. 그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인 예수님이었기에, 예수님과 같은 아들딸을 찾으시려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였기에 멸망을 예고해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 상에 쓰러지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심적인 동기가 하늘에서부터 출발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도들은 예수님의 제자만 되어선 안됩니다. 예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품고 하나님의 속에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것을 유업으로 맡기고 안심하실 수 있었던 입장에 있었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털어놓고 사정할 수 있고 모든 이념을 맡기고 축복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심정에 사무친 아들딸은 어디에 있느냐? 그러한 아들딸이 이 땅 위에 나타났다면 재림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2천 년이나 걸릴 필요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죽어간 사람들은 있었으나 예수님의 심정을 알고 예수님의 실체를 믿고 죽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는데 무얼 믿으란 말입니까? 하나님이 세상과 같이 사랑하는 독생자,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 세상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믿으면 천국은 문제없이 간다는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다 보아도 그 내용입니다.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고 독생자를 세상 같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심정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 했습니다.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것, 영원히 영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악된 이 세상일지라도 하나님이 세상을 독생자와 같이 사랑하는 줄 아는 자, 또 독생자를 세상과 같이 사랑할 줄 아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세상을 자기의 몸보다도 귀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하셨으니, 자신을 주신 것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알았습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게 될 때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이니 세상 앞에 서야 할 자신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3년 공생애는 자기 몸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를 세우기 위한 3년 공생애였습니다. 3년 동안 세 제자를 아들딸같이 만들기 위하여, 12사도를 참다운 직계의 아들딸로 만들기 위하여 수고한 것입니다.
아담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노아 가정에서 잃어버린 세 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3대 하나님, 사울 왕, 다윗 왕, 솔로몬 왕 3대를 세워서 섭리하신 것과 같이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3수를 찾아 나오는 천적인 복귀의 원칙에 따라서 믿음의 세 아들을 세워야 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다 버리고 가더라도 그 세 제자는 떨어져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같이 데리고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고 골고다 산정까지 같이 가고 싶었던 세 제자들이었으나, 그들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슬픈 역사는 거기서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7-301)
세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자 했다면
만일, 세 제자가 예수님과 같이 죽고자 했다면 예수님은 승천하지 않고 땅 위에서 뜻을 이뤘을 것입니다. 성신이 오고 믿음의 아들딸이 있으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이 땅 위에서 영적으로라도 기반을 잡고 뜻을 이루어 나왔을 것입니다.
땅을 구하러 온 예수님이 왜 승천하고, 어머니 신인 성신이 무엇 하러 예수님의 대신으로 땅 위에 오는가? 배반한 땅, 이 땅은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해와, 곧 어머니 때문에 타락했으니 이 타락한 땅의 죄를 씻는 일은 어머니가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 신인 성신과 오늘 믿는 신자들은 뒤넘이치면서 사선을 넘어 하늘에 있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까지 찾아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4천 년 역사 위에 사랑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을 보내셨으나 그를 붙안고 깊이 사랑해 보시지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을 인간이 맞았으나 인간이 예수님을 붙들고 사랑해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한 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붙들려고 했을 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막았던 것은 서러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통하셨으면 예수님도 원통했습니다. 여기에 천지의 곡절이 맺혀 있으므로 그것을 풀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는 천륜입니다. 그것이 맺혀 있는 것부터 해결해 놓고 보아야 했던 하늘은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하나님은 잃어버린 아담 해와의 대신 존재를 찾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을 생명나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잃어버린 생명나무의 대신으로 온 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땅 위에 사랑하시던 예수님을 세워놓고 믿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 한 번 해보셨느냐? 가정 앞에 자랑해 보셨느냐? 오늘날 2천 년 역사가 지났지만 어느 민족,어느 세계 앞에도 자랑해 보시지 못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쫓아내야만 했던 그때도 하나님은 분하셨지만, 예수님을 이 땅 위에 보내고서 죽이시고 또 다시 보내야 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은 더 분하신 것입니다. 아들을 사명자로 보냈지만 그 사명을 완결짓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아들이 기뻐할 수 있었던 한 날을 예수님 당시에 못 가졌기 때문에 재림이라는 명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한 시간, 6천 년 원한의 심정을 터놓고 앞으로 오시는 주님과 아들딸의 인연을 맺는 그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7-303)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와서 만일에 죽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예수님이 독생자라고 했으니 하나님은 그 앞에 독생녀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전도서 7장 28절에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 일천 남자 중에서 하나를 얻었거니와 일천 여인 중에서는 하나도 얻지 못하였느니라!” 했습니다.하나님의 2천 년 역사는 신부를 찾는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참다운 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참다운 딸의 모습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못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 년 역사는 딸을 찾는 역사였습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앞으로 싸우게 되는 것도 이 문제 때문입니다. 성신은 하나님의 딸로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해원의 그 날은 어린양 잔칫날입니다. 일천 남자 중에 택한 한 남자로 주님이 나타나시면 그의 한 신부는 어디에 있을 것이냐? 성신이 와서 2천 년 동안 지상에서 해야 할 것은 신부를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세워 놓고 축복해 주신 것은 아담 해와만을 사랑하시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 후손들까지도 사랑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실 수 있었던 후손, 예수님이 사랑할 수 있었던 아들딸이 없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이는 영원무궁토록 사랑할 나의 아들딸이요, 나의 직계로다.” 할 수 있었던 아들딸이 있었다면 이 세상은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역사적인 심정, 시대적인 심정, 미래적인 심정을 대신하여 죽어 간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그 뜻을 계승하여 땅 위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오실 것입니다. 그분이 오실 때 지상에 있는 수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아들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오시는 주님 앞에 참다운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7-304)
세 가지의 해원해야 될 것
땅 위에서 효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무릇, 효자가 되려면 부모를 잘 봉양함은 물론이요, 자식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모든 것을 부모 앞에 갖추어 드렸더라도 부모가 바라는 자식을 갖지 못하면 효자가 못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역사적인 효자로 탄생했습니다. 그렇지만 독생자의 영광을 갖추고 다 이루었다 하는 자리에 섰다 하더라도 자녀가 없을 때는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2천 년 동안 예수님이 왜 수고했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을 찾기 위하여 미칠 듯이 수고하신 것을 아시고 예수님도 땅 위의 인간을 대하여 미칠 듯한 심정을 갖고 30여 년의 생애를 지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보좌에 가서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2천 년 동안 미칠 듯이 이 땅 위의 인간을 고대하고 그리워한 것입니다. 성경 66권을 다 능통했다 할지라도 아버지 앞에 못 갑니다. 성경 말씀을 다 잊어버리더라도 예수님의 그 심정과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일 슬픈 것, 제일 분하고 억울한 것, 제일 기뻐하시는 것의 세 가지를 해결해야 됩니다. 14만4천 무리에 들어가겠다고, 혹은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세 가지를 해원해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제일 슬펐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분하고 억울했던 고비가 어디며, 제일 기뻤던 고비가 어디냐? 슬프고 분한 고비는 나와 있지만 기뻤던 고비는 찾아볼 도리가 없습니다.
친구가 되고 누구보다 가까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면, 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 가지고 그것을 붙들고 위로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의 친구가 되고 그를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심정을 통하고 사랑으로 인연을 맺는다면, 그 사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나도 그 사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4천 년 동안의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말 못 하고 갔습니다.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한 예수님의 슬펐던 심정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슬픔, 하나님의 고통, 하나님의 기쁨을 알았으니 우리도 하나님의 슬픔과 하나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기쁨을 알아야 됩니다. 또한, 예수님이 2천 년 동안 하나님이 수고하신 수고의 역사노정 위에도 가담되어 있으니 우리도 거기에 가담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은 아들딸을 잃어버리신 슬픔이요, 아들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시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모든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릴 만한 사랑의 심정으로 아들딸을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미쳐야 됩니다. 그 어떤 부부가 사랑하는 이상 미쳐야 됩니다. “내 뼛골, 내 생명이 여지없이 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를 위한 충절의 심정이 변할소냐? 그대를 위한 흠모의 심정이 변할소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 “밥을 먹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예수님을 위해서다.”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구경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애달픔과 굽이치는 서러움이 서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구경만 하러 다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직계 자녀는 못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찾아 세우시기 위하여 수고의 역사를 거듭해 나오셨다는 것입니다. (7-305)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려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이 되고 싶습니까? 진정, 땅 위의 어느 누구의 위로로도 막을 수 없는 서러움이 여러분의 가슴에 움직이고 있습니까? 어떠한 위로, 어떠한 사랑으로도 막을 수 없는 슬픔이 여러분의 마음과 몸에 움직이고 있습니까? 그러한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그 무엇을 갖다 준다 하더라도 그분의 아들딸이 될 수 없습니다. 아버님만 생각하면서 살고, 살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달음질치고자 하는 마음이 생활과 생애노정에서 사라지지 않아야만 그분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로잡혀서 하나의 막대기를 붙잡고도 눈물이 앞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물이 그런 해원의 한 날을 고대하면서 탄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 숙여 무지한 인간이라 몰랐으니 미안하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혹시나, 그러한 길을 찾기 위하여 허덕이는 동지를 바라보면 그를 붙들고 “너도 우리의 형제로구나!” 하고 통곡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사람이라야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아무리 슬프고 아무리 외롭다 할지라도 하나님한테 비할 바 아닙니다. 산천을 바라보면 산천에도 하나님의 눈물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흐르는 물을 보고 거기에도 하나님의 눈물이 어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누운 자리도 하나님의 눈물바다고 골고다의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리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늘은 이런 마음을 갖고 “골고다 산상에서 주님께 십자가를 지게 하셔야 했던 아버지시여!” 하며 눈물 짖는 아들딸, “예수님은 죽어 땅 위에 한을 남기고 갔지만, 나는 죽지 않고 실체로서 이 한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6천 년 역사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수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6천 년 동안 수고하신 하나님한테 빚을 진자요, 6천 년의 하나님의 눈물의 결정체요, 골고다의 희생의 대가를 치르고 산 나인 것을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죄를 회개하고, 시대적인 죄를 탕감하고, 미래적인 소망을 품고 아버지를 부르며 손을 벌리고 들어갈 때 아버지께서 친히 붙들고 “오! 내 아들아, 내 딸아!” 하시며 아버지의 위신을 잊어버리고 기쁨과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라야만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요, 그러한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아는 자라야 하나님의 아들딸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딸들을 하나님은 너희가 고대하던 주인이요, 내가 찾던 아들딸이라며 사탄세계와 천상천하의 모든 존재 앞에 늠름히 내세우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들딸들이 나타나야만 하나님은 비로소6천 년 수고를 잊어버리고 하늘땅을 맡기고 안식의 자리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이 슬픔의 역사를 붙들고 예수님이 울었고 예수님이 죽었던 것과 같이 여러분도 아버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 있다 할진대 고이고이 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7-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