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2권 제 9 일
하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훈독본)
날짜 : 1960. 1. 17(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 여러분들 앞에 드릴 말씀의 제목은 ‘하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입니다.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한테는 창조하고자 하시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 심정은 창조이상(創造理想)으로서, 그것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창조의 계획을 세우시고 만물을 짓기 시작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창조이념과 더불어 움직여야 할 창조물은 선의 기원을 찾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하늘과 인간, 하늘과 피조물로 각각 동떨어져서 움직여 나왔습니다.
본래에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난 인연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의 심정의 대상으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었던 만물과 인간이로되, 인간시조가 타락한 그 날부터 하나님은 타락된 세계를 보시지 않으면 안되었고, 타락한 인간을 대하시던 그날부터 하나님이 고대하시던 창조의 이상세계는 마음속 깊이 숨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로되 하나님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셔야 할 자녀로되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자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직계 자녀라는 명분을 갖추게끔 지으셨던 인연을 포기하실 수 없어서 다시 찾는 역사, 즉 구원역사,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잃어버리신 자를 다시 찾으시기 위한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많은 슬픔을 겪어 나오셨는데 사형수의 부모가 형장에 나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망의 손길에 끌려가는 인류, 우주적인 사형수와 같은 인류의 뒤를 따라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마음대로 주관하시거나 사랑하시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인류를 사탄 앞에 유린당하고 찢김받는 제물의 입장에 내놓으시게 될 적마다 무한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개인을 그런 입장에 내놓으실 때는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셨고 가정이나 민족, 혹은 국가를 그런 입장에 내놓으실 때는 거기에 상응되는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던 하늘이었습니다. (8-238)
인간에 대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소망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인류의 참조상이십니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고 내 본질 전체와 인연되어져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가 이런 사정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들이 다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아버지께서 고대하시는 한 날이요, 아들딸도 고대하는 한 날입니다. 그 날은 잃어버렸던 아들이 사망의 사슬을 끊고 해방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날입니다. 본연의 동산에서 지음을 받았던 그 본연의 참다운 아들딸로서 본연의 심정으로 그리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날입니다. 그 한 날이 인류가 소원하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날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하늘은 역사노정을 대해 나왔습니다. 죽어 가는 아들딸에 대해서도 아들딸이라는 감정을 잊어버릴 수 없는 연고로 좀 선한 아들딸을 동원하여 그들을 구하고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6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죄인들, 악한 무리를 구하기 위하여 선한 아들딸들을 죽음의 자리에 몰아넣기를 개의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지금까지 6천 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인류가 어느 한 때 이런 아버지를 불러봤으며, 아버지라 여기고 감사해 봤습니까? 그런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심정 앞에 반기를 들고 배반과 원망과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 가인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대했던 심정의 역사는 끊어지고 배반의 역사가 대(代)를 이어 이루어진 세계가 오늘날의 이 천지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배반으로 인하여 배반의 심정, 반역의 심정이 대를 이어 나온 연고로 인류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었던 아들딸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恨)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한해야 됩니다. 그 맥박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나왔느냐? 가인의 심장에서부터입니다. 가인의 피와 인연되어 선과 상반되기를 즐겨하는 입장에 처해 있고 사탄의 피가 뛰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8-239)
하나님이 한탄하는 원인과 인간의 책임
하늘이 지금까지 한탄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심정의 기원을 같이 해 가지고 하늘과 더불어 생활하고 더불어 만물을 주관해야 할 인간이요, 직계 자녀의 입장에 있어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사탄과 동행하고 사탄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사탄을 중심삼고 세계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악을 중심삼고 악의 사정을 통하고 악의 심정과 결탁하여 이루어진 세계이지 선을 중심삼고 선의 사정을 통하고 선의 심정과 결탁하여 이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지향하고 양심이 맑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이 싫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 본 마음과 배치(背馳)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러니 하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노정을 통하여 도를 세워 인류를 끌고 당기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입니다.
인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당장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든 것이 선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를 기원으로 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탄의 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그 즐거운 장면을 박차고 기쁜 장면으로 박차고 나아가야 합니다. 거기가 인간이 바라는 본연의 세계입니다. (8-242)
노아를 중심하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
하늘은 가인 이후 1600년 만에 노아를 세우고 수고하시기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늘을 대해 나오던 노아도 하늘 뜻을 받들어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을 아셨지만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던 것처럼 노아도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또, 그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위하던 노아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후 하나님은 물심판을 하셨는데, 그 후에 남아진 것이 노아의 여덟 식구였습니다. 거기에서 하늘은 무엇을 고대했느냐? 타락되지 않은 하늘의 식구로서, 하늘의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즐기기를 고대했던 것인데 노아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몰랐습니다. 자신은 본연의 아담의 자격을 복귀해야 할 입장이었고, 아담가정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한을 탕감복귀해야 할 입장으로 불려진 자신의 여덟 식구라는 것을 노아 자신이 몰랐습니다. 노아가 몰랐던 동시에 노아의 아들딸도 몰랐습니다. 함도 노아를 몰라주었습니다.
분하고 슬픈 일은 무엇이었느냐? 남이 알아주지 못하던 것은 참을 수 있었던 일이로되 죽으면 같이 죽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할 식구가 몰라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슬픔이었습니다. (8-243)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교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놓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늘의 부르심에 응하여 떠났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여러분이 듣고 있는 내용을 모르던 입장에서 죄악세상을 박차고 무조건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도 내용도 모르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삭을 잡아 죽이라고 하셨을 때도 그 명령의 의미도 모르고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을 지나 야곱의 시대에 와서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데리고 라반의 집에서 돌아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 일대(一代)에 천적인 가정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그리워하여 자기의 형을 속이던 놀음까지 하였던 야곱이었으나 그의 아들딸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사랑하던 요셉과 베냐민을 시기 질투했습니다. 그것이 기원이 되고 조건이 되어서 이스라엘 12지파가 열 지파의 편과 두 지파의 편으로 갈라지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와 그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담의 아들이 배반할 줄, 노아를 통하여 이루려던 뜻을 그의 아들 함이 배반할 줄, 야곱을 통하여 이루려던 뜻을 야곱의 아들이 배반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36) 했습니다. 그 말씀은 믿지 못하는 자, 배반하는 자, 하늘과 상관없는 위치에서 행동하는 자가 원수라는 뜻입니다. (8-245)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섭리
야곱 시대를 지나 모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를 세워놓고 그를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던 하늘의 심정을 모세 자신도 몰랐습니다. 바로 궁중, 원수의 궁중에 보내어 호화찬란한 환경에서 자라게 한 이유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모세는 자신 앞에 호화찬란한 영광이 겹겹이 가로놓이면 놓일수록 그곳이 자신이 살 세상이 아니라는 신념이 쌓여 갔습니다. 자기의 민족이 비탄 중에 있던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공포가 가해지더라도 민족을 구하고 싶었고, 민족을 동정한 나머지 민족을 위하여 죽겠다는 심정이 앞섰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나 새로운 신념의 말씀, 새로운 취지를 말할 때 배반하기를 일삼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때 모세의 편이 되어 하나로 단결했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40년 연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동반하고 갔어야 할 모세는 민족의 배반으로 미디안 광야 40년이라는 연장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곳, 하나님이 원하시던 땅이 어디였느냐? 이스라엘 민족이 단결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며 모세의 뒤를 따라 생사를 개의치 않고 가나안 땅으로 달려갔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던 자리에 모세를 몰아넣고 인도했던 하늘의 심정도 애달팠지만 애달픈 자리에 있던 그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이 몰라준 그것이 더욱 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족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8-246)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와 복음의 중심내용
모세도 그러했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느냐?
4천 년 동안 하늘은 그 심정을 붙안고 아무것도 모르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가 온다고 준비시켜 나왔습니다.
4천 년만에 하늘의 보내심을 입은 메시아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밝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심정은 밝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는 전개되었나니,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앞에 귀의하여 예수님이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 수 있는 단결된 민족이 되었던들 오늘날 이 세계는 공포에서 허덕이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을 갖고 왔느냐? 새로운 선포를 하기 위해 말씀을 갖고 왔습니다. 새로운 선포의 내용은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갖고 오신 복음의 중심 내용은 그것이었습니다. (8-24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그러면 오셨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었느냐? 그분은 무형의 아버지를 대신한 실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죽어서도 우리의 아버지, 살아서도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생애를 바쳐 모셔야 할 아버지요, 영생의 나라에서도 모셔야 할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딸을 만나 가지고 한 번도 아들이라고 불러 보지 못하고 한 번도 딸이라고 불러 보지 못한 채 아들한테 몰리고 딸한테 몰리다 나중에는 창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비통한 일 중에 그 이상 더 비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12)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할 말을 못다 했다는 것이요, 신랑으로서 신부에게 할 말을 못다 했다는 것이요, 만왕의 왕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은 4천 년 동안 수고하신 당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하여 사정을 풀어놓고 손에 손을 붙들고 “내 아들딸아!” 할 수 있는 한 날을 보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냈건만 보낸 그것이 한이 된 채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이루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된 인간들 중에서 선을 바라보고 양심이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려고 하는 선조들이 외로운 길을 가고, 죽음의 길을 가고, 피 흘리던 길을 개의치 않고 간 것은 하나님의 사정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으면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부자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소원하신 그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천지는 역전(逆轉)하던 것이 정상적으로 회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때가 끝날입니다. (8-250)
다시 오시는 주님의 사명과 믿음의 목적
그 분이 다시 오시면 무얼 하느냐? 아담 이후 6천 년 동안 쌓였던 하나님의 분한 마음과 한스러운 마음을 샅샅이 드러내고, 선조의 한을 밝혀줄 것이며, 따르고 받들어야 할 인물들이 배반하던 것을 밝혀 저끄러진 곡절을 남긴 과거의 흠의 역사노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게끔 할 것입니다.
그 분은 사탄을 규명하여 심판대에 올려놓고, 인류를 규명하여 심판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 놓고, 그 다음에 천국의 법도를 선포할 것입니다. “내가 찾는 아들딸은 이러한 아들딸, 내가 찾는 그 아들딸이 살 가정은 이러한 가정, 내가 건설할 사회는 이러한 사회, 내가 이루어야 할 나라는 이러한 나라”라고 선포하고 그 통치권 내에 세계를 끌어들여 하늘땅이 하나로 화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놓은 연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성경 말씀, 6천 년의 섭리를 지탱시켜 나온 성경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다.” 하면, 하나님도 “너는 내 딸이요, 내 아들”이라고 하실 수 있는 심정의 자리에 서고, 원수도 어떠한 누구도 이걸 참견할 수 없다는 각오와 신념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성경의 완성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한 구절도 모른다고 해도 좋습니다.
6천 년 동안 인류가 찾아 나온 목적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을 부모의 심정을 갖고 대하고, 상처를 당하고 유린을 당하고 배척을 받고 찢기며 나오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했습니다. 골고다에 오르기 전 이미 쓰러질 것을 알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를 보내심은 아버지의 기준을 세우기 위함이요, 내가 땅에 태어남은 아들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이거늘, 아버지를 증거해야 될 입장에서 이렇게 꺾여질 수 없습니다.” 한 뜻이었습니다.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보내주신 예수님이요, 아들의 기준을 갖추어야 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천상을 대하여, 아버지를 대하여 그 뜻을 배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8-252)
하나님의 아들딸의 위신을 세워야 할 우리의 책임
이제 우리는 역사가 피에 젖은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눈물이 수천만 번 뿌려졌다가 말려진 말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인류를 찾기 위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이 인류의 등에는 선조의 핏자국이, 이 인류의 이마 혹은 옷자락에는 선조의 피눈물이 어려 있습니다.
선조들은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죽어야 마땅했지만 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죽었다가 부활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그 아들의 눈물과 핏자국이 여러분의 몸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려주기 위하여 6천 년 동안 수고하셨고, 예수님을 보내셨고, 선조들을 희생시키셨거늘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감각한 만 인류들을 모아놓고 알려주는 이 한 마디의 말씀은 수천만의 선한 사람들이 목이 베이고 피를 흘린 제단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신음 소리가 나를 재촉하고 있음을 느끼는 자라야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며 찾으시던 아들의 면목을 갖출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과해야 됩니다. 이 말씀을 갖고 나선 마당에 하늘의 배반자라고 하며 좋지 않은 낙인을 찍는다 할지라도, 혹은 배반을 받아 이슬같이 사라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핏줄기가 어린 이 말씀과 더불어 죽겠나이다.” 할 수 있는 절개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의 역사는 말씀을 통과하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진리의 말씀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진리를 찾은 후에는 실체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 실체를 통과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이 땅 위에 실체의 주인공인 한 분이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체 통과의 은사를 입은 후에는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고 심정의 문을 통과해 나가야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만을 가지고는 상속을 못 받습니다. 육신만 가지고는 상속을 못 받습니다. 실체가 말씀의 화신이 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통과했다는 합격장을 받아야만 천상천하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8-257)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가 되자
말씀이 줄기차게 뻗쳐 있는 곳에 생명이 약동합니다. 말씀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갈 때 환희와 해방의 느낌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의 뒤에는 피눈물의 자국이 있는 것을 알고 서글픈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고 또 그렇게 가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고 황공한 마음이 앞서는 자라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6천 년 동안 인간은 너무도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선한 사람을 통하여 사망세계의 인간을 살려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 살려주는 책임을 지고 싸우며 하나님의 심정을 선포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하늘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 사람 앞에 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책임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거든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혹은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알아드리다가 참다운 아들딸들로 말없이 사라질 줄 아는 여러분이 되면 천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상의 황국(皇國)에서 하늘의 귀족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8-259)
<훈독 소감>
타락한 악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선한 아들딸들을 죽음의 자리에 몰아넣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노아를 통해, 아브라함을 통해, 모세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한 맺히신 하나님의 심정을 토로하셨습니다.
그 한은 반드시 실체를 통해 해원해야 하기 때문에 실체를 쓰고 재림하시는 재림주님을 이 땅에 보내셔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재림주님은 모시고 하나님의 한을 풀어드릴 수 있는 실체가 되어주길 당부에 당부를 하셨습니다.
6천년 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못했던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드리고 그 하나님의 심정을 해원해드리기 위해 하나님 대신 실체가 되어 살려주는 책임을 지고 싸우며 하나님의 심정을 선포하는 사람이 상속자가 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아들딸은 하나님 대신 살려주기 위한 하나님의 대신 실체로 살아야 함을 명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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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2권 제 9 일
하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
날짜 : 1960. 1. 17(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 여러분들 앞에 드릴 말씀의 제목은 ‘하늘의 심정을 누가 알았던고’입니다. 만물을 지으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한테는 창조하고자 하시는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 심정은 창조이상(創造理想)으로서, 그것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창조의 계획을 세우시고 만물을 짓기 시작하셨습니다.
타락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하나님의 소원은 그분의 심정이 통할 수 있는 창조이상의 세계, 창조이상의 사람, 창조이상의 만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상의 세계, 이상의 사람, 이상의 만물이 못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의 한(恨)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타락된 연고입니다.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창조이념과 더불어 움직여야 할 창조물은 선의 기원을 찾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하늘과 인간, 하늘과 피조물로 각각 동떨어져서 움직여 나왔습니다. 본래에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난 인연을 갖고 있었고 하나님의 심정의 대상으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었던 만물과 인간이로되,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몸과 만물에 머물 수 없고 하나님의 심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통탄스러운 일이 있게 된 것은 타락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시조가 타락한 그 날부터 하나님은 타락된 세계를 보시지 않으면 안되었고, 타락한 인간을 대하시던 그날부터 하나님이 고대하시던 창조의 이상세계는 마음속 깊이 숨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상이 있었으되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고, 만물을 대할 적마다 그 이상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움직였으되 그 이상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던 하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이로되 하나님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셔야 할 자녀로되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자녀가 못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을 바라보는 하늘은 기쁨의 하늘이 아니라 슬픔중의 슬픔을 느껴야 하는 하늘이요, 고통 중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 하늘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의 직계 자녀라는 명분을 갖추게끔 지으셨던 인연을 포기하실 수 없어서 다시 찾는 역사, 즉 구원역사, 재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잃어버리신 자를 다시 찾으시기 위한 역사노정에서 하나님은 많은 슬픔을 겪어 나오셨는데 그 슬픈 마음을 동정해 준 한 사람이 없었던 하나님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늘은 슬픈 심정을 품고 타락된 인류의 뒤를 따라 나왔습니다. 앞에 서지 못하고 뒤를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형수의 부모가 형장에 나가는 아들의 뒤를 따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망의 손길에끌려가는 인류, 우주적인 사형수와 같은 인류의 뒤를 따라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마음대로 주관하시거나 사랑하시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인류를 사탄 앞에 유린당하고 찢김받는 제물의 입장에 내놓으시게 될 적마다 무한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개인을 그런 입장에 내놓으실 때는 개인적인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셨고 가정이나 민족, 혹은 국가를 그런 입장에 내놓으실 때는 거기에 상응되는 십자가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던 하늘이었습니다. (8-238)
인간에 대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심정과 소망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시냐? 인류의 참조상이십니다.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고 내 본질 전체와 인연되어져 있는 아버지이십니다. 그 아버지가 이런 사정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은 인간들이 이런 입장을 파괴해 버리고 다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나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하늘을 찾기 위하여 하늘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도의 길을 개척해 나온 사람들도 그 한 날을 고대하여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은 아버지께서 고대하시는 한 날이요, 아들딸도 고대하는 한 날입니다. 그 날은잃어버렸던 아들이 사망의 사슬을 끊고 해방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날입니다. 본연의 동산에서 지음을 받았던 그 본연의 참다운 아들딸로서 본연의 심정으로 그리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날입니다. 그 한 날이 인류가 소원하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날인 것을 여러분은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하늘은 역사노정을 대해 나왔습니다. 죄인 중의 죄인 된 인간을 대할 적에도그러한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죽어가던 아들딸을 대하던 자리에서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또, 그러한 것을 탄식하며 선의 방향을 찾아 헤매어 나온 수많은 도인들이 움직이던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죄인에서부터 선을 향하고 의에 불타 울부짖는 그 한 생명까지 어떠한 환경, 어떠한 시대를 막론하고 하늘은 같은 심정을 갖고 대해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한 하나님이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인 연고로 인간이 죄 가운데 사로잡혀 있더라도 “내 아들이야, 딸이야!” 하시는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감정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을 대할 때 하늘은 무한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은 죽어 가는 아들딸에 대해서도 아들딸이라는 감정을 잊어버릴 수 없는 연고로 좀 선한 아들딸을 동원하여 그들을 구하고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하늘은 6천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죄인들, 악한 무리를 구하기 위하여 선한 아들딸들을 죽음의 자리에 몰아넣기를 개의치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이신지라 사망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는 아들딸들을 바라보시게 될 때 그들을 구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르던 아들딸들을 희생시키기를 개의치 않고 역사를 이끌어 나오셨음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마음이 섭리역사를 이끌어 나오는 본심입니다.
그런데 아담 이후 지금까지 6천 년의 역사가 지나갔지만 죄악에 물들어 있는 인류가 어느 한 때 이런 아버지를 불러봤으며, 아버지라 여기고 감사해 봤습니까? 그런 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늘은 아담가정을 대할 때 무한히도 슬픈 심정으로 대했습니까? 아벨을 대하던 마음과 가인을 대하던 마음에 어찌 차이가 있었겠습니까? 본심에서 우러나던 심정에 있어서는 그도 저도 모두 아들딸의 입장이었으되 차별의 심정을 갖고 대해야 했던 것이 하늘의 사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서글픈 자리에 있었던 하늘인데 아벨의 제물은 받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않았다고 가인이 아벨을 쳐죽인 것은 하나님을 친 것보다 더 분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심정과 인연을 맺지 못하고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심정 앞에 반기를 들고 배반과 원망과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 가인의 역사라는 것입니다.그리하여 하나님의 심정을 대했던 심정의 역사는 끊어지고 배반의 역사가 대(代)를 이어 이루어진 세계가 오늘날의 이 천지임을 우리들은 알아야 됩니다.
배반으로 인하여 타락의 심정을 조성하였던 가인의 역사를 우리는 무한히 통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맺어서 하나님의 심정의 역사가 전개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배반의 심정, 반역의 심정이 대를 이어 나온 연고로 인류 역사노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정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었던 아들딸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恨)해야 되겠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뛰고 있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될 때 우리는 한해야 됩니다. 그 맥박은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나왔느냐? 가인의 심장에서부터입니다. 가인의심장의 소리가 지금 여러분의 몸 속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가인의 피와 인연되어선과 상반되기를 즐겨하는 입장에 처해 있고 사탄의 피가 뛰고 있는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입니다. (8-239)
하나님이 한탄하는 원인과 인간의 책임
하늘이 지금까지 한탄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심정의 기원을 같이 해 가지고 하늘과 더불어 생활하고 더불어 만물을 주관해야 할 인간이요, 직계 자녀의 입장에 있어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는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사탄과 동행하고 사탄을 중심삼고 생활하고 사탄을 중심삼고 세계를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악을 중심삼고 악의 사정을 통하고 악의 심정과 결탁하여 이루어진 세계이지 선을 중심삼고 선의 사정을 통하고 선의 심정과 결탁하여 이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을 지향하고 양심이 맑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이 싫다는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내 본 마음과 배치(背馳)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러니 하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역사노정을 통하여 도를 세워 인류를 끌고 당기면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 인류가 느끼고 보고 감각하는 일체의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누구로 말미암은 것이냐? 사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류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 당장 좋아하고 기뻐하는 모든 것이 선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를 기원으로 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사탄의 무대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고 그 즐거운 장면을 박차고 기쁜 장면으로 박차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에 도라는것은 사탄의 무대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가정에서 떠나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떠나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떠나라고 합니다. 떠나서는 어디로 갈 것이냐? 사탄과 인연되어 움직이는 이 세계 말고 하나님과 인연되어 움직이는 그 세계입니다. 거기가 인간이 바라는 본연의 세계입니다. (8-242)
노아를 중심하고 섭리하신 하나님의 심정
가인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은 가인 이후 1600년 만에 노아를 세우고 수고하시기를 개의치 않았습니다. 하늘을 대해 나오던 노아도 하늘 뜻을 받들어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를 아셨으나 노아는 하나님의 진정한 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아벨과 가인을 아셨지만 아벨과 가인이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던 것처럼 노아도 하나님의심정을 몰랐습니다. 또, 그 당시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위하던 노아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잘 아시고서 노아가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한을 풀어주면 그때에기쁨의 아들로 대해 주시기 위한 뜻을 품고 노아를 바라보셨습니다. 복이 있다면 그 이상의 복이 없었던 것이요, 축복이 있다면 그 이상의 축복이 없었던 것이요, 영광이 있다면 그 이상의 영광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늘은 그러한 심정으로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노아는 그러한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모르면서도 따라 나온 노아가 얼마나 불쌍했고, 노아가 몰라주던 입장에서도 노아를 붙들고 나오신 하나님은 또 얼마나 불쌍했습니까? 모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겠다고 허덕인 노아였습니다. 하늘은 그런 노아가 자신의 심정을 알아주기를 바라 나왔지만 노아는 그 사정을 몰랐습니다. 몰랐던 노아의 심정도 불안했지만 하나님의 심정은 더욱 불안했다는 것입니다.노아도 하나님을 몰랐지만 노아와 같이 움직이던 노아의 식구들도 노아를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모르던 아들딸들을 붙들고 나오시느라 그 고충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120년 동안 수고한 후 하나님은 물심판을 하셨는데, 그 후에 남아진 것이 노아의 여덟 식구였습니다. 거기에서 하늘은 무엇을 고대했느냐? 타락되지 않은 하늘의 식구로서, 하늘의 가정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즐기기를 고대했던 것인데 노아 자신이 그것을 똑똑히 몰랐습니다. 자신은 본연의 아담의 자격을 복귀해야 할 입장이었고, 아담가정으로 말미암아 맺혀진 한을 탕감복귀해야 할 입장으로 불려진 자신의 여덟 식구라는 것을 노아 자신이 몰랐습니다. 노아가 몰랐던 동시에 노아의 아들딸도 몰랐습니다. 함도 노아를 몰라주었습니다.
분하고 슬픈 일은 무엇이었느냐? 남이 알아주지 못하던 것은 참을 수 있었던 일이로되 죽으면 같이 죽고, 기뻐하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면 같이 슬퍼해야 할 식구가 몰라주었다는 것입니다.그것이 하늘의 슬픔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늘의 역사는 연장되었습니다. 세상 사람이 몰라주어서 연장된 것이 아닙니다. 알아줘야 할 무리가 알아주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의 역사는 슬픔이 가해져 내려왔다는 것입니다.노아 앞에 함이 그랬고, 모세 앞에 민족이 그랬고, 예수님 앞에 사도들이 그랬습니다. 역사는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알아주기를 바라서 불러모아 기르고 먹이던 그 무리가 몰라주었기 때문에 하늘의 뜻은 깨지고 찢기면서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8-243)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와 교훈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놓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늘의 부르심에응하여 떠났습니다. 고향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거기는 아브라함이 살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은 원망받아야 할 세상, 저주받아야 할 세상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던 부모와 친척들이 살고 있던 땅이었지만 그 땅은 하늘의 사람이 살 땅이 아니었던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외로운 황무지인 광야로 몰아냈습니다. “갈데아 우르를 떠나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늘 여러분이 듣고 있는 내용을 모르던 입장에서 죄악 세상을 박차고 무조건 출발했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때도 내용도 모르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이삭을 잡아 죽이라고 하셨을 때도 그 명령의 의미도 모르고 무조건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모르던 입장에서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온 우리 선조들의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책임을 진 사람들은 모르면서도 하늘을 받들고 위하고 중요시해 나왔습니다. 그것을 알았던 가정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삭을 지나 야곱의 시대에 와서 야곱이 열두 아들들을 데리고 라반의 집에서돌아온 목적이 무엇이냐? 그 일대(一代)에 천적인 가정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의 축복을 그리워하여 자기의 형을 속이던 놀음까지 하였던 야곱이었으나 그의 아들딸들은 그러한 아버지를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야곱이 사랑하던 요셉과 베냐민을 시기 질투했습니다. 그것이 기원이 되고 조건이 되어서 이스라엘 12지파가 열 지파의 편과 두 지파의 편으로 갈라지는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역사노정에서 하늘을 받들던 책임자들은 하늘의 뜻이 귀한 것을 알고 거기에 따라 움직여 나왔으나, 그 책임자를 알아줘야 할 식구들이 알아주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역사를 망쳐 놓았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아담 해와와 그 자녀를 복귀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아담의 아들이 배반할 줄, 노아를 통하여 이루려던 뜻을 그의 아들 함이 배반할 줄, 야곱을 통하여 이루려던 뜻을 야곱의 아들이 배반할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세계에 있던 자들이 배반하고 몰라주었던 것은 당연하다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따르던 지도자, 혹은 부모 밑에 있던 자녀들이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닦아 놓았던 선조의 공적들이 유린당해 내려온 것입니다.
원수가 어디에 있느냐? 문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태복음 10:36) 했습니다. 그 말씀은 믿지 못하는 자, 배반하는 자, 하늘과 상관없는 위치에서 행동하는 자가 원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르고 따르던 노아, 아브라함, 야곱과 같은 선조들을 이끌어 나오셨습니다. 하늘은 모르던 자들을 세워 놓고 간곡한 사정을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어찌하여, 그러한 선조들을 지도자로 세우셨던가? 모르면서 따라 나왔어도, 하늘은 뜻 앞에 배반될 때는 그들을 쳤습니다. 용서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8-245)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섭리
야곱 시대를 지나 모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를 세워놓고 그를 장차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려고 했던 하늘의 심정을 모세 자신도 몰랐습니다. 바로 궁중, 원수의 궁중에 보내어 호화찬란한 환경에서 자라게 한 이유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민족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모세는 자신 앞에 호화찬란한 영광이 겹겹이 가로놓이면놓일수록 그곳이 자신이 살 세상이 아니라는 신념이 쌓여 갔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신념 밑에서 하늘 앞에 섰고, 노아도 그랬고, 야곱도 그랬습니다. 모세도 그런 입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호화찬란한 바로 궁중이었다고 하더라도 원수의 궁중이라는 마음이 철석같았습니다.
40평생을 바로 궁중에서 살았던 모세는 어느 한 날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민족이비탄 중에 있던 것을 바라보게 될 때 죽는 한이 있더라도. 찢기는 한이 있더라도, 공포가 가해지더라도 민족을 구하고 싶었고, 민족을 동정한 나머지 민족을 위하여 죽겠다는 심정이 앞섰기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모세의 절개를 누가 알았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모세인 줄을 그때의 이스라엘 민족 중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그러한 지조를 갖추고 하늘을 옹호하고 선민을 구하려는 심정을 갖고 있던 모세와 하나되었다면 하늘의 역사는 연장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나타나 새로운 신념의 말씀, 새로운 취지를 말할 때 배반하기를 일삼던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 무리들이 서로 싸우는 걸 바라보게 될 때, 모세의 의협심은 불탔습니다. 서로 단결하여 원수와 싸워야 할 입장이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동족끼리 서로 싸웠으니, 그것을 본 그의 심정은 안타까웠다는 것입니다. 한창 민족애에 불타고 있을 때 원수의 나라 애급 사람과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이 싸우던 것을 본 모세는 애급인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그때 모세의 편이 되어 하나로 단결했으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때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40년 연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민족을 동반하고 갔어야 할 모세는 민족의 배반으로 미디안 광야 40년이라는 연장의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갖은 고역을 당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빼앗아 광야로 이끌어 나오던 모세와 그를 따라 나오던 이스라엘 민족은 다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이상 어떠한 주권, 어떠한 가치, 어떠한 사회적 배경이 목적이 아니요, 어떠한 환경이나 어떠한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곳, 하나님이 원하시던 땅이 어디였느냐? 이스라엘 민족이 단결하여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하며 모세의 뒤를 따라 생사를 개의치 않고 가나안 땅으로 달려갔다면 그들은 광야에서 쓰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이끄심에 따라 나오는모세를 대하던 하늘은 어느 한 순간 쉴 사이 없이, 비록 모세가 잠들어 있던 순간이라 할지라도 마음 졸이면서 민족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르던 자리에 모세를 몰아넣고 인도했던 하늘의 심정도 애달팠지만 애달픈 자리에있던 그 모세를 이스라엘 민족이 몰라준 그것이 더욱 분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민족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은 그런 장면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의 후계자가 가나안 복귀의 뜻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8-246)
예수님을 중심한 하나님의 섭리와 복음의 중심내용
모세도 그러했지만, 더 나아가 예수님의 기대를 회상해 보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느냐?
4천 년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신앙의 선조들은 모르던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나왔고 모르는 가운데 하늘을 소망하고 따라 나왔지만, 예수님은 불쌍한 이스라엘 선민 앞에 하늘의 심정을 통고하기 위해서 몰리면서도 이끌어 나왔습니다. 4천 년 동안 하늘은 그 심정을 붙안고 아무것도 모르던 이스라엘 민족 앞에 메시아가 온다고 준비시켜 나왔습니다.
그가 오는 날에야 하늘의 심정을 알 수 있다고 하나님의 내적 심정을 예고시켰기에 이스라엘 민족은 모르던 가운데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 민족이 메시아를 부정했습니다. 만일에 메시아를 바라지 않았던 이스라엘 민족이었다면 심판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르던 그들을 인도하시던 고충을 털어놓고 “나는 누구이며, 너희들은 누구”라는 사정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 사정을 나누기 위하여 4천 년만에 하늘의 보내심을 입은 메시아가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역사는 밝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심정은 밝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는 전개되었나니, 만일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 앞에 귀의하여 예수님이 죽으면 같이 죽고 살면 같이 살 수 있는 단결된 민족이 되었던들 오늘날 이 세계는 원자탄으로 인한 공포에서 허덕이는 세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무엇을 갖고 왔느냐? 새로운 선포를 하기 위해 말씀을 갖고 왔습니다. 새로운 선포의 내용은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너희들은 내 백성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선포할 내용을 갖고 왔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좋다는 명사를 다 허락하기 위해 왔습니다.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고,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의 신부가 될 수 있고, 죄인 되었던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 이상 더 좋은 소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오신 복음의 중심 내용은 그것이었습니다. (8-248)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그러면 오셨던 예수님은 어떠한 분이었느냐? 그분은 무형의 아버지를 대신한 실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였습니다. 죽어서도 우리의 아버지, 살아서도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생애를 바쳐 모셔야 할 아버지요, 영생의 나라에서도 모셔야 할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딸을 만나 가지고 한 번도 아들이라고 불러 보지 못하고 한 번도 딸이라고 불러 보지 못한 채 아들한테 몰리고 딸한테 몰리다 나중에는 창에 찔려 죽어갔습니다. 비통한 일 중에 그 이상 더 비통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 땅 위에 와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한복음 16:12)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로서 자녀에게 할 말을 못다 했다는 것이요, 신랑으로서 신부에게 할 말을 못다 했다는 것이요, 만왕의 왕으로서 하고 싶은 말을 못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법에 걸리지 않는 정도의 말밖에 못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습니다.
원수의 땅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심정을 다 털어놓았으면 당장에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사탄이 주관하던 세계에 있어서는 반동분자요, 반역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늘은 지극히 조그맣지만 그러한 사정을 예고할 수 있는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어 놓고 예수님을 보낸 것입니다.
제사장과 서기관,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하나로 단결하여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한 말씀도 새지 않게끔 실천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삼은 이상세계가 시작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환경을 갖지 못했습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가는 곳곳마다 예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 판국이었으니까 예수님은 내가 누구며 너희는 누구라는 말도 못 하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한 일이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은 4천 년 동안 수고하신 당신의 사정을 알리기 위하여 사정을 풀어놓고 손에 손을 붙들고 “내 아들딸아!” 할 수 있는 한 날을 보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냈건만 보낸 그것이 한이 된 채 기독교 2천 년 역사를 이루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타락된 인간들 중에서 선을 바라보고 양심이 지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려고 하는 사람들은“하나님이 있사옵거든, 하나님이여, 당신의 사정을 알려 주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선조들이 외로운 길을 가고, 죽음의 길을 가고, 피 흘리던 길을 개의치 않고 간 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나님의 사정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을 알았으면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됩니다. 부자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고 나는 아버지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소원하신 그 기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순간 천지는 역전(逆轉)하던 것이 정상적으로 회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때가 끝날입니다.
그렇게 모르던 인류와 선조들을 지도해 나오신 것이 하나님의 슬픔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렇게 와서 새로운 선포를 해야 되었습니다. 무엇을 선포해야 되었느냐? 천국건설의 청사진을 선포해야 되었습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사탄이 소유하고 있으니 그 사탄을 쳐부수고 새로운 본연의 동산을 건설할 수 있는 내용을 선포해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선포문이 성경에는 안 나와 있습니다. 다 지워 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 년 역사노정은 방황하던 역사였습니다. (8-250)
다시 오시는 주님의 사명과 믿음의 목적
이 세계를 이끌어 갈 주인은 누구냐? 민주주의도 아니고 공산주의도 아닙니다. 이 세계의 주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만왕의 왕입니다. 그 분이 주관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사망세계에 머물러 있는 수많은 인류는 “오시옵소서, 메시아여!” 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시면 무얼 하느냐? 아담 이후 6천 년 동안 쌓였던 하나님의 분한 마음과 한스러운 마음을 샅샅이 드러내고, 선조의 한을 밝혀줄 것이며, 따르고 받들어야 할 인물들이 배반하던 것을 밝혀 저끄러진 곡절을 남긴 과거의 흠의 역사노정을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게끔 할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하여, 그것을 선포하기 위하여 오시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사탄을 규명하여 심판대에 올려놓고, 인류를 규명하여 심판할 수 있는 원칙을 세워 놓고, 그 다음에 천국의 법도를 선포할 것입니다. “내가 찾는 아들딸은 이러한 아들딸, 내가 찾는 그 아들딸이 살 가정은 이러한 가정, 내가 건설할 사회는 이러한 사회, 내가 이루어야 할 나라는 이러한 나라”라고 선포하고 그 통치권 내에 세계를 끌어들여 하늘땅이 하나로 화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놓은 연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성경 말씀, 6천 년의 섭리를 지탱시켜 나온 성경 말씀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원수의 나라에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마음놓고 하신 말씀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통할 수 있는 이상적인 말은 사탄이 참소를 하니까 주저하던 입장에서 한 말입니다. “참소하는 네 권한이 무엇이며 네가 참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며 사탄을 밟아치우고 승리적인 기반 위에서 한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기독교 신도들은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성경을 배우는 목적은 성경 구절을 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왔다간 이유는 모를지라도 성경 가운데 숨겨져 있는 것, 성경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다.” 하면, 하나님도 “너는 내 딸이요, 내 아들”이라고 하실 수 있는 심정의 자리에 서고, 원수도 어떠한 누구도 이걸 참견할 수 없다는 각오와 신념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의 완성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을 한 구절도 모른다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까지 나아가려면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이러한 이념을 갖고 인간을 지으셨고, 타락한 인간 때문에 이렇게 수고하셨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부터 지금까지 2천 년 동안 이러한 역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런 하나님임을 알고 그 하나님은 나를 중심삼고 무엇을 이루기 위해 심정을 기울이고 계시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정을 알고선 무얼 해야 하느냐?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선 내 아버지라고 해야 합니다.
6천 년 동안 인류가 찾아 나온 목적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민족이나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개개인을 부모의 심정을 갖고 대하고,상처를 당하고 유린을 당하고 배척을 받고 찢기며 나오신 그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했습니다. 골고다에 오르기 전 이미 쓰러질 것을 알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나를 보내심은 아버지의 기준을 세우기 위함이요, 내가 땅에 태어남은 아들의 기준을 세우기 위한 것이거늘, 아버지를 증거해야 될 입장에서 이렇게 꺾여질 수 없습니다.” 한 뜻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심정이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지가 무너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아버지가 보내주신 예수님이요, 아들의 기준을 갖추어야 할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천상을 대하여, 아버지를 대하여 그 뜻을 배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8-252)
하나님의 아들딸의 위신을 세워야 할 우리의 책임
이제 우리는 역사가 피에 젖은 역사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눈물이 수천만 번 뿌려졌다가 말려진 말씀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서 있는 이 땅을 찾기 위하여, 이 인류를 찾기 위하여 그랬던 것입니다. 이 인류의 등에는 선조의 핏자국이 어려 있습니다. 이 인류의 이마 혹은 옷자락에는 선조의 피눈물이 어려 있습니다. 이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조들은 당연히 눈물을 흘리며 죽어야 마땅했지만 나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죽었다가 부활해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그 아들의 눈물과 핏자국이 여러분의 몸에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가르쳐 주기를 원했던 예수님의 심정을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알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면 그 영광을 무엇으로 보답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알려주기 위하여 6천 년 동안 수고하셨고, 예수님을 보내셨고, 선조들을 희생시키셨거늘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고, 무감각한 만 인류들을 모아놓고 알려주는 이 한 마디의 말씀은 수천만의 선한 사람들이 목이 베이고 피를 흘린 제단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한 마디의 말씀에는 사형장에서 사라지는 수천 수만의 선한 사람들에게 알려 줄 수 없었던 하나님의 곡절이 묻혀 있습니다. 여러분이 창조원리부터 복귀원리까지 전체의 말씀을 받게 될 때 그 말씀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피눈물이 엉겨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수고한 사람은 제쳐놓고라도 역대 선조들의 피눈물과 한숨이 절절히 얼크러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하여 어떠한 길도 감수하고 나온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가 걸은 노정에는 한 마디의 말씀을 찾기 위해서도 피눈물 나는 사연이 깃들어 있습니다. 죽음의 신음 소리가 나를 재촉하고 있음을 느끼는 자라야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알 수 있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사정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소원하시며 찾으시던 아들의 면목을 갖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6천 년 후에 태어난 아들이라 해도 심정을 중심삼고는 6천 년 전의 나일 수 있고, 심정을 중심삼고는 4천 년 전의 나일 수 있고, 심정을 중심삼고는 2천 년 전의 예수님과 같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과해야 됩니다. 말씀을 지나는 데 있어서는 핏줄기가 뻗쳐 있고 눈물의 길이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의치 않고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 말씀을 지나 실체를 모셔야 되거늘, 상처를 입고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던 실체를 맞을 수 있는 비장한 각오를 가져야 됩니다. 이말씀을 갖고 나선 마당에 하늘의 배반자라고 하며 좋지 않은 낙인을 찍는다 할지라도, 혹은 배반을 받아 이슬같이 사라지는 한이 있다 할지라도 “나는 핏줄기가 어린 이 말씀과 더불어 죽겠나이다.” 할 수 있는 절개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구원섭리의 역사는 말씀을 통과하던 역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진리의 말씀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진리를 찾은 후에는 실체를 통과해야 됩니다. 그 실체를 통과하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연고로 이 땅 위에 실체의 주인공인 한 분이 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재림사상이라는 것입니다.
실체 통과의 은사를 입은 후에는 신랑 신부의 인연을 맺고 심정의 문을 통과해 나가야만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만을 가지고는 상속을 못 받습니다. 육신만 가지고는 상속을 못 받습니다. 실체가 말씀의 화신이 되어 하나님의 심정을 통과했다는 합격장을 받아야만 천상천하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될 수 있습니다. (8-257)
하나님의 심정을 아는 자가 되자
말씀이 줄기차게 뻗쳐 있는 곳에 생명이 약동합니다. 말씀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갈 때 환희와 해방의 느낌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의 뒤에는 피눈물의 자국이 있는 것을 알고 서글픈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고 또 그렇게 가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하고 황공한 마음이 앞서는 자라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6천 년 동안 인간은 너무도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한 때가있다 할진대, 그 때는 어떠한 때냐? 심정으로 하늘을 소개할 수 있는 때일 것입니다. 선한 사람을 통하여 사망세계의 인간을 살려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고 그 심정을 해원하기 위하여 하나님 대신 살려주는 책임을 지고 싸우며 하나님의 심정을 선포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하늘은 모든 것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 사람 앞에 넘겨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랑합시다. 남깁시다. 우리의 명예를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가문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무엇을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하나,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 다음에 자랑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입니다. 개인이 그러하고, 가정이 그러하고, 민족이 그러하고, 세계가 그러하고, 천상천하가 그러할 때 하나님의 소원은 성취될 것이요, 하나님의 한은 풀어질 것이요, 하나님의 천지창조 이념은 완성될 것입니다.
이런 책임이 여러분 각자에게 있는 것을 아시고, 하나님의 심정을 몰랐거든 여러분이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혹은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알아드리다가 참다운 아들딸들로 말없이 사라질 줄 아는 여러분이 되면 천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상의 황국(皇國)에서 하늘의 귀족이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8-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