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우리 인간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4일)

철장왕 | 20190119202424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4일


첨부파일 16 훈독경 제1권 4일 하나님과 우리 인간 1.mp3


하나님과 우리 인간 (훈독본)
날짜 : 1972. 5. 14(일) 
장소 : 한국 통일동산(구리시 교문동)
  
신의 실존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
  
지금 하나의 세계를 바라고 평화의 세계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하나의 세계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만으로는 불가능한 시대에 온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힘, 인간의 지혜, 인간의 문화 가운데서는 그 무엇을 가지고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세계나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바랄 수 없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계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확실히 해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온 인류가 아는 날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곳을 지향하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그 지향하는 뜻을 알게 될 때는 그 세계는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날에는 인류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그 뜻을 따라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근본문제를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잠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규명해 온 철학적인 문제요,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알 것인가
  
하나님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영계에 들어가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그 작용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지 실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 우주는 존재의 세계라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어 가지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물질은 반드시 원인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원인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빚어진 그 존재에게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존재하기 전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데는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방대한 이 우주가 힘의 기대 위에서 형성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힘이 계속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작용을 해야 됩니다. 작용을 거치는 자리에서만이 힘이 존속하는 것입니다. 힘은 반드시 작용하는 그 기대를 떠나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존재와 작용의 원칙
  
그러면 작용하기 위해서는 혼자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 상대 가운데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있는 인연 가운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그 작용을 통해서 힘이 존속하고, 힘이 존속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존재물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존재의 배후에 힘이 있기 전에 선행조건으로 필요한 것이 작용입니다. 또,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선행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데서는 작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반드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작용을 영속적으로 계속하기 위해서는 주체나 대상이 보다 이익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 와야 합니다. 작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서만이 그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지 마이너스될 수 있는 면을 바라보고 작용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점점점 작아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원소면 원소 하나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 원소가 어떠한 상대적인 원소를 대하여 작용하는 데는 두 원소가 서로 나을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데서 계속적인 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 주체와 대상이 자기 자체보다 더 작아질 수 있는 무엇을 바라보고 작용한다는 원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우주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하는 목적의 결과를 두고 보게 되면 주체보다도 크고 대상보다도 큰 제3의 결과적인 존재가 나오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는 주부가 있다고 하면 그 주부가 시장에 나갈 때 한푼이라도 손해보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가는 데는 반드시 이익을 바라보고 나갑니다. 나가서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 작용은 계속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손해나는 자리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그 작용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서로 플러스될 수 있는 공동목표 하에서만이 계속되는 것이지 그 이하에서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 철칙이요, 법칙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양심에도 양심의 주체가 있어야
  
하나님은 창조주요, 그 하나님이 지은 인간은 피조물인데 그런 피조물과 창조주가 합할 수 있는 목적, 하나의 공동목적을 제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그 인간이 하나님이 바라는 창조의 목적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점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힘의 작용체를 만들지 않고는 인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해서 그 목적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게끔 우리 인간 가운데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존속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이 바라는 제3의 목적기준에 도달해서 하나님도 기쁘고 인간도 좋아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던 목적의 기준과 지음받은 우리 인간으로서 가야 할 목적의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없습니다. 인간 가운데 절대적인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것을 찾아 올라갈 수 있는 무슨 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나를 자극시켜서 끌어내어 밀어주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는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이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높아지기를 바라고 작용합니다. 양심은 현재의 자기보다도 높아지라고 촉구하지 낮아지라고 촉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리 양심은 틀림없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양심은 혼자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작용할 수 있는 다른 상대적인 존재가 있느냐?  
아까 말하기를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작용이 있어야 하고,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그렇지 않고는 작용이 안 됩니다.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는 데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양심이 작용하는데 작용하고 있는 그 무엇, 주체가 되는 그 무엇이 없어 가지고는 작용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양심은 어디까지나 대상적인 존재지 주체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주체와 대상은 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도 보다 나을 수 있는 것, 보다 큰 것, 보다 가치적인 것, 보다 세계적인 것을 향해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양심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양심작용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적인 관계의 공동목적을 바라보고 작용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56-137)
 
 사랑은 행복과 생명의 근원
  
하나님이 이 우주 전체의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존재는 어디에 가서 합해지느냐? 합해질 수 있는 일치점이 반드시 이 우주 가운데 있어야 되고 하나님과 인간 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떤 것이냐? 어떤 남자가 있으면 그 남자 앞에 반드시 상대적인 존재가 있어야 행복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여자면 여자의 앞, 남자면 남자의 앞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성립되어 하나되는 자리를 기반으로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지 그 자리를 떠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복을 꿈꾸되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아야 합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되는 기반을 통하고서야 행복이 나오고 이상이 나오고 발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반드시 둘이 하나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그러면 둘이 하나되는 데 있어서 둘을 하나되게 하는 힘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냐 할 때 생명이라고 하겠지만 생명만을 붙들고는 안됩니다. 생명도 귀하지만 그 생명의 터전 위에 사랑을 결부시킬 수 있는 인연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생명보다도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생명 중에 어떤 것이 먼저냐? 생명이 있기 전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그 생명체가 있어 가지고 이 우주를 형성했다면 그 생명체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느냐? 반드시 사랑이 먼저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은 생명의 가치를 존중시하는 것보다도 사랑의 가치를 존중시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대상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적인 하나님은 인간을 왜 지었느냐? 주체만 가지고는 행복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만일 여기에 서 있는 선생님이 아무도 없는데 열렬히 이야기를 한다면 “저 사람 돌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나뭇잎이라도 바라보면서 열렬하게 웅변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물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들여다보고 큰소리로 웃거나 춤을 출 때는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좀더 올라가서 절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그 하나님이 혼자 웃고 춤을 춘다면 하나님도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상대도 없이 좋아한다면 그 하나님까지도 미쳤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기뻐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상대가 필요해서 지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인간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욕망

  
인간이 하나님의 상대라면 하나님은 그 인간이 무엇이 되기를 바랄 것이냐? 두말할 것 없이 완전한 상대가 되길 바랄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인간은 그 하나님도 내 것으로 만들고 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기를 바랄 것입니다. 

 

대상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그 주체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대상의 욕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자리만 결속하게 되면 갈라지는 일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은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욕망은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대상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은 주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욕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 되어야 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이것을 바라는 소원의 기준은 전부 다 통일인 것입니다. 


우주의 절대자, 천상천하에 한 분밖에 없는 절대자가 있으면 인간은 그 절대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존재는 절대적인 주체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 주체를 소유하지 않으면 영원히 존속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주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최고의 것을 소유하려는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하면 무엇을 소유했어요? 몸뚱이를 점령했다고 해서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은 물론이요, 그가 가진 것도 물론이요, 속속들이 깊은 가운데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모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쪽만 그런 자리에 선다면 행복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자리에서 주체는 상대의 사랑, 상대는 주체의 사랑을 서로서로가 점령했다고 하는 자리, 서로서로가 공동적으로 “그 사랑은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자리에 나서게 될 때 그 둘은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는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만 점령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점령했더라도 하나님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게 될 때는 완전한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이라는 주체되는 절대자는 우리 인간을 대해서 무엇을 바랄 것이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둘 사이의 사랑, 그리고 그들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서 바라는 최고의 창조목적의 종착점이 어디냐? 그것은 아들을 만나서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바라는 종착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아들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아들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상봉하는 자리가 부자관계의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게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욕망은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점령하여 영원히 내 것으로 귀결지으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상적인 실체권을 갖춰 가지고 영원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 본래의 인간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는 이러한 기준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그 주체와 대상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하나가 되지, 그 외에는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었지 생명의 욕구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정적인 문제가 근본이지 지적인 문제가 인간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주체적인 존재요, 인간은 대상적인 존재로서 그 주체와 대상이 서로서로 상응하고 영원히 일체권을 이룰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우리 인간은 아들이 되는 곳입니다. 이것은 천륜의 원칙을 따른 불가피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최고의 기준을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개해 준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요,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버지 앞에서 완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로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까지 갖고 싶어하는 인간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후의 인간의 욕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위에 있고 아들딸은 그 아래에 있으면 “아이구! 아버지의 자리를 내가 갖고, 아버지는 내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그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으로서 동등한 자리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동등한 자리에 세워 줬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가만히 보니까 천지만물을 창조한 능력이 있는 절대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도 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는 자기에게 없는 것까지도 보태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까지 사랑하는 아들딸한테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아담과 해와를 지은 것과 마찬가지의 창조의 능력을 부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성상과 마이너스 성상, 즉 남성성상과 여성성상이 완전히 하나되어 인간을 지었다고 할 때 인간이 그 하나님의 성상을 닮지 않고는 아들딸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본연의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이 그 사랑을 중심삼고 비로소 아담과 해와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는 것이 인간이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딸을 왜 낳아야 되느냐? 하나님이 그 기뻐하는 것까지도 인간에게 상속시켜 주기 위해 “번성하라!”는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녀를 낳으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상속받아 가지고 나온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6-149)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할 인간
  
이러한 본연의 가치의 기준을 가져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도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어요! 세상에서는 천사장급 사랑의 핏줄을 받고 그 사랑권 내에서 아들딸을 낳고도 “아이구, 나 죽는다!” 하면서 그 아들딸 때문에 생명을 바치는 놀음도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천사장급보다도 하나님급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되어 아들딸을 사랑하는 놀음이 벌어졌다면 나누어질래야 나누어질 수 없고, 나누어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귀한 인간이 돼야 할 것인데 타락으로 인하여 내적인 모든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타락했을망정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대행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연의 아담과 해와가 완전히 하나되어 이상을 그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이 하나되어 평면적인 이상세계를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천국입니다. 이것이 사위기대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은 되었을망정 그와 같은 본성의 기준은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의 기준을 통해 가지고 본연의 주체적인 이상권을 바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작용은 우리 인간을 그곳으로 가라고 재촉하고 강제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여러분의 양심의 배후에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지남철을 보면 플러스 극(N극)과 마이너스 극(S극)이 있는데 그 두 극의 사이에 절연체나 종이 짜박지 같은 무슨 방해가 되는 물질이 있더라도 그것을 뚫고 엔(N)극과 에스(S)극은 작용을 합니다. 그것이 점점 두꺼워지면 작용이 점점점 둔해집니다. 더 두껍게 해 놓으면 작용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용을 안 하는 것 같지만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중간에 무엇이 끼어서 이게 다 막혀 버린 것 같지만 양심은 그곳을 향해서 언제나 작용을 합니다. 그 사이의 절연체를 완전히 빼 버렸다고 할 때는 바로 통해 버립니다. 배우지 않고도 다 알게 됩니다. 


만일에 하나님과 안팎으로 하나된 자리에 있으면 배우지 않고도 전부 다 박물군자(博物君子)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지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영계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인생살이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다 안다는 거예요. 타락을 했을망정 이 두 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본성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이 사이에는 지금까지 쌓여 온 더러운 것들이 덮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빼 버리면 작용이 점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완전히 빼내 버렸다고 하는 날에는 확 터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추구해 나왔습니다. 




<훈독경 원문>


하나님과 우리 인간 
  
 날짜 : 1972. 5. 14(일) 
장소 : 한국 통일동산(구리시 교문동)
  
신의 실존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
  
이 세계에는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직접적인 문제의 시대로 들어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민주세계나 공산세계나 어느 세계를 막론하고 하나의 세계를 바라고 평화의 세계를 바라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하나의 세계와 평화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만으로는 불가능한 시대에 온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인간의 힘, 인간의 지혜, 인간의 문화 가운데서는 그 무엇을 가지고도 진정한 의미의 평화세계나 하나의 통일된 세계를 바랄 수 없는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세계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제일 중심문제가 무엇이냐?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확실히 해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온 인류가 아는 날에는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 곳을 지향하는가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고, 그 지향하는 뜻을 알게 될 때는 그 세계는 그야말로 하나의 세계요, 평화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만 아는 날에는 공산세계도 민주세계도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날에는 인류는 그 하나님과 더불어 그 뜻을 따라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과연 하나님이 확실히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근본문제를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 관건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잠깐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 인간들이 규명해 온 철학적인 문제요, 종교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막연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보다도 실질적인 문제를 취급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고 봅니다. (56-131)

  
 하나님을 어떻게 알 것인가
  
하나님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영적인 체험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알겠지만, 영계에 들어가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그 작용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지 실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이 우주는 존재의 세계라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나 나나, 식자나 무식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 가지고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재 존재하는 물질이 원인적인 것이냐, 결과적인 것이냐 할 때 현재 존재하는 물질은 반드시 원인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떠한 절대자나 어떠한 주체, 즉 원인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빚어진 그 존재에게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존재하기 전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는 데는 존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존재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방대한 이 우주가 힘의 기대 위에서 형성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힘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힘이 먼저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문제가 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힘 자체는 그냥 그대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 힘이 계속적으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작용을 해야 됩니다. 작용을 거치는 자리에서만이 힘이 존속하는 것입니다. 전기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전기 자체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 전기의 작용을 통해서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힘은 반드시 작용하는 그 기대를 떠나서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게 됩니다. (56-132)

   
 존재와 작용의 원칙

  
그러면 작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혼자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작용하는 것은 이 우주에는 없습니다.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결론에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 상대 가운데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있는 인연 가운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그 작용을 통해서 힘이 존속하고, 힘이 존속함으로 말미암아 하나의 존재물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존재의 배후에 힘이 있기 전에 선행조건으로 필요한 것이 작용입니다. 작용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선행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귀납적인 방법을 통해서 추리해 낼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데서는 작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선생님이 여러분이 없는 곳, 즉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없는 데서 말을 한다면 나는 정신나간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반드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작용을 영속적으로 계속하기 위해서는 주체나 대상이 보다 이익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 와야 합니다. 그런 데서만이 작용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만약, 주체와 대상이 마이너스될 수 있는 면이 한 면만이라도 보인다면 거기에서는 작용이 감소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작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서만이 그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지 마이너스될 수 있는 면을 바라보고 작용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점점점 작아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원소면 원소 하나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그 원소가 어떠한 상대적인 원소를 대하여 작용하는 데는 두 원소가 서로 나을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는 데서 계속적인 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 주체와 대상이 자기 자체보다 더 작아질 수 있는 무엇을 바라보고 작용한다는 원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 우주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두 작용체,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데서만이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하는 목적의 결과를 두고 보게 되면 주체보다도 크고 대상보다도 큰 제3의 결과적인 존재가 나오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집회가 있다고 해서 왔는데, 이곳에 온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올 때의 그 마음보다도 더 플러스될 수 있는 그 무엇, 좀더 나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서 온 것입니다. 만일 여기에 와서 마이너스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러한 작용은 점점점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스스로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는 주부가 있다고 하면 그 주부가 시장에 나갈 때 한푼이라도 손해보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가는 데는 반드시 이익을 바라보고 나갑니다. 이러한 원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작용을 계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가서 자기가 바라는 목적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그 작용은 계속적으로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손해나는 자리에서는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천리요, 천칙(天則)입니다. 만약에 작아지는데도 작용한다면 거기에는 파탄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형성되는데, 그 작용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서로 플러스될 수 있는 공동목표 하에서만이 계속되는 것이지 그 이하에서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 철칙이요, 법칙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56-133)
  
 양심에도 양심의 주체가 있어야
  
우리 인간에게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양심이란 것이 있습니다. 양심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들은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있다는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은 창조주요, 그 하나님이 지은 인간은 피조물인데 그런 피조물과 창조주가 합할 수 있는 목적, 하나의 공동목적을 제시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었다면 그 인간이 하나님이 바라는 창조의 목적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점에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힘의 작용체를 만들지 않고는 인간을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시니 절대자인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합할 수 있는 제1의 기반, 접촉할 수 있는 제1의 터전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대해서 그 목적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게끔 우리 인간 가운데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존속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하나님이 바라는 제3의 목적기준에 도달해서 하나님도 기쁘고 인간도 좋아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을 때 인간을 창조하던 목적의 기준과 지음받은 우리 인간으로서 가야 할 목적의 기준은 서로 다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하나될 수 있는 데서 하나님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요, 인간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인간 가운데 절대적인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것을 찾아 올라갈 수 있는 무슨 작용이 있어야 됩니다. 그 작용이 없게 되면 목적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으니 그것을 바라는 힘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자극시켜서 끌어내어 밀어주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이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는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양심이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높아지기를 바라고 작용합니다. 양심은 현재의 자기보다 “나아져라, 나아져라!” 하고 재촉하는 것입니다. 이 작용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현재의 자기보다도 높아지라고 촉구하지 낮아지라고 촉구하지 않습니다. 오늘보다도 내일, 내일보다도 모레가 보다 나을 수 있고 금년보다도 내년, 혹은 10대보다도 20대, 20대보다도 30대로 가면 갈수록 더 높고 더 가치적인 자기를 형성하라고 추구하는 힘이 양심작용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우리 양심은 틀림없이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양심은 어릴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작용합니다. 그러면 양심은 혼자 작용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작용할 수 있는 다른 상대적인 존재가 있느냐? 이것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말하기를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하고, 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작용이 있어야 하고, 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존재를 위한 하나의 원칙입니다.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작용이 안 됩니다. 전기를 보면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있는데, 그것이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결코 작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고,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작용을 계속하는 데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양심이 작용하는데 작용하고 있는 그 무엇, 주체가 되는 그 무엇이 없어 가지고는 작용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 자체를 두고 그 양심이 주체냐, 대상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의 양심은 어디까지나 대상적인 존재지 주체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작용의 원칙을 따라 찾아보게 될 때 반드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 주체와 대상은 손해나는 것, 서로가 마이너스되는 것을 바라보고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것, 보다 나을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양심도 보다 나을 수 있는 것, 보다 큰 것, 보다 가치적인 것, 보다 세계적인 것을 향해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그 길을 찾아 나서는 양심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양심작용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적인 관계의 공동목적을 바라보고 작용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56-137)
  
 사랑은 행복과 생명의 근원
  
하나님이 이 우주 전체의 주체라면 그 주체 앞에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 존재는 어디에 가서 합해지느냐? 합해질 수 있는 일치점이 반드시 이 우주 가운데 있어야 되고 하나님과 인간 가운데 있어야 됩니다. 그 일치될 수 있는 종착점이 무엇이냐? 그게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이 제일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간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은 어떤 것이냐? 혼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남자가 있으면 그 남자 앞에 반드시 상대적인 존재가 있어야 행복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여자면 여자의 앞, 남자면 남자의 앞에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성립되어 하나되는 자리를 기반으로 행복을 추구하려고 하지 그 자리를 떠나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 자리를 떠나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 남자는 100년, 1세기 이내에 망해 버리고 맙니다. 끝장을 보고 마는 것입니다. 
행복을 꿈꾸되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중심삼아야 합니다. 남자가 있으면 남자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어야 합니다. 또여자가 있으면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하나되는 기반을 통하고서야 행복이 나오고 이상이 나오고 발전이 나오는 것이지 그 터전을 갖추지 않고는 무슨 행복이니, 이상이니, 발전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반드시 둘이 하나되는 데서 형성됩니다. 그건 여러분이 잘 알 것입니다. 그러면 둘이 하나되는 데 있어서 둘을 하나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할 때 이것은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그 힘이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냐 할 때 생명이라고 하겠지만 생명만을 붙들고는 안됩니다. 생명도 귀하지만 그 생명의 터전 위에 사랑을 결부시킬 수 있는 인연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 생명도 오래 못 가서 없어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이냐? 생명보다도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랑과 생명 중에 어떤 것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생명이 먼저냐 할 때 여러분은 생명이 먼저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기 전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사랑으로부터 생명이 시작됩니다. 생명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들어가면 이 우주에 생명체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생명체가 있어 가지고 이 우주를 형성했다면 그 생명체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느냐? 생명과 사랑을 중심삼고 볼 때 반드시 사랑이 먼저입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바라는 최고의 목적은 생명의 가치를 존중시하는 것보다도 사랑의 가치를 존중시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56-140)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대상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적인 하나님은 피조 만물 가운데서 영물인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생명이 그리워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인간을 왜 지었느냐? 주체만 가지고는 행복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만일 여기에 서 있는 선생님이 아무도 없는데 열렬히 이야기를 한다면 “저 사람 돌았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리 큰소리한다 하더라도 대상이 없으면 미친 것입니다. 그것은 자체의 소모요, 자체의 파괴입니다. 모든 존재물이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그만 나뭇잎이라도 바라보면서 열렬하게 웅변한다고 할 때는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하지 않습니다. 조그마한 물건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들여다보고 큰소리로 웃거나 춤을 출 때는 그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하나밖에 없는 성현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도 없는 데 나타나서 춤을 추고 말을 할 때는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말할 것 없이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좀더 올라가서 절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그 하나님이 혼자 웃고 춤을 춘다면 하나님도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상대도 없이 좋아한다면 그 하나님까지도 미쳤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도 기뻐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지었느냐? 인간을 지은 목적이 어디에 있느냐? 상대가 필요해서 지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존재는 무엇이냐 할 때 그것은 식물도 아니요, 동물 중에서도 최고의 영물인 인간 외에는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것입니다. (56-141) 
  
 인간의 최고의 욕망
  
하나님이 최고의 걸작품으로 지은 인간이 하나님의 상대라면 하나님은 그 인간이 무엇이 되기를 바랄 것이냐? 하나님의 완전한 상대가 되기를 바랄 것이냐, 완전치 않은 상대가 되기를 바랄 것이냐? 두말할 것 없이 완전한 상대가 되길 바랄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한 상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완전한 하나님이 완전한 사랑을 갖고 있다면, 인간은 그 하나님도 내 것으로 만들고 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기를 바랄 것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상이라는 존재는 반드시 그 주체를 자기의 소유로 만들려고 하고, 그 주체 내에 보다 귀한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대상의 욕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완전히 하나 될 수 있는 길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서로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자리만 결속하게 되면 갈라지는 일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완전히 통일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상대적인 존재로 지음받은 인간은 무엇을 바랄 것이냐? 절대적인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욕망은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 대상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은 주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입장으로 지음을 받았다면, 인간으로서의 욕망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남자에게만 적용되고 여자에게는 적용이 안 된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남자만을 위한 하나님이지 여자를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남자나 여자나,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이것을 바라는 소원의 기준은 전부 다 통일인 것입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에게도 “너! 조그만 것을 좋아하니, 큰 것을 좋아하니?” 하면, “큰 것, 큰 것”이라고 합니다. 둘을 딱 보여 주면서 작은 것을 네가 가지라고 하면 싫다고 합니다. 전부 다 큰 것을 원합니다. 또, 큰 것을 갖고 있더라도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면 “아, 나 이거 싫어! 더 큰 것 줘!” 그럽니다. 또, 그보다 더 큰 것을 갖다 놓으면 더 큰 것으로 바꿔 가지려고 합니다. 이렇게 큰 것, 큰 것을 찾아 올라가면 어디까지 올라가느냐? 우주의 절대자, 천상천하에 한 분밖에 없는 절대자가 있으면 인간은 그 절대자를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러한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욕망을 누가 갖다 넣어 놓았느냐? 여러분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갖다 넣어 놓았어요? 아닙니다. 동서양의 어떤 민족을 초월하고 수많은 인류를 초월해서 역사시대에 태어난 그 누구라도 이러한 공통적인 욕망은 다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인간은 상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대적인 존재는 절대적인 주체를 추구하지 않으면, 그 주체를 소유하지 않으면 영원히 존속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주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최고의 것을 소유하려는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면,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하면 무엇을 소유했어요? 몸뚱이를 점령했다고 해서 그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서로 의가 좋고 행복하다고 하는 부부가 있더라도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을 대하여 서로가 “나는 당신의 몸뚱이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몸은 물론이요, 그가 가진 것도 물론이요, 속속들이 깊은 가운데 있는 단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해야만 그때서야 비로소 두 사람이 모두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당신 행복하지?” 하면, “예. 행복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쪽만 그런 자리에 선다면 행복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자리에서 주체는 상대의 사랑, 상대는 주체의 사랑을 서로서로가 점령했다고 하는 자리, 서로서로가 공동적으로 “그 사랑은 내 것이야!” 할 수 있는 자리에 나서게 될 때 그 둘은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는 목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헤아려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만 점령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점령했더라도 하나님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게 될 때는 완전한 행복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56-142)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이라는 주체되는 절대자는 우리 인간을 대해서 무엇을 바랄 것이냐? 하나님은 아담과 해와 몸뚱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사랑, 그리고 그들과 하나될 수 있는 자리를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서 바라는 최고의 창조목적의 종착점이 어디냐? 그것은 아들을 만나서 사랑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바라는 종착점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아들로서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고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아들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상봉하는 자리가 부자관계의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게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욕망은 세계를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지도하는 하나님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점령하여 영원히 내 것으로 귀결지으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원소가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모체가 되어 이상적인 실체권을 갖춰 가지고 영원히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 본래의 인간임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는 이러한 기준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그 주체와 대상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하나가 되지, 그 외에는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외에는 무엇을 가지고도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지식을 가지고도 안 되고, 권력을 가지고도 안 되고, 그 가외의 문제를 가지고는 하나로 만드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으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었지 생명의 욕구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은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욕구로 말미암아 인간을 지은 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정적인 문제가 근본이지 지적인 문제가 인간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주체적인 존재요, 인간은 대상적인 존재로서 그 주체와 대상이 서로서로 상응하고 영원히 일체권을 이룰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우리 인간은 아들이 되는 곳입니다. 그 외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로 신봉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륜의 원칙을 따른 불가피한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것은 오늘날 인간들이 막연한 입장에서 그 근본적인 내용을 추구하는 기준은 몰랐지만 최고의 기준을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개해 준 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요,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버지 앞에서 완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자리로 어떻게 들어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만일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 하나님과 갈라질래야 갈라질 수 없는 사랑, 완전히 일체될 수 있는 사랑으로 얽매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된 것이 타락입니다. (56-145)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까지 갖고 싶어하는 인간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후의 인간의 욕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위에 있고 아들딸은 그 아래에 있으면 “아이구! 아버지의 자리를 내가 갖고, 아버지는 내 자리에 있으면 좋겠다.” 하는 욕망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알고 그러한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으로서 동등한 자리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동등한 자리에 세워 줬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한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한 능력이 있는 절대적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인간도 전능한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욕망을 갖겠어요, 안 갖겠어요?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갖는 데는 시시한 것이 아니라 최고의 것을 나도 갖고 싶다고 하는 욕망을 갖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에게는 자기에게 없는 것까지도 보태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능력까지 사랑하는 아들딸한테 주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물 중에 최고의 창조물이 무엇이냐?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존재로 아담과 해와를 지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아담과 해와를 지은 것과 마찬가지의 창조의 능력을 부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플러스 성상과 마이너스 성상, 즉 남성성상과 여성성상이 완전히 하나되어 인간을 지었다고 할 때 인간이 완전한 능력을 행사하던 그 하나님의 성상을 닮지 않고는 아들딸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본연의 하나님의 이성성상을 닮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을 주고받아 완전히 하나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하나되면 하나님은 주체요,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 앞에,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 앞에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생기게 되어 하나님이 그 사랑을 중심삼고 비로소 아담과 해와를 창조한 것과 마찬가지의 입장에 서는 것이 인간이 아들딸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들딸을 왜 낳아야 되느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어놓고 “지극히 선한지라!”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권능을 행사해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고 심히 기뻐하셨던 것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뻐하는 것까지도 인간에게 상속시켜 주기 위해 “번성하라!”는 축복을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녀를 낳으면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상속받아 가지고 나온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56-149)
  
 본연의 가치를 회복해야 할 인간
  
이와 같이, 인간 본연의 가치는 방대하고도 고차적입니다. 이러한 본연의 가치의 기준을 가져야 할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도 다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래야 영영 맺을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도 설 수 없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창조의 능력을 대행할 수 있는 아들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을 못 낳아 봤습니다. 여러분이 아들딸을 낳지만 그건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어요! 세상에서는 천사장급 사랑의 핏줄을 받고 그 사랑권 내에서 아들딸을 낳고도 “아이구, 나 죽는다!” 하면서 그 아들딸 때문에 생명을 바치는 놀음도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천사장급보다도 하나님급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되어 아들딸을 사랑하는 놀음이 벌어졌다면 나누어질래야 나누어질 수 없고, 나누어 놓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귀한 인간이 돼야 할 것인데 타락으로 인하여 내적인 모든 가치를 완전히 상실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타락했을망정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고,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서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대행할 수 있는 입장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아들딸을 지어 놓고 그들을 보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그들과 더불어 완전히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본연의 아담과 해와가 완전히 하나되어 이상을 그리던 것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자식이 하나되어 평면적인 이상세계를 건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상천국입니다.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종적으로 묶어지고 아담과 해와 그리고 그 자녀는 횡적으로 묶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상입니다. 이것이 사위기대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관점에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체로 계시고 우리는 그 대상인데 타락은 되었을망정 그와 같은 본성의 기준은 지금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의 기준을 통해 가지고 본연의 주체적인 이상권을 바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작용은 양심작용보다 강한 작용으로서 밤이나 낮이나 우리 인간을 그곳으로 가라고 재촉하고 강제로 몰아내는 것입니다. 그런 힘이 여러분의 양심의 배후에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타락은 했을망정 그곳을 향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남철이 있지요? 지남철을 보면 플러스 극(N극)과 마이너스 극(S극)이 있는데 그 두 극의 사이에 절연체나 종이 짜박지 같은 무슨 방해가 되는 물질이 있더라도 그것을 뚫고 엔(N)극과 에스(S)극은 작용을 합니다. 그것이 점점 두꺼워지면 작용이 점점점 둔해집니다. 더 두껍게 해 놓으면 작용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작용을 안 하는 것 같지만 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중간에 무엇이 끼어서 이게 다 막혀 버린 것 같지만 양심은 그곳을 향해서 언제나 작용을 합니다. 이것을 열어제치는 날에는 그 작용이 강하겠어요, 안 강하겠어요? 그 사이의 절연체를 전부 다 빼 버리면 점점점 강해집니다. 그것을 완전히 빼 버렸다고 할 때는 바로 통해 버립니다. 배우지 않고도 다 알게 됩니다. 
여러분, 공부하기 참 힘들지요? 만일에 하나님과 안팎으로 하나된 자리에 있으면 배우지 않고도 전부 다 박물군자(博物君子)가 된다는 것입니다. 천지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영계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인생살이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다 안다는 거예요. 배우긴 뭘 배워요? 태어나는 모든 곤충 새끼도 나면 스스로 살겠다고 먹을 것 찾아가는데 만물의 영장이 배워 가지고야 먹을 것을 찾고 배워 가지고야 죽을 것과 살 것을 다 알겠어요? 척, 벌써 대하면 알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못 된 것은 타락 때문입니다. 
타락을 했을망정 이 두 사이,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본성은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이 사이에는 지금까지 쌓여 온 더러운 것들이 덮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빼 버리면 작용이 점점점 강해질 것입니다. 완전히 빼내 버렸다고 하는 날에는 확 터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길을 지금까지 인간들은 추구해 나왔습니다. (56-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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