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2권 제 6 일
본연의 에덴동산(훈독본)
날짜 : 1957. 6. 9(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연의 에덴동산은 어떠한 동산인가
여러분은 창조본연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본연의 에덴동산은 타락의 인연과 관계없는 세계요, 우리의 소망의 세계인 동시에 하나님이 창세 이후로 찾고자 원하시던 소망의 세계인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그 동산을 찾지 못한다면 인간이 누려야 할 참다운 행복, 인간이 찾아야 할 참다운 생명, 인간이 가져야 할 참다운 사랑, 인간이 가져야 할 천적인 이념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개체를 세우시어 수고의 섭리를 해 나오시는 귀일(歸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분을 중심삼고 에덴동산을 다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만 즐거워하시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즐거워하실 수 있는 에덴동산을 그리시며 6천 년 기나긴 세월을 사탄과 싸워 나오셨습니다.
우리가 타락으로 인해 그러한 소망의 동산을 잃어버렸으므로 우리는 그 소망의 동산을 그리면서 다시 찾아가야 할 운명길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운명길은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천륜적(天倫的)인 운명의 길이며 인륜적(人倫的)인 운명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개개인은 역사와 우주를 대신해서 아버지께 무한한 행복과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동시에 무한한 생명과 사랑을 갖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책임을 모르고 있다면 본연의 에덴동산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창조의 이상으로서 인간을 통하여 나타났어야 할 본연의 동산은 어떠한 동산이었겠습니까? 그 동산은 하나님이 즐기실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이 즐길 수 있으며 피조만물이 함께 즐길 수 있었던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그 동산은 영원을 중심삼고 나타났어야 했던 생명의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동산이 이 땅에 이루어졌다면 인간들은 생명을 가진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은사에 대한 고마움과 영원한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본연의 에덴동산은 인간이 모든 생명의 주인의 입장에서 생명의 빛을 나타낼 수 있었던 세계였습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개개인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 영원한 소망의 실체로 나타날 수 있었던 동시에 무한한 가치의 존재들로서 빛을 나타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연의 그 동산은 사랑의 동산인 동시에 평화의 세계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가 화목하며 모두가 하나되는 통일의 세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본연의 동산을 이루어서 행복과 생명 그리고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영광은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6천 년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은 미(美)의 실체로 나타날 때만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그와 같은 미의 실체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미는 어떠한 미입니까? 그것은 웃음과 노래와 춤으로 나타낼 수 있는 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영원한 가치로서의 미입니다. 본연의 에덴동산이 바로 그런 미의 세계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찾기를 원하는 동산은 행복의 동산이며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려드려야 할 세계입니다. 또, 그 세계는 생명을 중심삼은 소망의 세계요, 생명과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가치와 통일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가치가 결합되어 미로 나타나는 세계이며, 모든 개체 개체가 노래와 웃음 그리고 춤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찬양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인간이 움직이는 대로 온 피조물이 함께 동(動)하고 정(靜)하며 화동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창조본연의 세계를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2-243)
천지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되어 사랑이 넘치게 되었으면 아담은 하나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사랑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거(居)하실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성경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얼마만큼 좋아하셨느냐 하면 생명을 걸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면 갈라져 있으면서 좋아하셨느냐? 딱 붙어서 좋아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딱 붙었느냐?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가서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속에도 들어가실 수 있었고 해와의 속에도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대관절, 아담 해와가 누구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왜 지으셨느냐? 그냥 바라보고 재미를 느끼려고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처녀 총각이 시집 장가를 가서 아들딸을 낳고 사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림살이를 시작해서 하나님 자신의 족속을 중심삼고 사랑의 동산을 만드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이 세계는 하나님이 살림살이하시는 데 있어서 이용물로서의 정원이고 비품이었습니다. 사탄에게 주시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떻게 만드셨겠습니까? 정성에 정성을 다해서 만드셨습니다.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는데 그 걸작품을 전부 다 깨뜨려 버리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고 정성을 들여 만드셨기 때문에 행여나 흠이 갈세라 염려하셨습니다. (48-200)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보고 얼마나 좋고 기뻤는가
에덴동산에 아담 해와의 둘만 있었으니까 해와는 틀림없이 아담의 궁둥이를 졸졸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또, 그 둔한 아담은 누구를 따라다녔겠느냐? 털석털석 하면서 해와를 따라다녔습니다.해와가 “아담, 여기 와요!” 하면, “그래, 갈게!” 하게 되어 있었지 다른 데로 가게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붙어 다녔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은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고, 사방으로 보면서 빨리 클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어린 아담 해와를 보시던 하나님은 속에서 사랑이 폭발되었습니다.“이야, 이렇게 자식이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완성의 기준을 알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사랑의 체휼이 그렇게 아기자기할 줄은 모르셨습니다. 한살 두살 자라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말려 들어가고 몸이 말려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이 있다면 그 정신까지도 전부 말려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서로를 대하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담 해와는 서로를 대해 “야, 나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 무엇인가 있구나!” 하면서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던 것을 느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청소년 시대의 아담 해와를 보시고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꾸 커라!”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만들어 놓고 키워나가시던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셨습니다. (130-25)
태초에 아담 해와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아담은 수염이 났을 것입니다. 또, 머리는 여자같이 길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면도를 하거나 화장을 하고 나서는 우리가 외면적으로는 그들보다 더 낫습니다.
집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 외모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없으면 그 모든 외적인 물건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때 아담 해와는 아무리 못났어도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웃는 얼굴에는 악기(惡氣)가 없었고 사기를 치기 위한 저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순수한 하나님의 기쁨을 표상했던 얼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또, 그들은 보는 것도 자기들의 눈을 통해서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봤을 것이고 그들이 듣는 것, 느끼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했습니다.
그들이 좋아서 춤을 추었다면 그 춤도 하나님을 위해서 추었고, 일을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실과(實果)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도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을 잘 때도 아버지와 더불어 자고, 깰 때도 아버지와 더불어 깨고 싶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던 아담 해와였습니다. (95-246)
본연의 남자와 여자의 자리
만약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었다면 우주를 대표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직접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가정과 피조세계가 연결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영계와 육계에 하나님의 사랑의 축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을 중심삼고 센터가 생겼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 센터에 계십니다. 그 축을 중심삼고 아담과 해와가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나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됨과 동시에 모든 존재들을 연결시킬 수 있었던 대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자는 뭐냐? 우주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사랑의 중심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남자입니다. 남자는 그러한 사랑과 연결되는 주체입니다. 그러면 여자는 뭐냐?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남자 여자의 소망은 뭐냐?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는 것이 그들의 소망입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각도는 완전히 90도가 되어야 합니다. (134-193)
자연은 아담 해와를 교육할 수 있는 산 교과서
모든 만물은 서로 사랑을 합니다. 동물을 보나, 곤충을 보나, 식물을 보나, 광물세계를 보나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상대를 중심삼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날고, 기고 합니다.
아담 해와는 자연과 벗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남자였기 때문에 해와보다 활동 범위가 넓었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동물들이 사는 것을 보고 재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암컷 수컷이 서로 하나되어서 새끼를 낳는 것 등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교육의 재료였습니다. 동산에서 갖가지의 동물들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제각기 소리치던 것은 상대와 주고받음으로써 이루어졌던 음악, 창조의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철없이 그것을 보고 좋아만 했는데, 철이 들면서 알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큼으로써 환경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그때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랄 때까지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이치였습니다.
그런데 동산의 동물들은 전부 다 아담이 가면 아담을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걸 연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사랑에 연결되기 위해서 사람을 중심하고 따르게 되어 있었던 동산이었습니다.
해와는 아담을 따라다니다가 열 살이 지나서 가슴이 커졌는데 아담한테 “아담, 이거 이상하다.내 가슴이 이렇게 볼록 나온다.”고 얘기했겠습니까? 해와는 동물들이 젖을 먹이는 걸 봤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신체에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점점 커 가면 서로간에 인력이 강해집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자꾸 갖다 대고 싶고, 그래서 갖다 대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아담 해와도 인력이 강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동물의 수놈 암놈이 만나서 입맞추는 것을 다 봤습니다. 전부 동물세계를 보고 배웠습니다. 자연이 교육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피조세계는 아담 해와가 이상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소재였습니다.
거기에서 아담 해와는 중심이었습니다. 아담 해와, 남자와 여자의 소질은 근본적으로 같은 뱃속에서 나왔더라도 다릅니다. 여자는 나면서부터 고운 것, 귀고리나 목걸이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남자는 기관총 같은 소리가 나고 요란스러운 것을 생각합니다. 성격이 반대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가까워지게 하고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해와가 아담을 졸졸졸 따라다니다가 놀랄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겠느냐? 깜짝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해와는 아담의 행동이 자기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지만 아담이 참 재미있었고 아담과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해와는 놀랄 적마다 “아이쿠!” 하면서 아담을 붙들었습니다. 그럴 때 전기가 통했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가서 부딪치고 붙들어도 싫지 않고 좋았습니다. 언제든지 여자들은 놀라는 순간에 무엇이든지 붙들고 숨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그런 행동을 합니다. (134-194)
아담 해와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표시하는 것
그렇게 자라던 아담 해와가 성숙해서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때까지 아담 해와가 해 왔던 생활의 모든 전통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결혼해서 부부생활로 들어갈 때는 새로웠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결혼에 대해서 알았을 것인데 틀림없이 곤충이나 새, 혹은 동물들이 짝을 이루어서 사는 걸 보고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알았어도 사랑의 맛은 몰랐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맺어 주시지 않고서는 원칙과 통할 수 있는 사랑의 출발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 관해서도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된다는 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결혼시켜 주시던 석상에서 무슨 교시를 하셨을 것이냐? 그때는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교시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육하려면 교과서가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사랑을 교육하시려면 표준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을 표준삼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이냐? 틀림없이,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나를 사랑하던 이상 해와를 사랑해라!” 하셨을 것이고,해와에 대해서도 “해와야, 네가 나를 사랑하던 이상 아담을 사랑해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사랑하라고 하실 때 “너희들이 서로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하던 것보다 조금 덜 사랑해라!” 하셨겠어요? 더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그때부터 서로가 하나님을 사랑하던 것보다 더 사랑했다면 하나님이 섭섭해 하셨겠습니까?
예를 들어, 혼자 사는 아줌마한테 아들이 있는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을 사랑하던 것보다 더 사랑해서 쭉 키워 가지고 장가를 보냈습니다. 장가를 보냈는데, 첫날밤에 색시의 방에 들어가는 아들을 볼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이 섭섭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물론 섭섭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중심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둘이서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자꾸거기에 흡수되어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남자와 여자가 진짜 서로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영원히 계십니다.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하나님 대신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하나님 대신 사랑한다는 개념이 여기서 형성됩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표시합니다. 본래, 남자와 여자가 좋아하면 하나님도 내적으로 좋아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슬퍼하면 하나님도 내적으로 그 슬픔을 같이 느끼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요, 남자의 것이요, 여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95-248)
가정을 통한 사랑의 완성
우리들은 형제와 나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부모에게도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습니다. 그렇게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과 해와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아담 해와까지 올라가면 그들의 부모는 누구였느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모였다고 하면 자녀의 입장에 있었던 아담 해와는 그 부모와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오는데, 부모의 사랑이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생존해 있는 한 소년 시대, 청년 시대, 장년 시대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 성장하게 되면 횡적인 부부의 사랑이 각자에게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 그 자녀를 사랑해야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없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어야만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끼리는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자라지만 성장해서 결혼을 하여 자녀를 가지게 되면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로 시작하여 한 바퀴를 돌아서 부모로 돌아가 봐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낳아 봐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고 완성된 사람의 표준을 어디서 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모 자신이 성숙한 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부모가 횡적으로, 종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완성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숙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하나되었으면, 즉 이성관계에 있어서 서로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나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면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사랑이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었으면 하나의 형(型)이 갖추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평면적인 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녀를 낳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횡적인 관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적인 관계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하나이며, 부모의 사랑은 종적으로 둘 이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부부의 사랑은 상대적인 관계를 갖지만 하나이기 때문에 종적인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 연장된 것입니다. 부모, 부부, 자녀가 종적인 관계의 원칙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완전히 합하면 하나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부부의 관계를 거쳐서 부모가 되면 자녀들도 부모의 사랑과 크기가 같아야 되고 길이도 같아야 됩니다. 그러면 자녀들 사이의 사랑은 어떠해야 되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해야 되느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듯이 형제들도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은 누구로부터 배우느냐 하면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한 가정에 왜 파탄이 벌어지느냐 하면 사랑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계속하려면 부모를 중심삼고 부부의 사랑을 밟아야 하고, 그 부모와 부부의 사랑을 이어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 사랑을 이어받기 위한 준비는 형제를 통해서 해야 됩니다. 만약에 누이동생이 있다면 그 동생을 사랑하기를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해야 됩니다. 여자 형제는 오빠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됩니다.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는 서로서로 부모와 자식지간의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듯이 언니는 동생을 사랑해야 됩니다.
형제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상대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위하는 실체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형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을 통해서 나왔으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쪽씩을 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무엇으로 묶어야 하느냐? 사랑으로 묶어야 합니다. (66-119)
<훈독 소감>
본연의 에덴동산은 개개인이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로 무한한 가치적 존재로 서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화목하는 통일의 세계였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실체를 쓰시고 가정을 이뤄 사랑의 살림살이를 하는 세계가 바로 본연의 동산임을 강조하셨습니다.
타락으로 잃어버린 본연의 에덴동산을 찾아 회복해주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그 소망을 이뤄드리는 모습이 되어야 할 나임을 각오하고 다짐하게 됩니다.
&&&&&& 원문 &&&&&&
제 6 일
본연의 에덴동산
날짜 : 1957. 6. 9(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연의 에덴동산은 어떠한 동산인가
여러분은 창조본연의 동산인 에덴동산에 대하여 말씀을 통해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아담 해와가 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의논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이루어지길 바라셨던 소망의 에덴동산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 우리들이 찾아가야 할 본연의 에덴동산은 타락의 인연과 관계없는 세계요, 우리의 소망의 세계인 동시에 하나님이 창세 이후로 찾고자 원하시던 소망의 세계인 것입니다.
사람을 통하여 에덴동산에서 이상의 영광을 보시려던 하나님은 사람을 잃어버리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소망의 뜻인 에덴동산도 잃어버리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한테 있어서도 그 동산은 오늘날까지 소망의 동산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 타락의 혈통을 받은 우리 인간들도 생애노정을 거치고 역사노정을 지나오면서 영원한 소망으로서 그 동산을 찾아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이 그 동산을 찾지 못한다면 인간이 누려야 할 참다운 행복, 인간이 찾아야 할 참다운 생명, 인간이 가져야 할 참다운 사랑, 인간이 가져야 할 천적인 이념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개체를 세우시어 수고의 섭리를 해 나오시는 귀일(歸一)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분을 중심삼고 에덴동산을 다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만 즐거워하시는 에덴동산이 아니라 여러분을 통해 즐거워하실 수 있는 에덴동산을 그리시며 6천 년 기나긴 세월을 사탄과 싸워 나오셨습니다.
우리가 타락으로 인해 그러한 소망의 동산을 잃어버렸으므로 우리는 그 소망의 동산을 그리면서다시 찾아가야 할 운명길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 운명길은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천륜적(天倫的)인 운명의 길이며 인륜적(人倫的)인 운명의 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기거동작(起居動作)하는 전부가 여러분 개체만을 통할 수 있는 관계로서 나타나기를 원하고 있지만, 그 나타나는 전부가 여러분 자체에서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전체와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인륜적인 법도나 천륜적인 법도와도 인연을 맺어서 창조주의 이념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개개인은 역사와 우주를 대신해서 아버지께 무한한 행복과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책임을 지고 있는 동시에 무한한 생명과 사랑을 갖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책임을 모르고 있다면 본연의 에덴동산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창조의 이상으로서 인간을 통하여 나타났어야 할 본연의 동산은 어떠한 동산이었겠습니까? 그 동산은 하나님이 즐기실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이 즐길 수 있으며 피조만물이 함께 즐길 수 있었던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오늘날 인간들이 너나할것없이 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행복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하는가? 영원한 희락과 영원한 감사를 보장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본연의 에덴동산은 어떠한 동산이었는가? 그 동산은 생명의 동산이었습니다. 단지, 어떠한 시간권 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중심삼고 나타났어야 했던 생명의 동산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동산이 이 땅에 이루어졌다면 인간들은 생명을 가진 존재들로서 하나님의 생명의 은사에 대한 고마움과 영원한 즐거움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본연의 에덴동산은 인간이 모든 생명의 주인의 입장에서 생명의 빛을 나타낼 수 있었던 세계였습니다.
즉, 그 세계에서는 개개인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 영원한 소망의 실체로 나타날 수 있었던 동시에 무한한 가치의 존재들로서 빛을 나타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연의 그 동산은 사랑의 동산인 동시에 평화의 세계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가 화목하며 모두가 하나되는 통일의 세계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본연의 동산을 이루어서 행복과 생명 그리고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영광은 우리의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6천 년 역사노정에 왔다 갔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나은 미(美)의 실체로 나타날 때만 하나님이 기쁨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그러한 영광을 돌려드리기 위해서 그와 같은 미의 실체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미는 어떠한 미입니까? 그것은 웃음과 노래와 춤으로 나타낼 수 있는 미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는 영원한 가치로서의 미입니다. 본연의 에덴동산이 바로 그런 미의 세계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찾기를 원하는 동산은 행복의 동산이며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려드려야 할 세계입니다. 또, 그 세계는 생명을 중심삼은 소망의 세계요, 생명과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가치와 통일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가치가 결합되어 미로 나타나는 세계이며, 모든 개체 개체가 노래와 웃음 그리고 춤으로써 영원한 사랑을 찬양하는 세계인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인간이 움직이는 대로 온 피조물이 함께 동(動)하고 정(靜)하며 화동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창조본연의 세계를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고자 원하셨던 것입니다. (2-243)
천지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한 것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되어 사랑이 넘치게 되었으면 아담은 하나님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사랑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에게 거(居)하실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성경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린도전서 3:16)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이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얼마만큼 좋아하셨느냐 하면 생명을 걸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러면 갈라져 있으면서 좋아하셨느냐? 딱 붙어서 좋아하셨습니다. 어디까지 딱 붙었느냐?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가서 붙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의 속에도 들어가실 수 있었고 해와의 속에도 들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대관절, 아담 해와가 누구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왜 지으셨느냐? 그냥 바라보고 재미를 느끼려고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이 살림살이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처녀 총각이 시집 장가를 가서 아들딸을 낳고 사는 것을 살림살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살림살이를 시작해서 하나님 자신의 족속을 중심삼고 사랑의 동산을 만드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이 세계는 하나님이 살림살이하시는 데 있어서 이용물로서의 정원이고 비품이었습니다. 사탄에게 주시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어떻게 만드셨겠습니까? 정성에 정성을 다해서 만드셨습니다.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는데 그 걸작품을 전부 다 깨뜨려 버리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니고 정성을 들여 만드셨기 때문에 행여나 흠이 갈세라 염려하셨습니다.
정말로 예쁜 아기를 보면 만지고 싶습니다. 만지고 싶지 않은 사람은 목석입니다. 또, 예쁜 아기를 보면 뽀뽀해 주고 싶습니다. 뽀뽀를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가르쳐 줘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히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만큼 좋으냐? 전부 달라붙어서 영원히 떨어지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아담 해와를 보고 쓰다듬어 주셨을 것입니다. 쓰다듬어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뽀뽀도 하셨을 것입니다. (48-200)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보고 얼마나 좋고 기뻤는가
에덴동산에 아담 해와의 둘만 있었으니까 해와는 틀림없이 아담의 궁둥이를 졸졸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또, 그 둔한 아담은 누구를 따라다녔겠느냐? 털석털석 하면서 해와를 따라다녔습니다.해와가 “아담, 여기 와요!” 하면, “그래, 갈게!” 하게 되어 있었지 다른 데로 가게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붙어 다녔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은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옆에서 보고, 아래에서 보고, 사방으로 보면서 빨리 클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어린 아담 해와를 보시던 하나님은 속에서 사랑이 폭발되었습니다.“이야, 이렇게 자식이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완성의 기준을 알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사랑의 체휼이 그렇게 아기자기할 줄은 모르셨습니다. 한살 두살 자라게 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말려 들어가고 몸이 말려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이 있다면 그 정신까지도 전부 말려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사춘기가 되면서부터 서로를 대하면 무엇인지 모르지만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담 해와는 서로를 대해 “야, 나하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줄 알았더니 그 무엇인가 있구나!” 하면서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던 것을 느꼈습니다.
요즘에는 그렇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 두서너 살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들은 걸을 때도살살살 걷고 눈만 깜박거리면서 땅만 보고 다녔습니다. 더벅머리 총각, 멀쑥한 녀석이 지나가면 안 보는 것같이 하면서 언제 봤는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감지가 빨랐습니다. 그것을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청소년 시대의 아담 해와를 보시고 굉장히 좋아하시면서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꾸 커라!”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만들어 놓고 키워나가시던 과정에서 재미를 느끼셨습니다. (130-25)
태초에 아담 해와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타락하기 전 아담 해와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요즘처럼 머리를 깨끗이 하고 색깔을 맞춰 옷을입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담은 수염이 났을 것입니다. 또, 머리는 여자같이 길었을 것입니다.그러니까 오늘날 면도를 하거나 화장을 하고 나서는 우리가 외면적으로는 그들보다 더 낫습니다. 옷을 입고 치장을 하면 근사합니다. 그때 치약으로 이를 닦았겠습니까?
집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 외모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주인이 없으면 그 모든 외적인 물건들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때 아담 해와는 아무리 못났어도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의 웃는 얼굴에는 악기(惡氣)가 없었고 사기를 치기 위한 저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순수한 하나님의 기쁨을 표상했던 얼굴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또, 그들은 보는 것도 자기들의 눈을 통해서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봤을 것이고 그들이 듣는 것, 느끼는 것, 말하는 것 등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했습니다.
그러면 인류 시조가 노래를 했다면 무슨 노래를 했겠느냐? 하나님과 통할 수 있었던 아담 해와의 시대에는 하나님이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노래를 했을 것입니다. 또, 웃기 시작했다면 그렇게 웃는 것이 누구로 인해 시작되었겠어요? 누구를 대해서 웃기 시작했을까요? 틀림없이, 그 웃는 것도 아버지가 되시던 하나님을 대해서 웃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서 춤을 추었다면 그 춤도 하나님을 위해서 추었고, 일을 해도 하나님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실과(實果)를 먹고 물을 마시는 것도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을 잘 때도 아버지와 더불어 자고, 깰 때도 아버지와 더불어 깨고 싶었습니다. 그와 같은 입장에 있었던 아담 해와였습니다. (95-246)
본연의 남자와 여자의 자리
만약에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완성되었다면 우주를 대표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직접 관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었을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그 가정과 피조세계가 연결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권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으면 영계와 육계에 하나님의 사랑의 축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을 중심삼고 센터가 생겼을 것인데, 하나님은 그 센터에 계십니다. 그 축을 중심삼고 아담과 해와가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나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됨과 동시에 모든 존재들을 연결시킬 수 있었던 대표였습니다.
오늘날에도 남자는 뭐냐? 우주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을 수 없는데, 그런 사랑의 중심과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 남자입니다. 남자는 그러한 사랑과 연결되는 주체입니다. 그러면 여자는 뭐냐?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남자 여자의 소망은 뭐냐?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하나되는 것이 그들의 소망입니다. 그렇게 하나되는 각도는 완전히 90도가 되어야 합니다. (134-193)
자연은 아담 해와를 교육할 수 있는 산 교과서
모든 만물은 서로 사랑을 합니다. 동물을 보나, 곤충을 보나, 식물을 보나, 광물세계를 보나 모두 다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상대를 중심삼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날고, 기고 합니다. 아담과해와는 그런 만물세계를 바라보면서 “저들이 뭘 하나?” 하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연은 아담해와를 교육할 수 있었던 박물관이요, 산 교과서였습니다.
아담 해와는 자연과 벗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남자였기 때문에 해와보다 활동 범위가 넓었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동물들이 사는 것을 보고 재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암컷 수컷이 서로 하나되어서 새끼를 낳는 것 등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그런 것들이 다 교육의 재료였습니다. 동산에서 갖가지의 동물들이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제각기 소리치던 것은 상대와 주고받음으로써 이루어졌던 음악, 창조의 이상적인 오케스트라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철없이 그것을 보고 좋아만 했는데, 철이 들면서 알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큼으로써 환경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던 그때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자랄 때까지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이치였습니다.
그런데 동산의 동물들은 전부 다 아담이 가면 아담을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모든 걸 연결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사랑에 연결되기 위해서 사람을 중심하고 따르게 되어 있었던 동산이었습니다.
해와는 아담을 따라다니다가 열 살이 지나서 가슴이 커졌는데 아담한테 “아담, 이거 이상하다.내 가슴이 이렇게 볼록 나온다.”고 얘기했겠습니까? 해와는 동물들이 젖을 먹이는 걸 봤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신체에 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점점 커 가면 서로간에 인력이 강해집니다. 무엇인지 모르게 자꾸 갖다 대고 싶고, 그래서 갖다 대면 이상한 느낌이 듭니다. 아담 해와도 인력이 강한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동물의 수놈 암놈이 만나서 입맞추는 것을 다 봤습니다. 전부 동물세계를 보고 배웠습니다. 자연이 교육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피조세계는 아담 해와가 이상적인 자극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던 소재였습니다.
거기에서 아담 해와는 중심이었습니다. 아담 해와, 남자와 여자의 소질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사람은 같은 뱃속에서 나왔더라도 남자와 여자가 다릅니다. 여자는 나면서부터 고운 것, 귀고리나 목걸이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남자는 기관총 같은 소리가 나고 요란스러운 것을 생각합니다.성격이 반대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가까워지게 하고 하나로 만들 수 있는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해와가 아담을 졸졸졸 따라다니다가 놀랄 장면들이 얼마나 많았겠느냐? 깜짝깜짝 놀랐지만 그래도 좋았습니다. 해와는 아담의 행동이 자기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지만 아담이 참 재미있었고 아담과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해와는 놀랄 적마다 “아이쿠!” 하면서 아담을 붙들었습니다. 그럴 때 전기가 통했습니다. 그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가서 부딪치고 붙들어도 싫지 않고 좋았습니다. 언제든지 여자들은 놀라는 순간에 무엇이든지 붙들고 숨습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그런 행동을 합니다. (134-194)
아담 해와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표시하는 것
그렇게 자라던 아담 해와가 성숙해서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그때까지 아담 해와가 해 왔던 생활의 모든 전통은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어졌는데 결혼해서 부부생활로 들어갈 때는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럴 때 아담 해와의 마음대로 사랑했겠느냐, 하나님 아버지한테 문의하고 사랑했겠느냐? 하나님 아버지가 승낙을 안 했더라도 “우리 마음대로 해야 되겠다.” 했을 것이냐? 아담 해와가 결혼에 대해서 알았을 것인데 틀림없이 곤충이나 새, 혹은 동물들이 짝을 이루어서 사는 걸 보고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알았어도 사랑의 맛은 몰랐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맺어 주시지 않고서는 원칙과 통할 수 있는 사랑의 출발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 관해서도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된다는 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결혼시켜 주시던 석상에서 무슨 교시를 하셨을 것이냐? “너희들,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다.” 하셨겠어요? 그때는 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교시를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교육하려면 교과서가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사랑을 교육하시려면 표준이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을 표준삼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이냐? 틀림없이,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나를 사랑하던 이상 해와를 사랑해라!” 하셨을 것이고,해와에 대해서도 “해와야, 네가 나를 사랑하던 이상 아담을 사랑해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아담 해와에게 사랑하라고 하실 때 “너희들이 서로 사랑할 때 나를 사랑하던 것보다 조금 덜 사랑해라!” 하셨겠어요? 더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그때부터 서로가 하나님을 사랑하던 것보다 더 사랑했다면 하나님이 섭섭해 하셨겠습니까?
예를 들어, 혼자 사는 아줌마한테 아들이 있는데 그 사랑하는 아들을 남편을 사랑하던 것보다 더 사랑해서 쭉 키워 가지고 장가를 보냈습니다. 장가를 보냈는데, 첫날밤에 색시의 방에 들어가는 아들을 볼 때 그 어머니의 마음이 섭섭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물론 섭섭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랑의 중심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담 해와가 둘이서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자꾸거기에 흡수되어 들어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남자와 여자가 진짜 서로를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가운데 영원히 계십니다.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하나님 대신 사랑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랑할 때 하나님 대신 사랑한다는 개념이 여기서 형성됩니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의 생활은 하나님의 생활을 표시합니다. 본래, 남자와 여자가 좋아하면 하나님도 내적으로 좋아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슬퍼하면 하나님도 내적으로 그 슬픔을 같이 느끼실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이요, 남자의 것이요, 여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95-248)
가정을 통한 사랑의 완성
우리들은 형제와 나라는 존재가 있기 전에 나를 낳아 준 부모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부모에게도 형제가 있고 부모가 있습니다. 그렇게 선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의 시조였던 아담과 해와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아담 해와까지 올라가면 그들의 부모는 누구였느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모였다고 하면 자녀의 입장에 있었던 아담 해와는 그 부모와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오는데, 부모의 사랑이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생존해 있는 한 소년 시대, 청년 시대, 장년 시대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습니다.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 성장하게 되면 횡적인 부부의 사랑이 각자에게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부부의 사랑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 그 자녀를 사랑해야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없으면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상이 있어야만 참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끼리는 부모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자라지만 성장해서 결혼을 하여 자녀를 가지게 되면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로 시작하여 한 바퀴를 돌아서 부모로 돌아가 봐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를 낳아 봐야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완전하고 완성된 사람의 표준을 어디서 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모 자신이 성숙한 자리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부모가 횡적으로, 종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면 완성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성숙하여 하나님을 중심삼고 횡적으로 하나되었으면, 즉 이성관계에 있어서 서로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나될 수 있는 곳으로 들어갔으면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사랑이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었으면 하나의 형(型)이 갖추어졌을 것입니다. 그러한 평면적인 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녀를 낳아야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횡적인 관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적인 관계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하나이며, 부모의 사랑은 종적으로 둘 이상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중요하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부부의 사랑은 상대적인 관계를 갖지만 하나이기 때문에 종적인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사랑이 연장된 것입니다. 부모, 부부, 자녀가 종적인 관계의 원칙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완전히 합하면 하나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부부의 관계를 거쳐서 부모가 되면 자녀들도 부모의 사랑과 크기가 같아야 되고 길이도 같아야 됩니다. 그러면 자녀들 사이의 사랑은 어떠해야 되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사랑해야 되느냐?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랑하듯이 형제들도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은 누구로부터 배우느냐 하면 부모로부터 배웁니다. 한 가정에 왜 파탄이 벌어지느냐 하면 사랑이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계속하려면 부모를 중심삼고 부부의 사랑을 밟아야 하고, 그 부모와 부부의 사랑을 이어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 사랑을 이어받기 위한 준비는 형제를 통해서 해야 됩니다. 만약에 누이동생이 있다면 그 동생을 사랑하기를 자기 어머니를 사랑하듯이 해야 됩니다. 여자 형제는 오빠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 아버지를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됩니다. 남자 형제와 여자 형제는 서로서로 부모와 자식지간의 사랑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듯이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어머니가 딸을 사랑하듯이 언니는 동생을 사랑해야 됩니다.
형제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상대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서로 위하는 실체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형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몸을 통해서 나왔으므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쪽씩을 합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무엇으로 묶어야 하느냐? 사랑으로 묶어야 합니다. (66-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