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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우리(훈독본)
날짜: 1973. 7. 29(일)
장소: 한국 전본부교회
<기 도>
http://cafe.daum.net/rainbowKINGDOM/I30s/104
인간이 바라는 최고 욕망의 자리
창조 전을 보면 먼저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말씀을 구상하셨습니다. 그 말씀이라는 것은 이러이러한 실체를 빚어 낼 수 있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런 실체를 빚어 가지고 그 실체와 영원히 하나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최고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신 하나님 앞에 최고의 대상으로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출발 당시부터 하나님과 인간이 따로따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같이 출발했다 하는 자리를 추구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를 두고 볼 때, 이것이 같이 출발했느냐? 아닙니다. 남자가 먼저 태어나고 여자가 나중에 태어났다고 창조원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먼저 출발했고 여자가 나중에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그 절대자와 “같이 출발했다.”고 하는 자리에 서고 싶은 것이 인간의 최고의 욕망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가 같은 자리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지닌 자리는 어떠한 자리냐? 그것은 부자의 관계를 맺는 자리 외에는 없습니다. 부모 앞에 자식이 생겨나게 될 때는 부모가 있음과 동시에 그 자식이 같은 자리, 동참한 자리에서 생명을 지니고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자식의 생명의 결탁이 성립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욕망의 자리, 최고의 희망의 기준은 절대자인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를 맺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생명의 출발도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출발도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한 자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절대자와 더불어 그러한 내적인 인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이런 최고의 욕망을 갖고 절대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것이 왜 우리에게 요구되느냐? 본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같이 출발했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주체이신 하나님, 영원불변한 사랑의 주체이신 하나님 앞에 대상적인 가치를 지니고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영원한 가치적인 존재가 되기를 요구합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세계적인, 천주적인 성공을 바라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영원한 사랑을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그러한 존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우리의 주체요, 우리는 그의 대상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되는 원리적이고 내적인 인연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타락했을망정 그 본성의 작용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가치를 추구하고 그러한 존재성을 갖기를 원하고 그러한 대상권, 그러한 사랑의 기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68-127)
인간에게 제일 귀한 것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은 자기를 자기대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기준에 불합격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최고의 가치적인 존재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제일 귀한 것이 뭐냐? 누구를 막론하고 생명이 제일 귀하다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생명이 귀함과 동시에 무엇이 귀하냐 하면 사랑입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 보면 우리 인간은 가치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또, 인간은 생명을 지니되 절대적인 가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또한 사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절대적이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중심이기 때문에 그 앞에 우리 인간은 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지녀야 합니다. 무한한 생명의 주체와 같이 출발했기 때문에 우리 자신들도 무한한 생명의 가치를 지녀야 됩니다. 또, 그 무한한 사랑의 주체를 생명의 기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중심삼은 생활환경과 생애노정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한 자녀의 인연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간, 그러한 나였습니다.
그러한 내가 타락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지녀야 할 인간이 영생과는 관계없는 유한한 생명을 지닌 자리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 찾아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본연의 여건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길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몰락된 우리를 본연의 가치의 존재로 끌어올리는 길이 신앙길입니다. (68-129)
신앙의 기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무한한 가치적인 대상의 존재로 짓겠다는 신념을 가지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의 대상으로서 이상적인 가치를 지니겠다는 신념을 갖지 못한 인간들이 어떻게 대상적인 입장에서 무한한 신념을 지니고 무한한 가치의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신앙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하느냐? 신앙의 길은 무한한 가치를 중심삼고 나가는 길이기 때문에 신앙의 기준은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이 땅의 무슨 영광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한한 가치의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중심되는 표준을 하나님에게 두고 나가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그 가치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설정해 놓고 그 다음에는 무한한 생명을 그리고 나가는 것입니다. 즉 천국을 목표로 정해 놓고 그 무한한 천국의 이념에 일치될 수 있는 생명의 요인을 생활을 통하여 흡수해 나가자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무한한 생명을 재현시켜서 무한한 이상과의 일치점을 그려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느 때냐?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때, 그때가 우리 타락의 인간이 비로소 무한한 행복의 기원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그때가 인간으로서 타락한 모든 것을 청산짓는 종말시대요, 새로운 출발을 볼 수 있는 이상적인 출발시대입니다. 그 이상적인 행복의 출발은 사랑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류역사는 필시 영원한 가치추구의 노정을 향해 가야 하며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희구하며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의 관계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같이 출발했기 때문에 같은 행복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을 표준으로 해서 인류역사는 흘러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68-130)
역사노정은 무엇을 추구해 나왔는가
역사는 개인의 생활노정을 기록한 것이요, 개인의 현실적인 생활을 찾아 나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상향을 찾아 나가는 데는 반드시 과거를 청산짓고 새로운 이상과 일치될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다시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가치를 중심삼고 요동하지 말아야 됩니다. 절대적인 생명을 지니는 데 있어서는 추호의 어긋남도 없는 자신 있는 자리, 신앙의 기대를 완결 지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무한한 가치와 무한한 생명이 일치된 그 자리가 우리 인생의 역사노정에 있어야 되고, 그 역사노정은 우리 중 어느 개인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지상에서 책임지고 성사시킨 자리가 오늘날 기독교에서 바라는 신부의 자리이며, 이 신부의 자리가 설정되어 사랑의 주체되시는 신랑이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찾아오게 될 때 하나님이 바라시던 일체 이상의 행복의 기원이 비로소 찾아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역사노정은 복귀의 노정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복귀의 노정은 재창조의 길을 따라 나왔습니다. 새로운 인생의 가치와 새로운 생명력을 가지고 인간이 바라는 새로운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부자의 인연으로 하나되는 그 자리를 희망하고 나왔습니다.
이것을 표준으로 하여 오늘날 우리 생활에 부합시키지 않고는 그 목적의 자리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인 가치, 절대적인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희망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영원한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복은 타락한 인간 세상에서는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 영원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 영생의 가치를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그 자리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랑과 신부가 새로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만나는 그 자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상봉하는 자리입니다. (68-131)
인간이 가야 할 최후의 종착점
신랑과 신부라는 자리가 본래의 인간으로서 희망하였던 최고봉이냐? 아닙니다. 신랑과 신부의 자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생명이 출발할 때 부모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였으니까 부모인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야 할 최후의 종착점은 어디냐? 참된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고 우리가 그의 참된 아들딸이 되는 곳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통일교회는 참부모의 이념을 제시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신랑과 신부의 과정을 거쳐서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들과 딸의 자리에 들어가고 하나님을 참된 부모로 모시고 영원한 가치의 일체요, 영원한 생명의 일체요, 영원한 사랑의 일체로 화하여 새로운 재출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 지상에 현현하는 것이 오늘날 복귀도상에서 우리가 가야 할 최후의 종착점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두고 가는 길이 복귀의 노정이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류를 대해 구원섭리해 나온 것도 이러한 목적을 도달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우리는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을 짓기 전의 하나님의 자리를 우리가 다시 한번 회상해 볼 때 하나님은 절대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절대적인 주체이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적인 주체 앞에 절대적인 가치의 대상자로 실현되는 것이다.” 하는 관이 뚜렷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 자신이 “사람은 이렇게 절대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하는 믿음을 가지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홀로 있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대상의 존재로 인간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인연이 맺어진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자녀의 인연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출발되었습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아 출발된 그 생명의 터전 위에 절대적인 이념을 중심삼고 사랑으로 엮어 나가야 하는 것이 자녀의 역사입니다. 사랑으로 엮어지지 않고는 사랑의 세계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이상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68-133)
인간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
하나님은 절대적인 창조의 관을 소유한 절대자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가치의 대상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땅 위의 피조만물,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습니다. 가치로 보면, 상대적인 존재란 하나님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줘 봐야 하나님 혼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대상의 가치적인 존재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가 인간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짓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하나님 자신의 신념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그 신념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 위에 선 신념이어야 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뭐냐? 그것이 원리 원리원칙이에요. 하나님의 신념과 원리가 일치된 자리에서 다시 실체가 일치되는 순간이 창조의 순간입니다. 믿음과 더불어 그 원리를 통할 수 있는 실체를 만들기 위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말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이 나를 닮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 대상의 가치권에 등장시키기 위함입니다. 내 말을 완전히 믿고 완전히 하나되었다 할 때는 그 대상의 가치권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믿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창조위업을 시작할 당시에 완전히 믿었던 그 자리에 내가 다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 다음엔 완전히 알아야 됩니다. 믿고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리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 원리를 중심삼고 완전히 일체된 가운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대상의 일체관이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하나님이 믿던 것과 마찬가지로 믿어야 합니다.
원리를 중심삼고 원리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원리와 하나되는 믿음을 갖고 그 원리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실체를 완성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창조 당시에 하나님의 내적인 모양과 상대적인 우리의 외적인 모양이 서로 입장이 다른 방향에서 일치점을 그리고 나가는 창조하던 하나님과 창조를 받은 우리 인간들의 사정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창조되었다는 그 자체는 본래 하나님을 중심삼고 믿음의 자리를 통과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해서 믿음의 자리를 통과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원리원칙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도 믿음이 있었고, 원리원칙의 내용이 있었으며, 실체가 있었습니다. 그 실체를 통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무한한 대상의 가치적인 자녀가 등장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폭발되는 사랑의 인연을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나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나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도 절대적인 신앙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원리내용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됐다. 하나님의 대상실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대상실체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체로 등장하는 것이다.’라고 확신해야 됩니다. 그리고 ‘나는 영생한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68-134)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
절대적인 신앙 밑에서 원리를 통하여 내 실체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되는 것이요, 영원한 아들이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한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그 가치관의 중심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장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이상세계도, 행복의 세계도, 영원한 세계도, 사랑의 세계도 없는 것입니다. 왜? 모든 행복의 요인,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요건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 자신도 물론 알고 믿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원리의 내용을 통해서 ‘이렇게 돼라!’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리, 실현 가능한 입장에서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실체를 위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실체를 보게 될 때 영원한 생명이 출발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출발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폭발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왜? 대상이 나타나게 되면 사랑은 반드시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있고 대상이 있게 되면 반드시 주고받는 인연은 맺어지게 됩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가 생겨서 하나되는 이치와 마찬가지의 내적인 인연이 창조 당시에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에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태어난 우리 인간은 당시 미숙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라는 성장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성장기간은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훈련기간입니다.
그러면 그 기간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좋아하도록 하나님이 가면 가고, 하나님이 오면 오고 그래야 됩니다. 교육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는 대로 하고, 부모가 아는 대로 알아 가고, 부모가 행동하는 대로 따라 하고, 부모가 좋아하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행복을 꿈꾸고 그 외에 무엇을 행하게 되면 타락권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아까 말한 대로 모든 생명은 전부가 대상적인 입장에서 하나님과 같이 출발했는데, 같이 출발할 수 있는 자리는 부자의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한 가치추구의 대상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느냐? 하나님을 부모로 모시는 자리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재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리적으로 재창조를 해야 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흙덩이로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던 것과 마찬가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되는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원리원칙을 통한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제시함과 더불어 참부모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절대적인 가치의 기준이 참부모의 아들딸,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아담과 해와가 타락할 때 자기들의 멋대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서 관계를 갖고 출발할 수 있는 것은 부자의 인연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깨졌으니, 몰락되었으니 그것을 표준하여 다시 꿰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는 절대적인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의 부모로 모실 수 있는 자리, 새 생명의 기원에 새로이 봉착할 수 있는 그 자리가 타락한 인간이 희구해 나오던 희망봉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생명의 재현이 이루어져야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행복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지상천국이라는 새로운 이상세계의 출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무원리권 내에 떨어진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하냐? 하나님이 부여해 준 절대적인 대상의 가치를 찾아야 합니다. 그 자리가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대상의 자리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68-136)
원리결과주관권은 미래를 이어받기 위한 것
하나님은 절대적인 신앙을 갖고 절대적으로 아는 자리에서 절대적인 실체와 절대적인 심정이 하나되어 출발을 하셨습니다. 때문에 여러분도 절대적인 신앙과 원리를 중심삼고 하나돼야 합니다. 절대적인 원리와 신앙이 하나되는 그 자리에서 ‘절대적으로 된다.’는 신념을 갖고 내 실체를 재현시켜야 됩니다.
또, 그러한 자리에는 사랑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출발도 사랑이요, 과정도 사랑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이상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일체인 것을 알고 올바른 대상의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원리결과주관권을 거쳐서 밤이나 낮이나 어느 때나 하나님은 가만히 있더라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면서 찾아다닐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어느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기간을 두지 않았다면,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사정이 세계형으로 전개되는 후대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런 기간을 안 둘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결과주관권은 미래를 이어받기 위한 것입니다. 소생·장성·완성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미래를 이어받기 위해서입니다.
원리결과주관권을 두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담 해와는 좋아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아담과 해와가 진짜 하나님과 같이 좋아할 수 있는 자리에는 나가지 못합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과 같이 진짜 좋아하는 자리에 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창조하던 자리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던 것과 마찬가지 과정의 내적인 체험을 해야 됩니다. 자녀를 낳아서 길러 보아야 하나님이 어떠한 마음에서 우리를 창조해서 어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야 과거·현재·미래가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미래를 이어받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정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라는 것이 원리결과주관권입니다.
여러분 자신들도 본래는 믿음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본래의 존재요, 원리에 있어서 하나되었던 본래의 존재요, 생명에 있어서도 하나되었던 본래의 존재요, 사랑에 있어서도 하나되었던 본래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타락하여 다 깨졌으니까 재창조의 원칙을 통해서 그 길을 다시 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먼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알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아는 것을 놓고 ‘그렇게 하면 된다.’고 믿는 자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지에서는 완성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 믿기만 하는 데서는 완성이 안 나온다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과 동시에 알고, 앎과 동시에 실천하고, 실천함과 동시에 기뻐해야 됩니다. 실천을 거치지 않고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과정입니다. (68-1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