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우리의 가치 (천일국 훈독경 제9권 7일)

훈독왕 | 20250402072904

천일국 훈독경 제9권 7일

작금의 우리의 가치 
(훈독본) 
날짜 : 1969. 12. 1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작금의 우리의 가치 (천일국 훈독경 제9권 7일)

 

이 시간에는 ‘작금의 우리의 가치’라는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제창한 내용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는 복귀의 운명을 가리기 위해서 싸워 나온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나와서 본연의 인간의 모습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참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가 있을 수 있느냐? 그 참된 모습이 자기 자체에서 빚어지기를 바라고 수많은 종교가 역사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던 종교인들이 현세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과거의 종교가 오늘날의 종교로서 남아질 수 있고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참을 추구해 왔습니다. 참의 인간, 참의 나라, 참의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중심삼고 추구해 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서 남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하냐? 절대적인 신을 중심삼고 추구해 오던 종교이념이 현실에 와서는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이념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의 세계를 추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상적인 사회나 국가 혹은 세계를 추구할 수 없는 단계에 놓여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의 신관, 지금까지의 신앙관, 지금까지의 신앙을 통한 인생관을 가지고는 인류가 바라왔고 수많은 종교가 바라왔던 참의 세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와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종교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두고 볼 때, 우리 개인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개체가 추구하는 참의 나라, 참의 세계는 과연 인간만을 중심삼고 가능할 것이냐? 불가능합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동하는 이런 내용을 제창하고자 한 것이 지금까지 종교의 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서 인간만이 희망의 세계를 모색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종착점에 처해 있는 현실의 자아를 중심삼고 볼 때 새로운 가르침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전체도 이러한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이 시점에 놓여 있는데, 이 시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27-170) 

종교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점

이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맞이한 현시점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러한 현시점의 모든 내용을 타개해 버리고 옛날에 추구했던 하나님의 뜻, 옛날에 도의 길을 개척했던 창시자의 뜻을 현시점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옛날의 그것을 현시대의 생활무대에 전개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종교계의 현실을 두고 본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을 두고 보면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의 여러분이 추구하던 세계, 여러분이 바라보던 인생관, 여러분이 바라보던 우주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을 중심삼은 것이었느냐? 뜻 있는 사람은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걸어 온 길은 기껏해야 대한민국의 백성으로서 충실한 애국자가 되려고 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통일교회의 교리를 알고 있는 현실의 나 자신과 과거의 나를 비교해 보게 될 때 지금의 나 자신이 과거의 나 자신과 얼마나 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면 역사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걸어온 종교인들의 범위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과거의 나는 기껏해야 나 자신을 중심삼고 불행을 염려하여 나왔습니다. 내 부모 형제를 중심삼은 권내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뜻을 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겨우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했댔자 국가의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최고의 생활목표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추구하시거나 종교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점이 어디냐? 나 자신을 중심삼은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념을 성취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만일 개인만의 행복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교라면 인간세상에서 사라져야 됩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들을 지도하는 이념으로밖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니 하나님의 뜻이니 하는 말은 세계성을 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초월하고, 자기를 위주한 울타리를 벗어나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자기 나라만이 제일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사상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상이었다고 할진대, 그 사상은 유대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던 유대교인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 세계로 가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들의 민족만을 공고화시키는 사상에 귀착하려고 했습니다. 민족 제일주의 사상, 세계 만민을 자기 민족 앞에 예속시키고 귀속시키려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 유대교인들의 신앙태도였습니다. (27-174) 

운명의 한계선

그러면 그런 신앙태도를 가졌던 유대 민족 앞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행하여 이루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느냐? 유대교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유대 민족의 기반 위에 세계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뜻과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해야만 만민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이요, 만인간이 고대하던 새로운 종교이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상과 내용을 가지고 왔지만, 그 당시에 예수님을 대하던 유대교인과 이스라엘 민족은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을 넘으라고 했는데, 유대 민족은 산을 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두 세계가 지리멸렬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 문제점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원통한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유대 민족을 중심삼고 판가리했어야 할 역사적인 해결점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역사적인 시발점은 역사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역사과정에서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을 주장하면서 싸움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의 부흥과 승리를 위한 싸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세계의 승리를 위한 싸움은 없었습니다. 현시점에서 부딪치고 있는 좌우의 양쪽도 세계를 위하여 싸우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미국도 그렇고 소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공산주의도 그러하고 민주주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싸운다고 나섰지만 결국에 가서는 국가적인 한계선을 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 한계선을 타파하기 위한 싸움을 전개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희생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가던 도상에는 많은 민족적 시련들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 환경에 있어서 그들은 희생되는 운명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갔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수난의 기간은 짧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한계선이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의 장벽으로 남아져 나왔습니다. (27-176)

세계화의 길을 가야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가 2천 년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 나왔느냐? 주권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백성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땅을 갖지 못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2천 년 역사를 지탱해 나왔느냐? 그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나라가 앞으로 다시 와야 할 최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현실 사회에서 그냥 그대로 정주할 나라가 아니라 새로이 올 그야말로 이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주권,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땅,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백성을 추구해 나왔기 때문에 그 백성과 그 땅과 그 주권이 찾아질 때까지는 남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종교가 된 기독교 앞에 세계적인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서 싸워 나왔느냐? 하나의 기본적인 장벽이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가야 할 도상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교 앞에 그러한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그 장벽을 헤치고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자기 민족을 주장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일개 민족을 위주한 종교를 가지고 세계적인 뜻을 성취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야 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적인 사회제도나 문화 혹은 그 밖의 모든 관습을 전부 다 타파해 버리고 세계인을 중심삼은 사회,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야 됩니다. 거기에 모든 심정을 일체화시키고 생활 전체를 일체화시켜야 합니다. 인생관이면 인생관, 세계관이면 세계관을 일체화시키는 놀음을 단행하지 않고는 종교로서 남아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가 중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됩니다. 민족을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하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역사과정의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현재가 그러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27-178)


오늘날 공산당이 공산당의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화 운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순간에 와서 담벼락에 부딪쳐 가지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공산화 운동이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라면 망합니다. 세계를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 아니고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을 위주한 민주주의는 망합니다. 세계를 위주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세계 인류가 바라는 주체적인 사상, 아무리 외적으로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문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상, 그런 세계적인 사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 주의는 하나님주의입니다. (27-187)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통일교회의 움직임이 안팎으로 점점 문제화되는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반대하던 대한민국이 돌아서서 손을 잡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후원하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는 삼천만 이 민족 앞에 국가 기준까지의 시련고통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지만 이 민족 앞에 할 말이 있는 것은 민족 전부가 나와 같은 길을 가야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가 시련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수십 년 동안 이 민족이 가야 할 시련의 고비를 닦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민족은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민족이 개개인의 시련, 가정의 시련, 종족의 시련, 민족의 시련을 거치지 않고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을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될 때, 이 민족이 지금까지는 배반자의 입장 혹은 반대하던 입장에 섰지만, 하나님 앞에 안기는 인연을 가질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은 그때를 바라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세계로 갑시다. 광명한 희망의 세계로 가야 되겠습니다. 지난날 억울했던 원한의 역사, 고통의 역사, 슬픔의 역사, 비통의 역사, 참혹의 역사를 밟고 희망찬 내일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무한한 가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를 중심삼고 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중심삼고 망해 들어가는 세계, 희망 없는 절망의 세계 앞에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전개시키고 세계화 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통일교회의 무리가 세계화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싸워온 투쟁의 목표였습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았습니다. 그 화살이 박혔던 흉터에는 역사의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거기서 전통의 원천을 마련할 것입니다. (27-195)

나무의 잎이 뿌리를 알 수 없다

행복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용주의를 찾고 있는 미국 사람들 앞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야 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될 때 그들에게 추상적으로 설명해 주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설명해야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저렇게 좋은 집과 링컨 같은 자가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설명해야 납득한다는 것입니다. 행복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집어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영계라는 관념을 집어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실질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면 단어 하나에도 이념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도 풀이해 보면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요, 몸은 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서구의 사람들은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학자가 주역을 연구해 가지고 번역을 했는데 그 서문에 “내가 번역을 하긴 했지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이 책을 번역했다”고 했답니다. 설명의 근거를 잡을래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은 서구 사람들 앞에 가까이 갈래야 가까이 가실 수 없습니다.


나무의 잎은 뿌리를 알 수 없습니다. 잎이 뿌리를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잎밖에 모릅니다. 뿌리가 “야, 잎아! 너는 누구를 닮았어? 뿌리를 닮았지” 한다면 믿겠어요? “내가 잎을 닮았지 뿌리는 왜 닮아? 생김생김이 틀린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잎보다도 뿌리를 더 중요시합니다. 그러니까 극과 극이 지금 열매를 맺었습니다. 지금까지 동양에서는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왔는데, 서구에서는 물질을 중심삼고 나오다 보니까 큰 산덩이를 잃어버리고 원자니 중성자니 하다가 맨 끝에 가서 눈이 멀개져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깨워서 돌이키느냐?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채찍을 가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산당을 중심삼고 채찍질하시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질, 물질” 하면서 물질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니 물질주의에 공포를 느끼게 되어서 “아이쿠, 이젠 물질이 싫다” 하고 부정하는 운동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세계적으로 공산당이 한때 득세하는 것은 그런 것을 채찍질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이 맨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을 사람같이 여겼는 줄 알아요? 그러나 점점 떨어져 내려가니까 너희나 우리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입니다. 비슷비슷합니다. 유엔이라는 기관 안에서는 아무리 큰 미국이나 아프리카의 지극히 작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했댔자 유엔총회에서는 한 표밖에 안 됩니다. 이런 기구가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주체성과 국가의 주체성의 동등권을 취할 수 있는 시대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물질’ 하게 되면 진저리가 나게끔 되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싫어하지만 그 사회주의에 연결된 물질주의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를 나쁘다고 하는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물질을 위주로 하는 주의입니다. 사회주의의 근본철학인 유물사상이라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싫어하지만, 그 원인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싫어하게 만드느냐? 선생님의 미국에 대한 작전이 그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사회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이 나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승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중시키기 위해서 작전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탄이 최대의 노력을 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용하게 끌고 나와 가지고 국민의 3분의 2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미국 사회로 하여금 실용주의 앞에서 눈이 멀개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27-198)

시련과 고통을 도피해 가지 말라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살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14세기 말에 나타난 문예부흥처럼 인본주의 사상을 박차고 신본주의시대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교회가 동양과 서구의 문화권을 연결하는 교량의 사명을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에는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을 대비하여 우리는 주체성을 갖춰 나가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 앞에 전개될 수 있는 모체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활동 체제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옛날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에 잘 먹고 잘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리의 행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세계 문화권을 창설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입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초췌하고 처참했지만 그들의 사상체계가 역사를 지배했고, 후대 사람들의 추모를 받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현실적인 것만 보고서 낙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련과 고통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후대에 영광과 더불어 빛날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힘의 맥박으로 남아집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요, 이것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가치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또, 가치를 세워서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 세계적으로 극복해야 할 난문제들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후대에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그러한 인격자로 만들기 위해서 엄동설한에 맨발이라고 하더라도 무정하게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모든 어려운 환경을 타개시키기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닦아 놓은 모든 기반을 고스란히 상속받으려면 그런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기에서 통일교인으로서의 참된 가치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27-200)


여기에서 작금의 우리의 가치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시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과거의 시련과 고통을 넘어 부활의 가치를 재인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새로운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 가지고 새 시대를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내리는 선생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알고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책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련과 고통을 도피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27-202)*

 

 

 

 천일국 훈독경 제9권 7일, 원문
 
작금의 우리의 가치 
 
날짜 : 1969. 12. 1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이 시간에는 ‘작금의 우리의 가치’라는 내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뜻을 알기 전과 뜻을 알고 난 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을 잘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뜻을 알기 전의 나와 뜻을 알고 난 후의 나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나, 현재의 나, 미래의 나는 다릅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제창한 내용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는 복귀의 운명을 가리기 위해서 싸워 나온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원리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나와서 본연의 인간의 모습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참된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참된 사회와 국가 그리고 세계가 있을 수 있느냐? 그 참된 모습이 자기 자체에서 빚어지기를 바라고 수많은 종교가 역사상에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은 그 종교로 말미암아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러던 종교인들이 현세에 와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습니다. 과거의 종교가 오늘날의 종교로서 남아질 수 있고 미래를 연결시킬 수 있는 내용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실상을 볼 때, 현실에 남아 있는 종교를 과거의 종교로서 청산짓고 새로운 현실의 종교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교는 어떠한 종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 놓여 있는 세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종교가 참을 추구해 왔습니다. 참의 인간, 참의 나라, 참의 세계를 추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중심삼고 추구해 왔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서 남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하냐? 절대적인 신을 중심삼고 추구해 오던 종교이념이 현실에 와서는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이념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참의 세계를 추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이상적인 사회나 국가 혹은 세계를 추구할 수 없는 단계에 놓여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될 때 지금까지의 신관, 지금까지의 신앙관, 지금까지의 신앙을 통한 인생관을 가지고는 인류가 바라왔고 수많은 종교가 바라왔던 참의 세계는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와 사상을 뒷받침하고 있는 종교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두고 볼 때, 우리 개인은 더더욱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개체가 추구하는 참의 나라, 참의 세계는 과연 인간만을 중심삼고 가능할 것이냐? 불가능합니다. 하늘과 인간이 합동하는 이런 내용을 제창하고자 한 것이 지금까지 종교의 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종교를 통해서 인간만이 희망의 세계를 모색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종교가 더듬어 온 길이 틀렸느냐, 아니면 종교 자체가 가야 할 목적과 일치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느냐 하는 문제를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하나님과 지금까지 우리가 믿었던 종교 그리고 금후에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과 종교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종착점에 처해 있는 현실의 자아를 중심삼고 볼 때 새로운 가르침을 어떻게 일으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전체도 이러한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런 기로에 서서 허덕이고 있는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뜻을 지니고 세계를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이 되어 있으며 그런 종교가 되어 있느냐? 또, 그런 뜻을 중심삼고 제창할 수 있는 내 자신이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너무나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앞에 놓은 현실의 이 시점에서 나라는 개인을 다시 한 번 비판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가 제시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또 우리는 통일교회 교인으로서 방금 이야기한 것과 같은 역사적인 책임을 짊어져야 할 이 시점에 놓여 있는데, 이 시대 앞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종교가 제창한 내용을 두고 볼 때 종교는 주로 무엇을 추구해 나왔느냐?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추구해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공고화시켜 내 인격이 완전히 하나님의 인격과 일치된 새로운 변화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개인이면 개인, 종교면 종교가 사회 앞에 책임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이상의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화시키는 문제를 중심삼고 이 땅 위에 나타났다가 쓰러져 갔습니다. (27-170)
 
종교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점
 
이제 역사적인 종말시대를 맞이한 현시점에 있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이러한 현시점의 모든 내용을 타개해 버리고 옛날에 추구했던 하나님의 뜻, 옛날에 도의 길을 개척했던 창시자의 뜻을 현시점에 재현시켜야 합니다. 역사를 초월하여 옛날의 그것을 현시대의 생활무대에 전개시키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이 종교계의 현실을 두고 본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개인을 두고 보면 통일교회에 들어오기 전의 여러분이 추구하던 세계, 여러분이 바라보던 인생관, 여러분이 바라보던 우주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을 중심삼은 것이었느냐? 뜻 있는 사람은 나라를 중심삼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걸어 온 길은 기껏해야 대한민국의 백성으로서 충실한 애국자가 되려고 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 한계선을 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계 만민을 위하는 박애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막연했을 것입니다. 최대한으로 바란 것이 자기 나라가 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상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민족, 자기 씨족, 자기 가정을 위하는 사람밖에 못 되었습니다. 그것도 못 된 사람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 하나를 중심삼아 가지고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맺으며 살아 나왔습니다.
그런 내가 통일교회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통일교회의 교리를 알고 있는 현실의 나 자신과 과거의 나를 비교해 보게 될 때 지금의 나 자신이 과거의 나 자신과 얼마나 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달라진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면 역사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걸어온 종교인들의 범위를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과거의 나는 기껏해야 나 자신을 중심삼고 불행을 염려하여 나왔습니다. 내 부모 형제를 중심삼은 권내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뜻을 품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겨우 나라를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했댔자 국가의 기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최고의 생활목표가 무엇이었느냐 하면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추구하시거나 종교가 추구하는 최후의 목적점이 어디냐? 나 자신을 중심삼은 자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가정이 아닙니다. 가정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념을 성취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만일 개인만의 행복을 발전시키려고 하는 종교라면 인간세상에서 사라져야 됩니다. 그것은 인간 세상에서 자기를 중심삼은 개인들을 지도하는 이념으로밖에 등장할 수 없습니다.
하늘이니 하나님의 뜻이니 하는 말은 세계성을 띤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을 초월하고, 자기를 위주한 울타리를 벗어나라고 강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자기 나라만이 제일이 되어야 한다는 관념을 넘어서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사상이 하나님이 세우신 사상이었다고 할진대, 그 사상은 유대민족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로 갈 수 있는 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던 유대교인들이 어떤 사상을 가졌느냐? 세계로 가는 사상이 아니라 자기들의 민족만을 공고화시키는 사상에 귀착하려고 했습니다. 민족 제일주의 사상, 세계 만민을 자기 민족 앞에 예속시키고 귀속시키려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 유대교인들의 신앙태도였습니다. (27-174)
 
운명의 한계선
 
그러면 그런 신앙태도를 가졌던 유대 민족 앞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행하여 이루려고 했던 것은 무엇이었느냐? 유대교의 이념을 중심삼아 가지고 유대 민족의 기반 위에 세계를 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뜻과 사상을 가지고 세계를 위하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해야만 만민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것이요, 만인간이 고대하던 새로운 종교이념이 될 수 있었던 것이요, 새로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상과 내용을 가지고 왔지만, 그 당시에 예수님을 대하던 유대교인과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했느냐? 국가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폐단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산을 넘으라고 했는데, 유대 민족은 산을 넘지 않겠다고 했으니까 두 세계가 지리멸렬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 문제점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원통한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유대 민족을 중심삼고 판가리했어야 할 역사적인 해결점이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았기에 이러한 역사적인 시발점은 역사과정을 통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선택되는 민족이 있으면 그 민족, 그러한 국가가 있으면 그 국가가 이 운명을 중심삼고 최후의 판결을 해서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국가라는 한계점을 종교인들도 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민족들도 그 한계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역사과정에서 이 땅 위에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을 주장하면서 싸움을 했지만,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나라의 부흥과 승리를 위한 싸움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세계의 승리를 위한 싸움은 없었습니다. 현시점에서 부딪치고 있는 좌우의 양쪽도 세계를 위하여 싸우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미국도 그렇고 소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공산주의도 그러하고 민주주의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여 싸운다고 나섰지만 결국에 가서는 국가적인 한계선을 넘지 못합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들이 자기와 가정, 종족, 민족의 기준을 넘지 못하는 역사적인 운명을 밟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것을 탈피해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운명의 한계선에서 살고 있는 인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한계선을 타파하기 위한 싸움을 전개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희생시켜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가정을 희생시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가정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가정이 잘되고 이스라엘 민족도 구원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안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세계에 있어서는 불가능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하려면 이스라엘 민족은 희생을 감수하고 수난의 길을 감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민족이 될 때 승리적인 이스라엘 나라를 창건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급을 떠나 가나안을 향하여 가던 도상에는 많은 민족적 시련들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적인 입장에서 자기를 위주하고 살던 모든 감정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 환경에 있어서 부딪치던 괴로움을 극복하고 아버지의 뜻을 세우고 그들은 희생되는 운명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세우겠다는 마음을 갖고 나갔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 수난의 기간은 짧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한계선이 언제나 이스라엘 민족 앞에 하나의 장벽으로 남아져 나왔습니다.
민족적인 장벽, 국가적인 장벽이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나라가 추구하던 소망의 세계, 이스라엘 나라가 희망하던 메시아의 이상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이스라엘 민족 앞에 남겨진 장벽과 그 국가 앞에 남겨진 장벽은 재현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운명이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국가를 위주한 이념과 그들의 국가를 위주한 싸움으로 지탱해 나가다가는 기필코 망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은 전부 다 자기를 중심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나라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일대의 행복의 요건을 그 나라 가운데서 찾을 수 없게 될 때는 후퇴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이 지키던 싸움터를 제삼자에게 넘겨주고 자기는 그 자리에서 후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그러한 폐단적인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던 것입니다. (27-176)
 
세계화의 길을 가야
 
이런 점에서 볼 때, 기독교가 2천 년 역사를 어떻게 극복해 나왔느냐? 주권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백성을 갖지 못한 기독교요, 땅을 갖지 못한 기독교가 어떻게 해서 2천 년 역사를 지탱해 나왔느냐? 그것은 기독교가 추구하는 나라가 앞으로 다시 와야 할 최후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현실 사회에서 그냥 그대로 정주할 나라가 아니라 새로이 올 그야말로 이상적인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주권,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땅, 그 나라를 중심삼은 새로운 백성을 추구해 나왔기 때문에 그 백성과 그 땅과 그 주권이 찾아질 때까지는 남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종교가 된 기독교 앞에 세계적인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사랑하고 세계를 위해서 싸워 나왔느냐? 하나의 기본적인 장벽이 오늘날 전세계 기독교가 가야 할 도상에 가로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비단, 기독교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교 앞에 그러한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그 장벽을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것이 현시점에 놓여 있는 종교인들 혹은 종교가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 장벽을 헤치고 넘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자기 민족을 주장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 일개 민족을 위주한 종교를 가지고 세계적인 뜻을 성취하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자기의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야 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적인 사회제도나 문화 혹은 그 밖의 모든 관습을 전부 다 타파해 버리고 세계인을 중심삼은 사회,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수 있는 하나의 세계를 모색해야 됩니다. 거기에 모든 심정을 일체화시키고 생활 전체를 일체화시켜야 합니다. 인생관이면 인생관, 세계관이면 세계관을 일체화시키는 놀음을 단행하지 않고는 종교로서 남아지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가 중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됩니다. 민족을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종교적인 싸움을 전개해야 되겠습니다. 민족을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세계를 위주한 행복의 이념을 찾으려고 하는 통일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역사과정의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현재가 그러한 시점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자기를 위주한 관념이나 자기 가정을 위주한 관념 혹은 자기 국가, 즉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만을 위주한 관념을 가지고는 세계화가 안되는 것입니다. 세계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대한민국 안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됩니다. 통일교회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화할 수 있는 생활적인 기반이 여러분 자체 내에서 얼마나 공고화되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입니다. (27-178)
오늘날 공산당이 공산당의 이념을 중심삼고 세계화 운동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순간에 와서 담벼락에 부딪쳐 가지고 후퇴해 버렸습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공산화 운동이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라면 망합니다. 세계를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 아니고 소련을 위주한 공산화 운동이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을 위주한 민주주의는 망합니다. 세계를 위주한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세계 인류가 바라는 주체적인 사상, 아무리 외적으로 문명이 발달했다고 하더라도 그 문명을 주관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사상, 그런 세계적인 사상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닙니다. 그 주의는 무슨 주의냐? 하나님주의입니다. 우리 통일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통일교회주의가 아닙니다. 통일교회의 간판을 떼어버리고 싶습니다. 한국화된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교회화된 한국이요, 세계화된 통일교회가 아니라 통일교회화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느냐?
여기에는 통일사상을 세계화시킬 수 있는 요원, 주체적인 구성요원을 어떻게 양성해 내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은 세계화의 길을 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가는 도상에는 모진 시련이 부딪쳐 올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등장했던 모든 시련과 미해결된 문제가 오늘날 우리가 가는 길, 세계화 운동을 전개하는 우리 앞에 등장할 것입니다. 그래야 참인 것입니다. (27-187)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통일교회의 움직임이 안팎으로 점점 문제화되는 단계에 들어왔습니다. 반대하던 대한민국이 돌아서서 손을 잡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후원하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는 삼천만 이 민족 앞에 국가 기준까지의 시련고통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이 생길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외로운 사람이요, 불쌍한 사람이지만 이 민족 앞에 할 말이 있는 것은 민족 전부가 나와 같은 길을 가야 된다고 한 것이 아니라 나 하나가 시련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수십 년 동안 이 민족이 가야 할 시련의 고비를 닦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민족은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민족이 개개인의 시련, 가정의 시련, 종족의 시련, 민족의 시련을 거치지 않고 대한민국이 해방을 맞을 수 있는 특권적인 은사를 하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될 때, 이 민족이 지금까지는 배반자의 입장 혹은 반대하던 입장에 섰지만, 하나님 앞에 안기는 인연을 가질 수 있는 민족이 될 것이 아니겠어요? 선생님은 그때를 바라보고 나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가는 길은 전세계에 소문이 나 있습니다. 통일교회가 나쁘다는 소문이 어디든지 나 있다는 것입니다. “좋다. 너희들이 반대할 테면 반대해라. 그렇지만 우리는 갈 것이다” 하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 정부가 통일교회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도 통일교회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이 문제시한다고 해서 민족권 내에서 사라질 통일교회가 아닙니다. 민족을 밟고 올라서서 내가 제시한 그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세계화하는 운동을 하는 데 있어서는 어떠한 민족보다도, 어떠한 단체보다도, 어떠한 국가보다도 강력한 실천을 한다는 것입니다. 맹세코,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회피해 가는 패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을 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스승이라고 추앙하는 이 사나이의 손에는 쇠고랑을 찬 역사가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될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죽음의 한 교차로가 내 앞을 가로막게 될 때 나는 졸장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칼을 뽑으면 나도 뽑을 것입니다. 일대 싸움을 전개할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세계로 갑시다. 광명한 희망의 세계로 가야 되겠습니다. 지난날 억울했던 원한의 역사, 고통의 역사, 슬픔의 역사, 비통의 역사, 참혹의 역사를 밟고 희망찬 내일을 향해서 힘차게 달려갈 수 있는 무한한 가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냐?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를 중심삼고 찾아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 엄청난 역사를 중심삼고 망해 들어가는 세계, 희망 없는 절망의 세계 앞에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전개시키고 세계화 운동을 전개시키기 위해서는 소수의 통일교회의 무리가 세계화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선생님이 지금까지 생애를 걸고 싸워온 투쟁의 목표였습니다. 날아오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았습니다. 그 화살이 박혔던 흉터에는 역사의 반응이 나타날 것입니다. 희망의 역사가 거기서 전통의 원천을 마련할 것입니다. (27-195)
 
나무의 잎이 뿌리를 알 수 없다
 
내가 전번에 미국에 갔을 때 미국 언론계에 종사하던 저명한 매슈 스미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현재 캐나다에 적을 두고 있는데 캐나다와 미국의 언론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문필가입니다. 그 문필가에게 원리강론을 번역해 놓은 것을 좀 봐 달라고 부탁하고 왔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미국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분석하여 현재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대한 것을 쭉 써 왔습니다. 그 사람은 동양사상과 현재 미국의 사상과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실용주의를 찾고 있는 미국 사람들 앞에는 행복이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줘야 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이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게 될 때 그들에게 추상적으로 설명해 주어서는 안됩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설명해야 됩니다. “행복한 사람은 저렇게 좋은 집과 링컨 같은 자가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하는 식으로 설명해야 납득한다는 것입니다. 행복 그 자체만을 가지고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집어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영계라는 관념을 집어넣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실질적인 것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양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보면 단어 하나에도 이념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것도 풀이해 보면 마음은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요, 몸은 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전부 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이것을 서구의 사람들은 이해할 도리가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학자가 주역을 연구해 가지고 번역을 했는데 그 서문에 “내가 번역을 하긴 했지만 나 자신도 잘 모르는 이 책을 번역했다”고 했답니다. 설명의 근거를 잡을래야 잡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하나님은 서구 사람들 앞에 가까이 갈래야 가까이 가실 수 없습니다.
나무의 잎은 뿌리를 알 수 없습니다. 잎이 뿌리를 알 수 있어요? 아무리 알려고 해도 잎밖에 모릅니다. 뿌리가 “야, 잎아! 너는 누구를 닮았어? 뿌리를 닮았지” 한다면 믿겠어요? “내가 잎을 닮았지 뿌리는 왜 닮아? 생김생김이 틀린데”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사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잎보다도 뿌리를 더 중요시합니다. 그러니까 극과 극이 지금 열매를 맺었습니다. 지금까지 동양에서는 사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나왔는데, 서구에서는 물질을 중심삼고 나오다 보니까 큰 산덩이를 잃어버리고 원자니 중성자니 하다가 맨 끝에 가서 눈이 멀개져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깨워서 돌이키느냐? 이것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 채찍을 가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산당을 중심삼고 채찍질하시는 것도 일리가 있습니다. “물질, 물질” 하면서 물질을 중심삼고 모든 것을 들여다보니 물질주의에 공포를 느끼게 되어서 “아이쿠, 이젠 물질이 싫다” 하고 부정하는 운동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세계적으로 공산당이 한때 득세하는 것은 그런 것을 채찍질하기 위해서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미국 사람이 맨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한국 사람들을 사람같이 여겼는 줄 알아요? 그러나 점점 떨어져 내려가니까 너희나 우리나 피장파장이라는 것입니다. 비슷비슷합니다. 유엔이라는 기관 안에서는 아무리 큰 미국이나 아프리카의 지극히 작은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했댔자 유엔총회에서는 한 표밖에 안 됩니다. 이런 기구가 나왔기 때문에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민족의 주체성과 국가의 주체성의 동등권을 취할 수 있는 시대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이 ‘물질’ 하게 되면 진저리가 나게끔 되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사회주의는 싫어하지만 그 사회주의에 연결된 물질주의는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를 나쁘다고 하는데, 사회주의라는 것은 물질을 위주로 하는 주의입니다. 사회주의의 근본철학인 유물사상이라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싫어하지만, 그 원인은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싫어하게 만드느냐? 선생님의 미국에 대한 작전이 그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사회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이론이 나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승공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적중시키기 위해서 작전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탄이 최대의 노력을 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용하게 끌고 나와 가지고 국민의 3분의 2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미국 사회로 하여금 실용주의 앞에서 눈이 멀개지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27-198)
 
시련과 고통을 도피해 가지 말라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 것이냐? 다시 돌아가야 됩니다. 살길은 그 길밖에 없다는 거예요. 살겠다고 허우적거려 봐야 안됩니다. 돌아가야 됩니다. 돌아가야 돼요. 그렇기 때문에 14세기 말에 나타난 문예부흥처럼 인본주의 사상을 박차고 신본주의시대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교회가 동양과 서구의 문화권을 연결하는 교량의 사명을 해야 됩니다. 통일교회에는 그럴 수 있는 내용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 때가 기필코 올 것을 대비하여 우리는 주체성을 갖춰 나가야 합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 앞에 전개될 수 있는 모체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활동 체제를 강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사고방식과 먼 거리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한국백성으로 태어난 것, 동양의 한 국가 체제권 내에 태어난 것이 불행이 아니라 지극한 행복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옛날의 소크라테스와 같은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당시에 잘 먹고 잘살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거리의 행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오늘날의 세계 문화권을 창설한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잘 먹고 잘 입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습은 초췌하고 처참했지만 그들의 사상체계가 역사를 지배했고, 후대 사람들의 추모를 받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현실적인 것만 보고서 낙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련과 고통이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후대에 영광과 더불어 빛날 수 있는 하나의 원천이 되고 힘의 맥박으로 남아집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싫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불행한 사람이요, 이것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지극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가치를 어디에 세울 것이냐? 또, 가치를 세워서 어떻게 살 것이냐? 이런 문제를 놓고 볼 때, 세계적으로 극복해야 할 난문제들을 타개하는 데 있어서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후대에 역사와 더불어 살고 세계와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그러한 인격자로 만들기 위해서 엄동설한에 맨발이라고 하더라도 무정하게 내몰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모든 어려운 환경을 타개시키기 위해서는 무자비하게 내몰아야 됩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닦아 놓은 모든 기반을 고스란히 상속받으려면 그런 탕감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기에서 통일교인으로서의 참된 가치의 모습이 결정됩니다. (27-200)
여기에서 작금의 우리의 가치문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 시련을 피할 것이 아니라 시련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과거의 시련과 고통을 넘어 부활의 가치를 재인식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새로운 제2의 가치를 재인식해 가지고 새 시대를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내리는 선생님의 명령입니다. 그렇게 알고 무한한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책임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련과 고통을 도피해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27-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