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8권 19일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 (훈독본)
날짜 : 1986. 2. 16(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 (천일국 훈독경 제8권 19일)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산다
종교는 마루 되는 가르침입니다. 집으로 말하면 대들보입니다.
그러면 종교에서 가르치는 마루 되는 것은 뭐냐? 절대적인 신, 가장 높고 가장 귀한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교회,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나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가야 하느냐? 물론 인간 자체만으로 갈 수 있는 일상생활의 목표도 있지만, 제일의 목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남자 여자 둘이 만나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야 합니다. 남자 여자가 합하는 데 있어서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돕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돕니다.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중앙점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몸과 마음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머무를 수 있는 중심 핵, 하나님이 떠나실 수 없는 그 하나의 중심 핵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가 비로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어디냐? 그곳은 남자 여자가 합하는 하나의 중앙점인데 너와 내가 하나됨을 자랑할 수 있고 하나됨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조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가 가정의 기반을 닦았다면 그 가정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입니다. (141-12)
인간의 생활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돌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된 자리에서 또 확대해 나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중심을 찾아 하나님과 화합해 나오게 될 때 비로소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차원 높여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을 중심으로 사회를 느껴야 되고, 사회를 느끼고 체험하면서 국가를 체험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체험하고, 세계를 체험하면서 영계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대로의 자기 중심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한 중심을 중심삼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점을 중심으로 원형이 확대되는 것과 같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가야 합니다. 또, 아무리 세계까지 갔다 하더라도 다시 어디를 찾아가야 되느냐?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중심으로 한 우리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의 모델, 즉 공식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하나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 가정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과 화합한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확산되어야 합니다.
확산되면 될수록 소모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그리워집니다.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돌아가게 되면 또다시 그 중심의 사랑과 중심의 인격에 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또 하나되어 다른 의미에서, 더 큰 의미에서 “아,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이러하니 더 큰 곳을 향해서 가야 되겠다” 하면서 확산돼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세계무대에 나가 성공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성공하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141-14)
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고향의 생활환경을 보면 자기가 외지에 나가서 성공한 그 환경보다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정적이었던 자신의 과거가 살아 있습니다. 정을 중심으로 살던 옛날의 그곳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어디에 가서 죽고 싶어하느냐 하면 고향에 가서 죽고 싶어합니다. 외지에 나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하냐? 잊을 수 없는 정서적인 내용이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가 자랄 때 아버지 어머니에게 사랑받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옛날 남편 또는 아내를 만났던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그때가 처음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사랑을 중심으로 엮어진 자연환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것은 귀합니다.
사람이 첫정을 느낄 때가 언제냐? 어머니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랄 때의 여러 가지 사연을 첫정으로 느낍니다.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납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나느냐? 정을 중심으로 살아납니다. 이게 귀합니다. 정적인 것을 강하게 느낄 때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인 관계에서 맺어진 사건이나 인연은 잊을 수 없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옛날의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맞춰질 때는 주체적인, 정서적인 배경이 딱 되어 있습니다. 환경을 정서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이런 인연이 나를 중심으로 가정 전체, 마을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이 성공하여 금의환향해 봐야 거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금의환향해서 그 모든 것을 고향 땅에 심어 놓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인간이 그러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41-17)
남자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그러면 하나님은 정서적인 그 느낌을 어디에서 느끼실 수 있느냐? 하나님도 반드시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141-17)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고 할 때, 그 하나되는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냐? 상대적인 관계에서 비례적인 기준에 의해 가지고 정서적인 양이 결정된다고 하면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고 할 때 그 하나되는 것은 남자 여자가 둘이 맞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의 모체를 중심삼고, 횡적인 주체의 핵을 중심삼아 가지고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춤출 때 가만히 서서 춤추는 사람을 봤어요? 돌지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이 하나되어서 도는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 마음이 하나가 안 돼 가지고는 하나님과 하나되게끔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몸 마음이 하나되어야 남편이 필요하고 여편네가 필요하지요. 그 둘이 하나되어야 색시가 필요하고 신랑이 필요하지, 자기 몸 마음이 하나 안 돼 가지고 필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른 데 두고 다니면 싫어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된 자리를 통해서 가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이상을 논하게 돼 있지 둘로 갈라진 자리에서는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완성적 인격의 주체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 주체를 중심삼은 사랑의 인격으로 하나되기 위해서 여러분도 그걸 닮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과 90각도에서 남자 여자로 합해 가지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141-21)
상대적인 관계
이 큰 우주, 방대한 우주도 반드시 그러한 작용을 합니다. 어떠한 무엇이 합해 가지고 핵이 되어 위성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태양을 중심삼아 가지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고 그 외에 여덟 개의 행성들이 돌면서 하나의 태양계라고 하는 구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몸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거예요. 무엇이에요?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남자 여자가 닮았다는 거예요. 남자는 전부 다 내려다보려고 하고, 여자는 전부 다 올려다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끼리 사는 것을 보면, 큰 남자가 큰 여자를 데리고 사는 법이 없습니다. 큰 남자는 작은 여자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관계입니다. 뚱뚱한 남자는 홀쭉한 여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니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야 됩니다. 둘이서 싸우게 될 때 남자가 뚱뚱하고 여자가 홀쭉하니까 여자가 깔리게 되면, 하나님이 그걸 보시고 “이놈의 자식, 왜 그래” 하시면서 동정하고 싶지요. 그렇게 동정받을 수 있는 우리라야 정서적인 유발점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싸움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싸움도 올바로 하면 발전합니다.
무엇이든지 나쁘거나 좋다는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냐 할 때 하나의 핵이라든가 중앙점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기분 좋을 때, “뭘 중심삼고 기분 좋아” 하면 막연하거든요. “좋기는 좋은데…” 한다구요. 그게 뭐냐 하면 정서적입니다. 그런 정서적인 핵을 중심삼고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141-23)
사랑의 뿌리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행복한 하나님이냐 할 때 어때요? 사랑의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입장의 하나님은 고독한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일지라도 그분의 품에 품긴 고양이새끼를 중심삼고 “내가 고양이를 잘 만들었구나! 내가 귀를 이렇게 만들 때 기분이 참 좋았지! 이놈의 발톱도 쥐새끼를 잡아먹으라고, 네 먹이를 주려고 이렇게 만들어 주었지! 허허, 기분 좋다” 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 좋다는 것은 정서적인 동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 언제나 상대적이어야 됩니다. 높았으면 언제나 높을 수 없다구요. 높으면, 그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려와야만 소유권이 생깁니다. 면적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을 알겠어요?
우리 인간은 뭐냐?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남자 여자가 만났다고 하더라도 남자 모두, 여자 모두는 본래 사랑의 뿌리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있습니다. 그 뿌리에 인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뿌리를 갖지 못한 풀을 부평초라고 하지요? 그러한 것은 언제나 불안한 것입니다.
여자가 다 성숙했으면 남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해도 눈을 감고라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41-26)
더 좋을 수 있는 행복
오늘의 제목이 어제와 오늘입니다. 어제 살던 내가 오늘도 사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때요?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레버런 문을 세워 놓았는데 그 레버런 문을 중심삼고 하나님한테도 어제와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결혼한 부부가 생각할 때, 결혼한 부부를 중심삼고 어제와 오늘이 있지요? 마찬가지라구요. 하나님한테 있어서도 어제와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또, 결혼한 부부에 있어서도 결혼해서 만난 그때부터 어제와 오늘, 남편은 하나지만 어제와 오늘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보다도 오늘이 못해야 되느냐? 그것이 문제예요. 또,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여러분에게 어제와 오늘이 있지요?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의 여러분이 있지요? 옛날에 들어와 30년, 40년이 됐으면 그 길을 출발해 가지고 통일교회라는 무대를 중심삼고 여러분이 현재의 입장에 있고, 그리고 여러분은 반드시 과거를 남기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라는 거울에다가 여러분을 한번 비춰 봐요! 어제의 나는 이랬는데, 오늘의 나는 이렇다 하는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어제는 좋았지만, 오늘은 나쁘다고 하면 불행합니다. 어제는 나빴지만, 오늘이 좋으면 행복이 더하는 것입니다. 더한 행복, 더 좋을 수 있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141-26)
정서적인 인격이 얼마만큼 크냐 하는 것이 문제
이렇게 볼 때, 모든 정서적인 기원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이겁니다. 짐승이나 새들도 어미라면 모든 새끼를 사랑할 줄 압니다. 그걸 인간인 우리가 가르쳐 줬어요?
그 다음에 수놈과 암놈이 때가 되면 참 신기해요. 때가 되면 누가 먼저 발동하느냐 하면 암놈이 발동을 해요. 소로 말하면 암소가 우는 걸 숫놈은 벌써 아는 거예요. 어디에서 소리를 들었으면 벌써 그곳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거지요. 그 암놈이 처음 만나는 숫놈에 대해 자기 할아버지를 만난 것 이상,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귀한 손님을 만난 것 이상, 더 가까운 무엇을 만난 것처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것 누가 그렇게 가까우라고 가르쳐 주었어요? 그게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때에 따라서 컸다가 작아지고 작아졌다가 커지면서 발전하는 자연의 이치에 박자를 맞추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별 수 없다 이거예요, 하나님도 높고 훌륭하다는 것도 전부 다 사랑을 중심삼고 돌게 마련입니다.
선생님도 훌륭하지요? 「예.」 뭐가 훌륭해요, 뭐가? 천지의 모든 것보다 정서적인 세계에 박자를 맞추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폭이 넓고 깊이가 깊고 높이가 높은 것,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정서적인 인격이 얼마만큼 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한 분을 남편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여자들은 너나 할것 없이, 늙으나 젊으나 할 것 없이 다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또, 남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자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못생긴 부인이지만 정서적인 터전의 닻줄을 매 놓은 그 인연을 따라 가지고 좋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41-35)
우주의 근본
그건 누구를 닮았느냐 이거예요.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자체가 누구를 닮았겠느냐 이겁니다. 누구를 닮았겠느냐? 조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제2의 존재입니다. 제1의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근원에 연결된 관계의 결실체로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는 원인적인 뿌리와 통할 수 있는 소질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머니가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의 어머니가 있었으면, 어머니의 실체가 있었으면 창조가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성격 주체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격 주체로 존재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격 존재가 필요하니까 그 어머니격을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만을 상대로 자극을 못 느끼시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거리를 두어 가지고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플러스로서 마이너스적인 상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플러스격 상대형이 아담이요, 마이너스격 상대형이 해와였습니다. 그 둘을 지어 가지고 하나님은 아담 속에 들어가서 해와와 하나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해와는 누구였느냐?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부인이요, 외적으로는 뭐였어요? 아담의 아내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실체화시키신 것이 우리 인류시조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 하게 되면, 어디에서 대답하시느냐 하면 마음에서 “오냐” 하십니다.
아담은 절대 창조주의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아담의 마음에 들어가 아담이 성숙되기를 바라셨고, 하나님 자신이 해와의 마음에 들어가 가지고 해와가 성숙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타락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직계 혈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틀림없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뿌리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고 기도하게 되면 “부자의 관계다” 합니다. 역사이래 비로소 선생님이 나와 가지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모든 것을 밝혀 현시대와 더불어 미래의 세계까지 풀어 가지고 사람이 되돌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명주실의 꾸러미가 제멋대로 엉클어진 것과 같은 것을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푸는 길이라는 것은 둘이 없어요. 단 하나입니다. 단 한 길이지 두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절대 한 길입니다. 그 한 길을 풀지 않고는 절대 인간의 저끄러진 역사의 모든 죄상을 풀고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어요. 본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141-37)*
천일국 훈독경 제8권 19일, 원문
정을 중심한 인연의 세계
날짜 : 1986. 2. 16(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하고 산다
종교는 마루 되는 가르침입니다. 제일 마루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종’은 마루 종(宗) 자고, ‘교’는 가르칠 교(敎) 자입니다. 이 종(宗)은 제일 마루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집으로 말하면 대들보입니다. 집을 구성하는 데 대들보가 없으면 안됩니다. 대들보가 없으면 공간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다 무너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은 반드시 대들보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와 같이 마루, 맨 꼭대기가 되는 것을 가르치는 곳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종교에서 가르치는 마루 되는 것은 뭐냐? 종교는 사람에 대한 것을 가르쳐주는 것을 위주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뜻을 이루거나 사람이 사는 생활적인 관계를 이루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신, 가장 높고 가장 귀한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교회,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나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나와 세계에 대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는 어떻게 가야 하느냐? 물론 인간 자체만으로 갈 수 있는 일상생활의 목표도 있지만, 제일의 목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남자 여자 둘이 만나는데, 어떻게 만나야 하느냐?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만나서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그냥 그대로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 여자가 합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 합하라” 하면 안됩니다.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중심하고 도느냐? 하나님의 지식이나 힘을 중심하고 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하고 돕니다. 하나님 자신도 사랑을 중심으로 해서 돕니다. 우리에게 몸과 마음이 있듯이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중앙점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것이 중심이 돼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상대적인 관계에 있는데, 그것이 하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 중심의 핵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머무를 수 있는 중심 핵, 하나님이 떠나실 수 없는 그 하나의 중심 핵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고착돼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동하실 수 없습니다. 이동하게 되면 중앙점을 잃어버리십니다. 탈선하는 동시에 하나님 자체가 고착할 수 있는 자리를 상실하시게 됩니다. 그 자리를 상실하게 되면 이상적인 안착점 혹은 안식점은 우주 어디에 가더라도 없습니다. 그 점은 둘이 아니라 단 하나입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가 비로소 정착할 수 있는 곳은 어디냐? 동쪽의 끝도 아니요, 서쪽의 끝도 아니요, 남쪽의 끝도 아닙니다. 그곳은 남자 여자가 합하는 하나의 중앙점인데 그 중앙점은 남자의 자리도 아니요, 여자의 자리도 아닙니다. 서로가 자리를 엇바꿔 가면서 너와 내가 하나됨을 자랑할 수 있고 하나됨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을 조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하나님을 중심으로 남자 여자가 가정의 기반을 닦았다면 그 가정은 영원히 행복한 가정입니다. (141-12)
인간의 생활
예를 들면, 그것은 사랑의 큰 말뚝에 닻줄을 달아 맨 배와 같습니다. 사랑의 큰 말뚝에 매놓았기 때문에 아무리 떠돌더라도 그 배는 그 말뚝을 중심으로 돌게 마련입니다. 그 자리는 행복한 자리입니다. 이것은 누가 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영웅적인 남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걸 파괴할 수 없습니다. 약한 자나 강한 자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이것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돌면서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하나된 자리에서 또 확대해 나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중심을 찾아 하나님과 화합해 나오게 될 때 비로소 나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인격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지 못하고서는 완전한 인격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을 그리워하고 인격을 그리워할 수 있는 남성이면 남성, 여성이면 여성으로서 독자적인 사랑을 갖춘 하나님을 대신한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의 인격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차원 높여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생활입니다. 그러면서 가정을 중심으로 사회를 느껴야 되고, 사회를 느끼고 체험하면서 국가를 체험하고,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를 체험하고, 세계를 체험하면서 영계까지 확대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마음대로의 자기 중심한 입장에서가 아니라 반드시 한 중심을 중심삼고 확산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한 점을 중심으로 원형이 확대되는 것과 같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로 가야 합니다. 또, 아무리 세계까지 갔다 하더라도 다시 어디를 찾아가야 되느냐?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환고향해야 됩니다. 자기 고향을 떠난 사람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세계로 가서 돌아 들어올 때 바깥쪽으로 갔으면 돌아올 때는 안쪽으로 돌아 들어와야 합니다. 그렇게 구형의 세계를 향해서 내 자신이 횡적으로 반경을 그려서 또다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를 중심으로 한 우리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개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의 모델, 즉 공식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 하나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 가정도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과 화합한 부모와 자녀를 중심으로 하나되어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확산되어야 하느냐? 사랑은 컸다 작았다 하는 그런 작용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호흡할 때 내쉬는 것과 들이마시는 것이 차이가 있다면 불원한 장래에 이 존재세계에서 사라집니다. 내쉬는 숨과 들이마시는 숨이 균형이 맞아야 됩니다. 그 박자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선상에서 우리의 생명이 유지됩니다.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되어야 하고, 하나되어서는 반드시 확산되어야 됩니다. 확산되면 될수록 어떻게 되느냐? 소모가 벌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리워집니다.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이때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중심점을 통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게 되면 또다시 그 중심의 사랑과 중심의 인격에 접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거기에서 또 하나되어 다른 의미에서, 더 큰 의미에서 “아, 지금까지 경험한 것은 이러하니 더 큰 곳을 향해서 가야 되겠다” 하면서 확산돼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리 세계무대에 나가 성공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하더라도 성공하고 나서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141-14)
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
고향이 별것 아닙니다. 고향에 가도 별것 없습니다. 고향의 생활환경을 보면 자기가 외지에 나가서 성공한 그 환경보다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무엇이 있느냐? 정적이었던 자신의 과거가 살아 있습니다. 정을 중심으로 살던 옛날의 그곳을 잊을 수 없습니다. 타향살이와 고향살이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 정서적인 내용입니다. 정서적인 내용이 다릅니다. 타향에서 아무리 잘살더라도 고향의 깊은 사랑의 내적인 인연을 중심으로 관계가 맺어지면 다릅니다.
환경적인 여건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에 가면 벌써 사람이 다릅니다. 또, 여기 한국과는 환경이 다릅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환경이 반대입니다. 한국에서는 오라고 할 때는 손등을 위로 해서 손짓을 하는데, 미국에서는 손바닥을 위로 해서 손짓합니다. 전부가 반대입니다. 자는 것도 동양 사람은 반듯이 누워 자는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엎드려 잡니다. 많은 부분이 반대입니다.
왜 그렇게 반대로 되어 있느냐? 그래야 모든 것이 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멀리 돌아서 합할 수 있는 상대적인 위치를 취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돌아가서 다시 만나야 되겠기에 생활문화가 다릅니다. 동서양의 출발기준이 다르고, 생활풍습이 다르고, 문화배경이 다르지만 심정을 중심으로 한 역사과정은 반드시 돌아가서 합쳐져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깊은 심정적인 기준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가면 갈수록 어디로 가고 싶으냐? 중앙선을 넘어 점점점 세상 끝에 가면 갈수록 세상의 끝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난 돌아가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어디에 가서 죽고 싶어하느냐 하면 고향에 가서 죽고 싶어합니다. 외지에 나와서 죽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러하냐? 고향에서 잘먹고 잘살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잊을 수 없는 정서적인 내용이 거기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옛날 자기가 자랄 때 아버지 어머니에게 사랑받던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옛날 남편 또는 아내를 만났던 그런 인연이 있습니다. 그때가 처음이기 때문에 그 시절의 사랑을 중심으로 엮어진 자연환경을 잊을 수 없습니다. 처음 것은 귀합니다.
선생님이 잊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덟 살 무렵에 외가에 갔을 때, 외할머니가 삶아주던 고구마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고구마는 본래 일본에서 들어온 것인데 넝쿨 밑 땅속에 열매가 맺힙니다. 외갓집에 가니까 외할머니가 “아이쿠, 우리 손주 왔구나” 하면서 고구마를 캐다가 삶아주는데 참 맛있었습니다. 둘이 먹다가 어떻고 어떻다 하는 말도 있는데 그만큼 맛있었습니다. 한 소쿠리 삶아주던 것을 먹던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처음 먹어 보는 것이었으므로 껍질도 벗기지 않고 그냥 먹기에 바빴습니다. 지금도 어디에 가든지 색다른 걸 먹게 될 때는 그 고구마 먹던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첫맛을 들인 것, 그 처음의 것이 귀합니다.
사람이 첫정을 느낄 때가 언제냐? 어머니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자랄 때의 여러 가지 사연을 첫정으로 느낍니다. 모든 것이 생생히 살아납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살아나느냐? 정을 중심으로 살아납니다. 이게 귀합니다. 지식을 중심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적인 것을 강하게 느낄 때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적인 관계에서 맺어진 사건이나 인연은 잊을 수 없습니다.
고향에 가면 옛날의 정서적인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은 늙었지만, 옛날에는 이랬구만! 철이 없을 때는 이렇게 지냈고, 결혼을 해서 아기 엄마가 되었고, 이제는 할머니가 됐구만”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그 모든 것이 그리워집니다. 고향에 돌아와 손자를 보면 그 손자가 자기를 대신하는 것같이, 즉 “과거에 당신이 이랬소”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보면, 혹은 둘이 좋아하는 부부를 보면 “옛날에 우리가 좋아지내던 것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보여 주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고향에 돌아오면 옛날의 모든 것을 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맞춰질 때는 주체적인, 정서적인 배경이 딱 되어 있습니다. 환경을 정서적으로 수습할 수 있는 이런 인연이 나를 중심으로 가정 전체, 마을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금의환향(錦衣還鄕)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멀리 떠난 사람이 성공하여 금의환향해 봐야 거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10년, 20년, 30년이 지나 나이가 오십이 넘고 육십이 넘어 성공해서 고향에 돌아와 봐야 어머니 아버지가 다 떠났고, 형님 누나도 다 떠나서 아무도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금의환향해서 그 모든 것을 고향 땅에 심어 놓고 싶어합니다.
조국이 좋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선생님이 조국을 찾아오면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어디로 가고 싶으냐? 조국이지만 김포공항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중심지 서울을 찾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울을 지나 평안북도 정주의 산과 바다가 있는 내 고향 집, 그곳을 찾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인간이 그러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41-17)
남자 여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나되어야
그러면 하나님은 정서적인 그 느낌을 어디에서 느끼실 수 있느냐? 여러분 혼자 마음과 몸을 중심삼고 이렇게 있다 할 때 정서적인 것을 느껴요? 혼자는 못 느낀다구요. 그걸 느끼는 데는 새새끼라도 보고, 혹은 꽃이라도 보고 아름답다고 해야지요. 그 꽃 속에 꿀이라도 있어 가지고 벌이나 나비가 와서 그 꿀을 빨아먹는 것을 볼 때, 거기에 정서가 미쳐진다구요. 꽃만 봐 가지고는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상대적인 무엇이 있어서 작동이 벌어져야 비로소 정서가 유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혼자는 정서라는 것이 발동을 안 합니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건 반드시 상대와 관계를 맺어야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워하실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오늘날 기성교회에서 하나님은 거룩한 창조주이고 우리는 속된 피조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고 싶고 관계를 맺고 싶으신 것이 무엇이겠어요? 원숭이에요? 원숭이가 사람으로 되었다고 그러는데, 원숭이와 사람은 40여 가지나 내용이 다르다구요. 그런데도 사람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그래요.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다 그럽니다. 여러분도 그래요? 너희 할아버지는 원숭이같이 생겼다고 하면 듣기 좋아요? “저기 저 녀석이 생기기는 잘생겼는데, 빨리 뛰기는 잘 뛰는데 원숭이같이 잘 뛴다” 그러면 어떻겠어요? 내가 원숭이 띠입니다. 나 원숭이 띠라고 해도 원숭이를 닮았다고 하면 기분이 좋지 않다구요.
이걸 볼 때, 무엇을 닮았느냐 하면 싫든 좋든 “저 녀석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어” 하면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없다구요. 아무리 강도새끼라도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았다고 하면 기분 나빠하지 않습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닮은 것이 자연적인 이치지요. 다른 사람을 닮았다고 하면 싫어하는 거라구요. 안 그래요? 사람은 닮은 소성을 비례적으로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으면 그 기준에 비례하여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141-17)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고 할 때, 그 하나되는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는 것이냐? 상대적인 관계에서 비례적인 기준에 의해 가지고 정서적인 양이 결정된다고 하면 하나님도 사람과 마찬가지입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된다고 할 때 그 하나되는 것은 남자 여자가 둘이 맞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의 모체를 중삼삼고, 횡적인 주체의 핵을 중심삼아 가지고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남자 여자가 그렇잖아요? 남자 여자가 둘이서 만나 가지고 손바닥을 대고 좋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당신 나 좋아” 해서 “좋다” 하면 손바닥을 대고 맞추지 않거든요. 뭘 가지고 맞춰요? 손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상대편의 뒤로 가려고 하지 앞으로 가려고 해요? 앞으로 가려고 그래요? 그래요, 안 그래요? 나는 그렇다고 안다구요. 손은 어디로 가느냐 하면 벌써 상대편으로 갑니다.
그리고 남자 여자가 똑같으면 큰일난다는 거예요. 여자가 작으니까 손을 대면 벌써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몸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움직일 때는 손이 아래로 가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척 손을 대면 몸이 벌써 이렇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동작하기에 편리한 방향을 결정하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여자는 손을 올려서 잡게 되어 있지 내려서 잡게는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를 가만히 보라구요. 여자는 수평선 이하로 손이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절대 수평선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돌겠다는 것입니다. 춤출 때 가만히 서서 춤추는 사람을 봤어요? 돌지요?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가치 있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 있는 것이 뭐냐? 우주에서 제일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거예요. 하나님도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삼고 둘이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이 하나되어서 도는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무질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 마음이 하나가 안 돼 가지고는 하나님과 하나되게끔 안 돼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몸 마음이 하나되어야 남편이 필요하고 여편네가 필요하지요. 그 둘이 하나되어야 색시가 필요하고 신랑이 필요하지, 자기 몸 마음이 하나 안 돼 가지고 필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다른 데 두고 다니면 싫어합니다.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있는데, 그 두 마음이 뭐냐 하면 하나는 몸뚱이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의 마음입니다. 세 마음을 가졌다는 말은 안 하지요? 그런 말 들어 봤어요? “당신은 세 마음을 가진 남자야” 그래요? “여자인 당신은 세 마음을 가진 여자다” 하는 말을 들어 봤어요? 둘이 말할 때, “당신은 한 마음을 가진 남자야” 할 수 있지요. 한 마음을 가진 남자면 위대한 남자입니다. 그러나 “두 마음을 가진 남자야” 할 때는 “저것 저것…” 그러는 것입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두 마음을 가진 것은 하나가 안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된 자리를 통해서 가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이상을 논하게 돼 있지 둘로 갈라진 자리에서는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몸과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의 완성적 인격의 주체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 주체를 중심삼은 사랑의 인격으로 하나되기 위해서 여러분도 그걸 닮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가지고 하나님과 90각도에서 남자 여자로 합해 가지고 서로 주고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141-21)
상대적인 관계
이 큰 우주, 방대한 우주도 반드시 그러한 작용을 합니다. 어떠한 무엇이 합해 가지고 핵이 되어 위성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그렇잖아요? 태양을 중심삼아 가지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고 그 외에 여덟 개의 행성들이 돌면서 하나의 태양계라고 하는 구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몸 마음이 하나된 자리에서 사랑하시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느냐 이거예요. 무엇이에요? 하나님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남자 여자가 닮았어요? 닮았다는 거예요. 남자는 전부 다 내려다보려고 하고, 여자는 전부 다 올려다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처끼리 사는 것을 보면, 큰 남자가 큰 여자를 데리고 사는 법이 없습니다. 안 그래요? 서양의 어디로 가 봐도 그렇습니다. 반비례적입니다. 가끔 그러한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계산착오로 그렇게 되었지 자연법도에 의해서 보게 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큰 남자는 작은 남자….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작은 여자입니다.」 그래, 내가 얘기를 잘못했으면 잘 들어주는 사람이 훌륭한 것이지요.
그렇게 상대적인 관계입니다. 뚱뚱한 남자는 홀쭉한 여자가 필요합니다.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이 다음에 며느리를 얻든가 사위를 얻을 때, 뚱뚱한 남자에게 신부감이 오는데 각시가 더 뚱뚱할 때는 보지도 말라는 거예요. 그건 서로 만난 날부터 싸움을 하는데, 두 뚱뚱이가 싸우게 되면 박자가 안 맞아요. 하나님도 짓궂은 데가 있어서 싸우는 것도 보시고 싶을 거예요. 그래, 두 뚱뚱이가 붙들고 뒹굴고 하는 그 꼴을 어떻게 보시겠어요? 동정할 수가 없다구요. “실컷 싸워라! 또, 싸워라 이놈들! 누가 지나 보자” 이러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야 됩니다. 둘이서 싸우게 될 때 남자가 뚱뚱하고 여자가 홀쭉하니까 여자가 깔리게 되면, 하나님이 그걸 보시고 “이놈의 자식, 왜 그래” 하시면서 동정하고 싶지요. 그렇게 동정받을 수 있는 우리라야 정서적인 유발점이 생깁니다. 뚱뚱이끼리 싸우게 되면, “이 쌍것들, 잘들 해봐라! 죽는가 해봐라”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움하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싸움도 올바로 하면 발전합니다. 대한민국도 북괴가 남침한다고 선전하는데도 발전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싸우면서 선전하면 얼마나 발전하겠어요? 안 그래요? 아, 북괴의 총 소리, 꽝꽝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저놈의 자식들은 전부 다 악당들인데, 우리 선한 패들이 지겠느냐”고 격려하면 얼마나 발전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싸움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음악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할 때 파괴음 같은 것도 있지요? 그 돌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 그거 얼마나 기분 나빠요! 그러나 파괴음, 그게 필요하다구요. 돌과 돌끼리 마주쳐서 나오는 제일 듣기 싫은 소리도 있어야 됩니다. 그건 뭐냐 하면 깊은 골짜기를 연상시킵니다. 얼마나 깊은지 조그만 돌 하나밖에 들어갈 수 없는 그런 골짜기를 연상시키는 것도 필요하다구요. 깊고 높은 산에 참새도 앉을 수 없는 뾰족한 돌 봉우리도 상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걸 중심삼고 다른 음들이 돈다고 생각할 때 조화의 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괴음이라고 다 나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나쁘거나 좋다는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냐 할 때 하나의 핵이라든가 중앙점을 놓고 하는 말입니다. 안 그래요? 여러분이 기분 좋을 때, “뭘 중심삼고 기분 좋아” 하면 막연하거든요. 안 그래요? “뭘 중심삼고 기분 좋아” 하면, “좋기는 좋은데…” 한다구요. 그게 뭐냐 하면 정서적입니다. 그런 정서적인 핵을 중심삼고 기분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141-23)
사랑의 뿌리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행복한 하나님이냐 할 때 어때요? 사랑의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입장의 하나님은 고독한 하나님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일지라도 말이에요. 그분의 품에 품긴 고양이새끼를 중심삼고 “내가 고양이를 잘 만들었구나! 내가 귀를 이렇게 만들 때 기분이 참 좋았지! 이놈의 발톱도 쥐새끼를 잡아먹으라고, 네 먹이를 주려고 이렇게 만들어 주었지! 허허, 기분 좋다” 하시는 거예요. 안 그래요? 사실이 그렇다구요. 그 좋다는 것은 어떠한 동기에 의한 것이냐? 정서적인 동기를 중심삼고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상대는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 인간밖에 없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 자신이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드실 수 없습니다. 왜 그래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까 그 하나님과 똑같은 또 하나의 하나님을 만들어 놓으시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놓으시면 어떻게 되겠어요?
똑같은 하나님이 밥을 먹을 때 같이 밥 먹고, 손질하게 되면 같이 손질하고, 또 일어서게 되면 같이 일어서고, 따라다니면서 말이에요, 하나님이 앉게 되면 같이 앉고 그러면서 억천만년 똑같이 행동하게 되면 살아가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얼마나 기가 막히겠어요! 하루도 안 가서 눈이 뒤집어질 거라구요. 또, 말을 어떻게 해요? 말을 하게 되면 며칠이나 말할 것 같아요? 사흘이나 가겠어요? “저것, 저, 똑같잖아! 죽겠다”고 하실 거라구요.
그러니 언제나 상대적이어야 됩니다. 높았으면 언제나 높을 수 없다구요. 높으면, 그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내려와야만 소유권이 생깁니다. 면적이 생기는 거예요. 이것을 알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꼬불꼬불 가더라도 직선으로 가서 돌아올 수 없는 것보다도 꼬불꼬불 가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외로우신 하나님이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뭐냐?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남자 여자가 만났다고 하더라도 남자 모두, 여자 모두는 본래 사랑의 뿌리인 하나님을 중심삼고 있습니다. 그 뿌리에 인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뿌리를 갖지 못한 풀을 부평초라고 하지요? 그러한 것은 언제나 불안한 것입니다.
부평초라고 하더라도 뿌리가 있으면 아무리 태풍이 불고 아무리 뭐 하더라도 자기가 가는 데만큼 가다가는 다시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걸 범위로 해서 빙빙빙 도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곳으로만 가게 되면, 뿌리가 한 곳으로 치우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 같은 것이 불 때는 동풍도 불고, 서풍, 남풍, 북풍도 부는데 왜 그렇게 불어야 되느냐? 인간이 생각하게 될 때는 언제나 함부로 분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니라구요. 동풍이 불었으면, 서풍이 불어야 곧바로 섭니다. 동풍이 불게 될 때 며칠만 그렇게 불게 되면 뿌리가 동풍에 넘어지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쪽이 길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쪽이 길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걸 그냥 두면 이 풀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렇게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풍이 불어제껴야 된다는 거예요. 서풍이 불어제끼면 같은 뿌리가 됩니다. 남풍이 불어제끼면 북풍이 불고 그러는 게 전부 다 조화를 위해서 그런 놀음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중심점을 세우기 위해서 바람도 그런 놀음놀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고기압이 되었으면, 저기압으로 되지 말라고 해도 되는 거예요. 알겠어요? 여자가 다 성숙했으면 남자를 찾아가지 말라고 해도 눈을 감고라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기분 나빠요? 새벽부터 이런 얘기를 하니까 기분이 나쁘겠지요. 기분 나쁘면 죽어도 좋다구요.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141-26)
더 좋을 수 있는 행복
무엇이든지 꽉 차게 되면 어디로 가야 돼요? 꽉 차게 되면 내려가야 됩니다. 세계의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세계의 골짜기를 메워 주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자연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구, 나 대한민국의 이만한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세계적인 부자가 되어 나를 중심삼고, 내 일족을 중심삼고 잘살겠다” 한다면, 그는 오래 안 가서 욕심에 치여 죽습니다. 대한민국이 뭐 어떻고 어떻다는 그런 말을 남긴 사람들을 가만히 두고 보라는 거예요.
통일교회 문 아무개도 부자입니다. 나보고도 부자라고 하더라구요. 부자라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가 뭐예요? 돈 많은 사람이에요. 나 돈 많다구요. 하지만 지갑에는 한푼도 없습니다. 어저께도 수백만 불을 결재했지만 돈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전부 다 은행에서 왔다갔다합니다. 나는 돈을 한푼도 보지 못하고 수억 불에 해당하는 돈을 쓰고 있다 이거예요.
누구를 위해서 쓰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예요? 내가 깍정이에요. 어머니 생일 때…. 미안합니다, 우리 비밀 이야기를 해서. 역사적인 시대가 온다고 말은 하면서 생일날이 되었는데 예물은 생각도 안 하고, 아이쿠…! 생일이 되었는데 예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거든요. 그거 어머니가 섭섭하겠지요? 선생님이 생각하기는 “예물은 무슨 예물이야” 하는 식입니다. 예물이 아무리 좋더라도 수단방법으로 가짜의 마음을 가지고 예물을 해주는 것보다도 진짜의 마음을 가지고 “예물을 못 해서 미안합니다” 하는 한 마디가 다이아몬드를 주는 것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그러는 것이 더 낫습니다.
예물은 해서 뭘 해요? 어머니에 대해서 예물을 안 해도 좋아요. 생일이 되는 날 깊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한 살을 더 먹는구만! 우리의 갈 길이 바쁘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으로써 하늘 앞에 효도할 수 있는 그런 가정이 되면 하나님이 보고 좋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들 둘이 예물을 주고받고 좋아하면 하나님이 보시고 시기할 것입니다. “이 쌍것들, 나에게 먼저 인사 안 하고 그게 뭐야” 이러시는 거예요. 생각이 다르다구요.
무엇이든지 귀한 것이 생기면 전부 다 갖다 쌓아 두는 것입니다. 쌓아 두었다가 남을 줄 것을 생각하지요. 아이쿠, 우리 아들딸을 위해서 잘 쓰겠다고 내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어떤 때는 10년 전에 없어졌다고 하던 것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10년 전의 것을 그때 쓰지 않아서 지금에 와서는 못 쓰는 것이 있다구요. 그런 것은 “10년 전에 내가 이걸 잊어버렸으면 좋았을 것인데, 이렇게 되었구만” 합니다. 그렇지만 후회는 안 한다 이거예요. 자기 일보다는 전체를 위해서 생각하다가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내가 세계 사람들을 위하고 세계 사람들에게 주고 싶은 나의 심정에 하나님까지도 반할 수 있게 된다면 천지의 모든 물건은 내 궁둥이에 따라오지 말라고 해도 자꾸 따라오는 거예요. 차버려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걸 차게 되면, 이것이 앞에 와서 떨어지는 거예요. 이걸 또 차게 되면 그것보다 더 크게 멀리 가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점령해 간다는 거예요. 차 버리면 말이에요, 뒤에 떨어지는데 가까운 데보다는 더 멀리 떨어져요. 그럴 것 아니에요? 고무줄같이 차게 되면 떨어질 때에는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 다 내 영토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기분 나빠요, 좋아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욕을 먹고 다녀도 기분 좋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목이 무엇인가요? 「어제와 오늘입니다.」 어제와 오늘! 어제 살던 내가 오늘도 사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때요?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레버런 문을 세워 놓았는데 그 레버런 문을 중심삼고 하나님한테도 어제와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여러분도 그렇지 않아요? 결혼한 부부가 생각할 때, 결혼한 부부를 중심삼고 어제와 오늘이 있지요? 마찬가지라구요. 선생님을 만난 하나님한테 있어서도 어제와 오늘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예요. 또, 결혼한 부부에 있어서도 결혼해서 만난 그때부터 어제와 오늘, 남편은 하나지만 어제와 오늘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제보다도 오늘이 못해야 되느냐? 그것이 문제예요. 또,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여러분에게 어제와 오늘이 있지요? 통일교회에 들어올 때의 여러분이 있지요? 옛날에 들어와 30년, 40년이 됐으면 그 길을 출발해 가지고 통일교회라는 무대를 중심삼고 여러분이 현재의 입장에 있고, 그리고 여러분은 반드시 과거를 남기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라는 거울에다가 여러분을 한번 비춰 봐요! 어제의 나는 이랬는데, 오늘의 나는 이렇다 하는 것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만히 누워서 통일교회를 보신다면, 통일교회 이것은 누구를 보고 있느냐? 나를 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라구요.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태어난 나는 어제와 오늘의 역사를 그려 가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전통과 문화배경과 사상적인 흐름을 가진 대한민국에 태어나 가지고 관계를 맺은 나의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 이겁니다. 그것이 어제는 좋았지만, 오늘은 나쁘다고 하면 행복해요? 그럴 때는 불행합니다. 어제는 나빴지만, 오늘이 좋으면 행복이 더하는 것입니다. 더한 행복, 더 좋을 수 있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141-26)
정서적인 인격이 얼마만큼 크냐 하는 것이 문제
이렇게 볼 때, 모든 정서적인 기원이 어디서 나왔겠느냐 이겁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 짐승이나 새들도 어미라면 모든 새끼를 사랑할 줄 압니다. 그걸 인간인 우리가 가르쳐 줬어요? 어디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사랑하지 않고 서로 싸워 물어 잡아먹지…. 그렇지만 전부 다 새끼를 보호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히다구요.
또, 그 다음에 수놈과 암놈이 때가 되면 참 신기해요. 때가 되면 누가 먼저 발동하느냐 하면 암놈이 발동을 해요. 암놈이 발동을 하게 되면 눈이 뒤집어지고 입술이 붓고 모든 부분이 전부 다 붓는 거예요. 소로 말하면 울면 벌써 암놈이 우는 소리인지 숫놈이 우는 소리인지 알아요. 나는 모르는데, 소가 우는 소리는 암놈이나 숫놈이 움메 하는 것이 같은 것 같은데 암소가 우는 걸 숫놈은 벌써 아는 거예요. 어디에서 소리를 들었으면 벌써 그곳을 향해서 쏜살같이 달려가는 거지요. 그러니까 여자 혼자 사는 것도 불행하다구요. 불행하지 뭐. 그렇게 다 좋아하면서 살기 마련이라구요.
그 암놈이 처음 만나는 숫놈에 대해 자기 할아버지를 만난 것 이상, 세상의 누구보다도 더 귀한 손님을 만난 것 이상, 더 가까운 무엇을 만난 것처럼 좋아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만난 숫놈이 뭐가 그렇게 반가울꼬? 그저 입을 이렇게 뒤집어 가지고 이럽니다. 이 공석에서 내가 이런 원맨쇼를 해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이니까 할 수 없다구요.
그것 누가 그렇게 가까우라고 가르쳐 주었어요? 자기 어머니가요? 그때는 자기 어머니도 몰라봐요. 자기 아버지고 뭣이고 다 버리고 혼자 가서 그러고 있다구요. 그게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때에 따라서 컸다가 작아지고 작아졌다가 커지면서 발전하는 자연의 이치에 박자를 맞추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박자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별수없다 이거예요, 하나님도. 노아 할아버지가 점잖고 그랬겠지만, 그 할아버지도 자기 할머니에 대해서는 별수없었지요. 할머니가 “아이구, 당신 나 좀 도와주소” 하면…. 그네들도 뭐 이렇게 어리광도 하고 다 그랬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자기 집안의 종가댁 할아버지는 세도가 당당하지만 그 할머니에 대해서는 세도가 당당하지 않거든요. 그건 너와 나의 같은 박자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높고 훌륭하다는 것도 전부 다 사랑을 중심삼고 돌게 마련입니다.
선생님도 훌륭하지요? 유명하지요? 선생님이 훌륭해요? 「예.」 뭐가 훌륭해요, 뭐가? 선생님의 눈이 훌륭해요? 여러분의 눈보다 작다구요. 훌륭한 것이 없다구요. 아무것도 없어요. 뭣이 훌륭해요? 문제는 그것이에요. 천지의 모든 것보다 정서적인 세계에 박자를 맞추는 데 있어서 누구보다도 폭이 넓고 깊이가 깊고 높이가 높은 것, 그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은 하나님의 사정을 알고, 역사의 사정을 알고, 세계의 모든 사정을 통하고, “미래에 인간의 사정은 이럴 것이다” 하는 것을 예상하고 그것을 그려 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이 다르지 다른 면에 다른 것이 없다는 거예요. 학식이 높다고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돈이 많다고 자랑할 것이 못 돼요. 그 사람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정서적인 인격이 얼마만큼 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한 분을 남편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여자라는 동물은 너나 할것 없이, 늙으나 젊으나 할것 없이 다 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또, 남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남자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못생긴 부인이지만 정서적인 터전의 닻줄을 매 놓은 그 인연을 따라 가지고 좋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 그렇게 돼 있지 않아요? 안 그래요? (141-35)
우주의 근본
그건 누구를 닮았느냐 이거예요. 누구를 닮았느냐?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뿌리예요, 뿌리. 보이지 않는 뿌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전부 다 이 줄기를 통해서, 즉 조상을 통해서 가지와 같고 잎처럼 돼 있다구요. 그 잎 가운데는 줄기도 있는 것이요, 가지도 있는 것이요, 뿌리도 있는 것입니다. 요즘에 그렇잖아요? 식물의 세포를 번식시키는 시대에 왔지요? 이 세포 하나를 따 내 가지고 유리관 같은 데 심어 놓으면 말이에요, 거기에서 자라는 거예요. 자라는데, 그 세포 하나에서 꽃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꽃이 나오는데 색깔을 어디에서 보급받느냐? 씨가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게 될 때. 우리 인간 자체가 누구를 닮았겠느냐 이겁니다. 누구를 닮았겠느냐? 조상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적인 존재가 아니라 결과적인 존재입니다. 제2의 존재입니다. 제1의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는 상대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근원에서 빚어진 결과적인 존재라는 거예요. 근원 자체가 뿌리가 되어 있어 가지고 우리는 그 근원에 연결된 관계의 결실체로서 태어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자신에게는 원인적인 뿌리와 통할 수 있는 소질이 있습니다. 그건 뭐냐? 우리 인간이 누구를 닮았느냐 하면, 식물의 세포가 씨를 닮은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어머니가 있어요, 없어요? 하나님의 어머니가 있었으면, 어머니의 실체가 있었으면 창조가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성격 주체입니다. 이런 것을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알고 결론지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성성상의 주체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격 주체로 존재하신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머니격 존재가 필요하니까 그 어머니격을 창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은 무엇이었느냐? 무형의 신으로 계시는 하나님은 이 우주만을 상대로 자극을 못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자체가 아무리 자극을 해도 무형의 실체로는 감동이 없다구요. 같은 것이니까, 같아서 도니까 자극이 안 온다는 거예요. 그런데 서로 상충된 것, 더운물과 찬물이 합하면 폭발하지요? 그런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대적인 거리를 두어 가지고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플러스로서 마이너스적인 상대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둘이 있는데 플러스격 상대형이 아담이요, 마이너스격 상대형이 해와였습니다. 그 둘을 지어 가지고 하나님은 어디에 가 있으려고 하셨느냐 하면 아담 속에 들어가려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 속에 들어가서 해와와 하나되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해와는 누구였느냐?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부인이요, 외적으로는 뭐였어요? 아담의 아내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셨느냐?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실체화시키신 것이 우리 인류시조였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영적인 세계를 느끼게 되면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게 되면, 어디에서 대답하시느냐 하면 마음에서 “오냐” 하십니다. 그런 체험을 해봤어요? 그런 경지에 못 갔으니까 그렇지 마음보고 물어 보면 다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누구였느냐? 아담은 절대 창조주의 몸이었습니다. 몸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무형의 실체로는 실체 자극의 세계를 대할 수 없어요. 인간 자체가 무형으로 되었으면 다른 것을 대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아담의 마음에 들어가 아담이 성숙되기를 바라셨고, 하나님 자신이 해와의 마음에 들어가 가지고 해와가 성숙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이 성숙되기를 바라던 그때에 타락한 거라구요. 타락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직계 혈통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틀림없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뿌리가 돼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뿌리예요? 하나님이 사랑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 하고 기도하게 되면, 답은 간단합니다. “부자의 관계다” 합니다. 그러면 부자의 관계가 뭐냐? 그걸 해석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걸 풀어서 맞춰야 된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수많은 영통인들이 그 세계를 몰랐습니다.
역사이래 비로소 선생님이 나와 가지고 그것을 체계화해서 모든 것을 밝혀 현시대와 더불어 미래의 세계까지 풀어 가지고 사람이 되돌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명주실의 꾸러미가 제멋대로 엉클어진 것과 같은 것을 풀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푸는 길이라는 것은 둘이 없어요. 단 하나입니다. 단 한 길이지 두 길이 아니라는 거예요. 절대 한 길입니다. 그 한 길을 풀지 않고는 절대 인간의 저끄러진 역사의 모든 죄상을 풀고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본연의 사랑의 자리에 돌아갈 수 없어요. 본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14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