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2일)

훈독왕 | 20220426084437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2일

뿌리를 찾아서 (훈독본)

날짜 : 1986. 5. 4(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뿌리를 찾아서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2일)

 

나라는 한 존재는 뿌리가 되는 근원의 한 열매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은 ‘뿌리를 찾아서’입니다. 이 우주에는 만물이 있고, 사람이 있고,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것으로는 천주(天宙)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근원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그 과정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원이자 뿌리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나 하나에는 물질이 들어와 있고 영(靈)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선생님은 “우리 인간은 3대 부모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만물이 우리를 낳아 준 부모입니다. 그 다음엔 우리 부모가 우리를 낳아 줬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3대 부모를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볼 때, ‘아무개’ 하면 구조적인 그 인간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적인 것 가운데는 역사성이 들어 있고, 자기의 부모가 되는 조상이 깃들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보면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의 깊이를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양심이 얼마나 깊으냐 할 때, 이것이 무한히 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양심이 얕다면 무한히 얕습니다. 무한히 얕은 것 같으면서도 무한한 깊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째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근원이 무한히 깊은 근원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갖고 있고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몸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았고 만물로부터 재료를 공급받아 가지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는 이 자체는 나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방대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나무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를 통해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잎사귀를 통해 탄소동화작용, 광합성작용을 해서 엽록소를 보충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 잎은 전체를 대표해서 살고 있습니다. 가지도 마찬가지이고, 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는 그와 같이 연체(聯體)공동의 생명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나라는 한 존재는 뿌리가 되는 근원의 한 열매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 존재들의 뿌리를 대표한 하나의 결실체다 이겁니다. 또, 평면적으로 보면 모든 존재 양식의 종합체로서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145-169)

인간의 뿌리

그런데 오늘날 세계를 보면, 과연 인간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거예요. 인간의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에는 인간의 뿌리를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도 뿌리를 더듬어 나가야 됩니다. 뿌리 가운데는 나쁜 뿌리가 있고 좋은 뿌리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이 있다면 그 조상이 선한 조상이냐, 나쁜 조상이냐 이거예요. 종교적으로 볼 때 인간의 시조가 타락했다고 한다면 우리 조상은 나쁜 조상이고, 그렇게 나쁜 조상이라면 꼬부라진 것이다 이거예요. 어떤 선을 중심삼고 표준적인 형에 일치되지 못하고 반대되는 노선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나무는 어디까지나 태양 빛을 따라 곧게 자라려고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무가 꼬부라졌다가도 왔다갔다하면서 그대로 잡아끄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뿌리는 모르지만, 그 근원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의 양심은 식물이 태양 빛을 생명력으로 흡수하기를 바라듯이 선을 추구하고 좋은 걸 추구하는 것입니다.

나무의 순이 그 뿌리와 수직선상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순을 중심삼고 뿌리가 직선상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동쪽의 가지도 정상적인 가지요, 남쪽의 가지 혹은 북쪽이나 서쪽의 가지도 정상적인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순과 뿌리가 곧게 자랄 수 있게끔 영양 보급에 필요한 환경적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쪽 가지나 서쪽 가지나 남쪽 가지가 아무리 뻗었다고 하더라도, 순이 바르면 정당한 존재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순이 찌그러졌다고 할 때는 아무리 동서남북으로 가지가 뻗었다고 하더라도 효용가치가 없습니다. (145-172)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면 인간조상 아담 해와를 두고 볼 때, 아담 해와는 어디서 왔느냐? 그들의 자의에 의해서 출생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인류의 조상은 둘일 수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하나인 그 조상은 어디에 근거했느냐? 하나의 하나님에 근거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처음에 생겨나기 위해서는 나보다도 나을 수 있는 동기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진화론을 말하는데 맹목적인 진화나 발전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 논리의 형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맹목적이거나 우연적인 출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 가치의 기준은 무한한 확대 세계에서도 그 기준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맹목적인 우연한 자리에서 형성될 수 있었느냐?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가 아무리 날고 뛰고 발전하고 했댔자 그것은 그 동기가 나타내는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 동기를 넘어선 오늘의 나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내 존재라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자리의 존재성을 지녔지 진화적 과정의 연결적 단계를 달리하는 데 기인해서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45-174)

나는 이 우주의 근원에서부터 과정을 지나 현재까지의 전체를 종합한 하나의 표시체입니다. 모든 우주의 요소들을 가진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나는 우주를 축소시킨 하나의 핵과 같은 박물관, 생명력을 지닌 모든 요소들을 축소시킨 하나의 박물관입니다. 세포가 아주 작지만, 거기에는 전체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관련성에서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나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만물도 주관할 수 있습니다. (145-176)

인간의 본성

그러면 그 주관의 본질이 뭐냐? 본질만 들고 나가게 될 때는 우주주관(宇宙主管)도 가능합니다. 주관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내 하나의 생명적인 요소가 완전히 주체 앞에 대상적인 가치를 지니게 될 때 그 대상의 가치는 주체의 가치에 해당합니다. 그 대상의 가치는 원인과 대등한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몸 앞에 주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몸은 마음 앞에 대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둘이 합해 가지고 나라는 존재가 구성된 것입니다. 우주는 이와 같은 연관관계가 맺어져 있음과 동시에 전후의 관계, 내외의 관계, 좌우의 관계, 상하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십 억 가운데 하나로서의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 수십 억을 다 부정하고 자기를 긍정하려고 합니다. 어떤 본질적이고 주체적인 성품이 있다면 그 본성의 성품은 절대적인 동시에 그렇게 절대적인 자리에 대해서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될 때는 그 상대적인 존재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은 인류 전체를 대표한 자리에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뿌리의 기원에서부터 순 중에도 맨 높은 자리까지 가려고 합니다. 한 인간을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깊은 뿌리를 원하고 있고 제일 높은 순의 가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통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이 역사과정에서 지녀 온 본성이 아니냐 이겁니다. 


아무리 조그만 여자로 태어났더라도 될 수 있으면 “아, 여자 중의 최고다. 우리 어머니는 미인 조상이다” 이래 가지고 전체의 대표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낮은 것을 싫어합니다. 높은 것, 깊은 것, 넓은 것, 긴 것,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갖겠다는 것은 많은 것의 중심이 될 수 있고 많은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45-177)

우주의 이상적 형태

우리가 느끼고 보는 모든 것의 기원이자 뿌리가 뭐냐? 뿌리는 수평관계와 수직관계입니다. 그 평형과 수직이 겸해서는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원만한 원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주의 공기마저도 원형을 품으려고 하지 각도를 품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원형을 품을 수 있게끔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이상형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소모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원형일수록, 둥글수록 오래가는 법입니다. 둥글지 않은 것은 돌면 돌수록 마찰에 의해서 깎이든가 소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원만한 것을 바랍니다. 원만한 것은 납작한 것이 아니라 구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도 둥글어야 됩니다. 모든 세포도 그래야 됩니다. 원자(原子)도 전부 둥근 것입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평형 기준과 수직 기준을 통한 관계에 있어서 원만한 구조의 형태를 표상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둥근 구형을 닮게 마련이다 이겁니다. 

 

우리에게 수평적 대상이 누구냐? 남자에게 있어서는 누가 되겠어요? 남자 앞에 여자가 있으면 직선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합니다. 그게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생명력보다 더 강합니다. 남자 여자의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적인 대상의 기준이 누구냐 하면, 남자 앞에는 여자임에 틀림이 없고 여자 앞에는 남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남자는 키가 크고, 몸뚱이도 울툭불툭하고, 털이 나고 그렇습니다. 여자를 보게 되면 키도 상대적으로 작고 손댈 수 있는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사랑의 힘만은 평등합니다. 요즈음 여자들이 남녀 평등권을 말하는데, 그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145-184)

사랑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질

남자 여자를 두고 볼 때, 평행선의 뿌리를 찾아보게 되면 사랑을 중심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수직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수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횡적으로 잡으면, 부자(父子)의 관계는 수직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수직은 영원한 것이지만, 상대적인 관계는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수직은 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천리(天理)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종적인 기준인 아들을 먼저 지으셔야 했습니다. 종적인 기준을 지어야 횡적인 기준을 정하실 수 있었습니다. 종적인 기준만 세우면 횡적인 기준은 돌 수 있었습니다. “왜 남자부터 만들었느냐?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아닙니다. 수직적인 개념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이상적인 목적의 개념을 먼저 세워 놓고 창조적 개념을 투입하신 것입니다.


창조할 때 그 근원의 기준이 사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또, 부모는 자식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걸 떠날 수 없습니다. (145-188)


부모의 사랑은 수직적인 관계에 있어서 뿌리가 됩니다. 자연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그러한 상하관계인 부자의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90각도로 그릴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가 부부의 관계입니다. 무엇이 자연적으로 수직을 만들 수 있고, 무엇이 자연적으로 횡적인 90각도를 만들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랑만이 가능하지 돈이나 지식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대하게 될 때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횡적인 남녀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면 부모의 사랑에서 떠납니다. 부모의 사랑이 남녀의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포가 분열되어 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분열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도 수평선을 만들어 90각도의 원만한 조화가 이루어져 하나로 영원히 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주체적인 근원과 영원한 횡적인 근원이 사랑에 근거했기 때문에 사랑의 근원이 영원한 것이니까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도는 것이 이상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남자나 여자가 왜 태어났느냐? 영원한 사랑이 그리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게 뿌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렇게 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관계와 횡적인 관계에 있어서 영원히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주고 잘 받아야 됩니다. 남자 여자가 잘 주고 잘 받는 것은 전체의 원만한 가치를 형성시키는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투입하느냐? 성경에 보게 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했습니다. 마음과 목숨 그리고 뜻은 근원적인 것입니다. 맨 근원적인 본질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근원적인 것, 본질의 근원이 뭐냐 이거예요. 종횡으로 엮을 수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질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본질로 세워 놓고 지으신 것입니다. 

 

꽃이 왜 피며 변화적인 색깔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번식의 요소가 있고 발전의 요소가 있습니다. 사랑을 빼면 발전이 없습니다. (145-190)

3대 부모와 나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3대 존재세계의 사랑을 통합하고 화합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3대 부모가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만물은 제3의 부모입니다. 여러분 몸에 어머니 아버지가 낳아 줄 때의 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낳을 때 조그맣게 나왔지요? 나온 다음에는 어머니의 젖을 통해 만물의 원소를 보급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신을 키워 준 것은 만물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제3의 부모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물도 사랑이라는 인연을 중심삼고 공급할 때는 인간의 몸뚱이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을 무엇으로 세워요? 오직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중심삼고 만물이 제3의 부모가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2의 부모는 누구예요? 제2부모는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 제1의 부모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핵 중의 핵, 전자를 몇 천만배로 축소시킨 핵과 같은 존재, 전체를 움직이고 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제1부모인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요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춘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뿌리를 가지고 자라는 것입니다.


모든 전부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생활은 사랑의 생활 외에는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늙은 할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을 때보다도 손자를 낳았을 때 더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렇습니다. 아담 해와를 지었을 때보다도 손자를 더 바라시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자를 못 보셨습니다. 여기에 3단계라는 지극히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역사에서 둘째가 문제가 됐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둘째, 노아가정에 있어서 둘째, 야곱가정에 있어서 둘째가 문제된 것입니다. 사탄은 둘째를 노립니다. 왜냐하면 중앙선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앙선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적인 내용을 희미하게 약화시키기 위한 놀음을 사탄이 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반대가 되는 길만 확장시켜 놓으면 영원히 사탄 세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알알이 전부 다 갈라놓습니다. (145-192)

우주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순과 같은 자리에 서야

오늘은 뿌리를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뿌리가 뭐예요? 내 육신의 뿌리는 만물이고, 이 골육의 뿌리는 어머니 아버지고, 우리의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수천 년, 수만 년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전통을 묶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창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만약에 사랑의 논리를 세우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동작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창조를 사랑 때문에 하셨다는 논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게 근원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섭리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랑은 강제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리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의 두 남녀를 누가 결혼시켰겠어요?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이 결혼시켰다면 논리적인 기준에 맞았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멋대로 결혼할 수 있어요? 사랑은 반드시 부자의 관계를 통하여 주체의 사랑인 수직의 사랑이 성립된 후에 횡적인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과 뿌리를 여러분이 알고 그 뿌리와 근원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뿌리와 순이 있지만, 가지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사랑의 특권이 있는 이 뿌리를 앎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그렇게 살면 여러분의 생활이 얼마나 윤택하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사랑의 근원과 뿌리를 알고 이 우주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순과 같은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래서 똑바로 뻗어야 되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사랑의 길이요, 사랑의 진리요, 사랑의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수 없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145-201)

사랑의 다리

선생님이 전통적인 기원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 뭐냐 하면 보다 위하겠다는 자리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핍박도 많이 받았지만,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지금까지 생애를 지내다 보니까 이제는 세계에 드러나고 세계의 나무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곧게 자란 나무와 같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이거예요. 뿌리가 이렇게 된 것을 아시고, 오늘의 이 말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생활을 통해서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 전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민족,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종족,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가정,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내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사다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를 위하여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성취를 온 우주에 연결시키고 선생님의 소망성취를 영계에 연결시켜서 하나님을 뿌리로 해 가지고 여러분이 순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바른 나무와 같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이러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45-203)*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2일, 원문

뿌리를 찾아서 

날짜 : 1986. 5. 4(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나라는 한 존재는 뿌리가 되는 근원의 한 열매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은 ‘뿌리를 찾아서’입니다. 이 우주에는 만물이 있고, 사람이 있고,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것으로는 천주(天宙)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천주의 기원이자 뿌리는 무엇이겠느냐? 이것은 철학사상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혹은 종교인들이 탐구하는 하나의 본원지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근원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 그 과정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원이자 뿌리가 어떻게 돼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라는 것을 가만히 보면, 나 하나에는 물질이 들어와 있고 영(靈)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선생님은 “우리 인간은 3대 부모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만물이 우리를 낳아 준 부모입니다. 그 다음엔 우리 부모가 우리를 낳아 줬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3대 부모를 갖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볼 때, ‘아무개’ 하면 구조적인 그 인간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조적인 것 가운데는 역사성이 들어 있고, 자기의 부모가 되는 조상이 깃들어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가만히 보면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의 깊이를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양심이 얼마나 깊으냐 할 때, 이것이 무한히 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 양심이 얕다면 무한히 얕습니다. 무한히 얕은 것 같으면서도 무한한 깊이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어째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근원이 무한히 깊은 근원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깊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마음을 갖고 있고 몸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몸은 부모로부터 이어받았고 만물로부터 재료를 공급받아 가지고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는 이 자체는 나 하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레버런 문’ 하면 레버런 문 자체가 태어난 그날부터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성은 지극히 오래된 것입니다. 지극히 방대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무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그 나무는 뿌리, 줄기, 가지, 잎사귀를 통해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잎사귀를 통해 탄소동화작용, 광합성작용을 해서 엽록소를 보충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그 잎은 잎 자체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전체를 대표해서 살고 있습니다. 가지도 마찬가지이고, 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하에 뻗어 있는 가지와 뿌리 그리고 잎들을 대신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그와 같이 연체(聯體)로 되어 있습니다. 공동의 생명체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눈’ 하면, 그 눈의 역사는 깊다는 거예요. 인간에게도 눈이 있지만 동물세계에도 다 눈이 있습니다. 그 눈의 역사는 공통된 것입니다. 깊은 근원에 가서는 다 연관돼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지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별적으로 나눠진 것 같지만, 그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찾아 들어갈수록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어느 것 하나도 빼낼 수 없는 공동의 운명권에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그렇게 볼 때 나라는 한 존재는 뿌리가 되는 근원의 한 열매로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우주 존재들의 뿌리를 대표한 하나의 결실체다 이겁니다. 또, 평면적으로 보면 모든 존재 양식의 종합체로서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이 나입니다. (145-169)

인간의 뿌리

그런데 오늘날 세계를 보면, 과연 인간 세계가 어디로 가고 있느냐 이거예요. 인간의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 이걸 모르고 있습니다. 뿌리가 동에서 뻗었는지, 서에서 뻗었는지, 남에서 뻗었는지, 그렇지 않으면 북에서 뻗었는지 모릅니다. 그 뿌리의 방향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뿌리가 어떻게 돼 있느냐? 그 뿌리가 바른 뿌리냐, 꼬부라진 뿌리냐? 이게 문제입니다. 그리고 줄기 자체가 자라 나가는 데 있어서 곧게 자라고 있느냐, 제멋대로 자라고 있느냐? 아무리 곧은 뿌리를 갖고 줄기가 바르게 자란다고 해도 그 순까지도 곧게 자라느냐 이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세계에는 인간의 뿌리를 찾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참석하신 여러분도 뿌리를 더듬어 나가야 됩니다. 뿌리 가운데는 나쁜 뿌리가 있고 좋은 뿌리도 있습니다. 우리 조상이 있다면 그 조상이 선한 조상이냐, 나쁜 조상이냐 이거예요. 종교적으로 볼 때 인간의 시조가 타락했다고 한다면 우리 조상은 나쁜 조상이고, 그렇게 나쁜 조상이라면 꼬부라진 것이다 이거예요. 어떤 선을 중심삼고 표준적인 형에 일치되지 못하고 반대되는 노선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식물의 뿌리가 바로 뻗을래야 바로 뻗을 수 없어서 꼬부라졌다면 그렇게 꼬부라진 대로 줄기와 순이 뻗게 됩니다. 그러나 나무는 어디까지나 태양 빛을 따라 곧게 자라려고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무가 꼬부라졌다가도 왔다갔다하면서 그대로 잡아끄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뿌리는 모르지만, 그 근원은 모르지만 오늘날 우리의 양심은 식물이 태양 빛을 생명력으로 흡수하기를 바라듯이 선을 추구하고 좋은 걸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 있어야 할 그 뿌리의 자리와 오늘날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만약에 뿌리가 동쪽에 있는데 나무가 서쪽에 있으면, 그것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소용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나무의 순이 그 뿌리와 수직선상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순이 동쪽으로 가든가, 서쪽으로 가든가, 남쪽으로 가든가, 북쪽으로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순을 중심삼고 뿌리가 직선상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동쪽의 가지도 정상적인 가지요, 남쪽의 가지 혹은 북쪽이나 서쪽의 가지도 정상적인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순과 뿌리가 곧게 자랄 수 있게끔 영양 보급에 필요한 환경적 여건을 조성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쪽 가지나 서쪽 가지나 남쪽 가지가 아무리 뻗었다고 하더라도, 순이 바르면 정당한 존재의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순이 찌그러졌다고 할 때는 아무리 동서남북으로 가지가 뻗었다고 하더라도 효용가치가 없습니다. (145-172)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볼 때 종교면 종교, 철학이면 철학, 과학이면 과학의 원인을 규명하자는 것입니다. 원인을 규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1원인과 제2결과는 반드시 과정을 거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뿌리의 원인규명에 대해서 불분명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인간조상 아담 해와를 두고 볼 때, 아담 해와는 어디서 왔느냐? 그들의 자의에 의해서 출생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내가 있고 싶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존의 동기를 자기 스스로 의식하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부모의 사랑에 동참자가 되었지만, 내 자신이 의식해 가지고 내가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의식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이전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뿌리를 밝혀야 됩니다.
그 뿌리를 찾아보게 될 때 인간에게 있어서나, 나라면 나라에 있어서 뿌리는 결국 인류의 최초의 조상에게로 돌아갑니다. 인류의 조상은 둘일 수 없습니다. 하나입니다. 하나인 그 조상은 어디에 근거했느냐? 하나의 하나님에 근거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가 처음에 생겨나기 위해서는 나보다도 나을 수 있는 동기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진화론을 말하는데 맹목적인 진화나 발전이 있을 수 있느냐? 그런 논리의 형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맹목적이거나 우연적인 출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 가치의 기준은 무한한 확대 세계에서도 그 기준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맹목적인 우연한 자리에서 형성될 수 있었느냐?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의 내가 아무리 날고 뛰고 발전하고 했댔자 그것은 그 동기가 나타내는 하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 동기를 넘어선 오늘의 나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아요? 식물은 세포번식을 통해서 생존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나의 꽃이 있으면, 그 꽃잎이 왜 파랗거나 빨갛게 계속 유지되느냐? 그거 하나가 번식하면 새로운 꽃나무가 나옵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세포 하나에 전부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식물뿐 아니라 동물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세포를 통해 또 하나의 내가 다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뿌리로부터 줄기, 가지, 잎, 열매까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내 존재라는 것은 존재의 근원과 일치될 수 있는 그 자리의 존재성을 지녔지 진화적 과정의 연결적 단계를 달리하는 데 기인해서 존재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145-174)
그러면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예수님은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마음이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떠돌아다닌다 이거예요. 마음이 축(軸)을 중심삼고 평행선을 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수직과 일직선 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거꾸로 된 것입니다. 마음이 왜 달라지느냐 하면 일정한 축의 기준이 확정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축의 기준만 설정되어 있으면 그 축을 중심삼고 언제나 같은 수직선상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축의 자리가 잡히면, 그 수직선의 자리에는 하나님도 들어오십니다.
여러분 자신들에게는 누가 들어와 있느냐 하면, 어머니 아버지가 들어와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 자신의 몸에는 이 우주가 들어와 있습니다. 물이 다 들어와 있습니다. 모든 원소가 여러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면상에 나타난 자신을 볼 때, 나라는 것이 무엇이냐? 내가 어느 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이라고 할 때, 그것이 내가 아닙니다. 나는 이 우주의 근원에서부터 과정을 지나 현재까지의 전체를 종합한 하나의 표시체입니다. 모든 우주의 요소들을 가진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국립박물관에 가게 되면, 거기에 보물이나 국보 등을 나열해 가지고 자랑하고 있지만 내 하나의 가치는 우주 전체의 가치적인 내용을 전부 다 전시한 것입니다. 나는 우주를 축소시킨 하나의 핵과 같은 박물관, 생명력을 지닌 모든 요소들을 축소시킨 하나의 박물관입니다. 나에게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세포가 아주 작지만, 거기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 생명력의 근원이 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드러내지 못할 뿐이지 관련성에서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디에나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만물도 주관할 수 있습니다. (145-176)

인간의 본성

그러면 그 주관의 본질이 뭐냐? 본질만 들고 나가게 될 때는 우주주관(宇宙主管)도 가능합니다. 주관의 본질은 바로 사랑입니다. 내 하나의 생명적인 요소가 완전히 주체 앞에 대상적인 가치를 지니게 될 때 그 대상의 가치는 주체의 가치에 해당합니다. 그 대상의 가치는 원인과 대등한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몸 앞에 주체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고, 몸은 마음 앞에 대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둘이 합해 가지고 나라는 존재가 구성된 것입니다. 우주는 이와 같은 연관관계가 맺어져 있음과 동시에 전후의 관계, 내외의 관계, 좌우의 관계, 상하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성요소로 보게 된다면, 인간은 다 같은 것 같지만 다 다릅니다. 얼굴을 보면 눈, 귀, 코, 입의 네 가지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시한 네 가지는 세계 인류 전체를 다 갖다 놓아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 얼굴을 보면 눈이 까박까박하고 코가 오똑한 모양은 다 비슷한 것 같은데, 그 조그만 얼굴들이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몇 백억 인간을 갖다 놓아도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신비로우냐 이거예요.
그런데 이 수십 억 가운데 하나로서의 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그 수십 억을 다 부정하고 자기를 긍정하려고 합니다. 그게 왜 그래야 되느냐 이거예요. 이런 걸 볼 때, 어떤 본질적이고 주체적인 성품이 있다면 그 본성의 성품은 절대적인 동시에 그렇게 절대적인 자리에 대해서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될 때는 그 상대적인 존재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은 인류 전체를 대표한 자리에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더 큰 것이 있으면 그 더 큰 자리를 대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거 왜 그렇느냐? 인간의 뿌리가 그러한 것입니다. 인간은 뿌리의 기원에서부터 순 중에도 맨 높은 자리까지 가려고 합니다. 한 인간을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깊은 뿌리를 원하고 있고 제일 높은 순의 가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공통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인간이 역사과정에서 지녀 온 본성이 아니냐 이겁니다. 그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조그만 여자로 태어났더라도 될 수 있으면 “아, 여자 중의 최고다. 우리 어머니는 미인 조상이다” 이래 가지고 전체의 대표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낮은 것을 싫어합니다. 높은 것, 깊은 것, 넓은 것, 긴 것,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갖겠다는 것은 많은 것의 중심이 될 수 있고 많은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소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145-177)

우주의 이상적 형태

우리가 느끼고 보는 모든 것의 기원이자 뿌리가 뭐냐? 뿌리는 수평관계와 수직관계입니다. 그 평형과 수직이 겸해서는 운동을 합니다. 그래서 원만한 원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우주의 공기마저도 원형을 품으려고 하지 각도를 품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원형을 품을 수 있게끔 돼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이상형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소모가 벌어지지 않습니다. 원형일수록, 둥글수록 오래가는 법입니다. 둥글지 않은 것은 돌면 돌수록 마찰에 의해서 깎이든가 소모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원만한 것을 바랍니다. 원만한 것은 납작한 것이 아니라 구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체를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눈도 꽉 차 있고, 코도 꽉 차 있고, 입도 꽉 차 있고, 이 육신 전체가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구형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구형을 안 닮은 것이 없습니다. 한 가지 한 가지를 뜯어보게 될 때, 그것이 구형을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자의 나체를 그린 그림이 왜 화가들한테 동경의 대상이 되느냐? 거기에는 구형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구도 둥글어야 됩니다. 모든 세포도 그래야 됩니다. 원자(原子)도 전부 둥근 것입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평형 기준과 수직 기준을 통한 관계에 있어서 원만한 구조의 형태를 표상하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둥근 구형을 닮게 마련이다 이겁니다. 조화라는 것은 뭐냐? 평형과 수직이 다방면으로 아무데 갖다 맞춰도 딱딱 맞아야 됩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디에다 맞춰도 다 맞는다 이거예요.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수평적 대상이 누구냐? 남자에게 있어서는 누가 되겠어요? 친구끼리는 서로 하나된다고 해도 꽉 붙지 않습니다. 그건 외적으로 좋아하지 본질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정서적인 면이 동해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 앞에 여자가 있으면 직선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합니다. 그게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생명력보다 더 강합니다. 남자 여자의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평적인 대상의 기준이 누구냐 하면, 남자 앞에는 여자임에 틀림이 없고 여자 앞에는 남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구성체를 보게 된다면 남자와 여자는 판이합니다. 남자는 키가 크고, 몸뚱이도 울툭불툭하고, 털이 나고 그렇습니다. 여자를 보게 되면 키도 상대적으로 작고 손댈 수 있는 데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사랑의 힘만은 평등합니다. 요즈음 여자들이 남녀 평등권을 말하는데, 그 말은 사랑을 중심삼고 하는 말이지 그 이외는 성립이 안 됩니다. 밥을 먹는 데도 여자가 지지요? 웃는 소리만 해도 지지요? 뛰는 데도 지지요? 그러니 어떻게 평등권이에요? 그것은 사랑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는 너와 나입니다. 너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는 거지요. 남자에게 아내가 있으면 자기 생명을 다해서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평등권이라는 것은 수직을 중심삼고 하는 말입니다. 수직의 축을 중심삼고 남자 여자가 돌 때는 평등합니다. 사랑의 운동을 하는 데, 도는 데 있어서는 평등한 것입니다. (145-184)

사랑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질

남자 여자를 두고 볼 때, 평행선의 뿌리를 찾아보게 되면 사랑을 중심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수직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수직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횡적으로 잡으면, 부자(父子)의 관계는 수직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사상에서 부자의 관계는 변할 길이 없다고 합니다. 수직은 영원한 것이지만, 상대적인 관계는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수직은 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천리(天理)의 근본입니다. 천주(天宙)의 모든 존재들이 이것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긍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됩니다. 아무리 부모가 살인강도라고 해도 자식에 대해서 살인강도가 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자기는 마피아가 됐지만 “너는 마피아 되지 말라”고 합니다. 환경이 좋지 않으면 누구를 시켜서라도 그 동네에서 옮겨 딴 곳으로 이동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리의 본성적 기준인 뿌리가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떠날 수 없는 인간이므로 자식에 대해서 “너는 나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할 때 왜 해와부터 안 지으셨겠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종적인 기준인 아들을 먼저 지으셔야 했습니다. 종적인 기준을 지어야 횡적인 기준을 정하실 수 있었습니다. 종적인 기준만 세우면 횡적인 기준은 돌 수 있었습니다. “왜 남자부터 만들었느냐?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아닙니다. 수직적인 개념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이상적인 목적의 개념을 먼저 세워 놓고 창조적 개념을 투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할 때 근원이 있었는데 그 근원의 기준이 무엇이었겠어요? 그 기준이 사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또, 부모는 자식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걸 떠날 수 없습니다. 그걸 떠나면 고통입니다. 요즈음 미국을 보면,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고 부모를 반대하는 걸 보게 됩니다. 그것은 부모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본성의 부모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는 거예요. 아이들의 본성적인 마음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145-188)
부모의 사랑은 수직적인 관계에 있어서 뿌리가 됩니다. 자연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그러한 상하관계인 부자의 관계가 수직적인 관계입니다. 그 다음에 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90각도로 그릴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가 부부의 관계입니다. 무엇이 자연적으로 수직을 만들 수 있고, 무엇이 자연적으로 횡적인 90각도를 만들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랑만이 가능하지 돈이나 지식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여자를 대하게 될 때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돈이라든가 권력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횡적인 남녀의 관계가 맺어지게 되면 부모의 사랑에서 떠납니다. 부모의 사랑이 남녀의 사랑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포가 분열되어 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분열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녀의 관계에 있어서도 수평선을 만들어 90각도의 원만한 조화가 이루어져 하나로 영원히 돌 수 있습니다. 영원한 주체적인 근원과 영원한 횡적인 근원이 사랑에 근거했기 때문에 사랑의 근원이 영원한 것이니까 영원한 사랑을 중심삼고 도는 것이 이상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남자나 여자가 왜 태어났느냐? 영원한 사랑이 그리워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게 뿌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그렇게 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의 관계와 횡적인 관계에 있어서 영원히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서로 서로가 갈라져서 반목질시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어 잘 주고 잘 받으면서 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주고 잘 받아야 됩니다. 남자 여자가 잘 주고 잘 받는 것은 전체의 원만한 가치를 형성시키는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학생에게나 직장인에게나 다 적용됩니다 자기의 일이 주체라면 만들어지는 그 물건은 상대가 됩니다. 그것에 대해 원만하게 내 정성을 다하면 그 물건은 그 회사의 특제품목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투입하느냐? 성경에 보게 되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 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을 말합니다. 마음과 목숨 그리고 뜻은 근원적인 것입니다. 맨 근원적인 본질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근원적인 것, 본질의 근원이 뭐냐 이거예요. 종횡으로 엮을 수 있는 사랑이 하나님의 창조이상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 아무렇게나 짓지 않았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본질로 세워 놓고 지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싫어하는 존재가 있어요? 식물세계도 그렇고, 광물세계도 그렇잖아요? 광물세계에도 양자와 전자가 서로 대하고 있지만, 그 소성이 다른 것끼리는 상대적인 요소가 안 됩니다. 아무리 원소와 원소끼리 합할래야 합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도 못 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면 합하지 말래도 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만물의 뿌리가 무엇에 전부 다 엮어져 있느냐 이거예요. 꽃이 왜 피며 변화적인 색깔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번식의 요소가 있고 발전의 요소가 있습니다. 사랑을 빼면 발전이 없습니다. (145-190)

3대 부모와 나

우리 인간에게는 그러한 3대 존재세계의 사랑을 통합하고 화합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뚱이를 갖고 있습니다. 종횡으로 만물세계의 원소들을 다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3대 부모가 있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만물은 제3의 부모입니다. 여러분 몸에 어머니 아버지가 낳아 줄 때의 살은 하나도 없습니다. 낳을 때 조그맣게 나왔지요? 나온 다음에는 어머니의 젖을 통해 만물의 원소를 보급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육신을 키워 준 것은 만물입니다. 그래서 만물을 제3의 부모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채소를 먹고 음식을 먹는데, 그것들이 전부 우리를 키워 주는 부모입니다. 뱃속에서 어머니의 탯줄을 통해 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만물에 탯줄을 걸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만물이 “아이고, 나 이제는 보급 안 하니 좋다” 그러겠어요? 만물도 사랑이라는 인연을 중심삼고 공급할 때는 인간의 몸뚱이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을 무엇으로 세워요? 그것은 철학의 논리나 무슨 원칙을 가지고 안 됩니다. 오직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을 중심삼고 만물이 제3의 부모가 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2의 부모는 누구예요? 제2부모는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그 다음에 제1의 부모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핵 중의 핵, 전자를 몇 천만배로 축소시킨 핵과 같은 존재, 전체를 움직이고 남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가 제1부모인 하나님입니다. 그분은 절대적인 요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춘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뿌리를 가지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전부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생활은 사랑의 생활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을 가지고 부모를 대할 때 “이놈의 자식아…”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밤이든 낮이든 “오냐, 지금 왔느냐? 왜 지금 오노, 더 빨리 오지”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는 영원히 되풀이하더라도 싫지 않습니다. 천번 만번 되풀이하고 영원히 돌더라도 싫지 않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시소놀이를 하듯이 “또 돌자, 또 돌자, 또 돌자” 합니다. “너 올라갔구나. 나 내려갈게“ 하면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듯이 돌면서 사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사랑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늙은 할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을 때보다도 손자를 낳았을 때 더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그렇습니다. 아담 해와를 지었을 때보다도 손자를 더 바라시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손자를 못 보셨습니다. 여기에 3단계라는 지극히 중요한 원칙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역사에서 둘째가 문제가 됐습니다. 아담가정에 있어서 둘째, 노아가정에 있어서 둘째, 야곱가정에 있어서 둘째가 문제된 것입니다. 사탄은 둘째를 노립니다. 왜냐하면 중앙선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앙선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적인 내용을 희미하게 약화시키기 위한 놀음을 사탄이 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반대가 되는 길만 확장시켜 놓으면 영원히 사탄 세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알알이 전부 다 갈라놓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당신들하고 내가 무슨 상관이 있어” 하는 자식들도 있습니다. 사탄이 전부 다 갈라놓습니다. 그 사랑은 자기를 중심한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간과 만물이 돌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5-192)

우주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순과 같은 자리에 서야

오늘은 뿌리를 알자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뿌리가 뭐예요? 내 육신의 뿌리는 만물이고, 이 골육의 뿌리는 어머니 아버지고, 우리의 마음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지만 수천 년, 수만 년 역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전통을 묶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사랑만이 우리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이 창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뭐가 부러워서 창조하기 시작하셨겠어요? 돈, 지식, 권력 때문이었어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무엇이든지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만약에 사랑의 논리를 세우시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동작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한테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얼마든지 만드시면 됩니다.
우리 인간으로 보면 돈이 금인데, 금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도 얼마든지 만들어 내실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 보면, 하나님은 지식의 대왕입니다. 모든 존재의 기원, 세포의 근원까지도 조성시킨 분인데 지식이 뭐 필요 있어요? 과학자가 풀 한 포기에 대해 일생 동안 연구해도 못 다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권력은 어때요? 우주가 하나님의 것인데 권력이 필요하시겠어요?
이렇게 볼 때, 창조를 사랑 때문에 하셨다는 논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게 근원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섭리를 이끌어 오신 것입니다. 그 사랑은 강제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리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의 두 남녀를 누가 결혼시켰겠어요?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이 결혼시켰다면 논리적인 기준에 맞았겠지만 그렇게 되지 못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멋대로 결혼할 수 있어요? 사랑은 반드시 부자의 관계를 통하여 주체의 사랑인 수직의 사랑이 성립된 후에 횡적인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근원과 뿌리를 여러분이 알고 그 뿌리와 근원을 여러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뿌리와 순이 있지만, 가지는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사랑의 특권이 있는 이 뿌리를 앎으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그렇게 살면 여러분의 생활이 얼마나 윤택하겠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사랑의 근원과 뿌리를 알고 이 우주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는 순과 같은 자리에 서야 됩니다. 그래서 똑바로 뻗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계를 하나님이 사랑하실 수 있는 세계로 만들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 했지요? 거기에 하나가 빠졌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사랑이다” 해야 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나’라는 말은 ‘사랑을 대표한 나’라고 하게 될 때 맞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사랑의 길이요, 사랑의 진리요, 사랑의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수 없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145-201)

사랑의 다리

선생님이 전통적인 기원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 뭐냐 하면 보다 위하겠다는 자리입니다. 그렇게 위하다 보니까 나는 없어졌지만, 돌아오는 힘이 나를 위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힘이 자연히 제일 높은 자리로 뻗었는데, 그것이 종대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다 보니까 자식들이 사랑으로 밀어 주어서 주체가 되는 것 아니에요?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종대는 전체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전체를 위하다 보니까 무(無)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힘이 아래로 와서 원형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체가 합해서 나를 밀어 주어 순의 종대가 됩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핍박도 많이 받았지만, 그러한 사랑의 마음을 갖고 지금까지 생애를 지내다 보니까 이제는 세계에 드러나고 세계의 나무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곧게 자란 나무와 같으니까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본다 이거예요. 뿌리가 이렇게 된 것을 아시고, 오늘의 이 말을 기억하고 여러분의 생활을 통해서 세계를 정화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도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나라,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그 전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민족,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종족,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가정,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내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사다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를 위하여 왔던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성취를 온 우주에 연결시키고 선생님의 소망성취를 영계에 연결시켜서 하나님을 뿌리로 해 가지고 여러분이 순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바른 나무와 같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 이러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145-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