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맞자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1일)

훈독왕 | 20220425041837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1일

내일을 맞자 (훈독본)  

날짜 : 1970. 7. 19(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내일을 맞자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1일) - YouTube

 

오늘을 사는 인간이 바라는 것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 희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더 나은 한 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요, 미래를 향해 출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중심삼고 천태만상의 과거가 있었고, 현재도 천태만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미래에도 천태만상으로 벌어질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이 서 있는 것은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개인이 내일을 맞게 될 때 과거나 현재보다도 나은 미래를 바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원한다면 지금보다도 나은 가치 있는 것을 지녀야 됩니다. 또한, 과거보다 나을 수 있는 인연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는 사방의 환경을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환경의 무엇보다도 나은 자기 스스로의 자리를 결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좋은 환경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통일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앞으로 다가올 희망의 세계를 위해 보다 나은 인격을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새로이 느껴야 할 것은 나 스스로가 보다 가치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와 사회 앞에 자기 자신이 보다 나은 입장에 서야만 보다 나은 미래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2-210)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라면, 그 인간은 과거의 사실을 오늘날에 입증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지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서도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미래에 입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은 희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희망하는 전체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가치적 존재로 태어나야 됩니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장이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중심에 서서 전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사람에게는 세계적인 중심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가진 중심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있으면 그 존재 중에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또한 절대적인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과 하나되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보다 나은 가치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오늘날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출발의 때가 아니라 역사적 종말시대에 머무른 때입니다. 우리는 이때에 하나님과 내가 일체화될 수 있는 기점을 스스로의 생활권 내에서 자기 인격을 중심삼아 가지고 완결지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2-211)

역사적인 대표가 되어야 할 우리

그러기에 양심이 바라는 길을 찾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누구든지 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섭리역사와 인류의 역사노정에 인연을 맺어 놓으셔야 됩니다. 이런 인연을 맺기 위한 것이 종교가 가는 길입니다.


종교가 가는 길은 역사의 배후를 따라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과정을 넘어 환경을 초월하여 미래를 추구할 수 있는 보다 새롭고 가치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길입니다. 


인간이 역사적인 중심자리에 섰다면, 우리가 보다 나은 내일을 맞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역사적인 실체가 되어야 하고 보다 나은 시대적인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 시대에 있어서 한 종족이나 한 민족을 중심삼은 대표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며 시대적인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온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치와 능력을 지녀야 됩니다. 이런 존재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중심입니다.


이런 기점 위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끌어들인다면 그 내일은 끌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계, 죽음의 세계, 즉 사망의 세계가 그 앞에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보다 나은 내일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세계적인 가치의 중심 혹은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섭리적인 중심의 자리를 결정했다면, 그는 과거를 지배할 수 있고 현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면, 앞으로 가는 길에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어려운 환경 너머에 있는 새로운 소망을 끌어당기면 어려운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격체가 이 땅에 나타나면, 그는 인류역사의 끝날이 멀다고 하더라도 그 끝날을 단축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내일을 위해 나서게 될 때,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보증할 수 있는 미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인연을 통하여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대신해서 승리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거기에서 미래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32-212)

내일을 맞을 수 있는 사람

그러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주인이 될 사람은 누구냐? 오늘 우리 자신만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절대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그리는 하나의 권이 있을 것이고, 주체가 그리는 하나의 승리적 환경이 있을 것이고, 주체가 그리는 내일의 이상이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는 그 자리까지는 못 갔다고 하더라도 주체의 사랑, 주체의 소망, 주체의 현실이 그에게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미래의 실체와 미래의 환경 그리고 미래의 승리적 가치에 연결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상이 출발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미래를 맡겠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은 개인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세계를 대신해서 가는 길이요, 인간만이 아니라 절대자를 대신해서 가는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나간다고 할진대는 과거의 일을 추구하더라도 미래에 그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현재에서 생각하더라도 이 현재의 자리가 미래의 중심의 자리도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를 이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역사 앞에 있어서 최고의 희망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 앞에 있어서 최고의 승리적 중심이 아닐 수 없으며, 미래 앞에 있어서도 중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2-215)

하나님의 최고의 소망

그러한 존재가 하늘과 땅,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을 중심삼은 환경이나 생활권 가운데서 결정될 수 있는 한 날을 어떻게 우리의 생애노정에 남길 것이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는 심정세계를 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일체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승리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시대를 포괄할 수 있는 주체권, 이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심정의 세계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다 가치적인 존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보다도 인간을 누구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낼 수 있고, 전체의 마음을 대표한 하나의 상대로 나타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가졌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수고로운 것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요, 어려운 환경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힘은 강하기 때문에 그 힘과 하나될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치더라도 능히 소화시킬 수 있고 능히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힘의 모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태어나서 생애노정을 거치는 가운데, 즉 나면서부터 죽어 가는 순간까지 그런 사랑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백 퍼센트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경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그에게는 아들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바랄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찾아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라야 영원히 행복한 자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영원한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32-217)


절대적 인연으로 연결된 하나님과 인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도 슬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부자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도 부모면 부모, 아들이면 아들이 슬퍼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뼛골에서 슬픔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자기와 절대적인 인연인 하나의 핏줄을 중심삼고 영원히 같이할 수 있는 내적인 심정의 인연으로 묶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움직이는 전체는 주체와 상대적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가 기뻐하면 절대자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슬픔을 느끼실 때 나도 자연히 슬픔을 느끼게 되고, 내가 기뻐하게 될 때 자연히 하나님도 기뻐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슬픈 환경을 넘어 더 고차적인 자리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면, 그 기쁨을 이 땅 위에 반영시키는 일이 영계를 중심삼고 우리 인간의 배후에서 벌어집니다. (32-219)

체휼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자리

역사 속에 나타난 성도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당시에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들이 남긴 도(道)는 역사를 수습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리를 두고 수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일체화되면 거리를 초월해서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체와 더불어 시대의 환경을 극복하여 비약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새롭게 개혁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가해지는 파장은 온 세계 인류와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까지 파급되어 나갈 것입니다. 또한, 그때의 기쁜 사연은 세계를 소화하고 세계를 감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기도는 감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경지를 찾아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체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이런 체휼적인 사랑을 제일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그 자리는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자리에서 하나님 대신 그 사랑을 널리 만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자리입니다. (32-221)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원칙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자기의 몸은 물론 자기의 아들딸까지도 다 제물로 드려서 만민을 구원하고 사랑하려는 주체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섭리를 해 나오면서 원수를 쳐 가지고 추진시켜 나오신 적이 없습니다. 원수를 쳐서 섭리하기보다는 자기의 사랑하는 존재, 제일 가까운 존재를 희생시켜 가지고 섭리를 추진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를 발전시켜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자기의 아들딸까지도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시킬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소유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하는 수많은 종들을 희생시켜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고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했습니다. 아버지의 원이 자신을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사랑하고 살리고 싶으셨던 것이기 때문에 고이고이 그 뜻에 순응해 가는 것이 아들의 도리인 것을 알고 독생자 예수님은 제물이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 중의 제물이 되어 간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희생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아진다는 것을 알았던 예수님은 소원하던 하나의 세계가 기필코 이뤄질 것을 믿고 갔습니다. 거기서부터 세계는 수습되는 것이요,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의 기원은 한 단계 고차적인 입장을 결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한계선을 자기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내일의 천국을 현재에서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오늘이 없으면 내일이 있을 수 없듯이 오늘의 승리의 기원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내일의 인연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개인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되고, 내 가정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되며, 내 종족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됩니다. 또 내 민족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되며, 내 나라를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나라가 나타나야 세계는 그 나라로 말미암아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 나라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를 추진해 나오신 것입니다. (32-223) 

나라를 찾아 세우려고 했던 예수님의 슬픔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은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하시는 목적도 그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1-33)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의라는 것은 행동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는 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서 희생해야 되느냐? 하나님과 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자리, 즉 종적인 역사에 있어서 수직으로 흐르는 직계의 심정을 상속받아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개인을 그 나라 대신 사랑하고, 수많은 종족을 그 나라 대신 사랑하고, 수많은 민족을 그 나라 대신 사랑하고,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그 나라를 위해서 수많은 나라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죽더라도 절대적으로 정의에 입각한 생활을 해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 말이 바로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엮어져 온 하나님의 사연입니다. (32-225)

사랑과 희생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과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팔려 가는 자신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 세상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를 중심삼고 팔려 가는 신세가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심정을 중심삼은 개인적인 인격을 말하고, 심정을 중심삼은 가정적인 기준을 말하고, 심정을 중심삼은 민족과 국가 형태를 말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내용에 입각한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차피 소망의 한때를 이루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슬픈 사연을 내가 인식하고, 그 슬픈 사연을 내 심정으로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교차할 수 있는 교차점에 서야 합니다. 그 교차점이 나의 생활권입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가야 할 운명의 길은 내일의 나라, 내일의 세계를 상속받기 위하여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기 위하여 결속한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딸을 제물로 삼아 내 종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이 나라를 위하고 이 세계를 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여러분을 고생의 자리로 내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희생의 자리에 내모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자체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쓰러지고 죽어 제물이 되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터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넓혀 종족권을 넘고, 그것을 넓혀 민족권 앞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넓혀 국가의 기준을 바꾸는 날에는 새로운 나라의 깃발을 들고 세계를 향하여 진군할 수 있는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향하여 가는 길이 통일교회의 길입니다. (32-227)

우리들이 가야 할 길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이 문제입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은 가정들은 나라를 위하여 제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여기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말을 잘 하는 것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적과 심정이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은 심정의 경계선, 실적의 경계선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32-229)

참된 내일을 맞기 위해 제물의 길, 희생의 길로 가라

오늘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천국 가자” 하는데, 천국을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 땅 위에서 천국을 맞고 가야 됩니다. 땅 위에서 천국을 맞기 위해서는 사랑의 법도를 거치고 가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체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한 심정적인 대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그런 심정적인 대표가 되어야 하고, 종족이 그런 심정적인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개인과 가정 그리고 종족은 세계를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족 전체를 단결시켜서 심정적 일치점을 가지게 하여 이 나라를 앞으로 올 소망의 나라를 위해 제물로 바쳐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환경의 터전 위에 천상의 인연을 맺어 가지고 새로운 창조역사를 이룰 수 있는 세계적인 결실을 맺었으면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맞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으니,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32-232)*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1일, 원문

내일을 맞자  

날짜 : 1970. 7. 19(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을 사는 인간이 바라는 것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다 희망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희망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더 나은 한 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현재보다 미래가 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요, 미래를 향해 출발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70대가 되든, 50대가 되든, 20대가 되든 사람이 처해 있는 자리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중심입니다. 그 자리를 중심삼고 천태만상의 과거가 있었고, 현재도 천태만상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미래에도 천태만상으로 벌어질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여러분 자신이 서 있는 것은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인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리는 자기 개인의 입장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자기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면 사회를 대표해서 서 있는 것이요, 민족이면 민족을 대표해서 서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표해 서 있습니다.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개인이 내일을 맞게 될 때 과거나 현재보다도 나은 미래를 바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보다도 나은 가치 있는 것을 지녀야 됩니다. 또한, 과거보다 나을 수 있는 인연을 지녀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는 사방의 환경을 대표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 환경의 무엇보다도 나은 자기 스스로의 자리를 결하지 않고서는 미래의 좋은 환경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자신이므로 역사를 대표한 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은 과거나 현재보다도 못한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 자리에서는 역사를 대표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이 세상이 선한 세상으로 우리의 영원한 이상의 터전으로서 하나님이 보장하실 수 있는 세상이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자유와 평화 그리고 통일의 세계, 즉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앞으로 다가올 희망의 세계를 위해 보다 나은 인격을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새로이 느껴야 할 것은 나 스스로가 보다 가치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 이 땅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민족이 있고, 그 민족을 넘어 국가와 세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입장에 있어서 보다 나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입장을 결하지 않고는 보다 나은 내일의 가치적 세계를 추구하기에 합당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역사가 좋고 사회가 좋다고 하더라도 그 좋은 역사와 사회 앞에 자기 자신이 보다 나은 입장에 서야만 보다 나은 미래의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못하고 그보다 낫지 못한 입장에 서게 될 때는 역사와 환경 앞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2-210)

인간이 지녀야 할 가치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존재라면, 그 인간은 과거의 사실을 오늘날에 입증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존재로서 지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현재에 있어서도 보다 가치적인 내용을 미래에 입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람은 희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희망하는 전체의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가치적 존재로 태어나야 됩니다. ‘만물지중 유인최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만물 가운데서 가장 높고 귀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서 있는 그 자리는 역사가 우러러볼 수 있는 자리요, 이 시대가 중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리요, 미래가 그 가치 앞에 들어가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처럼 미래까지 품고 나갈 수 있는 가치적인 존재라야만 ‘유인최귀’의 자리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장이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중심에 서서 전체의 가치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사람에게는 세계적인 중심이 되려고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가진 중심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가 있으면 그 존재 중에 최고의 존재가 되고 싶어하고, 또한 절대적인 중심이 있다면 그 중심과 하나되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보다 나은 가치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마음이 왜 그렇게 되어 있느냐? 그것은 본래 우리 인간이 역사시대의 전체 가치를 대표하는 중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들이 자기를 보고 기뻐하고 자기가 생활하는 환경에서 즐거워하고 있느냐 할 때, 나 자신을 두고 기뻐하고 자기 자신의 생활로 말미암아 행복을 추구해 나가고 있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전체의 중심이 아닐 수 없고 전체 행복의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그런 가치를 지닌 중심존재와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 거리를 어떻게 단축시키느냐? 그 거리를 어떻게 단축시켜서 그 결정적 중심 앞에 일치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역사시대를 거치는 동안 뜻을 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간격을 좁히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바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절대적 가치의 기준과 일치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만이 힘쓰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절대적 가치의 기준까지 갈 수 있도록 우리를 협조해 주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적인 존재로 짓고, 또 하나님이 인간을 책임지고 인간과 절대적인 관계를 가지셨다면 어느 한 때는 기필코 절대적 가치의 기준과 인간이 일치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요, 무한한 능력을 지닌 분이기 때문에 인간도 그런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또 그것이 성사될 수 있는 때가 기필코 오리라고 믿고 계십니다. 그래서 양심적인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미래를 향해 하나의 세계를 바라나왔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지금까지 발전해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의 역사는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출발의 때가 아니라 역사적 종말시대에 머무른 때입니다. 우리는 이때에 하나님과 내가 일체화될 수 있는 기점을 스스로의 생활권 내에서 자기 인격을 중심삼아 가지고 완결지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현재를 말세라고 하고 끝날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품고 나온 희망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한 가문을 중심한 희망을 가졌다면 그 희망의 기준이 역사의 희망과 일치되고 이 시대의 희망과 일치되며 미래의 소망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떠한 특정한 종족, 특정한 민족, 특정한 국가를 중심삼은 희망이 되면 결국에 가서 하나밖에 남을 수 없는 그 희망 앞에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32-211)

역사적인 대표가 되어야 할 우리

그러기에 오늘날 인간은 이런 길을 피해 가기 위해서 양심이 바라는 길을 찾고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인간으로서 누구든지 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간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섭리역사와 인류의 역사노정에 인연을 맺어 놓으셔야 됩니다. 이런 인연을 맺기 위한 것이 종교가 가는 길입니다.
종교가 가는 길은 역사의 배후를 따라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역사과정을 넘어 환경을 초월하여 미래를 추구할 수 있는 보다 새롭고 가치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길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취하지 않는 종교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시대권 내에서 규탄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와 통할 수 있는 내용, 시대를 이끌고 미래로 갈 수 있는 종교적인 길을 찾아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역사적인 중심자리에 섰다면, 우리가 보다 나은 내일을 맞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역사적인 실체가 되어야 하고 보다 나은 시대적인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이 시대에 있어서 한 종족이나 한 민족을 중심삼은 대표뿐만 아니라 역사적이며 시대적인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온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치와 능력을 지녀야 됩니다. 이런 존재가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중심입니다.
이런 기점 위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끌어들인다면 그 내일은 끌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계, 죽음의 세계, 즉 사망의 세계가 그 앞에 다가온다고 하더라도 보다 나은 내일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세계적인 가치의 중심 혹은 역사적이고 시대적이고 섭리적인 중심의 자리를 결정했다면, 그는 과거를 지배할 수 있고 현재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서면, 앞으로 가는 길에 아무리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어려운 환경 너머에 있는 새로운 소망을 끌어당기면 어려운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인격체가 이 땅에 나타나면, 그는 인류역사의 끝날이 멀다고 하더라도 그 끝날을 단축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내일을 위해 나서게 될 때, 과거와 현재는 미래를 보증할 수 있는 미래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미래는 과거와 현재의 인연을 통하여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를 대신해서 승리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면 거기에서 미래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역사과정에서 미래의 소망을 품고 개척자의 사명을 하기 위해 왔다 갔던 성인들 앞에는 시련과 핍박의 길, 버림받는 길, 죽음의 길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그 가로놓였던 것들을 그들이 제거하고 몰아내기 위하여 대결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대결밖에 되지 못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영원한 승리로 남아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반드시 훗날 한 중심에 의해서 수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만일 통일된 하나님의 뜻,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하나되고 백 퍼센트 체득한 자리에서 그 환경과 싸웠다면 그들의 생애노정에서 뜻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 뜻은 절대적인 아들을 위한 뜻이자 절대적인 딸을 위한 뜻입니다. 절대적인 가치를 중심삼은 아들딸을 위한 뜻이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룬 아들딸이 이 땅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섭리노정 앞에 과거를 대표한 자가 되고, 현시대의 중심존재가 되며, 미래의 출발자가 될 수 있는 확고한 중심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이상을 몽땅 품을 수 있는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할진대, 거기서부터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벌어지고 초역사적인 새로운 능력의 역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32-212)

내일을 맞을 수 있는 사람

그러면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주인이 될 사람은 누구냐? 오늘 우리 자신만이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절대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은 결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주체적인 입장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가 그리는 하나의 권이 있을 것이고, 주체가 그리는 하나의 승리적 환경이 있을 것이고, 주체가 그리는 내일의 이상이 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일치될 수 있는 스스로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는 그 자리까지는 못 갔다고 하더라도 주체의 사랑, 주체의 소망, 주체의 현실이 그에게 연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미래의 실체와 미래의 환경 그리고 미래의 승리적 가치에 연결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상이 출발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미래를 맡겠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가는 길은 개인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세계를 대신해서 가는 길이요, 인간만이 아니라 절대자를 대신해서 가는 길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선 사람은 언제나 과거도 현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요, 현재도 과거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 자체가 내일의 희망을 가질 수 있게 자극시키는 입장에 선다는 것입니다. 즉, 과거는 과거로서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 자극을 가할 수 있는 인연으로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현실도 역시 현실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향할 수 있는 자극적인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입장에서 나간다고 할진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이에 차이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의 일을 추구하더라도 미래에 그 존재의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현재에서 생각하더라도 이 현재의 자리가 미래의 중심의 자리도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역사를 이긴 사람이 되는 것이며 역사 앞에 있어서 최고의 희망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 앞에 있어서 최고의 승리적 중심이 아닐 수 없으며, 미래 앞에 있어서도 중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2-215)

하나님의 최고의 소망

그러한 존재가 하늘과 땅,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한 이 세상에서의 인연을 중심삼은 환경이나 생활권 가운데서 결정될 수 있는 한 날을 어떻게 우리의 생애노정에 남길 것이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는 심정세계를 논합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소망이 무엇이며, 최고의 희망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자신의 품에 품으려고 하시는 것도 아니요, 하늘과 땅을 자신의 권세로 다스리고자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외적인 모든 상대적 여건이 아무리 풍족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한테는 간접적인 문제입니다. 오직 기쁨으로 포괄할 수 있고 기쁨으로 움직일 수 있는 주체적인 운동의 중심, 즉 핵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일체화,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역사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승리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시대를 포괄할 수 있는 주체권, 이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심정의 세계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는 지금까지 이 세계를 통일시키기에 앞서 통일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아들과 참된 딸을 세워 가지고 하나님과 하나되어서 시대와 환경을 개척하여 시대의 중심자리에 설 수 있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을 이끌어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끌고 나오실 때 끌려나올 수 있는 심정적인 유대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개인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대표한 자리에서 관계를 맺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보다 가치적인 존재가 되겠다고 하는 사람보다도 인간을 누구보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 사람 앞에 세계가 굴복했든 안 했든, 혹은 시대와 환경이 수습되었든 안 되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낼 수 있고, 전체의 마음을 대표한 하나의 상대로 나타날 수 있는 참다운 사랑의 인연을 가졌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런 아들딸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랑은 과거를 수습할 수 있는 것이요, 시대를 주관할 수 있는 것이요,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수고로운 것도 극복할 수 있는 것이요, 어려운 환경도 소화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힘은 강하기 때문에 그 힘과 하나될 수 있는 기원을 마련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일에 부딪치더라도 능히 소화시킬 수 있고 능히 주관하고도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힘의 모체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와 떨어진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시대와 분리된 사랑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미래에 올 수 있는 사랑을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직, 출발과 더불어 영원히 같이할 수 있는 사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태어나서 생애노정을 거치는 가운데, 즉 나면서부터 죽어 가는 순간까지 그런 사랑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생을 통해서 뜻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득하는 데 있어서 그때가 생애의 3분의 1의 기간에 해당된다면, 나머지 3분의 2에 해당하는 기간은 여러분에게 있어서 슬픔의 기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생애의 절반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위한 생활을 했다면 그 나머지 절반의 생애는 부끄러운 생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부끄러운 생애와 슬픔의 생애를 남겨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인간과 맺어진 사랑이 몇 퍼센트였겠느냐 생각해 보면 미완성적 사랑에서 역사가 흘러나와 지금도 그런 시대권을 이루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백 퍼센트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 경지를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그에게는 아들이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바랄 필요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찾아진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리라야 영원히 행복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수습해야 할 내용을 남긴 자리에 서게 된다면 영원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히 수습되어서 절대적인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되고, 또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자리에 서야만 영원한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32-217) 

절대적 인연으로 연결된 하나님과 인간

본래 인간은 승리의 본향에서 출발하게 되어 있는데 타락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자리에서 승리의 세계를 찾아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 찾아 나가는 표준이 인격의 완성을 이룬 자리입니다. 물론 인격도 필요하겠지만 그 인격을 움직일 수 있는 내심적인 핵, 즉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면 내가 슬퍼할 때 하나님도 슬퍼하시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부자의 관계라든가 혹은 부부의 관계를 중심삼고 볼 때도 부모면 부모, 아들이면 아들이 슬퍼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뼛골에서 슬픔이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설명을 초월하고 환경의 모든 인연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거리와 사정을 초월해서 상대와 일치된 감정이 유발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설명을 초월하고 사연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도 그 내용이 어떻게 되었든지, 그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지를 초월해서 같이 기뻐합니다. 상대가 아들이든지, 부모든지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상대적 존재로서 자기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순수하게 자기와 절대적인 인연인 하나의 핏줄을 중심삼고 영원히 같이할 수 있는 내적인 심정의 인연으로 묶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내가 움직이는 전체는 주체와 상대적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가 기뻐하면 나도 기뻐하고, 그가 슬퍼하면 나도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가 기뻐하면 절대자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기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내가 슬퍼하게 되면 절대자도 슬퍼하게 되고, 절대자가 슬퍼하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전 세계도 슬퍼하게 되는 이런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슬픔을 느끼실 때 나도 자연히 슬픔을 느끼게 되고, 내가 기뻐하게 될 때 자연히 하나님도 기뻐하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슬픈 환경을 넘어 더 고차적인 자리에서 기쁨을 느끼게 되면, 그 기쁨을 이 땅 위에 반영시키는 일이 영계를 중심삼고 우리 인간의 배후에서 벌어집니다. 
기도생활을 많이 하고 영적으로 높은 안목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슬픔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슬픈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벅찬 기쁨을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는 하나님이 기쁜 자리에 처해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32-219)

체휼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자리

우리 인간은 현실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있지만 영계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권내에서는 이것이자 저것이요, 저것이자 이것인 것입니다. 영계를 중심하고 반영되어 들어오는 관계의 세계에 있어서는 슬픔과 기쁨이 언제나 나를 중심한 하루의 생활을 통해서 접선돼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것을 감지하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에 있고 너무나 부족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일을 맞자, 참된 내일을 맞자” 할 수 있으려면 참된 나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된 내일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습니다. 이 자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체휼적인 신앙입니다. 체휼적인 신앙이란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 나도 슬퍼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나도 기뻐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매일매일 그런 생활을 중심삼고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풀어 드리고 세계 앞에 기쁨을 나눠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었다고 할진대는 나로 말미암아 세계가 수습되어 나갑니다.
역사 속에 나타난 성도들을 보면, 그 사람들이 당시에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들이 남긴 도(道)는 역사를 수습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거리를 두고 수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일체화되면 거리를 초월해서 수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주체와 더불어 시대의 환경을 극복하여 비약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계가 새롭게 개혁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가해지는 파장은 온 세계 인류와 과거, 현재, 미래의 세계까지 파급되어 나갈 것입니다. 또한, 그때의 기쁜 사연은 세계를 소화하고 세계를 감화시킬 수 있는 주체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의 기도는 감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 경지를 찾아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체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이런 체휼적인 사랑을 제일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그 자리는 여러분의 가정에서 여러분이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 상대적인 자리에서 하나님 대신 그 사랑을 널리 만인류에게 적용시키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다르십니다. 우리 인간은 자기 아들딸이 어려움을 당할 때는 만인을 희생시키더라도 자기 아들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을 가집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만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딸을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아십니다. 여기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돌려 잡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동기는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기 아들을 번제의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가 제사를 드린 것은 미래의 후손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제사를 드리게 된 동기였습니다. 미래의 후손을 위하여 자기 자식을 잡아 제사를 드리던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비장했겠습니까!
현재보다 미래의 세계를 위하여 자기 아들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 제사드릴 수 있는 사람은 미래의 승리의 기반을 현재에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아들을 미래의 세계를 위해서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나가게 될 때,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냐, 못 가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욕심부리는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자기를 중심한 것을 버리고, 자기를 희생시키고 제물로 삼으려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32-221)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원칙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점령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냐? 자기의 몸은 물론 자기의 아들딸까지도 다 제물로 드려서 만민을 구원하고 사랑하려는 주체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섭리를 해 나오면서 원수를 쳐 가지고 추진시켜 나오신 적이 없습니다. 원수를 쳐서 섭리하기보다는 자기의 사랑하는 존재, 제일 가까운 존재를 희생시켜 가지고 섭리를 추진시켜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를 발전시켜 나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우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자기의 아들딸까지도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시킬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소유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사랑하는 수많은 종들을 희생시켜 나오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반대하고 핍박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기를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했습니다. 아버지의 원이 자신을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사랑하고 살리고 싶으셨던 것이기 때문에 고이고이 그 뜻에 순응해 가는 것이 아들의 도리인 것을 알고 독생자 예수님은 제물이 되어 갔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물 중의 제물이 되어 간 것입니다. 자신은 비록 희생되더라도 하나님의 사랑만이 남아진다는 것을 알았던 예수님은 소원하던 하나의 세계가 기필코 이뤄질 것을 믿고 갔습니다. 거기서부터 세계는 수습되는 것이요, 거기서부터 새로운 역사의 기원은 한 단계 고차적인 입장을 결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한계선을 자기와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 하는 것이 곧 자신이 내일의 천국을 현재에서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오늘이 없으면 내일이 있을 수 없듯이 오늘의 승리의 기원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내일의 인연으로 연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시켜 원수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을 중심한 섭리역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자기 개인뿐만이 아니라 가정까지도 희생시켜야 합니다. 가정뿐만이 아니라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종족까지도 희생시켜야 됩니다. 그리고 국가를 구하기 위해서는 민족까지도 희생시켜야 되며,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가까지도 희생시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권을 만들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내 개인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되고, 내 가정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되며, 내 종족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됩니다. 또 내 민족을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해야 되며, 내 나라를 희생시키더라도 감사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나라가 나타나야 세계는 그 나라로 말미암아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과거의 역사노정에서 그 나라를 찾기 위해서 섭리를 추진해 나오신 것입니다. 나라를 위할 수 있는 개인이 있다면 그 개인의 전통을 이어받은 가정을 통해서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했고, 또 종족과 민족이 그 가정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나라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렇듯 그 나라를 찾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를 추진해 나오신 것입니다. (32-223)

나라를 찾아 세우려고 했던 예수님의 슬픔

오늘날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은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섭리하시는 목적도 그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태복음 6:31-33) 했습니다.
여기에서 그의 의라는 것은 행동의 가치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지 않고는 의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리에서 희생해야 되느냐? 하나님과 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자리, 즉 종적인 역사에 있어서 수직으로 흐르는 직계의 심정을 상속받아 가지고 세계를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개인을 그 나라 대신 사랑하고, 수많은 종족을 그 나라 대신 사랑하고, 수많은 민족을 그 나라 대신 사랑하고,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그 나라를 위해서 수많은 나라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전통의 인연을 가지고 그 나라를 사랑하기 위해서 희생의 길로 나가야만 의인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이지 그것 외에는 의인의 입장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나라를 위해서 죽더라도 절대적으로 정의에 입각한 생활을 해야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예수님도 나라를 사랑할래야 사랑할 수 없는 입장에 섰습니다. 마음으로는 사랑했지만, 실제로 사랑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되지 못했기에 예수님은 나라를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라가 이미 이지러졌고, 민족이 이지러졌으며, 백성이 이지러졌던 것입니다. 더욱이, 12사도들까지 전부 다 이지러져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붕괴된 입장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니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은 비참한 말입니다. 그 말이 바로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엮어져 온 하나님의 사연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느끼며 낙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불쌍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 태어나 30여 년의 생애를 통한 짧은 과정에서 나라를 갖지 못한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로되, 아버님은 태초부터 역사시대의 배후에서 복귀의 사명을 주도적으로 책임지시고 수습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셨는가! 사랑하고 싶은 나라를 갖지 못한 아버지가 얼마나 불쌍한가! 그 나라가 나올 때까지 오랜 역사를 이끌어 나오시면서 희생의 대가를 치렀는데도 불구하고 나라를 갖지 못하신 아버님은 얼마나 슬플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아버지여…’ 하고 부르며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대표한 아들이 아닐 수 없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여기에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32-225)

사랑과 희생

그렇기 때문에 아들딸과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팔려 가는 자신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또, 세상의 어떤 민족이나 국가를 중심삼고 팔려 가는 신세가 되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신앙인들은 국가 앞에 제재를 받았고, 사회 앞에 규탄을 받았으며, 가정과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핍박을 단절하고 밟고 넘어선 사람들이 오늘의 종교를 개척하여 온 중심적인 책임자들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들이 그 시대에 배척을 받고 몰림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오셨던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봄 절기가 한때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정성들이는 그 자리를 찾아서 그 사람을 중심으로 인연을 맺어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그리하여 그 인간의 일생을 통하여 조건을 세우면서 새로운 역사의 소망으로 접근해 나오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통일교회에서는 심정의 세계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가 심정을 중심삼은 개인적인 인격을 말하고, 심정을 중심삼은 가정적인 기준을 말하고, 심정을 중심삼은 민족과 국가 형태를 말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하면 오늘 이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가 관념적이거나 습관적으로 말하는 그런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내용에 입각한 심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딸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세계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자기 아내 혹은 자기 남편을 사랑하는 이상으로 세계를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중심삼고 이러고 저러고 하는 자들은 망하지 말라고 해도 망하고 맙니다. 역사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천 년 한의 역사를 품고 억울하게 죽어갔다면, 그는 미래의 소망으로 오는 수많은 인간들에게 자기의 한을 풀어 달라고 누구에게든지 독려하고 축원할 것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선민들의 죽음과 의인들의 피 흘림이 한이 되어 역사에 남아졌기 때문에 끝날에 있어 하나님의 섭리의 뜻이 이 지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내일을 맞을 수 있는 개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땅에서 자기의 아들딸만을 사랑하는 데 급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입장을 떠나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고, 혹은 하나님의 보장 하에 사랑할 수 있어야 보다 큰사랑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차피 소망의 한때를 이루기 위해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슬픈 사연을 내가 인식하고, 그 슬픈 사연을 내 심정으로 느끼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교차할 수 있는 교차점에 서야 합니다. 그 교차점이 나의 생활권입니다.
그래야 된다는 마음이 뼛골에서 우러나와 사랑하는 아들딸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느냐? 세계를 위해 내 아들딸을 희생시키고, 내 가정을 희생시키고, 내 종족을 희생시키고, 내 민족을 희생시키고, 내 나라까지 희생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라까지가 문제입니다.
오늘 통일교회가 가야 할 운명의 길은 내일의 나라, 내일의 세계를 상속받기 위하여 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기 위하여 결속한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딸을 제물로 삼아 내 종족을 희생시켜서라도 이 나라를 위하고 이 세계를 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 통일교회를 지도하는 선생님이 여러분을 고생의 자리로 내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희생의 자리에 내모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자체는 억울할지 모르지만 쓰러지고 죽어 제물이 되는 그 배후에 하나님의 사랑의 터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넓혀 종족권을 넘고, 그것을 넓혀 민족권 앞에 영향을 주고, 그것을 넓혀 국가의 기준을 바꾸는 날에는 새로운 나라의 깃발을 들고 세계를 향하여 진군할 수 있는 출발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향하여 가는 길이 통일교회의 길입니다. (32-227)

우리들이 가야 할 길

초민족적인 시대가 다가오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낙심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때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때의 절정을 맞을 수 있는 삼각지점, 즉 사탄의 악과 하나님의 선이 교차하려 부딪쳐 들어오는 순간에 이것을 선편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도 아니요, 사탄도 아닙니다. 오직 인간입니다.
이제 나라가 그럴 수 있는 때가 가까이 온 것입니다. 아시아의 정세가 세계의 모든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기운이 휘몰아쳐 오는 절박한 때가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앞에 세계적인 운세를 결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을 맞아 가지고 어떻게 이때를 뜻맞게 넘기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무리와 종족과 단체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한 그런 단체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통일교회가 그런 단체가 되려고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입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교단을 제물로 삼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감정을 한 기점으로 일치시키면, 여기서부터 새로운 창조의 능력은 무한히 뻗어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가 수습됩니다.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하나님의 사랑의 인연을 결속시켜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합하는 자리에 서게 되면 그 가운데 나라가 있는 것이요, 나라 가운데 민족이 있는 것이요, 그 가정 가운에 개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라를 부활시킬 수 있는 국민이 되었다고 할진대 그 국민은 자동적으로 해방을 맞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국민이 선주권 내에 서게 될 때는 일시에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나라의 주권이 서게 되면 민족도 구원할 수 있고, 종족도 구원할 수 있으며, 가정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라가 결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평면 세계에서는 이것이 핵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상에서 인류가 찾아 나온 것이 바로 이 핵입니다.
하나의 국가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이 문제입니다. 통일교회에서 축복받은 가정들은 나라를 위하여 제물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여기서부터 갈라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알고 말을 잘 하는 것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적과 심정이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의 경계선은 심정의 경계선, 실적의 경계선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축복받은 가정들은 축복받고 태어난 자녀들이 귀하다고 감싸려고 하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축복받은 가정의 자녀들을 제물로 삼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자녀들을 나라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그 나라를 위해서 희생시킬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이들을 희생시킨다는 각오로 나서야 합니다. (32-229)

참된 내일을 맞기 위해 제물의 길, 희생의 길로 가라

이렇게 살고 이렇게 싸워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현재에 있어서 내일을 맞을 수 있고 내일을 차지하고도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내일을 준비해 놓고 가기 때문에 미래의 천국은 그의 것이 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천국 가자” 하는데, 천국을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 땅 위에서 천국을 맞고 가야 됩니다. 땅 위에서 천국을 맞기 위해서는 사랑의 법도를 거치고 가야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하는 자녀들이 많이 태어나면 태어날수록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사랑해야 할 십자가가 가중된다는 것을 느껴야 합니다. 그 가정에 아들딸을 많이 보내는 것은 짊어질 십자가가 많다는 것이므로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할 책임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내용을 알고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가정이라야 그 가정에 후대를 상속받을 수 있는 운세를 가진 아들딸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체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한 심정적인 대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이 그런 심정적인 대표가 되어야 하고, 종족이 그런 심정적인 대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러한 개인과 가정 그리고 종족은 세계를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개인과 가정 그리고 종족이 되기 위해서는 어느 때든지 자기 가족과 종족 전체가 희생되더라도 하나님 앞에 당연하게 바쳐질 수 있는 전통을 남겨야 됩니다. 그러한 일을 하다가 죽은 가정과 종족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하여 미래를 차지한 종족이 되기 때문에 죽어서 저나라에 가서도 그것이 바뀌지 않습니다. 저나라에 가서도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러한 길을 거쳐 나가지 않고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 전체를 단결시켜서 심정적 일치점을 가지게 하여 이 나라를 앞으로 올 소망의 나라를 위해 제물로 바쳐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 환경의 터전 위에 천상의 인연을 맺어 가지고 새로운 창조역사를 이룰 수 있는 세계적인 결실을 맺었으면 하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내일을 맞자’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렸으니, 여러분이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32-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