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0일
인류의 결실 (훈독본)
- 제3회 자녀의 날 기념행사에서 하신 말씀 -
날짜 : 1962. 10. 28(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끝날에 있을 심판의 역사
오늘날 이 땅 위의 타락한 우리 후손들은 많은 추수의 날을 가져 보았습니다. 인간들은 추수하는 기쁨과 뿌리는 기쁨을 가져 보았지만, 하나님은 아직까지 추수의 기쁨을 가져 보시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추수의 열매를 대할 적마다 여러분은 과거에 추수하던 그런 입장에서 추수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거두어들인 한 포기의 곡식, 하나의 씨는 이 천지만물을 지어 놓으신 아버지가 바라시는 소원을 내가 대신되는 입장에서 거두고 뿌릴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어 가지고 자라던 과정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꺾이고 말았으니,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런 고로 하나님이 씨를 다시 뿌릴 수 있는 소원의 한 날을 일구월심 잊지 않고 바라고 나오신 날이 심판날입니다. 지금까지 뿌려 놓았던 인류가 자라다가 꺾여 나갔으니, 이것을 하나님이 살리는 역사를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하나님은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두 결실적인 존재를 거두어 들여야 할 소망의 한 날을 세우고 역사를 끌고 나오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의 날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혼인잔치가 벌어지며, 신랑 신부가 나타나 어린양 잔치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날이 곧 하나님이 본래의 창조이상을 세우시고 씨앗을 심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인연을 세우려고 하셨던 날입니다.
그리하여 끝날에 이르러 본연의 참다운 조상이 되는 부부를 만들어 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섭리의 역사요, 복귀의 역사요, 끝날에 있을 심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151-81)
대심판의 한 때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류의 결실’이라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로 볼 때, 본래는 하나님이 곡식을 심었는데 사탄이 이것을 가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라지와 같은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道)의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세상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도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의 도수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차적인 종교입니다. 그리하여 최고의 심정세계까지 부정하고 나서게 되면 최고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어떤 사정이냐? 하나님이 철창(鐵窓)을 뚫고 들어가서 채찍으로 몰아내듯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인간이 그것을 타고 넘어 나와야 됩니다. 그 철조망을 끊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철조망을 다 철거시키는 날에 인간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대심판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계에는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려면 국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쳐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철조망입니다. 이 철조망을 철폐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개인이 대하는 날에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개인의 투쟁시대에 있어서는 개인의 철조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정을 위주로 한 투쟁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의 철조망이 있고 종족, 민족, 국가의 철조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외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왜 이렇게 됐느냐? 이것은 역사는 우리가 모르지만 거기에는 그 무엇, 어떻게 할 수 없는 배후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헤쳐 보면 그것이 한 방향을 향하여 뚜렷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51-86)
심정을 위주로 한 종교가 되어야
그러면 어떠한 역사를 중심삼고 세계가 수습될 것이냐? 오늘날 이 세계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세계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날 민족이나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배경은 전부 다 종교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의 역사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가 인연되어 있고, 미래도 그러한 인연을 갖고 나가야 할 운명도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세계는 어떤 세계가 되느냐? 하나의 세계, 하나의 주의를 중심삼은 세계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철학들이 있지만, 다 깨지는 것입니다. 심정철학을 말할 수 있는 철학자가 나와야 됩니다. 또, 종교는 심정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사상은 심정사상, 주의도 심정주의를 들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심정은 어디서부터 나와야 되느냐? 오늘날 이 땅 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인간조상의 후손들로서 6천 년이나 지나왔지만 6천 년 전과 심정은 같습니다. 또, 하나님과 인간의 심정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교리적인 교본을 갖고 투쟁하는 종교시대는 지나갑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메시아다’ 했습니다. 또, ‘구주다’ 했으니 인류 가운데는 ‘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나는 인류의 소망의 본체이고, 인류의 생명의 본체이고, 인류의 근원체다”란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독생자다’ 했습니다. 독생자(獨生子)라는 말은 “너희들은 아들이 아니다” 한 것입니다.
또, 그 다음에 인간들에 대해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니 모셔라’ 했습니다. 열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복음 15:15)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심정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게 될 때 어떤 사명을 가지고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주적이고 대가족적인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메시아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결하고, 메시아가 메시아로서 인류 앞에 필요하게 되려면 이 심정적인 기반 위에 모든 여건을 구비하여 소망적인 심정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내용의 인격자라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그분이 메시아가 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1-91)
세계에서 최고로 행복한 자리
그 다음에 예수님은 죽으면서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려주지 마시옵고 내게 짊어지게 해주시옵소서’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죄를 남에게 지우려고 했다가는 거짓된 선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진리를 선포한 자기 시대를 초월해 천주적인 인연을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기 위한 생활관을 세웠고 생애적인 투쟁노정을 거쳤습니다. 그 최후의 결말도상에서 예수님이 바랐던 마음도 역사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기원을 헤쳐 볼 때, 과연 예수님이 말한 것은 세계적인 인연을 거쳐 간 말씀이었고, 오늘날 그것이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로 등장하게 된 원인도 그러한 내용에 기인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내용이 구비되어 있으므로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최고로 남아질 수 있는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우주보다 더 크다고 했는데, 오늘날 이 사탄 세계는 죄악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한 생명을 우주보다 더 크다고 가치를 설정한 기준은 심정세계에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에 연결된 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앞으로 필연코 남아질 수 있는 종교는 심정적인 것이어야 됩니다.
오늘날 노동자의 가정에서 콩 하나를 중심삼고 식사를 하는 초라한 살림살이를 하더라도 일국의 대통령이 “당신을 놓고는 못 살겠소” 이렇게 된다면, 그 자리가 백악관보다 나은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물 한 그릇을 놓고 밥을 먹는 자리라도 하나님이 “너 없이는 못 살겠다” 하는 자리는 세계에서 최고로 행복한 자리입니다. (151-95)
하나님은 최후에 남겨질 종교의 주인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영광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그 하나님은 한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적인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입니다. 이 지구성에는 하나님이 발붙이실 곳이 어느 한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굶어도 같이 굶고, 추워도 같이 춥고, 기뻐도 같이 기뻐해야 할 내용을 갖고 지으셨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이렇게 사는 걸 볼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도 잘못했지만, 그 원인은 원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원수 하나를 잡자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원수 앞에 시달렸느냐, 원수 앞에 얼마나 피를 빼앗겼느냐, 원수 앞에 얼마나 억울했느냐, 얼마나 통곡했느냐, 내 살에는 원수의 채찍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내 등에는 원수의 창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내 가슴에는 원수의 화살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그러한 심정의 도리를 세워야 할 하나님은 최후에 남겨질 종교의 주인입니다. (151-97)
결실의 땅을 향하여 걸어오신 하나님
하나님이 제일 슬픈 분입니다. 제일 분하고 불쌍하신 주인공이 하나님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옷자락은 영광스럽게 맞추어 입은 그런 옷자락이 아닙니다. 그 옷은 당신의 아들딸이 손으로 붙들겠다고 했다가 못 붙든 손의 피 어린 옷자락입니다. 그 신은 가시밭을 헤쳐 나온 수많은 투쟁역사에서 상처를 입은 그런 발걸음을 담은 신입니다. 그 육신은 한 개인이 매를 맞고 쓰러질 때 대신 맞아 나오신 육신입니다. 그분은 한 민족을 세워서 여러 민족들이 배반하게 될 때 대신으로 맞게 하기 위해서 투쟁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오는 하나님은 이렇게 불쌍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해방을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을 해방하자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공이 큰 웃음으로 웃으며 춤을 추시지 못하는 한 천하는 기쁠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데, 인간이 기뻐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도인들은 “고생해라, 울라, 통곡해라, 죽는 자리에 있어서도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계적인 투쟁의 선봉에서 사탄의 수천만 화살을 홀로 맞아 나오신 분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찾으시기 위해서냐?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탄도 본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낳기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는데, 가기는 원수의 세계로 간 것이 타락입니다. 이 원수의 철망을 끊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밭 한 평 없습니다. 집 한 채가 없습니다. 돌짝 밭에 쓰러진 곡식 이야기, 무슨 가시밭에 떨어진 씨의 비유, 길가에 쓰러진 비유 같은 것은 다 아버지가 거쳐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하늘의 곡절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길에서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돌짝 밭 가운데서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백 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옥토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가시밭 가운데서 옥토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맨 끝날에 와서 하나의 옥토를 마련하여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천 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땅을 향하여 하나님은 걸어오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우리가 모실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종교입니다. (151-100)
직계의 자리를 상속받으려면 직계의 부모가 나와야 돼
앞으로 여러분의 종교가 최후에 심정의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교라면 하나님이 제일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는 종교일 것입니다. 불쌍하고 억울한 하나님, 분통하고 한이 넘치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는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슬픈 하나님을 모를 때는 해방시켜 주는 하나님을 모르고 심판하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역사적인 종교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종교가 나와야 시대적인 종교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그런 심정을 통할 수 있게 해서 그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위로할 줄 아는 종교를 만들어야만 그 종교가 끝날에 남아질 종교일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참다운 아들딸, 즉 인류 수확의 결실로서 거두어질 수 있는 참부모입니다. 여러분, 참부모를 잃어버렸지요? 전부 다 거짓부모의 자식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정의 실체, 하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실체,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체가 필요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하나님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시대적인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혹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진 그러한 분입니다. (151-102)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세계적인 결실을 거두는 것
앞으로 끝날에 추수의 결실로서 나타나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는 인류의 총 결실적인 실체입니다. 외로운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찾아 나오시던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투쟁하며 찾아 나오시던 하나의 실체입니다. 그를 세워 자기의 이상하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소망의 실체요, 그를 세워 생활하기 위한 생활의 실체요, 그를 세워 영원 무궁토록 안식하기 위한 심정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이 떼어놓을 수 없는 분으로서 인류가 잃어버렸던 참부모입니다.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인류가 참부모를 찾아 하나님을 위주로 한 본래의 원천적인 발판을 이 지구성에 마련하고 출발하게 되면, 그것이 새 시대입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의 때부터 노아 때에도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었습니다. 6천 년 만에 아담 하나를 키워 놓은 것입니다. 그게 복귀역사입니다. 오늘날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세웠던 참이 될 수 있는 한 자녀를 세워 놓지 못했습니다. 참부모를 위주로 하여 하나님을 중심삼은 대가족의 이상주의 사회가 지상천국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화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고, 또 모든 것이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오늘날 어떤 민주주의 사상이 있으면 그 주의나 사상을 얼마만큼 잘 표현했느냐에 따라서 역사적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심정적인 하나의 세계가 나오면 그 우주적인 결실체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결실의 가정이 나올 것이고, 이러한 역사적인 가정의 기준이 나오는 동시에 종족의 기준이 나오고, 민족과 국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천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151-104)
진짜 효자
앞으로 우리는 이 역사 도상에서의 하나의 실체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 메시아의 심정을 소개하고, 하나님이 섭리하시던 역사적인 심정을 소개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심정적으로 모든 사정을 알아주고, 또 모든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한 점을 세워야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은 부족할지라도 하늘을 위하고자 하는 소망과 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뼛골이 더 부러지도록 하옵소서” 하면서 파고 들어갈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의 세계일망정 생활무대를 하나님을 위주해야 됩니다. 민주진영인 기독교 이념권 내에서 심정적인 아들딸을 세워 가지고 상속시키기 위한 날이 심판 날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디서 만나야 되느냐? 겟세마네 동산 위에 나타나시는 아버지를 만나야 됩니다. 십자가의 산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시던 그 아버지를 붙들고, 십자가의 도상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시던 그 아버지를 붙들고 통곡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효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사회의 어떤 사회 제도, 어떤 사회 풍습, 어떤 사회 상황이 휩쓸어 가지 못합니다. 행랑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루한 옷을 입더라도 천만 근 장식 하에 잘 입은 부잣집 아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아무리 굶고 앉아 있는 자리, 밤을 세워 눈물을 흘리는 자리라고 해도 어느 왕궁에서 풍류를 갖추어 음악소리를 들으며 무슨 시를 감상하는 것보다도 더 귀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151-107)
심정의 세계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서 효성을 하고 어떤 입장에서 충성을 해야 되느냐? 웃고 춤추는 자리에서 효도의 명분, 효자의 명사를 받는 사람은 잘못 되어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울고, 춥고, 처량한 자리에서부터 그렇게 되지 못하면 완전히 하나님의 진액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가 가을 절기에 씨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진액을 끌어당겨야 됩니다. 우리는 6천 년 뿌리로부터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당길 수 있는 자력의 힘을 가진 자가 되어야만 자기 스스로 하나의 결실을 완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태풍이 불어 올 때의 고난을 거쳐야 됩니다.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뿌리로 하여 복귀섭리의 줄기를 중심삼고 가지에 있어서 하나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 마당에 있어서 결실될 수 있는 자체는 남들이 끌어당기지 못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백 퍼센트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6천 년 심정의 결실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여러분은 지나간 날의 역사를 알고, 오늘날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알고, 다가오는 미래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을 가려면 울어라 이거예요. 눈을 땅에 대고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렸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피를 흘려 가면서 싸웠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탄이 제거됩니다. 그것이 최일선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각오하고 나선 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여러분이 역사적인 섭리의 뜻 앞에 거두어지는 하나의 결실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51-109)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랄 적부터의 것을 전부 다 알아서 그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시집은 오늘 왔을망정 알기는 옛날 몇 대조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았던 사정까지 알게 되면 그 색시가 그 집을 살리는 것입니다. 시집 온 며느리가 다 모르지만 옛날 조상의 인연을 다 캐서 그걸 알아 가지고 선조들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우리 선조도 이렇게 거룩했다” 하면서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 며느리가 상속을 받는 것이 천리의 원칙입니다.
아무리 불구 며느리라도 그런 심정만 갖추어서 박사 며느리보다 훌륭하게 되면 심정의 세계에는 그 불구 며느리가 상속을 받습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식을 닮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보다 더 뜻을 대해서 통곡을 하고 뜻을 대해서 그저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딸이 자기보다도 더 훌륭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욕심쟁이입니다. 자기보다 훌륭한 아들딸이 나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의 결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에덴 동산에 씨를 심어서 거둔 열매를 또 천하에 뿌려 가지고 번식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그 이념적인 기준이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 열매를 거두어서 세계에 뿌려 가지고 전부 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세우는 일을 선생님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결실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51-111)*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0일, 원문
인류의 결실 17221
- 제3회 자녀의 날 기념행사에서 하신 말씀 -
날짜 : 1962. 10. 28(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끝날에 있을 심판의 역사
오늘날 이 땅 위의 타락한 우리 후손들은 많은 추수의 날을 가져 보았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면, 그것이 한여름을 통해 자라서 가을을 맞이하여 그 결실을 자기의 것으로 추수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추수한 그 결실을 거두어 또다시 심을 수 있는 날을 가져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들은 추수하는 기쁨과 뿌리는 기쁨을 가져 보았지만, 하나님은 아직까지 추수의 기쁨을 가져 보시지 못했습니다. 그 뿌린 싹에서 소망스러운 추수의 날을 하나님은 가져 보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추수의 열매를 대할 적마다 여러분은 과거에 추수하던 그런 입장에서 추수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내 손으로 거두어들인 한 포기의 곡식, 하나의 씨는 이 천지만물을 지어 놓으신 아버지가 바라시는 소원을 내가 대신되는 입장에서 거두고 뿌릴 줄 아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심정적인 기준을 갖추지 못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날 인간도 하나의 씨를 뿌렸다가 그 씨가 자라 하나의 결실을 거두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사노정을 거쳐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 우리 인류의 시조인 아담 해와를 지어 가지고 뿌려 놓으신 것입니다. 그 아담 해와가 자라던 과정에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꺾이고 말았으니,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런 고로 하나님이 씨를 뿌렸으나 거둘 수 없는 결실의 인연을 부여안고 오늘까지 다시 뿌릴 수 있는 소원의 한 날을 일구월심 잊지 않고 바라고 나오신 날이 심판날입니다. 심판날은 인류 수확의 날입니다. 지금까지 뿌려 놓았던 인류가 자라다가 꺾여 나갔으니, 이것을 하나님이 살리는 역사를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하나님은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두 결실적인 존재를 거두어 들여야 할 소망의 한 날을 세우고 역사를 끌고 나오셨습니다. 그 날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재림의 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주님을 신랑이라고 하며, 자신들은 신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시면 혼인잔치가 벌어지며, 신랑 신부가 나타나 어린양 잔치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날이 곧 하나님이 본래의 창조이상을 세우시고 씨앗을 심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하나의 인연을 세우려고 하셨던 날입니다.
그것이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피와 눈물과 땀을 흘려 나오셨습니다. 그리하여 끝날에 이르러 한 날을 세우셔서 여기에 그러한 본연의 참다운 조상이 되는 부부를 만들어 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섭리의 역사요, 복귀의 역사요, 끝날에 있을 심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151-81)
대심판의 한 때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류의 결실’이라는 주제입니다. 오늘날 이 때는 어떤 때냐? 큰 물결이 부딪쳐 여기에 하나의 물결이 첨부해 들어올 수 있는 끝날입니다. 끝날은 지상에서 벌어지는 사조의 공포가 문제가 아니라 이 사조의 공포를 휘몰아 넘길 수 있는 고기압적인 태풍권이 내습하는 때입니다. 그 말은 이 지상의 인류는 타락한 후손들이기 때문에 옳지 못한 열매들로 되어 있으니, 이들을 걷어 치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서에 보면, 가라지가 나오고 곡식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섭리로 볼 때, 본래는 하나님이 곡식을 심었는데 사탄이 이것을 가라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가라지와 같은 입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道)의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몸을 치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도는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의 도수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차적인 종교입니다. 그리하여 최고의 심정세계까지 부정하고 나서게 되면 최고의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인들은 인생행로에 있어서 도주자(逃走者)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생활을 해 보면 실감이 날 것입니다. 도인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돌파할지 자나깨나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길을 개척하기 위한 것이 도의 길이요,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외쳐 온 것이 하나님의 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은 어떤 사정이냐? 하나님이 철창(鐵窓)을 뚫고 들어가서 채찍으로 몰아내듯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 놓았으니까 인간이 그것을 타고 넘어 나와야 됩니다. 그 철조망을 끊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인류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철조망을 다 철거시키는 날에 인간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 날이 바로 대심판날입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오늘날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전부 다 불살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철조망을 끊고 가고픈 데로 가라는 것입니다. 콩알이면 콩 섬을 찾아가야 되고, 벼알이면 볏섬을 찾아가야 되고, 조알이면 조 섬을 찾아가야 되듯이 끼리끼리 찾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문화는 끼리끼리 모입니다. 사상이 다르면 그 민족을 떠나 사상이 같은 동지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계에는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가려면 국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쳐 놓았습니까? 그것은 본래 하나님이 쳐 놓은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철조망입니다. 이 철조망을 철폐하는 운동을 벌여 나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과 개인이 대하는 날에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개인의 투쟁시대에 있어서는 개인의 철조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정을 위주로 한 투쟁시대에 있어서는 가정의 철조망이 있고 종족, 민족, 국가의 철조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나 세계적인 대학자들은 세계적인 전문분야 혹은 세계적인 역사를 찾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역사를 찾는 데 있어서는 오늘날 인간을 중심한 그런 역사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더 높고, 더 크고, 더 무한한 이념적인 내용을 기반으로 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그런 역사적인 인연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찾아야 됩니다.
그런 역사적인 배경을 찾아서 그 배경을 중심삼고 나오던 다른 하나의 근원지를 밝혀서 그 역사적인 배경이 왜 이렇게 되어 나왔고, 그렇다면 그것이 이 시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그 시대에 대한 관계를 맺어 주고, 그 시대로부터 어떤 시대로 갈 것이냐 하는 것까지 관계를 맺어 줄 수 있는 세계로 안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류역사가 그렇다면 하나의 문화도 그렇습니다. 하나의 정치나 사상 등 전부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의 이념적인 상충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외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왜 이렇게 됐느냐? 이것은 내 한 몸으로부터 벌어져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역사는 우리가 모르지만 거기에는 그 무엇, 어떻게 할 수 없는 배후의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리 가면 들이쳐서 저리로 가게 하고, 저리 가면 들이쳐서 이리로 가게 해서 역사를 헤쳐 보면 그것이 한 방향을 향하여 뚜렷이 나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151-86)
심정을 위주로 한 종교가 되어야
그러면 어떠한 역사를 중심삼고 세계가 수습될 것이냐? 이것을 헤아려 볼 때, 그 내용과 미쳐진 인연이 넓고 큰 역사관을 가진 민족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오늘날의 역사는 미국을 위주로 한 것도 아니요, 소련 역사를 위주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의 역사는 무슨 역사냐? 기독교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세계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오늘날 민족이나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배경은 전부 다 종교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인간의 역사는 인간 개개인의 역사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시대가 인연되어 있고, 미래도 그러한 인연을 갖고 나가야 할 운명도상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세계는 어떤 세계가 되느냐?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主義)는 하나의 주의를 중심삼은 세계가 됩니다. 오늘날 많은 철학들이 있지만, 그 시대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깨지는 것입니다. 심정철학을 말할 수 있는 철학자가 나와야 됩니다. 또, 종교는 심정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사상은 심정사상, 주의도 심정주의를 들고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심정은 어디서부터 나와야 되느냐? 근원으로부터 나와야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태어난 사람들은 인간조상의 후손들로서 6천 년이나 지나왔지만 6천 년 전과 심정은 같습니다. 또, 하나님과 인간의 심정도 같습니다. 심정의 터전은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교리적인 교본을 갖고 투쟁하는 종교시대는 지나갑니다. 종교는 심정을 위주로 한 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말하기를 ‘나는 메시아다’ 했습니다. 아주 제일 좋은 뜻으로 말했습니다. 허덕이는 인간들 앞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했습니다. 그게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또, ‘구주다’ 했으니 인류 가운데는 ‘나밖에 없다’는 말이 아니었어요? 그 말은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지만 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인류의 소망의 본체이고, 인류의 생명의 본체이고, 인류의 근원체다”란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한 것입니다.
그것 하나만 가지고도 예수님은 구주의 자격이 있었다고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이적기사는 차치하고서도 말입니다. 그것만 틀림없다면 그는 메시아요, 구주였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인류를 대신하여 하나의 총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배포를 가지고 손을 들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독생자다’ 했습니다. 독생자(獨生子)라는 말은 “너희들은 아들이 아니다” 한 것입니다. 그것은 대상적인 부정이 아니요, 상대적인 부정도 아니었습니다. 절대적인 부정이었습니다.
또, 그 다음에 인간들에 대해서 ‘나는 신랑이요, 너희는 신부니 모셔라’ 했습니다. 열녀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모시겠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저 자지 않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정성들이라고 했지 신랑이 와서 해주겠다는 말은 없다는 것입니다. 전부 신부들이 준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는 말이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15:15)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 심정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게 될 때 어떤 사명을 가지고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주적이고 대가족적인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메시아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완결하고, 메시아가 메시아로서 인류 앞에 필요하게 되려면 이 심정적인 기반 위에 모든 여건을 구비하여 소망적인 심정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는 내용의 인격자라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메시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견지에서 볼 때, 그분이 메시아가 안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51-91)
세계에서 최고로 행복한 자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어서 자기 종족을 중심삼고 기뻐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만민은 내 아들딸이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죽으면서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려주지 마시옵고 내게 짊어지게 해주시옵소서’ 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였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죄를 남에게 지우려고 했다가는 거짓된 선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통해 말한 것이냐? 진리를 선포한 자기 시대를 초월해 사나이의 일념을 세워 천주적인 인연을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러기 위한 생활관을 세웠고 생애적인 투쟁노정을 거쳤습니다. 그 최후의 결말도상에서 예수님이 바랐던 마음도 역사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반역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수천 년 동안 수고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터를 닦아 나오시던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이는 걸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저주했습니다. 비난을 퍼부은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 인들이여”(마태복음 23:13)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이름을 중심삼고 예수님을 창으로 찌른 그들을 향해서는 용서해 주었습니다. 기독교가 이방적인 민족을 통해서 세계적인 발판을 닦아 나오는 인연도 거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기원을 헤쳐 볼 때, 과연 예수님이 말한 것은 세계적인 인연을 거쳐 간 말씀이었고, 오늘날 그것이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로 등장하게 된 원인도 그러한 내용에 기인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런 내용이 구비되어 있으므로 오늘날의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최고로 남아질 수 있는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돈이 많더라도 심정을 중심삼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돈은 다 필요치 않습니다. 돈 몇 천억을 지금 준다고 할 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바꿀 수 있겠어요? 천지를 주고 바꾸자고 해도 그거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생명이 우주보다 더 크다고 했는데, 오늘날 이 사탄 세계는 죄악이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한 생명을 우주보다 더 크다고 가치를 설정한 기준은 심정세계에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에 연결된 한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즉, 자신을 빗대어 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적인 인연을 가지고 있는 자기 부모를 천지를 받고 팔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식을 천지를 받고 팔 수 있겠어요? 부정의 도리에 있어서 가정에서부터 세계무대까지 부정의 투쟁노정을 거쳐 가지고 모든 것을 부정했다는 인정을 받은 다음에 그렇게 부정한 것을 다시 찾았다는 결정을 받고서야 돌아올 수 있습니다. 지금 인간들은 그런 운명에서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앞으로 필연코 남아질 수 있는 종교는 심정적인 것이어야 됩니다. 또, 오늘날 국가 주권의 이념도 그래야 됩니다. 세계의 어떠한 주의나 사상도 그 기준에 가서는 “이제 됐다. 내 집이 제일이다” 합니다. 나그네들이 여행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집을 떠나면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만큼 편하지 않습니다. 내 집이 제일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아들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된장찌개를 해놓고 보리밥을 먹더라도 그게 제일이다 이겁니다.
거기에서 보리밥을 해 먹고 살더라도 그곳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탄 세계의 사람들보다 다른 것이 있다는 거예요. 또, 달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노동자의 가정에서 콩 하나를 중심삼고 식사를 하는 초라한 살림살이를 하더라도 일국의 대통령이 “당신을 놓고는 못 살겠소” 이렇게 된다면, 그 자리가 백악관보다 나은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물 한 그릇을 놓고 밥을 먹는 자리라도 하나님이 “너 없이는 못 살겠다” 하는 자리는 세계에서 최고로 행복한 자리입니다. (151-95)
하나님은 최후에 남겨질 종교의 주인
하나님은 한이 많으신 분입니다. 분하고 통곡에 사무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영광의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그 하나님은 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고 우리를 이끌어 나오신 역사적인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이요, 고통의 하나님입니다. 눈물이 눈시울을 적시며 앞을 막던 그런 처량한 길을 찾아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지구성에는 하나님이 발붙이실 곳이 어느 한 곳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들딸을 낳아서 자기 가정을 중심삼고 “좋구나! 오늘 추우니 불을 더 때라” 하는 그러한 자리는 하나님이 같이하실 자리가 못 됩니다. 내 집, 내 사회, 내 국가가 그러하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와 천지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제일 불쌍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그렇게 내버려두고 당신만 영원히 갈라져 살게끔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래의 창조원리가 그렇게 안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굶어도 같이 굶고, 추워도 같이 춥고, 기뻐도 같이 기뻐해야 할 내용을 갖고 지으셨습니다. 그런 인간들이 이렇게 사는 걸 볼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도 잘못했지만, 그 원인은 원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은 원수 하나를 잡자는 것입니다. 사람을 잡자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원수 앞에 시달렸느냐, 원수 앞에 얼마나 피를 빼앗겼느냐, 원수 앞에 얼마나 억울했느냐, 얼마나 통곡했느냐, 내 살에는 원수의 채찍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내 등에는 원수의 창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내 가슴에는 원수의 화살 자국이 얼마나 남아 있느냐? 그러한 심정의 도리를 세워야 할 하나님은 최후에 남겨질 종교의 주인입니다.
천주의 이념적인 기준으로 심령의 세계를 세워 놓아야 할 그분은 누구부터 찾느냐 하면 불쌍한 자부터 찾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을 찾기 위해 밤낮을 헤아리지 않겠습니다. 손이 찢어지든, 다리가 찢어지든, 욕을 먹든, 몸이야 어디에 가 처박혀 죽든 난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해도 당신을 찾지 못하거든 아버지를 찾아야 된다는 유언이라도 남기고 죽겠습니다” 할 수 있는 무리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151-97)
결실의 땅을 향하여 걸어오신 하나님
하나님이 제일 슬픈 분입니다. 여러분은 이걸 알아야 됩니다. 제일 슬픈 분입니다. 여러분이 죽어 가는 우리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우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더 슬픈 분입니다. 선을 주장하다가 모든 만민이 공인하는 그 자리에 있어서 민족 반역자로 몰려서 원통하게 죽는 사람보다도 더 분한 분입니다. 제일 분하고 불쌍하신 주인공이 하나님입니다. 그것을 실감나게끔 가르쳐 줘야 할 것이 종교입니다.
아버님의 옷자락은 영광스럽게 맞추어 입은 그런 옷자락이 아닙니다. 피땀에 절은 옷자락입니다. 그 옷은 당신의 아들딸이 손으로 붙들겠다고 했다가 못 붙든 손의 피 어린 옷자락입니다. 그 신은 가시밭을 헤쳐 나온 수많은 투쟁역사에서 상처를 입은 그런 발걸음을 담은 신입니다. 그 육신은 한 개인이 매를 맞고 쓰러질 때 대신 맞아 나오신 육신입니다. 그분은 한 민족을 세워서 여러 민족들이 배반하게 될 때 대신으로 맞게 하기 위해서 투쟁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원통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고 나오는 하나님은 이렇게 불쌍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해방을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을 해방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생님의 사상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할 것이냐? 우리가 조그만 섬이라도 하나 있으면 그러한 자리에 가서 하나님을 안심시켜 드려야 합니다. 거기에서 돌감자를 심어 먹는 한이 있더라도, 거기에서 물을 떠놓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아버지를 붙들고 한없이 울기라도 하고 싶은 그런 길을 찾아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헤매는 사람들이 참다운 도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공이 큰 웃음으로 웃으며 춤을 추시지 못하는 한 천하는 기쁠 리 만무합니다.
어떤 주권자가 있는데 그 주권자가 수심에 사무쳐 있으면 그 주권자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무리는 전부가 슬픈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는데, 인간이 기뻐할 리 없습니다. 그러니 도인들은 “고생해라, 울라, 통곡해라, 죽는 자리에 있어서도 참아라” 하는 것입니다. 개인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의 고개를 넘고,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죽음의 고개를 넘고, 종족·민족·국가·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가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세계적인 투쟁의 선봉에서 사탄의 수천만 화살을 홀로 맞아 나오신 분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찾으시기 위해서냐? 잃어버린 자식을 찾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탄도 본래는 하나님의 아들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낳기는 하나님의 아들을 낳았는데, 가기는 원수의 세계로 간 것이 타락입니다. 이 원수의 철망을 끊어야 됩니다. 그러한 포로수용소와 같은 곳이 바로 지상지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을 주장해 나온 사람, 양심을 세우고 진리를 탐구하던 그런 사람들은 어느 누구나 막론하고 이 세상을 바꾸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부정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러한 부정 가운데서 진실을 찾아 나왔고, 지금도 그렇게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세상에서 밭 한 평 없습니다. 집 한 채가 없습니다. 양복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돌짝 밭에 쓰러진 곡식 이야기, 무슨 가시밭에 떨어진 씨의 비유, 길가에 쓰러진 비유 같은 것은 다 아버지가 거쳐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하늘의 곡절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길에서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돌짝 밭 가운데서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백 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옥토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가시밭 가운데서 옥토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하여 맨 끝날에 와서 하나의 옥토를 마련하여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천 배의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땅을 향하여 하나님은 걸어오셨습니다. 이러한 아버지를 우리가 모실 수 있는 도리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 종교입니다. (151-100)
직계의 자리를 상속받으려면 직계의 부모가 나와야 돼
앞으로 여러분의 종교가 최후에 심정의 세계를 연결시킬 수 있는 종교라면 하나님이 제일 불쌍한 분이라는 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는 종교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고 훌륭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쌍하고 억울한 하나님, 분통하고 한이 넘치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세밀히 가르쳐 주는 종교가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효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부모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인다고 하더라도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당장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붙들고 통곡해야 될 그런 환경인데 “그러지 말고 고기 먹으소” 하면 먹겠느냐 말이에요. 고기를 먹게 하려면, 먼저 그 사정을 어머니 아버지보다 잘 아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보다 그 사정을 잘 아는 아들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에 사무쳐서 “어머니 아버지,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발 나를 봐서도 그래선 안됩니다” 이렇게 하면 “오냐, 그렇게 하자” 그럴 수 있지만, 이것은 속도 아무 것도 모르고 “이것 먹고 울지 마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슬픈 하나님을 모를 때는 해방시켜 주는 하나님을 모르고 심판하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역사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이 나와야 역사적인 종교의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시대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종교가 나와야 시대적인 종교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을 가르쳐 주고 그런 심정을 통할 수 있게 해서 그 심정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위로할 줄 아는 종교를 만들어야만 그 종교가 끝날에 남아질 종교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에 창조한 모든 만물들은 사람 하나를 세우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온 천하를 주관하게 하기 위한 사람 하나의 자유스러운 무대를 만들기 위해서 만물을 지으신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참다운 아들딸, 즉 인류 수확의 결실로서 거두어질 수 있는 참부모입니다. 인류의 참부모입니다. 여러분, 참부모를 잃어버렸지요? 전부 다 거짓부모의 자식들입니다. 원수의 피를 받고 태어난 자식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정의 실체, 하나님의 사정을 통할 수 있는 실체,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 실체가 필요합니다. 이는 역사적인 하나님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의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시대적인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적인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혹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심정과 동반할 수 있는 인연을 가진 그러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온 인류가 전부 다 고아들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갖고 있지만 사탄 세계의 어머니 아버지입니다. 혈통적인 인연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종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실은 종의 자식도 못됩니다. 그래서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종으로밖에 취급받지 못하던 것을 종으로 취급해서 종의 인연을 세우고 양자의 인연을 세워 나온 것이 섭리역사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지금 양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이름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내용이 로마서 8장에 있습니다. 양자가 되기 위해서 허덕이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인들입니다. 양자가 되어서 될 것 같습니까? 양자에서부터 직계의 자리를 상속받아야 됩니다. 이 직계의 자리를 상속받으려면 직계의 부모가 나와야 됩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타락한 인간이 반대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 반대로 찾아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종에서부터, 양자로부터 형제를 세워서 자녀의 자리에 올라간 다음에 부모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되는 것입니다. (151-102)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세계적인 결실을 거두는 것
앞으로 끝날에 추수의 결실로서 나타나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그 메시아는 인류의 총 결실적인 실체입니다. 외로운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찾아 나오시던 하나의 실체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투쟁하며 찾아 나오시던 하나의 실체입니다. 그를 세워 자기의 이상하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소망의 실체요, 그를 세워 생활하기 위한 생활의 실체요, 그를 세워 영원 무궁토록 안식하기 위한 심정의 실체인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딸인 동시에 하나님이 떼어놓을 수 없는 분으로서 인류가 잃어버렸던 참부모입니다. 오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부모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은 인류가 참부모를 찾아 하나님을 위주로 한 본래의 원천적인 발판을 이 지구성에 마련하고 출발하게 되면, 그것이 새 시대입니다. 그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이 세계는 사탄의 수중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인 형태는 있지만 사람을 짓지 않은 세계와 마찬가지입니다. 6천 년 문화의 세계를 발전시켜 외형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태어나면 생활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닦아 들어오는 것이고, 이 내적인 세계에 있어서는 아담의 자녀를 길러 나오는 것입니다.
가인 아벨의 때부터 노아 때에도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었습니다. 6천 년 만에 아담 하나를 키워 놓은 것입니다. 그게 복귀역사입니다. 오늘날 지상에 하나님의 창조이상으로 세웠던 참이 될 수 있는 한 자녀를 세워 놓지 못했습니다. 참부모를 위주로 하여 하나님을 중심삼은 대가족의 이상주의 사회가 지상천국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그러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문화도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고, 또 모든 것이 그렇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심정적인 면에서 오늘날 어떤 민주주의 사상이 있으면 그 주의나 사상을 얼마만큼 잘 표현했느냐에 따라서 역사적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런 심정적인 하나의 세계가 나오면 그 우주적인 결실체로 말미암아 우주적인 결실의 가정이 나올 것이고, 이러한 역사적인 가정의 기준이 나오는 동시에 종족의 기준이 나오고, 민족과 국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날에는 천하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시느냐? 하나의 결실을 세워서 뭘 하실 것이냐? 이 세계적인 결실을 거두는 것입니다. 백 배, 천 배를 번식해 가지고 무엇을 하실 것이냐? 이 세계를 몽땅 품자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나가는 길에 있어서는 뭘 하려고 여기로 모여 왔느냐 하는 것입니다.
찬란하게 꽃 피어 결실할 수 있는 가을 절기가 다가왔습니다. 왔으니, 여러분은 다 죽은 돌감람나무를 전부 다 잘라 버리고 가을이 되기 전에 접붙여서 다시 번식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입니다. 그런 힘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마지막 종교입니다. 예수님도 말하기를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아내나 자식이나 무엇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전부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그러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자르고 접붙이면 자른 그 가지는 남겨 놓습니다. 그렇지만 뿌리는 딴 가지로 해서 접붙이는 것입니다. 조금만 참으면 그 가치 이상의 나무에 접붙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해보는 장사는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151-104)
진짜 효자
이러한 견지에서 바라보면, 앞으로 우리는 이 역사 도상에서의 하나의 실체를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문화의 세계를 바라보고 나가야 되느냐? 이러한 이념적인 견지에서 하나님의 심정을 소개하고, 메시아의 심정을 소개하고, 하나님이 섭리하시던 역사적인 심정을 소개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러한 문화적인 역사관을 지니고서 이 시대적인 세계를 수습할 수 있는 사명이 천하에 널려져 있는 수많은 종교들의 사명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통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심정적으로 모든 사정을 알아주고, 또 모든 소망과 일치될 수 있는 한 점을 세워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통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은 부족할지라도 하늘을 위하고자 하는 소망과 사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 뼛골이 더 부러지도록 하옵소서” 하면서 파고 들어갈 수 있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우는 자리에 들어가 보니까 우는 내 입장보다 더 서러우셨던 아버지가 나를 위로해 주셔야 할 입장에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억울하고, 나보다도 더 불쌍하고, 나보다도 더 처량한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여, 이 보따리를 전부 다 맡고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기도를 하지요? “복은 내게 주고 어려운 것은 당신이 가지십시오” 하는 그런 불효자가 어디 있습니까? 효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어요?
효자는 “아버지가 술을 먹든, 어떻게 되든, 죽든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위하여 벌거숭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몸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서 충성하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어느 시대의 신앙인들보다 간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끌려오십니다. 그런 민족에게 재림주가 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탄의 세계일망정 생활무대를 하나님을 위주해야 됩니다. 민주진영인 기독교 이념권 내에서 심정적인 아들딸을 세워 가지고 상속시키기 위한 날이 심판 날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이 없다고 낙망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나게 될 때는 어디서 만날 것이냐? “나는 아버지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리잡고 큰 호령할 때 만나겠다” 하는 사람은 불효자입니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어디서 만나야 되느냐? 겟세마네 동산 위에 나타나시는 아버지를 만나야 됩니다. 십자가의 산상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시던 그 아버지를 붙들고, 십자가의 도상에 찾아와 눈물을 흘리시던 그 아버지를 붙들고 통곡하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효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남아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이 사회의 어떤 사회 제도, 어떤 사회 풍습, 어떤 사회 상황이 휩쓸어 가지 못합니다. 행랑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남루한 옷을 입더라도 천만 근 장식 하에 잘 입은 부잣집 아들이 부럽지 않습니다. 아무리 굶고 앉아 있는 자리, 밤을 세워 눈물을 흘리는 자리라고 해도 어느 왕궁에서 풍류를 갖추어 음악소리를 들으며 무슨 시를 감상하는 것보다도 더 귀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151-107)
심정의 세계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서 효성을 하고 어떤 입장에서 충성을 해야 되느냐? 웃고 춤추는 자리에서 효도의 명분, 효자의 명사를 받는 사람은 잘못 되어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울고, 춥고, 처량한 자리에서부터 그렇게 되지 못하면 완전히 하나님의 진액을 받는 자가 아닙니다.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역사적인 진액을 못 받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진액의 결실을 거두려는 이 수확의 가을 절기에 있어서 완전한 수확의 결실체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자리에서 우리가 가을 절기에 씨를 맺을 수 있는 모든 진액을 끌어당겨야 됩니다. 우리는 6천 년 뿌리로부터 끌어당기는 것입니다. 당길 수 있는 자력의 힘을 가진 자가 되어야만 자기 스스로 하나의 결실을 완비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태풍이 불어 올 때의 고난을 거쳐야 됩니다. 혹은 어느 날 침수의 원통한 사정에 부딪치게 될 때 침수의 고난을 겪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피해서는 결실을 볼 수 없습니다. 복귀섭리의 역사노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뿌리로 하여 복귀섭리의 줄기를 중심삼고 가지에 있어서 하나의 결실을 맺어야 하는 마당에 있어서 결실될 수 있는 자체는 남들이 끌어당기지 못하는 본질적인 요소를 백 퍼센트 흡수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완전한 6천 년 심정의 결실체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천리의 원칙입니다.
그런 연고로 여러분은 지나간 날의 역사를 알고, 오늘날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알고, 다가오는 미래를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길을 가려면 울어라 이거예요. 눈을 땅에 대고 울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렸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피를 흘려 가면서 싸웠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사탄이 제거됩니다. 그것이 최일선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각오하고 나선 길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여러분이 역사적인 섭리의 뜻 앞에 거두어지는 하나의 결실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51-109)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랄 적부터의 것을 전부 다 알아서 그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내가 시집은 오늘 왔을망정 알기는 옛날 몇 대조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았던 사정까지 알게 되면 그 색시가 그 집을 살리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통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시집 온 며느리가 다 모르지만 옛날 조상의 인연을 다 캐서 그걸 알아 가지고 선조들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우리 선조도 이렇게 거룩했다” 하면서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면 그 며느리가 상속을 받는 것이 천리의 원칙입니다.
돈이 없어도 좋다, 박사가 못 되어도 좋다 이겁니다. 모두 그런 면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구 며느리라도 그런 심정만 갖추어서 박사 며느리보다 훌륭하게 되면 심정의 세계에는 그 불구 며느리가 상속을 받습니다. 오늘날 사탄 세계에서는 자기보다 잘나면 목을 자르지요? 원수의 세계에서는 그렇습니다. 심정의 세계에서는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자식을 닮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보다 더 뜻을 대해서 통곡을 하고 뜻을 대해서 그저 감사해야 됩니다. 내가 그걸 보고 “아, 네가 용하구나! 같이 울어 주고 싶고, 아주 같이 있고 싶고, 같이 따라가고 싶다” 이러고 싶으면 좋을 텐데 반대로 되어 있다 이거예요. 하나님은 아들딸이 자기보다도 더 훌륭해지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제일 욕심쟁이입니다. 제일 능력과 권능이 많으시고 수많은 욕심을 가진 그분이 자기보다 훌륭한 아들딸이 나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하나의 결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에덴 동산에 씨를 심어서 거둔 열매를 또 천하에 뿌려 가지고 번식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그 이념적인 기준이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그 열매를 거두어서 세계에 뿌려 가지고 전부 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세우는 일을 선생님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결실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5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