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영광의 길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4일)

훈독왕 | 20220417060742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4일

참된 영광의 길 (훈독본) 
날짜 : 1972. 11. 5(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참된 영광의 길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4일)

 

오늘날의 인류

우리는 우리 개인들의 일생을 총망라해 보게 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슬픈 자리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세계를 악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계는 악한 세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타락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가정으로부터 타락한 자녀와 타락한 씨족, 타락한 민족, 타락한 국가와 세계가 자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세계는 불행한 세계요, 죄악된 세계요, 타락한 세계입니다. (65-113)


타락했다는 명사 그 자체는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얼마만큼 떨어졌느냐? 높은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과 지극히 반대되는 제일 낮은 곳에 떨어졌습니다. 

 

인간은 소망을 두고 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 소망의 출발점은 어디냐 하면 그렇게 떨어지기 직전의 선입니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소망으로서 바랄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바라보고 가다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점을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운명에 놓여진 것이 타락한 인간의 정상이요, 세계 인류가 가야 할 사정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인간의 소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타락선을 넘는 데서부터입니다.


그러면 떨어진 우리가 자체적으로 올라갈 수 있겠느냐? 자체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좋겠지만 떨어진 우리 자체들로서는 다시는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떨어진 자가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가 반대로 끌어 주는 사람이 나타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땅이 솟구쳐 올라오는 천지의 대변동이 있기 전에는 그 떨어진 구렁텅이에서 본연의 자리를 찾아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65-114)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생의 갈 길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갈 길에 있어서 옆으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왕래하더라도 그 사람의 갈 길은 절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단 한 가지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서 도약과 비약을 하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의 360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평면적보다도 더 많은 각도의 방향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차이에 의해 자기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며 도약 혹은 비약하여 해방을 맞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사로잡힌 자기의 인생고에 부대껴 가지고 그것을 초월하고,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한 것이 역사 이래의 인간상이었습니다. 그 인간상 가운데서 내가 나를 중요시하고, 나를 빼놓고는 전체의 가치를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자신을 두고 볼 때 이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자리와 가야 할 길이 어디냐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65-114)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뜻

자고로 수많은 인간들이 참을 추구하고, 공의를 추구하고,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전체를 위해서 자기가 빚지기를 원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남에게 이익을 주고 보탬을 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평으로 본다면, 자기가 높고 낮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입장에 선 인간이 왜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느냐?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갑이라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되었으면 갑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게 됩니다. 기억해 준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줄로 얽어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을이라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협조했다면 그와 나 사이에 줄을 걸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귀한 것일수록 입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덜 가치 있는 것, 덜 귀한 것,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선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올라가야 할 운명 길 앞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 높은 곳에 있는 좋은 것을 주게 되면 그 높은 인연을 중심삼고 얽어 매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면 상대가 많아지기 때문에 나는 모르지만 상대의 수많은 선한 조상들이 그 후손들을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 높은 자리에 있는 조상들이 후손을 협조해 주는 자리에 서면, 나는 그 높은 자리에 있는 조상의 후손과 줄을 맨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이 이동하게 되면 자연히 나는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바라 가지고 하라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 내가 높이 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색하기 위해 허덕이는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상입니다. 만일에 내가 쓰다 남은 좋지 않은 것을 주면, 그것은 도리어 밑창과 인연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올라갈래야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빚을 지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더라도 좋은 친구, 아들딸을 갖더라도 좋은 아들딸, 남녀가 결혼을 하는 데도 좋은 남편이나 아내를 원합니다. 모두가 좋은 것을 찾습니다. 좋은 것은 참과 통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갖추지 않으면 참된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참을 바라는 그 마음은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과 일치되는 것을 우리는 생활주변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35-117)

애국자와 성인

한 나라의 애국자는 그 나라의 최후의 운명을 중심삼고 싸운 자요, 성인은 한 시대에 한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싸운 사람입니다.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성인이 되려면 하늘을 위해서 싸운 사람이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온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온 세계 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하늘을 붙들고 싸우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은 역사시대에 남을 수 있는 인류 소망의 존재요, 하늘이 인정해야 할 필연적인 존재일 것입니다. 하늘이 있다면 하늘의 전 역사시대를 대표하는 참된 주인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친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의 필연적인 욕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그런 자들을 역사시대의 대표자들로 세워 나왔습니다. 그들이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자들로서만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5-120)

성인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하지요? 그는 나면서부터 고생을 말할 수 없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민족 앞에 몰리고, 유대교 앞에 몰리고, 로마 앞에 몰려 가지고 죽음의 길을 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심기 위한 것이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심어 가지고, 그것이 싹이 되고 줄기가 되고 잎이 퍼져서 온 세계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심어 놓았기 때문에 하늘은 그 생명의 씨가 동기가 된 사상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발전시켜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동기로 말미암아 세워진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안 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가정뿐만 아니라 나라도 버렸고, 교회도 버렸고, 그 시대에 출세할 수 있었던 제반 요건을 다 버렸습니다. 그보다 못한 것을 찾기 위해서 버린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버린 것입니다. 


성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석가모니도 그랬습니다. 석가모니는 자기가 살던 왕국을 버리고 고독의 세계를 찾아 나섰습니다. 다 버리고 나섰던 것입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대에 있어서 희망과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념적인 어떤 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미래의 세계는 이래야 된다는 국가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인도(人道)의 기준은 이래야 된다는 기원,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삼강오륜을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기원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처해 가지고 그 시대와 더불어 박자를 맞추어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초월하고 그 환경을 극복해 가지고 내일의 보다 가치적이고 보람 있는 인생길을 추구하기 위해서 환경에 몰리면서도 싸워 나갔던 사람이 유교의 공자였습니다. 마호메트 같은 양반도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65-121)

신인(神人)이 일체화한 인생관, 세계관, 심정관을 가져야

세기말적인 세계 정세를 앞에 놓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가야할 필생의 운명길이 어디냐 할 때 “나 모른다” 해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지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최후에 남아질 것은 뭐냐? 인간들이 구상했던 철학도 아니요, 그 어떤 인생관도 아닙니다. 하나님 플러스 인간, 즉 신인(神人)의 삶의 길이요, 신인의 생활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영원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떨어질 수 없었던 자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그 떨어질 수 없었던 자리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인(神人)이 하나된 생활적인 무대, 세계적인 무대를 요구하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적 신이라면 소망이 있음과 동시에 사정이 있을 것이고 심정이 있을 것입니다.


소망과 사정과 심정, 이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과 하나님의 공통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정을 넘어서 신의 사정과 일치되어야 되고, 인간의 심정을 넘어서 신의 심정을 가지고 일치되어야 되고, 인간의 소원을 넘어서 신의 소원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 땅에 왔다 갔던 분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도 신인(神人)이 일체화한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심정관을 가져야 됩니다. 생활은 사정을 통할 수 있는 것이요, 생애는 소망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요, 심정은 비로소 소망과 생활이 하나된 본보기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고 했습니다. 최후에 인류가 바라는 희망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도 아니요, 인격의 세계도 아니라 사랑의 세계입니다. (65-125)

영광의 길은 어떤 길이냐

오늘 말씀의 제목이 ‘참된 영광의 길’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인간이 그리는 최후의 갈 길이 어디냐? 내가 갈 수 있는 영광의 길이라는 것은 뭐냐? 이제 죽음으로 결정된 그런 운명에 처해서 신음하고 있는 내가 위로부터 하나의 줄이라도 탈 때, 그 순간은 영광의 순간입니다. 그것은 신음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는 순간은 영광된 순간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 영광의 순간을 붙드는 데도 내 손에 힘이 없게 되면 아무리 영광의 순간이 찾아왔더라도 영광의 길을 거쳐가지 못합니다. 만약에 그 줄이 있다면 그 줄을 붙들 뿐만 아니라 그 줄에다 목이든 다리든 꽁꽁 얽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얽어매기만 해 가지고 되느냐? 그렇게 얽어매더라도 누가 위에서 당겨 줘야 되는데, 만일 위에서 당겨 주지 않으면 옆에서 당겨 줄 사람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오면 인류의 소망이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 선조도 물론이요, 수천만 대의 인류가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다니 얼마나 복된 사실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라는 말 자체는 죽어도 좋은 말이요, 살아도 좋은 말입니다.


이 땅 위에 그런 분이 나오려면 하루살이와 같은 일생 동안 정성을 들인다고 해서 가능할 것 같아요? 십 년, 백 년, 천 년, 만 년뿐만 아니라 꾸준히 하나의 사상이 역사시대의 통일된 것으로서 고임돌을 고여 나온 인연을 가진 곳일수록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추앙의 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나는 죽어도 가겠습니다” 하는 순교의 선혈을 많이 뿌린 종교가 세계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추앙의 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종교가 어떠한 종교냐 할 때, 그것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65-128)

참된 영광의 출발점

역사시대에 끝날이 있다는 말은 하늘을 중심삼고 볼 때 복된 말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고 복음입니다. 설움의 자리에서 수천 년 동안 신음해 나오던 역사적인 한을 풀 수 있는 한 날, 원한의 가슴을 가진 아들딸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한 날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심판의 한 날이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의 법도를 가진 천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선포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복된 말입니다.


역사는 탕감역사를 거쳐 나가기 때문에 세계는 반드시 망해야 되는 것이고, 그렇게 망하게 될 때는 선과 악이 교차되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이며, 그 교차되는 점에서 올라가야지 떨어지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길만이 참된 영광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시대를 통한 심정, 전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심정, 미래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으면 역사의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시대의 기틀이 있을 수 없고 미래의 출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의 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통일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복지의 천국이 벌어질 것이요, 해방의 기원이 벌어질 것이며, 그 기점이야말로 우리가 찾아 나오던 참된 영광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65-146)

우리의 소원은 영광의 세계를 맞이하는 것

지금 우리는 숨막히는 시대의 교차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과거와 현재를 통해 하늘이 찾아오는 3층천 개문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한 때를 맞을 관문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하겠느냐? 영광된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이 어느 때일 것이냐?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정성을 다 들여서 그 순간의 초점 앞을 지나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개문되는 날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한 발짝, 반 발짝, 반의 반 발짝, 1센티미터라도 넘어서야 합니다. 그 넘는 순간이 얼마나 숨이 막힐 것이냐! 숨을 들이쉬고 넘을 것이냐, 내쉬고 넘을 것이냐?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쉴 때는 사망의 세계에 있어서 한스러운 숨길을 전부 다 씻어 버리고 영광의 숨길을 완전히 쉬어야 되겠다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명을 책임지고 남자 여자가 하나되고, 남녀노소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종적으로 하나되어야 하고, 횡적으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영광으로 인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 앞에 하나의 제물로서 피를 흘리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때 하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물의 피가 흐른 곳에 해방이 벌어집니다. 그 희생의 환경 위에 해방의 인연이 개문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고맙게 맞고 그 인연을 저버리지 않고 극복하는 날에는 한국이 영광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진정한 효도를 하고, 서로가 사랑하면서 복을 주고 잘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겠거든, 그걸 보고라도 죽는 것이 내 소원이라는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에 인간으로서 바라는 최고의 소원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가정으로부터 가정을 치리하고, 민족을 치리하고, 주권국가를 세워서 하나님의 세계를 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세계에 미쳐서 통치하는 세계가 평화의 세계요, 영광의 세계입니다. (65-152)

참된 영광의 길을 맞이하자

그렇게 되는 것이 소원인데, 하늘이 그런 사람을 불러 가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 가운데 내세워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치리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면 그 영광을 무엇으로 갚을 것이냐? 그러한 권한이 설정되면, 그 권한은 영원한 자리에 승리의 권한으로서 내려가지 않고 영원히 고착될 수 있는 참된 영광의 길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중심삼고 공인된 아들딸의 자리에 서서 만국 혹은 만 천주를 대신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고 온 천지 앞에 자랑하면서 목을 붙들고 입을 맞추는 그런 자리가 있다면, 그 이상의 소원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분과 더불어 살고 그분과 더불어 가고픈 곳을 가 보고 죽을 수 있는 환경을 보고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참된 영광의 길입니다.

역사이래 그런 압축된 환경에서 솟구쳐 오른 한 사람, 한 가정, 한 무리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국가와 세계를 뚫고 나올 수 있는 개인, 가정, 종족, 국가가 나타나면 그 국가는 세계적인 전통 국가가 될 것이고, 그 종족은 세계적인 전통 종족이 될 것이고, 그 가정은 세계적인 전통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따로 따로가 아닙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에서부터 종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적인 승리권을 갖게 되면 그것은 영원한 국가, 민족, 종족, 가정과 개인의 전통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랑을 중심삼고 세울 수 있는 전통의 기반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랑 신부의 이념을 중심삼고 뭘 하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가정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어 가지고 종족, 민족, 국가를 편성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 세계의 국가보다 강해야 됩니다. 모든 면에서 강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단결해야 되고, 누구보다도 하나되어야 하고, 누구보다도 승리해야 됩니다. 지금의 때는 세상의 것은 다 믿을 수 없는 때입니다. 하늘만을 믿고 의지하여 그 자리를 나서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영광의 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65-154)*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4일, 원문

참된 영광의 길  
날짜 : 1972. 11. 5(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날의 인류

우리는 우리 개인들의 일생을 총망라해 보게 될 때 참된 일, 참된 사정, 혹은 참된 생활이 얼마나 있었느냐 할 때 많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참된 일이 얼마나 있었느냐 하는 것을 묻게 된다면 그야말로 몇 시간, 혹은 몇 분이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결과가 나타나게 되면 기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기쁜 생활을 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나는 기쁘게 산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슬픈 자리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결국은 내가 발전할 수 있는 길이나 바라는 길과 하나된 자리가 아니라 반대되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슬픈 그 자리는 결국은 괴로운 자리요, 악과 통할 수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생애를 놓고 볼 때, 내가 기쁨 혹은 참됨과 선한 자리에서 살았느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게 살았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잠깐 지나가는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리고 줄기와 가지와 잎을 내어 “나는 이렇게 무성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그런 가정도 없는 것이요, 그런 씨족과 민족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계적으로 전개된 것이 오늘날의 인류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이 세계를 악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세계는 악한 세계이기 때문에 결국은 타락한 세계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는 타락한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타락한 조상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타락한 부모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한 가정으로부터 타락한 자녀와 타락한 씨족, 타락한 민족, 타락한 국가와 세계가 자연히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세계는 불행한 세계요, 죄악된 세계요, 타락한 세계입니다. (65-113)
타락했다는 명사 그 자체는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얼마만큼 떨어졌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높은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과 지극히 반대되는 제일 낮은 곳에 떨어졌습니다. 물건이 떨어지게 되면 제일 깊은 곳에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태평양 바다가 깊다고 하더라도 모래 한 알이 떨어지게 되면 그 물을 뚫고 맨 밑창의 깊은 곳에 떨어져 거기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떨어진 거리를 두고 볼 때, 우리가 바라는 제1단계의 소원은 어디가 될 것이냐? 태평양 바다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떨어진 돌의 희망의 출발기점을 찾는다면 그 곳은 물과 접하는 경계선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으로서 소원할 수 있는 것은 뭐냐? 인간은 소망을 두고 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 소망의 출발점은 어디냐 하면 그렇게 떨어지기 직전의 선입니다. 그 선을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소망으로서 바랄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점을 바라보고 가다가 떨어졌기 때문에 그 점을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될 필연적인 운명에 놓여진 것이 타락한 인간의 정상이요, 세계 인류가 가야 할 사정이 아니겠느냐 이겁니다. 인간의 소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타락선을 넘는 데서부터입니다.
그러면 떨어진 우리가 자체적으로 올라갈 수 있겠느냐? 자체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좋겠지만 떨어진 우리 자체들로서는 다시는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떨어진 자가 다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가 반대로 끌어 주는 사람이 나타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땅이 솟구쳐 올라오는 천지의 대변동이 있기 전에는 그 떨어진 구렁텅이에서 본연의 자리를 찾아 올라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떨어진 인간들을 보고 있는 어떤 한 분이 계신다면, 그 분이 떨어진 자체를 두고 볼 때 자기가 넉넉히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구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람을 건져 주고 난 후에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손해난다면 못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 떨어진 자가 구해주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슨 소망의 내적 이익을 줄 수 있다면 건져 줄 수 있는 길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더라도 구해 줄 수 없습니다. (65-114)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

그런 입장에 선 인류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옆으로 돌아가고 옮겨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태평양 가운데서 한 점을 이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동하나마나 한 것과 마찬가지의 움직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생의 갈 길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갈 길에 있어서 단 한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어떻게 가야 하느냐? 옆으로 아무리 노력을 하고 아무리 왕래하더라도 그 사람의 갈 길은 절망으로 끝날 것입니다. 단 한 가지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서 있는 자리를 떠나서 도약과 비약을 하는 것입니다.
비약을 하는 데는 각도가 좋아야 됩니다 솟구쳐 올라가는 데는 한 점을 중심삼아 가지고 동으로 각도를 갖추어 솟구쳐 올라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서, 북, 남으로 자기 나름대로 방향을 갖추어 올라가려고 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천태만상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동서남북 사방의 360도를 중심삼아 가지고, 평면적보다도 더 많은 각도의 방향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차이에 의해 자기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며 도약 혹은 비약하여 해방을 맞기를 고대하고 있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여러분도 그 어떤 분야의 방향을 갖추어 가지고 어떠한 각도를 향해 수고하고 노력하는 인간 아니에요? 뭔가 스스로도 모르지만 해방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사로잡힌 자기의 인생고에 부대껴 가지고 그것을 초월하고,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한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고대한 것이 역사 이래의 인간상이었습니다. 그 인간상 가운데서 내가 나를 중요시하고, 나를 빼놓고는 전체의 가치를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자신을 두고 볼 때 이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자리와 가야 할 길이 어디냐 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한 자리에 떨어져 있습니까? 거기에는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선한 조상도 있었고 악한 조상도 있었습니다. 역사이래 제일 악한 조상이라면 제일 깊은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그 조상들의 죽은 사체가 쌓이고 쌓여 그것이 높아져 가지고 하나의 터전으로 남겨졌으면 그 위에 태어난 조상은 선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악한 조상은 그 뼈라도 천지가 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악한 사람의 무덤은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의 행적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고 할진대는 악한 사람의 무덤이라든가 악한 사람의 그 무엇은 남기고 싶어하지 않고 없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맨 밑창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하 고저의 차이에 있어서 천태만상의 배경과 역사적 인연을 남기고 있고, 또 그것을 지니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65-114)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뜻

자고로 수많은 인간들이 참을 추구하고, 공의를 추구하고,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전체를 위해서 자기가 빚지기를 원치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남에게 이익을 주고 보탬을 주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평으로 본다면, 자기가 높고 낮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입장에 선 인간이 왜 남을 위해서 희생해야 되느냐? 결국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갑이라는 사람에게 좋은 일이 되었으면 갑이라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게 됩니다. 기억해 준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줄로 얽어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을이라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협조했다면 그와 나 사이에 줄을 걸어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자기에게 귀한 것일수록 입체성을 갖는 것입니다.
덜 가치 있는 것, 덜 귀한 것,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선한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올라가야 할 운명 길 앞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은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 높은 곳에 있는 좋은 것을 주게 되면 그 높은 인연을 중심삼고 얽어 매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희생하면 상대가 많아지기 때문에 나는 모르지만 상대의 수많은 선한 조상들이 그 후손들을 협조하는 것입니다. 그 높은 자리에 있는 조상들이 후손을 협조해 주는 자리에 서면, 나는 그 높은 자리에 있는 조상의 후손과 줄을 맨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후손이 이동하게 되면 자연히 나는 끌려가게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바라 가지고 하라고 하는 것이냐? 그것이 내가 높이 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하나의 방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색하기 위해 허덕이는 입장에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실상입니다. 만일에 내가 쓰다 남은 좋지 않은 것을 주면, 그것은 도리어 밑창과 인연을 맺는 것이기 때문에 올라갈래야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길, 선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빚을 지지 말라고 가르쳐 줍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마음을 가지고 희생하는 사람은 좋게 된다는 것이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막연하나마 오늘날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교육의 목표가 되어 있고 교양의 목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러냐? 인간은 떨어진 자리에서 보다 높은 한 점을 바라고 있는데, 하늘은 불가피하게 그런 것을 일대일의 자리에서 세밀하게 가르쳐 줄 수 없기 때문에 암암리에 상징적 혹은 비유적으로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쳐 준 것이 오늘날 선을 행하라든가 적선하라는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쓰다 남은 것, 내가 못 쓸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결국 나를 끌어다가 밑창으로 떨어뜨리는 하나의 조건밖에 안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오늘날 종교 혹은 도의 세계에서 가르칩니다. 여러분은 자신들이 현시점에서 어떤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은 좋은 스승을 찾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면, 누가 제일 좋은 선생이냐? 아무리 지식이 많아 가지고 가르쳐 주는 데 있어서는 일등이라고 해도 행동이나 인격에 있어서는 도저히 본받을 수 없는 선생이 있다면, 학생들은 그 선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말은 듣지만 돌아서서는 비웃는 것입니다 보다 인격적인 스승을 추구합니다. 자기 부모라고 하더라도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부모라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부모가 진정한 사랑을 한다면, 그 사랑은 하늘과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들은 훌륭한 스승을 바라는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자기의 영적인 인연을 중심삼고 하늘을 대표한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면 그런 지도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역사상에는 우리 인간이 원하지 않았지만 하늘이 훌륭한 선지자들을 보내 가지고 그 시대에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시대에 어떤 나라에도 있어 온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더라도 좋은 친구, 아들딸을 갖더라도 좋은 아들딸, 남녀가 결혼을 하는 데도 좋은 남편이나 아내를 원합니다. 모두가 좋은 것을 찾습니다. 좋은 것은 참과 통하는 것입니다. 좋은 환경을 갖추지 않으면 참된 자리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참을 바라는 그 마음은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과 일치되는 것을 우리는 생활주변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35-117)

애국자와 성인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을 대표해 가지고 역사상에 왔다 갔던 최대의 지도자는 누구였느냐? 나라를 대표해서는 애국자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순신 장군’ 하게 되면, 그는 우리 민족이 추모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애국자로 추대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애국자는 되었지만 위인과 성현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 애국자의 대표는 되지만 인류의 대표자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애국자란 환란시대를 통하여 나옵니다. 정상적인 평화시대에는 애국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국가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에 부딪쳐 가지고 적국이 나라를 삼키려고 하는 그런 상대적인 시대에 부딪쳐 가지고 그 삼키려는 적을 쳐서 굴복시키는 자리, 그것을 퇴치하는 승리의 기반을 닦은 데서 비로소 애국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혹은, 간신들이 날뛰는 환경을 청산한 그러한 자리에서 애국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적과 싸워 승리한 자리에서 애국이라는 말이 성립됩니다.
그렇게 보면 한 나라의 애국자는 적국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이순신 장군이 한국에서는 애국자로 통하지만 일본에서는 애국자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이 전부 다 일본 사람들보다 나으냐 할 때 그렇다는 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인은 무엇이냐? 한 나라의 애국자는 그 나라의 최후의 운명을 중심삼고 싸운 자요, 성인은 한 시대에 한 나라를 위하기보다는 세계를 위해서 싸운 사람입니다. 세계를 위해서 싸운 것만을 가지고 인류 앞에 성인이 될 수 있겠느냐? 하늘이 공인할 수 있는 성인이 되려면 하늘을 위해서 싸운 사람이어야 됩니다. 인류를 대표해서 하늘을 위해 싸운 사람이 누구냐 할 때, 그것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이냐? 온 세계를 대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온 세계 인류를 대표해 가지고 하늘을 붙들고 싸우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은 역사시대에 남을 수 있는 인류 소망의 존재요, 하늘이 인정해야 할 필연적인 존재일 것입니다. 하늘이 있다면 하늘의 전 역사시대를 대표하는 참된 주인이 되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친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들의 필연적인 욕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그런 자들을 역사시대의 대표자들로 세워 나왔습니다. 그들이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 지도자들로서만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65-120)

성인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

‘성인’ 하게 되면 4대 성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성인이라고 하지요? 그분이 땅 위에 와서 30평생 사는 동안에 나라의 주권을 중심삼고 행사를 해봤어요? 전쟁에 나가서 총칼을 들고 승리의 권위를 세워 봤어요? 그는 나면서부터 고생을 말할 수 없이 했습니다. 3년 공생애 노정뿐만 아니라 세상에 태어난 그 시간부터 쫓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민족 앞에 몰리고, 유대교 앞에 몰리고, 로마 앞에 몰려 가지고 죽음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세상 사람 같으면 도망갈 수 있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했습니다. 내 뜻과 하늘의 뜻이 엇갈린 자리에서 하늘의 뜻을 중요시했다는 데 있어서 어떤 성인보다도 내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갔던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내 원이라는 것은 타락한 세계의 인류를 대표한 공통적인 마음의 자세였지만, 여기서 아버지의 원이라고 한 것은 그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뜻이었습니다. 내 뜻은 이미 지나온 뜻으로서 나타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뜻 기준 전부를 이룰 수 없었던 운명에 몰린 환경을 붙들고 슬퍼하면서 죽음 길을 자처한 것이 아니요, 나는 죽더라도 당신의 뜻을 정비하여 내 생애의 터전 위에 남기고 가야 된다는 필생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에 죽는 순간까지 그 뜻을 심기 위해서 간 것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심기 위한 것이요, 십자가의 고통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심어 가지고, 그것이 싹이 되고 줄기가 되고 잎이 퍼져서 온 세계적으로 확대될 수 있도록 심어 놓았기 때문에 하늘은 그 생명의 씨가 동기가 된 사상과 더불어 세계적으로 발전시켜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동기로 말미암아 세워진 기독교는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안 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가정뿐만 아니라 나라도 버렸고, 교회도 버렸고, 그 시대에 출세할 수 있었던 제반 요건을 다 버렸습니다. 그보다 못한 것을 찾기 위해서 버린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버린 것입니다. 그는 올라가기 위해 제일 중요한 것을 버렸습니다. 떨어져 내려가기 위해서 죽어간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올라가고자 하는 마음과 하늘이 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치될 수 있었던 때, 어떤 접촉점을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한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때가 바로 세계적으로 접촉하는 끝날입니다.
성인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랬고, 석가모니도 그랬습니다. 석가모니는 자기가 살던 왕국을 버리고 고독의 세계를 찾아 나섰습니다. 다 버리고 나섰던 것입니다. 공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시대에 있어서 희망과 소망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에 처해 있으면서도 이념적인 어떤 관을 중심삼아 가지고 미래의 세계는 이래야 된다는 국가관을 형성하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인도(人道)의 기준은 이래야 된다는 기원, 인륜도덕을 중심삼고 삼강오륜을 가르쳐 줄 수 있었던 기원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처해 가지고 그 시대와 더불어 박자를 맞추어 가지고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 시대를 초월하고 그 환경을 극복해 가지고 내일의 보다 가치적이고 보람 있는 인생길을 추구하기 위해서 환경에 몰리면서도 싸워 나갔던 사람이 유교의 공자였습니다. 마호메트 같은 양반도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철인은 생명을 좌우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철학이 권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죽을 사람을 살리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방향을 제시해 줄 수는 있지만 옮겨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인은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양면의 기로에 서 있는 인간을 살려 준다는 결정적인 책임을 지고 나서는 사람이 아니고는 성인이 될 수 없습니다. (65-121)

신인(神人)이 일체화한 인생관, 세계관, 심정관을 가져야

세기말적인 세계 정세를 앞에 놓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가야할 필생의 운명길이 어디냐 할 때 “나 모른다” 해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지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로를 모르고 대양을 달리는 배와 마찬가지입니다. 키를 잡아 가지고 항로를 가려 가면서 전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전진하는 것만 보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항로를 따라 항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붙들어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붙들고 올라가는 데 있어서는 순식간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6천 년 동안 떨어진 이 구렁텅이를 올라가려면 혼자의 힘 가지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여, 땅이 솟구쳐 가지고 대양을 뚫고 나올 수 있는 터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늘도 바라는 소원이요, 구원받기를 원하는 인류의 소원이기 때문에 인류 앞에는 반드시 끝날이 와야 됩니다. 그 끝날은 뭐냐 하면 수평선상에 하나의 섬이 나타나는 때일 것입니다. 섬이 이 세계에 나타나는 그때가 끝날일 것입니다. 그것은 특수한 사람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때입니다.
그 자리에는 하늘을 대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처음 찾아올 것이요, 또 땅을 대표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처음 찾아올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냐? 성경에서 말한 대로 하늘을 대표한 남자는 신랑이요, 땅을 대표한 여자는 신부이기 때문에 그러한 신랑과 신부가 상봉하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간 후 하늘로 올라갔고, 성신은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땅에 온 성신의 목적이 비로소 종착점을 결하는 것이요, 올라갔던 그분이 올라가 이루어 가지고 올 수 있는 상봉의 순간이 재림의 순간입니다. 메시아가 땅 위에 현현하는 때가 그 목적점인 것입니다.
그러면 최후에 남아질 것은 뭐냐? 인간들이 구상했던 철학도 아니요, 그 어떤 인생관도 아닙니다. 하나님 플러스 인간, 즉 신인(神人)의 삶의 길이요, 신인의 생활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막연하게 하나님을 대해 가지고 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의 자리가 아니라 사람이 영원히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자리입니다. 왜? 하나님과 사람은 본래 떨어질 수 없었던 자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그 떨어질 수 없었던 자리 이상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서 신인(神人)이 하나된 생활적인 무대, 세계적인 무대를 요구하고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신학의 종착점은 어디냐? 인류를 대표할 수 있는 학적인 기반을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내적인 면에서 일치점을 가지고 인간의 지식을 포괄할 수 있는 신학의 결론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중심삼은 최고의 지혜가 무엇이냐? 하나님도 인격적 신이라면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소망이 있음과 동시에 사정이 있을 것이고 심정이 있을 것입니다.
소망과 사정과 심정, 이것은 인격을 가진 인간과 하나님의 공통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정을 넘어서 신의 사정과 일치되어야 되고, 인간의 심정을 넘어서 신의 심정을 가지고 일치되어야 되고, 인간의 소원을 넘어서 신의 소원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인물로 이 땅에 왔다 갔던 분이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제 사정은 비참하지만, 당신의 사정대로 하시옵소서! 제 심정은 비참한 길을 가기 싫지만, 당신이 원하는 심정은 세계를 사랑하기 위한 심정이기 때문에 나 하나를 희생시키더라도 세계를 위해서 사랑하는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여러분도 신인(神人)이 일체화한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심정관을 가져야 됩니다. 생활은 사정을 통할 수 있는 것이요, 생애는 소망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이요, 심정은 비로소 소망과 생활이 하나된 본보기를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린도전서 13:13)고 했습니다. 최후에 인류가 바라는 희망의 세계는 지식의 세계도 아니요, 인격의 세계도 아니라 사랑의 세계입니다. (65-125)

영광의 길은 어떤 길이냐

오늘 말씀의 제목이 ‘참된 영광의 길’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인간이 그리는 최후의 갈 길이 어디냐? 내가 갈 수 있는 영광의 길이라는 것은 뭐냐? 이제 죽음으로 결정된 그런 운명에 처해서 신음하고 있는 내가 위로부터 하나의 줄이라도 탈 때, 그 순간은 영광의 순간입니다. 그야말로 영광된 시간입니다. 이것을 내가 바랐다면 그렇게 바라던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일 것입니다.
만약에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마울 것이냐? 그것은 바라지 않았던 사람도 기쁠 것이요, 바랐던 사람은 더 기쁠 것입니다. 그것은 신음하는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 길을 찾는 순간은 영광된 순간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 영광의 순간을 붙드는 데도 내 손에 힘이 없게 되면 아무리 영광의 순간이 찾아왔더라도 영광의 길을 거쳐가지 못합니다. 만약에 그 줄이 있다면 그 줄을 붙들 뿐만 아니라 그 줄에다 목이든 다리든 꽁꽁 얽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얽어매기만 해 가지고 되느냐? 그렇게 얽어매더라도 누가 위에서 당겨 줘야 되는데, 만일 위에서 당겨 주지 않으면 옆에서 당겨 줄 사람이라도 있어야 됩니다.
그 줄을 붙들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하다가 쓰러지면, 그때 하나님이 “너 제발 망해라” 하시겠어요? 그렇게 고생하다가 남편이 쓰러지면 부인이 해주었으면, 부인이 쓰러지면 그 아들이 해주었으면, 그 아들이 쓰러지면 후손이 해주었으면, 그 후손이 없으면 나라 사람이 해주었으면, 그 나라에 그런 사람이 없으면 세계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실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 이것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그 사람은 역사시대의 희망봉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런 사람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나오면 인류의 소망이요,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 선조도 물론이요, 수천만 대의 인류가 고대하던 메시아가 왔다니 얼마나 복된 사실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라는 말 자체는 죽어도 좋은 말이요, 살아도 좋은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때, 이 땅 위에 그런 분이 나오려면 하루살이와 같은 일생 동안 정성을 들인다고 해서 가능할 것 같아요? 십 년, 백 년, 천 년, 만 년뿐만 아니라 꾸준히 하나의 사상이 역사시대의 통일된 것으로서 고임돌을 고여 나온 인연을 가진 곳일수록 높아질 수 있기 때문에 세계적인 추앙의 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의 역사노정에 있어서 “나는 죽어도 가겠습니다” 하는 순교의 선혈을 많이 뿌린 종교가 세계의 종말시대에 있어서 추앙의 대상이 될 것은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종교가 어떠한 종교냐 할 때, 그것은 기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아담 해와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딴 종교에는 아담 해와가 없습니다. 인류의 시조부터 들고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교만 해도 그렇습니다. 불교는 모든 법을 중요시합니다. 유교는 도리를 가르쳐 줍니다. 회교는 종교정치의 이념을 갖고 나오고 있습니다. 조상에 대해서, 뿌리에 대해서 그렇게 나쁜 말을 하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습니다. 그건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조상을 들추어내서 좌지우지해 나오는 종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기독교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역사 가운데 있어서 슬픈 사실을 원망하기 시작한 오랜 역사적 전통을 어떤 종교가 가졌느냐 할 때, 그건 기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있다면 기독교는 세계 종말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인 추앙을 받는 종교 문화권을 형성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기독교가 명실공히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5-128)

참된 영광의 출발점

역사시대에 끝날이 있다는 말은 하늘을 중심삼고 볼 때 복된 말입니다. 심판이라는 말은 나쁜 말이 아니고 복음입니다. 설움의 자리에서 수천 년 동안 신음해 나오던 역사적인 한을 풀 수 있는 한 날, 원한의 가슴을 가진 아들딸의 한을 풀어 줄 수 있는 한 날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심판의 한 날이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의의 법도를 가진 천지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선포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복된 말입니다.
역사는 탕감역사를 거쳐 나가기 때문에 세계는 반드시 망해야 되는 것이고, 그렇게 망하게 될 때는 선과 악이 교차되는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이며, 그 교차되는 점에서 올라가야지 떨어지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한 길만이 참된 영광의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민주세계와 공산세계가 서로 엇갈려 있다가 서로 지쳐 가지고 이제는 서로 화합하자 하고 있습니다. 또, 남북이 엇갈려 있었지만 이제는 하나되어 보자고 합니다. 또, 미국과 소련이 냉각시대를 거쳐서 이래 가지고는 안되겠으니 이제는 서로 세계를 다시 한 번 모아보자고 해 가지고 평화의 타이틀을 가지고 만나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어서도 여당과 야당이 엇갈려 있다가 하나로 만들자고 해 가지고 하나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나된 다음에 갈라지는 날에는 누가 수습하겠습니까? 역사적인 귀결점에 있어서 반드시 교차로가 있어야 할 그때가 왔기 때문에 세계를 대표해서 새로운 분야를 들고 나오는 것은 좋지만, 그 자체 내의 결렬이 벌어지게 될 때는 누가 통합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오늘날의 철학사조를 보면, 인간을 위주한 주체사상을 논하던 입장에서는 인간이 제일인 줄 알았지만 최후의 종말인 심판시대가 오기 때문에 그것은 장막에 부딪쳤다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과 마찬가지로 절벽에 부딪쳐 신음하는 입장에 놓여진 절망상태입니다. 인간은 이 장벽 앞에서 소외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밟고 올라가느냐? 인간을 위주로 하여 절대 주체사상을 강조한 철학사상은 이제 말로에 처해 있습니다 인간은 대상의 철학을 논의해 가지고 주체의 존재를 깨칠 수 있는 입장을 갖지 않으면 해방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몰락된 신을 부활시키고 우리 주체자로서의 잃었던 권위, 신의 권위를 다시 복귀해 가지고 하나님이 주체의 입장에 서시고 우리는 대상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우리는 대상의 입장에서 하나되어 하나님이 끌어 주셔야만 넘어갈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절대 못 간다는 것을 알게 해야 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높은 그분이 나와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에는 나뿐만 아니라 내 아우가 가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일지라도 사랑하는 아내의 품에 들어가면 좋아합니다. 아내를 위하여 종의 입장에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비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승리적인 결속이요, 승리적인 결판을 지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은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 심정은 인간을 통한 심정이 아니라 천륜을 통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역사시대를 통한 심정, 전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심정, 미래의 기원이 될 수 있는 심정의 기준이 지상에 나타나지 않으면 역사의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 시대의 기틀이 있을 수 없고 미래의 출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정의 세계는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아 가지고 통일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비로소 복지의 천국이 벌어질 것이요, 해방의 기원이 벌어질 것이며, 그 기점이야말로 우리가 찾아 나오던 참된 영광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65-146)

우리의 소원은 영광의 세계를 맞이하는 것

오늘날 이처럼 세계적인 최후의 교차점을 향하여 찾아 들어가는 혼란된 와중에서 내 주체성을 어떻게 들고 나오느냐 하는 문제가 금후에 종교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요, 수많은 교포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요, 대한민국 자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서는 안됩니다. 주체와 대상을 확실히 가려 가지고 하늘을 주체, 인간을 대상으로 완전히 가려 가지고 설 자리에 설 수 있고 처할 수 있는 자리에 처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숨막히는 시대의 교차점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과거와 현재를 통해 하늘이 찾아오는 3층천 개문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러한 때를 맞을 관문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자세가 필요하겠느냐? 영광된 새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순간이 어느 때일 것이냐?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정성을 다 들여서 그 순간의 초점 앞을 지나쳐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개문되는 날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한 발짝, 반 발짝, 반의 반 발짝, 1센티미터라도 넘어서야 합니다. 그 넘는 순간이 얼마나 숨이 막힐 것이냐! 숨을 들이쉬고 넘을 것이냐, 내쉬고 넘을 것이냐?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쉴 때는 사망의 세계에 있어서 한스러운 숨길을 전부 다 씻어 버리고 영광의 숨길을 완전히 쉬어야 되겠다는 각오를 해야 됩니다. 오늘날 이러한 사명을 책임지고 남자 여자가 하나되고, 남녀노소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종적으로 하나되어야 하고, 횡적으로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나라가 침공을 받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쟁에 나가야 됩니다. 남녀노소가 서로 일선을 지키겠다는 민족은 승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민족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민족이 아무리 약한 민족이라도 그 민족을 축복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세계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사상이 있으면 그 사상을 세계 앞에 남겨 놓으실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통일교회의 사상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사상을 지닌 정병으로서 전선에 나서는 날, 우리가 일치단결해 가지고 최후의 전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날에는 우리의 신념으로 인하여 승리는 하늘의 것으로 가져 올 것입니다. 하늘의 역사적인 권위와 우리 선조들의 한을 풀어 드리는 의미에서 오늘을 지키고 나가야 한다는 철두철미한 사상적인 기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 영광으로 인도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 앞에 하나의 제물로서 피를 흘리는 자리에 가야 합니다. 그때 하늘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물의 피가 흐른 곳에 해방이 벌어집니다. 그 희생의 환경 위에 해방의 인연이 개문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것을 고맙게 맞고 그 인연을 저버리지 않고 극복하는 날에는 한국이 영광의 국가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모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진정한 효도를 하고, 서로가 사랑하면서 복을 주고 잘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겠거든, 그걸 보고라도 죽는 것이 내 소원이라는 마음을 여러분이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에 인간으로서 바라는 최고의 소원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가정으로부터 가정을 치리하고, 민족을 치리하고, 주권국가를 세워서 하나님의 세계를 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세계에 미쳐서 통치하는 세계가 평화의 세계요, 영광의 세계입니다.
그것을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못 되더라도 구경이라도 하고 죽는 것이 소원 아니에요? 그러한 소원을 가진 우리 앞에 그런 백성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은덕을 얼마나 감사해야 되겠어요? 그리하여 세계를 하나의 백성으로 치리하고 하나의 사랑으로 묶은 형제의 인연을 갖추고 천지가 하나되어 그야말로 영광과 승리만이 비쳐질 수 있는 세계, 즉 해방이 필요치 않는 평화의 기틀이 영원히 설정된 그 세계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소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고 싶은 곳, 보고 싶은 나라, 보고 싶은 세계, 보고 싶은 분을 중심삼고 그러한 자리를 소원하고 나온 것이 타락한 선조의 후예인 우리의 소원이었습니다. 보고 싶은 그분을 만나서 그분이 가는 곳이면 동서남북 어디라도 따라갈 수 있고, 어떠한 명령을 내려도 반갑게 대답할 수 있고, 그가 바른발을 내디딜 때 같이 바른발을 내디딜 수 있는 반열에 동참할 수 있는 영광을 나에게 부여한다면 천만 번 죽더라도 그 감사와 영광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하늘 백성이 될 수 있는 영광 이상의 소원이 어디 있겠어요? (65-152)

참된 영광의 길을 맞이하자

그렇게 되는 것이 소원인데, 하늘이 그런 사람을 불러 가지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이 세워진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광 가운데 내세워 그 나라와 그 세계를 치리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면 그 영광을 무엇으로 갚을 것이냐? 그러한 권한이 설정되면, 그 권한은 영원한 자리에 승리의 권한으로서 내려가지 않고 영원히 고착될 수 있는 참된 영광의 길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중심삼고 공인된 아들딸의 자리에 서서 만국 혹은 만 천주를 대신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고 온 천지 앞에 자랑하면서 목을 붙들고 입을 맞추는 그런 자리가 있다면, 그 이상의 소원이 어디에 있겠어요? 그분과 더불어 살고 그분과 더불어 가고픈 곳을 가 보고 죽을 수 있는 환경을 보고 살다가 죽는 것이 우리 인간이 바라는 참된 영광의 길입니다.
타락한 그 날부터 이 세계에는 그런 세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음과 고통 그리고 절망 가운데서 죽음이 엇갈린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소망했던 날이 이제 우리 목전에 다가올 수 있는 비장한 시점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자는 하늘도 아니요, 다른 어떤 나라도 아닙니다. 바로 이 한국, 남북이 엇갈린 여기에서 문제점을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진 종교들 가운데 오늘날 통일교회가 주목거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숨막히는 순간에 있어서 한 발짝을 잘 넘느냐, 못 넘느냐 하는 것에 세계적으로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영광의 한 날, 나는 없는 것으로 탕감해 버리고 남은 것으로써 숨을 내쉬는 기쁨과 더불어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숨결을 또 다시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출발을 볼 수 있는 내 일생이 되고 후손들 앞에 그럴 수 있는 대표자로 남아진다면 그 얼마나 영광이겠느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자리를 차지해야 인생의 참된 영광의 길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이래 그런 압축된 환경에서 솟구쳐 오른 한 사람, 한 가정, 한 무리가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국가와 세계를 뚫고 나올 수 있는 개인, 가정, 종족, 국가가 나타나면 그 국가는 세계적인 전통 국가가 될 것이고, 그 종족은 세계적인 전통 종족이 될 것이고, 그 가정은 세계적인 전통 가정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따로 따로가 아닙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가정에서부터 종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적인 승리권을 갖게 되면 그것은 영원한 국가, 민족, 종족, 가정과 개인의 전통을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사랑을 중심삼고 세울 수 있는 전통의 기반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신랑 신부의 이념을 중심삼고 뭘 하려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가정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을 만들어 가지고 종족, 민족, 국가를 편성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 세계의 국가보다 강해야 됩니다. 모든 면에서 강해야 합니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단결해야 되고, 누구보다도 하나되어야 하고, 누구보다도 승리해야 됩니다. 지금의 때는 세상의 것은 다 믿을 수 없는 때입니다. 하늘만을 믿고 의지하여 그 자리를 나서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영광의 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65-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