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3일)

훈독왕 | 20220416064050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3일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 (훈독본) 
날짜 : 1973. 6. 21(목)
장소 : 미국 벨베디아수련소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3일)

 

통일교회 패는 질기고 강해야

여러분이 벨베디아에서 수련받는 것이 상당히 힘든다고 생각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새로이 출발한 종교단체로서 먼저 출발한 단체들과 비교하게 될 때 저들은 역사과정을 거쳐 어떤 기반을 닦고 있지만 우리는 기반을 닦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출발했지만 세계의 종교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출발했다면, 우리는 어떠한 종교보다도 앞설 수 있는 역량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같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누가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모든 면에 누가 더 시간을 투입하고 누가 더 수고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국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 시간을 일하는데, 그 가운데 한 시간 일분을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최후에 승리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론적입니다. 곧, 일분 일초가 승리할 수 있는 키 포인트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단체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자고 하는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이상으로 일하지 않고는 승리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개, 지금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결정된 일하는 시간은 여덟 시간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의 일하는 시간이 여덟 시간을 능가해야 된다는 것을 보편적인 판단으로써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를 구할 수 없고 세계 앞에 남겨 줄 무엇도 없습니다. (67-212)


여러분, 굳은 쇠를 놓고 어느 것이 더 강하냐 할 때 부딪쳐 보면 아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강한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일면, 강한 것은 깨질 수 있습니다. 깨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굳은 것을 가지고 강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강하다는 말은 굳기도 하지만 질기다는 관념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탄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강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요? 통일교회 패는 질기고 강해야 됩니다. 자동차의 스프링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굳으면서 탄력이 있어야 됩니다. 여유도 있고, 능동성도 있고, 추진력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에 알려진 일본도(日本刀) 마사무네(まさむね)라는 유명한 칼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만들 때는 한 번 불에 달궈서 두드려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고열에 달구면 자꾸 찌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두드려서 자꾸 떼어버립니다. 한 번은 높은 열, 한 번은 덜 높은 열에 달구는 작업을 하면서 두드리고 달구고 또 두드리고 또 달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투입합니다. 새벽에 정신을 투입하면서 두드립니다. “이 칼은 어떠한 무엇이든 치면 갈라진다” 하는 정신, 만드는 사람의 정신을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칼을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쓰는 날에는 무엇이든지 베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권도나 가라데를 하는 사람들이 종이에다 막대기를 걸고 탁 때리면 종이는 괜찮은데 막대기가 꺾어지는 것을 봤을 것입니다. 먼저 배운 사람은 그것을 부러뜨리고도 남음이 있는 자리에 서는 거라구요. 종이가 끊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종이가 끊어지기 전에 부러뜨려 버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작용하기 전에 벌써 끝나 버립니다. 이것은 논리적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도 시간을 투입해 가지고 훈련을 많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복싱이나 레슬링의 세계 챔피언을 볼 때 그 사람이 훈련을 얼마나 하느냐 하는 그 훈련의 시간과 양을 가지고 그 사람이 앞으로 얼마만큼 계속하겠느냐, 얼마만큼 실력을 갖추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라데 같은 것을 할 때도 요렇게 해서 여기만 치면 안됩니다. 수평이 되게 해 가지고 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가하면 전부 다 같은 힘을 받기 때문에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67-213)

직선을 긋자

여러분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을 표준해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여기서 출발한 말이다” 하는 관념을 갖고 있느냐? 그저 듣고 말하고 그런다구요. 그런 사람들은 평면적인 인간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려면 무엇을 통해서 무슨 목적을 갖고 일관되게 해야 되는데, 일생 동안 그런 관을 갖고 나가는 사람을 사상가라고 합니다. 그러한 관을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해서 자주성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인격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집을 설계할 때도 맨 처음의 한 선, 바른 그 한 선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됩니다. 거기서 각도에 따라 모든 것이 처리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면서부터 “나는 이렇게 간다” 하는 직선을 그어 놓은 사람이 있느냐? 지금까지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어졌다면 역사적인 세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수많은 종교를 통일하겠다는 직선을 세계보다도 강하게 긋자는 것입니다. “나는 날 때부터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이것 때문에 나를 낳아 주었다. 나는 사는 것도 요것을 위해서 산다. 죽을 때도 요것을 위해서 죽겠다” 해야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직선으로 남기느냐, 내려가게 하느냐, 올라가게 하느냐 하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끝내겠어요? 내려가든가 올라가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도 역사를 생각하고 과거를 생각해서 전부 다 치우치지 않게 딱 들이맞춰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시간은 일생에 제일 심각한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직선을 긋자 이겁니다. 이 직선은 영원히 그어 가야 됩니다.


그런 선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선을 중심삼고 우주적인 계획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가다가 구부러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것이기 때문에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 직선을 중심삼고 섭리를 하신다 이겁니다. 이것은 한 토막 한 토막으로 잘라도 전부 다 맞습니다. 어디에 맞춰도 꼭 맞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곧게 해 가지고 갖다 맞추면 어디든 맞아떨어져야 됩니다. 밀리미터기로 재 가지고 같은 원형이라면, 그것은 다른 밀리미터기로 재도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와 나는 같구나” 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이 되는 거예요. 직선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거쳐 미래까지 직선을 그어 놓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하면 안됩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님을 중심삼고 누가 더 곧으냐 할 때, 우리가 더 곧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현세에도 우리가 더 곧아야 됩니다. 미래에도 우리가 더 곧아야 됩니다. 이 직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같으면 하나님도 이 선이 세계적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부터 출발했는데 직선이다. 지금도 직선이다. 미래에도 직선이다” 하는 관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 선에서 맞추지 않으면 모든 것이 틀린다는 관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계도 우리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또, 지금의 이 세계도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미래도 우리가 세우는 전통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사상적인 관념으로 볼 때, 직선을 제일 굵고 길게 그어 놓을 수 있는 사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굵기만 하고 가는 것은 없느냐? 거기에 1밀리 정도로 가는 것들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있다면, 그가 세워 놓은 인생관은 영원한 인생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변경시키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도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67-215)

언제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길을 다니라

우리 통일사상은 이런 방대한 내용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하나의 직선을 그어서 여기에 조화적인 창조의 미를 가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만을 보고 “이놈아, 너와 나는 같지 않느냐” 할 수 있습니다. 요것만 보일 때는 “너와 내가 같지 않느냐? 뭐가 달라”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을 더듬으면 아담 해와의 이전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발부터 하나님의 심정세계, 하나님의 이상적 심정세계까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창조하기 전의 심정까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또, 이 방향의 끝은 어디냐? 이 세계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될 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원과 결과를 가질 수 있는 사상이 지금까지 있었느냐?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물질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들은 원인뿐만 아니라 결과도 모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사상의 중심은 기독교인데, 기독교도 거기까지는 못 미치고 있습니다. (판서하시며) 그러면 여기로 가려고 해도 멀고 저기로 가려고 해도 만 리인데 여러분은 지금의 위치에서 이리 가야 되겠어요, 저리 가야 되겠어요? 여러분이 여기에 있으면 어디를 먼저 가 봐야 되겠어요? 자기가 직선의 가운데 서 있다고 하면 앞으로 갈 거예요, 뒤로 갈 거예요?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돼요? 내가 점이고 여러분이 직선이라면, 여러분이 점이 있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길을 다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동기의 심정이 결과의 심정보다 강해야 과정에서 소모가 있더라도 결과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논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67-216)

모든 세포까지 춤을 출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똑바른 선이 무엇이냐? 물질이에요, 권력이에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필요로 함과 동시에 우리 인간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어야 끝과 끝이 연락될 수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사랑입니다. 사랑밖에는 여기에 갖다 놓을 무엇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돌아가려고 해요, 아니면 그저 부딪치고 벽이라도 무너뜨리고 가려고 해요? 직선으로 가려고 해요, 돌아가려고 해요? 직선으로 가려고 합니다. 왜 그러하냐?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상이 지지부진 오래 걸려서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당장에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어떤 것이 좋아요? 누구나 이상을 죽음보다 앞서서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둘이 하나되면 왜 이상적이라고 하느냐? 전 세계가 보호하고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다 부러워하고 찬양하기 때문에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상을 빨리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한 이상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돼 있어요? 믿어지지 않는다구요. 어떤 사람은 “나는 몸이 약한데 어떡하나” 하고 어떤 사람은 “올드 미스가 되어서 어떻게 하나? 나이가 많아서 어떡하나” 하는데, 그것은 다 변명이라구요. 진짜 사랑의 길을 만나게 되면 늙은이든 젊은이든 총돌진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부러워하고, 제일 그리워하고, 제일 찾고자 하고, 제일 갖고 싶어하시는 것이 뭐냐? 그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요? 대통령 같은 권력이 필요해요? 그것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하나님 속에서 놀아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한테 필요하지 않다구요. 그러면 “하나님, 당신한테 뭐가 필요합니까” 하면, “내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필요로 하시는 것을 내가 나꿔채 가지고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이 입맛을 쩍쩍 다시겠어요, 안 다시겠어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가겠어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의 속이 상하겠어요, 안 상하겠어요?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이 어떻겠어요? 하나님도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야, 너! 나하고 같이 어디 가자” 할 것인데 그때 그 사람이 싫다고 하면 하나님이 말 안 듣는 그 사람을 보고 좋아하겠어요, 속상해 하겠어요? 영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도 한번 갖고 싶지 않아요? 그래, 얼마나 좋을 것이냐? 눈은 눈대로 왕처럼 좋아하고, 귀는 귀대로 왕처럼 좋아하고,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손가락은 손가락대로, 세포는 세포대로 전부 다 왕같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없다 이거예요.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세포까지 자극시켜 가지고 춤을 출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한번 느껴 봤으면 모가지가 잘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서 춤을 추려고 이러면 하나님도 박자를 맞춰서 반대로 이러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67-217)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관문

그러한 심정적 인연을 가지고 출발하여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고 미래에도 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불행하시겠어요? 그런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길을 직선으로 갈 수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이냐? 거기에 제일 적합한 말은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신랑 신부도 그렇지 않으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아니라구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태어날 적부터 사랑의 인연으로 출발했지만, 남편과 아내는 태어날 적부터 사랑의 인연으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형제의 사랑은 어떠냐?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형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같이 출발했지만 자리가 다릅니다. 형제도 부모를 중심삼고야 하나될 수 있지 부모가 없이는 하나가 못 된다 이겁니다. 사랑의 길에서 부모와 부부 그리고 자녀의 관계를 두고 볼 때, 결국 나와 하나님의 사이에는 부자의 관계 이외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이라구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자식과 같이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여러분이 이태리에서 여기에 왔는데,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이 여기에 온 줄을 알게 되면 그 마음은 벌써 여기에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은 부자의 관계밖에 없습니다. 부자의 관계, 이거 얼마나 멋진 말이에요! 이제 맨 출발서부터 직선을 그을 수 있는 것,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죽을 때까지 직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부자관계 외에는 없다고 결론을 지어도 여러분이 “야, 그것 틀렸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희생되면, 그 아버지가 아들을 죽으라고 내버려두던가요? 이런 관점에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인 우리를 죽을 자리에 내세우실 수 없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이상적 세계를 만들어서 우리를 부활시켜 놓으셔야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두고 볼 때, 그것은 가능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자리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그러한 이상적인 부활권으로 옮겨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죽을 수 있는 곳이나 비참한 곳에 살도록 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관문으로 그런 곳을 두셨다면,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우리 아버지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고,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을 확실히 가져야 됩니다. 아들은 왜 태어나느냐 하면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납니다. 왜 살아가느냐? 부모의 여러 가지 자극을 받고 사랑의 감미를 더 맛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하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러면서 같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러는 모습에 반하신다구요. 여러분이 손 흔드는 것을 보실 때 그 손이 얼마나 탐나겠어요! 홀딱 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느끼면서 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의 인연을 가진 아버지가 “야, 너 저리 가라” 할 때, “아, 나 못 가겠소” 이럴 수 있어요? 가라고 하기 전에 벌써 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고 “야, 이 미친 녀석아! 네가 바쁘면 얼마나 바빠” 하면서도 좋아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래야 되겠어요, 안 그래야 되겠어요? 그럴 수 있지요? (67-219)

직행하는 길

그러면 여러분이 다음부터 불평을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려면 그까짓 것 못할 것 있겠느냐 이거예요. 못 해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안 해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뭐가 나오는지 아느냐는 말입니다. 불평보다는 행하라 이겁니다. 불평하는 사람하고 행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승리하겠어요? 행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을 인도해서 하늘나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의 사람들보다도 강하고 담대해야 됩니다. 이런 직선을 긋는 것도 선생님이 이렇게 그었으면 여기에 맞춰서 가려고 생각하라구요! “나는 싫어, 이렇게 갈래” 하는 것은 오래 못 갑니다. 이렇게 한번 움직이는 날에는 다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직선에 붙어 있으면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복귀섭리와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논하는 사람은 미스터 문이 처음 아니에요? 하버드 대학을 나온 유명한 교수들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을 논하는 사람이 있어요? 영국의 옥스포드 혹은 독일의 대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요? 어떤 목사나 장로들이 이런 말을 하느냐 이거예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세계에 한 사람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전문분야라면, 이게 제일 멋진 전문분야입니다. 얼마나 멋진 놀음이냐 이거예요!


이것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내일 모레 가서 찾겠다” 이게 아닙니다. 그저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당장에 찾겠다”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3년 뒤에 할래요, 3일 동안에 할래요, 세 시간에 할래요? 내 마음으로는 세 시간도 길다구요. 여러분의 마음이 “너희들은 자겠으면 자라, 나는 간다. 쉬겠으면 쉬어라, 나는 간다” 이래야 됩니다. 각자의 갈 길이 바쁜 것입니다. 밥 먹는 것도 빨리 먹어야 됩니다. 물 마시는 것도 한꺼번에 벌컥벌컥, 걷는 것도 빨리 빨리입니다.


미국을 복귀시키는데 빨리 복귀시키고 싶어요, 천천히 복귀시키고 싶어요? 그러니까 무책임하게 다 쓰러지지 말고 책임 있는 마음을 가지고 시간과 모든 것을 아끼면서 전체를 투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일생을 걸어갈 때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이냐? 꾸불꾸불 갈 것이냐, 똑바르게 갈 것이냐? 선생님이 선두에서 가느니 만큼 선생님이 가는 길에 보조를 맞추어야 됩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안 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길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참부모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최고의 발명품이라면 발명품이고 발견품이라면 발견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이전부터 창조 이후의 복귀세계까지 직선으로 간다는 사상을 가지고 모든 정력을 투입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천국 가지 않겠다. 천국에 안 가겠다”고 해도 벌써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보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책을 제일 많이 봤다는 기록을 내야 되고, 듣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말을 제일 많이 듣고, 말을 하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말을 제일 많이 하고, 뭘 만드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제일 많이 만들고, 느끼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제일 많이 느껴야 됩니다. 생각을 해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모든 것을 원리를 가지고 비판하고 그래야 됩니다. 그것이 직행하는 길입니다. (67-221)*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3일, 원문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사람  
날짜 : 1973. 6. 21(목)
장소 : 미국 벨베디아수련소
 
통일교회 패는 질기고 강해야

여러분이 벨베디아에서 수련받는 것이 상당히 힘든다고 생각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새로이 출발한 종교단체로서 먼저 출발한 단체들과 비교하게 될 때 저들은 역사과정을 거쳐 어떤 기반을 닦고 있지만 우리는 기반을 닦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출발했지만 세계의 종교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소망을 가지고 출발했다면, 우리는 어떠한 종교보다도 앞설 수 있는 역량을 갖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들끼리 같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누가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모든 면에 누가 더 시간을 투입하고 누가 더 수고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국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한 시간을 일하는데, 그 가운데 한 시간 일분을 일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최후에 승리할 수 있는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론적입니다. 곧, 일분 일초가 승리할 수 있는 키 포인트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단체일 뿐만이 아니라 세계를 구하자고 하는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사람들이 일하는 시간 이상으로 일하지 않고는 승리하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개, 지금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결정된 일하는 시간은 여덟 시간입니다. 여덟 시간을 일해야 된다는 것이 지금의 표준으로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여섯 시간 일하자는 입장으로 바뀌는 과정에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평균적인 기준에서 봐 가지고 여덟 시간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우리의 일하는 시간이 여덟 시간을 능가해야 된다는 것을 보편적인 판단으로써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를 구할 수 없고 세계 앞에 남겨 줄 무엇도 없습니다. (67-212)
여러분, 굳은 쇠를 놓고 어느 것이 더 강하냐 할 때 부딪쳐 보면 아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강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강한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일면, 강한 것은 깨질 수 있습니다. 깨지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굳은 것을 가지고 강하다고 하는데, 그렇게 강하다는 말은 굳기도 하지만 질기다는 관념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탄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강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러한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지요? 통일교회 패는 질기고 강해야 됩니다. 자동차의 스프링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굳으면서 탄력이 있어야 됩니다. 여유도 있고, 능동성도 있고, 추진력도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에 알려진 일본도(日本刀) 마사무네(まさむね)라는 유명한 칼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만들 때는 한 번 불에 달궈서 두드려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고열에 달구면 자꾸 찌꺼기가 나옵니다. 그것을 두드려서 자꾸 떼어버립니다. 한 번은 높은 열, 한 번은 덜 높은 열에 달구는 작업을 하면서 두드리고 달구고 또 두드리고 또 달구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투입합니다. 새벽에 정신을 투입하면서 두드립니다. “이 칼은 어떠한 무엇이든 치면 갈라진다” 하는 정신, 만드는 사람의 정신을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든 칼을 그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쓰는 날에는 무엇이든지 베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태권도나 가라데를 하는 사람들이 종이에다 막대기를 걸고 탁 때리면 종이는 괜찮은데 막대기가 꺾어지는 것을 봤을 것입니다. 먼저 배운 사람은 그것을 부러뜨리고도 남음이 있는 자리에 서는 거라구요. 종이가 끊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종이가 끊어지기 전에 부러뜨려 버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작용하기 전에 벌써 끝나 버립니다. 이것은 논리적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여러분도 시간을 투입해 가지고 훈련을 많이 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복싱이나 레슬링의 세계 챔피언을 볼 때 그 사람이 훈련을 얼마나 하느냐 하는 그 훈련의 시간과 양을 가지고 그 사람이 앞으로 얼마만큼 계속하겠느냐, 얼마만큼 실력을 갖추겠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라데 같은 것을 할 때도 요렇게 해서 여기만 치면 안됩니다. 수평이 되게 해 가지고 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을 가하면 전부 다 같은 힘을 받기 때문에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피아노를 치는 것도 그렇습니다. 다섯 손가락 가운데 이 손가락과 요 손가락의 치는 힘이 다르지만, 그것을 어떻게 같게 치느냐 하는 것이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많은 연습을 해야 됩니다. 이것은 더 강해야 되겠고, 이것은 약해야 되겠다는 것을 감안해 가지고 전부 다 자동적으로 움직여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연습하고 훈련한 기준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히 몰라 가지고는 명피아니스트가 될 수 없습니다. (67-213)

직선을 긋자

여러분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을 하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을 표준해 가지고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여기서 출발한 말이다” 하는 관념을 갖고 있느냐? 그저 듣고 말하고 그런다구요. 그런 사람들은 평면적인 인간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려면 무엇을 통해서 무슨 목적을 갖고 일관되게 해야 되는데, 일생 동안 그런 관을 갖고 나가는 사람을 사상가라고 합니다. 그러한 관을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해서 자주성을 어떻게 갖느냐 하는 것이 인격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집을 설계할 때도 맨 처음의 한 선, 바른 그 한 선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기준이 됩니다. 거기서 각도에 따라 모든 것이 처리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면서부터 “나는 이렇게 간다” 하는 직선을 그어 놓은 사람이 있느냐? 지금까지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어졌다면 역사적인 세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세계를 지배하고 수많은 종교를 통일하겠다는 직선을 세계보다도 강하게 긋자는 것입니다. “나는 날 때부터 이것을 위해서 태어났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이것 때문에 나를 낳아 주었다. 나는 사는 것도 요것을 위해서 산다. 죽을 때도 요것을 위해서 죽겠다” 해야 됩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때 직선으로 남기느냐, 내려가게 하느냐, 올라가게 하느냐 하는 세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끝내겠어요? 내려가든가 올라가게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때도 역사를 생각하고 과거를 생각해서 전부 다 치우치지 않게 딱 들이맞춰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시간은 일생에 제일 심각한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직선을 긋자 이겁니다. 이 직선은 영원히 그어 가야 됩니다.
그런 선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선을 중심삼고 우주적인 계획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가다가 구부러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것이기 때문에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 직선을 중심삼고 섭리를 하신다 이겁니다. 이것은 한 토막 한 토막으로 잘라도 전부 다 맞습니다. 어디에 맞춰도 꼭 맞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은 곧게 해 가지고 갖다 맞추면 어디든 맞아떨어져야 됩니다. 밀리미터기로 재 가지고 같은 원형이라면, 그것은 다른 밀리미터기로 재도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와 나는 같구나” 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이 되는 거예요. 직선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지금을 거쳐 미래까지 직선을 그어 놓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하면 안됩니다. 공자나 석가나 예수님을 중심삼고 누가 더 곧으냐 할 때, 우리가 더 곧다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현세에도 우리가 더 곧아야 됩니다. 미래에도 우리가 더 곧아야 됩니다. 이 직선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부터 시작하여 끝까지 같으면 하나님도 이 선이 세계적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옛날부터 출발했는데 직선이다. 지금도 직선이다. 미래에도 직선이다” 하는 관념을 가져야 됩니다. 이 선에서 맞추지 않으면 모든 것이 틀린다는 관념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영계도 우리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또, 지금의 이 세계도 우리를 필요로 합니다. 미래도 우리가 세우는 전통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사상적인 관념으로 볼 때, 직선을 제일 굵고 길게 그어 놓을 수 있는 사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굵기만 하고 가는 것은 없느냐? 거기에 1밀리 정도로 가는 것들도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이 있다면, 그가 세워 놓은 인생관은 영원한 인생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변경시키실 수 있겠어요? 하나님도 그것을 필요로 하시는 것입니다. (67-215)

언제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길을 다니라

우리 통일사상은 이런 방대한 내용을 중심삼고 역사적인 하나의 직선을 그어서 여기에 조화적인 창조의 미를 가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만을 보고 “이놈아, 너와 나는 같지 않느냐” 할 수 있습니다. 요것만 보일 때는 “너와 내가 같지 않느냐? 뭐가 달라” 이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것을 더듬으면 아담 해와의 이전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발부터 하나님의 심정세계, 하나님의 이상적 심정세계까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타락하기 전, 창조하기 전의 심정까지 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또, 이 방향의 끝은 어디냐? 이 세계가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될 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근원과 결과를 가질 수 있는 사상이 지금까지 있었느냐?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물질을 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들은 원인뿐만 아니라 결과도 모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사상의 중심은 기독교인데, 기독교도 거기까지는 못 미치고 있습니다. (판서하시며) 그러면 여기로 가려고 해도 멀고 저기로 가려고 해도 만 리인데 여러분은 지금의 위치에서 이리 가야 되겠어요, 저리 가야 되겠어요? 여러분이 여기에 있으면 어디를 먼저 가 봐야 되겠어요? 자기가 직선의 가운데 서 있다고 하면 앞으로 갈 거예요, 뒤로 갈 거예요?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돼요? 내가 점이고 여러분이 직선이라면, 여러분이 점이 있는 줄 알아요?
그러니까 언제나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하면서 길을 다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동기의 심정이 결과의 심정보다 강해야 과정에서 소모가 있더라도 결과까지 미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논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논해야 된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67-216)

모든 세포까지 춤을 출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
 
그러면 이 세상에서 제일 똑바른 선이 무엇이냐? 물질이에요, 권력이에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필요로 함과 동시에 우리 인간이 제일 필요로 하는 것이어야 끝과 끝이 연락될 수 있습니다. 그게 뭐예요? 사랑입니다. 사랑밖에는 여기에 갖다 놓을 무엇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돌아가려고 해요, 아니면 그저 부딪치고 벽이라도 무너뜨리고 가려고 해요? 직선으로 가려고 해요, 돌아가려고 해요? 직선으로 가려고 합니다. 왜 그러하냐?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이상이 빨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상이 지지부진 오래 걸려서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당장에 이루어지면 좋겠어요? 어떤 것이 좋아요? 누구나 이상을 죽음보다 앞서서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둘이 하나되면 왜 이상적이라고 하느냐? 전 세계가 보호하고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다 부러워하고 찬양하기 때문에 이상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상을 빨리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한 이상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생명을 각오하고 나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돼 있어요? 믿어지지 않는다구요. 어떤 사람은 “나는 몸이 약한데 어떡하나” 하고 어떤 사람은 “올드 미스가 되어서 어떻게 하나? 나이가 많아서 어떡하나” 하는데, 그것은 다 변명이라구요. 진짜 사랑의 길을 만나게 되면 늙은이든 젊은이든 총돌진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부러워하고, 제일 그리워하고, 제일 찾고자 하고, 제일 갖고 싶어하시는 것이 뭐냐? 그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요? 대통령 같은 권력이 필요해요? 그것은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하나님 속에서 놀아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한테 필요하지 않다구요. 그러면 “하나님, 당신한테 뭐가 필요합니까” 하면, “내게는 사랑이 필요하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필요로 하시는 것을 내가 나꿔채 가지고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생각해 보라구요! 하나님이 입맛을 쩍쩍 다시겠어요, 안 다시겠어요?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따라가겠어요, 안 따라가겠어요?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의 속이 상하겠어요, 안 상하겠어요?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이 어떻겠어요? 하나님도 속이 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야, 너! 나하고 같이 어디 가자” 할 것인데 그때 그 사람이 싫다고 하면 하나님이 말 안 듣는 그 사람을 보고 좋아하겠어요, 속상해 하겠어요? 영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도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있다면, 여러분도 한번 갖고 싶지 않아요? 그래, 얼마나 좋을 것이냐? 눈은 눈대로 왕처럼 좋아하고, 귀는 귀대로 왕처럼 좋아하고, 코는 코대로, 입은 입대로, 손가락은 손가락대로, 세포는 세포대로 전부 다 왕같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세상에는 없다 이거예요. 돈이나 권력을 가지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세포까지 자극시켜 가지고 춤을 출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한번 느껴 봤으면 모가지가 잘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서 춤을 추려고 이러면 하나님도 박자를 맞춰서 반대로 이러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67-217)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관문

그러한 심정적 인연을 가지고 출발하여 지금도 그렇게 가고 있고 미래에도 갈 수 있다면, 하나님이 불행하시겠어요? 그런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같이 기뻐할 수 있는 길을 직선으로 갈 수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이냐? 거기에 제일 적합한 말은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라는 말밖에 없습니다. 신랑 신부도 그렇지 않으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아니라구요.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태어날 적부터 사랑의 인연으로 출발했지만, 남편과 아내는 태어날 적부터 사랑의 인연으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형제의 사랑은 어떠냐?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형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같이 출발했지만 자리가 다릅니다. 형제도 부모를 중심삼고야 하나될 수 있지 부모가 없이는 하나가 못 된다 이겁니다. 사랑의 길에서 부모와 부부 그리고 자녀의 관계를 두고 볼 때, 결국 나와 하나님의 사이에는 부자의 관계 이외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이라구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일생 동안 자식과 같이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여러분이 이태리에서 여기에 왔는데, 여러분의 부모가 여러분이 여기에 온 줄을 알게 되면 그 마음은 벌써 여기에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은 부자의 관계밖에 없습니다. 부자의 관계, 이거 얼마나 멋진 말이에요! 이제 맨 출발서부터 직선을 그을 수 있는 것, 아들딸을 낳고 살면서 죽을 때까지 직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부자관계 외에는 없다고 결론을 지어도 여러분이 “야, 그것 틀렸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희생되면, 그 아버지가 아들을 죽으라고 내버려두던가요? 이런 관점에서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인 우리를 죽을 자리에 내세우실 수 없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면 이상적 세계를 만들어서 우리를 부활시켜 놓으셔야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두고 볼 때, 그것은 가능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그럴 수 있는 자리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그러한 이상적인 부활권으로 옮겨 주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죽을 수 있는 곳이나 비참한 곳에 살도록 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고차원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관문으로 그런 곳을 두셨다면,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우리 아버지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고, 나는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을 확실히 가져야 됩니다. 아들은 왜 태어나느냐 하면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납니다. 왜 살아가느냐? 부모의 여러 가지 자극을 받고 사랑의 감미를 더 맛보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하나님하고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이러면서 같이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러는 모습에 반하신다구요. 여러분이 손 흔드는 것을 보실 때 그 손이 얼마나 탐나겠어요! 홀딱 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심정을 느끼면서 가는 사람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의 인연을 가진 아버지가 “야, 너 저리 가라” 할 때, “아, 나 못 가겠소” 이럴 수 있어요? 가라고 하기 전에 벌써 가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고 “야, 이 미친 녀석아! 네가 바쁘면 얼마나 바빠” 하면서도 좋아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이 그래야 되겠어요, 안 그래야 되겠어요? 그럴 수 있지요? (67-219)

직행하는 길

그러면 여러분이 다음부터 불평을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되겠어요? 안 해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려면 그까짓 것 못할 것 있겠느냐 이거예요. 못 해서 못하는 게 아닙니다. 안 해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뭐가 나오는지 아느냐는 말입니다. 불평보다는 행하라 이겁니다. 불평하는 사람하고 행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승리하겠어요? 행하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을 인도해서 하늘나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교회의 사람들보다도 강하고 담대해야 됩니다. 이런 직선을 긋는 것도 선생님이 이렇게 그었으면 여기에 맞춰서 가려고 생각하라구요! “나는 싫어, 이렇게 갈래” 하는 것은 오래 못 갑니다. 이렇게 한번 움직이는 날에는 다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이 직선에 붙어 있으면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하나님의 복귀섭리와 하나님의 심정세계를 논하는 사람은 미스터 문이 처음 아니에요? 하버드 대학을 나온 유명한 교수들 가운데 하나님의 심정을 논하는 사람이 있어요? 영국의 옥스포드 혹은 독일의 대학 교수가 이런 말을 해요? 어떤 목사나 장로들이 이런 말을 하느냐 이거예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세계에 한 사람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전문분야라면, 이게 제일 멋진 전문분야입니다. 얼마나 멋진 놀음이냐 이거예요!
이것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내일 모레 가서 찾겠다” 이게 아닙니다. 그저 바라볼 것이 아니라 “당장에 찾겠다” 이래야 되는 것입니다. 3년 뒤에 할래요, 3일 동안에 할래요, 세 시간에 할래요? 내 마음으로는 세 시간도 길다구요. 여러분의 마음이 “너희들은 자겠으면 자라, 나는 간다. 쉬겠으면 쉬어라, 나는 간다” 이래야 됩니다. 각자의 갈 길이 바쁜 것입니다. 밥 먹는 것도 빨리 먹어야 됩니다. 물 마시는 것도 한꺼번에 벌컥벌컥, 걷는 것도 빨리 빨리입니다. 이것이 타당한 말이라구요.
미국을 복귀시키는데 빨리 복귀시키고 싶어요, 천천히 복귀시키고 싶어요? 그러니까 무책임하게 다 쓰러지지 말고 책임 있는 마음을 가지고 시간과 모든 것을 아끼면서 전체를 투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일생을 걸어갈 때 어디서부터 출발할 것이냐? 꾸불꾸불 갈 것이냐, 똑바르게 갈 것이냐? 선생님이 선두에서 가느니 만큼 선생님이 가는 길에 보조를 맞추어야 됩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안 가면 안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길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길밖에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참부모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최고의 발명품이라면 발명품이고 발견품이라면 발견품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 이전부터 창조 이후의 복귀세계까지 직선으로 간다는 사상을 가지고 모든 정력을 투입하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천국 가지 않겠다. 천국에 안 가겠다”고 해도 벌써 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보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책을 제일 많이 봤다는 기록을 내야 되고, 듣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말을 제일 많이 듣고, 말을 하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말을 제일 많이 하고, 뭘 만드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제일 많이 만들고, 느끼는 데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제일 많이 느껴야 됩니다. 생각을 해도 그렇게 해야 됩니다. 모든 것을 원리를 가지고 비판하고 그래야 됩니다. 그것이 직행하는 길입니다. (67-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