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2일
세계평화와 가정이상 (훈독본)
- 1999세계문화체육대전 개막 만찬회 때 하신 말씀 -
날짜 : 1999. 2. 4(목)
장소 : 한국 서울 롯데호텔
가정윤리와 세계평화
존경하는 의장,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세계 지도자, 내외 귀빈,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99세계문화체육대전에 즈음하여 전 세계 각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여러분이 이렇게 참석해주신 것에 대해 본대회의 창시자로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천 년을 바라보는 인류는 평화와 번영을 위해 사랑문화, 심정문화의 세계를 지향해 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 본인의 소신입니다. 이 점에서 ‘가정윤리와 세계평화’를 주제로 개최되는 본대회는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제에 본인은 역사이래 모든 사람들이 고심해 온 문제인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의 일단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계는 지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틀림없이 영계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과 영계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영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말에서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고 합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원래 인생이 출발했던 본래의 처소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창조주가 계신다면 그 창조주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주도 순환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에 쌓여 있던 눈이 녹게 되면 그 물이 조그만 계곡을 통해서 흐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여러 강들을 통해서 대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대해로 흘러 들어가게 된 그 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우리는 지상계에서 육신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영원한 세계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영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사는 일생은 잠깐이고 죽은 다음에 우리가 맞이해야 할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일생 기간이라는 것은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299-60)
소망의 내용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언젠가는 영계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영계는 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영계에서 생활하는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면, 고기는 물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고기에게는 물이 절대적인 생명의 조건이 됩니다. 그렇다고 고기가 한 곳에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고기 중에는 산란을 위해 담수를 떠나 해수와 접하는 계기를 만들어서 새끼를 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두 세계를 통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처럼 서로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상고해 볼 때, 만일 우리의 조상인 아담이 태어난 날과 성혼한 날 그리고 돌아간 날을 기념하는 세계적인 통일권이 형성되었더라면 그 날을 기념하는 인류는 한 형제가 되고 한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의 세계에서 사는 인류가 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담의 생활풍습은 그대로 인류역사를 통해 계승되었을 것이며, 그때 형성된 문화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히 계승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삽니다.
인간들 가운데는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소망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망은 인간을 중심삼은 소망과 하늘을 중심삼은 소망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그 날부터 어머니의 품속이 그 무엇보다도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자라지만 얼마만큼 자란 후에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또 자라면서 친구들을 사귀어 친구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지내지만, 언젠가는 그 친구들과도 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부부, 사랑하는 형제,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자녀도 자기 소망의 전체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많은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하는 마음도 결국은 사라지고 맙니다. 가정에 대한 소망, 국가에 대한 소망,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지만 연령이 많아짐에 따라 그 소망하는 마음도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기를 바라고 내일도 살기를 바라며 새로운 소망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죽음에 부딪치게 될 때는 그 모든 소망을 뒤로하고 절망하면서 최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삼고 볼 때는 소망을 가진 듯하나 죽음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규범으로 삼고 죽음까지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299-62)
삶의 진정한 가치
여러분,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최후까지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죽음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소망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땅 위의 어떤 소망을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고 영원한 소망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그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태어나는 것인데, 인간 세계에서는 “아이구, 죽는다” 하면서 아우성입니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은 기뻐하고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제한된 지상의 사랑권 내에서 무제한의 사랑권 내로 돌입할 수 있는 기쁨을 맞는 순간이 육신이 죽는 순간, 즉 제2의 출생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죽음의 공포에서 해탈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서부터 오줌똥을 싸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시고 또 직접 간섭하면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아기가 성장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움직이는 사랑의 박자도 그로잉 업(growing up)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시늉을 하시면 아이들도 같이 시늉을 합니다. 하나님이 웃으시면 아이들도 같이 웃고 슬퍼하시면 같이 슬퍼하면서 이렇게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299-65)
소생, 장성, 완성의 시대를 거친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싶어하고,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당신을 닮게 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시 하나님과 닮을 수 있는 체(體)를 입고 태어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영원히 날아다닐 수 있는 날을 고대합니다. 그렇게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날, 그런 몸뚱이로 태어나는 날 그날이 바로 육신을 벗는 죽음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데는 무엇을 위해서 죽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참사랑, 즉 위하는 사랑을 위해서 죽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벗는다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 사랑의 활동권에 우리가 동참하기 위해서요, 하나님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라는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이 무한한 우주를 순식간에 왕래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관심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능하지 우리의 맘대로 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주체이고 몸은 대상이기 때문에 몸이 마음을 따라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또 3단계의 세계인 소생, 장성, 완성의 시대를 거칩니다. 즉 어머니 복중의 수중세계, 지구성의 세계, 천상의 공중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복중의 물 시대를 거쳐 지상에 태어나서 육신을 쓰고 백 년 가까이 땅의 시대를 거치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날아가는 공중시대의 3시대를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299-67)
새로운 사랑의 인격을 형성해야
여러분, 사람은 맨 처음 태어날 때 제일 깊은 물 속에서 태어납니다. 복중시대는 수중시대입니다. 복중의 어린애는 영양분을 어디를 통해서 공급받습니까? 배꼽을 통해서입니다. 배꼽은 복중 어린애에게는 입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호흡기 역할도 했던 배꼽의 다음 단계는 입입니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이 지구성에서 공기로 호흡을 하고 사는 육신에 붙어 있는 우리의 영인체는 어머니 복중의 태아처럼 육신을 빨아먹다가 육신이 다 늙으면 차 버리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육신이 “아이구, 안 죽겠다” 하고 비명을 지른다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고통에 처한 그 육신을 동정하시겠어요, 아니면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겠어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어머니의 복중을 뛰쳐나온 어린애가 성장하여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육신의 비명을 뒤로하고 새로이 태어나 영적 아버지인 영원한 하나님의 상대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 원리적인 결론입니다.
어린애가 모태 안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상생활은 공기를 마시며 공기 보자기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상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사랑을 나누며 호흡하는 사람이라야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인 무한한 세계를 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영계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영계에 들어가면 머리 위에 있는 숨구멍과 세포로 호흡하게 됩니다. 영계에서의 공기는 지상의 공기가 아니고 사랑입니다. 호흡을 통해서 사랑의 요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사랑의 인격을 형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제2의 호흡을 하던 육체에 연결된 이 기관을 깨뜨려 버리고 사랑의 요소를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차피 육신을 깨뜨리고 나가야 됩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자녀의 사랑 등 모든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의 내적인 구조가 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 때만 어린애가 어머니의 복중에서 정상적인 아기로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도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299-69)
영원한 세계에 제2의 나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자연계를 살펴보면 하찮은 곤충들, 식물의 씨, 그리고 새 새끼도 날 수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날 수 없어야 되겠습니까? 민들레 씨를 보십시오! 바람이 불면 자연히 날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새도 날고, 곤충도 날고, 식물의 씨도 나는 것을 보면 인간도 분명히 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에 가서 그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훈련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언젠가는 이 육신을 벗고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자리의 일생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유충이 되어 가지고 물 속에서 헤엄치고 살다가 땅 위에 올라와서 한동안 기어다니며 삽니다. 그 다음에는 껍데기를 벗고 훌훌 날아다니며 육지에서는 먹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벌레들을 잡아먹습니다. 천하를 자기 무대로 삼고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곤충류 가운데는 3단계의 세계를 거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곤충은 날개가 있습니다. 물과 육지 그리고 공중의 3시대를 살면서 날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에게도 날개가 있습니까? 인간에게는 차원이 높은 날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육신을 벗고 죽는 것이 싫다고 하겠지만 막상 죽어서 육신을 벗고 나면 우리는 영인체로서 제2출생의 복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휙 하고 날아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복중에서 태교를 잘 받아야만 건강하고 선한 아기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지상세계에서의 생활도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본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본받으며 자라야 됩니다. 그렇게 자라서는 또 생명을 걸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무서운 폭풍우가 치더라도 우리는 최후의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잘 나가다가 경계선 앞에서 쓰러지면 안됩니다. (299-71)
내 자신을 찾아야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주장할 때는 하나님과 참부모가 그렇다고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터 위에 우리는 친척, 일족, 일국으로 발전시켜 나가며 우리의 생활환경을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험한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하여 수용하는 것처럼 머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은 격리시켜 북극 같은 한대지방에 수용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서는 그 날까지 그런 곳에 내 팽개쳐져 먹을 것과 잠잘 곳도 없이 엄청난 고통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서러워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는 책임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나는 살아생전에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수준까지 뜻을 이루어 놓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국가나 특정민족을 위하여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목적은 세계 구원입니다.
나는 그 목적을 위해서 지금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적으로 목숨을 바쳐 일해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세계를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합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아내, 가정, 종족, 민족을 몽땅 안고 죽을 수도 있어야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앞으로 어느 한 날에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죽음을 앞에 놓고 지난날을 회고해 보게 될 텐데, 그때 어떠한 말을 남기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죽음에 봉착하는 그 순간에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이 없다고 할진대는 거기에서 마지막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느냐 하면 죽음의 길 앞에서 후퇴한 자들이 아니라 죽음을 비웃고 죽음을 늠름히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의 길을 세워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인간이 슬퍼하는 죽음의 고개도 기쁨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의 소망을 품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앞에 놓고 세상만사를 원망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기뻐하고 하늘 앞에 서서 자기의 죽음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기 전까지는 내 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혈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는 우리의 생명 전부는 사탄 편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한 시대를 지내지 않고는 다른 시대를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299-73)
영계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
이 땅 위에 왔다가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최후의 자리에서 과거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과거의 모든 사실들이 영상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참이 있었다. 내 생명보다도 귀한 그 무엇을 남겼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록 이 땅에 왔다 가더라도 보람 있는 한 때를 즐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과거의 사연을 회상해 볼 때 머리를 흔들며 회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졌으면, 그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자기 얼굴에 환희가 넘치며 자기의 모든 문제가 이상에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도 그에게는 위로의 한 장면으로 장식될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을 남긴다면 그의 과거는 죽지 않은 것이요, 현실도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과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민족이 따라올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세계 만민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인연을 남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계에서 지구라는 것은 먼지 한 점 같은 것입니다. 영계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대에 이러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지상에서 태어나 살다가 간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 직접 나와 봐라” 하면, 그 사람이 순식간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직감적인 감각이 현실화되는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식량을 만드는 공장도 없고,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299-76)
심정권의 기지
인간은 영계에 입적할 때 지상생활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가지고 가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런 일을 했다” 할 수 있는 생애의 증명서를 말입니다. 그러한 증명서는 자기 자신이 쓸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씁니다. 먼저 사탄에게서 증명서를 받고 나서 예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영계에 가 보면 방대한데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톱(top)에 올라가느냐 하면 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살아 온 사람은 반대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던 사람은 모두 다 반대하고, 남을 위해서 살던 사람은 모두 다 환영합니다. 영계에 가 있으면 자기의 부모나 아내도 상관없습니다. 높은 데 가는 사람은 전부 남을 위한 사람들입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다니면서 자기 어머니와 가정에 대한 사랑을 확대한 것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위하고 세계의 사람들을 전부 악에서 구해주려는 성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높은 데 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산 사람은 지옥으로 가는 것이고, 남을 위해 산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가 죽음에서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위하고 보다 큰 것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죽을 때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사랑을 세계에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최후에 저나라의 소유권을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영계에 가면 전도한 사람의 수에 의해서 여러분의 영계 소유권이 결정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영계에 가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얼마만큼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저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세계보다도, 자기 나라보다도, 자기 아내보다도,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문 선생은 심정권이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는데 그 심정권의 기지란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부모의 사랑, 참부부의 사랑, 참형제의 사랑, 참자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보편화 될 수 있는 세계가 심정권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영계에는 가정을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후손이란 본래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횡적인 부모의 사랑, 하나님과 부모의 피가 종횡으로 혼합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손을 못 가진 사람은 영계에 가서 조화를 못 이루고 동서남북으로 박자를 못 맞춥니다. 후손을 갖지 않게 되면 저나라에 가서도 놀고 쉴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299-77)
세계종교 유엔기구가 창설돼야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인류는 국가 단위 또는 국제연합을 통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줄기차게 추구해 왔습니다. 현실이 말해 주듯이 그 노력이 정치, 경제, 기술적인 측면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보다 내적인 종교, 교육, 문화적 측면의 지원이 있어야 이상적인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외적, 육적,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만으로는 성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다 내적이요, 영적이며 정신적인 완성과 만족을 통하여 진정한 이상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종교적인 가르침과 세계 모든 종교의 연합과 일치된 행동을 통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본인은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기왕의 유엔에 세계 주요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세계종교 유엔기구가 창설돼야 함을 주창하는 바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오늘 이 시점에서 세계종교유엔의 창설과 그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앞으로 여러분과 세계 각계의 지도자들이 더욱 심도 있게 논의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99-80)*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12일, 원문
세계평화와 가정이상
- 1999세계문화체육대전 개막 만찬회 때 하신 말씀 -
날짜 : 1999. 2. 4(목)
장소 : 한국 서울 롯데호텔
가정윤리와 세계평화
존경하는 의장,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세계 지도자, 내외 귀빈, 그리고 신사 숙녀 여러분! ‘99세계문화체육대전에 즈음하여 전 세계 각국에서 존경받는 지도자 여러분이 이렇게 참석해주신 것에 대해 본대회의 창시자로서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새로운 천 년을 바라보는 인류는 평화와 번영을 위해 사랑문화, 심정문화의 세계를 지향해 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 본인의 소신입니다. 이 점에서 ‘가정윤리와 세계평화’를 주제로 개최되는 본대회는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람직한 사랑문화가 정립되기 위한 조건들이 많겠습니다만, 도덕과 정신적인 가치를 부흥시켜 가정의 화락과 안정을 이룩하는 일이 선결요건이 될 것입니다. 개인의 도덕적인 생활의 기준이나 가정 혹은 사회의 윤리기준이 절대가치를 중심하고 확립되기 위해서는 바른 세계관과 우주관이 정립되어야 하겠습니다. 차제에 본인은 역사이래 모든 사람들이 고심해 온 문제인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의 일단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계는 지상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계도 있습니다. 틀림없이, 영계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상과 영계는 전혀 다른 두 세계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로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계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다시 영계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말에서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죽는다’는 것을 ‘돌아간다’고 합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입니까? 이는 단지 공동묘지로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원래 인생이 출발했던 본래의 처소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멀고 먼 역사의 기원을 넘어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한국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인류조상의 근원이 되는 그 세계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즉, 창조주가 계신다면 그 창조주가 계시는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했으니까 거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주도 순환작용을 합니다. 예를 들어, 산에 쌓여 있던 눈이 녹게 되면 그 물이 조그만 계곡을 통해서 흐르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여러 강들을 통해서 대해로 흘러 들어갑니다. 대해로 흘러 들어가게 된 그 물은 수증기가 되어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환운동을 통해서 보다 더 높을 수 있는 곳, 보다 더 좋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우리는 지상계에서 육신생활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영원한 세계를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10대, 20대, 30대, 그리고 장년과 노년시대를 거치게 됩니다. 이처럼 청춘시대를 지나 가지고 장년시대를 거쳐 노년의 고개를 넘어가면서 지는 해와 같이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영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사는 일생은 잠깐이고 죽은 다음에 우리가 맞이해야 할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서의 일생 기간이라는 것은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기 위한 준비기간입니다.
학생을 예로 들어보면, 그 학생이 한 학기 혹은 한 학년을 마치면서 학교가 제정한 모든 학과의 학점을 따야만 하는 학점의 기준이 있습니다. 그 최고의 기준을 백 점으로 하여 가지고 볼 때 그 기준에 그 학생의 학점이 얼마만큼 도달했느냐 하는 비중에 의해서 학교에서 인정받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점에 미달하는 퍼센트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학생은 학교가 세운 그 가치 기준에서 멀어집니다.
이처럼 모든 일은 어떤 표준을 중심삼고 그 가치를 측정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육신세계에서 사는 것도 마치 학생이 학교에서 좋은 학점을 따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일생 전체를 걸고 학점을 따는 준비기간이라는 말이 됩니다.
즉, 우리의 일생을 놓고 책임을 추구하는 어떤 기준 앞에 우리가 얼마만큼 일치되느냐 하는 기준치를 중심삼고 우리는 매일 생애노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은 본래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찾아가야 할 본연의 세계가 어디인지를 확실히 모르고 있습니다. 즉 사후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신이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299-60)
소망의 내용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 언젠가는 영계에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알고 보면, 그 영계는 한 나라입니다. 지상세계처럼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영계에서 생활하는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예를 들면, 고기는 물을 떠나면 살 수 없습니다. 고기에게는 물이 절대적인 생명의 조건이 됩니다. 그렇다고 고기가 한 곳에서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고기 중에는 산란을 위해 담수를 떠나 해수와 접하는 계기를 만들어서 새끼를 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두 세계를 통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처럼 서로 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상고해 볼 때, 만일 우리의 조상인 아담이 태어난 날과 성혼한 날 그리고 돌아간 날을 기념하는 세계적인 통일권이 형성되었더라면 그 날을 기념하는 인류는 한 형제가 되고 한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즉, 하나의 세계에서 사는 인류가 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아담의 생활풍습은 그대로 인류역사를 통해 계승되었을 것이며, 그때 형성된 문화는 인류가 생존하는 한 영원히 계승되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 죽을지를 모르고 삽니다. 언제 교통사고가 나서 죽을지 모릅니다. 죽고 난 다음에야 “아이구, 문 선생의 말이 맞구나” 하면서 후회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대단히 심각한 삶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영원한 세계를 가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 촌음도 아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운명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영계에 가는 사람들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기의 타고난 명대로 다 살고 가는 사람과 자기의 명대로 다 못 살고 가는 사람의 두 종류입니다. 자기의 명대로 다 못 살고 가는 사람들 중에는 벌을 받아서 빨리 죽는 사람과 민족이나 세계의 죄를 탕감하기 위해 대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천 사람의 가치를 지닌 한 존재를 중심적인 자리에 세워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게 하신다면 천 사람이 모두 그 사람의 은덕 앞에 감동하여 그 사람을 위하고, 그 사람의 생애를 본받고, 그 사람처럼 살겠다고 하게 되면 결국 사람들은 그 사람과 같은 혜택권 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충신의 사상을 본받으려고 하고 성현의 삶을 따르려고 하는 것도 그들과 같은 혜택권 내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 가운데는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도 있고 소망을 갖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망은 인간을 중심삼은 소망과 하늘을 중심삼은 소망의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그 날부터 어머니의 품속이 그 무엇보다도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자라지만 얼마만큼 자란 후에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또 자라면서 친구들을 사귀어 친구들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알고 지내지만, 언젠가는 그 친구들과도 헤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성장하면서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부부, 사랑하는 형제, 더 나아가서는 사랑하는 자녀도 자기 소망의 전체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많은 것을 소망합니다. 그러나 그 소망하는 마음도 결국은 사라지고 맙니다. 가정에 대한 소망, 국가에 대한 소망, 더 나아가서는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있지만 연령이 많아짐에 따라 그 소망하는 마음도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소망을 전체적인 소망으로서 자랑하고 자기의 생명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 소망을 버릴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온갖 소망을 품고 살지만 결국 죽음에 부딪쳐 자기가 품었던 소망의 전부를 다 버린 채 가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살기를 바라고 내일도 살기를 바라며 새로운 소망을 찾아 헤매고 있지만, 죽음에 부딪치게 될 때는 그 모든 소망을 뒤로하고 절망하면서 최후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삼고 볼 때는 소망을 가진 듯하나 죽음의 고개를 넘을 수 있는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규범으로 삼고 죽음까지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하나의 소망을 찾아야 하는 것이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299-62)
삶의 진정한 가치
여러분,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가정도 지나가고, 국가도 지나가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 혹은 어떤 주의나 사상도 다 지나가고 마는데 최후까지 남아져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죽음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패배자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적인 모든 소망 일체를 거부하고 인간 세상의 소망이 아닌 하늘의 소망, 즉 영원한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땅 위의 어떤 소망을 품고 살 것이 아니라 죽음의 고개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을 품고 영원한 소망의 세계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죽음에 대해 점점 심각해집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여러분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서 있는 레버런 문도 언젠가는 죽게 됩니다. 이처럼 죽음이라는 것은 운명의 관문입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겠어요? 죽음이라는 낱말을 쓴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삶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삶의 가치는 누가 잘 압니까?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은 모릅니다. 죽을 경지에 들어가 가지고 생사의 기로에서 하늘을 붙들고 삶의 가치를 타진해 본 사람이 아니고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왜 태어났는지 그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죽느냐, 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에서도 가장 첫째로 묻는 질문이 인생이 무엇이며, 인간은 왜 태어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태어나는 것인데, 인간 세계에서는 “아이구, 죽는다” 하면서 아우성입니다.
그것을 보는 하나님은 껄껄 웃으시겠어요, 아니면 “우…” 하고 놀라 슬퍼하시겠어요? 기뻐하고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제한된 지상의 사랑권 내에서 무제한의 사랑권 내로 돌입할 수 있는 기쁨을 맞는 순간이 육신이 죽는 순간, 즉 제2의 출생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이 육신세계에 태어난 날을 더 기뻐하시겠어요, 아니면 제2의 무한한 세계의 사랑을 위하여 육신을 벗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아들딸로 태어나는 그 시간을 더 기뻐하시겠어요? 물론, 후자입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죽음의 공포에서 해탈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기로 태어나서부터 오줌똥을 싸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지켜보시고 또 직접 간섭하면서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아기가 성장함에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에 움직이는 사랑의 박자도 그로잉 업(growing up)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시늉을 하시면 아이들도 같이 시늉을 합니다. 하나님이 웃으시면 아이들도 같이 웃고 슬퍼하시면 같이 슬퍼하면서 이렇게 점점 하나님을 닮아 갑니다.
또,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부모의 모습을 닮게 됩니다. 말도 배우고 생활규범도 부모들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본래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함께 이 지구성에 살고 있다가 저편으로 휙 날아가실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아이구,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한다면 “이놈아, 너는 누구야”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떼 버리시겠어요, 아니면 함께 데리고 가시겠어요? 물론, 데리고 가고 싶어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데리고 갈 수가 없으니까 네가 조금 더 크고 완성이 된 후에 데리고 가겠다” 하실 때, 인간은 “우리도 지금은 못 가지만 언젠가는 갈 때가 오겠구나”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항상 따라다닐 수 없습니다. (299-65)
소생, 장성, 완성의 시대를 거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닮고 싶어하고,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당신을 닮게 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가지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다시 하나님과 닮을 수 있는 체(體)를 입고 태어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함께 영원히 날아다닐 수 있는 날을 고대합니다. 그렇게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날, 그런 몸뚱이로 태어나는 날 그날이 바로 육신을 벗는 죽음의 날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음을 환영해야 되겠어요, 아니면 슬퍼해야 되겠어요? 물론, 환영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는데는 무엇을 위해서 죽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참사랑, 즉 위하는 사랑을 위해서 죽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육신을 벗는다는 것은 무한한 하나님 사랑의 활동권에 우리가 동참하기 위해서요, 하나님 사랑의 세계를 위해서라는 결론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한번 그런 참사랑을 받아 실천하는 하나님의 진짜 아들딸로 태어나 보고 싶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부자라면 얼마나 부자이겠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저 무한한 별 가운데 다이아몬드별이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순금으로 된 별은 없겠습니까? 하나님이야말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엇인들 주고 싶어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무한한 우주를 순식간에 왕래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관심이 있어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도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가능하지 우리의 맘대로 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라” 하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자신이 있습니까?
인간은 이중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주체이고 몸은 대상이기 때문에 몸이 마음을 따라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또 3단계의 세계인 소생, 장성, 완성의 시대를 거칩니다. 즉 어머니 복중의 수중세계, 지구성의 세계, 천상의 공중세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복중의 물 시대를 거쳐 지상에 태어나서 육신을 쓰고 백 년 가까이 땅의 시대를 거치게 되며 최종적으로는 날아가는 공중시대의 3시대를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복중에 있을 때는 바깥세계로 나가지 않으려고 저항합니다. 그 속에서 계속 남아 있겠다고 발버둥을 칩니다. 우리가 복중을 뛰쳐나올 때는 집이 다 파괴되고 우리가 먹고살던 영양가치와 모든 것도 깨져 나가고 분만과정을 통과하면서 머리도 늘어나야 되고 몸뚱이도 늘어나야 되는데, 그 누가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도 모두들 “노(no)”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애는 양수가 확 터져 나오는 그 물을 따라나오면 순산이 됩니다.
어머니들이 아기를 분만하는 것을 보면 참 불쌍합니다. 아기를 낳아 본 어머니들은 다 압니다. 힘을 줄 때는 얼굴이 아무리 미인이라고 하더라도 온갖 상을 찌푸리면서 남편까지도 그 얼굴을 못 보고 도망가게 만듭니다. 근사한 만물상의 모습이 됩니다. 이와 같이 산모도 마지막 순간까지 엄청난 고통을 겪고 나서야 자식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배꼽에 달린 탯줄을 그대로 놔두어야 되겠어요, 아니면 무자비하게 잘라내야 되겠어요? “그것은 내 생명줄인데 왜 끊소” 하면서 항의할 아기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는 어린애도 죽겠다고 앙앙 울어댑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기쁨의 웃음을 감추지 못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태어난 새 생명에게 한 세계는 왕창 없어지고 새로운 한 세계에서 “후욱, 후욱” 하면서 숨을 쉬게 됩니다. (299-67)
새로운 사랑의 인격을 형성해야
여러분, 사람은 맨 처음 태어날 때 제일 깊은 물 속에서 태어납니다. 복중시대는 수중시대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는 물 가운데 둥둥 떠 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어머니의 뱃속시대에는 숨이 막혀서 살기 힘들 것처럼 느껴집니다. 물 속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물을 들여 마시고 내보내는 놀음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복중의 어린애들은 호스를 배에다 연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복중의 어린애는 영양분을 어디를 통해서 공급받습니까? 배꼽을 통해서입니다. 배꼽은 복중 어린애에게는 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꼽을 천대하면 안됩니다. “배꼽아, 너 옛날에 수고했다” 하면서 만져 주라는 것입니다. 배꼽을 많이 두드려 주면 건강해집니다. 웃을 얘기가 아닙니다. 운동을 하라는 말입니다. 배꼽운동을 통해서 건강해지시라는 말입니다.
그 예로 아무리 추운 방에서 자더라도 배꼽만 잘 감싸고 자면 설사가 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 배꼽을 우리의 옛날 입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혹자는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옛날 입이 어디 있어” 할지도 모르지만, 배꼽이 우리의 과거 입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호흡기 역할도 했던 배꼽의 다음 단계는 입입니다.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이 지구성에서 공기로 호흡을 하고 사는 육신에 붙어 있는 우리의 영인체는 어머니 복중의 태아처럼 육신을 빨아먹다가 육신이 다 늙으면 차 버리고 나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에 육신이 “아이구, 안 죽겠다” 하고 비명을 지른다면,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고통에 처한 그 육신을 동정하시겠어요, 아니면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겠어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고 어머니의 복중을 뛰쳐나온 어린애가 성장하여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육신의 비명을 뒤로하고 새로이 태어나 영적 아버지인 영원한 하나님의 상대로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 원리적인 결론입니다.
지상세계에서도 자식이 태어난 후 성장하면 어머니 아버지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사랑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지상세계에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어린애가 모태 안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상생활은 공기를 마시며 공기 보자기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상에서 어머니 아버지와 사랑을 나누며 호흡하는 사람이라야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영적인 무한한 세계를 통할 수 있는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영계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영계는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영계에 들어가면 머리 위에 있는 숨구멍과 세포로 호흡하게 됩니다. 영계에서의 공기는 지상의 공기가 아니고 사랑입니다. 호흡을 통해서 사랑의 요소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 살 때 밥만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밥만 먹고 물만 마시고 산다는 것은 밥 주머니와 물주머니를 채우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그러다가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의 우리 모습은 제2의 우리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기간에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사랑의 인격을 형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고아가 무엇입니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왜 고아라고 부릅니까? 영계와 영원히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사랑이 없으면 외롭습니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을 불쌍하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제2의 호흡을 하던 육체에 연결된 이 기관을 깨뜨려 버리고 사랑의 요소를 이어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차피 육신을 깨뜨리고 나가야 됩니다.
사랑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형제의 사랑, 자녀의 사랑 등 모든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의 내적인 구조가 성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살 때만 어린애가 어머니의 복중에서 정상적인 아기로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도 잘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299-69)
영원한 세계에 제2의 나로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자연계를 살펴보면 하찮은 곤충들, 식물의 씨, 그리고 새 새끼도 날 수 있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날 수 없어야 되겠습니까? 민들레 씨를 보십시오! 바람이 불면 자연히 날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새도 날고, 곤충도 날고, 식물의 씨도 나는 것을 보면 인간도 분명히 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혹자는 성급하게 “하나님, 다른 것들은 다 나는데 왜 우리는 날지 못하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항의하고 싶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들은 몇 십년 기다렸다가 완성하면 날게 해주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때에 가서 그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훈련해야 됩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부부끼리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면서 이 지상세계에서 훈련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고 살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언젠가는 이 육신을 벗고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미(잠자리)의 일생을 살펴보면 매미도 날게 되기 이전에 애벌레의 단계를 거칩니다. 그런데 그 매미가 “나는 애벌레로 살고 싶소. 껍데기 벗는 것 싫소. 아이구, 육지고 무엇이고 공기고 무엇이고 다 싫어” 하고 반항을 하다가도 막상 껍데기를 벗고 나면 후루룩 날게 됩니다. 잠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유충이 되어 가지고 물 속에서 헤엄치고 살다가 땅 위에 올라와서 한동안 기어다니며 삽니다. 그 다음에는 껍데기를 벗고 훌훌 날아다니며 육지에서는 먹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벌레들을 잡아먹습니다. 천하를 자기 무대로 삼고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곤충류 가운데는 3단계의 세계를 거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곤충은 날개가 있습니다. 물과 육지 그리고 공중의 3시대를 살면서 날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에게도 날개가 있습니까? 지상에서만 살아도 되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차원이 높은 날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육신을 벗고 죽는 것이 싫다고 하겠지만 막상 죽어서 육신을 벗고 나면 우리는 영인체로서 제2출생의 복된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휙 하고 날아가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은 어차피 죽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자아를 영원한 세계에 제2의 나로 세우기 위해서 고생을 각오해야 됩니다. 어머니의 복중에서 태교를 잘 받아야만 건강하고 선한 아기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지상세계에서의 생활도 잘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고, 하나님의 심정을 본받고,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본받으며 자라야 됩니다. 그렇게 자라서는 또 생명을 걸고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무서운 폭풍우가 치더라도 우리는 최후의 고개를 넘어야 합니다. 잘 나가다가 경계선 앞에서 쓰러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이런 인생의 경계선에 서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뛰어도 끝까지 갈지 못 갈지 모르는데 허둥지둥 하다가는 중도에 좌절하고 마는 것입니다. 최후의 결승점까지 경계선을 돌파하지 않으면 승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한번 해볼만한 일입니다. 아무리 뒤에서 반대하고 옆에서 핍박하더라도 내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남들이 반대하는 것을 관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 발이라도 어서 가서 이 운명의 길을 거쳐 나가야 되겠다는 사람이 최후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가야 되겠습니다. (299-71)
내 자신을 찾아야
우리는 흔히 마음이 곧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입니까? 똑바로 수직으로 선 것을 곧다고 합니다. 나무도 옆으로 기울어진 것은 곧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곧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직으로 서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서서 다닙니다. 수직이 되어야 곧은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완전히 수직이 되게 해야 됩니다. 거기에 몸이 수평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직과 수평이 우리 내부에서 이루어 질 때 수직에서 당겨주는 힘과 수평에서 밀어주는 힘이 균형을 취하게 되어 구심력과 원심력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주장할 때는 하나님과 참부모가 그렇다고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터 위에 우리는 친척, 일족, 일국으로 발전시켜 나가며 우리의 생활환경을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위험한 전염병 환자들을 격리하여 수용하는 것처럼 머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은 격리시켜 북극 같은 한대지방에 수용하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들은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서는 그 날까지 그런 곳에 내 팽개쳐져 먹을 것과 잠잘 곳도 없이 엄청난 고통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내가 서러워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는 책임을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나는 살아생전에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수준까지 뜻을 이루어 놓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사지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이 인도하고 끌어주십니다. 나는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세계와 인류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국가나 특정민족을 위하여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목적은 세계 구원입니다.
나는 그 목적을 위해서 지금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희생적으로 목숨을 바쳐 일해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세계를 위해서 살고 죽어야 합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아내, 가정, 종족, 민족을 몽땅 안고 죽을 수도 있어야 됩니다. 이제 여러분은 앞으로 어느 한 날에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죽음을 앞에 놓고 지난날을 회고해 보게 될 텐데, 그때 어떠한 말을 남기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죽음의 길은 친구도 없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부모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형제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부부도 없는 길이요, 사랑하는 자녀도 없는 길입니다. 오로지 혼자 가야 하는 길입니다. 다시 가 볼 수 없고 갔다가 올 수도 없는 길,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인데 이 길을 가게 될 때 인간은 어떠한 마음을 갖고 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인간이 죽음에 봉착하는 그 순간에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소망이 없다고 할진대는 거기에서 마지막입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 하나님의 뜻을 세워 나온 수많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느냐 하면 죽음의 길 앞에서 후퇴한 자들이 아니라 죽음을 비웃고 죽음을 늠름히 넘어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하늘의 길을 세워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잘 아는 바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인간이 슬퍼하는 죽음의 고개도 기쁨으로 넘어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늘의 소망을 품은 자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앞에 놓고 세상만사를 원망하고 탄식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기뻐하고 하늘 앞에 서서 자기의 죽음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죽기 전까지는 내 것이지만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락한 혈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기 전까지는 우리의 생명 전부는 사탄 편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과 인연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한 시대를 지내지 않고는 다른 시대를 맞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는 죽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죽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 세계의 타락한 혈통을 이어받은 생명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을 위해 죽으려는 사람은 산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역설 같지만 타락과 복귀의 내용을 중심삼고 볼 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복귀가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귀의 정상적인 논법입니다. (299-73)
영계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
인생의 승패는 몇 십년의 기간을 두고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순간에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두고 보더라도 여러분이 태어나는 그 순간은 긴 시간이 아닙니다. 물론, 태어나기 전까지 복중의 시기가 있지만 그 복중의 10개월이라는 기간은 출생하는 한 순간을 위한 준비의 기간입니다. 그런데 10개월 동안 아무리 잘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결정적인 한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태어나는 그 아기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이 땅 위에 왔다가 운명의 순간을 맞이하는 최후의 자리에서 과거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과거의 모든 사실들이 영상으로 지나갈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참이 있었다. 내 생명보다도 귀한 그 무엇을 남겼다”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비록 이 땅에 왔다 가더라도 보람 있는 한 때를 즐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과거의 사연을 회상해 볼 때 머리를 흔들며 회상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가졌으면, 그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자기 얼굴에 환희가 넘치며 자기의 모든 문제가 이상에 잠길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도 그에게는 위로의 한 장면으로 장식될 것입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순간이 공포의 순간이 아니고 다른 그 무엇을 남긴다면 그의 과거는 죽지 않은 것이요, 현실도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과거를 지닌 사람은 반드시 민족이 따라올 수 있는 인연을 가진 사람이요, 세계 만민이 따라오지 않을 수 없는 인연을 남긴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볼 때, 참과 선은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로부터 시작하여 남에게서 결과를 맺게 하든가, 남에 의해서 시작되어 나에게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야만 선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생활이 남을 위해준 생활이었으면 죽음 길에도 공포가 없을 것입니다.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었고 남을 위해 희생했으며 참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눈물도 남을 위하여 흘렸고, 내 생명도 남을 위하여 투입했고, 내 소원도 남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 과거는 빛나는 과거가 될 것입니다.
성현이 가는 길과 범인이 가는 길은 다릅니다. 성현은 역사와 더불어 살려고 했고, 세계와 더불어 살려고 했고, 미래와 더불어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범인은 자기로 말미암아 살려고 했고, 세계도 자기로 말미암아 있게 하려던 사람입니다. 영계에도 영계대로의 세계가 있고, 나라가 있고, 종족이 있고, 가정이 있고, 개인이 있습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볼 때 “나는 거기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다” 할 수 있는 자주성이 없이는 못 들어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종족을 중심삼고 볼 때도 역시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할 수 있는 그런 자주성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영계에서 지구라는 것은 먼지 한 점 같은 것입니다. 영계는 시공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어떤 시대에 이러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지상에서 태어나 살다가 간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 직접 나와 봐라” 하면, 그 사람이 순식간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직감적인 감각이 현실화되는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식량을 만드는 공장도 없고,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299-76)
심정권의 기지
인간은 영계에 입적할 때 지상생활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가지고 가야 됩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다. 이런 일을 했다” 할 수 있는 생애의 증명서를 말입니다. 그러한 증명서는 자기 자신이 쓸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사탄이 씁니다. 먼저 사탄에게서 증명서를 받고 나서 예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증명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의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영계에 가 보면 방대한데 3단계로 되어 있습니다. 누가 톱(top)에 올라가느냐 하면 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위해 살아 온 사람은 반대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 살던 사람은 모두 다 반대하고, 남을 위해서 살던 사람은 모두 다 환영합니다. 영계에 가 있으면 자기의 부모나 아내도 상관없습니다. 높은 데 가는 사람은 전부 남을 위한 사람들입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다니면서 자기 어머니와 가정에 대한 사랑을 확대한 것과 같은 심정을 가지고 위하고 세계의 사람들을 전부 악에서 구해주려는 성인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높은 데 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산 사람은 지옥으로 가는 것이고, 남을 위해 산 사람은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가 죽음에서 갈라집니다. 그러므로 전체를 위하고 보다 큰 것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인류의 해방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서로가 위하겠다고 하는 경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위하여 사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가기 때문에 그 높은 사람을 내가 위하게 되면 그 사람을 타고 점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위하는 것은 하나님이 상대를 만드신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대상권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영계는 참사랑을 중심삼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곳입니다. 남을 백 퍼센트 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다 “나를 밟고 넘어가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국이라는 나라가 크더라도 미국의 대통령보다 그 나라의 백성을 더 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대통령을 밟고 넘어가더라도 모두 다 환영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게 될 때는 전부 다 원수가 됩니다. 영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하게 되면 자연히 통합니다. 그러니까 세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미국을 위해서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가운데 미국이 포함됩니다. 모든 나라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환영할 수 있는 그 방향의 내용이란 참사랑을 중심삼고 위하여 가는 사랑의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죽을 때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사랑을 세계에 확대하기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최후에 저나라의 소유권을 결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영계에 가면 전도한 사람의 수에 의해서 여러분의 영계 소유권이 결정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영계에 가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얼마만큼 사람을 그리워하며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저나라에서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계보다도, 자기 나라보다도, 자기 아내보다도,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아내가 말하기를 “당신은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날 사랑해 줘요” 해야 남편으로부터 더 높은 차원의 하나님적 사랑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문 선생은 심정권이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는데 그 심정권의 기지란 하나님을 중심삼은 참부모의 사랑, 참부부의 사랑, 참형제의 사랑, 참자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이 보편화 될 수 있는 세계가 심정권의 세계입니다. 그런 본연의 세계에 있어서는 사랑하는 부부의 사랑기준을 중심삼고 살더라도 하늘땅, 천주를 위주로 한 부부의 사랑이어야 됩니다. 그러니 그 세계에 합격될 수 있는 사랑의 기반을 어디서 닦느냐? 문 선생은 이 세상에서 그것을 닦고 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심정권 세계의 합격자가 될 수 있게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계에는 가정을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왜 아들딸이 없으면 안됩니까? 후손이란 본래 종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횡적인 부모의 사랑, 하나님과 부모의 피가 종횡으로 혼합되어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후손을 못 가진 사람은 영계에 가서 조화를 못 이루고 동서남북으로 박자를 못 맞춥니다. 후손을 갖지 않게 되면 저나라에 가서도 놀고 쉴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299-77)
세계종교 유엔기구가 창설돼야
여러분, 영계에서는 종교나 종파가 필요 없습니다. 거기에 가서 장로교니 천주교니 하는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생활권 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나라에 가게 되면 세계를 사랑한 사람도 있고 애국자, 충신, 열녀, 성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문 선생이 알기로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본연적인 사랑 속에서 심정권의 전통을 중심삼고 살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가 있지 않습니다.
무슨 일을 출발시킬 때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시켜야 됩니다. 영계에 가면 그런 원칙에 얼마만큼 동화되고 얼마만큼 일치가 됐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지옥에서부터 중간영계, 낙원, 천국까지 전부 다 연결될 것입니다. 무엇이 제일 귀한 길이냐 하면 하늘을 위해서 지상에서 얼마나 고통받고 눈물을 흘렸느냐는 것입니다. 그게 저나라까지 패스하는 티켓입니다.
저나라에 가면 다른 나라의 사람들끼리는 같이 못 있지만 모든 종교권의 사람들은 같이 머무를 수 있습니다. 종교권은 하나의 세계를 바라 나오고 하나의 신을 믿고 나오기 때문에 같이 머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뭐냐 하면, 그들은 일생 동안 영계를 표준하고 생활한다는 점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영원한 세계, 초연한 세계의 내용을 중심삼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 계시는 곳과 하나님이 사시는 곳을 중심삼고 우리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인류는 국가 단위 또는 국제연합을 통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을 줄기차게 추구해 왔습니다. 현실이 말해 주듯이 그 노력이 정치, 경제, 기술적인 측면만으로는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보다 내적인 종교, 교육, 문화적 측면의 지원이 있어야 이상적인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외적, 육적, 물질적인 풍요와 안락만으로는 성취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보다 내적이요, 영적이며 정신적인 완성과 만족을 통하여 진정한 이상이 이루어집니다. 이와 같은 측면은 종교적인 가르침과 세계 모든 종교의 연합과 일치된 행동을 통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본인은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기왕의 유엔에 세계 주요 종교와 그 지도자들이 참여하는 세계종교 유엔기구가 창설돼야 함을 주창하는 바입니다. 세계와 인류의 미래를 위하여 오늘 이 시점에서 세계종교유엔의 창설과 그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 앞으로 여러분과 세계 각계의 지도자들이 더욱 심도 있게 논의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9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