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2권 7일
본을 세워야 할 지상시대 (훈독본) 8977
날짜 : 1971. 10. 17(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을 세워야 할 지상시대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7일)
종교인이 추구하는 것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또 인간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면, 그 인간을 지은 절대자가 있다고 할 때 그 절대자 또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첫 번째의 대상을 꼽는다면 물질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권력을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높고 참다운 인격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나 권력을 기쁨의 대상으로 함과 동시에 귀하고 참다운 사람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은 인간보다도 더 높을 수 있는 어떠한 절대자가 있으면 그 절대자를 기쁨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이 길을 모색해 나오는 것이 종교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인은 물질세계에 살고 있고 땅 위의 인간들과도 관계를 맺고 살고 있지만 여기에 있는 것을 선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가지고 하늘,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준을 표준으로 하고 출발함과 동시에 거기에서 새로운 대상의 인연을 찾아 허덕이는 것입니다. (49-291)
모든 것을 부정하라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이나 권력 혹은 사람입니다. 종교인들도 그런 것이 중심으로 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환경에 있어서 새로운 도약의 희망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없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버려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니라”(마태복음 10: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무릇 자기 목숨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누가복음 17:33)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역설적인 논리들입니다. 우리는 순응의 여건을 우리 환경권 내에서 절대로 긍정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내용을 남겨 두고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절대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욕망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인간들 앞에 죽고자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이고 처해 있는 환경과 다른 환경에 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계선을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한계선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이상의 자리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49-263)
자진해서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라
그렇지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 인생길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찾아가라고 하면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희망을 가지고 나갈 것이냐 절망을 가지고 나갈 것이냐 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을 갖고 가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가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조건을 제시하시느냐? 그것은 이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상과 우리가 바라는 욕망권과 상응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상극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깨끗이 청산 지은 데서부터 출발하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 앞에 제시하신 참다운 신앙의 전통적인 길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자기를 높이라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 높고자 하는 자는 제일 미욱한 사람입니다. 신앙길을 가면서 높겠다고 허덕이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악한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높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고자 하면 높아지느냐? 이것은 경계선이 있다는 말입니다. 삼팔선과 같은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생사의 결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팔선은 치열한 전투와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삼팔선은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억천만 년이 걸리더라도 그것을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삼팔선은 일정한 구간에 설정되어 있는 그런 삼팔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관을 통해 느끼는 그 감각을 통해서 전부 엇갈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골수와 감정과 더불어 격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인 것을 생각할 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안 사람이 있다면 살고자 해도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 것이요, 죽고자 하는 사람만이 사는 것입니다. 그때는 죽는 것이 그 나라에 충(忠)이 됩니다. (49-265)
언제나 생활 속에서 노리고 있는 사탄
사탄은 어디에 있느냐? 사탄은 특정한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의 생활무대에 고질과 같은 대왕으로 있으면서 여러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살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사탄이 실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까? 사탄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기대를 거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헤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 사탄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 헤어날 수 있겠습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왕지사 죽을 것, 한 번 비상수법을 취해 보고 죽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탄이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의 길로 나가서 사탄을 후려감아 쳐야 됩니다.
그때에 지혜가 떠오르지 않거든 “아! 우리 사랑하는 주권자여, 나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몸이 전체를 대신해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되겠습니다” 해 가지고 비상대책을 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심신을 사망선에 놓고 사탄과 일대 격전을 하여 판가리하겠다는 결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완전히 알아요? 사탄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사탄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모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위치가 불간섭권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북쪽으로 가면 사탄이요, 남쪽으로 가면 하나님인데 이것은 그 경계선에 부딪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이 지금의 인생이라고 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충지대에서 물에 물 탄 듯이 미지근해서는 안됩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미지근하게 하면 도리어 안 하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차든지 덥든지 극단에 서라는 것입니다.
종교권은 뭐냐 하면 완충지대권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종교권은 하늘나라의 권속으로서 그 나라권을 중심삼고 개인으로 대표하고 있고, 사탄 세계의 사람들은 사탄 나라를 중심삼고 이 종교권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믿는 자들 가운데도 아직까지 사탄의 초소를 청산짓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인생행로에서 그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권 내에서 대하는 그 사람들 가운데서 혈투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49-269)
성경의 가르침
이런 것을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예수님이 “살고자 하는 자는 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죽느니라” 이렇게 교육하겠어요? 여러분이 이런 처지라면 어떤 교육의 표준을 세워야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여러분이라고 하더라도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느니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 집안 식구가 제일 가까우니라”가 아니라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하고 교육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얘기한 것 중에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삼팔선이 있다는 것만은 잊어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지옥인 삼팔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망권 내에 있는 이 세계의 것을 차지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합격자로 만들고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성인이라는 팻말을 박고 죽었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다, 민족의 반역자다” 해 가지고, 공산당식으로 말하면 반동분자로 몰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지만 죽은 경계선이 어디냐? 즉, 어떠한 자리에서 죽었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늘의 절개와 충절을 대표한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죽은 가치를 전통으로 남기고 그의 사상을 사상적 기조로 세우셔야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게 될 때, 만나는 그 자리는 삼팔선을 중심삼고 그 상대방과 교전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사로잡히느냐 내가 그를 사로잡느냐, 악의 침범을 받느냐 선의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관점에서 만사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더럽힘을 받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자리입니다. 사탄 세계에서 살려면 자기 몸 하나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힘이 드느냐 하면 나라를 통치하는 것보다도 더 힘이 듭니다. 사탄나라를 통치하는 것보다도 더 힘들다는 거예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성경이 풀립니다. 그러니까 희생하는 자리를 찾아가면 하늘에게 손해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 앞에 모순된 조건을 제시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제시조건을 갖고 나오지 않고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인연을 맺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경계선을 앞에 둔, 생사의 기로에 선 인간 앞에는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49-274)
지상에서 세워야 할 본의 자리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영원히 남을 수 있고 역사시대에 빛을 발할 수 있는 본을 세우고자 할 때, 살고자 하는 자리에서 세운 본은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리에서 세운 것만이 본으로 남아집니다.
효자 중에 일등 효자가 되지 않고는 효자의 본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효자의 본은 보다 비참한 자리에서 설정됩니다. 보다 비참한 자리라는 것은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제일 비참하게 죽는 그런 자리에서 본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은 어디에서 세우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면 그 본을 영계에 가서 세우라고 하시지 왜 지상에서 세우라고 하시느냐 이겁니다. 영계의 영인이야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텐데, 죽지 않는 몸을 만들어 가지고 그런 놀음을 하면 될 것인데 왜 지상에서 하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49-279)
3단계의 세계를 거치는 인간
사람은 물 세계에서 한 번 살아 봤고, 땅 세계에서 한 번 살아 봤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는 먹는 입이 달라집니다. 뱃속에 있을 때는 탯줄로 영양 공급을 받고 탯줄로 숨을 쉬던 아기가 태어나서는 코로 숨을 쉽니다. 그리고 입으로 먹습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상에서 70, 80년을 살다가 죽습니다.
지상생활은 공기 중에서 태안에서 헤엄치고 다니며 살던 것과 마찬가지로 합니다. 공기 보자기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는 것은 무엇이냐? 죽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제3의 인생으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죽는 시간입니다.
잠자리도 처음에는 유충이 되어 물 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다가 땅 위에 올라와서는 한동안 기어다닙니다. 그 다음에는 훌훌 날아다니며 육지에서는 먹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벌레를 잡아먹습니다. 천하를 자기 무대로 삼고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곤충도 이와 같이 물, 육지, 공중에서 사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만 살게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차원이 높은 날개가 있습니다.
저 우주를 한 번 봅시다. 광대무변한 수억의 별들이 있습니다. 저 별나라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다이아몬드 별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셨다면, 그 어떠한 곳에 다이아몬드의 표본이 되는 별이 하나쯤 있을 것입니다. 또한 순금의 별도 하나 있을 것이요, 비취 별도 하나 있을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보지 못한 보석 별이 수두룩하게 우주에 박혀 있을 것입니다. (49-286)
그러면 그것을 다 무엇 하려고 그렇게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어요. 우리 인간을 위해서 준비한 대우주라면, 그거 한번 점령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 지상에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은 본궁 세계에 가서 박자를 맞추게 하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때 실천할 수 있느냐? 죽어야만 됩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거예요. 한 세계를 벗고 나가는 날에는 이 우주의 동쪽 경계선에서 서쪽 경계선까지 순식간에 갈 수 있습니다. “그 권내에 있는 금은보석이 가득한 별이 내 것이다” 하며 통쾌하게 우주의 왕자의 자리에서 쓱 내려다볼 때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소리를 지른다면 생전에 질러 보지 못한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웃는다면 생전 웃지 못한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지백체가 다 기쁨으로 꽉 차 가지고 화동할 것 아니냐 이겁니다. 그곳은 살아서는 못 가는 곳입니다.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49-298)
우주의 소유권과 주관권은 지상에서 결정된다
아무리 이 대우주가 멀고 멀다고 하더라도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순식간에 왕래할 수 있는 소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만물지중유인최귀(萬物之衆惟人最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세계의 소유권과 활동무대의 권한과 특권의 기준을 지상의 이 생애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내가 고생하는 것,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안 입고, 하고 싶은 것을 안 하고, 참는 것을 확대하여 그 몇 백배, 몇 만배, 몇 억천만 배 기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살 수 있는 무대가 일시에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 본연의 세계에 실험의 책임자뿐만이 아니라 전체 관리의 책임자로 등장할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이 우리 인생길의 끝날에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죽음 길이 슬프겠습니까? 그 대신 준비 안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쁘다 이겁니다. 그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 본을 세워야 할 지상시대에 있어서 무슨 본을 세워야 되느냐? 하나의 본연적이고 원칙적인 세계를 표준해서 거기에 합격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모든 케이스의 규격에 맞게 하려니까 오늘날 효자 중의 효자가 되어야 되고, 충신 중의 충신이 되어야 되고, 열녀 중의 열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살고 비참하게 가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천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천하가 대우주의 주인으로 세워 주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위해서 효자, 충신 된 도리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하신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가복음 12:31)고 했습니다. 네 이웃이 누구냐? 세계 만민이 내 이웃이요, 내 형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세계 만민을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으면 다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뜻을 위해서 한번 죽어 보자는 것입니다.
내일의 소망의 실현자가 되고, 그 세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할 사람이 없는 역사상에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정성을 들이며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대해서 노력과 정성, 열과 성을 다하여 이 표준 앞에 부합할 수 있는 하나의 귀일점, 그 한 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각오를 하고 가자는 것이 통일교회 선생님이 가진 주류적인 사상입니다.
생명을 다해서 하고도 죽지 않고 남아지는 터전이 되거든 이것은 인류역사에 본이 될 것이요, 만민의 행복의 기조가 될 것입니다. 온 천하가 그것을 화동의 기점으로 하여 대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축이 될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을 움직여내고 인류의 소망의 터전을 몽땅 결속시킬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동하면 천하가 동할 수 있고 내가 정하면 천하가 정할 수 있는 우주사적인 책임감을 느끼면서 사는 사나이라면 결코 졸장부가 아니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래 가지고 가기 싫어하는 길로 때려 모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서 죽으라니까 가고 싶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때려 모는 것입니다. (49-301)
우리가 세워야 할 본의 길
여러분이 이 엄청난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본의 기준을 이 짧은 지상의 생애노정에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때 세울 것이냐? 선생님도 그런 심각한 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고 남은 여생이 다할 때까지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 날 어떤 자리에 쓰러지더라도 “내가 이 이상 할 수 없소. 아버지, 내 성과 열을 다했습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이 이상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심각한 자리에서 생애를 다짐하며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이 땅 위에서 그런 엄청난 우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할 것을 알고 남은 여생을 참으로 가치 있게 보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청춘시대를 그냥 놓쳐 버린 것을 원통하게 느껴야 됩니다. 이 몸이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순정이 불타오르던 사춘기 시절, 젊은 청소년의 시절을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가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스러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길을 못 간 이 몸에 천대와 채찍이 임하고 멸시와 고역의 길이 임하더라도 그것을 응당히 받아야 할 운명의 길로 알고 엄숙히 따라가야 할 노정이 통일교회의 길이요, 인생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49-307)*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7일, 원문
본을 세워야 할 지상시대
날짜 : 1971. 10. 17(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종교인이 추구하는 것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욕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좋기를 바랍니다. 현재 살고 있는 환경보다도 내일 살아갈 환경이 더 좋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점진적인 행복의 무대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노유 혹은 동서를 초월하여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바라 왔고,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있고, 미래에도 그러한 입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지상에 살고 있는 인간이 그러함과 마찬가지로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도 그러할 것입니다. 또 인간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다면, 그 인간을 지은 절대자가 있다고 할 때 그 절대자 또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욕망을 중심삼고 오늘보다도 내일이 더 좋기를 바라는데, 그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우리 인간 세계에서는 우선 물질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황금만능시대를 부르짖는 현시대에 있어서는 돈이라는 것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릅니다. 돈만 가지면 인간의 생사지권도 좌우할 수 있다는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좋아하는 첫 번째의 대상을 꼽는다면 물질을 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이 권력을 바라고 있습니다. 권력은 자기의 권익을 취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보다 높을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입장에 서기 위해서 바라는 것이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높고 참다운 인격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나 권력을 기쁨의 대상으로 함과 동시에 귀하고 참다운 사람을 표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은 인간보다도 더 높을 수 있는 어떠한 절대자가 있으면 그 절대자를 기쁨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이 길을 모색해 나오는 것이 종교의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입장을 종합해 보면 종교를 모르는 사람들은 물질이나 돈을 기쁨의 상대로 삼고 있고 사람을 기쁨의 상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물질이나 사람보다도 하늘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하늘을 가치의 중심으로 세우고자 하는 무리가 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과 종교인들을 비교해 볼 때, 그 차이는 무엇이냐? 세상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한계선을 중심삼고 그것을 최고 선의 표준 혹은 소망과 욕망의 표준으로 삼고 있지만, 종교인은 여기에서 한 단계를 넘어서서 하늘을 표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까지가 한계점이지만, 종교인들은 사람의 단계를 넘어섭니다. 돈을 필요로 하고 사람을 필요로 하기도 하지만, 종교인들은 그것을 기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가지고 하늘을 기점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과 종교인의 다른 점입니다.
종교인은 물질세계에 살고 있고 땅 위의 인간들과도 관계를 맺고 살고 있지만 여기에 있는 것을 선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가지고 하늘,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 없을 것 같은 기준을 표준으로 하고 출발함과 동시에 거기에서 새로운 대상의 인연을 찾아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가 종교인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가족 혹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물질을 찾으려고 허덕입니다. 또, 보다 참될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보다 참다운 사람끼리 인연되어지고 묶어질 수 있는 사연을 중심삼고 자랑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일반 사람들이 생애노정에서 추구하는 욕망의 귀결점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자들이 가는 길은 그런 한계점을 중심삼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넘어서야 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질적 요건을 제일 조건으로 세워 가지고, 그 요건이 기반의 조건으로 남아져 가지고 하나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느냐?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내용이 되지 못하게 될 때, 우리는 물질적인 요건을 끊어 버려야 됩니다.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49-291)
모든 것을 부정하라
세상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물질이나 권력 혹은 사람입니다. 종교인들도 그런 것이 중심으로 되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음이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환경에 있어서 새로운 도약의 희망을 가지고 출발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없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버려야 됩니다. 버리는 데는 내가 부정해야 되느냐, 저쪽에서 나를 부정해야 되느냐고 했을 때 저쪽에서 부정하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부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고충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이니라”(마태복음 10: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무릇 자기 목숨을 보호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누가복음 17:33)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역설적인 논리들입니다. 우리는 순응의 여건을 우리 환경권 내에서 절대로 긍정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고 하였으니, 그는 세상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물질은 사망의 동기가 된다고 가르쳐 주었으니, 사망의 그늘을 대하는 입장에 서야 하는 종교인의 입장은 물질 앞에서는 비참한 입장이 아니겠습니까? 끊을 수 없고 떠날 수 없는 환경을 끊고 떠나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그러나 비참한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그 비참함이 나를 파탄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해방시키는 동기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단호히 그 길을 취해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욕망이 있다면 하나님도 역시 사람을 바라고 만물을 바라실 것이 아닙니까?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될 때는 사람에게 필요한 물질도 필요로 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이 사람에게 이것을 거부하라는 조건을 제시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인연은 되어 있고 상관은 되어 있지만, 그 인연되고 상관된 것을 다시 돌이켜 새로운 차원에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어떠한 내적인 욕망과 염원이 하나님한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앞에 부정적 요인을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내용을 남겨 두고 부정하라는 말이 아니라 절대 부정하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욕망을 가지고 살고자 하는 인간들 앞에 죽고자 하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이고 처해 있는 환경과 다른 환경에 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계선을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그 경계선을 넘어서는 한계선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러니까 죽음 이상의 자리를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49-263)
자진해서 죽음의 자리를 찾아가라
그렇지만 살 수 있는 길을 찾아가야 할 것이 인생길인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찾아가라고 하면 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일생을 두고 생각해 보십시오! 80, 90이 넘어서 죽을 시간이 다가오면 안 죽겠다고 하다가 죽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도 자원해서 그 자리를 찾아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희망을 가지고 나갈 것이냐 절망을 가지고 나갈 것이냐 할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망을 갖고 가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가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이러한 조건을 제시하시느냐? 그것은 이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상과 우리가 바라는 욕망권과 상응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상극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기점, 기조, 혹은 출발점이 어디냐고 했을 때 이 세상권 내에서부터 출발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권이 아닙니다. 인간의 욕망과 더불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깨끗이 청산한 데서부터 출발하자는 말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깨끗이 청산 지은 데서부터 출발하자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 앞에 제시하신 참다운 신앙의 전통적인 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거기에서 본이 되는 기준, 하나의 원칙적 기준을 설정하자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웃고 좋다고 하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는 자기를 높이라는 것은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고 했습니다.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은 대개 죽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희망 가운데 살다가 신앙길에 들어온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절망한 사람들이나 인간 세계의 낙오자와 같은 사람들이 찾아 들어오는 곳이 신앙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에서 높고자 하는 자는 제일 미욱한 사람입니다. 신앙길을 가면서 높겠다고 허덕이는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악한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왜 높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고자 하면 높아지느냐? 이것은 경계선이 있다는 말입니다. 삼팔선과 같은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원수 나라의 사이에는 경계선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생사의 결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삼팔선은 치열한 전투와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곳입니다. 만일 이쪽 편의 사람이 드러나는 날에는 죽지 않으면 이용의 제물이 됩니다. 그렇게 이용의 제물이 될 때 살려고 하면 이쪽 편 나라의 역적이 됩니다.
원수 앞에 잡혀갔을 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면 원수에게 자기 나라의 모든 비밀을 넘겨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죽어야 됩니다. 그렇게 죽겠다고 해서 맞게 되면, 그렇게 때리기는 원수가 때리지만 잘못 때릴 때는 우리가 원수를 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칠 때는 몇 백배 가중해서 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죽음으로 말미암아 망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이 그 한 사람을 잘못 침으로 말미암아 몇 천배를 가중해서 우리가 원수들을 쳐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당한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삼팔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의 삼팔선은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사는 순간, 나날, 매해 가운데 이것이 고질같이 붙어 있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가 그렇고, 아내가 그렇고, 자식이 그렇고, 부모가 그렇고, 사랑하는 나라가 그렇고, 인류가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어떻게 할 거예요? 포기해 버릴 것이냐? 그럴 수 없습니다. 억천만 년이 걸리더라도 그것을 넘어야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 삼팔선은 일정한 구간에 설정되어 있는 그런 삼팔선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오관을 통해 느끼는 그 감각을 통해서 전부 엇갈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골수와 감정과 더불어 격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여러분인 것을 생각할 때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것을 똑똑히 안 사람이 있다면 살고자 해도 산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은 죽는 것이요, 죽고자 하는 사람만이 사는 것입니다.
그때는 죽는 것이 그 나라에 충(忠)이 됩니다. 왜냐하면 악이 선을 잘못 치는 날에는 하나님이 몇 백배로 악을 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희생되면 그 대신 열 사람을 찾아올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벌금을 받아 온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게 되면 세 사람 이상 찾아올 수 있습니다. (49-265)
언제나 생활 속에서 노리고 있는 사탄
사탄은 어디에 있느냐? 사탄은 특정한 곳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의 생활무대에 고질과 같은 대왕으로 있으면서 여러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탄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살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사탄이 실존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까? “말로는 있는 것 같은데 있는지 없는지 난 모르겠어”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대를 거실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이 기대를 거실 수 있습니다. 기대를 걸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대하여 플러스가 될지 안 될지는 지내보아야 알겠지만, 그래도 사탄이 있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에 한해서만 하나님이 소망을 두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헤어날 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 사탄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 헤어날 수 있겠습니까? “에라, 모르겠다. 이왕지사 죽을 것, 한 번 비상수법을 취해 보고 죽겠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탄이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의 길로 나가서 사탄을 후려감아 쳐야 됩니다.
그때에 지혜가 떠오르지 않거든 “아! 우리 사랑하는 주권자여, 나에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 몸이 전체를 대신해서 사탄을 굴복시켜야 되겠습니다” 해 가지고 비상대책을 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화 가운데 그런 스릴 있는 장면을 더러 보지요? 여러분은 그렇게 심신을 사망선에 놓고 사탄과 일대 격전을 하여 판가리하겠다는 결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완전히 알아요? 사탄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사탄도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모른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처해 있는 위치가 불간섭권 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북쪽으로 가면 사탄이요, 남쪽으로 가면 하나님인데 이것은 그 경계선에 부딪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것이 지금의 인생이라고 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충지대에서 물에 물 탄 듯이 미지근해서는 안됩니다. 차든지 덥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미지근하게 하면 도리어 안 하는 것보다도 못합니다. 차든지 덥든지 극단에 서라는 것입니다.
종교권은 뭐냐 하면 완충지대권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종교권은 하늘나라의 권속으로서 그 나라권을 중심삼고 개인으로 대표하고 있고, 사탄 세계의 사람들은 사탄 나라를 중심삼고 이 종교권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를 믿는 자들 가운데도 아직까지 사탄의 초소를 청산짓지 못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인생행로에서 그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권 내에서 대하는 그 사람들 가운데서 혈투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49-269)
성경의 가르침
이런 것을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는 예수님이 오셨다면, 그 예수님이 “살고자 하는 자는 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죽느니라” 이렇게 교육하겠어요? 여러분이 이런 처지라면 어떤 교육의 표준을 세워야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여러분이라고 하더라도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느니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네 집안 식구가 제일 가까우니라”가 아니라 “네 집안 식구가 원수니라” 하고 교육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얘기한 것 중에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삼팔선이 있다는 것만은 잊어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망의 지옥인 삼팔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사망권 내에 있는 이 세계의 것을 차지하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합격자로 만들고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은 고마운 가르침입니다. 그래, 여러분은 지금까지 그걸 고맙게 생각했어요?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리고 쫓기다가 죽었습니다. 그 사회에서 가정 파탄분자요, 사회 소란분자요, 국가 광란분자로 취급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그런 패자라면 패자의 대표자가 어떻게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문화권을 형성하게 됐느냐 이겁니다. 예수님이 죽어 가지고 무슨 홍길동 같은 놀음을 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자리에 내세운 데는 그 배후에 절대적인 힘이 개재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결과를 타진해 볼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 이런 분이 성인이 될 수 있었느냐? 예수님이 죽을 때 성인이라는 팻말을 박고 죽었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다, 민족의 반역자다” 해 가지고, 공산당식으로 말하면 반동분자로 몰려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죽었지만 죽은 경계선이 어디냐? 즉, 어떠한 자리에서 죽었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늘의 절개와 충절을 대표한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가 죽은 가치를 전통으로 남기고 그의 사상을 사상적 기조로 세우셔야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그렇게 했어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나라의 국민성과 전통이 서는 것이요, 하늘나라의 새로운 출발의 기원이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터전이 남아진 것이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입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만나게 될 때, 만나는 그 자리는 삼팔선을 중심삼고 그 상대방과 교전하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내가 그에게 사로잡히느냐 내가 그를 사로잡느냐, 악의 침범을 받느냐 선의 영향을 끼치느냐” 하는 관점에서 만사를 해결해야 합니다. 내가 더럽힘을 받아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심각한 자리입니다. 사탄 세계에서 살려면 자기 몸 하나를 보호하는 데 얼마나 힘이 드느냐 하면 나라를 통치하는 것보다도 더 힘이 듭니다. 사탄나라를 통치하는 것보다도 더 힘들다는 거예요. 이 길이 그렇게 힘든 길이라는 것입니다.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성경이 풀립니다. 그래 가지고 성경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생하는 자리를 찾아가면 하늘에게 손해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 앞에 모순된 조건을 제시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제시조건을 갖고 나오지 않고는 인간이 살 수 있는 인연을 맺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은 경계선을 앞에 둔, 생사의 기로에 선 인간 앞에는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49-274)
지상에서 세워야 할 본의 자리
오늘날 인간 세상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영원히 남을 수 있고 역사시대에 빛을 발할 수 있는 본을 세우고자 할 때, 살고자 하는 자리에서 세운 본은 다 깨져 나가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리에서 세운 것만이 본으로 남아집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알아봅시다. 효자 중에 일등 효자가 되지 않고는 효자의 본으로 남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효자의 본은 보다 비참한 자리에서 설정됩니다. 보다 비참한 자리라는 것은 죽음의 자리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제일 비참하게 죽는 그런 자리에서 본이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은 어디에서 세우느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면 그 본을 영계에 가서 세우라고 하시지 왜 지상에서 세우라고 하시느냐 이겁니다. 영계의 영인이야 죽이려고 해도 죽지 않을 텐데, 죽지 않는 몸을 만들어 가지고 그런 놀음을 하면 될 것인데 왜 지상에서 하라고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거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영계에 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 잘 태어나야 됩니다.
사람은 맨 처음 태어날 때 제일 깊은 물 속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복중시대는 물 속의 시대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태중에 있을 때는 물 가운데 둥둥 떠 있지요? 그거 생각하면 “아이구, 숨이 막혀서 어떻게 살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물 속에서 살기 때문에, 물을 들이마시고 내보내야 되겠기 때문에 아기는 호스를 배에다 연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또, 아기가 영양분을 어디로 해서 공급받습니까? 배꼽으로 받습니다. 배꼽이 배 안의 입입니다. 그러니 그걸 천대해서는 안됩니다. “배꼽아, 너 옛날 수고했다” 하며 두드려 주라는 거예요. 그렇게 배꼽 운동을 많이 하면 건강해집니다. 아무리 추운 방에서 자더라도 배꼽만 잘 감싸고 자면 설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물 안의 시대가 있고, 그 다음에는 육지의 시대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날아가는 시대가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인간들이 날아가는 것을 얼마나 기다렸습니까! 날아간다고 하면 세계의 제일 주목거리가 되었고, 세계가 날아가는 데에서 비로소 통일되어 봤습니다. 아폴로 11호를 중심삼고, 날아가는 데 있어서 통일되어 봤다는 것입니다. (49-279)
3단계의 세계를 거치는 인간
사람은 물 세계에서 한 번 살아 봤고, 땅 세계에서 한 번 살아 봤습니다. 여러분이 복중에서 태어날 때 “육지 세상에 나가 입으로 꿀도 먹고, 떡도 먹고, 밥도 먹고, 쇠고기도 먹고 다 먹는다”고 생각해 봤어요?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여기를 벗어나면 죽는다면서 배꼽으로 숨쉬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그런데도 그 뱃속에서 밖으로 나갈까봐 “아이고, 안 나가면 좋겠다”고 합니다. 안 나가야 되겠다고 하겠지만, 때가 되면 다 터져 나갑니다. 물이 흘러 나가면, 물이 확 터져 나오는 그것을 따라 밖으로 나오면 순산이 됩니다. 잘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난 다음에는 먹는 입이 달라집니다. 뱃속에 있을 때는 탯줄로 영양 공급을 받고 탯줄로 숨을 쉬던 아기가 태어나서는 코로 숨을 쉽니다. 그리고 입으로 먹습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상에서 70, 80년을 살다가 죽습니다.
지상생활은 공기 중에서 태안에서 헤엄치고 다니며 살던 것과 마찬가지로 합니다. 공기 보자기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죽는 것은 무엇이냐? 죽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제3의 인생으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죽는 시간입니다.
잠자리도 처음에는 유충이 되어 물 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다가 땅 위에 올라와서는 한동안 기어다닙니다. 그 다음에는 훌훌 날아다니며 육지에서는 먹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벌레를 잡아먹습니다. 천하를 자기 무대로 삼고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곤충도 이와 같이 물, 육지, 공중에서 사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이 지상에서만 살게 창조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차원이 높은 날개가 있습니다.
저 우주를 한 번 봅시다. 여러분이 밤에 자다 말고 쓱 밖으로 나가 밤하늘의 은하수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바라보면 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수억 개의 별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빛은 1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 그러니까 1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돕니다. 빛이 그렇게 빠릅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빛이 출발하여 1년 걸려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해서, 이것을 하나의 단위로 잡습니다. 그런데 몇 억광년 이상 되는 먼 데에도 별이 있습니다. 그 별에서 빛이 출발한 지 몇 억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도 지구에 도달하지 못한 그런 먼 거리에 있는 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광대무변한 수억의 별들이 있습니다. 이 지구 같은 것은 먼지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그럴 것 아닙니까? 저 별나라에는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다이아몬드 별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셨다면, 그 어떠한 곳에 다이아몬드의 표본이 되는 별이 하나쯤 있을 것입니다. 그거 생각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또한 순금의 별도 하나 있을 것이요, 비취 별도 하나 있을 것입니다. 보석이라는 이름을 띤 것은 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는 보석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인간 세상에서 보지 못한 보석 별이 수두룩하게 우주에 박혀 있을 것입니다. (49-286)
그러면 그것을 다 무엇 하려고 그렇게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았다면 어떻겠어요? 사람 팔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그런 세계를 아침저녁으로 가고 싶을 때 가고, 오고 싶을 때 오고, 만지고 싶을 때 만지고,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활동무대로 삼아서 살 수 있는 내가 한번 되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육신을 가지고 그 세계를 다닐 수 있겠어요? 육신을 가지고는 답답하니까 달구지를 만들고, 자전거를 만들고, 그 다음에 오토바이를 만들고, 택시를 만들고, 제트기를 만들고, 인공위성을 만들고 야단합니다. 달나라에 가는 데 며칠씩 걸리는데, 여러분이 그러한 세계까지 쓱 갔다가 쓱 오고 그럴 수 있는 무엇을 만들 수 있으면 만들고 싶겠어요, 안 만들고 싶겠어요?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의 욕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면 그런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가능한 때가 언제냐? 이 나라에서 이것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국민들이 천년 만년 공중에 떠서 춤추겠어요, 안 추겠어요? 그럴 수 있는 무대가 우리 인간을 위해서 준비한 대우주라면, 그거 한번 점령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 지상에 다이아몬드가 있는 것은 본궁 세계에 가서 박자를 맞추게 하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때 실천할 수 있느냐? 죽어야만 됩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거예요. 한 세계를 벗고 나가는 날에는 이 우주의 동쪽 경계선에서 서쪽 경계선까지 순식간에 갈 수 있습니다. “그 권내에 있는 금은보석이 가득한 별이 내 것이다” 하며 통쾌하게 우주의 왕자의 자리에서 쓱 내려다볼 때 기분이 얼마나 좋겠습니까! 소리를 지른다면 생전에 질러 보지 못한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웃는다면 생전 웃지 못한 웃음을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지백체가 다 기쁨으로 꽉 차 가지고 화동할 것 아니냐 이겁니다. 그곳은 살아서는 못 가는 곳입니다.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49-298)
우주의 소유권과 주관권은 지상에서 결정된다
사람들이 다이아몬드를 귀하게 여기고, 금은보석을 귀하게 여기고, 다 귀하게 여기더라도 혼자 다니게 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귀하게 여겨야 되느냐? 다이아몬드 이상 귀하게 여겨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이상적인 호흡에 맞습니다. 그 세계에 한번 가 보고 싶어요? 아무리 이 대우주가 멀고 멀다고 하더라도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순식간에 왕래할 수 있는 소성을 가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만물지중유인최귀(萬物之衆惟人最貴)’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세계의 소유권과 활동무대의 권한과 특권의 기준을 지상의 이 생애에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서 내가 고생하는 것, 먹고 싶은 것을 안 먹고, 입고 싶은 것을 안 입고, 하고 싶은 것을 안 하고, 참는 것을 확대하여 그 몇 백배, 몇 만배, 몇 억천만 배 기쁠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살 수 있는 무대가 일시에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런 본연의 세계에 실험의 책임자뿐만이 아니라 전체 관리의 책임자로 등장할 수 있는 기쁨의 한 날이 우리 인생길의 끝날에 있을 것을 생각할 때 죽음 길이 슬프겠습니까? 그 대신 준비 안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쁘다 이겁니다. 그 준비를 어떻게 하느냐? 그 방법을 알아야 됩니다. 세계에 있어서 지금 이 시대에 그런 문제를 중심삼고 문제시하고 있는 사람은 통일교회 문 선생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저명한 학박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신학박사가 많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통일교회 문 선생한테 지도를 받아야 됩니다. 그건 결정적입니다. 또한, 절대적입니다.
그러면 본을 세워야 할 지상시대에 있어서 무슨 본을 세워야 되느냐? 이 나라의 역사에 이름을 남기면 뭘 합니까? 하나의 본연적이고 원칙적인 세계를 표준해서 거기에 합격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모든 케이스의 규격에 맞게 하려니까 오늘날 효자 중의 효자가 되어야 되고, 충신 중의 충신이 되어야 되고, 열녀 중의 열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비참하게 살고 비참하게 가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천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천하가 대우주의 주인으로 세워 주는 법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 오게 되면 땅 위에서 잘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지지리 못살고, 지지리 고생하다가 죽어 길가에 쓰러져 개도 안 물어갈 주검을 남겼더라도 언젠가 그 자리에는 꽃이 필 한 날이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에는 모든 거룩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지고 도성을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을 나라와 세계를 위해서 지긋지긋하게 고생을 시켜 가지고 효자와 충신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뜻을 위해서 효자, 충신 된 도리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하신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가복음 12:31)고 했습니다. 네 이웃이 누구냐? 세계 만민이 내 이웃이요, 내 형제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세계 만민을 위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내놓으면 다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뜻을 위해서 한번 죽어 보자는 것입니다. 어디서 죽을 것이냐? 각자가 자기 죽을 곳을 찾아야 되겠습니다. 하나의 폭탄으로 태어났으면 폭파되는 데는 깨끗이 바윗돌에 떨어지지 시궁창에 떨어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탄환과 마찬가지로 쏴 버린 폭탄이다. 반석 위에 떨어지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심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통일교회 문 선생이 아직까지 갈 길이 멉니다. 주저할 수 없습니다.
내일의 소망의 실현자가 되고, 그 세계를 관리하는 책임을 할 사람이 없는 역사상에 내가 그것을 바라보고 정성을 들이며 눈물을 흘리고 그것을 대해서 노력과 정성, 열과 성을 다하여 이 표준 앞에 부합할 수 있는 하나의 귀일점, 그 한 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각오를 하고 가자는 것이 통일교회 선생님이 가진 주류적인 사상입니다. 여기에는 모험이 안팎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무자비한 혈투전을 전개해야 할 마당을 거쳐가야 합니다.
생명을 다해서 하고도 죽지 않고 남아지는 터전이 되거든 이것은 인류역사에 본이 될 것이요, 만민의 행복의 기조가 될 것입니다. 온 천하가 그것을 화동의 기점으로 하여 대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축이 될 수 있는 자리, 하나님을 움직여내고 인류의 소망의 터전을 몽땅 결속시킬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동하면 천하가 동할 수 있고 내가 정하면 천하가 정할 수 있는 우주사적인 책임감을 느끼면서 사는 사나이라면 결코 졸장부가 아니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래 가지고 가기 싫어하는 길로 때려 모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서 죽으라니까 가고 싶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때려 모는 것입니다. 이 길이 개인을 지나서 가정을 지나고, 종족을 지나고, 민족을 지나고, 국가를 지나고 나면 깃발을 들고 천하에 새로운 나라를 차지하겠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권까지 우리는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기 위해 4천 년 동안 준비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선민으로 만들어 유대교를 세워 나오셨는데 그 길이 막혀 버렸기 때문에 섭리가 연장되어 오늘날의 기독교를 중심삼고 이런 놀음을 재판하여 나오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실질적인 결정은 통일교회가 해야 되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보통 교회가 아닙니다. (49-301)
우리가 세워야 할 본의 길
여러분이 이 엄청난 우주를 주관할 수 있는 본의 기준을 이 짧은 지상의 생애노정에서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느 때 세울 것이냐? 선생님도 그런 심각한 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고 남은 여생이 다할 때까지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죽는 날 어떤 자리에 쓰러지더라도 “내가 이 이상 할 수 없소. 아버지, 내 성과 열을 다했습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돌아볼 때 “이 이상으로 이렇게 했으면 좋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심각한 자리에서 생애를 다짐하며 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눈물지을 일이 있을 때면 아무것도 모르는 영계를 통하는 사람들을 눈물짓게 하시고, 내가 고통스러운 자리에 설 것을 염려해 가지고 난데없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분담시키시는 사실들을 볼 때 “하나님이 나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고 나를 위해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감사히 여생을 곱게 맞이하려는 것이 선생님의 인생관입니다.
이러한 사상 앞에 있어서 여러분이 제멋대로 생활을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천륜이 소망하는 역사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희생하여 내가 저나라에 갈 때 영계에 가 있는 우리 선조들이 대열을 갖추어 가지고 나와서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냐, 참소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성현 군자들이 쌍수를 들어 이제 오시느냐고 환영할 수 있는 그 날을 위하여 지금 준비하는 길이 바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도 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이 땅 위에서 그런 엄청난 우주적인 기반을 닦아야 할 것을 알고 남은 여생을 참으로 가치 있게 보내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나이 많은 사람들은 청춘시대를 그냥 놓쳐 버린 것을 원통하게 느껴야 됩니다. 이 몸이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 순정이 불타오르던 사춘기 시절, 젊은 청소년의 시절을 이런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가지 못한 것이 얼마나 한스러워요!
이런 것을 생각해 볼 때, 그 길을 못 간 이 몸에 천대와 채찍이 임하고 멸시와 고역의 길이 임하더라도 그것을 응당히 받아야 할 운명의 길로 알고 엄숙히 따라가야 할 노정이 통일교회의 길이요, 인생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49-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