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2권 6일
인생의 갈 길 (훈독본)
날짜 : 1971. 1. 8(금)
장소 : 한국 의정부교회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인간의 마음과 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보나, 혹은 사회를 보나 선한 세계와 사회가 되지 못한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인간을 두고 보면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개인을 중심삼고 보면 마음과 몸이 진정으로 하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되지 못하고 싸우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생활 가운데서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인간들은 세계가 하나되기를 바라고 있고 평화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체가 하나되지 못한 개인들로서 묶어진 사회요, 나라인데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 평화의 세계를 모색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평화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동기가 되고 근원이 될 수 있는 내 개인이 하나되지 못한 입장에서 보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세계, 즉 결과의 세계도 하나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바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볼 때, 오늘날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는 사회악이나 세계악을 제거하는 것보다도 나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악을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의 기원이 각자에게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38-223)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
역사과정에 수많은 성인 현철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이 싸운 목적은 무엇이었느냐? 먼저 참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중심삼고 싸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나 자신입니다. 내가 완전한 선을 갖추기 전에는 가정의 선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요, 가정이 완전한 선의 기반을 닦기 전에는 친척이면 친척, 종족이면 종족적인 선의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또, 김씨면 김씨의 한 종족권을 중심삼고 선한 권내에 서지 못하면 선한 민족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선한 민족이 형성되지 않고는 선한 국가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요, 선한 국가가 형성되지 않고는 선한 세계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기 개체를 보게 되면 마음의 사람과 몸의 사람이 다릅니다. 서로 싸우는 두 사람이 내 개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를 중심삼고 보면 네 사람이 싸우는 입장입니다. 열 식구가 있다면 스무 사람이 싸우는 입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로서 구성된 삼천만 민족 혹은 세계의 인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세계 가운데 과연 행복의 터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문제를 중심삼고 고심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싸우는 데 있어서도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우기 전에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남을 위해서 선을 행하기 전, 남을 위해서 좋은 것을 행하기 전에 자기 자신 앞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자리, 좋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참다운 인간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8-225)
어떤 사람이 참된 사람인가
그 동네에 있어서 “누구는 착한 사람이야, 선한 사람이야. 그래도 저분만은 우리 동네에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할 때, 신임한다고 하는 그 신임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하느냐?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합니다. 틀림없는 것을 가지고 측정합니다. 틀림없다는 것은 시종여일(始終如一)하다는 것입니다. 십 년 후에도, 백 년 후에도, 천년 만년 후에도 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절대적으로 선하냐 하면, 양심도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양심은 악을 싫어합니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악이 나타날 때는 “이놈…” 하고 브레이크를 겁니다. 제재를 가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악을 대해서 투쟁하려고 합니다. 이 작용에 있어서는 여러분의 양심이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양심은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언제나 제재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 작용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몇 천년 전 사람이나 몇 천년 후 사람이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38-226)
양심 작용
몸이 조금만 잘못하면 양심은 야단입니다. 잘못하는 것도 야단이지만 잘하지 않으면 이것도 야단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양심은 “너는 옷을 두둑이 입고 배도 부르고 부러운 것이 없으니 저 길가에 있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라” 합니다. 이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정직한 사람, 선량한 사람, 좋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몸은 “난 싫어”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법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 이상의 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양심은 바른 것입니다.
양심은 올라가는 바름입니다. 양심은 올라가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한두 번 작용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작용하려고 합니다. 양심은 명령할 때 오늘만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잘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마음이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어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양심은 “이제 이만했으면 남들을 도와줘야 될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즉, 양심은 혼자 갖고 살지 말고 좋은 것은 전부 다 나눠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38-228)
인간이 귀한 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
마음은 이러한 비법을 배우지 않고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명령을 따른 사람은 주인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물지중유인최귀(萬物之衆惟人最貴)’라는 말도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만물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38-231)
나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외적인 대외관계에 있어서 마음은 선한 일을 하도록 폭군처럼 명령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고 보면 폭군이 아닙니다. 내가 선군의 권한을 가지고 천하 앞에 영광을 발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우지 않고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38-232)
훌륭한 부모
인생의 근본문제라든가 해결해야 할 내용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딸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탐구하려는데 그 길을 막는다는 것은 틀려먹은 것입니다. 진정한 부모라면 어서 가서 참다운 인생의 가치를 찾으라고 격려해 주고 그 길을 개척해 주어야 합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 여러분과 무엇이 다르냐? 양심을 중심삼고 보는 관이 다릅니다. 행동하는 그 결과의 차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아들딸을 낳아 키우는 데 있어서 자신들이 늙어서 잘살기 위하여 공부시키는 부모와 자기 동네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 공부시키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면 어느 부모가 더 선한 부모이겠습니까? 동네를 위하여 공부시키는 부모입니다. 그건 다 아는 것이니까 교육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동네를 위해서 공부를 시키는 부모와 나라를 위해서 공부시키는 부모 중 어느 부모가 선한 부모입니까? 다시 말해, “네가 공부하는 것은 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후대 만민의 복귀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한 하나의 선각자로 서기 위한 것이다” 하면서 정성들여 아들딸의 장래를 추구하는 부모와 동네를 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아들딸의 장래를 추구하는 부모 중 어느 부모가 훌륭한 부모냐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공부시키는 부모가 훌륭한 부모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38-232)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살라
나라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만민을 위주로 태어난 세계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구성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세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 있어서도 “네가 공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하는 것이지만 앞으로의 세계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민족을 넘어 종족과 인종을 초월한 박애사상과 형제의 심정을 가지고 네 몸과 네 일생을 고이 만민을 위해서 희생하고 만민의 복지를 위한 개척자가 되라”고 다짐시키며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런 부모와 나라를 위한 충신의 도리를 가르치면서 공부시키는 부모 중에 어느 부모가 더 훌륭한 부모입니까? 세계를 위해서 공부시키는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나라만을 위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또, 자기 가정만의 운세를 주장하는 사람은 나라의 운세가 다가올 때 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의 운세가 다가온다고 할 때, 그 세계의 운세에 박자를 맞춰서 준비를 하는 사람과 나라의 운세에 박자를 맞춰서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가정의 운세에 박자를 맞춰서 준비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먼저 망하겠습니까? 개인의 운세는 가정의 운세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또, 가정의 운세는 동네의 운세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그 동네에서 잘산다고 큰소리를 해 봤자 동네가 망하게 될 때는 그 가정도 망하는 것입니다. 종족의 운세는 민족의 운세를 못 막아내고, 민족의 운세는 국가의 운세를 못 막아냅니다. 또한 국가의 운세는 세계의 운세를 못 막아내는 것이요, 세계의 운세는 천운을 못 막아내는 것입니다. (38-234)
종교의 가르침은 뭐냐
이제 여러분 자신에게 다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총수습하여 결론을 짓겠습니다. 나를 두고 봅시다. 여러분이 세계적인 사상을 가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싸워요, 안 싸워요? 싸우지요?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생각이 둘이 될 수 있어요? 하나겠어요, 둘이겠어요? 절대자의 생각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자의 생각은 법도를 따라서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세워집니다.
인격자일수록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나갑니다. 그것은 천 년이 가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목적하는 바도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사람을 지으셨다면, 그 지음 받은 사람이 어찌해서 두 목적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목적하는 것과 몸이 목적하는 것이 왜 다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은 목적이 하나일 텐데 그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목적은 몸의 목적과 마음의 목적, 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목적의 길을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절대적인 목적의 자리에 가야 할 텐데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절대적인 그 길을 가려면 먼저 몸과 마음 중에서 어느 것에 치중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 가운데 어느 것이 선한 것입니까? 마음이 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위주로 해 가지고 몸뚱이를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종교의 가르침은 뭐냐?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갖추어서 하나님을 숭상하고 천도를 숭상하면서 천정을 따르라, 천도를 중심삼고 천정을 따라서 마음의 방향을 일치시켜 가지고 거기에 배치되는 일체의 몸의 욕망을 끊어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적인 길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도를 숭상하면서 천정을 따라간 사람들이 예수님 같은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치리하는 것은 마음을 제거시키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즉 육정(肉情)을 제거시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본래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태어난 것인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두 주인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복잡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의 교리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갖게 되었는데 어떻게 갖게 되었느냐? 혈통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종교가 해야 할 일은 마음과 몸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중심삼고 통일시키느냐? 천의를 중심삼고 천정을 따라 마음이 하나된 기반 위에서 몸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종교는 몸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38-268)
종교생활의 목적
그러면 마음과 몸을 통일시키기 위한 첫째의 방안은 무엇이냐? 몸을 때려잡는 것입니다. 몸을 치라는 거예요. 몸이 하자는 것 일체를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부정해야 되느냐?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자리까지 부정하라는 거예요.
몸뚱이가 완전히 죽어서 마음화되어 마음이 완전히 살아 있는 형태의 입장에 서지 못하면 하나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몸을 완전히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이 완전히 사는 것이요, 마음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지만 완전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모보다도, 형제보다도, 처자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천정의 대표자로서 왔었기에 천정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에게 천정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육정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는 육(肉)을 중심삼은 관계입니다. 이 육정을 끊지 않으면 천정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천정을 따라가려면 육정을 부정하고 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부모, 처자식, 형제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천국에 갈 수 있는 공식적인 표를 어디서 받느냐? 자기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데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육정을 제거시켜야 합니다. 그러려면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고, 악한 데는 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천도와 천정의 도리를 넘을 수 없습니다. 인정과 인도는 모든 일에서 사탄과 악을 중심삼고 출발하기 쉽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부정할 수 있는 첫째의 방안은 육신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정성들이면 몸뚱이가 기운이 쭉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 다음에는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전부 육신이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육신과의 모든 관계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종교는 희생봉사, 온유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남을 위해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뚱이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육체를 때려잡는 놀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을 합니다. 때문에 몸뚱이를 약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득세해 가지고 약하게 된 몸뚱이를 몇 달 동안 끌고 넘어가게 되면 몸뚱이를 다시 올려놓아도 올라올 수 없게끔 습관화되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하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잘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냥 놔두어도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위주로 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생애를 엮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생활의 목적입니다. (38-270)
우리가 바라는 목적
그 다음에 몸을 주관할 수 있는 두 번째의 방안이 무엇이냐? 마음에다 힘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온갖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을 쌓아 올리면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 마음의 문이 열리기만 하면 아주 강력한 힘이 나오기 때문에 몸뚱이 같은 건 문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비슷비슷한데 마음의 힘이 몸의 3배만 되어도 몸뚱이는 문제가 안 됩니다. 몸을 그냥 그대로 두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힘을 압축시켜 가지고 몸을 일시에 끌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세계에서는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방법 이외에는 몸뚱이를 조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작전을 펴 나오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일교회도 지금 그러한 공식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자연히 인간으로서 가야 할 고차적인 자리,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자각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기의 권위에 미칠 사람이 없습니다. 홀로 스스로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홀로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게 되니까 홀로 높다고 자각하는 자리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자리까지 가서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살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38-272)
여기에서 한 가지 첨부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영생할 수 없습니다. 모든 힘은 작용하게 되면 소모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작용을 했는데 오히려 힘이 솟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상세계, 자연세계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이 공식에 어긋나고 상충되는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힘이라는 것이 뭐예요? 전기 모터나 발전기를 중심삼고 들어오는 힘과 나가는 힘을 보면 들어오는 힘이 나가는 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가는 힘은 언제나 작습니다. 다시 말하면, 운동을 하는 가운데 힘의 소모가 벌어지기 때문에 나가는 힘은 들어오는 힘보다 언제나 작아지는 것입니다. 이게 힘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해 주었다고 할 때는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보다 적게 마이너스시켜 가지고 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한 사랑을 열만큼 받았으면 돌려줄 때는 더 보태서 주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는 천번 만번 희생하면서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되돌려 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아들딸은 더 보태서 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주면 줄수록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면 줄수록 플러스가 되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작용하면 할수록 들어오는 힘보다 나가는 힘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작용하고 나면 더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영존하실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태 주는 힘의 작용이 없으면 영존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영존할 수 있는 바탕이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힘이 내재할 수 있으므로 그런 입장에 선 존재는 영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 가운데서 살고 싶어하고 사랑 가운데서 죽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이상의 요소로 삼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인들은 민족과 인종을 넘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보다, 자기 부모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끝날에는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원칙을 알고 나가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중심사상이요, 우리가 바라는 목적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이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히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게 하는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의 갈 길입니다. 거기에 비로소 소망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38-273)*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6일, 원문
인생의 갈 길
날짜 : 1971. 1. 8(금)
장소 : 한국 의정부교회
갈라져서 싸우고 있는 인간의 마음과 몸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보나, 혹은 사회를 보나 선한 세계와 사회가 되지 못한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을 두고 보더라도 역시 선한 가정이 되어 있지 못합니다. 누구나 다 사회의 영향과 세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더 들어가서, 우리 개인 자체를 두고 보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해야 할 텐데 선하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악한 환경에 사로잡혀 가지고 선이 요구하는 그런 자리를 벗어나서 살려고 하는 자신인 것을 생활 가운데서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인간을 두고 보면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즉, 몸과 마음이 합해서 김 아무개면 김 아무개나 박 아무개면 박 아무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개인을 중심삼고 보면 마음과 몸이 진정으로 하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하나되지 못하고 싸우고 있는 것을 여러분은 생활 가운데서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이렇게 가기를 원하는데, 몸은 반대로 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인간들이 역사과정을 거쳐오면서 이런 싸움을 계속해 왔습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후세의 우리 자손들도 역시 이런 싸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오랜 역사과정을 거쳐오는 가운데 수많은 성인 현철들이 이러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수많은 싸움의 노정을 거쳐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외적인 싸움보다도 대내적인 자기 몸과 마음의 싸움도 해결하지 못하고 간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 자신입니다.
지금 수많은 인간들은 세계가 하나되기를 바라고 있고 평화의 세계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체가 하나되지 못한 개인들로서 묶어진 사회요, 나라인데 어떻게 하나될 수 있는 평화의 세계를 모색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평화의 세계를 이룰 수 있는 동기가 되고 근원이 될 수 있는 내 개인이 하나되지 못한 입장에서 보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목적의 세계, 즉 결과의 세계도 하나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두고 보면, 몸과 마음이 싸우는데 이 싸움은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철이 들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일생을 두고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몸이 마음을 굴복시킬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마음이 몸을 굴복시킬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뒤넘이치면서 10년, 20년, 30년, 혹은 50년의 생애를 거쳐 가지고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볼 때, 오늘날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될 문제는 사회악이나 세계악을 제거하는 것보다도 나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악을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숨겨져 있는 그 악에서부터 사회악도 출발하는 것이요, 세계악도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회는 물론 세계까지 그 결과가 미치고 있습니다.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의 기원이 각자에게 뿌리깊게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38-223)
자신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
역사과정에 수많은 성인 현철들이 왔다 갔지만, 그들이 싸운 목적은 무엇이었느냐? 먼저 참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를 중심삼고 싸웠습니다. 선한 사람이라는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었느냐 하면 사회악을 대하여 싸우기 전에 먼저 모순된 자아를 타파하기 위한 싸움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싸움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매정하고 철저하게 싸워 가지고 선한 입장에 섰다고 마음이 주장할 수 있음과 동시에 몸이 그렇다고 공인할 수 있고, 마음이 지향하는 선의 목적 앞에 몸이 언제나 절대 순종하는 그 자리에서부터 역사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성인 현철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아무리 대외적으로 선을 주장해 봤자 그 밑바닥이 흐려져 있기 때문에 선의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과정에서는 좋은 결과가 날 것 같지만, 나중에 나타나는 열매는 악의 열매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뭐냐 하면 나 자신입니다. 내가 완전한 선을 갖추기 전에는 가정의 선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요, 가정이 완전한 선의 기반을 닦기 전에는 친척이면 친척, 종족이면 종족적인 선의 기반을 닦을 수 없습니다.
또, 김씨면 김씨의 한 종족권을 중심삼고 선한 권내에 서지 못하면 선한 민족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선한 민족이 형성되지 않고는 선한 국가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요, 선한 국가가 형성되지 않고는 선한 세계가 형성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세계를 이상으로 바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바라는 목적은 될지 모르지만 성사될 수 있는 목적으로는 우리가 맞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어디 있느냐?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기 개체를 보게 되면 마음의 사람과 몸의 사람이 다릅니다. 서로 싸우는 두 사람이 내 개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의 남편과 아내를 중심삼고 보면 네 사람이 싸우는 입장입니다. 열 식구가 있다면 스무 사람이 싸우는 입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로서 구성된 삼천만 민족 혹은 세계의 인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런 세계 가운데 과연 행복의 터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문제를 중심삼고 고심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싸우는 데 있어서도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우기 전에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싸워야 됩니다.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선을 행하라” 하거나 “좋은 일을 행하라” 할 때도 남을 위해서 선을 행하기 전, 남을 위해서 좋은 것을 행하기 전에 자기 자신 앞에 선을 행할 수 있는 자리, 좋은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올바른 씨를 심어야 올바른 싹이 나오는 것이요, 올바른 싹이 나와야만 올바른 가지와 잎이 생기고 꽃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참다운 인간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8-225)
어떤 사람이 참된 사람인가
어느 한 동네를 두고 볼 때,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동네에 있어서 “누구는 착한 사람이야, 선한 사람이야. 그래도 저분만은 우리 동네에서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야” 할 때, 신임한다고 하는 그 신임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측정하느냐? 그것은 변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합니다. 틀림없는 것을 가지고 측정합니다. 틀림없다는 것은 시종여일(始終如一)하다는 것입니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지 않습니다.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소원이 좋아지면 더 좋아졌지 나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그 사람은 신임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말은 무엇이냐? 변하지 않고 틀림이 없다는 말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히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보물이라고 할 때 색깔이나 질에 있어서 변하는 것은 보물이 될 수 없습니다. 색깔이나 질이 변하지 않아야 됩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해야 됩니다. 십 년 후에도, 백 년 후에도, 천년 만년 후에도 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변하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이 양심이 절대적으로 선하냐 하면, 양심도 환경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양심은 악을 싫어합니다. 싫어할 뿐만 아니라 악이 나타날 때는 “이놈…” 하고 브레이크를 겁니다. 제재를 가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악을 대해서 투쟁하려고 합니다. 이 작용에 있어서는 여러분의 양심이 변하지 않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무도 없는 캄캄한 밤에 동생의 먹을 것이라든가 입을 것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면 양심은 “야, 이놈아! 그건 동생 것이 아니냐? 동생에게 물어 보고 해야지”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양심은 원리원칙에 어긋나는 입장에 서게 되면 언제나 제재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 작용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두운 밤에 혼자 있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이 악한 입장에 설 때 양심은 브레이크를 건다는 것입니다. 이 작용만은 틀림없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가지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몇 천년 전 사람이나 몇 천년 후 사람이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마찬가지입니다. 못난 사람이 못난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잘난 사람과 비교해 가지고 차이 있게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못나고 비참한 자리일수록 긍휼의 마음, 불쌍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이 더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은 천 년 전 사람이나 천 년 후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앞으로 인간이 없어지지 않는 한 그런 사랑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8-226)
양심 작용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데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사랑합니까? 여기에 있는 아주머니들, 아기를 낳아서 사랑하게 될 때 그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어디에 사랑을 가르치는 초등학교가 있어요, 중학교가 있어요? 무슨 고등학교나 대학교가 있어요? 거기에 무슨 학박사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지만, 누구나 그 기준은 만점입니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것은 손댈 필요도 없고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가감이 필요하지 않을수록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것은 변치 않는 것이요, 변치 않는 것은 영원히 갑니다.
그래서 몸이 조금만 잘못하면 양심은 야단입니다. 잘못하는 것도 야단이지만 잘하지 않으면 이것도 야단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면 양심은 “너는 옷을 두둑이 입고 배도 부르고 부러운 것이 없으니 저 길가에 있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줘라” 합니다. 이건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정직한 사람, 선량한 사람, 좋은 사람일수록 마음이 하라는 대로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하라고 하는데, 몸은 “난 싫어”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관절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마음이 하자는 대로 “예” 하고 거기에 이의가 없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누가 교육합니까? “나는 마음 초등학교에 다녔소. 나는 마음 중학교에 다녔소” 하는 말을 들어 봤어요? 이것은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대 교육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법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마음 이상의 도리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좋지 않은 일을 하게 되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양심은 바른 것입니다. 대개, 관념이 그렇습니다. 양심이 꼬부라졌느냐 반듯하냐 할 때, 양심이 꼬부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보편적으로 양심은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바르면 얼마나 바르냐? 똑바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려가는 바름이냐, 올라가는 바름이냐, 혹은 수평선을 중심삼은 바름이냐? 이렇듯 바른 것도 다릅니다. 양심은 올라가는 바름입니다. 그러면 올라가는 바름은 뭐냐? 올라가는 각도가 작으면 하는 일도 작습니다. 좋은 일을 하겠으면 하고 말겠으면 말라는 식으로 작용 자체도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각도가 크면 클수록 그 작용도 커집니다. 양심이 올라가면서 바른 각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강한 작용을 합니다.
또, 양심은 올라가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한두 번 작용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작용하려고 합니다. 양심은 명령할 때 오늘만 잘하라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잘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마음이 원하던 모든 것을 이루어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양심은 “이제 이만했으면 남들을 도와줘야 될 것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즉, 양심은 혼자 갖고 살지 말고 좋은 것은 전부 다 나눠주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나누어주는데는 어떻게 나눠주고 싶으냐? 집안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닙니다. 좋으면 좋을수록 넓고 높고 멀고 깊게 나눠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이 있었다면 그 인물은 넓고 높고 깊게 주고자 하는 양심을 중심삼은 인격 내용과 결부된 기준을 가졌기 때문에 역사를 움직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선한 일을 얼마만큼 하라고 하느냐? 선한 것을 전부 다 이룰 때까지 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양심은 나하고 원수입니다. 폭군이라면 최고의 폭군입니다. 그만했으면 됐지, 여기에서 더 하려면 얼마나 뼛골이 빠지겠느냐는 거예요. 그런데도 그냥 두지 않습니다. 정성을 들이느라 잠 못 자고 피땀을 흘리며 수고를 했는데도 그 수고를 한꺼번에 집어던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동네를 위하고 나면 그 동네뿐만 아니라 삼천리 반도를 위하라고 하고, 삼천리 반도를 위하고 나면 또 세계를 위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30억 인류를 전부 잘살게 했다고 하더라도 양심은 “야, 이제 됐다” 하지 않습니다. 또, 옛날에 왔다 갔던 사람들을 위하라고 합니다. 죽었더라도 그 사람들을 잘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잘살고 있지만 내가 태어나기 전 수천만 대의 선조로부터 왔다간 수천 억 되는 인류들, 영계에 가 있는 영인들까지도 잘살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못살고 죽으면 한이 맺힌다고 하잖아요. 그러한 맺힌 한까지 풀 수 있으면 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이 못살면 되겠느냐? 그 기반까지 닦아 놓으라고 합니다. 대관절 이 양심이라는 것은 종자가 어디서 생겨났고, 뿌리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생겼길래 이러는지 이게 문제입니다. (38-228)
인간이 귀한 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
그러면 이 양심은 어디까지 갈 것이냐? 마음은 어떻게 생겼느냐? 둥글둥글한 거예요, 넓적한 거예요? 마음은 어떤 모양을 닮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납작하다면 지극히 납작하고, 좁다면 지극히 좁습니다. 또 길다면 무한히 길고, 넓다면 무한히 넓고, 높다면 무한히 높은 것입니다. 또, 빠르다면 비행기보다도 더 빠릅니다. 빛이 빠른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인공위성이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 여하에 따라서 천하가 놀아나면 놀아났지 천하를 따라서 마음이 놀아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보따리가 얼마나 큰지 이 세계의 모든 대통령을 자기 배 안에 집어넣고 운전하고 싶어합니다.
이 마음이 사고뭉치라면 지극히 큰 사고뭉치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빼 버리려고 해도 빼 버릴 수 없습니다. 이게 보기에는 시시한 것 같은데 잘났다고 들고나오면 천하가 이것을 당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존재입니다. 못났다면 지극히 못났고, 잘났다면 지극히 잘난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잘났으면 좋겠어요, 못났으면 좋겠어요? 잘난 것이 좋은 것입니다.
만약에 마음의 지시에 따라서 수고를 해 가지고 세계의 사람들을 전부 다 잘살게 해준 사람이 있다면 세계의 사람들이 그 사람에게 반기를 들고 데모를 하겠어요, 고맙다고 머리를 숙이고 따라가겠어요?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가 온다는 걸 여러분이 잘 알아야 됩니다. 잘살게 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살라고 내쫓아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관계를 안 맺겠다고 해도 맺으려고 합니다.
마음이 왜 이렇게 작용하느냐?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고 나면 내가 손해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준 것도 내 것으로 화할 수 있음과 동시에 받은 것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마음은 이러한 비법을 배우지 않고서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명령을 따른 사람은 주인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중심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만물지중유인최귀(萬物之衆惟人最貴)’라는 말도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만물과 다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귀합니까, 귀하지 않습니까? 귀합니다. 무엇이 있어서 귀합니까? 몸뚱이가 있어서 귀합니까, 마음이 있어서 귀합니까? 마음이 있어서 귀합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몸뚱이가 있어서 귀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38-231)
나 자체를 중심삼고 볼 때, 외적인 대외관계에 있어서 마음은 선한 일을 하도록 폭군처럼 명령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다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고 보면 폭군이 아닙니다. 내가 선군의 권한을 가지고 천하 앞에 영광을 발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싸우지 않고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다” 합니다. 이것이 공산당식입니다. 여기에 공산당 사촌 되는 아저씨들이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이 공산당 사촌인가, 친척인가,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없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다” 하는 사람은 공산당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공산당 사촌은 됩니다. (38-232)
훌륭한 부모
어느 부락에 욕심쟁이 아저씨가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배도 좀 나오고 신수도 멀끔하게 잘 생겼는데, 그 생김새와는 반대로 마음이 아주 욕심꾸러기입니다. 동네에 지나가다가 무슨 좋은 것이 있으면 “내 것…” 하면서 잡아채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빵 조각을 들고 있는 것을 봐도 “내 빵 조각…” 하면서 잡아챕니다. 무엇이든간에 체면불구하고 자기 배에 넣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이런 사람을 동네 사람들이 환영하겠어요, 쫓아내려고 하겠어요? 쫓아내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닙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란 사람도 그렇습니다. 분석할 수 있는 머리를 갖고 있지만 의분에 사무친 사나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땅이 옳다고 할 때는 대한민국이 반대해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반대하더라도 통일교회 교인들을 내모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들이 “우리 아들딸이 통일교회에 다니더니 부모도 몰라보니, 무슨 교회가 그러냐”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이 다 좋고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그들도 배워야 됩니다. 아무리 여든 살이 되었거나 늙어 죽을 나이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인생행로에 있어서 아직까지 모르는 것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근본문제라든가 해결해야 할 내용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아들딸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탐구하려는데 그 길을 막는다는 것은 틀려먹은 것입니다. 진정한 부모라면 어서 가서 참다운 인생의 가치를 찾으라고 격려해 주고 그 길을 개척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동네방네에서 쫓겨나거나 나라에서 규탄을 받지만 그것으로 흘러가 버리고 망하게 되면, 그건 나쁜 것입니다. 그렇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서 봤을 때, 그 동안에 핍박하던 사람들이 여러분이 제재도 가하지 않았는데 자연히 그 결과에 따라서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 앞에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지금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서 있는 이 사람이 통일교회 문 선생입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고 해서 여러분과 뭐 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몸은 조금 뚱뚱할는지 모르지만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가 좋은 몸뚱이로 태어나게 해줬으니까 뚱뚱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것도 아닙니다. 몸뚱이는 여러분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 추울 때는 춥고, 바늘로 찌르면 아프고, 섭섭한 이야기를 들으면 섭섭해합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르냐? 양심을 중심삼고 보는 관이 다릅니다. 행동하는 그 결과의 차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아들딸을 낳아 키우는 데 있어서 자신들이 늙어서 잘살기 위하여 공부시키는 부모와 자기 동네를 잘살게 하기 위해서 공부시키는 부모가 있다고 한다면 어느 부모가 더 선한 부모이겠습니까? 동네를 위하여 공부시키는 부모입니다. 그건 다 아는 것이니까 교육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동네를 위해서 공부를 시키는 부모와 나라를 위해서 공부시키는 부모 중 어느 부모가 선한 부모입니까? 다시 말해, “네가 공부하는 것은 이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후대 만민의 복귀의 터전을 개척하기 위한 하나의 선각자로 서기 위한 것이다” 하면서 정성들여 아들딸의 장래를 추구하는 부모와 동네를 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아들딸의 장래를 추구하는 부모 중 어느 부모가 훌륭한 부모냐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하여 공부시키는 부모가 훌륭한 부모입니다.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38-232)
나라보다도 세계를 위해 살라
나라를 위해서 공부하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한 자격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만민을 위주로 태어난 세계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구성은 인간의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세계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을 공부시키는 데 있어서도 “네가 공부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하는 것이지만 앞으로의 세계를 위하여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민족을 넘어 종족과 인종을 초월한 박애사상과 형제의 심정을 가지고 네 몸과 네 일생을 고이 만민을 위해서 희생하고 만민의 복지를 위한 개척자가 되라”고 다짐시키며 공부시켜야 합니다. 그런 부모와 나라를 위한 충신의 도리를 가르치면서 공부시키는 부모 중에 어느 부모가 더 훌륭한 부모입니까? 세계를 위해서 공부시키는 부모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나라만을 위하는 사람은 망합니다. 이게 결론입니다. 또, 자기 가정만의 운세를 주장하는 사람은 나라의 운세가 다가올 때 망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의 일등 국가가 되겠다고 했지만, 세계의 운세가 몰아치게 되니까 할 수 없이 남북으로 갈라지더라 이겁니다. 민족의 충신들이 죽음 길을 가며 소원하던 해방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날은 왔는데 세계의 운세가 몰아치니까 대한민국의 운세는 세계의 운세를 안고 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세계의 운세가 다가온다고 할 때, 그 세계의 운세에 박자를 맞춰서 준비를 하는 사람과 나라의 운세에 박자를 맞춰서 준비하는 사람 그리고 가정의 운세에 박자를 맞춰서 준비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먼저 망하겠습니까? 개인의 운세는 가정의 운세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또, 가정의 운세는 동네의 운세를 막아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그 동네에서 잘산다고 큰소리를 해 봤자 동네가 망하게 될 때는 그 가정도 망하는 것입니다. 종족의 운세는 민족의 운세를 못 막아내고, 민족의 운세는 국가의 운세를 못 막아냅니다. 또한 국가의 운세는 세계의 운세를 못 막아내는 것이요, 세계의 운세는 천운을 못 막아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재수가 좋기를 바라지요? 오늘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을 봤는데 기분 나쁘다고 하거나, 또는 통일교회 문 선생이라는 사람한테 갔다 왔는데 참 재수가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재수가 좋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갈 때는 아홉 냥을 가져갔는데 올 때 보니 여덟 냥이 되었을 때, 그것을 보고 재수 좋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아야 재수가 좋다고 합니다. 갈 때보다 올 때 더 크면 좋다고 하는 것입니다. 갈 때보다 더 나아야 좋다고 하는 것이지 나빠졌는데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습니다. 자연법도라든가 화학작용과 같은 모든 작용이라는 것은 손해나는 데서 작용하는 법이 없습니다. 통일교회 문 선생이 의정부까지 뭘 하러 왔겠어요? 나는 아주 바쁜 사람입니다. 시골 양반들에게 몇 시간 이야기해 봤자 당장에 두드러진 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바에야 서울에서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있어서 그런 사람들만이 사람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같은 한 몸뚱이라는 것입니다. 한 몸뚱이에서 이마는 번듯이 잘생겼는데 코가 못 생기거나, 또 코와 이마는 잘 생겼는데 눈이 애꾸라면 안됩니다. 또, 입이 찌그러져도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기 위한 전체적인 가치를 보게 될 때, 높은 곳이나 낮은 곳이나 귀하기는 같다는 것입니다. (38-234)
종교의 가르침은 뭐냐
이제 여러분 자신에게 다시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총수습하여 결론을 짓겠습니다. 나를 두고 봅시다. 여러분이 세계적인 사상을 가지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싸워요, 안 싸워요? 싸우지요?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생각이 둘이 될 수 있어요? 하나겠어요, 둘이겠어요? 절대자의 생각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자의 생각은 법도를 따라서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세워집니다. 이것은 틀림없습니다.
인격자일수록 하나의 목적을 중심삼고 나갑니다. 그것은 천 년이 가도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옛말에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요, 산천(山川)은 고금동(古今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석으로 변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폐품으로도 이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목적하는 바도 하나입니다.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목적을 두고 사람을 지으셨다면, 그 지음 받은 사람이 어찌해서 두 목적의 사람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이 목적하는 것과 몸이 목적하는 것이 왜 다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교에서는 타락이라고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은 목적이 하나일 텐데 그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목적은 몸의 목적과 마음의 목적, 둘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목적의 길을 갈래야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인생이 절대적인 목적의 자리에 가야 할 텐데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절대적인 그 길을 가려면 먼저 몸과 마음 중에서 어느 것에 치중해야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 가운데 어느 것이 선한 것입니까? 마음이 선합니까, 몸이 선합니까? 마음이 선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위주로 해 가지고 몸뚱이를 때려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종교의 가르침은 뭐냐?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갖추어서 하나님을 숭상하고 천도를 숭상하면서 천정을 따르라, 천도를 중심삼고 천정을 따라서 마음의 방향을 일치시켜 가지고 거기에 배치되는 일체의 몸의 욕망을 끊어 버리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절대적인 길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도를 숭상하면서 천정을 따라간 사람들이 예수님 같은 성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치리하는 것은 마음을 제거시키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 즉 육정(肉情)을 제거시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본래 사람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태어난 것인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두 주인을 갖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려면 복잡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의 교리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갖게 되었는데 어떻게 갖게 되었느냐? 혈통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선 종교가 해야 할 일은 마음과 몸을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중심삼고 통일시키느냐? 천의를 중심삼고 천정을 따라 마음이 하나된 기반 위에서 몸을 굴복시켜야 합니다. 종교는 몸을 굴복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38-268)
종교생활의 목적
그러면 마음과 몸을 통일시키기 위한 첫째의 방안은 무엇이냐? 몸을 때려잡는 것입니다. 몸을 치라는 거예요. 몸이 하자는 것 일체를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부정해야 되느냐? 완전히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죽었다고 하는 자리까지 부정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듯이 그런 역설적인 논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몸뚱이가 완전히 죽어서 마음화되어 마음이 완전히 살아 있는 형태의 입장에 서지 못하면 하나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몸을 완전히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마음이 완전히 사는 것이요, 마음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은 몸은 살아 있지만 완전히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모보다도, 형제보다도, 처자보다도 더 예수님을 사랑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왜냐?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천정의 대표자로서 왔었기에 천정과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에게 천정을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세상적인 육정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는 육(肉)을 중심삼은 관계입니다. 이 육정을 끊지 않으면 천정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천정을 따라가려면 육정을 부정하고 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부모, 처자식, 형제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 천국에 갈 수 있는 공식적인 표를 어디서 받느냐? 자기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자기 아들딸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데서 받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육정을 제거시켜야 합니다. 첫째의 목적은 강제로라도 때려잡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온유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몸뚱이가 온유겸손할까요? 몸뚱이는 자꾸 올라가려고 하고 교만해지려고 합니다. 먹여 주면 자꾸 더 먹으려고 하고, 쉬게 해주면 자꾸 더 쉬려고 하고, 위해주면 자꾸 더 위해 달라고 합니다. 따라서 몸뚱이는 악의 바탕이요, 악의 뿌리입니다. 악과 선의 뿌리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악의 뿌리를 뽑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몸뚱이가 하자는 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고, 악한 데는 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천도와 천정의 도리를 넘을 수 없습니다. 인정과 인도는 모든 일에서 사탄과 악을 중심삼고 출발하기 쉽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악을 부정할 수 있는 첫째의 방안은 육신을 구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금식기도를 하면서 정성들이면 몸뚱이가 기운이 쭉 빠져서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이 몸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합니다. 그 다음에는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죽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전부 육신이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종교는 육신과의 모든 관계를 부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 모든 종교의 경서를 보십시오! 잘먹고 잘살라는 내용이 있는 경서가 있습니까? 그런 경서는 하나도 없습니다. 종교는 희생봉사, 온유겸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남을 위해 복을 빌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몸뚱이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이 육체를 때려잡는 놀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대등하기 때문에 싸움을 합니다. 때문에 몸뚱이를 약하게 함으로써 마음이 득세해 가지고 약하게 된 몸뚱이를 몇 달 동안 끌고 넘어가게 되면 몸뚱이를 다시 올려놓아도 올라올 수 없게끔 습관화되어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자기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하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잘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냥 놔두어도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양심을 위주로 한 절대적인 자리에서 생애를 엮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생활의 목적입니다. (38-270)
우리가 바라는 목적
그 다음에 몸을 주관할 수 있는 두 번째의 방안이 무엇이냐? 마음과 몸이 비슷비슷하니까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레슬링 세계 챔피언하고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가 상대가 되겠어요? 그것은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서로가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의 방안은 마음에다 힘을 불어넣는 것입니다.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야 됩니다. 이 두 가지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온갖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정성을 쌓아 올리면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그 마음의 문이 열리기만 하면 아주 강력한 힘이 나오기 때문에 몸뚱이 같은 건 문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직 그걸 모를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비슷비슷한데 마음의 힘이 몸의 3배만 되어도 몸뚱이는 문제가 안 됩니다. 몸을 그냥 그대로 두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힘을 압축시켜 가지고 몸을 일시에 끌고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의 세계에서는 정성을 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통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도를 통하게 되면 마음에서 강력한 힘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뚱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면 할수록 메슥메슥하고 기분 나쁜 냄새가 납니다. 생각만 해도 아주 기분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도를 통한 사람은 마음에 강력한 힘이 옴으로 말미암아 그냥 그대로 놓아두더라도 몸은 마음이 하자는 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방법 이외에는 몸뚱이를 조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몸의 지배를 완성하기 위해서 이러한 작전을 펴 나오고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종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일교회도 지금 그러한 공식대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자연히 인간으로서 가야 할 고차적인 자리,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스스로 자각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한 것처럼 자기의 권위에 미칠 사람이 없습니다. 홀로 스스로의 가치를 찬양할 수 있는 영광된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홀로 받을 수 있는 아들이 되어 하나님이 지은 피조세계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것을 자기의 것으로 상속받을 수 있게 되니까 홀로 높다고 자각하는 자리에 들어갑니다. 이와 같은 자리까지 가서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서 살기 위해 찾아가는 길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38-272)
여기에서 한 가지 첨부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영생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사랑이 없이는 영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얘기를 하면 할수록 힘이 소모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힘은 작용하게 되면 소모가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작용을 했는데 오히려 힘이 솟아나는 법은 없습니다. 이것이 현상세계, 자연세계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이 공식에 어긋나고 상충되는 것이 단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힘이라는 것이 뭐예요? 전기 모터나 발전기를 중심삼고 들어오는 힘과 나가는 힘을 보면 들어오는 힘이 나가는 힘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가는 힘은 언제나 작습니다. 다시 말하면, 운동을 하는 가운데 힘의 소모가 벌어지기 때문에 나가는 힘은 들어오는 힘보다 언제나 작아지는 것입니다. 이게 힘의 원칙입니다. 들어가는 힘보다 나가는 힘이 작기 때문에 그 힘을 같게 해주기 위해서 휘발유를 태우고 하는 것입니다. 작용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보충을 해줘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영속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해 주었다고 할 때는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보다 적게 마이너스시켜 가지고 돌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한 사랑을 열만큼 받았으면 돌려줄 때는 더 보태서 주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는 천번 만번 희생하면서 자식을 사랑하지만 그것은 되돌려 받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은 아들딸은 더 보태서 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주면 줄수록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면 줄수록 플러스가 되어 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작용하면 할수록 들어오는 힘보다 나가는 힘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작용하고 나면 더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영존하실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태 주는 힘의 작용이 없으면 영존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영존할 수 있는 바탕이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힘이 내재할 수 있으므로 그런 입장에 선 존재는 영생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사랑 가운데서 살고 싶어하고 사랑 가운데서 죽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것을 이상의 요소로 삼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통일교인들은 민족과 인종을 넘어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보다, 자기 부모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게 되면 끝날에는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원칙을 알고 나가자는 것이 통일교회의 중심사상이요, 우리가 바라는 목적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이것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영원히 잘 주고 잘 받을 수 있게 하는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의 갈 길입니다. 거기에 비로소 소망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38-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