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동의 중심체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5일)

훈독왕 | 20220409071425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5일


화동의 중심체 (훈독본) 

- 제1회 협회 간부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
날짜 : 1970. 2. 26(목)
장소 : 한국 통일산업(구리시 수택리)

 

화동의 중심체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5일)

 

모든 작용은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은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 주체와 대상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한 어떠한 결정적인 요인을 가져야 합니다. 주체가 확정되고 상대가 확정되어야 모든 질서와 조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도 심장을 중심으로 모든 지체가 움직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놓고 볼 때 마음에도 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격을 중심삼고 인간은 지금까지 생활해 나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의 제도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말합니다. 국가도 역시 국가의 대표자, 즉 하나의 인격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그 인격자를 중심으로 국민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실체적인 조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범위가 넓은 세계에도 역시 하나의 중심적인 인격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적 분야를 중심삼아 가지고 인격을 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인 분야를 넓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세계를 알아야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정신적인 세계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고 할 때는 인간이 주인 될 수 있는 기점이 마련됩니다. 그 기점이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인간이 요구하는 최고의 행복의 요건과 절대적 가치의 요건이 결정될 수 있는 중심적인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최고의 상대적인 요건을 갖추어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인격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적인 요건을 세워 놓지 않고는 사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절대적 기준을 세웠다면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29-124)

절대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인격 기준

그 절대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인격의 기준은 인간 개체만을 중심삼고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상대적인 자리에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주체적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절대적인 최고의 기준을 찾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적 분야에서 하나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기준의 최고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주체를 중심삼고 상대적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360도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주체적인 기준 위에서 주체와 일체적인 내용을 가진 절대권 내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것을 통솔하고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게 될 때, 비로소 행복의 요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물의 중심이 되어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동기가 되어 만물이 상대적 요건을 갖추게 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중심 되는 절대자와 안팎의 관계와 상하의 관계를 총동원한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중심의 자리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됩니까?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삼고 맺어야 됩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절대자의 자리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주체와 일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면 상하관계가 형성됩니다. 


우리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하관계의 자리까지 들어가 모든 존재의 기원인 절대자와 더불어 하나되어 절대적인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절대자와 하나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고, 그의 모든 관계와 인연이 나의 것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러한 자리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9-126)

화동의 중심체인 인간이 절대자와 하나되면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입니다. 그런데 화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중심기준이 결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여러 사람이 박자를 맞추려면 지휘자를 중심으로 상하관계가 잘 연결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탄식하셨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영적이며 마음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몸과 같은 존재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몸과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과 같은 존재인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날에는 우주는 자동적으로 하나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우주는 인간을 주체로 삼아 가지고 그 대상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면 만유의 존재물도 하나님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절대자와 하나되면 우주는 자연히 통일되는 것입니다.

하늘땅을 합한 것을 천주(天宙)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천민(天民)입니다. 그리고 이 천민이 설 수 있는 기반은 천국의 국토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기반을 갖추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기준 그 자체로써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적 요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상대적인 인격의 기준을 결정짓고, 그 인격을 중심삼은 상대적인 세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하실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한테 행복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29-128)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자리

지금까지 6천 년 역사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절대적인 목적과 절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사랑을 소망하고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목적과 존재와 사랑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거리가 지났지만, 이 시대에 그러한 존재가 되려면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고 한 말씀 이상 절대적 존재와 자신의 관계를 나타낸 분명한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대적 관계를 칭하는 말 가운데 ‘나는 주체요, 너희들은 대상이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라고 한 것보다 더 나은 말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가 실제로 온 인류에게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그렇게 연결하는 데 있어서는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목적을 아무리 잘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주관할 주체적인 사랑의 권위를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또다시 새로운 목적을 추구해야 됩니다. 목적의 한계점이 사랑보다 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절대자에 대한 확인, 절대자의 사랑에 대한 확인을 했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런 기준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자와 관계를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확정지었습니다. (29-130)

예수님의 강림 목적과 그가 제시한 인격관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원하는 새로운 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이 절대적으로 연결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세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절대적인 인연이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세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상대적 존재로 확정된 자리,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이 절대적인 모체가 되고 이 모체와 절대적인 관계가 맺어져 사랑을 중심삼고 조직도 서야 되고 질서도 서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설파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세계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영원한 소망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사랑을 설파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인격관, 즉 우리 인간이 절대자의 대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절대자의 대신자로서 절대적인 사랑과 영원한 주체성을 가져야 됩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이러한 주체성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을 존재세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29-131)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할 인간

그러면 상대적인 피조세계는 누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까? 그것은 나 때문에,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동기가 되어 가지고 얻은 결과를 놓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간은 만물을 사랑하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를 돌리는 경지에 들어갈 때,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을 통하여 그 중심을 찾을 수 있느냐?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감, 다시 말하면 너보다 나아야 된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꽃이 핀 것을 보고 여러분은 “아, 꽃 좋다”라고 감탄하면서 그것들보다 나아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또한, 날아가는 새가 노래를 부르며 자연과 더불어 화동하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은 그 새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산에 혼자 있더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기뻐하셨던 내적인 심정을 어떻게 하면 내가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주체는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온 우주가 절대적인 주체와 더불어 하나되어 화동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 즉 만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권내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작용하는 그 동기가 반드시 개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을 때 얼마나 재미있게 지으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지어 주셨구나” 하면서 우주에 대하여 지금까지 느꼈던 것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감동을 느껴야 됩니다. 길가의 씀바귀 하나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지으실 때, 아버지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지으셨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느끼셨던 본연의 모든 미와 창조의 기쁨을 충만하게 느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형태와 같고 우주 자체와 같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 거기에서 비로소 우주적인 화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29-133)

잘못된 생활권 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것이냐

여러분이 화동의 중심체가 되면 새가 날아가는 것도 복귀섭리를 위해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그러한 전도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주를 중심삼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동시에 자기를 중심하고 살려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후자를 뿌리까지 빼 버려야 합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은 상반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적인 욕망을 완전히 빼내야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주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목적이 있으면 그런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락권 내에 있는 세상적인 욕망이나 모든 사욕을 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활이 잘못되었다면 그릇된 것을 완전히 제거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심장의 고동소리가 기적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심장소리가 기적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정도의 경지까지 들어가야 화동의 중심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29-133)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경계선을 넘으려면

그러면 주체적인 입장에 서기 위한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하나되어야 하나님과 같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하나되면 그 경계선에 연결될 것입니다.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화동의 중심체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자가 공인할 수 있는 자리, 그 절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봤습니까? 절대자 앞에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어린아이가 아빠 엄마와 지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고 무릎에서 똥을 싸면서 자라지만 부모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이 참된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형님이나 누나입니다. 이런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대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사랑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계를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물을 주관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의 목적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타락한 세상을 버리고 본연의 세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전에 있던 것을 버리게 됩니다. 생명을 버린다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9-137)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버리는 데는 보다 귀한 것을 갖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들은 그러한 터전을 갖지 못하고 보다 못한 것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사랑을 중심삼고 전체를 위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세계를 위해 잘못된 환경을 박차고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이 더디더라도 생명을 걸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을 버렸으면, 그 나라를 버렸으면 그것보다도 위대한 그 무엇을 발견해야 됩니다. 가정을 버렸으면 그 이상 귀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모든 것을 버렸으면 그 이상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발견했으면 후회 없이 가야 합니다. 당당코 가야 합니다.


귀한 가치를 발견한 경지에 들어가서 앞으로 나아가면 내일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주체의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뜻에 절대복종하며 주체가 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 나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었습니다.

현재의 입장을 버리고 더 나쁜 데로 가면, 그게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더 좋은 데로 가면 선입니다. 버리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격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이 여러분에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29-139)

오시는 주님은 인간세계의 화동의 중심

여러분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역사적인 결실, 시대적인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사탄세계의 자기 아버지보다도 낫고 형보다도 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받지 않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면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는 자신이 됩니다. 이러한 인격을 갖고 오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인간세계의 화동의 중심체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맨 처음엔 말씀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인격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심정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29-142)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세우지 못한 기준을 세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 절대시하여 절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우주가 생겨난 목적을 성사시키는 것, 주체적인 목적을 중요시하는 것이 부부가 하나되는 길입니다. 부부는 마음을 중심삼고, 인격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을 중심삼고 서로서로 권고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인격, 절대적인 심정,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서부터 벌어지느냐 하면 가정입니다. 가정의 부부를 중심삼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자식을 낳아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이 절대적인 인격과 심정과 사랑으로 하나되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모든 것의 화동의 중심체가 됩니다. 만민을 대표하고 만가정을 대표하는 화동의 중심체요, 종족적인 화동의 중심체요, 수많은 민족들의 화동의 중심체요, 수많은 국가의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기준까지 복귀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29-143)

평화의 천국이 이루어지려면

결국은 내 개인이 문제입니다. 가정을 품을 수 있는 나, 종족을 품을 수 있는 나,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되지 않고는 절대적인 권내에 있는 세계와 상관없는 내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작전을 펴는 데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화동의 중심체가 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절대적인 자리에 서야 합니다. 절대적인 종적 관계가 횡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화동의 중심체가 되겠습니까?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한 후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롭게 다시 긍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현실을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고는 통일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44)*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5일, 원문

화동의 중심체

- 제1회 협회 간부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
날짜 : 1970. 2. 26(목)
장소 : 한국 통일산업(구리시 수택리)

모든 작용은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은 혼자 시작되는 법이 없습니다. 작용을 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이 주체와 대상은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한 어떠한 결정적인 요인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상대적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태양계를 보더라도 태양 자체가 주체적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입장에 있는 유성들이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유의 존재물도 역시 그러한 주체와 대상의 기준을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있지 않으면 질서나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체가 확정되고 상대가 확정되어야 모든 질서와 조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도 심장을 중심으로 모든 지체가 움직이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놓고 볼 때 마음에도 중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격이라는 것입니다. 그 인격을 중심삼고 인간은 지금까지 생활해 나왔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회의 제도 가운데 중심적인 위치에 설 수 있는 사람을 인격자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동네에 존경을 받는 인격자가 있다고 하면, 그는 그 동네 안팎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중심적인 작용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국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도 역시 국가의 대표자, 즉 하나의 인격자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그 인격자를 중심으로 국민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실체적인 조직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범위가 넓은 세계에도 역시 하나의 중심적인 인격자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인격자라고 해도 외적으로 보면 보통 사람과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적으로 보면 사상적인 면이라든가 정신적인 면이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격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정신적 분야를 중심삼아 가지고 인격을 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정신적인 분야를 넓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세계를 알아야 됩니다. 마음은 무한대로 접할 수 있는 능동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을 보더라도, 그것은 어떠한 사회나 국가나 세계의 한계권에 한정지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절대적인 최고의 기준을 바라보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절대적인 자리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내심의 작용을 볼 때, 마음의 세계는 무한과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정신적인 세계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마음이 그런 자리를 잡았다고 할 때는 인간이 주인 될 수 있는 기점이 마련됩니다. 그 기점이 어떠한 자리일 것이냐? 인간이 요구하는 최고의 행복의 요건과 절대적 가치의 요건이 결정될 수 있는 중심적인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 선다고 하더라도 또 그 자리에서 보이는 최고의 존재가 있을 것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도 있을 것이고, 최고의 보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리에서 최고의 상대적인 요건을 갖추어 행복을 노래할 수 있는 인격이 어디에 있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적인 요건을 세워 놓지 않고는 사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절대적 기준을 세웠다면 시간성과 공간성을 초월하여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29-124)

절대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인격 기준

그 절대적 중심이 될 수 있는 인격의 기준은 인간 개체만을 중심삼고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나 절대자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상대적인 자리에서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주체적인 자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되는 데 있어서는 외적인 면보다 내적인 면에서 하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절대적인 최고의 기준을 찾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외적 분야에서 하나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기준의 최고의 가치와 연결될 수 있는 자리에서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과 하나되려고 할 때도 생활에서 하나되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세계, 즉 사랑의 세계에서 하나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절대자와 하나되고 싶어하는 것은 중심적 입장에 서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원리에 의하면 주체 가운데는 내성과 외형이 있고, 성상과 형상이 있고, 상하관계가 있습니다. 모든 것의 근본인 주체자가 통일의 이념과 하나의 목적관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그 주체 속에 상하관계가 있어야 하고 전후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주체를 중심삼고 상대적인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어 가면서 360도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주체적인 기준 위에서 주체와 일체적인 내용을 가진 절대권 내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것을 통솔하고 주관하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게 될 때, 비로소 행복의 요건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만물의 중심이 되어 그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동기가 되어 만물이 상대적 요건을 갖추게 될 때 행복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중심 되는 절대자와 안팎의 관계와 상하의 관계를 총동원한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중심의 자리를 결정지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됩니까? 부자관계의 사랑을 중심삼고 맺어야 됩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부자의 관계는 종적인 관계요, 부부의 관계는 횡적인 관계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아내보다 자식을 더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하관계를 중시한 말입니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절대자의 자리에 들어가 그 자리에서 주체와 일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들어가면 상하관계가 형성됩니다. 여기서 상대관계가 형성되면 횡적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 즉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 관계가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 있어서 부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절대자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와 상대라는 명사를 추구해 가는 데 있어서 인간은 상대적 기준을 넘어 절대자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상하관계의 자리까지 들어가 모든 존재의 기원인 절대자와 더불어 하나되어 절대적인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절대자와 하나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있고, 그의 모든 관계와 인연이 나의 것으로 맺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그러한 자리에서 출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9-126)

화동의 중심체인 인간이 절대자와 하나되면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입니다. 그런데 화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중심기준이 결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여러 사람이 박자를 맞추려면 지휘자를 중심으로 상하관계가 잘 연결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에서 화동의 중심체인 인간은 절대적 기준과 일치된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인간이 머무르는 곳에 우주가 머무르는 것이요, 존재세계가 그를 중심삼고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 작용으로 말미암아 존재세계에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탄식하셨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영적이며 마음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몸과 같은 존재와 하나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몸과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음과 같은 존재인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지금까지 탄식하고 계시는 이유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날에는 우주는 자동적으로 하나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우주는 인간을 주체로 삼아 가지고 그 대상의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되면 만유의 존재물도 하나님하고 인간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의 관계는 서로 반대적인 입장이 아니라 상대적인 입장으로서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의 범위는 초우주적입니다.
이처럼 절대자를 중심삼은 상대적 관계는 절대권 내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권내를 벗어난 존재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대자와 만물을 연결할 수 있는 존재, 즉 인간이 절대자와 하나되면 우주는 자연히 통일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에 인간들이 바라는 인격적인 중심체가 결정되었더라면 반드시 화동의 세계가 되었을 것입니다. 원리에서 말하듯이 완전한 중심은 완전한 상대를 창조합니다.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상대적인 요인을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는 데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주체가 있으면 상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의 속성을 지니고 우주 가운데 존재하기 때문에 창조의 원칙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6천 년 역사과정을 통해 하나의 중심 된 인격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선조가 수고의 길을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계적인 인격자라면 세계적인 국민을 가져야 되고 세계적인 국토를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 자신도 우주적인 백성을 가지셔야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땅을 합한 것을 통일교회에서는 천주(天宙)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천민(天民)입니다. 그리고 이 천민이 설 수 있는 기반은 천국의 국토입니다. 하나님도 이러한 기반을 갖추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인 자리로 접근해 들어가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절대적 주체를 중심삼고 상대적인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 범위가 크면 클수록 절대권 내에 가까워질 수 있는 입장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치리할 수 있는 입장이라면, 그 나라를 중심삼고 절대권 내에 가까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시대를 초월하여 국가 앞에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면 국가를 넘어서 세계적 권내에 틀림없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적인 권내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범위가 넓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절대권을 중심삼고 하나의 세계권을 만들려는 욕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절대기준 그 자체로써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적 요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상대적인 인격의 기준을 결정짓고, 그 인격을 중심삼은 상대적인 세계를 가지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하실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한테 행복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29-128)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자리

지금까지 6천 년 역사 과정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중심한 절대적인 목적과 절대적인 존재와 절대적인 사랑을 소망하고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목적과 존재와 사랑을 연결시킬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했습니다. 역사적인 거리가 지났지만, 이 시대에 그러한 존재가 되려면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고 한 말씀 이상 절대적 존재와 자신의 관계를 나타낸 분명한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대적 관계를 칭하는 말 가운데 ‘나는 주체요, 너희들은 대상이다. 나는 신랑이요, 너희들은 신부’라고 한 것보다 더 나은 말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가 실제로 온 인류에게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그렇게 연결하는 데 있어서는 물질적 가치를 중심삼고 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의 육적인 인간을 중심삼고 연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연결해야 합니까?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절대적인 존재를 확정하고, 아무리 절대적인 목적을 확립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기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살고 생활하는 것이 기뻐야 됩니다. 생활하는 것은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성취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존재 그 자체 이상의 새로운 무엇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를 중심삼고 볼 때 이들에게 무엇보다도 가장 귀한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이것과 연결시킬 수 있는 행복의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목적을 아무리 잘 세웠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주관할 주체적인 사랑의 권위를 세우지 못하게 될 때는 또다시 새로운 목적을 추구해야 됩니다. 목적의 한계점이 사랑보다 위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 있어서 절대자에 대한 확인, 절대자의 사랑에 대한 확인을 했다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런 기준을 세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절대자와 관계를 어떻게 확인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확정지었습니다. (29-130)

예수님의 강림 목적과 그가 제시한 인격관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왔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원하는 새로운 선의 세계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계는 아버지와 아들이 절대적으로 연결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는 상대적인 세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절대적인 인연이 관계되어 있지 않으면 그 세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 아들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상대적 존재로 확정된 자리,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둘이 절대적인 모체가 되고 이 모체와 절대적인 관계가 맺어져 서로 통할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 외에는 다 가짜의 세계입니다. 그러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돈 가지고도 안 됩니다. 사랑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조직도 서야 되고 질서도 서야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공동적인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인류애를 중심삼고 하나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이 조국애를 갖고 있다면 애국사상을 중심삼고 하나될 것입니다. 애국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국가를 이루기 위해 애국사상을 중심삼고 종적으로 하나될 것입니다. 애국운동을 혼자서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을 알면 횡적인 인연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동지규합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도 나라를 찾아서 온 국민이 행복해지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나라를 찾지 못한 우리 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전체가 하나되어 나라를 찾아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나라를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정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가정을 찾아야 하는 것이요, 세계도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세계를 찾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와서 설파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세계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영원한 소망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사랑을 설파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희망도 없고, 목적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시한 인격관, 즉 우리 인간이 절대자의 대신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절대자의 대신자로서 절대적인 사랑과 영원한 주체성을 가져야 됩니다. 어떠한 고난이 있더라도 이러한 주체성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메시아 사상입니다.
예수님이 바라신 세계는 절대적인 세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바라는 세계도 영원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됩니다. 어떠한 사랑을 해야 합니까?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사랑에는 온 우주가 안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시대를 대표하여 그런 사랑을 해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인류는 이러한 권내로 들어가기 위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시대든 중심을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화동의 중심체가 될 수 있는 주체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하여 지으신 것입니다. 인간을 존재세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존재세계의 모든 요소와 성품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완전한 중심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때는 천지가 공인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우주의 화동의 중심체 자리에 서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권내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만우주와 주고받는 자신을 발견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타락한 인간으로서 도 세계의 인격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은 도의 세계에서 인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심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석가모니도 그런 자리에 들어가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29-131)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할 인간

그러면 상대적인 피조세계는 누구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까? 그것은 나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 때문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스스로 동기가 되어 가지고 얻은 결과를 놓고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고차적인 사랑의 이념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만물을 사랑하고 만물은 인간에게 미를 돌리는 경지에 들어갈 때,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에 인연 된 인간은 현재의 생활에서 그 중심을 두어야 됩니다. 그러면 어떠한 방법을 통하여 그 중심을 찾을 수 있느냐? 화동의 중심체 자리를 잃어버린 타락한 나 자신이 그 자리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문제가 현실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든 존재물과 비교해 가지고 그보다 커야만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자신감, 다시 말하면 너보다 나아야 된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봄을 맞아 동산에 만물이 소생할 때 꽃이 핀 것을 보고 여러분은 “아, 꽃 좋다”라고 감탄하면서 그것들보다 나아야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새로운 희망에 벅찬 모습을 보면서도 그 이상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날아가는 새가 노래를 부르며 자연과 더불어 화동하는 것을 볼 때 여러분은 그 새보다 나아야 한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대해를 바라볼 때도 넓고 큰 바다보다도 나아야 하며, 산에 혼자 있더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실 때 기뻐하셨던 내적인 심정을 어떻게 하면 내가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주체는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온 우주가 절대적인 주체와 더불어 하나되어 화동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자리, 즉 만물을 통합시킬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한 권내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으로부터 작용하는 그 동기가 반드시 개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만물을 지을 때 얼마나 재미있게 지으셨을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지어 주셨구나” 하면서 우주에 대하여 지금까지 느꼈던 것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감동을 느껴야 됩니다. 길가의 씀바귀 하나를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지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계를 지으실 때, 아버지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지으셨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적인 중심으로 삼고 그와 상대기준을 조성하여 일치되고자 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요구요 소원이기에, 인간이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느끼셨던 본연의 모든 미와 창조의 기쁨을 충만하게 느낄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것을 체휼하려면 동산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가 지도록 사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는 권내에 빠져야 합니다. 거기에서 숨을 길게 들이쉬면 이 우주의 공기가 생명력을 가지고 쑥 몰려옵니다. 이렇게 우주의 생명력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나 자신이 숨을 내쉬면 모든 존재가 새롭게 각성하고, 깊이 잠들면 만물이 상대적으로 화동할 것입니다. 이러한 자리가 만유를 통치할 수 있는 절대자의 자리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관계에서 멈추지 말고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자연의 형태와 같고 우주 자체와 같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게 될 때, 거기에서 비로소 우주적인 화동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29-133)

잘못된 생활권 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것이냐

이렇게 상대와 주체가 하나된 자리에 만물도 하나되어야 행복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지금까지 이러한 세계와 관계를 갖지 못하고 동떨어진 생활을 해 나왔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을 중심삼고 생활하면서 그것을 추구해 나왔습니다. 그것은 허무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여러분이 화동의 중심체가 되면 새가 날아가는 것도 복귀섭리를 위해 날아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그러한 전도체가 있어야 합니다. 전기가 통하려면 반드시 전도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전도체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주를 중심삼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동시에 자기를 중심하고 살려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후자를 뿌리까지 빼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거기에 새로운 무엇이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저기압이 형성되면 고기압 세력이 저기압 쪽으로 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관념을 전부 빼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빼 버린 힘에 비례되는 그 무엇이 나타납니다. 새로운 것을 전달해 주는 존재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은 상반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적인 욕망을 완전히 빼내야 됩니다. 빼는 데는 천천히 빼면 안됩니다. 갑자기 확 빼 버려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우주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고 목적이 있으면 그런 힘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락권 내에 있는 세상적인 욕망이나 모든 사욕을 빼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에게는 생리적인 작용, 즉 번식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를 중심한 것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 울타리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면 잘못된 내 존재를 어떻게 부정하겠습니까? 자기를 중심삼고 생각하는 것은 남을 희생시키고 내가 잘되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자기 밑에다가 두고 그들의 보호를 받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부정할 것이냐? 또한, 잘못된 생활권 내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것이냐? 그 다음의 문제는 먹고, 입고, 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간단한 것 같지만, 그것을 어떻게 부정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자기의 생활이 잘못되었다면 그릇된 것을 완전히 제거시켜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경지에 들어가면 심장의 고동소리가 기적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것입니다. 심장소리가 기적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정도의 경지까지 들어가야 화동의 중심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주체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29-133)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경계선을 넘으려면

그러면 주체적인 입장에 서기 위한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경계선을 어떻게 넘어설 것이냐? 존재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새로운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격을 형성해야 됩니다. 결국은 심정 문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말씀이 필요합니다. 말씀과 하나되어야 하나님과 같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과 하나되면 그 경계선에 연결될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기적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누구 때문에 하셨느냐?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중심이 되기 위해서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기쁘기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기쁘기 위해서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없이는 기쁨이 없습니다. 목적을 중심삼고 환경을 이 목적에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환경에는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이 법을 지키면서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말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사된 말이 아닙니까? 전부 다 타락권 내의 사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을 하나님이 싫다고 하시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화동의 중심체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절대자가 계신다면 그 절대자가 공인할 수 있는 자리, 그 절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봤습니까? 절대자 앞에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기에 태어나서 말할 수 있는 대상이 누구겠습니까? 부모입니다.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아빠 엄마입니다. 그 이상 뭐가 있었겠습니까? 내가 부르는 아빠 엄마는 옛날 인간이 본연의 자리에서 부르던 아빠 엄마입니다. 재미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아빠 엄마를 천번 만번 불러 보십시오. 아빠 엄마의 맛이 어떤가를 알아보십시오! 그 맛이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아빠 엄마를 부르는데 그 아빠 엄마가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부르면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체와 대상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대상이 있으면 완전한 주체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원칙이라면 아빠 엄마를 부르면 반드시 대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좋아하게 됩니다. 수없이 불러도 대답이 없는데 좋아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찾아가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가 아빠 엄마와 지내는 것과 같은 입장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합니다. 엄마의 품에서 젖을 먹고 무릎에서 똥을 싸면서 자라지만 부모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말이 참된 말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다음으로 참된 말이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는 형님이나 누나입니다. 이런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대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대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태어났기에 사랑으로 완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세계를 품고 사랑해야 합니다. 만물을 주관해야 합니다.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의 목적세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경계선을 넘어가는 길은 한 길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길은 한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6천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그 사랑은 역사적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에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부자간의 사랑, 형제간의 사랑, 동족에 대한 사랑은 차원은 다르지만 절대적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역사를 이끌어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타락한 세상을 버리고 본연의 세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더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전에 있던 것을 버리게 됩니다. 더 좋아하는 것을 갖지 않고 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생명을 버린다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9-137)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서 무엇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 동생을 버리고, 형을 버리고, 아버지 어머니를 버려야 할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버리는 데는 보다 귀한 것을 갖고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님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을 어떻게 가지고, 동생이나 어머니보다 더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들은 그러한 터전을 갖지 못하고 보다 못한 것을 취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은 사랑을 중심삼고 전체를 위할 수 있는 보다 완전한 세계를 위해 잘못된 환경을 박차고 나가야 합니다. 그 길이 더디더라도 생명을 걸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의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보다 귀한 것을 얻기 위해 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려면 자기를 부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부정하는 말은 맹목적으로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버렸으면, 그 나라를 버렸으면 그것보다도 위대한 그 무엇을 발견해야 됩니다. 가정을 버렸으면 그 이상 귀한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생명을 걸고 모든 것을 버렸으면 그 이상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을 발견했으면 후회 없이 가야 합니다. 당당코 가야 합니다.
귀한 가치를 발견한 경지에 들어가서 앞으로 나아가면 내일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직까지 주체의 입장에 서지 못했기 때문에 뜻에 절대복종하며 주체가 되는 길로 가야 합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 나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사탄이 이제까지 무엇을 했습니까?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주체가 되지 못하게 반대했습니다. 사탄인 자기를 주체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저 남들처럼 먹고 자고 그냥 그렇게 살면 되지, 얼마나 살려고 그러냐? 고작해야 70, 80년 사는 짧은 인생인데 뭘 그러냐? 하나님을 봤느냐? 이 세상에서 그냥 사는 것이 제일이다” 하는 식으로 반대해 나왔습니다.
현재의 입장을 버리고 더 나쁜 데로 가면, 그게 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더 좋은 데로 가면 선입니다. 버리기는 마찬가지지만 어디로 가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중심삼고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격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터전이 여러분에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29-139)

오시는 주님은 인간세계의 화동의 중심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내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좋게 되어 있습니다. 왜 좋으냐 하면 절대적인 가치의 자리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금광을 찾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돌산에서 금맥을 발견하여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가까이 가면 기쁜 것이요, 멀어지면 슬픈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서 역사적인 결실, 시대적인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왔다 갔던 선한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있는 양심적인 사람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사탄세계의 자기 아버지보다도 낫고 형보다도 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렇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받지 않고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일년을 가도 후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년을 가도 후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면 영원히 보장받을 수 있는 자신이 됩니다. 이러한 인격을 갖고 오시는 분이 주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인간세계의 화동의 중심체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기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랑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맨 처음엔 말씀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인격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심정의 주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통일교회의 말씀을 중심삼고 이루어진다면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그 말씀을 절대시해야 할 것입니다. (29-142)
그러면 여러분은 부부끼리 서로를 절대시했습니까? 말씀으로 인해 인연이 맺어졌기에 부부는 서로 절대시해야 합니다. 서로 심정을 중심삼고 하나되면,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 개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담 해와가 세우지 못한 기준을 세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서로 절대시하여 절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화동의 중심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끼리는 앞산을 바라보면서도 저 산이 생겨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물어 보고, 온 우주를 생각하면서도 이 우주가 생겨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를 물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 때문인 동시에 너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우주가 생겨난 목적을 성사시키는 것, 주체적인 목적을 중요시하는 것이 부부가 하나되는 길입니다. 부부는 마음을 중심삼고, 인격을 중심삼고, 사랑을 중심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같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시골 아가씨라도 장관하고 결혼하면 어떻게 됩니까? 같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시골 여자가 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장관 사모님이라고 하면서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부는 같이 갑니다. 부부에게 그대 사랑이 따로 있고 내 사랑이 따로 있습니까? 그대 사랑이자 내 사랑입니다. 네 사랑이자 내 사랑인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물어 볼 때, 요만큼 사랑한다면 기분이 좋습니까? 제일 많이 사랑한다고 해야 기분이 좋은 것입니다.
참사랑을 중심삼고 서로서로 권고해 주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절대적인 인격, 절대적인 심정, 절대적인 사랑이 어디서부터 벌어지느냐 하면 가정입니다. 가정의 부부를 중심삼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 부부가 자식을 낳아 사위기대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정이 절대적인 인격과 심정과 사랑으로 하나되면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모든 것의 화동의 중심체가 됩니다. 만민을 대표하고 만가정을 대표하는 화동의 중심체요, 종족적인 화동의 중심체요, 수많은 민족들의 화동의 중심체요, 수많은 국가의 화동의 중심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기준까지 복귀되면 세계는 자동적으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29-143)

평화의 천국이 이루어지려면

우리 통일교인들은 심정일치, 이념일치, 생활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절대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해 가려면 국가가 필요합니다. 국가와 결합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민족이 필요합니다. 또한, 민족이 필요하기 전에 종족이 필요합니다. 종족이 필요하기 전에 가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가정이 필요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합니까? 개인이 필요합니다.
결국은 내 개인이 문제입니다. 개인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품을 수 있는 나, 종족을 품을 수 있는 나, 민족과 국가 그리고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되지 않고는 세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권내에 있는 세계와 상관없는 내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절대적인 인격관을 모색하고 절대적인 가치관을 인류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이루어진다면 이 우주의 통일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은 국가와 세계를 이루려면 가정보다도 국가, 국가보다도 세계를 위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이 나라를 제물로 삼아야 합니다.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는 통일교회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국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광명의 세계로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세계로 돌진해야 합니다. 그런 세계로 돌진하는 데 있어서 선두에 서지 않고는 그 이상의 권한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선생님이 지금까지 작전을 펴는 데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화동의 중심체가 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고, 가정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고, 종족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고, 국가적으로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이 통일교회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는 종적인 중심국가로 결정될 때까지 그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는 절대적인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가정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게 되고, 선생님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나라도 절대적인 자리에 서게 됩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종적 관계가 횡적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종적인 사람이 국가에 나타나면 그 자리가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가 되고, 종족에 나타나면 그 자리가 모든 종족을 대표하는 자리가 되고, 가정에 나타나면 그 자리가 수많은 가정들을 대표하는 자리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중심이 나타나야 평화의 천국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화동의 중심체가 되겠습니까? 현실의 모든 것을 부정한 후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롭게 다시 긍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잘못된 현실을 수습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가지 않고는 통일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29-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