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심통일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4일)

훈독왕 | 20220408050102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4일

일심통일 (훈독본)  
날짜 : 1970. 1. 1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일심통일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4일)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마음이 필요

무슨 일이든지 처음의 출발이 잘 되어야 그 일이 잘 성사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일심통일(一心統一), 즉 ‘한 마음으로 하나의 통일을 이루자’ 하는 이것은 어떤 국가의 주권자가 있으면 그 주권자도 원하는 것이요, 어떤 단체가 있으면 그 단체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통일되지 않고는 그 제도를 통해 성사시키려고 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이 일심통일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루의 생활에서부터 일년의 노정, 더 나아가서는 일생의 노정과 전 역사노정을 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진행하는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지금 여러분 자신이 접하고 있는 생활환경이 일심(一心) 된 환경을 갖추고 있느냐?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하루에 마음의 방향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요, 가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목적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져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되어도 목적을 이루기 힘든데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성사시킨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보게 될 때, 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두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향을 갖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의 마음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해 나오기 때문에, 수많은 주의나 사상이 수습되어 가지고 하나의 목적하는 바의 세계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그 배후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요인과 하나의 일치점이 반드시 성사되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28-154)

행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정에서 목적을 이루려면 그 가정의 내외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느냐? 남편이면 남편 혹은 아내면 아내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세계로 갈 수 있는 마음과 일치되는 사람을 중심삼고 그것에 가까이 서면 설수록 그 가정은 세계의 역사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그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행운을 다짐하는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둘이 상극이나 상충되는 입장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28-156)

참의 성립

우리는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거도 하나요, 현재도 하나요, 미래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참이란 것은 어디에서 성립되느냐? 참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참이어야 하고, 현재에도 참이어야 하고, 미래에도 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이라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 참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참의 모체를 이룰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참의 상대는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곧 양심입니다. 


우리는 마음이 직행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직행은 두 점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선입니다. 그 두 점이 뭐냐 하면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나의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행복도 참의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도 참의 자리에서 진행합니다. 이 참 가운데서는 참된 자기가 필요합니다. 그 참된 자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수양이니 하는 것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참의 자리가 아직까지 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참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 인간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것인 동시에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행복은 경제적인 것만을 가지고서는 논의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를 한 주먹에 통일한 영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으려면, 권위를 갖추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세계적인 무대를 바라볼 때 그의 마음에 넘쳐나는 기쁨이 세계적인 이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의 요건은 외적인 입장에서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이룬 행복을 자기 이상의 행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대적 환경이 사방으로 갖추어지게 될 때, 그 행복은 영원히 보장될 수 있습니다. (28-158)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이유

그러한 자리는 심정, 즉 사랑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그 사랑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연결되어 미래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절대적인 중심은 누구냐?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을 바라기 때문에 절대적인 중심에 놓여질 수 있는 사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외적으로 아무리 못난 자식을 데리고 있더라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왜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냐? 그것은 부모가 과거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랑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인연과 승리의 자리를 우리가 인계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외적인 입장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속으로 파고들어 더 깊어질 수 있고, 더 하나될 수 있고, 그 이상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과거의 승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세상의 권위도 아니요, 물질도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무엇인지 모르게 현실에 있어서 흠뻑 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전반적인 세계의 정세를 볼 때, 전 세계에 나타난 결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심정적인 결함 때문입니다. 심정적인 결함이 사회에 미쳐지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결함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체들을 중심삼고 볼 때, 어떻게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던 그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자녀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가정의 행·불행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이 됩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이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불행이 조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할 때, 아들만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어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딸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은 가정입니다. 거기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자기의 3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인연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은 세상이 아무리 요동한다고 해도 요동하는 사회의 침범을 받지 않고 행복의 터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28-160)

심정철학의 필요성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심정철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많은 분야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은 그 전체적인 분야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돌아가야 하는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데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옛날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 사랑받던 그 시절로 돌아가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조상의 심정을 거쳐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냐? 참된 심정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이어받을 수 있고, 현재를 이어받을 수 있으며, 미래를 상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할 때, 거기는 주체적인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분들은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느냐? 하나님의 진짜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부정하면 부정했지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 이상의 사실로써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을 가졌느냐?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이상세계에 갈 수 있는 이념을 가진 종교는 어떤 종교냐? 그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고 현실을 심판할 수 있고, 현실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녔느냐? 그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체휼적인 내용을 가졌느냐? 이것을 갖지 않고는 현실화된 종교라도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지지 않습니다. 이 현실을 능가하고 이 현실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랑을 체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받은 것은 영원히 남아져야 됩니다. (28-164)

종교가 사랑을 찾는 이유

그러면 남아진 것은 무엇이냐? 역사는 변천하고 발전해 나왔지만 종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이런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여러분이 일치되는 데 있어서는 사랑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에게 있어서 부자지애(父子之愛)를 중심삼고 부모와 자식이 하나됨으로써 합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동포애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서로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동포애는 무엇이 모여서 되느냐? 가정애(家庭愛)입니다. 그 가정애는 무엇에서 연유하느냐? 자기애(自己愛)입니다. 자기 개체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는 이런 실감을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먼 동네 사람과 자기 세포가 연결될 수 있고 자기 촉감이 인연될 수 있는 동포애, 그 사랑은 부자의 사랑이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면 부모애(父母愛)의 원천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된 부모가 되고 사회가 될 때 정상적인 진로를 거쳐 가지고 원인과 목적이 이탈하지 않은 이상세계로 갈 것입니다. 


타락의 기원을 보게 될 때 무엇을 하려다가 타락했느냐? 불륜한 사랑을 하려다가 타락했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을 했으면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사랑을 잘못 받고 잘못 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타락은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했는데, 태어난 우리는 사랑을 받겠다고 합니다. 결과가 이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사랑을 받겠다고만 하는데, 인간조상인 아담 해와가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사랑을 잘못 받고 타락한 것을 볼 때 이것은 파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면 할수록 파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세상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을 받겠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본연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사랑을 잘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28-166)

부자관계의 사랑

자기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이 정상적이냐? 마음의 본향을 중심삼고 볼 때 이탈된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참된 사랑을 중심삼고 가정의 제도, 사회의 제도, 개인의 인격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모든 관습을 왜 무시하느냐? 그것들에는 참된 사랑의 기원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무시당해야 됩니다.


그러면 무시할 수 있는 그 주체는 무엇이냐? 사랑만이 무시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발굴지는 어디냐? 


그 하나님의 사랑은 부자관계의 사랑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전통으로 남기고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는 종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종적인 관계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의 사랑 이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이 종적인 관계에 있어서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피와 살을 따라가는 중심은 종적입니다. 자기로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올라가는 것은 종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쭉 내려오면 결국은 수천의 사람들이 하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여기에 발전이 있고 변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혁명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발전이나 변천이나 혁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주는 실체세계요, 절대자의 상대적인 세계입니다. 물질세계의 중심이 무엇이겠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표면화되고, 그 내정적인 실상이 부자의 관계에 그냥 그대로 표면화되는 가정이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는 그래야 됩니다. 동기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될 때 천태만상으로 돌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본받아서 형이 동생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일원화된 가정은 가정애가 꽃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사회애(社會愛)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民族愛)가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면 세계애(世界愛)가 핍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28-168)

신앙의 중심

보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완전히 점령하면 세계를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러면 자식에게 부모를 취하겠느냐, 세계를 취하겠느냐고 하면 부모를 취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세계와 자기의 아들딸 중에서 어느 쪽을 취하겠느냐고 할 때, 부모는 세계를 버리고 자기의 아들딸을 취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그것은 중심적인 흐름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해 주던 부모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이 민족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라를 주관할 수 있는 소망의 터가 넓어집니다. 그것이 원칙적인 지도방법입니다. 자기의 위치만 생각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전체의 생명을 투입시키는 길이 사랑의 길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만을 위해서 전체의 생명을 투입합니다. 피와 살, 뼈와 살을 전부 다 투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희망이 있고, 거기에 자기의 소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법칙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가지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전체를 다 투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얼마나 이 민족을 위하여 목을 놓아 통곡해 봤어요? 아무리 불의한 자식이라도 그가 법망에 걸렸다든가, 혹은 그 나라 법의 제재를 받는 운명에 처해졌을 때 그 부모가 “잘됐다, 이 자식아! 그래도 싸다”고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나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자식아! 왜 내 말을 안 들었느냐” 하며 꾸짖기는 해도 자식에게 사랑이 흘러가는 길이 막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일심의 세계를 중심삼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을 그리기 전에는 한 마음의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한 마음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주관을 못 합니다. 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만 사랑을 가지게 되고 심정이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가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돌아가야 됩니다. 부모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부의 사랑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한테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정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뼈와 살이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갔다가 우러나와야 됩니다. (28-170)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이 서는 자리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심각했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했던 예수님은 무조건 순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한 것은 하나님 앞에 몽땅 드리면 몽땅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한 나라를 찾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이 서는 자리가 어디냐? 비참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불행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염려하며 불행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붙안고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자리입니다. 거기가 부모가 같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를 떠나 농촌의 농민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찾고 싶어하시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할 때 “저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관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불행한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8-172)

부모의 심정으로 가는 길

일심은 어디서 얻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마음에서 얻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늘 편에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가운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무엇으로 증거되느냐? 불행한 자식을 더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염려를 알고 부모 대신 동생들을 염려할 수 있는 맏아들이라면, 그는 아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것을 가졌기 때문에 장자의 기업을 이어 나온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 있어서는 장자의 주권을 갖고야 주인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할 수 있습니다.

 

불행한 여건을 넘어 가지고 하나의 형태를 갖추게 될 때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가 주인이 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러한 부모의 심정을 중심삼고 나가면서 역사이래 섭리적으로 이루어야 할 소원이 이러한 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시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부모의 심정을 따라서 열 형제들 중 불행한 자식을 더 사랑하는 부모와 같은 입장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주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려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내 그 사랑 안 받고 지옥 가지”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뼈와 살,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내 살과 내 피’라고 한 것은 그런 입장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피와 살, 뼈와 살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의 길은 부모의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불행한 입장에 있는 형제가 있을 때, 그 형제를 염려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오래지 않아 중심자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나라와 민족 앞에 남아지기 위해서는 우리끼리만 사랑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이 민족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위한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보호하기 위한 훈련이요, 사랑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이상 이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되겠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마음의 바탕이 불탈 수 있는 심정적 주체를 갖고 이 민족을 어떻게 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일심통일의 이념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인연 가운데 태어난 형제들을 부모의 사랑 가운데 품길 수 있는 환경으로 일원화시켜 가지고 국민 앞에 베풀게 될 때, 이 민족은 우리에게 품겨 올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일심통일을 잊지 말고 다시 진격해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28-177)*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4일, 원문

일심통일  

날짜 : 1970. 1. 1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 마음이 필요

무슨 일이든지 처음의 출발이 잘 되어야 그 일이 잘 성사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종여일(始終如一)이라는 것은 언제나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입니다. 역사과정에서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보다 나은 성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만사를 통해서 보아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일심통일(一心統一), 즉 ‘한 마음으로 하나의 통일을 이루자’ 하는 이것은 어떤 국가의 주권자가 있으면 그 주권자도 원하는 것이요, 어떤 단체가 있으면 그 단체도 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어떤 제도를 실행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도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마음이 통일되지 않고는 그 제도를 통해 성사시키려고 하는 일이 성사되지 않습니다.
이 일심통일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루의 생활에서부터 일년의 노정, 더 나아가서는 일생의 노정과 전 역사노정을 두고 보더라도 반드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진행하는 과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개개인이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도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하나의 마음이 있었는데 저녁에 돌아올 때는 두 마음으로 변해 있다면, 하나의 목적을 성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지금 여러분 자신이 접하고 있는 생활환경이 일심(一心) 된 환경을 갖추고 있느냐?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하루에 마음의 방향이 여러 방향으로 달라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가는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요, 가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에 목적이 달라집니다. 마음이 달라져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이 하나되어도 목적을 이루기 힘든데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의 목적을 성사시킨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모든 일을 보게 볼 때, 한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의 마음과 낮의 마음 그리고 저녁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하고, 초년시대의 마음과 중년시대의 마음과 말년시대의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누구든지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고, 하나의 마음을 가지고 그 과정을 개척하고, 하나의 마음을 중심하고 결속된 결과를 추구하는 그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 사람의 바라는 목적도 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도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마음을 떠나서는 어떤 목적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두 마음을 가지고 창조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향을 갖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간들은 하나의 마음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향이 다르고, 각 나라의 정책이 다르고, 그 사회의 사조가 다르고, 오늘날 현세사회를 구성하는 사상이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되어 있지 못합니다. 천태만상의 배후를 중심삼고 그 인연을 통하여 결과된 현실적인 사회환경이나 제도도 천태만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동기로 말미암아 수많은 결과가 맺어졌기 때문에 반드시 역사는 그 결과의 일치점을 추구해야만 하고, 그래야 역사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이렇게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해 나오기 때문에, 수많은 주의나 사상이 수습되어 가지고 하나의 목적하는 바의 세계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하나의 목적의 세계로 귀결되는 것은 우연한 결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그 형태를 변형시킬 수 없고 그 방향을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하는 바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상적인 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세계를 추구하는 그 배후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요인과 하나의 일치점이 반드시 성사되지 않고는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즉, 일치된 그 기원으로 말미암아 과정을 거치고, 그 과정이 세계화될 수 있는 인연을 거쳐 가지고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28-154)

행복하기 위해서는

러면 오늘날 세계사조를 대별(大別)해 볼 때 어떤 세계관으로 되어 있느냐? 물질적 세계관과 정신적 세계관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물사관과 유심사관이 대립되어 있습니다. 이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이 대립된 입장에서 하나의 중심으로 갈 수 있겠느냐? 그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을 두고 볼 때도 몸과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현실적인 것을 가지고 분석하고 처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환경이나 내용으로 관측해 가지고는 하나의 결과를 내릴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세계인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가 구체적인 내용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그것이 물질적인 세계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고차적인 내용을 갖춘 내적인 원칙을 통해서는 물질세계를 분석할 수 있으되, 물질적인 것을 가지고는 그 차원이 미급하기 때문에 마음세계를 분석하거나 해결지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세계는 두 세계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두 세계로 나누어진 채로 영속할 수 있겠느냐? 만약 인류가 두 세계로 나누어진 상태로 영속하게 된다면 비참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귀결점을 갖지 않으면 하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이나 그 나라 혹은 그 세계에 있어서 행복이나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 상충적 요인을 남겨 놓고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도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상반된 입장을 고수하고서는 그 가정에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체적인 입장인 하나의 중심을 기준으로 하여 그 중심과 상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어서 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느냐? 주체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대상은 주체를 중심삼아야 하고 주체 앞에 자신을 연결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대상으로서의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체가 대상의 입장에 서 가지고 왔다갔다하면 하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한 가정에서 목적을 이루려면 그 가정의 내외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가 되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느냐? 남편이면 남편 혹은 아내면 아내를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세계로 갈 수 있는 마음과 일치되는 사람을 중심삼고 그것에 가까이 서면 설수록 그 가정은 세계의 역사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그 나라의 운명과 민족의 행운을 다짐하는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둘이 상극이나 상충되는 입장에서는 행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행복하다는 말을 할 때, 행복이라는 그 말은 승리한 과거를 가지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현실에서는 중심적인 자리를 결정하여 세계면 세계 앞에 영원히 남아질 수 있고, 만존재 혹은 만유의 존재세계 앞에 중심으로 세워지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는 데서 행복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만이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도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일치된 내용임을 보장받을 수 있는 데에서 비로소 행복의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28-156)

참의 성립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집안이 좋은 집안인 것 같다고 평합니다. 그것은 그가 과거를 보장받을 수 있는 입장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그 집안을 평할 수 있고, 또 그 사람을 보고 현재를 평할 수 있고, 그 사람을 보고 미래를 관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과거도 하나요, 현재도 하나요, 미래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이라는 것을 추구합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성현들은 역사과정에 왔다 갔던 그 누구보다도 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참이란 것은 어디에서 성립되느냐? 참이라는 것은 미래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에서만 성립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참이어야 하고, 현재에도 참이어야 하고, 미래에도 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이라는 것은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참된 사람은 과거에도 중심이요, 현재에도 중심이요, 또 미래에 있어서도 중심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참된 사람이 성립됩니다.
그러면 인간 세상에 참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가장 참에 가까운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상대적으로 나타난 스승이나 부모보다도 참의 모체를 이룰 수 있는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면 자신에게 제일 가까울 수 있는 참의 상대는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 곧 양심입니다. 우리는 곧잘 “그 사람 양심적이다. 그 사람 마음이 곧다” 합니다. ‘마음이 곧다’는 것은 무엇이냐? 역사는 직행합니다. 그러기에 과거도 곧고, 현재도 곧고, 미래도 곧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가 구부러졌기 때문에 현재도 구부러지고 미래에도 구부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인연들을 혁신해 버리고 마음이 직행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직행은 두 점을 중심삼고 연결되는 선입니다. 그 두 점이 뭐냐 하면 원인과 결과입니다. 그 원인은 무엇으로 되어 있느냐? 하나의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결과는 무엇이냐? 그것도 하나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마음 바탕을 통해서 하나의 목적을 그려 가는 과정의 현상적인 표시가 하나의 직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도 참의 자리에서 성립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도 참의 자리에서 진행합니다. 그러니 이 참이 문제입니다. 이 참 가운데서는 참된 자기가 필요합니다. 그 참된 자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수양이니 하는 것을 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제반 교육제도는 인간개조라는 문제를 중심삼고 짜여진 것이요, 그것을 중심삼고 지금까지 혁신운동을 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참의 자리가 아직까지 결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참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 인간이 요구하는 피상적인 목적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인 것인 동시에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돈이냐? 아닙니다. 행복은 경제적인 것만을 가지고서는 논의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계를 한 주먹에 통일한 영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행복을 노래할 수 있으려면, 권위를 갖추고 자기가 이루어 놓은 세계적인 무대를 바라볼 때 그의 마음에 넘쳐나는 기쁨이 세계적인 이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행복을 노래할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이 자기 혼자만의 기쁨이 아니라 반드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 그 목적의 성사를 자기 이상으로 좋아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될 때 비로소 행복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의 요건은 외적인 입장에서 추구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이룬 행복을 자기 이상의 행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대적 환경이 사방으로 갖추어지게 될 때, 그 행복은 영원히 보장될 수 있습니다. (28-158)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이유

그러한 자리는 무엇으로 성립되는 것이냐? 외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제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심정, 즉 사랑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그 사랑은 돌변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랑은 현재에 연결되어 미래까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절대적인 중심은 누구냐?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절대적인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을 바라기 때문에 절대적인 중심에 놓여질 수 있는 사랑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도 외적으로 아무리 못난 자식을 데리고 있더라도 부모는 그 자식을 사랑합니다. 좋고 나쁜 외적인 조건을 초월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무리 불구자의 부모라고 하더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부모의 사랑이 필요하냐? 그것은 부모가 과거의 인연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랑의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그 터전 위에 서야만 자기가 사랑의 아들이 되고 그 사랑에 접붙을 수 있는 입장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부모를 갖지 못했으면 불행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인연과 승리의 자리를 우리가 인계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흠뻑 받았다고 하는 것은 과거의 것을 그냥 그대로 지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식이 있다면, 그는 늙어 죽을 때까지 부모의 사랑과 운명을 같이합니다.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유물이 있다고 할 때, 그 유물은 늙어 죽도록 같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외적인 것은 스러져 버리고 다 없어지고 말더라도 부모로부터 인연된 사랑이라는 것은 영원합니다.
누구든지 외적인 입장이 비참하면 비참할수록 그 속으로 파고들어 더 깊어질 수 있고, 더 하나될 수 있고, 그 이상의 인연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과거의 승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세상의 권위도 아니요, 물질도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부모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무엇인지 모르게 현실에 있어서 흠뻑 피어날 수 있습니다. 현실에 있어서 만발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동시에 축복의 손길이 있게 됩니다. 반면에 무엇인지 모르게 내적인 결함, 즉 심정적 결함을 가지고 자랐고 위축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사방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충신 열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전반적인 세계의 정세를 볼 때, 전 세계에 나타난 결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느냐? 오늘날 이 문화세계를 창건한 사회조직에 결함이 있어서만도 아니요, 이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결함이 있어서만도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이냐? 심정적인 결함 때문입니다. 심정적인 결함이 사회에 미쳐지는 영향으로 말미암아 결함이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자체들을 중심삼고 볼 때, 어떻게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던 그 사랑과 일치될 수 있는 자녀가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가정의 행·불행을 결정지을 수 있는 절대적인 요인이 됩니다.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 자식이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지 않을 때는 불행이 조성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과 딸이 있다고 할 때, 아들만 부모의 심정과 일치되어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딸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 무엇이냐? 그것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세계의 축소체와 같습니다. 거기에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가정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이 공존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입장에 올라가게 되면, 자기가 아버지의 입장에 올라가서 아들딸을 갖게 됩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 그리고 자기의 3대가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 인연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은 세상이 아무리 요동한다고 해도 요동하는 사회의 침범을 받지 않고 행복의 터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28-160)

심정철학의 필요성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통일교회가 심정철학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많은 분야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은 그 전체적인 분야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인간들은 돌아가야 하는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현재의 입장이 부정확한 입장에 있기에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어디냐? 현재의 입장에서 볼 때 모색 가능한 길은 미래를 향해 가는 길보다도 과거로 돌아가는 길이 더 빠릅니다. 미래는 가면 갈수록 태산준령이 첩첩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늦어집니다.
그렇게 돌아가는 데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옛날의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기가 어렸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이 어머니 아버지 품에 안겨 사랑받던 그 시절로 돌아가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그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인류조상의 심정을 거쳐 하나님의 심정을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심정은 어떤 것이냐? 참된 심정입니다. 그것은 과거를 이어받을 수 있고, 현재를 이어받을 수 있으며, 미래를 상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할 때, 거기는 주체적인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분들은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위대한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살지 못한 사람은 역사적인 성현이 되지 못했습니다. 인간사회를 중심삼은 사람들은 그 시대에 있어서 위인전에 기록될 수 있을 정도의 위인은 되었을는지 모르지만 성현은 되지 못했습니다. 반드시 천지인(天地人)을 중심삼아 가지고 사랑을 논의할 수 있었던 사람만이 성현이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여러분은 “아, 그는 그래서 성현의 자리에 있구나” 하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시느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느냐? 하나님의 진짜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부정하면 부정했지 그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 이상의 사실로써 주장할 수 있는 내용을 가졌느냐?
하늘나라에 갈 수 있고 이상세계에 갈 수 있는 이념을 가진 종교는 어떤 종교냐? 그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고 현실을 심판할 수 있고, 현실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주체성을 지녔느냐? 그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은 체휼적인 내용을 가졌느냐? 이것을 갖지 않고는 현실화된 종교라도 영원히 이 세상에 남아지지 않습니다. 이 현실을 능가하고 이 현실을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랑을 체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받은 것은 영원히 남아져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그리워할 수 있는 존재, 즉 다음 세계에 있어서 흠모의 대상이 되고 오래 남아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남아질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질적, 외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주장해 나온 권력이 아닙니다. 오랜 역사과정에 수많은 권력자들이 있었지만 남아지지 못했습니다. (28-164)

종교가 사랑을 찾는 이유

그러면 남아진 것은 무엇이냐? 역사는 변천하고 발전해 나왔지만 종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예수님의 시대로 돌아가자” 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에서도 그 종교를 세운 도주면 도주, 창시자면 창시자의 의도와 다르게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종교의 제도를 믿지 말고 종교의 주창자를 믿자고 합니다. 이렇게 오랜 동안 역사의 모든 모순된 환경을 타개해 오면서 세계 인류의 마음의 방향이 되고 흠모의 대상으로서 지금까지 남아져 내려온 것이 유심사관을 중심삼은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에 기독교가 지금까지 남아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셨느냐? 이런 문제를 가르쳐 주는 것이 통일교회의 원리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과 여러분이 일치되는 데 있어서는 사랑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에게 있어서 부자지애(父子之愛)를 중심삼고 부모와 자식이 하나됨으로써 합동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동포애를 중심삼고 보더라도 서로가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자유당 때 이 박사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뭉치면 무엇으로 뭉치느냐? 동포애입니다. 그러면 동포애는 무엇이 모여서 되느냐? 가정애(家庭愛)입니다. 그 가정애는 무엇에서 연유하느냐? 자기애(自己愛)입니다. 자기 개체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는 이런 실감을 할 수 있는 입장에서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먼 동네 사람과 자기 세포가 연결될 수 있고 자기 촉감이 인연될 수 있는 동포애, 그 사랑은 부자의 사랑이 확대된 것입니다. 그러한 영역이 횡적으로 넓어지고, 그 동기로 말미암아 엮어질 수 있는 그러한 동포애를 주장하는 민족은 발전합니다.
그러면 부모애(父母愛)의 원천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밑바탕이 된 부모가 되고 사회가 될 때 정상적인 진로를 거쳐 가지고 원인과 목적이 이탈하지 않은 이상세계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을 가만히 보면, 누가 자기를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사랑을 받으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받으려고만 합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고가 생깁니다. 모두 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는 바람에 세계가 망해 가는 것입니다.
타락의 기원을 보게 될 때 무엇을 하려다가 타락했느냐? 불륜한 사랑을 하려다가 타락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을 받으려고 야단인데, 타락의 기원을 보게 되면 불륜한 사랑을 하려다가 타락했습니다. 반대인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랑을 했으면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사랑을 잘못 받고 잘못 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잘 받겠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연의 마음입니다. 결국, 결과가 달라진 것입니다.
타락은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했는데, 태어난 우리는 사랑을 받겠다고 합니다. 결과가 이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사랑을 받겠다고만 하는데, 인간조상인 아담 해와가 사랑하겠다고 하다가 사랑을 잘못 받고 타락한 것을 볼 때 이것은 파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면 할수록 파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세상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랑을 받겠다고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본연의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언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보았습니까?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본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한번 받아 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생애에 있어서 필연적인 요구가 아니겠어요? 그 사람이 천년을 살았다면 천년 동안 그 일을 잊어버리지 않고 살았을 것이요, 만년을 살았다면 만년 동안 그 마음을 갖고 살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해와가 사랑을 못 받은 본심이 연결되었기 때문에 모두 다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타락은 사랑을 잘못 받았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랑을 잘 받았다면, 인간이 왜 받고 싶어하겠습니까? 잘못 받은 인간이기 때문에 잘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되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28-166)

부자관계의 사랑

그러므로 자기가 사랑을 주고받고 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를 재분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기에는 새로운 인륜도덕이 필요합니다. 자기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이 정상적이냐? 마음의 본향을 중심삼고 볼 때 이탈된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참된 사랑을 중심삼고 가정의 제도, 사회의 제도, 개인의 인격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반적인 모든 관습을 왜 무시하느냐? 그것들에는 참된 사랑의 기원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무시당해야 됩니다.
그러면 무시할 수 있는 그 주체는 무엇이냐? 사랑만이 무시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발굴지는 어디냐? 형제지간에 서로 사랑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남녀가 사랑하는 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세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부자관계의 사랑에 의해서 세워집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전통으로 남기고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는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종적인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종적인 관계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의 사랑 이외에는 없다고 봅니다. 이 사랑에는 거리가 없습니다. 이 종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심이 있어야 됩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심이 둘이면, 세상에서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변증법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파탄되는 것입니다. 중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외의 것은 전부 하나의 중심을 보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흡수하든가, 흡수되든가 해야 됩니다. 그런 두 가지의 경우밖에 없습니다. 여기에서 존재의 필연적인 환경이 성립됩니다.
피와 살을 따라가는 중심은 종적입니다. 자기로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올라가는 것은 종적입니다. 이런 식으로 쭉 내려오면 결국은 수천의 사람들이 하나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여기에 발전이 있고 변천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을 혁명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발전이나 변천이나 혁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동물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직계로 연결되는 자리는 그 자리뿐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어 주면서 좋아하는 자리도 그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우주는 실체세계요, 절대자의 상대적인 세계입니다. 물질세계의 중심이 무엇이겠어요?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부모의 사랑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표면화되고, 그 내정적인 실상이 부자의 관계에 그냥 그대로 표면화되는 가정이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데 계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류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는 그래야 됩니다. 동기가 되기 위해서는 목적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게 될 때 천태만상으로 돌게 됩니다. 그러므로 형제간에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본받아서 형이 동생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일원화된 가정은 가정애가 꽃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사회애(社會愛)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애(民族愛)가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랑하면 세계애(世界愛)가 핍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것이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했습니다. 여기서 결론이 뭐냐? 독생자를 주셨으니 그와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종교를 중심삼고 볼 때, 기독교는 어디에 일치되어야 하느냐? 중심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28-168)

신앙의 중심

그러면 여러분은 어디에 일치되어야 하느냐? 중심이 누군지 모르지만 중심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여자들이건 남자들이건 모두 이 중심에 일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중심이라면 선생님과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독재자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독재자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 가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보고 싶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것은 부모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완전히 점령하면 세계를 완전히 점령합니다. 그러면 자식에게 부모를 취하겠느냐, 세계를 취하겠느냐고 하면 부모를 취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세계와 자기의 아들딸 중에서 어느 쪽을 취하겠느냐고 할 때, 부모는 세계를 버리고 자기의 아들딸을 취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그것은 중심적인 흐름이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사랑해 주던 부모의 그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이 민족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나라를 주관할 수 있는 소망의 터가 넓어집니다. 그것이 원칙적인 지도방법입니다. 자기의 위치만 생각하는 입장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상대를 위해서 전체의 생명을 투입시키는 길이 사랑의 길입니다. 부모는 자기 자식만을 위해서 전체의 생명을 투입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전체를 투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와 살, 뼈와 살을 전부 다 투입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에 행복이 있고, 거기에 희망이 있고, 거기에 자기의 소망이 깃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법칙이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가지고 종의 몸을 쓰고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전체를 다 투입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합니다. 민족이 수난길에 있으면 그 수난의 민족을 보고 부모가 자식이 수난을 당하는 것을 애절히 여기는 이상의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할진대, 이 민족은 그들로 말미암아 수습되는 것입니다. 세계의 인류를 중심삼고 그러한 마음으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무리가 있다면, 세계는 그들 앞에 수습됩니다.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철칙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이 관망한 결과가 틀림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을 무자비하게 내보냅니다. 사랑은 무자비한 길을 통해 갑니다. 생사의 경각(頃刻)을 초월해서 가는 것입니다. 죽음과 연속시켜 가지고, 죽음의 피와 살을 여기에 퍼부어 가지고 그 목적의 세계로 나가려는 단 하나의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 종교가 순교의 길을 걸어 나온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와 살로 이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논의할 때 어떠한 종교보다도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실공히 세계적인 종교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얼마나 이 민족을 위하여 목을 놓아 통곡해 봤어요? 아무리 불의한 자식이라도 그가 법망에 걸렸다든가, 혹은 그 나라 법의 제재를 받는 운명에 처해졌을 때 그 부모가 “잘됐다, 이 자식아! 그래도 싸다”고 하는 부모가 있습니까? “네가 그렇게 된 것은 나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자식아! 왜 내 말을 안 들었느냐” 하며 꾸짖기는 해도 자식에게 사랑이 흘러가는 길이 막히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일심의 세계를 중심삼고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을 그리기 전에는 한 마음의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한 마음의 목적을 이루지 않고는 통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통일을 이루지 않고는 주관을 못 합니다. 즉, 거느리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느리는 것은 중심을 결정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수단이나 방법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기가 배고플 때 어머니의 젖을 먹여야지 물을 먹여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만 사랑을 가지게 되고 심정이 연결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가 아무리 넓다고 하더라도 돌아가야 됩니다. 부모의 사랑뿐만 아니라 부부의 사랑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한테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정이라는 말이 필연적으로 출현했습니다. 이 심정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자기의 뼈와 살이 하나님의 사랑에 들어갔다가 우러나와야 됩니다. (28-170)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이 서는 자리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심각했던 것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했던 예수님은 무조건 순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한 것은 하나님 앞에 몽땅 드리면 몽땅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원대로 하는 것보다 아버지의 원대로 함으로 말미암아 승리의 자리에 설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을 갖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치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돌아갔기 때문에 죽음의 지옥세계를 탈피해 가지고 부활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부모가 가야 할 사랑의 길은 어떤 길이냐? 열 형제가 있다면 그 열 형제 가운데서 제일 불행한 자식과 동반할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불구자의 동생이 있으면 그 동생과 더불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딸은 형제들 중에서 상속자가 됩니다. 부모의 사랑과 같이 동반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잘먹고 잘사는 자리가 아닙니다. 부모 앞에 열 형제가 있다고 할 때, 그 열 형제들 가운데 제일 못난 형제와 더불어 있게 되면 부모의 계대를 잇는 아들딸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한 나라를 찾아올 때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이 서는 자리가 어디냐? 비참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사랑하고 불행한 자리에서도 나라를 염려하며 불행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그들을 붙안고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자리입니다. 거기가 부모가 같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를 떠나 농촌의 농민들을 중심삼아 가지고 활동하는 것입니다. 잘사는 사람과 사귀는 것보다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귀는 것을 기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더 찾고 싶어하시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전도할 때 “저 사람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전도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관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부모는 불행한 자식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사랑과 동반할 수 있는 심정의 자리는 어디냐? 불행한 자식에게 마음을 두고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부모 마음의 종지조상이기 때문에, 근본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을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 마음이 계실 수 있는 세계를 찾아가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곳을 흠모하고 찾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 선생님의 주장입니다.
일년, 십년, 백년, 혹은 천년을 계속하여 그것을 주장할 때 우리는 지금 죽더라도 한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천년 후에라도 그 세계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시간 관념으로 볼 때, 천년의 수가 이 세계에서는 먼 거리로 보이지만 영계는 시간을 초월하는 곳이기 때문에 먼 거리로 보이지 않습니다. 천년이라는 시간이 하늘세계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했던 것입니다. (28-172)

부모의 심정으로 가는 길

일심은 어디서 얻어야 되느냐? 하나님의 마음에서 얻어야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늘 편에 있느냐 없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 가운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무엇으로 증거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까운 자리가 어디냐? 막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불행한 자식을 더 염려하는 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한 부모의 염려를 알고 부모 대신 동생들을 염려할 수 있는 맏아들이라면, 그는 아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것을 가졌기 때문에 장자의 기업을 이어 나온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 있어서는 장자의 주권을 갖고야 주인이 될 수 있고 새로운 세계를 창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우리는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나님이 제일 염려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불행한 여건을 넘어 가지고 하나의 형태를 갖추게 될 때 통일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비로소 자기가 주인이 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통일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가 이러한 부모의 심정을 중심삼고 나가면서 역사이래 섭리적으로 이루어야 할 소원이 이러한 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통일시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부모의 심정을 따라서 열 형제들 중 불행한 자식을 더 사랑하는 부모와 같은 입장에 서야 됩니다.
일심은 어디에서 시작되느냐 하면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피와 살이 연결됩니다. 부모가 슬퍼하면 자식도 슬퍼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슬퍼하는데 “부모가 잘못했으니까 그렇지” 하는 자식은 자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자식이 잘못하여 벌받을 때 “그 놈의 자식, 그래도 싸다” 하는 부모는 부모의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의 마음이 앞서 가지고 사랑을 주려고 하지 않고 원한의 마음을 가지고 “싸지” 하는 것은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주시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주려고 하시는데, 사람들은 “내 그 사랑 안 받고 지옥 가지”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뼈와 살, 피와 살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떡과 포도주를 ‘내 살과 내 피’라고 한 것은 그런 입장에서 얘기한 것입니다. 피와 살, 뼈와 살이 연결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통일의 길은 부모의 마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불행한 입장에 있는 형제가 있을 때, 그 형제를 염려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오래지 않아 중심자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나라와 민족 앞에 남아지기 위해서는 우리끼리만 사랑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이상으로 이 민족을 사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기 위한 훈련과 같은 것입니다. 보호하기 위한 훈련이요, 사랑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이상 이 민족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바야흐로 민족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남아질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전을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실천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그러한 길을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순결한 것이며, 얼마나 열과 성을 가지고 한 것이냐에 따라서 하늘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늘과의 일치점을 가지게 될 때 자연히 세계의 중심이 되고, 그로 인해 이 땅에 하늘의 주권이 이룩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마음의 바탕이 불탈 수 있는 심정적 주체를 갖고 이 민족을 어떻게 대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나라의 위정자나 종교 지도자들보다도 그러한 마음을 갖고 생활에 접어들어 환경을 파헤치며 들어갈 수 있는 무리가 우리들 중에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심통일의 이념으로 말미암아 부모의 인연 가운데 태어난 형제들을 부모의 사랑 가운데 품길 수 있는 환경으로 일원화시켜 가지고 국민 앞에 베풀게 될 때, 이 민족은 우리에게 품겨 올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일심통일을 잊지 말고 다시 진격해 나갈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28-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