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2권 3일
인간의 가치와 천국의 기원 (훈독본)
날짜 : 1971. 11. 2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인간의 가치와 천국의 기원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3일)
하나님과 인간의 소원이 실현되는 자리
사람은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그 가치를 어떠한 곳에서 찾을 수 있느냐? 더욱이, 종교인들의 소원은 어디에 귀결되느냐 하면 천국에 들어가 천국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된 후에 머무르고자 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도 단계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회에도 상·중·하의 계층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에도 상·중·하가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도 여러 계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계층은 무엇으로 좌우되느냐? 그것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가치 있는 존재냐 하는 문제가 그 계층을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바라는 보다 가치 있는 인간의 기준과 하늘이 바라는 기준이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도 기뻐하고 하늘도 기뻐할 수 있는 양면의 기쁨이 하나의 기쁨으로 연결되면, 거기에서 비로소 행복의 터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혼자서 있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중심의 자리에 서 있으면, 그 중심과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분야가 넓고 큼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이 좌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다 많은 것을 갖고자 합니다. 더 귀한 것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보다 가치 있는 것과 관계를 맺으려고 일상생활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하냐? 보다 행복할 수 있는 환경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란 홀로 있는 고독한 자리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상대적인 관계를 맺는 데서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51-157)
인간이 추구하는 인격 기준
그러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 광대무변한 대우주를 창조하셨겠느냐? 하나님이 광대한 행복권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를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이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자리에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행복의 요인으로 만들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만들어진 피조물과 만드신 창조주가 서로 상극이 아니라 상응할 수 있는 입장에서 피조물이 가치 있게 될 때는 창조주도 가치 있게 되는 것이요, 피조물이 기뻐하고 행복하게 될 때는 창조주도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의 인격적인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가치의 기준이 무한과 연결된 대우주의 중심적인 입장에 선 자기 자체를 인정하는 기준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51-160)
사랑의 자리
인간 세상에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가 가치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는데, 그 가치적인 존재가 어디를 근거로 하고 있느냐 할 때 그런 문제는 그를 중심삼고, 또한 나를 중심삼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일 것이냐?
오늘날 우리가 좋다고 하는 명사를 여기에 적용시켜 보면 그것은 마음속 깊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선(善)이 있으면 그 선한 자리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속 깊은 자리는 어떤 곳이냐? 나 홀로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자리여야 됩니다. 그런 자리라면 그도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어야 되고, 나도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둘이 아닌 하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이냐 할 때, 그 자리는 사랑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마음속 깊이 사랑하느냐, 참된 마음속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다고 할 때 그냥 좋다고 하면 맛이 안 나지만 “내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사랑한다” 하면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경계선을 타파해 버리고 둘이 아닌 하나로 결속되어야 합니다. 그 결속점은 서로 가만히 마주보는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 화하여 안팎이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만일에 그런 자리가 벌어졌다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까 말한 대로 인간이 바라는 가치의 기준과 하늘이 바라는 기준, 천국이 출발할 수 있는 그 기준이 일치되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하나로 결속될 것이냐? 그곳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성경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게 되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을 중심삼고 한 말이냐?
우리가 ‘선(善)’ 하게 될 때 그 선이란 것도 상대적인 관념이지만, ‘사랑’ 하게 되면 벌써 그 감이 어때요? ‘사랑’ 하게 되면 나와 더불어 한꺼번에 부딪히는 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은 사랑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무슨 사랑이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랑에 표준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경계선을 타파하여 일치시켜 가지고 하나로 결속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 즉 원인이요, 동기요, 모체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51-161)
행복의 출발지
행복과 불행 등의 모든 것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잘생긴 남자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미남 미녀가 혼자 산다면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출발은 어디서부터냐? 행복이라는 것은 가치적 기준이 성립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세워지는 것이냐? 나부터예요? 가치의 기준은 나에서부터 세워질 수 없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부터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고 그로부터 완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 완전히 줄 수 있고 완전히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아무리 혼자 굴속에 갇힌 몸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죽음 길을 가면서라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그 시간에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고독하고 비참하고 생사가 엇갈리는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를 극복하고 그 모든 환경을 제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내가 이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할 때는 죽음의 길도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51-163)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기준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의 가치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이냐?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가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가졌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해요? 사랑할 때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지식이라든가 권력 같은 상대적인 세계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적인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외의 것이 보이는 자리는 참된 사랑의 자리가 아닙니다. 돈을 따라 결혼하고, 권력을 따라 결혼하고, 지식을 따라 결혼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지식이 사랑 앞에 서고, 권력이 사랑 앞에 서고, 돈이 사랑 앞에 서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관계는 사랑이 앞서야 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가치기준이 설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관념권 내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가치기준도 상대적인 관념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동시에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외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을 중심삼고 일치될 수 있는데, 그렇게 일치되는 데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점에서 일치됩니다. 부부면 부부간에 서로 사랑으로 결합해야 됩니다. 그 결합점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수직선에 딱 맞아 가지고 세 점이 딱 달라붙는 자리, 그런 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수직선과 평면적인 중심이 접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중심삼고 보는 가치기준일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느끼고, 그 외의 것은 원치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고 난 다음에, 그것을 이루고 난 다음에 보다 울타리가 되고 기쁠 수 있는 인연을 전체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상대적인 감동의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것이 필요할는지 모르지만 제일의 조건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찾아가는 것이요, 여자는 남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수직선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서로를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 점이 접하는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격의 기준이라는 것,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결합점에서 비로소 출발하는 것입니다. (51-166)
가정은 천국의 모국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어떻게 사랑해야 되느냐?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보면, 여자 앞에는 아버지가 있고 남편이 있고 오빠가 있습니다. 또, 남자 앞에는 어머니가 있고 아내가 있고 누이동생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사람들을 그들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겨나려면 부모가 있어야 됩니다. 부모만 있으면 되느냐? 아닙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있는 동시에 상대가 있어야 되고, 상대가 있는 동시에 아들딸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 앞에는 아버지, 남편, 오빠가 아니면 동생이 있다구요. 남자 앞에는 어머니가 있어야 되고, 아내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누이동생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태어날 때는 어떻게 태어나느냐? 아들과 딸로 태어나서 사랑의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아들과 딸에게 무슨 교육을 해야 되느냐? 지식교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육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가 하나되는 교육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이고, 또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어머니이고, 둘 다 좋아하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이고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다 이거예요. 그렇게 보게 되면 사위기대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의 기원이 어디냐?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모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해와가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아담 해와의 가치기준의 설정은 어디서부터 될 것이었느냐? 하나님 사랑의 교육에서부터였습니다. 아버지가 알았던 모든 가치의 기준을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숙할 때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고, 타락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51-171)
하나님의 사랑의 교육
그러면 아담 해와가 교육을 받으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었느냐? 부모와 자식간이었으니까 부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따라가야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가게 되면 어디까지나, 언제나 따라가야 되었다구요. 언제나 부모와 같이 있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보고 싶어하신다는 거예요. 절대적으로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생명의 모체요, 사랑의 모체요, 보호의 모체입니다. 생명을 보호해 주고, 키워 주고, 사랑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보호권이 성립 안 되면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지금 죽게 되었는데 사랑이 성립되겠어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보호권을 만들었는데,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되느냐 하면 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생명의 기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천사장의 보호를 받아 가지고 사랑의 교육을 받고 있던 도중에 있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그 교육을 다 받았더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 것이냐?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했으니, 해와도 이렇게 사랑했고 아담도 이렇게 사랑했으니까 너희 서로 서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둘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길이 어떤 길이었을 것이냐? 그들이 성숙해서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길 외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보다 자신들끼리 더 사랑해야 되었느냐? 오늘날에도 부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를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 집안이 잘되고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가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너희가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희들끼리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신랑 신부의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던 것, 즉 종적인 사랑이 횡적인 사랑으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서로 성숙해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마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체이셨는데 상대가 멋진 사랑의 실체로 화하면 그 주체는 보다 큰 사랑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실 수 있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더 충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사랑의 주체가 되시던 하나님은 나빠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둘이 하나된 자리를 상대로 해 가지고 기쁨을 느끼실 수 있었던 주체였기 때문에 그 상대가 보다 가치적인 사랑을 느끼게 될 때 하나님도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중심한 사랑의 제일 법도였습니다. (51-173)
재림주는 어떤 분으로 오셔야 하느냐
재림주는 어떤 분으로 오셔야 되느냐 하면 인간 세상에 있어서 최고의 아버지로 오셔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세상을 구할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세계의 이상으로서 천국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가져야 됩니다. 아버지, 신랑, 오빠로서의 3대 심정적 내용을 완전히 종횡으로 뿐만 아니라 45도로 펼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의 가치를 종합한 내용을 가지고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주님이 못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아버지의 참사랑을 못 받아 봤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편의 참사랑을 못 받아 봤습니다. 오빠의 참사랑을 못 받아 봤습니다. 이것을 누가 깨뜨렸느냐? 누가 그걸 깨뜨리는 동기가 되었느냐? 여자입니다. 해와가 그랬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역사과정에서 그것을 찾을 때까지 지지리 고생을 해온 것입니다. 여자들이 사랑의 탕감을 해야 되었습니다. (51-175)
목적을 위한 사랑이 좋아요, 사랑을 위한 사랑이 좋아요? 남자끼리는 목적을 중심삼고 사랑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남자와 여자, 즉 부부끼리는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냐? 목적을 중심삼은 사랑은 나중이고, 사랑을 중심삼은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했으니까 한 사랑밖에 몰라야 됩니다. 또, 남자는 지조를 가져야 한다고 했으니까 한 목적만을 향해 가야 됩니다. (51-179)
천국의 기원
그러면 오늘 제목이 ‘인간의 가치와 천국의 기원’인데, 그 기원이 어디냐? 가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상대, 오빠의 세 사랑권입니다.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유린하여 잃어버린 이 3대 사랑을 내 일대에 어떻게 실현시키느냐? 하나님같이 인류를 사랑하고, 죽어 간 예수님같이 인류를 사랑하고, 살아 생전의 예수님같이 인류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총각 때 예수님의 자리, 그 다음에는 영적인 신랑 신부인 예수님과 성신을 통해 영적인 부모의 자리에서 인류를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류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육을 중심삼은 상대기반입니다. 이것이 아담 해와와 하나님이 일치될 수 있었던 결정점, 천정과 인정이 상봉할 수 있었던 핵심적 결정점입니다. 이 결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끝날에 비로소 신랑 신부의 인연을 중심삼고 천정과 인정이 결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하늘이 찾고 있던 참된 부모, 참된 아버지, 참된 남편, 참된 자녀의 자리를 결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천국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과 같이 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람의 마음을 맞추기 위하여 3년 공생애노정을 갔으며 죽어서도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부활해 가지고 40일 동안 그것을 수습하고 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열두 사람을 규합시켜야 됩니다. 열두 사람의 마음을 맞출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되면 춘하추동 사계절을 중심삼은 열두 달을 못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녀의 입장에서 열두 사람의 마음을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했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네가 홀로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거예요. 마음이 그리워하는 천국을 못 가진 사람은 실체로 살 수 있는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열두 사람을 미칠 듯이 사랑해 보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의 열두 진주문을 마음대로 통과하지 못합니다. 열두 사람을 미칠 듯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모르고 사랑하며 산 사람은 어느 문 앞에 가도 막히지 않습니다. (51-193)
천국을 중심삼은 인격의 가치
천국의 기원은 어디냐? 먼저 내가 내 마음에 부모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되고, 형제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되고, 가정을 가졌으면 서로서로 최고로 사랑해야 됩니다. 생명의 기원도 그러한 사랑에서부터, 존재 가치의 기원도 그런 내재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격적인 가치는 상대를 중심삼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된 사람은 아내 앞에 하나님보다 더 훌륭한 분이라고 기억되어야 됩니다. 아내가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 남편을 통해서 하나님을 봤고, 세상의 순수한 사랑을 몰랐지만 남편을 통해서 세상의 순수한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편을 통해서 오빠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편을 통해서 형제의 사랑을 내가 알았다. 남편은 모든 사랑을 가르쳐 준 장본인이다” 할 수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남편도 그러한 어머니의 대표요, 신부의 대표요, 누나의 대표적인 심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체휼하면서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을 대하게 되면 내 할아버지나 할머니, 내 아버지나 어머니, 내 형님이나 누나, 혹은 내 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이 세계 도처에 보편화되면, 그러한 가정에서의 심정이 보편화될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그곳은 틀림없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은 그와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기준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천국의 기원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 그리고 자녀의 사랑을 보다 생명선에 접근시키고 보다 전체의 가치에 일치시킬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체휼하느냐 하는 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라는 심정과 내 사랑의 울부짖음이 세계에 파급된다는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모든 성인들의 생활감정과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고 하게 될 때 그 한 사람은 역사의 완성이요, 시대의 완성이요, 미래의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을 중심삼은 인격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51-199)*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3일, 원문
인간의 가치와 천국의 기원
날짜 : 1971. 11. 2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과 인간의 소원이 실현되는 자리
사람은 누구나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고 합니다. 누구나 이름 있는 사람이 되고, 권위 있는 사람이 되고, 무게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즉,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라는 그 가치를 어떠한 곳에서 찾을 수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종교인들의 소원은 어디에 귀결되느냐 하면 천국에 들어가 천국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소원입니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된 후에 머무르고자 하는 곳이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천국도 단계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회에도 상·중·하의 계층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에도 상·중·하가 있습니다. 바울이 삼층천을 보았다는 내용을 보나 성서에서 가르쳐 주는 해의 영화, 달의 영화, 또 별과 별의 영화도 각각 다르다는 것을 두고 보더라도 거기에 여러 계층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직적인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질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질서라는 것은 선후관계를 통하지 않고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선후관계, 상하관계, 좌우관계를 중심삼은 상·중·하의 계층이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 가운데도 여러 계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계층은 무엇으로 좌우되느냐? 그것은 가치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얼마만큼 가치 있는 존재냐 하는 문제가 그 계층을 결정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바라는 보다 가치 있는 인간의 기준과 하늘이 바라는 기준이 일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하늘이 바라는 가치의 기준과 인간이 바라는 가치의 기준이 다르다고 할 때는 하늘이 기뻐할 수 있는 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이 기뻐하고 우리 인간이 기뻐하려면 하늘이 바라는 것과 인간이 바라는 것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도 기뻐하고 하늘도 기뻐할 수 있는 양면의 기쁨이 하나의 기쁨으로 연결되면, 거기에서 비로소 행복의 터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혼자서 있을 수 없습니다. 제아무리 세상에 없는 권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권위를 가진 그 자리가 고독단신(孤獨單身)이 된 자리라고 할 때,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자기가 중심의 자리에 서 있으면, 그 중심과 더불어 관계되어 있는 분야가 넓고 큼에 따라서 행복의 기준이 좌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다 많은 것을 갖고자 합니다. 더 귀한 것을 갖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보다 가치 있는 것과 관계를 맺으려고 일상생활에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왜 그러하냐? 보다 행복할 수 있는 환경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이란 홀로 있는 고독한 자리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행복은 상대적인 관계를 맺는 데서만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대적인 관계는 상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응적인 관계여야 합니다. 서로가 화하고 서로가 위하는 상대적인 관계를 맺는 데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자기를 위하려는 자리에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서로 서로가 상대를 위하는 그 자리가 노골화되면 노골화될수록, 표면화되면 표면화될수록, 그것이 전체에 긍(亘)하면 긍할수록 그 행복의 자극이 전체로 전개됩니다. 만일 그 자리가 축소되게 될 때는 행복도 축소되는 한계선으로 제한되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51-157)
인간이 추구하는 인격 기준
그러면 하나님 자신을 두고 보면, 하나님은 어찌하여 이 광대무변한 대우주를 창조하셨겠느냐? 하나님이 광대무변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은 조그만 분야에서 행복을 찾고자 한 것이 아니라 보다 광대한 행복권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를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이 그 어느 누구도 영원히 침범할 수 없는 자리에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행복의 요인으로 만들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만들어진 피조물과 만드신 창조주가 서로 상극이 아니라 상응할 수 있는 입장에서 피조물이 가치 있게 될 때는 창조주도 가치 있게 되는 것이요, 피조물이 기뻐하고 행복하게 될 때는 창조주도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만 창조이상의 기쁨이 실현될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한 인연을 따라서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 자신들도 그러한 것을 바랍니다. 크다면 얼마나 큰 것을 바라느냐? 무한한 것을 바랍니다. 자기의 상대적인 인격을 추구하는 그 무엇이 있다고 할진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권내의 인격이 아닙니다. 몇 천년, 몇 만년이 되더라도 생각할 수 없는 그 이상의 큰 인격을 자기도 모르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남의 생각도 미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도 미치지 못하는 그 이상의 가치적인 인격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인격을 추구하는 인간 자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이 주체가 되었다면, 그러한 인간이 주체로서 바라는 상대물도 무한히 큰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계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 이상의 것까지도 바라는 마음이 우리 인간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추구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인격적인 기준을 마음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세계를 바라는 데 있어서도 그렇게 바란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간의 인격적인 가치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 것이냐? 그 가치의 기준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권 내에 나타난 것을 두고 “이것이다” 할 수 있느냐? 물론, “이것이다” 할 수 있더라도 어떤 권내에 싸여진 것을 이것이라고 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무한과 연결된 대우주의 중심적인 입장에 선 자기 자체를 인정하는 기준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다” 하더라도 어떤 권내가 아니라 전체와 연결된 것을 “이것이다”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다면, 그 인간이 바라는 인격의 기준도 무한과 통합니다. 어떠한 한계선 내가 아니라 그 한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기준까지 확장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인격의 기준이 그렇게 방대하게 확장되어 나간다면 그 중심이 될 수 있는 핵은 무엇이냐? 그것이 나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나 자체만을 가지고는 핵이 될 수 없습니다. 방대한 대우주의 권내에서 나 홀로 있어 가지고는 중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나와 더불어 상대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상대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뭐냐? 그것은 나와 같은 것이어야 됩니다. 나와 같은 것인데, 그것이 상대성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있는 것입니다. 남자도 그러한 가치의 기준을 바람과 동시에 여자도 그러한 가치의 기준을 바라야 됩니다. 그런 가치의 출발이라는 것은 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나와 더불어 관계를 맺으려면, 그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제일의 기준이 무엇이냐? 나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큰 인격적인 기준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 제일의 기준은 결국 자기와 같은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51-160)
사랑의 자리
인간 세상에는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습니다. 그 남자와 여자가 가치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는데, 그 가치적인 존재가 어디를 근거로 하고 있느냐 할 때 그런 문제는 그를 중심삼고, 또한 나를 중심삼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나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일 것이냐? 이것이 문제됩니다. 그도 그 자리에 두면 좋겠고, 나도 그 자리에 두면 좋겠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일 것이냐 하는 것을 추구하게 될 때, 그 자리는 그저 좋다고 하는 막연한 자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디일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좋다고 하는 명사를 여기에 적용시켜 보면 그것은 마음속 깊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선(善)이 있으면 그 선한 자리가 중심이 될 것입니다. 그 마음속 깊은 자리는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속 깊은 자리는 어떤 곳이냐? 나 홀로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도 같이 있을 수 있는 자리여야 됩니다. 그런 자리라면 그도 내 마음속에 들어와 있어야 되고, 나도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둘이 아닌 하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가 될 것이냐 할 때, 그 자리는 사랑의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마음속 깊이 사랑하느냐, 참된 마음속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좋다고 할 때 그냥 좋다고 하면 맛이 안 나지만 “내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사랑한다” 하면 맛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경계선을 타파해 버리고 둘이 아닌 하나로 결속되어야 합니다. 그 결속점은 서로 가만히 마주보는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 화하여 안팎이 하나인지 둘인지 알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만일에 그런 자리가 벌어졌다면,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아까 말한 대로 인간이 바라는 가치의 기준과 하늘이 바라는 기준, 천국이 출발할 수 있는 그 기준이 일치되는 자리입니다. 만일 이것이 어느 한 곳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기쁨의 세계가 못 됩니다. 거기에는 기뻐할 수 있는 기원과 동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하나로 결속될 것이냐? 그 결속점은 어디일 것이냐? 그곳은 그가 내 안, 내가 그 안에 있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성경 요한복음 14장 20절을 보게 되면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은 무엇을 중심삼고 한 말이냐?
우리가 ‘선(善)’ 하게 될 때 그 선이란 것도 상대적인 관념이지만, ‘사랑’ 하게 되면 벌써 그 감이 어때요? ‘사랑’ 하게 되면 나와 더불어 한꺼번에 부딪히는 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말은 사랑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사랑은 사랑인데 무슨 사랑이냐?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랑에 표준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경계선을 타파하여 일치시켜 가지고 하나로 결속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 즉 원인이요, 동기요, 모체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작다면 지극히 작은 것이요, 크다면 지극히 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잖아요?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이 눈만 한번 깜박 해도, 힐끗 흘겨만 봐도 그것이 천지가 뒤집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이 방긋 하고 한번 웃는 표정만 지어도 천지가 들락날락합니다. 예민하다면 그렇게 예민하고, 작다면 그렇게 작고, 크다면 그렇게 크고, 보인다면 보이고, 안 보인다면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점령되어 있습니다. 말 한마디도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주고 싶은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받고 싶은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속삭이고 싶은 것이요, 사랑하는 사람을 중심삼고 만사를 인연 맺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끊어지게 되면 이 우주 전체가 다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51-161)
행복의 출발지
행복과 불행 등의 모든 것들도 사랑하는 사람을 놓고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가 안 그런가, 우리 실제 생활에서 한번 예를 들어 보자구요.
자, 백만장자인 할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세상적으로 볼 때 다 갖춘 할아버지입니다. 아들딸도 있고, 돈도 있고, 권력도 있고 외적으로 볼 때 부러울 것 하나 없이 전부 다 갖추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감이 홀아비 영감이다 할 때, 그 할아버지를 보고 “아, 그 영감은 천하를 대표할 수 있는 행복한 영감님이다” 그래요? 그런가 생각해 보라구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세상에 아무리 잘생긴 남자 여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미남 미녀가 혼자 산다면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행복의 출발은 어디서부터냐? 이것은 지극히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가치적 기준이 성립되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세워지는 것이냐? 나부터예요? 나부터는 될 수 없습니다. 가치의 기준은 나에서부터 세워질 수 없습니다. 나와 너 사이에서부터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내가 그를 완전히 사랑할 수 있고 그로부터 완전히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리, 완전히 줄 수 있고 완전히 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아무리 혼자 굴속에 갇힌 몸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고 죽음 길을 가면서라도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그 시간에는 불행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무리 고독하고 비참하고 생사가 엇갈리는 자리에 있더라도 그 자리를 극복하고 그 모든 환경을 제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나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내가 이 길을 감으로 말미암아 그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할 때는 죽음의 길도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51-163)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의 기준
이렇게 보게 될 때, 인간의 가치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이냐? 지식이냐? 내가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가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가졌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해요? 사랑할 때는 그런 것 다 없어집니다. 사랑하는 데는 그런 것들이 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의 눈이 지식보다 나은 것이요, 그의 모습이 지식보다 낫습니다. 그 사람 자체가 무엇보다도 낫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됩니다.
그 자리는 지식이라든가 권력 같은 상대적인 세계에서 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적인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 외의 것이 보이는 자리는 참된 사랑의 자리가 아닙니다. 돈을 따라 결혼하고, 권력을 따라 결혼하고, 지식을 따라 결혼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닙니다. 지식이 사랑 앞에 서고, 권력이 사랑 앞에 서고, 돈이 사랑 앞에 서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관계는 사랑이 앞서야 됩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인간의 가치기준은 무엇일 것이냐?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가치기준이 설정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상대적인 관념권 내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가치기준도 상대적인 관념권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인 동시에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외곬입니다. 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직 한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을 중심삼고 일치될 수 있는데, 그렇게 일치되는 데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점에서 일치됩니다. 부부면 부부간에 서로 사랑으로 결합해야 됩니다. 그 결합점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수직선에 딱 맞아 가지고 세 점이 딱 달라붙는 자리, 그런 자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옛날에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섰더라면 어땠을 것이냐?
그랬더라면 하나님은 많은 힘이 필요치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새로운 힘을 내기 위한 작용이 필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 둘을 조금만 들면 전체가 들려 올라오고, 조금만 늦추면 전체가 내려가고, 넓어지면 올라가고, 좁아지면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기울어지면 전체가 틀어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수직선과 평면적인 중심이 접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중심삼고 보는 가치기준일 것입니다. 그런 가치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느끼고, 그 외의 것은 원치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갖고 난 다음에, 그것을 이루고 난 다음에 보다 울타리가 되고 기쁠 수 있는 인연을 전체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또 다른 상대적인 감동의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다른 것이 필요할는지 모르지만 제일의 조건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찾아가는 것이요, 여자는 남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를 중심삼고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해와를 찾아 나가고, 해와는 아담을 찾아 나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해와를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 해와를 중심삼고 찾아 나가게 되어 있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찾아 나가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해와가 아담을 찾아 나가는 데 있어서도 아담을 중심삼고 찾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찾아 나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수직선을 중심삼고 상대적인 입장에서 서로를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 점이 접하는 자리를 찾아가게 되어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격의 기준이라는 것, 가치의 기준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결합점에서 비로소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틀림없는 원칙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제일의 기준입니다. (51-166)
가정은 천국의 모국
그러면 사람을 사랑하는 데는 어떻게 사랑해야 되느냐? 방법을 알아요? 어떻게 사랑해야 돼요? 그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듯이,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가정을 보면, 여자 앞에는 아버지가 있고 남편이 있고 오빠가 있습니다. 또, 남자 앞에는 어머니가 있고 아내가 있고 누이동생이 있는 것입니다. 세계의 사람들을 그들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겨나려면 부모가 있어야 됩니다. 부모만 있으면 되느냐? 아닙니다. 상대가 있어야 합니다. 상대가 없으면 영영 마지막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닮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있는 동시에 상대가 있어야 되고, 상대가 있는 동시에 아들딸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자 앞에는 아버지, 남편, 오빠가 아니면 동생이 있다구요. 아담을 해와보다 먼저 지었으니 아담이 오빠가 되었지요? 남자 앞에는 누가 있어야 된다구요? 어머니가 있어야 되고, 아내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누이동생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태어날 때는 어떻게 태어나느냐?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태어날 때 신랑 각시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과 딸로 태어나서 사랑의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부모는 아들과 딸에게 무슨 교육을 해야 되느냐? 지식교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육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싸우는 것이 사랑의 교육이에요?
서로 서로가 하나되는 교육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이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이고, 또 어머니가 좋아하는 아버지이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어머니이고, 둘 다 좋아하는 동시에 내가 좋아하는 어머니 아버지이고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하는 나다 이거예요. 그렇게 보게 되면 사위기대지요?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사위기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님 앞에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의 기원이 어디냐?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모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해와가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아담 해와의 가치기준의 설정은 어디서부터 될 것이었느냐? 하나님 사랑의 교육에서부터였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교육을 받는 데는 어느 때까지 받게 되어 있었느냐? 아버지가 알았던 모든 가치의 기준을 헤아릴 수 있을 때까지, 다시 말하면 성숙할 때까지는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기록이 성서에 있어요? 사랑을 받았다는 얘기는 없고, 타락했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51-171)
하나님의 사랑의 교육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의 교육을 받아야 했던 아담 해와의 사랑의 교육 기준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없었다면, 하나님의 이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교육기준이 무엇이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천국 가고 싶지요? 그러나 천국 가서는 그런 교육을 못 받습니다. 이 땅에서 교육을 받고 살다가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그 교육을 안 하면 큰일납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교육을 받으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었느냐? 부모와 자식간이었으니까 부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따라가야 되었던 것입니다. 부모가 가게 되면 어디까지나, 언제나 따라가야 되었다구요. 부모가 산에 오르면 산으로 따라가고, 골짜기로 내려가면 골짜기로 따라가고, 굴속으로 들어가면 굴속으로 따라가야 되었습니다. 언제나 부모와 같이 있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아들과 떨어져야 한다면 떨어질 수 있겠어요?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보고 싶어하신다는 거예요. 절대적인 분이기에 좋아해도 절대적으로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뭐 하나님은 오겠으면 오고 말겠으면 마소! 거 어디 있겠으면 있고 말겠으면 말고…” 그러면 되겠어요?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이들의 생명의 모체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부모는 그 아이의 생명의 모체지요? 생명을 키워 준다구요. 생명의 모체요, 사랑의 모체요, 보호의 모체입니다. 생명을 보호해 주고, 키워 주고, 사랑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어디에서 나오느냐? 보호권이 성립 안 되면 생명이 위협을 받게 됩니다. 생명이 위협받으면 사랑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지금 죽게 되었는데 사랑이 성립되겠어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호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보호권을 만들었는데, 누구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되느냐 하면 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는 생명의 기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천사장의 보호를 받아 가지고 사랑의 교육을 받고 있던 도중에 있었습니다.
아담 해와가 그 교육을 다 받았더라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 것이냐?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했으니, 해와도 이렇게 사랑했고 아담도 이렇게 사랑했으니까 너희 서로 서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아담 해와가 둘이서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 것보다 더 사랑할 수 있었던 길이 어떤 길이었을 것이냐? 그들이 성숙해서 둘이 서로를 사랑하는 길 외에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보다 자신들끼리 더 사랑해야 되었느냐? 서로가 더 사랑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부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를 더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 집안이 잘되고 하나님의 주체적인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큰가를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너희가 나를 더 사랑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희들끼리 더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신랑 신부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못지않은 사랑입니다.
거기에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던 것, 즉 종적인 사랑이 횡적인 사랑으로 출발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종적인 사랑이 약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종은 주체요, 횡은 상대이기 때문에 이 상대적인 가치가 보다 가치 있게 되면 그 주체는 보다 큰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서로 성숙해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기들끼리 더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시기 마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주체이셨는데 상대가 멋진 사랑의 실체로 화하면 그 주체는 보다 큰 사랑의 가치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서로 사랑하기를 얼마나 바라셨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은 한 몸입니다. 이성성상(二性性相)의 주체로 계시기 때문에 생각으로는 “남성적 주체의 자리다. 여성적 대상이다” 해 가지고 사랑을 느끼실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남성과 여성이 분립된 입장에서는 자극적인 충격을 느끼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 더 충격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볼 때 사랑의 주체가 되시던 하나님은 나빠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둘이 하나된 자리를 상대로 해 가지고 기쁨을 느끼실 수 있었던 주체였기 때문에 그 상대가 보다 가치적인 사랑을 느끼게 될 때 하나님도 행복을 느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중심한 사랑의 제일 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러한 사랑의 교육을 받지 않고는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51-173)
재림주는 어떤 분으로 오셔야 하느냐
그러면 오늘날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받아야 했던 사랑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심정적 내연이 깃들어 있는 종교가 있느냐? 그런 종교가 있다면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말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오면 그런 무엇을 느낄 수 있는데 어떻게 느끼느냐? 여자는 최고의 아버지를 찾았다는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로 결정하면 좋겠다는 소망의 기준을 느낍니다. 그 다음에는 오빠 중에서 세계 제일의 오빠를 찾은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분으로 오시는 분이 누구냐? 재림주입니다. 여러분은 재림주가 좋아요, 초림주가 좋아요? 재림주라는 말은 초림주가 뜻을 성사해서 나온 거예요, 못 해서 나온 거예요? 못 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주는 어떤 분으로 오셔야 되느냐 하면 인간 세상에 있어서 최고의 아버지로 오셔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세상을 구할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세계의 이상으로서 천국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러한 가치의 내용을 가져야 됩니다. 아버지, 신랑, 오빠로서의 3대 심정적 내용을 완전히 종횡으로 뿐만 아니라 45도로 펼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의 가치를 종합한 내용을 가지고 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주님이 못 된다는 거예요.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아버지의 참사랑을 못 받아 봤습니다. 그 다음에는 남편의 참사랑을 못 받아 봤습니다. 오빠의 참사랑을 못 받아 봤습니다. 이것을 누가 깨뜨렸느냐? 누가 그걸 깨뜨리는 동기가 되었느냐? 여자입니다. 해와가 그랬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역사과정에서 그것을 찾을 때까지 지지리 고생을 해온 것입니다. 여자들이 눈물을 흘릴 때는 사랑을 짓밟혀서 흘려 온 것입니다. 사랑의 탕감을 해야 되었습니다. 여자의 눈물은 무엇이더냐 할 때, 사랑의 엇갈림길에서 흘러 나오는 것이 여자의 눈물이더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51-175)
오늘날 인류역사에 있어서 절개에 대해서 말하게 되면, 남자가 절개를 더 지켜야 됩니다. 그런데 여자는 절개를 지켜야 된다고 하고, 남자는 뭐예요? 남자도 지조가 있어야지요. 그건 뜻을 위한 절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목적을 위한 절개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자의 절개는 사랑을 위한 절개입니다.
그러면 목적을 위한 사랑이 좋아요, 사랑을 위한 사랑이 좋아요? 아까 남자끼리는 목적을 중심삼고 사랑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남자와 여자, 즉 부부끼리는 사랑을 중심삼고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이 먼저냐? 목적을 중심삼은 사랑은 나중이고, 사랑을 중심삼은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했으니까 한 사랑밖에 몰라야 됩니다. 또, 남자는 지조를 가져야 한다고 했으니까 한 목적만을 향해 가야 됩니다.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번 정했으면,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라고 했으니까 한번 한다고 했으면 망하더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도리입니다. (51-179)
천국의 기원
그러면 오늘 제목이 ‘인간의 가치와 천국의 기원’인데, 그 기원이 어디냐? 가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 상대, 오빠의 세 사랑권입니다.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유린하여 잃어버린 이 3대 사랑을 내 일대에 어떻게 실현시키느냐? 하나님같이 인류를 사랑하고, 죽어 간 예수님같이 인류를 사랑하고, 살아 생전의 예수님같이 인류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총각 때 예수님의 자리, 그 다음에는 영적인 신랑 신부인 예수님과 성신을 통해 영적인 부모의 자리에서 인류를 사랑해야 되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류를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육을 중심삼은 상대기반입니다. 이것이 아담 해와와 하나님이 일치될 수 있었던 결정점, 천정과 인정이 상봉할 수 있었던 핵심적 결정점입니다. 이 결점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끝날에 비로소 신랑 신부의 인연을 중심삼고 천정과 인정이 결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거기에서 하늘이 찾고 있던 참된 부모, 참된 아버지, 참된 남편, 참된 자녀의 자리를 결정해야 됩니다. 그것이 천국의 기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천국의 기원이라는 것은 인격적 기준인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 결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막연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예수님과 같이 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열두 사람의 마음을 맞추기 위하여 3년 공생애노정을 갔으며 죽어서도 갈 길을 가지 못하고 부활해 가지고 40일 동안 그것을 수습하고 갔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열두 사람을 규합시켜야 됩니다. 열두 사람의 마음을 맞출 수 있는 자격자가 못 되면 춘하추동 사계절을 중심삼은 열두 달을 못 넘어가는 것입니다. 사위기대를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해야 됩니다. 부모를 중심삼아 가지고 자녀의 입장에서 열두 사람의 마음을 맞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어디 있느냐? 천국은 딴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했지요? 천국이 네 마음에 있다고 했지요?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랑을 두고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한 말입니다. 네가 홀로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는 홀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준에서 천국은 네 마음에 있다고 한 거예요. 마음이 그리워하는 천국을 못 가진 사람은 실체로 살 수 있는 천국을 보지 못합니다.
천국은 여러분의 안에서부터입니다. 형제간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 아버지의 대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를 대하게 될 때 어머니의 다른 면을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한 선물로 알아야 되고, 남자를 보게 될 때도 아버지의 딴 면을 보여 주는 선물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행복의 기원이 깃들 수 있는 하나의 기틀이 됩니다.
그러니까 열두 사람을 미칠 듯이 사랑해 보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의 열두 진주문을 마음대로 통과하지 못합니다. 열두 사람을 미칠 듯이 어른인지 아이인지 모르고 사랑하며 산 사람은 어느 문 앞에 가도 막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쳐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도 미치는데, 하늘 사랑을 중심삼아 가지고는 더 미쳐야 됩니다. 밤이 낮과 같이 그립고 낮이 밤과 같이 그리울 수 있는 심정, 밤낮을 움직일 수 있는 정서적인 심정의 기준을 하나님을 중심삼고 어떻게 체득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51-193)
천국을 중심삼은 인격의 가치
천국의 기원은 어디냐? 먼저 내가 내 마음에 부모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되고, 형제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해야 되고, 가정을 가졌으면 서로서로 최고로 사랑해야 됩니다. 그리하여 꽃 중의 꽃이요, 향기 중에 제일의 방향(芳香)을 가진 향기로서 우주를 대표한 가치의 결실이 거기에서 맺어질 것을 그리워하면서 서로 서로가 하나로 결집되는 그 인연이 공고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완전한 씨가 발발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원도 그러한 사랑에서부터, 존재 가치의 기원도 그런 내재적인 사랑을 기반으로 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격적인 가치는 상대를 중심삼고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된 사람은 아내 앞에 하나님보다 더 훌륭한 분이라고 기억되어야 됩니다. 아내가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 남편을 통해서 하나님을 봤고, 세상의 순수한 사랑을 몰랐지만 남편을 통해서 세상의 순수한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편을 통해서 오빠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편을 통해서 형제의 사랑을 내가 알았다. 남편은 모든 사랑을 가르쳐 준 장본인이다” 할 수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합니다. 또, 남편도 그러한 어머니의 대표요, 신부의 대표요, 누나의 대표적인 심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사랑의 인연을 체휼하면서 살아가는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질식하겠다고 할 만큼 생활습관이 되어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을 대하게 되면 내 할아버지나 할머니, 내 아버지나 어머니, 내 형님이나 누나, 혹은 내 동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심정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이 세계 도처에 보편화되면, 그러한 가정에서의 심정이 보편화될 수 있는 환경이 벌어지는 곳이라면 그곳은 틀림없이 천국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반대를 받지 않습니다. 그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은 그와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디를 가도 외롭지 않은 것이요, 어디를 가도 망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기준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결정됩니다. 천국의 기원은 타락한 우리 인간 세상의 정서적인 모든 문제를 초월한 기준, 하나님을 중심삼고 부모의 사랑과 부부의 사랑, 그리고 자녀의 사랑을 보다 생명선에 접근시키고 보다 전체의 가치에 일치시킬 수 있는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체휼하느냐 하는 데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세계를 위해서라는 심정과 내 사랑의 울부짖음이 세계에 파급된다는 심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모든 성인들의 생활감정과 통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고 하게 될 때 그 한 사람은 역사의 완성이요, 시대의 완성이요, 미래의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천국을 중심삼은 인격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인생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51-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