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일, 원문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훈독본)
날짜 : 1969. 10. 19(일)
장소 : 한국 대구교회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일)
참된 것을 추구하는 인간
과거로부터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참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국가, 참된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추구해 왔고 현재에도 추구하고 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추구해 나오는 참된 중심이 어디에 가서 귀결될 것이냐?
참의 기준은 개인에게 귀결되어서 출발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가정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의 중심이 하나님한테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참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환경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종적인 하나님은 횡적인 환경과 인연을 맺지 않고는 참의 인연을 갖추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방을 갖추고 입체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권을 갖추어 중심을 결정지어야 하시는 것입니다. (26-109)
하나님이 아무리 영적인 중심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중심으로 결정되지 못하면 참으로서 완전히 존속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류 자체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존재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나라는 한 존재는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그저 왔다 가는 개인이 아니라, 이 세계의 중심, 미래의 새로운 개척자로서의 참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될 엄청나고도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은 참된 가치의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태복음 16:26) 한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자신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일치된 자리에서 전체의 중심으로 나타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 대신의 존재로 나타날 때 참된 모습, 의(義)의 모습, 선(善)의 모습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면 남자 한 사람이 참된 모습이 되었다면 남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참된 가정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됩니다. 또, 그 참된 가정은 가정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참된 사회로 발전시켜야 되고, 참된 사회는 참된 민족, 참된 민족은 참된 국가, 참된 국가는 참된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중심이 아니요, 나라가 중심이 아니요, 또한 어떠한 가정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26-110)
참된 생애의 노정을 가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자기의 중심이 동기가 되어 그것을 기준 삼고 좌(左) 하면 좌, 우(右) 하면 우, 전(前) 하면 전, 후(後) 하면 후, 정(靜)하면 정, 동(動)하면 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대에 의해서 움직일 것이 아니라 주체적 입장에서 상대를 움직이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수억만 년의 영원한 역사과정에서 70, 80년의 생애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은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중심삼고 볼 때 극히 짧은 기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전체의 소원을 좌우할 수 있고 전체의 소원하는 바의 중심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시기가 얼마나 귀중하고 중대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만을 중심삼고 자기의 일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일생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데, 원래 인간은 그렇게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백성이면 그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일생을 결정해야 됩니다. 또한, 자신이 세계 인류의 일원이 되어 있으면 세계의 운명과 더불어 자기 일생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인연을 가지고 나가는 입장에 있다고 할진대 천운을 중심삼고 자기 일생을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운은 반드시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 하늘이면 하늘의 운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가정의 운,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운,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세계의 운,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천운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참된 생애의 노정을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6-110)
일생의 가치
세상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런 행복은 그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한때의 인연과 인륜이 후대에는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세상적인 명예나 권위로 보아 세상의 만국과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복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낚아채는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천상세계에 가서는 그 지식이 한의 조건이 되며, 땅 위에서 어떠한 영광의 자리에 살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물어뜯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 장담하고 내세우던 모든 권위의식이라는 것도 저나라에 가서나 후대에 가서는 자기를 구속하는 요인으로 남아집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도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 때를 표방하고 지금까지 인간을 몰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때를 중심삼고 온 인류가 공히 맞이할 수 있는 메시아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애는 한 번 가면 그만입니다. 이 땅 위에서 영육을 갖추고 이런 때를 다시는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기간을 잘못 사는 날에는 영원히 파멸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이 기간을 잘 수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는 영원한 행복의 터전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나깨나 슬플 때나 기쁠 때를 막론하고, 이 한 때의 가치를 응시하면서 빛나는 생애로 만들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나의 기준을 중심삼고 참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복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6-117)
참된 생애를 남기려면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불행과 행복은 한 점의 교차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이 오기 전에 불행이 먼저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불행의 자리에 떨어진 인간이 행복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불행의 열매를 밟고 올라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중에서도 통일교회는 안팎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민족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세계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걸어왔습니다. 모든 인류가 비운이 깃들어 있다고 도망치던 그 자리도 거쳐왔습니다. 그런 일에서부터 행복의 때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놓쳐 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완전히 맞이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역사의 한 때와 더불어, 우주사적인 한 때와 더불어 승리를 찬양하게 될 때 비로소 우주적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된 생애를 남기기 위해서는 참된 하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얼마나 진실했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적 승리의 기준을 갖추어 생활의 기반과 생애의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과정에 나타났던 어떠한 전투보다도 더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의 문제를 중심삼은 싸움은 죽으면 다 해결되지만, 이것은 죽어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흡수하고 소화시켜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픔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인연으로 남길 수 있는 싸움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한 때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생애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애를 남기고 가야 되겠습니다. (26-126)
참된 하루는 순간부터 시작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찬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을 찬양해야 됩니다. 또한, 나의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일체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내 감정과 생활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인연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자기 생애를 저울질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참된 생활은 참된 하루로부터 시작되고, 참된 하루는 참된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간과 같은 하루, 참된 순간과 같은 일년, 참된 순간과 같은 일생을 어떻게 지속해 가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생애에 남겨진 과업입니다.
한번 왔다가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한 때에 있어서 무한한 가치의 생애노정을 어떻게 그려가고 어떻게 결산지을 것인가? 여러분이 출발하는 데는 평면상의 한 선을 중심삼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갈 때는 갈라져서 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좋은 곳을 향해 직선으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몸은 직선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 자리로 가고, 어떤 때는 저 자리로 가고, 또 어떤 때는 내려가고, 어떤 때는 올라가는 등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집니다. (26-128)
어떻게 선과 악이 결정되는가
그리하여 지상의 생을 마감할 때는 전체의 삶이 플러스냐, 마이너스냐를 재 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플러스가 얼마냐, 마이너스가 얼마냐에 따라서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플러스가 되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한마디의 말이 천지의 수평선을 중심삼고 볼 때 위에 올라간 말이냐, 내려간 말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웃는 표정까지도 전부 다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씩 웃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마이너스의 웃음이냐, 플러스의 웃음이냐로 구분됩니다.
여러분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것을 중심삼고 플러스의 눈이냐, 마이너스의 눈이냐를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귀도 그렇습니다. 플러스의 귀냐, 마이너스의 귀냐? 그리고 마음도 마찬가지로 플러스의 마음이냐, 마이너스의 마음이냐를 가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관의 자극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동작이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만 믿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것을 모르고 범하지는 않습니다. 알고서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범죄수사를 할 때 주범이니, 종범이니, 연루자니 하는 것은 고의적이냐, 피동적이냐에 따라서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불효인지 몰라서 불효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라를 팔아먹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고 행합니까?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쁜 일을 할 때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합니까? 모르고 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러니 알고 한 것을 누구한테 변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누구에게 원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6-129)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마이너스 기준의 자리에 내려가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은 아무리 노력해도 플러스의 기준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중간에서 끌려 올라갔다 끌려 내려갔다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중심삼고 볼 때, 태어날 때는 모르지만 여러분이 차후에 영계에 갈 때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얼마인가를 결산짓게 됩니다. 그러면 플러스가 더 많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플러스를 더 많이 남기느냐? 그러려면 일생 동안 정말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생애의 표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하고 나빴던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면을 중심삼고 생애를 연장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인륜도덕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좋았다고 하는 그 기준이 나만 좋아 가지고 되느냐? 나라가 좋아하고, 세계가 좋아하고, 하늘땅이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땅이 같이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이 우주간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공히 그 기준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개인이 성공했다고 해서 거기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의 성공을 위해서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세계의 성공을 위해 달려가면 달려가는 그곳까지 우리는 발전하고 남아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천주주의란 사상을 중심삼고 하늘땅을 통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이 운동이 앞으로 전 세계화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 과연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땅, 천지에 있어서 천(天)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地)가 생겨났으니 인연이 있으면 어느 때 그것이 맞설 것입니다. 해와 달이 맞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침과 밤이 맞설 수 있는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90도 각도로 맞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최고의 때입니다. 그때에 가서 지금까지 들인 정성을 어떻게 남기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밖에 없는 귀중한 일생을 중요시해야 되고, 잃어버린 여러분 자신을 찾기 위해서 하루의 생활을 가치 있게 보내고 순간의 싸움을 이겨 나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6-131)
뜻의 길을 가는 자세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뜻길을 갈 때도 여러 가지의 모양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만 훌륭한 줄 아느냐? 역사와 환경이 이렇게 되어 내가 지금은 비록 이런 자리에 있지만, 내 세계에 있어서는 누구와 겨루더라도 지지 않는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그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동정해서 좋은 자리에 세워 주셨으면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백성과 세계 만민을 위해 동정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상하와 전후의 관계를 언제든지 이해하고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좋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우리 신앙의 기준과 정성의 기준은 거기에 합당한 기준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뜻을 중심삼고 이를 악물고 다짐해야 됩니다. 죽음이 교차되는 십자가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피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자기의 모든 존재의식을 잊어버리고 결의를 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하고 최후의 3차 기도를 드릴 때 ‘아버지의 원’이라는 대목에 가서는 세상에 없는 힘과 온 정력을 다 기울여서 말씀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할 때는 순순히 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힘을 기울여 간구했던 것이고 세상에 없던 결의를 했던 것입니다. (26-136)
선생님이 믿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있는가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이 와도 결코 그것을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아무런 죄 없이 일곱 번씩이나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사연이 많은 선생님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성현들이 그런 자리에서 비관하며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한을 남기고 갔지만 선생님마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결의를 다짐하며 나왔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이 “선생님을 죽도록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선생님은 여러분을 몇 퍼센트 믿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선생님에게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믿어 주었다가 여러분이 돌아서게 되면 그만큼 십자가를 내가 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밖에 소개를 못 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개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몇 퍼센트 믿어야 되는가를 놓고 많은 고충이 있습니다.
과거에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백두산 천지까지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반석을 갈아 밭을 만들고 감자를 심어 천년 한을 품고라도 선생님을 모시며, 세상이 다 변해도 자기는 변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맹세하던 사람도 다 흘러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3)라고 맹세했지만, 닭 울기 전에 세 번씩 배반한 베드로였습니다. (26-139)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 참된 생애를 남기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는 길이 이 길입니다. 영계에 가면 자기의 일생이 그대로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떠했으며 자랄 때는 어떠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천상세계의 사람이나 앞으로 수많은 후손들도 부러워할 수 있고 눈물지으며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귀한 생애를 남기고 가는 사람은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그러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참된 생애를 남기겠다고 각오하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순간 한 순간 필사의 결의를 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찾아 나오신 이 한 때를 무의미하게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천년사를 두고도 바꿀 수 없고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이 세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찾았던 것을 다 놓치더라도 이것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생명이 없어지더라도 이것만은 남기고 가겠노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이며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26-141)
고난 길의 개척자가 되어 참된 생애를 남기자
참된 길은 기쁨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길에 있습니다. 참된 사람은 수난이라는 두 글자를 소화시키고 극복하는 것을 생애의 철학으로 삼고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계의 고난 길을 홀로 책임지고 밤이나 낮이나, 누가 보나 안 보나 자기의 행복을 거기에서 찾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계의 충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참된 생애의 노정을 남긴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도 이제부터 그런 길을 걸어가기를 부탁합니다. 반가이 맞아 주는 웃음 뒤에는 슬픔이 올 수 있지만, 서로 서로가 먼저 슬픔을 이겨낼 자세를 갖추고 손에 손을 잡고 내일의 희망의 나라와 세계를 위해 결의해 나갈 때 비로소 기쁨의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선생님이 합하여 결의를 하고 세계를 부여안고 나서게 될 때, 우리의 슬픔으로 인하여 세계에 웃음꽃이 필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펴고, 이러한 길을 책임지고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생애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이 길을 피하지 않고 직행해 가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26-143)*
천일국 훈독경 제12권 2일, 원문
참된 생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날짜 : 1969. 10. 19(일)
장소 : 한국 대구교회
참된 것을 추구하는 인간
과거로부터 현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참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참중심이 되시는 분을 흠모하면서 참된 자신이 되기를 바라며 나왔습니다.
참된 개인, 참된 가정, 참된 국가, 참된 세계는 오늘날의 우리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추구해 왔고 현재에도 추구하고 있고 미래에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추구해 나오는 참된 중심이 어디에 가서 귀결될 것이냐? 그것은 세계에서 귀결되는 것도 아니요, 어떠한 나라에서 귀결되는 것도 아니요, 혹은 어떠한 사회에서 귀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참의 기준은 개인에게 귀결되어서 출발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가정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참된 사회, 참된 국가, 참된 세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의 중심이 하나님한테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인간이 참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막연하게 이 세계의 인간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그 중심이 되어서 세계의 중심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참된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환경과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종적인 하나님은 횡적인 환경과 인연을 맺지 않고는 참의 인연을 갖추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방을 갖추고 입체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권을 갖추어 중심을 결정지어야 하시는 것입니다. (26-109)
하나님이 아무리 영적인 중심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중심으로 결정되지 못하면 참으로서 완전히 존속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나오시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류 자체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중심존재로 찾아 세우지 않으면 안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나라는 한 존재는 흘러가는 역사 가운데 그저 왔다 가는 개인이 아니라, 이 세계의 중심, 미래의 새로운 개척자로서의 참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될 엄청나고도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인은 참된 가치의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마태복음 16:26)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내 개체는 전체를 넘어선 가치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 자신을 중심삼고 참된 내용을 갖추지 않고는 참된 세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도 개체적인 인격의 가치를 그와 같이 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성경 말씀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 자신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일치된 자리에서 전체의 중심으로 나타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 대신의 존재로 나타날 때 참된 모습, 의(義)의 모습, 선(善)의 모습으로 결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자면 남자 한 사람이 참된 모습이 되었다면 남자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참된 가정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됩니다. 또, 그 참된 가정은 가정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반드시 참된 사회로 발전시켜야 되고, 참된 사회는 참된 민족, 참된 민족은 참된 국가, 참된 국가는 참된 세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중심이 아니요, 나라가 중심이 아니요, 또한 어떠한 가정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리 자신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예수님도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설 수 있는 인식권 내에 들어섰던 것이 아닙니다. 30여 년의 생애 기간을 통해서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자기의 주체적 인식을 상대적인 세계에 어떻게 반영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싸우다가 십자가에 돌아간 것입니다. (26-110)
참된 생애의 노정을 가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자기의 중심이 동기가 되어 그것을 기준 삼고 좌(左) 하면 좌, 우(右) 하면 우, 전(前) 하면 전, 후(後) 하면 후, 정(靜)하면 정, 동(動)하면 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식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대에 의해서 움직일 것이 아니라 주체적 입장에서 상대를 움직이지 않고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 가운데 나라고 하는 한 사람은 한 순간에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수억만 년의 영원한 역사과정에서 70, 80년의 생애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은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호흡을 해야 하는데, 마치 우리 일생은 수많은 호흡 중에 한 번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기간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영원을 중심삼고 볼 때 극히 짧은 기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짧은 기간에 전체의 소원을 좌우할 수 있고 전체의 소원하는 바의 중심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시기가 얼마나 귀중하고 중대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자기만을 중심삼고 자기의 일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일생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데, 원래 인간은 그렇게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백성이면 그 나라의 운명과 더불어 일생을 결정해야 됩니다. 또한, 자신이 세계 인류의 일원이 되어 있으면 세계의 운명과 더불어 자기 일생을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인연을 가지고 나가는 입장에 있다고 할진대 천운을 중심삼고 자기 일생을 결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개인의 운은 반드시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 하늘이면 하늘의 운과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가정의 운,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국가의 운,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세계의 운, 개인의 운을 필요로 하는 천운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참된 생애의 노정을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애라고 하는 것은 일생을 두고 말하는 것이며 생활은 하루 하루를 두고 말하는데, 우리 인간이 참된 생애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참된 하루 하루의 생활을 해야 됩니다. 만약 하루의 생활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것이 생애의 전체적인 실패의 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의 생활이 얼마나 긴장되는 생활이어야 하고, 얼마나 많은 판가리의 싸움을 해야 되는 생활인가를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26-110)
일생의 가치
세상 사람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하지만, 그런 행복은 그저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한때의 인연과 인륜이 후대에는 탄식의 조건으로 남아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록 세상적인 명예나 권위로 보아 세상의 만국과 만민 앞에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에게 복된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낚아채는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천상세계에 가서는 그 지식이 한의 조건이 되며, 땅 위에서 어떠한 영광의 자리에 살았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자기를 물어뜯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기 스스로 장담하고 내세우던 모든 권위의식이라는 것도 저나라에 가서나 후대에 가서는 자기를 구속하는 요인으로 남아집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좋은 자리에서 행복을 노래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행복의 요건들은 나를 궁극적으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조건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도의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한 때를 표방하고 지금까지 인간을 몰아 나오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한 때를 중심삼고 온 인류가 공히 맞이할 수 있는 메시아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과거 사람들이 바라던 한 때요, 현재 사람들이 바라는 한 때요, 미래 사람들이 바라는 때입니다. 인류 앞에 중심이 되는 그런 한 때를 하나님뿐만 아니라 천운과 더불어 어떻게 맞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날 우리 통일교회에서 맞이한 이 한 때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생애는 한 번 가면 그만입니다. 이 땅 위에서 영육을 갖추고 이런 때를 다시는 맞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 기간을 잘못 사는 날에는 영원히 파멸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이 기간을 잘 수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는 영원한 행복의 터전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나깨나 슬플 때나 기쁠 때를 막론하고, 이 한 때의 가치를 응시하면서 빛나는 생애로 만들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심적 기준의 선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 이상의 곳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일생을 거쳐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죽음에 이를 때까지 하나의 기준을 중심삼고 참된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복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온갖 정성을 다 들여야 합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 있어서는 보통 흘러가는 사람같이 정성을 들여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역사상에 왔다 갔던 모든 사람들이 총집중할 수 있도록 최고의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곧 운동경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여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있다고 할 때, 그가 달리면 그 나라의 국민이 그 선수와 더불어 달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 개인이 세계적인 승리를 거두어서 영광의 자리에 섰다고 할 때, 그 영광의 자리에 그 개인만이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국민 전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연을 갖고 그 나라의 국민이 그 선수와 호흡을 같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우리 개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26-117)
참된 생애를 남기려면
타락한 인류에게 있어서 불행과 행복은 한 점의 교차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행복이 오기 전에 불행이 먼저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불행의 자리에 떨어진 인간이 행복의 자리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불행의 열매를 밟고 올라가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중에서도 통일교회는 안팎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민족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세계의 십자가를 홀로 지고 걸어왔습니다. 모든 인류가 비운이 깃들어 있다고 도망치던 그 자리도 거쳐왔습니다. 그런 일에서부터 행복의 때가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때를 놓쳐 버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완전히 맞이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역사의 한 때와 더불어, 우주사적인 한 때와 더불어 승리를 찬양하게 될 때 비로소 우주적인 가치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된 생애를 남기기 위해서는 참된 하루를 결정지을 수 있는 순간 순간에 있어서 얼마나 진실했느냐 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생님을 볼 때, 선생님 같은 사람은 역사이래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역사 가운데 한 번밖에 찾아올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선생님은 맨 꼭대기에 서 있습니다. 꼭대기에서 이 한 때를 어떻게 잘 끌어올려서 꼭대기와 직선을 만들어 놓느냐 하는 것이 선생님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제입니다. 그것이 한쪽으로 조금만 기울어져도 넘어갑니다. 조금만 잘못하게 되면 천지가 뒤넘이치게 됩니다. 내가 결정해야 할 문제를 조금만 잘못하면 천지가 기울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치우치지 않는 역사적 승리의 기준을 갖추어 생활의 기반과 생애의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과정에 나타났던 어떠한 전투보다도 더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세계의 문제를 중심삼은 싸움은 죽으면 다 해결되지만, 이것은 죽어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의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교차로를 앞에 놓고 그런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그 순간은 참으로 엄숙한 순간입니다. 천년사의 원한과 역사적 비운이 모두 해결되고, 역사노정에 승리의 깃발이 세워지고, 광명한 새 아침이 밝아 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리 생명이 좌우되는 엄숙하고 심각한 순간이 다가와도 그것을 내일의 소망과 인류의 참된 생애를 대신하는 탕감조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흡수하고 소화시켜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슬픔으로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인연으로 남길 수 있는 싸움을 계속해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한 때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생애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생애를 남기고 가야 되겠습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볼 때 메워야 할 과거를 가지고, 미련을 가지고 과거에 살았던 땅을 흠모하게 되면 그 생애는 비참해지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에 대하여 미련을 남기지 않을 참된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 온갖 정성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의 골짜기가 있다면 최고로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고, 정성의 정상이 있다면 최정상에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을 자고 나서도 회개할 수 있고 밥을 먹고 나서도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26-126)
참된 하루는 순간부터 시작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찬양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수고하신 공을 찬양해야 됩니다. 또한, 나의 생활에 있어서 자기의 일체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내 감정과 생활 전체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인연으로 남아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자기 생애를 저울질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참된 생활은 참된 하루로부터 시작되고, 참된 하루는 참된 순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순간과 같은 하루, 참된 순간과 같은 일년, 참된 순간과 같은 일생을 어떻게 지속해 가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생애에 남겨진 과업입니다. 혹자는 자기 마음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 내 일생이오” 하면서 한 때밖에 없는 청춘시절을 헛되이 흘려 보내 버립니다. 그러한 생활은 흔해빠진 생활이며, 그런 사람은 사탄도 싫어합니다. 사탄도 싫어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실 까닭이 있습니까? 사탄도 부러워하고 하나님도 부러워하는 생활을 해야 남아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러한 순간적인 생애노정에 있어서 참된 생활을 어떻게 남길 것이냐? 하나님은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은 참된 가치와 이 세계를 놓고 저울질하여 보았을 때 어떤 것을 취하실 것이냐? 세계를 버리고, 세계를 완전히 잊고 그 사람을 완전히 취하시게 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찾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세계를 주시더라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럴 수 있는 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의 기치 아래 인류의 역사가 우리를 중심삼고 엮어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기가 맡은 분야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참된 일을 할 것이며, 전도면 전도에 있어서도 참된 전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번 왔다가 가면 다시 올 수 없는 한 때에 있어서 무한한 가치의 생애노정을 어떻게 그려가고 어떻게 결산지을 것인가? 여러분이 출발하는 데는 평면상의 한 선을 중심삼고 출발합니다. 그러나 갈 때는 갈라져서 간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좋은 곳을 향해 직선으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몸은 직선으로만 가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 자리로 가고, 어떤 때는 저 자리로 가고, 또 어떤 때는 내려가고, 어떤 때는 올라가는 등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집니다. (26-128)
어떻게 선과 악이 결정되는가
그리하여 지상의 생을 마감할 때는 전체의 삶이 플러스냐, 마이너스냐를 재 보게 됩니다. 그래 가지고 플러스가 얼마냐, 마이너스가 얼마냐에 따라서 천국행과 지옥행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때에 플러스가 되느냐?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 한마디의 말이 천지의 수평선을 중심삼고 볼 때 위에 올라간 말이냐, 내려간 말이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웃는 표정까지도 전부 다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씩 웃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마이너스의 웃음이냐, 플러스의 웃음이냐로 구분됩니다.
여러분의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는 것을 중심삼고 플러스의 눈이냐, 마이너스의 눈이냐를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귀도 그렇습니다. 플러스의 귀냐, 마이너스의 귀냐? 그리고 마음도 마찬가지로 플러스의 마음이냐, 마이너스의 마음이냐를 가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관의 자극을 중심삼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동작이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만 믿어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행한 사람에게도 부모가 있는데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한, “부모가 너 때문에 수고를 했느냐” 하고 물어 보면 수고를 안 했다고 대답하는 사람도 속으로는 부모가 자기 때문에 수고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다 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기를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런 불효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부모의 속을 상하게 하는 불효자라고 할지라도 그 부모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스스로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하는 것인지, 잘못하는 것인지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을 때도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것을 모르고 범하지는 않습니다. 알고서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지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범죄수사를 할 때 주범이니, 종범이니, 연루자니 하는 것은 고의적이냐, 피동적이냐에 따라서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불효인지 몰라서 불효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나라를 팔아먹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고 행합니까?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쁜 일을 할 때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합니까? 모르고 하는 것은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러니 알고 한 것을 누구한테 변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누구에게 원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노래를 듣는 데도 선악이 있습니다. 보고 듣고,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모든 것에 선악이 있다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난시에 모두가 나가 싸우고 있는데, 혼자 잠만 자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평상시에는 얼마든지 잠을 자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지만, 전시에 동지들이 나가 싸우는데 자기만 뒤떨어진 채 싸우지 않는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됩니다. 스스로 다 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일생의 노정을 가면서 행한 동작의 전체로 말미암아 선악이 결정됩니다. 말 한마디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지금 말하는 것도 얼마나 선한 말을 하고 얼마나 악한 말을 하는지 전부 판별됩니다. (26-129)
모두가 기뻐할 수 있는 삶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마이너스 기준의 자리에 내려가지 않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사탄은 아무리 노력해도 플러스의 기준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중간에서 끌려 올라갔다 끌려 내려갔다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중심삼고 볼 때, 태어날 때는 모르지만 여러분이 차후에 영계에 갈 때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얼마인가를 결산짓게 됩니다. 그러면 플러스가 더 많아야 할 텐데, 어떻게 하면 플러스를 더 많이 남기느냐? 그러려면 일생 동안 정말 좋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을 생애의 표본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지긋지긋하고 나빴던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은 면을 중심삼고 생애를 연장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인륜도덕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좋았다고 하는 그 기준이 나만 좋아 가지고 되느냐? 나라가 좋아하고, 세계가 좋아하고, 하늘땅이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땅이 같이 좋아할 수 있는 기준이 이 우주간에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공히 그 기준을 가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럴 수 있는 한 때가 여러분의 생애노정 가운데 어느 때일 것인가? 그때를 중심삼고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그때에 열만큼 노력했으면 그 다음에는 스물 혹은 백만큼 일을 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성공을 했다고 해서 쉬는 사람은 더 전진할 수 없습니다. 그 성공이 자기만을 중심삼은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의 나라면 나라가 성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자기가 되고 자기 후손들이 된다면 그 민족은 그 나라의 운과 더불어 남아집니다.
오늘날 통일교인들은 개인이 성공했다고 해서 거기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이 민족의 성공을 위해서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세계의 성공을 위해 달려가면 달려가는 그곳까지 우리는 발전하고 남아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천주주의란 사상을 중심삼고 하늘땅을 통일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이 운동이 앞으로 전 세계화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어 가는 과정에서 과연 하늘땅 앞에 자랑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늘땅, 천지에 있어서 천(天)이 먼저 생기고 그 다음에 지(地)가 생겨났으니 인연이 있으면 어느 때 그것이 맞설 것입니다. 해와 달이 맞설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침과 밤이 맞설 수 있는 때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90도 각도로 맞설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가 최고의 때입니다. 그때에 가서 지금까지 들인 정성을 어떻게 남기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밖에 없는 귀중한 일생을 중요시해야 되고, 잃어버린 여러분 자신을 찾기 위해서 하루의 생활을 가치 있게 보내고 순간의 싸움을 이겨 나가야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확실히 알아야 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26-131)
뜻의 길을 가는 자세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뜻길을 갈 때도 여러 가지의 모양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만 훌륭한 줄 아느냐? 역사와 환경이 이렇게 되어 내가 지금은 비록 이런 자리에 있지만, 내 세계에 있어서는 누구와 겨루더라도 지지 않는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그 무엇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볼 때는 선생님의 자리가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선생님의 자리는 위험한 자리입니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고 살 수 없는 자리입니다. 잠을 조금만 깊이 자도 일어나서는 회개해야 됩니다. 밥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도 기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됩니다. 좋은 자리에 있다고 지나치게 자기만이 좋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정해서 좋은 자리에 세워 주셨으면 아래를 내려다보고 그러한 자리에 있지 못한 백성과 세계 만민을 위해 동정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상하와 전후의 관계를 언제든지 이해하고 나아가야 됩니다. 그러므로 말하고 행동하는 데 있어서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히 좋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오늘날 우리 신앙의 기준과 정성의 기준은 거기에 합당한 기준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만약 대학 이상의 기준을 가지고도 자기는 유치원 기준밖에 못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일 무서운 사람입니다. 높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고, 낮고자 하는 자는 높아집니다. 천하에 공을 다 세우고도 계속해서 공을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세우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가 수고해 놓고도 자기의 수고라고 할까봐 그것을 감추는 사람입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애국자는 잘먹고 호령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단의 자리에서 누더기 옷을 입고 소금국에 보리밥을 먹으며 가난하게 살면서도, 그 보리밥 상을 지나가는 외국 사람들이 볼까봐 두려워하고, 나라의 위신을 생각하며 자기 모습이 드러날까봐 몰래 숨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애국자라는 것입니다.
자기 국가의 체면과 위신은 생각지 않고 시기 질투하고 체통 없이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자기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만 국가의 위신과 체면을 세우고자 우리나라에는 나 같은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고, 자기 나라를 좀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드러내려고 애쓰는 사람이 애국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뜻을 중심삼고 이를 악물고 다짐해야 됩니다. 죽음이 교차되는 십자가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피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자기의 모든 존재의식을 잊어버리고 결의를 다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가복음 14:36) 하고 최후의 3차 기도를 드릴 때 ‘아버지의 원’이라는 대목에 가서는 세상에 없는 힘과 온 정력을 다 기울여서 말씀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할 때는 순순히 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땀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없던 힘을 기울여 간구했던 것이고 세상에 없던 결의를 했던 것입니다. (26-136)
선생님이 믿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 있는가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시련이 와도 결코 그것을 원망해 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아무런 죄 없이 일곱 번씩이나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습니다. 사연이 많은 선생님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피하려고 하거나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수많은 성현들이 그런 자리에서 비관하며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한을 남기고 갔지만 선생님마저 그럴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결의를 다짐하며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를 믿다가 떨어져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간 만물상이 모였다고 할 만큼 여러 유형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끔 평양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를 쭉 돌이켜보면 과거에 대했던 사람들의 여러 형(型)이 오늘날 여기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수많은 인간상들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선생님을 따르다가 떨어졌던 사람들 중에는 현재 여러분이 결의하고 뛰는 것보다 몇 십배 강한 결의를 했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여러분이 “선생님을 죽도록 따라가겠습니다” 할 때, 선생님은 여러분을 몇 퍼센트 믿어야 되겠습니까? 그것이 선생님에게는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믿어 주었다가 여러분이 돌아서게 되면 그만큼 십자가를 내가 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밖에 소개를 못 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소개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몇 퍼센트 믿어야 되는가를 놓고 많은 고충이 있습니다.
과거에 선생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백두산 천지까지라도 선생님을 모시고 올라가서 그곳에 있는 반석을 갈아 밭을 만들고 감자를 심어 천년 한을 품고라도 선생님을 모시며, 세상이 다 변해도 자기는 변하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맹세하던 사람도 다 흘러가 버렸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 26:33)라고 맹세했지만, 닭 울기 전에 세 번씩 배반한 베드로였습니다. (26-139)
그렇기 때문에 참된 생활, 참된 생애를 남기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는 길이 이 길입니다. 영계에 가면 자기의 일생이 그대로 밝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떠했으며 자랄 때는 어떠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천상세계의 사람이나 앞으로 수많은 후손들도 부러워할 수 있고 눈물지으며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귀한 생애를 남기고 가는 사람은 위대한 승리자입니다. 그러한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참된 생애를 남기겠다고 각오하고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순간 한 순간 필사의 결의를 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찾아 나오신 이 한 때를 무의미하게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천년사를 두고도 바꿀 수 없고 억천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이 세상을 모두 잃어버리고, 찾았던 것을 다 놓치더라도 이것만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생명이 없어지더라도 이것만은 남기고 가겠노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 들이며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서로 생사를 결해 가지고 네가 죽느냐, 내가 죽느냐 하는 지경에서도 서로 내가 죽겠다고 나설 수 있는 자리, 즉 생명을 엇바꿀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 길을 동반하여 어려움을 같이 겪은 사람들은 기쁠 때는 인연을 맺을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려울 때 맺은 인연과 기쁠 때 맺은 인연은 그 맛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통일교회도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가까운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개인, 가정, 우리나라와 세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계시니까 나 자신도 가정, 사회, 국가, 세계를 위해서 어려움을 당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저밖에 없습니다. 제가 이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으니 하나님한테 힘든 것이 있을 때는 저를 불러 주십시오. 밤이고 낮이고 서슴지 말고 불러 주십시오!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해야 됩니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어느 때건 부르시기만 하면 혼자만이라도 “예” 하며 기꺼이 나설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통일교회는 누구와 어려움을 당하자는 것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이 나라와 더불어 어려움을 당하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선생님의 주의이자 하나님의 주의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두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내가 아니라도 할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슬쩍 남에게 미루고 기회만 보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26-141)
고난 길의 개척자가 되어 참된 생애를 남기자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미욱해야 됩니다. 충신들은 어떻게 보면 미욱한 사람들입니다. 조금은 미련해 보이고 곰 같은 성격이 있습니다. 곰이나 멧돼지는 총에 맞아서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을 입으로 잘라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런 미욱한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충신 열사는 미욱해야 됩니다. 조금은 어리석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같은 사람도 나이 삼십도 못 된 젊은 나이에 무엇 때문에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했습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얼마나 처량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잘난 충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난 충신은 기회주의 충신입니다. 맹목적인 충신은 무지하고 미욱하며 곰 사촌 같은 사람입니다.
통일교회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쓰레기로 사라진다고 해도 좋다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이 골짜기를 메우는 매축공사를 하실 때 맨 첫 삽에 부어지는 흙이 되게 해 달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맨 밑창에 묻힐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계에서 제일 고생을 많이 해야 하는 단체는 어느 단체가 되어야 하느냐? 고생의 왕이 되지 않고서는 기쁨의 통일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외로운 십자가를 기쁜 자리에서 겸손하게 지려는 자가 충실한 사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국가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국가의 어려움을 책임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세계의 어려움을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냐? 하나님의 어려움을 책임지겠다는 사람인 것입니다.
참된 길은 기쁨의 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난의 길에 있습니다. 참된 사람은 수난이라는 두 글자를 소화시키고 극복하는 것을 생애의 철학으로 삼고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계의 고난 길을 홀로 책임지고 밤이나 낮이나, 누가 보나 안 보나 자기의 행복을 거기에서 찾겠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계의 충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참된 생애의 노정을 남긴다는 것을 알고, 여러분도 이제부터 그런 길을 걸어가기를 부탁합니다. 반가이 맞아 주는 웃음 뒤에는 슬픔이 올 수 있지만, 서로 서로가 먼저 슬픔을 이겨낼 자세를 갖추고 손에 손을 잡고 내일의 희망의 나라와 세계를 위해 결의해 나갈 때 비로소 기쁨의 세계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선생님이 합하여 결의를 하고 세계를 부여안고 나서게 될 때, 우리의 슬픔으로 인하여 세계에 웃음꽃이 필 것입니다. 이러한 길을 펴고, 이러한 길을 책임지고 나가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생애를 남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이 길을 피하지 않고 직행해 가는 여러분이 되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26-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