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 27 일) u

훈독왕 | 20190308213550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 27 일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훈독본) 
 날짜 : 1986. 11. 23(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된 인간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진정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인류는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찾아 나오는 역사노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중심인 동시에 사랑의 중심입니다. 물론, 생명도 사랑의 중심이요, 사랑도 생명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행복한 인류가 되게끔 하지 못 하였느냐? 얼핏,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떤 절대적인 신이 있다면 어찌하여 전세계의 인류가 역사를 통해 어느 때를 막론하고 수난길을 가야 되며 알지 못하는 길을 방황하며 더듬어 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에 처하였느냐?” 할 것입니다. 이런 자체를 보게 될 때 사랑의 신이 없다는 결론을 지을 것입니다. 그렇게 속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에서부터 과정을 거쳐서 끝까지 같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같이 처하는 것이 일시적이 아니요, 시간을 초월해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영원히 같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 인류를 지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원칙 앞에 위배되는 결과에 처하게 된 인류는 어찌된 연고냐?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없는 곡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곡절이 없었다고 부정하게 될 때는 신은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인간 타락의 곡절


우리 인간은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지만, 어떤 한 때에 하나님과 최초의 우리 인류시조 사이에 어떠한 곡절이 있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곡절이 없었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오늘날의 인류가 그분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류가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게 된 입장이기 때문에 인류는 도탄 중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며, 반드시 어떠한 곡절이 연유가 되어서 그러한 결과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계에서는 인간이 타락이라는 곡절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신과 인간이 아니 갈라질래야 아니 갈라질 수 없었던 그 곡절이 무엇이었겠느냐? 성경에는 비사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악과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선악과에 얼마나 위대한 내용이 있었기에 신과 인간이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공존해야 할 본연의 이상을 깨뜨려 버렸는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있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없게 된 것은, 같이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상실된 결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 타락의 곡절은 사랑의 곡절임에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의 안식처, 하나님과 자녀가 안식할 수 있는 그곳이 어떤 곳이냐? 그곳은 그 곡절의 한계선을 넘어선 세계, 그 곡절의 인연을 벗어난 세계, 그 곡절의 인연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본래는 사랑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떠한 곡절로 인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곡절이 있게 된 어떤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정상적인 입장에서 급변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비정상의 환경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도 그런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겠어요? 하나님이 부모이고 인간이 자식의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인간이 찾아가서 “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말아요. 이제는 안 그럴게요.” 하면서 타협할 수 있는 길이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타협할 수 없는 조건에 걸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해와의 타락은 뱀이 꼬였기 때문이라고 비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제3자의 출현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자의 출현, 제3의 어떠한 내용이 태초에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에 의해서 타락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49-214)
  
 하나님과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만나려고 했는가
  
그러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본래는 어디서부터 만나기 시작했어야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근본에서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는 출발에서부터 만나 끝까지 가면서 사랑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만나는 데에도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는 조건 밑에서 시작해야 됩니다. 


자식이 떨어져 나갔더라도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식이 사랑을 안고 가는 한 하나님은 그 자식이 가는 곳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라는 내용을 두고 어떻게 만나며, 어떻게 사랑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느냐? 본질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현재의 인간들이 하나님과 상별(相別)한 이후에 하나님을 모르고 있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엇으로 완전히 하나되고 싶으냐고 묻게 될 때 그것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주체되시는 부모가 그리운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내적인 인연을 맺으면서 일생을 살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필연적으로 결혼해야 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형제가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그 사랑이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은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입니다. (149-216)  
  
  하나님과 인간이 실제로 하나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성숙하면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데, 거기서 사랑의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에게 사춘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서 같이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느냐?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게 되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무르익어 성숙해서 아니 화합할래야 아니 화합할 수 없게끔 마음도 부풀고 몸도 부풀어 있는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실제로 하나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와 하나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영원히 같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살려면 얼마만큼 커야 되느냐?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흡족할 수 있는 그때까지 커야 됩니다.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는 기다려야 됩니다. 그것을 우리 통일교회에서 성숙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한 분으로 계셔서 남자의 가운데만 들어간다면 여자는 얼마나 적적하겠어요! 또, 여자의 가운데만 들어간다면 남자가 얼마나 적적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성성상의 주체이시므로 남자와 여자를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언제 하나님을 만나느냐? 물론, 우리가 자랄 때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우리 본연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정신이 있고 체(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내적인 형과 외적인 형, 이성성상이라는 성상과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모든 존재는 안팎이 공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팎이 공존하는 거기에서 완전한 물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완전한 물건이란 어떤 것이냐? 우리가 바라는 소원 앞에 완전히 하나되어 마음에 꼭 맞는 것이 있게 될 때 그것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개인에게 있어서 완전한 물건이 됩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언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완전한 사랑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게 될 수 있느냐? 아무 때나 꼭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성성상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가운데 임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9-21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그러면 남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남자와 여자가 장성할 때까지 높은 자리에서 주시하시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남자와 여자가 점점 커 감에 따라서 각도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벌어지면 하나님이 어디로 가겠어요? 이 둘이 이렇게 있다가 사이가 점점 벌어지니까 하나님이 올라가겠어요, 내려오겠어요? 둘 사이가 직선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직선이 되면, 하나님도 별 수 없이 직선상에 와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직선상에 연결된 것이 압축되어서 하나로 합해진 핵이 있다면 그 핵의 자리는 위대한 힘이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남자도 맘대로 못 합니다. 남자도 맘대로 못 하고, 여자도 맘대로 못 하고, 하나님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셋이 서로 맘대로 하지 못하고 달라붙는 것입니다. 셋이 공동운명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날부터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부터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작용은 우리의 몸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몸과 마음이 삼각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직선상에 서야 됩니다. 몸과 마음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직선상에 서야 되고, 남자와 여자도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성숙해서 몸과 마음이 직선상에 서고 하나님도 직선상에 서게 되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모두 다 직선상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구형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동그랗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나의 구형을 만들 수 있는 힘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하고 너도 나를 필요로 하고, 저쪽에서 이쪽을 필요로 하고 이쪽에서도 저쪽을 필요로 하고, 위에서는 아래쪽이 필요하고 아래에서는 위쪽이 필요한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그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요인을 중심으로 남자와 여자가 직선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의 축으로 세워졌더라면 인류역사가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러한 축으로 서기 위해서는 기다리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성숙기를 왜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 하나되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성숙기라는 기간을 하나님도 기다려야 되고 남자와 여자도 안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일적인 핵을 중심삼고 이 셋이 사랑으로 일치될 수 있는 세계가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아이구, 나 싫어!” 그랬겠어요? “아! 해와, 나 싫어!” 그랬겠어요? “아담, 나 싫어!” 그랬겠어요?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좋아. 영원히 좋아!” 그랬을 것입니다. 그처럼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149-220)
  
  하나님과 인간의 이상은 사위기대를 통해 완성돼
  
인간의 사랑, 남자 여자의 사랑, 무슨 사랑 무슨 사랑 하지만 그러한 사랑이 어디에서 연결되느냐? 수직선과 수평선에서만 연결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는 수직선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수직입니다. 그런 논리를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옆에 있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이 중요한 얘기를 할 때에 어머니는 거기에 참관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그런 논리가 어디 있느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역사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그건 뭐냐 하면 수직의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횡적인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통일이란 것은 하나되는 길로서 수직과 수평, 종선과 횡선이 90각도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인간이 자녀라면 오늘날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날 것이냐? 수직선상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직의 저 끝과 이 끝이 어떻게 만나요? 하나돼야 합니다. 한 점에 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 횡적인 면에서 좌우가 어떻게 만나느냐? 부부의 사랑은 수평선, 좌우의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종횡이 90각도를 맞추어서 수직의 사랑과 수평의 사랑이 결합할 수 있는 점, 사방이 같은 입장에 결착되는 그 정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점이요, 아들이 좋아하는 점이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점이요, 아내가 좋아하는 점이요, 남편이 좋아하는 점입니다. 그 점을 중심삼고 구형을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에서 모두가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꼭대기에서 이루어지느냐, 밑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상하가 불평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높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이니까 좀 멀리 있어야 되겠다.”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너는 아기니까 가까운 거리에 올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기들도 “어, 아버지가 조금 크면 난 싫어. 같아야 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먼 자리에 놓을 수 있어요?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놓고 싶어할 것입니다. 아들딸은 아버지와 같은 거리에 가서 머물러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올라간다면 만나는 거리가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중앙점입니다. 좌우도 같아야 됩니다. 


그러면 참부부는 어떠해야 되느냐? 부부는 부모가 좋아하는 부부가 되지 않고는 결코 참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세상에서도 부부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할 수 있는 부부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 동양에서는 아들딸이 결혼할 때 자기들 맘대로 못 합니다. 부모가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먼저 수직적인 사랑의 전통을 세워 놓고 그 다음에 횡선을 그어야 됩니다. 수직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다고 하면 수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고 싶고 만나고 싶은 곳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언제나 같이 합하고 싶은 곳입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중심점이 이상의 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과 해와가 성숙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이 성숙이란 말은 수직선상의 한 포인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왔으니, 그렇게 내려온 것은 연장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통해서 연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위기대를 중심삼은 완성체를 만들어 가지고 조화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대가 지나가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대가 되고, 그 다음에는 아들딸의 시대, 손자의 시대로 내려갑니다. 


그 사위기대를 중심삼고 어머니가 기뻐할 때 아버지가 기뻐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아들딸이 기뻐해야 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딸 낳아 키워서 그 아들딸이 자식을 낳게 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들을 대해 지극히 정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들딸을 기르던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내 아들딸의 2세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아들딸에 대한 사랑이 연장된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손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의 아름다움이요, 사랑으로 미화된 기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149-222)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있는 지성소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창조 이후 지금까지 수만 년의 역사를 지내 오면서 “사랑하자!” 할 수 있고 “네가 없으면 안된다. 네가 없어 가지고는 못 살겠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나 봤느냐? 인간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한 아들딸을 못 만나 봤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막힌 사실입니다. 


여러분, 복귀섭리역사를 알지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서 성약시대에 이르렀는데, 구약시대는 만물의 시대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만물보다도 못한 속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만물을 희생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갈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만물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자식을 제물로 드리던 때입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던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느냐! 사랑으로 지었던 모든 만물을 희생시키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느냐는 것입니다. 섭리역사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지금 성약시대는 뭐냐? 부부 자체를 전부 희생시키는 시대입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부부들의 사랑까지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부부 자체의 인연과 사랑을 희생시키는 억울한 자리, 그것을 부정하는 자리를 넘어서지 않고는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새로운 한계점에 도달하려면 지금까지 돌던 것과 반대로 돌아야 됩니다. 


인간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전부 다 아십니다. 아담과 해와가 성숙하여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의 상대형을 갖춰서 사랑의 성전을 이루게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성전, 사랑의 지성소는 무엇인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있었던 지성소였더라는 것입니다. 그 지성소가 천리를 파탄시킨 기원이 되었기 때문에 제일 나쁜 것이요, 추악한 자리에 떨어졌다는 서글픈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세계에 있어서 인륜을 중심삼은 정조문제가 벌어지는 것을 볼 때 그 사랑이 파탄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손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짓기에 얼마나 수고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담아 있어라!’ 해서 있었다고 하지만, 천만예요! 아담 해와에게는 하나님의 전체를 투입한 것입니다. 내심과 외심, 모든 정력을 전부 투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비의 왕궁입니다. 모든 것을 신비롭게 지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이 모든 정성을 다 들인 집,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집입니다. (149-234)
  
  하나님과 자녀의 안식처는 한국 땅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인데, 어디 가서 안식처를 찾느냐? 천국에 가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못 된 사람이 천국에 가면 하나될 것 같아요? 시부모를 보고 앵앵거리는 며느리, 새벽같이 교회에서 기도드리고 집에 가서는 밥을 해 가지고 “아이구,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죽지도 않고 왜 이러나! 밥상 좀 안 들고 들어가면 좋겠다.” 그러는 간나들 앞에 천국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라도 그저 찾아가 보기에 바빠야 됩니다. 그런 효자는 하늘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못생기고 병신이라도 첫사랑의 정 이상의 정을 가지고 눈물과 더불어 그를 위해 늘 위로하면서도 부족하다고 자신을 놓고 탄식하는 아낙네 앞에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을 따라서 천국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도와서 하나님을 이 나라에 천년 만년 모셔야 합니다. 왜, 그런 우리 민요가 있지 않아요?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지고…♬” 하는 민요가 말이에요. 이게 이 민족의 동요인데, 그 동요가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 아니냐!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과 천리 구도의 중심이 되시는 참부모님을 중심삼고 살면 초가삼간이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초야에 살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년 만년 살고싶다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 민요예요! 


그럴 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우리 동요, 우리의 민족사상 가운데 있으니, 이 안식의 보금자리가 한국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갈망하는 민요를 두고 볼 때, 우리 민족에게는 그걸 그리워 아니할 수 없는 성품이 있지 않느냐, 그런 소성이 있지 않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원리를 들어 아는 여러분이 선조에게서 받은 그런 풍토를 전국화시키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하나님과 아들딸들이 안식을 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이 한국 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국이 필시 그러한 기지가 되기를 바라 나오신 하나님이 오셔서 실망하지 않게끔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위해 준비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내적 환경과 외적 환경을 정비하는 데 총동원할지어다! (149-258)

 <훈독 소감>
 
하나님은 우리 마음 가운데 거하시는데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타락한 인간이 되어버렸다고 탄식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근본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데 그 사랑을 위해 남녀가 서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야 하는 필연의 길이 놓여 있다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는 수직인데 그 수직을 중심하고 수평, 횡적인 사랑을 이루어야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성약시대는 사랑을 희생하는 시대라고 강조하시면서
희생적 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전통을 가진 민족이 한민족임을 말씀하시면서 한국 민족이 반드시 그런 하나님의 소망을 이루어 드릴 수 있기를 당부에 당부를 하셨습니다.

우리 민족을 한 많은 한민족이 되게 하심은 가정에서 희생적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심정적 민족으로 기르시기 위함이었음을 느끼게 될 때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 27 일 원문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 
 날짜 : 1986. 11. 23(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된 인간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진정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인류역사를 보면 인류는 지금까지 무엇인가를 찾아 나오는 역사노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중심인 동시에 사랑의 중심입니다. 물론, 생명도 사랑의 중심이요, 사랑도 생명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류가 고통받고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왜 행복한 인류가 되게끔 하지 못 하였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얼핏,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떤 절대적인 신이 있다면 어찌하여 전세계의 인류가 역사를 통해 어느 때를 막론하고 수난길을 가야 되며 알지 못하는 길을 방황하며 더듬어 가지 않으면 안되는 운명에 처하였느냐?” 할 것입니다. 이런 자체를 보게 될 때 사랑의 신이 없다는 결론을 지을 것입니다. 그렇게 속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에서부터 과정을 거쳐서 끝까지 같이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같이 처하는 것이 일시적이 아니요, 시간을 초월해 영원히 같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같이 있어야 되느냐?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같이 있어야 됩니다. 
진정, 하나님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 인류를 지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원칙 앞에 위배되는 결과에 처하게 된 인류는 어찌된 연고냐? 그게 문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살 수 없는 곡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곡절이 없었다고 부정하게 될 때는 신은 없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신 사이에는 어떠한 곡절이 있었습니다. (149-213)
  
  인간 타락의 곡절
  
우리 인간은 인간의 근원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지만, 어떤 한 때에 하나님과 최초의 우리 인류시조 사이에 어떠한 곡절이 있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곡절이 없었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는데 오늘날의 인류가 그분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논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류가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게 된 입장이기 때문에 인류는 도탄 중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며, 그 무엇인가 더듬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어떠한 곡절이 연유가 되어서 그러한 결과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계에서는 인간이 타락이라는 곡절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 신과 인간이 아니 갈라질래야 아니 갈라질 수 없었던 그 곡절이 무엇이었겠느냐? 성경에는 비사로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선악과가 얼마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선악과에 얼마나 위대한 내용이 있었기에 신과 인간이 절대적인 사랑을 중심삼고 공존해야 할 본연의 이상을 깨뜨려 버렸는가? 
성경에서는 그저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간단하게 상징적으로 얘기했지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있을 수 없게 된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있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없게 된 것은, 같이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상실된 결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그 타락의 곡절은 사랑의 곡절임에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안식처, 하나님과 인간을 중심삼은 사랑의 안식처, 하나님과 자녀가 안식할 수 있는 그곳이 어떤 곳이냐? 그곳은 그 곡절의 한계선을 넘어선 세계, 그 곡절의 인연을 벗어난 세계, 그 곡절의 인연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를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생님이 추리해 낸 결론입니다. 
본래는 사랑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떠한 곡절로 인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곡절이 있게 된 어떤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놀랄 수 있었고 인간도 놀랄 수 있었던 사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정상적인 입장에서 급변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 비정상의 환경에 서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도 그런 입장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되었겠어요? 하나님이 부모이고 인간이 자식의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 앞에 인간이 찾아가서 “아버지,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말아요. 이제는 안 그럴게요.” 하면서 타협할 수 있는 길이 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타협할 수 없는 조건에 걸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해와의 타락은 뱀이 꼬였기 때문이라고 비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제3자의 출현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도 부모면 부모, 자녀면 자녀를 중심삼고 제3의 어떠한 조건, 부모가 원치 않는 제3의 조건 때문에 부모와 아들딸의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모가 원하지 않으면 그것을 자식도 원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자식이 원해서 제3의 자리로 갈 때는 부모와 자식이 격리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자의 출현, 제3의 어떠한 내용이 태초에 출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는 그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에 의해서 타락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149-214)
  
 하나님과 인간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만나려고 했는가
  
그러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본래는 어디서부터 만나기 시작했어야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디서부터 만났어야 했느냐? 근본에서부터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는 출발에서부터 만나 끝까지 가면서 사랑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을 가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만나는 데에도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는 조건 밑에서 시작해야 됩니다. 
자식이 떨어져 나갔더라도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자식이 사랑을 안고 가는 한 하나님은 그 자식이 가는 곳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라는 내용을 두고 어떻게 만나며, 어떻게 사랑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마음과 몸이 있습니다. 마음이 있고 몸이 있는데, 이것이 무엇 때문에 생겨났느냐? 왜 이중구조로 되어 있느냐? 물론, 몸은 마음을 위하고 마음은 몸을 위해 있지만 그 몸과 마음이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겠느냐? 남자의 몸 마음과 여자의 몸 마음이 무엇을 중심으로 하나될 수 있어야 되느냐? 그 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데 있어서 백 퍼센트 하나되고, 영원히 하나로 동거하고, 영원히 하나로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요인이라는 게 무엇이냐?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돈 가지고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 수 있어요? 지식과 권력을 가지고도 안됩니다. 권력이 있다고 해서 내 몸과 마음이 싸우고 있는 것을 하나되라고 암만 호령하고, 권력을 가지고 힘을 아무리 가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하나될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면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될 수 있느냐? 본질적으로 볼 때, 그것은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오늘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현재의 인간들이 하나님과 상별(相別)한 이후에 하나님을 모르고 있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무엇으로 완전히 하나되고 싶으냐고 묻게 될 때 그것은 지식도 아니요, 돈도 아닙니다.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의 주체되시는 부모가 그리운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사랑의 내적인 인연을 맺으면서 일생을 살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필연적으로 결혼해야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래요? 사랑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는 뭐냐? 형제가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하나되는 것도 그렇지만 자녀가 하나되어야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자녀는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고 싶어하느냐? 돈을 중심삼고 하나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요, 역시 사랑입니다. 그것은 남자 개인에게도 그렇고 여자 개인에게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의 몸과 여자의 몸이 영원히 하나될 수 있는 본질적인 내용이 무엇이냐?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사랑인데, 그 사랑이 무슨 사랑이냐? 영원한 사랑입니다. 일시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 영원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영원한 주체요, 절대자이신 하나님이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입니다. (149-216)  
  
  하나님과 인간이 실제로 하나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그러면 남자가 완성하는 것이 뭐냐? 남자가 성숙되어 완성했다는 기준을 무엇으로 세우느냐 할 때, 그것 역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하면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데, 거기서 사랑의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에게 사춘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 사춘기에는 자기도 모르는 사랑의 광활한 무대에 끌려 다니면서 행복의 안식처를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서 같이 있을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몸과 마음을 중심삼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수 있느냐? 마음이 쑥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올라가서 만날 것이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게 되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사랑을 중심삼고 완전히 무르익어 성숙해서 아니 화합할래야 아니 화합할 수 없게끔 마음도 부풀고 몸도 부풀어 있는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이 실제로 하나될 수 있는 자리는 어디냐?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들어왔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몸뚱이를 사랑해요? 물론, 사랑으로 품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이고,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 가운데 들어와 하나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영원히 같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살려면 얼마만큼 커야 되느냐? 하나님이 사랑하시기에 흡족할 수 있는 그때까지 커야 됩니다.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는 기다려야 됩니다. 그것을 소위 성숙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성숙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성성상으로 계시기 때문에 남자의 몸 가운데 임할 수 있고 여자의 몸 가운데도 임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한 분으로 계셔서 남자의 가운데만 들어간다면 여자는 얼마나 적적하겠어요! 또, 여자의 가운데만 들어간다면 남자가 얼마나 적적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이성성상의 주체이시므로 남자와 여자를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원리의 정분합작용(正分合作用)의 논리가 나옵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 언제 하나님을 만나느냐? 물론, 우리가 자랄 때는 하나님을 몰랐지만 우리 본연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는 정신이 있고 체(體)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지요? 모든 것이 내적인 형과 외적인 형, 이성성상이라는 성상과 형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모든 존재는 안팎이 공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안팎이 공존하는 거기에서 완전한 물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완전한 물건이란 어떤 것이냐? 우리가 바라는 소원 앞에 완전히 하나되어 마음에 꼭 맞는 것이 있게 될 때 그것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것이 개인에게 있어서 완전한 물건이 됩니다.
그러면 남자와 여자가 언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완전한 사랑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게 될 수 있느냐? 아무 때나 꼭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발전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끝과 시작이 같이 돌더라도 지장이 없고, 끝과 시작을 같이 세우더라도 균형이 잡혀 있어야 됩니다. 
여기에 하나의 축이 있고 좌우에 날개가 있다면, 그 날개는 아무데 있더라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그 좌우의 날개가 같이할 수 있는 자리에 있을 때는 말이에요. 그래서 그 무엇보다도 축이 좌우를 지탱시켜 줄 수 있고 그 좌우의 날개를 지지해 줄 수 있으며 붙들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서 좋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아한다는 것은 운동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건 평면적인 운동이 아니라 입체적인 구형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각양각색의 변화적인 운동을 일으키면서 안팎이 모두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이성성상이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의 가운데 임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49-218)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그러면 남자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남자와 여자가 장성할 때까지 높은 자리에서 주시하시던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남자와 여자가 점점 커 감에 따라서 각도가 벌어집니다. 이렇게 벌어지면 하나님이 어디로 가겠어요? 이 둘이 이렇게 있다가 사이가 점점 벌어지니까 하나님이 올라가겠어요, 내려오겠어요? 둘 사이가 직선이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직선이 되면, 하나님도 별 수 없이 직선상에 와 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 일직선상에 연결된 것이 압축되어서 하나로 합해진 핵이 있다면 그 핵의 자리는 위대한 힘이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남자도 맘대로 못 합니다. 남자도 맘대로 못 하고, 여자도 맘대로 못 하고, 하나님도 맘대로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셋이 서로 맘대로 하지 못하고 달라붙는 것입니다. 셋이 공동운명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날부터 같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날부터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작용은 우리의 몸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몸과 마음이 삼각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직선상에 서야 됩니다. 몸과 마음도 하나님을 중심삼고 직선상에 서야 되고, 남자와 여자도 그렇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성숙해서 몸과 마음이 직선상에 서고 하나님도 직선상에 서게 되어서 하나님과 인간이 모두 다 직선상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구형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동그랗게 만드는 것은 뭐냐? 하나의 구형을 만들 수 있는 힘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필요로 하고 너도 나를 필요로 하고, 저쪽에서 이쪽을 필요로 하고 이쪽에서도 저쪽을 필요로 하고, 위에서는 아래쪽이 필요하고 아래에서는 위쪽이 필요한 요인이 무엇이겠는가? 그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요인을 중심으로 남자와 여자가 직선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의 축으로 세워졌더라면 인류역사가 어떻게 되었을 것이냐? 하나님이 그러한 축으로 서기 위해서는 기다리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성숙기를 왜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하느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워 하나되어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상대적인 입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성숙기라는 기간을 하나님도 기다려야 되고 남자와 여자도 안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일적인 핵을 중심삼고 이 셋이 사랑으로 일치될 수 있는 세계가 되었더라면 하나님이 “아이구, 나 싫어!” 그랬겠어요? “아! 해와, 나 싫어!” 그랬겠어요? “아담, 나 싫어!” 그랬겠어요?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좋아. 영원히 좋아!” 그랬을 것입니다. 그처럼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149-220)
  
  하나님과 인간의 이상은 사위기대를 통해 완성돼
  
그러한 사랑이 어디서 연결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인간의 사랑, 남자 여자의 사랑, 무슨 사랑 무슨 사랑 하지만 그러한 사랑이 어디에서 연결되느냐? 수직선과 수평선에서만 연결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는 수직선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수직입니다. 그런 논리를 알아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에서는 사랑하는 어머니가 옆에 있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이 중요한 얘기를 할 때에 어머니는 거기에 참관하지 않습니다. 혹자는 “그런 논리가 어디 있느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역사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그건 뭐냐 하면 수직의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 횡적인 사랑이 가능한 것입니다. 통일이란 것은 하나되는 길로서 수직과 수평, 종선과 횡선이 90각도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인간이 자녀라면 오늘날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만날 것이냐? 수직선상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수직의 저 끝과 이 끝이 어떻게 만나요? 하나돼야 합니다. 한 점에 와야 됩니다.
그 다음에 횡적인 면에서 좌우가 어떻게 만나느냐? 부부의 사랑은 수평선, 좌우의 사랑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종횡이 90각도를 맞추어서 수직의 사랑과 수평의 사랑이 결합할 수 있는 점, 사방이 같은 입장에 결착되는 그 정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점이요, 아들이 좋아하는 점이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점이요, 아내가 좋아하는 점이요, 남편이 좋아하는 점입니다. 그 점을 중심삼고 구형을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에서 모두가 같이 있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꼭대기에서 이루어지느냐, 밑에서 이루어지느냐? 그것이 막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연한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상하가 불평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높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이니까 좀 멀리 있어야 되겠다.” 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너는 아기니까 가까운 거리에 올 수 없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기들도 “어, 아버지가 조금 크면 난 싫어. 같아야 돼!” 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먼 자리에 놓을 수 있어요?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놓고 싶어할 것입니다. 아들딸은 아버지와 같은 거리에 가서 머물러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서 내려오고 아래에서 올라간다면 만나는 거리가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중앙점입니다. 좌우도 같아야 됩니다. 수평선에서 좌우가 중심으로 모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참부부는 어떠해야 되느냐? 부부는 부모가 좋아하는 부부가 되지 않고는 결코 참부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세상에서도 부부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좋아할 수 있는 부부의 자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래, 동양에서는 아들딸이 결혼할 때 자기들 맘대로 못 합니다. 부모가 좋아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먼저 수직적인 사랑의 전통을 세워 놓고 그 다음에 횡선을 그어야 됩니다. 수직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서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다고 하면 어떻게 된 것을 말하느냐? 그건 평행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곧다고 하면 수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고 싶고 만나고 싶은 곳입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언제나 같이 합하고 싶은 곳입니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중심점이 이상의 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과 해와가 성숙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이 성숙이란 말은 수직선상의 한 포인트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왔으니, 그렇게 내려온 것은 연장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통해서 연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위기대를 중심삼은 완성체를 만들어 가지고 조화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시대가 지나가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대가 되고, 그 다음에는 아들딸의 시대, 손자의 시대로 내려갑니다. 
그 사위기대를 중심삼고 어머니가 기뻐할 때 아버지가 기뻐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아들딸이 기뻐해야 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기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딸 낳아 키워서 그 아들딸이 자식을 낳게 될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어서 손자들을 대해 지극히 정성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들딸을 기르던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사랑합니다. 내 아들딸의 2세라는 생각을 갖지 않고 아들딸에 대한 사랑이 연장된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손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의 아름다움이요, 그것이 사랑으로 미화된 기반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149-222)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있는 지성소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창조 이후 지금까지 수만 년의 역사를 지내 오면서 “사랑하자!” 할 수 있고 “네가 없으면 안된다. 네가 없어 가지고는 못 살겠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을 만나 봤느냐? 인간시조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러한 아들딸을 못 만나 봤다는 것입니다. 이게 기막힌 사실입니다. 
여러분, 복귀섭리역사를 알지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거쳐서 성약시대에 이르렀는데, 구약시대는 만물의 시대였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만물보다도 못한 속된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만물을 희생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갈 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만물을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신약시대는 자식을 제물로 드리던 때입니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던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느냐! 사랑으로 지었던 모든 만물을 희생시키시던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느냐는 것입니다. 섭리역사가 그렇게 흘러왔습니다. 
지금 성약시대는 뭐냐? 부부 자체를 전부 희생시키는 시대입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부부들의 사랑까지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서 부부 자체의 인연과 사랑을 희생시키는 억울한 자리, 그것을 부정하는 자리를 넘어서지 않고는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새로운 한계점에 도달하려면 지금까지 돌던 것과 반대로 돌아야 됩니다. 
인간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전부 다 아십니다. 아담과 해와가 성숙하여 하나님의 이상적인 사랑의 상대형을 갖춰서 사랑의 성전을 이루게 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성전, 사랑의 지성소는 무엇인가?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본연의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 수 있었던 지성소였더라는 것입니다. 그 지성소가 천리를 파탄시킨 기원이 되었기 때문에 제일 나쁜 것이요, 추악한 자리에 떨어졌다는 서글픈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인간세계에 있어서 인륜을 중심삼은 정조문제가 벌어지는 것을 볼 때 그 사랑이 파탄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거둘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손댈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는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짓기에 얼마나 수고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담아 있어라!’ 해서 있었다고 하지만, 천만예요! 아담 해와에게는 하나님의 전체를 투입한 것입니다. 내심과 외심, 모든 정력을 전부 투입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신비의 왕궁입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신비롭게 지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하나님이 모든 정성을 다 들인 집,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집입니다. (149-234)
  
  하나님과 자녀의 안식처는 한국 땅
  
오늘 말씀의 제목이 ‘하나님과 자녀는 안식하소서!’인데, 어디 가서 안식처를 찾느냐? 천국에 가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 절대 안식처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 못 된 사람이 천국에 가면 하나될 것 같아요? 시부모를 보고 앵앵거리는 며느리, 새벽같이 교회에서 기도드리고 집에 가서는 밥을 해 가지고 “아이구,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죽지도 않고 왜 이러나! 밥상 좀 안 들고 들어가면 좋겠다.” 그러는 간나들 앞에 천국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나이 많은 부모라도 그저 찾아가 보기에 바빠야 됩니다. 그런 효자는 하늘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못생기고 병신이라도 첫사랑의 정 이상의 정을 가지고 눈물과 더불어 그를 위해 늘 위로하면서도 부족하다고 자신을 놓고 탄식하는 아낙네 앞에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길을 따라서 천국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도와서 하나님을 이 나라에 천년 만년 모셔야 합니다. 왜, 그런 우리 민요가 있지 않아요? “양친부모 모셔다가 천년 만년 살고지고…♬” 하는 민요가 말이에요. 이게 이 민족의 동요인데, 그 동요가 거짓말이 아닌 사실이 아니냐! 천지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과 천리 구도의 중심이 되시는 참부모님을 중심삼고 살면 초가삼간이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초야에 살더라도 좋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 끼를 먹더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년 만년 살고싶다니, 그 얼마나 아름다운 민요예요! 
그럴 수 있는 안식의 보금자리가 우리 동요, 우리의 민족사상 가운데 있으니, 이 안식의 보금자리가 한국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갈망하는 민요를 두고 볼 때, 우리 민족에게는 그걸 그리워 아니할 수 없는 성품이 있지 않느냐, 그런 소성이 있지 않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원리를 들어 아는 여러분이 선조에게서 받은 그런 풍토를 전국화시키는 놀음을 해야 된다는 것은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 것을 알고 하나님과 아들딸들이 안식을 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이 한국 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한국이 필시 그러한 기지가 되기를 바라 나오신 하나님이 오셔서 실망하지 않게끔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위해 준비하면서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내적 환경과 외적 환경을 정비하는 데 총동원할지어다! (149-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