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해도 큰일이요, 없는 것을 또 있다고 해도 큰일입니다. 혹시라도 신이 없다면 우상을 숭배하는 것보다 더 죄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상은 형태라도 갖추고 섬기지만 이것은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체가 우상숭배보다 더 죄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신과 나는 어떤 관계가 돼 있느냐? 인간과 신이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라면 그 하늘나라는 나와 어떤 관계냐? 또, 땅에 있는 나라라고 해도, 땅에서 인간을 중심삼고 생활하는 가정이 확대된 것이 종족이 되고, 종족이 확대되어 민족이 되고, 민족이 확대되어 국가가 되고, 그 국가가 확대되어 세계까지 되더라도 그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 원래는 여러 나라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의 이상적 목표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그 목표가 둘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평화의 세계가 이상세계가 둘일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라는 하나의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면 하늘나라도 둘일 수 없습니다. 그 하늘나라가 지상세계의 인간을 통해서 형성된다면, 이것은 인간에게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인간과 신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하늘나라와 인간이 사는 나라와의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묶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 지식, 권력 가지고도 안 됩니다. (263-303)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관계라는 것은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 서서 얘기할 때 요만한 수건을 가지고 이렇게 키스를 하고 춤을 추고 노래하더라도 미친 사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없는데 춤을 추고 입을 맞추고 있으면 미친 사람이 됩니다. 그 가치가 대치될 수 있는 입장에 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외로우신 하나님이겠어요, 기쁘신 하나님이겠어요? 홀로 계실 때는 외롭습니다. 그것을 기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틀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외로워 가지고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분이요, 무엇이든지 창조 가능한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상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지금 문 총재같이 이렇게 말하고 따져 보고 생각해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에게도 적절하고도 필요하고 하나님에게도 적절하고도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서로 같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는 인간의 이상세계는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평화의 세계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과 인간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 실체로도 맞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과 인간이 좋아하는 것,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제일 좋아하고 인간도 영원히 제일 좋아할 수 있는 그런 대등한 가치의 결합 초점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서 우주의 새로운 이상의 출발기지가 형성될 수 있는 논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만나 한 자리에서 정착해야 됩니다. 그것을 “내 몸에서 하면 좋겠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욕심이 많지요? 여러분의 욕심은 우주를 점령하고 나더라도 우주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면 또 갖고 싶어합니다. 이 욕심을 중심삼고 하나님을 딱 점령해서 이 바지 포켓에 집어넣고 옆을 보니 하나님보다 더 훌륭한 분이 있다면 그분도 이 지갑에 잡아넣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방대한 마음의 보자기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이래 오늘날까지 인간의 욕망은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표제를 달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나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자고로 우리 선조로부터 계속되어 가지고 천만 년의 역사를 지냈다 하더라도 변하지 않고 그런 욕망이 연면히 전수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길이 없습니다. (263-307)
그러면 이것들이 다 무엇을 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것이 공동 목적을 추구하는 모든 초점이 뭐냐는 것입니다. 사랑의 초점, 생명의 초점, 혈통의 초점, 양심의 초점은 뭐냐? 최고의 것을 바라고 최고 것을 접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최고가 뭐냐? 하나님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우리의 사랑도 거기에 방향을 맞추려고 하고, 우리의 생명도 그 사랑을 통해 격동하려고 합니다. 남자면 남자, 여자면 여자가 흥분해서 천하를 전부 다 몰고 나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런 초점적 사랑, 근원적 사랑과 부딪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혈통도 그렇습니다. 참된 후손은 참된 사랑이 없으면 나올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입니다. 참된 사랑에 의해 참된 자식이 나오게 돼 있지, 참된 생명에 의해 참된 자식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생명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어 봤어요? 내 어머니 아버지를 사랑하기 위해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자식을 사랑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 봤어요? 이런 것이 문제가 됩니다.
참된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어야 됩니다. 목숨을 밟고 넘어 갈 수 있어야 그 사랑을 참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남편도 그렇고 참된 스승도, 참된 아들딸도, 참된 제자도 모두가 사랑을 중심삼고 변치 않는 인연, 자기의 생사지권을 넘어설 수 있는 인연을 들고 나오게 될 때 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소망도 사랑을 통한 소망이요, 하나님이 바라는 모든 소망도 사랑을 통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통한 효자, 사랑을 통한 부부, 사랑을 통한 부모를 바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가정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자기의 부부, 아들딸까지 다 희희낙락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평화와 행복의 기지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곳에 이상의 기지가 있고, 그곳에서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오늘날 젊은 놈들이 “자유를 위해서 투쟁하라!” 그러지요? 자유는 어떤 자리에서 운동하느냐는 것입니다. 비탈길에서는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가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아, 나는 자유의 환경이 필요해!” 하는데, 비탈길에서 자면서 자유를 찾아요? 자유라는 것은 반드시 사방이 수평이 되어 모든 것이 중앙선에서 딱 만나는 것입니다. 전부 다 그 중앙선과 비례적인 거리를 가질 수 있는 평평한 복판에서만이 자유가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행복도 거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263-309)
평화라는 말은 그 자체가 평평하고 화(和)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방의 모든 것들이 수평이 되어 있어야 어디 걸리는 것이 없습니다. 행복도 그렇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비탈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찌그러진 길에는 없습니다. 밸런스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학생들과 스승이 평화가 되어 있느냐? 주고받는 마음 자체가 안 되어 있으면 문제가 됩니다. 모든 질서가 일그러지는 것은 원칙적 기준이 일그러져 있기 때문입니다. 원칙적 기준을 바로잡아야 됩니다. 그 원칙적 주류가 뭐냐? 그것이 참사랑입니다.
참사랑이 도대체 뭐냐? 참사랑은 투입하고 잊어버려야 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여러분이 약혼할 때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랐어요, 잘나기를 바랐어요? 잘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열배 백배 잘나기를 바랐느냐, 천배 만배 잘나기를 바랐느냐? 천배 만배, 아니 그 이상, 억만 배 잘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결혼하고 나서도 상대가 억만 배 잘나기를 바란다면 천배 만배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기를 수없이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만 번을 투입했다고 생각하고 스톱하게 될 때는 무한하게 가치적인 존재를 찾을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무한하게 잘나기를 바란다면 무한히 투입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하나님도 그러한 존재를 상대로 삼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그런 사랑을 요구한다면 그 요인이 어디로부터 왔느냐를 추궁하는 것입니다. 조상의 조상, 할아버지 할머니의 조상의 조상, 또 그 조상으로 올라가 1대조 할아버지가 성경에서 말하는 아담 해와라면 아담 해와로부터 시작했다, 아담 해와도 그렇게 바랐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 하나님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제1원인 존재로부터 온 것입니다. 제2의 결과적 존재가 인간이라면 인간이 그렇게 욕망을 바란 것과 마찬가지로 제1의 원인적 존재인 하나님도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를 놓고 담판한 사나이가 있다면 역사상에 문 총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통일하고, 종교를 통일하고, 국가를 통일하고, 모든 것을 통일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절대 한 분이신데 그 한 분이 그럴 수 있는 상대를 바랐다면 그 상대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대가 있다면 당장에 찾아가 붙잡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만물지중 유인최귀(萬物之衆 唯人最貴)’라고 한 것은 맞는 말입니다. 무엇을 중심삼고 최귀(最貴)냐 하면 돈 가지고 최귀가 아닙니다. 지식 가지고 최귀가 아닙니다. 권력 가지고 최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사랑의 상대로 설 수 있는 데 있어서 최귀라고 결론지어도 이론적인 모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상대가 무한한 가치를 지녔다면 그 무한한 가치를 지닌 존재가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몇 천만 배 훌륭한 인격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 자체에 그것을 받을 수 있는 바탕이 있느냐 할 때, 그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의 보따리가 얼마나 커요? 무한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집어넣더라도 남습니다. 여러분이 갖고 있는 양심이 그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263-311)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통일교회는 그런 것을 알고 나서는 기도를 막연히 하지 않습니다. 마음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점점점 밝아 오기 때문에 갈 곳을 다 가르쳐 줍니다. 어찌 보면, 하나님보다도 위대한 것이 내 양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류를 대한 구원섭리는 뭐냐? 몸과 마음이 싸우는데, 왜 몸이 언제나 마음을 끌고 다니느냐? 인간의 타락으로 부모들이 곁길로 사랑의 길을 접하게 될 때 그 타락한 사랑, 거짓부모의 사랑의 힘이 양심의 힘보다도 강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강하지 않았으면 양심, 하나님이 몸을 끌고 다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사랑의 힘이 양심의 힘보다 강했기 때문에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양심은 하늘을 향해 플러스 입장에 있는데 또 다른 사랑이 플러스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을 맺으면 소유권이 결정됩니다. 타락한 사랑의 행동이라도 그 결과는 사랑의 원칙적인 기준에 결탁되어 그 자체가 사랑의 근본에 좌우될 수 있기 때문에 타락을 한번 하고 나면 그 몸뚱이는 결국 타락시킨 그 사람의 소유가 됩니다. 아무리 사대부의 외동딸이라도 부랑자 깡패와 사랑의 육체관계를 맺으면 내줘야 되지요?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의 황후가 되어야 할 해와가 종새끼와 관계를 맺었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기 전, 결혼을 바라고 있는 도중에서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니 이 몸뚱이가 또 다른 플러스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가 또 다른 사랑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사탄도 그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기 때문에 양심세계는 점령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상대적 입장에 있는 몸뚱이에 뿌리를 박은 것이 거짓 사랑입니다. 거짓 사랑이 남아져서 플러스가 되었기 때문에 양심과 몸이 반발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반발해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제거시키느냐? 이것을 제거시키기 위한 방편적 수단으로 세운 기관이 종교였습니다. (263-338)
그래서 참부모가 필요하고 참사랑이 필요하고 참생명과 참혈통이 필요합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이런 이론 가운데서 문 총재를 믿고 참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세계의 어떤 자리에 있든지 거기에서 같이 영력(靈力)으로 살 수 있는 환경의 치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조직입니다. 저 아프리카 오지에도 문 총재가 명령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왔습니다. 무엇을 갖고서요? 사랑을 갖고서입니다. 사랑의 전화입니다. 어디든지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는 출가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땅 위의 모든 거짓사랑에 인연된 것을 전부 다 끊고 모든 것을 부정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인 부정, 가정 부정, 종족 부정, 민족 부정, 국가 부정은 물론이고 세계를 부정하지 않는 사람은 하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가를 명령하고 독신생활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본연의 이상적인 참부모가 결혼식을 못 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세계에 살고 있으니 그곳에서 출가를 해야 됩니다. 침을 뱉고 달려나가야 됩니다. 나라면 뭘 해요? 가정이면 뭘 해요? 자기 여편네면 뭘 해요? 자식이면 뭘 해요? 악마의 혈통을 이어 온 둥지입니다.
출가를 왜 명령했느냐 하면 마음세계의 본향을 다시 찾아가려는 것입니다. 독신생활을 왜 강요하느냐 하면 아직까지 참부모가 결혼을 못 했는데, 아직까지 참부모를 통해 태어나지 못한 작자가 결혼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혜로우신 하나님입니다. 문 총재가 세계를 언제 부정하느냐는 것입니다. 개인 부정하는 데 몇 십년, 가정 부정하는 데 몇 십년, 종족 부정하는 데 몇 십년, 국가 부정하는 데 몇 십년, 하늘땅을 부정하는 데 몇 십년, 몇 백년 걸려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하는 자리에 세워 주려니 사탄 악마를 시켜 들이치는 것입니다. 전세계가 미워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 총재를 부정시키는 원칙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제2의 전술입니다. 그래서 “문 총재를 빨리 이 세계가 핍박해야 한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소망의 세계가 안 온다는 것입니다. (263-341)
성경을 보면 그 지긋지긋한 악마와 한 자리에서 의논하면서 “이것은 당신의 것이오. 내 것이오.” 하고 분별하면서 이 세상을 가려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천의를 위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여기서 위대한 것을 하나 소개했던 것이 뭐냐? 여러분의 양심은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상적 존재, 하나님보다 몇 천만 배의 가치적 존재로 끌어올릴 수 있는 이런 상대자가 사람이기 때문에 양심은 그 일을 위해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하나 문제는 뭐냐? 사랑과 하나돼 가지고 장성했으면 만사가 형통인데 참사랑,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만 맺는 날에는 양심의 욕망을 얼마든지 달성하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영계에 가서도 하나님은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몇 천만 배의 큰 우주도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의 대상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양심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관계를 안 맺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63-343)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하나님을 점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 줄만 만들어 놓으면 꼼짝없이 하나님이 그 집안에 들어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론이 없는 것입니다.
해와는 누구였느냐? 아담의 부인인 동시에 하나님의 부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몸은 아담이었고, 해와는 하나님의 실체의 부인이었습니다. 나는 종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종적인 부모의 피를 받은 종적인 나와 아담, 횡적인 부모의 핏줄을 이어받은 횡적인 나의 둘로 합해져 있습니다. 내가 둘입니다. 이것이 어디서 하나되느냐 하면 오목과 볼록의 한 자리입니다.
아담 해와의 생식기, 본래는 그 자리가 위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생식기는 사랑의 본궁이었습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하나님까지 안식시킬 수 있었던 왕궁이요, 본궁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자리는 참사랑을 중심삼은 본궁이었지만 참생명을 중심삼은 본궁이기도 했습니다. 혈통을 중심삼은 본궁이었고 지상천국의 출발지요, 천상천국의 출발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곳이 쌍스런 곳이 되었습니다. 천지를 망친 망국지종이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제일 나쁜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본래는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나 인사를 할 때 그 곳을 보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해야 됩니다. 조상 중의 조상보다도 조상 중의 조상의 사랑을 모실 수 있는 자리가 그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밤에 가정에 돌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몸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또 아내는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몸으로서)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만 거기에서 통일적 이상 사랑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받는 가정이 되기를 빌면서 문 총재의 말씀을 폐하고 돌아가겠습니다. (263-347)
<훈독 소감>
인간은 하나님의 상대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절대적 가치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 하셔도사랑은 혼자서는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상대인 인간을 창조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인간창조의 필연성을 강조하셨습니다.
타락으로 인간들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종교는 전부 부정하고 가정을 떠나 도의 길을 가는 출가를 지시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서도 타락으로 잃어버린 사랑의 본궁을 찾기 위한 필연적 노정이 세상 기존 가정을 부정하고 고향을 떠나 종교의 길을 가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렇게 선천시대의 말씀은 역시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출가를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버님 말씀이 후천시대에 가면 환고향을 강조하시면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렇게 아버님께서는 섭리의 진전에 따라 말씀을 달리하신 것을 여실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