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행복한 본연의 곳 (천일국 훈독경 제8권 29일)

훈독왕 | 20201222154430

천일국 훈독경 제8권 29일

최고로 행복한 본연의 곳 (훈독본) 
날짜 : 1983. 12. 1(목)
장소 : 미국

 

최고로 행복한 본연의 곳 (천일국 훈독경 제8권 29일)


인간은 누구든지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사람

행복이란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느냐? 물론 가치면 가치, 무슨 물건이면 물건의 귀한 것을 중심삼고 연관관계를 맺고 찾아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보통 생각하기를 돈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지식이라든가 권력을 표방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 인간 자체가 주체적인 입장에 설 때 소모할 수 있고 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돈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지식이라는 것을 볼 때 거기에 사람이 개재되겠느냐? 사람은 상대적인 물건을 중심삼고 그렇게 보고 있는데, 인간 자신을 중심삼고는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편적인 인간들이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찾고 있던 귀하다는 것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제1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말고 이 우주를 볼 때 우주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서야 되느냐? 그 모든 것들을 서로 관계를 맺어 주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에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질서를 잡아 주고, 분리를 하고,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가 해 가지고 등급을 매길 수 있지 사람이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없는 세계를 생각해 보라구요! 무엇이 중심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보물이 좋은 것이고, 지식이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없다면 어떨까요? 무슨 보물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해요? 권력이라는 것이 있더라도 권력을 가지고 전권적인 행사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지식이니, 돈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은 동물세계라든가 다른 세계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호랑이 옆에 다이아몬드 몇 천 캐럿이나 몇 만 캐럿이 있더라도 그것을 좋아하겠어요? 책을 갖다 놓든 지식 보따리를 갖다 놓든 알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있어 가지고야 귀한 것이 필요하고, 사람이 있어 가지고야 권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은 절대적입니다.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우주권에서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이 뭐냐?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9-305)

중심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그러면 사람이 많은데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귀하냐? 동물세계에는 규범이라든가 생태라는 것이 간단하지만, 인간세계에는 사는 규범이라든가 생태라는 것이 전부 다 역사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면 인간 가운데서 가치 있는 인간, 보다 귀한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게 뭐예요? 먹는 것도 마찬가지요,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이나 코의 생김새나 구조로 봐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 가운데 귀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인간은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육이 합해 가지고 하나의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합해서 하나됩니다. 그런데 육을 가지고 사는 생활은 동물적인 생활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먹이를 위해서 활동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그것이 우주세계에서 귀한 가치를 갖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고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편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육적인 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높다면 육적인 것이 낮습니다. 또는, 영적인 것이 낮다면 육적인 것이 높습니다. 이 둘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높은 것이 중심이냐, 낮은 것이 중심이냐? 사람은 높은 걸 좋아합니다. 깊은 곳이 있어 가지고 높은 곳이 시작돼요, 높은 곳이 있어 가지고 깊은 곳과 낮은 곳이 시작돼요? 사람들이 깊은 골짜기를 좋아해요, 높은 산꼭대기를 좋아해요? 어느 것을 좋아해요? 높은 것을 좋아합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양한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모든 것이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 가면 많던 것이 점점 없어집니다. 상대했던 게 점점 잘려 버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높은 곳을 왜 좋아하느냐? 높은 곳에서는 다양한 세계와 내가 관계를 맺어서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전체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29-307)


사람은 왜 높은 걸 좋아하느냐? 다양한 것과 인연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왜 낮은 걸 싫어하느냐? 낮으면 단순해지고 다양한 관계에서 멀어집니다. 사람들 가운데 귀한 사람은 높은 이상, 높은 관, 높은 것과 관계를 맺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개념을 여기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정신적인 자세가 높은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몸뚱이는 마찬가지지만 정신적인 자세가 낮은 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기준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육적인 기준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낮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높은 사람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낮은 사람은 전체를 떠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높고 넓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위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귀합니다.


육적인 인간은 동물적인 인간이고, 영적인 인간은 정신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면 동물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물적인 인간은 무가치하고 정신적인 인간은 유가치합니다. 질(質)로 보면 무엇이 다르냐? 동물적인 인간은 자기를 위주해서 사는 사람이요, 정신적인 인간은 전체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우리가 보편적인 개념을 집어넣을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정신적인 사람이냐? 전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레버런 문이 여러분에게 위하여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위하여 살면 좋으냐 이거예요. 그것은 센터, 중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중심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됩니다. 모든 것을 책임지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심자입니다.


그러면 센터로서 위하여 사는 데는 어떻게 사느냐? 전부가 다 좋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눈으로 보기에 좋고, 귀로 듣기에 좋고, 느끼기에 좋고, 만지기에 좋고, 대하기에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무엇이 보기 좋으냐 하면 조화된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된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된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둥글둥글 돌아가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플러스인 남자하고 마이너스인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둘이 만나 가지고 서로 “당신은 나를 위하소” 하고 한 마디만 하면 관계가 다 끝나 버립니다. 취미라든가 재미의 세계는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당신 나를 위하소” 하고, 또 여자는 “아니, 당신이 나를 위하소”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129-308)

지상의 하늘나라, 천상의 하늘나라

우리의 눈이 나를 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상대를 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상대를 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또, 입은 나를 위해서 말하라고 생겼어요? 입이 나를 위해서 생긴 것 같지만 상대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말이 필요하지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닙니다. 


귀는 어때요? 내 귀가 내 말을 듣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코는 냄새를 맡기 위해서 있는데 자신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 있어요? 또, 촉감이 나를 느끼기 위해서 있어요? 상대를 느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오관은 내게 있지만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해서 있는 오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오관이 좋아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 우리의 오관이 남을 위하려고 하는 사람을 기쁘게 환영하게 되어 있지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사람을 기쁘게 환영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눈을 감으려고 하고, 귀를 막으려고 하고, 코를 막으려고 합니다.


누가 나와 가지고 “아이구! 눈이 참 아름답고, 코도 아름답구나. 야, 만지고 싶다. 사랑스럽다” 이래야 좋아하지 “너는 나를 위해라, 이놈아” 그러면 전부 다 싫어합니다. 전부 다 자기를 위해주려고 할 때는 좋아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본연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하, 나도 남들이 나를 위해주는 것이 좋기 때문에 내가 전체 사람들한테 좋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려면 전체 사람들을 위해야 되겠구나! 그래야 좋은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이 쏙 들어옵니다.


내 발한테 물어 보기를 “너 어디 가고 싶어? 너를 위해주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어, 너보고 위하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어" 할 때, 발은 말하기를 “아, 나를 위해주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어요” 한다는 것입니다. 손에게 말하기를 “너 어떤 사람을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주는 사람을 만지고 싶어, 너보고 자꾸 위하라고 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어? 어떤 거야” 해도 전부 다 대답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보다 좋은 것은 뭐냐? 이 원칙으로 볼 때 “보다 넓고, 보다 높고, 보다 깊게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가 보다 높은 사람이다” 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보다 좋다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까지 위하려고 하는 사람이 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 같은 사람이 제일 위대한 사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원수까지 위해서 살겠다고 했으니까 인간으로서는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상한 세계는 원수가 없어질 수 있는 세계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수가 있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서로 위해주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지상의 하늘나라이고 천상의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9-310)

위하여 사는 사랑을 중심삼은 것이 최고의 이상형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한 자리가 어떤 자리냐? 그곳은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최고로 행복한 곳은 어디에 있을 것이냐? 행복한 사람들이 좋아서 모여 사는 곳이 행복한 곳입니다. 그런 행복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모여 살까요? 행복한 돈, 행복한 지식, 행복한 권력이에요?


돈이 나를 위해서 있어요? 권세가 나를 위해서 있어요? 권세가 매일같이 “당신 좋습니다” 하고 위로해 줘요? 지식이 그래요? 그런 존재는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있을 것이냐? 뭘 갖고 뭉쳐 가지고 살겠느냐는 말입니다. 단순히 밥 먹는 것, 행복한 음식이에요? 그것은 행복한 사랑입니다. 최고의 행복한 사랑이 뭐냐? 서로 위하겠다는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는 결론이 딱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소, 널뛰는 것 있잖아요? 한 번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또 올라갑니다. 그래야 운동이 됩니다. 그런데 올라간 사람이 “나는 올라가는 게 좋아” 하면서 올라가서 떠억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해야 좋습니다. 빨리 내려가려고, 힘있게 내려가려고 높이 올라갑니다. 힘있게 내려갈 때는 누구를 위해서 내려가느냐? 일시적으로 나는 손해입니다.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렇지만 저쪽은 삥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러한 분석적인 관에 의해서 위하여 살라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결론입니다. 위하여 사는 사랑을 중심삼은 것이 최고의 이상형이라는 결론을 딱 지은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은 안 받고 자꾸 사랑하려고만 하니까 자꾸 올라갑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렇게 위하여 사는 것이 제일 멋지다는 것입니다. (129-312)

위하는 사랑의 본체

남자라는 동물은 결혼해 가지고 여자의 노예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자란 동물도 남자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럴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이냐? 무엇이 더 값있는 것이냐? 사랑의 노예가 값진 것이냐, 사랑의 안식처가 값진 것이냐? 어떤 거예요? 사랑의 노예가 더 값집니다. 이 자체가 우주적인 혁명입니다. 


여자들! 나를 보다 위하는 사랑이 좋겠어요, 덜 위하는 사랑이 좋겠어요? 더 사랑하는 것이 좋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나를 더 위하는 사랑이에요? 위하고 또 위하려고 하고, 내 생명을 버리더라도 위하려고 하고, 내 일생을 버리더라도 위하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그게 더 위하는 사랑입니다. 생명을 버리고, 그 다음에는 일생을 버리더라도 사랑하려고 하고 위하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영원히 위하려는 사랑 앞에 인간은 완전히 정착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지요?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그 최고의 행복의 본궁이 어디냐? 오늘 제목인 ‘최고로 행복한 본연의 곳’이 어디냐? 그곳은 영원 무궁토록 위하는 사랑을 중심삼고 좋을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는 남자의 상대가 존재하면 눈을 가지고 보는 데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듣는 데도 그런 사람에게는 십년 백년 들어도 좋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경지, 그것을 어디서 찾겠느냐 이거예요. 이제는 알았습니다. 위하는 사랑의 세계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적인 최고의 가치적인 인간이 어떤 것이냐? 그 결론도 간단합니다. 일생 동안, 의식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죽을 때까지 만우주를 위하여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남녀노소를 위하여 사랑하기에 미쳐서 산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고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사랑은 우주를 포괄하고도 남고, 우주를 통하고도 남고, 우주와 화하고도 남습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데서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서 이상적인 것도 나옵니다. 울음의 세계나 지옥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행복을 알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하나의 힘은 오직 전체를 위하여 살겠다는 힘입니다. (129-314)

사랑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란 어떤 곳이냐? 위하여 살다가 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위하는 사랑의 길을 그리며 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면 레버런 문이 주장하는 이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을 위하여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요, 가정을 희생시켜서 보다 큰 종족을 위하여 사는 가정이 보다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종족이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며 산다면 보다 가치 있는 종족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민족, 보다 가치 있는 국가, 보다 가치 있는 세계로 더 큰 것을 위해 나가서 맨 나중에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산다고 결론지어 가지고 여러분을 냅다 모는 것입니다.


누구나 최고의 행복의 자리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일생 동안 남을 위해서 살고 임종시에 가 가지고 “아, 나는 남을 위해서 다 살았다” 이러는 사람하고 “아이구! 죽음아, 물러가라! 나는 남을 위하여 못 살았구나” 하는 사람의 두 종류가 있다면, 어떤 것이 보다 행복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행복한 자리에 있느냐 이거예요.


또, 같은 자리에서 위해서 산 사람이 힘을 다하고 죽을 때 돌아보며 “그래도 내가 잘살았다” 하는 사람하고 죽을 때 “더 위할 걸 못다 위하고 죽는다” 하고 우는 사람 중에서 어떤 게 더 가치 있느냐? 둘째 번 사람이 낫습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영원히 위하고 또 위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이구, 세상 만사 귀찮고 고통스러운데 씻어 버리고 천국 가면 좋겠다” 합니다. 그런데 천국 가 가지고 “나를 위해라” 하면 지옥에 간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천국 가서 “내가 세상에서 못다 했으니까 하늘나라에 와 가지고 영원히 위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을 갈 것이다” 하는 사람은 천국에 안 간다고 눈감고 돌아다니고, 생각도 안 해도 천국에 가서 산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완전한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그렇지 않더라도 여자를 그렇게 재창조합니다. 계속적으로 재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는 재창조의 능력이 영원히 계속되지만, 이러한 것이 없을 때는 재창조의 능력이 중단됩니다. (129-316)

보다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라

그러면 최고의 행복이 뭐냐? 최고의 사랑의 자리는 어디냐? 최고의 사랑의 자리는 어디서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느냐? 그 자리는 최고로 위하는 자리입니다. 최고로 위하는 자리, 행복의 본궁과 통하는 곳입니다. 만약에 내가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식구가 여덟이면 그 여덟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제일 위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 가정의 센터가 됩니다. 그게 철칙입니다.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천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가 영원히 망하지 않으려면 보다 위하는 사람을 따라가야 됩니다. 보다 위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보다 전체를 위할 수 있는 사람이냐? 그 사람이 주류의 전통을 이어받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 사상만 갖는 한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가인 아벨을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보다 위하려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최고의 천국에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 원칙에 의해 가지고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생 동안을 바치고도 더 위하지 못해서 눈물짓고 가는 사람이 최고의 행복의 본궁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전에 간다는 것입니다. 본궁이 하나님의 어전입니다.


이런 원칙에 의해서 그렇게 갔다면 누가 항의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의례 그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태어나기를 상대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생리기관도 자기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사람은 태어나기를 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자가 가슴이 나온 것이 자기를 위해서예요? 아들딸을 위해서입니다. 궁둥이가 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리적으로 갖고 있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가진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위해서 가진 것입니다. 태어나기를 상대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 관념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게 됩니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다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129-320)

 

오늘날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본궁으로 통하는 길은 위해서 사랑하는 길을 지나는 데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본궁에 연결되는 사다리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선생님이 잘했소! 최고의 행복의 기지, 그 본궁의 세계까지 가는 길, 천국의 최고 끝까지 가는 길을 알았습니다” 하면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129-323)*

 

 

천일국 훈독경 제8권 29일, 원문 

 

 
최고로 행복한 본연의 곳 
 
날짜 : 1983. 12. 1(목)
장소 : 미국
 
인간은 누구든지 행복을 추구하고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공통적인 소원입니다. 그건 동양 사람이나 서양 사람이나 혹은 흑백을 초월하여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귀한 것은 사람
 
행복이란 것은 무엇을 중심삼고 이루어지느냐? 물론 가치면 가치, 무슨 물건이면 물건의 귀한 것을 중심삼고 연관관계를 맺고 찾아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냐? 가치 있는 그 자체를 가지고는 무엇하고든지 대치할 수 있고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세계에서는 보통 생각하기를 돈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지식이라든가 권력을 표방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 인간 자체가 주체적인 입장에 설 때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사람이 소모할 수 있고 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돈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지식이라는 것을 볼 때 거기에 사람이 개재되겠느냐? 사람은 어떠냐 이거예요. 우리가 이것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물건을 중심삼고 그렇게 보고 있는데, 인간 자신을 중심삼고는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편적인 인간들이 지금까지 역사를 통해 찾고 있던 귀하다는 것들을 생각할 때, 그것들이 제1적인 존재냐? 제1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2, 제3의 존재들입니다. 우리 인간말고 이 우주를 볼 때 우주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권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서야 되느냐? 그 모든 것들을 서로 관계를 맺어 주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전부 다 관계를 맺어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리 봐도 사람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세계에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질서를 잡아 주고, 분리를 하고,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가 해 가지고 등급을 매길 수 있지 사람이 없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세계를 생각해 보라구요! 무엇이 중심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기 때문에 보물이 좋은 것이고, 지식이 필요하고, 권력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없다면 어떨까요? 무슨 보물이 필요해요? 지식이 필요해요? 권력이라는 것이 있더라도 권력을 가지고 전권적인 행사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하는 지식이니, 돈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은 동물세계라든가 다른 세계에는 필요치 않습니다. 호랑이 옆에 다이아몬드 몇 천 캐럿이나 몇 만 캐럿이 있더라도 그것을 좋아하겠어요? 책을 갖다 놓든 지식 보따리를 갖다 놓든 알겠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있어 가지고야 귀한 것이 필요하고, 사람이 있어 가지고야 권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관은 절대적입니다.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우주권에서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이 뭐냐?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29-305)
 
중심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그러면 사람이 많은데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귀하냐? 동물세계에는 규범이라든가 생태라는 것이 간단하지만, 인간세계에는 사는 규범이라든가 생태라는 것이 전부 다 역사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면 인간 가운데서 가치 있는 인간, 보다 귀한 인간이 어떤 인간이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동물과 인간이 다른 게 뭐예요? 먹는 것도 마찬가지요, 자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이나 코의 생김새나 구조로 봐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 가운데 귀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몸뚱이의 눈이나 코를 가지고 생활하는 것을 중심삼고 귀하다고 보는 거예요? 무엇을 가지고 귀하다고 보는 거예요? 인간은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육이 합해 가지고 하나의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이 합해서 하나됩니다. 그런데 육을 가지고 사는 생활은 동물적인 생활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먹이를 위해서 활동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이거예요.
인간이 동물과 무엇이 다르냐? 그것이 우주세계에서 귀한 가치를 갖게 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할 때, 그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 아니고 영적인 사람입니다. 영적인 편이 귀하다고 하는 것은 육적인 편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이 높다면 육적인 것이 낮습니다. 또는, 영적인 것이 낮다면 육적인 것이 높습니다. 이 둘이 다를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높은 것이 중심이냐, 낮은 것이 중심이냐? 사람은 높은 걸 좋아합니다. 깊은 곳이 있어 가지고 높은 곳이 시작돼요, 높은 곳이 있어 가지고 깊은 곳과 낮은 곳이 시작돼요? 사람들이 깊은 골짜기를 좋아해요, 높은 산꼭대기를 좋아해요? 어느 것을 좋아해요? 높은 것을 좋아합니다.
왜 깊은 곳은 싫어해요? 높은 곳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다양한 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모든 것이 눈에 다 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 가면 많던 것이 점점 없어집니다. 상대했던 게 점점 잘려 버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높은 곳을 왜 좋아하느냐? 높은 곳에서는 다양한 세계와 내가 관계를 맺어서 내가 주체적인 입장에서 전체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깊은 곳에서는 반대입니다. (129-307)
사람은 왜 높은 걸 좋아하느냐? 다양한 것과 인연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을 좋아합니다. 왜 낮은 걸 싫어하느냐? 낮으면 단순해지고 다양한 관계에서 멀어집니다. 사람들 가운데 귀한 사람은 높은 이상, 높은 관, 높은 것과 관계를 맺겠다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귀한 사람이라고 하는 개념을 여기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정신적인 자세가 높은 자리에 가 있는 사람이 귀한 사람입니다. 몸뚱이는 마찬가지지만 정신적인 자세가 낮은 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영적인 기준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고 육적인 기준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낮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육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자기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은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높은 사람은 전체를 위하고 전체와 관계를 맺고 있지만, 낮은 사람은 전체를 떠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다 높고 넓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위하고, 주고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귀합니다.
육적인 인간은 동물적인 인간이고, 영적인 인간은 정신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면 동물적인 인간과 정신적인 인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물적인 인간은 무가치하고 정신적인 인간은 유가치합니다. 질(質)로 보면 무엇이 다르냐? 동물적인 인간은 자기를 위주해서 사는 사람이요, 정신적인 인간은 전체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게 될 때, 우리가 보편적인 개념을 집어넣을 때 어떻게 사는 것이 정신적인 사람이냐? 전체를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레버런 문이 여러분에게 위하여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위하여 살면 좋으냐 이거예요. 그것은 센터, 중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중심자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됩니다. 모든 것을 책임지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중심자입니다.
그러면 센터로서 위하여 사는 데는 어떻게 사느냐? 전부가 다 좋아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모두가 환영하는 것은 어떤 것이냐? 눈으로 보기에 좋고, 귀로 듣기에 좋고, 느끼기에 좋고, 만지기에 좋고, 대하기에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무엇이 보기 좋으냐 하면 조화된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되라는 것입니다. 될 대로 된 것이 아니라 서로 하나된 그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둥글둥글 돌아가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플러스인 남자하고 마이너스인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 둘이 만나 가지고 서로 “당신은 나를 위하소” 하고 한 마디만 하면 관계가 다 끝나 버립니다. 취미라든가 재미의 세계는 완전히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당신 나를 위하소” 하고, 또 여자는 “아니, 당신이 나를 위하소”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동이 스톱됩니다. (129-308)
 
지상의 하늘나라, 천상의 하늘나라
 
우리의 눈이 나를 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상대를 보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상대를 보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눈은 남을 보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 나를 보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입은 뭐예요? 입이 나를 위해서 말하라고 생겼어요? 입이 나를 위해서 생긴 것 같지만 상대를 위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상대를 위해서 말이 필요하지 나를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닙니다. 혼자 있을 때 말하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입니다.
귀는 어때요? 내 귀가 내 말을 듣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코는 냄새를 맡기 위해서 있는데 자신의 냄새를 맡기 위해서 있어요? 또, 촉감이 나를 느끼기 위해서 있어요? 상대를 느끼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촉감이 나를 느끼기 위해서 있는 게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오관은 내게 있지만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해서 있는 오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오관이 좋아하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 “날 위해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오관이냐, “남을 위해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오관이냐? 우리의 오관이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남을 위하려고 하는 사람을 기쁘게 환영하게 되어 있지 자기를 위하라고 하는 사람을 기쁘게 환영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는 눈을 감으려고 하고, 귀를 막으려고 하고, 코를 막으려고 합니다.
누가 나와 가지고 “아이구! 눈이 참 아름답고, 코도 아름답구나. 야, 만지고 싶다. 사랑스럽다” 이래야 좋아하지 “너는 나를 위해라, 이놈아” 그러면 전부 다 싫어합니다. 전부 다 자기를 위해주려고 할 때는 좋아합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자기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본연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하, 나도 남들이 나를 위해주는 것이 좋기 때문에 내가 전체 사람들한테 좋은 사람으로 취급을 받으려면 전체 사람들을 위해야 되겠구나! 그래야 좋은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이 쏙 들어옵니다.
내 발한테 물어 보기를 “너 어디 가고 싶어? 너를 위해주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어, 너보고 위하라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어" 할 때, 발은 말하기를 “아, 나를 위해주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어요” 한다는 것입니다. 손에게 말하기를 “너 어떤 사람을 만지고 싶어? 너를 위해주는 사람을 만지고 싶어, 너보고 자꾸 위하라고 하는 사람을 만지고 싶어? 어떤 거야” 해도 전부 다 대답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이제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보다 좋은 것은 뭐냐? 이 원칙으로 볼 때 “보다 넓고, 보다 높고, 보다 깊게 위하여 사는 사람이다. 그가 보다 높은 사람이다” 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보다 좋다는 것이 무슨 말이에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까지 위하려고 하는 사람이 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최고의 사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 제일 위대한 사람이 누구냐? 예수님 같은 사람이 제일 위대한 사람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까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원수까지 위해서 살겠다고 했으니까 인간으로서는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상한 세계는 원수가 없어질 수 있는 세계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원수가 있을 수 없는 세계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서로 위해주면서 살 수 있는 세계가 지상의 하늘나라이고 천상의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9-310)
 
위하여 사는 사랑을 중심삼은 것이 최고의 이상형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한 자리가 어떤 자리냐? 그곳은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최고로 행복한 곳은 어디에 있을 것이냐? 행복한 사람들이 좋아서 모여 사는 곳이 행복한 곳입니다. 그런 행복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데는 무엇을 중심삼고 모여 살까요? 행복한 돈, 행복한 지식, 행복한 권력이에요?
돈이 나를 위해서 있어요? 권세가 나를 위해서 있어요? 권세가 매일같이 “당신 좋습니다” 하고 위로해 줘요? 지식이 그래요? 그런 존재는 사람 외에는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은 무엇을 중심삼고 하나되어 있을 것이냐? 뭘 갖고 뭉쳐 가지고 살겠느냐는 말입니다. 단순히 밥 먹는 것, 행복한 음식이에요? 그것은 행복한 사랑입니다. 최고의 행복한 사랑이 뭐냐? 서로 위하겠다는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라는 결론이 딱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소, 널뛰는 것 있잖아요? 한 번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또 올라갑니다. 그래야 운동이 됩니다. 그런데 올라간 사람이 “나는 올라가는 게 좋아” 하면서 올라가서 떠억 버티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높이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해야 좋습니다. 빨리 내려가려고, 힘있게 내려가려고 높이 올라갑니다. 힘있게 내려갈 때는 누구를 위해서 내려가느냐? 일시적으로 나는 손해입니다.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그렇지만 저쪽은 삥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는 이러한 분석적인 관에 의해서 위하여 살라는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결론입니다. 위하여 사는 사랑을 중심삼은 것이 최고의 이상형이라는 결론을 딱 지은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하고, 사랑은 안 받고 자꾸 사랑하려고만 하니까 자꾸 올라갑니다. 이것이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래서 레버런 문은 스마트한 레버런 문이기 때문에 이렇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분석해 보고 아무리 계산해 봐도 틀림없기 때문에 이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세계적이요, 온 우주가 환영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영원한 운동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레버런 문이 말하는 건 언제든지 위하여 살라고 하는 것인데, 그거 뭐 간단하지” 이렇게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위하여 사는 것이 제일 멋지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좋은 사람도 와서 네 활개를 뻗치고 10년이고 편안히 그저 쿨쿨 자려고 하고 쉬려고 하지 어디로 떠나려고 안 합니다. 사람이 어디에 가 머물고 싶어하느냐? 전부를 위하겠다는 사랑의 환경에 가 가지고 네활개 펴고 낮잠 자고 “사랑이 좋아. 이곳이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본거지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 다음에는 어떻게 해요? 영원한 사랑의 풀에 달라붙어서 발을 뺄래야 뺄 수 없고, 아주 짓이겨져 눈이고 뭣이고 엉망진창이 되었다고 하면 어떻겠어요? 사랑의 풀에 눈이고 손이고 다 달라붙어 꼼짝못하게 되면 어떻겠느냐구요? 그러면 불행하겠어요, 행복하겠어요? 여러분은 거기에 얼마나 머물기를 원해요? 영원히 머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하는 사랑 앞에서는 종이 되고, 엉망진창으로 내가 거기서 이용당하더라도 영원히 행복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129-312)
 
위하는 사랑의 본체
 
남자라는 동물은 결혼해 가지고 여자의 노예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여자란 동물도 남자의 노예가 되어도 좋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럴 수 있는 동기가 무엇이냐? 무엇이 더 값있는 것이냐? 사랑의 노예가 값진 것이냐, 사랑의 안식처가 값진 것이냐? 어떤 거예요? 사랑의 노예가 더 값집니다. 이 자체가 우주적인 혁명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선생님이 아침마다 나타나서 위하여 살라고 하던 것이 여러분의 귀에 거슬렸고, 눈에도 그랬고, 느낌도 싫었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여자들! 나를 보다 위하는 사랑이 좋겠어요, 덜 위하는 사랑이 좋겠어요? 더 사랑하는 것이 좋지요? 그러면 어떤 것이 나를 더 위하는 사랑이에요? 위하고 또 위하려고 하고, 내 생명을 버리더라도 위하려고 하고, 내 일생을 버리더라도 위하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그게 더 위하는 사랑입니다. 생명을 버리고, 그 다음에는 일생을 버리더라도 사랑하려고 하고 위하려고 하는 사랑입니다. 영원히 위하려는 사랑 앞에 인간은 완전히 정착합니다.
레버런 문은 아무것도 없더라도 그 세계에 가서 살고 싶은데, 여러분은 어때요? 여러분은 어디에 가서 살래요? 여러분도 그런 곳에 가서 살고 싶지요? 남자나 여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알았습니다. 그 최고의 행복의 본궁이 어디냐? 오늘 제목인 ‘최고로 행복한 본연의 곳’이 어디냐? 그곳은 영원 무궁토록 위하는 사랑을 중심삼고 좋을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는 남자의 상대가 존재하면 눈을 가지고 보는 데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걸 좋아합니다. 손이 어떻게 생기고 눈이 어떻게 생겼든 봐도 또 보고 싶고 또 봐도 좋다는 것입니다. 십 년이나 백 년이 아니라 영원히 들여다봐도 좋습니다. 입이 속삭이는 데도 그런 상대가 있으면 영원히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영원히 움직여도 싫지 않고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가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듣는 데도 그런 사람에게는 십년 백년 들어도 좋습니다. “또 해라, 또 해라” 그런다는 것입니다. 천 년 가더라도 “또 해라”, 만 년 가더라도 “또 해라. 또 듣고 싶다” 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경지, 그것을 어디서 찾겠느냐 이거예요. 이제는 알았습니다. 위하는 사랑의 세계에서만이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상적인 인간은 어떤 인간이냐? 최고의 가치적인 인간이 어떤 것이냐? 그 결론도 간단합니다. 일생 동안, 의식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간 동안, 죽을 때까지 만우주를 위하여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남녀노소를 위하여 사랑하기에 미쳐서 산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고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런 사랑은 우주를 포괄하고도 남고, 우주를 통하고도 남고, 우주와 화하고도 남습니다. 그게 뭐냐? 생명의 원동력이요, 운동의 원동력이요, 모든 것의 원동력입니다.
그런 사랑이 있는 데서 비로소 생명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서 이상적인 것도 나옵니다. 거기서 “하하하…” 하고 웃더라도 이상적입니다. “엉엉엉…” 울더라도 사랑 때문에 운다면 이상적인 울음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슬플 때도 눈물이 나오고 좋을 때도 눈물이 나옵니다. 울음의 세계나 지옥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행복을 알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하나의 힘은 오직 전체를 위하여 살겠다는 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일 것이냐? 그런 것을 좋아하시는 주체입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이 가진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위하는 사랑의 본체입니다. (129-314)
 
사랑이 있기 때문에
 
천국이란 어떤 곳이냐? 위하여 살다가 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위하는 사랑의 길을 그리며 간 사람들이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오늘날 이 세계를 천국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개념이 있다면 레버런 문이 주장하는 이것입니다. 찾아보라구요! 이런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그러한 천국과 가까운 나라예요, 동떨어진 나라예요? 동떨어진 나라입니다. 천국에서 제일 먼 곳이 어디예요? 지옥입니다. 그러면 지옥에서 사는 것이 좋아요? 여자들이 경대에 앉아서 화장하는 것은 “아이구, 나를 사랑해다오! 나를 생각해다오” 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름답게 보이려고 그렇게 하지요? 그것은 사탄 편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비가 알록달록하고 예쁘거나 꽃이 아름다운 것은 전체를 좋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화장하는 것은 꽃과 같이, 나비와 같이 전체를 좋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다” 하면 아무리 화장을 많이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달라집니다. 하나는 지옥이요, 하나는 천국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정을 위하여 사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보다 가치 있는 것이요, 가정을 희생시켜서 보다 큰 종족을 위하여 사는 가정이 보다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종족이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며 산다면 보다 가치 있는 종족입니다. 보다 가치 있는 민족, 보다 가치 있는 국가, 보다 가치 있는 세계로 더 큰 것을 위해 나가서 맨 나중에는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는 것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통일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산다고 결론지어 가지고 여러분을 냅다 모는 것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행복의 자리에 가고 싶어요, 중간 행복의 자리에 가고 싶어요, 낮은 행복의 자리에 가고 싶어요? 어떤 거예요? 최고의 행복의 자리에 가고 싶은 것입니다. 일생 동안 남을 위해서 살고 임종시에 가 가지고 “아, 나는 남을 위해서 다 살았다” 이러는 사람하고 “아이구! 죽음아, 물러가라! 나는 남을 위하여 못 살았구나” 하는 사람의 두 종류가 있다면, 어떤 것이 보다 행복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행복한 자리에 있느냐 이거예요.
또, 같은 자리에서 위해서 산 사람이 힘을 다하고 죽을 때 돌아보며 “그래도 내가 잘살았다” 하는 사람하고 죽을 때 “더 위할 걸 못다 위하고 죽는다” 하고 우는 사람 중에서 어떤 게 더 가치 있느냐? 둘째 번 사람이 낫습니다. 그 말은 뭐냐하면 영원히 위하고 또 위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아이구, 세상 만사 귀찮고 고통스러운데 씻어 버리고 천국 가면 좋겠다” 합니다. 그런데 천국 가 가지고 “나를 위해라” 하면 지옥에 간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수작을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 가서 “내가 세상에서 못다 했으니까 하늘나라에 와 가지고 영원히 위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을 갈 것이다” 하는 사람은 천국에 안 간다고 눈감고 돌아다니고, 생각도 안 해도 천국에 가서 산다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보는 천국관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는 천국관이 얼마나 달라요! 기성교회와 통일교회의 본질이 얼마나 달라요! 어떤 것이 천국이겠어요? 통일교회가 바라보는 세계가 천국이겠어요, 나를 위하고 내가 영광받겠다고 하고 내가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 있는 곳이 천국이겠어요? 여러분은 어떤 천국을 갈래요? 기성교회가 말하는 천국 갈래요, 통일교회가 말하는 천국 갈래요? 통일교회가 가는 천국에 가야 합니다.
거기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얼마나 삭막하고 비참하겠어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복되고 행복한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곳에는 완전한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그렇지 않더라도 여자를 그렇게 재창조합니다. 계속적으로 재창조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거기에는 재창조의 능력이 영원히 계속되지만, 이러한 것이 없을 때는 재창조의 능력이 중단됩니다. (129-316)
 
보다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라
 
그러면 최고의 행복이 뭐냐? 최고의 사랑의 자리는 어디냐? 최고의 사랑의 자리는 어디서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느냐? 그 자리는 최고로 위하는 자리입니다. 최고로 위하는 자리, 행복의 본궁과 통하는 곳입니다. 만약에 내가 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식구가 여덟이면 그 여덟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 그 누구보다도 그들을 제일 위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는 그 가정의 센터가 됩니다. 그게 철칙입니다. 나라 안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천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통일교회가 영원히 망하지 않으려면 보다 위하는 사람을 따라가야 됩니다. 선거제고 무엇이고 필요 없습니다. 보다 위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을 비교할 때, 자기가 책임자가 되겠다고 싸우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다 전체를 위할 수 있는 사람이냐? 그 사람이 주류의 전통을 이어받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 사상만 갖는 한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습니다. 가인 아벨을 대번에 아는 것입니다. 보다 위하려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오늘 여기에 아프리카에 선교하러 갔던 사람들도 오고 여러 지역의 책임자들도 왔는데, 어디서든지 보다 위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책임자가 됩니다. 편안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막혀 버립니다. 그렇게 막혀 버린 그대로 가다가는 자기의 여편네와 아들딸까지 전부 다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가인 아벨도 그렇잖아요? 보다 희생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인물이라고 그저 버티고 앉았던 사람들은 이제부터 보라구요! 오래 가지 않아 추방당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천국에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이 원칙에 의해 가지고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생 동안을 바치고도 더 위하지 못해서 눈물짓고 가는 사람이 최고의 행복의 본궁에 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전에 간다는 것입니다. 본궁이 하나님의 어전입니다.
이런 원칙에 의해서 그렇게 갔다면 누가 항의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의례 그럴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갔다면 참소합니다. 모두가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 손이 누구를 위하여 있다구요? 상대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태어나기를 상대를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생리기관도 자기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사람은 태어나기를 남을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여자가 가슴이 나온 것이 자기를 위해서예요? 아들딸을 위해서입니다. 궁둥이가 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리적으로 갖고 있는 것도 자기를 위해서 가진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위해서 가진 것입니다. 태어나기를 상대를 위해서 태어났다는 이 관념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남자와 여자가 하나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게 됩니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다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회사에서 일할 때도 “우리 식구들을 벌어먹이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것과 “내가 먹기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가치 있어요? 식구를 위해서 일한다는 것이 보다 가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부모를 위하고, 처자를 위하고, 그 다음에 그 위하는 환경에 따라서 나도 위하고 산다면 얼마나 멋지냐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는 식구들은 어때요? “어머니 아버지는 나를 위해라” 하면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 가정은 전부 다 산산조각이 안 날 수 없습니다. 깨진다는 것입니다. 깨지는 것은 없어질 징조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원칙입니다.
얼굴에 있는 눈을 보면서 “이 눈이 나를 위해서 생겨났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코도, 귀도, 입도 전부 다 그렇습니다. 여자들은 매일 아침에 얼굴을 보지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변하고 얼마나 달라지느냐? 얼마나 혁명이 벌어지느냐? 그러면 무한히 발전합니다. 무한히 발전하고, 무한한 세계와 무한한 행복이 연결됩니다. 그것이 멸망으로 가는 길이에요, 흥하는 세계로 가는 길이에요? 흥하는 세계로 가는 길입니다. 선생님이 그런 길을 가니까 세상이 망하라고, 다 죽으라고 “통일교회 망해라” 하면서 야단하지만 선생님은 지금까지 발전해 왔습니다.
누가 번영하느냐? 미국이 레버런 문을 반대하는데, 누가 더 흥하고 누가 망할 것이냐? 자유세계가 레버런 문을 반대하고 핍박하는데, 누가 흥하고 누가 망할 것이냐? 종교계도 레버런 문을 핍박하고 반대하지만, 누가 흥하고 누가 망할 것이냐? 이 원칙에 따라서 우주가 보호하고 천리가 보호하기 때문에 레버런 문이 흥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철칙의 길을 가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우리는 당당히 자랑할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생님이 일생 동안, 60평생을 이러다 보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세계는 레버런 문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세계의 유명한 명물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레버런 문을 따라가자” 할 때가 오지 말래도 올 것입니다. (129-320)
오늘날 최하의 자리에서부터 본궁으로 통하는 길은 위해서 사랑하는 길을 지나는 데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거쳐 본궁에 연결되는 사다리입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세계관은 통일교회의 종족권을 “하나님이 원하는 나라를 위해서 희생해라, 희생해라” 하며 때려 모는 것입니다.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보다 큰 것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아 남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불평할래요, 안 할래요? 이것은 틀림없는 길입니다. 이제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선생님이 잘했소! 최고의 행복의 기지, 그 본궁의 세계까지 가는 길, 천국의 최고 끝까지 가는 길을 알았습니다” 하면서 열심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가야 되겠습니다. (129-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