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과 사랑과 은혜 (천일국 훈독경 제8권 6일)

훈독왕 | 20201221192924

천일국 훈독경 제8권 6일

 

희생과 사랑과 은혜 (훈독본) 

- 축복가정 부인 전도대원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

 

날짜 : 1971. 5. 2(일)

장소 : 한국 중앙수련원

 

희생과 사랑과 은혜 (천일국 훈독경 제8권 6일)

사랑의 소재지

 

여러분, 무사통과가 좋지요? 여러분이 어느 살림집에 터억 가면 눈치를 봐요, 안 봐요? 누가 볼까봐 눈치를 보는 것이 좋아요, 누가 봐도 좋다고 하면서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그러는 게 좋아요? 무사통과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무사통과라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무사통과 할 수 있는 사정과 환경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앞에서 아들딸들이 잠자려고 할 때 “어머니 아버지,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무사통과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봉사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는 그렇게도 고생하더니 참 시집을 잘 갔어” 할 때, 그 여자의 남편은 어떤 남자이기에 시집을 잘 갔다고 하겠어요? 그 아내를 밤이나 낮이나 무조건 사랑해 주는 남자라는 것입니다. 그저 언제든지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내가 잘못했소” 하면서 전부 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색시를 사랑하는 그런 남자의 색시가 되었다면 그 색시는 시집을 잘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그렇게 하기를 바라요, 안 바라요?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면 누가 좋아해요? 아들딸이 좋아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서로 좋아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아들딸한테도 좋은 것입니다. 아들딸의 환경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둘이 그렇게 된다면, 그 아들딸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복 중의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하면 남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사랑은 오래 못 갑니다.    

 

여러분의 신랑이 있지요?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그 신랑한테 “당신이 뭐야? 당신이 뭐냐구? 무슨 남자의 사랑이 그래? 당신이 남자니까 더 사랑해 줘야지…” 해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사랑은 끝장이 납니다. (43-308)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할 때 내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할 때 남편 앞에는 색시인 것이요, 색시 앞에는 남편인 것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자기예요, 남이에요? 그 소재지는 남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남을 위하게 될 때만이 본연적인 소재지에서 사랑이 움직이고 꿈틀거립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라구요? 자기 자신이 사랑의 소재지라면 희생하는 것은 소모입니다. 자기 자체가 사랑의 소재지라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자기 자체의 소모에 불과하겠지만, 상대가 사랑의 소재지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당당해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온유겸손하고 높여 주고 희생봉사하는 데서만 사랑이 옮겨올 수 있습니다. (43-310)   

 

사랑의 본질은 희생

 

처녀가 시집을 가기 위해서 준비를 해 놓고 어떤 신랑이 나타날 것인가를 오늘이야 내일이야 기다리고 있는데 이웃 동네의 잘난 미남자로부터 청혼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 남자를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설 것입니다. 내가 구상하던 남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그 남자의 구비조건은 여기에 몇 퍼센트나 합격일까?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구비 조건이 내가 바라던 조건에 백 퍼센트 이상 들어맞고도 남아 가지고 그 사람을 붙들고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던 사람 이상의 사람이기를 바라겠어요, 이하의 사람이기를 바라겠어요? 그 이상의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럼, 시집을 가는 데는 어떻게 가야 될 것이냐? 얼굴이 못생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노력을 해야 되기 때문에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좋은 아들딸을 주시는 데 있어서 그냥 노력해서 잘사는 부부가 있고 얼굴이 못생긴 남편을 만나 가지고 두 배로 노력해서 그냥 노력해서 잘사는 부부만큼 잘사는 부부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부부한테 좋은 아들딸을 주고자 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구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두 배로 노력해 가지고 그냥 노력해서 잘사는 부부만큼 잘사는 부부한테 좋은 아들딸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왜 그러하냐? 사랑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큰 희생의 터전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본질은 희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터전이 있어야만 후대에 남을 수 있는 복덩이의 아들딸을 받을 수 있습니다. (43-311)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행복의 소재지는 사랑이로되,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라구요? 자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목을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이든지 생명을 내놓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답지 못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0세가 된 할머니라고 해도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생명을 단 사흘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심정,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을 하더라도 고마워할 수 있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만 그 부부의 사랑을 참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314)  

 

통일교인들의 의무요, 책임

 

여러분이 가는 동네마다 사람들한테 욕이나 먹고 쫓겨나기를 바라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위해주기를 바라요? 위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이냐? 동네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줌으로써 그 동네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동네가 나를 위하게 되면 한 리(里)의 보고거리가 되어서 점차로 점프하게 됩니다. 한 면(面)에 열 개의 리(里)가 있는데, 그 보고거리가 열 개의 리에 드러났다고 할 때는 운을 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운을 타고 그 보고거리가 면장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군에서 면장들의 회의가 있을 때 그 면장이 군수에게 그것을 보고하면 군수가 “그것이 모든 면 가운데서 제일이다. 아, 그거 훌륭하구만” 하게 되면 또 점프해서 어떻게 되느냐? 군수의 꼭대기를 타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라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세계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갑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올라가기 위해서는 적당히 해 가지고 절대 안됩니다. 생명을 걸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상 큰 사랑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남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희생적인 사랑 앞에는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참다운 자리를 잡아서 열매만 맺게 되는 날에는 날아가는 것입니다. 한도 없이 날아갑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희생하는 길,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을 준비해 놓는 그 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터전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마운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고마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나가서 고생하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겠다는 사람들은 손 들어 봐요!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꼼짝달싹할 수 없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43-316)  

 

사랑의 근거지는 나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가서 열매를 맺을 것이냐? 나에게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복판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나라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도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군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면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리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마지막으로 가정과 내 자체에서 열매가 맺혀야 됩니다. (43-319)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

 

이제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내가 만국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일 대, 이 대, 삼 대, 십 대, 천 대, 만 대를 거친 후라도 아무런 싸움이 없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 완전히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끝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 통일교회도 이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종교는 나 하나 구원받기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가고 희생의 길을 갔지만, 통일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가정을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적인 자리에 서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지에 설 수 있습니다. (43-322)  

 

참사랑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 서로가 희생하는 전통을 갖추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지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연은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들딸이라면 자기 부모에게 절대로 불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서로가 더 위해 주고 더 희생하는 자리가 넓어지게 될 때 그 가정에 복이 찾아옵니다. 그러한 가정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복지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복을 받되 가정만의 복으로서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복을 받되 나라를 돕고 나서 복 받는 가정이 되자는 것입니다. 복을 받되 세계를 돕고 나서 복 받는 가정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천국의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만 중심삼고 복 받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이 복 받는 때가 지나가게 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을 받되 나라를 업고 가정의 복을 받게 되면 내가 가정의 복을 다 누렸더라도 나라의 복을 또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업고 가정의 복을 맞아들이게 된다면 내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세계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올라가서 내가 내 생명을 희생시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하게 되면 다 망하더라도 나는 나중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세계는 백 년 동안, 우리의 일생 동안에 완전히 복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는 몇 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그 복의 때를 찾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복은 안 찾아왔습니다. 아직까지 세계적인 복의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하나되어 하늘땅이 화동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천지의 때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때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43-323)  

 

성인 중의 성인

 

아무리 복을 받은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나라가 비운에 사로잡히게 될 때는 그 나라의 주권과 더불어 그 가정도 휩쓸리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가정은 아무리 망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쳐도 망하는 운세권 내로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과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가정보다 나라가 더 귀합니다. 또, 나라가 아무리 흥하더라도 세계가 망하는 운세로 말려 들어가게 될 때는 그 나라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큰 은혜란 무엇이냐? 은혜가 찾아오는 데 있어서 십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십 년의 은혜요, 백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백 년의 은혜요, 천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천 년의 은혜요, 만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만 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십 년의 은혜를 받고 싶어요, 만 년의 은혜를 받고 싶어요? 통일교회를 믿고 만 년 동안 희생하더라도 틀림없이 이 길을 가겠다는 사람은 손 들어 봐요! 

 

만 년 동안 가기 위해서는 만 년 동안 갈 것을 남겨야 됩니다. 만 년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돈을 남기면, 그것이 만 년 역사의 전통이 되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억천만년 가는 거라구요. 그렇게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억천만년 가는 것입니다. 

 

성인은 내적인 인연과 전통적인 생애와 자각의 실적을 남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에 선 성인의 희생적인 사랑의 도리가 세계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인 중의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최고입니다. (43-325) 

 

큰 은혜와 큰 복이라는 것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리말씀이 이렇다고 말만을 남겨 놓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누가 실천을 하겠어요? 우리가 실천해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도 자식의 뼛골에 사무치도록 사랑하여 그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은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가르침이 그러하니까 자식도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식의 마음이 괴로울 수 있는 내연적인 터전을 상속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년 갈 수 있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대까지 복을 상속시키게 될 때는 영계에서 누가 그 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느냐 하면 여러분이 그 복을 받아 가지고 후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즉, 만년을 복 받게 해준 조상이 그 복을 받아서 후손들에게 나누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후손들이 복을 받는 데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나눠 받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누구의 뜻이냐?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반드시, 큰 은혜와 큰 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비례되는 수고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큰 복을 받기를 원하거든, 천 년의 복을 받기를 원하거든 천 년 동안 그 복이 지탱할 수 있는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복이 남아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개인의 공적을 의지해 가지고는 큰 복을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적인 선한 선조들이 남긴 복의 계대를 받기 위해서, 세계적인 선한 선조들 가운데 자기 조상이 없다면 세계적인 선조와 같은 형의 스승을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성인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성인의 도리를 교육받고 인계받습니다. 그것을 인계받으면 그들이 바라던 소망의 세계를 내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43-325) 

 

역사시대에 한 번밖에 없을 시대

 

기독교를 보게 될 때, 기독교가 예수님과 선조로부터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 과정을 거치는 데 있어서 그 대가를 누가 치러야 되느냐? 예수님이 그러한 것을 심어 놓고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어받은 기독교가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예수님처럼 죽음길을 갑니다. 그렇게 죽고 살고 해서 살아 남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가정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종족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민족적으로 책임을 다하며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나라는 망하면서도 그것은 남아졌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남아질 수 있었던 은사의 터전이 무엇이냐?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에 메시아가 올 수 있는 은사의 터전입니다. 그러면 그 은사의 터전을 아무런 공로도 없이 맞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반드시 내정적인 심정을 중심삼고 탕감의 과정을 거치고 정성들여 점핑해서 타고 넘겠다는 그러한 무엇을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 이상은 없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 그 사랑을 중심삼고 점핑해야 됩니다.  

 

그렇게 점핑하는 데 있어서 자기 리(里)만을 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그 이상 못 갑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리를 위해서 일하는 데 있어서는 세계를 대표해서 일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상은 절대사상입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라는 것은 6천 년뿐만 아니라 몇 천만년 동안 몇 천만대의 수많은 인류가 찾아 나오던 최후의 결실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 개인의 공적과 수고만으로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돼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심정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정은 하나입니다. 심정은 여기에서도 통하고 저기에서도 통합니다. 아담에서부터 출발한 부모의 심정, 부부의 심정, 자녀의 심정을 원칙으로 해서 오늘날 이 시대에도 넓은 범위에서 전체를 걸고 싸워 승리의 터전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선생님을 만나 가지고 뿌리를 잡아서 가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복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억천만년의 수난의 고비를 거치면서 수많은 수고의 대가를 치러 온 터전이 열매로 맺힐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은혜인지,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역사시대에 한 번밖에 없을 시대를 만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10년 동안 통일교회를 따라 나왔다고 해서 그 10년 동안 산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천 년의 한을 품은 심정을 가지고 정성에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 열매로 맺힐 수 있기 위해서는 내 한 몸이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따라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한 기준도 세우지 않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도둑놈입니다. 공 없이, 수고하지 않고 소유를 탐하는 자리에서 도적의 길이 생겨나고 강도의 길이 생겨납니다. (43-328)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리

 

이 놀라운 역사적인 시대에 선생님이 앞서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며, 선생님이 겪어 온 것이 여러분 일대에 당하지 못할 수난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의 도리를 다해야 할 여러분의 기준이 어떤 기준이냐? 여러분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배운 것을 아직까지 실천하지 못한 기준이요, 천명을 받들어 싸움터에 출전하라고 명령했는데도 출전하지 못한 입장이 아니냐! 그렇게 위신을 세워 가지고 남아질 것 같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이렇듯 자기 몸을 가눌 수 없고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불쌍한 신세인데,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체면을 세우고 위신을 갖출 수 있는 이 한 때를 허락하신 것은 둘도 없는 고마운 은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가는 걸음 앞에 하늘의 소망이 찾아올 수 있고, 여러분이 머무는 자리에 하늘의 소식이 싹틀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부터 여러분이 재봉춘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야말로 기적 중의 최고의 기적은 이 일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내 심정을 뜻을 위해서 퍼부을 수 있고 바쳐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는 보고 싶은 남편과 아들딸을 볼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을수록 하늘을 위하는 희생적인 사랑이 생기게 될 것이며, 또 하늘을 위하는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이 넓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가가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복귀할 그 터전이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리가 복스러운 자리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43-336)*  

 

 

천일국 훈독경 제8권 6일, 원문

 

희생과 사랑과 은혜 

- 축복가정 부인 전도대원 수련회에서 하신 말씀 -

 

날짜 : 1971. 5. 2(일)

장소 : 한국 중앙수련원

 

사랑의 소재지

 

여러분, 무사통과가 좋지요? 여러분이 어느 살림집에 터억 가면 눈치를 봐요, 안 봐요? 누가 볼까봐 눈치를 보는 것이 좋아요, 누가 봐도 좋다고 하면서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그러는 게 좋아요? 무사통과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무사통과라는 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무사통과 할 수 있는 사정과 환경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앞에서 아들딸들이 잠자려고 할 때 “어머니 아버지,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요? 무사통과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를 싫다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를 왜 그렇게 좋아하느냐? 부모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봉사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그 여자가 시집가기 전에는 그렇게도 고생하더니 참 시집을 잘 갔어” 할 때, 그 여자의 남편은 어떤 남자이기에 시집을 잘 갔다고 하겠어요? 그 아내를 밤이나 낮이나 무조건 사랑해 주는 남자라는 것입니다. 그저 언제든지 무슨 잘못된 일이 있으면 “내가 잘못했소” 하면서 전부 다 자기가 책임을 지고 색시를 사랑하는 그런 남자의 색시가 되었다면 그 색시는 시집을 잘 갔어요, 못 갔어요? 잘 갔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잘 갔지요? 또, 그렇게 희생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신랑이라면 그 신랑도 장가를 잘 갔어요, 못 갔어요?

그러면 여러분의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그렇게 하기를 바라요, 안 바라요?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희생적인 사랑을 주고받으면 누가 좋아해요? 아들딸이 좋아합니다. 그렇게 부모가 서로 좋아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이 아들딸한테도 좋은 것입니다. 아들딸의 환경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둘이 그렇게 된다면, 그 아들딸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복 중의 최고의 복이 무엇이냐 하면 남을 위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한 사랑은 오래 못 갑니다. 여기에도 유순한 처녀들이 있지요? 얼굴을 보나 마음을 보나 유순한 처녀들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 꼭 찔러 보고, 두 번 꼭 찔러 보고, 세 번 찔러 보고, 네 번까지 꼬집어 보면 토라집니다. 이 순한 처녀들도 자기 자신만을 중심삼고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비교하다 보면 적막강산이 됩니다. “여자는 세상에 불쌍하게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사랑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갈라집니다.

여러분의 신랑이 있지요?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그 신랑한테 “당신이 뭐야? 당신이 뭐냐구? 무슨 남자의 사랑이 그래? 당신이 남자니까 더 사랑해 줘야지…” 해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남편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은 사랑은 끝장이 납니다. (43-308)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할 때 내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참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할 때 남편 앞에는 색시인 것이요, 색시 앞에는 남편인 것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자기예요, 남이에요? 그 소재지는 남입니다. 그러한 천지이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가 필요합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이기 때문에 상대에게 머리를 숙이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해야만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원칙입니다. 그래서 봉사하고, 희생하고, 남을 위하게 될 때만이 본연적인 소재지에서 사랑이 움직이고 꿈틀거립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라구요? 자기 자신이 사랑의 소재지라면 희생하는 것은 소모입니다. 자기 자체가 사랑의 소재지라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은 자기 자체의 소모에 불과하겠지만, 상대가 사랑의 소재지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당당해 가지고는 안되는 것입니다. 온유겸손하고 높여 주고 희생봉사하는 데서만 사랑이 옮겨올 수 있습니다.

사랑의 소재지는 상대방입니다. 사랑의 소재지가 상대방이기 때문에 상대방을 완전히 점령하기 전에는 내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사랑이라고 하려면 상대를 완전히 점령해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내 사랑이 안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한테 “나는 이렇게 잘났기 때문에 당신 같은 여자가 본래부터 나를 사랑하게 되어 있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여자는 여자가 아니오” 하면서 큰소리를 친다면 처음에 한두 번은 잘 들어주겠지만 밥먹듯이 자꾸 그러면 한번 복수하고 싶어지고 그런가, 안 그런가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여자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소재지는 자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겠어요? 자기 자신한테 있어요? 나라에 있습니다. 세계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에 있느냐? 세계에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세계를 위하여 봉사해야 됩니다. 모두가 봉사하는 가운데서도 생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으면 생명을 내놓고 적극적으로 희생하려고 하는 그 사람 앞에 먼저 사랑의 인연이 맺어질 것입니다. (43-310)

 

사랑의 본질은 희생

 

처녀가 시집을 가기 위해서 준비를 해 놓고 어떤 신랑이 나타날 것인가를 오늘이야 내일이야 기다리고 있는데 이웃 동네의 잘난 미남자로부터 청혼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시집가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처녀라면 모르지만, 시집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는 아가씨라면 시집을 가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장가를 오겠다는 사람이 없으면 섭섭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집가고 싶은데 장가를 오겠다는 사람이 있으니까 기분이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기분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것입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그 남자를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설 것입니다. 내가 구상하던 남자는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그 남자의 구비조건은 여기에 몇 퍼센트나 합격일까?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구비 조건이 내가 바라던 조건에 백 퍼센트 이상 들어맞고도 남아 가지고 그 사람을 붙들고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가 바라던 사람 이상의 사람이기를 바라겠어요, 이하의 사람이기를 바라겠어요? 그 이상의 사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남자가 동시에 세 사람이 나타났다고 할 때는 한 사람만 보고 싶겠어요, 아니면 세 사람을 다 보고 싶겠어요? 다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꺼번에 백 사람이 나타났다고 할 때는 어떻겠어요? 그때에는 “그저 눈을 감고 닥치는 대로 한 사람을 택하지 뭐…” 그래요? 백 사람이 한꺼번에 장가를 오겠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을 일일이 다 만나 봐야 되겠어요, 안 만나 봐도 되겠어요?

그 백 사람을 전부 만나 보는데 1번 퇴짜놓고, 10번 퇴짜놓고, 30번 퇴짜놓고, 60번을 퇴짜놓았다고 할 때 나머지의 사람들이 붙어 있겠어요? 그래도 남아 있는 녀석은 미련한 녀석입니다. 그렇게 60번까지 내려가면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갈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을 잘해야 됩니다. 출발을 잘못했다가는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시집을 가는 데는 어떻게 가야 될 것이냐? 시집을 어떻게 갈 것이냐? 생각해 보라구요! 얼굴이 못생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더 노력을 해야 되기 때문에 희생적인 사랑이 필요합니다. 희생적인 사랑이 행복이라면, 두 배의 희생을 해 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그냥 희생해 가지고 사랑하는 것보다 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좋은 아들딸을 주시는 데 있어서 그냥 노력해서 잘사는 부부가 있고 얼굴이 못생긴 남편을 만나 가지고 두 배로 노력해서 그냥 노력해서 잘사는 부부만큼 잘사는 부부가 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어떤 부부한테 좋은 아들딸을 주고자 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구요! 내가 하나님이라도 두 배로 노력해 가지고 그냥 노력해서 잘사는 부부만큼 잘사는 부부한테 좋은 아들딸을 주고 싶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왜 그러하냐? 사랑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보다 큰 희생의 터전이 있어야 됩니다. 사랑의 본질은 희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터전이 있어야만 후대에 남을 수 있는 복덩이의 아들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느냐? 백 사람이 장가를 오겠다면 그들을 상대로 선을 볼 것이 아니라 “남자라면 아침이나, 대낮이나, 밤이나, 언제든지 사랑할 자신이 있소? 나에게 장가오고 싶거든 여러분끼리 그 시합을 해서 최후에 남아지는 남자가 오시오” 해야 됩니다. 여자가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자들은 “야, 그 여자 멋지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경쟁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너 그 여자한테 장가갈 거야” 할 때 가겠다고 하면, “이놈, 정말이야? 나하고 생명을 걸고 싸울 거야? 나와라! 벌써, 나는 생명을 걸 각오를 했다” 하면서 얼굴도 보지 않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백 사람들 가운데 맨 나중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될 것입니다. 다 싸워 넘어뜨리고 맨 나중에는 두 사람이 싸워 가지고 어떤 사람이 남느냐 하면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한 사람이 남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을 보지 않고 시집을 가더라도 시집을 잘 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렇게 남아진 남자가 애꾸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애꾸눈의 신랑을 생각해 봤어요? 그렇게 되었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만일에 처녀가 약속하기를 싸워서 맨 나중까지 남아진 사람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했다면 최후에 남아진 사람이 애꾸눈이 아니라 봉사라도 그 사람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어요, 안 가야 되겠어요?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한테 시집을 안 가면, 그 처녀는 생과부보다 못한 여자가 됩니다. 시집을 못 간다는 것입니다. 백여 명의 남자들을 싸움을 붙여 놓고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간나라고 레테르가 붙게 되면, 그 여자는 시집을 못 갑니다. 그렇게 약속을 했으면, 그 사람이 비록 봉사라고 할지라도 시집을 가야 되는 것입니다.

봉사 신랑을 맞아 보라구요! 비록 앞은 못 보지만 사랑은 제일일 것입니다. 그럴 것 아니겠어요? 그렇게 생각해 보면 눈이 안 보인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다리가 하나 없다고 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3-311)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

 

행복의 소재지는 사랑이로되, 사랑의 소재지는 어디라구요? 자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려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됩니다. 세계를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목을 내놓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랑이든지 생명을 내놓지 못하는 사랑은 사랑답지 못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0세가 된 할머니라고 해도 자기의 사랑하는 남편의 생명을 단 사흘이라도 연장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심정,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치는 희생을 하더라도 고마워할 수 있는 심정을 갖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어야만 그 부부의 사랑을 참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참사랑을 다 좋아하지요? 여러분은 이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은 통일교회의 문 선생이라는 사람이 단에 서 가지고 “잘먹고 잘살아라! 포동포동하게 겹살이 쪄 가지고 말이나 돼지처럼 살아라” 하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이 나타나면 “또 뭐 고생하라는 타령이 나올 것 같구만! 두고 보자! 내가 점친 것이 백발백중일 것이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백발백중하는 것이 참입니다. 늙은이가 들어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이요, 젊은이가 들어 보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얘기를 했다고 하면 반드시 고생하라는 얘기부터 하는데, “우리와 무슨 원수가 졌길래 이렇게 고생을 시키려고 하느냐” 할 것입니다. 내가 알고 보니까 고생시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시키는데 나를 위해서 고생시키면 망합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고생시키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을 위해서 고생시키면 흥합니다. 왜냐하면 남을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은 사랑을 점령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위해서 수고할 때는 그 수고의 대가로 반드시 받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그 사람의 사랑입니다.

통일교회의 여자들 중에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선생님을 좋아해요? 약방에서 언제든지 제일 필요로 한다는 감초같이 선생님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고생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지 잘살아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고생하기 때문에 선생님을 좋아하지 잘만 살아 보라는 거예요. 선생님을 언제 알았더냐 하고 꿈도 안 꿀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이 꿈도 안 꾸게 되면 다 망하겠기 때문에 여러분을 고생시켜 가지고 꿈이라도 꾸게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대하는 것이 도리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결과가 되고 여러분이 선생님을 사랑할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 여러분은 선생님을 사랑하지요?

또, 한 가지 물어 보자구요. 여러분 중에서 몽시나 기도 중에 가끔씩 선생님을 만나 보는 사람이 있으면 손 들어 봐요! 이것이 사고입니다. 왜 그러하냐? 이것이 심상치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이 몽시로는 언제나 선생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선생님이 오빠와 같이 나타나서 손을 붙잡고 꽃동산에서 활개를 펴고 뛰어다닙니다. 여러분과 나는 원수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존중합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동네에서 손가락질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이 마을과 저 고을에서 “아, 저 사람…” 하면서 손가락질받기를 원하겠어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은, 그 나라의 여자 축에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겠어요?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여자들이면 여자들, 남자들이면 남자들이 사는 세상에서 축에도 못 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겠어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43-314)

 

통일교인들의 의무요, 책임

 

여러분이 가는 동네마다 사람들한테 욕이나 먹고 쫓겨나기를 바라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위해주기를 바라요? 위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 나가는 가장 빠른 길은 무엇이냐? 동네를 위하여 정성을 들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줌으로써 그 동네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동네가 나를 위하게 되면 한 리(里)의 보고거리가 되어서 점차로 점프하게 됩니다. 한 면(面)에 열 개의 리(里)가 있는데, 그 보고거리가 열 개의 리에 드러났다고 할 때는 운을 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운을 타고 그 보고거리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리에서 삥 돌고 쭉 드러나면 면장의 꼭대기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면을 탄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그렇게 점프되어 올라갈 때 면장이 이장들을 불러 놓고 각 리의 특별한 사연이 무엇이냐고 해 가지고 보고를 받으면 그 보고거리가 일등이 됩니다.

그러고 나서 군에서 면장들의 회의가 있을 때 그 면장이 군수에게 그것을 보고하면 군수가 “그것이 모든 면 가운데서 제일이다. 아, 그거 훌륭하구만” 하게 되면 또 점프해서 어떻게 되느냐? 군수의 꼭대기를 타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나라로 갑니다. 작은 동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올라가느냐? 나라로 올라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세계로 갑니다.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가느냐? 하늘나라로 갑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얼렁뚱땅 적당히 해 가지고 되겠어요? 그래서는 절대 안됩니다. 생명을 걸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이상 큰 사랑이 없다는 말도 그래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남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희생적인 사랑 앞에는 머리를 숙이기 때문에 참다운 자리를 잡아서 열매만 맺게 되는 날에는 날아가는 것입니다. 한도 없이 날아갑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고 싶은 것이 선생님의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생명이 다할 때까지 수고하고 고생하여 희생적인 사랑의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주의고 하나님주의입니다. 예수님은 민족의 반역자로 몰려서 죽었지만 그 행적은 하늘나라까지 올라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 자기의 생명을 바쳐서 희생하는 길,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을 준비해 놓는 그 길만이 영원히 남아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그 터전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분을 희생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마운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고마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나가서 고생하면서 그렇게 고생하는 것을 고맙다고 생각하겠다는 사람들은 손 들어 봐요!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꼼짝달싹할 수 없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 주었습니다. (43-316)

 

사랑의 근거지는 나 자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 가서 열매를 맺을 것이냐? 나에게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복판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나라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도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군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면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리의 복판에서 열매가 맺혀야 되고, 마지막으로 가정과 내 자체에서 열매가 맺혀야 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탕감을 거쳐야 가정으로 발전해 나가고, 가정적인 탕감을 거쳐야 종족으로 발전해 나가고, 종족적인 탕감을 거쳐야 민족으로 발전해 나가고, 민족적인 탕감을 거쳐야 국가로 발전해 나가고, 국가적인 탕감을 거쳐야 세계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희생적인 사랑을 깊이 뿌리기 위하여 생명이 다할 때까지 몸부림쳐 나가야 하는 것이 심정세계를 창건하기 위한 우리 통일교인들의 의무요, 책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43-319)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

 

여러분, 남을 위해서 살더라도 어떤 때는 참 슬플 때가 있지요? 그저 쓸쓸하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원수와 마지막 판가리의 싸움을 할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에요. 그러면서 통일교회를 발전시켜 나왔습니다. 여자들은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동원해서 단결만 된다면 살아 있는 호랑이도 그냥 잡을 수 있습니다. 지독한 게 여자입니다. 우리가 만난 인연이라는 것은 간단한 인연이 아니라 아주 큰 인연입니다.

이제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행복은 무엇이냐? 내가 만국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면 일 대, 이 대, 삼 대, 십 대, 천 대, 만 대를 거친 후라도 아무런 싸움이 없이 세상을 정복할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고, 한 사람에게도 피해를 입히지 않고 완전히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끝날을 맞이할 수 있는 길은 이 길밖에 없기 때문에 현재 통일교회도 이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 길을 개척해 나오셨습니다. 이 길을 중심삼고 시범을 보인 것이 예수님이 이 땅 위에서 간 노정이었습니다. 그것이 틀렸느냐, 맞았느냐? 사람들이 죽어도 망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더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을 중심삼고 전세계가 하나될 수 있는 자리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전통적인 사상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 전통적인 사상을 선생님이 더욱더 꽃피우고 빛내야 되겠습니다.

과거에는 종교가 남자와 여자를 분리시켜 놓고 가정을 부정하던 길을 갔지만, 오늘날 통일교회는 가정을 이루어 그 가정이 몽땅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한 날을 맞게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가정 전체가 나라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게 해주자는 사상은 역사상에 처음으로 나왔습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종교는 나 하나 구원받기 위해서 순교의 길을 가고 희생의 길을 갔지만, 통일교회는 그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가정을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세계를 사랑하기 위해서 가정이 희생적인 자리에 서게 되면 영원히 하나님 편에 설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근거지에 설 수 있습니다. (43-322)

사랑의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 혼자서 사랑이 필요하시겠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게 되면 하나님 자체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소재지가 어디냐 하면 희생 봉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그 전통을 고스란히 꽃피우고 향기를 내며 열매를 거두어 줄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서 가정을 중심삼고 사랑의 터전을 이루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참사랑이 무엇이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 서로가 희생하는 전통을 갖추지 않으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깨어지는 법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인연은 깨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난 아들딸이라면 자기 부모에게 절대로 불효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서로가 더 위해 주고 더 희생하는 자리가 넓어지게 될 때 그 가정에 복이 찾아옵니다. 그러한 가정이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복지인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복을 받되 가정만의 복으로서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복을 받되 나라를 돕고 나서 복 받는 가정이 되자는 것입니다. 복을 받되 세계를 돕고 나서 복 받는 가정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정이 천국의 가정입니다. 우리 가정만 중심삼고 복 받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가정이 복 받는 때가 지나가게 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복을 받되 나라를 업고 가정의 복을 받게 되면 내가 가정의 복을 다 누렸더라도 나라의 복을 또 누릴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를 업고 가정의 복을 맞아들이게 된다면 내가 망하고 나라가 망하더라도 세계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남아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올라가서 내가 내 생명을 희생시켜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하게 되면 다 망하더라도 나는 나중에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이냐? 일대에 수고한 터전 위에서 복 받기를 바라는 가정은 진짜 복 받을 수 있는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고로 사람들은 선한 조상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복이 선대로부터 상속되어 내려오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을 존중시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전통을 이어받으라고 합니다.

세계는 백 년 동안, 우리의 일생 동안에 완전히 복귀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는 몇 천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그 복의 때를 찾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복은 안 찾아왔습니다. 아직까지 세계적인 복의 시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세계가 하나되어 하늘땅이 화동하고 기뻐할 수 있는 세계적인 천지의 때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세계가 그때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야 됩니다. (43-323)

 

성인 중의 성인

 

오늘날 대한민국을 중심삼고 볼 때, 대한민국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백성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국가적인 복을 아직까지 받지 못했습니다. 그 국가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는 남북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냐? 남북한의 두 나라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남북한이 하나되어야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한에 살고 있지만 남한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우리가 축복을 받고, 모든 민족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민족의 전통을 세워 주는 가정들이 되겠다고 하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되느냐 하면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됩니다.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이 통일된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복을 받은 가정이라고 하더라도 나라가 비운에 사로잡히게 될 때는 그 나라의 주권과 더불어 그 가정도 휩쓸리게 됩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가정은 아무리 망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쳐도 망하는 운세권 내로 말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과 나라 중 어느 쪽이 더 귀합니까? 가정보다 나라가 더 귀합니다. 또, 나라가 아무리 흥하더라도 세계가 망하는 운세로 말려 들어가게 될 때는 그 나라도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망하지 않는 세계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큰 은혜란 무엇이냐? 은혜가 찾아오는 데 있어서 십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십 년의 은혜요, 백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백 년의 은혜요, 천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천 년의 은혜요, 만 년만에 찾아오는 것은 만 년의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십 년의 은혜를 받고 싶어요, 만 년의 은혜를 받고 싶어요? 통일교회를 믿고 만 년 동안 희생하더라도 틀림없이 이 길을 가겠다는 사람은 손 들어 봐요!

만 년 동안 가기 위해서는 만 년 동안 갈 것을 남겨야 됩니다. 만 년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돈을 남기면, 그것이 만 년 역사의 전통이 되겠어요?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인류를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억천만년 가는 거라구요. 그렇게 사랑했다고 하는 것은 억천만년 가는 것입니다.

나라를 사랑한 애국지사의 사랑은 그 나라가 존재할 때까지 억천만년이라도 남아집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때에 가서는 나라만을 사랑한 애국자는 남아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성현은 남아집니다. 성현들의 사랑은 세계적이기 때문에 그 성현들은 나라의 배척을 받으면서도 고독단신으로 자기의 생명을 걸고 그 당대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후대를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성인은 내적인 인연과 전통적인 생애와 자각의 실적을 남기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현세에 살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 살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에 선 성인의 희생적인 사랑의 도리가 세계에 남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인 중의 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인 중의 성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을 중심삼고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최고입니다. (43-325)

 

큰 은혜와 큰 복이라는 것

 

하나님을 중심삼은 사랑의 인연을 심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전통을 만년 남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원리말씀이 이렇다고 말만을 남겨 놓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누가 실천을 하겠어요? 우리가 실천해야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도 자식의 뼛골에 사무치도록 사랑하여 그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은공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가르침이 그러하니까 자식도 그렇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 자식의 마음이 괴로울 수 있는 내연적인 터전을 상속시켜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만년 갈 수 있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대까지 복을 상속시키게 될 때는 영계에서 누가 그 복을 받아서 나누어주느냐 하면 여러분이 그 복을 받아 가지고 후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즉, 만년을 복 받게 해준 조상이 그 복을 받아서 후손들에게 나누어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계에 가 보면,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후손들이 복을 받는 데는 예수님으로부터 복을 나눠 받게 됩니다. 결국, 그것이 누구의 뜻이냐?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것은 뭐냐? 반드시, 큰 은혜와 큰 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비례되는 수고를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큰 복을 받기를 원하거든, 천 년의 복을 받기를 원하거든 천 년 동안 그 복이 지탱할 수 있는 수고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복이 남아지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개인의 공적을 의지해 가지고는 큰 복을 받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역사적인 선한 선조들이 남긴 복의 계대를 받기 위해서, 세계적인 선한 선조들 가운데 자기 조상이 없다면 세계적인 선조와 같은 형의 스승을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성인의 도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성인의 도리를 교육받고 인계받습니다. 그것을 인계받으면 그들이 바라던 소망의 세계를 내가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옛날의 성인들은 개인적인 수난시대에 죽어 갔습니다. 오늘날에는 그 개인적인 수난의 과정을 거쳐서 가정적인 수난의 과정을 거쳐야 되고, 종족적인 수난의 과정을 거쳐야 되고, 민족적인 수난의 과정을 거쳐야 되고, 국가적인 수난의 과정을 거쳐야 되고, 세계적인 수난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만 세계적인 시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수난의 과정에 있어서 희생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이냐? 누구든지 “나는 싫어” 할 수 있어요? 대가를 치러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43-325)

 

역사시대에 한 번밖에 없을 시대

 

기독교를 보게 될 때, 기독교가 예수님과 선조로부터 전통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가지고 그 과정을 거치는 데 있어서 그 대가를 누가 치러야 되느냐? 예수님이 그러한 것을 심어 놓고 갔기 때문에 그 과정을 이어받은 기독교가 치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예수님처럼 죽음길을 갑니다. 그렇게 죽고 살고 해서 살아 남은 사람이 개인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가정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종족적으로 책임을 다하고, 민족적으로 책임을 다하며 나왔습니다. 지금까지 나라는 망하면서도 그것은 남아졌습니다.

그것이 그렇게 남아질 수 있었던 은사의 터전이 무엇이냐?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끝날에 메시아가 올 수 있는 은사의 터전입니다. 그러면 그 은사의 터전을 아무런 공로도 없이 맞을 수 있느냐? 아닙니다. 반드시 내정적인 심정을 중심삼고 탕감의 과정을 거치고 정성들여 점핑해서 타고 넘겠다는 그러한 무엇을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그것 이상은 없습니다. 생명을 다하는 희생적인 사랑, 그 사랑을 중심삼고 점핑해야 됩니다.

그렇게 점핑하는 데 있어서 자기 리(里)만을 위한 사상을 가진 사람은 그 이상 못 갑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리를 위해서 일하는 데 있어서는 세계를 대표해서 일한다는 사상을 가져야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통일교회의 사상은 절대사상입니다. 그러니까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생각해 보라구요!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에서 받은 은혜라는 것은 6천 년뿐만 아니라 몇 천만년 동안 몇 천만대의 수많은 인류가 찾아 나오던 최후의 결실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 개인의 공적과 수고만으로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돼요? 돼요, 안 돼요? 안 됩니다.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의 심정을 본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정은 하나입니다. 심정은 여기에서도 통하고 저기에서도 통합니다. 아담에서부터 출발한 부모의 심정, 부부의 심정, 자녀의 심정을 원칙으로 해서 오늘날 이 시대에도 넓은 범위에서 전체를 걸고 싸워 승리의 터전을 닦아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선생님을 만나 가지고 뿌리를 잡아서 가지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복을 받을 수 있지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뿌리는 얼마나 깊으냐? 여러분의 뿌리는 6천 년 이상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남아지기까지 하나님과 선조들이 수많은 곡절을 거치고 수많은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있는 나 한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치른 대가를 전부 다 총합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대가를 치른 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한 은사를 대하는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한 십 년쯤 믿은 자격을 내세워서 “내가 당당하지”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구요. 이 통일교회에 들어왔다는 사람들, 10년을 믿었다든가 15년을 믿었다는 사람들, 혹은 36가정이니 무슨 가정이니 하는 사람들이 “선생님도 우리가 아니면 뜻을 못 이루지” 하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평을 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천만년의 수난의 고비를 거치면서 수많은 수고의 대가를 치러 온 터전이 열매로 맺힐 수 있는 자리에 내가 서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은혜인지, 어떠한 인연을 통해서인지 모르지만 역사시대에 한 번밖에 없을 시대를 만나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10년 동안 통일교회를 따라 나왔다고 해서 그 10년 동안 산 것을 가지고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천 년의 한을 품은 심정을 가지고 정성에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 열매로 맺힐 수 있기 위해서는 내 한 몸이 백번 천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따라가겠다고 해야 됩니다. 그러한 기준도 세우지 않고 복을 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도둑놈입니다. 공 없이, 수고하지 않고 소유를 탐하는 자리에서 도적의 길이 생겨나고 강도의 길이 생겨납니다. (43-328)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리

 

여러분이 선생님을 만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필연적이고 역사적인 운명의 길을 통해서 만나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지만, 그 배후에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그 무엇이 뿌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자들을 동원시키는 데 있어서 동원되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이나 마음속으로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동원되어 나가는 사람들의 뒤를 바라보게 될 때, 자기가 안 나가고는 견딜 수 없으리 만큼 마음에 무엇인가가 휘몰아치는 어떤 힘을 느낀다면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 천운의 힘이 내밀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그 힘이 동원되는 여러분이 선 이 자리는 천지의 만복을 받은 것보다도 더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자리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자리에서 양심의 고통을 받고 사는 사람은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내심으로 불러 일깨워서 가라고 명령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보조를 안 맞추게 되면 망합니다.

이 놀라운 역사적인 시대에 선생님이 앞서 가는 길이 평탄한 길이 아니며, 선생님이 겪어 온 것이 여러분 일대에 당하지 못할 수난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효의 도리를 다하고 충의 도리를 다해야 할 여러분의 기준이 어떤 기준이냐? 여러분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배운 것을 아직까지 실천하지 못한 기준이요, 천명을 받들어 싸움터에 출전하라고 명령했는데도 출전하지 못한 입장이 아니냐! 그렇게 위신을 세워 가지고 남아질 것 같아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습니다.

이렇듯 자기 몸을 가눌 수 없고 체면을 세울 수 없는 불쌍한 신세인데, 하나님이 책임을 지고 체면을 세우고 위신을 갖출 수 있는 이 한 때를 허락하신 것은 둘도 없는 고마운 은사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가는 걸음 앞에 하늘의 소망이 찾아올 수 있고, 여러분이 머무는 자리에 하늘의 소식이 싹틀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거기서부터 여러분이 재봉춘하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야말로 기적 중의 최고의 기적은 이 일밖에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인연 가운데서 만난 선생님을 중심삼고 인연되어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은 우연히 난 아들딸이 아니요, 역사적인 아들딸입니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길거리에서 사탄세계의 아들딸로부터 조롱을 받고 농락을 당하는 일이 있게 될 때, 그것은 헛되이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하나 둘 가해지는 그 전부가 여러분의 갈 길을 넓혀 주는 것이 되고, 여러분의 외로운 노정을 탕감시켜 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외로운 아들딸을 남겨 놓고 가는 것이 도리어 복이 될 수 있고 사랑하는 남편을 뒤에 두고 가는 것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심정을 뜻을 위해서 퍼부을 수 있고 바쳐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자리는 보고 싶은 남편과 아들딸을 볼 수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그들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끊어지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을수록 하늘을 위하는 희생적인 사랑이 생기게 될 것이며, 또 하늘을 위하는 희생적인 사랑의 터전이 넓어질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가가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복귀할 그 터전이 앞으로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줄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우리가 처한 자리가 복스러운 자리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4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