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남 (천일국 훈독경 제8권 4일)

훈독왕 | 20201221192638

천일국 훈독경 제8권 4일

 

만  남 (훈독본)

날짜 : 1981. 4. 19(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만 남 (천일국 훈독경 제8권 4일)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은 ‘만남’입니다.

 

만남의 의의와 가치

 

우리 인간들은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환경적인 요건과 대인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집약해서 말하면, 가정을 중심삼은 소유관계와 같은 환경을 초월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를 거치며 일생을 살아가는데 그 과정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남아지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일생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인간은 환경적인 여건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을 크게 말하면 나라도 그러한 입장에 있고, 세계도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또, 전체의 섭리를 추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천주(天宙)라는 대우주를 두고 봐도 그와 같은 환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오기 위해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옷을 입는 자체도 하나의 만남입니다. 만물과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물을 마신다면 그것도 하나의 만남입니다. 그것도 만물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오늘 어떠한 환경에 머물게 될 때 그 환경을 중심삼고 서로 서로가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는 것도 하나의 만남입니다. 

 

모든 만남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중심삼고 보다 더 가치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모든 인연들을 통하여 전진하고 발전하기를 누구나 바랍니다.  

 

그러면 만남의 가치적인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식을 중심삼고 그러한 만남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만남의 내용으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금전을 중심삼고 만남의 가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 것들이 우리 만남의 생활 가운데서 중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사회와 환경적인 여건에 접촉하는 데 있어서 내 한 자체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결정하는 하나의 요건은 될는지 모르지만, 인생의 전체 목적의 가치를 결정지을 수 없고, 또 우리 생애에 바라는 하나의 이상적인 가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생은 무엇을 만나러 가야 되느냐? 

우리가 사랑을 중심삼고 만난다고 할 때 그러한 만남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요, 환경에 있어서도 바라는 것이요, 미래에 있어서도 소망으로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혁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인간세계의 모든 만남의 기원은 파괴될 것이고, 그 만남의 기원이 파괴되면 이상적인 실체가 존속할 수 있는 터전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112-247) 

 

사랑의 인연의 파문을 넓혀 나가야

 

모든 인연과 상대권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말을 중심삼고는 통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여러분, 잔잔한 못에 돌을 던져 봐요! 얼마나 파문이 아름다워요! 파문이 일면 사방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와 같이 사방으로 파문을 일으켜 가지고 그 파문이 이는 데 따라서 전부가 화동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닌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건 힘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112-249) 

 

사랑은 위대한 것

 

사람은 어느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고 필요로 합니다. 

여기에는 모든 환경적인 여건이라든가 사회적인 표상으로서 연결되는 모든 내용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내용을 극복하고 부모를 모시고 싶고 부모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상하관계의 그 모든 어려운 순종과 복종의 내용을 극복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내가 부모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요, 위대한 사랑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순종과 복종이 나쁜 게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순종과 복종까지도 거느려서 상충 없이 하나의 방향성을 중심삼고 차원 높은 미래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요즈음 사제지관계에 있어서 학교 선생들을 보고 “선생은 뭐냐” 할 때, “하나의 직업인이다” 이렇게 보면 곤란합니다. 직업이라는 것은 금전관계를 중심삼은 인연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사제지관계에 있어서 그분과 나와는 또 다른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인 규범을 축소시킨 질서적인 내용과 환경적인 여건을 소화시키고 대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과제를 무난히 극복하고 모순과 상충 없이 소화시키는 자리에서 제자가 스승을 대하고, 스승이 제자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제일 가까운 것, 보다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게 뭐냐?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환경적인 모든 여건을 극복하고 그 인연을 길이길이 간직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나라면 나라에 대해서도 한 국민으로서 갖게 되는 애국심이라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귀한 것입니다. (112-251) 

 

사랑은 역사를 포괄할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전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또, 각 종파도 그런 내용의 인연을 따라서 신앙을 지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간 모든 성현들이 오늘날 현실에 있어서 어떻게 그 만남의 가치를 재현할 수 있느냐? 이것은 지식, 돈, 권력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역사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또, 역사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포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당신은 그렇게 능치 못함이 없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는데, 당신이 있고 싶은 곳이 어디요? 힘을 가진 환경에 있고 싶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노” 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도 사랑의 공기 가운데, 사랑의 환경 가운데, 사랑의 보좌에 앉고 싶다” 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하냐? 순간을 넘어서 영원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인연 가운데서 사랑을 중심삼고 상대와 만남의 자리를 필요로 하실 것이 아니냐. 이렇게 자연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면 2천 년 전에 왔다 갔던 그리스도면 그리스도가 오늘날 현실에 어떻게 재현될 수 있겠느냐? 사랑을 통해서는 역사를 극복할 수 있고 모든 시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을 통해서 만나기 위한 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냐 이거예요. (112-253)

 

간절한 정성을 들여라

 

그렇다면 만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일방적이냐?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사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사방적으로 만나면 그 생활적인 기반을 넘어서 생애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럴 때 그분과 나의 만남에 있어서는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랑을 지니지 않고는 만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에 접하여 만남의 시간을 추구하는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 이거예요. 그 만남의 자리는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간절한 자리입니다. 그 만남의 도수가 강하면 강할수록 거기에 같은 내용이 될 수 있는 강한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 간절히의 극치가 어디냐? 힘을 주고 땀을 흘리는 것이 간절함의 극치냐? 아니다 이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을 갖다 붙여 놓고 간절히 하면 극치에 도달합니다.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될 게 아니에요? 

 

그러면 나의 일생을 어떻게 갈 것이냐? 이게 문제예요. 

많은 군상 가운데서 아무리 봐도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서 “아…” 하고 놀랄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남이 보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누가 관계를 맺을 수 없이 얼굴을 숙이고 그저 힘없이 가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내 사랑의 인연인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정신이 번쩍 든다구요. 그런 것 알아요, 여러분 그건 왜 그러하냐? 사랑이 인연된 곳에는 나의 모든 신경이 충격적인 자극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나에게 기쁨의 자극과 기쁨의 충동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112-254) 

 

참된 생활

 

아무리 권력이 좋다고 해도, 그 권력을 생의 가치 전체로 알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권력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빼 버리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금전이 귀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중심삼고 금전을 쌓아 놓은 것은 찬양의 조건이 되지만, 사랑을 빼놓고 쌓아 놓은 것은 화근이 된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중심삼고 시작해야 되고, 사랑을 중심삼고 살아야 되고, 사랑을 중심삼고 죽어야 됩니다. 이것이 행복한 길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활 중에서 참된 생활이 뭐냐? 사랑을 개재시킨 생활이 참된 생활입니다. 그 사랑을 개재시킨 생활, 거기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이 전부 다 거슬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112-257)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인연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내 자체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부모의 사랑에서 태어났다 이거예요. 출발이 사랑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나기를 사랑에서 태어나서 자라나 가지고 첫번 사랑을 받은 것이 누구예요? 누구의 사랑을 받아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이 땅 위에 태어날 때 첫 번째로 나를 쓰다듬으면서 사랑하신 분, 첫사랑의 인연을 맺은 것이 부모다 이거예요. 철을 알지 못할 때부터 첫사랑의 인연을 맺었는데,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때의 인연이 아닙니다. 사랑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를 때 사랑한 그분이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철을 알아 가지고 사춘기가 되고 청년남녀가 되어 시집가고 장가가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사랑보다도 더 차원 높은 것입니다. 

 

첫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첫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첫사랑을 누가 먼저 해줬어요?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나면서부터 잘 때나 알지 못할 때나 언제나 사랑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이 그래요? 여러분은 어때요? “부모하고 남편하고 있을 때 어느 쪽을 취할 거야” 하면, 서구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남편을 따라갑니다. 상대적인 사랑이 제일이지, 부모야 까짓것 다 뒷방 영감이 돼서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생활이라든가 지식적인 생활기반을 중심삼고 볼 때는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근본적인 전체의 내용을 파헤쳐 사랑이라는 것을 개재시켜 보게 될 때는 부모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집간 아가씨들도 말이에요, 옛날에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이 가지고 있던 책, 남편이 살아가던 일기 쓴 것 등은 이사 다닐 때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책이고,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보따리다” 하면서 도망가고 피난가면서도 들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사랑하던 어머니 아버지는 어때요? 그건 다 버리고 가요? 이게 사랑의 논리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일 사랑하고 제일 사랑받던 것이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거느리고 가야 된다 이거예요. (112-259) 

 

만남의 시간 가운데서 제일 길게 갖고 싶은 것이 뭐냐

 

세상의 아가씨들은 어머니 아버지를 뭐 뒷방 노인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역사에 대한 유린입니다. 내가 사랑의 역사를 논하게 될 때는 첫 번째로 부모의 사랑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의 사랑을 논할 때는 아내와 남편의 사랑을 논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3의 사랑을 논할 때 아들딸에 대한 사랑을 논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우주는 무엇을 중심삼고 태동할 수 있느냐? 사랑이라는 이 권을 중심삼고 시작하고, 움직여 나가고, 이상의 자리에 정착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통으로 이어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112-261) 

 

참사랑이 가는 길

 

여러분이 참사랑을 갖게 될 때, 친구가 나에게 10만 원을 도와주었으면 내가 그것을 돌려주게 될 때는 사랑을 가지고 도와준 그 친구에 대해서는 플러스해서 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12만 원, 15만 원으로 더 보태서 갚고 싶은 것이 사랑의 세계에서의 운동법칙입니다. 

 

그러면 참사랑이 가는 직선코스의 주류 내용이 뭐냐? 그것은 자기를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위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해야 되느냐? 동서남북 사방으로 위해야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사방으로 위하는 것입니다.  

 

보다 위하려고 하는 사람은 보다 중심되는 자리에 도달합니다. 천리(天理)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라” 이거예요. 가정을 위해서 낮이나 밤이나 일생을 희생하면 그 가정의 주인이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그를 앞세우고 그 그늘에서 잠을 자려고 하고, 형제들도 그를 앞세우고 그 그늘에서 잠을 자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을 중심삼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품에서 깃들고 싶고 그 사랑의 품에서 영원히 안식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존재의 최고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변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라. 부모를 위하고 형제를 네 몸보다 더 위하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희생을 강조해요? 왜 종교에서도 희생하라고 하고, 오늘날 사회에서도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하느냐? 애국하라는 말은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려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희생이란 지극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뒷받침이 되어서 희생하게 될 때는 희생을 덜한 존재들이 희생을 더한 그 사랑을 가진 그 주체를 중심으로 모시고, 그 그늘에서 쉬고 싶고, 그와 더불어 화합하고 싶어합니다. 그게 천지이치요, 우리 본성은 그것을 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천지에서 사는 동안 누구를 만나고 싶어요? 

이 우주 가운데서 제일 높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크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밖에 없는 분이요, 모든 면에서 제일가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한번 갖고 싶지 않아요? (112-276) 

 

가야 할 정상적인 길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도 어려운 수속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간단한 수속으로 통할 것 같아요? 사랑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가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만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랑을 중심삼고 희생의 길을 통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쌓아진 터전을 통하여 하늘과 만남의 날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만나고 싶어요? 하나님을 내 오붓한 가정에서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가정을 중심삼은 세계의 대표적인 가정의 하나님으로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정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세계를 치리하실 수 있는 궁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서는 못 나타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가지고 가정에 들어와서 만나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최상의 자리에 있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내가 찾아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시오! 내려오다 보면 한 단계 낮은 천주사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세계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국가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종족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가정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개인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니까 그런 자리에 내려오지 마세요! 내가 그곳을 찾아가겠습니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찾아가는 데 있어서 어려움의 길을 나에게 폭포수같이 퍼부어 주소서! 천년만년을 위해서 가거든 그 천년만년을 압축한 수난 길을 나에게 퍼부어 주소서! 그걸 타고 넘어가 당신 앞에 도달할 수 있는 그 만남의 길을 나에게 부여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요, 최고의 왕과 만날 수 있는 종착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오색인종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과제 하에서 운명길을 출발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거쳐 그 종착점을 향해 가야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행로이기 때문에 그런 천의(天意)에 의한 사랑의 내심(內心)을 가지고 나타나는 곳에는 동서양을 넘고 세계의 환경과 역사적인 전통과 문화적인 배경을 극복해 가지고 비약해서 하나의 높은 차원으로 전진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때는 그 사람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라도 도움을 주고, 거기에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주파를 남겨 주어야 됩니다. 어디에 가서 앉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의 사랑을 중심삼은 무한한 발전소다. 나는 사심 없이 전체를 위한다” 하게 되면, 그 전체의 분위기는 전부 다 내 앞에서 부활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망하게 하려는 사람이 그 순간에 망하고 자기는 비약하는 것입니다. 비약이라는 것은 순탄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극(極)의 순간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작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시고, 이제 사회에 나가서 누구를 만날 때도 주체가 되는 입장에서 그를 위해서 무엇을 줄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사랑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잎을 뻗게 하고, 사랑의 맥박을 연결시킬 수 있는 놀음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정상적인 길인 동시에 입체적인 향상의 길입니다. 그래야만 차원 높은 만남의 길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나보다도 남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 산곡(山谷)을 거쳐가야 되고 험산 준령을 넘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생애를 희생하며 가겠다고 하면, 천국은 새벽처럼 옵니다. 여기는 밤이지만, 새로운 태양과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밤이 지날 때까지 밤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타락권을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길을 추구해야 할 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러한 활동을 하고 그런 내용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도 그것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발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계시는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112-285)* 

 

 

천일국 훈독경 제8권 4일, 원문

 

만  남

 

날짜 : 1981. 4. 19(일)

장소 : 한국 본부교회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은 ‘만남’입니다.

 

만남의 의의와 가치

 

우리 인간들은 자기 혼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환경적인 요건과 대인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집약해서 말하면, 가정을 중심삼은 소유관계와 같은 환경을 초월해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소년시대, 청년시대, 장년시대, 노년시대를 거치며 일생을 살아가는데 그 과정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남아지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일생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 인간은 환경적인 여건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것을 크게 말하면 나라도 그러한 입장에 있고, 세계도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또, 전체의 섭리를 추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삼고 천주(天宙)라는 대우주를 두고 봐도 그와 같은 환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여기에 오기 위해서 옷을 입었을 것입니다. 옷을 입는 자체도 하나의 만남입니다. 만물과의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물을 마신다면 그것도 하나의 만남입니다. 그것도 만물과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내가 오늘 어떠한 환경에 머물게 될 때 그 환경을 중심삼고 서로 서로가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생님을 대하는 것도 하나의 만남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엮어진 인연을 중심삼은 모든 만남을 통해서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하느냐? 자기를 중심삼고 보다 더 가치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가치 있는 기준으로 자기와 인연을 맺으면서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인간생활이요, 생애가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루의 생활이나 일생을 중심삼은 생애를 통해서 관계되는 그 모든 인연들을 통하여 전진하고 발전하기를 누구나 바랍니다. 또한, 가치적인 내용에 있어서 내실의 충실과 외부의 충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남의 가치적인 내용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남자에게는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 아내에게는 남편이 필요하고, 남편에게는 아내가 필요하다. 더 나아가서, 부부를 중심삼고는 자녀가 필요하다. 또, 나를 중심삼고 볼 때 부모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이런 환경적인 여건에 있어서 그 내용이 뭐냐? 그렇게 만나서 살고, 만나서 엮어지는 역사노정 혹은 생애의 걸음걸이가 무엇을 내용으로 하고 움직이는 것이냐? 이 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것입니다.

지식을 중심삼고 그러한 만남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권력을 만남의 내용으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금전을 중심삼고 만남의 가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이렇게 외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환경적인 여건을 보게 될 때,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 뭐냐? 사람들은 흔히 “지식을 좋아한다. 공부해야 되겠다” 하고, “금전이 필요하니 돈을 벌어야 되겠다” 하고, 그 다음에는 “출세를 해야 되겠다. 권력이 필요하다” 합니다. 과연, 그러한 것들이 우리 만남의 생활 가운데서 중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요즘에 보게 되면, 학자들도 65세가 넘으면 정년퇴직을 합니다. 그럴 때 유명한 박사들도 인생의 내리막길에 서게 됩니다. 거기서 자기가 학문을 즐기며 추구했던 모든 지식이 내려가는 인생의 행로를 거슬러 미래의 소망을 찾을 수 있는 내용으로 돼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또, 금전을 중심삼고 볼 때, 나이 육십이 되고 칠십이 되어 이제 영계에 갈 날이 가까워 오면 그 돈이 과연 그에게 있어서 죽음의 고개를 넘어 갈 때 소망의 어떠한 뒷바라지가 될 수 있는 내용이 되느냐 하면 그것도 그렇지 못합니다. 권력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지, 내 일생에 있어서 어렸을 적부터 노년시대를 거쳐 사후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 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사회와 환경적인 여건에 접촉하는 데 있어서 내 한 자체의 가치를 일시적으로 결정하는 하나의 요건은 될는지 모르지만, 인생의 전체 목적의 가치를 결정지을 수 없고, 또 우리 생애에 바라는 하나의 이상적인 가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생은 어디로, 무엇을 만나러 가야 되느냐? 무엇을 중심삼고 가야 되느냐?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남자나 여자는 서로 무엇을 중심삼고 만나려고 하느냐? 같은 동료로서 같이 일하는 자리에서 서로 아니까 아무런 내용 없이 만나는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는 깊은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 만남의 가치를 자랑할 수 있는 내용을 중심삼고, 우리가 뜻을 가지고 그런 내용의 추구를 위해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당연히 표준으로 할 것입니다. 그것을 표준으로 안 삼을래야 안 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중심삼고 만난다고 할 때 그러한 만남은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요, 환경에 있어서도 바라는 것이요, 미래에 있어서도 소망으로 남기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이나, 현재의 사람이나, 미래의 사람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혁명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인간세계의 모든 만남의 기원은 파괴될 것이고, 그 만남의 기원이 파괴되면 이상적인 실체가 존속할 수 있는 터전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112-247)

 

사랑의 인연의 파문을 넓혀 나가야

 

그러면 우리가 안식을 하거나, 혹은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중심삼고 시작하고 싶고 움직이고 싶겠느냐? 그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사랑의 마음을 중심삼고 보면 모든 것이 원만히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어떠한 것을 보거나 만나는 데 있어서 그 내용이 무엇이 되어야 되겠느냐? “서로서로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 그저 그렇게 만나는 것이다” 하면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듣는 데 있어서도 그렇고 느끼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것이 개재되어야 그것이 인연이 되고 엉켜서 뗄 수 없는 것으로 수습되느냐? 그 내용은 보는 데도 사랑을 가지고 보고자 하는 것이요, 듣는 데도 역시 사랑이라는 내용을 중심삼고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제일 큰 바람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어느 누구든지 말하는 것, 느끼는 것, 감각으로 체휼되는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삼고 되어질 때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좋다고 하는 기준이 무엇으로 결정되느냐? 사랑의 내용을 중심삼고 인연된 결과가 나타나게 될 때, 그 자리에 있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좋다는 것은 일시적이면 되느냐? 일시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무엇인지 모르게 좋은 사실이 영원으로서 하나의 파장이면 파장, 파문이면 파문과 같이 확장되어 갈 수 있고 그 확장됨이 전체에 환영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서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면 어떻겠어요? 그렇게 뻗어 나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랑이라는 파문입니다.

모든 인연과 상대권에 이르기까지 사랑이라는 말을 중심삼고는 통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못에 돌을 던지면 돌이 떨어진 곳에서 물결이 파문을 일으키며 퍼져 나갑니다. 그렇게 파문이 일 때, 거기에 떠 있는 잎사귀들은 그 파문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가치적인 어떤 존재가 되어 하나의 파문을 던지게 된다면 그러한 파문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것은 지식이라든가 권력이라든가 금력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잔잔한 못에 돌을 던져 봐요! 얼마나 파문이 아름다워요! 파문이 일면 사방으로 퍼져 나갑니다. 그와 같이 사방으로 파문을 일으켜 가지고 그 파문이 이는 데 따라서 전부가 화동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닌 무엇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느냐? 그건 힘도 아니요, 돈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춘기에 있는 청춘 남녀들이 서로 서로가 대하고 싶고 그리워하는 환경이 있다면 그것은 뭐냐? 사랑의 환경입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에는 어느 누구나 시인이 아닌 사람이 없고 문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꿈을 그려도 무한히 그립니다. 그러면 그렇게 되게 하는 내용이 무엇이냐? 그때부터 발발하는 사랑의 느낌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춘기에는 어느 분야에나 영향을 미치고 싶고 관계를 맺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마음이 반사되고 반영되면 환경도 전부 다 화동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더라도 사랑을 중심삼고 만나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친구끼리 만나더라도, 어제 보던 친구의 그 얼굴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 얼굴을 사진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보나, 혹은 그 친구를 직접 보나 다른 게 뭐가 있어요? 그 얼굴은 다 아는 거고, 그 성격도 다 아는 것인데 말이에요.

그러나 어제 만났고, 오늘 만나고, 내일 또 만나는 거기에는 정이라는 게 있어서 서로 서로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생활이 동화되고, 모든 느낌이 동화되고, 심정이 동화되어 그 자체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자체에 내가 휩쓸려 들어가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그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 내가 스스로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친구와 더불어 있고 싶고, 친구가 있는 데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는 그 내용에 무엇이 있어서 그러냐? 친구지정(親舊之情)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112-249)

 

사랑은 위대한 것

 

사람은 어느 누구나 부모를 사랑하고 필요로 합니다. 언제나 부모를 만나고 싶어하고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부모와 자식은 연령으로 봐도 차이가 있고, 또 질서적인 관계를 봐도 상하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예(禮)를 갖춰야 됩니다. 예(禮)를 갖춰서 존경하고 효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사회생활의 인륜 도덕적인 내용을 갖춰 가지고 상하관계에 있어서 하나는 주체요, 하나는 대상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래서 효자가 되려면 순종이나 복종이란 내용을 개재시켜 가지고 만나야 됩니다. 그것이 참된 부자관계입니다.

여기에는 모든 환경적인 여건이라든가 사회적인 표상으로서 연결되는 모든 내용이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내용을 극복하고 부모를 모시고 싶고 부모와 같이 있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상하관계의 그 모든 어려운 순종과 복종의 내용을 극복시키고도 남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내가 부모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위대한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요, 위대한 사랑 앞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순종과 복종이 나쁜 게 아닙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순종과 복종까지도 거느려서 상충 없이 하나의 방향성을 중심삼고 차원 높은 미래의 세계로 인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요즈음 사제지관계에 있어서 학교 선생들을 보고 “선생은 뭐냐” 할 때, “하나의 직업인이다” 이렇게 보면 곤란합니다. 직업이라는 것은 금전관계를 중심삼은 인연입니다. 그렇게 될 때는 그야말로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사제지관계에 있어서 그분과 나와는 또 다른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 있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의 사회적인 규범을 축소시킨 질서적인 내용과 환경적인 여건을 소화시키고 대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과제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과제를 무난히 극복하고 모순과 상충 없이 소화시키는 자리에서 제자가 스승을 대하고, 스승이 제자를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제일 가까운 것, 보다 귀한 것이 있다면 그게 뭐냐? 사랑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환경적인 모든 여건을 극복하고 그 인연을 길이길이 간직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바로 사랑이 아니겠느냐고 보는 것입니다.

나라면 나라에 대해서도 한 국민으로서 갖게 되는 애국심이라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귀한 것입니다. 나라와 나의 관계, 그 만남에 있어서 보다 귀한 것이 뭐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중심삼고 볼 때 환경적인 여건이 아무리 복잡하고, 아무리 어려운 수난길이 가로막혀 있더라도 문제가 안 됩니다.

애국이라는 마음을 가질 때는 원수들이 원수가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큰 테두리 안에서 자기의 지체(肢體)와 같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 그들은 원수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그 모든 환경을 소화하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이 무엇이겠느냐? 그건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애국하는 마음입니다. (112-251)

 

사랑은 역사를 포괄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최후의 표준을 무엇으로 삼느냐? 기독교 신자들이 기도를 하고, 성경을 보고, 전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한 때에 지나간 분이지만, 오늘 현실생활에 있어서 그분을 만나기 위한 간절한 생활적인 표시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자의 표시일 것이고, 불교면 불교 신앙자의 표시일 것입니다. 또, 각 종파도 그런 내용의 인연을 따라서 신앙을 지녀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간 모든 성현들이 오늘날 현실에 있어서 어떻게 그 만남의 가치를 재현할 수 있느냐? 이것은 지식을 가지고 안 되고, 돈을 가지고 안 되고, 권력을 가지고도 안 됩니다. 진리를 가지고도 안 됩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가지고 가능하다 이거예요. 사랑은 역사를 포괄할 수 있습니다. 또, 역사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도 포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통해서 “당신은 그렇게 능치 못함이 없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입장에 계시는데, 당신이 있고 싶은 곳이 어디요? 힘을 가진 환경에 있고 싶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노” 하신다는 거예요. 무슨 지식을 가진 입장에서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시고 싶을 것이냐? 우리 인간이 바라는 돈을 가지고 제일 높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시고 싶어하실 것이냐? 그거 다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나도 사랑의 공기 가운데, 사랑의 환경 가운데, 사랑의 보좌에 앉고 싶다” 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하냐? 순간을 넘어서 영원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자리에 계시고 싶은데, 그 사랑의 자리에 계시면 억천 날을 혼자 계시고 싶으냐? 아니다 이거예요. 인격적인 존재라면,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듣고 싶고, 말하고 싶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으실 것이 아니냐 이거예요. 그렇게 생각할 때 아무리 하나님이 사랑의 분위기에 취해서 사신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취하는 것보다 만지고, 보고, 비비고, 느끼고 싶은 분이 아니겠느냐 이거예요. 그렇지 않다면 인격적인 신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사랑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인연 가운데서 사랑을 중심삼고 상대와 만남의 자리를 필요로 하실 것이 아니냐. 이렇게 자연적인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면 2천 년 전에 왔다 갔던 그리스도면 그리스도가 오늘날 현실에 어떻게 재현될 수 있겠느냐? 사랑을 통해서는 역사를 극복할 수 있고 모든 시공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을 통해서 만나기 위한 생활이 신앙생활이 아니냐 이거예요. (112-253)

 

간절한 정성을 들여라

 

그렇다면 만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일방적이냐? 그건 범위가 다른 것입니다. 참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사방적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사방적으로 만나면 그 생활적인 기반을 넘어서 생애적으로 만날 수 있다 이거예요. 그럴 때 그분과 나의 만남에 있어서는 무엇을 필요로 하느냐?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사랑을 지니지 않고는 만날 수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의 참다운 신앙자가 몇 사람이나 되느냐?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보는 눈이 그리스도가 원하는 사랑의 눈이 되고, 귀로 듣는 것도 그렇고, 내 모든 오관을 통해 느끼는 촉감까지 그 사랑을 통할 수 있는 내용을 지녀 가지고 그리스도에 접하여 만남의 시간을 추구하는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 이거예요.

그 만남의 자리는 어떤 자리냐?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간절한 자리입니다. 간절한 자리 중에서도 어떤 자리냐? 그 만남의 도수가 강하면 강할수록 거기에 같은 내용이 될 수 있는 강한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그 강한 사랑에는 절대권을 넘어올 수 있는 간절함이 젖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 간절한 것으로 역사를 긋는다면 모든 역사의 어디든지 그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놓은 판이 있더라도 간절한 사랑의 마음으로 글자를 쓰면 글자가 써진다 이거예요. 다이아몬드가 굳지요? 쇠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간절한 사랑의 그 무엇으로써 다이아몬드에 글을 쓰게 되면 글이 써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을 강조합니다. 간절한 정성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승도 할머니가 여기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겠어요. 뭐 기도할 때는 보통사람은 “간절히, 간절히…” 하지만, “간-절히…” 한다구요. 그때는 오장 육부가 다 까부러져 똘똘 뭉쳐 가지고 동서남북으로 굴러다닙니다. 그런 그 모습 “간-절히…” 간절히 한번 해보자구요. 한 30분만 해봐요! 그 간절히의 극치가 어디냐? 힘을 주고 땀을 흘리는 것이 간절함의 극치냐? 아니다 이거예요. 사랑이라는 것을 갖다 붙여 놓고 간절히 하면 극치에 도달합니다.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될 게 아니에요?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연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만날 수 있는 만남의 대상적인 가치를 지녀 가지고 생활을 더듬고 환경을 소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참다운 기독교 신자가 몇 명이나 되느냐? 요즘에 뭐 “월급을 많이 줘야 된다. 지방교회는 싫다. 큰 교회 가 가지고 월급을 많이 받아야 되고, 그 다음에 자동차가 필요하다. 뭐 어떻다” 하는 그것이 문제라구요.

그러면 나의 일생을 어떻게 갈 것이냐? 이게 문제예요. 내가 오늘 종로 네거리나 명동거리에 가게 되면 오색 군상이 지나갑니다. 어떤 사람은 조그만 사람, 어떤 사람은 절름발이, 어떤 사람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얼굴은 제멋대로 생겼는데 옷은 아주 호화찬란하게 입었거든요. 그거 아무리 호화찬란하게 옷을 입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오색 가지의 반지를 끼고, 별의별 행차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관계없는 것이다 이거예요.

많은 군상 가운데서 아무리 봐도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서 “아…” 하고 놀랄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그렇다구요.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초라하고 말이에요, 남이 보면 동서남북 사방에서 누가 관계를 맺을 수 없이 얼굴을 숙이고 그저 힘없이 가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내 사랑의 인연인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때는 정신이 번쩍 든다구요. 그런 것 알아요, 여러분? 둘도 없는 친구면 친구,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아버지, 사랑하는 그 누구를 만나게 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이거예요.

그건 왜 그러하냐? 좋은 환경이나 잘난 사람에게는 내 마음이 끌려가지 않고 다 휘저어 버리고 잊어버리지만 사랑이 인연된 곳에는 나의 모든 신경이 충격적인 자극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사랑은 나로 하여금 제일 가까운 곳에 있게 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또, 사랑이란 제일 가까운 동시에 나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기쁨의 자극과 기쁨의 충동을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112-254)

 

참된 생활

 

육십 난 자식에게 팔십 난 어머니가 “애…” 하는 그 말이 말이에요, 세상의 젊은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고 꿈에도 그릴 수 없는 뭐라고 할까요? 역사의 모든 고비를 넘어 가지고 환경을 소화시키고 사랑으로 품어 주는 포근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이 많은 팔십 난 노부모가 육십 난 아들에 대해서 하는 말에는 보통의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는 큰 가치가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그런 작용을 하느냐 할 때, 그건 사랑을 빼놓고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 자식이 부모를 존경하고 위하는 사랑의 마음은 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여러분 공부하는 학생들이 “아, 내가 공부하는 것을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신다” 할 때 어때요? 그것도 좋아하시지요. “아, 내가 이제 공부해 가지고 대통령이 될거야” 하면 그것도 좋아하시지요. “아, 내가 사업해서 백만장자가 될거야” 하면 그것도 좋아하시지요. 그러나 그것을 자기를 위해서 한다면 다 무용지물입니다. 학박사가 되더라도 사랑을 중심삼은 내용을 위한 학박사는 천년만년 학박사가 되더라도 좋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환영한다 이거예요. 아무리 교만하더라도, 아무리 꾸짖더라도 환영한다는 것입니다. 채찍을 들고 때리더라도 “감사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지닌 부모 앞에 선 자식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거예요.

그 사랑이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멋집니다. 아무리 권력이 좋다고 해도, 그 권력을 생의 가치 전체로 알고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권력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빼 버리면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금전이 귀하다고 하더라도 사랑을 중심삼고 금전을 쌓아 놓은 것은 찬양의 조건이 되지만, 사랑을 빼놓고 쌓아 놓은 것은 화근이 된다 이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랑을 중심삼고 시작해야 되고, 사랑을 중심삼고 살아야 되고, 사랑을 중심삼고 죽어야 됩니다. 이것이 행복한 길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한 것은 뭐냐? 그것은 좋은 것의 연속이다 이거예요. 꽃을 봐도 좋아요, 꽃을. 그 꽃을 사랑하는 아내에게 갖다 준다고 하면 얼마나 아름다워요! “야, 꽃이 아름답다. 이것은 전부 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의 향기와 비교할 수 있느냐” 하는 거라구요. 그 모든 전부가 사랑 가운데 왕창 빠지지, 사랑을 끌고 가지 못합니다. 안 그래요? 나는 모르긴 하지만 그럴 것 같다구요.

그러한 눈으로 날아가는 새를 보게 될 때 “아, 저 새는 왜 지지배배 하느냐? 아, 사랑하는 님을 그리워한다” 하지요? 거기에서는 시가 읊어지고 문학작품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인생살이의 사연이 반복하여 재현된다 이거예요. 그거 얼마나 멋지냐 이거예요. 흘러가는 물을 보더라도 보통사람은 구불구불한 지형에 따라서 굽이쳐 내려가기도 하고, 바윗돌이 있으면 부딪혀 가지고 거기에 물방물을 내고 가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사랑을 중심삼고 흘러간다는 걸 알게 되면 천 년을 엮고도 남을 수 있는 시가 읊어지고 소설이 엮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생활 중에서 참된 생활이 뭐냐? 간단하다구요. 사랑을 개재시킨 생활이 참된 생활입니다. 그 사랑을 개재시킨 생활, 거기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습니다. 가는 것과 오는 것이 전부 다 거슬리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112-257)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인연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내 자체는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태어나길 도대체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태어나긴 어디에서 태어나? 지식에서 태어났지, 권력에서 태어났지, 혹은 돈에서 태어났지”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어요? 부모의 사랑에서 태어났다 이거예요. 출발이 어디냐? 사랑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알겠어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에서 태어났다 이거예요.

사랑에서 태어나 가지고 말이에요, 만약에 세상으로 말하게 되면 어때요? 남자들은 좀 낫지만, 여자들은 벗기 싫어합니다. 뭐 미국 여자는 빼놓고 한국 여자 말이에요. 미국 여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종로 네거리 같은 데에서도 젖 뚜껑만 덮고 활짝 벗고 다니는데 뭐! 그런데 한국 여자는 벗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전부 꽁꽁 싸매지요? 그건 왜 그래요?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워하기를 잘합니다.

그러면 부모 앞에 태어난 어린애기가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발가벗은 채로 태어나 가지고 적나라하게 다 벗었는데 “아이고 부끄럽다” 그래요? 부끄럽기보다는, 오줌똥을 한꺼번에 안팎으로 들이 싸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릅니다. 그러면 또 엄마 아빠는 “이 간나야, 나자마자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해야지! 그래, 이게 뭐야? 나를 존경하고 형편과 사정이 우리 살림살이에 맞게끔 모든 것을 좀 알아 가지고 해야 될 텐데, 이게 뭐야” 그래요? 그저 똥오줌을 싸도 “후후후…” 하고, “그래도 제일 좋다. 요것 봐라, 요것, 요것, 요것…! 요리 봐도 그렇고 저리 봐도 그렇고, 아이고 어쩌면 이렇게 뺨이 곱고, 어쩌면 입술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하면서 입을 맞춥니다. 진짜 그걸 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법도도 필요 없습니다. 두루뭉수리래도 좋다 이거예요. 어쨋든 좋다 이거예요. 통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기 때문에 무사통과를 하느냐 이거예요. 여기에 틀린 것을 가리키면 우는 것도 틀리고 전부가 틀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환경을 아름답게 미화시킬 수 있는 내용이 도대체 뭐냐? 모르긴 모르지만 사랑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태어나기를 사랑에서 태어나서 자라나 가지고 첫번 사랑을 받은 것이 누구예요? 누구의 사랑을 받아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습니다. 애기가 나면서 “앙앙앙…” 우는 것은 그 어머니 아버지에게 사랑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우는 게? 아무렇거나, 그저 울든 어떻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사랑하게 됩니다.

이 땅 위에 태어날 때 첫 번째로 나를 쓰다듬으면서 사랑하신 분, 첫사랑의 인연을 맺은 것이 부모다 이거예요. 철을 알지 못할 때부터 첫사랑의 인연을 맺었는데,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때의 인연이 아닙니다. 사랑할 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를 때 사랑한 그분이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철을 알아 가지고 사춘기가 되고 청년남녀가 되어 시집가고 장가가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사랑보다도 더 차원 높은 것입니다.

첫사랑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첫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첫사랑을 누가 먼저 해줬어요?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부모입니다. 나면서부터 잘 때나 알지 못할 때나 언제나 사랑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러나 남편의 사랑이 그래요? 여러분은 어때요? “부모하고 남편하고 있을 때 어느 쪽을 취할 거야” 하면, 서구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남편을 따라갑니다. 상대적인 사랑이 제일이지, 부모야 까짓것 다 뒷방 영감이 돼서 쓸데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인 생활이라든가 지식적인 생활기반을 중심삼고 볼 때는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근본적인 전체의 내용을 파헤쳐 사랑이라는 것을 개재시켜 보게 될 때는 부모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집간 아가씨들도 말이에요, 옛날에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이 가지고 있던 책, 남편이 살아가던 일기 쓴 것 등은 이사 다닐 때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책이고, 우리 남편이 좋아하는 보따리다” 하면서 도망가고 피난가면서도 들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남편이 사랑하던 어머니 아버지는 어때요? 그건 다 버리고 가요? 이게 사랑의 논리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일 사랑하고 제일 사랑받던 것이 부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거느리고 가야 된다 이거예요. (112-259)

 

만남의 시간 가운데서 제일 길게 갖고 싶은 것이 뭐냐

 

요즘에 우리 통일교회 아가씨들은 좀 낫지만, 세상의 아가씨들은 어머니 아버지를 뭐 뒷방 노인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역사에 대한 유린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사랑도 역사가 있습니다. 내가 사랑의 역사를 논하게 될 때는 첫 번째로 부모의 사랑을 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2의 사랑을 논할 때는 아내와 남편의 사랑을 논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제3의 사랑을 논할 때 아들딸에 대한 사랑을 논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역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우주는 무엇을 중심삼고 태동할 수 있느냐? 무엇을 중심삼고 움직이며, 무엇을 중심삼고 정착하느냐? 사랑이라는 이 권을 중심삼고 시작하고, 움직여 나가고, 이상의 자리에 정착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통으로 이어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게 필요하고 내게 좋은 것은 받고, 내게 나쁜 것은 안 받는다” 하는 게 아니라구요. 사랑의 인연을 맺게 될 때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도 다 나와 직결됩니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백성이 안 되고 싶어도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태어나면 그 사랑이라는 인연 가운데서 연결되어 있는 권내에 존속하는 개인은 국가의 운세와 직결됩니다. 그 가정도 그렇게 직결되고, 전체가 그렇게 직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인연이라는 것은 직결이요, 통일입니다. 그러면서 방향성을 지녀 가지고 분립이 아니라 공동보조를 맞춰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랑의 역사나 전통도 완전히 이어받지 않으면 안된다 이거예요. 그래야 가지에 가지가 뻗어 나가서 큰 나무가 되고 꽃이 피는 것입니다.

이런 걸 볼 때, 만남의 시간 가운데서 제일 길게 갖고 싶은 것이 뭐냐?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제일 길다고 해서 잼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같이 갖고 싶은 것이 뭐냐 할 때 뭐예요? 돈 혹은 공부를 하는 시간이지요? “아이고, 내일 시험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는 시간에 영원히 같이 있고 싶소이다, 아멘” 그래요? 어디, 우리 학생들! 그래요? “아이고, 시험아! 이놈의 시험, 할 수 없는 시험이지” 하지요. 그러면 할 수 없는 걸 왜 해요? 시험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선생도 못 봤다구요. 선생도 “시험은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다” 하지,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다” 하는 선생은 없습니다. 그거 할 수 없는 것을 왜 해요? 시험을 안 치면 사회적으로 탈락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만약에 사랑의 무슨 시험이 있다면 어떨까요? 꿀맛보다도 좋고, 밤을 새우면서 똑딱똑딱 시계가 가는 것을 보고 “아이고, 좋아” 할 수 있는 내용의 사랑의 보따리가 있으면 공부하는 게 싫겠어요, 좋겠어요? 시험을 치는 게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좋다는 것입니다.

그건 뭘 말하느냐? 모든 어려운 자리나 슬픈 자리나 고통스러운 자리는 다 같은 말이지만, 매 맞는 자리나 죽는 자리에서도 같이 죽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것이 뭐냐? 지식도 아니요, 권력도 아니요, 돈도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그 무엇을 지니고 모든 것을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바라는 우주의 어떠한 주체자가 있다면 지남철에 쇠붙이가 붙듯이 째까닥 끌려가서 붙을 것입니다. (112-261)

 

참사랑이 가는 길

 

여러분이 참사랑을 갖게 될 때, 친구가 나에게 10만 원을 도와주었으면 내가 그것을 돌려주게 될 때는 사랑을 가지고 도와준 그 친구에 대해서는 플러스해서 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12만 원, 15만 원으로 더 보태서 갚고 싶은 것이 사랑의 세계에서의 운동법칙입니다.

그러면 참사랑이 가는 직선코스의 주류 내용이 뭐냐? 그것은 자기를 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위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해야 되느냐? 동서남북 사방으로 위해야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사방으로 위하는 것입니다.

보다 위하려고 하는 사람은 보다 중심되는 자리에 도달합니다. 천리(天理)가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라” 이거예요. 가정을 위해서 낮이나 밤이나 일생을 희생하면 그 가정의 주인이 됩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그를 앞세우고 그 그늘에서 잠을 자려고 하고, 형제들도 그를 앞세우고 그 그늘에서 잠을 자려고 합니다.

그것이 사랑을 중심삼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품에서 깃들고 싶고 그 사랑의 품에서 영원히 안식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 존재의 최고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변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하라. 부모를 위하고 형제를 네 몸보다 더 위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어때야 되느냐? 가정은 종족을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종족을 감싸 가지고 열심히 동네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만히 있더라도 자동적으로 가운데로 가는 것입니다. 동네의 반장이 되고 이장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희생을 강조해요? 왜 종교에서도 희생하라고 하고, 오늘날 사회에서도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라고 하느냐? 애국하라는 말은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희생을 통하지 않고는 애국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효자가 되려면 부모 앞에 희생해야 됩니다. 희생을 통하지 않으면 효자가 될 수 없습니다. 성인이 되려면 세계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런 경력이 없어 가지고는 되는 길이 없습니다.

희생이란 지극히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을 끌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뒷받침이 되어서 희생하게 될 때는 희생을 덜한 존재들이 희생을 더한 그 사랑을 가진 그 주체를 중심으로 모시고, 그 그늘에서 쉬고 싶고, 그와 더불어 화합하고 싶어합니다. 그게 천지이치요, 우리 본성은 그것을 환영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천지에서 사는 동안 누구를 만나고 싶어요? 만남의 내용에 있어서 사랑을 중심삼고 만난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요? 여러분이 대학교에 가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요? 교수도 만나고 싶겠지만, 우선 총장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 만약에 사위가 된다면 학과 교수의 사위가 되고 싶어요, 총장의 사위가 되고 싶어요? 다들 총장의 사위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학교 총장이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교수보다도 학교를 위해서 더 희생하는 학생이 있다면, 그 총장이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 가운데서 제일 높고, 제일 훌륭하고, 제일 크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란 말은 하나밖에 없는 분이요, 모든 면에서 제일가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마라톤을 하는 데도 일등이고, 수판을 놓는 데도 일등이고, 무엇이든지 일등입니다. 그런 아버지를 한번 갖고 싶지 않아요? 더 나아가서는 그런 친구를 다 원하는 것입니다. (112-276)

 

가야 할 정상적인 길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일할 수 있고 모든 것에 챔피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님입니다. 님이라는 것은 주인을 말합니다.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런 분을 한번 만나고 싶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대통령이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도 어려운 수속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간단한 수속으로 통할 것 같아요? 사무적인 그런 공문이나 사무적인 무슨 문서의 형식을 통해서 가는 게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가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만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종교는 사랑을 중심삼고 희생의 길을 통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쌓아진 터전을 통하여 하늘과 만남의 날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만나고 싶어요? 하나님을 내 오붓한 가정에서 만나고 싶어요? 그러면 가정을 중심삼은 세계의 대표적인 가정의 하나님으로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정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이 세계를 치리하실 수 있는 궁전에 계시는 하나님으로서는 못 나타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인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기반을 닦아 가지고 가정에 들어와서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만나게 되면, 그 가정적인 기반 위에 종족의 만남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또, 종족의 자리에서 만나게 되면 민족의 만남의 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또, 민족의 자리에서 만나면 국가의 만남의 자리가 남아 있고, 국가에서 만나기를 필요로 하게 되면 세계의 자리가 남아 있고, 세계에서 만나기를 원하거든 천주와 영계를 개재시킨 그것이 남아 있고, 최후에 가서는 하나님의 자리에서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이 최상의 자리일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최상의 자리에 있는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내가 찾아갈 테니 거기서 기다리시오! 내려오다 보면 한 단계 낮은 천주사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세계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국가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종족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가정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요, 내려오다 보면 개인적인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니까 그런 자리에 내려오지 마세요! 내가 그곳을 찾아가겠습니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찾아가는 데 있어서 어려움의 길을 나에게 폭포수같이 퍼부어 주소서! 천년만년을 위해서 가거든 그 천년만년을 압축한 수난 길을 나에게 퍼부어 주소서! 그걸 타고 넘어가 당신 앞에 도달할 수 있는 그 만남의 길을 나에게 부여하시옵소서” 하는 것이 우리의 욕망이요, 최고의 왕과 만날 수 있는 종착점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오색인종이 결국은 사랑이라는 과제 하에서 운명길을 출발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거쳐 그 종착점을 향해 가야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행로이기 때문에 그런 천의(天意)에 의한 사랑의 내심(內心)을 가지고 나타나는 곳에는 동서양을 넘고 세계의 환경과 역사적인 전통과 문화적인 배경을 극복해 가지고 비약해서 하나의 높은 차원으로 전진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때는 그 사람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라도 도움을 주고, 거기에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주파를 남겨 주어야 됩니다. 어디에 가서 앉더라도 그런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의 사랑을 중심삼은 무한한 발전소다. 나는 사심 없이 전체를 위한다” 하게 되면, 그 전체의 분위기는 전부 다 내 앞에서 부활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망하는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망하게 하려는 사람이 그 순간에 망하고 자기는 비약하는 것입니다. 비약이라는 것은 순탄한 환경에서 벌어지는 게 아니라 극(極)의 순간에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은 그런 작전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시고, 이제 사회에 나가서 누구를 만날 때도 주체가 되는 입장에서 그를 위해서 무엇을 줄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사랑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잎을 뻗게 하고, 사랑의 맥박을 연결시킬 수 있는 놀음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정상적인 길인 동시에 입체적인 향상의 길입니다. 그래야만 차원 높은 만남의 길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나보다도 남을 위하여 살기 위해서 산곡(山谷)을 거쳐가야 되고 험산 준령을 넘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생애를 희생하며 가겠다고 하면, 천국은 새벽처럼 옵니다. 여기는 밤이지만, 새로운 태양과 같은 것을 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밤이 지날 때까지 밤길을 넘어가야 됩니다. 타락권을 넘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만남의 길을 추구해야 할 것이 여러분이 가야 할 정상적인 길입니다.

그러한 활동을 하고 그런 내용을 가지고 가면, 하나님도 그것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발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계시는 사랑을 중심삼은 하나님과 상봉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하자는 것입니다. (112-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