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7권 16일
축 복 (훈독본)
날짜 : 1970. 3. 2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567) 축 복 (천일국 훈독경 제7권 16일) - YouTube
축복의 기원과 그 성립조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선조로부터 어떤 유업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고, 혹은 부모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형제들 가운데서 누구보다 정이 더 가서 부모가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겠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을 거치지 않고는 상속을 받을 수 없으며 축복을 받는 자리에도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축복이라는 말은 통일교회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마음속에 실천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아직까지 그 누구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서글픈 입장에서 축복이 실천되기를 소원 중의 소원으로 고대하면서 지금까지 역사의 과정을 거쳐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4천 년의 역사과정을 거친 연후에 하나님이 본래부터 주시고 싶었던 축복을 최후로 결행(決行)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역사를 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천 년 기독교의 역사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싸워 나왔지만 아직까지 그 하나님의 소원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라는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부터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내심 가운데 하나의 소원으로서 남아져 온 것입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한 날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오셨지만, 아직까지 그 날을 찾으시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한 날을 찾으신다면 그 날은 역사적인 해원성사를 하실 수 있는 날이요, 하나님의 오랜 소원을 성취하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존재가 축복의 자리에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축복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개인으로 하여금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 가정은 자기만의 가정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대신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이루지 않으면 축복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30-166)
축복의 자리와 그 의미
인류조상 아담 해와가 개체로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역사의 시발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통해서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현현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세계적인 기반이 결정되는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러한 축복의 자리를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복귀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축복이 우리 개체의 축복에 한해서는 안됩니다. 민족과 국가의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입장에서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귀섭리의 완결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6천 년 역사는 한 남성을 찾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찾아 나온 것이 아담을 대신할 수 있는 한 남성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남성을 찾은 후에는 그 남성을 통해서 한 여성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 아담을 통해서 해와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우선 아담을 대신할 수 있는 한 남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 남성을 찾았으면, 그 날부터 해와를 재창조해야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재창조하는 데 있어서는 순리적인 환경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를 앞에 놓고 재창조했다는 승리적인 결정점을 완전히 해결해 놓지 않고는 축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30-168)
축복행사의 의의
에덴 동산에서 해와를 타락시킨 천사장의 주관권에 있는 세계에서 해와를 찾아 나오기 위해서는 협조해 줄 수 있는 남성격인 존재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1960년대를 중심으로 축복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 말은 1960년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과정을 통하여 섭리를 펴시는 곳곳마다, 혹은 그때마다 바라시는 최고의 소원은 축복이라는 하나의 기점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점에 나타나는 중심존재는 그 시대라는 제한된 환경에만 처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내용을 지니는 중심인물입니다. 그러기에 축복은 부부의 인연을 갖추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960년대부터 새로운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족, 국가, 세계의 형성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기점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에서는 수차에 걸쳐서 축복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그 행사를 거쳐서 민족과 세계적인 복귀섭리의 노정에 승리적인 기점을 넓혀 나왔습니다. 그처럼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내정적인 심정으로 체휼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그러한 남성과 여성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한 남성과 여성, 단 둘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하나님이 재창조하실 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어야 합니다. (30-170)
가정이면 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기원이 될 수 있는 부부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완전히 하나되어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지워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사무친 원한의 심정을 해원시켜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으실 때 먼저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그 만물의 중심인 아담 해와를 지으셔서 그들을 축복해 주실 수 있을 한 날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 소원의 한 날을 완결지어야 됩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은 평면적으로 제한된 환경에만 미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통해서 인류가 갈구해 온 소망의 기점 혹은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추구하고 갈구해 나온 소망의 기점이 여기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30-171)
축복가정이 품어야 할 소원과 신념
축복가정은 모든 일체의 신념을 국가와 세계를 위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국가와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신자라는 책임감을 갖고 일체의 행동을 취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제한된 환경에서 일을 하더라도 누구의 명령을 받아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거나 세계와 국가의 소명을 받아서 일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와 국가를 대신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명령을 받은 배후가 다름에 따라서 그 일의 결과도 달라집니다.
축복가정은 자기 부부를 위해서만 산다는 관념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를 복귀하는 데 있어서 공신이라는 기준을 남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기준을 남기지 못하면 영계에 가서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축복받고 나가야 하는 길은 자기 부부만을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부부를 위하기 전에 종족을 위해야 부부로서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집니다. 종족은 국가를 위해야 되고, 국가는 세계를 위해야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축복이라는 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은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서로가 하나되어 가정을 형성하게 될 때, 비로소 그 가정은 세계로 향할 수 있는 가정이 됩니다. 그런 축복가정이 한 가정밖에 없다고 할 때는 그 한 가정이 그 책임을 절대적으로 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는 가정들이 한 가정 한 가정 생기게 되면 복귀역사가 진전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똑 같은 길을 가는 가정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의지만 해서는 안됩니다. 각자가 자체의 자주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이 국가를 위하는 가정이요, 세계를 위하는 가정입니다. 그런 자각을 가지고 나가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후손들도 국가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적인 남편과 아내가 되고, 그 후손들은 복귀섭리의 도상에서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종족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종족적인 인연을 남길 수 있는 부부가 된다면 새로운 조상의 자리에 등극할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책임과 사명을 부여받을 수 있는 인연을 결정짓기 위해서 참석하는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30-179)
축복가정이 가야 할 길
축복을 받는 데 있어서 상습적인 관념으로 그 과정을 거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과정만을 거쳐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축복에 엮어진 사연이나 인연이 얼마나 기막히게 엉클어져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축복받은 부부들은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상대가 잘나고 못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할 목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기 전에 국가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가야 할 길입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 “나를 사랑하는 대신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본래 축복가정은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하늘을 대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아야 할 운명이요, 세계와 나라에 대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아야 할 운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세계를 사랑해야 되고, 세계를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국가를 사랑해야 되고, 나라를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종족을 사랑해야 되고, 종족을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가정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렇게 가정까지 사랑했다는 공인을 하늘로부터 받고 난 후에 비로소 부부끼리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가정보다 종족을 더 사랑해야 하고, 나라를 더 사랑해야 하고, 세계를 더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자기의 친척과 축복받은 동료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모든 축복받은 가정들은 축복받은 그날부터 남자는 자기의 세계만이 아니라 여자의 세계까지도 책임을 져야 하고, 여자 또한 자기의 세계만이 아니라 남자의 세계까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게 둘이서 책임을 지고 나가는 길에 있어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남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축복받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30-182)
축복가정의 생활
그렇게 갈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느냐, 그럴 수 있는 내용을 나 자신이 갖추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탕감조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먼저,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믿음의 세 아들딸이 필요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여덟 식구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여덟 식구를 대표할 수 있는 기준을 넘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갖추지 않고 “민족을 위한다. 국가를 위한다. 세계를 위한다”는 말은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기준은 절대적입니다. 그 절대적인 기준을 해결지어야 할 운명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아들딸을 낳게 되면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합니다. 비록, 나 자신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했지만, 내가 하늘을 위로할 수 있는 자리를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정성을 다하게 될 때 그 아들딸이 세계와 나라 앞에 필요한 존재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하는 데 있어서 치열한 전투를 해야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끌고 가든가, 남편이 아내를 끌고 가든가 해서 어차피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먼저 가야 합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앞에 가고 한 사람은 따라가는 입장에 서야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주체가 되고 상대가 되느냐? 설사,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부인이라고 해도 남편이 모시고 가야 합니다. 그 부인 앞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남자라고 해서 큰소리쳐서는 안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주체가 되어서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는 남자한테 외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외적인 형태를 갖춘 학박사보다 순진하고 순박한 농촌 출신들이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며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보다도 묵묵히 끌면 끄는 곳으로 가고 어떤 장소에 놓아두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늘 앞에 더 필요합니다. (30-184)
본래 사랑은 하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타락은 사탄과 해와로부터 횡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타락의 후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가정으로서 현재의 입장에 머물 것이 아니라 발전을 해야 됩니다. 국가와 세계의 운세를 안고 태어날 수 있는 후손들을 낳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결혼한다고 했지만, 우리 통일교회의 결혼은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데 있습니다. 민족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위한 부부이기 때문에 결혼을 한 번밖에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부부이기 때문에 결혼을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0-185)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가정의 기준은 우리 자신의 가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 세우시는 가정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세계를 대표할 수 있고, 하늘을 대표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찾아 나온 걸음이 축복의 걸음이기 때문에 하늘 부모의 가정을 통해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고 난 후에 정성들이는 가정으로서 정상적인 길을 갈 때 그 아들딸은 대운(大運)을 타고날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무리 못났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녀들은 하늘의 운세를 타고납니다. 그렇게 하늘의 운세를 타고날 수 있는 후손은 부모가 정성들이는 기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얼마만큼 지성을 다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태어날 후손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넓고 높은 사랑을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 축복가정의 길입니다. (30-188)
일생 일대에 가장 귀한 것이 축복
축복 상대의 결정은 하늘이 합니다.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던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한국의 전통적인 혼례법이 천법(天法)에 합당한 결혼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승낙이 없이는 절대로 결혼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아들딸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있으면 그 즉시 부모에게 보고해야 됩니다.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부모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둘이 사귀어도 좋다고 인정해 주면 괜찮습니다. 부모한테 보고하고 연애를 하는 것은 죄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고하지 않고 하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30-188)
사랑은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하늘로부터 끝나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세계를 중심삼고 축복의 때가 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이냐? 우리에게 축복을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면 상속이 됩니다.
그 소유권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수확된 결실을 상속받은 사람이 관리하는 것처럼 그 상속받은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젊더라도 그 사람의 관리 밑에서 조정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서는 잘나고 못나고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선생님이 “이 사람은 너와 천생배필이다” 하면서 딱 결정해 주면,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의 짝을 맺어 주기 위해서 밤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남의 생명문제, 영혼의 문제를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30-200)
축복과 이상상대
무엇이든지 겉보기에 좋은 것은 사탄세계에서 간판을 달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전하고 있는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샀다가는 바가지를 씁니다. 선전을 잘하는 곳에 찾아 들어갔다가는 대다수가 바가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진짜는 선전을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받기 위해서 올 때 새 옷을 입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바르고 와서 날뛰는 여자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수수하여 한 꺼풀을 벗기고 나면 또 한 꺼풀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여자에게 무언가가 있습니다.
미남 미녀끼리 같이 살게 되면, 그 가정이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대로 해주어야 됩니다. 천지이치가 그렇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키가 작은 사람과 맺어 주어야지 같이 키가 큰 사람끼리 맺어 주면 그들이 사는데 있어서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알고, 얼굴이 넓적하게 생긴 사람은 넓적한 사람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갸름한 사람을 얻을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코가 나발코인 사람은 매부리코인 사람과 맺어 주어야 됩니다. 눈을 봐서 절반만 뜬 것 같은 사람이면 큰 눈을 가진 사람과 맺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축복해 주는 것은 자기의 후손을 위해서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모습이 어떻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야 됩니다. “나 자신은 이렇게 생겼기 때문에 이런 남자를 얻어야 내 후손은 이런 자식이 나올 것이다”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끼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정이 들었다고 결혼하면 결혼하는 즉시로 이변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접붙여야 됩니다. 서로가 맞는 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나름의 입장에서 통과하려는 자리에는 절대로 서지 않아야 됩니다. 축복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후대를 위하는 것이 됩니다. (30-205)*
천일국 훈독경 제7권 16일, 원문
축 복
날짜 : 1970. 3. 2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축복의 기원과 그 성립조건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선조로부터 어떤 유업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고, 혹은 부모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상속을 받기 위해서는 형제들 가운데서 누구보다 정이 더 가서 부모가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겠다” 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즉, 부모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간을 거치지 않고는 상속을 받을 수 없으며 축복을 받는 자리에도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래 축복이라는 말은 통일교회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복귀섭리를 해 나오시면서 마음속에 실천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아직까지 그 누구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서글픈 입장에서 축복이 실천되기를 소원 중의 소원으로 고대하면서 지금까지 역사의 과정을 거쳐 나오셨습니다.
이러한 4천 년의 역사과정을 거친 연후에 하나님이 본래부터 주시고 싶었던 축복을 최후로 결행(決行)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섭리역사를 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축복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천 년 기독교의 역사과정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싸워 나왔지만 아직까지 그 하나님의 소원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이라는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한 후부터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내심 가운데 하나의 소원으로서 남아져 온 것입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한 날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이 지금까지 수난의 길을 걸어오셨지만, 아직까지 그 날을 찾으시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한 날을 찾으신다면 그 날은 역사적인 해원성사를 하실 수 있는 날이요, 하나님의 오랜 소원을 성취하시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인류는 타락하여 하나님을 중심삼은 직계의 혈연관계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새로운 인연을 맺어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축복의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락한 사망의 세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중심삼은 생명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탄생한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성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것을 거치기 위해서는 제반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나가야 됩니다. 제반 탕감조건을 세워 가지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개인적인 사명뿐만 아니라 국가적인 사명과 세계적인 사명도 함께 책임지고 나가야 합니다. 그러한 책임을 중심삼고 어떻게 해 나가느냐에 따라 축복이라는 문제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존재가 축복의 자리에 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축복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개인으로 하여금 종족, 민족, 국가,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가정을 이루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 가정은 자기만의 가정이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대신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대표할 수 있는 가정입니다. 그러한 가정을 이루지 않으면 축복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30-166)
축복의 자리와 그 의미
인류조상 아담 해와가 개체로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은 역사의 시발점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두 사람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통해서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현현할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세계적인 기반이 결정되는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그러한 축복의 자리를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다시 복귀해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축복이 우리 개체의 축복에 한해서는 안됩니다. 민족과 국가의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입장에서 축복을 받아야 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복귀섭리의 완결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의 자리에 나가는 사람은 얼마나 엄중한 자리에 나가는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자리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엮어져 온 역사과정의 모든 슬픔을 청산지을 수 있는 자리요, 지금까지 성취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소원이 성취될 수 있는 자리요, 새로운 미래를 출발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는 한 기점입니다.
지금까지의 6천 년 역사는 한 남성을 찾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지선열들이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 찾아 나온 것이 아담을 대신할 수 있는 한 남성을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남성을 찾은 후에는 그 남성을 통해서 한 여성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후 그 아담을 통해서 해와를 창조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우선 아담을 대신할 수 있는 한 남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 남성을 찾았으면, 그 날부터 해와를 재창조해야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렇게 재창조하는 데 있어서는 순리적인 환경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면 국가, 세계면 세계를 앞에 놓고 재창조했다는 승리적인 결정점을 완전히 해결해 놓지 않고는 축복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담 이후에 실패한 모든 것들을 탕감하기 위해서 한 남성으로 태어난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는 혼자서는 안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섭리의 모든 내용을 상속받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 혼자서는 국가를 형성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가정을 편성해야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새로운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땅 위에 있는 수많은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여성을 찾아야 됩니다. 국가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전체를 걸어 놓고 수많은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여성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한 여성을 사탄세계에서 찾아내려면 역사과정에서 반기를 들고 반대하던 수많은 사탄들과 싸워야 합니다. 즉, 4천 년 동안 사탄에게 침범받았던 모든 것들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는 승리적인 조건을 사탄한테 제시하지 않고는 잃어버렸던 해와를 찾아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여성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실패한 내용들을 청산지어야 됩니다. 또한, 시대적인 해와가 되기 위해서는 시대적인 모든 여성들을 대표해서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했다는 하나의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한 남성을 대해서 열녀의 심정을 갖고 나서야 합니다.
그러한 여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지금까지 역사과정을 통하여 소망했던 복귀된 해와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역사상의 모든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실체를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여성을 찾기 위한 배후의 환경을 만든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환경에는 세계사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야 됩니다. 그 여성을 찾으면, 그 여성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민족과 세계가 형성될 것입니다. (30-168)
축복행사의 의의
에덴 동산에서 해와를 타락시킨 천사장의 주관권에 있는 세계에서 해와를 찾아 나오기 위해서는 협조해 줄 수 있는 남성격인 존재가 있어야 됩니다. 우리 통일교회에서 1960년대를 중심으로 축복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 말은 1960년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과정을 통하여 섭리를 펴시는 곳곳마다, 혹은 그때마다 바라시는 최고의 소원은 축복이라는 하나의 기점을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점에 나타나는 중심존재는 그 시대라는 제한된 환경에만 처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내용을 지니는 중심인물입니다. 그러기에 축복은 부부의 인연을 갖추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정, 종족, 민족, 국가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1960년대부터 새로운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종족, 국가, 세계의 형성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 기점을 중심삼고 통일교회에서는 수차에 걸쳐서 축복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그 행사를 거쳐서 민족과 세계적인 복귀섭리의 노정에 승리적인 기점을 넓혀 나왔습니다. 그처럼 축복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내정적인 심정으로 체휼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그러한 남성과 여성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한 남성과 여성, 단 둘만이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하나님이 재창조하실 수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나는 이런 아들이 되고 딸이 되겠습니다. 이 아들과 딸이 가는 길은 당신이 소망하시는 나라를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당신이 추구해 나오시던 세계를 위해서 가는 길입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길을 가는 도중에는 어려움도 많이 있을 것이요, 곤궁함의 곡절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모든 것들을 돌파해서 국가를 지나고 세계로 갈 수 있는 부부가 되어야 합니다. (30-170)
한 남성과 여성이 일생을 동반하여 산다는 것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기대는 아닙니다. 그 자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인연을 맺고 들어서는 자리입니다. 그 길은 가고 싶다고 해서 가거나, 가고 싶지 않다고 해서 안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필연적으로 가야 할 운명의 길입니다. 이 길은 우리에게 한 번밖에 허락되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서 잘못되는 날에는 다시 복귀라는 명사를 찾아 세울 수 없습니다.
아담 해와의 타락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된 것이 아니라 사탄을 중심삼아 가지고 된 것입니다. 본래 사랑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할 것이었는데 아담 해와의 타락으로 그 사랑이 사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중심삼고는 언제나 하나님 편이 시초와 결과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하나님은 그 사랑을 표준하고 복귀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가정이면 남편과 아내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정의 기원이 될 수 있는 부부가 완전히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가 완전히 하나되어서 타락한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지워 버려야 하고 하나님의 사무친 원한의 심정을 해원시켜야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으실 때 먼저 만물을 지어 놓으시고 그 만물의 중심인 아담 해와를 지으셔서 그들을 축복해 주실 수 있을 한 날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 소원의 한 날을 완결지어야 됩니다.
그 축복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죽었듯이 복귀섭리의 도상에 왔다 간 수많은 사람들의 소원도 축복이었습니다. 영계에 가 있는 수많은 영인들도 축복의 인연을 맺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의의 면류관’과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면류관의 표상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 앞에 축복의 상대를 갖추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특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면류관의 상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축복은 평면적으로 제한된 환경에만 미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통해서 인류가 갈구해 온 소망의 기점 혹은 영계의 수많은 영인들이 추구하고 갈구해 나온 소망의 기점이 여기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30-171)
축복가정이 품어야 할 소원과 신념
예수님이 찾아 세우고자 한 상대, 다시 말해서 축복 대상자는 예수님 자신에게만 속하는 여성이 아니라 세계를 대신할 수 있는 여성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계의 중심존재였기 때문에 그 여성도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축복가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길을 가야 합니다. 축복가정은 모든 일체의 신념을 국가와 세계를 위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국가와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신자라는 책임감을 갖고 일체의 행동을 취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제한된 환경에서 일을 하더라도 누구의 명령을 받아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거나 세계와 국가의 소명을 받아서 일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와 국가를 대신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명령을 받은 배후가 다름에 따라서 그 일의 결과도 달라집니다.
세계를 대표해서 일하는 것이 내 개체의 일과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세계의 명령을 받고 일한다고 할 때는 세계에 결속됩니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명령을 받고 일한다고 할 때는 국가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가정은 자기 부부를 위해서만 산다는 관념을 초월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를 복귀하는 데 있어서 공신이라는 기준을 남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기준을 남기지 못하면 영계에 가서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영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히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축복받고 나가야 하는 길은 자기 부부만을 위하는 길이 아닙니다. 자기 부부를 위하기 전에 종족을 위해야 부부로서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벌어집니다. 종족은 국가를 위해야 되고, 국가는 세계를 위해야 안식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축복이라는 것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축복은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서로가 하나되어 가정을 형성하게 될 때, 비로소 그 가정은 세계로 향할 수 있는 가정이 됩니다. 그런 축복가정이 한 가정밖에 없다고 할 때는 그 한 가정이 그 책임을 절대적으로 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나아가는 가정들이 한 가정 한 가정 생기게 되면 복귀역사가 진전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똑 같은 길을 가는 가정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의지만 해서는 안됩니다. 각자가 자체의 자주성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런 가정이 국가를 위하는 가정이요, 세계를 위하는 가정입니다. 그런 자각을 가지고 나가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에서 태어나는 후손들도 국가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적인 남편과 아내가 되고, 그 후손들은 복귀섭리의 도상에서 세계를 복귀할 수 있는 종족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종족적인 인연을 남길 수 있는 부부가 된다면 새로운 조상의 자리에 등극할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책임과 사명을 부여받을 수 있는 인연을 결정짓기 위해서 참석하는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30-179)
축복가정이 가야 할 길
축복을 받는 데 있어서 상습적인 관념으로 그 과정을 거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과정만을 거쳐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축복에 엮어진 사연이나 인연이 얼마나 기막히게 엉클어져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나오게 되면 세계가 좌우됩니다. 그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방향을 맞추어 나가게 되면, 세계가 그 방향을 향하여 따라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축복받은 부부들은 자기들의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상대가 잘나고 못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할 목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기 전에 국가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받은 가정으로서 가야 할 길입니다. 남편뿐만 아니라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가 서로 “나를 사랑하는 대신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하늘을 사랑하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만약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으면 그들이 사랑한 것은 하늘땅을 대신한 사랑, 세계를 대신한 사랑, 국가를 대신한 사랑, 민족을 대신한 사랑이 되었을 것입니다. 전부 다 그들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본래 축복가정은 인간시조가 타락하여 하늘을 대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아야 할 운명이요, 세계와 나라에 대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을 찾아야 할 운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을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세계를 사랑해야 되고, 세계를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국가를 사랑해야 되고, 나라를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종족을 사랑해야 되고, 종족을 사랑했다는 공인을 받아서 가정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렇게 가정까지 사랑했다는 공인을 하늘로부터 받고 난 후에 비로소 부부끼리 사랑해야 됩니다. 자기 가정보다 종족을 더 사랑해야 하고, 나라를 더 사랑해야 하고, 세계를 더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자기의 친척과 축복받은 동료들을 사랑해야 됩니다.
모든 축복받은 가정들은 축복받은 그날부터 남자는 자기의 세계만이 아니라 여자의 세계까지도 책임을 져야 하고, 여자 또한 자기의 세계만이 아니라 남자의 세계까지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게 둘이서 책임을 지고 나가는 길에 있어서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남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축복받은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30-182)
축복가정의 생활
그렇게 갈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 있느냐, 그럴 수 있는 내용을 나 자신이 갖추었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탕감조건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먼저, 탕감조건을 세우려면 믿음의 세 아들딸이 필요합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여덟 식구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 여덟 식구를 대표할 수 있는 기준을 넘지 않고는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갖추지 않고 “민족을 위한다. 국가를 위한다. 세계를 위한다”는 말은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 기준은 절대적입니다. 그 절대적인 기준을 해결지어야 할 운명의 자리가 축복의 자리입니다.
여기의 수많은 가정들 가운데 중심이 될 수 있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많은 가정들 가운데 하늘이 가장 사랑할 수 있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모두 다 뜻을 망각하고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면서 살았다면 하늘 앞에 부끄러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뜻을 앞에 놓고 자기들끼리 인연을 맺어서 자기들만의 행복을 찾아 가정을 꾸려 나가는 입장에 서면 발전을 못 합니다. 따라서 가정에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나라, 세계, 하늘과 더불어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그래서 그 가정의 기쁨이 나라의 자랑이요, 세계의 자랑이요, 하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들딸을 낳게 되면 하나님 앞에 바쳐 드려야 합니다. 비록, 나 자신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했지만, 내가 하늘을 위로할 수 있는 자리를 이루어 드릴 수 있는 날이 기필코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정성을 다하게 될 때 그 아들딸이 세계와 나라 앞에 필요한 존재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들을 중심삼고 행복을 모색하는 가정은 하늘의 뜻을 이용하려는 것밖에 안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하는 데 있어서 치열한 전투를 해야 됩니다. 아내가 남편을 끌고 가든가, 남편이 아내를 끌고 가든가 해서 어차피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먼저 가야 합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앞에 가고 한 사람은 따라가는 입장에 서야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주체가 되고 상대가 되느냐? 설사, 신앙생활에 있어서 주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부인이라고 해도 남편이 모시고 가야 합니다. 그 부인 앞에 절대 복종해야 됩니다. 남자라고 해서 큰소리쳐서는 안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가 주체가 되어서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는 남자한테 외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뜻에 대해서 얼마나 충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자기의 생명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체가 바라는 상대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가 뜻을 위하는 마음이 자기보다 앞서 있으면 그를 통해서 세계를 찾아 나가겠다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남성과 여성들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외적인 형태를 갖춘 학박사보다 순진하고 순박한 농촌 출신들이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기를 내세우며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보다도 묵묵히 끌면 끄는 곳으로 가고 어떤 장소에 놓아두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늘 앞에 더 필요합니다. (30-184)
우리가 뜻을 앞에 놓고 가는 데 있어서 자기 욕심을 부리다가는 거꾸로 가게 됩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욕심을 개입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축복받고 나서 서로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욕심을 부리며 사는 부부가 있다면, 그 부부는 아담과 해와가 타락하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타락이란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축복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중심삼고 사랑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이런 사람이 좋아” 하면서 자기만을 내세우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하늘이 동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마음에 있었던 사람들은 절대로 축복을 안 해줍니다. 어느 누구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신앙의 정규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본래 사랑은 하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데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타락은 사탄과 해와로부터 횡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타락의 후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가정으로서 현재의 입장에 머물 것이 아니라 발전을 해야 됩니다. 국가와 세계의 운세를 안고 태어날 수 있는 후손들을 낳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결혼한다고 했지만, 우리 통일교회의 결혼은 민족을 위하고 세계를 위하는 데 있습니다. 민족은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민족을 위한 부부이기 때문에 결혼을 한 번밖에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계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부부이기 때문에 결혼을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30-185)
지금 우리는 현재의 입장에서 종족을 중심삼고 국가와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세계 인류를 대신하고, 민족을 대신하고, 종족을 대신해서 제사장의 책임을 감당하겠다는 선서를 해야 됩니다. 우리 가정은 역사시대에 있어서 하늘을 중심삼고 남아질 수 있는 가정이요, 세계 앞에 필요한 가정이요, 당신의 사랑의 세계에서 필요한 가정이라는 절대적인 내용을 가지고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 나오시는 가정의 기준은 우리 자신의 가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찾아 세우시는 가정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국가를 대표할 수 있고, 세계를 대표할 수 있고, 하늘을 대표할 수 있는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찾아 나온 걸음이 축복의 걸음이기 때문에 하늘 부모의 가정을 통해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축복을 받고 난 후에 정성들이는 가정으로서 정상적인 길을 갈 때 그 아들딸은 대운(大運)을 타고날 것입니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무리 못났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자녀들은 하늘의 운세를 타고납니다. 그렇게 하늘의 운세를 타고날 수 있는 후손은 부모가 정성들이는 기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세계를 위해서, 하늘을 위해서 얼마만큼 지성을 다하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태어날 후손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욕심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면 하늘이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떠나게 됩니다. 자기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사랑을 가지고 나오게 될 때는 하나님이 같이하시지 않는 것이요, 반드시 세계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자리에 있을 때 같이하십니다. 그러니까 보다 넓고 높은 사랑을 찾아 세워야 하는 것이 축복가정의 길입니다. (30-188)
일생 일대에 가장 귀한 것이 축복
축복을 받는 데 있어서 “나는 누구와 하면 좋겠다” 하면서 마음속에 자기의 짝으로 맺어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할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해와가 장성기 완성급에서 타락할 때, 서로가 자기의 상대인 것을 확실히 몰랐습니다. 모르는 자리에서 사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부지불식간에 그런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축복 상대의 결정은 하늘이 합니다.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즉, 아담의 아버지가 되시던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한국의 전통적인 혼례법이 천법(天法)에 합당한 결혼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승낙이 없이는 절대로 결혼을 못 합니다. 그러니까 아들딸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있으면 그 즉시 부모에게 보고해야 됩니다.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기 전에 먼저 부모의 공인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둘이 사귀어도 좋다고 인정해 주면 괜찮습니다. 부모한테 보고하고 연애를 하는 것은 죄가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고하지 않고 하는 것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30-188)
축복의 자리는 자기 일대에서 영원을 두고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자리입니다. 그 가장 귀한 자리에서 가장 귀한 분과 더불어 결정을 짓고 넘어가야 됩니다. 하늘이 여기에 내려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하늘과 더불어 결정지은 가장 귀한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귀한 실체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 나가는 것은 원칙이 아닙니다. 그것을 잘못했기 때문에 타락의 한이 지금까지 사무쳤습니다. 그것을 탕감하고 나가야 할 우리의 입장에서 어떻게 그 귀한 자리를 찾아 나가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통일교회에서는 연애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하늘로부터 끝나야 됩니다. 그러면 앞으로 세계를 중심삼고 축복의 때가 있을 때는 어떻게 될 것이냐? 우리에게 축복을 상속해 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아들에게 물려주면 상속이 됩니다.
그 소유권은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수확된 결실을 상속받은 사람이 관리하는 것처럼 그 상속받은 사람이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젊더라도 그 사람의 관리 밑에서 조정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서는 잘나고 못나고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선생님이 이것을 인계해 주게 될 때, 우리는 그 상속받은 사람이 아무리 불구자라고 해도 그 사람 앞에 가서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곧, 그럴 때가 올 것입니다. 이런 것을 깨닫고, 이 축복의 자리가 우리 자신의 일대에 있어서 한 번밖에 있을 수 없는 가장 귀한 인연을 결정짓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생님이 “이 사람은 너와 천생배필이다” 하면서 딱 결정해 주면,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여러분의 짝을 맺어 주기 위해서 밤잠을 제대로 못 잡니다. 남의 생명문제, 영혼의 문제를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보면,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 있습니다. 얼굴을 보면, 몇 번씩 시집가야 할 타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과부가 될 타입입니다. 눈을 보나, 입술을 보나, 콧등을 보나, 틀림없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이상의 남자를 만나게 해 주어야 됩니다.
그런 여자가 신랑을 만나면, 처음에는 그 신랑이 원수와 같습니다. 그것이 좋게 출발해서는 깨져 나가기 때문에 원수로부터 출발해야 나중에 좋게 들어맞습니다. 그런 것을 선생님이 알고 있습니다. 어찌 됐건, 축복에 대해서는 선생님하고 의논해야 됩니다.
또, 선생님이 축복할 때 여자들 가운데 불구자가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 여자의 얼굴이 못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후의 인연이나 천성을 잘 타고난 여자였는데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렇게 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그 여자와 맺어 주려고 하면 전부 다 싫다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누가 불구자를 좋다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
그런데 어떤 한 남자를 가만히 보니까 눈이 쓱 들어가고 생김 생김에 결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결점을 보충해 줄 수 있는 여자가 바로 그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설득 공작에 나섰습니다. “너, 이 여자가 보기에는 이렇게 생겼지만 좋은 여자다. 살다가 보기 싫은 데가 보이거든 그때는 눈을 감으면 되지 않겠느냐? 그렇지만 여자의 얼굴은 참 잘생겼다. 그리고 네가 결혼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냐? 후대를 위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냐? 그런 입장에서 결혼하게 되면, 이것이 통일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 아니겠느냐? 선생님의 일생에서 잊지 못할 일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쭉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그 여자와 결혼하여 딸을 낳게 되면 미인을 낳을 것이고, 아들을 낳게 되면 장군을 낳을 것이다” 해 가지고 짝을 맺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선생님이 지방에 순회를 갔는데, 그 부부가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을 보자마자 그 사람이 선생님 앞으로 뛰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어찌되었나 궁금하던 차에 만나게 되었는데, 그 아이를 보자고 해서 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참 잘생긴 딸이었습니다. (30-200)
축복과 이상상대
무엇이든지 겉보기에 좋은 것은 사탄세계에서 간판을 달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전하고 있는 집에 들어가서 물건을 샀다가는 바가지를 씁니다. 선전을 잘하는 곳에 찾아 들어갔다가는 대다수가 바가지를 쓴다는 것입니다. 진짜는 선전을 안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축복받기 위해서 올 때 새 옷을 입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바르고 와서 날뛰는 여자는 상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수수하여 한 꺼풀을 벗기고 나면 또 한 꺼풀이 있을 것 같은 그런 여자에게 무언가가 있습니다.
미남 미녀끼리 같이 살게 되면, 그 가정이 견디어 낼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대로 해주어야 됩니다. 천지이치가 그렇습니다. 키가 큰 사람은 키가 작은 사람과 맺어 주어야지 같이 키가 큰 사람끼리 맺어 주면 그들이 사는 데 있어서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알고, 얼굴이 넓적하게 생긴 사람은 넓적한 사람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갸름한 사람을 얻을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또, 코가 나발코인 사람은 매부리코인 사람과 맺어 주어야 됩니다. 눈을 봐서 절반만 뜬 것 같은 사람이면 큰 눈을 가진 사람과 맺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님이 축복해 주는 것은 자기의 후손을 위해서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모습이 어떻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야 됩니다. “나 자신은 이렇게 생겼기 때문에 이런 남자를 얻어야 내 후손은 이런 자식이 나올 것이다” 하는 것을 생각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선생님이 축복해 준 사람들의 아들딸을 보면 대체적으로 그 부모보다 낫더라구요. 그것은 내가 결합을 잘 시켜 주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국에서 궁합을 잘 보기로 유명한 이 모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 원리를 알고 나서 선생님을 상당히 존경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자기의 전업이 그것이기 때문에 선생님이 축복을 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도와주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는 필요 없소” 하면서 “도대체 영감은 하루에 몇 쌍이나 할 수 있소” 하고 물으니, “한 쌍을 하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걸려야 됩니다” 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는 나에게 안 통한다고 했습니다.
그 영감이 묻기를 “그러면 선생님은 하루에 몇 쌍까지 하십니까” 하길래, “하루에 보통 70쌍은 해야 된다” 했습니다. 선생님이 그 사람에게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식하고 통일교회에서 하고 있는 식으로 한번 대결해 보자” 하면서 선생님의 자료를 쑥 뽑아다 보여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탄복을 하는 거예요. “과연 선생님이십니다” 그러는 거예요. 어쩌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여자는 여차하면 급살을 맞아 죽을 여자로서 천하에 그 여자에게 맞는 남자를 고르려고 해도 고를 수가 없는데, 어쩌면 그 남자를 짝으로 잘 맞춰 놓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선생님한테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면 벌써 무엇인지 모르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끼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정이 들었다고 결혼하면 결혼하는 즉시로 이변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접붙여야 됩니다. 서로가 맞는 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 나름의 입장에서 통과하려는 자리에는 절대로 서지 않아야 됩니다. 축복이란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나라를 위하고 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후대를 위하는 것이 됩니다. (3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