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통전환 (천일국 훈독경 제7권 5일), u

훈독왕 | 20201007213425

천일국 훈독경 제75

 

혈통전환 (훈독본)

날짜 : 1970. 10. 13()

장소 : 한국 중앙수련원

 

혈통전환 (훈독경 제7권 5일)

 

아담을 창조하신 목적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알지 않고서는 완전주관을 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알지 못하면 완전주관을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 이외에는 이 세상을 완전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아담 자체도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그 피조물 자체가 창조의 전반을 관장해서 완전주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담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아담의 육체를 하나님의 공명체(共鳴體)와 같은 입장에 세워 가지고 하나님이 직접 천주를 주관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째서 아담과 같은 형()을 거치려고 하셨는가? 만물은 형상적인 꼴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형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실체를 가진 만물은 그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체를 가지고 주인적인 인격과 형을 갖춘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 만물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계도 주관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여러 형체를 가진 실체들과 무형의 실체들까지도 주관하시려면 중심적인 타입, 곧 형상(形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아담을 중심삼고 무형의 실체세계와 유형의 실체세계를 주관하시려던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그의 형태, 인상(人相), 인격 등이 하나님 자신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제2의 목적은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렇게 하나로 맺을 수 있었느냐? 그 양자가 결부될 수 있었던 결실점, 그 중심점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일체 되는 것을 실감하는 세계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 창조이상입니다. 결국에는 그 소망이 사랑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도 사랑의 환경을 떠나서는 달성될 수 없습니다.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고, 사랑에 의해서 인간과 세계도 하나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습니다. (35-156)

 

왜 메시아가 필요하냐

 

한 남자와 여자끼리도 창조목적과 일체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입장이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고자 하셨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그 중심점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했는데 사탄과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그 연결된 동기가 반대의 작용을 받은 것이므로 연결된 그 자체도 언제나 반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양심과 육심(肉心)이 서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된 그 끝을 어떻게 풀고 해방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걸어나온 길이 지금까지 인간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하여 싸워 온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기점을 회복하기 위해서 직접 인간의 육심에 들어와 인간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싶었지만 인간과 직접적인 사랑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간접적인 전법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에 임재하여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언자라든가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사랑의 체휼을 통하여 섭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그러니까 복귀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 사랑의 부활노정을 더듬어 오셨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몸과 양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결합을 도모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시작하여 4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선민권을 형성하시고 유대교를 중심삼고 메시아 사상을 지속시켜 오셨습니다. 그렇게 그 민족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에 대해서 이스라엘나라는 믿음의 기대(基臺)에 해당되었고 유대교는 실체기대에 해당했습니다. 그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이스라엘나라를 중심삼고 횡적으로 일체가 되는 경우에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자연히 완성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한 때를 바라셔서 4천 년의 역사를 경과하면서 수고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완성되지 않더라도 원리적으로 그 기간에 도달했으므로 하나님은 서둘러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예수님과 일체가 되었으면 예수님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참부모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메시아가 필요하냐? 구원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구원의 근본기점은 어디냐? 하나님과 사랑의 접촉점입니다. 거기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혈통과 관계없는 인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반대의 방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탕감하기 위해서는 원죄를 제거해야 됩니다. 원죄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는 혈통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메시아가 필요합니다. (35-159)

 

완전복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만들어서 그분의 사랑을 우리 인간과 결합시키고 싶어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일신은 잊어도 상관없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심(愛情心)에 접하지 않으면 생사의 경지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종교는 긍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완전부정입니다. 생명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떳떳이 사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각 개인들이 신앙생활을 해 온 입장이었습니다.

 

가정을 중심삼고 악의 부모로부터 출발한 인류역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체인 참부모의 가정을 이루어서 그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전환운동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대표자를 세워 놓고 전환운동을 전개하면서 역사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가 여자를 거쳐서 한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그 전환을 위한 교차점을 어디에서 만들어야 했겠어요? 그것은 여자의 뱃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뱃속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을 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줄곧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을 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뱃속에 생명이 잉태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잉태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잉태해야 할 여자가 있어야 되는 동시에 잉태시킬 남자도 있어야 됩니다. 결국, 한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을 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완전복귀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남자의 골육 속에 잠재해 있는 아기씨가 그 출발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의 혈육 속에 있는 아기씨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가 되었다는 조건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세우지 않으면 혈통의 완전한 전환을 위한 기대를 쌓았다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경우, 세계적인 종교가 어떠한 종교인가 하면 우리 인간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내용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문답과 같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태어나 성장하여 30세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거듭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심정적인 내용의 발생지는 30세부터가 아닙니다. 역사로부터입니다. 그 역사적인 심정을 상속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거듭남의 동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혈통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담의 골수까지, 골육의 중심부까지 들어가서 장래의 아이가 될 그 씨에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된 승리적인 조건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35-162)

 

예수님을 사모해야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면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님 안에 모두 다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 그 주님과 일체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게, 그립다하며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경지에 서야만 예수님과 자기가 하나될 수 있습니다. 자기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슬퍼지면 자신도 슬퍼집니다. 남자의 골육 속에 있는 아기씨가 있다면, 그 남자의 감정적인 모든 것이 그 씨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쁠 때는 기쁜 영향을 미치고, 슬플 때는 슬픈 영향을 미칩니다. 그처럼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아기씨와 같은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예수님은 남자였습니다. 사실은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아담이었습니다. 결국은 육적이면서도 영적으로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와 하나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골수까지 들어갔다고 하는 것, 예수님을 목마르게 그리워해서 예수님의 애정과 맞닿는 그러한 것을 체휼시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워하고 맞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신랑으로 맞이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중의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골육으로 들어가서 아기씨가 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복중을 통과했다는 조건도 얻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부의 입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 속으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합니다. 성령(聖靈)은 해와의 신입니다. 이것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낳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에 아담 속으로 빨리 돌아가게 하는 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작용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몸 속에 있는 아기씨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이와 같은 신앙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이런 것은 알지도 못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다만예수님을 무조건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수월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데 잘 모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원리적으로 보아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완전복귀는 안됩니다. 이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이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된다고 해서 예수님 앞에 모이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골육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역사상에서 섭리하시는 것이 쉬운 일인가 어떤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중간에는 수많은 사탄권, 원수권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로막고 있는 이 사탄권을 돌파하는 것은 단번에는 안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싸움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예수님의 골육까지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한테 다 들어간다고 한다면 무엇이 들어갈 것인가? 육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심정밖에는, 사랑밖에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이외에는 인연을 맺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리도 아니고 정의도 아닌 것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앞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사랑 없이는 그것을 맺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은 역사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거리나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분명히 가르쳐 주느냐 하면 복귀의 노정이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요, 지금부터 여러분이 심정적 문제를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제 일보를 내디디지 않으면 안되는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혈통적인 전환기가 아니라 생애의 전환기에 서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와 같이 분명한 내용의 기반을 닦아 나가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이것 봐, 어디에서 이전해 왔어? 어디에서 출발했어?” 하면, “타락하지 않은 에덴 동산, 하나님의 품에서…”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무엇이 그러냐고 물었을 경우에 여기가 이렇지 않느냐고 하면서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로서는 설 길이 없지만 이러 이러한 분이 사인해 주신 것을 받았으므로 그렇다고 해야 합니다.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세웠으나 그 소유권은 종이 한 장으로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사탄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5-164)

 

새로 태어나는 길

 

그렇게 해서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고 참부모의 혈육에 접할 수 있는 내인(內因)을 세웠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성신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길을 더듬어 가야 거듭나게 됩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원리는 그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겠어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을 경우에는 타락한 인간 자체가 주관권을 복귀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그것을 찾아서이것이다하여 세계적인 인격의 권위를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절망적인 세계에 선생님과 같은 사나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슬픈 일이에요, 기쁜 일이에요? 여러분은 기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기쁘지 않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왔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선생님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반을 만들어 여러분이 몰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평안권을 이룩했다는 것은 천주적(天宙的)인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면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걸어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35-166)

 

다말과 밧세바

 

여러분이 다말에 관해 연구를 하면 원리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말은 누구와 관계했던가? 시아버지하고 관계했습니다.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혈통을 계승할 수 있었는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어머니는 누구였던가? 밧세바였습니다. 밧세바는 어떠한 여자였던가 하면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해서 솔로몬이 되었는가? 다윗은 아담의 입장이었고, 우리야는 천사장의 입장이었습니다. 그 천사장의 아내는 복귀하지 않으면 안되는 해와의 입장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천사장이 아담의 상대자인 해와를 타락시켜 끌고 갔습니다. 사랑으로 점령하여 훔쳐 간 것입니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그러한 삼각관계에 다시 되돌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원리적 기준에 입각한 조건을 세운 기대 위에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영광의 아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영광의 아이였던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자기 시아버지하고 관계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시아버지하고 관계하는 데 있어서도 정신이 훌륭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법도는 음행을 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대권에 있어서 다말은 자기의 첫째 남편과 둘째 남편이 죽어 버렸지만, 어차피 그 혈통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혈통을 지키는 데 있어서 자기 체면이라든가 자기 위신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말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혈통을 어떻게 하면 남길 수 있을까가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혈통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혈통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말은 혈통을 복귀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권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아버지와 관계했던 것입니다.

 

태중에서 승리한 그 기준이 줄곧 전통적인 역사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의 자손에게 이어져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국가적인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사탄세계에 국가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늘세계에도 국가적인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가인 아벨로서 상대기준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권을 이와 같이 발전시키면서 혈통적인 승리의 기준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선조들의 심정을 계승해 온 것입니다. (35-168)

 

기독교 이외의 종교

 

자기 체면이라든가, 위신이라든가, 사회적인 환경과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전부라고 하는 심정을 가진 대표적인 한 사람의 딸이 마리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적인 승리의 기준을 이어받은 마리아의 태중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기반에 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잉태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적인 싸움을 끝낸 승리의 기반, 하나님 앞에 태어날 조건이 갖추어진 기반 위에서 태어난 것이 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를 통과하지 않은 자는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혈통적인 내용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비로소 사랑을 받는 독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 앞에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가정적으로는 세례 요한, 교회를 중심삼고는 유대교, 그리고 나라를 중심삼고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정이 예수님과 하나되었다면 유대교도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하나되었다면 유대교도 완전히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체가 되어 국가를 세워 로마를 병합하고 지중해 전반에 걸쳐 있는 로마 문명권을 예수님의 지휘 하에 들어오게 했으면 세계 통일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전세계를 복귀하고 지상천국의 이상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룩하려고 했지만 이룩하실 수 없었습니다. (35-171)

 

기독교사에 있어서 완성기반

 

통일교회는 나라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습니다. 3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수고와 싸움을 하더라도 본향 땅을 탈환하고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권을 갖추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제2이스라엘의 주권기반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까지 고통스런 노정을 더듬어 온 그 희망은 무엇이었겠는가? 그 나라로 돌아가 주권을 복귀하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국민의 위치에 서서 입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망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와 같은 조건기반이 지금의 통일교회 기준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2천 년이나 걸려서 민주주의 국가권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로마와 같은 입장을 세계적인 대립권으로 세워 놓았습니다. 기독교권이 공산권과 대립하여 우위의 입장에 선 기준을 준비한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권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제2이스라엘의 세계적인 기준입니다.

 

그 세계적인 기독교의 기대를 생각해 볼 때 3단계의 과정을 통과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소생과정을 통과해서 장성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이것이 신교입니다. 원리적으로 볼 경우에 구교는 율법적이고 구약적인 신앙이고, 신교는 신약적인 신앙입니다. 신교가 주장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실체는 누구인가 할 때 재림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의 세계적인 기반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실체는 무엇을 겸하지 않으면 안되느냐 하면 심정을 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아울러 갖는 실체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실체를 중심삼은 것이 기독교사에 있어서 완성기반이 되는데, 그것이 통일교회입니다. (35-173)*

 

천일국 훈독경 제75, 원문

 

혈통전환 

 

날짜 : 1970. 10. 13()

장소 : 한국 중앙수련원

 

아담을 창조하신 목적

 

이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완전히 알지 않고서는 완전주관을 할 수 없습니다. 완전주관은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알지 못하면 완전주관을 할 수 없는 것이니까 완전히 알고 계시는 하나님 이외에는 이 세상을 완전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아담 자체도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그 피조물 자체가 창조의 전반을 관장해서 완전주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담 가운데 하나님이 직접 임재하셔서 아담의 육체를 하나님의 공명체(共鳴體)와 같은 입장에 세워 가지고 하나님이 직접 천주를 주관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째서 아담과 같은 형()을 거치려고 하셨는가? 만물은 형상적인 꼴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형도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크다고 하면 무한대(無限大), 작다고 하면 무한히 작은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실체를 가진 만물은 그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체를 가지고 주인적인 인격과 형을 갖춘 존재가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 지상 만물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무한한 영계도 주관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여러 형체를 가진 실체들과 무형의 실체들까지도 주관하시려면 중심적인 타입, 곧 형상(形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아담을 중심삼고 무형의 실체세계와 유형의 실체세계를 주관하시려던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그의 형태, 인상(人相), 인격 등이 하나님 자신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이 없으면 형()의 세계를 주관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2의 목적은 아담과 하나님이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그렇게 하나로 맺을 수 있었느냐? 거기에서 평면적인 대표자는 인간이었으며 입체적인 대표자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양자가 결부될 수 있었던 결실점, 그 중심점은 사랑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육체를 가진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일체가 될 때 최대의 행복감을 느낍니다. 누구든지 그렇게 행복한 경지의 이상세계, 창조이상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과 일체 되는 것을 실감하는 세계로 통일하고자 하는 것이 창조이상입니다. 결국에는 그 소망이 사랑을 중심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도 사랑의 환경을 떠나서는 달성될 수 없습니다.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고, 사랑에 의해서 인간과 세계도 하나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습니다. (35-156)

 

왜 메시아가 필요하냐

 

한 남자와 여자끼리도 그와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목적과 일체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그러한 입장이 하나님이 인간과 사랑을 중심삼고 하나되고자 하셨던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중심을 천사장이었던 사탄이 노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주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중심점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했는데 사탄과 연결되고 말았습니다. 그 연결된 동기가 반대의 작용을 받은 것이므로 연결된 그 자체도 언제나 반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양심과 육심(肉心)이 서로 반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탄의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된 그 끝을 어떻게 풀고 해방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걸어나온 길이 지금까지 인간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하여 싸워 온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같은 기점을 회복하기 위해서 직접 인간의 육심에 들어와 인간을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싶었지만 인간과 직접적인 사랑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간접적인 전법을 통하여 인간의 양심에 임재하여 지금까지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언자라든가 수많은 선지자들이 와서 하나님의 사랑의 체휼을 통하여 섭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복귀역사였습니다.

그러니까 복귀역사의 중심은 하나님이 사랑의 부활노정을 더듬어 오셨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이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의 몸과 양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랑의 결합을 도모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복귀섭리를 시작하여 4천 년의 역사를 통해서 이스라엘 선민권을 형성하시고 유대교를 중심삼고 메시아 사상을 지속시켜 오셨습니다. 그렇게 그 민족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메시아에 대해서 이스라엘나라는 믿음의 기대(基臺)에 해당되었고 유대교는 실체기대에 해당했습니다. 그 믿음의 기대와 실체기대가 이스라엘나라를 중심삼고 횡적으로 일체가 되는 경우에는 메시아를 위한 기대가 자연히 완성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한 때를 바라셔서 4천 년의 역사를 경과하면서 수고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대가 완성되지 않더라도 원리적으로 그 기간에 도달했으므로 하나님은 서둘러 예수님을 지상에 보내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와 이스라엘이 예수님과 일체가 되었으면 예수님이 메시아를 위한 기대 위에서 참부모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이 참부모의 자리에 설 수 없으면 새로운 사랑을 중심삼은 혈통 전환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원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왜 메시아가 필요하냐? 그 목적은 어디에 있느냐? 구원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 구원의 근본기점은 어디냐? 하나님과 사랑의 접촉점입니다. 거기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사탄의 혈통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의 혈통과 관계없는 인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반대의 방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탕감하기 위해서는 원죄를 제거해야 됩니다. 원죄를 제거하는 데 있어서는 혈통적인 문제가 근본적인 문제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메시아가 필요합니다.

그 메시아는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우리들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사탄의 혈통을 누가 제거할 수 있느냐?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이 참부모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일체가 되어 선한 상대기준을 조성하고 세계를 자기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는 참부모가 나타나기 전에는 절대로 그것을 뽑아 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의 부모와 선의 부모가 사랑을 중심삼은 싸움의 기준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다 싸우고 최후에 남는 것이 사탄의 사랑이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남았다고 하는 기준이 설 때 사탄의 혈통권이 굴복합니다. (35-159)

 

예수님의 길

 

그러한 기준을 예수님은 바라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3년 공생애노정에 나서기 전에 선포한 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어미나 아비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태복음 10:37) 한 것입니다. 그리고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태복음 10:38) 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혈통을 빼 버리는 것은 메시아가 합니다. 그러나 그 혈통을 제거하는 행동은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일체가 되어서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기준이 성립되지 않는 이상에는 우리가 구원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빼내는 것은 어떠한 입장에서 될 수 있느냐 하면 죽느냐, 사느냐의 경지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빠지지 않습니다. 생사의 경지인 것입니다. 거기를 통과해야 악의 혈통이 제거됩니다.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우리가 그냥 이야기하고 느끼는 그런 입장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사의 경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거나 죽음의 경지를 더듬어 가야 합니다. 육체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소생할 것을 한마음으로 사모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에 참소(讒訴)받을 수 있는 어떤 빚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경지를 어떻게 체휼해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한테 있어서 제일 어려운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셉 가정에서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감정을 가진 산 사람이 산송장과 같은 생활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렇게 생사의 경지를 통과하면서도 내심으로 바란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이 하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철칙이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거기까지 도달해 가지고 승리권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그 승리권이 역사적으로 어떠한 관계를 가졌던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 개인한테 있어서는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었던 승리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때까지 혈통전환의 뜻을 품고서 섭리하신 노정에서 어떻게 승리적인 기반을 닦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기반을 완전히 닦았다고 하는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메시아로서 설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미리 알고 계셨으므로 메시아가 그 기준을 세울 수 있도록 역사를 통하여 준비해 나오셨던 것입니다. (35-160)

 

완전복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본연의 인간으로 만들어서 그분의 사랑을 우리 인간과 결합시키고 싶어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일신은 잊어도 상관없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애정심(愛情心)에 접하지 않으면 생사의 경지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종교는 긍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완전부정입니다. 생명까지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을 통과하지 않으면 떳떳이 사탄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각 개인들이 신앙생활을 해 온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개인의 입장에 서서는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역사적인 입장에 서기 위해서 어떠한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인가? 혈통을 전환시키는 데는 어디서부터 전환시켜야 했느냐?

예수님이 죽음의 경지를 넘어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준에서는 개인적인 승리의 기준이 세워질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이전과 관계된 승리의 기준은 세워질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공식노정을 출발하기 이전의 승리권이 중요합니다. 공식노정을 출발하기 이전의 생활권은 역사적인 부활의 생활권에 해당되었습니다. 그것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공식노정의 출발기준을 세울 수 없었습니다.

공적인 3년 기간은 그 당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있었던 기간입니다. 사적인 30년 기간에는 역사적인 기준을 세워서 하나님의 심정을 중심삼고 사랑의 기대를 쌓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섭리가 아담으로부터 계속되어 나왔습니다. 그 아담으로부터의 섭리기간이 무엇으로 메워졌느냐? 사랑에 의해서 메워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랑이었느냐?

가정을 중심삼고 악의 부모로부터 출발한 인류역사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실체인 참부모의 가정을 이루어서 그 참부모의 사랑을 중심삼고 전환운동이 전개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대표자를 세워 놓고 전환운동을 전개하면서 역사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남자로부터 생명의 씨가 여자를 거쳐서 한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그렇다면 그 전환을 위한 교차점을 어디에서 만들어야 했겠어요? 그것은 여자의 뱃속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뱃속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을 해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 역사는 줄곧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을 세워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자의 뱃속에 생명이 잉태된다고 하더라도 아무렇게나 잉태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잉태해야 할 여자가 있어야 되는 동시에 잉태시킬 남자도 있어야 됩니다. 결국, 한 가정을 중심삼고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일을 해 나오셨습니다.

그러나 완전복귀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남자의 골육 속에 잠재해 있는 아기씨가 그 출발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남자의 혈육 속에 있는 아기씨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일체가 되었다는 조건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세우지 않으면 혈통의 완전한 전환을 위한 기대를 쌓았다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았을 경우, 세계적인 종교가 어떠한 종교인가 하면 우리 인간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내용을 가진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문답과 같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가를 분명하게 해명하지 못했습니다. 어디를 목표로 해서 부활의 기반을 출발시켰느냐? 아직 그것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지금 태어나 성장하여 30세에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거듭난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심정적인 내용의 발생지는 30세부터가 아닙니다. 역사로부터입니다. 그 역사적인 심정을 상속했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거듭남의 동기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누구든지 혈통 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담의 골수까지, 골육의 중심부까지 들어가서 장래의 아이가 될 그 씨에 하나님의 사랑과 결속된 승리적인 조건을 충족시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틀림없는 것입니다. 성서에 그렇게 해 나온 기록이 있어요? 그러한 기록이 있다면, 성서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5-162)

 

예수님을 사모해야

 

지금까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면서 모든 사랑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주님 안에 모두 다 들어가고 싶어했습니다. , 그 주님과 일체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게, 그립다하며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경지에 서야만 예수님과 자기가 하나될 수 있습니다. 자기도 예수님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슬퍼지면 자신도 슬퍼집니다. 남자의 골육 속에 있는 아기씨가 있다면, 그 남자의 감정적인 모든 것이 그 씨에 영향을 미칩니다. 기쁠 때는 기쁜 영향을 미치고, 슬플 때는 슬픈 영향을 미칩니다. 그처럼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아기씨와 같은 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예수님은 남자였습니다. 사실은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아담이었습니다. 결국은 육적이면서도 영적으로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버지와 하나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인간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골수까지 들어갔다고 하는 것, 예수님을 목마르게 그리워해서 예수님의 애정과 맞닿는 그러한 것을 체휼시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워하고 맞이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렇게 신랑으로 맞이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이중의 효과를 얻으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골육으로 들어가서 아기씨가 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복중을 통과했다는 조건도 얻으려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신부의 입장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 속으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합니다. 성령(聖靈)은 해와의 신입니다. 이것을 복귀하는 데 있어서 자기가 낳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태어나기 전에 아담 속으로 빨리 돌아가게 하는 작용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작용을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몸 속에 있는 아기씨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지금 이와 같은 신앙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이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이런 것은 알지도 못합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다만예수님을 무조건 믿으면 천국에 갑니다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 수월하니까 그런 말을 하는데 잘 모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원리적으로 보아 이렇게 되지 않고서는 완전복귀는 안됩니다. 이론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민이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된다고 해서 예수님 앞에 모이기만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골육 속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역사상에서 섭리하시는 것이 쉬운 일인가 어떤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중간에는 수많은 사탄권, 원수권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로막고 있는 이 사탄권을 돌파하는 것은 단번에는 안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싸움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예수님의 골육까지 파고 들어가고 싶다는 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한테 다 들어간다고 한다면 무엇이 들어갈 것인가? 육체는 들어가지 못합니다. 심정밖에는 안 됩니다. 사랑밖에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이외에는 인연을 맺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리도 아니고 정의도 아닌 것입니다. 생명이 있기에 앞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사랑 없이는 그것을 맺을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히 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은 역사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거리나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분명히 가르쳐 주느냐 하면 복귀의 노정이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요, 지금부터 여러분이 심정적 문제를 중심삼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제 일보를 내디디지 않으면 안되는 중대한 전환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혈통적인 전환기가 아니라 생애의 전환기에 서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와 같이 분명한 내용의 기반을 닦아 나가지 않으면 사탄이 참소합니다. “이것 봐, 어디에서 이전해 왔어? 어디에서 출발했어?” 하면, “타락하지 않은 에덴 동산, 하나님의 품에서…”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무엇이 그러냐고 물었을 경우에 여기가 이렇지 않느냐고 하면서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로서는 설 길이 없지만 이러 이러한 분이 사인해 주신 것을 받았으므로 그렇다고 해야 합니다. 건물은 세계적인 건축가가 세웠으나 그 소유권은 종이 한 장으로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았으니까 사탄이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5-164)

 

새로 태어나는 길

 

그렇게 해서 예수님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고 참부모의 혈육에 접할 수 있는 내인(內因)을 세웠다고 하는 조건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성신을 그리워하는 사랑의 길을 더듬어 가야 거듭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상대자는 성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실체인 예수님과 성신의 사랑의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합니다.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듯이 예수님과 성신의 일치된 사랑의 경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문도 없을 것입니다.

성신의 은혜를 받으면 예수님이 그리워서 견딜 수 없게 됩니다. 성신은 그러한 감동의 역사를 합니다. 예수님은 신랑, 성신은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그리워하여 이들과 영적으로 하나가 된 기쁨을 체휼해야 비로소 잃었던 본래의 사랑의 기준이 새롭게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생의 체휼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부활의 원리는 그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도 이 때문에 오랜 역사과정을 통과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역사적인 비애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것을 극복해 나오시며 지금에 이르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6천 년이나 걸렸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6일도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알겠어요?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을 경우에는 타락한 인간 자체가 주관권을 복귀할 수 없습니다. 인간 자체가 그것을 찾아서이것이다하여 세계적인 인격의 권위를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절망적인 세계에 선생님과 같은 사나이가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슬픈 일이에요, 기쁜 일이에요? 여러분은 기쁘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은 기쁘지 않습니다. 나는 평생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워 왔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어렵다고 하는 것은 하면 되는 것이지만, 이것은 그저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되지 않습니다. 완력이나 폭력으로써는 되지 않습니다. 원칙을 철칙으로 해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방팔방에서 그 표준을 겨냥하면서 중심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않도록 해 나간다고 하는 것, 이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와 같은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탕감의 조건을 세워 나왔습니다. 여러분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반을 만들어 여러분이 몰라도 그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평안권을 이룩했다는 것은 천주적(天宙的)인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방면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걸어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도와서 타락시킨 해와를 끌어내고, 사탄 편에 넘겼던 것을 끌어들여 본래의 애정을 중심으로 해서 다시 낳았다는 조건을 세우지 않는다고 하면 완전복귀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떠했는가?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는 데 있어서도 역사적 내인의 심정기준에 결합시키기 위한 섭리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여자의 복중으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싸움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가정에서는 아벨과 가인이 싸웠습니다. 둘이서 싸웠는데, 오늘날에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하면 가인 편에 있는 형이 동생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형님이 어떻게 하여 동생이 될 수 있느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탄을 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복귀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렇게 역사적으로 형제를 중심삼고 싸웠습니다. 에서와 야곱, 이들은 쌍둥이로 태어나서 싸웠습니다. 이들은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리고 언제 또 싸웠느냐 하면 성장한 다음에 싸웠습니다. 40대에 싸웠던 것입니다. (35-166)

 

다말과 밧세바

 

여러분이 다말에 관해 연구를 하면 원리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말은 누구와 관계했던가? 시아버지하고 관계했습니다.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혈통을 계승할 수 있었는가?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어머니는 누구였던가? 밧세바였습니다. 밧세바는 어떠한 여자였던가 하면 우리야의 아내였습니다. 다윗 왕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어떻게 해서 솔로몬이 되었는가? 다윗은 아담의 입장이었고, 우리야는 천사장의 입장이었습니다. 그 천사장의 아내는 복귀하지 않으면 안되는 해와의 입장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천사장이 아담의 상대자인 해와를 타락시켜 끌고 갔습니다. 사랑으로 점령하여 훔쳐 간 것입니다. 그것을 탕감하려면 그러한 삼각관계에 다시 되돌아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원리적 기준에 입각한 조건을 세운 기대 위에서 태어났다면 그 아이는 하늘의 사랑을 받는 영광의 아이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영광의 아이였던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자기 시아버지하고 관계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시아버지하고 관계하는 데 있어서도 정신이 훌륭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법도는 음행을 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대권에 있어서 다말은 자기의 첫째 남편과 둘째 남편이 죽어 버렸지만, 어차피 그 혈통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혈통을 지키는 데 있어서 자기 체면이라든가 자기 위신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다말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혈통을 어떻게 하면 남길 수 있을까가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혈통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혈통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말은 혈통을 복귀시키려고 하셨던 하나님의 섭리권에 설 수 있었습니다. 심정적으로 되돌아가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시아버지와 관계했던 것입니다.

태중에서 승리한 그 기준이 줄곧 전통적인 역사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민족, 유대교의 자손에게 이어져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런데 왜 국가적인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사탄세계에 국가가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하늘세계에도 국가적인 기준이 세워지지 않으면 가인 아벨로서 상대기준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권을 이와 같이 발전시키면서 혈통적인 승리의 기준을 이루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역사적인 선조들의 심정을 계승해 온 것입니다. (35-168)

 

기독교 이외의 종교

 

자기 체면이라든가, 위신이라든가, 사회적인 환경과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전부라고 하는 심정을 가진 대표적인 한 사람의 딸이 마리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적인 승리의 기준을 이어받은 마리아의 태중에는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기반에 선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이 잉태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역사적인 싸움을 끝낸 승리의 기반, 하나님 앞에 태어날 조건이 갖추어진 기반 위에서 태어난 것이 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를 통과하지 않은 자는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혈통적인 내용을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비로소 사랑을 받는 독생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한테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표어입니다. 이것을 지금까지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종교라도 기독교 이외의 종교는 모두 다 종의 종교나 양자(養子)의 종교권에는 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인 적자권에 서는 종교는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타당한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런 입장에서 태어난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사탄의 참소를 받는 입장에 서 있었어요, 그렇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가 와서 모시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하늘땅과 영계가 총동원되어서 그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예수님 앞에 천사장과 같은 입장에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가정적으로는 세례 요한, 교회를 중심삼고는 유대교, 그리고 나라를 중심삼고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가정이 예수님과 하나되었다면 유대교도 자연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하나되었다면 유대교도 완전히 하나될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언자로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힘을 합쳐 계획을 세워서 제사장을 앞세워 로마의 반대자들을 모두 추방해 버리면 되었습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이 일체가 되었다면 로마 법왕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일체가 되어 국가를 세워 로마를 병합하고 지중해 전반에 걸쳐 있는 로마 문명권을 예수님의 지휘 하에 들어오게 했으면 세계 통일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전세계를 복귀하고 지상천국의 이상을 예수님을 중심으로 이룩하려고 했지만 이룩하실 수 없었습니다. (35-171)

 

입적을 하려면 나라가 있어야

 

그리하여 수천 년 동안 죽음의 희생을 치르고 이제 겨우 세계적인 제2이스라엘권을 이룩하셨습니다. 그러나 제2이스라엘권의 기독교는 지상에 나라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속죄하는 기간으로서의 2천 년 동안 방랑하며 세계 만민으로부터 학대를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탕감의 철칙은 용서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아래 모두가 환영하는 환경에서 예수님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주위 환경과 또다시 싸워서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이것을 선생님이 다시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때가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잃고 말았으므로, 이스라엘은 열둘 이상의 아랍 국가와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지상에 나라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사탄과 대결해서이것은 하나님의 땅이다할 수 있는 땅이 없다는 것입니다. 1이스라엘을 중심한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뜬구름 모양으로 바람 부는 대로 쫓기고 쫓기면서 나온 무리들이 많았지만 지상에서 가치가 없는 종교권의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수많은 정권의 박해를 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을 방비할 수 있는 법칙이 없으니까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종교와 정치는 분리시킬 것이 아니라 일치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종교와 정치는 오래된 갈등문제를 안고 있으며 여러 가지 비참한 사태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종교의 자유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정치와 분리시켰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할 때, 이제부터 해야 할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상에 발판을 만들고 싶어하시겠어요, 그렇지 않으시겠어요? 만들고 싶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에다 만드실 것인가? 우주 전체라고 하더라도, 얼음이 얼 때에도 한 점이 문제인 것처럼 어느 한 곳이 문제입니다. 얼음인가 아닌가 하는 경지(境地)인 것입니다. 여긴지 저긴지 분별할 수 없는 자리,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어디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자리,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지금이 그러한 시대입니다. 어느 한 곳에 얼음이 얼었다고 할 경우에는 세계는 단번에 얼어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세계 각국에 성지를 결정했습니다. 여러분은 성지에서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이 아니면 그러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쭉 본원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세계는 누구의 이름 아래 있고 싶겠어요? 하나님과 참부모의 이름 아래 있고 싶어할 것입니다. 시초부터 만물은 하나님과 일체가 된 완성한 부부, 부모의 이름 아래 있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이 창조본연의 위치인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천사장의 소유입니다.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것은 천사장의 자식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통일사상은 참부모를 중심삼고 세계가 하나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여러분은 적()이 없습니다. 입적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중심삼고 새로이 입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입적을 하려면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라가 없는 자들입니다. 살아 있지만 사탄세계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자기 위치를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기반이 없는 자들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분명히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35-171)

 

기독교사에 있어서 완성기반

 

통일교회는 나라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과 똑같습니다. 3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수고와 싸움을 하더라도 본향 땅을 탈환하고 점령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주권을 갖추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제2이스라엘의 주권기반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까지 고통스런 노정을 더듬어 온 그 희망은 무엇이었겠는가? 그 나라로 돌아가 주권을 복귀하고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국민의 위치에 서서 입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소망입니다. 이것을 빠른 기간 내에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내심을 가지고 이 목적에다 자기의 모든 것을 쏟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것은 원리적인 것입니다.

입적을 해야 하는 때가 된 경우에는 나라를 초월해서 모두 돌아가고 싶어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그렇습니다. 지금 아랍과 전투를 하면서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도 입적함과 동시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그 나라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입적하는 순번에 따라서 조상의 위치가 다릅니다. 1입적자는 제1조상의 위치에 서며, 2는 제2의 조상, 3은 제3의 조상이 됩니다. 그리고 비례적으로 수가 많으면 자연히 그 주권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권위를 이어받습니다.

어떠한 국민이 그러한 국민이 되는 것일까요? 일본 사람들이 그러한 국민이 될 것인가, 미국 사람들이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할 때, 서로 경쟁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일본이 해와국가일지라도 가만히 있어 가지고 해와국가가 될 수 있어요? 뜻을 위해 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자유자재로 갈 수 있는 길을 넓히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번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최후의 애국심인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와 같은 조건기반이 지금의 통일교회 기준 정도로 이루어져 있었다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엾게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인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원리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에 재림해야 합니다. , 다시 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시 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쫓겨간 그러한 슬픈 입장을 극복할 수 있는 세계적인 기반을 이루지 않고는 오실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기독교의 선교문제가 추진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2천 년이나 걸렸습니다. 2천 년이나 걸려서 민주주의 국가권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로마와 같은 입장을 세계적인 대립권으로 세워 놓았습니다. 기독교권이 공산권과 대립하여 우위의 입장에 선 기준을 준비한 것이 지금의 민주주의 국가권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제2이스라엘의 세계적인 기준입니다.

그 세계적인 기독교의 기대를 생각해 볼 때 3단계의 과정을 통과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교가 사명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타락한 아담과 마찬가지로 소생과정을 통과해서 장성과정을 통과했습니다. 이것이 신교입니다. 원리적으로 볼 경우에 구교는 율법적이고 구약적인 신앙이고, 신교는 신약적인 신앙입니다. 신교가 주장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의 실체는 누구인가 할 때 재림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씀의 세계적인 기반을 만들어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실체는 무엇을 겸하지 않으면 안되느냐 하면 심정을 겸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을 아울러 갖는 실체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 실체를 중심삼은 것이 기독교사에 있어서 완성기반이 되는데, 그것이 통일교회입니다. (35-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