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19일)

훈독왕 | 20190215120354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19일

 

첨부파일 la16 훈독경 제1권 19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 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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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youtu.be/9MtPQZOWStw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 

 날짜 : 1973. 10. 20(토)
 장소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리스너강당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 

오늘 저녁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제목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가장 영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 근본이 틀어져 나가게 되면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69-71)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은 사랑, 생명, 이상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혹자는 권력, 혹자는 돈, 혹자는 지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권력과 돈과 지식이 인간에게 있어서 귀한 것이지만 그것들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게 된다면 그 누구나 사랑이 귀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겠느냐고 물으면 생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생명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이상(理想)이 없으면 안될 것이니, 셋째 번은 그 누구도 이상이라고 대답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보는 사랑, 생명, 이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변하는 사랑은 아무도 원치 않는 것입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누구나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종교를 믿는 목적도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요, 생명이요,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든가 이상이라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이상을 추구하고, 그걸 절대시하고, 그것을 바라는 입장에 있다면 우리 인간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요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69-72)
  
 사랑과 생명과 이상의 주체이신 하나님 
  
만약에 우리가 대상이라면 주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결과적인 존재라면 어떠한 원인적인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초월한 주체적이고 원인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불변이어야 되고, 영원해야 되고, 이상적이어야 될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하나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최고의 자리, 완전한 자리에서 하나되기를 원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 모두가 원하는 기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상적이요, 결과적인 입장에 있는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내용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절대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도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요, 생명의 대상이요, 이상의 대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절대적이라면 인간도 절대적인 자리를 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불변이라면 인간인 나 자신도 불변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면 나도 역시 유일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나도 영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영생은 불가피한 것이요, 그것은 결과적인 귀일점이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을 당당히 내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한테 사랑이 있고 생명이 있고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에게 이상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체 앞에 대상이 얼마나 가치가 있나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 상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높고 크면 뭘 해요? 대상이 없으면, 혼자서 기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쁨을 위해서 대상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홀로 있을 때 슬퍼지는 것은 하나님도 그렇게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도외시되어 왔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대상의 가치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런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상대적인 자리에 나갈 수 있겠느냐? 무엇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인연을 맺고 나가면 대번에 동등한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위대한 한 남성이 있으면 그 남성에 비해 별로 갖춘 것이 없는 여자라도 주체되는 남성과 사랑의 인연만 맺으면 일시에 당당한 대상적인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 남성이 위대한 ‘존’이면 그와 사랑의 인연을 맺은 여성은 당장에 위대한 ‘미세스 존’이 됩니다. 위대한 남편을 가진 그 여자를 다른 여자들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69-74)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부자간의 사랑보다도 더 강하기에 그 사랑을 중심삼고 당장에 대등한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은 절대적이요, 불변이요, 영원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대하고 가치적인 근원을 망각해 버린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본원지를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도 반드시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요한계시록 22;13)고 했습니다. 그 둘이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파라면 우리 인간은 오메가요, 하나님이 처음이라면 우리는 나중입니다. 하나님이 시작이라면 우리는 끝입니다. 시작과 끝이 서로 반대입장만 취해 가지고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둘이 다른데 하나가 돼요?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서 되겠어요? 화목과 평화는 모두 하나되는 기원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이냐? 우리 인간은 최고의 것을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비교의 지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라도 보다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 높은 것이 있으면 또 그보다 더 높은 것을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믿어 온 통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끝이 있어야 됩니다. 그 끝이 어디이겠느냐 하는 것을 이제 알아봅시다. 지금 말 한 마디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는 성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가 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인간이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그보다 좋은 자리가 있으면 그것을 원할 것입니다. 친구보다도 양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친구가 되는 것을 버리고 양자가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족해요?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자보다 직계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되고 싶겠어요, 안 되고 싶겠어요? 양자의 자리를 버리고 직계의 자녀가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양자를 버리고 직계의 아들딸이 되려고 하느냐?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점령하기 전에 그 사람의 사랑만 완전히 점령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면 그가 기뻐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그가 가진 것은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수속을 밟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자동적인 것입니다.  (69-76)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실감이 나야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최고의 욕망을 준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창조목적상의 대상의 가치를 지니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점령하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을 가질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면 다른 이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복 중의 복이요, 기쁨 중의 기쁨이요, 세상 만사가 다 내 말하는 것과 내 행동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나는 과거에 성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하나님한테 질문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은 부자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자의 관계가 갖는 특정한 내용과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사랑이 교차되는 중심의 자리, 생명이 교차되는 중심의 자리, 이상이 교차되는 중심의 자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은 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고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고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고 나도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초의 인연과 최초의 통일의 장소가 부자의 관계가 아니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서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부부가 하나되어야 부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은 내 사랑이요, 남편의 생명은 내 생명이요, 남편의 이상은 내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내의 사랑, 생명, 이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된 자리, 그렇듯 통일된 사랑의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이 자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실현체요, 사랑의 투입체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체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상의 구현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식을 낳아서 사랑해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이는 내 사랑의 실체요, 생명의 연장체요, 이상의 구현체다.” 하면서 제2의 나로 여깁니다. 자녀는 출발에서부터 사랑과 생명과 이상적인 기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는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보면 볼수록 생명이 약동하고, 보면 볼수록 이상적인 상대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연결되느냐? 생명이 교류하는 곳, 사랑이 교류하는 곳, 이상이 교류하는 곳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점이 어디가 될 것이냐? 부자(父子)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거기에서도 기도가 필요해요? “하나님 나 죄인입니다.” 하는 기도가 필요해요?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인데 기도가 필요해요? 그런 자리는 위신과 체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서슴지 않고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가 이루어진 자리에서 숨을 쉬면 세계가 들락날락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권에 들어가게 되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4백 조나 되는 육신의 모든 세포까지도 춤을 추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런 실감이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오늘 저녁 여러분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실감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고독하고 어려운 고난의 자리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잠을 잘 수 있고 어떠한 수난 길에서도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돈 가지고는 못 삽니다. 골수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심정, 설명 없이 아는 주체와 대상의 감정, 그와 내가 하나라는 그런 감정의 흐름이 속에서 폭발되는 데서부터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가치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우주와 생명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에는 사랑이 있고 이상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이상이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고 이상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 묻겠는데 “하나님은 높은 분이요,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가치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하면 어떻게 서로가 연결이 되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사람편에 서야지 하나님편에 서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이론적으로 타당하게끔 전부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교류될 수 있고 이상과 교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주의 근본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끝날이 되면 될수록 그렇지 않은 기독교는 전부 다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본향을 찾아가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가 살 수 있는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69-78)
  
 우리는 상대를 위하여 태어났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아 났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자신을 위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천지만물과 인간을 짓기 전에는 자기를 중심삼고 움직이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우리도 자기를 위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상의 세계를 전개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또 다른 자기의 상대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투입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여러분, 창조역사라는 것은 힘의 투입을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이렇게 되라, 저렇게 되라!” 하는 말씀에 의하여 모든 것이 손쉽게 창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는 참생명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사랑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이상을 완전히 투입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창조하기 전에는 하나님 자신을 생각했지만 창조하고 나서는 대상을 위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들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사랑과 이상이라는 말은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존재의 기원은 자기를 위하는 자리가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도 손해가 나는 일은 안 합니다. 투입하는 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있기 때문에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투입하면 없던 것이 생겨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던 사랑을 대상이 갖고 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하나님도 끌려갑니다. 대상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보고 좋아하는 것보다 대상을 보면 더 좋습니다. 하나님한테 있어서 인간 창조는 완전한 자기 투입이요, 그래서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여기에 유명한 화가가 있더라도 모든 정력을 투입해서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자기 전체를 투입시킬 때 걸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걸작품은 내가 갖고, 내가 보관하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은 상대를 만드는 데 있어서 완전투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이상적인 대상의 전개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는 그들을 위해서 있겠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하던 때로부터 상대를 위하는 때로 넘어온 것입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남을 위하는 데서부터, 대상을 위하는 데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도 남자나 여자나 자기를 위하여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존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남자로 태어난 것은 남자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아무리 미인이고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상대를 위하여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을 위하고 자식은 부모를 위하게 될 때 서로 위해주니까 돌아갑니다. 그렇게 위해주면 위해줄수록 빨리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이상형입니다. 서로 위해주는 것은 서로가 밀어 주는 것이니까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돌아가면 구형을 이루어 영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원형을 닮아 있습니다. 얼굴도 둥급니다. 눈도 둥급니다. 전부 다 완전히 주고받아야 합니다. 정맥과 동맥도 주고받습니다. 병이란 주는 길은 있는데 받는 길이 없게 되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균형이 깨지는 데서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존재물은 위할 수 있는 작용의 원칙을 세우지 않고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69-81)
  
 종교의 길
  
이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알았으니까 그 관계를 통해서 보게 될 때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근본부터 알아 가지고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악은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죄는 뭐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되면 죄입니다. 악은 사탄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와에게 있어서도 “내가 주체가 되어 보자. 내가 중심이 되자!” 하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원칙은 “상대를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고, “나를 위해 살아라!” 하는 것은 사탄의 근성입니다. 악한 사람은 나를 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이걸 때려부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 봉사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타락으로 인간이 고장났는데, 무엇이든지 고장난 것을 고치려면 고장나기 전의 원리원칙에 따라서 갖다 맞춰야 됩니다. 타락은 상대를 위하여 자기를 투입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자기에게 투입하라고 한 데에서 생겼기 때문에 반대로 투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자기를 희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주로 왔지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태복음 20;28)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투입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69-84)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 
  
타락은 고장난 것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고장났고, 가정적으로도 고장났고, 국가적으로도 고장났고, 세계적으로도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 하나님이 완전한 것과 같이 완전한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이 일치될 수 있는 사람, 고장나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그러한 사람은 나면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한 아들딸이 커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결혼식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죄 없는 아들딸을 낳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 땅 위에 완전한 왕이 필요하고 여왕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언제 하나님이 그런 한 때를 가져 봤어요? 하나님도 사탄을 추방하고 그런 때를 맞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는 나라, 백성, 가정과 아들딸을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타락(으로) 타락되지 않은 세계와는 관계없는 패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것을 개인적으로 수리하고, 가정적으로 수리하고, 종족적으로 수리하고, 민족적으로 수리하고, 국가적으로 수리해서 내세운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선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목적은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사람으로 와서 완전한 가정을 이루어 완전한 할아버지가 되고 완전한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대상으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그 둘이 타락했으니까 그 둘을 다시 수리공장에 맡겨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담의 완성자로 왔던 예수님한테 신부가 필요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신부를 맞아서 결혼했다면 예수님의 아들딸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그 아들딸이 있었더라면 로마의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수많은 교파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까 다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제1이스라엘이었던 유대 민족이 그러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했고, 오늘날의 기독교가 제2이스라엘의 사명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6천 년 전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의 주체로 창조한 인간을 축복해서 인류의 선한 조상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인류의 부모가 되시는 무형의 하나님과 실체의 하나님이 하나되어서 아들딸을 낳아야 영(靈)을 가진 실체의 사람이 나옵니다. 영과 실체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아들딸은 영생할 수 있는 영을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의 참부모가 하나되어 천지가 조화를 이루는 자리에서 인간이 자녀의 명분을 복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부모로부터 죄 없는 아들딸, 종족, 민족, 국가와 세계를 한꺼번에 이루려고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와 세계적으로 이루어야 지상천국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로 하나되어 가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이 어디든지 연결될 수 있는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인 것을 기억하시고,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69-90)

 

 

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19일 (원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 
날짜 : 1973. 10. 20(토)
장소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리스너강당 14000글자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의 중요성 

오늘 저녁에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제목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제목이 크다면 큰 제목이고 복잡하다면 복잡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그런 광범한 내용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하고 가장 영특한 존재이기 때문에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그러하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수많은 종교인들과 신앙인들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표현을 하고 있지만 분명하게 제시해 주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근본적이기 때문에 이 근본이 틀어져 나가게 되면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중심삼고 보느냐, 인간만을 중심삼고 보느냐에 따라서 두 철학사조가 나타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 종교들도 이 근본이 달라지게 되면 결정적으로 내용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는 종교는 이래야 된다, 또 나와 종교의 관계는 이래야 된다는 어떠한 원칙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그 관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69-71)
  
 인간에게 가장 귀한 것은 사랑, 생명, 이상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으로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혹자는 권력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혹자는 돈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혹자는 지식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권력과 돈과 지식이 인간에게 있어서 귀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도 그것들이 절대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보다 귀한 것이 무엇이냐고 한 걸음 더 들어가 묻게 된다면 그 누구나 사랑이 귀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겠느냐고 물으면 생명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생명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이상(理想)이 없으면 안될 것이니, 셋째 번은 그 누구도 이상이라고 대답하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귀한 것이라고 보는 사랑, 생명, 이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떠한 문학작품을 보더라도 ‘사랑’ 하면 영원한 사랑, 불변의 사랑, 유일한 사랑을 강조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변하는 사랑은 아무도 원치 않는 것입니다. 청춘시대나 중년시대나 노년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은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도 그렇지만, 본래부터 “잠깐 살다가 죽자! 잠깐 살다가 없어지면 좋겠다.”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영원히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변하지 않고 유일하며 절대적이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종교를 믿는 목적도 구원이 있고 영생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만일에 영생을 부정하는 종교가 있다면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종교를 통하여 인간이 이상하는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종교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요, 생명이요,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이라든가 이상이라는 말은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는 말입니다. “아, 나 혼자 사랑한다.” 하는 말은 성립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과 이상을 추구하고, 그걸 절대시하고, 그것을 바라는 입장에 있다면 우리 인간은 주체와 대상의 상대적인 관계를 요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69-72)
  
 사랑과 생명과 이상의 주체이신 하나님 
  
만약에 우리가 대상이라면 주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결과적인 존재라면 어떠한 원인적인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초월한 주체적이고 원인적인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는 불변이어야 되고, 영원해야 되고, 이상적이어야 될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은 하나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 세상에는 나쁜 자리에서 하나되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 완전한 자리에서 하나되기를 원하는 것은 주체와 대상 모두가 원하는 기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상적이요, 결과적인 입장에 있는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내용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한테 “당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절대적인 가치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돈과 지식과 권력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틀림없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랑과 생명과 이상이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요, 생명의 대상이요, 이상의 대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절대적이라면 인간도 절대적인 자리를 원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불변이라면 인간인 나 자신도 불변이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유일하신 분이라면 나도 역시 유일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면 나도 영원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영생은 불가피한 것이요, 그것은 결과적인 귀일점이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을 당당히 내릴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한테 사랑이 있고 하더라도 내게 사랑이 없고, 아무리 하나님한테 생명이 있고 하더라도 내게 생명이 없고, 아무리 하나님한테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에게 이상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체 앞에 대상이 얼마나 가치가 있나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 상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청중도 없는데 주먹을 휘두르며 연설을 한다면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름발이 한 사람이라도 데려다 놓고 그 앞에서 말씀을 외친다면 그때에는 누구도 정신병자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사람은 없을 지라도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지극히 조그만 것을 집어들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좋다고 시를 읊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상의 가치가 절대적인 존재를 옹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예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높고 아무리 크면 뭘 해요? 대상이 없으면, 하나님이 혼자서 기쁠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기쁨을 위해서 대상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에서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종교에서는 하나님은 신성하고 거룩한 분이요, 인간은 악하고 거짓된 존재이기 때문에 창조주와 피조물은 대등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러한 지금까지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틀린 것입니다. 대상이 없으면 아무리 위대한 사람, 아무리 도를 통한 사람, 아무리 절대적인 사람이라도 슬픈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홀로 있을 때 슬퍼지는 것은 하나님도 그렇게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지금까지 도외시되어 왔습니다.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대상의 가치로 당당히 설 수 있는 인간 본연의 가치와 권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런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떻게 상대적인 자리에 나갈 수 있겠느냐? 노력으로 돼요? 힘을 써서 돼요? 무엇 가지고도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인연을 맺고 나가면 대번에 동등한 자리에 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그렇지 않아요? 위대한 한 남성이 있으면 그 남성에 비해 별로 갖춘 것이 없는 여자라도 주체되는 남성과 사랑의 인연만 맺으면 일시에 당당한 대상적인 가치를 갖는 것입니다. 그 남성이 위대한 ‘존’이면 그와 사랑의 인연을 맺은 여성은 당장에 위대한 ‘미세스 존’이 됩니다. 위대한 남편을 가진 그 여자를 다른 여자들은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69-74)
  
 하나님 앞에 서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도 사랑을 중심삼고 연결될 수 있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부자간의 사랑보다도 더 강하기에 그 사랑을 중심삼고 당장에 대등한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은 절대적이요, 불변이요, 영원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위대하고 가치적인 근원을 망각해 버린 우리는 우리 인생의 본원지를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은 하나되어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도 반드시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요한계시록 22;13)고 했습니다. 그 둘이 하나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파라면 우리 인간은 오메가요, 하나님이 처음이라면 우리는 나중입니다. 하나님이 시작이라면 우리는 끝입니다. 시작과 끝이 서로 반대입장만 취해 가지고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돌아서야 됩니다. 돌아 가지고 하나되는 방향을 취해야 됩니다. 


그런데 둘이 다른데 하나가 돼요?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아서 되겠어요? 화목과 평화는 모두 하나되는 기원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이 주체로 있다면 인간 앞에 하나되게 하기 위해서 대등한 사랑과 생명과 이상에 연결될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은 마련하셔야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체와 대상의 위치를 결정하는 요소가 무엇이냐? 우리 인간은 최고의 것을 바라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비교의 지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던 것을 버리고라도 보다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더 높은 것이 있으면 또 그보다 더 높은 것을 바랍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믿어 온 통념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없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은 끝이 있어야 됩니다. 그 끝이 어디이겠느냐 하는 것을 이제 알아봅시다. 지금 말 한 마디로 세계를 움직일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는 성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친구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친구가 된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인간이 그것으로 만족합니까? 그보다 좋은 자리가 있으면 그것을 원할 것입니다. 친구보다도 양자가 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친구가 되는 것을 버리고 양자가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족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그거야 물어보나마나지!”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양자보다 직계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되고 싶겠어요, 안 되고 싶겠어요? 양자의 자리를 버리고 직계의 자녀가 되겠다고 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양자를 버리고 직계의 아들딸이 되려고 하느냐?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완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은 그 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을 점령하기 전에 그 사람의 사랑만 완전히 점령할 수 있는 아들딸이 되면 그가 기뻐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이요, 그가 가진 것은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자기의 모든 것을 상속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심정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수속을 밟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자동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보다 더 높은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의 소원은 그런 자리를 또 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싶어요? 그것도 되고 싶겠지요.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으면 그걸 원할 것입니다. 친구를 원해요, 양자를 원해요? 친구가 아니라 양자를 원하겠지요? 또, 직계의 아들딸이 될 수 있다면 양자의 자리를 집어치우고 아들딸이 되려고 할 것입니다. (69-76)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실감이 나야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최고의 욕망을 준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창조목적상의 대상의 가치를 지니도록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을 원하는 것이며, 결국은 하나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을 점령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점령하고 나면 또 다른 욕망을 가질 것 같습니까? 더 이상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이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복 중의 복이요, 기쁨 중의 기쁨이요, 세상 만사가 다 내 말하는 것과 내 행동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나는 과거에 성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우주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하나님한테 질문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은 부자의 관계, 아버지와 아들이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결론입니다. 일반 사람들 같으면 부자지관계를 “우리 부모와 나의 관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자의 관계가 갖는 특정한 내용과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사랑이 교차되는 중심의 자리, 생명이 교차되는 중심의 자리, 이상이 교차되는 중심의 자리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은 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고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고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고 나도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최초의 인연과 최초의 통일의 장소가 부자의 관계가 아니고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결혼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싫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 가지고 부부가 하나되어야 부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은 내 사랑이요, 남편의 생명은 내 생명이요, 남편의 이상은 내 이상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내의 사랑, 생명, 이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된 자리, 그렇듯 통일된 사랑의 자리에서 태어나는 것이 자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실현체요, 사랑의 투입체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체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상의 구현체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자식을 낳아서 사랑해 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이는 내 사랑의 실체요, 생명의 연장체요, 이상의 구현체다.” 하면서 제2의 나로 여깁니다. 자녀는 출발에서부터 사랑과 생명과 이상적인 기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부모는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보면 볼수록 생명이 약동하고, 보면 볼수록 이상적인 상대로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은 어떤 자리에서 연결되느냐? 생명이 교류하는 곳, 사랑이 교류하는 곳, 이상이 교류하는 곳에서 연결됩니다. 그러면 그러한 점이 어디가 될 것이나? 부자(父子)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과 동등할 수 있다니까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서도 기도가 필요해요? “하나님 나 죄인입니다.” 하는 기도가 필요해요?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인데 기도가 필요해요? 그런 자리는 위신과 체면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서슴지 않고 붙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부자의 관계가 이루어진 자리에서 숨을 쉬면 세계가 들락날락합니다. 아편을 먹거나 술을 먹고 취하는 것과 견줄 수 있겠어요? 


하나님의 사랑권에 들어가게 되면 채워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4백 조나 되는 육신의 모든 세포까지도 춤을 추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은 눈대로, 손은 손대로 전부가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런 실감이 있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위대한가를 오늘 저녁 여러분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실감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아무리 고독하고 어려운 고난의 자리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잠을 잘 수 있고 어떠한 수난 길에서도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보는데, 여러분이 그런 길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면 몇 억원이라도 주고 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돈 가지고는 못 삽니다. 골수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심정, 설명 없이 아는 주체와 대상의 감정, 그와 내가 하나라는 그런 감정의 흐름이 속에서 폭발되는 데서부터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한 가치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우주와 생명을 바꿀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에는 사랑이 있고 이상이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과 이상이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고 이상을 중심삼고 생명이 약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 관계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았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기독교인들에게 묻겠는데 “하나님은 높은 분이요,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니까 가치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하면 어떻게 서로가 연결이 되겠어요?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사람편에 서야지 하나님편에 서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 뜯어 정리해 놓아야 됩니다. 이론적으로 타당하게끔 전부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죄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교류될 수 있고 이상과 교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주의 근본으로 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끝날이 되면 될수록 그렇지 않은 기독교는 전부 다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이제 주먹구구식으로 믿을 때는 지나갔다고 봅니다. 인간의 가치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가치를 추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본향을 찾아가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가 살 수 있는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69-78)
  
 우리는 상대를 위하여 태어났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닮아 났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여러분 자신을 위할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천지만물과 인간을 짓기 전에는 자기를 중심삼고 움직이던 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우리도 자기를 위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대상의 세계를 전개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또 다른 자기의 상대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을 투입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여러분, 창조역사라는 것은 힘의 투입을 말한 것입니다. 창조는 힘을 소모시킨 것입니다. 투입했는데 얼마나 투입했느냐?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이 “이렇게 되라, 저렇게 되라!” 하는 말씀에 의하여 모든 것이 손쉽게 창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는 참생명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사랑을 완전히 투입하고, 참이상을 완전히 투입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하기 전과 창조하고 난 후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창조하기 전에는 하나님 자신을 생각했지만 창조하고 나서는 대상을 위하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있는 것은 나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들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사랑과 이상이라는 말은 대상을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이상적인 존재의 기원은 자기를 위하는 자리가 아니라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도 손해가 나는 일은 안 합니다. 투입하는 이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있기 때문에 투입한다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투입하면 없던 것이 생겨납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바라던 사랑을 대상이 갖고 옵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하나님도 끌려갑니다. 대상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보고 좋아하는 것보다 대상을 보면 더 좋습니다. 하나님한테 있어서 인간 창조는 완전한 자기 투입이요, 그래서 인간은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여기에 유명한 화가가 있더라도 장난으로 아무렇게나 그린 그림은 아무도 중요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정신을 집중하여 모든 정력을 투입해서 하나하나 정성을 기울여 자기 전체를 투입시킬 때 걸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걸작품은 내가 갖고, 내가 보관하고, 내가 사랑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은 상대를 만드는 데 있어서 완전투입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가치 있고 보다 이상적인 대상의 전개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를 지어 놓고는 그들을 위해서 있겠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위하던 때로부터 상대를 위하는 때로 넘어온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상적인 존재라는 것은 자기를 위주하는 데서는 바랄 수 없습니다. 이상적인 존재는 남을 위하는 데서부터, 대상을 위하는 데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인간도 남자나 여자나 자기를 위하여 살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존재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남자로 태어난 것은 남자 자신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가 아무리 미인이고 남자를 싫어하는 여자라고 하더라도 그 생긴 모양을 보십시오!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여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식을 위하고 자식은 부모를 위하게 될 때 서로 위해주니까 돌아갑니다. 그렇게 위해주면 위해줄수록 빨리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게 이상형입니다. 사각형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둥글다는 것입니다. 서로 위해주는 것은 서로가 밀어 주는 것이니까 돌아가게 되고, 그렇게 돌아가면 구형을 이루어 영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원형을 닮아 있습니다. 얼굴도 둥급니다. 눈도 둥급니다. 전부 다 완전히 주고받아야 합니다. 정맥과 동맥도 주고받습니다. 병이란 주는 길은 있는데 받는 길이 없게 되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균형이 깨지는 데서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움직이는 존재물은 위할 수 있는 작용의 원칙을 세우지 않고는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69-81)


  
 종교의 길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선이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선과 악의 판단기준이 불확실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알았으니까 그 관계를 통해서 보게 될 때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히 근본부터 알아 가지고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악은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죄는 뭐냐? 사탄이 참소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게 되면 죄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앞서 기독교인들은 죄의 뿌리를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악은 사탄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해와에게 있어서도 “내가 주체가 되어 보자. 내가 중심이 되자!” 하는 데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원칙은 “상대를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이고, “나를 위해 살아라!” 하는 것은 사탄의 근성입니다. 여러분은 선악의 기원을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악한 사람은 나를 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도 이걸 때려부수려고 하고 예수님도 이걸 때려부수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지 말라, 남을 위해서 희생하라, 봉사하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타락으로 인간이 고장났는데, 무엇이든지 고장난 것을 고치려면 고장나기 전의 원리원칙에 따라서 갖다 맞춰야 됩니다. 그리고 창조법도에 일치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는 재창조역사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타락은 상대를 위하여 자기를 투입하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자기에게 투입하라고 한 데에서 생겼기 때문에 반대로 투입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에서는 자기를 희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주로 왔지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태복음 20;28)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하기를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완전히 투입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69-84)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 
  
타락은 고장난 것과 같습니다. 고장났으니까 수리공장이 필요하고 기술자가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도 고장났고, 가정적으로도 고장났고, 국가적으로도 고장났고, 세계적으로도 고장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본래 하나님이 완전한 것과 같이 완전한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이 일치될 수 있는 사람, 고장나지 않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그러한 사람은 나면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아들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못 받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러한 아들딸이 커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결혼식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죄 없는 아들딸을 낳아야 합니다. 여러분, 죄 없는 아들딸 낳아 봤어요? 원래는 죄 없는 자식을 낳아 죄 없는 아버지가 되는 동시에 죄 없는 할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 땅 위에 완전한 왕이 필요하고 여왕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언제 하나님이 그런 한 때를 가져 봤어요? 하나님도 사탄을 추방하고 그런 때를 맞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꺼번에 사랑할 수 있는 나라, 백성, 가정과 아들딸을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이루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타락한 시조로부터 타락된 할아버지와 할머니, 타락된 아버지와 어머니, 타락된 민족, 타락된 국가, 타락된 세계를 가지고 있어서 타락되지 않은 세계와는 관계없는 패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것을 개인적으로 수리하고, 가정적으로 수리하고, 종족적으로 수리하고, 민족적으로 수리하고, 국가적으로 수리해서 내세운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 선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온 목적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사람으로 와서 완전한 가정을 이루어 완전한 할아버지가 되고 완전한 왕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대상으로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을 창조했습니다. 그 둘이 타락했으니까 그 둘을 다시 수리공장에 맡겨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아담의 완성자로 왔던 예수님한테 신부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해 줄 수 있는 신부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신부를 맞아서 결혼했다면 예수님의 아들딸이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그 아들딸이 있었더라면 로마의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수많은 교파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봤어요? 예수님은 그 뜻을 다 이루지 못했으니까 다시 와야 하는 것입니다. 제1이스라엘이었던 유대 민족이 그러한 준비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망했고, 오늘날의 기독교가 제2이스라엘의 사명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6천 년 전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의 주체로 창조한 인간을 축복해서 인류의 선한 조상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인류의 부모가 되시는 무형의 하나님과 실체의 하나님이 하나되어서 아들딸을 낳아야 영(靈)을 가진 실체의 사람이 나옵니다. 영과 실체가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아들딸은 영생할 수 있는 영을 갖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고 실체적으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아들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생명과 사랑 그리고 이상을 중심삼고 종횡으로 하나되지 못했던 것을 인류의 종말시대에 비로소 하나될 수 있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하나님과 실체의 참부모가 하나되어 천지가 조화를 이루는 자리에서 인간이 자녀의 명분을 복귀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들딸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부모로부터 죄 없는 아들딸, 종족, 민족, 국가와 세계를 한꺼번에 이루려고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의 불신으로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와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을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와 세계적으로 이루어야 지상천국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로 하나되어 가지고 참자녀, 참종족, 참민족을 이루어 지상천국을 건설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 그리고 이상이 어디든지 연결될 수 있는 지상천국을 이루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위해주는 세계로 화하는 것이 지상천국을 이루는 첩경입니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대의 소망인 것을 기억하시고, 그럴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저녁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6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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