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6권 18일
16 훈독경 6권 18일 내일의 주인 1.mp3
내일의 주인(훈독본)
날짜 : 1971. 6. 6(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현실이 실패나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
우리가 현재 처하여 있는 시점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시점입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혹은 천주적인 섭리를 운행하는 천운을 통해서 살펴볼 때도 오늘의 입장은 반드시 과거를 입증하고 미래를 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소망적일 수 있는 것이요, 현재보다 미래가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의 우리 자신, 즉 현재의 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이 어떠냐에 따라서 과거가 빛을 발하느냐, 발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고 오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보다 좋은 미래가 건설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좋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과거보다 못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 승리를 하지 못하는 자는 역사에 남을 후사(後嗣)가 못됩니다. 현재에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사람은 미래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라는 것을 말하게 될 때, 과거의 승리보다도 현재의 승리를 다짐하지 못하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시대와 더불어 정리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를 무시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인연을 무시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현재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중요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야말로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이요, 현재야말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점이라는 것을 항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게 되면 그 실패를 놓고 성공을 재다짐할 수 있는 한 시점이 중요합니다. 그 시점은 오늘의 한 순간으로 말미암아 결정됩니다.
오늘에 무책임한 자에게는 미래를 책임지울 수 없습니다. 현재에서 자기 운명의 기준을 넘었으면 생애의 기준도 넘어야 합니다. 그 생애의 기준을 중심삼고 심각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보다도 더 심각한 미래가 찾아오면 그 미래의 세계에서 남아질 수 없습니다. 오늘 심각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에 남아질 수 없고 제거당합니다. (45-19)
오늘이 가장 귀하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희생을 강조하고 매일 새롭게 되기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내일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 소망을 오늘의 현실적인 생활권 내에서 체휼해야 됩니다. 즉, 현실의 감정과 일체되게 만들어서 오늘의 생활무대에서 인연될 수 있는 요건으로 만들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증적인 기반을 상실한 사람은 미래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터전은 현실에서부터 마련해야 됩니다.
미래의 주인은 어디서 나올 것이냐? 오늘을 상실한 자리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의 사회를 바라볼 때 부패하고 사망이 감도는 악한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 악한 세계를 토대로 해서 미래의 세계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흑암세계의 권한을 생활권 내에서 제거할 수 있는 주체성을 발견하여 생활하는 환경에서 스스로 해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보람 있는 길이 계승되는 것이지 현재는 암담한 자리에 있으면서 미래에만 소망을 두고 아무리 큰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 과정을 거쳐서 미래가 판정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는 미래를 계승받을 터전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과거가 귀중하더냐, 오늘이 귀중하냐, 미래가 귀중할 것이냐? 과거가 귀중한 것이 아니요, 미래가 귀중한 것도 아니요, 오늘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고통이나 불행 혹은 행복을 중심삼고 몸부림치고 있는 현실이 가장 심각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에 있어서 고통받는 환경을 내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45-23)
미래를 계승할 수 있는 주인
그러면 우리가 기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인 실패의 자리에서 후퇴할 수 있는 현실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미래의 슬픈 고통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그 고통을 피해 가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복귀섭리노정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면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하늘 앞에 승리를 다짐해 나왔느냐, 혹은 실패의 요인을 자극시켜 가지고 하늘의 슬픔을 가중시켰느냐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 앞에 그렇게 충성하고 수고했던 노아 할아버지, 오직 뜻 대한 일념으로 슬픔을 잊고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한 자리에 섰던 아브라함,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이스라엘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며 선두에 나섰던 모세, 귀중한 청춘시대를 부정하고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승리의 요인이 되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패자로서 슬픔의 요인을 남겼을 뿐 승리의 터전을 공고하게 다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수십 년 혹은 일생을 걸고 수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타났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계승할 수 있었던 심각한 순간을 계속해서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의 요인이 깃들어 저끄러진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삼고 자기의 일체의 행복의 요건을 한꺼번에 도말해 버리는 행동을 단행했지만, 결국에는 실패의 요인을 남겨서 역사적인 한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지극히 작은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촌음에 지나지 않았고, 행동으로 말해도 지극히 간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 촌음의 순간에 그렇게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현실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역사 전체를 뒤넘이치게 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이에 흥망성쇠의 요인이 그 당시의 현실이라는 운명길을 중심삼고 뒤넘이쳐 나간 것입니다. 그런 과거의 고통스러운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해 볼 때, 과거의 고통 이상으로 고통스런 자리도 당당코 나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는 실패의 요인을 남겼던 역사를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심각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상들이 남긴 뜻을 알면 알수록 그 이상의 심각한 자리도 찾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현재에서 어떻게 결정지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더욱이, 미래에 있어서 행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상의 수난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기가 당하는 수난 이상의 수난을 기꺼이 맞을 수 있고 현재의 수난길을 요리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지 않고는 미래의 계승자가 될 수 없고 미래의 터전을 마련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과거의 조종을 받아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뒤로 돌아가서 과거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뜻을 처음 알았을 때 기뻐하던 그 마음이 오늘의 자신과 상관없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에 자기가 뜻을 알고는 어떻게 움직였다며 옛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어떠냐고 하면, 오늘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나 어느 한 때는 다시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한 때라는 것이 오늘을 넘어서는 오지 않습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자비한 개척자의 생활을 한 과거가 있다고 할진대, 그런 개척생활에 있어서 미래에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오늘은 그 이상으로 무자비한 개척생활을 하겠다는 결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미래를 계승할 수 있는 주인이 못 됩니다. 미래에는 과거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45-25)
미래의 중심
미래의 주인은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혹은 일생을 거쳐 가지고 현실적인 승리의 터전이 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승리의 역사로 남아지고, 오늘의 승리가 과거의 승리보다도 빛날 수 있게 될 때 현재의 중심으로 추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추대를 받는 게 현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다짐하면 다짐할수록 미래의 내용이 깃드는 것이요, 그래야만 미래의 주인으로 남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래와 현실의 승리를 결정짓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심각하게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심각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그것이 결정 안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심각해 가지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도 실패의 요인이 결정될 수도 있겠지만, 심각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실패의 요인이 현실과 이마를 맞대고 전진과 후퇴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에서 얼마나 심각하냐 하는 심각의 정도가 결정의 요인이 되는 것보다도 심각하지 않을 때 자기의 운명이 뒤넘이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저기 땅 끝에서 하나의 선이 나를 찾아오고 이 끝에서 현재의 나와 더불어 맞춰 나가는 선이 있다면 이것이 어느 때 마주칠 것이냐? 그러면 그것을 언제 연결시킬 것이냐? 현실의 한 시점에서 연결될 수 있는 때를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맺어지는 것이 사탄의 세력권 내에서 제거당할 것이냐? 아닙니다. 제거되어서는 안됩니다.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아무리 천지가 동요하더라도 그것만은 동요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현실에서 반드시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정되는 순간은 현실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역사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미래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준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공고한 자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중심이 됩니다. (45-27)
현실에서 사탄을 때려잡아야
그러면 그것이 결정되는 때는 언제냐? 섭리의 때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먼저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느냐? 타락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먼저 출발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먼저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요인을 결정짓는 자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탄이 먼저 참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맛있는 음식을 해 놓으면 사람이 먹기 전에 파리가 날아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방지하지 않고는 아무리 정성들인 음식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될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디에 있느냐? 세계에 있지요. 어느 때에 있었느냐? 현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사탄을 때려잡아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사탄을 어떤 자리에서 때려잡아야 되느냐? 지금까지 습관화된 터전 위에서 “이렇게 살다가 가면 될 것 같은데 남달리 그럴 게 뭐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6천 년 동안 하나님을 유린하고 수많은 우리 선조들을 유린한 사탄이 얼마나 간교하고 음흉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거기에 걸려서 6천 년 동안 수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탄을 대해서 싸워 나오는 기독교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계에서 그렇게 싸워 나왔지만 피를 흘려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퇴치할 수 없었던 악랄한 사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탄과 언제 결판을 지을 것이냐? 과거에 결판을 지었어요? 만일 과거에 결판을 지었다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냐? 안 끝납니다. 역사를 붙안고 섭리의 뜻과 더불어 대결해 나오는 사탄이기 때문에 섭리를 중심삼고 역사의 운명을 완전히 결판지을 때까지는 남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타락된 권내에서 승리했던 것이 자기 나름대로의 승리를 가진 것이라면, 그 승리는 역사시대를 초월하여 남아져야 할 하나님의 섭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45-29)
통일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현재에 있어서 춤추고 가는 것이 좋으냐? 현재에 춤을 추었으면 미래에는 그 이상의 춤을 춰야 됩니다. 현재에 기뻐하면 미래에는 더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는 대중의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대중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먹고 잘살아서 대중의 공인을 받을 수 있어요? 아닙니다. 대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는 못먹고 못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패들이 그렇게 살면 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일교회가 승리의 터전을 갖추고, 현재에서 승리한 내용을 전통적으로 미래에 상속시킬 수 있고, 미래를 인계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해 나온 사람이라야 승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해 나오던 조상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냐? 공적인 입장에 섰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 다 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고생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대하며 “내가 이렇게 일을 했는데, 그것을 몰라준다” 하면서 눈물을 섬벅섬벅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을 섬벅섬벅 흘리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그가 공적인 일을 염려하면서 섬벅섬벅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은 공적인 뜻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섬벅섬벅 흘리고 다님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아, 그러냐” 하고 동정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공적인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사적인 것을 내세우면 망하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사정을 하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던 일도 가족을 걸고 들어가고 아벨을 중심삼고 나가는 입장에서 가문을 두고 봐도 그럴 수 없고 과거의 인연을 보거나 미래의 인연을 봐도 그럴 수 없다고 하게 될 때는 남편도 옳은 말이라고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불평할지 모르지만 내심으로는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체면상, 위신상 이럴 뿐이다”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압니다. 그렇지만 “아이고, 자식이고 무엇이고 다 밉다” 해보라는 거예요, 누가 동정하나. 그렇게 한 번 하면 틈이 벌어지고, 두 번 하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눈물을 한 번 흘리고 두 번 흘리면 멀어지지 않습니다. 남편이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아, 고생하는구나. 나보다 낫구나” 하는 것입니다. (45-33)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한계점으로 생각하고 계신다
그러면 그런 원칙을 어디서부터 세워야 되느냐? 오늘 이 현실에서부터 세워야 합니다. 현실이 중요하니까 현실에서 훈련해야 되는데, 어떤 자리에서 훈련해야 되느냐? 지금 있는 자리보다 나은 자리에서 훈련해야 되느냐? 그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것이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중심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점령해야 되느냐? 참사랑만이 치리하는 치리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 참사랑의 치리권을 정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첩첩 방위선을 거치고 수난을 극복하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또한, 그 수난을 감수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입장이 결정된 현재의 터전을 갖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보다도 비참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남아 가지고 그 비참한 역사를 비참으로 소화시킬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소화시켜서 승리의 요인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현실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결정적인 사람은 제일 깊은 골짜기에 들어갈 때 탄력을 발휘해 가지고 뛰어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탄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탄력이 생기지요? 현실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아, 때가 되었구나! 내가 뛰어오를 수 있는 찬스다” 하면서 점핑해야 됩니다.
큰 책임자가 되었다고 언제나 웃을 수 있고 언제나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줄 알아요? 천만에요!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후퇴하시고 사탄이 기수가 됩니다. 우리가 갈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그 순간에는 누가 결정짓느냐?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조심스럽게 비판하시고 사탄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5-36)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한계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통일교회가 국가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국가를 중심삼고 움직일 때까지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맨 밑창에서 공고한 터전을 닦고 점핑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에 복 받을 수 있는 때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1차에 복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양보하고 제2차에 복 받을 수 있는 것도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3차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복귀역사입니다. 하나님도 제1차와 제2차를 사탄에게 양보하셨지요? 그러나 제3차만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3차는 어떠한 때냐?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때요, 완결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 나오셨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이것도 네 것이요, 저것도 네 것”이라고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와 제2차는 식구들에게 줘야 됩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 문 선생도 통일교회 간부들을 누구보다도 영광된 자리에 내세우기 위해서 노력해 나왔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생명을 책임지고 밤을 새워 가면서 말해 주던 사람이 수십, 수백, 수천의 무리가 등장할 때 소신을 피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자리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식구들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제1차와 제2차까지는 그렇게 하려고 생각합니다. (45-38)
우리가 남아져야 할 곳
기독교의 역사를 두고 보면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 순교를 시시한 꼬래비의 신도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심인 신도들, 머리가 되는 신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었지요. 그러지 않았으면 남아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의 입장이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수난길을 가야 되고 세계에 있어서도 수난의 첨단에서 그 수난을 극복하는 기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 영광이 통일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것으로 옮겨지게 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기반을 상실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아무리 비참한 자리라고 하더라도 그 자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현재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주인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내일의 주인은 현실적인 기반무대, 공적인 입장, 수난을 받는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아져야 할 곳은 과거의 승리의 요인을 빛낼 수 있고 미래의 승리적인 여건을 제시할 수 있으며 현실에 있어서 승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여러분이 망상적으로 바라는 자리가 아닙니다. 피가 흐르고 죽음이 뒤넘이치는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그 자리가 결정됩니다. 그런 현실에서 자기 스스로 정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축수를 드릴 수 있을 때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45-43)*
천일국 훈독경 제6권 18일, 원문
내일의 주인
날짜 : 1971. 6. 6(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현실이 실패나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
우리가 현재 처하여 있는 시점은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어 있는 시점입니다. 현재의 개인을 두고 보아도 그러한 입장에 있고, 우리나라의 정세를 두고 보아도 그러한 입장에 있으며, 세계의 정세를 두고 보아도 역시 그러한 입장에 있습니다. 섭리적인 뜻을 실현해 나가시는 하나님을 중심삼고 볼 때, 하나님도 역시 그런 입장에 계십니다.
개인,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 혹은 천주적인 섭리를 운행하는 천운을 통해서 살펴볼 때도 오늘의 입장은 반드시 과거를 입증하고 미래를 세울 수 있는 입장이 되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오늘보다 내일이 더 소망적일 수 있는 것이요, 현재보다 미래가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의 우리 자신, 즉 현재의 생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이 어떠냐에 따라서 과거가 빛을 발하느냐, 발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고 오늘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보다 좋은 미래가 건설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문제가 판가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다 좋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과거보다 못해서는 안됩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 승리를 하지 못하는 자는 역사에 남을 후사(後嗣)가 못됩니다. 현재에 승리를 거둘 수 없는 사람은 미래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승리라는 것을 말하게 될 때, 과거의 승리보다도 현재의 승리를 다짐하지 못하는 무리가 되어 가지고는 시대와 더불어 정리되고 말 것입니다. 현재에 승리를 갖추지 못하는 무리는 미래의 세계를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요, 그 세계를 이루는 하나의 모체가 될 수 없는 것 역시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보게 될 때, 오늘 생명을 가지고 살고 있는 우리 개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현재를 무시하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과거의 인연을 무시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요, 현재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미래의 중요한 자리에 설 수 없는 것도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야말로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이요, 현재야말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점이라는 것을 항시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사람이 실패를 하게 되면 그 실패를 놓고 성공을 재다짐할 수 있는 한 시점이 중요합니다. 그 시점은 오늘의 한 순간으로 말미암아 결정됩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자리에 봉착해 있는 것이 현재 우리의 입장인 것을 망각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만일 오늘 실패를 하거나 오늘 가는 길에 있어서 한 발자국이 어긋나게 되면, 그가 아무리 과거에 빛나던 영광의 자리에 있었고 빛나던 승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간난(艱難)한 운명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은 일상생활이나 역사적인 사실을 미루어 보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에 무책임한 자에게는 미래를 책임지울 수 없습니다. 현재에서 자기 운명의 기준을 넘었으면 생애의 기준도 넘어야 합니다. 그 생애의 기준을 중심삼고 심각하지 않은 사람은 현재보다도 더 심각한 미래가 찾아오면 그 미래의 세계에서 남아질 수 없습니다. 오늘 심각하지 못한 사람은 미래에 남아질 수 없고 제거당합니다. 현재의 복잡한 환경이 미래와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 복잡한 환경을 책임지고 수습하여 극복하지 못하는 무리는 현재보다 더 복잡한 미래가 다가올 때 남아질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 중에서 어떤 것이 더 귀한가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과거가 제아무리 귀하고 미래가 아무리 귀하다고 하더라도, 또 그것들이 귀한 것을 아는 나 자신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과거와 미래를 현실의 운명에 연결시켜서 귀한 가치를 드러내지 못하면 과거도 규탄을 받아야 되고 미래도 규탄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현실이 실패나 성공의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는 귀중한 것임을 느껴야 됩니다. (45-19)
오늘이 가장 귀하다
그러면 미래의 주인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 물론 과거로부터 출발해 나와야 되겠지만, 출발을 아무리 잘했고 어제까지 아무리 잘해 나왔다 하더라도 오늘의 현실에서 당당히 승리의 요인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서지 않고, 승리의 현실을 갖지 않으면, 또 과거의 승리의 터전을 이어받지 않으면 절대로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과거보다 나은 현실의 자리, 과거를 빛낼 수 있는 현실의 자리를 갖지 못한다면 절대로 미래의 소망의 터전을 이어받을 수 있는 기준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현실이야말로 과거의 부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희생을 강조하고 매일 새롭게 되기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내일에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 소망을 오늘의 현실적인 생활권 내에서 체휼해야 됩니다. 즉, 현실의 감정과 일체되게 만들어서 오늘의 생활무대에서 인연될 수 있는 요건으로 만들어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증적인 기반을 상실한 사람은 미래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터전은 현실에서부터 마련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연 현실의 나 자신이 미래를 상속받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자리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현실이 과거를 부정시킬 수 있는 당당한 권위를 가진 주체의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빛나는 과거가 있었다면 그 과거는 현재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신을 어떻게 발견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거의 승자의 기쁨이 오늘의 패자의 서러움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패자 혹은 오늘의 약자로서 신음하는 고통은 미래가 받아들일 수 없고 계승할 수 없는 요인 중의 주체인 것을 볼 때 오늘 이때야말로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는 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오늘의 이때가 미래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의 주인은 어디서 나올 것이냐? 오늘을 상실한 자리에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현실의 사회를 바라볼 때 부패하고 사망이 감도는 악한 세계라고 하더라도, 이 악한 세계를 토대로 해서 미래의 세계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흑암세계의 권한을 생활권 내에서 제거할 수 있는 주체성을 발견하여 생활하는 환경에서 스스로 해내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보람 있는 길이 계승되는 것이지 현재는 암담한 자리에 있으면서 미래에만 소망을 두고 아무리 큰 꿈을 꾸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습니다.
현실 과정을 거쳐서 미래가 판정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런 입장에 서 가지고는 미래를 계승받을 터전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과거가 귀중하더냐, 오늘이 귀중하냐, 미래가 귀중할 것이냐? 과거가 귀중한 것이 아니요, 미래가 귀중한 것도 아니요, 오늘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고통이나 불행 혹은 행복을 중심삼고 몸부림치고 있는 현실이 가장 심각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현재에 있어서 고통받는 환경을 내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지간에 있어서나, 사회활동을 하거나, 혹은 국가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친구를 중심삼고 자랑할 수 있는 자리, 오늘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자랑할 수 있는 자리, 오늘 국가 앞에 당당히 자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선 사람을 중심삼고 시대는 발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없고 그러한 환경의 터전이 없어 가지고는 지금보다 나은 희망의 세계를 맞을 수 없는 것이요, 이 땅 위에서 재출발할 수 있는 기점도 찾지 못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오늘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45-23)
미래를 계승할 수 있는 주인
그러면 우리가 기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역사적인 실패의 자리에서 후퇴할 수 있는 현실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미래의 슬픈 고통이 우리 앞에 다가올 때 그 고통을 피해 가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복귀섭리노정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면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하늘 앞에 승리를 다짐해 나왔느냐, 혹은 실패의 요인을 자극시켜 가지고 하늘의 슬픔을 가중시켰느냐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늘 앞에 그렇게 충성하고 수고했던 노아 할아버지, 오직 뜻 대한 일념으로 슬픔을 잊고 자기를 송두리째 부정한 자리에 섰던 아브라함,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이스라엘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염려하며 선두에 나섰던 모세, 귀중한 청춘시대를 부정하고 광야에서 수도생활을 했던 세례 요한과 같은 사람들이 역사시대에 있어서 승리의 요인이 되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할 때 패자로서 슬픔의 요인을 남겼을 뿐 승리의 터전을 공고하게 다지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수십 년 혹은 일생을 걸고 수난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결과가 나타났느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계승할 수 있었던 심각한 순간을 계속해서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패의 요인이 깃들어 저끄러진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역사적인 시대를 계승받은 현실의 입장에서 누구보다도 심각한 자리에 서야 되겠습니다.
모세가 누구보다도 심각한 자리에서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이던 마음, 미래에 이스라엘을 창건하여 소망하던 천국의 계승자가 되기를 바라던 모세의 마음 이상의 마음을 가지고 현실을 어떻게 미래와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몸부림쳐야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명령을 중심삼고 자기의 일체의 행복의 요건을 한꺼번에 도말해 버리는 행동을 단행했지만, 결국에는 실패의 요인을 남겨서 역사적인 한의 씨를 뿌렸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느냐? 제단에 제물을 드릴 때 비둘기를 쪼개지 않은 지극히 작은 실수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으로 말하면 촌음에 지나지 않았고, 행동으로 말해도 지극히 간단한 행동이었습니다. 그 촌음의 순간에 그렇게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현실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행동이었지만 역사 전체를 뒤넘이치게 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미처 몰랐던 사이에 흥망성쇠의 요인이 그 당시의 현실이라는 운명길을 중심삼고 뒤넘이쳐 나간 것입니다. 그런 과거의 고통스러운 실패의 요인들을 분석해 볼 때, 과거의 고통 이상으로 고통스런 자리도 당당코 나갈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고는 실패의 요인을 남겼던 역사를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심각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상들이 남긴 뜻을 알면 알수록 그 이상의 심각한 자리도 찾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현재에서 어떻게 결정지을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됩니다. 더욱이, 미래에 있어서 행복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상의 수난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현재 자기가 당하는 수난 이상의 수난을 기꺼이 맞을 수 있고 현재의 수난길을 요리할 수 있는 주인공이 되지 않고는 미래의 계승자가 될 수 없고 미래의 터전을 마련하는 주체적인 존재로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좋았다고 하더라도 현실이 과거의 조종을 받아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전진할 수 있는 방향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뒤로 돌아가서 과거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신앙을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뜻을 처음 알았을 때 기뻐하던 그 마음이 오늘의 자신과 상관없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에 자기가 뜻을 알고는 어떻게 움직였다며 옛날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어떠냐고 하면, 오늘은 이러이러하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나 어느 한 때는 다시 그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한 때라는 것이 오늘을 넘어서는 오지 않습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무자비한 개척자의 생활을 한 과거가 있다고 할진대, 그런 개척생활에 있어서 미래에 자랑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오늘은 그 이상으로 무자비한 개척생활을 하겠다는 결단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은 미래를 계승할 수 있는 주인이 못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미래에는 과거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45-25)
미래의 중심
미래의 주인은 현실이 결정합니다. 미래의 주인은 미래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결정되어 가지고 미래의 주인이 됩니다. 그것은 하루 이틀에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년 혹은 일생을 거쳐 가지고 현실적인 승리의 터전이 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승리의 역사로 남아지고, 오늘의 승리가 과거의 승리보다도 빛날 수 있게 될 때 현재의 중심으로 추대를 받게 됩니다. 그렇게 추대를 받는 게 현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다짐하면 다짐할수록 미래의 내용이 깃드는 것이요, 그래야만 미래의 주인으로 남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교인들 가운데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현실에 실패의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부터 결정되느냐? 예배시간과 기도시간에서부터 결정됩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같이하겠다” 하는 자리에서부터 결정되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면 높아질 수 있지만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평평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거기에서 떨어지기 쉽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미래와 현실의 승리를 결정짓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심각하게 정성들이는 자리입니다. 그러면 심각하지 않은 자리에서는 그것이 결정 안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심각해 가지고 몸부림치는 자리에서도 실패의 요인이 결정될 수도 있겠지만, 심각하지 않는 자리에서도 실패의 요인이 현실과 이마를 맞대고 전진과 후퇴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일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에서 얼마나 심각하냐 하는 심각의 정도가 결정의 요인이 되는 것보다도 심각하지 않을 때 자기의 운명이 뒤넘이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저기 땅 끝에서 하나의 선이 나를 찾아오고 이 끝에서 현재의 나와 더불어 맞춰 나가는 선이 있다면 이것이 어느 때 마주칠 것이냐? 미래에 마주쳐 가지고는 관계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과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언제 연결시킬 것이냐? 현실의 한 시점에서 연결될 수 있는 때를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해서 맺어지는 것이 사탄의 세력권 내에서 제거당할 것이냐? 아닙니다. 제거되어서는 안됩니다. 절대적이어야 됩니다. 아무리 천지가 동요하더라도 그것만은 동요되어서는 안된다고 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현실에서 반드시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정되는 순간은 현실을 대표하는 것은 물론 역사를 대표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은 미래의 요인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기준을 결정지을 수 있는 공고한 자리가 아니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미래의 중심이 됩니다. (45-27)
현실에서 사탄을 때려잡아야
그러면 그것이 결정되는 때는 언제냐? 나 자신이 좋아서 신이 나 가지고 은혜에 사무쳐 있을 때일 것이냐? 보라구요! 섭리의 때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하나님이 먼저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느냐? 타락한 이 세상은 하나님이 먼저 출발하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먼저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요인을 결정짓는 자리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사탄이 먼저 참석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맛있는 음식을 해 놓으면 사람이 먹기 전에 파리가 날아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방지하지 않고는 아무리 정성들인 음식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를 제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될 것이 아니겠어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사탄은 어디에 있느냐? 어디에 있긴 어디 있어요? 세계에 있지요. 어느 때에 있었느냐? 과거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것이냐? 현실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사탄을 때려잡아야 됩니다. 그렇잖아요? 사탄을 어떤 자리에서 때려잡아야 되느냐? 여러분은 이런 생각을 안 해봤지요? 지금까지 습관화된 터전 위에서 “이렇게 살다가 가면 될 것 같은데 남달리 그럴 게 뭐 있느냐” 하는 자리에서는 절대로 사탄을 굴복시키고 승리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라구요! 6천 년 동안 하나님을 유린하고 수많은 우리 선조들을 유린한 사탄이 얼마나 간교하고 음흉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거기에 걸려서 6천 년 동안 수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탄을 대해서 싸워 나오는 기독교의 역사를 두고 볼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계에서 그렇게 싸워 나왔지만 피를 흘려서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퇴치할 수 없었던 악랄한 사탄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탄과 언제 결판을 지을 것이냐? 과거에 결판을 지었어요? 만일 과거에 결판을 지었다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냐? 안 끝납니다. 역사를 붙안고 섭리의 뜻과 더불어 대결해 나오는 사탄이기 때문에 섭리를 중심삼고 역사의 운명을 완전히 결판지을 때까지는 남아집니다. 백 년이면 백 년의 일생 동안 그런 섭리권에 포함되어 가지고 길을 가고 있는 우리가 아니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타락된 권내에서 승리했던 것이 자기 나름대로의 승리를 가진 것이라면, 그 승리는 역사시대를 초월하여 남아져야 할 하나님의 섭리와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야말로 최후의 승리, 역사적인 승리는 나 혼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탄 그리고 나의 삼각관계에서 내가 하나님을 대표해 가지고 사탄을 제거하겠다는 승리의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45-29)
통일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
그러면 오늘날 통일교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통일교회를 지도하고 있는 나에게 있어서도 통일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통일교회를 어떻게 이끌고 갈 것이냐? 현재에 있어서 춤추고 가는 것이 좋으냐? 현재에 춤을 추었으면 미래에는 그 이상의 춤을 춰야 됩니다. 현재에 기뻐하면 미래에는 더 기뻐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를 발견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대중의 공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대중의 공인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잘먹고 잘살아서 대중의 공인을 받을 수 있어요? 아닙니다. 대중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는 못먹고 못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통일교회 패들이 그렇게 살면 망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망하라고 아무리 발악을 하고, 목을 자르겠다고 아무리 별의별 수단과 방법을 쓰더라도, 그래서 목을 잘라 놓아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를 자르면 두 개가 나옵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나무의 종대를 잘라 놓으면 그 밑에서 가지가 여러 개 나오지요? 뿌리만 싱싱하다면 여러 개의 가지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통일교회가 승리의 터전을 갖추고, 현재에서 승리한 내용을 전통적으로 미래에 상속시킬 수 있고, 미래를 인계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전체를 위해서 희생해야 되겠습니다. 과거의 우리 선조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해 나온 사람이라야 승리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승리해 나오던 조상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냐? 공적인 입장에 섰다는 것을 망각하고 자유로운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게 되었을 때 다 망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스스로 고생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대하며 “내가 이렇게 일을 했는데, 그것을 몰라준다” 하면서 눈물을 섬벅섬벅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물을 섬벅섬벅 흘리는 건 좋습니다. 그런데 그가 공적인 일을 염려하면서 섬벅섬벅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해요?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그런 것은 공적인 뜻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섬벅섬벅 흘리고 다님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비참하게 느껴서 “아, 그러냐” 하고 동정하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공적인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사적인 것을 내세우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망하지 말래도 망합니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에게 사정을 하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들어주지 않던 일도 가족을 걸고 들어가고 아벨을 중심삼고 나가는 입장에서 가문을 두고 봐도 그럴 수 없고 과거의 인연을 보거나 미래의 인연을 봐도 그럴 수 없다고 하게 될 때는 남편도 옳은 말이라고 긍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불평할지 모르지만 내심으로는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체면상, 위신상 이럴 뿐이다”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압니다. 그렇지만 “아이고, 자식이고 무엇이고 다 밉다” 해보라는 거예요, 누가 동정하나. 그렇게 한 번 하면 틈이 벌어지고, 두 번 하면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적인 문제를 중심삼고 눈물을 한 번 흘리고 두 번 흘리면 멀어지지 않습니다. 남편이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아, 고생하는구나. 나보다 낫구나” 하는 것입니다. (45-33)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한계점으로 생각하고 계신다
그러면 그런 원칙을 어디서부터 세워야 되느냐? 오늘 이 현실에서부터 세워야 합니다. 현실이 중요하니까 현실에서 훈련해야 되는데, 어떤 자리에서 훈련해야 되느냐? 지금 있는 자리보다 나은 자리에서 훈련해야 되느냐? 그것은 누구나 다 바라는 것이지만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중심이 될 수 있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를 점령해야 되느냐? 참사랑만이 치리하는 치리권을 점령해야 됩니다.
그 참사랑의 치리권을 정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첩첩 방위선을 거치고 수난을 극복하고 나서야 가능합니다. 또한, 그 수난을 감수할 수 있는 스스로의 입장이 결정된 현재의 터전을 갖지 않고는 달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통일교회가 미래의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냐? 개인을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개인의 자리보다 나은 자리입니다. 세계 60억 인류의 개개인보다 조금 나으면 개인적인 미래의 주인은 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주인으로는 안되는 것입니다. 또, 가정을 중심삼고 볼 때 조금 나으면 가정의 주인이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가정을 넘어서 종족, 종족을 넘어서 국가, 국가를 넘어서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해야 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비참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남아 가지고 그 비참한 역사를 비참으로 소화시킬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소화시켜서 승리의 요인으로 결정지을 수 있는 확고부동한 현실적인 승리의 터전을 마련하지 않고는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요인입니다.
선생님이 통일교회의 간부면 간부들을 보면서 “어느 한 때에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자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사람은 제일 깊은 골짜기에 들어갈 때 탄력을 발휘해 가지고 뛰어오를 수 있어야 합니다. 드디어, 올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탄력을 발휘해야 됩니다.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탄력이 생기지요? 현실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아, 때가 되었구나! 내가 뛰어오를 수 있는 찬스다” 하면서 점핑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닥치는 일들이 많지요? 큰 책임자가 되었다고 언제나 웃을 수 있고 언제나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줄 알아요? 천만에요! 최후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후퇴하시고 사탄이 기수가 됩니다. 우리가 갈 길을 가는 데 있어서 최후의 그 순간에는 누가 결정짓느냐?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조심스럽게 비판하시고 사탄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가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45-36)
하나님은 통일교회를 한계점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통일교회가 국가를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국가를 중심삼고 움직일 때까지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맨 밑창에서 공고한 터전을 닦고 점핑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가 요즈음 어떤 말을 듣느냐 하면 지방에 있는 지역장이나 지구장들이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면 선생님 안녕하시냐고 내 안부를 묻는 기관장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요? 외형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기관장들이 문 선생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 가지고 선생님의 안부를 묻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통일교회가 점핑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뛰려고 하면 외형적으로 모든 조건이 갖추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에 복 받을 수 있는 때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제1차에 복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양보하고 제2차에 복 받을 수 있는 것도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3차는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복귀역사입니다. 하나님도 제1차와 제2차를 사탄에게 양보하셨지요? 그러나 제3차만은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3차는 어떠한 때냐? 전체의 운명을 결정짓는 때요, 완결하는 때입니다. 그렇게 돼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해 나오셨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분이 성공하기 위해서도 “이것도 네 것, 저것도 네 것”이라고 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차와 제2차는 식구들에게 줘야 됩니다.
그러므로 통일교회 문 선생도 통일교회 간부들을 누구보다도 영광된 자리에 내세우기 위해서 노력해 나왔습니다. 통일교회 교인들은 이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 생명을 책임지고 밤을 새워 가면서 말해 주던 사람이 수십, 수백, 수천의 무리가 등장할 때 소신을 피력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어요? 그렇지만 그런 자리에는 될 수 있는 대로 식구들을 내세우려고 합니다. 제1차와 제2차까지는 그렇게 하려고 생각합니다. (45-38)
우리가 남아져야 할 곳
지금 통일교회는 누구도 모르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현재의 입장을 중심삼고 세계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선구자적인 사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 이런 움직임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미래의 세계가 어디서부터 형성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구요! 아무리 훌륭한 철학사상이라고 하더라도 그 철학사상을 중심삼고 세계적인 조직을 이루어 실천하는 운동으로 승화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일개국을 중심삼고 움직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일개국을 희생하더라도 세계의 행복을 위해서 움직여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독교가 희생해 나온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두고 보면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그 순교를 시시한 꼬래비의 신도들이 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심인 신도들, 머리가 되는 신도들이 순교를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기독교가 세계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건 자동적으로 되게 되어 있었지요. 그러지 않았으면 남아질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생각해야 됩니다.
통일교회도 마찬가지의 입장이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수난길을 가야 되고 세계에 있어서도 수난의 첨단에서 그 수난을 극복하는 기수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그 영광이 통일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계의 것으로 옮겨지게 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기반을 상실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아무리 비참한 자리라고 하더라도 그 자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현재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주인의 자리를 상속받을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내일의 주인은 현실적인 기반무대, 공적인 입장, 수난을 받는 자리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남아져야 할 곳은 과거의 승리의 요인을 빛낼 수 있고 미래의 승리적인 여건을 제시할 수 있으며 현실에 있어서 승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여러분이 망상적으로 바라는 자리가 아닙니다. 피가 흐르고 죽음이 뒤넘이치는 비참한 자리에서부터 그 자리가 결정됩니다. 그런 현실에서 자기 스스로 정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축수를 드릴 수 있을 때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미래에 그런 역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 통일교회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되겠습니다. (4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