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천일국 훈독경 제6권 10일) u

훈독왕 | 20200620091627

천일국 훈독경 제6권 10일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훈독본) 
날짜 : 1959. 1. 18(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날 여러분은 아니 살래야 아니 살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고, 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어느 때 이루어질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서 있기에 그럭저럭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하나의 가치를 하늘이 찾고자 원할 때, 여러분 자신은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리는 무엇인지 모르게 최후의 이념과 최고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충격을 받아 모순된 환경을 타개하려는 사명감에 사무쳐 있는 청년 남녀가 있다고 할진대 그는 생애에 대한 애착심까지도 없어지는 경지에 들어갈 것입니다. 내 몸에서 모든 죄악을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고 죄악의 몸을 포기하고 누구보다도 낮은 자리에 처할 수 있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어떠한 무엇이 붙들고 있고 어떤 이념을 향해서 지향시키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온 세계 인류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그날부터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자탄의 호소, 울부짖는 심정의 호소를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입니다. (5-170)

 

우리의 선조들을 그리워해야 할 때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타락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타락, 현세의 타락성, 미래까지 연장될 타락의 원인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오늘날까지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수고와 희생을 거듭하면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애썼지만 타락의 역사를 계속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현세에도 죄악된 이 세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허덕이고 있고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한다면 과거에 되어진 역사적인 사실을 그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인 비애와 대결하여 참다운 믿음의 심정을 붙안고 싸워나가던 선조들의 그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적인 비애를 청산하기 위해 지녔던 지조는 무엇이었던가? 오늘의 내 일신이 무엇을 세워 놓기를 바랄 것인가? 오늘날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현실의 모든 역경을 이겨내면서 내일의 한 선의 터전을 쌓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동지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마음을 품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역사적인 인연을 배반하는 자요, 시대적인 인연을 배반하는 자요, 미래를 망칠 자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선조들이 나타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너는 나를 아느냐” 할 때, 여러분은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또,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죄악된 세상과 대항해 싸워 나가는 어떠한 형제에 대하여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 줄 것인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길을 타개하기 위하여 싸우고 배척받는 입장에 서 있는 나를 위하여 무슨 권고의 말씀을 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점(觀點)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대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조들의 말씀과 심정을 내가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시대적인 사정을 다 앎으로써 끝날 수 없는 사정이 남아 있고, 미래적인 모든 사정을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끝날 수 없는 사정이 남아 있습니다. 곧 역사적인 서러움, 시대적인 서러움, 미래적인 서러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5-172)

 

역사적인 슬픔의 심정을 체휼하여 승리해야

아담가정으로부터 슬픔의 역사가 시작되어 복귀섭리를 받들어 온 선조들은 슬픈 노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노아가 거치고, 아브라함이 거치고, 예수님까지 파란곡절을 거치면서 비운의 역사가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운을 가로막기 위하여 하늘을 대표하고 인류를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하여 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역사적인 비운의 운세 앞에 승리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소망의 한 날을 약속하고 감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슬픔의 역사가 흘러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는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느냐? 이제 여러분은 옛날의 아담의 심정을 넘어야 되겠고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심정을 넘어야 되겠으며 어느 선지자나 어떤 개인의 심정도 넘어야 될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심정까지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순교를 당한 애달프고 서글픈 심정을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열매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여러분이 역사적인 그 심정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어떠한 심적인 기반을 여러분의 마음에 갖고 있는가를 물어볼 것입니다. 하늘이 역사를 거쳐오면서 싸웠다고 할진대 끝날에 한 승리의 아들딸을 세워 놓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인 슬픔의 심정을 체휼하여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에 있어서 역사에 맺힌 하늘의 슬픈 심정의 모든 조건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전체 역사에 대한 하늘의 슬픈 심정을 붙들고 위로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고 할진대는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어떠한 사람을 품지 못하셨을지라도 그러한 개체를 통하여 기쁨의 심정을 갖고 품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심정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선조의 심정적인 기반을 거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은 역사적인 심정권 내에 속하여 있는 심정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하늘이여! 내가 어떤 감각을 갖고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고 할진대 옛날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대하던 심정, 타락하던 심정, 하나님이 쫓아내시던 심정, 노아를 세우실 때까지 1,600년 동안 수고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노아가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으면서 무한한 천대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수고해 나오던 그 심정, 우여곡절과 천태만상의 역사과정을 거쳐온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한번 살고 싶습니다”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산 실체, 승리의 표적으로 한 인간을 내세우고자 하실진대 여러분은 “아버지여, 손길을 펴시어서 저희가 인간시조가 타락 전 아버님과 즐겼던 그 심정으로부터 타락 이후 역사의 비애의 그 장면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여행시켜 줄 수 없습니까” 하면서 기도해 보라구요!
 
이제 여러분은 하늘을 찾아가는 노정을 다시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소망의 동산으로 보내기 위하여 우리를 대하여 찾아오셨습니다. (5-174)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세워 자랑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내 실체를 세워서 주도적인 행사를 일으킬 수 없는 존재요, 내 마음을 세워서 안식의 터전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된 연고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는 먼저 실체를 찾아오시고 사랑의 심정으로 찾아오고 싶으시되 인간이 실체와 사랑 그리고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실체로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실체를 대신하여 왔으나 예수님도 실체를 갖춘 행동을 다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나님이 말씀을 배반한 인간에게 실체를 대신한 존재를 주셨으나 인간이 그 실체마저 배반한 연고로, 또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으나 그것도 배반한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간 앞에는 실체와 말씀 그리고 사랑의 명사만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돌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말씀 같은 말씀이 우리를 완성시킬 수 없고, 실체 같은 실체가 우리를 실체로서 이끌 수 없고, 사랑 같은 사랑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우리는 “참다운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 실체가 어디에 있느냐,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표어를 내걸고 그것을 찾아 허덕여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한 인류를 바라보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목음 7:7-8)고 말씀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걷고 있는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구하기 위해 걷고 있고, 찾기 위해 걷고 있고, 두드리기 위해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걸음을 타락 이후 6천 년 동안이나 걸었으나 아직까지 정지할 줄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참다운 스승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선의 지도자, 참다운 스승을 찾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를 통하여 내 마음의 안위(安慰)와 소망을 일으킬 수 있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가 새로운 말씀을 찾기 위하여 새로운 스승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말씀과 하나될 내 자신의 실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과 선의 이념 혹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는 인간과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5-176)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말씀을 찾아 헤매고 있고, 말씀을 기반으로 한 신앙노정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참신앙을 중심삼고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중심존재를 기독교적으로 말할 때 재림주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신앙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은 말씀을 기반으로 인류를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실체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으나 예수님의 실체를 의지하여 따라가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다운 말씀을 가진 분이 나타나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 말씀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신 분은 천적인 유일한 존재요, 모든 인간의 표본이요, 인간의 전체이념을 대표한 존재인데 그 존재와 우리를 비교할 때 우리가 차이가 있는 존재가 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로 선하시고, 최고로 의로우시고, 최대의 승리자이신 그 하나의 실체를 표방하여 여러분은 다시 제2의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이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지내 오는데 있어서 말씀에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허덕이며 나왔으나 말씀의 주인공이요, 말씀의 실체가 되시는 분을 모시고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존재를 제대로 모시고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이후 4천 년 역사를 섭리하면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세우고 무한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의 중심을 찾게 하기 위하여 민족을 규합시켜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오시면서 말씀의 실체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홀연히 말씀을 가지고 나타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붙들고 판가리의 싸움을 하여 역사적인 모든 조건을 밟고 넘어선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붙들고 판가리의 싸움을 해야 되는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5-180)

 

직계 혈통의 인연을 맺으려면

그러면 예수님을 붙들고 어떻게 할 것이냐?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싸우던 것과 같은 싸움을 해야 됩니다. 장자의 기업을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야곱은 그날부터 말씀을 중심삼고 축복의 조건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축복의 조건을 세운 후에는 실체를 회복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을 붙들고 판가리의 싸움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말씀을 밟고 올라서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이 지니고 있는 하늘의 전권의 능력과 구세주의 자격을 나에게 물려주고 모든 죄의 근본을 청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 다음에는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하늘의 사랑을 소개해 주소서” 하면서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만일 예수님을 만나서 그러한 조건을 요구하여 축복을 받고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쌍수를 들어 “아, 그대의 소원이 이렇거늘 영원한 행복을 누리라”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신랑 신부로 하나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당신이 우리 실체를 세우셨으니까 당신의 속 깊이 숨겨진 사랑을 주소서” 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냐! 이곳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으니까 나를 조건으로 삼아서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의 이념을 찾아가는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찾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 당신의 사랑의 전권을 우리에게 축복해 주소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입장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는 진리를 찾아 넘고 실체를 찾아 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나에게 사랑의 축복을 해주소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찾아 나올 때까지 수많은 사탄, 수억만의 사탄의 시련을 거쳐오느라 대단히 수고했다” 하면서 사탄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한 노정, 하나님을 알게 될 때까지의 노정을 칭찬해 줄 수 있으되 하나님의 심중으로 그리던 이상동산에서 취하여 살 수 있는 사랑의 심정으로는 축복해 주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그것이 네 소원이거든 이제부터 죄악 된 세상으로 나가라” 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죄악 된 부모의 후손들인고로 복귀의 과정을 거쳐야 되겠다. 그래서 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진대 너희는 잃어버린 참부모를 찾아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면 다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저끄러진 분야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즉, 인간조상이 인류의 참조상이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인류가 참부모를 가지지 못했고 참다운 자식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양자로서 하나님을 알고 사탄과 싸워서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직계 혈통의 인연을 맺으려면 참부모를 모셔야 됩니다. (5-182)

 

인간들이 속죄의 완성을 바라보고 나온 목표

어떠한 신앙의 용자라도 하나님 앞을 떠나면 허덕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한테 나아가 “그 부모가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땅에 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땅에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러분이 그 부모를 대신하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네가 한번 부모가 되어 봐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앙의 용자는 모든 신앙자들을 더듬어 편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를 찾아서 “지금까지 제가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어 참부모인 당신 앞에 나왔사오니,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이제부터 당신의 영원한 복지에서 살 수 있는 전권을 저희에게 인계해 주소서” 하면서 호소해도 그렇게 호소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부모는 “네 형제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찾으러 가서 만나면 “네가 아니면 내가 못 되고 내가 아니면 네가 못 되는 형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 있는 형제, 뼈를 연하고 살을 연한 지체 중의 지체로서 너와 내가 나누어질 수 없는 형제를 찾아와야 된다는 명령을 받고 찾아왔으니까 6천 년 역사가 우리로 말미암아 해원된다면 너와 내가 형제로서 그 해원성사의 행복을 누려보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형제는 “아, 당신이 찾아온 것은 고맙소! 그러나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오. 또,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은 무슨 길이냐? 그 길은 종족을 찾아와야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용자는 또 발길을 옮겨갑니다. 

그래서 한 종족을 만나 가지고 “내가 이러 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그대들을 만났으니까 그대들을 통해서 천적인 소원을 성취해야 되겠소” 하면서 사정해도 그 종족은 “당신을 환영은 할 수 있으나 기쁨의 춤은 출 수 없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종족을 깨뜨렸던 사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으로 인하여 깨어진 종족이 있는 동시에 그 종족과 연결된 민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런 민족이 있는 동시에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고개를 넘어서 백성을 찾아 가지고 “이제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소원성취를 다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찾았으니까 하늘의 백성들이 될 자들과 즐기자” 하지만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넘어 우리의 참부모, 참형제, 참종족, 참백성, 참민족, 참인류가 모여서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려야 됩니다. 이것이 역사의 배후를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에 애달픈 곡절을 쌓이게 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살아 나온 역사의 목표입니다. 

이것과 반대방향으로 엉클어진 것이 죄악의 세상이고, 이 이념을 세우지 못하게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의 역사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184)

 

인간이 가야 할 목적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의 목표는 먼저 하나님의 인을 받고 내가 형제에게 인을 쳐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종족과 민족에게 인을 쳐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서 있는 발걸음이 내일은 어디로 향하여 갈 것인가?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부모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형제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종족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민족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하나님이 품어주실 수 있는 사랑권 내에 있어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일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직 낙원에서 보류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이 곡절을 일으킨 주인공인 사탄과 격전하기 위한 하늘의 정병과 용자로서 하늘땅을 대하여 호령하며 나설 수 있는 청년 남녀들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부모의 피를 받은 자녀들이 되어서 그 피와 연결된 민족과 백성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 부모와 하나되어 그 부모의 기쁨이 전체의 기쁨이요, 전체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민이 하나님을 모셔놓고 송영을 돌리고 경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목적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5-188)*
 

천일국 훈독경 제6권 10일, 원문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날짜 : 1959. 1. 18(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날 여러분은 신(神)이 있는가, 없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니 살래야 아니 살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고, 또 아니 갈래야 아니 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항상 더 좋은 것을 찾아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오늘과 내일뿐만 아니라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후손들까지도 이 길을 갈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여러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때 이루어질 것인가

어차피 어떤 목적을 향해서 가야 할 우리라면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해야 하며, 선과 악에 대하여 어떻게 주장해야 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해명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의 현실을 바라보게 될 때 후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을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입니다. 눈을 뜨고 모든 세상을 바라보아도 여러분이 원하는 환경이 이루어져 있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돌아보아도 내 마음이 원하는 복지사회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사회환경과 세대가 복잡다단하게 흐름에 따라서 그 사회에 여러분이 머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도 복잡하지만, 오늘날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심령세계를 이끌고 있는 종교단체의 움직임은 더 복잡합니다. 그래서 종교단체를 찾아가 보더라도 마음으로는 이끌리지만 그들을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복잡다단한 사정에 엉클어져 있어서 마음이 원하고 있고 몸이 가고 싶어 하지만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원하는 방향을 따라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자탄(自嘆)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들이 살아 있는 동안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라도 만우주 앞에 자기를 세워 놓고 비판해야 합니다. 그런 곳을 종교에서는 누구도 가기를 원치 않는 지옥세계라고 규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니 갈 수 없는 입장에 서 있기에 그럭저럭 이 자리까지 나왔습니다. 그러면 내 자신이 여기까지 왔다고 하는 하나의 가치를 하늘이 찾고자 원할 때, 여러분 자신은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과거를 회고하면서 후회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과거를 바라보아도 그렇고, 현세를 바라보아도 그렇고, 미래를 바라보아도 그런 입장에 서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지 모르게 최후의 이념과 최고의 행복을 마음속으로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어느 때 이루어질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마음에 충격을 받아 모순된 환경을 타개하려는 사명감에 사무쳐 있는 청년 남녀가 있다고 할진대 그는 생애에 대한 애착심까지도 없어지는 경지에 들어갈 것입니다. 내 몸에서 모든 죄악을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고 죄악의 몸을 포기하고 누구보다도 낮은 자리에 처할 수 있는 자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을 어떠한 무엇이 붙들고 있고 어떤 이념을 향해서 지향시키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넘어갈 것인가? 온 세계 인류가 여기에 걸려 있습니다.
온 인류와 만물, 즉 하늘땅의 어떠한 존재물도 이러한 과정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인 것을 여러분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그날부터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자탄의 호소, 울부짖는 심정의 호소를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제목은 ‘나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입니다. (5-170)

 

우리의 선조들을 그리워해야 할 때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은 타락의 역사노정을 거쳐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타락된 현실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현실을 근거로 하여 타락역사가 연장될 것이라고 우리는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거의 타락, 현세의 타락성, 미래까지 연장될 타락의 원인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오늘날까지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면서 우리 선조들은 수많은 수고와 희생을 거듭하면서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애썼지만 타락의 역사를 계속해 왔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현세에도 죄악된 이 세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허덕이고 있고 노심초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게 될 때 내 마음에 과거의 선조들이 가졌던 원한의 심정이 움직이고 있고 현세의 충격으로 인한 슬픈 감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워지는 한 가지의 인연이 있다고 할진대 그것이 무엇일 것인가? 지금 이때는 타락의 역사노정을 거쳐오면서 슬픔의 심정을 붙안고 싸워 나왔던 우리의 선조들을 그리워해야 할 때입니다. 또한, 이 현세에 있어서 사망권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고난권과 타락권을 벗어나기 위해서 슬픔의 심정을 붙안고 싸우고 있는 우리의 동지들이 그리워져야 할 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그리워한다면 과거에 되어진 역사적인 사실을 그리워할 것이 아닙니다. 그 역사적인 비애와 대결하여 참다운 믿음의 심정을 붙안고 싸워나가던 선조들의 그 심정을 그리워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적인 비애를 청산하기 위해 지녔던 지조는 무엇이었던가? 오늘의 내 일신이 무엇을 세워 놓기를 바랄 것인가? 오늘날 미래에 소망을 가지고 현실의 모든 역경을 이겨내면서 내일의 한 선의 터전을 쌓기 위하여 싸우고 있는 동지들은 누구인가?
이러한 마음을 품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역사적인 인연을 배반하는 자요, 시대적인 인연을 배반하는 자요, 미래를 망칠 자인 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은 바로 이러한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러면 어떠한 선조들이 나타나서 여러분 자신에 대하여 “너는 나를 아느냐” 할 때, 여러분은 무슨 대답을 할 것인가? 또, 오늘날 이 시대에 있어서 죄악된 세상과 대항해 싸워 나가는 어떠한 형제에 대하여 “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해 줄 것인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의 길을 타개하기 위하여 싸우고 배척받는 입장에 서 있는 나를 위하여 무슨 권고의 말씀을 해 줄 수 있겠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점(觀點)에서 들려오는 그 음성을 대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조들의 말씀과 심정을 내가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시대적인 사정을 다 앎으로써 끝날 수 없는 사정이 남아 있고, 미래적인 모든 사정을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써 끝날 수 없는 사정이 남아 있습니다. 곧 역사적인 서러움, 시대적인 서러움, 미래적인 서러움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러움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선조들을 대신하여, 현재의 인간들을 대신하여, 후손들을 대신하여 대변해야 할 자신들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이러한 책임을 질 수 있는 후손을 갖지 못했다고 할진대 우리 선조들이 아무리 공적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탄식할 것입니다. 뜻을 위해서 싸우던 분들, 비애의 심정에 북받쳤던 선조들, 하늘땅을 향한 원한의 심정에 사무쳤던 선조들이 오늘날 우리를 대해서 하나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심정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선조들의 슬픔은 가중될 것입니다. (5-172)

 

역사적인 슬픔의 심정을 체휼하여 승리해야

아담가정으로부터 슬픔의 역사가 시작되어 복귀섭리를 받들어 온 선조들은 슬픈 노정을 거쳐 나왔습니다. 노아가 거치고, 아브라함이 거치고, 예수님까지 파란곡절을 거치면서 비운의 역사가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운을 가로막기 위하여 하늘을 대표하고 인류를 대표하고 역사를 대표하고 시대를 대표하고 미래를 대표하여 왔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역사적인 비운의 운세 앞에 승리적인 조건을 세우지 못하고 소망의 한 날을 약속하고 감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슬픔의 역사가 흘러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는 어디로 향하여 가고 있느냐? 이제 여러분은 옛날의 아담의 심정을 넘어야 되겠고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심정을 넘어야 되겠으며 어느 선지자나 어떤 개인의 심정도 넘어야 될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심정까지 넘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왔다 간 이후부터 오늘날까지의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을 당하고 순교를 당한 애달프고 서글픈 심정을 넘어서야 되겠습니다. 그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있는 하나의 열매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여러분이 역사적인 그 심정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어떠한 심적인 기반을 여러분의 마음에 갖고 있는가를 물어볼 것입니다. 하늘이 역사를 거쳐오면서 싸웠다고 할진대 끝날에 한 승리의 아들딸을 세워 놓고자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적인 슬픔의 심정을 체휼하여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이 시대에 있어서 역사에 맺힌 하늘의 슬픈 심정의 모든 조건을 회복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전체 역사에 대한 하늘의 슬픈 심정을 붙들고 위로할 수 있는 하늘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러한 아들딸이 있다고 할진대는 하나님이 6천 년 동안 어떠한 사람을 품지 못하셨을지라도 그러한 개체를 통하여 기쁨의 심정을 갖고 품어 주시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심정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선조의 심정적인 기반을 거치지 않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심정은 역사적인 심정권 내에 속하여 있는 심정임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나는 어떠한 심정의 세계에서 방황하고 있으며 어떠한 시선과 어떠한 오관을 갖고 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여러분은 먼저 “하늘이여! 내가 어떤 감각을 갖고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고 할진대 옛날 에덴에서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전 하나님을 대하던 심정, 타락하던 심정, 하나님이 쫓아내시던 심정, 노아를 세우실 때까지 1,600년 동안 수고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노아가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으면서 무한한 천대와 학대를 받으면서도 하늘을 붙들고 수고해 나오던 그 심정, 우여곡절과 천태만상의 역사과정을 거쳐온 하나님의 심정을 붙들고 한번 살고 싶습니다”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산 실체, 승리의 표적으로 한 인간을 내세우고자 하실진대 여러분은 “아버지여, 손길을 펴시어서 저희가 인간시조가 타락 전 아버님과 즐겼던 그 심정으로부터 타락 이후 역사의 비애의 그 장면 장면을 볼 수 있도록 여행시켜 줄 수 없습니까” 하면서 기도해 보라구요!
그러면 하늘의 슬픔과 인간의 슬픔이 해결되지 않는 초점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들은 있지만 하나님의 심정을 붙드는 사람이 없고 역사적인 심정을 붙드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오늘 이 시대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심정과 미래적인 심정을 붙들고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의 심정과 연결짓는 역사를 이루어 놓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탄식이 있다고 할진대는 이 뜻을 세우지 못한 탄식보다 더 큰 탄식이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여러분은 하늘을 찾아가는 노정을 다시 회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한 소망의 동산으로 보내기 위하여 우리를 대하여 찾아오셨습니다. (5-174)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입장에 있느냐

여러분이 원리를 통하여 아시다시피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 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실체를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실체를 지으실 때의 심정은 어떠했으며, 그 실체를 통하여 자랑하고자 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이러한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들이요, 본연의 실체를 잃어버린 자들이요, 하나님의 이념동산을 움직여 낼 수 있는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를 세워 자랑할 수 없는 죄인인 것을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내 실체를 세워서 주도적인 행사를 일으킬 수 없는 존재요, 내 마음을 세워서 안식의 터전을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된 연고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데는 먼저 실체를 찾아오시고 사랑의 심정으로 찾아오고 싶으시되 인간이 실체와 사랑 그리고 말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실체로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실체를 대신하여 왔으나 예수님도 실체를 갖춘 행동을 다하지 못하고 갔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배반한 인간에게 실체를 대신한 존재를 주셨으나 인간이 그 실체마저 배반한 연고로, 또 하나님의 사랑을 주셨으나 그것도 배반한 연고로 오늘날 우리 인간 앞에는 실체와 말씀 그리고 사랑의 명사만 남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을 찾아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역사를 돌아가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말씀 같은 말씀이 우리를 완성시킬 수 없고, 실체 같은 실체가 우리를 실체로서 이끌 수 없고, 사랑 같은 사랑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우리는 “참다운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 실체가 어디에 있느냐,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표어를 내걸고 그것을 찾아 허덕여야 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 처한 인류를 바라보고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목음 7:7-8)고 말씀했음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내가 걷고 있는 발걸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구하기 위해 걷고 있고, 찾기 위해 걷고 있고, 두드리기 위해 걷고 있습니다. 이러한 걸음을 타락 이후 6천 년 동안이나 걸었으나 아직까지 정지할 줄 모르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옮기는 걸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땅을 바라보면 선한 것들만 있지 않습니다. 선한 것들보다 오히려 악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의 발자취가 좌로 가느냐, 우로 가느냐, 또는 선의 방향으로 옮기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참다운 스승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선의 지도자, 참다운 스승을 찾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를 통하여 내 마음의 안위(安慰)와 소망을 일으킬 수 있는 말씀을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인가 새로운 말씀을 찾기 위하여 새로운 스승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말씀과 하나될 내 자신의 실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씀을 찾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선조들도 하늘의 존재성을 규명하고 인생의 근본문제를 해명하기 위하여 수고했고, 또 그러한 수고는 지금 이 시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러한 관념 속에 사로잡혀 있건 없건간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두드리고 있고, 찾고 있고, 구하고 있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모습들을 바라볼 때 여러분도 그러한 입장에서 허덕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게 허덕이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계에 그러한 사람이 없다고 할진대는 하나님의 뜻과 선의 이념 혹은 우리가 바라는 소망의 시대는 인간과 인연을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모를지라도 기필코 찾고, 헤매고,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의 선조 때부터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또 앞으로도 끊임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견지에서 오늘날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입장에 있는가를 자문해 봐야 될 것입니다. (5-176)

 

인간의 소망

오늘날 젊은 학생들이 가방을 들고 학교에 갑니다. 그런데 가방을 들고 어떤 목적으로 가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나는 사회로 나간다. 국가의 중대한 책임을 지고 나간다. 세계를 이끌기 위해 나간다”고 하면서 나가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어디로 갈 것이냐? 하늘이 있다면 엑스(X)가 가로놓입니다. 세상만사가 이와 같은 곡절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내적인 세계도 그렇거니와 외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무한히 뻗어나가고 싶지만 한 발자국을 나아갈 때마다 그 곡절의 징조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피하여 내적인 세계로 찾아갈 때 도의(道義)니, 도덕이니, 윤리니, 종교니 하는 방향으로 내 자신을 이끌어 나가려고 하는데, 거기에도 천태만상의 곡절들이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 왜 종교를 세웠소” 하면서 원망하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러한 비운(悲運)의 역사를 만들어 놓으셨는가? 그리고 나에게 그것을 체험시키는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내가 세상의 모든 내적인 세계를 박찰 수 있는 권한이 없어서 허덕이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를 해명하려는 입장에서 하늘과 땅 그리고 세상을 걸고, 내 생명을 걸고 이 비운의 힘과 대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판가리의 고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어차피, 인간은 이것을 넘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지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선조들이 허덕이던 역사적인 심정이라도 알아서 자기도 모르는 말로서 역사적인 비운의 모든 곡절의 말을 한번 자기 입으로 해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하늘을 찾아갈 수 없고 땅을 찾아나갈 수 없습니다. 되돌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역사적인 심정의 경지에서 “내가 믿겠습니다” 하는 말을 해 보고 싶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을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느끼지 못하면 운명 직전에 가서라도 봉착게 되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류가 허덕이는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운명 직전에 이러한 난관에 부딪치지 않으려면 젊었을 때 간절히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같이 젊었을 때 간절히 믿는 믿음을 갖는 것이 인간의 소망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운명 직전에 이것에 봉착할 때는 이도 저도 어쩔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늘은 인간이 젊을 때 선을 중심으로 한 생활관념이나 세계관념을 세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즉 그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는 하나의 해결점을 지어 주기 위해서 역경의 길로 몰아 넣습니다. 하늘은 인간으로 하여금 세상을 피하라고 세상과 반대되는 길로 몰아 넣는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교리나 교파보다도 나를 더 믿으라고 강조하고 나옵니다. 오늘날 믿고 있는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데,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지나가는 행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하늘은 원치 않습니다. (5-178)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

그러면 하늘은 어떠한 믿음을 원하는가? 예수님이 나를 믿으라고 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여기고 믿듯이 하나님도 자신을 아들로 여기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한 말씀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말씀을 찾아 헤매고 있고, 말씀을 기반으로 한 신앙노정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참신앙을 중심삼고 인간들을 찾아오시는 중심존재를 기독교적으로 말할 때 재림주라고 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신앙을 분석해 보면, 하나님은 말씀을 기반으로 인류를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종교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싸워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적으로 말하면 끝날의 7년 대환란의 시기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실체를 만나야 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은 많으나 예수님의 실체를 의지하여 따라가는 사람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다운 말씀을 가진 분이 나타나도 믿지 않고 오히려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인가? 말씀과 하나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오신 분은 천적인 유일한 존재요, 모든 인간의 표본이요, 인간의 전체이념을 대표한 존재인데 그 존재와 우리를 비교할 때 우리가 차이가 있는 존재가 되면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로 선하시고, 최고로 의로우시고, 최대의 승리자이신 그 하나의 실체를 표방하여 여러분은 다시 제2의 발걸음을 옮겨 놓아야 됩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 땅 위의 모든 인간들이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지내 오는데 있어서 말씀에 의지하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허덕이며 나왔으나 말씀의 주인공이요, 말씀의 실체가 되시는 분을 모시고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인 우리의 선조부터 지금까지 그러한 존재를 제대로 모시고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이후 4천 년 역사를 섭리하면서 수많은 선지선열들을 세우고 무한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의 중심을 찾게 하기 위하여 민족을 규합시켜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나오시면서 말씀의 실체를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복음 5:17)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까지의 모든 말씀을 완결지을 수 있는 분이었고, 하나님이 역사노정에서 주신 그 말씀 이상의 것을 가지고 왔던 분입니다. 그러한 존재로 온 메시아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실체인 메시아를 고대하고 나오던 수많은 인류는 정작 나타난 말씀의 실체를 몰라 봤습니다. 말씀의 실체를 다 잃어버리고 만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홀연히 말씀을 가지고 나타난 예수님이 하나님을 붙들고 판가리의 싸움을 하여 역사적인 모든 조건을 밟고 넘어선 것과 같이 우리도 예수님을 붙들고 판가리의 싸움을 해야 되는 조건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5-180)

 

직계 혈통의 인연을 맺으려면

그러면 예수님을 붙들고 어떻게 할 것이냐? 야곱이 천사를 붙들고 싸우던 것과 같은 싸움을 해야 됩니다. 장자의 기업을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야곱은 그날부터 말씀을 중심삼고 축복의 조건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축복의 조건을 세운 후에는 실체를 회복해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하늘을 붙들고 판가리의 싸움을 해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야 할 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를 바라볼 때 아직 사탄을 지배할 수 있는 말씀의 권한을 이루어 놓지 못했습니다. 진실로 사탄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의 실체인 예수님을 소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나서는 신자들이 이 땅 위에 드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말씀에 포용되어 있었는데, 거기에서 아무리 해봐도 갈 길은 요원합니다. 오늘날까지 6천 년 동안 역사가 흘러왔는데, 이제부터 여기서 어디로 갈 것인가? 말씀을 밟고 올라서 실체를 붙들어야 합니다. 신약은 대부분 바울의 서신들인데, 그 서신들을 통해서 만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북받쳐 오는 사정을 통해서 만나야 됩니다. 그렇게 하늘과 하나된 존재, 타락 이후 6천 년 역사 속에서 그런 입장에 나아가 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밟고 올라서 예수님을 붙드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아가 “당신이 지니고 있는 하늘의 전권의 능력과 구세주의 자격을 나에게 물려주고 모든 죄의 근본을 청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소서! 그 다음에는 당신과 더불어 영원히 즐길 수 있는 하늘의 사랑을 소개해 주소서” 하면서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만일 예수님을 만나서 그러한 조건을 요구하여 축복을 받고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이 쌍수를 들어 “아, 그대의 소원이 이렇거늘 영원한 행복을 누리라” 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십자가에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땅 위에서 신랑 신부로 하나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당신이 우리 실체를 세우셨으니까 당신의 속 깊이 숨겨진 사랑을 주소서” 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냐! 이곳까지 오느라고 수고했으니까 나를 조건으로 삼아서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라”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사랑만을 받으려고 합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사랑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부의 이념을 찾아가는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실체를 찾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아버지, 당신의 사랑의 전권을 우리에게 축복해 주소서” 할 수 있는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입장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는 진리를 찾아 넘고 실체를 찾아 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나에게 사랑의 축복을 해주소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찾아온 사람에게 하나님이 “나를 찾아 나올 때까지 수많은 사탄, 수억만의 사탄의 시련을 거쳐오느라 대단히 수고했다” 하면서 사탄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한 노정, 하나님을 알게 될 때까지의 노정을 칭찬해 줄 수 있으되 하나님의 심중으로 그리던 이상동산에서 취하여 살 수 있는 사랑의 심정으로는 축복해 주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은 “그것이 네 소원이거든 이제부터 죄악 된 세상으로 나가라” 하는 것입니다. 즉, “너희는 죄악 된 부모의 후손들인고로 복귀의 과정을 거쳐야 되겠다. 그래서 나의 아들딸이 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렀다고 할진대 너희는 잃어버린 참부모를 찾아라” 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면 다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저끄러진 분야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즉, 인간조상이 인류의 참조상이 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 인류가 참부모를 가지지 못했고 참다운 자식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양자로서 하나님을 알고 사탄과 싸워서 승리했다고 할지라도 직계 혈통의 인연을 맺으려면 참부모를 모셔야 됩니다. (5-182)

 

인간들이 속죄의 완성을 바라보고 나온 목표

어떠한 신앙의 용자라도 하나님 앞을 떠나면 허덕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한테 나아가 “그 부모가 땅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땅에 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땅에 없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 여러분이 그 부모를 대신하는 책임을 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네가 한번 부모가 되어 봐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신앙의 용자는 모든 신앙자들을 더듬어 편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참부모를 찾아서 “지금까지 제가 어려운 고비를 넘고 넘어 참부모인 당신 앞에 나왔사오니, 지금까지 걸어오면서 느꼈던 역사적인 모든 슬픔을 위로해 주시고 이제부터 당신의 영원한 복지에서 살 수 있는 전권을 저희에게 인계해 주소서” 하면서 호소해도 그렇게 호소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 부모는 “네 형제를 찾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찾으러 가서 만나면 “네가 아니면 내가 못 되고 내가 아니면 네가 못 되는 형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 있는 형제, 뼈를 연하고 살을 연한 지체 중의 지체로서 너와 내가 나누어질 수 없는 형제를 찾아와야 된다는 명령을 받고 찾아왔으니까 6천 년 역사가 우리로 말미암아 해원된다면 너와 내가 형제로서 그 해원성사의 행복을 누려보자”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형제는 “아, 당신이 찾아온 것은 고맙소! 그러나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오. 또,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소”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은 무슨 길이냐? 그 길은 종족을 찾아와야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의 용자는 또 발길을 옮겨갑니다. 
그래서 한 종족을 만나 가지고 “내가 이러 이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서 그대들을 만났으니까 그대들을 통해서 천적인 소원을 성취해야 되겠소” 하면서 사정해도 그 종족은 “당신을 환영은 할 수 있으나 기쁨의 춤은 출 수 없다”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종족을 깨뜨렸던 사탄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탄으로 인하여 깨어진 종족이 있는 동시에 그 종족과 연결된 민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런 민족이 있는 동시에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 고개를 넘어서 백성을 찾아 가지고 “이제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소원성취를 다 할 수 있는 백성들을 찾았으니까 하늘의 백성들이 될 자들과 즐기자” 하지만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를 넘어 우리의 참부모, 참형제, 참종족, 참백성, 참민족, 참인류가 모여서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려야 됩니다. 이것이 역사의 배후를 움직여 나오신 하나님의 심정에 애달픈 곡절을 쌓이게 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살아 나온 역사의 목표입니다. 
이것과 반대방향으로 엉클어진 것이 죄악의 세상이고, 이 이념을 세우지 못하게 앞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의 역사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필히, 가야 할 인생의 행로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진리의 본체, 하나님을 대신한 실체, 하나님의 심정을 대신한 사랑의 실체, 인류의 참부모, 참아버지의 실체로 왔습니다. 예수님이 참아버지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참형제들입니다. 예수님도 너희를 종이라고 하지 않고 끝날에는 자녀라고 부르겠다고 했습니다. 자녀라는 것입니다. 
부모이신 예수님을 중심삼고 형제로 출발하여 종족을 만들자는 것이었는데, 그 기반이 70문도와 120문도였습니다. 그 무리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교단을 움직이고 민족을 움직이고자 했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제1이스라엘은 깨져나가고 제2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이래서 기독교는 오늘날까지 예수님를 중심삼은 세계의 민족을 형성해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끝날에 당도한 오늘날의 인류는 역사적인 비운의 고개를 넘어가는 데 있어서 승리하지 않으면 14만4천의 무리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묵시록 14장에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인(印)을 맞았어요? 먼저 예수님의 인을 맞아야 하고, 그 다음에 아버지의 인을 맞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인만을 맞으면 다 될 줄 알아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을 맞고 아버지의 인을 맞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이 속죄의 완성을 바라보고 나온 목표입니다. (5-184)

 

인간이 가야 할 목적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선한 사람의 목표는 먼저 하나님의 인을 받고 내가 형제에게 인을 쳐 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종족과 민족에게 인을 쳐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하늘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슬픔에 대한 말씀은 꿈에서도 알지 못했던 것이요, 어떠한 친구나 스승 혹은 교역자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진실로 심각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서 있는 발걸음이 내일은 어디로 향하여 갈 것인가?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부모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형제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종족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참민족의 사랑권 내에 있어요, 하나님이 품어주실 수 있는 사랑권 내에 있어요? 그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 일을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직 낙원에서 보류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끝날에 다시 와서 필히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이 일을 회복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밟고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돌아간 후 부활하신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려고 할 때 배척했고, “신부여, 나와 더불어 아버지 앞에 갑시다” 할 수 있는 자리를 거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천 년 동안 신부를 찾을 수 있을 그 날을 바라보면서 수고해 나왔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환희라는 신부와 더불어 아버지 앞에 나아가 축복을 받고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참다운 자식을 품고 참다운 종족과 참다운 민족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천지에 참다운 조상이 되라고 축복하시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의 참조상의 입장에서 축복을 받지 못하고 갔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슬픔이요, 예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이제 그러한 비장한 심정의 사무침이 여러분 마음에 동해야 되겠습니다. 하늘의 말씀을 배반한 나요, 하늘의 실체를 배반한 나요, 하나님을 배반한 나요, 하늘의 형제와 종족과 민족 그리고 백성을 배반한 나요, 더 나아가서는 하늘의 주권을 유린한 나를 어찌 하늘이 용서해 주시겠어요? 그러니까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알고 자기의 몸 둘 곳을 몰라서 몸부림치는 청년 남녀들이 많이 나오기를 하늘은 바라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알게 될 때 우리의 심정은 불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이 통하고 마음이 움직이며 역사를 대하여 원망하고 싶고 시대를 대하여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복받쳐 오를 것입니다. 이 분한 마음이 강할수록 어디에 가서 해원할 것이냐 하는 생각이 날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애는 사탄 때문이었으니, 사탄과 더불어 일대 격전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각오를 가진 청년 남녀들이 많아야만 부모를 회복할 수 있고, 형제를 회복할 수 있고, 종족과 민족과 국가 그리고 하늘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태평세월을 보냈습니다. 감각 없는 무골충으로서 존재의식은 가졌으나 존재의 가치를 갖지 못하며 서글픈 행로를 걸어왔습니다. 그래도 잘났다고 뻔뻔스럽게 나서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와 같은 죄악의 종족이라는 것을 이 시간만이라도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이것조차 모르고 있는 인간들은 하늘의 천벌을 받아 마땅하고 심판날에 유황불 구덩이에 던져지는 심판의 제물이 되어 마땅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내가 심판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은 나보다 더 슬픈 사정에 처해 있음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선조들이 간 걸음이 나보다도 슬픈 사정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고, 오늘날 이 시대에 뜻을 품고 나선 참다운 사람들이 오늘 내가 느끼는 슬픔과 고통 이상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라도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살아서 못 가면 죽어서라도 영원을 걸어놓고 가야 합니다. 이런 운명의 고개, 이런 비참한 곡절의 사연은 원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이 곡절을 일으킨 주인공인 사탄과 격전하기 위한 하늘의 정병과 용자로서 하늘땅을 대하여 호령하며 나설 수 있는 청년 남녀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려나갈 수 있는 하늘의 심정을 가지고 울부짖는 무리가 그립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심정을 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부모의 피를 받은 자녀들이 되어서 그 피와 연결된 민족과 백성을 이루어야 되겠습니다. 그 부모와 하나되어 그 부모의 기쁨이 전체의 기쁨이요, 전체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민이 하나님을 모셔놓고 송영을 돌리고 경배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타락한 인간이 가야 할 목적지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5-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