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적인 인간의 소원 (천일국 훈독경 제6권 9일) u

훈독왕 | 20200612074202

천일국 훈독경 제6권 9일



본성적인 인간의 소원(훈독본)

 

날짜 : 1971. 10. 3()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물론이고,역사과정을 놓고 보나 시대적인 현실을 두고 보나 미래를 두고 보더라도 사람이면 누구든지 더 높은 것을 바라 나왔고 지금도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전체가 인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개체를 중심삼고 최후의 기준, 절대적인 기준까지 연결시키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 요구하는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좋은 것이 있게 때는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체에 마음이 있는데마음은 깊다면 말할 수 없이 깊은 것입니다. , 마음이 넓다면 한량없이 넓은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한한 범위를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을 있는 마음의 세계를 더듬어 보면 마음세계의 중심이 있을 것입니다.마음세계의 중심이 있으면 그 상대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높은 곳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와 더불어 관계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개체인 것을 두고 볼 때, 본성의 세계에 지고지대(至高至大)하신 어떠한 분이 계신다고 하면 자기가 그 분과도 관계를 맺고 싶어할 것은 두말할 바 없습니다.

 

마음세계의 처음에서부터 몸을 통한 상대적인 세계의 끝까지,근본의 출발점에서부터 목적지인 종착점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나를 빼놓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것이요,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 할 노정, 우리 원리가 지시하는 노정에는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의 노정까지 있습니다. 그렇다고 천주복귀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자 앞에 상대적인 절대권을 갖추어 가지고 통일성을 기할 수 있는 자리까지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때,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은 지금까지 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사상이 제시한 이상의 기준이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될 때, 하나의 원이 그려지기 전에 중심이 있어야 되고 평면이 그려지기 전에 하나의 선이 그어져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놓고 보면 출발된 기원의 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종착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 종착점이 또 한 점이라면 그 두 점을 이을 수 있는 선이 있어야 됩니다. 그 선이 곡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먼저는 직선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모든 존재의 출발이 하늘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할진대 그 직선을 그냥 그대로 그을 수 있다면 하늘의 슬픔이니 탄식이니 혹은 고통이니 하는 명사가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라는 하나의 테두리가 생겨나서 하늘을 추앙하는 놀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기원에서부터 결과까지 직선을 자유롭게 그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더라면, 오늘날 하나님도 걱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그 직선을 따라서 가게 되어 있지 일체의 어떠한 존재라도 그 직선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한 기준이 세워져 있다면 어느 누구든지, 어떠한 존재든지 자동적으로 소망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이요, 이상의 자리에 처해 있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미래의 소망의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한 사실을 보게 될 때 이 직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직선은 누구로 말미암아 그어질 것이냐? 직선이 그어지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소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이 원리를 배워서 아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영적인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육적인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입니다. 영적.육적 세계가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총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말합니다. 소우주라고 해서 단순히 작은 우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서 소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을 긋되 어디를 통하여 그어야 되느냐? 반드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그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49-18)

 

종합적인 하나의 기원을 확정지어야 자리

 

오늘날 세계의 모든 존재물들을 보면 반드시 원형(圓形)을 닮아 있습니다. 지구도 그러하지만 우주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 전체가 평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도는 작용의 인연을 갖고 움직이니 만큼 자동적으로 원형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야 됩니다. 그렇게 돌기 위해서는 출발과 목적점을 이을 수 있는 과정적인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원형을 절반으로 가르면 쪽은 영계가 되는 것이요, 다른 한 쪽은 육체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보더라도 각각이 별개의 방향을 갖추고 있습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각기 다른 방향을 갖추고 있습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중심과 간격을 넓혀 놓은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간격이 넓은 사람입니다. 그 간격이 멀어질수록 악해집니다. 그렇게 중심점으로부터의 이탈범위를 확대시키는 작용이 악의 작용입니다.

 

악의 작용과 반대로 중심점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작용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선의 작용입니다. 악은 무한히 분립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요, 선은 무한히 통일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선이라면 절대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통일은 영원해야 됩니다. 만일 절대적인 악이 있다면, 그 악은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 개인이 분열되어 가지고 세계 끝까지 나누어집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으로서 살면서 영원히 통일의 가망성을 보지 못하는 가정은 악한 가정입니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민성이라든가 애국애족의 사상 등을 통해서 볼 때 하나될 수 없는 국민이라면,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종합적인 하나의 기원을 확정지어야 할 자리는 인간 세상을 두고 보나 우주를 중심삼고 보나 하나님도 아니요, 어떠한 목적에 있는 것도 아닌 우리 인간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기원되어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을 통하고, 외적인 세계가 기원되어 있는 모든 것은 내 몸을 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엇갈리면 안됩니다. 직선상에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갈라진 인간을 반대로 접근시키는 놀음을 해 나오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49-20)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

 

어떤 동기를 갖고 과정을 거쳐서 목적을 찾아나가는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을 접근시키고 단축시킬 수 있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야만 됩니다. 그런 매개의 자리를 확정짓는 사명을 해야 할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을 확정짓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운은 그 사람을 통해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희망을 걸더라도 희망의 한 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실존철학을 중심삼고 때도 이러한 현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기에서는 가치를 찾겠다고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가치적인 기원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거(論據)를 세워야 되는데 “그 가치의 기원이 누구냐? 사람이냐, 국가냐” 하는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게 될 때, 그 기원이 모호합니다. 거기에는 확정적인 가치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상으로 귀결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금후의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문제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인간은 본래의 중심의 자리에 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자각해야 됩니다. 인간 자체가 스스로 어떠한 중심적인 자리를 결정할 없고, 출발의 기원도 되지 못하고 목적의 결과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적인 내연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는 그 자리를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문제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체를 볼 때, 나라는 자체는 결과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통해서 나온 결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만히 나라는 결과를 따져 보면, 나라는 존재는 옛날의 한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쳐서 지금의 세계까지 찾아 나왔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거쳐서 오늘의 나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기 위해서 스스로의 결의를 다짐할 있는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나라는 것을 생각할 절망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세계인의 고민사(苦悶事)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중간 매개체의 자리입니다. 중간 매개체는 동기와 더불어 일치하고 결과와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49-22)

 

지금까지의 종교의 폐단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오늘날 이러한 인생의 길을 해결짓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을 동기의 자리라든가 목적의 자리로 끌고 가는 일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종교를 통해서 섭리해 나오셨는데, 그 종교를 통해서 마음과 더불어 사는 생활을 강조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마음과 더불어 사는 생활을 강조하신 반면에 세상과 더불어 생활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끝날 이후의 세계, 이 세상을 넘어선 세계의 생활을 강조해 나오신 것입니다.

 

본성의 세계에서의 개인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본성의 세계에 있어서 내 가정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본성적인 세계의 국가관이나 세계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했는데, 그 마음속에 있다는 천국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도 지금까지 확정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천국이 외적인 세계의 천국으로 연결될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성서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와서 기독교가 갈 길을 못 가리는 것은 기독교가 그런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결론적인 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본성의 세계에 있어서 마음의 천국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천국의 본질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으로 오게 될 본성의 세계, 천국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있는 중심이 누구냐? 그 작용은 먼저 개인에게 미쳐야 됩니다. 특정한 민족에게 미치기 전에 특정한 개인에게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섭리를 해 나오신다고 하더라도, 그 섭리가 아무리 크고 넓고 긴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개인을 통해서 접근해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은 어떠한 개인이냐? 하나님을 절대시하는 개인입니다. 동기를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통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 개인이 사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을 통해 가지고 사방이 벌어집니다. 그 중심이 결정되기 전에 사방에 금을 그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금을 그었다가는 화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의 폐단이 그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남아진 종교의 폐단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 중심의 자리에 오기 전에 그런 놀음을 한 것입니다. 사방에 금을 그어 놓았습니다. 거기서 세계적인 틀거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왔을 때가 그 완전한 개인과 접선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때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개인과 하나님이 접선하실 있었던 세계적인 중앙지였던 동시에 국가적인 중앙지, 종족적인 중앙지, 가정적인 중앙지, 개인적인 중앙지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모든 일체의 중심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한 점을 중심삼고 결정지으려고 섭리해 나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나라와 유대교가 국권과 교권을 중심삼고 거기에 하나되지 못하도록 일체를 제거시켜 버리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간 것입니다. (49-24)

 

오시는 주님을 어떠한 분이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과연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세계 가운데 하나의 중심적인 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점을 결정지어 놓으셨느냐 하면 그것을 결정짓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인가는 그것을 결정지으실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반드시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 날을 남겨 놓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다시 주님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재림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다시 와야 된다는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이라는 것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중앙점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중앙점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기필코 설정하셔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끝날이 와야 됩니다. 그 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그 하나의 기준을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를 동원해 나오셨는데, 그 동원된 역사가 끝나는 날입니다. 그 한 날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중심이 잡히게 됩니다. 그 중심은 개인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가정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종족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국가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세계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하늘땅의 중심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그 한 분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찾기 위해서 나라도 부정하고, 자기의 생애도 부정하고, 자기의 가정도 부정합니다. 자기의 자식이고 뭐고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독교가 강조하고 주장해 나온 주의입니다. 점을 찾아 가지고는 나라도 잃어버리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숱한 희생을 치러 왔고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그 제단을 이어왔는데, 지금까지 기독교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주도적인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느냐? 믿고 천당 가는 데 있었습니다. , 믿고 천당 가는 것도 가는 것이지만 주님이 오실 그 날을 맞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양면적인 소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하나는 천국 가는 것, 또 하나는 끝날에 주님을 맞이한다는 두 가지의 소원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천국이라는 것은 본성의 세계를 말합니다. 끝날에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 가지고 천국 가자는 것입니다. 무슨 천국이냐? 영계의 천국이 아닙니다. 지상의 천국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천국과 영원한 천국을 우리는 그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이념입니다. 하나의 남성을 표준해 가지고 교리화시켜서 사모해 나온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부의 종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여기에 귀결됩니다. 이 하나의 중심핵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는 것이요, 이 하나의 중심핵이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요, 이 하나가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가치의 기준을 비로소 지상에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한 기점을 삼으실 수 있고, 그 중심적인 기준으로 인간을 표준화시킬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천지가 통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바라고 있는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분이냐? 이런 세계적인 사명을 대표적으로 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개인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갖출 수 있는 것이요, 가정적인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종족의 표준과 민족의 표준 그리고 국가의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49-27)

 

세계를 주고도 바꿀 없는

 

사람은 일대(一代)에 있어서 전체를 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지금까지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사람들이 전부 다 그러한 소원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60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60억이 전부 다 그러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할 때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한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도 인간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까지든지 남아질 것이어늘, 그 욕망이 한 번도 성사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욕망이 이루어질 때가 한 번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어떤 때냐? 이 지상의 천국과 천상의 천국이 갈라져 가지고 나타나는 때가 아니라 인간 자체 내에서 화()하는 천국으로 나타나게 될 때입니다.

 

그렇게 화하는 천국권 내에 사는 개인은 개인이로되 세계를 대표할 있는 개인이 됩니다. 그는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만 서 있으면 높은 자리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돌아가는 하나의 원형과 마찬가지입니다. 낮다고 낮은 것이 아닙니다. 낮은 것은 높은 것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낮으면 낮을수록 그 상대되는 것은 높은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자체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했다고 비로소 공동적인 관계성을 가질 있습니다. 그 관계성을 갖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협조적이고 통일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결속되는 데서만이 나 자체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면 홀로 있지만 홀로의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가 가해지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전체로 보게 되면 이중적인 가치를 겸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됩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행복은 자기 개인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중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가치를 찾은 기준이 아직까지 인간세상에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시대로부터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중간적인 입장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우리 통일원리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이 있어야 됩니다. 본성의 인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주장하는 재림사상은 무엇이냐? 그것은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인간은 본성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운명을 피할 없었던 역사시대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신음의 도를 가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개인적으로 신음하던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그 범위가 넓어져 가지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신음하는 단계까지 도달했습니다. 여기에서 신음의 도를 탈피하여 본래의 개인의 가치를 이 세계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자리로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나오셨지만, 그 섭리역사의 노정에서 한 사람만 승리하는 날에는 그 한 사람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고로 수고하셨던 모든 수고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수고를 하셨으면 하셨을수록 그 가치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가치가 드러나 그 가치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들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그 아들은 어떤 국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가 그 아들을 위해서 있고 세계가 그 아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 아들이 국가와 세계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로 볼 때, 그 아들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은 중심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49-29)*

 


천일국 훈독경 제6권 9일, 원문




본성적인 인간의 소원 


날짜 : 1971. 10. 3()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물론이고, 그 가운데 하나인 우리 자신도 현재의 자리에서 희망을 가지고 그 무엇인가 보다 높은 것을 더듬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역사과정을 놓고 보나 시대적인 현실을 두고 보나 미래를 두고 보더라도 높고 낮음의 계층을 초월하여 사람이면 누구든지 더 높은 것을 바라 나왔고 지금도 바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전체가 인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는 개체를 중심삼고 최후의 기준, 절대적인 기준까지 연결시키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이 요구하는 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무엇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좋은 것이 있게 때는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또 그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개체에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깊으냐고 묻는다면 그 누구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마음은 깊다면 말할 수 없이 깊은 것입니다. , 마음이 넓다면 한량없이 넓은 것을 우리는 느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무한한 범위를 차지하고도 남음이 있을 있는 마음의 세계를 더듬어 보면 마음세계의 중심이 있을 것입니다. 마음세계의 중심이 있으면 그 깊은 중심 혹은 높은 중심을 그냥 그대로 나와 상관없이 남겨 두고 싶으냐 할 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상대적인 세계를 중심삼고 높은 곳이 있으면 그것을 자기와 더불어 관계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개체인 것을 두고 볼 때, 본성의 세계에 지고지대(至高至大)하신 어떠한 분이 계신다고 하면 자기가 그 분과도 관계를 맺고 싶어할 것은 두말할 바 없습니다.

마음세계의 처음에서부터 몸을 통한 상대적인 세계의 끝까지, 근본의 출발점에서부터 목적지인 종착점까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나를 빼놓고는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나를 중심삼고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것이요,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 현재 여러분이 처해 있는 자리는 어떠한 자리이겠느냐? 우리 본성의 어떠한 중심이 있어 가지고 그 무한한 가치의 중심을 기점으로 생각해 볼 때 현재에 도달한 나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멀 것이냐?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 할 노정, 우리 원리가 지시하는 노정에는 개인복귀, 가정복귀, 종족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 천주복귀의 노정까지 있습니다. 그렇다고 천주복귀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삼고 절대자 앞에 상대적인 절대권을 갖추어 가지고 통일성을 기할 수 있는 자리까지 우리는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 통일원리가 제시하는 소망의 기준은 지금까지 역사상에 있었던 모든 사상이 제시한 이상의 기준이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될 때, 하나의 원이 그려지기 전에 중심이 있어야 되고 평면이 그려지기 전에 하나의 선이 그어져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놓고 보면 출발된 기원의 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가 바라는 소망의 종착점도 있을 것입니다. 그 종착점이 또 한 점이라면 그 두 점을 이을 수 있는 선이 있어야 됩니다. 그 선이 곡선이 되어야 하느냐, 직선이 되어야 하느냐? 그것이 곡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먼저는 직선이 되어야 합니다. 직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렇게 직선을 긋는 있어서는 그냥 그을 있느냐? 만일에 모든 존재의 출발이 하늘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할진대 그 직선을 그냥 그대로 그을 수 있다면 하늘의 슬픔이니 탄식이니 혹은 고통이니 하는 명사가 역사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교라는 하나의 테두리가 생겨나서 하늘을 추앙하는 놀음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기원에서부터 결과까지 직선을 자유롭게 그을 수 있는 기준이 되었더라면, 오늘날 하나님도 걱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그 직선을 따라서 가게 되어 있지 일체의 어떠한 존재라도 그 직선을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러한 기준이 세워져 있다면 어느 누구든지, 어떠한 존재든지 자동적으로 소망의 자리에 처해 있는 것이요, 이상의 자리에 처해 있음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미래의 소망의 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로되 그렇지 못한 사실을 보게 될 때 이 직선이 그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직선은 누구로 말미암아 그어질 것이냐? 직선이 그어지기 위해서는 원인과 결과의 소성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여러분이 원리를 배워서 아는 것처럼 우리 인간은 영적인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이요, 육적인 세계를 총합한 실체상입니다. 영적·육적 세계가 하나의 사람을 중심삼고 총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말합니다. 소우주라고 해서 단순히 작은 우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을 대신할 수 있는 입장에서 소우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선을 긋되 어디를 통하여 그어야 되느냐? 반드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그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만약에 원형에다 직선을 긋는다면 중앙을 통해서 긋습니다. 이 중앙선을 긋기 전까지는 천갈래 만갈래의 선들이 그어 질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선을 그을 때 잘못된 선을 긋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최고의 선을 그어야 됩니다. 최고의 선이 어디냐? 그 최고의 선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중앙점을 통해야만 최고의 선이 그어집니다. (49-18)

 

종합적인 하나의 기원을 확정지어야 자리

 

오늘날 세계의 모든 존재물들을 보면 반드시 원형(圓形)을 닮아 있습니다. 지구도 그러하지만 우주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주 전체가 평면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주가 도는 작용의 인연을 갖고 움직이니 만큼 자동적으로 원형을 갖추어야 된다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계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돌아야 됩니다. 그렇게 돌기 위해서는 출발과 목적점을 이을 수 있는 과정적인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존재는 어떤 존재냐 하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요, 전체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어떤 자리냐? 그 한 점에 나와야 할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원형을 절반으로 가르면 쪽은 영계가 되는 것이요, 다른 한 쪽은 육체가 됩니다. 이걸 절반으로 가르면 상하가 되고 좌우가 되는데 전후, 좌우, 상하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서로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좌와 우, 상과 하, 전과 후가 모두 다 같다는 일체의 평등기원을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어디냐 하면 중앙점입니다. 전부 다 같은 것입니다. 이 자리를 통해 가지고야 전체의 통일성을 기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높은 것은 높은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낮은 것을 돕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낮은 것도 낮은 것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것을 위해서 있습니다. 오른쪽도 오른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왼쪽을 돕기 위해서 있는 것이요, 왼쪽도 왼쪽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때문에 있습니다. 전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체를 위하는 것보다도 존재원칙을 두고 볼 때 상대를 위하는 자리를 결정지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자리가 어떠한 자리냐? 그것을 영원히 정()이라고 판정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중심자리요, 그 한계선은 중심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보더라도 각각이 별개의 방향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각기 다릅니다.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각기 다른 방향을 갖추고 있습니다. 타락이 무엇이냐? 중심과 간격을 넓혀 놓은 것입니다. 악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그 간격이 넓은 사람입니다. 그 간격이 멀어질수록 악해집니다. 그렇게 중심점으로부터의 이탈범위를 확대시키는 작용이 악의 작용입니다.

악의 작용과 반대로 중심점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작용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선의 작용입니다. 악은 무한히 분립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요, 선은 무한히 통일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선이라면 절대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데, 그 통일은 영원해야 됩니다. 만일 절대적인 악이 있다면, 그 악은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 개인이 분열되어 가지고 세계 끝까지 나누어집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으로서 살면서 영원히 통일의 가망성을 보지 못하는 가정은 악한 가정입니다. 나아가 한 나라의 국민성이라든가 애국애족의 사상 등을 통해서 볼 때 하나될 수 없는 국민이라면, 그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종합적인 하나의 기원을 확정지어야 할 자리는 인간 세상을 두고 보나 우주를 중심삼고 보나 하나님도 아니요, 어떠한 목적에 있는 것도 아닌 우리 인간 자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이 기원되어 있는 모든 것은 마음을 통하고, 외적인 세계가 기원되어 있는 모든 것은 내 몸을 통해야 합니다. 이것이 엇갈리면 안됩니다. 직선상에 있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갈라진 인간을 반대로 접근시키는 놀음을 해 나오는 것이 도의 길입니다. (49-20)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

 

불교에서 참선하는 사람들이 마음이 무엇인가를 놓고 생각하는데, 도대체 마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무엇이든지 있다는 것은 상대관념을 가져야만 느낄 수 있습니다. 혼자서는 느끼지 못합니다. 상대적인 관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기의 존재가치도 강해집니다. 반면에, 상대적인 관념이 희박해지면 희박해질수록 자기의 존재가치도 희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식을 가진 부모가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무엇보다도 부모와 자식간에 하나될 있는 내적인 인연, 즉 상대적인 관계가 공고할 때입니다. 그것이 사방으로 커지면 커질수록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보람을 느낍니다. , 입체적인 형태를 갖추면 갖출수록 더 불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보람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그런 여건이 희미해지게 될 때는 고독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의 현세는 어떠한 때냐? 모든 것을 망각해 버리는 시대권 내로 들어가는 때입니다. 세계가 어디 있느냐, 나라가 어디 있느냐, 가정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부정하고 있습니다. , 자기 개인도 확실하지 않은 근거에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권 내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출발점뿐만 아니라 목적점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떠한 기원에 인연되어 연결된 것이 아니요, 어떠한 목적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에 인연되어 연결된 것이 아니라 둥둥 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 있기 때문에 “나라가 뭐야, 세계가 뭐야, 박애주의가 다 뭐야” 하면서 전부 다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하나님도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중심삼고는 어떠한 힘을 작용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용하면 할수록 마이너스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손해를 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손해보는 놀음은 안 하십니다. 천륜도 손해보는 놀음은 절대로 안 합니다.

어떤 동기를 갖고 과정을 거쳐서 목적을 찾아나가는 천운이 있다면, 그 천운은 반드시 그 동기와 목적을 접근시키고 단축시킬 수 있는 어떤 매개체를 통해야만 됩니다. 그런 매개의 자리를 확정짓는 사명을 해야 할 우리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을 확정짓지 못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천운은 그 사람을 통해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희망을 걸더라도 희망의 한 때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실존철학을 중심삼고 때도 이러한 현재의 세계에서 어떻게 인간의 가치를 추구해 것이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기에서는 가치를 찾겠다고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 가치적인 기원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거(論據)를 세워야 되는데 “그 가치의 기원이 누구냐? 사람이냐, 국가냐” 하는 문제를 따지고 들어가게 될 때, 그 기원이 모호합니다. 거기에는 확정적인 가치의 기준을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상으로 귀결되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금후의 이 세계는 어디로 갈 것이냐? 문제가 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소외를 부르짖고 있는 누가 인간을 소외시켰느냐, 아니면 인간 자신이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그것도 확정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외를 당했느냐, 나 스스로 소외되도록 만들었느냐 하는 그것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해결방안이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인간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인간은 본래의 중심의 자리에 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자각해야 됩니다.

인간 자체가 스스로 어떠한 중심적인 자리를 결정할 없다는 것입니다. 출발의 기원도 되지 못하고 목적의 결과도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정적인 내연을 통하여 연결시켜 주는 그 자리를 어떻게 자각하느냐 하는 문제가 인간에게 있어서 보다 큰 문제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체를 볼 때, 나라는 자체는 결과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디를 통해서 나온 결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만히 나라는 결과를 따져 보면, 나라는 존재는 옛날의 한 개인으로부터 종족을 거치고 국가를 거쳐서 지금의 세계까지 찾아 나왔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거쳐서 오늘의 나를 남겨 놓았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나라는 존재가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이상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수난길과 투쟁길을 넘어야 될 것이냐?

그런데 그것을 넘기 위해서 스스로의 결의를 다짐할 있는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나라는 것을 생각할 절망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을 없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세계인의 고민사(苦悶事)인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자리는 어떤 자리이냐? 이 자리는 기원도 아니요, 결과도 아닌 중간 매개체의 자리입니다. 중간 매개체는 동기와 더불어 일치하고 결과와 더불어 일치할 수 있는 그런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자체의 위치를 결정지을 수 없습니다. (49-22)

 

지금까지의 종교의 폐단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오늘날 이러한 인생의 길을 해결짓기 위해서 우리 인간들을 동기의 자리라든가 목적의 자리로 끌고 가는 일을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까지 종교를 통해서 섭리해 나오셨는데, 그 종교를 통해서 마음과 더불어 사는 생활을 강조해 나오셨습니다. 그렇게 마음과 더불어 사는 생활을 강조하신 반면에 세상과 더불어 생활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끝날 이후의 세계, 이 세상을 넘어선 세계의 생활을 강조해 나오신 것입니다.

기독교를 보더라도 현실의 세계를 중심삼고 살라고 가르쳐 주는 도리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라고 가르쳐 준 그런 무엇은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마음세계의 평화를 부르짖고 나옵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이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다. 마음세계에 천국이 있고, 또한 천국은 끝날에 이루어지는 것이다”고 가르치며 나오고 있습니다.  

끝날의 천국이라는 것은 세상과 상관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역사과정을 거쳐가는 인간들이 필요로 하고 중요시하는 것이나 역사과정의 내용을 가르치는 도리가 아닙니다. 본래 종교라는 것은 그래야 됩니다. 만일 과정의 도리를 가르치고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는 사교(邪敎)입니다. 마음의 세계를 다짐하고 본성의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본성의 세계에서의 개인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 이게 문제입니다. 본성의 세계에 있어서 내 가정의 가치가 어떤 것이냐? 그걸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본성적인 세계의 국가관이나 세계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은 네 마음속에 있다”고 했는데, 그 마음속에 있다는 천국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냐에 대해서는 기독교에서도 지금까지 확정짓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천국이 외적인 세계의 천국으로 연결될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 성서에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날에 와서 기독교가 갈 길을 못 가리는 것은 기독교가 그런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피한 결론적인 위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본성의 세계에 있어서 마음의 천국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천국의 본질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앞으로 오게 될 본성의 세계, 천국이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이냐? 이것이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있는 중심이 누구냐? 물론, 사람을 통해야 되겠지만 그 사람은 기원도 아니고 전체적인 목적의 결과도 아니기 때문에 기원이 될 수 있는 것과 완전히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 작용은 어디에 미쳐야 되느냐? 나라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개인에게 미쳐야 됩니다. 특정한 민족에게 미치기 전에 특정한 개인에게 미쳐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섭리를 해 나오신다고 하더라도, 그 섭리가 아무리 크고 넓고 긴 역사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개인을 통해서 접근해 나가는 것입니다.

개인은 어떠한 개인이냐? 하늘을 위하는 개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절대시하는 개인입니다. 동기를 자기의 생명보다 더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개인을 통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이 확정되면 그 개인을 통하여 갑니다. 그 개인이 사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을 통해 가지고 사방이 벌어집니다. 그 중심이 결정되기 전에 사방에 금을 그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금을 그었다가는 화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종교의 폐단이 그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과정에 남아진 종교의 폐단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이 중심의 자리에 오기 전에 그런 놀음을 한 것입니다. 사방에 금을 그어 놓았습니다. 거기서 세계적인 틀거리를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왔을 때가 그 완전한 개인과 접선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때였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개인과 하나님이 접선하실 있었던 세계적인 중앙지였던 동시에 국가적인 중앙지, 종족적인 중앙지, 가정적인 중앙지, 개인적인 중앙지였습니다. 바로 그 자리가 모든 일체의 중심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한 점을 중심삼고 결정지으려고 섭리해 나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나라와 유대교가 국권과 교권을 중심삼고 거기에 하나되지 못하도록 일체를 제거시켜 버리는 입장에 섰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간 것입니다. (49-24)

 

오시는 주님을 어떠한 분이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한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미루어 보게 될 때, 과연 하나님은 오늘날 인간세계 가운데 하나의 중심적인 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점을 결정지어 놓으셨느냐 하면 그것을 결정짓지 못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인가는 그것을 결정지으실 수 있는 한 날이 와야 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반드시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한 날을 남겨 놓으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로 말하면 재림사상입니다. 다시 주님이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재림사상을 가지고 있는데 다시 와야 된다는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이라는 것은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 중앙점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중앙점이 설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기필코 설정하셔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끝날이 와야 됩니다. 그 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그 하나의 기준을 결정짓기 위해서 지금까지 역사를 동원해 나오셨는데, 그 동원된 역사가 끝나는 날입니다. 그 한 날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중심이 잡히게 됩니다. 그 중심은 개인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가정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종족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국가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세계의 중심도 되는 것이요, 하늘땅의 중심도 되는 것입니다.

중심이 잡혀야 됩니다. 그 중심이 잡히지 않고는 인간세상에서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리의 중심이 어떻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이상세계의 출현을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소원이 어디에 있느냐? 그 한 분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 한 분을 찾기 위해서 나라도 부정하고, 자기의 생애도 부정하고, 자기의 가정도 부정합니다. 자기의 자식이고 뭐고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기독교가 강조하고 주장해 나온 주의입니다.

점을 찾아 가지고는 나라도 잃어버리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시하는 까닭은 그것이 전체의 내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가르쳐 주셔야 됩니다. 만일 그러한 결정적인 기원의 내용이 아닌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면 하나님은 사기를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방향이나, 개인의 신앙의 방향이나, 민족의 모든 소원의 방향까지 전부 다 그 점에 접근시키려고 지도해 나오셨습니다. 여기에 접선되는 길은 남아지는 것이요, 여기에 가까이 처할 수 있는 어떠한 단체나 국가는 남아지는 것이요, 여기에서 먼 것은 악한 것이니까 전부 다 제거해야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역사적인 방향이 어떻게 흘러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봅시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역사노정에서 숱한 희생을 치러 왔고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대가로 그 제단을 이어왔는데, 지금까지 기독교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주도적인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느냐? 믿고 천당 가는 데 있었습니다. , 믿고 천당 가는 것도 가는 것이지만 주님이 오실 그 날을 맞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양면적인 소망을 가지고 지금까지 나왔습니다. 하나는 천국 가는 것, 또 하나는 끝날에 주님을 맞이한다는 두 가지의 소원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천국이라는 것은 본성의 세계를 말합니다. 끝날에 주님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은 주님을 만나 가지고 천국 가자는 것입니다. 무슨 천국이냐? 영계의 천국이 아닙니다. 지상의 천국을 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상천국과 영원한 천국을 우리는 그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이념입니다. 하나의 남성을 표준해 가지고 교리화시켜서 사모해 나온 대표적인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신부의 종교라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여기에 귀결됩니다. 이 하나의 중심핵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국가가 존재할 수 있는 기준이 설정되는 것이요, 이 하나의 중심핵이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세계의 기준이 결정되는 것이요, 이 하나가 결정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가치의 기준을 비로소 지상에 세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한 기점을 삼으실 수 있고, 그 중심적인 기준으로 인간을 표준화시킬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천지가 통일을 볼 수 있습니다.

통일된 자리에서 바라는 인생관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인생관과 통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라는 가정관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가정관과 통하고, 거기에서 바라는 국가관과 세계관은 하나님이 바라시는 국가관과 세계관과 통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상충이 아니라 통일된 자리에서 출발을 볼 수 있는 그 거점지가 바로 그 중심입니다. 그 자리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바라고 있는 오시는 주님은 어떠한 분이냐? 이런 세계적인 사명을 대표적으로 지고 오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개인적으로 완성될 수 있는 하나의 표준을 갖출 수 있는 것이요, 가정적인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이요, 종족의 표준과 민족의 표준 그리고 국가의 표준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49-27)

 

세계를 주고도 바꿀 없는

 

사람은 일대(一代)에 있어서 전체를 다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20대의 청소년들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 할 것입니다. 열 살만 넘으면 벌써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도 “너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래” 하고 물으면, “대통령 되지요”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대통령” 하면, “세계 대통령” 합니다. 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생각할 줄 아는 때부터 일생을 마치고 죽을 때까지 바라는 소원입니다. 그것은 개개인이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지만, 그 사람들이 전부 다 그러한 소원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60억 인류가 살고 있지만 60억이 전부 다 그러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소원이 무엇이냐고 할 때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겠다고 한다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소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성취하지 못하고 간다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도 인간의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욕망은 언제까지든지 남아질 것이어늘, 그 욕망이 한 번도 성사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절대자가 있다면, 인간이 그렇게 바라는 욕망이 이루어질 때가 한 번은 올 것입니다. 그 때가 어떤 때냐? 이 지상의 천국과 천상의 천국이 갈라져 가지고 나타나는 때가 아니라 인간 자체 내에서 화()하는 천국으로 나타나게 될 때입니다.

그렇게 화하는 천국권 내에 사는 개인은 개인이로되 세계를 대표할 있는 개인이 됩니다. 그는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낮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만 서 있으면 높은 자리로 올라갑니다. 이것은 돌아가는 하나의 원형과 마찬가지입니다. 낮다고 낮은 것이 아닙니다. 낮은 것은 높은 것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낮으면 낮을수록 그 상대되는 것은 높은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자체를 위하지 않고 상대를 위했다고 비로소 공동적인 관계성을 가질 있습니다. 그 관계성을 갖고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협조적이고 통일적인 내용을 중심삼고 결속되는 데서만이 나 자체의 가치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면 홀로 있지만 홀로의 가치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가 가해지는 자리에 서기 때문에 전체로 보게 되면 이중적인 가치를 겸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됩니다. 거기에서 느끼는 행복은 자기 개인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중적인 세계를 대표하는 행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가치를 찾은 기준이 아직까지 인간세상에서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시대로부터 섭리하시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중간적인 입장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우리 통일원리에서 가르쳐 주고 있듯이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이 있어야 됩니다. 본성의 인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주장하는 재림사상은 무엇이냐? 그게 다 뭐냐? 그것은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고자 하는 소원을 이루는 데 불가피한 것입니다. 인간이 본성의 인간을 추구하는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타락입니다. 타락이 없었다면 인간은 본성의 인간으로 출발했을 것인데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본성의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추구해야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복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다시 회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운명을 피할 없었던 역사시대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신음의 도를 가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개인적으로 신음하던 것으로 끝났지만 이제는 그 범위가 넓어져 가지고 가정, 종족, 민족, 국가, 세계가 신음하는 단계까지 도달했습니다. 여기에서 신음의 도를 탈피하여 본래의 개인의 가치를 이 세계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자리로 찾아 들어가야 됩니다.

역사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 나오셨지만, 그 섭리역사의 노정에서 한 사람만 승리하는 날에는 그 한 사람의 승리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고로 수고하셨던 모든 수고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수고를 하셨으면 하셨을수록 그 가치가 감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가치가 드러나 것입니다. 하셨으면 하셨을수록 그 가치가 더 빛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들을 찾아 나오셨습니다. 그 아들은 어떤 국가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요, 이 세계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가 그 아들을 위해서 있고 세계가 그 아들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 아들이 국가와 세계를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치로 볼 때, 그 아들 이상으로 가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들은 중심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49-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