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1권 제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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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에덴
날짜 : 1959. 6. 28(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리운 에덴’입니다.
타락이 없었던 본연의 에덴 동산을 생각할 때 어느 누구나 하나님이 연상되는 동시에 아담 해와가 연상됩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삼고 죄 없는 본연의 우리 조상들이 있었다는 것이 연상되는 동시에 죄악의 침범을 받지 아니한 만물이 연상됩니다.
만물이 있음은 인간을 위함이요, 인간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늘을 위주한 인간이 되지 못하였고 인간을 위주하여 화동할 수 있는 만물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에덴을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크나큰 슬픔이요, 서러움이요, 혹은 억울함으로 남아져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려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살던 아담 해와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었던 만물의 세계, 선만을 찬양할 수 있었던 본연의 그 세계를 막아 버렸던 타락의 흔적에 대해서 분하고 강한 적개심을 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게 수시로 천적인 심정과 인연될 수 있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이는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외적인 환경이 되지 못하고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사정을 갖추지 못한 것은 우리 인간의 탄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아담 해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고, 환경을 원망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내가 그냥 그대로 휩쓸려서 마음과 몸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느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환경을 타개해 넘어가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이런 불쌍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억제하시면서 타락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나오면서 수고하고 계십니다. (6-334)
에덴은 하늘의 심정이 동하여 사는 곳
오늘날 우리는 타락의 인간임을 타락성에 물든 죄악의 본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늘은 기필코 역사적으로 물든 죄상을 청산해야 되고 혈통적으로 맺혀 내려오는 죄악의 원한을 풀어야 됩니다.
그 죄악의 원한을 푸는 것이 하늘의 소원이고 우리의 소원인데, 그 모든 것을 드러내는 날이 없다면 해원의 한날이 없을 것이고 해방의 한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해원과 해방의 한날이 없다면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뜻이 성취되는 한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성취의 한날이 없다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시던 하나님의 영광의 한날도 없을 것이고 섭리를 따라 나오고 있는 인간들도 영광의 한날을 맞을 수 없습니다.
타락 전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수습하여 하늘 앞에 영광의 조건, 기쁨과 미의 대상으로 세우고 그 만물로부터 내적인 자극을 일으켜서 천성의 심정을 대하여 영광의 실체임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슬픔이 된 것입니다.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에도 나무 한 그루에도 하나님의 심정적인 인연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지어 놓고 다 선한지라고 하셨지만, 그 가운데 지금도 제일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만물과 통하시던 하나님의 은사와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도 즐거워하면서 그것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심정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나온 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타락된 인간이로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친구의 입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새는 물론이거니와 곤충 등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음받은 존재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느 것을 아버지께서 제일 사랑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면서 영광의 자리에서 기쁨을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을지 모르지만 미미한 초목으로부터 곤충, 나아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미쳐 있는 아버지의 심정적인 인연을 상기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마음과 정을 다하여 그 곤충을 사랑해 줄 수 있다면 그 곤충을 만든 분에게는 그 이상의 만족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만물의 요소를 제거하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를 공급해 주는 만물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을 앞세워 나가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정도(正道)를 갖출 수 있고,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만물과 통하는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할진대 여러분은 창조이상을 세우신 하나님의 심정과 무관한 자가 될 것입니다.
자연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인류문화
오늘날 피조세계의 원리와 법칙, 공리와 공식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야가 과학입니다. 그리고 자연에 깊이 숨어 있는 정서적인 분야를 나타내는 것이 문학입니다. 자연에 나타나 있거나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근본이치를 해명하려는 분야가 철학입니다. 그 단계 위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참된 종교와 종교가가 해명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자연 속에 깊이 흐르고 있는 정적인 내용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는 자연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당당하게 그 위세를 자랑하고 권세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무시하면 그러한 것들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연이요,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만상에 흐르고 있는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됩니다. 곤충이나 새, 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과학적으로 그 논리를 해명하지 못할지라도,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예술적으로 그 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능력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찾아 세우고자 하시는 본연의 인간의 모습
진정으로 세계적인 위대한 학자가 있다고 할진대, 그 학자의 심정에는 자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는 감성이 있을 것이요, 자기가 연구하는 차원 이상으로 수시로 연락되는 그러한 감성이 있기 때문에 암시나 환상 혹은 몽시와 같은 현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에 취해 들어가는 상태에서만 벌어지는 현상들입니다.
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큰 일을 한 것은 역사를 보아서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감정에 화하여 한 포기의 풀을 대해서도 “하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종교가가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종교가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생활은 너무나 무감각적이요, 너무나 무정서적이요, 너무나 몰락된 우주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서러워해야 됩니다. 만일 이것을 서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새 시대의 인물로 소명받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넓은 벌판을 흐르는 시냇물, 솟아 있는 산맥,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동녘에서 비쳐오는 달빛 등 모든 만상을 대하여 시기를 가리지 않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맡기려고 하셨던 참된 모습,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본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원하십니다.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해 보지 못하신 하나님
그러면 본연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내 아들아, 저 산을 바라보아라! 저 산을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저 초목을 바라보아라! 저것도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저 모든 것들은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지은 것들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바라보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간절한 내적인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미숙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연의 에덴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었던 세계요, 영원히 사랑의 감정에 화할 수 있었던 세계요, 한번 노래하면 영원 무궁토록 노래에 취할 수 있었던 세계였습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세계가 그리워서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심정을 지닌 인간을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만일 본연의 세계에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을 가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풍부한 자, 그런 심정을 체휼한 자들이 새로운 이상천국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복귀의 원한을 풀고 역사의 슬픔을 밟고 올라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붙들어 주실 것인가? 하나님은 “이 만물을 내 대신 즐겨 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느껴 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사랑해 다오!”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붙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인간들이 그리워하는 에덴 동산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만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으면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는데, 우리도 그것을 갚아야지요. 더 나아가서는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감정 가운데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물이 그리워하는 참사람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은 어떠한 자연이며, 내가 밟고 있는 땅은 어떠한 땅이냐? 서럽게도, 내가 기뻐하다 말고 슬퍼해야 할 자연과 땅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 기쁨을 느끼는 대신에 슬퍼하며 울 줄 알아야 되겠고, 나무를 붙들고 울 줄 알아야 되겠고, 산천을 바라보고도 한숨을 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에덴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요, 아직까지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을 바라보고도 에덴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에덴이라고 한다면 자연도 그리워져야 되겠거니와, 또 거기서 모든 피조만물을 주관할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도 그리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는가를 심정세계에 들어가서 체휼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어요? 그 사람이 춤을 춘다면 몇 십년이라도 추고 싶어할 것입니다.
본연의 인간은 무한한 신축성이 있는 원칙을 통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그 가치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인간을 들여다보셨다면 당신의 모든 속성을 느끼실 수 있었을 것이고 만우주의 기운이 흐르고 있던 것을 느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기뻐하셨으며, 만물도 주인이 되어 주기를 고대하고 바라던 대상이 아담과 해와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물이 고대했던 아담과 해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쁨과 만물의 기대가 변하여 저주와 원망이 되었고, 행복과 소망이 변하여 탄식과 절망이 되었고, 생명이 변하여 사망이 되었고, 사랑이 변하여 통곡이 되었습니다.
하늘이 기뻐하고 만물이 고대했던 인간이 오늘날에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으니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판을 피하고자 한다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정의 합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덴에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고 즐거워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그들을 찾아가서 만나 보고 싶어하셨던 그 심정에 합격되어 심판을 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은 그러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천륜을 그리워할 줄 아는 나 자신이 되는 동시에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도록 일남 일녀를 지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은사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성품(性品)과 성상(性相)을 대신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한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심정과 해와가 가지고 있었던 심정을 가지고 자유를 누리며 하늘을 포옹할 수 있는 부부가 땅 위에 있다면 온 우주를 넘겨주고 안식하겠다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오늘날의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한 그리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솟구쳐 오른다고 할진대, 만물들과 더불어 그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끌던 본연의 인간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쌍수를 들어 “오냐, 내 아들딸아!” 하면서 붙잡지 않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종교의 사명
우리가 하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본연의 인간적인 가치를 체휼하여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종교의 목적은 심정세계의 법도를 활용하여 우주 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할할 수 있는 인격자를 배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시던 심정으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그리워하시던 심정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심정이 하나님의 그러한 심정과 차이가 있다면 그 인간은 패배자요, 역사노정에서의 낙오자입니다.
본연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타락된 인간을 붙들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하늘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타락된 인간을 슬픈 감정 속에서 그리워하고 있는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갈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 제가 제 자신의 손을 붙들고 그리워서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붙드실 수 있는 손이라고 할진대, 자신이 그 손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던 본연적인 아담의 손으로 붙들고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담과 해와를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타락의 역사를 밟고 올라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가치를 자랑해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있고 그 가치를 높이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이념을 인간은 본래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세우려고 하다가 잘못하면 타락된 세계의 가치를 용납하게 되고, 나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려다가 잘못하면 타락의 근거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된 인간은 전체를 부정해야 됩니다.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그래서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찾아가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 있는 연고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울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는데, 그것은 통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자신을 보고 통곡하고, 네 가정을 두고 통곡하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통곡하고, 네 민족과 나라뿐만 아니라 땅 위의 전체를 보고 통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움의 인연을 새로이 맺기 위한 하늘의 뜻이 남아 있었던 연고로 그랬던 것입니다.
종교를 통해서만 풀리는 인생문제
우리는 만물을 그리워할 줄 알고 사람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런 심정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종교, 혹은 구주나 신랑과 신부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섭리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심정과 그리움의 사정이 연결되어서 드리는 만물을 받게 될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과 그리움에 사무쳐서 드리는 가정을 받고자 하십니다. 그리움에 사무쳐서 나라와 백성뿐만 아니라 세계가 바쳐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하늘 앞에 그리운 심정에 사무쳐서 “한푼밖에 되지 못하는 이 동전이라도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그 한푼은 우주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천한 가정이라도 “부족하오나, 이 가정을 받아 주시옵소서!” 할 때, 그 가정은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명을 다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쳐서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알고 인간들을 찾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이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본연의 참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운 에덴에서 자라고 있던 만물, 거기에 살고 있던 인간, 그리고 거기에 찾아 주시던 하나님이 한 사람을 중심삼고 하늘과 만물이 화합할 수 있는 한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일이 종결되지 않는다면 복귀섭리, 즉 하늘이 세우신 전체의 뜻은 끝을 맺어 승리의 영광을 볼 수 없고, 우리도 타락의 슬픔을 해원하고서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진대, 승리의 한날을 갖춘 세계를 이 땅 위에 건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6, 334-350)
<훈독 소감>
인간은 비록 타락하였지만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가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을 때 본연의 심정을 가지고 만물을 바라보았던 그런 심정을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당부하십니다.
타락으로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해보지 못하신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드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풀 한포기를 붙들고도 서러워할 줄 알고 산천을 바라보고도 한숨을 쉴 줄 아는 하나님의 서러움과 슬픔을 함께 하는 모습이 되어주길 당부하십니다.
그리하여 타락하지 않은 본연적인 아담의 손으로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울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그런 사람이 본연의 참사람임을 분명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주신 말씀을 통해 내 자신이 생활 일체를 아버지의 심정 가운데 사무쳐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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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에덴
날짜 : 1959. 6. 28(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연의 세계를 그리워하는 인간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제목은 ‘그리운 에덴’입니다.
타락이 없었던 본연의 에덴 동산을 생각할 때 어느 누구나 연상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연상되는 동시에 하나님이 6일간의 창조를 마치시고 축복하셨던 아담 해와가 연상됩니다. 또, 하나님을 중심삼고 죄 없는 본연의 우리 조상들이 있었다는 것이 연상되는 동시에 죄악의 침범을 받지 아니한 만물이 연상됩니다.
만물이 있음은 인간을 위함이요, 인간이 있음은 하나님을 위함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하늘을 위주한 인간이 되지 못하였고 인간을 위주하여 화동할 수 있는 만물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에덴을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크나큰 슬픔이요, 서러움이요, 혹은 억울함으로 남아져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본연의 세계와 본연의 동산에서 살고 있던 우리의 조상과 그 조상을 거느리고 있던 선(善)만을 위주하여 움직이셨던 하나님을 놓고 심각히 생각하게 될 때 그분과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먼 거리에 처하여 있음을 자인(自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더불어, 어떠한 최고의 선과 더불어 인연을 맺으려는 간곡한 심정이 있으면 있을수록 자신이 그 최고의 선, 즉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다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려는 참다운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을 중심삼고 살던 아담 해와와 더불어 화동할 수 있었던 만물의 세계, 선만을 찬양할 수 있었던 본연의 그 세계를 막아 버렸던 타락의 흔적에 대해서 분하고 강한 적개심을 품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게 수시로 천적인 심정과 인연될 수 있는 길을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움직이는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외적인 환경이 되지 못하고 그럴 수 있는 내적인 사정을 갖추지 못한 것은 우리 인간의 탄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타락한 아담 해와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고, 오늘날 살고 있는 현실의 환경을 원망치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에 내가 그냥 그대로 휩쓸려서 마음과 몸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느냐?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환경을 타개해 넘어가야 할 그 무엇, 무엇인지 모르지만 필연적인 곡절의 노정을 거쳐가야 할 그 무엇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방향도 잘 모르면서 무엇인가를 찾아서 허덕여 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제 때가 왔습니다. 내가 참다운 양심을 가다듬어 양심의 주체인 하늘과 영원한 인연을 맺고 영원한 행복의 기준을 찾아 세우고자 하는 간곡한 마음이 우러나면 우러날수록 이 땅에 대해서는 분개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대하여서도 적개심을 갖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또 이 적개심을 막아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미쳐지는 고통 이상의 큰 고통이 없다는 것과 여기에서 해결지어야 할 문제 이상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하늘이 있다고 할진대 이런 고통 중에 있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고 이와 같이 불쌍한 자리에 있는 우리 인간을 찾아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인연을 존중하여 찾아주는 관계가 있어야만 우리는 하늘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불쌍한 입장에 처해 있는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슬픈 마음을 억제하시면서 타락한 인류의 발자취를 따라 나오면서 수고하고 계십니다. (6-334)
에덴은 하늘의 심정이 동하여 사는 곳
오늘날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기에 앞서서 타락의 인간임을 자인해야 됩니다. 자신의 무엇을 나타내기에 앞서서 타락성에 물든 죄악의 본성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은 기필코 역사적으로 물든 죄상을 청산해야 되고 혈통적으로 맺혀 내려오는 죄악의 원한을 풀어야 됩니다.
그 죄악의 원한을 푸는 것이 하늘의 소원이고 우리의 소원인데, 그 모든 것을 드러내는 날이 없다면 해원의 한날이 없을 것이고 해방의 한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해원과 해방의 한날이 없다면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뜻이 성취되는 한날도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성취의 한날이 없다면 인간을 대하여 섭리해 나오시던 하나님의 영광의 한날도 없을 것이고 섭리를 따라 나오고 있는 인간들도 영광의 한날을 맞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과 몸, 혹은 심령으로 자연의 모든 신성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고, 본성으로 하늘의 심정적인 감촉을 느껴야 되겠고, 본성품(本性品)을 통하여 몸으로 체휼되어 들어오는 천심(天心)이나 천정(天情)을 느낄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땅 위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타락 전 인류의 조상은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수습하여 하늘 앞에 영광의 조건, 기쁨과 미의 대상으로 세우고 그 만물로부터 내적인 자극을 일으켜서 천성의 심정을 대하여 영광의 실체임을 자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큰 슬픔이 된 것입니다.
본연의 에덴에서는 하늘의 심정에 동하여 살 수 있었고, 선과 화할 수 있었으며, 하늘의 이념과 더불어 생활할 수 있었고, 보고 듣고 느끼던 모든 것이 선을 자극시켰습니다. 우리 자신이 그러한 곳에서 하늘의 심정을 느끼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의 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최대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도 그러한 인간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인연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대신할 수 있고 선의 부모가 되었어야 할 인류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해와를 짓기 위해서 닷새 동안에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어떠한 심정으로 바라보셨겠느냐? 그 심정을 회상하면서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6-336)
우리가 찾아야 할 심정
우리는 삼라만상을 매일같이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똑 같은 심정이나 감정으로 삼라만상을 대합니다. 만일에 인간시조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삼라만상이 선을 중심삼은 본연의 삼라만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본연의 삼라만상을 보면서 우리의 인간시조가 어떻게 느꼈을 것이며, 또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들에 자라고 있는 미미한 풀 한 포기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거쳤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나무 한 그루에도 하나님의 심정적인 인연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초목들뿐만 아니라 들에서 뛰놀고 있는 짐승이나 곤충, 혹은 조류들 가운데서도 무심하게 창조되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들이 모두 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만물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할진대, 우리는 어떠한 생각을 해야 되느냐? 하나님이 만물을 지어 놓고 다 선한지라고 하셨지만, 그 가운데 지금도 제일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풀이면 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시는 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시간을 아끼지 않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자리에 머무를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을 지으시기 전에 만물과 통하시던 하나님의 은사와 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도 즐거워하면서 그것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쁜 심정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거쳐 나온 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타락된 인간이로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심정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친구의 입장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풀을 좋아하신다면 풀 가운데서 어떠한 풀을 제일 좋아하실까, 꽃을 좋아하신다면 꽃들 가운데서는 어떤 꽃을 제일 좋아하실까, 나무를 사랑하신다면 나무들 가운데 어떤 나무를 제일 사랑하실까를 생각해야 됩니다. 새는 물론이거니와 곤충 등 하등동물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하나님의 심정을 통하여 지음받은 존재들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어느 것을 아버지께서 제일 사랑하실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심정을 흠모하고, 하늘의 이념을 고대하고, 하늘의 복귀의 동산을 바라보는 참다운 마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을 높이면서 영광의 자리에서 기쁨을 체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사람들은 많을지 모르지만 미미한 초목으로부터 곤충, 나아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미쳐 있는 아버지의 심정적인 인연을 상기하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적습니다. 모든 정력을 다 기울여 어떤 곤충을 만들었다고 할 적에 그렇게 기울인 이상의 정력을 가지고 사랑하려는 사람이 나타나서 마음과 정을 다하여 그 곤충을 사랑해 줄 수 있다면 그 곤충을 만든 분에게는 그 이상의 만족이 없을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만물의 요소를 제거하면 인간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이루는 요소를 공급해 주는 만물에 대해서 감사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을 앞세워 나가는 사람이라면 어디에 가든지 정도(正道)를 갖출 수 있고, 어떠한 환경에 처하든지 만물과 통하는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생애노정에 있어서 얼마나 그러한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혹은 산천을 대했습니까? 한 덩이의 흙으로 인간을 빚으신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할진대 여러분은 창조이상을 세우신 하나님의 심정과 무관한 자가 될 것입니다. (6-338)
자연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는 인류문화
오늘날 피조세계의 원리와 법칙, 공리와 공식을 해명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분야가 과학입니다. 그리고 자연에 깊이 숨어 있는 정서적인 분야를 나타내는 것이 문학입니다. 자연에 나타나 있거나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근본이치를 해명하려는 분야가 철학입니다. 그 단계 위에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면 참된 종교와 종교가가 해명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 것인가? 그것은 자연 속에 깊이 흐르고 있는 정적인 내용을 해명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책임을 종교가 짊어져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류의 문화는 자연을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당당하게 그 위세를 자랑하고 권세를 누린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무시하면 그러한 것들이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을 가치 있게 해 주는 것이 자연이요,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자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만상에 흐르고 있는 심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하늘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영광의 자리에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풀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되겠고, 꽃을 바라보더라도 하나님의 심정과 통할 수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됩니다. 곤충이나 새, 혹은 어떤 동물을 바라보게 될 때도 하나님의 심정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과학적으로 그 논리를 해명하지 못할지라도, 문학적으로 그 정서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예술적으로 그 미를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정서적으로 사랑을 체휼하는 능력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은 위대한 과학자요, 위대한 문학가요, 위대한 예술가요, 위대한 철학자요, 위대한 종교가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6-340)
하늘이 찾아 세우고자 하시는 본연의 인간의 모습
이제까지의 과학적인 논리와 공식과 법칙을 가지고 우주를 바라보면서 느끼던 단계를 넘어서 자기도 모르게 우주와 통하는 심정적인 감응이 없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문학가도 그렇고, 예술가도 그렇고, 철학자도 그렇고, 종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으로 세계적인 위대한 학자가 있다고 할진대, 그 학자의 심정에는 자연의 심정과 화할 수 있는 감성이 있을 것이요, 자기가 연구하는 차원 이상으로 수시로 연락되는 그러한 감성이 있기 때문에 암시나 환상 혹은 몽시와 같은 현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자기가 연구하는 분야에 취해 들어가는 상태에서만 벌어지는 현상들입니다.
정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큰 일을 한 것은 역사를 보아서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또, 그런 감정에 화하여 한 포기의 풀을 대해서도 “하나님!” 하고 부를 수 있는 종교가가 있다면,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종교가일 것입니다.
오늘날 불교에서는 불상을 모셔 놓고 복을 빌고 있는데, 주체와 대상이 외적으로는 천지의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심정의 세계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통하는 모든 것을 하늘처럼 믿고 대하면, 하늘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고 이루어 주기 때문에 소원성취라는 말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생활은 너무나 무감각적이요, 너무나 무정서적이요, 너무나 몰락된 우주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서러워해야 됩니다. 만일 이것을 서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그는 새 시대의 인물로 소명받을 것이고 새로운 시대의 사명을 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환경을 바라보고 얼굴을 찌푸리거나, 탄식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면서 그러한 감정들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새 시대에 남아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상적이고 심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필코 하나님과 인연을 맺으려고 할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풀 한 포기를 바라보며 심정을 느껴 보십시오! 거기에는 무한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의 산봉우리를 바라보게 될 때 어제 보던 감정과 오늘 보는 감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내 심정에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를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고상한 일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온 자연과 화동할 수 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래의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넓은 벌판을 흐르는 시냇물, 솟아 있는 산맥,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동녘에서 비쳐오는 달빛 등 모든 만상을 대하여 시기를 가리지 않고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는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맡기려고 하셨던 참된 모습,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셨던 본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을 원하십니다. (6-341)
인간과 더불어 자연을 노래해 보지 못하신 하나님
그러면 본연의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 해와와 더불어 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에 대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던 한 시간을 가지셨느냐 하면 못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들아, 저 산을 바라보아라! 저 산을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저 초목을 바라보아라! 저것도 내가 어떻게 어떻게 지었다. 저 모든 것들은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 지은 것들이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제로 그런 말씀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왜 못하셨느냐? 아담이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바라보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간절한 내적인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미숙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러실 수 있는 자리에 아담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그의 손을 붙들고 “아담아, 내가 보고 싶은 저 동산의 꽃들을 바라보아라! 내가 바라보고 싶은 산천을 같이 바라보자!”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인간시조가 그러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들, 오늘의 인류가 사망권에서 허덕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연의 에덴을 그리워해야 되겠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었던 세계요, 영원히 사랑의 감정에 화할 수 있었던 세계요, 한번 노래하면 영원 무궁토록 노래에 취할 수 있었던 세계였습니다. 또한, 한번 뛰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났던 세계, 한번 무엇을 책임지면 영원한 책임으로 생각하고 노력할 수 있었던 세계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세계가 그리워서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러한 심정을 지닌 인간을 찾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슬픔이었습니다. 땅을 대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기필코 그러한 사람을 찾아 세우시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들 가운데도 산천이나 자연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빌어 우리의 감정을 높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만일 본연의 세계에서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심정을 가질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그런 심정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런 마음이 풍부한 자, 그런 심정을 체휼한 자들이 새로운 이상천국의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복귀의 원한을 풀고 역사의 슬픔을 밟고 올라서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자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붙들어 주실 것인가? 하나님은 “이 만물을 내 대신 즐겨 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느껴 다오! 이 만물을 내 대신 사랑해 다오!” 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붙들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어느 한 때에 신비스러운 분위기, 혹은 은혜스러운 분위기 가운데서 자연의 꽃 한 포기를 그리워한 적이 있었습니까? 또, 조상의 누구를 만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그것을 대해 본 적이 있었습니까? 혹은, 산천을 바라보게 될 때, 품겨 들어오는 자극에 자기도 모르는 찬미를 하늘 앞에 드린 일이 있습니까? 없다 한다면, 여러분은 만물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들이 그리워하는 에덴 동산이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만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이 심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움직일 수 없으면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인간을 위하여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우리를 위해 밤을 새워가며 기도했는데, 우리도 그것을 갚아야지요. 그리고 오늘날까지 수고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해야 되겠고, 더 나아가서는 만민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그런 감정 가운데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길을 걷다가 고단해서 쉬는 자리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 자리에 하늘이 같이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그루의 늙은 느티나무 뿌리를 붙들고도 하늘의 심정을 노래할 수 있고 큰 바위를 안식의 보금자리로 의지하고 하나님의 정서를 노래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6-343)
하나님과 만물이 그리워하는 참사람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은 어떠한 자연이며, 내가 밟고 있는 땅은 어떠한 땅이냐? 서럽게도, 내가 기뻐하다 말고 슬퍼해야 할 자연과 땅이 되었습니다. 내가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마음에 좋다고 느끼는 반면에 탄식권에 있는 만물임을 알아야 됩니다. 산고수려한 명승지를 바라보고 좋다고 하더라도, 한편으로는 무한히 슬픈 감정을 아버지와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오늘날 타락된 인간들의 입장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한 포기의 풀을 붙들고 기쁨을 느끼는 대신에 슬퍼하며 울 줄 알아야 되겠고, 나무를 붙들고 울 줄 알아야 되겠고, 산천을 바라보고도 한숨을 쉴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에덴이 그리워지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심정에 사무쳐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요, 아직까지 그러한 심정의 인연을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을 바라보고도 에덴을 그리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운 에덴이라고 한다면 자연도 그리워져야 되겠거니와, 또 거기서 모든 피조만물을 주관할 수 있었던 본연의 인간도 그리워져야 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도 자기가 만드는 물건을 오늘 짓다가 끝내지 못하면 내일 계속해서 완전히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어 놓고 얼마나 기뻐하셨는가를 심정세계에 들어가서 체휼한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어요? 그 사람이 춤을 춘다면 몇 십년이라도 추고 싶어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간단하게 나타난 인간이 아닙니다. 본연의 인간은 무한한 신축성이 있는 원칙을 통하여 지어졌기 때문에 그 가치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인간을 들여다보셨다면 당신의 모든 속성을 느끼실 수 있었을 것이고 만우주의 기운이 흐르고 있던 것을 느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본연의 인간을 바라보시던 하나님은 무한히 기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고 기뻐하셨으며, 만물도 주인이 되어 주기를 고대하고 바라던 대상이 아담과 해와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만물이 고대했던 아담과 해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타락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쁨과 만물의 기대가 변하여 저주와 원망이 되었고, 행복과 소망이 변하여 탄식과 절망이 되었고, 생명이 변하여 사망이 되었고, 사랑이 변하여 통곡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한스러운 조상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한탄해야 할 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운데는 그 한스러운 사실이 어디서부터 출발하여 오늘날의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한스러운 심정을 쓸어버리고 인간 본연의 심정을 찾아서 환희의 소리를 내지를 수 있는 무리가 이 땅 위에 없을 것인가? 하늘은 그러한 무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늘이 기뻐하고 만물이 고대했던 인간이 오늘날에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으니 심판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판을 피하고자 한다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심정의 합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에덴에 아담과 해와를 지어 놓고 즐거워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그들을 찾아가서 만나 보고 싶어하셨던 그 심정에 합격되어 심판을 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하늘은 그러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천륜을 그리워할 줄 아는 나 자신이 되는 동시에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심정을 체휼할 수 있도록 일남 일녀를 지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은사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땅 위에 있는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성품(性品)과 성상(性相)을 대신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한 여자를 사랑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하고, 한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되어야 합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심정과 해와가 가지고 있었던 심정을 가지고 자유를 누리며 하늘을 포옹할 수 있는 부부가 땅 위에 있다면 온 우주를 넘겨주고 안식하겠다는 것이 하늘의 뜻임을 오늘날의 인간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시조가 그러한 심정의 법도를 유린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류가 심정의 세계에서 무한한 그리움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취미를 통하여, 예술을 통하여, 학문을 통하여, 또는 땅 위에 있는 어떠한 사랑의 대상을 통하여 그 그리움을 메우려고 하지만 메울 길이 없어서 허덕이고 있는 것이 타락된 인류의 실상입니다. 그것이 역사적인 비애요, 비극입니다.
그러한 그리움이 여러분의 마음에 솟구쳐 오른다고 할진대, 만물들과 더불어 그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끌던 본연의 인간적인 형태를 갖추어서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쌍수를 들어 “오냐, 내 아들딸아!” 하면서 붙잡지 않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6-346)
종교의 사명
우리가 하늘 앞에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본연의 인간적인 가치를 체휼하여 하늘을 그리워할 줄 아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한 인간이 나타난다면 하늘이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그리움이라는 것은 사랑을 빼놓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 아닌 영원한 안식과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서 사명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심정세계의 법도를 활용하여 우주 만상의 모든 이치를 관할할 수 있는 인격자를 배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우리 인간을 그리워하시던 심정으로 섭리해 나오셨습니다. 역사는 천태만상으로 벌어져 왔지만,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의 입장에서 시종일관 그리워하시던 심정을 잃지 않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심정이 하나님의 그러한 심정과 차이가 있다면 그 인간은 패배자요, 역사노정에서의 낙오자입니다. 하늘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한 것은 고마운 것입니다. 뿐만이 아니라, 타락된 인간을 대하여 하나님은 슬픈 감정을 가하여 그리워하고 계십니다.
본연의 심정에 상처를 입힌 타락된 인간을 붙들고 그리워하던 마음을 하늘은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와 같이 타락된 인간을 슬픈 감정 속에서 그리워하고 있는 하늘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갈 것입니다. 누구든지 “아버지! 제가 제 자신의 손을 붙들고 그리워서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붙드실 수 있는 손이라고 할진대, 자신이 그 손을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리워하던 본연적인 아담의 손으로 붙들고 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아담과 해와를 붙들고 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면 타락의 역사를 밟고 올라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고 그 가치를 자랑해야 할 역사적인 책임이 있고 그 가치를 높이 세워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연고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개체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고자 하는데, 그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이념을 인간은 본래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세우려고 하다가 잘못하면 타락된 세계의 가치를 용납하게 되고, 나를 그리움의 대상으로 세우려다가 잘못하면 타락의 근거가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락된 인간은 전체를 부정해야 됩니다. 아담과 해와가 모든 것을 갖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아담과 해와는 그런 이념을 갖지 못했고 심정적인 어떠한 무엇도 갖지 못했습니다.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한 것이 타락입니다. 아담이 만물을 주관할 수 있는 입장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연의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찾아가야 할 역사적인 조건에 걸려 있는 연고로 인간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울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음을 유발시키는 종교를 찾아보게 될 때 기독교를 찾게 됩니다.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는데, 그것은 통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네 자신을 보고 통곡하고, 네 가정을 두고 통곡하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통곡하고, 네 민족과 나라뿐만 아니라 땅 위의 전체를 보고 통곡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움의 인연을 새로이 맺기 위한 하늘의 뜻이 남아 있었던 연고로 그랬던 것입니다. (6-348)
종교를 통해서만 풀리는 인생문제
우리는 만물을 그리워할 줄 알고 사람을 그리워할 줄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그리워해 봤습니까? 순수한 하늘의 심정과 연결되어 무한히 주고도 잊어버리면서 좋아할 수 있는 그런 심정을 체휼해 봤습니까? 그런 심정을 유발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종교, 혹은 구주나 신랑과 신부라는 표어를 걸어 놓고 섭리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심정과 그리움의 사정이 연결되어서 드리는 만물을 받게 될 날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심정과 그리움에 사무쳐서 드리는 가정을 받고자 하십니다. 그리움에 사무쳐서 나라와 백성뿐만 아니라 세계가 바쳐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하늘 앞에 그리운 심정에 사무쳐서 “한푼밖에 되지 못하는 이 동전이라도 받아 주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그 한푼은 우주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천한 가정이라도 “부족하오나, 이 가정을 받아 주시옵소서!” 할 때, 그 가정은 천국의 유업을 받을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헤매고 있던 이스라엘민족이었지만, 그 민족이 하늘을 향한 그리운 심정에 사무쳐서 “이 민족을 받아 주시옵소서!” 했다면 하늘은 지상천국의 주도적인 권한을 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요,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이 땅의 인류들 앞에 주어야 할 어떠한 이상주의, 또는 이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늘을 심정적으로 사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천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심정적으로 하늘과 본연의 동산을 그리워할 수 있었던 한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 타락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관계가 맺어진 세계를 내 한 자체를 걸어 놓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복귀의 사명입니다.
그런 사명을 다하겠다는 심정에 사무쳐서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할 줄 알고 인간들을 찾아 움직이시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 사람은 하늘이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가지고 본연의 동산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모른다고 하실 수 없고, 전인류가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온 피조만물이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본연의 참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운 에덴에서 자라고 있던 만물, 거기에 살고 있던 인간, 그리고 거기에 찾아 주시던 하나님이 따로따로 사정을 통할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중심삼고 하늘과 만물이 화합할 수 있는 한 보금자리를 이루어야 합니다. 거기에 있는 사람은 하늘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요, 인간들이 위할 수 있는 사람이요, 만물이 존중할 수 있는 참주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일이 종결되지 않는다면 복귀섭리, 즉 하늘이 세우신 전체의 뜻은 끝을 맺어 승리의 영광을 볼 수 없고, 우리도 타락의 슬픔을 해원하고서 소원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진대, 승리의 한날을 갖춘 세계를 이 땅 위에 건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6-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