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4권 11일-2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훈독본)
날짜 : 1991. 1. 2(수)
장소 : 한국 한남동 공관
에서와 야곱, 세라와 베레스를 중심삼은 섭리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두고 볼 때, 창조한 모든 원리적인 내용은 하나의 공적인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그 기준에 일치가 안 될 때는 시정하든가 제거해야 할 것이 창조 이후의 피조세계에 있는 존재물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원리원칙의 기반에 서지 못하고 탈원리의 권내에 섬으로써 시정되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본래 그들은 하나님의 직계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재창조라는 뜻 가운데서 다시 수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섭리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게 구원섭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원칙을 따라야 했는데, 아담 해와가 그 원칙의 노정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던 입장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몰랐던 입장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번식되어 세계적인 발전을 해 나오던 가운데 하나님은 배후에 종교권을 세워서 인류가 아담 해와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본연의 세계로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권에 한해서는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심정권이 연결될 적마다 하늘이 영계에서 가르쳐 줌으로써 종교권의 배후와 하나님의 섭리가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렇게 종교를 중심삼고 종의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로 탕감의 길을 걸어 나오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하나님이 택해 세우셨습니다.
그 선민이라는 것은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실수한 모든 것을 탕감해야 되었습니다. 본연적인 혈통으로 맑게 만들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가인 아벨의 시대로부터 그 이후의 에서와 야곱을 중심삼고 섭리가 진행되었습니다. 피를 교체해야 되었습니다. 씨를 변경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212-65)
야곱은 어머니와 하나되어서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리브가는 하나님을 속이고 남편을 속이고 아들을 속인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였던 입장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도덕적으로 볼 때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비법적인 기사로 남아 있지만, 그 비법적인 기사가 사탄세계로 향하던 인류의 역사를 180도 돌이킬 수 있었던 하나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를 돌이킨 것은 40세 때였습니다. 그래서 복중에서부터 40세까지는 돌이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복중에서부터 다시 돌이켜 세우기 위해서 다말을 중심삼고 섭리가 진행되었습니다. 다말이 잉태한 것도 비법적이었습니다.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거기에서 시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기를 밴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축복받은 혈족을 무엇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자기의 일신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축복받은 혈대를 남겨야 된다는 입장에서 낳은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습니다. 리브가의 복중에 잉태된 야곱과 에서, 또 다말의 복중에 잉태된 베레스와 세라는 똑같이 복중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것은 섭리적인 입장에서 외적으로 점점점 축소시켜 쌍태로부터 복중까지 찾아 들어간 것입니다. 먼저 나오려고 한 세라의 팔에 산모가 빨간 실로 표시를 하고 난 후에 그 형을 밀치고 동생이었던 베레스를 먼저 나오게 함으로써 장자를 복귀했습니다. 비로소, 그래서 하늘 편의 사람이 나왔습니다. (212-66)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듯 야곱이 승리한 기준을 베레스를 중심삼고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연결시켜서 청산지었기 때문에 유다의 지파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온 시대는 사탄이 세계적인 판도를 갖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그 판도의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대교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편성할 수 있었던 국가시대를 맞아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섭리사를 중심삼고 4천 년만에 메시아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거꾸로 복귀해 나오셨습니다. 즉, 외적인 것으로부터 섭리를 시작하여 점점점 내적으로 들어가 복중에서 승리의 결정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기준을 닦으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핏줄기를 정화하고 탕감해야 할 내용을 모두 탕감한 승리적인 복귀의 터전을 통하여 나온 분은 한 분밖에 없었으니, 그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17-189)
마리아가 예수님을 복중에 잉태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러한 역사적인 승리권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너는 나와 혈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사이래 사탄 편의 핏줄을 하늘 편으로 전환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었던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생자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역사를 볼 때, 어떠한 성자나 성인도 그런 배후를 중심삼고 과거의 피를 맑혀서 태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피를 맑게 할 수 있는 첫 번째의 사람이요, 하늘의 혈통을 지상에 접붙여서 돌감람나무의 세계를 참감람나무의 세계로 만들 수 있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세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세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나 유교의 공자나 회교의 마호메트 같은 사람들은 그런 혈통적인 성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된 특정적인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212-67)
해와는 하나님과 아담을 배반하고 타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배반했습니다. 일족을 다 배반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의 생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 하니까, “난 남자를 알지 못하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알고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중심삼고 혈통을 맑혀 나왔습니다. (219-64)
다말이 복중에서 세라와 베레스를 통해서 청산한 그 전통을 마리아가 이어받아서 다말의 이상으로 생명을 각오하고 축복받은 혈통을 존중시한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늘이 택해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 사탄이 참소할 수 없었습니다. 다말이 복중에서 다 청산지었기 때문에, 형제권을 복귀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사탄이 복중에 있던 아들을 참소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독생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독생자라는 것은 타락하지 않은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219-65)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5일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6일째 되던 날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그 아담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제2의 아담, 즉 후아담이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를 창조하셨으니까 그 후아담을 중심삼고 후해와를 세워야 했는데 세우지 못했습니다. 후해와는 누가 세워야 했느냐? 예수님이 세워야 했습니다. 해와가 타락할 때 아담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후해와를 후아담이 세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탕감원칙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며 왜 오셨느냐? 인류의 참부모요, 참아버지의 사명자로 온 분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인류의 참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고, 해와는 참어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그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 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준비한 터전 위에 예수님을 참아버지의 사명자로 보내셨습니다. (17-190)
신부를 찾아야 했던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수많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12제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인류를 다시 낳기 위해서 예수님은 신부를 반드시 찾아야 했습니다. 성신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했습니다. 이에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한복음 3:4)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3:10) 하고 한탄했습니다.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삼고 인류는 거듭나야 합니다. 인류를 사탄이 다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을 중심삼고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혈연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서 심정적인 기반을 닦지 않고는 천륜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칙적인 기반, 즉 부모의 터전을 닦아야 했습니다. 부모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신부를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12제자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짓고 나서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찾고 난 후에는 그 아담이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이게 창조원칙입니다. 재창조라는 것은 이 땅 위에 주님이 와서 신부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였습니까? 아담 대신 온 후아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인 후해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하늘을 대신하고, 여자는 땅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남자들을 대신하여 신랑으로 왔기 때문에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 뜻을 몰랐기 때문에 협조하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요셉의 가정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참부모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가정은 하나님이 4천 년의 역사를 두고 섭리하신 끝에 자신의 가정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알아 가지고 시대적인 총책임을 지고서 그 책임을 완수해야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요셉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야 했던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 차례나 부모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알지 못했던 부모는 끝내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정으로부터 배반당하고 가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예수님은 다시 가정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마저 예수님을 불신하자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과 유대 나라에 뜻을 펼치지 못한 채 그들에게 몰리고 쫓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신부를 찾아 참부모의 인연을 세움으로써 세상과 하나님 앞에 사명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6-180)
가정을 이루어야 했던 예수님
2천 년 전 예수님은 처음으로 원죄와 하등의 상관이 없는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거짓부모의 피를 받아서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해야 했던 일은 무엇이었느냐? 참부모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참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었느냐? 예수님 혼자서 부모가 될 수 있었어요? 신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부모가 되려면, 예수님이 신랑으로 왔으니까 신부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22-265)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신부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었는데, 그 신부가 누구였느냐? 예수님은 아버지요, 그의 신부는 어머니였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그 신부,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보내시느냐? 우리가 거짓된 부모의 인연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갖지 못한 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때에 참부모를 찾아서 참부모의 사랑을 받고 참부모가 인도하는 나라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평화의 왕국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되었습니까? 장가를 가야 되었겠어요, 시집을 오게 해야 되었겠어요? 장가를 가는 것도 좋았고, 시집을 오게 하는 것도 좋았지요. 어쨌든, 예수님이 장가를 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성교인들은 “아이구, 거룩한 우리 주님이 장가를 가야 했다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가를 안 가면 망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장가를 갔다고 합시다. 기성교회에서 이 자리에 처음 온 사람들! 예수님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았다면 예수님의 핏줄을 타고 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겠어요, 사랑 안 하셨겠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예수님의 아들은 무엇이었겠어요? 하나님의 손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손자가 있는 것을 좋아하셨겠어요, 없는 것을 좋아하셨겠어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노인들이 손자들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손자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원하시지 않으셨겠어요? 가정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었으면 그 가정이 누구의 가정이었겠어요? 예수님의 가정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정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족도 원하셨던 것이요, 그 예수님의 종족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장가를 가야 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보아서도 어긋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단입니다. 오늘 통일교회에 갔더니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땀을 흘려가면서 예수님이 장가가야 했다고 하더라면서 기분 나빠할는지 모르지만, 기분 나쁘게 생각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옛날에 그런 내용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알고 나서 그것을 의심해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해서 이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무릎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도 기도해 보았습니다. 영계에 대해서 보고 듣고 분석도 해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모였느냐 하면 예수님의 결혼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잔치를 한다면 얼마나 큰 잔치를 하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고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구경하고 싶어서 뛰쳐나오려고 할 정도로 크나큰 잔치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뱃속에서 팔삭동이가 뛰쳐나와서 예수님의 혼인잔치를 구경하러 가겠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싫어하시겠어요?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를 하느라고 합동결혼식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은 왜 죽게 되었느냐? 예수님 자신의 가정을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기 전에, 그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의 수중에 넣기 전에, 유대교 앞에 제사장의 입장에 서기 전에 맨 먼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었느냐? 가정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늘 앞에 먼저 가정을 찾아 세우지 않고서는 제사장이 된다고 해도 헛된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된다고 하더라도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22-273)
기독교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
예수님은 참감람나무로 이 땅에 와서 영과 육을 접붙여 나라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이루려고 했는데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감으로써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이스라엘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나라를 영적으로 발전시켜 나온 것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지만 그 십자가에서 이스라엘 나라도 잃어버리고, 교회도 잃어버리고, 세례 요한도 잃어버리고, 열두 제자도 잃어버리고, 전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출발은 십자가가 아니라 잃어버린 제자들이 부활의 혜택권에 들어와 다시 모인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 기간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구원은 육적인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영적인 구원입니다. (72-78)
성신이 온 이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들은 창조이상의 실체적인 목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아담 해와가 사랑이라는 기준에 일체화했더라면 그들은 체를 입은 영원한 지상세계의 부모요, 영원한 천상세계의 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되었다는 것은 조상이 되고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그 기준을 잃어버림으로써 본래 이상하였던 사랑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기준을 하나님 편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연의 완성실체를 이루지 못한 존재로서 추방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아담의 영을 체득해서 형성할 수 있었지만 해와와 하나될 수 있는 기준에는 서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천상세계에 올라갔지만, 해와의 영은 실체를 못 이룸으로써 형체가 없는 어머니로 지상에 온 것입니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들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했던 수직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완성된 예수님은 천상세계로 올라가고 성신은 지상에 내려와서 수직적으로 상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자들은 반드시 정성을 들여서 수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 수직의 자리에는 부모나 친척들과 같은 세상적인 인연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느냐? 세상에서 인연된 것은 사탄에 의해서 더럽혀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사탄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을 가지고 들어가야 되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타락한 사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천사장급의 이상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부정할 수 있는 기준 이상의 자리에 서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축인 수직과 연결될 수 있는 자리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212-70)*
천일국 훈독경 제4권 11일, 원문
2. 참부모의 사명을 갖고 오신 예수님
날짜 : 1991. 1. 2(수)
장소 : 한국 한남동 공관
에서와 야곱, 세라와 베레스를 중심삼은 섭리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두고 볼 때, 창조한 모든 원리적인 내용은 하나의 공적인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적인 그 기준에 일치가 안 될 때는 시정하든가 제거해야 할 것이 창조 이후의 피조세계에 있는 존재물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담 해와가 타락하여 원리원칙의 기반에 서지 못하고 탈원리의 권내에 섬으로써 시정되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본래 그들은 하나님의 직계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재창조라는 뜻 가운데서 다시 수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섭리의 역사였습니다.
그렇게 구원섭리를 하는 데 있어서는 원칙을 따라야 했는데, 아담 해와가 그 원칙의 노정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던 입장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몰랐던 입장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번식되어 세계적인 발전을 해 나오던 가운데 하나님은 배후에 종교권을 세워서 인류가 아담 해와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본연의 세계로 돌아오도록 만들기 위해서 정성을 들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권에 한해서는 아담 해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심정권이 연결될 적마다 하늘이 영계에서 가르쳐 줌으로써 종교권의 배후와 하나님의 섭리가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렇게 종교를 중심삼고 종에 종의 시대로부터 종의 시대, 양자의 시대로 탕감의 길을 걸어 나오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을 하나님이 택해 세우셨습니다.
그 선민이라는 것은 그냥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선민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실수한 모든 것을 탕감해야 되었습니다. 본연적인 혈통으로 맑게 만들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가인 아벨의 시대로부터 그 이후의 에서와 야곱을 중심삼고 섭리가 진행되었습니다. 피를 교체해야 되었습니다. 씨를 변경시켜야 했던 것입니다. (212-65)
그래서 하나님은 피를 교체하는 섭리를 하셨습니다. 피를 교체하는 섭리로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의 원칙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본연적인 인간의 생명을 어머니의 뱃속으로 다시 몰아넣는 섭리를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은 동생한테 굴복해야 되었고 동생에게 축복을 상속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런 역리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애급시대에도 장자를 치셨습니다. 그렇듯 성경의 역사는 차자를 중심삼고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개인적인 섭리기대를 세우셨고,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을 중심삼고 가정적인 섭리기대를 세우시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는 쌍둥이 형제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뱃속에서도 싸웠고 나와서도 싸웠습니다. 아담 가정의 가인과 아벨은 따로따로 나왔는데 태어난 후 싸웠고, 에서와 야곱은 한 뱃속에서 한 핏줄을 받은 쌍둥이로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렇게 뱃속을 통해서 복귀해 왔습니다. (17-188)
야곱은 어머니와 하나되어서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았습니다. 그때 리브가는 하나님을 속이고 남편을 속이고 아들을 속인 입장이었습니다. 또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였던 입장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도덕적으로 볼 때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비법적인 기사로 남아 있지만, 그 비법적인 기사가 사탄세계로 향하던 인류의 역사를 180도 돌이킬 수 있었던 하나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에서를 돌이킨 것은 40세 때였습니다. 그래서 복중에서부터 40세까지는 돌이키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복중에서부터 다시 돌이켜 세우기 위해서 다말을 중심삼고 섭리가 진행되었습니다. 다말이 잉태한 것도 비법적이었습니다. 시아버지와 관계해서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거기에서 시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삼고 아기를 밴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여자는 축복받은 혈족을 무엇보다도 사랑했습니다. 자기의 일신이 희생되는 한이 있더라도 축복받은 혈대를 남겨야 된다는 입장에서 낳은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습니다. 리브가의 복중에 잉태된 야곱과 에서, 또 다말의 복중에 잉태된 베레스와 세라는 똑같이 복중에서부터 싸웠습니다. 그것은 섭리적인 입장에서 외적으로 점점점 축소시켜 쌍태로부터 복중까지 찾아 들어간 것입니다. 먼저 나오려고 한 세라의 팔에 산모가 빨간 실로 표시를 하고 난 후에 그 형을 밀치고 동생이었던 베레스를 먼저 나오게 함으로써 장자를 복귀했습니다. 비로소, 그래서 하늘 편의 사람이 나왔습니다. (212-66)
예수님이 메시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그렇듯 야곱이 승리한 기준을 베레스를 중심삼고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연결시켜서 청산지었기 때문에 유다의 지파를 통해서 메시아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온 시대는 사탄이 세계적인 판도를 갖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수많은 나라들이 그 판도의 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대교를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편성할 수 있었던 국가시대를 맞아서 메시아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섭리사를 중심삼고 4천 년만에 메시아가 왔습니다.
하나님은 거꾸로 복귀해 나오셨습니다. 즉, 외적인 것으로부터 섭리를 시작하여 점점점 내적으로 들어가 복중에서 승리의 결정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탄이 참소할 수 없는 기준을 닦으셨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인 핏줄기를 정화하고 탕감해야 할 내용을 모두 탕감한 승리적인 복귀의 터전을 통하여 나온 분은 한 분밖에 없었으니, 그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17-189)
마리아가 예수님을 복중에 잉태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러한 역사적인 승리권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탄이 “너는 나와 혈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사이래 사탄 편의 핏줄을 하늘 편으로 전환시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었던 제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생자였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역사를 볼 때, 어떠한 성자나 성인도 그런 배후를 중심삼고 과거의 피를 맑혀서 태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피를 맑게 할 수 있는 첫 번째의 사람이요, 하늘의 혈통을 지상에 접붙여서 돌감람나무의 세계를 참감람나무의 세계로 만들 수 있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세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세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나 유교의 공자나 회교의 마호메트 같은 사람들은 그런 혈통적인 성별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가 된 특정적인 내용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212-67)
해와는 하나님과 아담을 배반하고 타락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배반했습니다. 일족을 다 배반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을 중심삼고 자기의 생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천사가 나타나서 “네가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 하니까, “난 남자를 알지 못하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알고는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중심삼고 혈통을 맑혀 나왔습니다. (219-64)
다말이 복중에서 세라와 베레스를 통해서 청산한 그 전통을 마리아가 이어받아서 다말의 이상으로 생명을 각오하고 축복받은 혈통을 존중시한 자리에 섰기 때문에 하늘이 택해 세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복중에 있을 때 사탄이 참소할 수 없었습니다. 다말이 복중에서 다 청산지었기 때문에, 형제권을 복귀한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사탄이 복중에 있던 아들을 참소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삼고 예수님이 태어났기 때문에 독생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독생자라는 것은 타락하지 않은 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219-65)
하나님은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5일 동안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6일째 되던 날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그 아담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제2의 아담, 즉 후아담이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아담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아담을 중심삼고 해와를 창조하셨으니까 그 후아담을 중심삼고 후해와를 세워야 했는데 세우지 못했습니다. 후해와는 누가 세워야 했느냐? 예수님이 세워야 했습니다. 해와가 타락할 때 아담이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후해와를 후아담이 세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탕감원칙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며 왜 오셨느냐? 인류의 참부모요, 참아버지의 사명자로 온 분입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인류의 참아버지가 되었을 것이고, 해와는 참어머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써 그 축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복귀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4천 년의 긴 역사를 통하여 준비한 터전 위에 예수님을 참아버지의 사명자로 보내셨습니다. (17-190)
신부를 찾아야 했던 예수님
예수님은 이 땅 위의 수많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12제자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인류를 다시 낳기 위해서 예수님은 신부를 반드시 찾아야 했습니다. 성신이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3) 했습니다. 이에 니고데모가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한복음 3:4)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3:10) 하고 한탄했습니다.
예수님과 성신을 중심삼고 인류는 거듭나야 합니다. 인류를 사탄이 다 빼앗아 갔으니 하나님을 중심삼고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참부모의 혈연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서 심정적인 기반을 닦지 않고는 천륜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원칙적인 기반, 즉 부모의 터전을 닦아야 했습니다. 부모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신부를 찾아 세워야 했습니다. 12제자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짓고 나서 해와를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을 찾고 난 후에는 그 아담이 해와를 찾아야 됩니다. 이게 창조원칙입니다. 재창조라는 것은 이 땅 위에 주님이 와서 신부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였습니까? 아담 대신 온 후아담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부인 후해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잃어버린 부모의 자리를 다시 찾아 세울 수 있었습니다.
남자는 하늘을 대신하고, 여자는 땅을 대신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남자들을 대신하여 신랑으로 왔기 때문에 신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제자들 역시 그 뜻을 몰랐기 때문에 협조하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요셉의 가정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함으로써 예수님은 참부모가 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의 가정은 하나님이 4천 년의 역사를 두고 섭리하신 끝에 자신의 가정을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알아 가지고 시대적인 총책임을 지고서 그 책임을 완수해야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요셉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루어야 했던 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 차례나 부모를 추궁했습니다. 그러나 뜻을 알지 못했던 부모는 끝내 예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가정으로부터 배반당하고 가정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예수님은 다시 가정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마저 예수님을 불신하자 예수님은 요셉의 가정과 유대 나라에 뜻을 펼치지 못한 채 그들에게 몰리고 쫓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데려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 위에서 신부를 찾아 참부모의 인연을 세움으로써 세상과 하나님 앞에 사명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16-180)
가정을 이루어야 했던 예수님
2천 년 전 예수님은 처음으로 원죄와 하등의 상관이 없는 입장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거짓부모의 피를 받아서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원죄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던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해야 했던 일은 무엇이었느냐? 참부모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참부모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었느냐? 예수님 혼자서 부모가 될 수 있었어요? 신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부모가 되려면, 예수님이 신랑으로 왔으니까 신부를 맞이해야 했습니다. (22-265)
신랑이신 예수님 앞에 신부가 하나밖에 있을 수 없었는데, 그 신부가 누구였느냐? 예수님은 아버지요, 그의 신부는 어머니였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과 그 신부, 즉 아버지와 어머니를 다시 보내시느냐? 우리가 거짓된 부모의 인연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갖지 못한 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때에 참부모를 찾아서 참부모의 사랑을 받고 참부모가 인도하는 나라까지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땅 위에 평화의 왕국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되었습니까? 장가를 가야 되었겠어요, 시집을 오게 해야 되었겠어요? 장가를 가는 것도 좋았고, 시집을 오게 하는 것도 좋았지요. 어쨌든, 예수님이 장가를 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성교인들은 “아이구, 거룩한 우리 주님이 장가를 가야 했다구?”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가를 안 가면 망하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장가를 갔다고 합시다. 기성교회에서 이 자리에 처음 온 사람들! 예수님이 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았다면 예수님의 핏줄을 타고 난 그 아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셨겠어요, 사랑 안 하셨겠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예수님의 아들은 무엇이었겠어요? 하나님의 손자였습니다. 하나님이 손자가 있는 것을 좋아하셨겠어요, 없는 것을 좋아하셨겠어요?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노인들이 손자들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아서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손자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정을 원하시지 않으셨겠어요? 가정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이루었으면 그 가정이 누구의 가정이었겠어요? 예수님의 가정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정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친족도 원하셨던 것이요, 그 예수님의 종족으로 말미암아 민족을 이루고,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나라를 중심삼고 세계를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장가를 가야 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보아서도 어긋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이단입니다. 오늘 통일교회에 갔더니 통일교회의 선생님이 땀을 흘려가면서 예수님이 장가가야 했다고 하더라면서 기분 나빠할는지 모르지만, 기분 나쁘게 생각하려면 하라는 것입니다. 선생님도 옛날에 그런 내용을 알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또한, 알고 나서 그것을 의심해 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보다 못해서 이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보다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무릎에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도 기도해 보았습니다. 영계에 대해서 보고 듣고 분석도 해 보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 위해서 모였느냐 하면 예수님의 결혼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잔치를 한다면 얼마나 큰 잔치를 하겠습니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놀라 자빠지고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어린아이들까지도 구경하고 싶어서 뛰쳐나오려고 할 정도로 크나큰 잔치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뱃속에서 팔삭동이가 뛰쳐나와서 예수님의 혼인잔치를 구경하러 가겠다고 하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싫어하시겠어요? 좋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준비를 하느라고 합동결혼식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예수님은 왜 죽게 되었느냐? 예수님 자신의 가정을 못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기 전에, 그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나라를 자기의 수중에 넣기 전에, 유대교 앞에 제사장의 입장에 서기 전에 맨 먼저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이었느냐? 가정을 이루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늘 앞에 먼저 가정을 찾아 세우지 않고서는 제사장이 된다고 해도 헛된 것이요,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된다고 하더라도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22-273)
기독교의 구원은 영적인 구원
예수님은 3년 공생애의 기간동안에 어떤 일을 해야 했느냐? 종의 입장에서 개인에서부터 가정을 거쳐 종족, 민족, 국가, 세계, 천주까지 복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자녀의 입장에서 개인으로부터 세계까지 복귀해야 되었습니다. 또한, 부모의 심정을 가지고 세계까지 복귀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생전에 뭘 했느냐? 종의 몸을 쓰고 아들을 대신하여 부모를 찾아가던 일을 했습니다.
3년 공생애의 노정, 3년의 준비기간에는 종의 입장이었습니다. 종으로서 사탄과 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천사장이 하늘의 법, 즉 천법을 어겼으니까 천사를 굴복시켜 천사장의 입장을 복귀해야 했습니다. 천사장이 종으로서 하나님을 배반했으니까 배반한 천사장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준비기간이 3년 공생애 노정이었습니다. 그 3년이라는 준비기간을 거쳐서 천사장의 입장을 복귀한 실체가 되어 가지고 아들의 책임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했느냐? 승리한 천사장의 입장에서 하늘 편 해와, 즉 신부를 세워 복귀의 기준을 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입장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으면 딸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남자, 즉 아담격이었던 신랑으로서의 예수님은 여자인 해와격으로서의 신부를 바라보며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적인 천사장의 사명을 3년 준비의 기간동안에 완결짓고 자녀의 사명을 완결지어야 했습니다. 자녀의 사명을 완결짓는 데는 형제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형제의 발판을 닦아야 했습니다. 그 발판을 중심삼고 부모의 자리까지 올라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모의 자리에 나가는 데는 신랑과 신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 신랑 신부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 조상으로서 인류의 참부모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참아버지의 격이 된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인류의 참아버지로 서려면 참어머니가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사명을 완결지었으나 참어머니가 될 신부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만 부모의 인연을 남기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신랑으로 하늘을 대신하고 성신은 신부로 땅을 대신하여 영적인 부모의 기준만을 세웠습니다. 본래, 부부란 실체를 쓰고 평면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루어야 할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계와 육계가 하나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신랑 되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고 신부 되신 성신은 땅에 내려와서 다시 영계와 육계를 하나로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의 모든 인류는 영계와 육계의 권내에서 뒤넘이치고 있습니다. (12-226)
예수님은 참감람나무로 이 땅에 와서 영과 육을 접붙여 나라를 만들고 세계를 만들어 하나님이 주관할 수 있는 본연의 세계,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세계를 이루려고 했는데 이루지 못하고 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감으로써 어떻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준비하셨던 이스라엘 나라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나라를 영적으로 발전시켜 나온 것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믿고 있지만 그 십자가에서 이스라엘 나라도 잃어버리고, 교회도 잃어버리고, 세례 요한도 잃어버리고, 열두 제자도 잃어버리고, 전부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출발은 십자가가 아니라 잃어버린 제자들이 부활의 혜택권에 들어와 다시 모인 데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후 40일 기간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니라 부활로 말미암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구원은 육적인 구원의 완성이 아닙니다. 영적인 구원입니다. (72-78)
성신이 온 이유
아담 해와가 타락함으로써 그들은 창조이상의 실체적인 목표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아담 해와가 사랑이라는 기준에 일체화했더라면 그들은 체를 입은 영원한 지상세계의 부모요, 영원한 천상세계의 부모가 되었을 것입니다. 부모가 되었다는 것은 조상이 되고 왕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 해와가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그 기준을 잃어버림으로써 본래 이상하였던 사랑의 이상을 이룰 수 있는 기준을 하나님 편에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연의 완성실체를 이루지 못한 존재로서 추방당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아담의 영을 체득해서 형성할 수 있었지만 해와와 하나될 수 있는 기준에는 서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영적인 기준을 중심삼고 천상세계에 올라갔지만, 해와의 영은 실체를 못 이룸으로써 형체가 없는 어머니로 지상에 온 것입니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사랑은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아들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했던 수직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완성된 예수님은 천상세계로 올라가고 성신은 지상에 내려와서 수직적으로 상대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자들은 반드시 정성을 들여서 수직의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 수직의 자리에는 부모나 친척들과 같은 세상적인 인연을 가지고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왜 그렇느냐? 세상에서 인연된 것은 사탄에 의해서 더럽혀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자리에 들어가더라도 사탄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직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사탄세계의 그 무엇보다도 귀한 것을 가지고 들어가야 되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 타락한 사랑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천사장급의 이상으로 사랑해야 됩니다. 그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부정할 수 있는 기준 이상에 자리에 서는 자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축인 수직과 연결될 수 있는 자리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21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