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무리들(천일국 훈독경 제4권 6일) u

訓讀王 | 20191125105520

천일국 훈독경 제4권 6일


행복한 무리들(훈독본) 


날짜 : 1960. 5. 1(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본문 


오늘은 ‘행복한 무리들’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행한 인간들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찾아온 것도 지금 살고 있는 이상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생활적인 행복을 넘어서 심정의 세계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 올해보다는 내년, 한 생애를 넘어 영원히 행복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할진대 그 하나님은 피조물이 어떠하길 바라실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그 지음 받은 것들도 같이 있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 지음 받은 것들도 같이 기뻐하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행복하시면 그 지음 받은 것들도 역시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연인지 알지 못하나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종교의 명사를 빌어 말하면 지음받은 우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피조물이라면 우리를 창조하신 절대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절대자를 일컬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오늘날의 인간들이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불완전하게 우리를 지으신 것인가, 아니면 지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고지선이라는 말을 하려면, 거기에 우리 생애의 이상적인 모든 요소들이 다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지정의(知情意)의 감정을 충만하게 충당시킬 수 있는 내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적인 주체자로서 절대목적의 중심으로 계실 수 있고, 나아가서는 실체로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지고지선의 존재, 절대적인 기준에 있는 존재와 인연되지 못하게 된 어떤 조건이 개재되었는데 그 조건을 악이라고 하고, 그 조건이 생긴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대우주의 목적을 세우시고 피조만물을 지으셨을 텐데, 그렇게 지음을 받은 인간이 그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슬픔과 고통이 개재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후에는 비록 슬픈 일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슬픔과 고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재료가 되고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을 지배하고 행복을 유린하는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불행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9-131)


인간이 잃어버린 것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천지간에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찾아 나가는 소망의 끝은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선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선은 없습니다. 사랑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사랑은 없습니다. 참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참은 없습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세포와 감정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관념적으로는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내재하신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슬픈 일들이 있다고 할진대 그 슬픈 일들 중에서도 무엇이 제일 슬픈 일이냐?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 무엇이 제일 괴로운 일이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또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하나님의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 거기에 만물의 주재(主宰)로 아담과 해와를 세워 놓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셨는데, 지금까지 인간이 그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인간이 그 축복을 성취하는 날에는 하나님은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인간들은 그분의 아들딸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 이것은 가공적인 명사가 아닙니다. (9-134)


아담 해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말로 주관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삼은 사랑으로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오늘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되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이상의 자리에 나가서 하나님, 당신의 심정이 이렇지 않사옵니까? 당신의 심정이 이러이러하시지요?”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들에게 당신의 위치를 밝히신 동시에 당신의 가치와 인간과 관계를 밝혀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당신과 부자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시키기 위하여 싸워오신 것이 6천 년 역사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의()의 면류관이니 무슨 면류관이니 하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나의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가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역사노정을 찾아봐도, 성경 66권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 하나님과 같이 즐기고 기뻐할 수 있었던 인연의 세계는 어디로 갔느냐?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사랑받는 자리,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들의 명령에 순응하고 주관받던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한테 끌려다니던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위치와 권한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사탄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아들딸,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9-136)


영육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백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의 두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나를 지으신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땅 위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한때 아버지여, 내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면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본래는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합니다. 알고 보니, 이런 역사적인 곡절이 그 옛날 우리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잃어버린 자들인 동시에 참다운 육신을 갖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자들입니다. (9-138)


중생(重生)해야 할 인간


예수님은 후아담으로 온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 45절을 보면,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 것인데, 후해와는 누구냐? 기독교에서는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그 성신이 바로 어머니 신으로서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인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구멍이 뚫어졌으면 뚫어진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다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 15절을 보면 여자들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들을 낳았을 것인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들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러기에 성신이 그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중생은 무엇을 말하느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아버지고 신랑이었으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고 신부입니다. 인간들이 신부의 인연을 받아 가지고 신랑이 되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이 없이는 못 살고 성신이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적인 면에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인간에게 다시 주입되게 되면 중생이 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그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9-140)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이제 종교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과 사회관 그리고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만이 아들딸이 아니요, 내 가정만 가정이 아니요, 내 나라만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는 내 생활감정과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생활관을 넘어서 천주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게 되면 그 부모가 좋아하겠어요?


이 땅 위에 인간으로서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어떠한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버지라고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하실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찾을 것을 찾지 못하고, 가질 것을 갖지 못하고, 자랑할 것을 못 가졌으니까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개 국가나 민족권 내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는데,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9-143)


인간은 먼저 참자녀가 되어야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명사를 거쳐서 자라고, 또 자라서 참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서 하나님은 영원한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자녀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심정적인 모든 것을 전부 싸매 가지고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9-145)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세계


그런 천적인 심정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인간적인 모든 윤리도덕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헌 것이 깨져야 새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혼란해집니다. 윤리와 도덕관이 깨져 나갑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 칼질을 합니다.


오랜 역사노정에서 사도들이 수고해 왔지만, 수고하여 무엇을 얻으면 또 잃어버리고 눈물지어야 할 것을 아셨기에 다 버리고 한 때만을 소망하며 참고 고대해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9-146)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만우주의 대주재이시며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할진대 천지가 그의 것이 됩니다. ,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으시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나는 몰라!” 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불쌍하게 되어야지, 하나님이 불쌍해져도 된다는 말입니까?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시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시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띄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 단순히 구원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한의 심정을 풀기 위하여 6천 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거꾸로 제쳐 버리고 아버지의 알파와 오메가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아들딸이 나와야 됩니다. (9-154)


새 시대의 주인공


역사노정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구약시대는 물질을 제물로 드린 시대요, 신약시대는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린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 분이요, 마음을 대신한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상상대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신이 은혜를 준다고 알았습니다. 성신은 몸 제물을 드리는 분입니다. 이 몸 제물이 완결되면 신랑이 되신 예수님이 마음 제물을 겸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한 자리에서 심정문제가 나옵니다. 과거에는 물질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성신과 예수님을 중심삼고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했습니다. 이렇게 뜻의 성사는 상대적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물질의 제물시대, 몸과 마음의 제물시대가 지나가고 최후에는 심정의 제물시대가 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과 일체적인 관계,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 확실하고 실증적인 내용, 체험적인 사실을 갖춘 자만이 끝날에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공의의 심판과정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며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156)*

 


천일국 훈독경 제4권 6일, 원문


행복한 무리들 


날짜 : 1960. 5. 1()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오늘은 행복한 무리들이란 제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불행한 인간들


오늘날 수많은 인간들은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여기에 찾아온 것도 지금 살고 있는 이상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일상의 생활적인 행복을 넘어서 심정의 세계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오늘보다는 내일, 내일보다는 모레, 올해보다는 내년, 한 생애를 넘어 영원히 행복하기를 고대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구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할진대 그 하나님은 피조물이 어떠하길 바라실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 그 지음 받은 것들도 같이 있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 지음 받은 것들도 같이 기뻐하기를 바라시고, 하나님이 행복하시면 그 지음 받은 것들도 역시 같이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한 입장에서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인연인지 알지 못하나 이 땅 위에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종교의 명사를 빌어 말하면 지음받은 우리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피조물이라면 우리를 창조하신 절대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 절대자를 일컬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오늘날의 인간들이 이렇게 되어 있는가? 하나님이 불완전하게 우리를 지으신 것인가, 아니면 지으신 하나님이 불완전하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한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고지선이라는 말을 하려면, 거기에 우리 생애의 이상적인 모든 요소들이 다 내포되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지정의(知情意)의 감정을 충만하게 충당시킬 수 있는 내용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의 절대적인 주체자로서 절대목적의 중심으로 계실 수 있고, 나아가서는 실체로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지고지선의 존재, 절대적인 기준에 있는 존재와 인연되지 못하게 된 어떤 조건이 개재되었는데 그 조건을 악이라고 하고, 그 조건이 생긴 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천지만물들 중에서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아무리 미물인 세균이라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 그 생을 영위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부모의 혈육을 받아 태어난 그 시간부터 자신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대천륜(大天倫)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재료로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되겠습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한 재료와 어떠한 목적의 실체가 하나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백 퍼센트의 가치를 발휘할 것이고, 그때에 비로소 재료로서 자기의 요구조건과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그런 때가 와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심정을 헤쳐 놓고 생활의 한 분야를 세부적으로 분석해 볼 때 행복이란 명사는 있을망정 자신이 행복하다고 스스로 자랑할 그 무엇을 갖지 못했을 뿐더러 남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그 무엇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대우주의 목적을 세우시고 피조만물을 지으셨을 텐데, 그렇게 지음을 받은 인간이 그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슬픔과 고통이 개재된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후에는 비록 슬픈 일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슬픔과 고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쁨을 자극시킬 수 있는 재료가 되고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하나의 요소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명을 지배하고 행복을 유린하는 요소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입장에 처한 사람이 이 땅 위에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될 때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다 불행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세워진 자신들인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무엇인가를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있으되 자신을 자랑할 아무것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있다고 해도 그 생명이 대우주의 이념 앞에 어떤 재료가 될 수 없습니다. 내가 갖춘 인격과 이념과 자랑할 그 무엇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대우주의 이념과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9-131)

 

인간이 잃어버린 것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천지간에 자기 자신을 세울 수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행복을 찾아 나가는 소망의 끝은 무엇이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선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선은 없습니다. 사랑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사랑은 없습니다. 참 같은 것은 있으되 최고의 참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최고의 참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환경에 머물더라도 그 환경이 우리를 환영하고 좋아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될 때 내가 선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으되 선의 본체가 되어 있지 못하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요소는 갖고 있으되 진정으로 행복한 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렸습니다.

창조주, 즉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응당 알아야 할 피조물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창조주의 지정의를 부여받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그 창조주와 정을 통하고 뜻을 통하고 마음을 통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중심삼고 인연되어 있느냐? 만일 이 몸이 행복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인연되어 있다면, 이 몸은 만족해야 할 것인데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정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알맹이를 다 잃어버리고 빈 껍데기를 가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애써 온 사람들이 도의 길을 간 사람들이요, 성현 현철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맨 처음에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이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 있는데 그 주인을 잃어버렸다면 인간은 그 주인 앞에 역적이 됩니다. 인간은 심정 깊이 인연될 수 있는 본연의 주인을 모셔야 할 텐데 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림으로 말미암아 모시지 못하는 것은 천륜 앞에 용납받지 못할 역적이 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세포와 감정 어딘가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다. 관념적으로는 인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심정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내재하신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자리에 여러분이 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슬픈 일들이 있다고 할진대 그 슬픈 일들 중에서도 무엇이 제일 슬픈 일이냐?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 무엇이 제일 괴로운 일이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입니다. 매를 맞고 천대를 받는 것이 제일 슬프고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그분을 마음대로 못 만나는 것이 슬픔이요, 괴로움이요, 억울함입니다. 만날 수 있는 인연 가운데 있는데 못 만나는 것 이상 더 원통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인간들이 슬픔과 고난의 역사노정을 걸어왔다고 하지만, 그 역사노정은 인간에게 슬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억울함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체를 잃어버리고 주인을 잃어버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상속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고통과 슬픔의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역사적인 유래말고 원리적인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을 잃어버린 데 그 유래가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잃어버린 것을 찾아야 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도 그곳을 향해 달음질쳐 가야 됩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또 무엇을 잃어버렸느냐? 하나님의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이냐?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지으신 후 거기에 만물의 주재(主宰)로 아담과 해와를 세워 놓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모든 만물을 주관하라!”고 축복하셨는데, 지금까지 인간이 그 축복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었습니다.

인간이 그 축복을 성취하는 날에는 하나님은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인간들은 그분의 아들딸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딸, 이것은 가공적인 명사가 아닙니다. (9-134)

 

아담 해와에 대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그들이 장성하여 온 천지만물을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말로 주관하기를 바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심정을 중심삼은 사랑으로 주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담이 해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면서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대하기를 바라셨습니다. , 해와가 아담을 오빠로만 여기면서 철모르는 누이동생으로서 아담을 섬기는 것을 바라시지 않으시고 신랑 중의 신랑이요, 아버지를 대신하는 몸 중의 몸이라고 하면서 심정적으로 모시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소망의 한 때를 바라시던 하나님은 아담 해와가 그런 소망의 자리에서 아담은 나의 영원한 남편이요, 해와는 나의 영원한 신부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소원임을 알았나이다.”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대자연을 주관할 수 있도록 지으셨습니다.

지금까지 만물도 그렇게 주관받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람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탄식이 생겼고, 인간의 탄식이 생겼고, 만물의 탄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할 수 있는 참부모로서의 아담 해와의 손길에 의해 주관받기를 소망하게끔 지어졌는데, 아담 해와가 그런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타락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되 뼛골이 녹아나는 간곡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 없습니다. 타락 전 아담 해와의 이상의 자리에 나가서 하나님, 당신의 심정이 이렇지 않사옵니까? 당신의 심정이 이러이러하시지요?”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 땅 위에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의 소망인 축복을 이루어서 하나님 앞에 나와 아버지여, 나의 아버지여!” 할 수 있는 참다운 인류의 조상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까지 그런 참다운 인류의 조상을 못 만나보셨습니다. 그 후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을 못 만나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부르는 아버지는 심정을 통하여 뼛골이 녹아나는 자리에서 부르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름만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까지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인간들에게 당신의 위치를 밝히신 동시에 당신의 가치와 인간과 관계를 밝혀 나오셨습니다. 인간이 당신과 부자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타락한 인간들 앞에 통고시키기 위하여 싸워오신 것이 6천 년 역사였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의()의 면류관이니 무슨 면류관이니 하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선생님이 원하는 것은 타락하기 전의 아담 해와의 자리에서 심정적으로 간절히 고대하는 하나님의 소원을 성취해 드린 자리에서 나의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리가 인간이 바라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그런 심정의 자리는 역사노정을 찾아봐도, 성경 66권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성경은 타락 이후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타락 이전에 있었던 심정의 동산, 하나님과 같이 즐기고 기뻐할 수 있었던 인연의 세계는 어디로 갔느냐?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나의 영원한 아들딸이다.” 하는 인정을 받고 사랑받는 자리, 천사장까지도 아담 해와 앞에 굴복하여 온 만상이 그들의 명령에 순응하고 주관받던 자리에서 타락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장한테 끌려다니던 자리에서 타락했습니다. 주인의 아들로서 위치와 권한을 갖추지 못한 자리에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장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수많은 인류는 사탄의 장중(掌中)에 있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뒤에는 사탄이 따라다니고 언제나 사탄에게 시험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세상을 도말(塗抹)해 버리고 사탄을 지배하고 명령할 수 있는 아들딸, 더 나아가서는 천사장까지도 명령할 수 있는 본연의 아들딸을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뜻도 모르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9-136)

 

영육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인간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은 만우주의 대주재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우리가 육신을 쓰고 사는 백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만 부를 그런 아버지가 아닙니다. 영원무궁토록 부를 아버지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시면 같이 슬퍼해야 합니다. 땅 위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신앙의 길을 지켜간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이요,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자리에서 살던 사람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자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곡절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다 잃어버린 인생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 즉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생애의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둘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낳아준 아버지의 두 아버지가 있습니다. 이 두 아버지는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냐 하면 나를 지으신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요, 나를 낳아준 아버지는 땅 위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 해와는 인류의 참조상이요, 참아버지와 참어머니가 될 것이었습니다. 육신을 쓴 인류의 참부모가 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인류가 사탄의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들어가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는 집이 되었다면, 오늘날 인간들은 아버지를 가진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도 다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종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왜 필요 없느냐 하면 본연의 아버지와 심정적인 인연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딸은 땅 위의 그 무엇이 빼앗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더불어 일체가 된 참부모를 통하여 태어난 아들딸, 심정으로 아버지!” 하며 달려갈 수 있는 그 아들딸은 사탄이 사랑은 물론 그 무엇을 가지고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충신의 마음, 효자와 효녀의 마음, 열녀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돌릴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자리에 들어가야만 천륜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본연의 하나님의 심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선남선녀로서 성례식을 치르고 인류의 참부모가 되었다면, 만물은 아담 해와와 화동하면서 즐겁게 그 가정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아담 해와가 행복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 모실 수 있는 인류의 참부모가 되고 하나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었던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빼앗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주인도 하나요, 사랑의 주인도 하나입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동시에 아버지를 잃어버렸고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선생님은 한때 아버지여, 내 육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왜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구주가 못 됩니까? 나를 낳아준 부모인데 어찌하여 구주가 못 됩니까?” 하면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 참부모를 가진 인간이 이 땅 위에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받지 않아도 행복할 것입니다. 본래는 그래야 됩니다. 그런데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가 필요합니다. 알고 보니, 이런 역사적인 곡절이 그 옛날 우리 조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류는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요, 하나님과 부자의 인연을 잃어버린 자들인 동시에 참다운 육신을 갖춘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는 자들입니다. (9-138)

 

중생(重生)해야 할 인간

 

예수님은 후아담으로 온 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5 45절을 보면, 예수님을 후아담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후해와가 있어야 할 것인데, 후해와는 누구냐? 기독교에서는 성신을 상징적으로 말해 왔는데, 그 성신이 바로 어머니 신으로서 후해와입니다. 인류의 어머니인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에 후해와로 어머니인 성신을 보내셨습니다. 구멍이 뚫어졌으면 뚫어진 그 구멍을 때워야 하고,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잃어버린 곳에 가서 찾아야 하듯이 해와로 말미암아 이 땅 위의 인간들이 전부 다 사망세계에 들어갔으니 성신이 와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 15절을 보면 여자들이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에 사는 부인들을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해와를 두고 한 말입니다. 해와가 타락하지 않고 인류의 참조상이 되었다면 이 땅 위에 선한 아들딸들을 낳았을 것인데 타락하여 사탄의 자식들을 낳았으니 해와가 다시 해산하지 않으면 인간들은 구원을 못 받습니다. 그러기에 성신이 그 사명을 짊어지고 오늘날 만인류를 붙들고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고 있습니다. 그 해산이 다 끝나야만 해와가 구원되고 성신의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부활이란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중생은 무엇을 말하느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아버지고 신랑이었으며, 성신은 인류의 어머니고 신부입니다. 인간들이 신부의 인연을 받아 가지고 신랑이 되는 예수님을 사모하여 예수님이 없이는 못 살고 성신이 없이는 못 산다고 하게 될 때 예수님과 성신이 영적인 면에서 상봉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씨가 인간에게 다시 주입되게 되면 중생이 됩니다.

부모의 사랑을 통하지 않고 아들딸을 낳는 법이 천지의 이치 가운데는 없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아담이 아버지로서의 책임을 못 했기 때문에 그 사명을 수행키 위해 실체를 쓰고 아버지로 온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구주이신 동시에 인간의 아버지였습니다. 실체의 참아버지였습니다. 인간들이 잃어버린 참아버지를 다시 세워 놓아야만 천지이치의 원칙적인 궤도를 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에도 고아와 과부 같은 너희들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도 있고 신랑도 있는데, 왜 그랬느냐? 하나님의 창조이념으로 볼 때 참부모와 인연을 못 맺고 잃어버렸으니 고아입니다. 또한, 참다운 신랑이 되신 예수님과 인연을 못 맺었으니 과부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문제를 수습하려면 그 원인에서부터 수습해야 됩니다. 모든 종교의 근원을 밝히려면 맨 꼭대기인 아담 해와로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거기서부터 종교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신학은 망합니다. 그 신학은 하늘의 역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준비하고 갖추었다고 할지라도 하늘 앞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있는 아담 해와의 곡절부터 풀어야 됩니다. 타락 전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하는 아담 해와를 대하시던 하나님의 심정, 타락 후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애달팠는가 하는 심정의 관문을 여러분이 통과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병이 났으면 그 병의 근원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그 근원을 바로잡아 놓으면 모든 것은 자연히 수습됩니다. 이 나라도 그렇습니다. 근원이 되는 중심존재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아무리 백성이 훌륭하더라도 그가 잘못하면 다 망합니다. 그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은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심이 문제입니다. (9-140)

 

인간이 찾아야 할 참부모

 

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이 된 것은 아담 해와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담 해와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 그들이 중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타락했기 때문에 구주니, 기도니, 종교니 하는 것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무신론이냐 유신론이냐 하는 논란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미흡하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피조물을 대하여 !” 하면, 그 피조물이 !” 할 수 있게끔 지으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제 종교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세계를 넘어서야 할 시기가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역사관과 사회관 그리고 자기 위주의 심정관을 넘어서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딸만이 아들딸이 아니요, 내 가정만 가정이 아니요, 내 나라만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세계적인 이념시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때는 내 생활감정과 인생관을 넘어서고, 내가 갖고 있는 생활관을 넘어서 천주관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해야 할 때입니다. 아무리 효자라고 해도 부모가 거느리는 가정이나 환경을 잘 수습하지 못하고 싸움만 하면서 아버지!” 하게 되면 그 부모가 좋아하겠어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것을 수습할 수 있는 충성된 자리에 들어가서 심정적인 기준을 통과한 후 아버지!” 해야만 하나님께서 오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인간으로서 어떠한 사랑, 어떠한 이념, 어떠한 그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아버지라고 불러도 하나님은 오냐!” 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끝날이 다가오는 이 때, 참다운 행복을 바라고 나가는 이 때에 우리는 오늘의 것을 향하여 나갈 것이 아니라 내일의 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오늘의 것을 부정할 수 있는 동시에 내일의 것에 대한 가치관이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심중 깊이 뿌리박힌 자가 있다고 할진대 그는 소망의 사람입니다. 역사와 더불어 이 땅이 망할 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빼내어 명령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 때는 바야흐로 생사의 결판을 지으려 하는 때입니다. 비록, 내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찾을 것은 찾고 가질 것은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찾을 것을 찾지 못하고, 가질 것을 갖지 못하고, 자랑할 것을 못 가졌으니까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오늘의 환경에서 행복의 터전을 꿈꾸게 된다면 나 살려주오!” 할 때가 옵니다. 보따리를 싸 가지고 죽자살자 하는 놀음이 벌어집니다.

하늘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역사의 복판에 서서 너희들은 나에게 오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개 국가나 민족권 내로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그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던 그 인연과 관계를 아는 심정의 주인공입니다. 그 사람에게 가라고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도()가 있지만 심정을 통과할 수 있는 하나의 도가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도가 기필코 나타나야 됩니다. 만일 그것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안 계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윤리와 도덕을 가르쳐 주는 도도 있고 무한한 영계를 가르쳐 주는 도도 있는데, 윤리도덕과 무형세계에 대한 가르침을 통합하여 하나의 심정의 골자 위에 올려놓는 종교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 종교를 찾아보니까 기독교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심정의 종교입니다. 인간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실체를 갖춘 참부모를 잃어버렸는데, 기독교는 그 참부모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종교입니다.

여러분이 부부를 이루어 알뜰살뜰하게 살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천국에 같이 갈 수 있는 그런 부부가 아닙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부부들이 주님이 오실 때 다 갈라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도 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한 체험을 한 사람은 다 알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재미있게 살던 부부라고 할지라도 남편이 갈 곳이 따로 있고 부인이 갈 곳은 따로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타락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대하여 축복받은 참다운 부부로서 땅에서부터 영원한 세계까지 영원히 당신을 모셔주기를 바라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공인하실 수 있는 참부모가 이 땅 위에 나오지 않았고 그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공인받은 부부가 이 땅 위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남일녀를 지어 놓으시고 이렇게 살라고 하셨겠어요?

오늘날 도의 기준은 독신생활입니다. 왜 독신생활이냐 하면, 아직까지 원칙적인 기준에 도달한 주인공이 나타나 참부모로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념에 의한 참부모가 아직까지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후손이 되는 자들이 가정을 이루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차적인 종교일수록 독신생활을 강조합니다. (9-143)

 

인간은 먼저 참자녀가 되어야

 

일남일녀가 성숙하여 만물과 화동하는 웃음이 터져 나올 때 그 심정의 터전 위에 하나님은 그들과 인연을 맺으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연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한스러운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인류역사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복귀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명사를 거쳐서 자라고, 또 자라서 참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영()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육()의 아버지와 인연을 맺어서 하나님은 영원한 내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신랑인 동시에 참아버지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잃어버렸고, 참부모도 잃어버렸고, 참부부도 잃어버렸고, 참자녀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놓고 하나님이라고도 했고, 참부모라고도 했고, 신랑이라고도 했고, 자녀라고도 했습니다. 그것은 한 목표에 역사적으로 잃어버린 심정적인 모든 것을 전부 싸매 가지고 한꺼번에 땜질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복귀섭리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인간, 참부모를 잃어버린 인간, 참부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 참자녀의 인연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바라는 것은 먼저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다시 낳음을 받아야 됩니다. 다시 낳음을 못 받은 자는 전부 다 의붓자식들입니다. 우리는 중생의 체험을 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과 성신을 잃고는 못 산다. 내 몸의 피와 살이 그분의 일부분이다.” 하는 자리에 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참다운 자녀의 인연을 맺어서 양육받고 성신의 도움을 받아서 성신이 예수님을 사모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앞으로 주님이 오실 한 때를 바라보면서 처녀와 같은 몸으로 단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9-145)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세계

 

앞으로, 만천하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고 울부짖을 때가 올 것입니다. 바라고 의지하던 주권, 믿고 있던 종교, 어떠한 학문이나 철학도 믿을 수 없다고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정으로 시작된 인간이요, 심정을 거쳐서 심정으로 종결되는 인간이기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기원은 말이 아닙니다. 심정을 기원으로 한 인간이니 심정의 인연을 거쳐 심정으로 종결지어야 합니다. 그래야 만물로부터 , 할렐루야!” 하는 송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송영의 가치를 백 퍼센트 구비하려면 심정의 인연을 벗어나서는 안됩니다.

역사는 처리의 역사입니다. 어떠한 국가나 주권을 본으로 세워 나가다가 그 국가나 주권이 떨어지면 처리하여 그보다 더 본이 되고 좋은 새로운 국가를 세워 나옵니다. 그렇게 국가나 주권은 처리할 수 있지만 인간의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생활과 사정은 처리할 수 있으되 심정은 처리할 수 없습니다. 그 심정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주인공이 인류의 역사노정에 나타나지 않는 한 세계에 평화의 때는 오지 않습니다. 행복의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심정의 세계를 찾아 나오시는 것입니다.

그런 천적인 심정의 세계가 이루어지는 날에는 인간적인 모든 윤리도덕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헌 것이 깨져야 새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말할 수 없이 혼란해집니다. 윤리와 도덕관이 깨져 나갑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거나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부가 서로 칼질을 합니다.

안식의 터전은 마음이 아니라고 하는 자리가 아니요, 사정과 형편으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휴식하게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심정이 영원무궁토록 떠나고 싶지 않은 자리입니다. “욕을 먹어도 좋고, 매를 맞아도 좋고, 그 무엇이 내 생애를 빼앗아 가도 좋다.” 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것을 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태복음 26:39)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거기서의 원()은 심정의 원이었습니다. “심정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전세계의 인류는 찾고 있습니다.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때에 기필코 해결해야 할 문제를 앞에 놓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밥 잘 먹는 것이 아니요, 주권을 잘 세워서 빛나는 문화를 창조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동서양의 문제나 피부색의 문제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원칙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마음을 갖게 하는 일이 이 땅 위에 벌어질 수 있는 이념이 나온다고 할진대 평화와 행복의 세계, 천국은 자연히 올 것입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거나 무엇을 버리라고만 하고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최대의 선물을 준비하셨기에 우리가 아무리 좋다고 하는 것이나 받고자 하는 것이 있더라도 다 잊고 오직 한 가지만 고대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무엇이 있기 때문에 무엇을 하지 말라, 버려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고 보니 고맙다는 것입니다. 오랜 역사노정에서 사도들이 수고해 왔지만, 수고하여 무엇을 얻으면 또 잃어버리고 눈물지어야 할 것을 아셨기에 다 버리고 한 때만을 소망하며 참고 고대해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9-146)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우리는 무한히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많은 학문을 터득하는 것이 행복이 아니요, 땅 위의 어떤 보물을 많이 가진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어떤 권세를 가진 것도 행복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갖고도 천륜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리에 서면 망하는 것입니다.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이냐? 만우주의 대주재이시며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심정적인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아들이 있다고 할진대 천지가 그의 것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속 깊이 그런 인연이 남아 있기에 하나님이 네가 제일 소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이 세상을 마음대로 주관하고 이 세계를 내 땅과 같이 유람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마음입니다. 타락하여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을 찾기 위해서 허덕이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참아들딸이 되십시오! 그러면 그 아버지의 것은 아들딸인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한 위대한 선물, 그러한 심정적인 선물을 내리려고 하늘은 6천 년 동안 수고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여러분은 몇 번이나 배반했습니까? , 아무개야!” 하고 피를 토하면서 울부짖으시던 그 아버지를 얼마나 배반했습니까? “나는 몰라!” 하고 배반한 그 사람이 불쌍하게 되어야지, 하나님이 불쌍해져도 된다는 말입니까? 불쌍한 하나님입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내 마음의 아버지입니다. 원통하고 분하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심정의 모든 아픔과 슬픔을 잊어버리시고 나를 붙안고 통곡할 수 있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고, “오냐, 내 아들딸아!” 하시며 긴 한숨과 더불어 소망의 웃음을 띄는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효자 효녀가 이 땅에 있어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무엇 하러 왔습니까? 단순히 구원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저끄러진 한의 심정을 풀기 위하여 6천 년 동안 수고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붙안고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을 거꾸로 제쳐 버리고 아버지의 알파와 오메가의 심정을 상속받을 수 있는 아들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 위에 그런 아들딸이 나와야 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나님이 바라시고 소원하시는 제일 귀한 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자를 아버지로 삼고 하나님의 독생녀를 어머니로 삼을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아버지였던 동시에 시대적으로 보면 신랑격이었습니다. , 하나님 대신 죄악의 인간들을 구원해야 할 입장에 서 있었다고 보면 아들격이었습니다. 그분은 역사상의 모든 존재가 소망하던 분이요, 섭리적인 전체 목적을 이룰 소망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분을 찾기 위하여 하나님은 6천 년 동안 비통한 역사를 걸어오셨고, 그때까지 왔다 간 수많은 우리의 선조와 성도들도 전부 다 그 한 분을 찾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그런 귀한 분, 한 분밖에 없었던 분을 여러분도 모실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습니까! 그 귀한 분이 여러분의 것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 이상 행복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이루어진다면 돈이 문제가 아니요, 몸뚱이가 문제가 아니요, 세계의 땅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은 귀한 것을 가졌으면 갖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신 분과 더불어 기뻐해야 됩니다. 그래야 주신 분도 기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더 있으면 더 주고 싶다고 하실 수 있을 만큼 기뻐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이 넘쳐흐르는 자는 행복한 자입니다. (9-154)

 

새 시대의 주인공

 

역사노정을 면밀히 관찰해 보면 구약시대는 물질을 제물로 드린 시대요, 신약시대는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린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몸을 대신한 분이요, 마음을 대신한 분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상상대였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신이 은혜를 준다고 알았습니다. 성신은 몸 제물을 드리는 분입니다. 이 몸 제물이 완결되면 신랑이 되신 예수님이 마음 제물을 겸해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합한 자리에서 심정문제가 나옵니다. 과거에는 물질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성신과 예수님을 중심삼고 몸과 마음을 제물로 드리는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가복음 12:30) 했습니다. 이렇게 뜻의 성사는 상대적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물질의 제물시대, 몸과 마음의 제물시대가 지나가고 최후에는 심정의 제물시대가 옵니다. 그 시대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고 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리워서 못 살겠다는 마음, 그분이 죽는 자리에 가면 나도 그 자리에 갈 수 있는 심정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한 심정의 제물시대를 통과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심정의 인연을 배반하여 마음과 몸을 잃어버리고 세상만사를 잃어버렸으니 그것을 다 한 몸에 지녀서 탕감복귀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노정을 거쳐 나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잃어버린 최후의 행복의 요소를 찾는 데 있어서는 그분과 심정의 일체를 이루어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심정이 하나되면 역사적인 거리, 시대적인 거리, 평면적인 거리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에 갈지라도 항상 그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중심삼고 만물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만물과 정을 통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늘과 관계됩니다. 하늘과 마음, 마음과 몸, 몸과 만물의 삼대상(三對象)을 갖추게 됩니다. 그렇게 되어야 땅 위에서 사탄을 지배하고 천리원칙을 통과한 승리의 아들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런 자라야 하나님의 분체(分體)입니다. 남자라면 참아버지의 분체요, 여자라면 참어머니의 분체입니다. 그러한 인연은 억천만 사탄이 와도 못 끊습니다.

어떠한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과 일체적인 관계, 부자의 인연을 맺어야 합니다. 그런 확실하고 실증적인 내용, 체험적인 사실을 갖춘 자만이 끝날에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공의의 심판과정을 넘어갈 수 있을 것이며 사랑을 중심삼은 평화의 세계에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9-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