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3권 26일
척자의 길 (훈독본)
날짜 : 1970. 4. 1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일생을 승리로 이끌려면
사람들이 생활해 나가는 가운데서 어떠한 날도 우연히 맞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람 있는 하루를 맞기 위해서는 아침이면 아침에 그 날의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실천해야 합니다. 계획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아침에 계획한 하루의 일을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잘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그 환경이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또 그 환경의 범위가 사회라든가 세계와 같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결과 짓기 위해서는 그것에 비례해서 그 큰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결의와 추진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더해져서 한 달이 되는 것이요, 한 달 한 달이 더해져서 일년이 됩니다.
이런 1년에 10년이 가해지고 20년 혹은 30년이 가해진 날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입니다. (31-30)
누가 승리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성현이나 위인들도 그들이 자기들의 생애 가운데서 “내가 인류 앞에 개척자의 입장에 서서 승리했다.” 혹은 “희생의 자리에서 승리했다. 온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는 인생을 가졌느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그런 역사를 엮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하는 생애노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승리를 다짐하고 나서는 걸음 앞에서 이 역사적인 패자의 서러움, 역사적인 미완성의 환경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서는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불쌍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나는 이렇게 가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를 비웃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네가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 네가 그렇게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물음 앞에 “억 년을 두고 나는 자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인간세계의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절대자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31-31)
아직도 개척자의 길을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을 두고 볼 때 복귀섭리노정의 하루, 몇 년, 혹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하나님 자체와 그 명령하신 모든 뜻이 승리의 한 날을 가졌느냐? 이렇게 묻게 될 때 하나님도 역시 역사적 운명을 거쳐간 수많은 선조들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역사시대에 승리의 한 기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아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아보면 시련의 역사가 엮어져 왔고, 현실을 바라보면 삭막한 세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래의 암담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이시여, 저를 믿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요, 필시 이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길을 어떻게 돌파하여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영생을 희구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이끌고 있기에 영생의 노정을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의 고통은 거기에 비례되는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가야 할 하나님에게 영생적인 고통, 영생적인 슬픔이 개재되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1-32)
점점 가중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간다는 입장에서 두고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짐이 된 입장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맡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도 번번이 하나님께 짐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격언이 있듯이 자식이 많은 부모는 쉴 날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가진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인간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해야 됩니다. 어느 한 편이 이것을 넘지 않고는 수가 많은 것이 기쁨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책임져야 될 것이냐? 하나님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들다고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시여, 저의 어려움을 맡아 주시옵소서! 제가 어려운 길, 개척자의 노정을 가고 있사오니 제 아픈 모든 사연을 맡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번번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들은 그 기도의 이면에 하나님의 슬픔이 가중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저희들과 같이하시옵소서!”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수천 수만의 십자가를 우리와 같이 져 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종의 자리에 서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죽어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4)
개척자의 행로를 먼저 가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개척자보다도 복귀섭리역사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거듭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개척하는 데 인간 자체가 주동이 되었던 것같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관계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권내에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하고, 역사가 그러해야 하고, 시대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시대에 남을 수 있고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그 분야의 개척자이지만, 그 개척자가 나타나기까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개척자의 행로를 수없이 왕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척자 혹은 선각자로서 선두의 자리에 섰을 때 여러분 자신이 섰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몇 백 번 몇 천만 번 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개척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 천만 번 개척자의 입장에 섰고, 내가 선각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 천만 번 선각자의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선각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타락한 세상의 인간들은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7)
인내와 극복
개척자는 인내심이 없이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역사와 문화를 헤아려 가지고 어떤 나라나 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면 그것들은 수많은 모험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만들어진 유물들이요, 유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물며 하늘세계를 창건하기 위해 인류 구도의 노정을 개척하시는 하나님의 노정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죽음의 고비가 연이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참고 극복해야 할 길이 하나님께서 걸으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인내와 극복이 그분의 생활의 전부요, 희생이 그분의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 투쟁은 습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투쟁이 아니라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더욱 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투쟁이 사방에서 가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시대를 거쳐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를 중심삼은 복잡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다가 기도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그러한 자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몇 번이나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31-39)
하나님이 소원하는 아들딸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니 그 대가를 반드시 내 아들딸들 앞에 돌려주소! 내가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 수고의 대가를 통일교회에 돌려주소!” 하는 입장에서 믿고 일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내심을 부여안고 수난의 노정을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투쟁의 역경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탱해 온 하나님의 신세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를 지탱하면서 나온 하나님의 생활이 얼마나 역경의 생활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야 할 부모의 심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기에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만이 다짐할 수 있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한된 시대권에 있는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노정을 통하여 이 일을 책임져 줄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지 인간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도 일생을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비참한 것이요,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쌍한 것이 왜 생겨났느냐?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넘어가야 할 것은 선을 중심삼고 원수가 침범할 수 있는 악의 요소를 어떻게 박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는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못살더라도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고 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가중된 십자가의 행로를 남기고 가지만 나만은 내 일생에서 아무리 수난의 길을 가고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부딪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내 십자가를 남겨 놓지 않겠다.”고 하며 “내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고 몸부림치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31-40)
두 가지의 십자가를 책임지고 있는 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과정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잘못해서입니다. 그 인류는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와 친척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인연을 집약할 총합실체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진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먼저 어떤 기도를 해야 되느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선조로부터 이어 나온 잘못된 역사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눈물과 피땀으로 메워 나오시던 골짜기를 청산하지 못해 한이 맺힌 하나님을 회개의 눈물로써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 때를 갖지 못하고는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회개하기보다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됩니다. 통일교인들은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되고, 또한 현시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놓고 회개해야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류를 대신한 입장이기 때문에 제물된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탄하는 자리에서는 신앙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게 어려움이 가해져 온다 해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가해져 오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면 이중의 십자가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내 자신이 역사의 산물이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거의 선조들이 책임하지 못한 짐들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이요, 현시대가 책임하지 못한 짐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두 가지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그 십자가를 피하게 되면 나에게 상속되었던 역사적 십자가, 시대적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려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고로 이중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놀음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중의 십자가를 하나님한테 가중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참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자기 일대에 이것을 막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31-42)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됩니다. 내가 뜻을 이루기 위해 책임을 졌다 해도 “하나님이여, 왜 당신은 내가 책임진 것을 몰라줍니까?”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상급은 내 것이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갖고 출발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보다는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넓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수난의 길에 처해 있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통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1-44)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라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만만해 한다거나 “내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몰라주십니까?”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개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의 십자가도 감당 못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가정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가야 할 생애노정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단계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노정에서 나 개인이 한 것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사람, 칭찬을 안 해주면 얼굴을 찡그리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엄청난 역사를 책임지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내적 사연을 알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개척자의 책임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 편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식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피와 뼈와 살을 받아 태어난 몸이기에 그 몸 자체가 어느 한계선을 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의 뜻길을 간다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더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 빚을 안 진다. 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누구의 협조도 원치 않는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어려울 때 번번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기성교회보다 못하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뜻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각자가 가야 할 길이 바쁩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이런 생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31-47)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의 자리에 세우시는 이유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아들딸을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협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책임지고 나오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탄의 공격을 받아야 됩니다. 원수의 고문틀에 매여 채찍을 맞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도 “아버지여, 걱정마시옵소서! 제가 참아 남아지는 날에는 이것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거쳐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교육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걱정마시고 진정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길을 넘지 않고는 인간 세상에 새로운 개척의 동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냥 그대로 해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수많은 종교는 반드시 끝이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1-48)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새로운 효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충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그 기원이 어디에서부터냐? 그 자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하나님이시여, 나를 알아주시옵소서!”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도와주는 하나님한테 민망한 마음을 갖고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어떠한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십니까? 영계와 수많은 투쟁을 하여 길을 트고, 이제까지 관계를 맺고 찾아가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야 합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개인복귀, 가정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축소시켜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당하는 이 시련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맞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당하신 시련이 그런 시련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복귀의 노정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요, 가정복귀의 노정, 혹은 통일가의 개척노정, 민족복귀의 개척의 노정, 국가복귀의 개척노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쓰러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이끌고 오신 하나님 앞에 타락한 인간이 갖추고 나가야 할 본연의 자세입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십자가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져 주려 하는 것이 부자의 관계를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하나님의 동정과 인연을 가지고 내 길은 내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냐? “야, 아무개야! 이런 내 십자가를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느냐?” 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자리가 더더욱 선한 가치의 자리인 것을 알고 책임을 지기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땅 위에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역사에 남지 않으려 해도 기필코 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