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의 길 (천일국 훈독경 제3권 26일) u

訓讀王 | 20191024140002
천일국 훈독경 제3권 26일


개척자의 길 (훈독본)

날짜 : 1970. 4. 1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일생을 승리로 이끌려면

사람들이 생활해 나가는 가운데서 어떠한 날도 우연히 맞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람 있는 하루를 맞기 위해서는 아침이면 아침에 그 날의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실천해야 합니다. 계획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아침에 계획한 하루의 일을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잘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그 환경이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또 그 환경의 범위가 사회라든가 세계와 같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결과 짓기 위해서는 그것에 비례해서 그 큰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결의와 추진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더해져서 한 달이 되는 것이요, 한 달 한 달이 더해져서 일년이 됩니다. 

이런 1년에 10년이 가해지고 20년 혹은 30년이 가해진 날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입니다. (31-30)

누가 승리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성현이나 위인들도 그들이 자기들의 생애 가운데서 “내가 인류 앞에 개척자의 입장에 서서 승리했다.” 혹은 “희생의 자리에서 승리했다. 온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는 인생을 가졌느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그런 역사를 엮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하는 생애노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승리를 다짐하고 나서는 걸음 앞에서 이 역사적인 패자의 서러움, 역사적인 미완성의 환경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서는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불쌍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나는 이렇게 가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를 비웃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네가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 네가 그렇게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물음 앞에 “억 년을 두고 나는 자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인간세계의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절대자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31-31)

아직도 개척자의 길을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을 두고 볼 때 복귀섭리노정의 하루, 몇 년, 혹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하나님 자체와 그 명령하신 모든 뜻이 승리의 한 날을 가졌느냐? 이렇게 묻게 될 때 하나님도 역시 역사적 운명을 거쳐간 수많은 선조들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역사시대에 승리의 한 기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아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아보면 시련의 역사가 엮어져 왔고, 현실을 바라보면 삭막한 세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래의 암담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이시여, 저를 믿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요, 필시 이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길을 어떻게 돌파하여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영생을 희구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이끌고 있기에 영생의 노정을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의 고통은 거기에 비례되는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가야 할 하나님에게 영생적인 고통, 영생적인 슬픔이 개재되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1-32)

점점 가중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간다는 입장에서 두고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짐이 된 입장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맡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도 번번이 하나님께 짐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격언이 있듯이 자식이 많은 부모는 쉴 날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가진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인간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해야 됩니다. 어느 한 편이 이것을 넘지 않고는 수가 많은 것이 기쁨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책임져야 될 것이냐? 하나님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들다고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시여, 저의 어려움을 맡아 주시옵소서! 제가 어려운 길, 개척자의 노정을 가고 있사오니 제 아픈 모든 사연을 맡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번번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들은 그 기도의 이면에 하나님의 슬픔이 가중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저희들과 같이하시옵소서!”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수천 수만의 십자가를 우리와 같이 져 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종의 자리에 서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죽어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4)

개척자의 행로를 먼저 가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개척자보다도 복귀섭리역사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거듭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개척하는 데 인간 자체가 주동이 되었던 것같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관계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권내에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하고, 역사가 그러해야 하고, 시대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시대에 남을 수 있고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그 분야의 개척자이지만, 그 개척자가 나타나기까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개척자의 행로를 수없이 왕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척자 혹은 선각자로서 선두의 자리에 섰을 때 여러분 자신이 섰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몇 백 번 몇 천만 번 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개척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 천만 번 개척자의 입장에 섰고, 내가 선각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 천만 번 선각자의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선각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타락한 세상의 인간들은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7)

인내와 극복

개척자는 인내심이 없이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역사와 문화를 헤아려 가지고 어떤 나라나 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면 그것들은 수많은 모험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만들어진 유물들이요, 유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물며 하늘세계를 창건하기 위해 인류 구도의 노정을 개척하시는 하나님의 노정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죽음의 고비가 연이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참고 극복해야 할 길이 하나님께서 걸으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인내와 극복이 그분의 생활의 전부요, 희생이 그분의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 투쟁은 습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투쟁이 아니라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더욱 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투쟁이 사방에서 가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시대를 거쳐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를 중심삼은 복잡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다가 기도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그러한 자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몇 번이나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31-39)

하나님이 소원하는 아들딸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니 그 대가를 반드시 내 아들딸들 앞에 돌려주소! 내가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 수고의 대가를 통일교회에 돌려주소!” 하는 입장에서 믿고 일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내심을 부여안고 수난의 노정을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투쟁의 역경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탱해 온 하나님의 신세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를 지탱하면서 나온 하나님의 생활이 얼마나 역경의 생활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야 할 부모의 심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기에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만이 다짐할 수 있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한된 시대권에 있는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노정을 통하여 이 일을 책임져 줄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지 인간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도 일생을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비참한 것이요,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쌍한 것이 왜 생겨났느냐?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넘어가야 할 것은 선을 중심삼고 원수가 침범할 수 있는 악의 요소를 어떻게 박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는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못살더라도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고 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가중된 십자가의 행로를 남기고 가지만 나만은 내 일생에서 아무리 수난의 길을 가고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부딪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내 십자가를 남겨 놓지 않겠다.”고 하며 “내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고 몸부림치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31-40)

두 가지의 십자가를 책임지고 있는 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과정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잘못해서입니다. 그 인류는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와 친척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인연을 집약할 총합실체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진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먼저 어떤 기도를 해야 되느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선조로부터 이어 나온 잘못된 역사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눈물과 피땀으로 메워 나오시던 골짜기를 청산하지 못해 한이 맺힌 하나님을 회개의 눈물로써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 때를 갖지 못하고는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회개하기보다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됩니다. 통일교인들은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되고, 또한 현시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놓고 회개해야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류를 대신한 입장이기 때문에 제물된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탄하는 자리에서는 신앙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게 어려움이 가해져 온다 해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가해져 오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면 이중의 십자가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내 자신이 역사의 산물이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거의 선조들이 책임하지 못한 짐들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이요, 현시대가 책임하지 못한 짐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두 가지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그 십자가를 피하게 되면 나에게 상속되었던 역사적 십자가, 시대적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려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고로 이중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놀음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중의 십자가를 하나님한테 가중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참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자기 일대에 이것을 막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31-42)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됩니다. 내가 뜻을 이루기 위해 책임을 졌다 해도 “하나님이여, 왜 당신은 내가 책임진 것을 몰라줍니까?”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상급은 내 것이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갖고 출발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보다는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넓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수난의 길에 처해 있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통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1-44)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라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만만해 한다거나 “내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몰라주십니까?”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개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의 십자가도 감당 못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가정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가야 할 생애노정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단계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노정에서 나 개인이 한 것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사람, 칭찬을 안 해주면 얼굴을 찡그리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엄청난 역사를 책임지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내적 사연을 알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개척자의 책임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 편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식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피와 뼈와 살을 받아 태어난 몸이기에 그 몸 자체가 어느 한계선을 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의 뜻길을 간다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더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 빚을 안 진다. 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누구의 협조도 원치 않는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어려울 때 번번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기성교회보다 못하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뜻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각자가 가야 할 길이 바쁩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이런 생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31-47)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의 자리에 세우시는 이유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아들딸을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협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책임지고 나오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탄의 공격을 받아야 됩니다. 원수의 고문틀에 매여 채찍을 맞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도 “아버지여, 걱정마시옵소서! 제가 참아 남아지는 날에는 이것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거쳐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교육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걱정마시고 진정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길을 넘지 않고는 인간 세상에 새로운 개척의 동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냥 그대로 해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수많은 종교는 반드시 끝이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1-48)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새로운 효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충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그 기원이 어디에서부터냐? 그 자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하나님이시여, 나를 알아주시옵소서!”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도와주는 하나님한테 민망한 마음을 갖고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어떠한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십니까? 영계와 수많은 투쟁을 하여 길을 트고, 이제까지 관계를 맺고 찾아가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야 합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개인복귀, 가정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축소시켜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당하는 이 시련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맞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당하신 시련이 그런 시련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복귀의 노정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요, 가정복귀의 노정, 혹은 통일가의 개척노정, 민족복귀의 개척의 노정, 국가복귀의 개척노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쓰러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이끌고 오신 하나님 앞에 타락한 인간이 갖추고 나가야 할 본연의 자세입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십자가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져 주려 하는 것이 부자의 관계를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하나님의 동정과 인연을 가지고 내 길은 내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냐? “야, 아무개야! 이런 내 십자가를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느냐?” 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자리가 더더욱 선한 가치의 자리인 것을 알고 책임을 지기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땅 위에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역사에 남지 않으려 해도 기필코 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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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국 훈독경 제3권 26일

개척자의 길 

날짜 : 1970. 4. 12(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일생을 승리로 이끌려면

사람들이 생활해 나가는 가운데서 어떠한 날도 우연히 맞는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람 있는 하루를 맞기 위해서는 아침이면 아침에 그 날의 계획을 하고 그 계획을 실천해야 합니다. 계획을 실천하려면 자기의 뜻과 일치시킬 수 있는 환경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는 내 뜻에 부합되는 환경이 돼 있지 못하기에 여기에는 온갖 고충이 벌어지는 것이요, 선악의 분기점이 엇갈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그 방향을 따라서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백이면 백 사람 전부가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하루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환경과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고 그 환경을 밀고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아침에 계획한 하루의 일을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하루의 생활 가운데서 잘 느끼게 됩니다. 

더욱이 그 환경이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가로막고 있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또 그 환경의 범위가 사회라든가 세계와 같이 크면 클수록 자신의 하루의 생활을 승리로 결과 짓기 위해서는 그것에 비례해서 그 큰 기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결의와 추진력을 가져야 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날이 승리의 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더해져서 한 달이 되는 것이요, 한 달 한 달이 더해져서 일년이 됩니다. 

그 한 달을 중심삼고 볼 때, 한 달은 하루를 30번 더하면 한 달이 되지요? 그 한 달도 우리가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달의 승리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한 달의 환경에 갖추어진 복잡한 모든 사연들, 계획한 갈 길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여건들을 타파할 수 있는 추진력과 결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없어 가지고는 한 달의 계획을 승리로 끝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일년을 중심삼고 볼 때, 일년은 열두 달 365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일년의 승리를 다짐하기 위해서 어떤 목표를 그 해의 원단에 정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그 일년 동안의 모든 시련과 기타 사정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자기와 일치 안 되면 거기에 반발적이요, 배척적이요, 파멸적인 환경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일년을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삼백 예순 날 이상을 극복할 수 있는 투지력 혹은 추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일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1년에 10년이 가해지고 20년 혹은 30년이 가해진 날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길입니다. (31-30)

누가 승리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일년을 두고 볼 때, 거기에는 벗어날 수 없는 어려움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일년과 마찬가지의 일생을 살아 가지고 “나는 이렇게 해서 승리했다.” 할 수 있는 날을 가졌느냐? 그런 사람이 역사상에 없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성현이나 위인들도 그들이 자기들의 생애 가운데서 “내가 인류 앞에 개척자의 입장에 서서 승리했다.” 혹은 “희생의 자리에서 승리했다. 온 인류가 소망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는 인생을 가졌느냐? 아직까지 그 누구도 갖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역사과정을 거쳐왔고, 오늘날 우리도 그러한 역사시대에 접어들어 그런 역사를 엮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싸워 나가야 하는 생애노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계획을 세워 가지고 승리를 다짐하고 나서는 걸음 앞에서 이 역사적인 패자의 서러움, 역사적인 미완성의 환경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서는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초라하고 불쌍한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희망을 품고 “나는 이렇게 가겠다.”고 하며 나선다면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를 비웃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네가 과연 그럴 수 있겠느냐? 네가 그렇게 해낼 수 있겠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의 물음 앞에 “억 년을 두고 나는 자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인간세계의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절대자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31-31)

아직도 개척자의 길을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의 복귀섭리노정을 두고 볼 때 복귀섭리노정의 하루, 몇 년, 혹은 세기 세기를 거쳐오면서 하나님 자체와 그 명령하신 모든 뜻이 승리의 한 날을 가졌느냐? 이렇게 묻게 될 때, 하나님도 역시 역사적 운명을 거쳐간 수많은 선조들과 같은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절대자이신 하나님도 역사시대에 승리의 한 기점을 마련하지 못한 것을 오늘날 우리가 상속받아 가지고 가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엄청난 일입니다. 

여러분의 일생을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6천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거쳐오셨습니다. 성경상으로 보아서 6천 년이지 이것은 수백만 년, 수억 년에 해당할 수 있는 기나긴 세월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런 역사를 엮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느 한 날 승리하고 싶지 않은 날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원수와 싸워 가지고 그 진영을 격파하고 거기에 승리의 초석을 쌓아 안식할 수 있는 한 날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추구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날을 갖지 못하고 싸움의 행로, 개척자의 행로를 가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그 뒤를 따르고 그 사명을 상속받아 나서겠다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는 얼마나 결의해야 되고 얼마나 맹세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의 과거를 돌아보면 시련의 역사가 엮어져 왔고, 현실을 바라보면 삭막한 세계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미래의 암담한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자신의 옷깃을 여미고 “하나님이시여, 저를 믿으시옵소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이요, 필시 이것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시기에 이 길을 어떻게 돌파하여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까지 하나님은 기뻐하며 걸어 나온 날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 패자의 서러운 마음을 품고 나오신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제1차 약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했고, 제2차 약속도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했으며, 제3차, 제4차, 혹은 역사시대를 거쳐오면서, 수많은 민족들의 배후를 더듬어 오면서 인간들로 말미암아 실패를 거듭하신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오늘은, 이 해는 내가 승리한다고 다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입장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할 때 이 전체의 책임을 짊어진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한 분인지를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아서 알 수 있느냐? 우리들의 하루의 생활을 보아서 알 수 있고, 일년의 생활을 보아서 알 수 있으며, 또한 일생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영생을 희구하고 있는 수많은 인간들을 이끌고 있기에 영생의 노정을 향하여 나가는 하나님의 고통은 거기에 비례되는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가야 할 하나님에게 영생적인 고통, 영생적인 슬픔이 개재되어 있지 않겠느냐 하는 문제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1-32)

점점 가중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하나님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생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간다는 입장에서 두고 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짐이 된 입장에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짐을 내가 대신 맡을 수 있는 입장에 있느냐? 이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도 번번이 하나님께 짐이 되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기쁨보다 슬픔이 더 가중될 것이 아니겠느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는 격언이 있듯이 자식이 많은 부모는 쉴 날이 없습니다. 그와 같은 책임을 가진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개체의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모양이 점점 더 알록달록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모양도 생기고 저런 모양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합하여 하나의 형태를 갖춘다 하더라도 그 형태가 전부 하나님의 소망의 실체가 될 수 있느냐? 될 수 없습니다. 그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가중된 십자가를 짊어지고 하나님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인간이 고난의 길을 넘든가 해야 됩니다. 어느 한 편이 이것을 넘지 않고는 수가 많은 것이 기쁨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책임져야 될 것이냐? 하나님이 책임져야 되느냐, 우리가 책임져야 되느냐? 하나님은 아무리 힘이 들더라도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힘들다고 자식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힘이 들면 들수록 그것을 하나님이 책임질 것입니다. 만일에 책임진 것을 해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자신을 두고 자탄할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쳐야 할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려움이 있으면 “하나님이시여, 저의 어려움을 맡아 주시옵소서! 제가 어려운 길, 개척자의 노정을 가고 있사오니 제 아픈 모든 사연을 맡으시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번번이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들은 그 기도의 이면에 하나님의 슬픔이 가중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아버지라는 말이 얼마나 두려운 말인가를 여러분들은 느껴야 되겠습니다. 아버지라는 그 말 가운데는 천지의 사연이 엉클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저희들과 같이하시옵소서!”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수천 수만의 십자가를 우리와 같이 져 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종의 자리에 서달라는 말이요, 나를 위하여 죽어 달라는 말이라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4)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효자

하나님께서 주체적인 입장에서 책임을 짊어지고 지금까지의 역사를 수습해 나오셔서 그나마 오늘날과 같은 역사를 맞이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 역사는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야 될 입장에 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정지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오늘도 그렇거니와 미래도 그럴 수 있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길을 누가 대신 책임질 것이냐? 여기에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나님의 한도 책임져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년의 십자가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을 알고, 일년의 생활 가운데서도 수많은 한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6천 년의 역사노정을 거쳐오셨습니다. 그간 얼마나 많은 슬픈 사연이 맺혔겠으며 외로운 고빗길이 많았겠습니까? 인간으로는 헤아릴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불쌍한 처지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도하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부르기가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가중된 십자가를 남겨 놓게 된 입장에서 아버지를 부른다는 것이 체면이 없는 일임을 발견할 수 있을 때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 당당코 자세를 갖추어 가지고 “하나님이여! 저를 자랑하고, 제가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있으니 이 책임과 더불어 저를 지켜 주소서.” 하는 자리에 있기보다는 그 내심적인 십자가를 염려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통일교회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 가중된 십자가를 지고 나오시는 아버지를 헤아리고 자식된 도리를 다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수고하시는 부모 앞에 효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는 먼저 눈물로써 부모를 위로하고 짊어진 십자가를 당당하게 지고 가야 합니다. 

당신이 걸어온 십자가의 길은 자식을 위하기에 비참하였다는 사실을 통고하는 마음을 가지고 “아버지여, 더 이상 고생하지 마시옵소서! 아버지여, 저를 위하여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슬픔을 당하면서 나오신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효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너무나 뻔뻔스러웠고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1-35)


개척자의 행로를 먼저 가신 하나님

오늘날 우리가 도도하고 자신감을 가진 자리에 서 있다면 그 자리에는 아직까지 하나님이 같이 하실 수 없습니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메워야 할 구렁텅이가 남아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저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시련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안될 개척자의 노정이 남아 있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떤 개척자보다도 복귀섭리역사에서 개척자의 사명을 거듭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인간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영계에 가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그 누가 세계를 위하여, 혹은 역사를 자기가 책임져 가지고 자기 자체를 본받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할진대 그는 망령된 사람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보다도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통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 위의 한 나라면 한 나라에는 그 나라를 개척한 개척자가 있고, 혹은 지역이면 지역에도 그 지역을 개척한 개척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개척하는 데 인간 자체가 주동이 되었던 것같이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관계되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권내에서 하나님의 주관을 받아야 하고, 역사가 그러해야 하고, 시대가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시대에 남을 수 있고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에 그 분야의 개척자이지만, 그 개척자가 나타나기까지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개척자의 행로를 수없이 왕래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천 번 개척해 놓고 한 번 내세우기를 주저하는 하나님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천 번 수고하여 쌓은 승리의 터전을 한 번 잘못 내세우면 천 번 수고한 것이 일시에 다 깨어져 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시 수습하려면 몇 천 번 가중된 개척자의 행로를 다시 더듬어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 땅위에 한 가지 일을 맡겨서 개척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가중된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 앞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개척자 혹은 선각자로서 선두의 자리에 섰을 때 여러분 자신이 섰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몇 백 번 몇 천만 번 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개척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 천만 번 개척자의 입장에 섰고, 내가 선각자의 입장에 서기 전에 하나님이 몇 천만 번 선각자의 입장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한 날 개척자로서 승리를 했다고 자랑해 보지 못한 하나님이요, 선각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시대를 앞놓아 가지고 그 척도를 좁혀 나오며 싸웠지만 자랑해 보지 못한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선각자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될 때, 오늘날 타락한 세상의 인간들은 너무나 도도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31-37)

인내와 극복

개척자는 인내심이 없이는 그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시점 자체가 모험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은 전부 다 생소한 것들이요, 전부 다 새로운 손길을 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역사와 문화를 헤아려 가지고 어떤 나라나 민족이 문화민족이라고 칭송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면 그것들은 수많은 모험을 거쳐 가지고 이루어진 것이요,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서 만들어진 유물들이요, 유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이 땅에 역사시대의 한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에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하늘세계를 창건하기 위해 인류 구도의 노정을 개척하시는 하나님의 노정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그 길을 개척하기 위한 하나님의 입장은 말할 수 없는 인내를 가지고 고난을 극복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참아야 하는 길이냐? 죽음의 고비가 연이어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참고 극복해야 할 길이 하나님께서 걸으신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원수가 없으면 모르거니와 원수가 있어 가지고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 어느 때 원수의 습격을 받아 지금까지의 천년공사(千年功事)가 일시에 파탄을 당할지 모르는 길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초초한 심정을 지니고 수난의 길을 극복해 나오는 이 순간에도 원수들은 화살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은 기진맥진한 자리에서 흑백을 가릴 수 있는 소망의 한 때를 바라보면서 나오고 있는 때까지도 원수들은 하나님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칠 수 있는 자리요, 쉬고 싶은 자리에서도 원수를 맞아 가지고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 할 입장이니 어느 한 날 마음놓고 안심할 때가 있었겠느냐? 그러기에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내와 극복이 그분의 생활의 전부요, 희생이 그분의 생활의 전부입니다. 그 투쟁은 습관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되풀이되는 투쟁이 아니라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더욱 더 복잡다단하고 광범위한 투쟁이 사방에서 가해져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시대를 거쳐오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힘드시겠는가를 여러분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동양이 밤이 되어 쉬는 시간이면 서양은 낮입니다. 동양 사람들이 밤이 되어 쉬는 시간에 서양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을 중심삼고 투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지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서 24시간 어느 한 순간이라도 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배제하고는 이 세상의 일이 해결될 수 없다고 볼 때, 한 가지에서부터 천만사에 이르기까지 전부 관여해 가지고 선의 결정권을 내려야 하는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지극히 불쌍한 분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자기를 중심삼은 복잡한 문제를 놓고 기도하려다가 기도할 수 없어 입을 다물고 눈물을 흘리는 그러한 자리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몇 번이나 있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31-39)

하나님이 소원하는 아들딸

“내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어려움이니 그 대가를 반드시 내 아들딸들 앞에 돌려주소! 내가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통일교회를 위해 하는 것이니 그 수고의 대가를 통일교회에 돌려주소!” 하는 입장에서 믿고 일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의 내심을 부여안고 수난의 노정을 극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투쟁의 역경을 품고 내일의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몸부림치는 신세가 지금까지의 역사를 지탱해 온 하나님의 신세가 아니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를 지탱하면서 나온 하나님의 생활이 얼마나 역경의 생활이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것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잃어버린 아들딸을 찾아야 할 부모의 심정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기에 나만이 책임질 수 있다고 하며 하나님만이 다짐할 수 있는 길이 복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제한된 시대권에 있는 한 사람이 자기의 일생노정을 통하여 이 일을 책임져 줄 것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일은 하나님만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역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자신만이 책임질 수 있는 일이지 인간은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복귀의 노정인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인간 자신이 그런 입장에 계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도 일생을 사는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음이 비참한 것이요, 불쌍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불쌍한 것이 왜 생겨났느냐? 인간시조의 타락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넘어가야 할 것은 선을 중심삼고 원수가 침범할 수 있는 악의 요소를 어떻게 박멸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는데는 잘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못살더라도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남겨 주지 않고 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효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왔다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생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가중된 십자가의 행로를 남기고 가지만 나만은 내 일생에서 아무리 수난의 길을 가고 아무리 어려운 역경에 부딪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내 십자가를 남겨 놓지 않겠다.”고 하며 “내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몸부림치는 아들딸을 하나님은 보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31-40)

두 가지의 십자가를 책임지고 있는 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과정의 모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잘못해서입니다. 그 인류는 우리의 조상이요, 우리와 친척의 인연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그 인연을 집약할 총합실체로서 태어난 것입니다. 결국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대신 짊어진 역사적인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정성들이는 무리가 있다면, 그들은 먼저 어떤 기도를 해야 되느냐? 회개의 기도를 해야 됩니다. 선조로부터 이어 나온 잘못된 역사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안됩니다. 눈물과 피땀으로 메워 나오시던 골짜기를 청산하지 못해 한이 맺힌 하나님을 회개의 눈물로써 위로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한 때를 갖지 못하고는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가 책임을 다한다고 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회개하기보다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됩니다. 통일교인들은 역사를 책임졌기 때문에 역사를 놓고 회개해야 되고, 또한 현시대를 책임졌기 때문에 이 시대를 놓고 회개해야 됩니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인류를 대신한 입장이기 때문에 제물된 입장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는 지금까지 실패의 역사를 거듭해 왔던 수많은 선조들과 실패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는 현재 30억 인류를 대신한 서글픈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연을 알고 하나님 앞에 실낱같은 위로의 길이라도 개척하여 역사시대에 관계를 맺게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에게 감사해야 되고, 또한 역사시대에 왔다갔던 수많은 선지선열들도 기필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일생에서 그럴 수 있는 한 때를 어느 때에 남길 것이냐? 그 일생을 통하여 그런 한 때를 남길 수 있을 것이냐, 없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현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역사의 배반자냐, 아니면 역사의 지휘자냐? 또 시대의 배반자냐, 시대의 지휘자냐? 이런 생각을 해 볼 때, 하나님은 역사를 지휘하기 위해서 싸워 나왔고, 시대를 지휘하기 위해서 싸워 나오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내가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역사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 순간, 시대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한 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한 기점을 갖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신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는 내가 이러이러한 각오를 하고 이러이러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응당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순간이요, 한때밖에 못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을 연속시켜 일년을 거쳐야 되고, 일년을 연속시켜 10년, 그 10년을 연속시키기 위하여 일생을 가야 하는 것이 신앙길입니다. 그런 승리의 기점을 하루, 그 하루를 한 해, 그 한 해를 10년, 그 10년을 생애로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공고화시키고 심정을 공고화시켜 가지고 나아가는 길이 신앙자의 길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자탄하는 자리에서는 신앙길이 성립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게 어려움이 가해져 온다 해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가해져 오는 십자가를 피하려 하면 이중의 십자가가 남아진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내 자신이 역사의 산물이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과거의 선조들이 책임하지 못한 짐들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이요, 현시대가 책임하지 못한 짐이 나에게 가중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는 두 가지의 짐을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그 십자가를 피하게 되면 나에게 상속되었던 역사적 십자가, 시대적 십자가를 하나님 앞에 돌려버리는 결과가 됩니다. 그런 고로 이중적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놀음이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길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라는 존재는 역사를 지탱하고 시대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은 역사를 탕감해야 하고 시대를 탕감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런 관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재림역사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현실은 이중적인 역사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현실의 승리는 역사적인 승리를 가져 올 수 있으며, 현실의 실패는 역사적인 실패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임을 회피하게 되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중의 십자가를 하나님한테 가중시키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려 버려서는 안될 사실이요,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하게 해서는 안될 사실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참상이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생각하고 자기 일대에 이것을 막아내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31-42)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

그러면 이러한 입장에 있는 우리 자신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해야 하는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어야 됩니다. 내가 뜻을 이루기 위해 책임을 졌다 해도 “하나님이여, 왜 당신은 내가 책임진 것을 몰라줍니까?”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선생님은 그런 기도를 해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상급은 내 것이다.” 하는 이런 마음을 갖고 출발해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동정을 받을 수 있게 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생각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갖추고 있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보다는 너무나 부끄러움을 느끼면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울 수 없는 입장인 것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심정적인 동정을 받을 수 있는 자리가 넓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수난의 길에 처해 있는 것을 알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통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이만하다면, 민족이 질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은 이보다 훨씬 크지 않겠는가? “그 십자가를 제가 지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면 현재의 편안한 자리가 도리어 고통으로 느껴지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느끼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은 하나님이 가실 길을 대신해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일생 동안에 편안한 날을 갖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공연한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행복했다가는 행복한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수 있고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는 동기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되다, 즉 받는 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받는 자리요, 내가 희생하려고 하는 자리는 어디까지나 주는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희생하는 자리가 복 받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럼, 왜 희생하는 자리가 복 받는 자리냐?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희생해 나오셨기 때문이요, 그 자리가 하나님 편에 설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31-44)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라

오늘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창건하는 개척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자신만만해 한다거나 “내가 아버지의 뜻을 위해서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왜 나를 몰라주십니까?” 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개척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사람이요, 자기 스스로의 십자가도 감당 못 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인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가정이 가야 할 길을 가야 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가야 할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통일교인들이 가야 할 길입니다. 

이처럼 개인이 가야 할 생애노정에 남아 있는 십자가의 단계가 많은 데도 불구하고 그 노정에서 나 개인이 한 것을 칭찬해 달라고 하는 사람, 칭찬을 안 해주면 얼굴을 찡그리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엄청난 역사를 책임지고 나오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까지의 역사시대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내적 사연을 알지 못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현재의 입장에서는 개척자의 책임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탄 편에서 태어난 자신의 인식권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피와 뼈와 살을 받아 태어난 몸이기에 그 몸 자체가 어느 한계선을 넘지 못한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습관적인 생활을 하면서 통일교회에서 하나님의 뜻길을 간다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다.”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은 소용없습니다. 그런 자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자기의 십자가를 더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절대 빚을 안 진다. 내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 누구의 협조도 원치 않는다.” 하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어려울 때 번번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통일교회 교인들이 나를 몰라준다고, 기성교회보다 못하다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뜻길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각자가 가야 할 길이 바쁩니다. 자기가 가야 할 길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이런 생활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이것이 급선무입니다. 

오늘 여러분 각자가 정상적인 편안한 자리에서 뜻길을 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길이 아닙니다. 그 자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십자가를 가중시키는 자리라는 것을 여러분이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 없고 미안하고 황송한 마음, 어떻게 자기의 심정을 가눌 수 없이 부끄러운 마음,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들의 주위를 휩쓸어 여러분의 생활을 이끌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자신이 되지 못한 자리는 하나님 앞에 십자가를 짊어지우는 자리임이 틀림없습니다. (31-47)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의 자리에 세우시는 이유

나라는 존재는 역사적인 죄의 인연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벗어나려면 역사를 대신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이 시대의 산물이니 시대를 대신하여 회개해야 합니다. “과거의 아담 가정, 노아 가정, 아브라함 가정, 모세 노정에 있었던 잘못된 모든 사실들이 저희 자신에게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저희 가정만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협조해 주시지 않아도 저는 그런 길을 안 가겠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불쌍하게 생각하셔서 협조해 주신다고 해도 저의 짐은 제가 지겠습니다.”라고 하는 다짐을 해 봤어요? 

하나님은 그런 조건을 세워나가도록 하기 위해 여러분을 십자가의 노정으로 몰아 내는 것입니다. 3일 노정은 어느 때나 있습니다. 이 3점이라는 것은 반드시 중심을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직선은 안됩니다. 꺾어져서 넘어가야 합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의 협조 없이 혼자 가야 됩니다. “아버지, 저만이 갑니다.” 해야 합니다. 이것이 새로운 역사시대의 출발을 예고하고 나서는 신앙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협조를 받아 가지고 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의 신앙길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중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나온 걸음이 아닙니까? 그러니 “하나님이여, 저를 배반하시옵소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탕감복귀하는 것입니다. “저를 모른다 하시옵소서. 최후의 수난의 때까지 당신이 저를 몰라본다 하더라도 저는 효의 도리를 다하겠습니다. 이 길은 응당 제가 가야 할 길입니다.” 하는 결의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를 안 도와주더라도 그의 후손은 영원히 도와주고 싶은 것입니다. 심정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복귀도상에서 아들딸을 책임지고 나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협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책임지고 나오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는 응당 사탄의 공격을 받아야 됩니다. 원수의 고문틀에 매여 채찍을 맞는 자리, 그러한 자리에 들어가도 “아버지여, 걱정마시옵소서! 제가 참아 남아지는 날에는 이것을 천 배 만 배로 갚아 드리겠습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깊은 심정의 골짜기를 거쳐 새로운 결의와 새로운 교육을 받는 자리에서도 “아버지, 걱정마시고 진정하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길을 넘지 않고는 인간 세상에 새로운 개척의 동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세상이 그냥 그대로 해결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수많은 종교는 반드시 끝이 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1-48)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할 우리

여러분은 새로운 효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충의 길을 모색해야 되고, 새로운 개척자의 길을 모색해야 됩니다. 그 기원이 어디에서부터냐? 그 자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를 중심삼아 “하나님이시여, 나를 알아주시옵소서!” 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기에서부터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도와주는 하나님한테 민망한 마음을 갖고 개척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어떠한 자리에서 기도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같이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불쌍하십니까? 영계와 수많은 투쟁을 하여 길을 트고, 이제까지 관계를 맺고 찾아가는 그 마음이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을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세계를 위하여 고생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가야 합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개인복귀, 가정복귀, 민족복귀, 국가복귀, 세계복귀를 해야 할 운명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70, 80년밖에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축소시켜 오늘 이 세계를 위하여, 이 나라를 위하여, 이 민족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제가 당하는 이 시련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하여 맞는 것으로 인정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가 당하신 시련이 그런 시련이었기 때문에 그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싶어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언제 기뻐해 보셨습니까? 오늘날 신령한 사람들이 기도해 보고는 선생님이 불쌍하다고들 하지요? 그렇지만 선생님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하십니다. 나보다 몇 천만 배 더 불쌍한 분이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나는 불쌍하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동정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동정보다는 민족의 동정을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민족적인 여러분이 되게 하려고 그럽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복귀의 길을 개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까운 통일교회라 할진대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지고도 “하나님이시여, 저를 세우시옵소서!”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효의 자리입니다. 

그러기에 다리를 펴고 편히 잠을 잔 사람이 있다면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옷을 입고 나서는 때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고, 밥을 먹고 나서도 부끄러움을 느껴야 되겠습니다. 눈물의 길을 버리고 떠날 수 없는 것이 신앙길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이 제시한 개인복귀의 노정을 개척해야 하는 것이요, 가정복귀의 노정, 혹은 통일가의 개척노정, 민족복귀의 개척의 노정, 국가복귀의 개척노정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내가 망하면 하나님도 쓰러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귀섭리를 이끌고 오신 하나님 앞에 타락한 인간이 갖추고 나가야 할 본연의 자세입니다. 가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십자가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져 주려 하는 것이 부자의 관계를 가진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그런 하나님의 동정과 인연을 가지고 내 길은 내가 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냐? “야, 아무개야! 이런 내 십자가를 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느냐?” 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자리가 더더욱 선한 가치의 자리인 것을 알고 책임을 지기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이 땅 위에 새로운 개척자의 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은 역사에 남지 않으려 해도 기필코 남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민족, 새로운 세계가 형성되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