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국 훈독경 제3권 24일
하늘이 가는 길 (훈독본)
날짜 : 1971. 11. 4(목)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이 가는 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우리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은 신앙길을 가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과 타락된 인간들 혹은 하나님과 타락된 세계에서 신앙길을 가고 있는 인간, 또 우리 통일교회의 개개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으며 하나님이 가는 길 앞에 우리의 신앙자들은 언제나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쉽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통일교회의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고 있는 길과 하나님이 가고 있는 길이 같지 않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이냐? 우리 통일교인들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역사와 이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오는 하나님이 걸어 나온 역사와는 일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로서 하나님이 가는 길 앞에 나섰다는 나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변화무쌍한 하루의 생활을 중심삼고 미루어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들을 믿고 이끌고 가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가는 길이 높은 길이라고 하면 우리들이 가는 길은 낮은 길일 것이요, 하나님이 가는 길이 똑바른 길이라 하면 우리들이 가는 길은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며 간다고 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슬픔의 길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자기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스스로 기쁨의 길을 동경하고 찾아가는 자들이 아니겠느냐? 내가 밥을 먹고 사는 하루의 생활에 하늘이 같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전체의 생활환경을 미루어 봐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기뻐하기를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못 되고 도리어 하나님에게 가중된 짐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는 이 신앙길에 들어온 후의 시일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남기는 것보다 도리어 슬픔의 내연을 많이 남기는 무리가 아닐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51-17)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면
하나님이 붙들어 줘 가지고 나를 대하여 기뻐하던 한 때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기뻐하던 한 때를 언제나 그리워하게 됩니다. 지난날에 기뻐한 한 날이 있었거든, 하나님이 그 기쁨을 다시 맞이하고 오늘날의 환경에 사는 우리 앞에 그런 기쁨을 갖다 주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수난의 길을 거치고 얼마만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되느냐? 그런 기쁨을 자극하는 한 때의 체험을 갖지 않고는 수난길에서 각성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한 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배가 되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모종의 결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기쁨의 한 때를 그리워할 적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는 것보다 얼마나 부끄러운 수난을 하나님 앞에 짊어지웠던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다시는 그런 입장에 서서는 안 되겠다고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하루하루의 신앙길을 가누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연속적으로 우리로 말미암아 슬픔을 푸실 수 있는 그런 무엇을 스스로 다짐하지 못하는 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평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을 수 있는 한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현실에 있어서 하나님이 염려할 수 있는 길을 가서는 안되겠다고 해 가지고 스스로를 치고 스스로를 죄어 구속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옛날보다도 더 좋을 수 있는 무엇을 바라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수고를 보다 가중시키게 되고 슬픔만 재촉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태도를 가지고는 보다 깊은 신앙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의 인연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내 한 자체의 변모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된 자리에서는 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여기에는 더 어려운 결과가 첨부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자의 가는 길은 간추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복잡한 환경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단한 자리에 처해 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가 바라는 소원을 세워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는 길의 방향이 하나님과 언제나 일치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박자를 맞춰 드려야 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반드시 그 환경과 고립된 자리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자리가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신앙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는 방향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사람은 신앙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51-19)
신앙길은 하늘이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하는 길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이라는 것은 한 일면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중심삼고 360도가 둘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려 가야 되는 길이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그 한 길만 맞추어 가지고도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하며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고생을 당하는 쓰라림을 극복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무엇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과 맞추기란 힘들 것입니다.
우리 개인이 가는 길이 하늘과 엇갈린다고 할 때 환경이라든가, 전체가 가는 길이 더더욱 하늘과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을 따라가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일 것이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우리의 뒤에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가야 됩니다. 앞서가는 하나님은 개척의 사명을 해야 되는 것이요, 우리는 개척의 사명을 하지 않고 그 개척한 것을 본받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일푼이라도 갖고 비판하면 할수록 그것은 손해 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은 따라가는 길일 것입니다. 하라는 대로 해야 된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이 주장하는 그 주장이 무엇인지 모색해야 됩니다.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자리를 맞게 될 때 그 기쁨의 자리가 도리어 하늘의 길을 막을 수 있는 원수의 제물이 되는 자리가 아니냐, 하나님에게 슬픔을 가할 수 있는 자리고 사탄에게 기쁨을 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냐 할 때 그걸 생각만 해도 180도 돌아설 수 있는 나 자신, 그걸 생각만 해도 그 자리를 일시에 초월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51-21)
자신의 신앙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반성해 보라
내가 오관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을 어떻게 수습해 가지고 하나님과 박자를 맞출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에 있어서도 바로 이 시간에 오관으로 느끼는 그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을 향해서 수직으로 올라가는 방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늘상 조정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서 가지는 못하더라도 상대적 입장에서 보조라도 맞추고 상하의 방향이라도 일치되고 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의 신앙길이 얼마나 모호했고 얼마나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자리였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은 끌고 가는 데 있어서 기쁜 길, 좋은 길로 끌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인간 외에 원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판도라는 것은 하늘 편이 아닙니다. 사탄의 도구요, 사탄의 장비요, 사탄의 무기입니다. 사탄이 어느 때든지 명령을 내려서 하늘이 가고자 하는 길을 백방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가는 길은 환경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로막고 있는 환경을 제거하고, 거기에 충정된 환경을 개척해 놓지 않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을 혼자 갈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인간을 뒤에 두고 원수와 싸우면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못할수록,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뒤에서 사탄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되어 있다 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얼마나 빚을 지고 얼마나 부끄러운 자체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과 생애노정을 미루어 보게 될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평탄한 자리에서 갈 수 있는 그때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때는 어느 때가 되어야 될 것이냐? 이 지구성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탄을 대해 싸울 전폭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전체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앞에서 안식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51-23)
끝까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민주세계와 기독교 문화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민주세계와 기독교 문화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기독교면 기독교를 보게 될 때,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특정한 종단이 있으면 그 종단은 그 종단을 창시한 창시자의 뜻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파가 있지만,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할 길은 두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하늘이라는 명제를 앞에 놓고 고생하고 수난길을 즐거이 가겠다고 나선 무리가 있다면 그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모색한 무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끝까지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끝이라는 것이 나 혼자 죽을 수 있는 입장에서 죽어 갔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끝까지라는 말은 가정적인 기준에서 싸울 수 있는 입장에 선 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자리, 민족적인 싸움 이내에서의 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서 바라보는 끝, 그래 가지고 세계를 향한 노정을 남긴 자리에서의 끝이 아니라 세계의 끝을 지내고 나서 이제는 이 이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의 끝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신앙길을 따라 하나님과 더불어 일생 동안 혹은 생애를 통하여 가야 할 그 누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을 모색하는 사람은 평안이니, 안식이니, 희망이니, 소망이니, 영광이니 하는 것을 바라는 마음 가지고는 그 끝에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내세워 가지고 그 무엇을 그리는 자리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자 하는 자만이 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언제 그 끝 된 자리에 서 봤느냐? 개인이 아니고 가정, 가정이 아니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끝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느냐? 하나님은 그 끝이 오기를 얼마나 바랄 것이냐? 내 개인의 끝이 이 순간에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개인의 끝을 결정짓는다고 맹세한 입장에서 얼마나 자기 신앙길을 다짐해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렇지 못한 나 자신임을 발견하거든 자신의 신앙태도를 뜯어고쳐야 됩니다. 지금의 내 신앙자세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며 그것을 무자비하게 타파해 버리고 새로이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언제 끝을 결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까? 혹은, 민족과 더불어 언제 끝까지 왔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 봤습니까? 혹은, 세계와 더불어 언제 그런 자리에 서 봤습니까? 그러한 자리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은 하늘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활의 내막을 선포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의 노정을 엮어 가고 있다는 배후의 사실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된 말입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계는 엇갈린 세계, 반대의 세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죽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죽는 그 자리에서부터 세상의 인연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새로운 인연이 결정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는 이별하게 되고 하나는 상봉하게 되기 때문에 하늘이 바라는 제일보의 기준이 그 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단연코 그런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51-25)
신앙생활의 본질
하나님이 가는 길과 우리 인간이 가는 길은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늘과 사탄이 정면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이 틀어지면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를 돌보지 말고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 혹은 목사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에게 뭘 해달라고 합니다. 그렇게 수천 년 동안 기도해 온 교단이 어찌하여 지금 와서는 무력해졌습니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는 방향권과 하나님이 전투하고 있는 전쟁 마당과는 별도의 환경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떠냐? 그런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 가지고 자기가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합니다.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했다면 거기에는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구, 어렵습니다. 하늘이여,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전진해 나가던 그 전선을 뒤에 두고 후퇴하여 자기를 이끌어 주라는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합니다. 전체를 위해서 선두에 서 가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보조를 맞추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 입장을 버리고 후퇴해 가지고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한다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됩니다. 벌을 피해 가려는 자세보다 자기가 행한 데 대한 응보를 당연한 것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51-27)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선두에 서서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은, 낙오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 전선을 지켜야지 개인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무리 기도해 보라는 거예요. 그건 일각이라도 도와줘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가자.’ 해도 가겠으면 가고 말겠으면 말고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늘 길을 못 갑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사탄한테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한테 걸리게 되면 사탄은 삼면에 닻을 걸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꽁꽁 묶어 놓는 것입니다. 신앙 길에서 충성을 다해 정성을 들여 가던 사람들이 끝까지 못 가게 될 때는 그 사람들의 말로가 비참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 하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계되어 있는 나라면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가정이면 가정, 일족이면 일족 전체가 걸려 버립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이런 어려운 배후의 사연을 중심삼고 신앙 길을 가는 개인과 하늘의 인연이 묶어져 나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신앙길을 간다는 우리의 생활을 반성해 보면 볼수록 하나님 앞에 슬픔을 많이 남기고, 빚을 많이 졌다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은 말씀선집 원문에서 가져온 것임)
신앙인은 세상적인 욕망을 버려야 돼
여러분, 통일교회를 믿게 되면 복을 받을 줄 알지만 복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점점 꼬여 들어갑니다.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싫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웃고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의 인연을 가지고 사는 것을 그냥 그대로 공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다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가는 길이 엇갈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앞에 서 가지고, 6천 년 동안 우리 인생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섭리를 그르치고 파탄시켜 나왔던 사탄과 대결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언제 끝날 것이냐? 지금 이 시간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편안함이 있을 때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에게 고통이 극하면 극할수록 하나님의 권세는 나로 말미암아 유일한 입장에 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빚지는 자리에 서서는 안될 것입니다. 빚을 갚고 빚을 지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빚을 지울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자기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 과중한 십자가의 길 외에는 하나님께 빚을 지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서 싸움을 책임지고 여러분을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쉽겠어요? 나 한 사람의 개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싸움을 해야 되느냐? 세계를 막아내야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방비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못 데려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 세계적인 전선을 사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51-32)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승리권
우리는 사탄권과 싸워 세계를 방어해야 합니다. 세계를 방어하기 전에는 국가기준을 마음 대로 왕래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기준을 방어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씨족의 기준, 종족의 기준을 왕래할 수 없습니다. 또 씨족을 방어하기 전에는 가정을 찾아올 수 없고, 가정을 방어하기 전에는 개인을 찾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 충의 도리가 무엇이냐? 이 길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정한 개인을 통해 특정한 가정을 남기는 것이요, 특정한 종족을 남기는 것이요, 특정한 나라를 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안팎으로 하나되어야 될 텐데 안팎으로 갈라진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안팎을 중심삼은 나라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이스라엘 나라요, 내적인 것이 유대교입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이 이와 같이 국가기준을 중심삼고 통일성을 갖출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무엇을 중심삼아야 하느냐 하면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갈라져 있었지만 예수님이 하늘의 품격을 지니고 땅에 와 가지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영육을 중심삼은 국가 승리권이 비로소 사탄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권내는 사탄이 통치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침입할 수 없는 이런 나라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나라를 가진다면 하나님은 종족이라든가 민족을 중심삼고 안식하실 수 있습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싸워서 이기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의 종족장으로서 안식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에 종족이 싸워서 이긴다면 하나님은 가장으로서 안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고는 하나님이 민족적인 안식권을 가지실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면 종족적 안식권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종족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면 가정적 안식권이 생겨나지 못하는 것이며, 가정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고는 개인적 안식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믿는 사람의 종자를 남겨 가지고 이 땅 위에 승리권을 만들어서 개인이 안식하고 가정이 안식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일시에 안식할 수 있는 권을 이루어 하나님이 주권을 잡고 명령해 가지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51-33)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24일, 원문
하늘이 가는 길
날짜 : 1971. 11. 4(목)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하나님이 가는 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우리
신앙길을 가는 사람들은 신앙길을 가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들이 동쪽으로 가고자 한다고 해서 우리도 동쪽으로 갈 수 없는 것이요, 그들이 자기를 중심삼고 살고 있다고 해서 우리도 그와 같은 생활을 따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신앙자와 비신앙자는 서로 가는 길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세계에 있어서도 그런 것을 쉽사리 헤아릴 수 있으니 하나님과 타락된 인간들 혹은 하나님과 타락된 세계에서 신앙길을 가고 있는 인간, 또 하나님과 모든 종교를 대표한 자리에 섰다고 하는 우리 통일교회의 개개인을 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고자 하는 길과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일치되면 좋겠지만,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에는 먼 거리가 있으며 자유롭고 순조롭게 연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가는 길 앞에 우리의 신앙자들은 언제나 보조를 맞추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는 것을 쉽사리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가는 길, 즉 우리 통일교회의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고 있는 길과 하나님이 가고 있는 길이 같지 않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이냐? 하나님이 머무는 자리와 우리 통일교회의 교인들이 머무는 자리가 일치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일치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통일교인들이 지금까지 걸어 나온 역사와 이 통일교회를 이끌고 나오는 하나님이 걸어 나온 역사와는 일치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을 중심삼은 하루의 생활을 미루어 볼 때도 아침에 결심하고 나선 하루의 길에서도 여러 가지의 변화가 있음을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 자신들로서 하나님이 가는 길 앞에 나섰다는 나 자신의 결심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변화무쌍한 하루의 생활을 중심삼고 미루어 보더라도 하나님이 우리들을 믿고 이끌고 가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가는 길이 높은 길이라고 하면 우리들이 가는 길은 낮은 길일 것이요, 하나님이 가는 길이 똑바른 길이라 하면 우리들이 가는 길은 꾸불꾸불 돌아가는 길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퍼하시며 간다고 하게 된다면, 우리들은 슬픔의 길을 동경하는 것보다도 자기 개인을 중심삼아 가지고 스스로 기쁨의 길을 동경하고 찾아가는 자들이 아니겠느냐? 우리들이 좋아하는 것과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 늘상 일치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밥을 먹고 사는 하루의 생활에 하늘이 같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전체의 생활환경을 미루어 봐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 있는 우리라는 것을 결정지어 놓고 보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고 가는 데는 그 환경이 변모함에 비례해 가지고 하나님의 수고의 길밖에 남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내가 기뻐하기를 바라고 원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바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 못 되고 도리어 하나님에게 가중된 짐밖에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는 이 신앙길에 들어온 후의 시일이 길면 길수록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을 남기는 것보다 도리어 슬픔의 내연을 많이 남기는 무리가 아닐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51-17)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면
하나님이 붙들어 줘 가지고 나를 대하여 기뻐하던 한 때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 기뻐하던 한 때를 언제나 그리워하게 됩니다. 지난날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언제나 그 지난날을 그리워하면서 그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고 비교하는데, 그렇게 그리워하는 지난날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것으로 남아 내적인 사연으로 묻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일 것입니다. 지난날에 기뻐한 한 날이 있었거든, 하나님이 그 기쁨을 다시 맞이하고 오늘날의 환경에 사는 우리 앞에 그런 기쁨을 갖다 주기 위해서는 얼마만한 수난의 길을 거치고 얼마만한 희생의 대가를 치러야 되느냐? 그런 기쁨을 자극하는 한 때의 체험을 갖지 않고는 수난길에서 각성할 수 없는 인간인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한 때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배가되는 희생의 대가를 치러서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모종의 결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기쁨의 한 때를 그리워할 적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는 것보다 얼마나 부끄러운 수난을 하나님 앞에 짊어지웠던가 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가 다시는 그런 입장에 서서는 안 되겠다고 조심스럽게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하루하루의 신앙길을 가누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연속적으로 우리로 말미암아 슬픔을 푸실 수 있는 그런 무엇을 스스로 다짐하지 못하는 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은 평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을 수 있는 한 때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있을수록 현실에 있어서 하나님이 염려할 수 있는 길을 가서는 안되겠다고 해 가지고 스스로를 치고 스스로를 죄어 구속할 수 있는 입장에 서서 하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옛날보다도 더 좋을 수 있는 무엇을 바라고 나가는 데 있어서는 하나님의 수고를 보다 가중시키게 되고 슬픔만 재촉하게 되는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그러한 신앙태도를 가지고는 보다 깊은 신앙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이 가는 길과 우리가 가는 길이 언제나 엇갈린다는 것을 생활에서 잘 느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루의 생활에서 자신을 중심삼고 그것을 완전히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환경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내 뒤에는 가정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내 뒤에는 국가 혹은 세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이 내 뒤에 연결되어 있는 가정이나 국가나 세계를 거느리고 갈 수 있겠느냐 할 때 거느리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내 개인을 중심삼고 가정의 인연이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내 한 자체의 변모를 느끼게 되고, 하나님과 상관된 자리에서는 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여기에는 더 어려운 결과가 첨부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신앙자의 가는 길은 간추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간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환경을 가져서는 안될 것입니다.
간단한 자리에 처해 있다고 해도 자기 스스로가 바라는 소원을 세워 가지고는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계획을 세워 가지고 이렇게 간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는 길의 방향이 하나님과 언제나 일치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앞에 세우고 따라가야 되고,하나님이 우리에게 박자를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박자를 맞춰 드려야 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길을 가려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 여러분 자신들 혹은 젊은 시대에 처해 있는 청년들이 “내가 이 길을 가야 되겠다.” 할 때는 그 젊은 청년들이 바라는 그냥 그대로 갈 수 있겠느냐? 그냥 그대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환경과 고립된 자리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자리가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신앙길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는 방향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쉬우면 쉬울수록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길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사람은 신앙길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51-19)
신앙길은 하늘이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하는 길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이라는 것은 한 일면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을 중심삼고 360도가 둘러 있는 것입니다. 평면적으로만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시는 데는 평면적인 입장에서만 가시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인 입장에서 가고 계시니 그 가야 할 길의 엇갈리는 도수라는 것은 몇 배, 몇 십 배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려 가야 되는 길이 하나님이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그 한 길만 맞추어 가지고도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생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하면서도 또 찾아가야 됩니다. 고생하며 찾아가는 데 있어서는 고생을 당하는 쓰라림을 느끼는 자리에서 포위되어 가지고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해 가지고 그 쓰라림을 극복하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무엇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하나님이 가시는 방향과 맞추기란 힘들것이 아니냐 할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대로 먹고 사는 그 환경이 하나님이 나와 마음대로 접할 수 있는 자리냐 할 때 그렇지 못한 자리입니다. 또,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 만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좋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리냐 할 때 역시 그렇지 못한 자리입니다. 내가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스러워하며 살고 있는 그 가정이 하나님이 보시게 될 때 행복하다고 공인할 수 있는 가정일 것이냐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혹은, 내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가 나가고 있는 방향에 맞추어 나가는 그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길이냐 할 때 그렇지 못한 것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개인이 가는 길이 하늘과 엇갈린다고 할 때 환경이라든가, 전체가 가는 길이 더더욱 하늘과 엇갈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때,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얼마나 어려운 길일 것이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길일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만 어려울 것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우리의 뒤에서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가야 됩니다. 우리는 따라가는 것입니다. 앞서가는 것과 따라가는 것은 다릅니다. 앞서가는 하나님은 개척의 사명을 해야 되는 것이요, 우리는 개척의 사명을 하지 않고 그 개척한 것을 본받아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높은 데로 올라가면 우리도 따라 올라가야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낮은 데로 내려가면 따라 내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평지를 향해서 한없이 가게 된다면 그 평지를 한없이 따라가야 됩니다.
올라가고 내려가고 혹은 평지를 따라가는 데 있어서, 자기의 마음이라는 것을 일푼이라도 갖고 비판하면 할수록 그것은 손해 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그 길은 따라가는 길일 것입니다. 거기에 보조와 박자를 맞추어 가야 됩니다. 하라는 대로 해야 된다는 결론밖에 내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길에 있어서 “내가 이제 이 신앙길에서 올 곳에 다 왔다. 나로서는 바라는 대로 이미 다 이루었다.” 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 스스로의 주장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미루어 생각할 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주장을 세우기 전에 하나님이 주장하는 그 주장이 무엇인지 모색해야 됩니다.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자리를 맞게 될 때 그 기쁨의 자리가 도리어 하늘의 길을 막을 수 있는 원수의 제물이 되는 자리가 아니냐, 하나님에게 슬픔을 가할 수 있는 자리고 사탄에게 기쁨을 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냐 할 때 그걸 생각만 해도 180도 돌아설 수 있는 나 자신, 그걸 생각만 해도 그 자리를 일시에 초월할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51-21)
자신의 신앙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반성해 보라
내가 오관을 통하여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감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의 생활을 중심삼고 볼 때 이것을 어떻게 수습해 가지고 하나님과 박자를 맞출 것이냐? 이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문제되는 것입니다. 하루에 있어서도 24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시간에 오관으로 느끼는 그 감정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을 향해서 수직으로 올라가고 있느냐, 수평선과 비교하여 볼 때 올라가는 방향을 갖추고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이것을 늘상 조정해야 되겠습니다.
내가 수평선 이상으로 올라가고 있느냐, 혹은 사탄이 끌어당기는 선 이하로 끌려 내려가고 있느냐? 하나님과 같은 자리에 서서 가지는 못하더라도 상대적 입장에서 보조라도 맞추고 상하의 방향이라도 일치되고 있느냐?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우리의 신앙길이 얼마나 모호했고 얼마나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자리였나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반성해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나를 하나님은 끌고 가는 것입니다. 끌고 가는 데 있어서는 기쁜 길, 좋은 길로 끌고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가는 길에는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만 이끌고 가면 별로 문제되지 않겠지만 인간 외에 원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는 길에는 반드시 원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원수를 보게 되면, 개인보다도 가정보다도 국가, 세계가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계적인 발판을 동원하여 가고자 하는 신앙길을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판도라는 것은 하늘 편이 아닙니다. 사탄의 도구요, 사탄의 장비요, 사탄의 무기입니다. 사탄이 어느 때든지 명령을 내려서 하늘이 가고자 하는 길을 백방으로 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가는 길은 어떤 길이냐? 하늘이 한 발자국씩 가야 할 때는 환경과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지 않고는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로막고 있는 환경을 제거하고, 거기에 충정된 환경을 개척해 놓지 않고는 한 걸음 한 걸음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 길을 혼자 갈 수 없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인간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데리고 가는 데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우리 인간만 중심삼아 가지고는 전폭적으로 방향을 갖추어 앞으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뒤에 두고 원수와 싸우면서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못할수록,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뒤에서 사탄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포로가 세 사람 이상만 되는 날에는 아무리 능력이 많은 하나님이라도 후퇴해야 되고, 하나님 앞에 탄식의 조건을 세워 가지고 항서를 남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길이 되어 있다 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가 신앙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 얼마나 빚을 지고 얼마나 부끄러운 자체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신앙생활과 생애노정을 미루어 보게 될 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6천 년 기나긴 세월 동안 하나님이 가는 길을 그렇게 막아 나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평탄한 자리에서 갈 수 있는 그때는 어느 때냐? 그때는 지금까지 역사시대에서는 없었던 시대를 거쳐야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때는 어느 때가 되어야 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 때는 이 지구성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그야말로 제2의 해방을 완전히 받아 가지고 선두에 서서 하나님을 뒤에 모셔 놓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탄을 대해 싸울 전폭적인 책임을 짊어지고 전체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앞에서 안식하기를 바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51-23)
끝까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은 절박한 세계정세를 앞에 놓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러 가지고 민주세계와 기독교 문화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민주세계와 기독교 문화권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 기독교면 기독교를 보게 될 때, 자기 마음대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한 특정한 종단이 있으면 그 종단은 그 종단을 창시한 창시자의 뜻을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종파가 있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종파가 하나님과 더불어 가야 할 길은 두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이 시대에 있어서 어떠한 종교보다도 하늘이라는 명제를 앞에 놓고 고생하고 수난길을 즐거이 가겠다고 나선 무리가 있다면 그들이종교 가운데 제일 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모색한 무리일 것입니다. 만일, 지상에 하나님이 인연을 두고 생각할 수 있는 단체라면 그러한 곳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끝까지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끝까지 참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끝이라는 것이 나 혼자 죽을 수 있는 입장에서 죽어 갔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가정이 전부 다 희생될 수 있는 가정의 끝도 있는 것입니다. 혹은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의 끝도 있는 것입니다. 또, 세계의 끝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라는 말은 가정적인 기준에서 싸울 수 있는 입장에 선 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자리, 민족적인 싸움 이내에서의 끝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자리에서 바라보는 끝, 그래 가지고 세계를 향한 노정을 남긴 자리에서의 끝이 아니라 세계의 끝을 지내고 나서 이제는 이 이상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서의 끝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신앙길을 따라 하나님과 더불어 개인을 넘고, 가정을 넘고,종족을 넘고, 민족을 넘고, 국가를 넘어 세계 끝까지 갈 때까지의 그 수난이 얼마나 클 것이냐? 그 길을 일생 동안 혹은 생애를 통하여 가야 할 그 누군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그 길을 모색하는 사람은 평안이니, 안식이니, 희망이니, 소망이니, 영광이니 하는 것을 바라는 마음 가지고는 그 끝에까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내세워 가지고 그 무엇을 그리는 자리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자 하는 자만이 산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승리의 자리에서 개인의 끝을 결할 수 있는 사람도 죽고자 하는 각오를 하지 않고는 승리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가정과 더불어 죽고자 하지 않는 사람은 가정으로서 가야 할 끝을 하나님과 더불어 맞이할 수 없습니다. 또 민족이면 민족, 국가면 국가와 더불어 죽고자 하는 자리, 이런 일체가 통일된 자리에서 그런 것을 결하지 못하게 되면 그 국가의 뜻을 중심삼아 가지고 끝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세계도 역시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두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들은 언제 그 끝 된 자리에 서 봤느냐?개인이 아니고 가정, 가정이 아니고 종족, 민족, 국가, 세계의 끝 될 수 있는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느냐? 하나님은 그 끝이 오기를 얼마나 바랄 것이냐? 내 개인의 끝이 이 순간에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이 순간에 있기를 바랄 것인데, 여러분은이 순간에 내 개인의 끝을 결정짓는다고 맹세한 입장에서 얼마나 자기 신앙길을 다짐해 나왔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렇지 못한 나 자신임을 발견하거든 다시 한 번 전폭적으로 자신의 신앙태도를 뜯어고쳐야 됩니다. 자신을 죽여 버려야 됩니다.지금의 내 신앙자세는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하며 그것을 무자비하게 타파해 버리고 새로이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미루어 헤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정은 언제 끝을 결할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까? 혹은, 민족과 더불어 언제 끝까지 왔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서 봤습니까? 혹은, 세계와 더불어 언제 그런 자리에 서 봤습니까? 그러한 자리가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그렇기 때문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 하는 그 말을 하늘이 누구나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교육할 수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말은 하늘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생활의 내막을 선포한 것임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하늘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의 노정을 엮어 가고 있다는 배후의 사실을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죽기를 원한다면 무언가가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가 모순된 말입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계는 엇갈린 세계, 반대의 세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서 완전 부정할 수 있는 최후의 극점이라는 것은 죽는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죽는 그 자리에서부터 세상의 인연이 끊어지고 하나님과 새로운 인연이 결정됩니다.그 자리에서 하나는 이별하게 되고 하나는 상봉하게 되기 때문에 하늘이 바라는 제일보의 기준이 그 자리밖에 없다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단연코 그런 명령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51-25)
신앙생활의 본질
하나님이 가는 길과 우리 인간이 가는 길은 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과 사탄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하늘과 사탄이 정면적인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야 할 길 앞에는 원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방향이 틀어지면 언제든지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늘이 나를 돌보지 말고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앙자가 가야 할 길이요, 신앙생활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 혹은 목사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전부 다 하나님에게 뭘 해달라고 합니다. 자기 아들딸 중심삼고 “뭐 해주십시오!” 혹은, 자기 교회를 중심삼고 “뭐 해주십시오!” 그렇게 수천 년 동안 기도해 온 교단이 어찌하여 지금 와서는 무력해졌습니까?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는 방향권과 하나님이 전투하고 있는 전쟁 마당과는 별도의 환경에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대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미칠 수 없고 올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그 환경적 터전이 세상과 다른 것이 뭐냐? 그냥 그대로의 방향이요, 그냥 그대로의 환경이요, 그냥 그대로의 생활체제요, 그냥 그대로의 모임이라 할진대는 그 가운데 하나님이 갈 수 없고 하나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그 자리는 하나님이 이미 지나간 자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통일교인들은 어떠냐? 그런 환경에서 다시 한 번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생각해 보게 될 때, 여러분이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 가지고 자기가 수습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 날 도와주시옵소서. 제가 이제야 진짜 깨달았습니다.” 합니다.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 더불어 어려움을 당했다면 거기에는 기도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일한 자리에서 “아이구, 어렵습니다. 하늘이여,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면, 하나님이 전진해 나가던 그 전선을 뒤에 두고 후퇴하여 자기를 이끌어 주라는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에서는 아무리 기도를 하더라도 여러분이 구원받지 못합니다. 번번이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전체를 위해서 선두에 서 가지고 국가적인 최후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혹은 세계적인 최후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 보조를 맞추어야 할 입장인데도 불구하고 그 입장을 버리고 후퇴해 가지고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한다면 아무리 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가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러분이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것을 솔직히 고백하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을 했으면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됩니다. 벌을 피해 가려는 자세보다 자기가 행한 데 대한 응보를 당연한 것으로 맞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벌을 주는 데 있어서 열만큼의 벌을 줘야 하는데, 사탄이 “에이, 요 녀석! 잘못했다.”고 하면서 열 이상 혹은 백만큼의 벌을 주는 날에는 하나님이 동원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접근시킬 수 있는 길은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1-27)
중요한 책임을 짊어지고 선두에 서서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은, 낙오된 입장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부르짖는다고 하더라도 그 전선을 지켜야지 개인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아무리 기도해 보라는 거예요. 그건 일각이라도 도와줘서는 안 되는 거라구요.
그런 자리에서는 전우가 아무리 ‘아무개야, 내가 죽게 되었으니 같이 가자’고 해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 전선에 있어서 승리를 촉구하고 국가에 충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결의가 불타면 불탈수록, 그런 심정이 앞서면 앞설수록 그 동지를 제하고 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전선에 있어서 최후를 결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 동지가 부르짖는 그 말을 중심삼고 거기에 관심을 갖다가는 도리어 자기 스스로가 불리한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냐. 그럴 때에 자기의 아무리 가까운 동지라 할지라도 그를 뒤에 두고 네가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배가의 책임을 내가 다해 내겠다고 도리어 선두에 서 서 달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동지에게는 원수처럼 보이고 위해 주는 친구가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동지를 위하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그 동지 때문에 보다 나을 수 있는 승리를 다짐 했다면 그 승리는 그 동지와 더불어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아니냐. 그렇게 되면 그 동지는 죽은 후에라도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를 돌보는 것보다 자기를 돌보지 않고 버리고 간 사람이 도리어 자기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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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신앙 길에서 언제나 끌려 다니는 무리가 아니었느냐 ‘가자.’ 해도 가겠으면 가고 말겠으면 말고 하는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은 하늘 길을 못 갑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사탄한테 걸려 있는 사람입니다. 사탄한테 걸리게 되면 사탄은 삼면에 닻을 걸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꽁꽁 묶어 놓는 것입니다. 만약 통일교인이 그렇게 되었다면, 번번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사람이 그렇게 되었다면 닻 만 달아 놓겠어요? 꽁꽁 묶어 놓고 삼면으로 구속해 놓을 것이 아니냐는 거예요. 거기서 항거를 했다, 끊고 갔다 할 때는 그것을 끊고 가면 갈수록 차후에는 점점 용서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하나님을 믿고 따라 나왔지만,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사탄세계에서도 갈래야 갈 길이 없는 구속된 입장에 처하게 된다면 그 누가 동정할 것이냐? 하나님도 동정을 못 하고 사탄도 동정을 못 한다구요. 그렇기 때문에 신앙 길에서 충성을 다해 정성을 들여 가던 사람들이 끝까지 못 가게 될 때는 그 사람들의 말로가 비참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후손까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흥 강사의 자녀들 중에는 훌륭한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요? 그것을 알아야 돼요. 책임자의 자리라는 것은 참 두려운 자리라는 거예요. 부흥 강사면 부흥 강사가 자신이 잘나서 하나님의 은덕을 입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부흥회면 부흥회 가운데에서, 역사적으로 선조의 선한 공적이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만나도록 택해 세워 놨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택해 세우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어떤 선도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책임진 부흥사를 내세워서 그 사람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사는 자기가 잘나서 은혜의 역사를 일 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일으키기 위해서 자기를 통해 역사한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야 됩니다. 자기가 동기가 되어 가지고, 움직임이 전부 자기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면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신령한 사람들이 몇 년, 한 7년쯤 가다가는 다 내리닫아 꺼꾸러지는 것입니다. 전부 다 자기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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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아 시작되었고 자기로 말미암아 거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응당 자기가 받을 은사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감사하며 교역자면 교역자, 부흥사면 부흥사에게 제물을 바치게 될 때, 그 제물을 하늘에 직접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늘의 제물을 받았으면 대신 하늘 앞에 드려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그 제물을 하늘 앞에 드리지 않고 자기가 타고 앉아 가지고 자기가 소화시킬 때는 자기만 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족이 걸려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짊어진 사람이 하나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관계되어 있는 나라면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가정이면 가정, 일족이면 일족 전체가 걸려 버립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건 안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부흥회면 부흥회 때에 인연되는 그 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인연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 동안, 선조들이 그 한때를 맞기 위해서 인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는 얼마나 심각한 자리인지 모릅니다. 그 한 사람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전체가 가려 갈 수 있는 길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배후의 사연을 중심삼고 신앙 길을 가는 개인과 하늘의 인연이 묶어져 나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날 신앙길을 간다는 우리의 생활을 반성해 보면 볼수록 하나님 앞에 슬픔을 많이 남기고, 빚을 많이 졌다고 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상은 말씀선집 원문에서 가져와 보충한 것임)
신앙인은 세상적인 욕망을 버려야 돼
여러분, 통일교회를 믿게 되면 복을 받을 줄 알지만 복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점점 꼬여 들어갑니다. 가만히 보면 잘될 것 같은데 도리어 꼬여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꼬여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를 믿고 나오며 열만큼의 욕심을 가졌는데 백만큼의 물질이 생겼을 때 또다시 백만큼을 바랐다가는 영영 엇갈리는 길을 가고 마는 것입니다.
열만큼의 욕심을 가졌다면 그 열만큼의 것을 꺾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꺾어 버림으로 말미암아, 열만큼의 외적인 욕심을 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열만큼 밀접하게 할 수 있는 불가피한 결과를 다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복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이라고 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싫다고 하는 것을 갖다 주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세상 사람들이 웃고 좋아할 수 있는 환경의 인연을 가지고 사는 것을 그냥 그대로 공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다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만약에 파탄시키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물어뜯는 것입니다. 안 끊으려야 안 끊을 수 없게끔 그들이 다 물어뜯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물어뜯기 전에 끊기 싫어도 끊는 놀음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충이 벌어집니다. 여기서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종교는 참된 길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미루어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가는 길이 엇갈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앞에 서 가지고, 6천 년 동안 우리 인생길을 가로막고 하나님의 섭리를 그르치고 파탄시켜 나왔던 사탄과 대결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언제 끝날 것이냐? 끝날 수 없을 것 같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싸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왔으며, 지금 이 시간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밤이면 밤, 여러분이 자는 시간이라고 해서 휴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밤이 되면 될수록 배수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는 시간이 자기 앞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나에게 편안함이 있을 때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가야 되겠습니다. 나에게 고통이 극하면 극할수록 하나님의 권세는 나로 말미암아 유일한 입장에 설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빚지는 자리에 서서는 안될 것입니다. 빚을 갚고 빚을 지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빚을 지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냐? 자기의 역량이 미치지 못할 과중한 십자가의 길 외에는 하나님께 빚을 지울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자연적인 결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 네 집안식구가 원수다.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지 않고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등등의 말씀은 심각한 말씀입니다. 왜 이런 심각한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하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보조를 맞추며 살아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게 가려니 돌아서 가야 됩니다. 돌아서는 데는 옆을 봐서는 안됩니다. 180도 돌아서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가는 길 앞에서 싸움을 책임지고 여러분을 이끌고 가야 할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쉽겠어요? 그 싸움은 어떤 싸움인가 보십시오! 나 한 사람의 개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싸움을 해야 되느냐? 세계를 막아내야 될 것입니다. 세계뿐만이 아니라 그 나라를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또, 나라뿐만이 아니라 종족이라든가 가정의 환경을 방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들을 방비하기 전에는 하나님이 나를 못 데려갈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이끌기 위해서 세계적인 전선을 사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51-32)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승리권
우리는 사탄권과 싸워 세계를 방어해야 합니다. 세계를 방어하기 전에는 국가기준을 마음 대로 왕래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기준을 방어하기 전에는 마음대로 씨족의 기준, 종족의 기준을 왕래할 수 없습니다. 또 씨족을 방어하기 전에는 가정을 찾아올 수 없고, 가정을 방어하기 전에는 개인을 찾아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효의 도리, 충의 도리가 무엇이냐? 이 길을 단축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정한 개인을 통해 특정한 가정을 남기는 것이요, 특정한 종족을 남기는 것이요, 특정한 나라를 구해 나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안팎으로 하나되어야 될 텐데 안팎으로 갈라진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안팎을 중심삼은 나라를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외적인 것이 이스라엘 나라요, 내적인 것이 유대교입니다. 유대교와 이스라엘 나라는 죽어도 같이 죽어야 되며, 망해도 같이 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승리해도 같이 승리해야 됩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이 갈라져 있는 것이 이와 같이 국가기준을 중심삼고 통일성을 갖출 수 있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준은 무엇을 중심삼아야 하느냐 하면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삼아야 합니다.
그 완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완전한 하나님의 사상을 이어받은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이끌고자 하는 것이요, 가정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가정적으로 싸우지 않고 사탄의 참소에 걸리지 않는 가정을 만들기 위한 것이요, 민족적 국가적으로 가고자 하는 것 역시 싸우지 않고 사탄의 참소에 걸리지 않는 민족과 국가를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기준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국가는 예수님을 따라서 그와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늘과 땅이 갈라져 있었지만 예수님이 하늘의 품격을 지니고 땅에 와 가지고 하나됨으로 말미암아 영육을 중심삼은 국가 승리권이 비로소 사탄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권내는 사탄이 통치할 수 없습니다. 사탄이 침입할 수 없는 이런 나라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나라를 가진다면 하나님은 종족이라든가 민족을 중심삼고 안식하실 수 있습니다. 나라를 중심삼고 싸워서 이기게 되면 하나님은 하나의 종족장으로서 안식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에 종족이 싸워서 이긴다면 하나님은 가장으로서 안식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고는 하나님이 민족적인 안식권을 가지실 수 없는 것입니다. 민족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면 종족적 안식권이 생겨날 수 없는 것이며, 종족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면 가정적 안식권이 생겨나지 못하는 것이며, 가정적 승리권을 갖지 못하고는 개인적 안식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하고 간 일이 무엇이냐? 그런 일을 다 못 했습니다. 예수님 개인마저 사탄에게 침범을 받아 가지고 십자가에 돌아갔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찾아오는 데는 나라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교회는 천주주의(天宙主義)를 중심삼고 바라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싸움을 책임지고 사수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끌어 주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가정을 넘어가야 되고, 민족을 넘어가야 되고, 국가를 넘어가야 됩니다. 국가기준의 선두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적인 전선에 국가를 대표한 수많은 하늘의 정병들이 나타나야 됩니다.
이것이 커 가면 커 갈수록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생겨나기를 하나님은 얼마나 고대하셨겠습니까? 이것이 넓어지고 넓어져 하나의 입장에 다 흡수되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 날을 얼마나 고대했던가를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은 이런 나라를 생각해 봤어요? 지금까지 땅 위에 이런 승리권을 갖겠다고 다짐하는 신앙자들이 있었어요? “그저 나야 믿으면 천국 가겠지!” 하며, 예수님을 믿고 천당 가겠다고만 하면 천당에 가게 되어 있느냐는 말입니다. 믿기만 해 가지고 천당가게 돼 있다면 큰일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믿는 사람의 종자를 남겨 가지고 이 땅 위에 승리권을 만들어서 개인이 안식하고 가정이 안식하고 종족, 민족, 국가가 일시에 안식할 수 있는 권을 이루어 하나님이 주권을 잡고 명령해 가지고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한 날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51-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