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과 극복 (천일국 훈독경 제3권 18일) u

訓讀王 | 20191003060714

천일국 훈독경 제3권 18일



정성과 극복 

날짜 : 1971. 3. 1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인간들은 귀한 무엇이 있으면 그 귀한 것을 찾아서 보호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물건이 그러하다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 세계에 역사적으로 참된 사람이 있다면 그 참된 사람을 찾아서 모시고, 받들고, 변치 않는 자리에 두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귀하고 거룩한 것은 이 천지간의 귀하고 거룩한 자리에서 보여 주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귀하고 참된 것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귀하고 참된 환경이 벌어지기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바라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나와 더불어 같이하고 싶고, 나쁜 것은 나와 더불어 격리시키고 분리시키고 싶은 마음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 느끼는 바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좋은 것은 남아지지 않고 나쁜 것이 내 생활권 내에 침범하느냐? 그것은 나 자신이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내가 처하여 있는 환경이 기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그 추구하는 대상으로서 귀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지만 그 대상인 귀한 것과 좋은 것이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보다 귀하고 보다 좋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터전이 될 때 그러한 내 자신 앞에 백의 가치를 지닌 것을 놓아둔다고 하더라도 오십, 사십, 혹은 그 이하의 가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가치의 기준마저 세울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온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고 싶고 귀한 것을 갖다 놓으시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천국은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요, 참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함과 참이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한 나, 귀한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했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지극히 높고 거룩하고 귀할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귀하고 선하고 높은 하늘이 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귀하다는 것을 찬양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서 귀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보다 문제가 됩니다. (42-212)


어떻게 선한 마음을 지속시킬 것인가


여러분 가운데 내 마음에 귀한 마음선한 마음거룩한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이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마음을 갖고 십 년을 하루와 같이 “십 년만이 아니라 일생을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 나갈 수 있느냐?” 할 때,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는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생활 가운데 내 마음을 자극시키는 선의 바탕이 며칠 동안 내 마음과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냐? 우리가 선한 마음을 발견한다면 그 마음을 내 생활에서 어떻게 반영시키고 보유할 것이며 어떻게 그것에 상극되고 상반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시켜서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자주적인 선의 모체를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은 선의 바탕을 가졌던 인간이었으나 타락으로 악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바탕은 언제나 악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포위한 악한 환경이 선한 환경보다 더 큰 환경으로 엉클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라는 것은 내 생활환경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으로 흘려 버리기 쉬운 것이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고 선의 실체가 되어서 악한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는 모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42-214)


내·외적인 선의 기반을 닦으려면


그러면 악을 제거시키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바탕에 있어서 선과 더불어 터전이 될 수 있는 내적인 기반과 외적인 환경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라를 등에 업고 나를 반대하는 사탄이나 사회를 발판으로 하여 반대하는 사탄이 무서운 것이 아니요, 그 악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선 앞에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본심으로 기도하는 데서나 혹은 하늘을 향하여 정성들이게 될 때는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소망을 갖기도 하지만 곧 그러한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이 영영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사회의 환경에 휩싸여서 원치 않는 하루나 한 시간을 거치고 난 후 본심의 마음 바탕이 여지없이 유린당한 것 같은 느낌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자로서 사탄마귀의 토대를 완전히 분석하고 비판해 가지고 그 기반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자들이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갖춰지는 선한 마음을 어떻게 외형적으로 판도를 넓혀 나가느냐 하는 것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는 내 환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선하지 못한 요소들을 여지없이 끊어 버릴 수 있는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한 투쟁의 무대를 거치지 않고는 영원한 선, 지극히 높고 귀한 것이 내 마음에 임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싸우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들이 넘어야 할 책임과 의무로서 감당해야 할 그러한 분야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분야를 현재의 입장에서 소망의 입장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오늘이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상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입장을 내일의 소망의 터전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주력이 없게 될 때는 아무리 내일의 선한 소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내가 내일의 그 소망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본심이 요구하는 선하고 귀한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환경적인 요건을 타개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수고와 정성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42-216)

 

정성은 나를 구해 주는 요소

 

그러면 기도를 하는 데는 무슨 기도를 해야 되느냐? 자기를 제어하는 기도자기를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좀더 편해지고 싶고, 좀더 행복해지고 싶고, 내가 모든 것의 동기가 되고 싶은 욕심을 부정하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보조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정성을 들일 때 그 정성이 크면 큰 만큼 악을 제거시킬 수 있는 판도를 넓혀 가기 때문에 자연히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쁨의 정도는 얼마나 정성을 투입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정성이야말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제일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리는 여러분을 구해 줄 수 있는 동기나 자극은 될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정성과 직결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42-219)

 

정성은 어떻게 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 인간은 타락한 혈통을 지니고 있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악한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 자신은 거룩하시고 귀하신 하나님 앞에 상응의 존재가 아닌 상반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 타락한 인간이 높고 귀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화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고 할진대 그것은 말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냐? 그것을 자기의 마음은 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아무리 환경이 
부정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할 수 있는 철석같은 마음,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고 현재도 이렇게 살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다.” 하는 철석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선의 터전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정성이 없으면 선하지 못한 환경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성들이는 것이냐? 정성은 아무도 없는 곳, 나만이 아는 곳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기의 본심이 하늘을 그리워하게 될 때의 그 마음은 나만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는 그 마음을 중심삼고 나만의 터전을 해결하려니까 누구도 모르는 자리,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갖추어진 것은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 가운데 계시는 하늘과 내가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절대적인 존재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은밀한 자리에서 들여진 정성과 더불어 느끼는 기쁨은 하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포만하여 제3자 앞에 감화를 주고 영향을 미치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늘의 명령을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이 시작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42-220)

 

하늘을 모시려면 정성을 들여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정성과 더불어 몸 마음으로 맞이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느냐? 그러기에 여기에서 하나님을 보고 싶으면 내가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하늘 아버지의 선함과 귀함이 머무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인연을 갖추고 아버지를 모셔드렸느냐? 

언제든지 “내가 정성들인 것이 이 정도면 되겠지!”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육신의 높고 영광된 자리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지옥에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되어지고 관계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필히 신앙생활을 통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였으니, 아버지, 이제는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정성을 들일 만큼 들였는데, 내 사정을 몰라주시네!”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같이 가고 싶고, 같이 살고 싶고,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와 환경을 맞이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인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원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42-222)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정성들여 보았느냐

 

원수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 1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친구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생명 이상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사망의 고통을 자신이 느끼며 대신 죽겠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바쳤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가 천국 가기 위해서 친구를 이용해 먹은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오직 
그를 구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생명을 중심삼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 생명을 걸고 정성들이는 사람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 생명을 중심삼고 얼마나 정성을 들여 봤느냐? “너는 사람을 사랑했느냐?” 할 때, “예. 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알고, 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고, 그 사람이 흘려야 할 눈물을 내가 흘리고, 그 사람이 당해야 할 고통을 내가 당할 때 나는 부활되는 것입니다. (42-224)

 

하나님이 더 정성들이고 계신다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동네면 동네, 김씨의 가문이면 김씨의 가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해봤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복귀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서 얼마만큼 정성들이셨느냐? 생명을 걸어 놓고 정성들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앞에는 면목이 없는 것이요,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요, 어떠한 반발이나 반문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였느냐, 하나님이 정성을 들였느냐 할 때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들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마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더 정성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귀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아들딸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그 다음에는 그런 아들딸들이 찾아 나가는 가정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그 가정이 찾아 나가는 종족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합하여 한 민족이 되었으면 그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이십니다. 그렇게 앞놓아가며 정성들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류가 망하지 않았습니다. (42-226)

 

정성으로만 극복이 가능해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간다고 할 때 그냥 나가 가지고는 안됩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가지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오나가나, 쉬나, 혹은 어떠한 행동을 하나 일체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모든 것을 줘 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면 완전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에 가서 인격이 되는 것이요, 영광의 터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은 세상에서의 좋은 것과 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정성이 안 들여지는 것이요, 나쁘다고 하는 자리일수록 정성이 잘 들여집니다. 이렇게 정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입니다. 그 수난의 배후에는 죽음의 교차로가 연결된 정성의 터전만이 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제단이 연결되어 공의의 심판권을 가지고 심판할 수 있는 거룩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42-228)

 

선열들의 정성의 터전을 상속받으려면

 

이것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절대 겸손해야 합니다. 선조들이 들인 그 정성에 꽃을 놓고 무늬를 놓아줘야 합니다. “당신은 그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았지만, 나는 이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정성은 내적인 가치에 있어서 미달되어 있기에 나로 말미암아 보강되고, 나로 말미암아 완비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런 자리에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승자는 뜻을 절대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어린 터전을 상속받았을 때는 그것을 절대시해야 됩니다. 그 이상 절대시하는 사람한테 옮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워지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이 가중됩니다. 
가까워 오는 때를 웃음으로 맞이하는 것보다도 조급한 마음으로, 스스로의 미숙한 것을 다짐하고 하늘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야만 다가오는 그때와 시운은 나를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맞이하려는 사람은 자기 것으로 이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때를 대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버림받고 쫓겨다닐 때는 기도하지 않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는 내가 무관심하더라도 하나님이 떠나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날이 찾아오게 될 때 더 큰 것을 갖출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못 만들게 되면 그 영광은 나에게 왔다가도 옮겨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발판 삼아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서글프고 무서운 일이 우리 신앙노정에 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데는 한이 없는 것입니다. (42-229)

 

이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았느냐

 

여러분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개인복귀와 가정복귀를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자기의 친족, 민족, 나라, 세계, 하늘땅의 만민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권에 삼켜져 있는 원한의 터전을 소화해서 영광의 터전으로서 남길 수 있는 주체적인 내용을 얼마나 제시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찾아오는 때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살아왔는데 그 어머니 아버지가 진짜 지옥 가고, 천당 간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형제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생각해 봤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붙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이 나라와 민족을 대신하여 소망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책임을 다했느냐 할 때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를 남의 길거리로 보지 않았습니다. 삼천리 반도의 산야를 바라볼 때도 남의 산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내 손이 거쳐갈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려라! 눈물어린 마음으로 네가 주인을 얼마나 고대했느냐?” 하면서 뼛골에서 우러나오던 마음으로 산하를 바라보고, 그것을 품고 싶어했고, 서글픈 심정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했습니다. 삼천리 반도에 깃들 수 있는 운세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과 더불어 엉클어지고, 이 민족은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으로서 등장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단을 형성한 모체적인 사상입니다. 

선생님이 정성들인 이 모든 터전을 여러분이 유린해서는 안됩니다. 통일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6천 년 역사를 거쳐온 교회, 하늘의 뜻을 대해 온 교회라면 이 길을 거쳐오면서 흐느껴 가지고 눈물로 얼룩질 수 있는 걸음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정성들이신 아버지 앞에 어떻게 동정의 한 시간을 내 환경에 남기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지극히 몸부림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믿고 따라나오는 선생님의 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2-232)

 

극복을 위한 정성

 

효자가 가려고 하는 길을 막고 나서면서 “아들아, 이젠 좀 그만 하라!” 하면서 걱정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내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야, 좀 쉬어서 가라!” 하실 수 있는 두터운 사랑, 그런 아버지의 깊으신 후정이 남아질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이 땅 위에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누구에게 그 무엇을 주고 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것은 내 일생의 최후의 종착점에서 남겨 줄 예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면 망하지 않습니다. 

내 눈으로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으며 민족의 운명을 중심삼고, 하나님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철렁 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자식이야 죽겠으면 죽고, 집안이야 망하겠으면 망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망하더라도 그것은 나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냐? 국민으로서 소망의 터전을 잃는 것이 아니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세계가 망해서는 안되겠기에 세계를 붙들고 호소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원수들의 터전도 말없이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정성들이는 자리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을 생활에서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느끼는 기쁨과 선한 것이 그 사람의 것으로서 남아질 수 있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정성이 아니고는 복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42-234)*


&&&& 천일국 훈독경 제3권 18 일 원문 &&&&

정성과 극복 

날짜 : 1971. 3. 14(일) 장소 : 한국 전본부교회

인간들은 좋은 물건이 있으면 그걸 흠 없이 만지고 싶어합니다. 혹은, 귀한 무엇이 있으면 그 귀한 것을 찾아서 보호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입니다. 물건이 그러하다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 세계에 역사적으로 참된 사람이 있다면 그 참된 사람을 찾아서 모시고, 받들고, 변치 않는 자리에 두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우리 인간이 그렇다고 할진대,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도 역시 귀하고 거룩한 것은 이 천지간의 귀하고 거룩한 자리에서 보여 주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귀하고 참된 것이 있는 그 자리로부터 귀하고 참된 환경이 벌어지기를 우리 인간의 마음이 바라듯이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참된 것 혹은 귀한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좋은 것은 나와 더불어 같이하고 싶고, 나쁜 것은 나와 더불어 격리시키고 분리시키고 싶은 마음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잘 느끼는 바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좋은 것은 남아지지 않고 나쁜 것이 내 생활권 내에 침범하느냐?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은 나 자신이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았고 내가 처하여 있는 환경이 기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 그 추구하는 대상으로서 귀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지만 그 대상인 귀한 것과 좋은 것이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보다 귀하고 보다 좋을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상반되는 입장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좋은 것을 그런 자리에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좋은 것이 반감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이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터전이 될 때 그러한 내 자신 앞에 백의 가치를 지닌 것을 놓아둔다고 하더라도 그 백의 가치를 지닌 좋은 것이 백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십, 사십, 혹은 그 이하의 가치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정상적인 가치의 기준마저 세울 수 없는 입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결과가 나온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고 싶고 귀한 것을 갖다 놓으시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천국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 천국은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요, 참된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함과 참이 머물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한 나 자신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요, 귀한 나 자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우리 신앙자들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귀중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누가복음 17:20-21) 했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지극히 높고 거룩하고 귀할 수 있는 내적인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고는 귀하고 선하고 높은 하늘이 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이 귀하다는 것을 찬양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서 귀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 보다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42-212)


어떻게 선한 마음을 지속시킬 것인가


여러분 가운데 내 마음에 귀한 마음 있느냐, 내 마음에 선한 마음 있느냐내 마음에 거룩한 마음이 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그것이 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년을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느냐? 혹은, 그러한 마음을 갖고 일년 이상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 그 사람이 십 년을 하루와 같이 그런 마음을 지닐 수 있느냐? “십 년만이 아니라 일생을 그러한 마음을 지니고 살아 나갈 수 있느냐?” 할 때, “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 위에는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생활 가운데 일시적으로 내 마음을 자극시키는 선의 바탕이 며칠 동안 내 마음과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냐? 우리가 선한 마음을 발견한다면 그 마음을 내 하루의 생활, 한 달의 생활, 일년의 생활에서 어떻게 반영시키고 보유할 것이며 어떻게 그것에 상극되고 상반되는 모든 여건을 제거시켜서 그 여건에 굴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자주적인 선의 모체를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만약에 귀하고 거룩한 본성을 품어 가지고 하루의 생활은 물론이요일년의 생활은 물론이요,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할진대는 그 사람이 살아 나가는 생활에 있어서 선이 같이하지 말라고 해도 같이하는 것이요, 귀한 자리가 아니라고 하여도 그것은 귀하지 않을 수 없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귀한 것을 악이 점령할 수 있느냐? 점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세상이 그 주위를 철옹성같이 에워쌌다고 하더라도 그 선한 것과 귀한 것을 소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이 선한 터전에 서 있고 선한 환경과 같이하는 자리에 서 있음으로써 선한 주체와 선한 대상이 하나되어 절대적인 선의 방향을 갖추어 나가기 때문에 새로운 역사를 빚어낼 수 있는 것이요, 그 사연은 새로운 인간으로 혁신시키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타락한 인간은 선에서 출발한 것이 아닙니다. 선의 바탕을 가졌던 인간이었으나 타락으로부터 출발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악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바탕은 언제나 악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포위한 악한 환경이 선한 환경보다 몇 십배, 몇 백배 더 큰 환경으로 엉클어져 있고 고착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내 마음에 작용하는 것입니다. 내 생활환경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느껴지는 것으로 흘려 버리기 쉬운 것이지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내 생활의 중심이 되고 선의 실체가 되어서 악한 환경을 제거시킬 수 있는 모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42-214)


내·외적인 선의 기반을 닦으려면


그러면 악을 제거시키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바탕에 있어서 선과 더불어 짝이 될 수 있고 선과 더불어 터전이 될 수 있는 내적인 기반과 외적인 환경을 어떻게 갖추느냐 하는 것이 신앙자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계를 점령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에 주어진 환경을 점령하기가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라를 등에 업고 나를 반대하는 사탄이나 사회를 발판으로 하여 반대하는 사탄이 무서운 것이 아니요, 그 악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선 앞에 직접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따라서, 이 나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신앙자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본심으로 기도하는 데서나 혹은 하늘을 향하여 정성들이게 될 때는 마음속으로 울려오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소망을 갖기도 하지만 곧 그러한 것들이 삽시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말 한마디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이 영영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낄 때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사회의 환경에 휩싸여서 원치 않는 하루나 한 시간을 거치고 난 후 본심의 마음 바탕이 여지없이 유린당한 것 같은 느낌을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을 개척해야 할 사명자로서 사탄마귀의 토대를 완전히 분석하고 비판해 가지고 그 기반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자의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자들이 가야 할 단 하나의 길은 어디에 있느냐? 마음의 소리를 듣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갖춰지는 선한 마음을 어떻게 외형적으로 판도를 넓혀 나가느냐 하는 것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터전을 닦는 문제와 직결 때문에 이것을 하루 하루의 생활목표로 세우고 투쟁해 나가는 것이 사회나 민족 또는 국가 앞에 영향을 미치는 것보다도 더 귀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는 우리의 상대적인 세계에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 환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으로부터 점령해 들어오는 선하지 못한 요소들을 여지없이 끊어 버릴 수 있는 용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한 투쟁의 무대를 거치지 않고는 영원한 선, 지극히 높고 귀한 것이 내 마음에 임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싸우는 것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원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들이 넘어야 할 책임과 의무로서 감당해야 할 그러한 분야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분야를 현재의 입장에서 소망의 입장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 말미암아 오늘이 내일의 소망의 터전을 상속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입장을 내일의 소망의 터전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자주력이 없게 될 때는 아무리 내일의 선한 소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내가 내일의 그 소망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러분의 본심이 요구하는 선하고 귀한 것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 요구에 상응될 수 있는 환경적인 요건을 타개해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와 같이 총칼을 가지고 싸우면서 타개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타개해 나가기 위해서는 수고와 정성이 있어야 됩니다. 정성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42-216)


정성은 나를 구해 주는 요소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될 것은 정성을 가지고 대해 나가지 않는다면 악과 더불어 싸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하는 데는 무슨 기도를 해야 되느냐? 자기를 제어하는 기도 해야 됩니다. 자기를 극복하는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좀더 편해지고 싶고, 좀더 행복해지고 싶고, 내가 모든 것의 동기가 되고 싶은 욕심을 부정하기에는 내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을 보조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통해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정성을 들일 때 그 정성이 크면 큰 만큼 악한 환경의 여건이 제거될 수 있습니다. 즉, 기도를 중심삼은 선한 동기의 마음이 악을 제거시킬 수 있는 판도를 넓혀 가기 때문에 자연히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본성이 그러한 환경과 더불어 배양되어 가지고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희열과 만족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쁨의 정도는 기도의 시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정성을 투입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정성이야말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는 제일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리는 여러분을 구해 줄 수 있는 동기나 자극은 될는지 모르지만 자기가 구원을 받느냐, 못 받느냐 하는 것은 원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성과 직결되어지는 자리에 서지 않고는 구원이나 완성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42-219)


정성은 어떻게 들여야 할 것인가


우리 인간은 타락한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 앞에 용납받을 수 없는 악한 몸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 자신은 거룩하시고 귀하신 하나님 앞에 상응의 존재가 아닌 상반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상반된 인연을 추구해 나온 잘못된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타락한 인간이 높고 귀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화합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된다고 할진대 그것은 말로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냐? 그것을 자기 자신은 아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은 안다는 것입니다. 제3자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면 아무리 환경이 부정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할 수 있는 철석같은 마음,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고 현재도 이렇게 살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 것이다.” 하는 철석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환경은 그 느낌과 일치되었다고 할 수 있는 선의 터전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정성이 없으면 선하지 못한 환경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정성들이는 것이냐? 뭐 시장 거리에서 약장수들이 약을 파는 식으로 들이는 것이냐?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정성은 어떤 자리에서 들여야 되느냐? 아무도 없는 곳, 나만이 아는 곳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자기의 본심이 하늘을 그리워하게 될 때의 그 마음은 누구든지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만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나만이 아는 그 마음을 중심삼고 나만의 터전을 해결하려니까 누구나 아는 자리에서는 정성을 들일 수 없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자리,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됩니다.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갖추어진 것은 자랑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성을 들이는 데는 누가 알게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가운데 계시는 하늘과 내가 관계를 맺어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개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니 절대적인 존재와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누구도 동참할 수 없는 은밀한 자리에서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은밀한 자리에서 들여진 정성과 더불어 느끼는 기쁨은 대단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 포만하여 제3자 앞에 감화를 주고 영향을 미치게 될 때 거기서부터 하늘의 명령을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이 시작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42-220)


하늘을 모시려면 정성을 들여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정성을 들이는 그 골수에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을 지니고 꾸준히 정성들이며 가는 사람의 길은 올바른 길입니다. 정성은 은밀히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과 더불어 몸 마음으로 맞이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느냐? 그러기에 여기에서 하나님을 보고 싶으면 내가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리워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됩니다. 또, 만나고 싶으면 얼마나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정성들이며 만나고 싶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만큼 하늘 아버지의 선함과 귀함이 머무를 수 있는 자기 자신의 내적인 인연을 갖추고 아버지를 모셔드렸느냐? 여러분이 오관을 통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있겠지만, 자신이 듣되 얼마만큼 정성어린 마음을 가지고 들어 봤느냐? 볼 때는 얼마나 그런 마음으로 보아 봤느냐? 또, 느끼되 얼마만큼 정성을 다하는 자리에서 느껴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내가 정성들인 것이 이 정도면 되겠지!” 해서는 안됩니다. 지극히 선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환경적인 여건이 정성의 터전에 의해서 마련되었느냐 할 때, 여러분이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정성의 기준에는 설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육신의 높고 영광된 자리를 바라보는 것보다도 지옥에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눈물을 흘린다면,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과 인연이 되어지고 관계가 맺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필히 신앙생활을 통해서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들였으니, 아버지, 이제는 나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내가 정성을 들일 만큼 들였는데, 내 사정을 몰라주시네!”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만큼 정성을 들였느냐? 내가 아버지를 보고 싶다고 할 때 얼마나 정성의 대가를 치르면서 보고 싶어하느냐? 아버지와 같이 가고 싶고, 같이 살고 싶고, 아버지가 원하는 나라와 환경을 맞이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정성을 들인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원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42-222)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정성들여 보았느냐


원수는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자기 자신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 무슨 인연도 없이 목숨을 버린다면 무슨 큰사랑이 되겠어요? 친구를 위해서 생명을 걸고, 생명 이상 정성들이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사망의 고통을 자신이 느끼며 대신 죽겠다는 것이 사랑입니다. 정성을 통하지 않은 희생, 더구나 그것이 자기를 위한 희생이라면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는데, 왜 바쳤느냐 할 때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바쳤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갑니다. 그런 사람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가 천국 가기 위해서 친구를 이용해 먹은 것이 됩니다. 그 사람은 천국에 못 가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떤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잘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를 구해주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정성들여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 생명을 중심삼고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사람, 생명을 걸고 정성들이는 사람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한 생명을 중심삼고 얼마나 정성을 들여 봤느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인간 세상에 태어나 칠팔십 년 동안 영광스럽게 살았다고 자랑할 수 있는 외적인 내용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너는 사람을 사랑했느냐?” 할 때, “예. 했습니다.” “어떻게 했느냐?” 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알고, 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느끼고, 그 사람이 흘려야 할 눈물을 내가 흘리고, 그 사람이 당해야 할 고통을 내가 당할 때 나는 부활되는 것입니다. (42-224)


하나님이 더 정성들이고 계신다


개인이면 개인, 가정이면 가정, 동네면 동네, 김씨의 가문이면 김씨의 가문을 중심삼아  가지고 그렇게 해봤느냐? 내가 개인은 구했지만 가문은 못 구했기 때문에 가문을 구해야 된다고 하면서 어떤 가문을 위해서 정성들여 봤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복귀역사를 해 나오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서 얼마만큼 정성들이셨느냐? 생명을 걸어 놓고 정성들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앞에는 면목이 없는 것이요, 얼굴을 들 수 없는 것이요, 어떠한 반발이나 반문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였느냐, 하나님이 정성을 들였느냐 할 때 타락한 인간이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들여 나오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마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귀하신 것입니다. 내가 정성들이니까 내가 귀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보다 더 정성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더 귀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아들딸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그 다음에는 그런 아들딸들이 찾아 나가는 가정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그 가정이 찾아 나가는 종족을 위해서 정성들이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합하여 한 민족이 되었으면 그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이십니다. 그렇게 앞놓아가며 정성들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인류가 망하지 않았습니다. (42-226)


정성으로만 극복이 가능해


여러분이 전도하러 나간다고 할 때 그냥 나가 가지고는 안됩니다. 얼마만큼 정성을 들여 가지고 나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을 전도하는 데 있어서 일주일이나 한 달, 일 년, 이 년, 혹은 삼 년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기간 동안 정성들여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밥을 먹으나, 자나깨나, 오나가나, 쉬나, 혹은 어떠한 행동을 하나 일체의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 앞에 모든 것을 줘 보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면 완전히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의 정성을 통해서 사랑하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에 가서 인격이 되는 것이요, 영광의 터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본부에 있는 교인들 중에서 오래되었다는 사람들은 “내가 먼저 교회에 들어왔는데….”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님도 그러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런 생활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자식은 평등하게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정성들이는 사람은 잠잘 때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지 않습니다. 제일 나쁜 자리에 가서 자는 것입니다. 

정성은 세상에서의 좋은 것과 비례가 아니라 반비례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정성이 안 들여지는 것이요, 나쁘다고 하는 자리일수록 정성이 잘 들여집니다. 이렇게 정성은 반비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회는 이 민족을 위해서 정성들일 수 있는 단체가 되고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민족의 운명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민족을 대표한 비운의 자리에서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정성을 들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단체가 되면 민족이 망하더라도 그 단체는 망하지 않습니다. 이게 천륜입니다. 이게 틀리면 하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난의 종교입니다. 그 수난의 배후에는 죽음의 교차로가 연결된 정성의 터전만이 남아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직분과 제단은 피 어린 정성의 터전과 더불어 상속되어 나왔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라고 할 때,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순교한 선열들의 피의 제단이 연결되어 공의의 심판권을 가지고 심판할 수 있는 거룩한 내용이 깃들어 있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42-228)


선열들의 정성의 터전을 상속받으려면


이것을 상속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교만해서야 되겠습니까? 절대 겸손해야 합니다. 선조들이 들인 그 정성에 꽃을 놓고 무늬를 놓아줘야 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의미에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 있는 것을 찾았지만, 나는 이러한 자리에서 귀한 것을 찾고 가치를 찾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정성은 내적인 가치에 있어서 미달되어 있기에 나로 말미암아 보강되고, 나로 말미암아 완비될 것입니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사실이 그렇다면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겠느냐! 그런 자리에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승자는 뜻을 절대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어린 터전을 상속받았을 때는 그것을 절대시해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전수가 안 됩니다. 그들이 피 흘려 이루어 놓은 터전을 그들이 이루어 놓은 가치 이하의 것에 옮겨 주고 싶을 것이냐? 그렇겠어요? 어림도 없습니다. 그 이상 절대시하는 사람한테 옮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워지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가까워지면 거기에 따르는 책임이 가중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느냐?” 하면서 걱정해야 하는 문제가 벌어집니다. 거기에 비례하여 그 이상의 정성을 어떻게 들여 가지고 그 때를 맞을 것이냐, 더 큰 때가 오면 거기에 비례될 수 있는 정성의 환경적인 여건과 그 바탕의 터전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가까워지는 때를 웃음으로 맞이하는 것보다도 조급한 마음, 스스로의 미숙한 것을 다짐하고 하늘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이 앞서야만 다가오는 그 때와 시운이 나를 찾아옵니다. 기쁨으로 맞이하려는 사람은 자기의 것으로 이용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때를 대해서 조심하십시오! 

누구든지 버림받고 쫓겨다닐 때는 기도하지 않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는 내가 무관심하더라도 하나님이 떠나실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영광의 날이 찾아오게 될 때 더 큰 것을 갖출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못 만들게 되면 그 영광은 나에게 왔다가도 옮겨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발판 삼아서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서글프고 무서운 일이 우리 신앙노정에 있기 때문에 정성을 들이는 데는 한이 없는 것입니다. (42-229)


이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보았느냐


여러분은 복귀노정에 있어서 개인복귀와 가정복귀를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내 개인을 중심삼고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느냐? 내 아들과 딸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자기의 친족, 민족, 나라, 세계, 하늘땅의 만민을 위해서 얼마나 정성들여 봤느냐 하는 것입니다. 타락권에 삼켜져 있는 원한의 터전을 소화해서 영광의 터전으로서 남길 수 있는 주체적인 내용을 얼마나 제시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찾아오는 때가 문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어머니 아버지를 중심삼고 살아왔는데 그 어머니 아버지가 진짜 지옥 가고, 천당 간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형제들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진정으로 생각해 봤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붙들고 나오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나서 이 나라와 민족을 대신하여 소망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책임을 다했느냐 할 때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를 남의 길거리로 보지 않았습니다. 삼천리 반도의 산야를 바라볼 때도 남의 산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조금만 참아라! 내 손이 거쳐갈 수 있는 그 날을 기다려라! 눈물어린 마음으로 네가 주인을 얼마나 고대했느냐?” 하면서 뼛골에서 우러나오던 마음으로 산하를 바라보고, 그것을 품고 싶어했고, 서글픈 심정으로 위로해 주고 싶어했습니다. 삼천리 반도에 깃들 수 있는 운세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과 더불어 엉클어지고, 이 민족은 하나님의 새로운 민족으로서 등장할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일교단을 형성한 모체적인 사상입니다. 

선생님이 정성들인 이 모든 터전을 여러분이 유린해서는 안됩니다. 통일교회가 과연 하나님의 6천 년 역사를 거쳐온 교회, 하늘의 뜻을 대해 온 교회라면 이 길을 거쳐오면서 흐느껴 가지고 눈물로 얼룩질 수 있는 걸음을 걷지 못하는 사람은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이 본부교회의 마루바닥에서 눈물짓고, 이 마루에 엎드려 기도하게 될 때, 이 자리가 아버지께서 천년 만년 고대하시던 소원의 한 터전이라는 것을 느껴 봤느냐? 뼛골이 울려나고 피살이 인연된 심정으로 자기 일신의 모든 의식을 잊어버리고 눈물만으로 시작하여 눈물만으로 끝나는 슬픔과 서글픔이 나를 점령해 봤느냐? 자기의 환경을 잊어버리고 호소한 때가 있었느냐? 그런 것이 여러분의 생활 가운데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이 그 이상의 자리를 통해서 기반을 닦아 놓은 터전이 있다면 그 터전의 정성이 여러분을 참소할 것이 아니냐? 선생님도 하나님이 억천만세의 수난길을 걸어오시면서 뜻을 위하여 들이신 정성이 나를 심판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 정성을 중심삼고 내가 심판의 자리에 서는 것이니, 그것이 제일 무섭다는 것입니다. 정성들이신 아버지의 앞에 어떻게 동정의 한 시간을 내 환경에 남기겠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삼아 가지고 지극히 몸부림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믿고 따라나오는 선생님의 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42-232)


극복을 위한 정성


효자가 가려고 하는 길을 막고 나서면서 “아들아, 이젠 좀 그만 하라!” 하면서 걱정하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내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야, 좀 쉬어서 가라!” 하실 수 있는 두터운 사랑, 그런 아버지의 깊으신 후정이 남아질 수 있는 터전을 어떻게 이 땅 위에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일생에 있어서 누구에게 그 무엇을 주고 가지는 못하더라도 이것은 내 일생의 최후의 종착점에서 남겨 줄 예물이 아니겠느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가면 망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좋은 곳에 두고 싶고, 귀한 것은 귀한 곳에 두고 싶은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느끼는 사실임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지극히 좋은 곳에 머무를 수 있는 환경과 터전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타락한 내가 이것을 남기고 가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련과 고통에 비례되는 정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눈으로 민족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을 흘려 봤으며 민족의 운명을 중심삼고, 하나님 뜻을 중심삼고 얼마나 가슴이 철렁철렁해 봤느냐는 것입니다. 자식이야 죽겠으면 죽고, 집안이야 망하겠으면 망하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망하더라도 그것은 나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냐?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냐? 국민으로서 소망의 터전을 잃는 것이 아니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세계가 망해서는 안되겠기에 세계를 붙들고 호소하는 입장에 서게 될 때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원수들의 터전도 말없이 빼앗아 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정성들이는 자리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같이하시는 것을 생활에서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만 비로소 그 느끼는 기쁨과 선한 것이 그 사람의 것으로서 남아질 수 있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은사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리에 민족과 더불어 같이했으면 틀림없이 그 민족을 상속받을 것이요, 세계와 더불어 같이했으면 세계를 상속받는 것입니다. 기필코, 그러한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는 정성이 아니고는 복귀의 길을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환경과 그들이 추구하는 욕망과는 반비례하는 데에서 정성은 쌓아진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정성을 들이지 않고는 세상적인 욕망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정성을 들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42-234)*